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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섭 칼럼] 그렇게 죄송할 짓을 왜 했나

드디어 세 번째 여자도 포토라인에 섰다. 그녀의 두 딸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딸들과 똑같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또,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의 부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이 28일 오전 10시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됐다. ‘폭행 및 업무방해 혐의’다. 이씨는 자택에서 일하는 수행비서와 가정부, 한진그룹 임직원 등을 대상으로 상습적인 ‘갑질’을 해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직원 10여 명에게 폭언을 퍼붓고 손찌검을 한 의혹이 제기돼 경찰에 소환된 것이다. 이씨는 3분가량 포토라인에 섰다. ‘직원들을 왜 욕하고 폭행했냐’, ‘상습적으로 폭행한 사실이 있냐’, ‘가위나 화분 던진 것 맞냐’는 기자들의 여러 차례 질문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죄송하다’는 말을 7번 반복했다.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는 대답도 3번 했다. 이씨는 15시간가량 조사를 받고 29일 0시45분께 귀가했다. 조사를 마치고 나온 이씨에게 ‘상습폭행을 인정하는가’, ‘경비원에게 화분을 던졌나’, ‘임직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등의 취재진 질문에 그녀는 또 “죄송합니다”라고 3차례 말했다. 이씨는 경찰청에 들고 나며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합니다”를 10번 되풀이했다. 5월 한 달간 한진가(家) 세 모녀가 경찰에 줄줄이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지난 1일 ‘물벼락 갑질’ 의혹으로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강서경찰서에 출석했다. ‘유리컵 던진 것을 인정하느냐’, ‘음료 뿌린 것 맞느냐’, ‘대한항공 총수 일가 사퇴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 잇따른 취재진의 질문에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며 머리를 숙였다. ‘죄송하다’를 6번 반복했다.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울먹임의 의미가 반성인지, 억울함인지, 창피함인지…. 이 모습은 4년 전 언니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모습과 데칼코마니처럼 겹쳤다. 2014년 12월12일 조 전 부사장은 ‘땅콩 회항’ 사건으로 김포공항 내 국토부 항공안전감독관실에 출두했고, 이날 취재진 앞에서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자매는 모두 검은색 정장차림에 참담한 표정이었다. 취재진의 여러 질문에 “조사 과정에서 성실하게 답하겠다”고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조현아 전 부사장은 2014년 미국 뉴욕 JFK공항에서 출발하려는 여객기 내에서 기내 서비스를 문제 삼아 사무장과 승무원을 폭행하고 항공기 항로를 변경해 정상 운항을 방해한 혐의로 2015년 1월에 구속기소 된 바 있다. 이 사건으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됐었다. 그녀가 이번엔 필리핀 가사 도우미를 불법 고용한 혐의로 다시 경찰에 출두했다. ‘땅콩회항’ 사건 뒤 3년 5개월 만에, 24일 다시 포토라인에 선 그녀는 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한진그룹의 세 모녀가 수사기관 포토라인에 서서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모습이라니 꼴불견이다. ‘갑의 추락’이다. 그렇게 죄송할 짓을 왜 했나 싶다. 피해자들과 국민 앞에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는 건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죄송하다는 중얼거림이 입만 뻥긋거리는 건 아닌가 진정성에 의구심이 든다. 피해자들에게 사과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묵묵부답이 그렇고, 조사과정서 여러 혐의를 대부분 부인했다고 하니 더 그렇다. 죄송하다는 말은 그냥 의례적으로 한 사과 발언 같아 보인다. 그들이 진정 죄송한 마음이라면, 신분이 드러날까 두려워 가면을 쓴 채 매주 집회에 참가하고 있는 대한항공 직원들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한다. 온 맘을 다해 정중하게 사과하고, 그룹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 손을 떼야 한다. 잘못된 부분은 상응한 벌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입으로만 10번, 100번 죄송하다고 떠드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마음날씨도 챙기세요

2월21일 수요일, ‘대한민국 안녕지수’는 55점이다. 마음날씨, ‘보통’이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와 카카오가 지난해 9월 ‘마음날씨’ 웹사이트(https:together.kakao.comhello)를 오픈했다. 사회 구성원의 행복 정도를 실시간으로 측정해 해당 데이터를 정책 등에 반영하려는 취지로 만든 공익 웹사이트다. 수시로 변화하는 주가지수처럼 국민들의 심리상태 변화 추이를 성별ㆍ지역별ㆍ연령별로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마음날씨에선 ‘지금 삶에 만족하는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 ‘의미있는 삶을 사는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나’ ‘불안한 감정을 느끼나’ ‘우울한 감정을 느끼나’ 등 11개 질문에 점수로 답변을 받고 이를 토대로 종합 행복 지표인 ‘안녕지수’(100점 만점)를 산출한다. 국민 안녕지수 54점, 마음날씨 ‘보통’ 지난해 9월∼12월 웹사이트에 접속한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정도를 조사한 결과, 삶의 행복지수는 평균 54점이다. 이 기간 28만1천162건의 설문 결과를 활용한 것이다. 분석 자료에 따르면 20∼30대가 삶에서 느끼는 행복의 정도가 다른 연령대보다 훨씬 낮게 나왔다. 20대와 30대의 안녕지수는 52점씩으로 국민 평균에 못 미쳤다. 60세 이상 노인층은 61점, 10대는 59점, 50대는 58점, 40대는 54점이었다. 20∼30대는 불안지수도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았다. 성별로는 남성의 안녕지수가 평균 57점으로 여성(54점)보다 다소 높았다. 22일 오후 3시 현재 마음날씨 사이트를 찾은 국민은 누적 58만7천914명이다. 이들의 안녕지수는 평균 54점이다. 지난해 말 조사와 같다. 우리 국민들의 행복감은 여전히 낮고 불안, 우울, 스트레스 지수는 높다. 한국의 자살률은 OECD 35개국 중 1위다. 2003년 이후 15년째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16년 한국의 자살 사망자는 1만3천92명다. 자살률(인구 10만명당 자살자)은 25.6명으로 OECD 평균(12.1명)의 2배가 넘는다. 자살자의 70~80%가 우울증 소인이 있었다는 심리부검연구로 미뤄 볼 때 우울증이 자살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정부가 자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얼마 전 자살방지 대책을 내놨지만 실효성은 의문이다. 우울증 환자를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나 인식 개선이 중요하다. 직장에서 ‘우울함’을 느낀다고 말하면 상당수 상사나 동료는 ‘정신 상태가 약해서’라고 얘기한다. 이런 이유로 우울증 환자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어렵다. 우울증은 본인뿐 아니라 주변에서 빨리 알아차리고 상담·약물 치료를 하게 해야 자살 등을 막을 수 있다. 사회나 국가 차원에서 국민 정신건강을 챙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마음 관리를 잘 해야 한다. 그러려면 평상시 마음날씨를 챙겨야 한다. 우울한 지, 불안한 지, 어디가 왜 불편한 지 살피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것은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나 혼자만의 문제도 아니다. 스트레스 없는 일상은 없다. 완벽한 삶도 없다. 이를 깨닫고 신체의 근력을 강화하듯 마음의 근력을 키워야 한다. 긍정적 사고로 마음근육 키워야 우리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 처음 겪을 때는 지독하게 힘들었던 일도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니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마음이 단련됐기 때문이다.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몸에 근육이 붙으면 체력이 생기고 에너지가 충만해져 활기가 넘친다. 마음도 마찬가지로 긍정적 사고를 하면 여유가 생기고 스트레스로부터 회복탄력성이 좋아진다. 마음 근육은 신체 근육처럼 노력과 연습을 통해 키울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불안하고 우울하다고 말한다. 행복하다는 이를 별로 보지 못했다. 이제부터라도 마음날씨를 챙기면서 마음근육을 키워보자. 조금 더 여유있고 편안해진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58년 개띠’를 위하여

58년 개띠 해/오월 오일에 태어났다, 나는// (중략)// 마을 어르신들/너는 좋은 날 태어났으니/잘 살 거라고 ‘출세’할 거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되어/나는 지금 출세하여/잘 살고 있다.// 이 세상 황금을 다 준다 해도/맞바꿀 수 없는 노동자가 되어/땀흘리며 살고 있다.// 갑근세 주민세 한 푼 깎거나/날짜 하루 어긴 일 없고/공짜 술 얻어 먹거나/돈 떼어 먹은 일 한 번 없고//(후략) // 58년생 서정홍 시인의 ‘58년 개띠’란 시다. 2003년에 쓰여졌다. ‘58년 개띠’란 무용작품도 있다. 전미숙씨가 1993년 안무한 현대무용이다. 1950년대에 태어나 세상사에 순응해 살며 자아를 상실한 인간상을 그린 것으로, 기계적 일상과 사회적 강요에 시달리는 삶에 주목하고 있다. 개인의 정체성이나 욕구는 무시된 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쉼없이 줄넘기를 하는 남자의 모습으로 그렸다. ‘58년 개띠’는 유명하다. 개띠 하면, 58년 개띠가 그냥, 자연스레 떠오른다. ‘58년 개띠’는 어느새 고유명사가 됐다. 2018년 무술년(戊戌年)이 황금개띠 해라며, 58년 개띠 얘기를 많이 한다. 1958년 무술년에 태어났으니 올해로 환갑을 맞았다. 서정홍 시인의 시처럼 58년 개띠는 지금 ‘출세해’ 잘 살고 있을까? 두 작품 모두에서 보듯, 58년 개띠의 삶은 녹록지 않다. 60년 전 첫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태어난 58년 개띠들은 새해, 일선에서 전면 퇴진한다. 민간기업에서 일했던 동갑내기들은 벌써 물러났지만 정년 60세가 지켜지고 있는 공직사회나 일부 기업의 개띠들까지 이번에 모두 퇴장한다. 그들이 태어난 무술년에 일선에서 전면 사라진다니 아이러니다. 57년 닭띠, 59년 돼지띠도 아니고, 왜 58년 개띠인가? 58년 개띠는 고달픈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를 고비고비 힘겹게 넘으며 살아온 의미있는 세대다. 이들은 한국전쟁의 상처가 수습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베이비붐의 절정에 태어났다. 출생자 수가 90만 명대로 급증해 60∼70명이 바글거리는 콩나물시루 같은 초등학교에서 2부제 수업을 받았고, 고교 평준화가 시행돼 시험없이 ‘뺑뺑이(추첨)’로 고등학교에 처음 진학했다. 대학(77학번)에 들어가는 데도 역대 최고의 경쟁률을 뚫어야 했다. 힘겹게 들어간 대학에선 긴급조치와 10·26을 지켜보며 유신정권이 몰락하고 제5공화국 탄생이라는 정치적 격변기를 경험했다. 20대 초반 누구는 군인 신분으로, 누구는 시위대로 광주민주항쟁을 겪었다. 한국 나이로 30세가 된 1987년 6월엔 ‘넥타이 부대’로 민주화에 기여했지만 40세가 된 1997년엔 외환위기가 닥쳐 명예퇴직과 구조조정의 직격탄을 맞았다. 물론 경제성장의 혜택도 가장 많이 누렸다. 급속한 경제성장 덕분에 지금처럼 일자리 걱정을 하지 않고 중산층 진입에 성공했고 내집 마련의 꿈도 이뤘다. 58년 개띠의 노고가 없었다면 올해 3만달러 시대를 여는 한국 경제의 성공 스토리는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궁핍했던 ‘보릿고개’를 극복했고 ‘한강의 기적’을 견인한 주역으로 영욕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던 58년생의 전면 은퇴는 우리 사회 전반의 세대교체를 시사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8년을 살아갈 58년 개띠는 76만4천여 명이다. 대규모 은퇴 인구집단인 58년 개띠는 은퇴 이후의 삶도 주목받고 있다. 인생 2막에서 어떤 삶을 설계하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가 우리 사회 중요 이정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에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변화를 이끄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58년 개띠가 행복해야 ‘100세 시대’ 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는 우리 사회도 행복할 수 있다. 58년 개띠에게 응원을 보낼 수밖에 없다. 수고 많았다고, 앞으로 인생 2막도 멋지게 잘 살아달라고.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슬로건의 정치, 과연 승자는

