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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순 칼럼] 정당 중심의 정책경쟁이 필요하다

여의도 정치권에는 선거철만 되면 일 잘하는 자, 줄 잘 서는 자, 잽싼 자로 나눈다는 우스개 같은 이야기가 회자되곤 한다. 그리고 이 바닥에서 성공하려면 잽싼 자가 가장 유리하고 다음으로 줄 잘 서는 자이며, 일 잘하는 자는 셋 가운데 가장 성공과 멀다는 얘기도 덤으로 오르내린다. 특히 지지율이 높은 후보의 선거캠프는 잽싼 자, 줄 잘 서는 자들의 공직 경쟁을 위한 향연이 펼쳐지는 곳이다. 대선후보 캠프는 그야말로 전쟁터다. 국회의원, 교수, 변호사를 비롯한 다양한 인사, 선거기획자들이 참여하는 매머드급 사설이자 비선 조직이다. 그러다 보니 캠프 구성원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누가 쥘 것인가를 두고 불꽃 튀는 싸움이 벌어진다. 때론 캠프 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상대 후보에 대한 인격 살인을 서슴지 않으며 소모적인 비방전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주로 과거에 현재 후보와 정파를 달리했거나 지난 선거에서 정당 공천에 실패했던 인사들이 그런 역할을 담당한다. 논공행상에 관심이 있는 잽싼 자, 줄 잘 서는 자만 있을 뿐 대한민국의 미래비전을 위해 일하는 자는 캠프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20대 대선은 사회, 경제 전반의 대전환 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이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두고 치러지는 중대선거이다. 한국 사회에 당면한 문제 해결방안과 미래 의제를 다루는 정책경쟁의 장(場)이 되어야 한다. 아울러 정당의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부터 비전과 정책의 차이에 입각한 정책경쟁이 실현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선거 강령, 후보, 정책을 당원이 검증하고 선택하기 위한 전당대회는 공조직인 정당이 주도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 없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정당이 아닌 사적 이해로 뭉친 선거캠프가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무분별한 네거티브가 난무한 탓에 정책 의제나 미래 비전에 대한 검증은 힘을 잃는 모양새다. 대선 공약은 캠프에서 만들어진 어설픈 정책들로 검증마저 불가능한 단순 희망모음집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정당의 투명한 프로세스와 시스템에 의한 정책과 비전의 경쟁보다는 공직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어떨까. 대선후보 캠프에 시민사회의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인재가 참여한다. 당과 당원을 중심으로 투명한 시스템에 의한 경선을 진행한다. 국회의원들은 대선후보 지지 선언은 자유롭게 하되 캠프에서 공식 직함을 갖고 활동하지 않는다. 전당대회에 앞서 승자가 패자의 정책을 일부 수용해 주면서 패자의 퇴로를 열어주어 경선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을 봉합해 나가는 프로세스를 밟는다. 대선후보와의 사적인 친소관계로 당내 파벌이 형성되고, 해당 행위를 불사하는 싸움으로 당을 분열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선거캠프가 잽싼 자, 줄 잘 서는 자들의 공직 진출에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대선후보의 공약을 당의 공식기구인 매니페스토위원회에서 만들도록 의무화하는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그리고 선거공약 이력제(Campaign Pledge Traceability System)를 도입해 최초의 제안자가 누구인지, 공약실천계획서를 언제까지 작성하여 공개해야 하는지, 이행과정에서는 누가 책임을 지고 있는지를 시민들이 추적 조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대선 캠프 참여 인사들의 명단 공개도 의무화해야 한다. 그래야 정책 정당 실현을 위한 기반이 형성되고, 참여인사들의 정치적 책임을 다하는 데 압박이 될 것이 때문이다. 오현순 공공의제연구소장

