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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종 칼럼] 흔들리는 정보기관

‘겉보기엔 견고해 보이지만 속은 허물어져 가는 낡은 2층 집’. 최근 우리 정보기관을 논할 때 가장 자주 떠오르는 비유다. 외관은 위엄을 지닌 듯하지만, 내부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로 그동안 쌓아온 평판과 위상은 심각한 퇴행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달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수미 테리’의 기소 사건은 한미 동맹의 안보 협력과 직접적으로 연관 짓기 어려울 수 있으나, 이 사건이 드러낸 우리 정보기관의 임무수행상의 허점은 국가 안보를 지켜낼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국가의 안전과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를 탐지하고 신속히 대응하는 정보기관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견해는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충격적인 사건이 최근 대북 정보의 최전선에 위치한 국군정보사령부에서도 발생했다는 사실은 그 우려를 더욱 증폭시킨다. 이번 사건은 오랜 세월에 걸쳐 구축된 ‘블랙 요원’의 신상 등 해외 정보망이 단번에 유출된 중대한 사태로, 이를 복구하는 데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조직 시스템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근본적인 재정비를 통해 개선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이 잠복해 있던 기강 해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외부의 위협보다 내부의 위협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정보기관의 존재 이유가 무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전략과 인재를 갖추고 있더라도, 조직의 기반이 흔들리면 유사한 사고는 언제든 재발 할 수 있다. 얼마 전 ‘위키리크스’는 미국 국가안보 국(NSA)이 전 세계 국가수반들을 대상으로 감청 활동을 벌였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는 미국이 첩보 활동에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는 첩보 초강대국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목적이 단순히 반(反) 테러뿐만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패권 장악에도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첩보 비용이 군사비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정보력이 군사력보다 중요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미국이 전 세계를 통제하는 ‘빅 브라더(Big Brother)’로 군림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제 모든 국가는 군사 주권보다 정보 주권이 더 중요한 ‘첩보 제국주의’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가 국가의 생존을 위해 '정보기관 대전(大戰)'에 돌입하고 있지만, 지금 한국의 민·군 정보기관은 오히려 점차 그 역량을 상실하고 후퇴하고 있다. 국정원은 대공수사권을 잃어 스파이 검거 능력이 약화되었으며, 군 정보망은 기강의 붕괴와 정보 유출로 인해 심각한 혼란 상태에 빠져 있다. 사이버 안보법 제정과 '간첩죄'의 적용범위 개정논의조차 정치적 이해관계에 묻혀 지지부진하다. 이번 사건들은 정보기관의 역량 강화를 위해 어떤 가치가 필요한지 깊이 고민해야 할 중요한 전환점이다. 단순히 임무 수행 중 발생할 수 있는 우연의 사고라는 잘못된 전제는 정보기관의 역할을 묵살한 채 조직의 퇴행을 조장할 뿐이다. 정보기관의 활동이 법을 넘어 인권을 침해하고 국민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북한의 지속적인 위협과 핵·미사일 도전에 직면한 우리에게 정보활동은 포기할 수 없는 현실이다. 현실은 늘 규범을 앞선다. 정보활동의 궁극적 명분은 정치적 논쟁을 넘어, 오직 국익을 위한 당위적 논리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정보 역량이 더 이상 무너지기 전에, 어떤 정보활동이 더 적절하고 효과적인지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가장 큰 위기는,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만종 칼럼] 차량 돌진, 고민 없는 미봉책

분당 서현역 사건과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가 재난과 각종 사건에 뒤늦게 움직이는 ‘뒷북 대응’이 판에 박은 듯 똑같다는 답답함은 서울시청역 인근에서 발생한 차량 인도 돌진 사태 현장을 살펴보면서 든 생각이다. 사고 직후 둘러본 역주행 사고 현장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인도에 턱이 없었다는 점이다. ‘만약 인도와 차도 사이에 턱이 있었다면 인명 피해는 훨씬 줄었을 텐데’라는 생각은 그동안 차량 돌진 위험을 수차례 경고했던, 나만의 생각이 아닌 현장에 있던 모두의 탄식이었다. 일반적으로 연석은 인도로 진입하려는 차량의 속도를 급격히 낮춰 보행자를 보호하지만 놀랍게도 사고 장소는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경계석인 연석의 높이가 3㎝에 불과했다. 낮은 연석은 시속 100㎞에 가까운 역주행 차량이 철제 방호울타리(가드레일)를 부수고 인도를 덮칠 때까지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또 다른 장소는 문제가 없을까. 광화문광장과 홍대 앞 버스킹 거리도 찾아봤다. 광화문광장은 2009년 택시 난입 소동으로 석재 화분을 배치했으나 2022년 재개장 시에는 당시 안전 대책으로 세워둔 화분마저 모두 광장 한편에 치워져 있었고 간이 철제 울타리가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더구나 광장으로 통하는 횡단보도 9개소 중 차량 출입을 차단하는 ‘볼라드’(길가 말뚝)가 설치된 곳은 단 한 곳도 없어 이곳을 통해 차량이 광장으로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는 상태였다. 도로와 광장 경계부에서도 약 17㎝의 경계석만 놓여 있는 실정이다. 대형 트럭 등의 차량이 광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는 어려웠다. 홍대입구역 인근 ‘레드 로드’ 버스킹 거리도 차량 돌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곳은 각종 공연이 열리는 금·토·일요일 정오부터 오후 11시까지 ‘차 없는 거리’로 운영돼 차량 진입이 제한되지만 버젓이 차량이 활보하는 모습은 아찔했다. 볼라드의 재질과 간격도 제각각이다. 150여m의 인도에 단 두 개의 볼라드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가 하면 최대 4m까지 떨어진 볼라드도 볼 수 있었다. 대부분 승용차의 폭이 1.8m인 것을 감안하면 이 같은 볼라드는 효과가 없다. 차량 진입이 제한되는 시간대에 아예 이를 차단할 수 있는 자동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 미국과 유럽은 차량 돌진 테러가 잇따르면서 방어벽과 구조물을 광장을 비롯한 다중 운집 장소에 세우는 등 안전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10억유로를 조달하고 파리와 영국, 독일과 미국도 주요 도시에 차량 차단용 볼라드를 설치했다. 최근 라스베이거스는 500만달러(약 69억원)를 들여 1만5천파운드 무게의 차량이 시속 80㎞로 돌진해도 견딜 수 있는 700개의 장애물을 설치했다. 위기관리에서 가능성은 항상 미래 위험의 전조 현상이다. 유럽에서 자주 벌어지는 차량 돌진 테러가 결코 다른 나라의 일만은 아닐 수 있다. 사고 이후 내놓은 대책이 기껏 ‘배려 없는 고령운전 제한’뿐이라면 고민 없이 만들어낸 미봉책이라는 비난은 피하기 힘들 것이다. 급발진이 아니어도 우리 사회에 잠복한 많은 요인들이 언제 어느 때 우리를 덮치는 흉기로 변할지 상상해야 한다. 정치의 본령은 국민의 안전과 평화다. 비록 국가의 노력이 백방으로 이뤄져도 한 번의 잘못이 나라 전체를 멍들게 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끊임없는 살핌과 점검만이 우리 사회의 정초(定礎)를 올바르고 튼튼하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또다시 우리의 어느 거리가 처참한 아우성과 피로 얼룩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번 사태의 원인과 위험들을 보다 세심하게 살펴야 하는 것은 이번 사고가 우리에게 던져준 중요한 과제이며 교훈이다. 이번 참사는 오랫동안 우리 모두에게 아픔을 남길 것이다.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자.