거리마다 동네마다 대통령 선거 벽보와 현수막이 나붙었다. 유권자 표심이 왔다갔다 하듯 현수막이 봄바람에 살랑거린다. 벽보는 길다. 무려 15명이 19대 대선에 도전장을 냈다.1명은 중도 사퇴했다. 14명의 후보 중 몇 명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 당 이름도 마찬가지다. 지명도가 없거나 약하고, 당선 가능성도 전혀 없는데 왜 대선에 출마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저마다 ‘슬로건’을 내걸고 한 표를 호소하고 있다.길을 가다 멈춰서서 벽보 속 인물들을 유심히 보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어떤 후보의 슬로건이 그 유권자의 마음에 꽂혔을까? 슬로건은 그 시대의 거울이다. 후보의 정치 철학과 비전, 그리고 시대정신이 압축돼 담겨있다. 어떤 강렬한 메시지를 담았느냐에 따라 표심이 좌우된다. 슬로건(slogan)은 스코틀랜드어 ‘슬로곤(slogorn)’에서 나왔다. 슬로곤이란 말 속엔 ‘군대’라는 의미와 ‘함성’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스코틀랜드의 대영 항쟁을 다룬 멜 깁슨 주연의 영화 ‘브레이브하트’에서 보듯, 전투가 시작될 때 적의 기를 죽이기 위해 질러대는 함성이 바로 ‘슬로곤’이다. 선거도 전쟁이다. 그중 대통령 선거는 가장 크고 치열하다. 5ㆍ9 대선을 앞두고 한바탕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전쟁에서 슬로건은 자기편을 결집시키고 상대방의 기를 꺾기 위한 전투구호다.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잘 만든 슬로건은 선거판을 요동치게 하고 대통령의 꿈을 이루게도 한다. 미국 대선 슬로건은 짧고 힘 있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는 경제 회복에 초점을 맞춘 클린턴의 슬로건이다. 지금도 유사한 제목이 차용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래, 우린 할 수 있어(Yes, We can)’는 미국의 변화를 강조한 오바마의 슬로건으로 역시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는 트럼프의 슬로건으로 그를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되게 했다.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에서 슬로건이 등장한 것은 1956년 3대 대선 때다. 민주당 신익희 대통령ㆍ장면 부통령 후보가 내세운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강렬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독재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 등으로 맞불을 놓았지만 민심은 외면했다. 그러나 신 후보가 유세 중 사망하면서 이승만은 3선에 성공했다. 이후에도 대선 때마다 슬로건은 등장했다. 본격적인 슬로건 경쟁이 시작된 건 1987년 직선제 이후다.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는 ‘보통사람의 시대’를,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군정종식’을,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평화와 화합의 시대’를 슬로건으로 내걸었고, 유권자들은 ‘보통사람’ 노태우를 선택했다. 이어 1992년 14대 대선에선 민자당 김영삼 후보가 개혁과 안정을 내세운 ‘신한국창조’로 대통령이 됐고, 1997년 15대 대선에선 김대중 후보가 ‘준비된 대통령’을 슬로건으로 3번 도전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16대 대선이 실시된 2002년엔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새로운 대한민국’을 표방하며 ‘나라다운 나라’를 내세운 이회창 후보를 눌러 대역전극을 썼다. 2007년 이명박 후보는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을, 2012년 박근혜 후보는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당선됐다. 물론 슬로건대로 국정이 운영되지 않고 구호로 그친 경우도 많았지만 그 당시엔 유권자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19대 대선에서도 후보들은 저마다 슬로건에 정치철학과 시대정신을 담았다.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당당한 서민 대통령’(자유한국당 홍준표), ‘국민이 이긴다’(국민의당 안철수), ‘보수의 새희망’(바른정당 유승민), ‘노동이 당당한 나라’(정의당 심상정) 등이 주요 후보가 내건 슬로건이다. 이번엔 어떤 슬로건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게 될까. 5월 9일, 역사에 남을 슬로건이 결정된다.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김 여사가 뿔났다

팔순이 가까운 김 여사는 지난해 무릎 인공관절수술을 받았다. 일 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걷는데 힘겹다. 계단을 오르거나 앉았다 일어나는 건 더욱 힘들다. 다리가 불편한 김 여사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TV를 많이 본다. 드라마를 즐겨 보고, 종편의 건강프로그램도 열심히 챙겨 본다. 뉴스도 빼놓지 않고 보니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잘 안다. 가족들이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꼭 끼어서 한 번씩 멘트를 날린다. 엉뚱할 때도 있지만, ‘엄마가 그런 것도 알아?’하며 가족을 놀라게 한 적도 여러 번이다. 요즘같이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 가족 카톡방에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는 글도 올린다. 가족의 생일 축하 메시지도 이모티콘과 함께 제일 먼저 챙긴다. 종종 맞춤법이 틀려도, 김 여사의 마음이 느껴져 따뜻하다. 김 여사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늘 감사하다. 김 여사도 그 또래 많은 다른 엄마들처럼 ‘그녀’ 박근혜를 찍었다.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박 대통령이 임기 중 어려움에 처해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안쓰러워했다. ‘결혼도 않고, 여자 혼자의 몸으로… 대통령하기 참 힘들겠다’ 어쩌고 하면서. ‘세월호 7시간’ 관련, 사람들이 대통령 얼굴이 부어 보이는 게 무슨 시술을 한 것 같다고 했을 때도 김 여사는 ‘나라 걱정에 잠을 잘 못자서’ ‘피곤이 쌓여서’라고 옹호했다. 그런 김 여사가 며칠 전 밥 먹는 자리에 종이컵과 양초를 가져왔다. 딸이 토요일에 서울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슬쩍 건네줬다. 촛불 집회 분위기가 어떤지 가보고 싶은데 다리가 아파서 못 간다면서. 꺼지지 않는 촛불이 있다길래 동네 슈퍼에 물어보니 없어서 집에 있는 비상용 초를 가져왔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현 시국 얘기가 나왔고, 김 여사가 또 멘트를 날렸다. 이번엔 좀 흥분한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을 하느냐’ ‘빨리 그만둬야 한다’고. ‘감쪽같이 속았다’고도 했고, ‘배신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김 여사는 토요일에 날이 춥다니 옷을 두둑이 입고 가라고 했다. 몸조심도 당부했다. 엄마, 김 여사의 얘기지만 또 다른 김 여사들도 돌아섰다. 그녀의 골수팬인 줄 알았는데, 변하지 않는 그 5%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얼마 전 한 여성 모임에서 만난 60~70대 김 여사들도 더 이상 ‘그녀’를 옹호하거나 응원하지 않았다. 믿었던 까닭일까, 화를 내는 이도 있었다.어떤 김 여사는 ‘그녀를 찍은 걸 후회한다’고 했고, 또 어떤 김 여사는 ‘대선때 선거운동까지 열심히 했다’며 잠이 안 온다고 했다. ‘이 나라를 위해, 국민들을 위해 빨리 내려와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나이 지긋한 김 여사들은 이 나라 보통의 엄마이고 할머니들이다.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이 열심히 해보겠다니, 그동안 누구보다 열렬히 응원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달라졌다. 분노하고 있다. 딸에게 촛불을 밝혀야 한다면서 초를 건네고 있다. 이게 민심이다. 김 여사를 비롯해 상당수 국민들은 ‘그녀’를 이미 탄핵했다. 그들의 맘 속에 ‘그녀’는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다. 내일, 광화문엔 그런 의미를 담은 김 여사의 촛불이 켜질 것이다. ‘그녀’가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외치던 그 자리에.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한국은 만만하고 한국인은 봉이다