[오현순 칼럼] 불확실성의 바다에서 공약이 의미하는 것은

대통령 출마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후보자 검증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후보자 검증 대상으로는 도덕성과 자질, 정책을 주로 다뤄왔다.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으며 요소 간에 상호 연결돼 있기도 하다. 물론 어떤 요소가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에는 그 나라의 정치 문화, 국민의 정서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 요소를 통합적으로 검증하는 것엔 이견이 없으나 무엇에 더 집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후보자 검증은 무분별한 메시아적 추앙에 기대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주권재민 실현을 위한 과정이다. 시민들은 불안을 해소하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길 바라는 자신의 바람을 정치인에게 투사한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시민이 정치인에게 갖는 열망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정치적 행위일 수 있다. 하지만 시민의 관심을 악용해 마치 이 나라를 악으로부터 구원하기라도 할 것처럼 등장했던 사람들은 혹독한 현실 정치를 견디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점차 사라져 갔다. 검증 없는 팬덤 정치의 결말은 실패로 끝난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지켜봤다. 이처럼 후보자 검증은 구원자를 행세하며 국민을 혹세무민하는 정치인을 걸러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공존을 위한 약속, 그 약속을 이행할 정치적 역량과 시스템을 철저히 검증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대의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선거의 핵심 요소는 약속이다. 독일 출신의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예측불가능성의 바다에서 예측가능성의 섬을 만들고 신뢰성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약속이라고 했다. 인간은 다원성을 지니고 있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예측불가능성은 증대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약속은 사람들의 행위 결과를 예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들을 보완하는 행위다. 또한 다원적인 인간관계와 그 속에서 공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호 약속(계약)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탁월한 개인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만드는 약속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지금 세계는 기후 변화, 팬데믹, 인구와 산업구조의 변화, 불평등 문제 등 불확실성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불확실성의 바다에서 예측가능성의 섬을 위한 공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공약은 후보자가 속한 정당의 공약과 괘를 같이 한다. 정당의 역량이 곧 후보자의 역량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의 발자취와 정체성, 정치 철학과 국정운영의 방향, 시대정신과 미래 비전을 모두 고려해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시민, 언론은 공약으로 제시한 정책의 적실성뿐만 아니라 공약의 이행 가능성, 제약된 조건들을 고려 또는 개선할 수 있는 역량, 그런 일련의 과정을 책임져야 할 후보자의 의지와 리더십을 철저히 검증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약을 후보자가 독점하는 것이 아닌 시민과 함께 만들어야 한다. 공약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시민이 참여해 공동체의 새로운 규범과 정책을 공동 생산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정치인의 말과 행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말과 행위가 반영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공적 약속인 공약(公約)이 아니라 빌 공자 공약(空約)이 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성찰과 변화를 함께 이야기하고 정책공약의 적실성, 이행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 이것이 예측가능성의 섬을 위한 약속을 만드는 과정이다. 시민들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매니페스토 선거가 되길 바란다. 오현순 공공의제연구소 오름 소장

[오현순 칼럼] ‘K방역’ 성공 요인과 문제의식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본격화되면서 집단면역 형성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희망도 잠깐.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풍토병이 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고 있다. 코로나와 함께 사는 삶으로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지금까지 K방역의 성공 요인과 문제의식을 거칠게나마 간략하게 제시해보고자 한다. 한국은 현재까지 다른 나라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방역을 이뤄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성공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우선 정부의 전문성과 신속성, 그리고 이에 대한 한국 시민들의 신뢰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2003년 사스와 2013년 중동 호흡기증후군 메르스 사태를 거치면서 방역시스템을 체계화하고 대응 매뉴얼을 마련할 수 있었다. 개방성, 투명성, 민주성의 방역원칙 아래 방역 전문가 집단과 질병관리청은 정확하고 신속하게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국민의 신뢰와 적극적인 협조를 견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중앙부처, 17개 광역자치단체 및 18개 지방경찰청이 함께 진행했던 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도 큰 위력을 발휘했다. 국무총리를 본부장으로 영상대책회의를 거의 매일 진행했으며 주요 지자체 코로나19 현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조치상황에 대해 공유했다. 방역수칙에 대한 이행력 강화방안과 조치 현황, 권고안 등의 논의가 실시간으로 이뤄질 수 있었기에 효과적인 방역시스템이 가동될 수 있었다. 우수한 공중보건체계, 의료진과 지자체 공무원의 헌신도 빼놓을 수 없다. 코로나 대응의 최전선에 있는 보건소와 공중보건의사 등의 우수한 공중보건체계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성공 요인이다. 최일선에서 사투를 벌인 의료진, 휴일도 반납하고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상황근무, 임시생활시설 운영, 방역 및 물품지원 업무 등에 최선을 다한 지자체 공무원들, 그들의 고군분투가 있었기에 K방역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위기 극복을 위해 언제나 팔을 걷어붙였던 시민들의 연대와 협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민들은 모두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 방역의 주체라는 인식을 갖고 거리두기에 동참했다. 전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마스크 제작과 배분, 장애인 구호와 공동 자가격리, 실업예방과 취약계층 안전망 구축을 위한 연대 활동 등을 펼쳤다. 공공서비스 폐쇄조치로 인해 어려운 환경에 있는 시민들이 방치되는 상황에서 시민사회는 자발적으로 정부의 한계를 보완해 가고 있다. 인류사를 보면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바빴고 질병의 근본 원인은 감추고 구조적인 해결책은 늘 제쳐놓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장편 문명에서도 전염병 페스트가 인류를 휩쓸면서 서로 헐뜯고 공격하다 인구가 8분의 1 수준으로 몰락한다는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실제 작년 코로나19가 발생한 국가의 국민과 확진자를 향한 심한 욕설과 혐오가 난무했던 상황을 기억해보면 한국도 예외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정치적 목적과 상업적 이득을 위해 생산되는 가짜뉴스는 혼란과 불신을 부추기며 방역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영웅주의 서사와 리더십에 의존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위기 시 관련 조직, 체계, 자원의 신속한 작동, 방역ㆍ의료 인력의 안전과 적절한 보상이 제도적으로 마련돼야 한다. 개인의 희생과 리더의 역량에 따라 방역의 성패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시스템이 정착돼야 할 것이다. 오현순 공공의제연구소장

