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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진 칼럼] A.I.와 인간애

얼마 전 온 나라를 경악케 하였던 고유정 사건이 있었다. 그녀는 인터넷을 통해 졸피뎀, 수갑, 남편의 뼈무게 등을 검색했다고 한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이의 엄마였고, 딸이기도 했으며, 부인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녀가 잔인하기 짝이 없는 범죄를 계획하며, 그 실행을 위하여 인터넷에서 정보를 캔 것이다. 그녀가 사람을 죽이거나, 사체를 처리하는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전문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전문가들조차도 알기 어려운 고급정보나 세부정보를, 자판기 몇 글자를 두들기는 것으로 그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요즘의 세상이다. 예컨대 유명밴드의 어제까지 음반판매 현황이 어떠한지, 부산발 막차 KTX 좌석에 몇 개의 빈좌석이 남아있는지, 어느 신문의 어느 날짜 사회면에 어떤 내용이 실려 있었는지 등 소소한 일상의 정보도 앉은 자리에서 수분 만에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에는 제한이 없다. 정보는 무색투명이다.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정보는 아름다운 일을 위하여 쓰일 수도 있지만, 고유정과 같이 무서운 일을 만드는 계기를 주기도 한다. 인터넷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더 위험한 사회를 예비한다. 기술문명이 극에 달한 이즈음,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민과 감성, 그리고 윤리, 도덕을 생각하게 하는 이유이다. 스웨덴의 작가 시몬 스톨렌하그의 SF 아트북 일렉트릭 스테이트에는 뉴로캐스터라는 기기가 등장한다. 뉴로캐스터는 애초 드론을 조종하는 원격제어장치였는데, 전쟁 후 사람들에게 상품으로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뉴로캐스터를 머리에 장착하고, 이 기기가 제공하는 가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중독 증세에까지 이르게 되고, 사람들은 먹지도 않고 오로지 가상세계의 패닉상태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우리가 맞고 있는 세상이 기술문명의 발달을 통하여 인간의 편리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이 거꾸로 인간을 구속하거나 속박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지금 도래하고 있는 소위 A.I.의 세계가, 과연 인간이 추구하는 장밋빛 미래일까, 아니면 오히려 인간멸망에 이르는 디스토피아의 서막일까. 이에 대한 답을 쉽게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술문명의 고도화는 현재도 시시각각 이루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며, 머지않아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계와 인간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고, 어떠한 윤리와 규준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1, 2차 산업혁명이 전문가의 시대였다면, 3, 4차 산업혁명은 정보와 융합, 네트워크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전자의 시대에 전문지식을 보유한 전문가가 중시되었다면, 후자의 시대에는 전문분야들을 통섭하고, 사람들을 연결하여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는 종합예술가와 같은 능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제 지식과 정보는 더 이상 누군가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지식과 정보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운용을 위한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까. 가장 존중되어야 할 덕목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본성에 대한 존중. 인간애야말로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대에 모두가 함께 공유해야 하는 기본 덕목일 수 있지 않을까. 고유정 사건은 비인간적인 현대 물질문명의 극단을 보여준다. 허탈하고 무섭다. 그러나 그럴수록 인간본성을 되찾음으로써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갈 때, 비로소 우리가 꿈꾸던 A.I.의 세계가 도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재진 변호사

[이재진 칼럼] 아베 정부의 규제, 철회를 촉구한다

일본 아베 총리는 지난 7월4일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제품 등과 관련한 수출 규제조치를 발동했다. 갑작스런 조치에 업계와 정치권은 물론 나라 전체가 요동치고 있다. 아베의 속내에 국내외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나라 전체에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규제 이유와 관련하여 일본 정부는 공식입장을 통해 수출관리의 필요성과 수출관련한 부적절한 사안 발생 등의 사정을 이유로 들고 있으나,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여전히 함구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우리나라 대법원의 강제징용배상판결에 대한 경제보복 성격으로 이해되고 있기도 하나, 그 속내는 그리 간단치는 않아 보인다. 상황적으로는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 문제, 위안부협정파기 문제 등 최근 한국과 일본을 둘러싼 여러 현안문제들도 관련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남북한관계의 기류변화가 예고되고 있는 가운데, 동북아지역에서 일본의 지위와 역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곧 치러지는 일본 참의원선거에서의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수순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인 듯하다. 규제조치가 발동된 7월4일은 일본 참의원 선거 공고일이었다. 선거는 7월 21일 치러진다. 이번에 선거를 앞두고 있는 참의원은 임기가 6년이나, 3년마다 절반씩 선거를 통해 교체된다. 이번 선거에서는, 현재의석수 248석 가운데 절반인 124석이 대상이 된다. 한편 상원의 성격을 갖고 있는 중의원에 대해서는 총리에게 의회해산권한이 주어진다. 아베 총리는 2017년 국난극복을 이유로 중의원을 해산시켰으며, 그후 이어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바 있다. 한편 아베가 집요하게 의도하고 있는 구도는, 개헌을 통해 자위대의 존재를 인정받고, 일본을 교전가능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일본국 헌법 제9조 제1항은 평화를 선언하고, 전쟁과 무력의 행사는 이를 포기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고, 제9조 제2항은 군대를 보유하지 아니하며 국가의 교전권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은 지금까지 해석상 자국의 방위를 위하여 자위대를 운영해 왔고, 그 힘을 키워왔다. 만약 헌법을 개정한다면 독자적인 군대를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해외파병과 교전가능국으로서 지위를 갖게 된다. 개헌을 위해서는 참의원과 중의원의 각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통하여 개헌안 발의가 이루어져야 하고, 발의가 이루어지면 국민투표를 하게 된다. 아베 총리는 2020년 개헌 목표 달성이라는 기조 아래, 2016년 참의원선거와 2017년 중의원선거의 승리에 이어, 올해 참의원 승리를 이끌고, 그 여세를 몰아 중의원을 해산한 후, 다시 개헌정국으로 대승을 얻어냄으로써 국민투표까지 이어간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에 대해 선거에서 아베 정부가 승리할 것이 예상되긴 하나, 다만 과연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를 확보하거나 3분의 2 이상의 개헌찬성표를 얻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또한 일본 국민들 대부분이 개헌까지 요구하지는 않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아베의 계산법에 따른다면 이 상황에서 한국에 대한 규제조치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수순이다. 일본의 조치에 대해 한국내 반일감정이 드세지면, 그만큼 일본 내 우익이 집결하게 될 것이고, 이는 아베가 원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반대로 만약 우리나라가 유화책으로 일본에 굽힌다면, 아베의 압승과 한국의 굴욕으로 몰아감으로써 이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하여 타국의 경제를 농단하는 것은 용납되기 어려운 만행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군국주의를 표방하는 개헌을 염두에 둔 수순이라면, 이는 일국을 넘어서 국제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으며 국제평화를 저해하는 반동의 움직임이다. 그의 만행을 규탄한다. 우리는 국채보상운동 시절 머슴이 술과 담배를 끊고, 하층민이 끼니를 모았으며, 아이들까지도 모금운동에 참여하였다. IMF 시절에는 결혼반지, 돌반지까지 팔아서 국난을 극복했다. 일본의 규제가 거세질수록 한반도는 더 거세게 단결할 것이다. 순리를 거스르는 폭압규제를 하루빨리 철회하기를 촉구한다. 이재진 변호사

