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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의 도시이야기] 도시와 집합 주거-인술라

도시는 규모가 커지면 사람이 몰려들고 주택도 자연스럽게 증가하게 마련이다. 특히나 한정된 토지에 사람이 몰려들면 당연히 주거 밀도가 높아지고 주택들은 수직 확장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집합 주거의 탄생 배경이다. 역사적으로 집합 주거가 최초로 발달한 곳은 로마 제국의 도시들이었다. 천재적인 도로 건설 기술과 광대한 운송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로마는 고대에 이미 세계 각처 사람들이 몰려드는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자연히 땅과 비교하면 거주 인구가 많을 수밖에 없었으며 여기저기서 몰려든 사람들은 로마 한구석에 집을 올리기 시작했다. 도시형 집합 주거인 인술라(insula)라는 주거형태가 나타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인술라는 평균이 4층이었으나 7층 이상 올라가는 일도 있었다. 이 양식의 건물은 주로 도로를 끼고 있어 1층에는 점포가 있는 게 일반적이었고 그 위로 주거가 겹쳐졌다. 초기 인술라는 건설비용을 절약하고자 목재로 3~4층 높이로 지어졌으나 화재와 붕괴에 취약했던 탓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인술라의 하부를 벽돌로 짓고 전체의 높이도 20m 이하로 규제했다. 이후로 인술라는 더욱 튼튼해지고 안정감을 갖추게 됐다. 게다가 기원전 2세기부터 화산재의 일종인 포졸라나(pozzolana)를 이용한 콘크리트 축조법이 개발돼 저렴한 비용으로 대규모 건물을 축조할 수 있었던 로마였기에 인술라는 순식간에 도시 대부분을 덮어버렸다. 노예와 이주민을 제외하고도 100만여 인구가 살던 4세기 제정시대 로마에는 이미 4만6천여 채의 인술라가 있었다고 하니 거의 모든 시민들이 집합 주거에 살던 셈이다. 그러나 부자나 귀족은 인술라를 선호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뜨리움과 안뜰을 지닌 도무스(domus)라는 주택에서 일과 휴식을 즐겼으며 대리석벽과 유리창, 화려한 장식이 박힌 바닥은 물론 난방용 화덕과 식수용 수로를 갖춘 저택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 인술라는 중산층이나 하층 계급의 몫이었다. 또한, 도무스 주택은 내향적인 공간구성이었던데 반해, 인술라는 도로를 향해 개방된 구조였다. 그래서 마차나 수레의 소음에 그대로 노출됐으며, 평균 200여명 이상이 동시에 사는 만큼 생활 소음이나 저층부 상가에서 발생하는 소음 등으로 온종일 시끄러웠다. 게다가 유리창이 없는 창문에 생활 쓰레기를 던지는 사람들도 많았다는 기록을 보면 그리 품격 있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주거 단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로마는 인술라를 이용해 당시 도시가 직면하고 있던 이른바 홈리스(homeless) 문제를 해결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빈부 격차와 같은 사회 문제나 주거 환경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다. 로마는 현재 우리사회의 고민을 이 때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이야기] 상상하기 힘든 도시의 입지- 수상도시

이번에는 물이다. 이른바 수상도시 이야기이다. 역사적으로 물이나 바다와 연관된 도시라고 해봐야 전설 속의 아트란티스나 일본의 요나구니 혹은 쿠바의 해저 도시처럼 지진 등으로 물에 침잠된 육지의 도시가 대부분이며 처음부터 수상에 도시를 지었던 경우는 어디를 봐도 나타나고 있지 않다. 이런 면에서 보면 수상도시라는 말은 존재할 수 없으며, 기껏해야 물 위에 세운 기둥을 의지하고 서있는 몇 몇 수상가옥이나 마을 혹은 물을 가까이 접하고 있는 수변도시 정도의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사실 수상가옥이나 마을은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지역의 간비에 수상마을을 비롯하여 캄보디아의 톤레사프 수상마을, 미얀마 남부 메르귀제도 해역의 모켄족(族), 타이나 베트남의 수상생활자, 필리핀 남부 술루 해역의 사마르족, 홍콩의 단민(蛋民)의 주거, 중국의 우진()을 비롯한 몇 몇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도시라기보다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수상 가옥들은 연중 기온이 높고 강수량이 많아 기온과 습도에 대비한 생활양식이 필요한 지역에 주로 위치하고 있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가옥이나 마을 형태라 할 수 있다. 물론 수상 마을이라고 해서 다 규모가 작은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캄퐁 아에르(Kampong Ayer)라는 곳인데 이곳은 16세기 이후 브루나이 강을 따라 집단 마을을 형성한 후 1906년 브루나이 도심이 형성되기 이전까지 이 지역을 대표하는 거주 지역이었으며 오늘날에도 3만여 명의 사람들이 수상가옥에서 살아가고 있다. 수상가옥 내부에는 전기, 전화, 상수도 시설 등이 잘 구비되어 있고 학교, 병원, 시장, 경찰서, 소방서 등이 잘 갖춰져 있다. 그야말로 도시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존재하는 작은 도시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수상도시하면 우선 떠올리는 곳이 바로 베네치아이다. 롬바르디아에 거주하던 베네치아 주민이 이민족의 공격을 피해 토르첼로, 이에솔로, 말라모코 등의 모래섬으로 피난하여 임시로 거주하던 5세기 이래로 이 지역은 점차 거대한 해양국가로 발전해갔으며 종국에는 5만㎢에 달하는 석호 지역에 리알토 섬을 중심부로 하는 베네치아라는 도시가 만들어졌다. 특히 북쪽으로는 토르첼로에서부터 남쪽의 키오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은 섬들에는 고유의 정주지, 도시, 어촌, 무라노라는 장인 마을 등이 혼재되어 있어 여전히 중세의 고풍스러움을 지니고 있다. 118개의 섬들과 400여개의 다리로 연결된 베네치아는 바다에 떠있다기보다는 섬과 석호를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엄밀히 수상도시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집 밖으로 바로 바닷물이 찰랑거리고 수상버스나 수상 택시를 이용해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물 위에 도시가 만들어진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을 법 하다. 이제는 기반이 취약해진 베네치아의 석호가 서서히 침잠 중이기도 하거니와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위기에 처하자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모세 프로젝트라는 방벽 공사가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모쪼록 긴 세월 이어 온 물의 도시가 온전하게 보존되기를 바랄 뿐이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이야기] 상상하기 힘든 도시입지(2)-산 정상을 사랑한 도시들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입지의 도시 몇 가지를 더 알아보기로 하자. 전에 이야기했던 페트라라는 도시는 길고 좁은 협곡에 의해 가려진 척박하고 신비한 바위의 도시라는 점에서는 물론 만만한 입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르지 못할 정도의 산은 아니었다. 산이나 그 정상은 전쟁이 빈번하던 시기에는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수많은 도시가 선호하던 지역이기도 하였다. 고대 미케네 왕국처럼 전략적인 측면에서 산 정상 부분을 선호하는 경우는 물론 히타이트의 하투사처럼 아예 도시의 입지가 해발 고도가 높은 평지에 위치하는 경우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처럼 신전 등의 신성한 공간에 도시의 최정상을 차지하는 경우도 자주 보이고 있다. 이 도시들은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점에서 거의 요새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높은 지역이나 말도 안 되는 환경에 지어진 도시는 따로 존재한다. 우선 해발 450m의 산 정상 위에 길이 650m 넓이 300m의 성채를 지니고 있던 고대 이스라엘의 마사다를 들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정도에 알렉산더 얀네우스 왕이 시작하여 그 후 기원전 40년에 헤롯왕이 주변국의 침입에 대비하여 완공한 이 성채 도시는 그 철통같은 요새 기능에도 불구하고 정작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당하자 960명의 이스라엘인이 이곳에서 결사항전 하다가 전멸하고 마는 슬픈 역사를 지닌 곳이 되어버렸다. 다음으로는 이른바 스리랑카의 바위궁전이라 불리는 시기리아라는 곳이다. 5세기 후반 카샤파 왕이 해발 370m, 바위 높이 200m의 일명 사자바위로 불리는 장엄한 바위 요새에 건립한 이 성채도시는 평지에 우뚝 서있는 큰 바위만으로도 가히 불가사의라 할 만하다. 계단 이외에는 접근로가 없으며 지그재그로 설치된 약 1천200개의 계단을 올라야 바위 정상에 도달한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닌 이상 이 성채도시를 공격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장 압권은 마추픽추일 것이다. 깎아지른 절벽과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봉우리로 둘러싸인 우르밤바 계곡의 해발 2천280m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마추픽추는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상상 초월의 도시가 아닐 수 없다. 굳이 편한 땅을 두고 그 척박한 곳으로 옮겨간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스페인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해 산 속 깊이 달아난 잉카인들의 슬픈 역사나 입지의 신비함 혹은 태양의 신전이나 인티파타나라는 제례용 시설 등의 건축적 화려함과 현란한 기술 등을 차치하더라도 우리나라 백두산 천지만큼이나 높은 지역에 궁전이나 마을 및 계단식 밭 등의 생활 터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뭐라 딱히 할 말이 없어지게 된다. 잉카인의 기술도 기술이지만 우선은 그 폐활량에 놀라고 나아가 인간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과 도시의 끈질긴 생명력에 또 한 번 놀랄 뿐이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이야기] 상상하기 힘든 도시입지(1)-고대도시 페트라