[오현순 칼럼]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행복하다면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행복하다면, 우리도 행복하단다. 다비드 칼 리가 쓰고 마르코 모사가 그린 그림책 나도 가족일까?에서 부모가 보리스에게 보낸 쪽지에 적혀 있는 글이다. 아이가 없는 부부는 늪에서 우연히 물고기와 인간의 몸을 반씩 지닌 아기를 발견하게 되고 아이(보리스)의 부모가 된다. 하지만 보리스는 인간의 몸과 다른 자신을 보며 자신과 닮은 누군가를 찾아 늪으로 떠난다. 그곳에서도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슬픔에 빠진 순간, 늪의 바닥에 있는 보리스의 부모가 보낸 수많은 빈병 안의 쪽지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쪽지에 새겨진 위의 글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된다. 닮지도 않고 혈연관계도 아니며, 심지어 종(種)도 다른 보리스가 어디에 있든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진정한 가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과 달리, 법과 정책은 여전히 전통적 가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행 민법과 건강가족기본법에는 가족을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단위를 가족으로 인정하고 있다. 비혼, 동거가족, 1인 가구 등은 가족 유형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부양, 돌봄, 교육, 주거, 의료 등 다양한 복지서비스로부터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영화 어느 가족에서 할머니의 연금으로 여섯 식구가 근근이 살아가는 비혈연 가족이 법적 가족으로 인정을 받았다면, 아이들은 도둑질하지 않았을 것이고, 학교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가정폭력과 냉소에서 벗어나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통적 가족 체계가 무너져 비정상 가족이 늘어나면 사회가 흔들린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법적, 사회적 힘은 아직도 강력하다. 생존에서 시작된 가족의 탄생은 농경사회, 종교의 전파, 과학기술의 발전 등 정치, 경제, 사회의 흐름에 따라 형태와 역할도 변해 온 것이 사실이다. 가족의 형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그 시대 시민의 욕구와 열망에 따라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다행인 것은 정부, 국회에서 관련 법과 정책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가족 개념을 재정립하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도 사회적 복지를 보장받을 수 있게 하려고 민법, 건강가정기본법을 개정할 계획에 있다. 더 나아가 프랑스의 시민연대협약, 독일의 생활동반자관계법안과 유사한 생활동반자법도 계속 논의 중이다. 주목할 점은 반려동물도 가족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법적 지위를 개선한다는 것이다. 건강가정기본법의 목적에는 특히 가족의 유지를 강조한다. 하지만 가족의 유지를 위해 가정폭력 등 각종 불합리한 상황에도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가족유지가 아닌 가족 구성원 개인의 존엄과 행복에 목적을 둬야 한다. 혈연적 관계를 넘어 사회적 공존을 통해 친밀과 돌봄, 부양을 실천하는 다양한 결합들이 탄생하고 그 탓에 개인의 삶이 행복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행복하다면 그곳이 내가 머물러도 될 가족공동체가 아닐까. 오현순 공공의제연구소 오름 소장

