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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의 시시각각] 윤석열의 광화문을 주목하는 이유

대선 슈퍼위크의 시작. 여러 대선 주자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여야 정치권의 대선 열차에도 속도가 붙었다. 최재형 감사원장의 사퇴, 민주당의 대선 경선 일정 시작 등 여러 변수가 관심을 끌었지만, 누가 뭐래도 유력한 차기 주자인 윤석열 전 총장이 잠행을 마무리 짓고 본격적인 대권 행보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기에 비로소 대선 열차의 시동이 걸린 것이 아닐까. 정치인에겐 말과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상징언어에 진짜 속내가 숨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인의 입이 아닌 그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지속해서 관찰하고 확인하며 정치적 의미를 해석하곤 한다. 대한민국 모든 언론의 주목을 한몸에 받는 유력 대통령 후보의 경우, 제일 처음 찾게 되는 장소, 만나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말할 것도 없고, 식사에서 택하는 메뉴 하나하나에도 상징적 의미가 풍성하게 담겨 있어야만 한다. 탄탄한 시각적 효과를 바탕으로 국민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는 상징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일은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는 정치인의 언어와 비교할 수 없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정치 문법에 따르면, 통상 정치인의 활동 무대는 여의도 국회로 수렴된다. 따라서 대선주자의 주 활동공간인 대선 캠프 역시 여의도에 둥지를 트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관의 30대 0선 당대표의 탄생과 각종 여론조사에서 1, 2위를 다투는 유력 대권 주자가 모두 여의도 국회 경험이 전무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이번 대통령 선거는 과거의 정치문법으로 해석될 수 없는 상당한 변화 앞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래서 더, 여의도가 아닌 광화문 한복판에 대통령 선거의 전초기지를 마련한 윤석열 전 총장의 상징언어에 눈길이 간다. 어쩌면 4.7 보궐선거 승리 이후 상승 국면인 국민의힘에 입당하는 가장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가 광화문이라는 상징 안에 녹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과연 우리는 윤석열의 광화문에서 어떤 상징을 주목할 수 있을까. 첫째, 광화문은 촛불의 상징이다. 2016년 겨울, 최순실 국정농단에 분노한 국민은 광화문을 촛불로 가득 메웠고, 국가권력의 사적 남용을 준엄하게 꾸짖는 시민의 목소리는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의 탄핵과 사법적 판단의 근거가 된 특검 기소의 핵심에는 윤석열 전 특별수사팀장이 있었다. 수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야권진영의 후보가 된 윤석열 전 총장을 향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가에 관해 묻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문제는 윤 전 총장이 대선 국면에서 반드시 넘어서야 할 첫 번째 허들이 될 것이다. 아마도 광화문의 상징을 선택한 윤석열은 그때 광화문에 모였던 촛불이 틀리지 않았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 않을까. 둘째, 광화문은 공정과 정의의 상징이다. 2019년 가을, 대한민국은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쩍 갈라진 분열의 대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촛불의 상징임을 자처했던 조국 전 민정수석의 법무부 장관 청문회를 지켜보며 위선과 내로남불에 치를 떤 국민들이 광화문으로 모여들었다. 이 중에는 수년 전 광화문에서 전직 대통령 탄핵을 주장하며 촛불을 들었던 이들의 목소리도 상당했다. 그리고 광화문에서 공정과 정의를 외치며 조국 전 장관의 퇴진을 염원하던 시민의 중심에는 역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권력에 맞서 조 전 장관 가족 일가의 수사를 결연히 추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위선 속에 가려진 진실과 과연 마주할 수 있었을까. 셋째, 광화문은 결국 시민의 힘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필자에게 광화문은 2002년 월드컵에서 온 국민과 함께 꿈은 이루어진다면서 얼싸안고, 서로를 응원하던 축제의 공간이다. 자국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의 성공을 위해 축제처럼 모였고, 스스로 떠난 자리를 정리하던 시민의 힘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80년대를 살았던 누군가에게 광화문은 87년 민주항쟁을 통해 서울의 봄을 만들었던 민주주의의 공간일 수 있다. 지금 여의도 정치권에 주류가 된 86 운동권 정치인들이 이런 민주화의 상징자본을 독점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 광화문을 통해 군사정부 종식을 이뤄낸 힘은 알려지지 않은 시민의 소리 없는 참여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이른바 촛불 정권을 자임해 왔던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급변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매해 새로운 시대정신이 광화문을 향해 모여들고 있다. 그리고 이는 어느 특정 진영의 목소리에 기대어 풀어낼 수 없는 무거운 과업임이 틀림없다. 촛불 민심을 특정 진영의 논리로 치환 시켜 국민분열을 가속화 시켰던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딛고, 진짜 광화문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새 정부 출현의 시기가 점점 다가오는 듯 보인다. 윤석열의 광화문은 과연 어떤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아직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꽤 오랜 기간 그에게 담긴 국민의 기대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고민해본다면, 광화문에서 펼쳐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이 무엇인지는 점점 더 분명해지지 않겠는가. 김병민 시사평론가

