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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용의 이심전심] 소소한 일상의 회복을 기원함

12월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계절이다. 송년이라는 이름으로 가는 해를 아쉬워하기도 하고 잘 살아냈음을 축하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 해가 끝나는 시기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성탄절이 있다. 세속력과 교회력(Church Calendar)이 다름에서 기인하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확인시켜주고 있다. 새로운 시작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끝이란 얼마나 큰 좌절이며 허무한 일인가! 끝은 시작의 꼬리를 잡고 시작은 다시 끝으로 이어지는 생명과 삶의 연속성을 생각하면 시작도 끝도 그저 편의적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질서가 아니라 생명의 질서에서 생각하면 시작도 끝도 반복되는 하나의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 중심의 사고와 문명에서 벗어나 좀 더 넓고 깊은 생명의 질서를 생각하고 존중해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조금만 더 돌아보고 생각해 보면 인간도 이 우주를 구성하는 하나의 생명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 해의 끝자락임에도 시절이 하 수상하다. 코로나19에 이어 오미크론으로 인간의 일상이 어그러지고 헝클어져 버렸다.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생명, 존재가 얼마나 위력적이고 위협적일 수 있는가를 실감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고 언제 끝날 것인지 아무도 모른 채 인류 전체가 일상의 삶을 잃고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있다. 2천 년 전 이스라엘도 불안과 긴장이 뒤덮고 있었다. 천 년 동안 숨죽이며 간절히 기다리던 구세주가 곧 등장할 거라는 소문이 백성에게도, 로마 총독과 지방의 영주들에게도, 세리와 사제들에게도 돌았다. 반응과 기대는 사람마다, 처지마다 달랐다.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은 자신들의 한을 풀어줄 자비로운 통치자를 기다렸고,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길까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까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비방을 찾아 현자라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이 불안과 긴장, 공포를 한 방에 해결해 줄 사람을 찾아서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사람들이 찾아간 사람 중에는 세례자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가장 과격한 예언을 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졌으며 권력에 의해 가장 주목을 받던 예언자였다. 그분, 구세주가 오는 그날 그 시간이 오면 썩은 나무는 밑동이 잘려나갈 것이며 쭉정이는 불에 태워질 것이라는 엄청난 예언을 쏟아냈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일상을 지키고 바로 살라는 것이었다. 위대한 결단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이웃에게 옷과 음식을 주고, 세금을 걷는 자는 부정하지 말고 규정대로 걷어라, 군인은 약한 사람들을 협박하거나 착취하지 말고 주는 봉급에 맞추어 살라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반전인가? 공포와 불안, 긴장이 팽팽한 가운데 크고 위대한 비장의 한 말씀을 기다렸는데 이렇듯 상식적이고 소소한 말이라니! 그렇다. 변화의 과정도 목적도 일상을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종교도, 이념도, 정치도 상식적이고 소소한 일상을 침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와 거리가 먼 것이다. 세상에 한 방은 없다. 가장 위대한 진리는 생명의 질서에 순응하고 존중하면서 소소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지키고 이어가는 것에 있다. 가까이 있는 생명을 살피고 이웃을 돌보면서 자유롭고 평화롭고 평온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삶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지금 팬데믹 시대에 절감하고 있지 않은가. 새로운 탄생과 시작의 계절 12월에 소소하지만 따뜻하고 자유로운 일상을 조금이라도 회복하는 큰 축복이 모든 이웃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송경용 성공회 신부