[오현순 칼럼] 미얀마의 진정한 봄을 기다리며

미얀마 사태가 결국 걷잡을 수 없는 내전상황으로 치닫는 것으로 보인다. 53년 만에 역사적인 민주적 정권교체를 축하한 지 6년 만의 일이다. 랑군의 봄으로 불리는 1988년 버마민주화 운동과 2007년 샤프란 항쟁, 정글로 들어가 투쟁을 계속 해온 전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의 희생으로 어렵게 이룩한 민주화가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미얀마에서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NLD(민족민주동맹)로의 정권 교체는 군부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군부가 주도해 개정한 미얀마 헌법에는 외국인 배우자와 외국 국적의 자녀를 둔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아웅산 수치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또한 군부는 의회 의석의 25%를 할당받고, 내무국방국경경비 등 주요부처의 장관 임명권을 쥐고 있다. 군부와 민주주의를 바라는 시민 간의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던 셈이다. 최근 들어 로힝야족 탄압 등을 이유로 서방국가들마저 미얀마 문민정부와 거리 두기하면서 정치 지형은 더욱 불안해졌다. 사실 로힝야족 탄압은 2020년 11월 총선거에서 승리를 겨냥한 군부세력의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행위였다. 2017년 수치의 NLD는 경찰 권력을 손에 쥔 군부의 세력 약화를 위해 자치경찰제 시행을 위한 법 개정을 시도했으나 군부의 반발로 실패했다. 이에 대한 군부의 반격이 로힝야족 대학살과 추방사건이었다. 군부는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 이슬람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을 탄압하면 국제적인 인권 활동가인 수치가 로힝야족을 지지할 것이고, 이에 따른 불교계의 비판이 일어나 수치의 NLD와 불교계를 대립시키는 구도를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치는 국내 여론과 문민정부를 지키고자 국제적인 비판에도 군부의 로힝야족 탄압을 외면하는 길을 선택했다. 수치의 비동맹 정책 유지는 이번 비극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얀마는 원유와 천연가스, 석탄, 유연탄, 우라늄, 철, 니켈 등의 자원이 풍부한 국가이며 동남아시아의 가운데 있어 오랫동안 인도와 중국의 중개무역지로 역할을 했다. 서방국가와는 오랫동안 관계가 단절됐지만, 중국은 90년대부터 미얀마 군부와 합작해 대규모 투자를 해왔다. 가스와 원유 파이프라인을 건설했고, 수력 발전과 광산 개발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이 때문에 수치는 국익을 위해 영국과 미국 등의 적극적인 구애에도 인도와 중국을 중시하는 비동맹 정책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서방국가의 좁은 입지가 적극적인 개입을 불러오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미얀마 인권단체인 정치범지원연합(AAPP)은 5일 오전 기준 570여명이 숨졌고 이 가운데 어린이가 47명이라고 발표했다. 군부의 유혈 진압과 체포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미얀마 시민의 의지는 확고하다. 미얀마 시민은 더 이상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1988년 버마 민주화 항쟁 때 우리는 88년 올림픽에 취해 미얀마의 상흔과 노고를 오롯이 품어주지 못했다. 그런데도 미얀마 민중들은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모국으로 부르며 자유에 대한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잔인한 폭력 앞에서 극도의 고통을 겪는 미얀마 시민들은 오늘도 세계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우리 이웃인 미얀마에 지지와 성원을 아낌없이 보내자. 언론의 관심이 사그라지더라도 미얀마를 잊지 말자. 그것이 미얀마의 봄을 앞당기는 희망일 것이다. 오현순공공의제연구소 오름 소장

[오현순 칼럼] 노인 놀이터 도입 공론화가 시급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은 2020년에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15.7%이고 2025년에는 20.3%에 이르러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19년 기준 기대수명은 83.3년으로 2005년에 비해 약 5년 늘었다. 문제는 건강수명이 줄어들고 있다는 데 있다. 건강수명은 기대수명에서 유병기간을 제외한 기간으로 2018년 평균 64.4년이다. 대략 17년간 질병, 부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기대수명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를 줄이는 것에 더욱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이다. 2009년 UN은 100세 장수의 삶을 누릴 가능성이 커졌다는 이유로 호모헌드레드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유발 하라리는 한 술 더 떠, 호모 사피엔스는 종말하고 호모 데우스가 지배하리라 전망했다. 알고리즘을 통하여 유전자와 질병을 분석하여 인간의 몸은 계속 업그레이드되어 불멸할 것이며, 신성의 호모데우스(신이 된 인간)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러한 전망은 단순히 좋은 소식이기만 할까. 질병과 부상으로 삶의 질이 떨어지는 상황이라면 오래 사는 것은 거의 재앙에 가까울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여전히 경제적 이익과 효율이 지배하고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노인들을 시설에 격리시켜왔다. 시설, 공원 등에 설치된 운동기구들도 건장한 성인에 맞춘 기구들이 대부분이다.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 사회참여가 가능하게 돕는 개방형 놀이터를 만들고 노인의 신체적 조건에 맞는 놀이, 건강 기구들을 설치하고 있는 외국과는 사뭇 다른 접근이라 할 수 있겠다. 미국과 유럽의 노인 건강정책은 치료보다는 예방이 우선이다. 지속적인 운동으로 균형 감각과 운동 능력을 향상시켜 자신감을 개선하는 방식이다. 노인의 정신건강과 자신감을 증진시켜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겠다는 것이다. 달팽이관의 노화에 따른 낙상 사고 가능성과 낙상에 대한 공포가 노인들의 행동 제약한다는 문제점에 초점을 맞춰 해결방안을 찾고 있다. 시설에만 있으면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문제 등의 노년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결국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1유로의 예방 조치에 투자하는 것이 10유로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보고 고관절 수술비용 약 3만유로(약 4천만원)를 넘어지거나 골절되는 것을 막기 위한 노인 놀이시설 제공에 쓰고 있다. 영국은 2008년 맨체스터의 하이드파크에서 노인 놀이터를 조성하였고, 스페인은 카탈루냐 주에만 500개의 노인놀이터 시설이 있다. 한마디로 한국의 노인정책이 얼마나 근시안적이고 편의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04년 살만큼 살았으니 슬퍼하지 말라며 달력 뒷장에 유서를 쓴 뒤 장례비 250만 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는 노부부의 동반자살 뉴스는 큰 충격이었다. 노인자살은 급증하고 있다. 65세 이상의 자살률이 10만 명당 80명으로 OECD 평균인 20명보다 4배나 높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살방지 재정의 주요 쓰임새는 전철과 지하철의 스크린도어 설치이다. 노인의 건강하고 존엄한 삶은 우리 사회 공동의 책임이다. 노인놀이터 도입 공론화를 시작으로 기존 노인 정책에 대한 성찰과 개선방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오현순 공공의제연구소 오름 소장