무례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다. 한국 소비자를 봉으로 보고, 한국을 만만하게 보는 이케아(IKEA)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그렇잖아도 더운 날씨에 열불이 난다. 한국 소비자가 문제일까, 한국 정부가 문제일까. 둘 다인 것 같다. 세계 최대 가구업체 이케아의 서랍장 ‘말름’ 모델이 말썽이다. 이 서랍장이 앞으로 넘어지면서 미국에서 2년동안 유아와 어린이 6명이 깔려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에 이케아는 북미에서 서랍장 3천560만개를 리콜(수거)하고, 판매중지한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지난 6월 이케아의 유사 서랍장 32개 제품에 대해서도 판매 중단을 요청했다. 이케아의 미국 홈페이지에는 ‘더 안전한 우리 집을 함께 만들어요’라는 문구와 함께 리콜 절차가 상세히 게재됐다. 중국에서도 리콜이 결정됐다. 당초 이케아는 중국에서 환불은 가능하지만 리콜 계획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중국 네티즌들이 “중국인을 차별한다” “이케아를 보이콧하겠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관영 신화통신도 이케아가 오만하고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난징, 톈진의 관변 소비자위원회도 잇딴 성명을 발표하며 이케아 때리기에 동참했다. 결국 이케아는 무릎을 꿇었다. 중국 내 매장 곳곳에 리콜 안내문을 붙였다. 한국에서도 같은 제품이 2014년 12월부터 최근까지 4만여 개 팔렸다. 비슷한 모양과 규격의 서랍장까지 합치면 판매량은 10만여 개나 된다. 문제는 미국에서 리콜하고 판매 중단된 이 서랍장이 한국에선 버젓이 판매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케아 한국 홈페이지에는 리콜이나 판매 중단에 대한 안내가 없다. ‘단단히 고정하세요!’라는 문구로 가구를 벽에 고정시키는 방법만 알려줄 뿐이다. ‘서랍장이 벽에 고정된 경우에 어떠한 사고도 보고되지 않았다’는 설명도 곁들여 놓았다. 이는 한국 소비자들에 대한 엄연한 차별 대우다. 한국 소비자를 ‘호갱(호구고객)’으로 알고 우롱하는 처사다. 북미 지역에서 안전하지 않은 제품이 한국에서는 괜찮다는 것인가. 우리 국민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으로 밖에 이해할 수가 없다. 이케아는 국내 소비자들의 비난과 항의에 최근 리콜 대신 선심 쓰듯 환불을 해준다고 했다. 정부도 뒤늦게 논란이 일고 있는 서랍장 안전성 조사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늘 몇 발씩 느린 소극적인 조치다. 답답하고 속 터진다. 외국 기업들이 한국의 소비자를 차별하는 것은 명백하다. 이케아뿐 아니라 폴크스바겐도 그랬다. 배기가스 조작으로 자동차 시장을 흔든 폴크스바겐은 미국의 차량 소유주들에게 147억달러(16조7천억원) 규모의 배상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한국서는 보상 소식이 없다. 리콜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가습기 살균제로 많은 사상자를 낸 옥시도 피해 보상을 미루다 검찰 수사가 시작되면서 마지못해 진전된 대책을 내놓았다. 외국 기업들이 한국의 소비자를 차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폴크스바겐이나 이케아의 경우 미국서는 즉각 소비자 보호조치를 하지 않으면 장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서는 보호조치를 하지 않아도 정부로부터 큰 제재가 따르지도 않고 엄청난 벌금을 물지도 않는다. 오히려 물건이 더 많이 팔리기도 한다. 이윤추구가 목적인 기업 입장에서 굳이 한국 소비자에게 배상이나 보상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여기엔 소비자들의 책임도 크다. 제품에 문제가 있거나 차별 대우를 받으면 제품 구입을 줄이거나 중단해야 하는데 거꾸로 더 늘어나고 있다니 아이러니다. 정부나 국회는 징벌적 손해배상, 집단소송 등을 강화해 법으로 소비자를 보호해야 하는데 지지부진이다. 한국 정부도 그렇고 소비자도 그렇고, 글로벌 기업들에겐 봉이다. 언제까지 멍청하게 당하고만 살 것인가. 한국인을 우습게 아는 기업, 소비자 안전을 도외시한 상품을 외면할 의지가 우리에겐 없는 것인가.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문제는 정치인이야, 바보야’

선거 때면 늘 요란하다. 국민을 위하는 양, 나라를 걱정하는 양 호들갑이다. 국회의원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 얘기다. 말을 참 잘한다. 구호도 그럴듯하다. 선거 슬로건은 번지르르하다. 하지만 진정성은 없어 보인다. 국민들이 느끼는 정서다. 20대 총선이 보름도 남지 않았다. 여야는 이번에도 톡톡 튀는 선거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워 선거에 임하는 각오와 선거전략을 유권자에게 선보이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저마다 상대 당의 심판론을 앞세우고 있다. 유권자 입장에서 보면 도긴개긴이다. ‘뛰어라 국회’ ‘문제는 경제’ ‘문제는 정치’ 새누리당은 ‘뛰어라 국회야, 잠자는 국회에서 일하는 국회로’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일하는 정당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조동원 당 홍보본부장은 “19대 국회는 식물국회가 됐지만 20대 국회는 그렇게 되면 안된다”며 “지금 대한민국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새누리당만 해결할 수 있는 만큼 과반 의석을 만들어 일하는 국회가 되게 해달라는 호소를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누리당은 이를 위해 후보들에게 △일자리 개혁 △청년 독립(청년의 주거ㆍ재정독립 지원 공약) △40∼50대 재교육 △마더센터(여성의 임신ㆍ출산·육아문제를 지원하는 센터) △갑ㆍ을 개혁(불평등ㆍ불공정 관계 청산) 등 5대 핵심공약을 내년 5월31일까지 완수하지 못하면 1년치 세비를 반납한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쓰도록 했다. 김무성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 등 현재까지 30여명이 서명을 했거나 동참을 약속했다. 누가 봐도 정치쇼다. 더불어민주당은 현 정부에 대한 ‘경제심판론’을 선거 기조로 삼아 선대위 명칭부터 ‘더불어경제선대위(약칭 경제선대위)’로 정했다. 더민주는 총선의 메인 슬로건을 ‘문제는 경제다. 정답은 투표다’로 정하고, 서브 슬로건을 ‘4월 13일은 털린 지갑을 되찾는 날’로 정했다. 이재경 선대위 대변인은 “메인 슬로건은 경제문제를 먼저 부각해 투표라는 행동으로 이끌겠다는 뜻을 담았다”면서 “이번 선거를 ‘새누리당 8년의 경제 실패 대 더민주의 경제 살리기’ 구도로 이끌고 나가겠다”고 말했다. 더민주의 슬로건은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가 직접 제안했다. ‘잃어버린 8년 경제 실패 심판’을 통한 서민과 중산층 등 경제적 피해를 입고있는 대상을 타깃으로 경제주권을 회복시키겠다는 당 총선 기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새누리당의 ‘경제 실정’이 비난받고 있지만 더민주의 ‘국정 발목잡기’가 경제 실패의 한 원인이었다는 지적도 틀리지 않다. 총선 슬로건, 구호 아닌 실천이 중요 국민의당은 메인 슬로건을 ‘문제는 정치다, 이제는 3번이다’로 정했다. 또 ‘1번과 2번에겐 기회가 많았다, 여기서 멈추면 미래가 없다’를 서브 슬로건으로 삼았다. 오만한 여당을 심판하고, 무능한 야당을 대체하자며 기존의 양당 체제를 겨냥한 것이다. 천창호 기획조정국장은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부터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면서 “제3당이 등장하면 정치에 경쟁이 도입돼 민생을 챙기게 된다는 뜻을 설득력 있게 전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누리당은 ‘일하는 국회론’을, 더민주는 ‘경제심판론’을 들고 나왔지만 본질은 정치다”라는 국민의당 말이 맞긴 맞는데 이 당이 뭘 바꿀 수 있을 지는 의심스럽다. 더민주와 국민의당의 슬로건은, 1992년 미국 대선 때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구호를 응용한 것이다. 대한민국 유권자들을 대신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문제는 정치인이야, 바보야’. 말만 앞서는 정당, 밥그릇 싸움만 하는 정당, 발목 잡는 정당, 책임지지 않는 정당, 민생을 외면하는 정당…. 그동안 국민들이 봐온 정당, 정치인의 모습이다. 이번 총선도 그들만의 말잔치로 끝날 것이 뻔하기에 그저 씁쓸하다.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지자체 파산제는 정치적 꼼수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 14일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지방자치단체 파산제 도입을 시사했다. 방만한 재정운영으로 심각한 재정위기에 놓인 지방정부의 재정 건전성과 책임성을 높일 수 있는 대안이라며 밝힌 극약처방이다. 황 대표는 100조원이 넘는 지방정부 부채와 72조원이 넘는 지방 공기업 부채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제 부채와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며 지방 파산제도 도입을 깊이있게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때 맞춰 일부 중앙언론은 지방자치단체 파산제도 이제 도입할 때 지방정부 파산제 도입할 때 됐다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동조했고, 일부 전문가들도 지자체 파산제를 지지하고 나섰다. 반면 민주당은 지방 재정이 비상 상황이라는데 공감하면서도 지자체 파산제에 대해선 지방자치제도를 무시하는 발상 또는 공천 폐지와 파산제 연계는 정략적 계산 이라며 반발했다. 지방자치 근간 흔드는 발상 그런데 정작 지방정부는 생각보다 조용하다. 침묵하고 있다. 지자체 파산제가 시의적절하다는 뜻인지? 아니면 6ㆍ4 지방선거를 의식해 여당에 밉보이면 공천을 못받을까봐 눈치를 보고있는 건지 모르겠다. 일부 자치단체장은 재정 악화가 자기가 저지른 일이라 가슴이 뜨끔할 수도 있겠다. 황 대표가 지자체 파산제 도입 의지를 밝힌 것은 선거를 의식한 일부 지자체장들이 전시성선심성 행정을 남발하며 지방 재정을 악화시키는 것을 막겠다는 조치로 해석된다. 지자체 파산제는 무분별한 재정사업을 추진해 정상적인 행정 수행이 어려운 지자체의 빚을 중앙 정부가 청산해주는 대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강제하는 제도다. 부채비율이 일정 기준을 넘어선 지자체에 파산 선고를 내리고, 예산을 통제하거나 사업인력 구조조정 등의 조치를 취하는 방식이다. 지자체 파산제는 지방자치제가 본격화됐던 1995년부터 제기됐지만 정부와 지방, 정치권 사이의 이견으로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민주당 집권 때인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에서도 도입을 검토했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2010년 부자도시로 꼽혔던 성남시가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하면서 지자체 파산제 도입 논의에 불이 붙었으나 여야간 책임 공방만 벌였을 뿐 정책적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나라 지자체 중 상당수가 재정 위기를 겪고있는 게 사실이다. 안전행정부에 따르면 2012년 말 기준, 전국의 지자체 부채(지방채 기준)는 27조1천252억원이다. 여기에 지방공기업 부채 등을 합하면 100조원이 넘는다. 용인시는 예산 대비 부채 비율이 39%에 달하고, 인천시도 37.6%에 이른다. 이는 민선 단체장이 선심성ㆍ과시성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한데다 국제행사 등에 과도한 예산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또 재정 위기를 지방채 발행이라는 미봉책으로 대응하다 보니 빚만 늘어 재정 건전성이 악화된 것이다. 불합리한 세제구조 개편 먼저 그렇다고 지자체 파산제가 해법은 아니다. 지방재정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불합리한 세제구조 때문이다. 국세와 지방세 비율이 8대 2 수준인 2할 자치로는 지자체 재정 건전성은 요원하다. 최소 4할의 재정권을 지방에 넘겨줘야 재정분권이 이뤄질 수 있다. 일본만 해도 지방세 비율이 50%에 이른다. 정부와 정치권의 무리한 복지정책 추진으로 지자체가 부담해야 하는 매칭비 증가도 지자체의 재정 건전성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지자체에 떠넘겨지는 복지예산, 불합리한 세제구조 개편 등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지자체 파산제란 규제만 내놓는 것은 자치제도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다. 중앙에 치우친 세제구조 속에서 파산제 운운하는 것은 앞 뒤가 맞지않는다. 더욱이 파산제 도입 검토 발언이, 기초지방선거 정당공천 폐지 논의가 한창인 시점에 나온 것은 공천 폐지에 대한 물타기 전략으로 보인다. 공천제 폐지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려는 꼼수로 비쳐진다. 지자체 파산제는 지방자치에 역행하는 중앙집권적 발상이다. 지방자치제 부활 23년을 맞아 실질적인 지방자치가 구현될 수 있는 행ㆍ재정적 분권을 위한 방안부터 마련돼야 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길에서 새해 각오를 건지다