[송경용의 이심전심] 침소봉대, 봉대침소

침소봉대, 봉대침소. 작은 바늘을 몽둥이처럼 말한다는 뜻이다. 또는 몽둥이처럼 큰일을 작은 바늘만 한 일로 여기는 것이다. 의도적 과장과 축소가 심하다는 뜻으로 실생활에서도 많이 쓰이는 말이다. 누구나 자신의 상태나 일은 크게 여기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작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아플 때는 자신이 제일 아프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자신이 제일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잘못은 다 사연이 있어서이거나 작은 실수 또는 미미한 것이고, 남이 잘못한 일은 고의적이거나 책임을 져야 하는 큰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좋은 일, 잘한 일에 대해 자신이 보상을 받은 것은 적게 받은 것이고 다른 사람의 보상은 실제보다 크게 받은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필자는 자신의 과거, 현재의 처지, 미래에 대해 과장이 심한 경제적,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이 낮은 분들과 수십년을 함께 살아오면서 그런 태도와 말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익숙해져 있는 편이다. 왕년 없는 사람 없다고 주로 과거에는 한 가락 했고 현재의 어려운 처지는 자신의 사소한 실수와 다른 사람의 잘못이며 미래는 창대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 사람의 마음 상태와 처지와 문제 해결 방안까지를 알 수 있게 돼있다. 따라서 약자들,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의 이야기는 늘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라 하더라도 공감하고 반응하면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약자들의 과장과 축소, 소망은 다른 사람을 해하거나 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이야기는 별로 없다. 목소리는 크고 이야기의 과장과 비약은 크지만 듣다 보면 그저 한 인간으로, 가족의 일원으로, 거리에 오고 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일 뿐이다. 어깨에 차카게 살자를 새겼든, 손목에 우정, 일편단심을 새겼든 마음은 똑같다. 그 글자들을 새긴 연유도 대부분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조금이라도 강하게 보이고 싶은, 자신도 배제당하거나 소외된 존재가 아니라 어딘가에 속한 사람이라는 하나의 과시적 표현 또는 간절한 소망이다. 그러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의도적이고 왜곡된 과장과 축소는 심각한 후유증을 낳게 돼있다. 지위가 높을수록 많은 힘을 가질수록 정직과 책임이 있는 언행은 사회 전체의 건강을 위해 필수적이다. 모든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에 기초해서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은 개인적인 관계, 크고 작은 집단 간의 관계에서도 중요하지만 넓게 보면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각자가 보호받고 존중받으며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할 것이라는 신뢰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사회인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사실을 왜곡, 과장, 축소하는 언동은 이런 기본적인 믿음, 질서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이 깨진 관계, 사회는 각자도생, 약육강식,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사회로 갈 수밖에 없으므로 위험한 것이다. 나의 것이나 상대의 아픔과 상처를 크게 과장하거나 축소한다고 해서, 나의 아픔과 상처라는 사실이 줄어들 리도 없고 더 커질 리도 없다. 올바른 치유와 치료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고 그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 대신 하소연해주거나 대변해주는 이 하나 없다고 생각하는 약자들,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의 이야기는 연민의 마음으로 들어주고 격려해주고 지지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힘이 있는 사람들, 집단의 왜곡, 과장, 축소는 개개인의 건강한 삶에 해악을 끼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근본 가치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생각으로 단호하게 비판하고 배척해야 한다. 침소봉대도, 봉대침소도 모두 옳지 않다. 성서에도 남의 눈에 있는 티끌보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라는 말씀이 있다. 건강한 삶, 따뜻한 사회는 누구라도 자신부터 사실 앞에 정직하고 겸손한 마음과 태도로부터 가능하리라 믿는다. 어느덧 무성했던 형형색색의 잎들에 가려 있던 나무의 가지가 드러나고 있다. 맨몸으로 정직하게 추운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나무들처럼 우리도 사실과 진실 앞에 마주 설 수 있기를. 우리의 삶과 소망을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정직하게 이야기하고, 견디어 내고, 더 단단해져서 더욱 푸르고 따뜻한 봄날을 맞이하기를 기원한다. 송경용 성공회 신부

[송경용의 이심전심]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차기 대통령을 선거에 출마할 후보를 뽑는 경선이 한창이다. 이번 대선 경쟁은 전 세계를 멈추게 한 팬데믹과 함께 기후ㆍ생태 비상, 산업과 노동의 대전환, 생활방식의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는 중대한 변화와 전환의 시기에 펼쳐지고 있다. 이번 선거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주로 국내 정치, 경제 문제가 주요 이슈였던 예전의 선거와 달리 지구적 차원의 변화에 대응할 능력이 있는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경영을 해야 한다. 세계의 주요 투자자들이 확실한 ESG 경영을 실천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서는 투자 중단이나 철회를 하겠다는 상황에서 기업은 ESG 경영이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좌우하는 필수조건이 됐다. 국가는 국가대로 탄소 절감 대책을 국제사회에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한다. 정부가 서둘러서 탄소 절감 로드맵과 그린뉴딜 정책을 발표하는 이유이다. 이에 따라 모든 기업은 지금까지의 생산 체제를 바꾸어야 하고, 오랜 기간 기존의 산업 체계에 최적화되어 있는 노동(자)도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자동화, 탄소 절감 정책에 맞추어 새롭게 재편될 산업에 필요하지 않은 노동(자)도 실직, 플랫폼 노동으로의 전직 등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소비자인 시민들도 소비패턴이나 일상에서의 소통과 교류, 각종의 사회적 관계 맺기 방식에서 급격하고 커다란 변화에 직면해 있다. 전 세계가 이 변화, 대전환의 물결에 휩싸여 있다. 선거 때마다 각 당, 각 후보에게 요구하는 미래에 대한 정책, 전망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기존의 정책 몇 가지를 고쳐서 내어놓는 통상적인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상황을 우리 모두의 생존이 걸린 절박하고도 긴급한 상황이라고 인식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 부자와 빈자, 청년과 노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생존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정책과 전망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지구 전체를 뒤덮고 진행되는 기후ㆍ생태 비상, 산업과 노동의 변화, 일상생활 방식의 변화에 대처하는 일은 특정한 이념, 정파,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당사자이며 모두가 책임의 주체이다. 처지와 상황, 생각이 다르다 하더라도 정부, 기업, 노동, 시민사회 등 모든 당사자와 주체가 힘을 합쳐 목표를 세우고 단위별로 확실한 장단기 실천 계획을 세워가야 하는 상황이다. 대전환에 대한 대책은 언급한 대로 어느 특정 후보나, 정당, 정치인, 정파, 진영의 힘만으로는 세울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모두가 힘을, 지혜를 합쳐야 한다. 시급하게 힘과 지혜를 모으고 나눌 수 있는 사회적 대화가 필요한 상황이다. 정부, 기업, 노동, 시민사회가 대화의 장을 만들어 함께 고민하고 함께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 정부의 힘, 기업의 자본력, 노동과 시민사회의 주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혼자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누가 전환 과정의 주도권을 가지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실천 기능하고 확실한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느냐가 훨씬 더 긴박하고 중요하다. 대전환의 모습이 정의로워야 한다는 주장은 과정의 공정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두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협의와 합의 과정에서 누구도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위기와 비상을 초래한 원인이 무분별한 소비와 환경 파괴, 산업과 노동에서의 공정하고 자율적인 조정 능력의 상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반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과정이 공정해야 정의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전 세계에 충격을 준 오징어 게임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된 불평등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낼 수 있는 동력을 갖추려면 미래는 훨씬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게임은 공정하게 진행될 것이며, 게임에서 지거나 탈락하는 사람들도 생명의 위협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비전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전환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부터 누구도 소외되거나 배제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정부와 정치, 기업과 노동, 시민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가 동등한 위치에서 발언하고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본인들이 다 해결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이나 세력이 아니라, 정의로운 대전환에 대한 철학과 인식이 확고한 사람, 모두의 힘과 지혜를 모을 수 있는, 공정한 과정을 조직할 수 있는 경륜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대통령 후보자로, 지도자로 선출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정의는 선언이나 주장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과정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송경용 성공회 신부