[이재진 칼럼] 연대보증

매우 오래 전 선임했던 사건 가운데, 시골 할아버지의 연대보증 관련 사건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사연은 이러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K가 이주해 왔다. K는 시골의 궂은일들을 도와주기도 하였고, 할아버지와 같은 토착민들에게도 매우 잘 대했다. 시간이 갈수록 할아버지는 K를 신뢰하게 되었다. 한편 K는 조그맣게 부동산 개발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할아버지에게 조금은 어려운 부탁을 하게 되었다. K의 이야기인즉, 자신의 개발사업 한 곳에 돈이 묶여있어서 그러하니, 사업을 하는데 할아버지가 연대보증 하나만 서달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K를 매우 신뢰하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흔쾌히 보증을 서주었다. 그러나 대출채무의 만기가 되었는데도 K는 이를 변제하지 않았고, 급기야 할아버지에게 연대보증책임을 지게 하는 민사소송이 제기되었다. 원고는 금융기관이었고, 피고는 위 할아버지였다. 내가 맡은 것은 피고 소송대리였다. 법정에서 준비된 절차를 마치고 변론을 종결함에 앞서, 재판장에게 최후변론의 기회를 달라고 하였다. 실정법을 떠나서 연대보증의 문제점에 대해서 주장했다. 연대보증인은 한 푼의 돈도 만져보지 못한 사람이고, 이러한 연대보증인을 이용하여 대출금의 혜택을 누린 사람은 채무자인데, 그 모든 책임을 연대보증인에게 지우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또 채무자인 K가 타인의 이름을 빌려서 부동산개발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로부터 대출금을 회수할 방법은 왜 강구되지 않는지도. 나아가 이 사건에서 할아버지는 시골 노인으로서 세상물정을 모른 채 연대보증책임만 지게 된 억울한 사정이 있음을 주장했다. 재판장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원고에게 다른 방법이 없는지 물었다. 그러나 원고는 금융기관이어서, 예외를 인정하는 선례를 남길 수 없다는 것이었고, 법에 따라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판결은 패소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 할아버지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리가 주장했던 대로, 원고는 K의 개발사업 건을 조사하였고, 개발현장의 재산을 찾아서 그곳에 집행하여 대출금을 회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할아버지를 상대로 해서는 사실상 판결의 집행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연대보증은 위 할아버지의 경우와 같이 책임만 존재하는 모순된 구조를 갖고 있다. 정부는 그간 은행 및 제2금융권을 중심으로 연대보증 폐지를 확대해왔고, 올해 1월 1일부터는 대부업체의 연대보증도 폐지되었다. 아직도 개인간의 연대보증 약정은 가능하고, 법인대출시 대표의 연대보증을 요구하는 것까지 법이 제한하고 있지는 않지만, 개인대출의 경우에는 이제 완전히 연대보증이 폐지된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 종의 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상상력과 총량의 증대에 관해 설명한 바 있다.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자본과 기술, 투자와 기업이 분리될 수 있었던 데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상상력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총량의 증대는, 발전하리라는 미래의 전망에 기인한다. 그렇지 않다면 미래에 투자할 수 없고, 산업과 기술은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연대보증은 이에 역행한다. 미래의 전망은, 투자 가치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연대보증인의 재산적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연대보증은 채무자의 무책임과 연대보증인의 추락으로 사회병폐적 악순환을 남기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금융기관은 부를 얻게 되지만, 이것은 발전적 가치 창출에 기인한 수익이 아니다. 기업의 상상력이 투자를 유치하고, 이로써 전체 총량이 증대되는 결과를 냄으로써, 기업과, 투자자, 이용자 모두의 편익이 증대되는 이상적인 구조가 도래하길 꿈꾸면서, 부디 정부가 추진하는 연대보증 폐지의 노력이, 건강한 투자와 발전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이재진 변호사