새해에는 누구나 이런저런 계획들을 세운다. 작년에 했던 계획을 또 세우기도 하고, 벌써 몇년째 같은 계획을 세울 때도 있지만 새해가 되면 새롭게 마음을 다져 먹는다. 새해 계획이 작심삼일 된 것도 있고, 한 두달 간 것도 있고, 지금껏 하고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얼마만큼 실행에 옮겼는가에 따라 아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365일이 지나면 새해를 맞게 되고, 또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다짐을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지난해 말 10년 다이어리를 샀다. 이 다이어리는 매일의 일상을 간단하게 몇줄로 정리해 적을 수 있도록 꾸며졌다. 10년간의 자신의 삶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게 이 다이어리의 장점이다. 오늘의 일상을 메모하면서 작년 오늘, 그 작년 오늘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재밌다. 5년 뒤, 10년 뒤 이 다이어리를 뒤적여보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도 궁금하다. 산 속 카페에서의 힐링 새해 이 다이어리에 올 한해 계획을 10여가지 적었다. 그리고 며칠전 조심스레 그 계획들을 들여다봤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지키지 못한 것이 더 많다. 책을 많이 읽겠다는 것도, 운동을 열심히 하겠다는 것도 한참 미달이다. 취미로 배우는 그림 그리기는 보통 수준, 열심은 아니지만 결석은 별로 안한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 중 잘 지킨 것은, 여행을 많이 다닌 것이다. 틈나는대로 혼자서도 다니고, 여럿이 어울려서도 다녔다. 그래서인가 올 한해, 좋았다는 생각이다. 12월 중순 휴일에 지인들과 평창의 산골에 위치한 호젓한 찻집에 다녀왔다. 산 속에 위치한 카페는, 이런 곳에 누가 커피를 마시러 올까 싶었는데 뜨문뜨문 입소문을 듣고 찾아 들었다. 좌석도 몇개 되지 않는 찻집에서 LP판 음악을 들으며 맛과 향이 다른 드립커피 몇잔에 취해 있으려니 저절로 힐링이 되는 것 같았다. 카페 주인장 부부는 별 욕심없이, 하루 몇잔의 커피를 파는 것에 만족하며 거기 오는 이들이 즐거우면 자신들도 즐거운 양 그렇게 사는 것 같았다. 그집 화장실에 이런 글이 붙어 있었다. 결심한 일이 잘 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강박관념을 버릴 것/ 사람이든 일이든 내쪽에 유리한 방향으로만 계산하면서 대하지 말 것/ 무엇에 대해서든 기대치는 항상 가장 낮은 쪽 가장 아래 쪽에 둘 것/ 나라는 한 개인보다 인간이라는 전체에 대해 보다 많이 생각하고 사고 할 것/ 음악, 미술, 문학, 예술들에 좀 더 깊어 질 것/ 모두에게 그리고 무슨일에나 진정성을 갖고 대할 것 그 글 아래엔 어느 심리학자의 새해 각오라는군요라고 적혀 있었다. 화장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눈 덮인 산 풍경을 그냥 멍하니 쳐다도 보고, 장작을 때 뜨끈한 의자에서 지지기도 하고, 수다도 떨고 그러다 웃음보를 터뜨리기도 하며 몇시간을 보냈다. 빈둥대며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잘 쉬고, 눈쌓인 길이 미끄러워 차를 못갖고 올라와 잠깐 걸어 내려가는데 마을에서 또 하나의 글을 만났다. 그 마을이 별천지마을이란 것도 그때 알았다. 여행에서 만난 좋은 글 별이 유난히 많아서 별천지인가? 아님 때묻지 않은 자연과 아름다운 풍광을 별천지라 한건가? 하며 글을 읽어 내렸다.어느날 내가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이 나를 만난 다음에는/ 사는 일이 더 즐겁고 행복해져야 한다. 그래야한다고, 단호함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찻집 화장실에서, 마을 길에서 만난 두 개의 글이 내 자신을, 내 삶을 들여다보게 했다. 오늘은 이래서 또 의미있는 시간이구나 생각했다. 저물녘 조심스레 산 속을 빠져나가며 그냥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또 한해가 저물어 간다. 새해가 되면 또 이런 저런 계획들을 세우겠지. 난 내년엔 책을 한달에 몇권 읽겠다, 몸무게를 몇 kg 줄이겠다, 운동을 매일 얼마나 하겠다라는 식의 계획은 세우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찻집 화장실에서 봤던 문구, 별천지 마을에서 만난 글귀를 맘에 새기는 것을 새해 계획으로 삼으려 한다. 이젠 삶의 의미, 삶의 가치 이런 걸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우리도 무연사회로 간다

맥도날드 할머니 권하자씨는 한국외국어대 불문과 59학번으로 1976년부터 1991년까지 외무부 직원으로 일했던 재원이다. 권씨가 맥도날드 할머니로 알려지게 된 것은 3년전 한 TV프로에 방송됐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밤 9시가 되면 24시간 문을 여는 서울 정동의 맥도날드에 나타나 새벽 4시까지 새우잠을 자다가 사라진다고 해 그런 별명을 얻었다. 맥도날드에서 7시간의 밤을 보낸 그는 교회에서 다시 4시간을, 이후 광화문 스타벅스 등에서 13시간이나 신문이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맥도날드 할머니가 지난 7월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3개월 뒤인 10월 초에 알려졌다. 지난 5월 서울역 인근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그녀는 국립중앙의료원 응급실에 이송됐으나 암이 복막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치료가 어려워 7월에 요양병원으로 옮겨졌고, 입원 8일만에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 중구청과 병원에서 유족을 수소문했지만 연락이 닿지않아 무연고 변사자로 처리됐고, 서울시립 무연고 추모의 집 납골당에 안치됐다. 맥도날드 할머니의 무연고 고독사 지난해엔 기러기 아빠로 지내던 한 지방의 국립대 명예교수가 죽은 지 한달이 지난 후에 발견된 사례도 있었다. 많은 매체들에서 고독사라는 용어를 써서 이를 보도했다. 이 사건이 충격적인 것은 그간 고독사가 빈곤층 독거노인이나 노숙자 등 사회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서 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고독사라는 게 경제적 상태를 떠나 혼자 사는 이들에게 발생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제 혼자 살다 혼자 죽는 고독한 세상이 도래했다. 연고 없이 혼자 지내다 숨져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고독사 소식은 앞으로 닥칠 고령사회의 그늘을 경고하고 있다. 2010년 일본 NHK는 무연사회(無緣社會)라는 특집방송으로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홀로 살다 죽은 고인의 유족이 유체 인수를 거부해 조문객도 없이 치러지는 장례 과정이 장례식보다는 사체 처리과정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무연사(無緣死)는 모든 인간관계가 끊긴 상태에서 혼자 죽어 아무도 거두어 줄 사람이 없는 죽음을 뜻한다. 신원 혹은 연고자 확인이 안되는 이런 죽음이 전국적으로 3만2천여명에 이르는 일본사회를 NHK 특별취재팀은 무연사회라고 이름 붙였다. NHK는 고령화와 저출산, 개인주의가 초래한 일본의 병리적 사회 현상인 무연사회를 중점적으로 파헤쳤다. 일생에 단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 독신의 비율인 평생미혼율의 증가, 비정규직의 증가로 인한 무너진 사회 안전망, 30~40대로 퍼져가는 정서적 무연감(無緣感) 등으로 일본은 혼자 살다 혼자 죽는 것이 점점 자연스런 사회가 되고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다. 우리나라의 노령화 속도는 기네스북 감이다. 독거 노인의 수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2010년 인구주택 총조사에서 1인 가구는 414만여 가구로 5년간 30% 넘게 급증했다. 이중 독거노인의 수는 125만여명에 이른다. 그러면서 최근 고독사하는 노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무연고 고독사는 2009년 587명, 2010년 636명, 2011년 727명으로 계속 증가 추세이고, 이 중 60세 이상이 전체의 48.6%를 차지하고 있다. 무연고 고독사가 남의 일로 치부되지 않는 이유는 올해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613만 7천702명으로 전체 인구의 12.2%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2025년에는 1천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혼자 살다 혼자 죽는 비극 줄여야 상황이 이러하자 일본처럼 가족 대신 유품을 정리해주는 전문업체들도 생겨나고 있다. 1인 가구가 늘면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채 고독사하는 경우는 몇년 전부터 있었지만 마지막 마무리까지 타인의 손에 맡기는 세상은 우리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연사회는 이제 이웃나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개인적인 삶을 중시하는 도시생활, 하나의 트렌드가 된 싱글족, 가족 해체와 맞물려 무연사회는 젊은 세대가 미리 준비해야 할 현대인의 미래상이 됐다.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세종대왕 뿔 나시겠다