[송경용의 이심전심] 아프간을 위해 기도함

전 세계가 아프간에 집중돼 있다. 누구에게도 보복하지 않겠다는 것과 여성 인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 선언했다. 탈레반 정권은 지난 20년 동안 자신들이 이룩한 진화와 진보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변화된 방식에 따라 통치하는 모습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주겠다는 약속이자 선언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탈레반의 선언은 정권 장악 초반에 민심을 얻고 국제적으로 안정감을 주기 위한 지극히 정치적이고 정략적인 판단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지에서 들리는 소식은 이러한 약속과는 다르다. 탈레반을 피해 난민을 택하거나 탈출을 원하는 사람들이나 머물러 있는 사람들 역시신변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있다고 한다.부디 그들이 공개적으로 약속한 대로 실천해주리라 믿고 싶다. 어떤 정치적 수사보다, 어떤 역사적 의미보다 아프간에 사는 여성, 어린이들의 생명과 인권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아프간에서 미국은 침략자였고, 부당한 외세였으며 미국이 세운 아프간 정부는 독립적으로 아프간을 통치할 수 있는 능력도 전망도, 의지도 없는 부패한 미국의 허수아비 정권이었다. 이는 탈레반이 카불 점령 전후에 보여준 대통령을 비롯한 아프간 정부 지도자들의 행태에서 보았듯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한 국가의 주권, 독립도 중요하지만 국민과 시민의 생명에 대한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주권과 독립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권을 담당한 정치세력, 권력자들의 종교적 신념, 정치철학, 나라의 주권과 독립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다. 캄보디아, 르완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저질러진 무고한 국민, 시민에 대한 대량학살도 정치적종교적민족적 신념을 내세우며 일어나지 않았던가. 아프간의 미래에 대해 특별히 여성과 아동의 안전을 우려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내정간섭이 아니라 인류가 마땅히 해야 할 정당행위다. 누구라도 어떤 국가라도 자신들의 특수성, 정치적종교적 신념을 내세우며 인류가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인 생명에 대해 억압적인 폭력을 행사한다면 마땅히 비난받고 고쳐나가도록 행동해야 한다. 다만 이런 행동이 또 다른 물리적 전쟁을 통해 행사되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아프간이 평화의 길로 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정권을 담당한 탈레반 세력을 책임 있는 실체로 존중하고, 가장 큰 문제인 아프간 국민의 빈곤 문제를 개선할 경제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동시에 아프간 국민이 보편적 가치인 인권과 민주주의에 접근하고 향유 할 수 있도록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ㆍ협력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탈레반 정부와 협의를 통해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국제적 차원의 공동 행동에 책임 있는 나라들부터 즉각적으로 나서야 한다. 사람이나 나라나 과거의 관계나 전력 때문에 밉다고 믿지 못하겠다고 왕따를 시키거나 무력으로 제압하려고 하면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해결책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게 마련이다. 문제가 많을수록 긍정적인 조치와 행동을 할 수 있는 동기를 마련해주고, 넘어졌을 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잡아줘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탈레반이 지난 시절 유적과 유물을 파괴하고, 세계 곳곳에서 무자비한 테러 활동을 저질렀으며 여성에 대해 반 문명적인 잔인한 정책을 펴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 탓에 극도의 불신과 공포가 존재하지만 다시는 그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게 하려면, 무엇보다 아프간에 사는 수천만명의 사람들, 특별히 여성의 인권과 안전을 생각한다면 이제는 대결, 배척, 혐오, 전쟁이 아니라 협력과 공존, 평화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 수천년 동안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문명과 문명을 이어주는 교류와 번영, 평화의 가교였던 땅, 아프간이라는 나라가 다시는 열강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기를, 그 땅에 살아가는 누구도 특정한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제도에 의해서 배제되고 희생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들 스스로 공언한 대로 탈레반이 특별히 여성의 안전, 인권, 사회적 활동을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아프간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신뢰와 존중을 받는 정부가 되길 간절히 기대하고 기도한다. 송경용 성공회 신부