[이만종 칼럼] 보훈의 6월, 군인정신 다잡는 계기로

어느 시대나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는 ‘보편적 군인’은 존재하는 것일까? 매년 6월이면 한 번 씩 찾는 현충원 대신 용인시 법화산에 있는 6.25전사자 유해발굴지역을 찾았다. 1951년 1월 25일부터 3주간 국군 6사단과 미 24사단 그리스 대대가 중공군 38군과 전투를 했던 역사적 장소이다. 그곳에서 잠시 73년 전 1월의 하루를 떠올렸다. 눈을 감으니, 새해 아침이 한 달도 지나기 전 그날, 이곳을 사수하다 꽃다운 젊은이들이 입가로 흘린 피가 나에게도 배어 나올 듯한 상상이 떠올라 비통했다. ‘선더볼트 작전’이라고 불린 이작전은 중공군이 개입한 뒤로 물러나기만 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한 작전으로 서울 재탈환의 여건을 조성한 분수령적인 작전이었다. 6.25전쟁 당시 참전했다 목숨을 잃은 국군 전사자는 총 16만여 명이다. 그러나 아직도 수습되지 못한 채 이름 모를 산야에 잠들어있는 호국영웅들의 유해는 12만 여위이다. 전쟁에서 우리가 군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는 죽음마저 불사하는 투혼과 헌신이다. 물론 투철한 군인정신은 군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자질일 수 있다. 하지만 휴전 71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까지 이 기준이 여전히 군인정신을 정의할 수 있는 충분한 기준이 되는지는 의문이다. 그동안 군대와 사회는 급속하게 변화했고, 평화가 계속될수록 군인의 애국적 열정도 점차 현실적인 동기에 가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MZ세대의 병영 풍속도는 변화의 속도가 예전과 다르다. 애국이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정작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때로는 이견을 갖기도 한다. 언제인가 또다시 국가에 위난이 발생한다면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청년들이 귀국하는 모습처럼 세계에 흩어진 우리 청년들도 줄지어 귀국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지나친 기대인지 생각해 본다. 최근 우리 군은 ‘훈련병 얼차려’와 ‘수류탄 오발’로 인한 사망사고와 해병대 채 상병 사건 등 계속되는 군 관련 사건 이슈들로 어수선하다. 사고 촉발의 원인도 문제이지만 사건의 본질보다 ‘군인은 본질적으로 모두 똑같다’라는 성급한 일반화가 더 걱정스럽다.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사기와 정신력이 4분의 3을 차지하며 수적 요소는 단지 나머지 4분의 1일뿐”이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군인에게 필요한 것은 높은 사기와 강한 정신력이다. 그것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보다 더 상위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오랫동안 군인들을 얽매여 온 폐쇄적이고 낡은 관행이라는 부정적 편견이 사장돼야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땀 흘리는 대부분의 군인들이 얼굴 없는 동일성에서 벗어나 사기가 진작되고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돼 국가 안위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장차 국방개혁의 방향은 무기와 전략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군의 사기 진작과 군인정신 함양으로 강한 군대를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잘못된 군인정신은 무덤에 묻어야 하지만 임무에 충실하는 대부분의 군인은 칭송해야 하는 게 기준이 돼야 한다. 로마 천년을 지탱해 준 철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전쟁 시 로마 귀족들은 자신들이 먼저 전장에서 싸웠다. 지휘관 역시 진급과 출세를 먼저 할 것인가 보다 어떻게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 그 의미가 무엇이 됐건 더 이상 군인을 정치적 도구화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보훈의 6월이다. 서해교전과 천안함 용사들, DMZ 목함지뢰 사건 당시 목숨을 걸고 전우를 구한 뜨거운 전우애를 기억하고 호국영웅들의 희생과 부하 사랑을 잊지 말고 ‘정병 강군’의 분위기를 다잡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강한 군대가 되길 염원한다.

[이만종 칼럼] 반복되는 미사일 위협, 어떻게 맞설 것인가

잦아지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공격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하는 것은 늘 논란거리다. 2024년 발생한 북한 미사일 도발 횟수는 지금까지 11회다. 금년 들어서는 순항미사일 발사(6회)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특히 주목된다. 그들의 미사일 개발 진전은 사거리 및 형태에 상관없이 날로 성능이 고도화되고 있다. 혹자는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KAMD)가 북한 미사일 공격의 위협을 감소시켜 줄 것으로 기대하지만 계속되는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우리에게 현존하는 가장 큰 안보위기다. 사실 우리는 K-방산으로 수출까지 하는 군사 강국이지만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사용한다면 감당하기 쉽지 않다.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예방하고 대응하기 위한 대표적 전략으로는 발사의 이전인 준비 단계(왼편)에서 통제 시스템을 파괴 또는 무력화하는 일명 ‘발사의 왼편(Left of Launch)’ 전략이 강조된다. ‘발사 직전 교란의 개념이다. 미국이 역점을 두고 있는 선제타격 방법이다. 그러나 이 전략이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만능의 보검이 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실전에서는 많은 변수가 작전을 방해하며, 미사일이 발사되기 전 관련 정보를 입수해 시스템이나 인프라를 공격하기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이다. 반대로 ‘발사의 오른편’ 전략은 발사보다 오른쪽에 있는 단계라는 의미에서 부르는 군사용어다. 발사 이후 요격과 이후의 응징·보복의 작전개념으로 쏘아 올려진 미사일을 사드나 패트리엇으로 요격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늘에 떠 있을 때 요격하기엔 대응할 시간이나 기술이 여의치 않아 대응 자체가 쉽지 않다. 더구나 최근 북한은 음속의 5배인 마하 5(시속 6천㎞) 이상의 속도를 내며 변칙적인 궤도로 저공비행하는 ‘극초음속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결국 미사일 발사에 대비한 ‘발사의 왼편과 오른편’의 전략 모두는 그럴듯하지만 고도화된 북한의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한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대피소 구축 등 강력한 방호체계 구축은 또 다른 대안적 전략으로 강조된다. 스위스는 36만개의 전시 대피소가 있어 전체 인구 100%를 수용한다. 지휘소와 비축물자, 응급치료시설을 갖춘 민방위단 작전을 위한 전문 대피시설도 무려 3천500개를 운영한다. 핀란드 역시 민간건물의 85%가 방공호 등 대피시설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당 건물은 대피 공간을 평시에 카페나 주차장, 체육시설 등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경우는 군을 중심으로 한 시민 방위체제와 효율적인 군 작전지원을 위한 국가비상경제운영체제(MELACH)가 운영되는 등 전시 체제 위주의 위기관리 체제가 작동하고 있는 게 큰 특징이다. 정쟁으로 시끄러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물론 우리도 전국에 1만7천곳 이상의 전시 대피시설이 갖춰져 있고 건물 신축 시에는 공기정화장치가 있는 대피소 설비를 의무화하고 2주간 생활 가능한 비상식량 등 비축물자를 구비토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피소가 긴급 대피만 가능한 단기 대피시설로 화장실마저 없는 곳이 많다. 미사일을 피해 대피소에 갔는데 30~40m 떨어진 대피소 밖 화장실에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전시방호 시설과 체계도 다시 살펴야 한다. 전쟁의 억제는 안보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우리는 ‘전쟁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폭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는지 걱정이다. 준비가 부족하면 전쟁은 도둑처럼 다시 찾아올 수 있다.

[이만종 칼럼] ‘사유의 부재’에 빠진 내 탓 없는 정치

총선을 앞두고 곳곳에 내건 현수막을 보면서 문득 오래전에 읽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생각났다. 전쟁 이후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 받는 과정을 다룬 그 책에 따르면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홀로코스트를 주도했지만 자신은 단지 “국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하면서 무죄를 주장했다. 오늘날 ‘아이히만의 항변’으로도 유명한 이 말은 당시 재판을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사유하지 않는 인간’의 전형이라고 분석하면서 그가 유죄인 까닭은 유대인에 대한 엄청난 악행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 때문이라고 힐난했다. 굳이 이 말을 소환하는 것은 이번 총선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라는 근대사에 ‘있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원인이 남의 탓이라고 돌리는 ‘사유의 부재’에 기인한다는 이러한 주장은 유권자 무시 현상이 깊은 정치 영역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총선의 시대적 의미는 선택된 정치세력이 새로운 개혁과제들을 발굴하고 나라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정책과 정치를 펼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미래 국가의 명운을 가를 수 있는 중차대한 변곡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여야 모두 한결같이 포퓰리즘 공약을 남발하고 후보자들의 면면 역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공약은 달콤하지만 재정이 거덜날 것 같고 후보자들의 전과자 비율은 3명 중 1명이다. 한강물이 더 깨끗하다는 말이 틀리지 않아 보인다. 유권자들을 우습게 보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후보가 많다. 솔직히 유권자들은 권리를 포기할 수 없어 ‘최악’보다는 ‘차악’을 뽑고자 하지만 누가 나라를 떠받칠 동량지재(棟梁之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판단하기 쉽지 않은 처지다. 국민은 안중에 없는 ‘사유의 부재’ 현상이다. 어쩌면 이대로 가다가는 어느 쪽이 이기든 나라의 혼란은 이전보다 더 심상치 않아 보인다. 이념 편향적 갈등으로 정치가 양분되고 국민과 지역 간의 불신과 반목이 더 깊게 전개될 수도 있다는 걱정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듯하다. 더구나 국가의 정체성마저 진보와 보수 이념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 것은 그동안 국가 발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역사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이념 간의 충돌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선거 이후 위기가 뻔히 보이는 이유다. 그래서 이번 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이 해야 할 일은 국민들보다 잘나 보이고 높아지고 싶은 정치인들이 평범하고 선량한 민초들의 생각을 저버리는 사유의 부재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지적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선거가 정치적 경쟁이어도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총선에서 이기겠다는 무책임한 후보와 내 잘못보다는 국민 탓으로 돌리는 위선적이고 자위적인 후보의 선택으로 이어져서는 결코 안 된다. ‘선거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 정치의 수준이 낮은 것이 후보자들보다 오히려 유권자들의 수준 때문이라는 비판은 최소한 듣지 말아야 한다. 유권자들이 정치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반대세력을 멸절(滅絶) 시키라는 게 아니라 일체와 화합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새로운 차원의 경제적, 안보적 위기에 봉착하고 또다시 깊고 혼란스러운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하는 것은 유권자들이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고 책임이다. 새뮤얼 헌팅턴이 말한 ‘국가 질서의 확립’으로서 선거가 또다시 ‘정치적 양극화와 세력 간의 충돌’로 야기되고 혼란과 갈등의 강으로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단순한 기우이길 바란다.