얼마전 잘 아는 병원장이 한 모임에서 요즘 젊은이들이 자주 쓰는 말이라며 맞춰보라고 했다. 병원장은 간호사 등 젊은 친구들과 소통 하려면 줄임말을 알아야 할 것 같아 몇가지를 핸드폰에 적어다닌다고 했다. 그가 던진 단어는 흠좀무 안습 금사빠 깜놀 냉무 같은 것들이었다. 자리를 같이했던 3명이 맞춘 단어는 안습과 깜놀 정도였다. 안습은 안구에 습기차다, 즉 눈물이 난다는 뜻으로 슬프거나 안타까울 때 쓰는 표현이란다. 깜놀은 깜짝 놀라다의 줄임말이다. 나머지를 병원장이 설명해 주는데 그도 흠좀무는 생각이 안난다고 했다. 단어를 적어놓으면 생각이 날 줄 알았는데 자주 쓰지 않다보니 잊어버린 것이다. 홀대받고 파괴되고, 한글 수난 듣도 보지도 못한 흠좀무는 흠 이게 사실이라면 좀 무섭겠다라는 뜻이란다. 세 글자만 보고는 상상이 되지 않는 생소한 뜻이다.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냉무(내용이 없음)도 이상스럽기만 하다. 이런 단어는 생선(생일선물), 생파(생일파티), 버카충(버스카드충전), 멘붕(멘탈붕괴) 처럼 단어를 압축시킨 것부터 ㅊㅊ(친구 추천), ㄱㄱ싱(고고싱의 줄임), 즐~(즐겁다는 뜻), 즐(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비꼴 때), - -(황당하거나 어이없을 때) 등 뜻 모를 부호까지 부지기수다. 한글이 수난을 겪고 있다. 망가져가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래어, 비속어가 난무해 사회적 소통에 문제를 일으킨다. 문법에 맞지 않는 높임법과 줄임말도 한글 파괴의 주범이다. 과도한 높임법은 사람이 아닌 사물을 높여 부르는 것으로 많은 이들이 혼동해서 쓴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노 한잔 나오셨습니다나 이 옷은 30% 할인 되십니다라는 식이다. 우스꽝스러운 사물 존칭은 흔히 백화점 존칭이라고 하는데 쇼핑센터 등에 가면 자주 듣게 된다. 높임말은 사람이 대상이 돼야지 엉뚱한 대상을 높이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청소년들이 즐겨쓰는 과도한 줄임말, 외래어와 우리말을 섞어 만든 신조어, 쩐다 빡친다 등의 비속어, 조아 시러 등의 틀린 맞춤법 등 잘못쓰거나 비틀어쓰는 사례도 허다하다. 인터넷, 휴대폰을 통한 통신 사용이 늘면서 한글의 망가짐은 더욱 가속화 됐다. 이들의 언어는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해 외계어라고도 한다. 문제는 언어 습득력이 놓은 청소년들이 이런 언어를 빠르게 받아들이면서 정확한 한글 교육 및 보급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상당수 학생들이 맞춤법이 서툰 것도 줄임말의 남발 때문으로, 표준어와 구별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과 글을 보존발전시켜야 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한글 파괴에 가세하고 있다. 정부 기관과 지자체의 상징이나 구호, 정책 이름, 공문 등에 영어가 남용되고 영어와 한자, 한글을 뒤섞은 국적 불명의 조어(造語)가 넘쳐나고 있다. Its 대전 Go~興! 온마을교육 내가 그린Green 희망Job氣 등 정체불명의 외래어가 범벅돼 있다. 국어기본법 제4조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국어의 발전과 보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안타깝다. 한글, 세계 공용문자로 키우자 한글은 전 세계 언어학자들로부터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문자라는 칭송을 받았고, 세계 각국에서 한글의 과학적인 체계성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언어는 존재하되 문자가 없는 소수민족의 사라져가는 언어를 기록하기 위해 세계 언어학자들은 한글 채택을 권장하고 실제로 많은 소수민족이 한글 사용을 검토하는 상황이다. 최근 해외 세종학당에서 한국어와 한글교육 열풍이 일고 있기도 하다. 한글이 머지않은 장래에 세계 공용문자가 될 것이라 예측도 나온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한글을 홀대하고 망가뜨리고 있다. 세종대왕이 뿔 나실 일이다. 한글 경시풍조를 보다 못한 사람들은 국어 모독죄라도 만들어 망가지는 우리 말과 글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내일은 한글 탄생 567주년 되는 날이다. 올해 한글날은 23년만에 공휴일로 돌아와 하루 쉰다. 쉬는 날 하루 더 생겨서 좋다가 아니라 한글의 오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날이었음 좋겠다.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아픈 사람들

요즘 어깨와 목이 아파 병원을 전전하고 있다. 어느 날부터 뒷목이 뻣뻣하더니 어깨에 돌을 얹어놓은 듯 무겁고 편두통까지 있어 일상생활이 불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정형외과에 가니 근막통증증후군이란 진단이다. 컴퓨터 작업을 오래 하는데서 비롯된 직업병으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스트레칭을 많이 하란다. 약을 먹으며 통증클리닉에도 다녀보고 침도 맞고 경락마사지도 받고 있지만 쉽게 낫지 않는다. 어느덧 두달이 다 돼간다. 더이상 방치하면 안되겠다 싶어 지인의 소개로 지난 주부터 회사 근처 한의원에 매일 가고있다. 틈나는대로 스트레칭도 하고 뭉친 근육을 푸느라 마사지도 받고있다. 버거운 삶 넋두리 병원서 풀어 다니는 한의원내 풍경이 이색적이다. 그동안 다닌 한의원은 침대에 누워 주로 아픈 부위에 침을 맞고 전기 마사지와 핫팩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한의원에선 방석을 깔고 벽에 기대 앉은 채 침을 맞는다. 거의 한시간 동안 손과 발에 주로 맞는다. 중간에 한번 침을 빼고 다시 놓는다. 세개의 방이 있는데 모두 꽉 들어찬다. 한 방에 보통 10명 내외의 사람들이 들어간다. 시간대별로 수십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들어가 침을 맞고 일제히 나온다. 그리고 계산하러 줄을 서고 다음 날짜를 예약하고 나가는 순이다. 같은 방에서 얼굴을 맞대고 침을 맞다보니 한의사가 환자와 나누는 얘기, 환자들끼리 나누는 얘기, 침놓을 때 아파서 신음하는 소리까지 다 들린다. 아픈 사연들이 제각각이다. 어느 아주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는데 주방에서 후라이팬을 들었다놨다 하기를 하루 수백번 하다보니 어깨와 팔이 아파 병원을 찾았다고 했다. 의사가 조금 쉬어야 한다고 말하니, 쉴 형편이면 좋겠다고 한숨 짓는다. 60대 중반의 또 다른 아주머니도 손목과 어깨가 아파 침을 맞으러 왔단다. 맞벌이 아들의 손자를 봐주느라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고 한다. 주변에 마음놓고 맡길만한 어린이집이 없어 힘들어도 봐줘야 할 형편이란다. 폐휴지를 주워 생활한다는 등이 많이 굽은 할머니도 있다. 깔끔한 모습으로 나름 단장을 하고 온 듯한 할머니는 침을 맞으며 꾸벅꾸벅 존다. 주름진 얼굴에 조는 모습이 안쓰럽다. 취업 준비생이라는 한 젊은이는 두통이 심해 침을 맞으러 왔단다. 스트레스가 주 원인으로 보여진다. 외모는 젊지만 표정이 어둡다. 젊은 한의사들은 방마다 침을 놓으며 환자들과 잠깐이지만 이야기를 나눈다. 아픈 부위가 좀 나아졌는지, 또다른 아픈 곳은 없는지 물으며 침을 꽂는다. 잠은 잘 자는지, 변은 잘 보는지, 소화는 잘 되는지도 묻는다. 아마도 단골(?)인 듯한 사람들에겐 시골에 잘 다녀왔느냐, 손주는 잘 크느냐, 요즘 장사가 힘들지 않느냐는 등의 얘기도 한다. 그러면 환자들은, 특히 나이 든 아주머니, 할머니일수록 이런 저런 말씀을 많이 한다. 의사는 예~ 예~하며 얘기도 들어주고 호응도 해주고 위로도 해준다. 사람들은 병원에 와서 단지 침만 맞는게 아니고, 잠깐이지만 아픈 곳, 답답한 것을 토로한다. 정치인 나서 서민들 병 고쳐야 환자들끼리 두런두런 나누는 얘기도 우리네 현실적인 것들이다. 이사를 가야하는데 전세값이 너무 올라 외곽으로 나가야할 것 같다는 얘기, 물가가 너무 올라 과일 하나 사먹기 겁난다는 얘기,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유출때문에 고등어ㆍ동태는 먹으면 안된다, 회도 먹으면 안된다는 얘기를 한다. 또 아들이 취업이 안돼 아주머니가 근처 대형마트에 나가 일을 시작했다는 얘기, 재수생 엄마인데 대학입시제도가 자주 바뀌고 복잡해 머리에 쥐가 난다는 얘기도 들린다. 며칠 동안 잠깐 병원에서 들은 얘기지만 서민들의 세상살이가 녹녹치 않음을 보여준다. 이 서민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고 낫게 해줄 사람은 의사가 아닌 듯하다. 근본적으로 정치인들이 귀 기울여야 하고 대통령이 나서야 할 일이다. 그들이 나서 서민들의 걱정을 덜어주고 힘이 돼줄 때 병원에 오는 사람, 아픈 사람도 줄어 들게 될 것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화장장, 제발 우리 마을로…’