[이재진 칼럼] 밈의 진화 ‘UBD’

지난 15일 개봉한 악인전은, 개봉 하루만인 16일 1 UBD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그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고 있던 어벤져스 4를 누르고 1위로 등극했다. 여기서 1 UBD는 17만을 의미한다. UBD는 네티즌 사이에서 만들어진 인터넷 상의 새로운 단위이다. 이것은 자전차왕 엄복동의 관객수가 17만이었던 데서 비롯된다. 자전차왕 엄복동은 관객들의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관객수가 17만명에 그치게 되자, 네티즌들은 엄복동의 영어 이니셜을 따서 UBD라는 단위를 만들어냈고, 이는 17만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런데 UBD는 의외로 유용하게 사용되면서, 최근 인터넷에서는 핫한 관심어가 되었다. 우리나라 인구는 약 300 UBD(≒5천만17만)가 되고, 국회의원 숫자는 300명이어서, 1UBD의 인구를 국회의원 1명이 대표하는 셈이 된다. 17만을 UBD로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인터넷 상에서 더 찾아보았다. 환율상 1천위안은 1UBD 원이고, 제천시의 2020년 인구 목표가 1UBD 명이며, 지난 4월 취업자 증가폭이 1UBD 명에 그쳤다. 지난 3월 초경 퇴직 후에도 직장 의료보험 가입자로 남아있는 사람의 숫자가 1UBD 명이었고, 얼마 전 BMW 리콜 대상 차량대수가 1UBD 대였으며, 암호화폐 대시는 5월16일 기준 1UBD 원 금액에 거래되었다. 물론 UBD 단위는 그 정확도나 필요성 면에 비추어 볼 때, 실무에서 실제 단위로 활용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새로운 유행을 만들고 이를 빠르게 전수해가는 일종의 인터넷 밈 현상에 대한 진화가능성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원래 밈(meme)은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낸 신조어로서, 그의 걸작 이기적 유전자에서 소개된 용어이다. 여기서 밈(meme)은 복제(Mimesis)와 유전자(Gene)의 합성어로서, 생물학적인 유전 외에, 사상, 종교, 관습적인 것도 문화적으로 유전된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을 담아서 새롭게 표현된 개념이었다. 이러한 문화적 유전 현상인 밈은, 인터넷에서 영상이나 유행어, 짤 등이 유행하거나 회자되면, 네티즌 사이에서 급속도로 전파되는 현상을 표현하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UBD 단위는 이러한 의미에서 일종의 밈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기존의 인터넷 밈은 주로 일상을 벗어나는 예외성의 재미 또는 특별한 이해를 통한 신선한 유머 등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현대인들에게 비정규적인 배설의 통로를 제공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UBD 단위는 혹하는 재미나 한 번 웃고 넘기는 유머 차원을 넘어서서, 밈의 새로운 정착지를 보여주는 듯하여, 매우 신선한 느낌이다. 17만이라는 개념은 단위로서는 무용한 숫자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단위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발상이다. 처음에는 재미로 사용하는 단위 개념에서, 단위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개념은 의미로 발전하여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강화해 준다. 국민의 숫자가 UBD로 나누니 국회의원 숫자가 나온다는 것 등이 그러하다. 나아가 밈이 이제 웃고 즐기는 유행의 개념을 넘어서, 실제 사용하고 활용되는 현실적인 개념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 또한 고무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밈은 마치 초원을 떠돌면서 어느 곳에서도 그 정착지를 발견하기도 하고, 또 언제라도 또 새로운 모습을 찾아가는 유목민을 닮았다. 늘 신선한 감시의 끈을 놓치지 않는 자유로운 탐구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현상 속에서 새로운 개념과 의미를 만들어가는 살아있는 밈의 발전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밈의 또다른 모습은 어떤 것일지 기다려진다. 이재진 변호사