[이만종 칼럼] ‘테러의 정치화’보다 더 큰 문제

총선 정국이 본격화되면서 여야 간 협치는 멀어지고 ‘적’을 찾아내고 적의와 혐오를 고취시키는 것으로 정치가 대신 되고 있다. 야당 대표와 여당 의원에 대한 피습 사건이 테러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지가 최근 새로운 논란거리였다. 양당 모두 똑같은 피해자이지만 야당은 사건 축소와 왜곡 의혹을 제기하면서 대테러센터와 경찰청 등 관련 기관들에 대한 법적 조치에 나섰다. 야당 대표 피습 사건을 정치테러로 규정해야 한다는 공세다. 반면에 여당은 “테러로 정치장사하면 안 된다”고 일갈한다. 국민들은 ‘과연 어떤 주장이 맞을까’ 하고 호기심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어느 쪽을 더 옹호할 마음은 전혀 없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논란되는 주장들이 합리적 결론을 찾기를 기대한다. 첫째, 이번 피습 사건은 정치인이 대상이었지만 이를 테러행위로 의율(擬律)하기 위해서는 법규에 근거하지 않고는 통제할 현실적 방도가 없다는 점이다. 적용하는 근거법이 없이 피해자가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테러범으로 규정하는 것은 법의 명확성 원칙 측면에서 어긋난다. 우리가 시행하고 있는 ‘테러방지법’은 테러와 테러단체 개념을 제2조에서 정의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면 두 사건 모두는 일반적 인식과는 다르게 테러범 적용보다는 폭력행위에 해당되는 형사범죄로 처리될 사항이다. 일본의 아베 총리 암살범은 살인죄, 기시다 총리 피의자는 ‘위력업무방해’가 법 적용의 대표적 사례다. 법은 정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지만 정의는 실정법의 가치척도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법철학에서 강조하는 ‘라드브루흐 공식’이다. 둘째, 테러행위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번 피습 사건들을 단순히 ‘정적 제거를 위한 정치테러’로 끌어내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실제로 테러행위는 범인의 정치적 주체성에 기반하기도 하지만 자생 테러 같은 1인 테러는 오히려 범죄자의 개인적 일탈과 사회적 분위기에 경도돼 발생하고 있는 게 최근 테러의 통계가 보여주는 경향이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의 암살을 시도한 저격범은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 암살 시도 이유였다. 일본의 정치인 테러와 박근혜 대통령 커터 칼 피습 사건 역시 범행 동기는 자기 과시욕이 주요 이유였다. 비록 투사의 이미지를 내세우지만 모두가 비슷한 공통점이다.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은 세계적 현상이다. 그중 총선을 앞둔 한국이 제일 걱정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비틀어진 개인의 가치관과 욕망이 요란한 사회 속에서 학습되고 전염돼 언제든지 뜻하지 않은 괴물이 나올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진실과 거짓,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 사실을 판단하는 개개인의 ‘상식력’이 후퇴하는 조짐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진실 공방은 잦아졌지만 정작 구체적 타당성을 갖춘 결론을 가려내기도 쉽지 않다. 예전의 정치가 아니라 바닥이 쩍쩍 갈라지는 ‘빙판 같은 정치’다. 굳이 한 가지 기대되는 것은 계속된 개정 요구에도 꿈쩍하지 않던 테러방지법의 문제 조항이 이번 논쟁을 계기로 재정비되고 발전적 방향으로 개선된다면 다행일 수 있다. 정치는 국민을 위한 필요다. ‘적’만 만드는 ‘정치의 테러화’가 음모론을 부추기는 ‘테러의 정치화’가 된다면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올지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범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테러’를 특정하지 못한 채 복잡다단해지는 테러 위협에 적시성 있게 대응하지 못하는 부실한 ‘테러방지법’이다.

[이만종 칼럼] 정쟁을 안 끝내면... 정쟁이 우리를 끝낼 것이다

역사 속에서 위기는 언제든지 있었다. 다만 쉽게 비가시화(非可視化)되고, 무시당하고 누락당할 뿐이었다. 해가 바뀌고 한 달이 지났지만 그간의 시간은 하루가 천 년 같다는 우려를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지금 한국을 보면 남북 간 군사적 대립이 긴장을 더해 가고 있다. 국내 정치도 격변하며 경제 상황은 예측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중에서 가장 불안한 것은 정치와 안보다. 요컨대 그동안 그칠줄 모르는 시위와 정치적 다툼은 이미 국민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감정적 시련을 안겨 준 지 오래다. 특검법과 명품백 몰카 공방, 야당 대표와 여당 의원 피습, 대통령 행사장 소동 논란까지 무한히 반복되는 극단적 정쟁과 지루함도 요원하기만 하다. 야당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라라는 비판이고, 여당은 켜켜이 쌓인 적폐를 털어내야 한다는 입장이다. ‘편향된 되갚음만을 반복’하는 전쟁 같은 정치는 선거가 임박할수록 갈등이 더 깊어지며 길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정치가 승자독식으로 폭주하고 정치인들이 동원한 혐오와 차별로 더욱 위태롭고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게 될 시민들의 불안과 분노가 지속돼 사회적 규범이 해체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점이다. 안보 상황 역시 쉽지 않다. 북한의 잇단 도발 양상은 과거와 다르다. 그들의 ‘잦은 전쟁 언급이 허세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전문가들의 경고는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위험한 경보음이어도 놀라지 않는 평정심은 담대하기 이를 데 없다. 어떻게 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우리가 처한 가장 오래된 물음이지만 모든 상황에 대해 일관된 해결책을 찾기는 어렵다. 북한의 가려진 호전성과 침략적 의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남북 간 공존공영이 우리 시대를 위한 진정한 평화라고 강변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전쟁을 벌이지 않고도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는 유화정책이 가장 평화적인 방안일 수도 있다지만 ‘남한 영토 평정’을 호언하는 잠재적 침략자에게 선물을 바치는 식의 오도된 평화는 아무리 전쟁 가능성을 낮출 수 있는 노력이라 할지라도 현명하고 항구적인 평화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정치와 안보는 함께 작동한다. 그렇기에 좋은 정치가 있어야 튼튼한 안보가 가능한 것이다. 지금처럼 민생이 아니라 본인들만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정치는 더 이상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이뤄낸, 민주주의적 공동체의 가치들을 무너뜨리려 하는 데 멈추지 않고 오히려 국가 안보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 감각 자체까지 훼손할 뿐이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데 기울여야 할 정치적 노력이 한낱 제 눈에 거슬리는 집단을 ‘적’으로 만들며 싸움하는 사이 우리 사회에 닥친 안보 위기의 심각성은 뒷전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북돋울 나라 지킴이 어째서 절실하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도 전쟁의 불안을 제거하고 자유와 평화를 지켜야 한다. 테러와의 전쟁, 핵과 미사일 같은 용어들은 상호 관용의 정치만이 해결할 수 있는 항목이다. 올 한 해는 우리가 마음을 단단히 여며야 하는 위기의 시대다. ‘살던 대로 살아서는’ 국가의 위기는 파멸적 국면이 될 것이다.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파국이 되기 전에 정치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들의 생존을 위한 정치가 필요하다. 아마 우리가 정쟁을 끝내지 않으면 정쟁이 우리를 끝낼 것이다.

[이만종 칼럼] 대테러 정보역량을 키워야 하는 이유

공포와 위협은 세월을 초월해 테러리스트들이 구사하는 전형적 수법이다. 항상 그랬듯이 테러리즘은 표적으로 삼는 청중들에 심대한 심리적 파급효과를 미치도록 설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테러리즘은 정치적이지만 대부분 약탈적이고 보복적이다. 2001년 9월11일 뉴욕시와 워싱턴DC에서 발생한 9·11테러가 그렇고 최근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 기습 테러 등 수많은 테러가 마찬가지 형태였다. 9·11테러의 경우 테러리스트들이 미 본토를 공격했고 민간항공기가 대량살상무기로 돌변했으며, 선전포고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했다는 점이 과거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단지 19명이라는 소수에 의해 3천여명의 민간인 인명 손실은 오직 남북전쟁 기간 전투에서 발생한 사망자 숫자뿐이었다. 하마스의 기습 역시 이스라엘의 최고 정보기관인 모사드조차 알 수 없었던 동시다발적이고 전격적이었다. 최근 하마스의 무기와 전술은 우리가 예상하는 북한의 ‘비대칭 공격 양상’과 유사했다. 앞으로 북한이 하마스의 공격 전략을 대남 기습 공격에 활용할 가능성은 닮은꼴일 수 있다. 다가오는 새해, 우리는 테러로부터 안전할 것인가? 테러 위험성은 점차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실적으로 크게 경험하는 위험이 적기 때문에 경각심은 낮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안보 도전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외국인의 증가와 사회 불만 등으로 내부에서 초래될 수 있는 자생적 테러의 가능성도 많지만 해양뿐만 아니라 우주, 사이버 등 초국가적 위협도 증대되고 있다. 특히 지정학적 불안정성이 증대되고 신(新)안보 위협도 다양화되고 있다. 최근 국정원 첩보에 따라 홍해를 통과하기로 했던 우리 선박이 항해 계획을 변경했다. 이란과 우호관계인 예멘 후티 반군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침공했다고 비난하면서 이스라엘과 연관 있는 우리 선박도 나포의 위협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북한은 미 국무부가 공개한 ‘2022년 국가별 테러 보고서’에서 ‘테러 지원국’으로 재지정돼 7년째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북한이 계속 국제 테러행위를 지원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지금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검토해야 할 초점은 대테러 정보 수집의 강화다. 이는 국가 대테러 활동에서 사전 정보활동이 이뤄져야 관련 기관들이 테러 대응에 역량을 집중하고 조율할 수 있기 때문이다. 9·11테러를 막지 못한 가장 큰 원인도 대테러 기관 간의 분산과 상호 협조의 부족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기습에 대응하지 못한 결정적 패착도 정보의 실패였다. 미국은 대테러 정보활동기관을 재편성해 16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최고 정보기관으로 국가정보장실(ODNI) 산하 국가테러대책센터(NCTC)를 창설하고 법 집행은 기존 22개 정부 조직을 통합 신설해 만든 국토안보부(DHS)가, 비상사태는 연방재난관리청(FEMA)이 담당하는 모형을 구축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달 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되고 입법 발의 1년이 지난 ‘사이버안보 기본법’은 제정의 긴급성에도 불구하고 추진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대테러센터와 정보활동의 중심인 국가정보원, 법 집행 활동과 테러 진압의 중심축인 경찰과, 군이 제대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법 제도를 정비하는 예방적 조치가 시급하다. 만약 이 같은 계획이 준비되지 못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긴 시간에 걸친 처참한 상황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만종 칼럼] 문명의 대척점에 서 있는 ‘야만’