화성시는 지금 화장장 유치경쟁으로 뜨겁다. 서로 자기네 동네가 적격지라며, 제발 우리 동네로 와 달라고 유혹한다. 화성시가 공동형 종합장사시설을 추진하면서 후보지를 공개모집한 결과 모두 6개 마을이 유치를 신청했다. 서신면 궁평2리, 봉담읍 상2리, 매송면 숙곡1리, 매송면 송라1리, 비봉면 삼화2리, 비봉면 양노2리 등이다. 이들 마을은 유치 신청서에 저마다 동네 장점들을 적어냈다. 어떤 마을에선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 형태의 명당을 자랑했고, 다른 마을에선 주변에 국도와 고속도로가 있어 군포ㆍ의왕ㆍ시흥까지 30분 거리라고 교통 접근성을 내세웠다. 무슨 대기업의 사업장을 유치하는 것도 아닌데 경쟁이 치열하다. 화장장을 서로 유치하겠다고 주민들이 발벗고 나선 사례는 전국에서 처음이 아닌가 싶다. 화성시, 6개 마을서 유치 신청 화장장과 장례식장 등을 갖춘 장사시설은 대표적인 혐오시설로 여겨져 우리 동네만은 안된다고 반대해 건립이 어렵다. 경기도에서만도 안산, 부천, 포천, 이천, 연천, 김포, 시흥 등 여러 지역이 예산과 부지를 확보하고 몇 년간 추진하다 주민들 반대로 무산됐다. 이런 현실을 볼때 화성시의 유치경쟁은 뜻밖이다. 우리 마을엔 절대 안된다는 님비(NIMBY: Not In My Back Yard)가 우리 마을로 제발 와달라는 핌피(PIMFY: Please In My Front Yard)로 바뀐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제일 큰 이유는 과감한 인센티브다. 장사시설을 유치하는 마을에 300억원의 지원금을 주기로 한 것이다. 화성시 공동형 종합장사시설은 화성시를 비롯해 부천 안양 평택 시흥 군포 의왕 과천시 등 자체 화장시설이 없는 인근 8개 지방자치단체가 공동으로 짓는다. 30만㎡ 부지에 화장로 10기, 장례식장, 봉안당, 자연장지 등을 갖출 예정으로 건립비가 1천200억원에 이른다. 220억원의 국ㆍ도비를 뺀 980억원을 참여 자치단체가 나눠서 낸다. 화성시는 지난 5월 7개 시와 종합장사시설 건립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화장 수요는 늘지만 화장시설이 없던 자치단체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생의 해법을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자치단체들은 유치마을에 마을기반시설과 주민복지시설 건립 등에 300억원을 지원키로 했다. 시골 동네에선 큰 돈이다. 공장 하나 없는 마을에 일자리가 수십개 늘고, 주변에 상가가 생겨 지역경제도 살아나게 된다. 마을주민들이 실리를 선택한 것이다. 두 번째는 혐오시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아직도 화장장이나 쓰레기소각장은 물론 노인요양시설 등도 기피시설로 인식해 자기 동네 입지를 반대한다. 하지만 화성시 주민들은 2010년 8월 봉담읍에 문을 연 광역소각장 그린환경센터를 보고 인식이 달라졌다. 환경오염 없는 첨단 소각시설내에 수영장과 피트니스센터가 들어서고, 300억원의 지원금으로 마을이 달라진 모습을 보고 장사시설 유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소통ㆍ인센티브가 주민 마음 열어 세 번째는 주민과의 소통이다. 화성시는 상당수의 자치단체가 그렇듯 대상 부지를 선정하고 그냥 밀어 부치지 않았다. 주민대상 설명회를 4~5차례 열고, 장사 전문가를 초청해 첨단 화장장은 공원처럼 꾸며져 주민 편의시설이 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 결과 6개 마을에서 주민간 토론을 거쳐 70%가 넘는 동의를 얻어 유치를 신청했다. 반면 안산시는 600억원이라는 인센티브를 내걸고 장사시설 후보지를 응모했지만 무산됐고, 추후 양상동으로 추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주민과의 소통이 제대로 안돼 자치단체에 대한 불신만 커졌고, 민관ㆍ민민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화성시는 지리적ㆍ환경적 장점 등을 내걸고 주민동의가 잇따르는데 반해, 안산시는 시의 강력한 추진의지에도 불구하고 정반대 상황에 직면해 무산된 것이다. 사례에서 보듯 소통은 중요하다. 단체장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활동을 왕성하게 한다고 소통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이 진정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대화를 나누고 욕구를 충족시켜 줄때 화성시처럼 시가 원하는 더 큰 것을 얻어낼 수 있다. 그러는 사이 님비는 핌피로 바뀌게 된다. 지방선거가 1년도 남지않았다. 시장ㆍ군수들이 부쩍 더 바빠졌다. 소통이란 이름으로 SNS에 자신들을 홍보하느라 정신이 없다. 화성시의 장사시설 사례를 통해 소통이 어떤 건지 배우는 계기가 됐음 싶다.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갈 데까지 간 지방공기업들

화성시가 2008년 설립한 화성도시공사가 대규모 개발사업이 잇따라 부진에 빠지면서 빚더미에 올라있다. 2010년 경기도시공사와 공동으로 5천370억원을 투자해 서신면 전곡리 일대에 조성 중인 전곡해양산업단지는 지금까지 세차례 분양을 실시했지만 분양률이 9.9%에 그치고 있다. 1천500억원을 투자해 작년 말 완공한 635가구 규모의 조암 공동주택사업도 분양률이 50%에 못 미친다. 화성도시공사의 부채는 작년 말 2천221억원으로 자본 대비 부채비율이 333%에 이르고 있다. 경기도시공사도 각종 개발공사 실패로 빚에 허덕이고 있다. 경기도시공사가 현재 진행 중인 개발사업은 광교신도시 등 택지지구 7개, 고덕국제화단지 등 산업단지 7개, 남양주 진건지구 등 주택지구 6개 등 모두 25건에 달한다. 이들 사업 중 미분양 물량이 2조7천503억원에 이른다. 평균 분양률은 50%대에 불과하고 택지지구는 79%가 미분양이다. 경기도시공사는 작년 말 기준 8조4천356억원의 부채를 안고 있다. 수 조원 부채 지자체 거덜날 판 인천도시공사는 택지산업단지 개발뿐 아니라 호텔 건설과 교육사업 등 회사 설립 목적에서 벗어난 각종 사업에 투자했다가 잇따라 실패했다. 2011년 10월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분양한 1천63가구 아파트는 계약률이 불과 1.5%(16가구)에 그쳤다. 이로 인해 작년 말 빚이 5년 전의 3.6배인 7조9천271억원으로 급증, 파산 위기에 몰려 있다. 경전철사업으로 5천억원에 이르는 빚더미에 오른 용인도시공사는 부채비율이 500%에 육박해 감독기관인 안전행정부로부터 청산권고까지 받았다. 그런데도 최근 5억여원에 달하는 임직원 성과급을 추진해 모럴해저드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지방자치단체 산하 공기업인 도시공사들의 실태다. 이들 도시공사는 엄청난 빚을 내 산업단지와 주택지구, 경전철 등의 사업을 추진했지만 이자도 못갚아 만성적자와 부채에 허덕이고 있다. 호황을 기대하고 대형 개발사업을 벌였지만 사업성 과대평가와 부동산 경기침체 등으로 투자비 대부분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지방공기업은 1998년 117개에서 꾸준히 늘어나 현재 463개에 이른다. 직원은 2만5천명을 웃돈다. 2011년 말 현재 총자산은 160조원, 부채는 69조1천억원이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년간 부채가 21조3천억원 늘었다. 지자체들의 무분별한 공기업 설립 경쟁이 부실경영을 불렀다. 의욕만 앞세워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다 보니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빚더미에 올라앉은 지방공기업이 한 둘이 아니다. 재정자립도가 극도로 낮은 지자체 살림이 거덜날 판이다. 지방공기업 부실이 지자체 파산이라는 재앙을 부를 것이란 전망이다. 지방공기업의 방만한 운영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최근 당ㆍ정이 나섰다. 새누리당과 안전행정부가 지방자치단체 출자ㆍ출연기관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법률을 연내 제정, 지방공기업의 경영부실을 중앙 차원에서 관리 감독하기로 한 것이다. 정부 통제, 엄정하되 원칙있게 이 법안은 지방공기업의 설립절차, 인사예산운영, 존폐 여부 등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게 된다. 일정 규모 이상인 지방공기업은 안행부의 타당성 검토를 거쳐야 설립이 가능하고 설립 이후에도 매년 지방자치단체장의 경영진단을 받도록 했다. 실적에 따라 자치단체장은 중앙공기업처럼 사장 해임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중앙의 간섭을 반길 일은 아니지만 지방공기업의 부실경영과 도덕적 해이를 바로 잡겠다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대신 그 통제가 실효성 있어야 한다. 개혁은 엄정하되 분명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 지방공기업 설립까지 일일이 통제하는 건 또다른 갑의 횡포로 비쳐질 수 있고, 지방자치의 참뜻이 왜곡될 소지도 있다. 부실경영을 핑계로 중앙정부 출신 관료들이 줄줄이 지방공기업의 수장으로 오는 낙하산 인사 등도 있어선 안된다. 중요한 건 지방공기업 스스로의 혁신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DMZ 60년, 그 미래는

허리 잘린 국토의 최전선, 철원의 중부전선 백골부대 멸공 오피(OP)에서 철조망 휘어감긴 삼엄한 철책 너머로 북녘의 산하를 바라본다. 갈 수 없는 땅이라서 더욱 애틋한 정감을 불러 일으키는 산풍경. 철조망이 아니라면, 멧부리마다 올라앉는 초소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평화로운 풍경일까. 남과 북이 살벌하게 대치한 분단 현장은 철책선이 겹겹이 둘러쳐져 있고 긴장과 정적이 감돈다. 더 이상 발을 내디딜 수 없는 DMZ(비무장지대)엔 언제 따사로운 봄이 올 지 알수가 없다. 이곳에서는 한여름에도 한기가 느껴질 듯 싶다. 너른 평원 위로 짙푸른 물줄기 하나가 도도히 흐른다. 철책선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새처럼, 금강산 아래 장암산 남쪽 기슭에서 흘러내린 한탄강이 분단의 벽을 넘고 있다. 냉전의 산물, 남북분단의 장벽 2004년 경기일보에 한반도의 보고 한탄강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여러 차례 북한과의 접경지역을 다녀왔다. 취재지역이 DMZ과 접해있거나 민간인통제선 안쪽이 많아 자주 군부대 허락을 받아야 했고, 곳곳에 묻혀진 지뢰를 밟지않을까 가슴 조렸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내 나라 땅이면서도 더는 갈 수 없는 막 다른 곳에 서 있자니, 가슴 한켠이 아리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났었다. 올해로 한반도의 DMZ(Demilitarized Zone)이 만들어진지 60년이다. 1950년 6월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이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에 의해 휴전되면서 생겨났다. 한국전쟁이 종전(終戰) 아닌 정전(停戰)으로 마무리되면서 육상의 군사분계선(MDL)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씩 양국의 군대를 후퇴시키기로 약속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은 남ㆍ북한이 아닌, 유엔군이 관리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넘었서도, 세계 냉전체제가 무너진 지 한참 됐어도 DMZ는 여전히 세계 냉전사의 생생한 현장으로, 남북분단의 장벽으로 살아있다. 전쟁의 상처와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곳은 오랜 세월 발길이 닿지 않음으로 해서 자연생태계가 순수하게 보존돼 있다. DMZ 인접지역엔 식생우수지역, 습지, 희귀식물군 서식지, 자연경관지 등 다양하고 중요한 자연생태지역이 존재하며 고등식물과 척추동물 약 2천930여종이 서식분포하고 있다. 한반도에 서식하는 동식물종의 30%에 해당하며 이중 두루미, 저어새, 수달, 산양 등 보호가 절실한 멸종위기종이 82종이나 된다. 또 동아시아의 철새 이동경로상에 위치해 다양한 철새 서식지로도 중요하다. 이로 인해 DMZ는 국제적으로 생태적지질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DMZ 주변 접경지역은 그동안 과도한 군사시설보호구역 지정 및 취약한 산업기반으로 소외돼 왔지만 통일이 이뤄지거나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한반도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에 적대와 단절의 접경지역에서 화해와 통합의 접경지역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DMZ와 관련된 여러 계획이 접경지역과 분리된 채 진행되고 있지만 DMZ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접경지역을 고려한 발전전략이 필요하다. DMZ의 배후도시인 접경지역에 산재해 있는 통일안보역사문화생태자원을 활용해 많은 사람이 방문할 수 있도록 하고 지역주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평화의 상징, 세계의 DMZ으로 DMZ가 갖는 세계평화의 상징성과 생태관광 가치를 극대화 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등재뿐 아니라 지질공원(Geo Park),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러려면 DMZ의 반쪽이 소재한 북한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때마침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 방문중 의회 연설에서 DMZ내에 세계평화공원을 조성해 평화와 신뢰가 자라는 계기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통일부는 DMZ 세계평화공원이 조성되면 남북간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신뢰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유엔 등과 협의해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범정부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DMZ 60년, 세계속의 새로운 DMZ의 모습이 기대된다.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나누면, 내가 행복하다