[오현순 칼럼] 천대받은 놀이의 배신

어릴 적, 대부분의 사람은 먹고 자는 것 외에 많은 시간을 노는 데 몰입했을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의 삶도 놀이 그 자체였다. 산과 바다의 온갖 것들이 나에겐 즐거움이었고, 그 자연의 즐거움에 낙천적 성격이 보태지면서 나에게 재미와 유머는 일상이 됐다. 그러나 놀이가 공부와 일의 여분일 뿐이고 시간 낭비라는 인식이 사회 저변에 짙게 깔렸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생산성을 높이고자 인간의 생산적인 효과성을 따져야 했고 비생산적인 놀이는 무가치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압축개발성장과 물질문명의 발전은 놀이의 상실을 가속했다. 하지만 천대받은 놀이는 인간을 배신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삶의 질은 나빠졌다. 놀이가 상실됐기 때문이다. 놀이의 가치를 접할 기회가 차단된 상황에서 그 빈틈으로 스멀스멀 침투해 들어온 것은 시장의 논리다. 휴식, 즐거움, 재미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타인의 욕망이 투영된 소비문화로 전락한다. 놀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놀이의 상실은 타인의 고통을 즐기고 폭력과 놀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양산했다. 많은 청소년이 타인을 상대로 한 패드립과 혐오발언, 집단 괴롭힘, 불법촬영과 디지털 성범죄 등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싸 문화, 놀이 문화로 소비하고 있다. 학교 내에서 불법촬영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19세 이하 청소년의 디지털 성범죄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는 경찰청 조사를 통해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수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마치 그러한 행위가 용인된 것처럼 죄책감 없이 급속도로 퍼져갔다. 놀이 또한 사회적인 관계 속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망각한 탓이다. 놀이에 있어 경쟁, 인정욕구와 성취감은 중요한 요소로 간주된다. 하지만 천대받은 놀이는 잘못된 인정욕구와 성취감을 배태했고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순식간에 효율적으로 응답, 인정,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놀이의 배신을 더욱 확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노르베르트 볼츠가 놀이하는 인간에서 생산과 소비의 시대를 넘어 21세기는 놀이의 시대가 되리라 전망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20세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형국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어떻게 하면 잘 놀 수 있을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1930년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100년 후인 2030년에는 주당 15시간 일하고 여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가 인류의 과제가 되리라 예측했다. 물론 2030년까지 10년이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주당 15시간이라는 예측은 거의 빗나갔지만, 여가의 중요성에 대한 함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놀이는 일의 여분에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로서 설명될 수 있으며 완전한 인간을 추구하기 위한 요소로 인식돼야 한다. 요한 호이징하는 놀이는 문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고 말한다. 천대받은 놀이의 배신은 얼마든지 인간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는 놀이는 문화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모른다. 빼앗긴 놀이를 본래 놀이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돌려주고 우리 삶의 일상으로 복원해야 한다. 일하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적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자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삶을 불행하게 했던 낡은 기준에서 벗어난 놀이를 창조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쓸모없는 취급을 받는 놀이에 대한 반론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오현순 공공의제연구소 오름 소장

[오현순 칼럼] 먹거리 그냥드림을 환영하며

경기도는 긴급 생계 위기에 처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격 조건 없이 먹거리를 가져갈 수 있는 `경기 먹거리 그냥드림 코너`를 설치했다. 이재명 지사는 페이스북을 통해 모두 내려놓고 주저 말고 찾아와 달라고 했다. 절박한 이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신원확인과 재산조사 등의 진입장벽도 없앴다. 약간의 악용 부작용이 있더라도 예산 부족도 지자체장 자신이 모두 책임지겠다고 나선 것은 내 기억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먹거리 그냥드림을 두고 무책임한 선심성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지적이 있기도 하지만 그냥드림 정책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의 경제사회구조에서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가 담겨 있다. 소홀히 다뤘던 복지정책의 철학과 가치에 대한 성찰을 주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간 우리 사회는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생산성과 효율성을 따지거나 일부의 악용사례 혹은 재정부족을 핑계로 주저하곤 했다. 포괄적 복지서비스의 점진적 확대를 위한 사회적 합의보다는 퍼주기식 포퓰리즘이라고 무차별적으로 비판하기 일쑤였고 개인에게 떠넘기는 가족부양 방식의 복지정책을 고집해왔다. 그 결과 생활고로 숨진 송파 세 모녀 사건, 숨진 지 반년 만에 발견된 방배동 모자(母子)의 비극 등 고질적인 복지참사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을 때마다 국민적 공분이 일어났고 동정여론은 들끓었다. 사건에 여론이 집중될 때마다 희생자의 이름을 딴 네이밍 법안들이 땜질식으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정작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들면 재정고갈과 악용사례 등을 이유로 일부 언론이 주도하는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복지정책의 방향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래전 학교 수업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아직도 뇌리에 짙게 남아 있다. 한 동료가 교수에게 수혜대상자가 아님에도 부정으로 수급한 사례를 문제 제기하며 해당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교수는 부정수급으로 인한 낭비는 부차적인 문제이며 그 제도로 인한 취약계층의 혜택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답했다. 절박한 이들의 존엄과 인간에 대한 이해는 복지정책을 추진하면서 잊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메시지였다. 2014년 송파 세 모녀는 복지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식당일을 하던 어머니마저 넘어져 식당일을 하지 못해 생활고와 실의에 빠졌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타인에게 폐가 될까 봐 50만원의 밀린 집세와 가스비가 담긴 돈 봉투, 그리고 죄송하다. 정말 죄송하다라고 쓴 유서를 남겼다. 송파 세 모녀의 비극은 코로나19 위기에 빠진 오늘도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7번째로 국민소득 3만불 이상, 인구 5천만명 이상의 나라를 의미하는 3050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경제 규모는 캐나다보다 조금 앞선 세계 10위이다. 더 이상 재정 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로부터 수혜를 받는 것에 미안해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게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현순 오현순 공공의제연구소 오름 소장