지난 두 달여간 뉴스를 볼 때마다 끔찍한 상황에 가슴 졸이고 더 큰일이 벌어질까 무서웠던 것은 어쩌면 가자지구의 참극을 우리 역사에 포개어 봤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6·25전쟁을 겪은 세대와 이후 세대의 안보 관점은 똑같을 수 없지만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 모두에게 주는 느낌은 처참한 비극이었다. 이번 전쟁은 하마스의 기습공격이 불을 댕겼다. 1천400명이 넘는 이스라엘인을 닥치는 대로 살상하고 납치한 행위는 인도주의뿐 아니라 국제법에 위배되는 심각한 테러이며, 전쟁범죄다. 그들의 행위가 가자지구의 인도적 위기를 불러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자위권은 당연히 지지돼야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는 ‘무고한 민간인’이다. 그런 점에서 ‘피의 보복’에 나선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습과 포격은 정당방위 수준을 넘어선 또 다른 전쟁범죄일 뿐이다. 양쪽 모두가 피해자이지만 팔레스타인 쪽 민간인의 희생과 참상은 훨씬 더 비극적이다. 그래서 하마스에 맞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 폭격은 이른바 침략군에 맞서 항전하는 도덕적 우위를 가진 쪽이라는 명분마저 찾지 못하고 있다. 억울할 수 있지만 폭력과 폭력이 만났을 때 ‘가치’는 실종되고 ‘관성’만 남기 때문이다. 강대국 미국에 대한 정치 비판가로 유명한 놈 촘스키가 말한 강자의 테러를 비판하는 유명한 해적 이야기가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잡혀온 해적에게 이렇게 묻는다. “넌 어찌하여 감히 바다를 어지럽히느뇨?” 이에 해적의 답변은 “그러는 당신은 어찌하여 감히 온 세상을 어지럽히는 건가요? 전 그저 자그마한 배 한 척으로 그 짓을 하기 때문에 도둑놈 소릴 듣는 것이고, 당신은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그 짓을 하기 때문에 제왕이라 불리는 것뿐이외다.” 해적의 대답은 촌철살인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서방국가들에서 사용되는 테러리즘의 개념은 정의의 본질에서 본다면 ‘편향된 이중 잣대’에 불과하다는 게 그의 견해다. 사실 우리가 테러리즘과 관련해 놓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일반적으로 테러리즘이라고 하면 중동에서 일어나는 극단주의 테러단체의 무차별적 테러만을 떠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하얀 전쟁’이든지, 혹은 ‘테러 행위를 예방하기 위한 합법적 선제공격’이든지 아무리 좋은 명분이더라도 강대국이 약소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할 목적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도 또 다른 형태의 테러라고 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미국과 서방이라는 ‘제왕’의 테러리즘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정벌’ 내지 ‘징벌’이 되고 그 외 나라 혹은 단체가 행하는 ‘해적’ 행위는 테러리즘으로 규정돼 주살(誅殺)해야 할 ‘악’이 된다는 촘스키의 비유적 일갈은 정의를 강자의 이익으로만 봐야 한다는 기존 가치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테러리즘의 개념이 제왕의 폭력보다는 단순히 해적의 좀도둑을 기준으로만 고착돼 버린다면 지구촌 곳곳의 평화와 인권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관점이다. 따라서 하마스의 행위가 가자지구의 인도적 위기를 불러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도덕적 우위’ 역시 지켜져야 한다.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은 국제질서와 정치적 해법보다 더 이상의 무고한 인명 피해를 막는 일이다. 그들의 서로 다른 종교의 ‘계약과 율법’도 결코 평화와 사랑이 아닌, 폭력과 살육이 되는 잘못은 없어야 한다. 지난 두 달여간 필자가 바라본 이번 전쟁의 느낌은 문명의 대척점에 서 있는 야만뿐이었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서둘러 귀국한 이스라엘인들의 정신은 적이 지척임에도 여전히 양치기 소년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다.

[이만종 칼럼] 정치인의 언어가 바뀌어야 한다

요즘 사방에서 ‘정치인의 가벼움’을 본다. 우리 정치인의 언어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말의 성찬’이지만 정작 마음을 움직이는 깊은 말은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나의 생각이 정치적 언어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 중 하나인지 모르지만 정치적 욕망은 폭주하나 점점 언어는 거칠고 자극적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최근의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정감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정치인들의 행태가 대표적이다. 혀를 차게 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정치인들의 언어는 지나치게 저급하고 퇴행적으로 변했다. 물론 여야 간 벌어지는 정치적 산술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지만, 혐오가 비판을 대체하고, 조롱과 경멸이 대안 모색을 대신하는 것은 특정 정당의 지지나 정치적 관심 여부와는 관계없이 또 다른 문제다. 마이크가 켜져 있는 생중계 상황에서 거침없이 난무하는 고성과 막말은 어둡고 처연하다. 정치는 국민 곁에 존재하는 가능성의 싹을 포착해 새로운 미래의 꿈을 제시해야 하는 과업이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절박한 문제들을 생각하면 현재 벌어지는 상황은 의식 없는 일부 정치인들의 무사유(無思惟)적 언행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의로 포장돼 국민들을 기만하고 경박한 언론과 포털 사이트가 이런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은 더욱 오싹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대다수 국민은 선을 넘는 정치의 퇴행성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극렬 지지자들에게만 호쾌하고 강단 있게 보이려는 정치인들의 무절제한 언행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적’을 만들기에만 동원되는 언어는 비록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해도 그냥 말이 아니라 찌르고 덮치고 난도질하는 정서적 충격이다. 실제로 품행이 정치 변동의 중요한 요소가 됐던 사례를 되짚어봐도 모두가 언어의 품격이 문제였다. 정치인의 비공식 대화가 여야 간 정쟁의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입에 담지 못하는 ‘욕설’ 파문도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중요한 논란이었다. 국민은 이제 더는 흥분하고 정제되지 않은 언행을 듣거나 보는 것이 힘겹다. 고대 아테네 정치는 선동가들의 천국이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주장한 ‘산파술’은 소피스트들의 웅변보다 오히려 침묵의 가치를 강조했다. 아마 그 시절 그는 분명히 말하는 시간보다 침묵하는 시간이 더 길었을 것이다. 강렬한 언어는 때때로 정치적 분위기를 뜨겁게 만들 수 있지만 ‘포퓰리즘’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도 기품 있는 침묵의 정치가 필요하다. 더 좋은 정책 대안을 찾기 위한 협력과 상생만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비전을 구현할 ‘대전환’을 견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의 일상은 정치가 아니어도 지나치게 힘들고 어렵다. 최근 이스라엘-하마스전쟁도 남의 나라 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반면교사적 사례다. 국민의 마음 속에 새로운 덕성과 영혼을 창조하지 못하고 정권 수복과 지지율 역전에만 집중하는 낡은 관성의 정치 역시 더 이상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힘들다. 결국 사유 없는 정의와 투쟁은 모두에게 폭망이다. 한국 사회가 진정 부유한 강국이 되고 민주주의가 파도 치는 나라를 소망한다면 무책임한 선동과 저속하고 자극적인 언어 사용이 그치고 국민의 눈살을 펴게 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세워온 국격을 사나운 언어로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공부지만 언어의 과잉을 경계하고 제어하기 위한 성찰이 필요하다. 더 이상 정치인이 ‘뿔 달린 동물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로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미래의 정치를 하려는 초보이든, 때 묻은 정치가이든 모두에게 말하고 싶은 부탁이다.