2007년 2월, 아프리카의 심장 콩고민주공화국의 땅을 밟은 적이 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 드넓은 초원과 동물의 왕국 등 감상적인 아프리카를 생각하며 떠난 여유로운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접한 모습들은 오래도록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 군부 쿠데타와 독재, 내전 등으로 피폐화된 콩고민주공화국은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전 세계에 구호의 손길을 요청하고 있었다. 영양실조로 굶어 죽는 사람, 더러운 물을 먹고 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 별 것 아닌 상처가 썩어 들어가 병원에도 못 가보고 죽는 사람, 태어날 때부터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 빵 한 조각에 유린 당하는 어린 소녀들. 그곳의 풍경은 열악하다기 보다 처참했다. 하지만 유난히 많은 아이들의 눈망울은 검은빛 피부 속에서 더없이 순수하고 맑게 빛났다. 그래서 맘이 더 아프고 저렸다. 콩고서 만난 아니타, 딸이 되다 그때 만난 한 여자아이가 가끔 생각난다. 콩고에서도 깡시골에 속하는 풍구루메에 사는 아니타(Anita)다. 당시 8살이었는데 학용품과 선물을 받아들고도 기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처음 만나는 나에게 꼭 안겨 수줍어 하면서도 환환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따뜻하게 포옹하며 서로 진한 뭔가를 나눴다. thank you를 연발했던 아니타 아버지의 선한 눈빛이 지금도 기억난다. 이후 적어도 1년에 한번씩은 아니타의 사진을 받아보는데 해마다 부쩍 크고 있다. 딸같은 생각이 든다. 아니타를 만나게 된 건 월드비전을 통해서다. 콩고에 가기 전 두 아이와 결연을 맺었는데 거기서 아니타를 만나게 된 것이다. 무토시에 사는 남자아이 바네사(Vanessa)는 사진으로만 만나고 있다. 매년 건강 상태는 어떤지, 학교엔 잘 다니는지, 관심사가 뭔지 등이 편지로 전해져 온다. 이들에게 매달 후원을 통해 작은 도움을 주고있다. 적은 액수지만 현지에서 예방접종도 받고 밥도 굶지않고 학교에도 갈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지구촌 저편의 어떤 아이가 나의 작은 도움으로 밝고 건강하게 살고있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경기일보엔 제3세계 아이들과 결연을 맺은 기자들이 많다. 케냐, 콩고, 가나, 이디오피아, 네팔, 캄보디아 등 도움이 손길이 절실한 세계 여러나라의 어린이들을 후원하고 있다. 이런 인연은 경기일보와 월드비전이 1998년부터 사랑의 빵 나누기 캠페인 등을 통해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지구촌의 어린이들을 돕고있기 때문이다. 매년 월드비전이 도움을 주고있는 현장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때 취재에 동행했던 기자들이 1~2명의 아이들과 결연을 맺고 꾸준히 후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후원은 굶주리고 가난한, 그리고 병든 아이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전해준다. 사랑의 점심나누기 희망 대장정 나눔문화 확산에 큰 역할을 하고있는 경기일보가 창간 25주년을 기념해 월드비전과 함께 사랑의 점심 나누기 희망대장정에 나섰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다. 도내 결식아동을 위해, 또 제3세계 굶주리는 아이들을 위해 벌이는 사랑의 점심 나누기 캠페인은 지난 3일 군포에서 시작, 2개월여간 도내 31개 시ㆍ군을 순회하며 전개된다. 모금액은 국내 어린이들에게는 교육비와 식비, 도시락 나눔, 주거비, 의료비 등의 형태로 전달되며,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저개발국가 어린이들에게는 학교와 식수펌프 등으로 지원될 예정이다. 우리가 점심 한끼를 굶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즘엔 간헐적 단식이 유행이어서 하루 한끼만 먹고 두끼를 일부러 굶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점심 한끼를 먹는 것이 생명을 이어가는 절박함일 수 있다. 그러기에 사랑의 점심 나누기를 통해 위기의 아이들에게 점심을 지원하는 것은 단순한 밥의 의미를 넘어선다. 한끼의 점심은 그들에게 생명이다. 미래의 꿈과 희망을 갖게하는 양식이다. 나눔은, 그래서 소중하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먼저, 존경받는 의원이 되세요

지방의원에게 공무원은 봉이다. 공무원에게 지방의원은 수퍼갑이다. 지방의원은 공무원 앞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고압적인 자세로 윽박 지르고 호통을 치기 일쑤다. 유일하게 폼 잡고 큰 소리 치는 대상이 공무원인 것이다. 공무원들 입에서 나온 얘기고, 늘 가까이서 지켜보는 기자들이 하는 얘기다. 지방의원들에 대한 일반 시민의 여론은 좋은 편이 아니다. 초창기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함량 미달 자질 부족 의원들이 수두룩하다. 매년 수천만원의 의정비가 아까울 정도로 활동이 미미하고, 1년에 조례 한건 발의하지 않는 의원들이 부지기수다. 지방의원들의 불ㆍ탈법, 비리도 끊이지 않고있다. 집행부를 감시하고 견제해야할 의원들이 뇌물수수, 횡령, 폭력, 사기 등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지경이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관광성 외유 논란, 경제상황이나 지자체 재정은 아랑곳않는 의정비 인상, 의장단을 선출할 때마다 벌어지는 패싸움과 몇개월씩의 파행, 업무추진비를 쌈짓돈처럼 사용하다 적발된 사례 등 주민을 위해 봉사하는 지방의원의 모습보단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한 구태도 여전하다. 유급보좌관제 도입 비판 거세 국민권익위원회가 지방의원의 청렴하고 공정한 직무 수행을 위해 마련한 지방의회 의원 행동강령을 상당수 지방의회가 거부하고 있는 것도 비판 대상이다. 경기도의회도 조례를 미루고 있는 상태다. 국회의원에게 국회의원 윤리강령이, 공무원에게 공무원 행동강령이 있듯이 지방의회도 제도적 장치를 만들자는 것인데 이를 거부하는 저의가 뭔지 의심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이 지난 14일 지방의회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연내 광역의회에 유급보좌관제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연 수십조원에 이르는 광역자치단체의 예산을 다루고 시민생활과 직결된 일을 하는 광역의원들에게 일할 여건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기초의회도 단계적으로 유급보좌관제 도입을 검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유 장관의 유급보좌관제 발표 이후, 중앙 언론은 강경한 어조로 일제히 반대하는 사설들을 실었다. 지방의회 유급보좌관제 도입은 시기상조 말타고 경마 잡히자는 유급보좌관 타령 유정복장관, 지방의원 유급보좌관제 발상 접으라 지방의회가 유급보좌관 없어 이 모양인가 광역의원, 유급보좌관 없어 의정활동 못했나 . 심지어 지방자치 활성화를 외치던 지방신문들까지 서두르면 안된다, 재고하라며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유급보좌관제에 대해 지방의원들만 찬성할뿐 지방자치단체와 주민, 시민단체 등에서 모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지방의원에 대한 이미지가 비호감인데, 잘됐다고 호응하는 이가 있을 리 없다. 애정이 없는데 달가울 리 없다. 광역의원에게 1인당 수천만원씩의 유급 보좌관을 두는 것은 열악한 지방재정을 축내는 일로 볼 수 밖에 없다. 반대 여론이 거세자 안행부는 갑자기 의정활동에 불성실한 의원에겐 의정활동비를 주지않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특별한 사유없이 결석하면 해당 일수만큼 활동비를 깎고, 법규 위반 등으로 출석정지 징계를 받아도 활동비를 깎는다는 것이다. 지방의원들이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의정활동에 임하라는 것이지만, 의원들 입장에선 기분 나쁜 간섭이다. 지방의원들은 유급보좌관제를 쌍수를 들어 반대하는 것도, 결석하면 의정활동비를 깎겠다는 것도, 모두 언짢을 수 밖에 없다. 자질 향상 통해 신뢰회복을 하지만 이는 지방의회나 지방의원들이 지방자치의 주인인 지역주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들을 바라보는 정확한 시선이다. 자존심이 상한다면, 기분이 나쁘다면 구태를 버리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야 한다. 자질 향상과 자정 노력에 힘쓰고, 전문성을 키우고, 존경받는 의원이 되도록 해야 한다. 신뢰가 쌓이고 존경받는 지방의원이 되면 유급보좌관은 지자체와 주민, 시민단체 등에서 먼저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죽음으로 내몰리는 복지 공무원들