일반적으로 도시라는 것은 먹고살기 편한 곳에 이루어지게 마련이었다. 수많은 선사시대나 고대도시들이 저마다 강을 끼고 있거나 넓은 평야를 옆에 두고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른바 젖과 꿀이 흐르는 명당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같은 입지가 많을 리는 만무하였다. 평야나 강을 끼고 있지 못한 나라나 도시들은 어쩔 수 없이 사막이나 바위산을 가릴 것 없이 둥지를 틀 수밖에 없었다. 힘이 약할수록, 약탈당할 재산이 많을수록 그들은 적이 침입하기 힘든 점점 더 깊고 높은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다보니 간혹은 어떻게 이런 곳에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들며 도시를 건설했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곳도 나타나게 된다. 그 가운데 독보적인 존재가 바로 페트라(Petra)라는 고대 도시이다. 페트라는 유목생활을 하던 나바테아인(Nabataean)이 BC 7세기 무렵 건설한 고대 대상(隊商) 도시로 이집트, 아라비아, 페니키아 등의 교차 지점에 위치하였으며 선사시대부터 사막의 대상로를 지배하여 번영을 누리면서 이른바 나바테아 문명을 꽃피우고 있었다.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였던 페트라는 중계무역으로 돈도 많았을 것이며 사람들도 부유한 생활을 했을 법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철통같은 요새가 필요했다. 군사력으로 강성한 도시가 아니라 상업적으로 부를 축적한 도시였기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붉은 사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해발 950m의 거대한 바위산 틈새에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그리스어로 바위를 뜻하는 페트라라는 도시가 완성되었다. 페트라는 시크(siq)라는 좁고 긴 바위 협곡을 지나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마치 복잡한 개미굴 입구를 연상시키는 듯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1.2㎞의 이 시크는 그야말로 페트라의 안전장치이자 그들이 살아가기 위한 물자나 수로가 통과하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이곳만 막아버리면 그 누구도 페트라를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페트라의 가장 상징적인 건물인 알 카즈네 신전은 6개의 원형 기둥이 떠받히는 2층의 화려한 헬레니즘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그 규모도 너비 30m, 높이 43m의 거대함을 자랑하고 있다. 사암이라 가능했을 터이지만 그렇다 해도 10층 이상의 건축물을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사실과 정교한 조각이나 화려한 디자인의 헬레니즘이 이 삭막한 곳에서까지 화려하게 꽃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과 문화라는 존재의 무한 잠재력을 보여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시크라는 천혜의 요새 덕에 수많은 외침을 막아왔던 페트라는 106년 막강한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의 군대에게 몰락하게 된다. 시크를 통과할 수 없었던 로마군들이 페트라의 수로를 차단하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6세기경 발생한 지진에 의해 도시 전체가 흙으로 묻혀 있다가 1812년 탐험가 부르크하르트가 재발견할 때까지 이 기상천외한 입지는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었다. 아마도 페트라는 우리에게 인간의 능력과 문화의 힘 앞에서는 도시의 입지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 도시이야기] 국제도시 ‘장안성’

도시라는 것이 커지고 발전하다 보면 이곳저곳의 문화와 산물 혹은 다양한 인종이 모이게 된다. 이른바 국제도시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꽤 많은 국제도시가 존재해왔다.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알렉산드리아나 로마제국의 로마는 물론 중세에도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등이 유럽의 국제도시의 맥을 잇고 있었고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사라센 제국의 바그다드가 이슬람 문명을 내걸고 국제도시로 번성하고 있었다. 아시아 쪽에서도 역시 국제도시는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당나라의 장안이라는 도시였다. 당나라(618~907)의 수도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도시였던 장안은 새벽 북소리에 사람들 벌써 나다니고 저녁 북소리에도 쉬지를 않네. 산 넘고 바다 건너 만국에서 몰려와 앞 다퉈 황금과 비단을 바친다라는 당나라 시인 왕정백의 장안도(長安道)의 한 구절처럼 온 종일 살아있는 도시이자 거대한 도시였다. 실제로 장안성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던 남쪽 외곽지역까지 합하면 당시 국제도시였던 비잔티움의 7배, 바그다드의 약 6.2배 규모였고 전성기의 인구가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하니 과연 대성(大城)이자 오늘날 말하는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였던 셈이다. 게다가 당나라는 한나라 무제 때 만든 실크로드를 통해 외래문명이나 문화 및 기독교 같은 종교까지 개방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장안에 거주하는 외국인도 한때는 5만 명에 이를 정도였으니 당시로서는 그 국제성과 포용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당나라는 한발 앞서갔으며 무엇이든지 포용하면서 점차 강대해져갔으며 국제화됐다. 장안성의 모든 것이 주변의 나라에 영향을 끼쳤다. 신라는 당나라의 관제와 복식을 일부 채용하기도 하였고 일본은 장안을 본 따 헤이안교(平安京) 등의 도시를 만들고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을 가져와 일본의 기모노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른바 당류(唐流)였던 셈이다. 장안은 전한시대부터 수 및 당(唐)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세월을 이어오면서 고대 중국의 명실상부한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도시였다. 특히 당나라 시기의 장안성은 수나라의 개황 2~4년(582~584)에 건설한 대흥성을 계승 발전시켜 북 9천570m, 서 8천470m의 장방형의 성벽 안에 동남 모서리 부분을 돌출시킨 형태로 지어졌으며 북 성벽에 연해 중앙부에는 궁성을 위치시키고 그 남쪽에 정부관청의 집합인 황성을 설치하였다. 그야말로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도시는 완전한 바둑판형으로 구획되었으며 성곽과 방장을 먼저 만들어 놓은 후 주민들을 그 속에 들어가 살게 하는 봉쇄식 방장제를 도입하였다. 주민들은 성 밖에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두 개나 네 개의 방문을 통해서만 오직 주간에만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 거대하고 자유분방한 도시를 관리하기 위해 얼마나 철저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 이야기] 중국 문명 최초의 도시, 은허(殷墟)