[이만종 칼럼] 죄는 있지만 벌이 없는 세상

“세상은 실제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보다 악을 용인하거나 고무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 위험하다.” 아인슈타인이 첼로 연주자 파블로 카잘스에게 바친 헌사다. 얼마 전 책 속에서 이 글을 읽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다 현재 이 나라의 준법 상황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있겠는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아인슈타인은 질량을 빛의 속도와 연결시킨 물리학자일뿐만 아니라 인권과 정의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였다. 법과 정의에 대한 생각을 자주 표현했으며 “정의는 집에서 시작된다”는 유명한 말도 했다. 아마 그는 법과 정의가 인간의 삶과 사회의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철학적인 가치를 반영해 그런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말은 요즘처럼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험악하고 부당한 일들을 방관하지 않고 올바르게 대처하는 것이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 역사를 진보시킨다는 의미로도 읽혔다. 지난 여름 이후 걱정되는 뉴스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건 신림동과 서현동 등에서 발생한 불특정 다수에 대한 잇따른 범죄와 관련된 뉴스였다. 극단적 행위도 놀랐지만 뒤이어 발생한 온라인상 살인 예고와 각종 커뮤니티 댓글난에 쏟아진 혐오 발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감정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할 정서적 방출 행위일지 모르지만 어떻게 엄청난 사건으로 지울 수 없는 아픔이 있는 피해자를 조롱하는 비윤리적 인간성이 가능한지 놀랄 뿐이었다. 정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새 정부 이래 국회는 방탄 국회로 공전 중이다. 민생은 뒷전이고 입법 교착과 폭주는 일상화된 지 오래다. 각종 범죄 혐의를 받는 다수 의원은 불체포 특권 뒤에 숨어 있다. 이처럼 지금 우리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갈수록 국가의 법질서가 무시되고 각자도생의 기형적 분위기로 번져 가는 형국이다. 그래서 최근 거론되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제도 도입과 사형제 부활, 살인 예고 사건의 엄정 대응에 관한 언급은 강력범죄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결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법과 공권력이 지나치게 무력해진 것 같다는 대다수의 생각을 고려할 때는 전혀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느낌마저 든다. 물론 현실의 법체계가 도덕률이 아닌 이상 죄를 눈감아 줄 수는 없기 때문에 옳은 일은 보호하고, 그른 일은 단죄하는 것이 법이 추구해야 할 원칙이라는 관점에서 ‘죄가 있는 곳에 반드시 벌이 있어야 한다’는 법의 적용은 누가 뭐라 해도 당연하다. 그러나 과거보다 법망이 팽창해 가더라도 법과 도덕적 공황 현상이 국가 전반에 만연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현대 사회에서 법치와 정의는 중요하다. 이러한 가치들이 흔들리고 약화되면 우리 일상의 평화와 안전은 무너지며 험악한 사건과 부당한 행위가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우리들이 갈망하는 것은 어느 한쪽만 이겨 환호하지 않는 정의가 살아있는 좋은 사회다. 더 이상 최소한의 인권을 지켜 주는 법치가 힘의 논리로 관철되고, 사실에 어긋나는 주장이 진실처럼 기만되는 사회는 암울하고 살 만한 곳이 아니다. 이제 “누구도 법 위에 설 수 없다”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 너무 많은 고소고발과 난무하는 무법적 폭력을 막아내고, 모든 것이 상식선 안에서 공존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사회 안정의 근간인 정치 역시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의가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이만종 칼럼] 폭력적 위기에 대한 몇 가지 언급

어쩌다 ‘안전한 치안’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대한민국 사회가 이렇게 무너져 가고 있는지 마음이 착잡하다. 범행의 ‘동기’와 ‘표적’이 상식에 비춰서는 납득할 수 없고, 테러와 살인 예고가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됐다. 지난 한 달 동안에만 다른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예측하기 힘든 사건사고들이 잇따라 발생해, 국민들의 가슴을 크게 쓸어내게 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도 결코 간단치 않음을 새삼 느낀다. 특히 계속된 흉기 난동 사고와 같은 이상동기 범행 경우, 심리상태가 정상의 스펙트럼에서 벗어나고 가해의 실상도 단순 ‘원한’에 사무친 대인관계 범행에 그치지 않고, 무차별적이고 험악해졌다는 사실은 마치 추리소설 속 연쇄살인을 보는 듯 현실감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이 같은 범행이 비록 국가기능이 체계적으로 발동되더라도 놓치기 쉬울 정도로 급박하고, 언제든지 평화로운 일상 속 주변에서 재발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를 두렵게 하고 있다. 굳이 대처를 위해 몇 가지 문제를 짚어본다. 우선은 약해진 위하력이다. 안전사회를 위한 국가의 책무와 공권력의 행사가 과거에 비해 지나치게 축소되고, 위축됐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범죄의 심각성과 흉악성에 대한 형벌체계의 위하력을 약화시키고, 치안활동을 위축하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시민의 인권보다 범죄자의 인권이 앞서는 것은 극단적인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정의가 아니다. 다음은 대응 문제다. 예측하기 힘든 테러와 무차별 범죄 등 폭력적 위기 극복을 위한 적절한 타이밍은 군사작전처럼, 선제적이고 치밀해야 함은 기본이다. 이는 마치 언제 새는 지붕을 고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패러독스와 같은 이치다. 만약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지붕을 고치고 싶어 하지만, 막상 비가 내리지 않으면 지붕 고치기를 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느끼지 못한다면, 국민의 안전은 결코 담보될 수 없다. 위험사회 속에서는 사태의 본질을 사전 예견하고, 사회 구석구석을 살피는 것이야말로 위기대응의 보편적 원리다. 마지막은 관심 치환과 정치 과잉화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발생된 사건을 살피는 협치와 다짐 대신, 사고의 책임을 다른 대상으로 돌리고 정파의 손익계산에만 매달리고 있다. 법과 정치 등 우리 사회의 장치들이 더 이상 힘없는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는 것은 가장 큰 문제다. 더불어 언급하고 싶은 것은 ‘불안의 역치’다. 이는 극단적 범죄가 발생해도 시민들이 느끼는 자극과 반응이 크게 낮아지고 있는 것으로, ‘묻지마 흉기 난동’과 ‘살인예고’가 속출해도 불안감이 무뎌지는 심리적 현상이다. 사실 범죄는 우리가 사는 일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의 일이 아니다. 따라서 범죄에 대한 이해는 현실에 부합한 논의에 근거해야 한다. 그럼에도 마치 남의 일처럼, 관념적으로만 접근되고 있는 것은 범죄의 대책을 어렵게 한다. 이것은 모두가 자각해야 할 또 다른 문제다. ‘미래는 아무런 지도도 없는 하나의 대륙이다’는 테일러의 경구가 떠오른다. 미처 예측 못한 위기가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흔한 일이다. 최근 끔찍한 사건들이 보여준 모습은 일상 속에서 상처나고, 억눌린 증오의 감성이 어떤 이유로 타인을 향해, 충동적 파괴행위로 표출되는지 모두가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적 양극화와 사회 부적응자의 소외와 차별이 극단적 범죄의 토양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지만, 대부분의 강력 범죄가 단순히 산업화와 형식적 민주화의 후과(後果)로 나타나는 빈곤과 차별에 연유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우리에게 뚜렷이 인식시켜줬다. 하지만 위기는 종종 새로운 상상력이 발휘될 반전의 기회를 마련하기도 한다. 이번 사건들을 일상 속의 불가피한 현상으로 간과하지 말고, 더 안전한 사회를 구축하고, 공권력의 엄격함을 견지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만종 칼럼]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

지난 주말에도 서울의 도심 시위는 격렬했다. 슬로건의 글귀도 거칠었다. 온통 나라가 싸움질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시급하고 우려스러운 현안은 무엇인가, 묻는다면 나는 대선 직후부터 계속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편 가르기라고 답할 것이다. ‘남북 간 대립의 격화’도 걱정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적대적 정치다. 아무리 잘해도 ‘네 편은 적군’이고, ‘내 편은 아군’이다. 나 역시 어느 시기, 편 가르기 혼란에 깊어진 번민의 시간이 있었다. 정직하게 말하면 확실하게 아는 정보가 없었으며,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점검할 만큼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확신에 차 언성을 높이던 주변의 말에 간혹 고개를 끄덕여 줬던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2022년 5월10일 윤석열 정부는 출범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2개월이 지나고 있다. 한 정권을 조망하기에는 그 시간은 길지 않지만 정권 교체 이후 수많은 일이 급속하게 변화되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14개월이 결코 짧다고만 할 수 없을 것 같다. 관점의 차이는 있지만 요즘 정국 흐름에 대한 나의 단상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가와 국익을 위한 노력까지 비난할 이유는 없다는 점이다. 종종 칭찬할 만한 것까지 인정하지 않는 것은 비겁해 보인다. 상대를 과소평가하는 교만은 터무니없는 감정이입의 부재다. 다른 하나는 감정과 선동이 우선하고 있다. 정치적 논쟁에서 제시해야 하는 증거는 반드시 상대방의 흐름을 역전시킬 수 있는 논리와 대안이 전제돼야 한다. 하지만 최근 거론되는 여야 간 논쟁들은 명확한 증거보다 너무 많은 허위와 과장이 사실의 접근을 가로막고 있다. 적개심에 대한 이중 잣대다. 얼마 전 파리 근교의 나폴레옹 기념관을 찾은 적이 있다. 세미나 참석 후 남은 여가의 목적도 있었지만 그가 어떻게 위대한 군사지도자와 정치가로 성장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50 대 50이었다. ‘혁명 이념을 전파한 유럽의 해방자 vs 종신 황제 자리에 오른 독재자’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양립했다. 그러나 황제 독재자라고 비난하면서 파리 내 석상을 부수고, 고향 생가인 코르시카까지 가서 불을 지르는 식의 역사 세우기는 없었다. 반대로 혁명을 전파한 해방 자를 기리는 절세의 위인으로서의 용비어천가도 없었다. 여론과 평가를 생각 없이 꾸며내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다. 진영에 따라 만들어내는 잘못된 여론이 국민을 호도하고, 국가의 신뢰까지 훼손시킬 수 있다. 편 가르기는 한 가지 기준을 적용할 때 양극화된다. 계층, 세대, 학력, 지역 등 여러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다양한 기준이 공존할 때 편 가르기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적이 친구가 되고, 친구가 적이 돼야 한다. 정치를 떠나면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 변함없이 ‘정권교체’만이 당면 과제라는 것에 매달리기만 한다면 혼란은 가중되고 이 나라는 크게 바뀔 것이 없다. 근거 없이 상대를 악당으로 몰아가는 것은 민주주의와는 동떨어지는 일이다. ‘장님은 절대로 자신 있게 걸을 수 없지만 스스로 장님이란 것을 인식한다면 자신 있게 걸어갈 수 있다’는 버크의 경고적 글귀는 승자의 조건이며, 패자의 교훈일지도 모른다. 이제 국민들은 오인식의 원인보다 오인식의 본질에 초점을 맞춰봐야 한다. 정치 실종의 시대, 민심을 읽는 길 찾기가 시급하다.