[이민규의 思각思각] 감성적 대처가 필요한 시대

한동안 배달 플랫폼에 올라온 불만 고객의 리뷰와 업주들의 막말 대응이 논란이 됐다. 후두염이 심해 죽 시켰어요. 쏘쏘에요~라는 고객의 리뷰에 업주가 답했다. 16시간 일해가면서 만들어요. 쏘쏘라고 하실 거면 다른 데 가서 시켜 드세요. 아프신 거 안 나으셨으면 좋겠네요. 업주들에게 고객들의 악성리뷰는 공포의 대상이다. 신규 고객 유입에 높은 평점과 긍정적 리뷰보다 더 중요한 게 없고 악성 리뷰 몇 개로 매출이 급격하게 떨어질 수 있다. 실제로 여러 조사결과 고객들은 배달앱으로 식당을 고를 때 리뷰와 평점을 가장 많이 고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업주들이 평점이나 리뷰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악플을 남기는 블랙컨슈머들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억울하고 화가 나더라도 감정적 대응은 자제해야 한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너 아니면 장사 못하랴하는 생각으로 감정적인 대응을 하면 그 고객 한 명을 잃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화가 풀리지 않은 불만고객은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수많은 잠재 고객들에게 소문을 내고 다닐 것이며 업주의 막말 댓글을 본 고객이 수도 없이 떨어져 나간다. SNS를 즐기는 고객이라면 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진다. 일본의 인터넷리서치 회사 인포플란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불만을 느껴 그 음식점에 가지 않는 경우가 있냐는 질문에 90%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클레임을 걸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 음식점에 대해 나쁘게 말한 적이 있냐는 질문에는 92%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모두 달라서 모든 고객을 100%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제품과 서비스란 없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불만고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들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불만고객을 양산할 수도 있고, 수많은 잠재고객에게 입소문을 내주는 충성고객으로 만들 수도 있다. 불만고객을 줄이고 충성고객을 늘리려면 감정적인 대응을 자제하고 감성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감정과 감성은 한 획 차이지만, 그 의미는 천지차이처럼 크다. 감정(感情)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해 일어나는 마음이나 느끼는 기분이다. 감성(感性)은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이다. 그러므로 감정적인 대응을 하는 업주는 자신의 느낌이나 기분에 초점을 맞춘다. 고객들과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반면 감성적인 업주는 고객의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고객으로서 공감이 가능하고 불만고객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다. 감정적인 대응을 자제하고 감성적인 대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멈추고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생각으로 맞대응하고 싶을 때는 잠깐 멈추고 이렇게 자문하자. 이 반응을 선택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그 일은 어디로 이어질까? 모든 선택은 즉각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 감정적으로 반응하면 그 순간은 속이 시원할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문을 닫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여유와 지혜는 자극과 반응 사이의 멈춤에서 나온다. 둘째, 불만고객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 사람들은 웬만하면 주문한 음식에 클레임을 걸지 않는다. 허기뿐 아니라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음식을 주문하며 불평하는 일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각의 각도를 조금만 바꿔보면 불만을 토로하는 고객은 골칫덩어리가 아니라 히든 클레임을 알려주는 고마운 손님이 된다. 또 지혜롭게 대처하기만 하면 충성고객이 되어 스스로 홍보대사가 돼준다. 셋째, 평소에 정신적 리허설을 해둔다. 위기 상황에 대한 대처 요령을 미리 마음속으로 리허설 해두면 우리를 행동으로 이끄는 대뇌 전두엽 피질이 활성화된다. 그래서 실제상황에서 충동적 행동을 현저하게 줄여준다. 정신적 리허설은 운전 시비나 부부싸움 등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쉬운 다른 상황에서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물론 처음엔 쉽지 않다. 하지만 연습을 하다 보면 쉬워진다. 까다로운 고객은 최고의 스승이다. 그들의 까다로움이 서비스 혁신의 모멘텀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에게 친절하라. 그는 변장한 천사일지도 모른다. 서양 속담이다. 기회는 언제나 고객과 함께 온다. 그러니 불만고객, 막 대하지 마라. 그는 성공 노하우를 알려 주기 위해 찾아오는 변장한 천사일지 모른다. 이민규 아주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이민규의 思각思각] 5월엔 뻔한 말 좀 합시다