고대 중국 문명은 서양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황허라는 강을 끼고 발생했다. 황허 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신석기문화는 초기에는 허난성의 페이리강(裴李崗)문화와 허베이성(河北省)의 츠산(磁山)문화, 후기에는 BC 4000년 경의 양사오(仰韶)문화와 그로부터 발전한 룽산(龍山)문화가 그 뒤를 이었다. 이 기간 동안 황허강의 중 하류 지방에는 수많은 농경취락이 밀집됐고 그 규모도 점차 커졌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신석기라 해도 청동으로 무장한 세력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신석기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른바 왕조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이 때부터 중국도 본격적인 고대도시의 시기로 접어들게 됐다. 하(夏), 상(商), 주(周) 3대의 왕조가 중국을 지배하였다고는 하나 역사적인 실재가 증명된 최초의 국가는 상(商)나라였다. 상나라는 전기(B.C. 1600년-1300)와 도읍을 은으로 바꾼 후기(B.C. 1300-1046년)에 이르기까지 550여 년 동안 화북(華北)지역에 군림한 최초의 왕조이자 도시국가였다. 이때부터 255년 동안 8세대 12명의 왕들이 통치하며 상나라는 청동기 시대의 전성기를 누렸고 은이라는 도시는 중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은의 유적지인 은허(殷墟)에서 80여 채 이상의 궁전이나 신전 터 및 무덤 등이 발견돼 이미 고대국가로서의 면모가 확인된 바 있으며 나아가 종묘나 제왕, 왕족 등은 지상 주거에, 백성들은 수혈주거에 거주하는 등 사회적 신분에 따른 계급화도 이미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거북이 껍데기나 소나 양의 뼈에 문자나 표식을 새긴 이른바 갑골문자는 상나라가 국가의 중요한 일을 정할 때 신에게 묻고 그 결과를 기록하는 제정일치 혹은 신권정치 사회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은력이라는 달력의 존재는 당시 농경이 활발하고 체계적이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특히 상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것은 수레와 마차로 대변되는 전투 병기의 존재였다. 거마갱(車馬坑) 같은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마차와 순장된 말의 숫자는 상나라가 대규모의 병력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막강한 경제력을 지닌 국가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마차를 이용했다는 것은 기동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방증하는 셈이니 당시 상나라가 군사력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을 수준이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마차에 사용되는 수레바퀴의 발명이었다. 그러나 수레바퀴처럼 역사도 돌고 도는 것일까. 기원전 1046년경 상 왕조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이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패하면서 도시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은허(殷墟)가 된 셈이다. 말희라는 여인을 사랑한 하나라의 걸왕(桀王)의 주지육림(酒池肉林)에 철퇴를 가한 탕왕이 의기투합해 세운 상나라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달기를 총애한 주왕의 또 다른 주지육림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간 것이다. 어찌 보면 수레바퀴 같은 윤회이자 업보의 시작이었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 이야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마우솔레움과 타지마할’

도시는 살아있는 생물(生物)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처럼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그 속에 내재한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 중 하나가 사랑이다. 도시의 세월이나 숫자만큼 수많은 사랑 이이야기가 존재하지만 오늘은 죽어서까지도 사랑을 놓지 못했던 두 가지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 잠시 외도를 해보기로 한다. 우선은 마우솔레움(Mausoleum)이다. 살아 생전 자신의 영묘를 짓고 싶어 하던 마우솔로스 왕(Mausolos, B.C.377~B.C.353)이 돌연 세상을 떠나자 그의 누이 동생이자 부인이었던 아르테미시아(Artemisia Ⅱ)는 사랑하는 남편이 못 다 이룬 꿈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당대의 유명한 미술가인 사티로스와 피테오스를 불러 마우솔레움의 설계를 명하였고 건물의 사면에 들어갈 조각을 위해 스코파스, 레오카레스, 티모테오스, 브리악시스 등 당대의 명망 있는 그리스 조각가들을 초빙하였다. 면적 29m35.6m, 높이 약 50m, 총 4개 층의 건물이자 영묘가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은 크지는 않았지만 화려했다. 1층 기단 부분에는 사각형 대리석 토대가 설치되었고 그 토대 위의 네 모서리에는 말을 탄 전사들의 입상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2층에는 금백색 대리석으로 만든 36개의 이오니아식 원주가 사방으로 나란히 서 있는 영안실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 위로는 24단의 피라미드형 지붕이 솟아 있으며 마지막 층에는 4두 마차를 탄 마우솔로스 왕과 아르테미시아 왕비의 조각상이 그들이 만든 할리카르나소스의 도시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당대의 작품이었다. 당시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명명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그들의 사랑은 그만큼 화려했다. 2000년 정도의 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17세기 무굴 제국에서는 반대의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번에는 남편이었다. 무굴 제국의 황제였던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이 너무도 사랑했던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을 추모하여 아그라(Agra)라는 도시에 타지마할(Taj-Mahal)을 만들고 만 것이다. 최고급 대리석과 붉은 사암은 인도 현지에서 조달되었지만 궁전 내 외부를 장식한 보석과 준보석들은 터키, 티베트, 미얀마, 이집트, 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 수입되었다. 국가 재정에 영향을 줄 정도의 거액이 투자되었다고 하니 정치나 권력도 사랑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인가 싶기도 하다. 마우솔레움이나 타지마할 덕에 그것들이 존재하던 할리카르나소스나 아그라라는 도시는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사랑이 또 다른 도시를 만든 셈이다. 아무리 권력과 재력이 뒷받침된 사랑이었다 해도 도시에 이런 사랑 이야기 하나 정도는 있어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 이야기] 물을 다스리는 자, 고대 도시

흔히 도시라는 것은 문명(文明)의 산물이라고 한다. 문명이라는 단어가 인류가 이루어 낸 물질적, 기술적, 사회구조적인 발전을 총망라하는 단어로서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생활과는 상대적으로 발전되고 세련된 삶의 양태를 뜻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고대 도시들이 고대 문명과 함께 탄생하고 있으며 이 도시들은 기존의 원시 촌락과는 달리 발전되고 세련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물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고대 문명 자체가 강을 끼고 발생하였기 때문에 태초의 도시들에게는 물은 필수적이었다. 깨끗한 물을 마셔야했으며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어야만 먹고 살 수 있었다. 촌락이건 도시이건 모두 물이나 강을 끼고 있었다. 물이 범람하여 그들을 덮치고 생명을 위협한다 해도 그들을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물은 곧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냥 변덕스러운 강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었다. 우선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역시 가장 오래된 우물은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2000년 전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는 장방형의 우물이 누비아라는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죠셉 우물 같은 경우는 그 탄탄한 암반을 뚫고 지하 90m나 파 들어갔다고 한다. 놀라운 기술이자 물에 대한 강한 집착이 아닐 수 없다. 하긴 고대 중국에서는 깊이가 500m에 달하는 우물도 발견되었다고 하니 이것만 보아도 물에 대한 인류의 갈망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이러한 갈망은 물이 부족한 지역이나 사막지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큰 강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이기 수월했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도시와는 달리 물의 양이 부족했던 미노스의 크레타 문명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물의 저장과 분배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산악지형에 건조 지대였던 앗시리아에서는 우물과 수로를 겸한 일종의 하수도를 기원전 1240년경 고안하였다. 이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물을 지하로부터 끌어올리는 장치도 등장하였다. 이른바 양수 장치로 불리는 이 장치는 기원전 3000년경 바빌로니아 시기부터 기원하고 있으며 그 이후 활차를 이용한 두레박을 거쳐 기원전 200년경 페르시아 수차 등 연속식 양수 장치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우물이나 수로의 기술적 발전은 고대도시를 강이나 호수에 의존하는 작은 규모의 도시로만 방치해 두지 않았다. 이제 고대도시들은 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점점 더 멀리로 확산되면서 거대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정점은 역시 로마였다. 로마에서는 기원전 312년경 최초의 수로인 아피아 수로가 건설되었다. 이 공사는 14개의 수로의 총 길이가 578km에 달하는 대규모 토목공사였으며 점토나 석회석에 자갈이나 모래를 섞어 오늘날 콘크리트에 해당하는 신 재료를 사용하였다. 수로가 지나가는 산에는 터널을 뚫었으며 계곡 위에는 다리를 걸어 끊임없이 물을 실어 날았다. 적군이 물을 훔치거나 독극물을 탈 수도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도관은 땅으로부터 15m 높이에 설치하였다. 모든 토목 기술과 신 재료의 개발 및 정치적 고려 등이 총망라된 이른바 국가적 사업이었던 셈이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 이야기] 격자형도시 히포다무스의 공(功)과 과(過)