[이만종 칼럼] 우리 사회에 내재된 위험·차별·혐오

한 달 전이다. 미국 텍사스주 쇼핑몰 총기난사가 벌어지고 몇 개의 보도를 시청하자 곧장 끼쳐온 심정은 이 사건의 트라우마가 내게 전이해 오는 것을 한사코 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관련된 보도를 더는 듣거나 보고 싶지 않았다. 며칠 뒤면 둘째 딸 가족의 미국 연수가 예정돼 약간의 공감이라도 마음에 일면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웃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온몸에 총기난사를 당한 비극적 참사였다. 순진무구한 세살배기를 포함한 한인 교포 일가족이 갑자기 숨져간 그런 끔찍함은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항용 혐오와 증오범죄는 특정 인종이나 국적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이 겹쳐 일어난다. 하지만 이번 텍사스 참사는 이보다는 근본적으로 다인종 사회의 구조적 불의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즉, 국가가 마땅히 기울여야 했던 인종차별과 혐오에 대한 주의와 대응역량의 퇴화가 근원일 수 있다. 이는 흑인 대통령까지 배출할 정도로 미국 사회의 다원성이 미국의 정신적 힘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미국 사회를 언제든지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게 할 수 있고 국가적 권위를 약화시킬 수도 있는 또 다른 단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미치광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폭력적 행위나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뺏긴 백인 청년층의 박탈감이 배경인지 그 관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국가 구성원들이 서로 믿음을 지니고 함께 살아야 하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왜 미국의 정치권력은 백인 우월적인 혐오를 부추기고 편파성 공권력으로만 기능하게 됐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2023년 현재 미국에는 인종 혐오 그룹 784개가 적극 활동하고 있다. 만약 노예로밖에 안 보이는 흑인, 후진적인 유색인 이민자라는 백인 우월 사상이 계속된다면 미국 사회의 미래는 이번 사건과 같은 등잔 밑 재앙의 강한 역풍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비단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유럽에서도 브렉시트 이후 혐오 범죄가 증가하고 있고 중동에서도 종파 간의 테러가 길거리를 피로 얼룩지게 하고 있다. 우리 사회 역시 온갖 이해관계로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혐오와 증오 표현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으로 인한 이주민들이 느끼는 차별에 대한 불만, 편견과 일자리 경쟁으로 인한 사회 갈등은 얼마든지 폭력으로 촉발될 수 있는 사항이다. 비단 사회적 약자로서의 이주민, 장애인, 성적 소수자 등에게 자유로운 역량 발휘 기회가 적은 사회 환경만이 해결해야 할 숙제가 아니다. 치열한 정치적 반목과 탐욕, 권력지향적 정치인들의 ‘내로남불’ 이중성은 더욱 위험한 국민적 분노 유발 요인이다. “모두가 용이 될 필요는 없다”며 ‘가붕개’로 살아가라고 말하는 기득권 정치인들의 경악스러운 망언 역시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를 황폐화하는 치명적 독소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 우리도 소수자에 대한 배타적 분위기와 그들의 다양한 절규가 우발적인 사고를 촉발시킬 가능성은 없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평등으로의 인권 가치는 차별과 적대가 아니라 ‘상호 간의 공존과 공영’으로써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발달한 민주주의는 갈등과 대립에 대한 긍정적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에 소수자의 신념이 극단화됨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지역분열·이념 대립과 마이너리티에 대한 차별과 무시라는 사회적 질병에 필요한 것은 상처를 아물게 할 치료이지 상처를 덧나게 할 공격은 아닌 것이다. 북한의 핵위협으로 불안해진 위기의 시대, 우리에게도 서로를 하나로 묶고 강한 나라를 만드는 게 가장 큰 과제다.

[이만종 칼럼] 어떻게 전쟁이 시작될 수 있는가...치킨게임의 함정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우크라이나에서의 포연은 1년이 넘도록 그치지 않으며 덩달아 한반도의 긴장도 끝없이 고조되고 있다. 1950년대 제임스 딘의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 등장하는 2명의 청소년은 차를 몰고 낭떠러지를 향해 고속으로 질주한다. 자동차를 놓고 먼저 방향을 틀은 쪽이 패자, 그리고 끝까지 방향을 유지한 쪽이 승자가 된다. 두 마리의 수탉이 서로 마주 보고 물러서지 않는 ‘치킨게임’이다. 최근 남북 간의 상황이 그렇다. 그동안 북한의 도발은 큰 틀에서 살펴보면 일회성의 도발이나 무력시위가 아니라 통제되지 않는 군사적 대립을 벌이고 있다. 남북 간 통신연락망은 벌써 2주 넘게 두절되고 지난 2월 화성-15,17형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 발사에서 최근 신형 고체연료 엔진 ICBM 발사에 이르기까지 북한이 감행한 도발 행태는 더 과감하고 대담해지고 있다. 핵·미사일 고도화 목표 역시 그들의 계획된 수순과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특히 최근 ‘전쟁억제력의 공세적 확대’를 언급한 것은 또 다른 도발을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 입장에서 핵·미사일 실험은 고위험 고수익을 노린 이성적 도박이고 자부심일 수 있다. 앞으로도 핵·미사일 실험을 자제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북한을 저지할 방법은 무엇일까? 남북 대화를 통해 풀어보겠다는 우리 측 기대는 지난 정부에서 무참하게 실패했다. 대안으로 거론되는 전술핵 재배치와 핵 보유 주장은 미국의 핵우산 보장 공약만으로는 ‘사실상 핵 무장’ 상태인 북한을 억제하기 어렵다는 다수의 여론에 기반한다. 일반적으로 핵 억지론의 기본 전략은 ‘상호확증파괴(MAD)’다. 즉, 핵을 쓰면 서로 절멸하기 때문에 핵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북 압박 수위를 높이는 선택이 최선이라는 판단은 어렵다. 북한은 ‘핵을 안 쓰면 김정은 정권이 100% 쓰러지고, 핵을 쓰면 1%라도 체제 보장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 문제다. 북한은 전통적인 ‘핵 억지 이론’이 통하지 않는 체제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비핵화 목표는 1년 전의 상황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위기 국면이다. 최악의 가정이지만 정말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이 미국의 본토를 위협할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면 미국은 자위권 차원에서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북한 역시 선제공격에 맞대응하게 되고 전면전은 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게 예측된 시나리오다. 만일 미국이 자국 이익을 위해 미국 우선주의의 방법을 선택하면 우리에게는 안보 재앙이다. 미국의 도·감청 의혹을 두고 논란이 분분하지만 동맹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현실적으로 남북 간 대결을 막을 수 있는 선택지는 몇 가지 없어 보인다. 때문에 다시 격화되는 남북 간 군사적 대립과 긴장이 우리의 일상과 삶을 어떻게 바꿀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남북 간의 전력은 서로 상대방을 똑같이 완벽하게 격파할 수 있어 어느 쪽도 먼저 방향을 돌리는 수치스러운 역할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 결국 각자가 상대방에게 방향을 돌리라고 고집하는 군사적 치킨 대결에서 결과는 ‘프라이드치킨’, 즉 양쪽의 공멸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로 불렸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가 버텨 온 것은 국제사회의 지원 덕도 빠뜨릴 수 없지만 애국에 기반한 단결과 용기가 가장 크다. 전쟁이라는 참상과 그 뒤에 따라오는 비극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어떻게 발생하고 그 뒤에는 무엇이 있었는가를 직시해야 한다. 남북 간 대결이 주변국들과의 역학관계 속에 한 치 양보 없는 치킨게임의 양상으로 비화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북한의 핵무기 사용을 거부하고 막아낼 완벽한 군사적 대비도 서둘러야 하지만 북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외교적 능력과 국민적 단합이 중요하다. 정치 영역에서도 전쟁보다 치열한 대립과 갈등을 그쳐야 한다. 전쟁의 종국에 남는 것은 ‘야만성’이다.