[이재진 칼럼] 저 술 끊었어요

음주운전의 기준이 되는 혈중알콜농도의 수치는 종래 0.05%였다. 그러나 도로교통법의 개정에 따라, 올해 6월25일부터 이제 혈중알콜농도 0.03% 이상이면 음주운전 단속 대상이 된다. 혈중알콜농도 0.03%면 음주량으로는 어느 정도일까. 소주나 와인으로는 각 1잔 정도이고, 맥주로는 1캔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과신하면 안된다. 알콜 분해 능력은 사람마다 다르고, 몸의 컨디션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운전을 하고자 한다면,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함이 철칙일 것이다. 음주운전으로 적발되면, 너무도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야 하고, 벌금을 납부해야 하며, 운전면허도 정지 또는 취소될 것이다. 나아가 수회 음주운전이 누적되는 경우, 징역형을 받을 가능성이 있고, 그로 인하여 본인뿐만 아니라, 직장이나 가정에 불러올 손실 또한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런데도 음주운전은 줄어들지 않았고, 또 다시 당국은 강한 처벌로 음주운전 계도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우리에게 음주라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1980년대 중반 이후 대학생활을 하였던 필자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당시 우리들에게 술은 유일한 놀이문화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자동차나 게임, 해외연수 등을 알지 못했던 당시에, 젊은 친구들이 모여서 할 수 있는 것은 술 마시면서 흥겹게 떠들어대는 것이 가장 큰 낙이었고, 한탄이었고, 즐거움이었던 것 같다. 나이가 30대에서 40대로, 다시 50대로 접어들면서, 술은 주변 지인들과 허허실실 어울릴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해주었던 것 같고, 나를 위로해주는 변하지 않는 오랜 친구같기도 했다. 술예찬론을 잠깐 언급한 시기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술을 약 6개월 전에 끊었다. 물론 술을 끊었다고 해서, 입에 한 잔도 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끔 와인을 한 잔 하기도 하고, 회식이나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몇 잔 거들기도 한다. 그러나 거의 매일 어느 자리에서나 술을 마셨던 반평생의 음주문화는 이제 끊었다. 지나치게 고착화된 음주습관을 고쳐보고자 하는 것이 큰 이유였다. 술을 끊고 나니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던 우리 문화도 보이기 시작했다. 과거엔 술을 마시면서 취기에 지인과의 친함을 과시하곤 했다. 새벽까지 술로 함께 애로를 이야기하고, 그것이 친한 사람 간의 필요한 스킨십인 것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또 술을 밤새 얼마나 마셨는지, 몇 차수의 술자리를 가졌는지, 새벽 몇 시까지 마셨는지 등의 대화가 남자들 사이에선 자랑거리같이 들리기도 하였다. 술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친근감의 페이소스를 작동시킨다. 그러나 술이 추억을 남길 수는 있지만, 현실을 감당하지는 못한다. 또 누군가는 술에 취하여 실수를 하고, 타인과 자신에게 심한 고통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축하할 날, 파티 직후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치고, 수년간 감옥생활을 했던 사람도 있었다. 술로 인해 사람들간에 수많은 오해가 생겼고, 그 때문에, 헤어지고 이혼하고, 슬퍼하고 우울증을 겪기도 했을 것이다. 술은 자유로움의 대명사로 이해되기도 했으나, 사실 술은, 우리에게 또 다른 구속이었는지도 모른다. 술을 마셔야 한다는 제약이, 소통의 많은 가능성들을 막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술문화도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술을 매개하지 않고도 소통하고 즐기고 위로받을 수 있는 새로운 문화들이 우리에겐 필요한지도 모른다. 며칠 전 한 모임에서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는데, 우연히 술을 마시지 않는 분위기였다. 건배를 하기가 머쓱했다. 결국 모두 사이다 한 잔 하시죠라는 말과 함께 사이다로 건배를 하였다. 웃음이 나지만, 하나도 이상하지는 않다. 최근 저녁 모임에서, 2차 술자리가 눈에 띠게 줄어들었다. 2차를 커피숍에서 갖는 경우도 흔해졌다. 이제 필자도 모임 자리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저 술 끊었어요라고 말이다. 과거 지인을 만날 때 일상의 인사로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언제 소주 한 잔 해라고. 이제는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언제 차나 한 잔 하자. 이재진 변호사

[이재진 칼럼] 당신은 로봇인가요

이재진 어린 시절, 보물 목록에 있던 탁구공이 깨어졌을 때, 깨진 탁구공을 마당에 묻어준 적이 있다. 탁구공은 물론 평범한 탁구공이었다. 그냥 물건에 불과한 것이다. 아이의 우스개 행동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일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닐 수 있다. 보스턴 다이내믹스에서 제작한 빅도그라는 로봇에 대한 영상이 유튜브를 달군 일이 있었다. 2014년 즈음 제작사에서는, 새 버전의 빅도그가 나올 때마다, 홍보영상을 제작한다. 내용은, 걸어가는 빅도그를 상대로 사람들이 발로 밀어서 넘어뜨리려고 시도하고, 막대기로 밀어서 진행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빅도그는 이내 균형을 되찾고 유유히 걸어가는 영상이었다. 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균형감을 되찾는 로봇의 놀라운 기능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제작된 것이었다. 홍보팀은 제작사의 첨단 기술에 깜짝 놀라는 네티즌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기대했다. 그러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사람들은, 넘어지려다가 간신히 일어나는 로봇을 보면서, 안쓰럽고 불쌍한 감정을 느꼈고, 그러한 잔인한 행위를, 홍보의 매개로 삼은 제작사에 대하여 불만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이상한 일이다. 빅도그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내장된 쇳덩어리에 불과하다. 컴퓨터를 부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슬퍼하거나 괴로워한다는 것이 상상이 가는가. 게다가 빅도그는 사람의 모습과 유사하거나,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로봇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느끼는 이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핸슨 로보틱스에서 제작된 소피아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피부도 인간과 비슷하며, 완벽하지는 않으나 몇 가지 얼굴표정까지도 지어보일 수 있다. 마치 사람인 양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고, 미래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약 20년 정도 후면 이러한 인공지능이 일반화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한다. 스파이크 존스 감독의 그녀에서는, 이혼절차를 밟으며, 외로움으로 힘들어하던 남자주인공이, 컴퓨터 인공지능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사만다는 휴대폰 상에서 목소리로만 존재하며 실체가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에서는, 로봇 아들을 입양한 후의 가족관계를 그린다. 로봇 아들을 입양한 후, 진짜 아들이 돌아오자, 로봇 아들 데이비드를 버리게 되는데, 이때 데이비드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읊는다. 진짜가 아니라서 미안해요 엄마, 제발 날 버리지 마요. 엄마가 허락한다면 진짜가 될게요아이의 대사는, 아이가 사람인지, 로봇인지 여부를 불문하고, 우리들의 심금을 울린다. 인터넷 상에서 회원가입을 할 때, 우리는 당신은 로봇인가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인간인지, 로봇인지 표기를 해야 한다. 이제 인간이 로봇과 함께 살아가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로봇과 공감해야 하는 세상. 인류의 사회적 소통을 넘어서, 이제 로못과도 사회관계를 공유해야 하는 세상이 오고 있다. 서울대 장대익 교수는 이러한 우리의 시기를 울트라소셜이라 표현했다. 그는 울트라소셜이 호모 사피엔스의 성공스토리이자 묵시록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제 아이들이 로봇에 의하여 교육받고, 노인들이 A.I.에 의하여 도움을 받으며, 모든 업무에서 인공지능과 함께 일을 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그들과 웃고, 울며, 같이 공감하고, 때로는 싸우고, 끌어안고, 눈물흘리는 날이 오게 되는 것일까.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반려동물로써 가족의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로봇도 반려동물처럼 우리와 가족으로 마음을 나누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이제 이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될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이재진변호사