오늘날 도시가 아무리 규모가 크고 복잡하다 해도 도시를 만드는 기법은 본질적으로 고대나 그 이전 시대의 도시와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 심지어는 고대에 사용되던 방법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격자형 패턴의 도시계획이다. 역사적으로 격자형 도시계획이 나타난 것은 B.C5 세기경이었으며 밀레투스(Miletus) 출신의 히포다무스(498 B.C-408 B.C)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소아시아에 위치한 밀레투스(475 B.C)를 비롯하여 아테네 근처에 위치한 피레우스(Piraeus, 470 B.C-그림) 등에 마치 그물을 씌우듯이 격자형 도로 패턴을 채용하여 도시를 만들어갔다. 말 그대로 선 하나하나는 도로가 되었으며 도로로 인해 구획이 생기고 각 구역에는 도시가 필요로 하는 공공시설과 주거지역 및 종교지역 등이 배치되는 아주 간단하고 명쾌한 도시 만들기였다. 하긴 그가 살고 있던 B.C 5세기가 페르시아 격퇴에 따른 그리스 고전시대의 시작이었으며 이후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황금시대로 이어지면서 여기저기에 식민도시를 건설할 때였으니 어찌 보면 신속하고 관리가 용이한 도시 만들기 기법이 필요했을 법이다. 그러나 격자형 도시계획은 단지 도시라는 공간에 줄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수많은 그리스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히포다무스도 도시계획가나 건축가 같은 엔지니어 이전에 철학자이자 기상학자, 수학자, 물리학자이기도 했으며 국가의 통치이념을 고민하던 정치가였음을 생각해 보면 격자형 도시계획 패턴은 새로운 시기를 위한 이상적인 정치 패러다임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그는 격자형 도시계획을 통해 장인과 농부 및 군인으로 구성된 1만여 명의 시민이 공적 공간, 사적 공간 및 신성 공간으로 명확히 구분된 도시에 각자 역할에 충실하게 거주할 수 있는 이상적인 도시국가를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계획은 당시의 자연 순응적이고 비계획적이던 기존 도시와는 달리 기하학적 질서와 규칙성을 보장받았으며 급기야는 사회적 질서와 합리성의 표현으로서의 새로운 도시라는 칭송까지도 받게 되었다. 물론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격자형 도시계획이 출현하게 되자, 그리스 반도의 해안가나 구릉지 이곳저곳에 등고와 지형을 따라 아기자기한 집들과 공터 혹은 아고라들이 자연스럽고 자유스럽게 자리하던 당시 도시의 모습은 그 경관의 아름다움이나 삶의 여유와는 별개로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도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도시의 이상(理想)이 변하는 순간이었다. 히포다무스가 비록 도시계획의 아버지로 불리고는 있지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격자 속에서 자유와 자연스러움이 마치 그물에 걸린 물고기 마냥 허우적거리고 있는 한 꼭 그리 칭송만 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 이야기] 이집트 왕국 비운의 도시, 텔 엘 아마르나

그동안 다양한 고대도시를 언급하면서도 조금 손을 뺐던 곳이 있다. 바로 이집트의 고대도시가 그것이다. 이집트라는 곳은 그 장구한 역사와 문화는 물론 피라미드나 신전 같은 대 건조물로 익히 알려진 곳인데 반해 정작 도시라는 측면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자료나 유적이 그다지 남아있지 않은 편이다. 그렇다고 단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텔 엘 아마르나라는 도시이다. 이 도시는 아크나톤(Ahknaton) 혹은 아멘호테프 4세(재위 B.C. 1379경~B.C. 1362경)가 아몬(Amon) 신을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리던 귀족들을 처단하고 새로이 왕권을 강화하고자 아몬 신 대신 유일 태양신인 아텐(Aten)신을 내걸고 당시까지의 수도였던 테베를 떠나 새롭게 건설한 이른바 신도시였다. 애석하게도 다음 왕인 투탄카멘이 아몬 신 부흥을 이유로 즉위 2년에 되는 해 다시 테베로 수도를 옮기는 바람에 단지 17년 간 존속되다가 방치된 비운의 수도였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도시 유구나 유적의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기 때문에 오늘날 고대 이집트의 도시계획을 판명하기에 거의 유일한 도시유적이 되어있다. 카이로 상류 312㎞ 지점의 나일 강 동쪽에 위치하고 있던 이 도시는 나일 강을 따라 동서 5㎞, 남북 10㎞에 걸쳐 선형으로 건설되었다. 일종의 종교개혁을 통한 왕권 강화의 의지가 컸던 탓일까. 도시 곳곳에는 이러한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있다. 나일 강변에 위치한 대 왕궁을 기점으로 아텐 대 신전, 왕의 사저, 기록 창고, 귀족들의 대 저택 등 관청을 중심으로 한 중심부는 그 규모나 화려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으며 도시의 북쪽으로는 북 왕궁, 남쪽으로는 마루아텐이라는 남 왕궁 등이 위치하고 있어 당시 왕의 세력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아텐 대 신전을 왕궁 근처에 위치시키고 왕의 사저 바로 옆에 아텐 소 신전을 두어 왕과 아텐 신과의 일체를 꾀하고 있으며 왕궁과 왕의 사저를 고관대작의 주택들과 군대 병영이 둘러싸고 있어 그 위용과 권위를 한층 강조하고 있다. 또한 강과 나란히 남북으로 설치된 폭 100m의 왕도의 길은 이 도시의 중심도로이자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일종의 주작대로였으며 도시 외곽에서 발견된 대규모의 노동자 집합주거의 흔적도 왕궁이나 신전 및 도시를 건설하는데 얼마나 공을 들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인 도시형태는 다른 고대 도시와는 달리 성벽을 지니지 않은 자유로운 선형이지만 도시 내부 공간은 정치 종교 중심지, 주거지, 작업 공간 및 묘역 등으로 공간 분할이 지형을 따라 자연스럽고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남쪽 외곽 지역에 시장과 농경지를 별도로 설치하여 주변의 시민들과 공방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아텐 신만을 위해 살겠다던 아멘호테프 4세의 개인적인 욕심이라고만 폄하하기에는 도시 곳곳에서 느껴지는 품위와 배려가 아깝기만 하다. 다른 고대도시와는 상이한 이집트만의 색깔도 매력적이다. 종교개혁과 정치개혁을 겸한 과감한 승부수의 도시이자 비운의 도시로만 남겨두기에는 아직도 우리에게 말해 줄 것이 많은 듯하다. 텔 엘 아마르나는 그런 도시이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 이야기] 오리엔트 제국 도시들의 영광과 수난