[이만종 칼럼]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이관, 최선인가 차악인가

어떻게 하면 국가정보원이 국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조직이 될 수 있을까? 최근 내가 생각해본 물음이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경찰 이관이 1년도 남지 않은 지금, 이 문제를 놓고 찬반 논란이 다시 불붙고 있기 때문이다. 또 현재 국정원의 약화된 정보 역량이 안보 공백을 가져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와 불안도 야기되고 있다. 지난 정부 5년 동안 무수한 국정원의 개혁과 변화에 대한 의견들이 제기됐다. 일군의 학자들은 국정원의 권한을 통제하면 국민의 인권침해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양이를 묶어 놓지 않고 생선가게를 맡길 수는 없다’는 영국의 정치학자 하이에크의 주장과 같은 관점이다. 이는 무제한적 권력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대표적 논점이기도 했다. 사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금과옥조처럼 지켜야 할 정치적 중립을 파기하고, 본연의 직무를 벗어나 일탈한 과거 사례는 그동안 국정원이 국가안보의 한 축을 담당해온 공로에도 불구하고 비판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대공수사권 이관 문제는 두 가지 이유에서 후과를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국가 안보상의 위해나 국익 침해 사항이 발생할 경우 선제적으로 대비하고 통제할 현실적 방도가 없다는 점이다. 더구나 정보와 수사의 분리가 대세라는 주장은 일면 그럴듯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지금도 미국의 연방수사국(FBI)은 수사기관이지만 정보기관으로서 국내 수사와 보안 정보를 함께 담당한다. 특히 9·11테러 이후 미국은 해외 정보와 적극적 방첩활동을 국가 정보의 두 축으로 설정해 국가적 위기나 재앙에 선제적으로 대비하는 예방적 정보활동 체계를 구축했다. 프랑스의 국토감시국(DST)을 비롯해 다른 20여개 국가도 정보와 수사를 겸한 통합형 국가정보기구를 운영한다. 지금 세계가 그렇다. 둘째, 더 중요한 사실은 경찰이 하는 범죄 수사와 정보기관이 하는 안보 수사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이다. 범죄 수사가 사후 조치 중심이며 현장체포에 중점을 둬 기소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조건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안보 수사는 전향적이고 위협 중심적이며 예방적 기능에 주력하는 게 특징이다. 기능 개편과 개혁 성공의 핵심은 권한을 어떻게 통제하고 효율적으로 극대화될 수 있도록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가진 권력이 힘이 아니라 가진 정보가 힘이 돼야 한다. 고(故)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거론한 ‘한국 내 북한 고정간첩 5만명’ 주장이 사실이라 단언하긴 어렵지만 2023년 벽두를 장식한 일부 진보단체들의 이적행위 의혹은 대공수사권을 결코 한가롭게 다뤄서는 안 됨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더욱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안보는 생존’과 직결되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북한의 노골적인 위협을 마주하고 있는 현재의 안보 여건에서 우리가 스스로 무장해제하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 물론 국정원의 안보수사권 유지가 권력 부패와 정치적 일탈로 악용된 잘못된 과거를 답습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가 극우 혹은 극좌 포퓰리즘 득세로 양분되고 있는 것은 걱정이다. 사실과 거짓,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개인의 ‘상식력’이 후퇴하는 조짐이 요즘 우리의 모습이다. 국정원의 수사권 분리 역시 국민의 신뢰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장기적 개혁과제이긴 하지만 현재의 열악한 방첩 인프라와 미비한 안보 수사의 법제를 고려할 때 시기상조라는 제언을 하고자 한다. 과정에서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 투명한 절차를 유지하고 정치적 간섭은 피해야 한다. 다툼 없고, 전쟁 없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고 싶은 것은 모두의 소망이다.

[이만종 칼럼] 걱정되는 다섯 가지 안보 위험

해가 바뀌고 봄이 다가오지만 나라 안팎으로 안보환경은 녹록지 않은 형국이다. 국외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고 국내에서는 북한 무인기 침투, 간첩단 수사가 벌어졌다. 나는 비록 유려한 탁견은 아니지만 이 땅에 사는 많은 보통 사람 중 한 명으로 최근 안보 상황에 대해 몇 가지 걱정을 떨치기 어렵다. 첫째, 정치인들의 정쟁이 국가안보를 망칠 수 있다는 걱정이다. 생각해 보자. 요즘 입 달린 사람 치고 정치판 싸움에 욕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적(敵)은 나라 밖에 있는데 나라 안에서 먼저 분열돼 국력을 낭비하고 있다. 지붕에 빗물이 새고 있지만 누구 그릇에 밥이 더 많이 담겼는지를 놓고 형제가 싸우는 격이다. 한반도 상황에 대한 냉철한 이성적 인식 없이 내지르는 포퓰리즘적 정치 수사들은 나라를 위기로 내몰 수 있다. 노림수가 뻔한 정쟁은 이제 그쳐야 한다. 둘째, 좌우 이념의 상충적 이데올로기가 한국 사회의 합리적 민주주의 사상을 편향적 갈등으로 추동시키고 있다. 전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사상적 기저에 깔린 경직성과 편협성 때문이다. 최근 논란이 된 여러 간첩단 의혹 사건은 우리 사회의 사상적 훼손의 징표다. 북한공작원들이 국내 곳곳에서 암약해 왔다면 충격이다. 셋째, 약화된 안보역량과 불감증이다. 최정예 우리 군이 장난감 같은 무인기에 조롱당하는 불명예를 어쩌다 안게 됐는지 아쉽다. 전쟁 위기에 대한 우리 자신의 불가해한 무감각과 무관심, 그리고 그러한 집단적 병리 현상의 근원에 똬리를 틀고 있는 무력감은 더 큰 문제다. 곧 전쟁이 터진다 해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초연할 수 있는 한국인들의 ‘안보 불감증’에 외국인들은 분단 현상보다 더 놀라워한다. 깨어 있어야 한다. 넷째, 무력해진 국가안보 법제와 방첩 시스템이다. 오늘날 안보의 근간은 정보전쟁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익을 뒷받침해야 하는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이관 재검토, 핵심 사항이 빠진 ‘테러방지법’ 개정과 최근 주요 이슈인 ‘사이버안보기본법’ 제정도 시급하지만 정치적 논쟁과 해석이라는 난제에 맞닥뜨리고 있다. 국가안보 수호라는 관점에서 숙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강력 확보다. 북이 핵무장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점은 세상 누구도 다 안다. 북한의 전쟁 시나리오는 짧고 치열한 단기 속결전이다. 미국과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 한국에 대한 지원을 억제한 뒤 신속히 남한 전역을 장악하려는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우리의 계산대로 동맹과의 연합작전은 쉽지 않을 수 있다. 9·11테러처럼 미국 본토가 치명적 공격을 받을 경우 미국의 한반도 전개는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하다. 확장억제 수단도 유용하지만 미국의 지원은 북한으로부터 공격받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을 때 가능하다. 그래서 스스로 지킬 결기와 역량이 없으면 결정적 굴욕을 경험하거나 국가의 생존에 대한 치명적 위험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공격보다 방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이제는 철 지난 이론일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믿음 역시 엄청난 위험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결국 ‘남북 간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언적 명령이다. 남북 간의 열전은 모든 사람과 사물은 말할 것도 없이 서로 다투는 당사자 모두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국가안보는 달성이 아닌 추구다. 우리가 추구할 최우선 가치는 일상의 평화와 국익이다. 국민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지도력과 초당적 대북 정책을 추진하는 각고의 노력을 부탁하고 싶다.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의 긴장이 해소되고 더 넓은 평화의 진전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이만종 칼럼] 사이버안보법 제정, 성숙한 논의 필요