[이재진 칼럼] 생활 속의 미술 문화

가족들과 의미 있는 휴일, 미술관을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한적한 전시관을 둘러보며 휴식과 배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좋은 휴일이 될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2008년 미술작품을 전시하던 화랑은 183개였다. 불과 10년 후인 현재는 그 두 배가 넘는 수의 화랑이 운영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미술문화가 대중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하지만 아직 서민들에게는 작품을 구매하고 집에 거는 것은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린다. 미술이라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어느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판단하기 어려우며, 가격이 비쌀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물론 전시를 관람하러 가면 미술이란 것이 상당히 어렵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작가의 예술사조나 그의 배경으로 인한 작품성 등을 장대하게 쓴 글들은 읽기 난해할 뿐만 아니라 도저히 작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는 미술이란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뿐, 이것이 어렵다고 해서 미술에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클래식의 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블루스나 팝의 기원과 역사를 알지 못해도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음악을 듣다보면 관심이 생겨 그 역사를 찾아보게 되듯, 미술도 처음엔 자신의 눈과 생각으로 관람해도 상관없다.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생기게 되면, 자연스럽게 더 깊은 이야기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졌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인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작품이 비싼 금액으로 거래되기 보단, 평범한 사람들의 식탁에 걸리기를 희망했다. 물론 고흐의 그림은 현존하는 가장 비싼 그림들 중 하나이지만, 고흐의 그림들은 그의 바람과 같이 감상할 때 편하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미술 작품은 더 이상 부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 섞여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을 때야말로 비로소 자기 모습을 찾고 빛을 발하게 된다.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에 오게 된 스페인 출신, 열아홉 살의 청년인 파블로 피카소는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당시 가난을 등에 지고 살았다. 그의 자존심은 그의 그림을 싸게 팔려하지 않았지만 그의 굶주린 배는 자존심을 내려두게 만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명세를 탔으며 그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그림 값은 마치 그의 가난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폭등하게 된다. 마음에 든 그림이 생겼다면 평소에 관람을 하듯 그저 지나가지 말고 한 번쯤 가격을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 그림의 작가가 청년 시절의 피카소일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수원지방법원에서는 미술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휴게 공간을 마련해 민원인들이 쉴 수 있는 자리를 조성하면서, 법정 안에 그림들을 걸어두고 있다. 법정은 보통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항상 흐르는 곳이다. 특히 형사법정은 사람의 인신에 관한 판결을 내리고, 범죄에 대한 처단을 하는 곳이기에 더욱이 싸늘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다. 희고 휑한 벽은 무거운 분위기를 한 층 더해준다. 그런데 그 차가운 벽면에 걸린 몇 점의 그림들은, 봄날 햇살처럼 따스함과 희망을 준다. 그야말로 그림 한 점이 주는 큰 아우라다. 스트레스와 불안에 시달리며, 과도한 경쟁, 과중한 업무로 지칠 대로 지친 현대인들에게 그림 한 점이 주는 공간의 변화는 큰 위안과 여유를 마련해 준다. 손을 씻으며 바라보게 되는 세면대 위의 작은 꽃 그림 한 점, 식후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감상할 수 있는 카페 벽면의 유화, 일에 지칠 때 잠시 쳐다보며 휴식시간을 가져보는 사무실의 수채화 한 점. 돈이나 경쟁으로 점철되어 있는 현대의 회색빛 벽면 한 가운데 한 뼘의 미술 문화가 현대인의 쉼터가 되어줄 것을 기대해 본다. 이재진 변호사