오늘날 세계 문명이 그리스나 로마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는 있지만 그들만이 찬란하거나 강성한 문화를 지녔던 것만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당시 그들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경쟁자는 오리엔트 지역의 제국들이었다. 현재의 아나톨리아 반도 지역부터 시작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역에 걸쳐 찬란하고도 용맹한 몇몇 제국과 그 도시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히타이트,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가 그것이다. 최초의 맹주는 아나톨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기원전 14세기 경 전성기를 이루면서 남서쪽으로는 이집트, 남쪽으로는 아시리아 등과 자웅을 겨루던 히타이트 왕국이었다. 해발 약 1천m의 고원 비탈면에 건설된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 하투샤는 동서 길이 약 1.3㎞남북 길이 약 2.1㎞ 규모에 약 8㎞의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특히 왕의 문과 스핑크스 문, 사자문 등 강력하고 용맹한 왕의 권한을 상징하는 시설들은 왕국의 위용을 뽐내기에 충분하였다. 히타이트의 뒤를 이은 것은 아시리아, 정확히 말하자면 신 아시리아였다. 기원전 670년 경 히타이트의 영토와 이집트 영토의 일부를 차지한 아시리아는 오리엔트 최초로 통일제국을 이뤘다. 이들은 축성이나 도시 건설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고 있었으며 격자형 도시를 처음으로 선보이기도 하였다. 나보폴라사르 왕이 이끄는 신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재차 맹주가 되었다. 특히 이 지역의 전성기를 이끈 네부카드네짜르 2세는 외벽 길이만 11.3㎞에 달하는 격자형 고대도시 바빌론을 건설하였으며 그 내부를 철옹성의 궁전과 푸른 벽돌의 이슈타르 문, 지구라트 등으로 화려하게 채워 나갔다. 그 이후 등장한 것이 키루스 왕이 건설한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신바빌로니아만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지방 심지어는 인도의 일부 지역까지 복속시키고 가장 방대한 영토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페르시아의 전성기를 이끈 다리우스 1세는 활발한 건축 사업을 벌였으며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를 총집결시켜 페르세폴리스라는 위대한 걸작을 건설했다. 페르세폴리스는 국가의 주요한 행사를 치르는 곳이자 보물을 보관하고 왕들의 안식처로 사용되는 특수 목적 도시로 건설되었다. 페르시아의 권력과 나아가서는 오리엔트의 영광을 자랑하던 이 도시는 페르세폴리스의 보물을 약탈하고 도시를 파괴하라는 알렉산더 대왕의 한 마디에 폐허가 되고 만다(BC 330). 아마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워 버렸던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에 대한 원한이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적 보복에 아무런 죄가 없는 문화만이 피해를 본 셈이다. 무릇 승자만의 역사가 안타까울 뿐이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 이야기] 인더스 문명의 이상-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무릇 사람의 사상은 문명을 창조하고 문명은 도시를 만들어낸다. 도시는 문명과 함께 생성되고 발전하며 쇠락하거나 멸망한다. 특히나 세계 최초의 도시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도시들이 고대 문명권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할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전에 이야기했던 수메르인의 도시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인도 지역에서도 역시 찬란한 선사 혹은 고대문명의 흔적과 도시의 잔흔이 발견되고 있다. 이미 B.C7000년 ~ B.C5500년부터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 주의 카치 평원을 중심으로 메르가르(Mehrgarh) 문명이 시작되고 있었으며 흙벽돌로 주택을 짓고 농경과 가축을 키우는 등 선사시대 도시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인더스 강과 현재 파키스탄, 인도에 걸쳐있는 가가하크라강 사이에 위치하면서 B.C2600년부터 1900년경에 이르기까지 번성한 인더스 문명이 등장하면서 좀 더 성숙한 도시가 탄생하게 된다. 바로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등의 찬란한 도시 문명이 그것이다. 모헨조다로는 지금까지 전체 유적의 10% 정도밖에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기 힘들다. 그러나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모헨조다로는 파키스탄 신드 지방의 라르카나 지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동서 1천60m, 남북 1천200m의 사각형 도시로 크게 서쪽의 성곽 요새 지구와 동쪽의 시가지구로 구획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격자형태의 12개의 도시 구획 내에 2층 평지붕 형태의 주택들이 밀집되어 있었으며 약 4천명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부분의 집들은 불에 구운 벽돌로 축조하였고 주택의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방과 우물, 욕실 등이 있었으며 폐수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전체 도시는 폭 10m의 포장된 간선도로와 2~3m의 골목길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개인 소유의 우물이 700개 이상, 화장실과 도시 전체에 깔려있는 하수도 및 마을 한 가운데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대 욕장 시설이 존재하는 등 철저한 계획에 의해 건설된 이상적인 도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모헨조다로보다 나중에 건설된 것으로 보이는 하라파는 파키스탄 펀자브 지방의 몽고메리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도시 구획이나 도로, 하수도 혹은 주택 양식 및 흙벽돌을 사용하고 있는 등 많은 부분에서 모헨조다로와 유사하였다. 일반적으로 도시공간의 기하학적 구획 및 격자형 직교도로나 포장기술 등은 절대적인 통치자의 존재나 군사적 필요성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임을 생각하면 당시 강력한 통치세력이 존재하지 않던 모헨조다로에 이러한 도로 패턴이 존재한다는 점은 매우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도시민의 편의와 위생 등을 과학적으로 고려한 인간 중심의 이상적인 도시 만들기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인더스 문명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도시들도 진흙 속에 묻히고 말았다. 문명이 죽어 도시가 숨을 거두기는 했지만 과연 그들의 사상마저도 사라진 것일까. 모헨조다로나 하라파에서 보이는 도시민에 대한 애정과 평등사상 그리고 그에 따른 과학적 배려는 아마도 그리 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 이야기] 오리엔트 도시의 힘 - 수메르의 도시들

지금까지 주로 서양의 도시 이야기를 해 왔다고 해서 서양이 동양보다 문화나 역사가 뛰어나거나 가치 있다는 말이 아니며 동양에는 변변한 도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실 도시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은 그리스 반도나 이탈리아 반도도 아닌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인도 및 중국 등 이른바 오리엔트 고대문명권의 도시들이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는 그 규모나 형식이 발군이었으며 그 주인공은 수메르였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남쪽에 터를 잡고 있었던 수메르(Sumer)인들은 이미 B.C.6000년경부터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복합적인 도시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수많은 고대 도시들은 구약성서에도 수차례 등장할 만큼 인간의 역사와 그 궤적을 같이 하면서 오히려 당시의 유럽 본토를 미개 문명 지역으로 폄하시킬 정도로 찬란하고 조직적인 도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이 지역은 습지가 많고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으로부터 발생하는 홍수나 페르시아만의 조수간만 차로 인한 피해 때문에 일찍부터 간척이나 배수 및 축제(築堤) 등 씨족이나 부족들의 협동이 필요한 토목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고대 도시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초기에는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의 도시로부터 시작하여 B.C.3000년경의 우루크 문명을 거치면서 정치, 군사, 경제 및 생활이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신전공동체 겸 초기 도시국가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들 도시는 대부분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중심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었으며 종교와 정치를 공유하면서 간혹은 상업도시로서의 기능도 수행하는 등 활발한 도시 활동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도시 주거는 지구라트를 둘러싼 성역 외부에 밀집된 상태로 구운 진흙으로 만든 흙벽돌을 사용하는 등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으며 우르(Ur) 같은 도시의 경우 성벽과 격자형 도로 및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건설한 도시들은 한 발 앞 선 문화적 탁월감은 물론 도로나 도시 구성 패턴 등에 있어서도 이른바 전형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이른바 도시 만들기의 달인이었던 셈이다. 이 사이에 히타이트의 하투사(Hattusa)나 앗시리아 제국의 콜사바드 같은 도시들이 수메르 도시를 대신하긴 했지만 그것들 역시 수메르의 도시적 프레임을 완벽하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 지역에서는 점토 이외의 자원이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석재나 광석 및 귀금속 등은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원격지 무역을 통해 동쪽으로는 인더스 유역, 서쪽으로는 아나톨리아나 이집트와도 교역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수메르의 문화와 도시 만들기가 오리엔트라는 이름의 주축으로 각지에 전파되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도시라는 것의 기본적인 속성은 인간이 모여 살면서 생활하는 곳이라고 보면 후대의 도시들이 거대하고 찬란한 도시 구조를 뽐낸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수메르 인에게 원초적인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최소한 모여 사는 방법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 이야기] 중세도시의 또 다른 얼굴- 부르주아와 길드