영화에 등장하는 사이버 전쟁은 박진감 넘치면서도 손쉽게 진행된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몇 번 클릭하고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해킹에 성공하고 바이러스를 심어 놓는다. 이 같은 위험은 단순히 영화적 허구에 머무르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 국가 안보와 경제의 무수한 핵심 분야도 현재 이 같은 위험에 처해 있다. 북한은 2010년대 중반 이후 사이버 공간에서 금융 공격과 해킹을 주요 외화 수익원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9월 미국 하버드대 벨퍼센터가 발표한 ‘국가 사이버 역량 지표 2022’에 따르면 북한의 암호화폐 해킹 공격 역량은 세계 1위다. 더구나 정찰총국이 관리하는 ‘라자루스’ 등 정예 조직에서 활동하는 300~500명이 지난 2년여 동안 해킹으로 탈취한 돈과 암호화폐의 규모는 10억달러(약 1조3천160억원)가 넘고, 이는 북한 미사일 프로그램 자금의 약 30%에 해당한다는 게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최근 분석이다. 현재 북한의 전체 해커 규모는 6천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런 측면에서 지난해 11월 제정안이 입법 예고된 ‘국가 사이버 안보 기본법’은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벌써 정보의 주도권, 사생활 침해 문제 등 세부적 사항에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자칫 과거와 같은 공안정국의 매카시즘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공권력 불신에 대한 일각의 우려와 비판도 강하다. 물론 사이버안보법의 존재가 사이버 공격을 방지하는 실재적인 효율과 가치를 얼마나 갖고 있는가 하는 입법의 타당성 문제는 논의될 사안이다. 이 법 제정이 사이버 공격에 대한 모든 행위를 차단하는 완벽한 안전장치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록 ‘법’이 존재해도 모든 불법을 무조건 막아내기 어렵다는 이치다.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과 존엄성을 보장하는 법에 대한 ‘용인성(容認性)’ 측면도 살펴야 한다. 이는 2013년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 개인정보 수집 실태를 폭로한 전 중앙정보국(CIA) 요원 에드워드 스노든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국민의 인권과 사생활 침해가 심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억지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없다. 하지만 이번 사이버안보법 제정 문제는 정치적인 논쟁과 해석보다는 국가 안보 수호라는 측면을 우선적으로 고려해 논의에 임했으면 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사이버 안보 상황은 세계에서 가장 위중하지만 관련 법제 구축은 허술하다. 더구나 통상 국가안보 법제는 안보와 인권 간의 관계에서 상호가치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지만 국가 사이버 대응 능력 강화는 근본적으로 사이버 공간에서의 안전보장 능력과 국가 법 집행 능력의 확보라는 주요 목표를 전제로 추진돼야지 결코 찬반 양측 간 극한 대치를 벌일 일은 절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과거 테러방지법처럼 법안 통과라는 조급함으로 내용의 충실성보다는 핵심 사항이 빠진 형태만 남는 법안이 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견제와 균형보다는 대립과 갈등으로 인한 이견을 보이는 사안이 여럿 있다. 사이버안보법 제정을 놓고도 아무 일도 못하는 싸움판 논쟁의 새로운 주제로 시작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이 얼마나 타당하고 적절하게 행사될 수 있는가 하는 측면과 함께 전체적, 통시적 관점에서 사회규범적인 논의와 검토가 필요하다. 국민의 사생활 침해와 공권력 남용에 대한 우려도 향후 운영 과정에서 명확한 법률적 권한 규정 명시 등 제도적 안전장치와 높아지는 국민의 정치 성숙도가 어느 정도 차단할 것이라 믿고 싶다.

[이만종 칼럼] 공론을 이끌어내는 정치

36.4%, 대통령 국정 지지율이 한 달 만에 30%대 중반에 진입했다. 그동안 답보 상태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큰 변화다. 국가 운영에 관한 한 여론은 중요하다. 특히 국난 극복에 국가의 역량을 결집시켜야 하는 경우 더욱 그렇지만, 임기 초반 국민의 기대감이 높아 지지율이 높게 형성된다는 공식이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사실 여론은 목소리가 큰 사람, 시끄러운 소수의 이념적 논리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실체 파악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침묵하는 다수’로 인해 다른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생각이 사회적으로 다수라고 느껴지면 마음껏 의견을 표출하지만 소수라고 생각되면 그냥 침묵한다는 ‘침묵의 나선 이론’에서도 확인된다. 더구나 정치적 접전 속에 과열된 설전은 불신을 쌓고, 사실과 무관해도 부정적 프레이밍이 설정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상대 흠집 내기까지 여론으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실제 유권자들의 입장이 급격하게 변하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더러 선동적이더라도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정치에서 갈등은 필연이지만, 새 정부의 정치적 실천은 곳곳에서 차단된다. 정부입법 발의 법안 77건 중 처리는 0건이다. 노조의 투쟁도 강경하다. 국가지도자의 성패가 곧 나라의 사활이어서 지나친 반대는 걱정이다. 상호 심각한 감정이입의 부재다. 그러나 아무리 정치가 개탄스럽고, 유권자들의 변심이 야속하더라도 여론의 반전은 지도자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금 국민들은 힘들다. ‘지키는 자’와 ‘반기를 드는 자’로 나뉘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는 세상에서 결론 없는 논쟁, 생채기 내는 정치는 먹고사는 데 의미가 없다. 더 큰 근심은 앞으로도 고착화된 이분법적 거친 정쟁이 쉽게 그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내전과 같다고 할 정도의 치열한 충돌이 깊어지는 과정에서 튼튼한 나라가 만들어지기보다는 국가 안보와 경제가 분절(分節)되고 손상된다. 최근 북한은 ‘핵 무력정책 법제화’를 선언하고, 미사일 도발을 계속하고 있다. 핵 참화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대두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지만, 정치권은 무심한 평온이다. 유사시 정치인들은 어떻게 나라를 지킬까 한숨만 난다. 링컨은 “대중의 감정을 좌우하는 사람은 더 심원(深遠)한 차원의 정치를 펼 수 있다”고 했다. 국가가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민심의 변화를 살피고 헤아려야 한다. 앞으로도 지지율은 등락을 거듭할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의 철학이 입증되고 유권자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한다면 지지율의 급반등은 쉽지 않다. 정치지도자의 비전과 정책이 더욱 혁신적이어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새 정부의 정치는 지난 정부의 아쉬움처럼 ‘상호 적대적 규정’으로 좁아져서는 안 된다. 중도층까지 포용하고 통합하는 ‘지도력’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여론의 힘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세상사는 달라져 왔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다. 여론 형성의 주체는 국민의 공론(公論)이다. 대중은 위대한 지도자, 완벽하고 신에 가까운 능력의 지도자를 꿈꾸는 한편 동시에 매우 서민적이고 친구 같은 정치지도자를 원한다. 국민의 가슴에 불을 붙여야 한다. 이만종 한국테러학회장·호원대 법경찰학과 교수

[이만종칼럼] 쉽게 말하는 전쟁의 수사, 적절한가

잇단 북한의 도발로 안보 상황이 예단하기 힘들다. 핵무기 억제를 위한 군사적 옵션에 대한 언급도 점차 고조되고 있다. 북한이 핵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전에 전쟁 대응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미국 전술핵 재배치와 핵 공유 구상을 거론하게 하고 선제타격(Kill Chain) 같은 군사적 행동 가능성을 부추기고 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만일 지금 선제타격을 고려하는 경우 과연 ‘정밀타격’으로 북한의 핵시설을 무력화할 수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북한은 게임도 안 되고, 쉽게 없애버릴 수 있는 그런 상대일까. 전면전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타격할 수는 있겠지만 성공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북한의 핵 개발 능력과 의지를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지는 장담하기 힘들다. 제한적 범위의 타격이라도 전면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많다.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 때도 영변의 핵시설을 폭격했다면 북한의 핵 개발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에도 전면전에서 발생할 사상자 수를 감안해 계획은 무산됐다. 이처럼 군사적 옵션은 쉽게 말할 수 있어도, 생각만큼 깔끔하고 단순한 옵션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지켜만 볼 수도, 전면전을 각오하고 선제타격의 방법을 선택하기도 어렵다. 칠 건가 말 건가를 결정 못 하는 전략적 딜레마다. 군사적 작전으로는 유효성이 주저된다. 다음은 참수(斬首) 작전을 보자. 적의 전쟁지도부가 마비되면 적을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유효한 전술이다. 오사마 빈라덴과 사담 후세인 제거는 대표적 성공 사례다. 미군의 참수 작전은 현재 ‘고가치 표적(High Value Target)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정규 작전이 됐다. 그러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전쟁은 깊어지게 된다. 전쟁 상황을 가정해 보자. 북한은 상당한 재래식 전력과 화학·생물학무기,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재래식 전력인 장사정포는 핵무기나 미사일 같은 정밀유도무기보다도 오히려 우리를 가장 괴롭힐 수 있다. 사거리가 30~60km에 달하는 이들 무기를 경기 북부권과 서울 중심부를 타격하는 데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결국은 전면전에서 북한의 군대와 무기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 어느 때 작전을 전개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과 미국 모두에 판단이 어렵다. 트럼프 행정부도 북한에 대한 “전략적 인내는 실패했다”고 선언했지만 정작 군사적 선택은 고민만 했다.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얻게 되는 것이 안정일지, 극도의 혼란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남과 북 모두의 생명과 평화는 처참하게 변한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것은 분명한 우리의 소망이지만, 평화를 지키는 기본적 전제는 어떠한 계산된 광기도 궤멸(潰滅)할 수 있는 억지력의 보유다. 우리는 과연 전쟁을 감당할 준비가 충분히 돼 있는지, 아니면 무엇을 해도 어차피 전쟁은 안 난다는 안일한 생각에 젖어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만에 하나 어림짐작으로 전쟁을 그리며 군사적 옵션을 이야기하고, 북한 정부의 붕괴를 바라고만 있다면 그것은 현실을 너무 모르는 책임 없는 자세다. 지금 우리 안보 상황은 엄중하다. 핵 참화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커지고 있다. 이제 정치권의 분별없는 정쟁도 그치고, 튼튼한 나라 만들기에 힘을 모아야 한다. 이만종 한국테러학회장·호원대 법경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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