[이재진 칼럼] 우리는 푸른 하늘을 보고 싶다

2019년 1월 12일 밤, 베이징의 초미세먼지 수치는 1입방미터당 522마이크로그램(㎍/㎥)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2일 후, 14일 서울의 초미세먼지는 하루 평균 129㎍/㎥을 기록해, 국내에서는 관측을 시작한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다. 같은 시간 베이징은 여전히 200㎍/㎥을 넘는 수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15일 수도권 지역은 초미세먼지 농도가 100㎍/㎥을 훌쩍 넘었고, 서울은 한 때 최고 179㎍/㎥을 기록했다. 미세먼지(Particulate Matter, PM)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자가 작은 먼지로서 10마이크로미터(m) 이하의 미세한 먼지이며, PM10이라고도 하는데, 입자가 2.5m 이하인 경우(PM2.5)에는 이를 초미세먼지라고 부른다. 사람의 머리카락 두께가 50m 정도 된다고 하므로, 초미세먼지의 입자 크기는, 머리카락 두께의 약 1/20수준 미만의 크기인 셈이다. 최근에는 초미세먼지보다도 작은 입자인 극미세먼지(PM0.1=100nm), 나노미세먼지 (PM0.05=50nm)까지 문제되고 있다. PM10보다 큰 입자의 경우에는 코에 걸려서 후두를 넘어가지 못하나, PM10 미만의 입자들은 기도를 통과해 기관지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특히 PM2.5인 경우에는 폐의 폐포에까지 들어가서, 천식, 폐포손상 등 각종 질환을 야기하게 되며, PM2.5 미만인 경에는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게 된다고 한다. 이에 따라 심혈관질환 등 다양한 질병을 유발시키게 된다. 심지어 이 작은 먼지 입자들은, 뇌에까지 침투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에서는, 1급 발암물질로서 석면, 벤젠과 함께 미세먼지를 포함시켰다. 세계보건기구는 미세먼지와 관련하여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있는데, 미세먼지의 경우에는 하루 평균 농도가 50㎍/㎥(연평균 20㎍/㎥), 초미세먼지의 경우에는 하루 평균 농도가 25㎍/㎥(연평균 10㎍/㎥)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하루 평균 농도가 미세먼지의 경우에는 100㎍/㎥(연평균 50㎍/㎥), 초미세먼지의 경우에는 35㎍/㎥(연평균 15㎍/㎥)을 기준으로 정하고 있다. 초미세먼지의 경우, 기존에 50㎍/㎥(연평균 25㎍/㎥)을 기준으로 정하고 있던 것을, 2018년에 더 엄격하게 기준을 변경했다. 그렇다면 1월 14일과 15일 우리나라의 초미세먼지는 세계보건기구 가인드라인의 약 5배 내지 7배에 달하는 심각한 수준의 것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 집 옥상에서 밤을 새가며, 손전등을 들고 별자리를 찾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은 늘 맑고 높았고, 봄하늘은 포근하고 따듯했다. 그러나 이제 그 하늘에, 별자리도 맑은 하늘도 아닌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가 자리를 차지했다.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다. 그런데 초미세먼지 PM2.5의 58.3%는 황산염과 질산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초미세먼지는 앞으로 매우 심각한 질병을 가져올 수 있다.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의 주원인은 석탄연료사용으로 인한 오염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며, 그 원인은 결국 중국이다. 중국은 이를 부인하고 있으나, 14일 심각한 미세먼지 발생이 중국에서 왔다는 것은, 중국에서의 미세먼지 농도 수치와, 그 먼지들이 우리나라로 넘어오는 위성사진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환경오염에 대한 대처는 한 국가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전 세계적 연대를 요구한다. 중국에 대한 보다 강력한 대응이 시급해 보인다. 나아가 국가와 민간 모두가 중국을 상대로 한 강력한 목소리를 내어야 할 것으로 요망된다. 이전처럼 우리나라의 푸른 하늘을 보고 싶다. 이재진 변호사

[이재진 칼럼] 측은지심, 수오지심

1999년 2월 6일 오전 4시께 완주군 삼례읍 나라슈퍼에는 괴한들이 침입했다. 괴한들은 가게 주인 유모 할머니(당시 77세)의 입을 테이프로 막아 숨지게 한 뒤, 현금과 패물을 가지고 갔다. 그 범인으로 지목된 것은, 동네 3명의 청년들. 최*열, 임*서, 강*구. 그들은 19살에서 21살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조사를 받은 후, 유죄로 인정되어, 3년 내지 6년의 징역을 복역했다. 그러나 사실 그들 3명은, 진범이 아니었다. 그들은 매우 가난했고, 지적장애를 앓는 사람들이어서, 당시의 억울함을 해명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중 1명은 현재까지도 언어나 논리 구사능력이 매우 낮아서, 긴 문장을 쓸 수 없는 정도의 능력으로 밝혀졌는데, 당시 그의 자술서는 매우 긴 문장으로 자세하게 작성된 것이었다. 경찰 현장검증 영상에서는, 경찰이 위 3인을 폭행하며, 행동을 지시하거나 유도하는 장면이 확인되기도 한다. 당시 현장 목격자였던 피해자 할머니의 사위는 경상도 사투리의 범인을 지적했으나, 반영되지 않았다. 수사과정에는 폭행과 강압이 있었고, 이에 못 이겨 허위자백이 이루어진 것이다. 최*열은 검거될 당시 어머니는 하반신 마비 1급 장애인, 아버지는 척추장애 5급 장애인이었다. 그는 부모를 돌봐야 했지만 교도소에 있어야만 했고 그가 출소하고 얼마 안지나 부모는 숨졌다. 진범들이 잡혀와 범행을 시인하고 수사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혐의로 풀려났고, 결국 진실은 묻힌 채, 그들 3명은 살인범의 누명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들은 긴 시간 누명을 벗기 위한 노력을 했으나, 이미 굳어진 확정판결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희망을 잃어가던 그 즈음, 재심으로 유명한 박준영 변호사가 사건을 맡게 되었고, 악전고투 끝에, 불가능해 보였던 재심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지난 2016년, 드디어 그들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사건이 벌어진 지 17년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삼례 슈퍼 살인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기막힌 사연이다. 그런데 최근에 당시 위 사건 수사를 맡았던 검사(현재는 변호사)가 위 피해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피해자들이 본인을 상대로 허위사실을 유포해 정신적 피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한편 대검찰청 진상조사단에서는 종래 이 사건의 부실수사 여부에 대하여 조사를 해오고 있었으나, 얼마 전 부실수사 책임이 없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안정된 사회를 위하여, 법이라는 제도가 만들어지고 운용되고 있지만, 정작 법은 무정형이어서,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고, 양날의 칼과도 같아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때로는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다. 법이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러한 이유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법이 만능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법 이전에 도덕적인 교감이 사태해결의 근본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런지. 오래된 맹자의 교훈이 귓가에 맴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고(惻隱之心, 측은지심), 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라는(羞惡之心, 수오지심) 가르침이 그것이다. 3명의 피해자들은, 범하지도 않은 죄를 강압에 못 이겨 인정하고는, 수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고, 그동안 가정은 산산조각이 났다. 지적 수준이 낮다고 해서, 그들에게 인간의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지적 장애가 있다고 해서, 느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서럽고 소외받은 그 심정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짧은 지식과 권력으로 그 선량한 사람들에게 죄를 덮어씌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에게 무죄가 선고된 날, 그처럼 오래도록 숨죽여 왔던 피해자들 중 1명이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가 당한 것처럼, 우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들도 똑같이 감옥에 가서 살았으면 지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처절한 삶을 위로와 사과로 어루만져 줄 수는 없었던 것인지 아쉬움을 더한다. 이재진 법무법인 정상 대표변호사