중세 초기는 서슬 퍼런 영주의 권력과 하루하루를 땅을 파면서 살고 있었던 농노만을 생각해보아도 암울한 시기였음은 틀림없다. 굳건히 닫힌 성문 안 쪽에서 영주나 귀족이 포도주를 마시면서 식사를 할 동안 시민이나 자유민들은 물건 하나 만들기에 시간을 다 보내야했으며 농노들은 피땀을 짜내며 땅을 파야만 했으니 이 얼마나 불공평하고 암울한 사회였단 말인가. 게다가 모든 신분이 세습제였으니 한 번 농노는 영원한 농노이며 한번 귀족은 영원한 귀족이었으니 땅을 파고 있거나 물건을 만들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을 법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자신의 생을 원망하고 후회했을까. 언젠가 참담한 현실을 바꾸리라 생각에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성 밖은 이미 도시도 아니었다. 삶의 전장(戰場)이었다. 드디어 기회가 오고야 말았다. 근 200여년을 끌고 온 십자군 원정 실패와 이에 따른 교황권의 약화 등으로 중세의 질서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12세기경에 접어들면서 십자군 시절 왕성했던 동방 무역의 결과 상공업도시가 번창한다 싶더니만 급기야는 봉건영주로부터 독립하며 그 전의 모습과는 딴 판이 된 도시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인구가 중세 초기의 2배에 달하기 시작한 13세기 무렵에는 이미 몸이 자유로워진 농노들과 농민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다. 상업은 더욱 중요한 돈벌이 수단이었고 상업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었고 그 곳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곧 도시가 되었다. 교통이 편하고 돈이나 상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용이한 지역으로는 당시 잘 나가는 상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킬만한 곳은 이미 도시화가 진행된 곳(civitas)이나 아니면 예전에 봉건 영주들이 자리를 틀고 있던 굳건하고 안전한 성(城, bourg)이었다. 그러나 중세도시가 다 그렇듯이 세력과 숫자가 늘어난 상인들을 충분히 수용할 만한 도시나 성이 없었기에 이들은 특히 성 문 근처인 포르타(porta)에 모여 거주하게 되었다. 그 세력은 점점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자본과 화폐가 그곳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성 주변에서 상공업을 통해 재력을 확보하였다하여 성(bourg)이라는 어원을 지닌 부르주아(bourgeois)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태생적 귀족과는 다른 자본력으로 무장한 신흥 귀족의 탄생이었다. 상업은 당연히 산업을 자극하기 시작하였고 수많은 예술가와 장인들이 화폐가 몰려있는 도시나 포르타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솜씨 좋은 장인들은 화폐와 부르주아에 종속되는 또 다른 상업적 계층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10세기 중엽 내지 11세기 이후 상업 및 수공업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동업조합인 길드(guild)를 조직해 마스터 아래서 특정 수공업에 참여할 자격과 조건을 통제하거나 품질 정도와 가격 등을 나름대로 정하면서 독점적인 권리를 누렸던 장인들이 이제는 거대해진 상업 자본에 얽매이면서 막강한 귀족이나 신흥 부르주아의 보살핌 아래 자신이 만든 구두나 가방에 인두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고 있었다. 인두로 지진 갈색 글씨의 모양을 나타내는 브랜드(brand)라는 이름은 바로 이렇게 태어나고 있었다. 동시에 화폐의 힘 앞에 예술과 직능과 노동이 종속되면서 그렇게 근대라는 시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이야기] 중세 도시-느린 도시의 매력

최소한 르네상스 이전까지의 유럽의 중세는 그 긴 역사에 비해 획기적인 발전이 없던 관계로 가끔 암흑기나 정체기라는 단어가 그 시기를 대체하기도 한다. 그만큼 중세는 다른 시기에 비해 성장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당시의 도시 또한 마찬가지이다. 중세 초기 기독교를 정점으로 하는 수도원적 금욕 생활과 봉건 영주들 간의 수많은 전쟁과 갈등 등이 여전히 도시의 성장을 더디게 하고 있었으며 중세 중기 이후 길드(guild)라는 상공업 세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근근이 일상을 영위할 정도의 소규모 상공업도 아직은 도시 하나를 먹여 살릴 만한 힘을 얻고 있지 못하였다. 이른바 도시 발전의 동력이 미진했던 셈이다. 중세 중기 이후 상공업이 조금 활성화되면서 바스티드(bastide)라는 새로운 상업 신도시들이 간혹 등장하기도 했지만 다른 많은 중세의 도시들은 그 긴 시간 동안 여전히 예전 모습 거의 그대로였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도시 거주민이 늘어나면서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사이에 둔 고만고만한 집들이 도시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답답하고 비위생적이며 정리가 안 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세 도시들도 나름대로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베네볼로(L. Benevolo)의 말을 빌리자면, 복합성(complexity), 중심성(concentration) 및 연속성(continuity)이 그것이다. 중세 도시에는 교회와 길드 같은 상공업조합 그리고 시청사 같은 행정기관이 각자의 독립된 영역을 지닌 채 도시나 마을의 랜드마크를 이루면서 병존하는 복합성을 보이고 있었으며 이런 시설들이 자연스럽게 도시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뱀처럼 구불구불한 길로 이루어진 모든 도로와 길들은 기가 막힐 정도로 몇몇 소 광장이나 교회 앞의 파비스 같은 중심 광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중세도시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나 도로가 이루는 연속성은 일견 불편하고 비위생적으로 보이기도 하나 길을 따라 걷다보면 도시 주거나 건물의 다양한 면(面)이 계속적으로 변하면서 지루함을 덜어주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작은 일상과의 조우도 가능하게 되어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간간히 마주치는 상점에 들러 생활에 필요한 물건 하나 살 여유도 있다. 또한 저 멀리 교회 종탑이나 시청사 시계탑을 방향 삼아 걷게 되면 생각보다 길을 잃거나 헤맬 일도 없기 때문에 도시에서의 오리엔테이션도 자연스러워진다. 조금은 느리고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그만큼 눈높이에서 다양한 건물도 만나고 사람도 만나고 일상도 만나는 즐거움이 있었던 것이다. 중세도시를 꼭 암울하고 복잡한 이미지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합리와 기능을 내세운 근대 이후의 시각에서 보면 중세도시는 분명히 비합리적 도시였지만 도시미(都市美)를 추구하는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절묘할 정도로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도시로서의 매력이 발견되기도 한다. 느리다고 꼭 안 좋은 것만은 아니다. 구불구불하다고 꼭 반듯한 길로 바꿀 필요도 없다. 그만큼의 삶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이야기] 도시와 권력, 특히 위정자와의 관계