최근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복지직 공무원이 잇따르고 있다.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가족과 사회복지사들은 전했다. 지난달 19일 울산에선 9급 복지직 공무원 안모씨가 업무 스트레스로 너무 힘들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안씨는 지난 2월 보육비 지원 신고 900건을 처리했고, 저소득층 학자금 지원 신청 300여건을 처리하느라 밤 12시에 퇴근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2월26일엔 성남시 공무원 강모씨가 역시 일이 너무 힘들다는 유서를 남긴채 자살했다. 그녀는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내용과 함께 5월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에게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내용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에 앞서 1월31일엔 용인시 복지담당 공무원 이모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살인적 업무로 주7일 근무 한 달에 한 건씩 복지직 공무원들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불행한 일이 터지고 있다.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사회 취약계층을 돌보는 이들이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목숨까지 버리는 현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국민행복을 위해 최일선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직 공무원들의 삶이 너무도 열악하다. 안모씨의 유서대로 하루하루 숨이 턱에 차도록 버거운 일상이다. 특히 주민센터 복지직 공무원들은 늘어난 복지 업무로 매일매일 전쟁을 치른다. 올 들어 전면 무상보육 등 복지정책이 쏟아지면서 영유아 보육비 신청, 저소득층 학자금 신청 등 업무가 폭주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기초생활수급자만 대상으로 하다가 점차 일반 노인, 장애인까지 확대되고 최근엔 양육수당 도입, 학비 지원 등의 사업까지 떠맡게 됐다. 여기에 서류상 소득수준 조사, 상담, 현장 방문까지 전방위 업무를 담당하느라 눈 코 뜰새가 없다. 퇴근은 빨라야 밤 10시고, 주말도 복지급여 정산이 끝난 월말에나 겨우 쉴만큼 격무에 시달린다. 한달 내내 거의 주7일 근무다. 아파도 병원갈 시간조차 없다. 복지직 공무원은 민원인들에게도 엄청 시달린다. 각종 복지수당이 늘어나고 액수도 커지면서 민원인들이 민감해져 전화도 늘었고 항의 강도도 높아졌다. 수급 탈락자에 대한 통지를 일선 복지 공무원이 전담하면서 수급 기준에 불만을 가진 탈락자들의 거친 폭언과 협박을 당하기 일쑤다. 사회복지 공무원들이 이런 격무에 시달리는 것은 복지 예산과 업무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비해 해당 공무원 수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중앙정부 복지예산 규모는 2006년 56조원이던 것이 올해 97조원으로 1.7배나 늘었다. 복지 지원 대상자도 395만명에서 944만명으로 2.4배가 됐다. 반면 복지직 공무원 숫자는 2006년 2만1천500명에서 2만3천600명으로 겨우 9.7% 증가했다. 전국 3천474개 읍면동 주민센터 가운데 복지 공무원이 1명인 경우가 41.7%인 1천448곳에 이른다. 2명인 곳은 1천390곳(40.4%)이다. 10곳 중 8곳은 복지담당 공무원이 1~2명이란 얘기다. 폭증한 업무량을 볼때 3~4명이 해야할 일을 1명이 맡고있는 것이다. 복지 사각지대 그들의 복지는 정부는 2011년부터 4년 동안 복지직 4천400명을 신규 임용하고, 2천600명의 행정직 공무원을 복지직으로 전환하는 중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여성인 복지 공무원의 육아휴직 등을 고려할 때 실제 인력은 크게 부족한 형편이다. 복지 공무원 숫자를 급속하게 늘려 예산 부담을 가중시키지 않으려면 더 과감하게 행정직을 복지직으로 전환 배치하는 등의 대책이 나와야 한다. 근로조건과 처우도 크게 개선해야 한다. 사회복지 전달체계를 종합행정체계에서 분리해 획기적으로 개편하는 것도 고려해 볼 일이다. 복지예산 100조 시대, 박근혜 새정부가 진정 맞춤형 복지를 통해 국민행복시대를 열어가겠다고 한다면 국민행복의 사각지대인 사회복지 공무원의 죽음을 더이상 외면해선 안된다.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책읽는 도시 군포

중학교 교사인 A씨는 주말마다 아이들과 함께 군포시청을 찾는다. 밥상머리 북카페에서 놀기 위해서다. 그는 책을 읽다가 좋은 문구가 나오면 스마트폰으로 찍어 남기기도 한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다. 그의 아이들도 동화책이며 위인전 읽기를 좋아한다. 이제 주말이면 아이들이 아빠 손을 잡아끌고 북카페에 가자고 한다. 군포시청 현관엔 밥상머리란 북카페가 있다. 1층 전체를 리모델링 해 아늑한 북카페로 꾸며 시민들이 아무때나 들러 편안하게 책을 읽는다. 밥상머리는 모든 교육이 시작되는 밥상머리처럼, 이곳에서 밥이 되는 양식을 쌓고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자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북카페엔 1만여권의 도서가 갖춰져 있고, 관내 공공도서관과 시스템을 통합해 대출 및 반납도 가능하다. 여기서 유치원 및 어린이집 아이들의 도서관 수업이 진행되기도 한다. 북카페는 40여명의 자원활동가들이 운영하고 있다. 동네 곳곳마다 도서관ㆍ북카페 군포엔 공공도서관 5개, 작은 도서관 35개, 미니문고 26개, 북카페 5개가 있다. 인문학ㆍ다문화ㆍ실버ㆍ천문 등의 테마도서관이 있는가하면, 상가와 아파트ㆍ동주민센터ㆍ경찰서ㆍ군부대ㆍ공장 등에도 작은도서관이나 미니문고가 있다.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면 어디서든 책을 접하고 읽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 군포시의 계획이다. 시민들이 찾아오는 도서관이 아닌, 시민들을 찾아가는 도서관을 표방하며 앞으로 재래시장과 쌈지공원 등에도 미니문고를 만들 생각이다. 덕분에 책의 향기가 군포시민들 속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군포시가 책읽는 도시로 뜨고있다. 군포시에 가면 책읽는 소리가 들린다. 휴먼시티 수원 판타지아 부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 고양 희망도시 의정부 . 지방자치단체마다 이색 슬로건을 내걸고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군포시는 책읽는 군포를 으뜸 시책으로 혁신적인 독서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제 그 성과가 나타나 군포하면 책, 책하면 군포가 떠오를 정도가 됐다. 군포시는 보잘 것 없는 지자체였다. 인구 29만명, 면적 36.36㎢로 전국 165개 도시 중에서 세번째로 작은 도시다. 서울 주변부의 위성도시로 유명한 전통문화도 없고, 특산물도 없다. 수리고를 졸업한 김연아 선수를 말하면서 군포를 떠올렸던게 전부였다. 그러나 책을 도시브랜드로 만들고 책의 도시로 키워 나가면서 군포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손만 뻗으면 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다양한 독서정책을 전개하면서 책읽는 시민이 늘고 도서관 이용률이 경기도내 1위를 기록했다. 군포가 책읽는 도시로 유명해진데는 김윤주 시장의 역할이 컸다. 민선 2기ㆍ3기에 이어 5기 시장을 지내고 있는 김 시장은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정규학력이 초등학교가 전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네 책방의 책을 모두 읽었고, 그런 경험이 삶의 자양분이 돼 오늘날의 그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시장은 책으로 사람을 만들고 책으로 도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책읽는 군포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 책읽는 군포 전담부서도 설치 군포시는 지자체 최초로 독서문화진흥을 위한 전담부서인 책읽는 군포팀을 설치해 다양한 사업들을 펼치고 있다. 매월 유명인사를 초청한 밥이 되는 인문학 강의는 인근 도시에서까지 찾아와 좌석이 없을 정도고, 거실의 TV를 없애고 서재로 전환해 책을 읽고 토론하는 거실을 서재로 캠페인의 참여도도 높다. 이외에 한도시 한책 읽기, 책읽는 시범학교, 북 콘서트, 북 페스티벌, 위드북스타트, 도서나눔전 등 책과 관련된 사업들이 성과를 거둬 타 지자체에서 벤칭마킹을 올 정도다. 책을 통해 지자체의 비전을 찾아가는 군포시의 발상이 신선해 보인다. 빌 게이츠가 어느 시상식 수상소감에서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는 조국도 어머니도 아닌, 어린시절 우리 동네의 작은 도서관이었다고 말했다 한다. 훗날, 세계적인 한국인 석학이 어느 시상식에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어린시절 책과 더불어 살던 군포라는 도시에서 익힌 독서 습관때문이었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해보인다. 이연섭 논설위원

[이연섭 칼럼] 졸업 안하는 대학생들

수원의 모 대학 경영학과에 다니는 윤모씨(27)는 계속 4학년 2학기생이다. 예정대로라면 지난해 이맘때 졸업해야 했지만 취업이 안돼 졸업유예를 신청했다. 윤씨는 2009년 군 복무를 마친 뒤 공인회계사 시험에 도전했지만 떨어졌고, 2년 전부터는 대기업 공채로 방향을 틀었지만 아직 합격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그는 또 한 학기 졸업을 연기하기로 하고 졸업유예 신청을 했다. 물론 맘은 편치않다. 최근 일부 대기업이 졸업유예를 반복한 응시자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소문까지 나돌아 불안하기만 하다. 대학가 졸업 시즌이 다가왔다. 하지만 윤씨처럼 제때 졸업을 안하고 졸업을 유보하는 대학생들이 크게 늘고있다. 기 졸업자보다는 대학에 적을 둔 졸업 예정자가 취업에 다소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졸업 뒤 백수 소리를 듣는 실업자로 남느니 차라리 학교에 남아 상황을 살피겠다는 것이다. 학생 10명중 4명 졸업유예 취업난과 함께 청년실업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졸업유예는 이제 대학가의 새로운 풍속도가 돼버렸다. 입학에서 졸업까지 10년 이상 걸리는 학생들도 상당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학기 중 한 번도 휴학하지 않고 대학 4년을 다닌, 말 그대로 스트레이트식 졸업은 학생들에게 꿈일 정도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최근 대학교 4학년생 62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10명 중 4명(42.7%)이 졸업을 연기할 계획이 있다고 답했다. 전공으로 보면 상경계열(52.3%)이 가장 많았고 이어 이공학 계열(42.4%), 사회과학계열(42.4%), 예체능계열(37.5%), 인문계열(37%) 순이었다. 졸업 연기 사유는 아직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67.3%복수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다음 기업이 졸업예정자를 더 선호해서(45.5%), 자격증 취득 등 취업 스펙을 쌓기 위해(37.6%), 졸업 후 구직 기간이 길어질까 두려워서(31.2%), 인턴십 등 실무 경험을 쌓기 위해(19.2%) 등을 꼽았다. 졸업연기 방법으로는 졸업유예제도 신청(57.9%ㆍ복수응답)이 가장 많았다. 이밖에도 토익 등 졸업 필수요건 미충족(25.6%), 졸업 논문 미제출(11.7%), 교수에게 F학점 요청(7.9%) 등이 있었다. 실제 경기도내 대학마다 졸업유예 신청자가 수백명에 이르고 있다. 오는 28일까지 등록을 받는 경희대 국제캠퍼스는 올해 졸업대상자 3천400여명중 600~700여명이 유예 등록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아주대도 지난해 12월 졸업유예 신청을 마친 상태로 717명이 등록했으며, 단국대는 졸업예정자 2천500여명 중 500명 안팎이 졸업을 연기할 것으로 예측했다. 졸업유예생은 매년 더 늘어나는 추세다. 대학 5학년, 6학년의 장기 대학생은 졸업유예시 강의를 듣지 않더라도 수업료를 내야한다. 학적부에 등록하기 위해 납부해야 하는 최소 금액은 대개 등록금의 6분의 1이나 기성회비의 20% 정도다. 보통 50만원 이상 된다. 취업에 필요한 스펙에 갇혀 인생의 황금기인 대학생활의 낭만과 여유를 잃어가고 있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애처롭다. 대학생들은 취업 준비생으로 불리고, 대학은 학문을 연구하는 상아탑이 아니라 취업스쿨로 변질된 지 오래다. 취업 여부가 졸업의 기준 취업이 어려워 대학생들의 졸업기간이 늘어가고 취직 연령이 높아진다. 결국 결혼 연령이 높아지고 이로 인해 저출산 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에 자식 뒷바라지 하는 부모들의 부담이 늘어갈 수밖에 없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심각한 사회문제다. 대학생들의 취업 여부가 졸업의 기준이 되고, 취업이라는 바늘구멍을 뚫을 때까지 졸업 학사모 못쓰는 청춘들. 이 시대 대학가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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