[이재진 칼럼] 속물근성

속물근성의 영어 snobbery라는 단어는, 영국에서 182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즉 당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옆에 sine nobilitate(without nobility)라고 기재하여 작위가 없다는 것을 밝혔는데, 이를 줄여서 s.nob 썼던 것이 관례가 되어 snobbery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던 것인데, 근대적인 의미는 거의 정반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알랭 드 보통은 현대에서 인간이 불안해하는 원인을 사회적 지위에서 찾고 있다. 타인, 특히 자기가 속한 준거집단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주변의 많은 속물들은 이러한 현대인의 불안을 부추기게 된다. 게다가 사회의 분위기, 매체들은 이를 강화한다. 부자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지위에는 도덕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으로, 게다가 사회진화론자들 입장에서는 적자생존 주장으로 개인들의 우월감과 열등감을 키워갈 것이다. 과거에 비하여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신분이나 지위에 따른 차별이 폐지되고, 자유와 복지가 주어지고 있지만, 타인을 의식하고 그에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을 부족한 인간으로 몰아가는 속물 욕망은 현대인을 더없이 비참하고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어쩌면 그 욕망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바꿔가며 타인과 닮아가려는 허망한 노력을, 우리는 끊임없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랭 드 보통은 이와 같은 종류의 속물근성에 대하여, 탐욕과는 다른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잭슨 앤드 그레이엄이라는 회사가 만들었던 천박한 가구가 날개 돋친 듯이 팔렸던 것을 속물근성의 예로 들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에게도 사랑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텅 빈 선반에 엄청난 것들을 전시하려 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형의 유행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 탐욕스러운 성형욕구가 있었던 것이 아닐 것이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보편가치로 인한 희생자로 볼 수도 있을 터이다. 여기에는 방송매체도 한 몫을 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감정적 상처가 성형의 욕망을 키웠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성형은 또 다른 성형의 욕망을 불러올 것이다. 성형을 통한 미의 추구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늪이라고 생각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타인의 모습을 흉내내기보다는 자신의 개성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이 있음을 자랑하는 것은, 뒤집어 보면 다른 면에서는 자신이 없음을 숨기는 것이고, 우월감은 결국 열등감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경제학에서 백로효과와 같은 의미로 속물 효과(snob effect)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특정 제품에 대한 소비가 증가하게 되면 그 제품의 수요가 줄어드는 현상을 말한다. 닮고 싶었던 모습이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되고 나면, 이제는 혐오하는 모습이 되는 것은 아닐까. 각자 자신의 개성을 아름답게 드러낼 수 있도록 자존감을 찾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불안을 제거하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재진 법무법인 정상 대표변호사

[이재진 칼럼] 신뢰받는 법원을 기대하며

상고법원 설치와 관련된 대법원의 재판거래 의혹으로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상고법원 제도는, 3심을 담당하는 대법원의 업무 가운데 일부를 나누어, 이를 담당할 새로운 법원을 설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상고 사건 가운데,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은 대법원에서 담당하고, 그 이외에 일반 상고 사건은 상고법원에서 담당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는 대법원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상고법원에 대한 헌법적 근거가 없으며, 상고법원 판사 임명권을 대법원장이 갖게 됨으로 인해 3권분립의 근본취지를 흔들게 된다는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럼에도 대법원에서 상고법원 설치를 주장하며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대법원의 업무를 줄이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었다. 대법관 1인이 연간 약 3천여 건의 사건을 해결한다는 통계는 상고심의 문제를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한편 이를 해결하는 다른 방법으로는 그밖에 상고 사건 수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상고사건이 많다는 것은, 결국 항소 사건이 많다는 것이 된다. 1심에서 2심으로 상소하는 것을 항소라고 하고, 2심에서 3심으로 상소하는 것을 상고라 한다. 그러므로 2심으로의 항소가 줄면, 3심으로의 상고도 줄게 될 것이다. 이에 수년 전부터 법원은 ‘1심 충실화원칙’을 강조해 왔다. 1심을 충실히 재판하면 항소가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 그 요지이다. 1심 재판을 충실하게 한다는 것은, 재판을 받는 시민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1심 충실화를 위해서는, 그에 따른 실천적인 과제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예를 든다면 1심 법관을 충원한다든가, 법관의 업무를 돕는 보조시스템을 확충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될 것이다.만약 실천적인 과제 수행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1심 충실화원칙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재판을 ‘충실히’ 해야 하는 것은, 마땅히 당연한 일이고, 제도 개선이 없는 ‘1심 충실화’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그런데 1심 충실화를 위한 법관충원이나, 그밖의 실천적 제도개선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던 것 같다.그런데 이렇게 된다면 ‘1심 충실화 원칙’은, 실무에서는 ‘항소기각’ 원칙과 그다지 다르지 않게 된다. 1심에서 충실히 하였으므로, 특별히 변경된 사정이 없으면, 항소는 기각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법원이 2심을 사후심화한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우리나라 항소심은 1심의 재판을 전제로, 부족한 입증 등을 보완하여 1심에 이어서 2심에서 재판을 진행하는 속심 성격으로 이해되고 있다. 반면 사후심은 대법원에서의 심리방식이다. 즉 원심의 판단이 잘못되었는지 여부만을 심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심에서는 1심에서 이루어진 재판을 다시 짚어보게 되고, 필요한 경우, 증인 신문 등 증거조사를 진행할 수 있지만, 사후심에서는 1심에서 조사된 증거에 대하여 판단의 적정 여부만을 심리하게 된다. 2심을 사후심화한다는 것은, 2심에서 추가증거수집을 가능한 제약하고, 1심 증거를 전제로 1심이 그에 따른 판단을 잘 했는지에 심리를 집중한다는 것이다. 2심 사후심화와 1심 충실화 원칙이 결합하면, 상소는 줄어들 것으로 법원은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법원이 추진하고 있는 1심 충실화 지침에 따라, 실제 상소비율이 낮아졌지 궁금해진다. 박주민 국회의원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전국 법원 항소비율은 2014년 38.6%였고, 2015년 40.9%, 2016년 43%, 2017년 41.2%였으며, 2018년 상반기의 경우에는 40.8%였다. 역시 전국 법원 상고비율은 2014년 33.5%, 2015년 33.2%, 2016년 32.7%, 2017년 31.2%, 2018년 상반기 33.6%로 확인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1심 충실화 원칙은, 상소비율을 줄이는데 결코 기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항소하지 말라는 공허한 외침과, 이해하기 힘든 항소기각은 오히려 시민들로 하여금 재판의 불신만을 조장할 뿐이다. 재판의 불신은 순환적으로 항소와 상고비율을 높이게 만든다. 재판이 시민의 신뢰를 얻을 때 비로소 상소비율은 줄어들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재판은,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가지며, 그에 따른 법적용의 적정성이 당사자를 설득시킬 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판의 신뢰를 찾기 위한 법원의 노력이 보다 낮은 시민의 눈높이에서 해답을 찾아가길 바란다. 이재진 법무법인 정상 대표변호사