도시는 본질적으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예로부터 권력을 지닌 위정자의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하나가 도시 조직에 거대한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미노스 왕의 질투와 배신이 크노소스 궁전을 짓게 하였으며 페리클레스의 위대한 아테네라는 구호가 휘황찬란한 파르테논 신전을 정점으로 하는 아크로폴리스를 만들어냈다. 왕비의 향수병을 치유하고자 한 네브카드네짜르 2세의 애절한 사랑이 공중정원이라는 기상천외한 건조물을 도시에 세우게 하였으며 마우솔로스 왕과 아르테미시아 왕비의 애틋한 사랑이 마우솔레움이라는 아름다운 분묘를 만들어 할리카르나소스라는 도시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사르곤 2세의 신도시에 대한 열망에 따라 기존의 구불구불한 도로로 얽혀있던 도시와는 다른 격자형의 말끔한 도시가 뚝딱 새워지더니만 다리우스 황제의 대제국을 향한 의지는 그대로 페르세폴리스라는 거대한 궁정 복합체로 나타나 페르시아라는 나라의 도시 중심으로 만들어버렸다. 병들고 낡은 로마 시내를 불태워서라도 새로운 도시를 짓고 싶어 하던 네로 황제는 인공 연못 옆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황금궁전을 지어 예전의 도시 모습을 확 바꿔버렸다. 그런데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연못을 묻어 그 자리에 콜로세움을 세우고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도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 뿐인가. 저 멀리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동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도시 전체에 비잔틴 양식의 교회와 대형 건조물을 만들면서 그 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새로운 도시 풍경을 창조해내는데 성공했다. 봉건 영주가 힘을 발휘하던 중세 초기에는 굳건하고 위용스러운 성채가 도시의 존재이유였고, 특별한 위정자가 존재하지 않고 교회와 신앙생활이 전부였던 시기에는 성당 주변에 오밀조밀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오랜만에 평온한 도시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의 강력한 권한을 위임받은 절대주의 왕조는 도시 전체를 방사형 도로로 채워가면서 거대하고 으리으리한 궁전이나 정원을 강조하고 있었으며 스페인의 필립 2세는 식민지 법령까지 만들어 신개척지 여기저기에 교회와 광장 및 행정청사가 모여 있는 식민도시 건설에 열중하였다. 전통적인 권력이 없어졌다 싶던 근대 초기에는 오히려 산업이라는 존재가 득세를 하더니만 기술과 자본을 독점한 자본가들이 도시 여기저기에 공장이나 별장을 지어대면서 도시 풍경을 바꾸기 시작했다. 경제논리가 새로운 권력이 될 것이라는 징후는 이미 고층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시카고와 맨하턴 등의 도시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급기야 행정이나 정치라는 권력이 조르쥬외젠 오스만 남작으로 하여금 삽과 곡괭이를 들고 파리 시내의 낡은 지역을 부수게 하면서 엉뚱한 개선문과 샹젤리제라는 새로운 명소의 도시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무릇 권력이나 위정자들은 도시를 그냥 내버려두지는 못하는 듯싶다. 결국 도시라는 것의 운명도 위정자나 통치자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도시를 바라보는가에 달려있는 셈이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이야기] 도시의 세포분열, 네아폴리스와 메갈레 헬라스

도시라는 것이 처음부터 팽창이나 발전을 고려하여 거대하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대도시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특히 B.C. 10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그리스 지역에서 촌락집주(村落集住, synoikismos) 형태로 형성된 자그마한 도시, 즉 폴리스(polis)들은 산악 지형이 많은 그리스 반도의 지형적 특징이나 종교 및 사회적 관습의 차이 등으로 인하여 애초부터 대규모 도시 건설은 언감생심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작은 규모의 촌락이 도시가 되고 나아가 국가가 되는 특이한 도시구조를 만들어내게 된다. 게다가 거의 모든 폴리스들이 크지도 않은 지역에 방어를 위한 성벽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혹여 도시가 발전하거나 인구가 팽창한다 해도 도시 자체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원천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고대 그리스의 네아폴리스(neapolis)는 이러한 배경에서 태어나고 있다. 네아폴리스는 본토 주변이나 혹은 외지에 건설되었으며 본토의 모도시, 즉 팔레아폴리스(paleapolis)의 사회, 정치 조직은 물론 문화와 예술까지도 공유하고 있었다. 요즘 말로는 신도시일 것이며 혹은 경제적 이유로 속국을 만든 지역에도 네아폴리스를 만들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식민도시라 불러도 크게 문제 되지는 않을 것이다. B.C. 280년 경 그리스 반도에 발생한 기근이나 인구과잉 등 사회 경제적 위기와 전쟁의 위협 등으로 인하여 그리스인들은 새로운 상업 판로와 항구를 찾아 고국을 떠나 이탈리아 남부에 네아폴리스를 건설하게 되었다. 일종의 식민지 개척에 해당하는 이 같은 행위는 이탈리아 남부뿐만 아니라 당시 흑해 동부 해안이나 프랑스의 마르세유 등 본국과 멀리 떨어진 곳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식민도시 건설을 재촉하였다. 그 결과 B.C. 8세기 중엽에는 큐메, 포세이도니아, 시바리스, 타라스 등의 도시가 건설되었으며 B.C. 7세기 무렵에는 로크로이, 시리스, 메타폰티온 등의 네아폴리스가 세워졌다. 특히 B.C. 4세기 무렵에는 이 지역에 세워진 그리스의 네아폴리스의 숫자는 물론 그 경제적 세력이 강성했기 때문에 비로서 위대한 그리스 즉 메갈레 헬라스(Megale Hellas)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이 도시들은 B.C. 272년 타라스가 로마의 수중에 떨어질 때까지 비옥한 농산물과 자연적 풍광 등에 힘입어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리스인들의 네아폴리스 건설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리스 문화와 고대 그리스어의 방언, 종교 의식과 폴리스의 전통도 이탈리아에 수입되었으며 이후 이탈리아 반도에 내재하던 라틴 문명과 교류하게 되면서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일례로 이탈리아 반도에 거주하던 에투루리아인들이 칼키스와 쿠마이의 그리스 알파벳을 받아들여 이후 로마 알파벳을 거쳐 라틴 알파벳으로 진화한 사실은 이탈리아 지역에 건설된 그리스의 네아폴리스와 그들의 번영이 만들어낸 메갈레 헬라스의 힘이었다. 어찌 보면 헬레니즘의 정신은 이 때부터 싹트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스인들은 마치 종족을 보존하고자 하는 동물의 본능처럼 세포분열을 통하여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또 하나의 그리스와 도시를 만든 셈이다. 비록 메갈레 헬라스는 이제 그 자취를 감추었지만 네아폴리스(neapolis)를 어원으로 하는 나폴리(Napoli)라는 도시의 이름을 통해 여전히 그리스 도시의 정신은 이어지고 있다. 김영훈 대진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이야기] 도시와 도시 주거의 방정식, 시장(市場)

도시가 인류의 정주(定住), 특히 주거의 정착으로 인해 성립하고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도시 내에 존재하는 일상적인 주거 즉 도시주거는 도시의 처음부터 지금 혹은 그 종말까지도 도시와 함께할 수밖에 없는 파트너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오래되고 중요한 도시의 파트너가 그동안 으리으리한 궁전이나 신전, 혹은 휘황찬란한 기념비나 갖가지 호사스러운 양식을 뒤집어 쓴 귀족의 저택 등에 가려 도시라는 조직 속에서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은 이상스럽기까지 하다. 하긴 도시라는 것도 일종의 살아있는 조직체이고 그 조직을 움직이는 힘 가운데 하나가 계층이나 계급이라고 본다면, 몇몇 사람들과 단촐한 주거들로 시작된 도시의 중심부가 점차 왕궁이나 신전 등으로 채워지고 일반인들의 도시주거는 도시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스의 페리스타일(peristyle) 주택, 로마의 도무스(domus)나 빌라(villa), 중세 이탈리아의 팔라쪼(palazzo) 같은 귀족 주택들이 당대의 세력을 등에 업고 궁전이나 신전과 대등한 힘을 발휘하는 동안 일반적인 도시인들은 화려하지도 않은 자그마한 주택에서 일상을 보냈다. 더러는 비싼 땅값을 견디지 못해 비좁고 혼탁한 도시의 한 구석에서 최소한의 도시생활을 영위했다. 파라오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근처에 지어진 주거들은 최소한의 공간만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대역사를 위해 조용히 희생했다. 또 대저택을 소유하기 힘들었던 소시민들은 로마의 복작거리는 거리 한 켠에 인슐라(insula)를 짓고 수십세대가 중정 하나를 공유하면서 아등바등 살았다. 기독교적 교리가 사회를 지배하던 중세에는 수도원 한 쪽 구석에서 밭을 갈거나 가축을 키우면서 살았고, 상업 발전이 가져다 준 도시 성장에 순응하고자 후기 중세 도시민들은 길을 향해 좁은 얼굴을 삐죽이 내민 형태의 세장형(細長型) 주거에서 일도 하고 생활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보냈다. 그렇다고 도시주거가 매번 보조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길이나 도로를 따라 도시 주거가 자연스럽게 들어서고 그 길을 따라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여기저기 생필품과 공산품을 파는 가게들이 들어서게 된다. 이른바 시장(市場)이라는 것이다. 로마시대 집합주거의 1층 부분은 여지없이 회랑을 설치하여 상점이나 가게로 이용됐고, 이슬람 도시에서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형성된 도시주거 사이를 비집고 원시적인 시장인 바자(bazzar)가 등장했다. 중국의 사합원이나 일본의 신덴즈꾸리(寢殿造) 등의 무사계급 주택 혹은 우리나라의 반가 주택 등이 마을이나 도시의 중심을 이루며 유교적 질서와 경제적 부를 동시에 탐닉할 때도 일반인들은 성(城)이나 널찍한 공터 주변에 하나 둘 둥지를 틀고 나가야(長屋) 같은 특이한 형태의 도시주거 양식을 선보이면서 사람들이 바글바글 대는 시장이나 장터를 형성했다. 비로소 정치의 중심인 도(都)와 경제나 생활의 중심인 시(市)가 합체되는 순간이었다. 으리으리한 규모나 화려한 디자인이 없어도 도시 주거는 일상적인 우리들의 생활 그 자체를 담은 채 도시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활기를 보장하는 어엿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이야기] 왕이라는 권력이 만든 계획도시 코르사바드