[오현순 칼럼] 못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국회의원의 이해충돌을 방지하는 국회법 개정안의 연내 처리가 무산됐다. 2011년부터 이해충돌방지법 필요성이 제기된 이후 법안 발의는 계속 이어졌으나 10년 넘게 제대로 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는 것만큼 국회에 대한 불신이 더욱 공고화되는 것은 아닐지 우려가 된다. 국회의원 이해충돌방지 법안의 취지는 국회의원의 권한을 이용한 사익 추구, 도덕적 해이와 부패 등을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직무연관성이 있는 주식을 보유한 상황에서 법안 심사와 상임위원회 활동을 하거나 피감기관들로부터 가족회사가 수천억 원대의 공사를 수주하면서 사회적 공분을 산 적이 있다. 자신의 지역구에 철도 역사 건설을 요구했던 어떤 한 의원이 역 바로 앞에 가족 명의의 상가 건물을 소유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국회의원 이해충돌방지법은 모호하고 적용 범위가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번번이 좌절되어왔다. 국회의원의 업무 범위는 매우 포괄적이고 부정한 사익 추구 행위에 따른 악영향 또한 광범위하다. 적용 범위가 포괄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난해 6월 경실련은 다주택 보유의원은 국토위와 기재위 등 관련 상임위 배정에서 배제할 것 등을 제안한 바 있다. 부동산 재산 상위 10명의 평균액은 106억4천만원이었고, 이들 중 상당수가 부동산 관련 국회 상임위인 국토교통위와 기획재정위 소속이기에 부정한 사익 추구 행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난 5월 매니페스토본부의 설문 결과에 따르면, 국회의원 당선인이 밝힌 희망 상임위 중 26%가 국토위를 1순위로 꼽았고 개발로비스트를 자처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KBS 보도에서는 고액의 주식을 보유한 의원 중 상당수가 활동 상임위와의 직무관련성이 있었고, 국토위 소속 의원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주식 보유 액수가 많은 의원은 본인이 설립하거나 가족이 운영하고 있는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고 상당수가 직무 관련성이 있었다. 의회민주주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고 있을까. 유럽의 나라들은 부정한 사익 추구 행위를 제한하거나 재산내역을 공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욱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과거의 이력과 경력 등을 사전에 공개해 의정활동 과정에서 이해관계 관련성을 의회에 보고하게 하고, 이를 위반할 시에는 징계를 받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사전 정보공개와 이해충돌 회피 의무 및 불이행 시 제제 방안을 법률에 명시하고 있다. 한국 또한 국회의원이 지위와 직권을 이용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법적 장치가 헌법, 국회법, 국회 내부 규칙 등에 상당 부분 제도화되어 있다. 하지만 간접적 규제에 그치거나 구체적인 법률 규정이 없어 추상적 선언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현행 청탁금지법(김영란법)을 논의하던 2015년 당시에 국회의원 이해충돌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법안들이 제출됐으나 최종적으로 청탁금지법에서 제외됐다. 그때 이 규정들에 대한 입법이 이뤄졌으면 이런 일련의 이해충돌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국회의원 이해충돌방지법 도입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 이미 널리 형성되어 있다. 고양이가 생선을 훔쳐가는 것을 목격하고도 아무 손도 쓰지 못하는 상황을 국민은 언제까지 지켜만 봐야 하는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길 수밖에 없다면 못 된 고양이 목에 방울이라도 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국회의 신뢰 회복을 위해 이젠 매듭을 지어야 할 때다. 오현순 공공의제연구소 오름 소장