[이재진 칼럼] 이기적 인간이 인류를 구할 수 있을까

2018년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북위 33도를 넘어야 만나게 되는 한국에서 열대지방보다 높은 수은주가 확인되었다. 40도를 넘는 살인적인 더위에 사람들은 지쳤고, 놀랐고, 그리고 무서웠다. 우리가 사는 지구별은 괜찮은 걸까.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의 환경을 지나치게 훼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금성은 수성에 비하여 태양에서 더 멀리 있지만, 행성의 온도는 금성이 훨씬 더 뜨겁다. 그 이유는 두꺼운 대기층이 온실효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며, 그 주범은 이산화탄소로 알려져 있다.이산화탄소는 금성 대기에서 96.5%를 차지한다. 보잉 747의 엔진은 1초에 1t의 공기를 빨아들인다고 한다. 1시간이면 3천600초. 비행시간이 10시간이면 3만6천초이므로 3만6천t의 공기를 빨아들이는 셈이다. 비행기 1대 당 엔진이 4개임을 가정하면, 그 4배 즉 약 15만t의 공기를 빨아들이는 셈이다. 지구 대기 중 산소의 비중이 대략 20%임을 감안하면, 비행기 1대의 10시간 운행에 약 3만t의 산소가 사라지는 셈이다.그런데 하루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의 비행기가 전 세계에서 움직이고 있다. 다른 한편 문명의 이기들은 이산화탄소를 내뿜는다. 지구 역사 80만 년 동안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0.03%를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지구의 온도 1도가 오르면 지구상의 30% 생명체가 멸종된다는 보고도 있다. 이기적인 인간은 지구를 파멸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일까. 일벌이 침을 쏘는 행위는 도둑에 대한 매우 효과적인 방어수단이 된다. 그러나 침을 쏜 벌은, 침을 쏘는 것과 동시에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내장이 침과 함께 빠져버리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된다.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도둑을 막아내고자 벌은 최후의 무기인 침을 사용했다. 여기서 일벌의 행동은 이타적인 행동이었을까. 집단을 위한 이타적인 행동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과학자로 꼽히는 리처드 도킨스의 견해는 다르다. 그는 유전자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행동이 이기적이라고 본다. 따라서 종의 이익을 위하여 개체가 희생한 것이 아니라, 개체의 이기적 유전자가 결국 종을 유지하게 만들었다고 이해한다. 인간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생물학적 본성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고, 학습을 통하여 변화될 수 있으며, 문화를 나누거나 전수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기본적 속성이 이기적인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도킨스는 “개개인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관대하게 이타적으로 협력하는 사회를 만들기를 원한다면 생물학적 본성으로부터 기대할 것은 없다는 것을 경고로 받아들이기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을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은 세계적인 연대를 필요로 한다. 개인을 넘어가야 하고, 국가를 넘어서야 한다. 기본적으로 이타주의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자연을 훼손시킨 이기적인 인간. 그들이 과연 그 벽을 넘어서 자연을 되살려낼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이기적인 인간의 유전자들이 강력한 생존본능으로, 환경오염으로 인한 지구의 파멸을 막아낼 수 있지는 않을까. 마치 자신을 희생하는 일벌의 죽음이 이기적이었던 것처럼. 금성은 태양계의 지옥으로 불리운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지구에 온실 효과가 지속된다면, 지구 역시 금성처럼 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제 개체와 종족이 살아남기 위한 가장 이기적인 유전자를 만들어갈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찬 바람에 낙엽이 보이기 시작한 가을 언저리에 벌써부터 내년 여름을 걱정한다. 이재진 법무법인 정상 대표변호사·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 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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