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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희망세상] 발가락 하나 차이의 비밀

내가 1990년대 초 유럽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브라질 축구선수 호나우두가 유럽 프로축구무대의 신예 스포츠 선수로 각광을 받았다. 나는 그의 열성 팬이었다. 발동작 하나하나가 예술이었다. 나는 그때 그의 황홀한 발놀림을 주의 깊게 관찰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아,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가 되는 비결은 반 발이구나. 맞아 바로 다른 선수들보다 반발만 빨리 움직이면 되는 거야!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의 결론은 바뀌었다. 야아, 세상 무섭게 변했네! 이젠 반 발 차이가 아니라 발가락 하나 차이네. 최고의 축구 스타가 되려면 남들보다 발가락 하나 차이만큼 빨리 움직여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리다니! 꼭 축구에 국한된 얘기는 아닐 것이다. 다른 스포츠 분야에서도 스타들끼리의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선두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총동원해도 자칫하면 밀릴 판이니 이 얼마나 피말리는 전쟁인가. 타고난 체력 조건, 훈련, 지능 모든 것을 가동해도 안심을 못할 지경이니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지식융합 시대 생존경쟁의 한 단면인 것이다. 실로 우리는 발가락 하나 차이, 한 끝 차이, 1점 차이로 승패가 갈리고, 당락이 결정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생존을 결정짓는 이 간격이 점점 좁혀지면 좁혀졌지 넓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듯한 기세로 미래는 달려오고 있다. 그런데! 학계와 재계 부문에서는 줄곧 최상위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은 유다인이다. 미국의 경우 명문대 교수 30%가 소수민족 유다인출신이다. 20세기를 주도한 최고의 지성 21명 중 15명이 유다인이다. 할리우드의 걸출한 영화감독들과 스타들의 대부분이 유다인이다. 미국 내 최고 부자 40명 중 절반이 유다인이다. 이렇듯이 유다인은 거의 전 부문에 걸쳐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까닭은 그들에게 발가락 하나 차이를 확보하는 비결이 있기 때문이다. 그 비결은 다름 아닌 셰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이라 불리는 기도문이다. 오늘날도 모든 유다인들이 매일 아침, 저녁 최소 두 번 낭송해야 하는 이 기도의 전통은 구약성경 신명기 6장의 성구에서 비롯되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는 []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고 일러 주어라(신명 6,5-7). 나는 밀리언셀러 무지개 원리에서 이 문장의 키워드 마음, 목숨, 힘이 결국 정(情), 의(意), 지(知)임을 밝혀, 이것이 전인적 자기계발의 묘방임을 입증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이 교육지혜를 알아봤을 때,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와우, 이거 천기누설이다! 그러니까 마음은 정(情) 곧 감성(感性)을 뜻하고 목숨은 의지(意志)를 말하는 것이고 힘은 지성(知性)을 가리키는 것이니, 이야말로 전인적 투신을 뜻하지 않는가! 게다가 거듭이라는 단어와 다하여라는 단어는 또 얼마나 영양가 있는 인격화 방안인가. 가히 자기계발의 비방(秘方)이라 해도 무색할 것이야. 발가락 하나 차이로 특등과 우등이 갈리는 살벌한 시대에, 유다인의 전통지혜는 더욱 빛을 발한다. 놀라운 사실은, 유다인들이 이 말씀을 받은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3천200년 전이며, 글로 기록된 것이 약 2천700년 전인데, 유다인 가정에서는 오늘날도 이 말씀을 아침,저녁으로 최소 하루 2번씩 공동으로 암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통의 계승을 구닥다리의 집착으로 치부해버리기 십상인 우리에게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문화쇼크다. 차동엽 미래사목연구소장인천가톨릭대 교수