[오현순 칼럼] 정치 타락은 거짓과 증오의 결과다

미국 민주주의의 민낯을 보았다. 대선 후보 토론에서는 대중들의 증오를 이용하려는 헤이트 스피치(증오발언)가 난무했고 거짓 주장을 쏟아냈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은 대선 결과에 불복 입장을 밝혔고 트럼프 지지자들은 대규모 시위를 예고했다. 4년 전 트럼프 한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뿐인데 비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추락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트럼프가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어 불안해하는 상황을 지켜보며 미국 민주주의에 적잖은 실망이 앞선다. 많은 사람에게 미국은 민주주의의 모국이었고 본보기였기에 그 충격은 컸을 것이다. 거짓과 증오는 민주주의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2020년 미국 대선은 거짓과 증오로 얼룩졌다. 그 이유로 편향성과 배타성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미국의 극단적 일방주의와 나는 옳고 상대방은 모두 틀렸다는 배타성은 미국의 장점인 다양성을 점점 더 빨리 잃게 했다. 서로 혐오하고 증오하였으며, 무차별적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은 조롱거리로 전락해 버렸다.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한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 사회도 성별, 종교, 인종 등에 대한 혐오가 확산되고 있고, 묻지마 증오범죄도 늘어나고 있다. 일부 정치인들은 거짓 주장과 혐오 발언으로 증오를 선동하기까지 한다. 정파적 혹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거짓 주장들은 편향성을 강화한다. 그 상황에서 진실과 본질은 증발해 버리고 만다. 또 문제는 정치 1번가인 여의도다. 21대 국회 첫 국정감사의 평가는 한 마디로 격투장으로 전락한 정쟁국감이었다. 여야 모두 추미애 법무부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으로 나뉘어 격투를 벌였다. 상대방을 도발해 분노를 유발하는 어그로(aggro)만 있을 뿐, 국민에게 내 놓은 국감 결과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정쟁은 입법과정에서도 이어졌다. 일하는 국회를 약속했지만 지난 5개월간 국회가 보여준 모습은 집단 퇴장, 고성과 막말의 장이었다. 언론들은 여전히 편향된 보도를 이어갔고 SNS에서는 정치적 증오와 극단적 주장이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사회의 가치들을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정치의 본질은 실종 된 지 오래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거짓혐오증오를 조장하고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며 심지어 갈등을 사유화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한국 또한 언제든지 미국처럼 병든 민주주의 국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한국사회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서 있다. 노동절약형 기술진보에 따른 산업구조 전반의 재편을 강요받고 있다. 매우 빠른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등 인구구조의 급격한 변화도 일어나고 있다. 코로나19는 전과는 다른 삶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기후 변화는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재난이 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미래의 위기가 일찍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듣도 보도 못했던 거대한 변화, 새로운 미래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시급한 이유이다.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정치 타락은 지성이 타락한 결과라고 말했다. 지성의 타락은 결국 거짓과 증오에서 배태된다. 더 이상 합리적인 논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젠 내 주장에 대한 오류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타인의 주장에 경청할 줄 알고 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한 대화에 나서야 한다. 정치 타락의 최후는 공멸의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오현순 공공의제연구소 오름 소장

[오현순 칼럼] 한국판 뉴딜, 속도가 아닌 방향이 중요하다

정부는 지난 7월14일, 2025년까지 총 160조원을 투자해 디지털 뉴딜그린 뉴딜을 중심으로 일자리 190만개를 창출하겠다는 한국판 뉴딜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350만개 일자리 창출),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238만개 일자리 창출)와 유사한 사업 방식이라는 점에서 볼 때 NewDeal이라 부르기엔 과거 정부의 방안과 차별성이 크지 않아 보인다. 문제는 지금의 한국판 뉴딜은 철학과 방향에 대한 충분한 사회화 과정보다는 엘리트 관료 중심의 톱다운(Top Down)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화, 자동화 등 노동절약형 기술진보에 따른 노동과 고용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지 사회적 대화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이에 대한 계획은 찾아보기 어렵다. 초고령화 사회 진입과 100세 삶이 보편화되는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시대 도래에 따른 대응책도 미흡하다. 좋은 노동과 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인구변화에 대한 대응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4차 산업혁명에 따른 기술 혁신과 성장 동력에 초점이 맞춰진 까닭이다. 특히 기술혁신에 따른 일자리 소멸과 고용불안은 더 이상 부차적으로 다뤄져서는 안 될 절체절명의 과제다. 이를 무시한 채 과거의 경제 전략을 답습할 경우 정보통신, 스마트 인프라 등의 기술력을 확보한 대기업은 수혜를 받겠지만 대다수의 고용을 책임지는 중소기업의 일자리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질 수밖에 없다. 이미 우리는 기술진보에 의한 일자리 소멸을 지켜보고 있다. 무인 자동 물류 항만으로 추진 중에 있는 인천시와 부산시의 항만 SOC 디지털화, 스마트 해운물류가 그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불공정한 대우와 임금체계를 개혁하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판 뉴딜을 통해 경제사회산업의 체질을 개선하고 좋은 노동을 유지하고 강화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의 성패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있는 일자리의 창출과 사각지대가 없는 사회복지제도 구축에 달려 있다. 이 모든 일은 1차적으로 저임금 노동과 고용의 불안정성을 강요받고 있는 현재의 임금체계를 합리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독일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과 독일은 제조업 중심의 산업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독일은 2012년 첨단기술전략인 Industry 4.0을 발표하였으며, 궁극적인 목표로 기존 공장자동화(Factory Automation, FA)를 넘어선 전 국가의 스마트 공장화(Smart Factory)를 선언했다. 이와 함께 독일정부는 가속되는 디지털화 과정에서 무엇보다 먼저 좋은 노동의 유지와 강화를 고민했다. 광범위한 사회적 논의를 통해 미래변화에 따른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했고, 2015년부터 2016년까지 노사정이 함께 법체계, 제도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그리고 그 합의 결과를 노동 4.0 백서에 담아 발간하는 등 사회적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한국판 뉴딜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이다. 하지만 기술 혁신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한국판 뉴딜사업은 지금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기술 혁신과 노동복지정책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사회구성원의 공동의 비전이 빠진 뉴딜사업은 한계를 들어 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또 다시 과거 압축개발성정시대처럼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 오현순 공공의제연구소 오름 소장