몇 년 전 어버이날, 한 취업포털사이트에서 대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부모님에게 가장 하기 힘든 말은 무엇인가? 1위가 사랑합니다였다. 그렇다면 부모들이 자식들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그 역시 사랑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학생 자녀들은 왜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을 가장 하기 힘들다고 했을까?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고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상담할 때 가족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해보라고 권한다. 그러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문한다. 마음이 중요하지 그걸 꼭 말로 해야 합니까? 물론 마음도 중요하다. 그러나 표현은 더 중요하다. 그런데 왜 표현이 잘 안 될까? 거기에는 몇 가지 심리학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남이 어쩌다 한 번 베푼 작은 친절에는 고맙다는 말을 잘하면서도 정작 누구보다 감사해야 할 가족에게는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보다 오히려 투덜거릴 때가 더 많다. 가족들이 베푼 것은 당연한 것이고, 가족은 늘 내가 어떻게 하든 다 받아주면서 붙박이처럼 거기에 존재할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기 때문이다. 관계의 질은 표현에 의해 결정되고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리 가득해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건 마치 비싼 선물을 사서 포장까지 해놓고 건네주지 않고 내가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종은 울려야 종이고 사랑은 표현해야 사랑이다. 셋째, 표현방법을 공부하고 연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저절로 우러나오는 감정이고 마음속에 담고 있으면 저절로 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이란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표현을 연습해야 하는 일종의 기술이고 예술이다. 거창하게 표현하라는 것이 아니다. 흔하고 뻔한 말로 표현하면 된다. 상담을 하다보면 행복한 가정에는 공통점이 있다. 뻔한 말을 잘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불행한 가정은 뻔한 말을 잘 안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이다. 잘 잤어? 고마워 엄마가 미안해 잘했어 괜찮아 수고했어 아빠는 너 믿지 알라뷰 아빠가 좋아요.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은 뻔한 말을 잘 하는지 여부에 의해서 갈라지기 때문에 나는 이를 뻔한 말 효과라고 한다. 행복한 가정은 당연한 일 속에서도 감사할 일을 찾아내 고마움을 표현하고, 문제가 생기면 상대방을 탓하기보다 자신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얼른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도 그만하면 잘 했다고 격려하고, 실수를 했을 때는 괜찮다고 안심을 시켜준다. 작은 일에도 감탄하고 감동하면서 상대방에게 기운을 넣어준다. 상담을 하다보면 가슴과 입까지의 거리는 30㎝ 밖에 안 되는데 가슴속에 담아둔 사랑을 말로 표현하는데 30년 이상 걸렸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표현을 미루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앞으로도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이며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사람에게 해야 할 정말 중요한 말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다 마지막 순간이 지난 다음에야 과거형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평생 임종환자의 심리를 연구했던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그녀의 마지막 책 인생수업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당부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십시오 나중으로 미루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밤 12시가 되기 전에 가족 중 누군가에게 뻔한 말로 사랑을 표현하자. 마주 앉아 가만히 눈을 맞추고 말로 해도 좋고, 전화나 메일, 문자 한 통, 쪽지 한 장으로도 좋다. 진심을 담아 사랑을 표현할 때, 최대의 수혜자는 내 자신이 된다. 내가 가장 먼저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은 표현이 얼마나 큰일로 이어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테레사 수녀님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다. 세계평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수녀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집으로 가서 가족을 사랑해주세요 오늘 표현한 뻔한 말 한 마디는 말 한 마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평화의 시작점이 된다. 이민규 아주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이민규의 思각思각] 화를 대하는 생각의 차이