[차동엽 신부의 희망세상] 사색의 계절에

가을이 되면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철학자? 스스로 자신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도 있을 터다. 허나 사실이다. 철학이 무엇인가? 철학은 존재하는 것들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고 보편적인 답을 추구하는 사유과정을 가리킨다. 세상에 물음을 던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비록 온전치는 않아도 답의 실루엣 정도는 누구든지 어림으로 가늠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철학자의 신원에서 벗어난 사람은 없는 셈이라는 얘기다. 모르긴 모르되 흔히 말하는 개똥철학이라는 말도 이런 취지를 가리키는 해학적 표현이라 여겨진다. 가을은 깊어 가는데, 나의 사색도 깊어가고 있는가. 자문해 본다. 돌이켜 보건대, 사색에도 좋은 스승이 필요하다. 스승이 아니라면 멘토라도 좋다.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고마운 추억이 있다. 내가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에서 박사학위 통과 시험을 치르던 당시의 이야기다. 나는 학위 취득을 위해 전공서적 30여권을 깨알 같은 글씨로 요약해 가며 빈틈없이 준비하였다. 구두시험 현장에서 내 논문지도 교수이며 시험 주심이기도 했던 쮸레너(P.M. Zulehner) 교수가 던진 질문은 그에 비해 의외로 너무도 파격이었다. 기억이 다 나지는 않지만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그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단 한 단어로 말해 보시오. 오늘날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상들의 배후에 작용하고 있는 결정적인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단 한 단어로 말해 보시오. . 당황스럽기도 하고 혼돈스럽기도 한 이 질문에 나는 마치 스무고개 풀기를 하듯이 진땀을 빼며 답을 추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답의 언저리에 근접할 때마다 교수님은 보조 질문을 던져 주면서 도와주었다. 단 한 번에 만족스런 답을 제시하지 못한 나였던지라 의당 교수님의 얼굴을 살필 수밖에 없었지만, 교수님의 표정은 대만족이었다. 어차피 교수님은 정해진 답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지식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사유법의 학습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교수님은 오직 제자 스스로가 섭취하고 소화한 초간단 핵심 및 그의 학문적 내공을 점검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회상해 보니 교수님의 질문은 시험이 아니라 마지막 강의였던 셈이다. 그 수업의 추억은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되어 오늘도 내 가슴에서 고동치고 있다. 늘 한 단어 핵심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라. 많이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정적인 인자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 물으라. 여기서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이지? 그렇다. 우선순위를 아는 것이야말로 으뜸 지혜라 할 것이다. 고로 현상의 표리(表裏), 사안의 경중(輕重), 순서의 선후(先後)를 파악하는 것이 무릇 공부의 목적이 아닐까. 무수한 곁다리들을 가져다 놓고 이러쿵저러쿵 해봤자 허접할 따름이다. 그 곁다리들을 헤치고 핵심 하나만 분명히 잡으면 어떤 난제건 해결의 실마리가 술술 풀리게 마련 아닌가. 용어들이 거창하니까 방금의 얘기가 저잣거리 일상과는 거리가 먼 학술적 진술로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랬다면 그것은 오판이다. 한 단어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은 매일의 생활고를 해결하는 데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통찰력, 혜안, 촌철살인. 이런 말들이 왜 필요한가. 얼키설키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인생만사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데 요긴한 도움이 그것들에서 오기 때문이다. 얼마 남지 않은 가을날들. 삼삼오오, 또는 단체로 단풍구경만 나다니지 말고, 쓸쓸히 낙엽이 깔린 길을 걸어보자. 홀로 부질없는 사색에 잠겨보자. 실속 없어도 간만에 의미 한 두 개 쯤은 주울 수 있을 테니까. 차동엽 미래사목연구소장인천가톨릭대 교수

[차동엽 신부의 희망세상] 의인의 곁

비엔나 대학에서 석사과정에 있을 때 윤리신학 시험을 소위 오럴테스트(oral test), 곧 구두시험으로 치렀다. 그 때 교수님으로부터 받았던 물음들 가운데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아주 재미있는 물음이 하나 있다. 지금 당신이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갑자기 한 괴한이 나타나 총기를 들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습니다. 상황은 악화되어 이미 몇 사람의 생명이 희생당했고 분위기는 점점 위험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당신에게 그를 제거할 기회가 옵니다. 당신은 호신용 총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당신의 사정거리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당신의 움직임을 보지 못합니다. 자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자를 쏘겠습니다. 교수님이 다시 물었다. 살인은 제 5계명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나는 대답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동등한 가치가 서로 대치국면에 있을 때 우선적 선택의 원리를 따를 것을 권장합니다. 곧 생명과 생명이 대립되어 부득이 한쪽을 희생해야 하는 선택을 해야 할 때, 다수의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 소수의 생명을 희생해야 한다는 원리 말입니다. 미치광이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선량한 여러 사람이 산다면 그것은 의로운 행위입니다. 교수님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어주셨다. 그 때 나는 정당방위론은 피력하지 않았다. 교수님의 질문의도가 불가피한 우선선택의 원리를 묻고자 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에 총탄을 발사한 안중근! 일제 강점기 때 한 가톨릭교회의 선교사 출신 주교는 그를 단순한 살인범으로 치부한 적이 있다. 그 오류를 치유하는 과정은 가톨릭교회가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다. 돌아오는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 기념일이다. 우리는 그를 의사(義士)라 부른다. 그는 그 이름에 걸맞게 대의(大義)를 구했던 큰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의로움의 진면목은 어떤 것인가? 과연 큰 의로움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서슬 퍼런 눈빛에 입술을 굳게 다문 근엄? 아니면 의분에 찬 콧김에 호통을 뿜어낼 듯한 아우라? 1908년 봄 안중근 의사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두성을 총독으로, 이범윤을 대장으로 한 의병 부대를 조직하고 자신은 참모 중장이 되어 일제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면서 일정한 전과를 거두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교전 과정에서 잡은 일본군 포로들을 죽이지 않고 모두 석방했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단 한 명의 일본군이라도 더 죽이는 게 국익에 더 유리했을 것 같겠지만 안중근 의사는 달랐다. 만국공법(국제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라는 법이 없다면서 이들을 석방하고는 자신의 신념을 분명히 밝혔다.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을 물리친다. 안중근 의사는 의가 무엇인지 알았던 대범한 인물이었다. 그의 의로움에는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이는 그리스도교 정신이다. 그는 이 정신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토 히로부미로 인하여 너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자칫 우리는 의로움을 냉정한 응징의 덕으로만 여기기 쉽다. 이런 류(類)의 의인의 곁은 서늘하기만 하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품었던 의로움은 이를 넘어 단 한 생명이라도 섬세하게 보듬을 줄 아는 의로움이었다. 의로움에 생명사랑의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의로움의 민낯이 아닐까. 차동엽 미래사목연구소장인천가톨릭대 교수