[오현순 칼럼] 도덕적 해이는 누구를 겨눠야 하는가

코로나19의 재앙이 예상을 벗어나고 있다. IMF 외환위기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고 한다. 두 위기는 공통점이 있다. 아무도 예상 못 했던 상황이라는 것과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국민의 협력을 이끌어 내려면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과 공적 안전망에 대한 굳건한 확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IMF 외환위기는 국가 부도상황이었다. 폐업과 실직에 이어 신용불량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정부는 국가와 기업의 실패를 국민이 나서서 막아준다면 결코 정부는 그 노고를 있지 않겠다고 했다. 온 국민은 위기의 공동체를 구하고자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다. 시중은행 금리가 연 29.5%로 수직으로 상승하였고 이 환난을 이용해 이익을 추구하는 파렴치한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루속히 국난극복을 위해 힘을 모았던 국민에게 날아온 것은 비수였다. 2004년 신용불량자에 대한 구제책이 나오자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정책이라며 열심히 살아온 서민들에게 돈 떼먹는 자로 낙인을 찍은 것이다. 서민금융정책에 도덕적 해이는 당연한 명제처럼 따라다닌다. 이번에도 그랬다. 이재명 도지사가 꺼내 든 기본대출권에 반대하는 첫 번째 논리로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여권 중진 국회의원 입에서 나왔다. 신용도가 낮은 서민도 1~2%의 저금리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자는 기본대출권은 국가가 이자를 재정으로 보전해주는 방식으로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다고 비판했다. 국책연구기관인 KDI도 기본대출권은 해외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현재의 서민금융정책도 과한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코로나19로 인한 자영업자들의 폐업과 실직, 대량 신용불량 사태가 우려되는 국가(국민) 위기상황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도덕적 해이는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고 금융시장을 붕괴시키는 위협요인을 말한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가 금융시장을 붕괴시키는 위협적 행동을 하고 있는가. 외환위기 때 부실채권 정리를 위해 금융기관에 지원된 공적자금은 총 168조 7천억 원이었으나 지난 6월까지의 회수율은 69.5%에 그쳤다. 이에 반해 20%가 넘는 고금리를 10% 안팎의 금리로 바꿔줬던 서민금융상품에서 채무자의 변제율은 70%를 넘는다. 여전히 10%는 서민에게 높은 금리인데도 말이다. 금융기관은 자금이 사회적으로 생산성 있는 곳에서 쓰일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방기해 왔다. 부동산과 기업을 위한 대출이 금융 부실의 뇌관으로 지목되고 있다. 도대체 누가 도덕적 해이를 저지르는 것인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서민경제의 후폭풍은 하반기에 더욱 커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금융시장은 복지와 접근 방식이 다르다는 의견은 한가한 주장에 불과하다. 「은행법」은 국민경제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금융 특유의 공공성을 강조하고 있다. 대환란 시기에 사회적인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은 어떤 곳인가를 고민하여 자금을 적극적으로 투입해야 한다. 사실 필자는 이 지사의 기본대출권 제안은 금융복지보다 금융시장 실패자에 대한 적극적인 재기회 부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남고자 몸부림치는 국민을 향한 비수를 멈추고 전향적인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금융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해도 모자랄 판에 한가하게 금융시장과 자본주의 원리에 어긋난다는 교과서적인 주장과 과거의 경험으로 미래의 발목을 잡아서야 되겠는가. 오현순 공공의제연구소 오름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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