도시라는 것이 몇몇 마을이 모여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고대에 획기적인 도시 하나가 탄생하게 된다. 이른바 계획도시의 시초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코르사바드(Khorsabad, BC. 706)가 그것이다. 19세기 중엽 프랑스 V. 플라스P. 보타가 최초로 발굴한 코르사바드는 현재의 이라크 북부, 지금의 모술 맞은편 연안 니네베 북동쪽 약 20㎞ 지점에 존재했던 도시로, 이 도시를 건설한 앗시리아 제국의 사르곤 2세(BC 721-BC 705)의 성채가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라 하여 두르 사르킨(Dur-Sharrukin)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도시는 사르곤 2세 사후 수도를 니네베로 옮기기 전까지 당시 앗시리아의 수도였다. 코르사바드의 도시계획적 특징은 그 동안의 여타 도시와는 달리 자연발생적인 도시가 아니라 사르곤 2세의 권력에 대한 의지와 의도를 철저하게 반영한 계획도시라는 점에 있다. BC 720년경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이 도시는 난공불락의 성채가 굳건한 시타델(citadel) 속에 몸을 숨긴 채 이를 다시 사방 1천700m의 성벽으로 감싸고 있으며 궁전 부분을 제외한 각 변마다 2개씩 총 7개의 출입구를 설치하고 있다. 도시의 중심은 기단 위에 건조된 왕궁신전 및 지구라트의 복합체로 이뤄졌으며 특히 왕궁은 그 위엄이라도 자랑하듯이 날개 달린 인면수신상(人面獸身像)이 수호하고 있다. 3개소의 중정을 중심으로 700여개의 장방형 실들로 구성된 궁전은 그 크기도 어마어마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석재로 되어있는 내벽의 외장은 무시무시하고 용맹한 용사들의 전투나 학살 장면이 새겨져 있었으며 요철 모양의 첨탑이 그 누구의 범접도 허용하지 않는 듯 철저한 요새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신전 또한 왕궁 한 구석에 얌전한 모습으로 위치하고 있는데 이 또한 앗시리아 제국의 국왕의 힘이 얼마나 강대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궁전 입구로부터 쭉 뻗어나간 도로와 그것과 직교하는 도로는 마차가 지나다닐 정도로 곧고 넓어 이 역시 군사 제국의 강성한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었다. 하긴 앗시리아가 어떤 나라인가. B.C. 12세기 중반부터 B.C. 7세기 무렵까지 현재의 아랍 지역 대부분을 통치하던 강대국에 제국이라 불릴 정도의 막강한 힘과 정치세력으로 무장한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 정도의 권력이면 이 정도의 도시 정도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력과 힘이 세면 또 그만큼의 반발도 있을 터. 창과 검으로 적들을 쳐부수면서 막강 화력을 자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지배를 받는 나라들은 항상 그들에게 대항하였으며 그 결과 제국의 역사는 끊임없는 반란으로 얼룩졌으니 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그리 마음은 편한 상태는 아니었을 법이다. 그래서일까. 사르곤 2세의 성채는 도시 저 끝자락 천혜의 요새에 철옹성처럼 몸을 숨기고 도시를 호령하고 있다. 지켜져야 할 최후의 보루에 권력이 버티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최초의 계획도시는 절대 권력의 과시와 미련에 기대어 왕이라는 권력을 뽐내는 거만한 의도로 시작되고 있었다. 사르곤 2세는 앞으로 나타날 절대 권력자들의 거만함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영훈의 도시이야기] 차탈 휘이크 ‘필요한 최소한’의 도시

1958년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의 코니카 근처에서 제임스 메라트(James Melaart)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을 발굴하기 시작하면서 차탈 휘이크(Catal Huyuk)는 인류가 만든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기원전 6천500년 정도에 건설되어 무슨 이유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원전 5천년 정도에 그 모습을 감춘 이 도시는 인구 약 6천명 정도가 함께 거주한 대규모 집락지이자 도시였다. 신석기 시대임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한 인구이자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삼각지 지역에 둥지를 틀고 비옥한 토지 위에 곡물과 견과류를 비롯한 농사를 지었다. 벌판에는 가축까지 키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곳에는 견고한 성벽도 없었고 그곳을 지키는 군사도 없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직사각형 주택을 짓고 살았으며 한 주택에서 약 100년 정도 사용한 후에 그것을 메우거나 부숴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주택을 건설하는 식으로 긴 세월을 지내왔다. 같이 살던 가족이 죽기라도 하면 그들이 살던 집 바닥을 파고 사랑하는 사람을 순장하였다. 가족이라는 것이 죽어서도 끊을 수 없는 인연이었던 셈이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주택 사이의 간격은 점점 좁아지고 급기야는 이웃집과 벽을 맞대고 있는 모양으로 변해갔다. 집과 집에 오밀조밀 모이다 보니 길이나 도로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도 성벽도 없었던 곳이다 보니 포악한 짐승이나 적군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원초적인 수비 대형이었을지도 모른다. 특별하게 큰 주택이나 건물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아직은 살벌한 계급사회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이며 원시 신앙을 섬기던 사원 또한 일반 주택과 그 모양이나 크기가 비슷했으니 어마어마한 권력을 지닌 제사장 같은 존재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모두들 고만고만한 크기의 집에 모여 살면서 지붕 위로 올라가 하루를 즐기고 또 고만고만한 사원에 모여 사냥에서 잡은 짐승을 제물 삼아 무병(無病)과 안위(安危)를 빌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차탈 휘이크에는 먹고 살고 사랑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이 있었다. 서로에 대한 질투와 욕심도 없이 햇빛 따사한 옥상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나 하고 지낼 정도로 여유도 있었다. 서로 살 맞대가면서 사랑해야할 자연인과 가족이 있었다. 다른 곳을 침탈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자기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와 그곳의 자연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버내큘러(vernacular)란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도 필요 없었다. 한 웅큼 움켜쥐고도 욕심이 끝이 없는 필요한 최대한(necessary maximum)의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저 하루하루 넉넉히 먹고 살고 뜻이 맞는 사람끼리 모여 사는 일에만 충실한 이 도시는 다시금 필요한 최소한(necessary minimum)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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