현재 대한민국을 읽을 감정 키워드는 화다. 욱하는 감정에 일면식도 없는 이를 폭행하고, 도로 위에서 보복 운전으로 화를 분출한다. 화, 열등감, 분노가 사방에서 타인에게 표출된다. 사람들은 왜 비슷한 상황에서도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행동하면서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까? 생각, 자극에 대한 해석과 반응에 대한 선택이 다르기 때문이다. 갑자기 다른 차가 끼어들면 반사적으로 욕이 나온다. 키가 작고 못생겼으니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으면 당연히 화가 난다. 일이 늘어나면 누구나 짜증이 난다. 이처럼 A라는 자극을 받으면 B라는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자극과 반응 사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틈이 있다. 반응이 너무 빨리 일어나 그 틈을 미처 의식하지 못할 뿐,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의 크기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각도가 삶의 질,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 운전 중에 갑자기 끼어드는 차량을 만나면 반사적으로 핏대를 올리면서 경적을 울린다. 이 경우 자세히 살펴보면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에 생각이 있다. 저게 사람을 뭘로 보고라는 분노감을 유발하는 생각이다. 이때 급한 일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을 해보자. 운전 시비로 인한 말싸움이나 폭력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가던 길을 갈 수 있다. 실패를 겪은 후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면서 절망하고, 어떤 사람은 그만하면 잘했어 하고 자신을 격려하면서 다음 기회를 준비한다. 실연을 당하고도 어떤 사람은 폐인이 되고 어떤 사람은 시인이 된다. 비가 오면 어떤 사람은 기분이 처진다고 짜증을 내지만, 어떤 사람은 낭만적이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똑같은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랐어도, 어떤 아들은 그런 아버지랑 살았는데 어떻게 술을 안 마시겠느냐?라고 하고, 또 다른 아들은 그런 아버지랑 살았는데 어떻게 술을 마시겠느냐?라고 반문한다. 99개를 갖고 있으면서도 한 개가 부족하다고 늘 불만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개만 갖고도 그나마 없는 것보다 낫다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모두 생각의 각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면 생각의 각도를 바꿔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생각의 각도를 180도 바꿀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1%만 바꿔도 충분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 핸들을 조금만 돌려도 차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질주한다. 사격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조준 각도가 1도만 벗어나도 탄착지점은 표적에서 완전히 빗나간다는 사실을 잘 안다. 실제로 20m 공기총 사격에서 조준 각도가 0.87도만 어긋나면, 탄착지점은 표적의 정중앙에서 표적 밖으로 완전히 빗나가버린다. 생각은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아니다. 생각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고, 자전거를 타거나 운전을 하는 것처럼 배우고 연습하면 얼마든지 익힐 수 있는 일종의 기술(Skill)이다. 어떻게 하면 생각의 각도를 지혜롭게 조절할 수 있을까? 세 가지 단계만 거치면 된다. 우선 멈춘다. 자극을 받으면, 반사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잠시 멈춘다. 처음엔 쉽지 않지만, 잠깐의 순간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작은 것부터 연습하자. 갑자기 다른 차가 끼어들 때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으로 잠깐!하면서 심호흡을 하거나 하나, 둘, 셋을 세는 것이다. 두 번째는 생각하기다. 반사적으로 반응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련의 부정적 파급 효과를 찾아본다. 이 일을 선택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그 일은 어디로 이어질까? 이렇게 생각의 꼬리를 이어간다. 마지막으로 바꾸기다. 충동적이고 부정적인 반응을 유발하는 생각을 찾아본다. 그리고 그 생각을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반응을 유발할 수 있는 생각으로 바꾼다. 이를테면, 저게 사람을 뭘로 보고처럼 무시한다는 생각 대신, 뭔가 급한 일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현실치료(reality therapy)의 창시자 윌리엄 글래서(William Glasser)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동물은 자극에 따라서 반응하고 인간은 반응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박테리아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체는 자극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자극에 대한 해석과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화가 분출하는 시대, 자신과 마음, 생각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민규 아주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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