[차동엽 신부의 희망세상] 프란치스코 후유증

외부 강의를 많이 하다보면 호불호를 넘어 별별 말을 다 듣게 된다. 나는 어느 성당 신부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 전해들은 적도 있다. 그런 신부 한번 다녀가면 그 후유증이 얼마나 큰 줄 아십니까? 나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십분 이해한다. 아무래도 잠시 다녀가는 이의 강의는 온갖 좋은 말은 다 동원하여 화려하기 마련이다. 음식으로 치자면 일 년에 한번 먹을까 말까 하는 성찬인 셈. 그러나 본당 신부는 다시 평범으로 돌아와서 일상의 양식을 공급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 괴리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것이 본당 주임 신부의 몫인 것이다. 요란하고 흥분스러웠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4박 5일 방한 일정을 마음으로 동행하면서 그 끝자락에서 문득 그 일이 떠올랐다. 모르긴 모르되 지금 이 사회 지도층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마음 한켠에 신선한 감동을 품고 있은 채, 뭔지 모를 부담감으로 인해 속이 개운치는 않을 터다. 이건 뭐지? 이 감정! 은혜를 받은 것 같으면서도 괜히 죄인 같은 이 기분. 그러지 않아도 요즈음 모든 잣대를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행에 맞추어 볼멘소리를 하는 이들을 여기저기서 만난다. 왜 정치권은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약자들을 안아주지 못하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우리 식탁에 빈자리를 마련하자고 했는데, 왜 경제인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가난한 이들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해주자고 했는데, 왜 당신네들은 용서를 못하는가? 프란치스코 교황 덕에 우리의 눈과 귀는 고급스러워졌고, 우리의 이상은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높아진 잣대를 자신에게 돌릴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늘 하던 버릇대로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향하기 일쑤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비겁한(?) 손가락질에 진즉 일침을 놓았다. 한 도시의 모습은 그 안에 사는 구성원 모두의 얼굴로 만들어진 모자이크와 같은 것으로 지도자나 관리들이 보다 큰 책임을 지고 있겠지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시민들도 공동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니 남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자신의 책임을 추슬러 볼일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오늘 발생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사건들과 관련하여 나에게는 과연 어떤 책임이 있을까. 나는 그 책임만큼 행동했던 사람인가, 아니면 입만 살아 있던 사람인가.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남에게 돌렸던 성찰의 시선을 이제 자신에게로 회수하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도 우리의 파파(papa)께서는 친절하게 도움말을 준다. 나는 등반가에게 조언을 해 줄 수는 있지만, 그를 위해 대신 산을 올라 줄 수는 없다. 풀어 알아듣자면 이런 말씀일터다. 나는 당신들을 기꺼이 안아 줄 수 있습니다. 위로든, 격려든, 조언이든, 당신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다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산은 당신들이 오르는 것입니다. 교황이 우리에게 남겨준 진정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 아닐까 한다. 현금의 절망 문화에서 벌떡 일어서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말이다. 차동엽 미래사목연구소장ㆍ인천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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