[송경용의 이심전심] 시대정신과 세례자 요한

본격적으로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었다. 공식 선거일은 내년 3월이라 아직 멀었지만, 뉴스의 대부분이 대통령 선거와 후보자들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어디를 가나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피할 수가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 방역 단계가 높아짐에 따라 일상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고, 열돔 현상으로 인해 전례 없는 폭염에 시달리고, 시도 때도 없는 폭우로 강물이 넘치고 산사태가 일어나면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온통 대통령 선거와 후보자들 이야기가 홍수처럼 넘쳐난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시급한 도전이자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기후ㆍ생태 비상, 산업ㆍ노동의 급격한 변화, 삶의 조건과 방식의 변화에 대한 의견과 대안이 시대정신으로 제출되고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기후ㆍ생태 문제는 일상에서 겪는 상식이 되어 있다. 미국 MIT 학자들은 1972년에 이미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인해 21세기 안에 인류 문명이 붕괴할 것으로 예측한 보고서를 낸 바 있으며, 최근에는 불행하게도 이미 붕괴의 경로 위에 놓여 있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앞으로 10년 동안 차별과 불평등을 조장하는 파괴적이고 탐욕적인 성장주의 대신 모두를 위한 지속 가능 사회를 위한 방식과 경로를 택한다면 되살아날 기회의 창은 여전히 열려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이미 탈 탄소 정책, 녹색 뉴딜 정책 등을 발표한 바 있으며, 기업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ESG(Environment, Social, Governance)를 중심으로 재구조화하고 있다. 기후ㆍ생태 비상은 일국의 문제만도 아니고, 특정 진영과 계층의 문제도 아니다. 지구 상에 사는 모든 인류의 생존에 관한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이보다 더 시급한 시대정신이 있는가? 두 번째는 기후ㆍ생태 위기뿐만 아니라 급속한 기술 발전에 따른 산업과 노동의 변화이다. AI(인공지능), 자동화, 알고리즘으로 통제되고 움직이는 산업의 확산과 성장 등으로 산업의 지형과 노동의 형태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전통적인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보다 배달(57만 명 정도로 추산), 대리기사(28만 명 정도로 추산), 각 직역에서의 프리랜서, 단기 일자리 등 새롭고도 불안정한 지위의 노동자들이 훨씬 많아지고 있다. 4~5년 안에 대중화될 전기 자동차 시대를 앞두고 가장 큰 공장 노동자였던 자동차 기업의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며, 카센터와 협력업체 등 연관 산업의 수십만 명이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할 비상한 때이다. 산업과 노동이 혁명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대통령 후보들께서는 어떤 일자리 대책과 사회보장 정책을 구상하고 계획하고 있는가? 세 번째로, 기후ㆍ생태 비상, 산업과 노동의 변화로 인해 우리들의 삶의 조건과 방식이 크게 변하고 있다. 재택근무와 비대면 생활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먹고사는 방식, 관계와 소통의 방식 등 일상의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 이런 변화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인류 문명이 통째로 변화하고 있는 이 전환의 시대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대통령 후보들과 각 정당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대통령 후보들의 난립을 보면서 2천 년 전에 활동했던 세례자 요한을 생각하고 있다. 예수의 친척이며 6개월 정도 먼저 태어난 사람이다. 로마제국과 부패한 정치, 종교 권력이 지배하던 시기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메시아를 대망하던 민중들의 영웅, 광야의 예언자이자 세례자였다. 메뚜기와 들에서 나는 꿀을 먹고살 정도로 지극히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민중들에게뿐만 아니라 로마제국과 부패한 권력에 회개하라, 새 시대를 준비하라!라고 외치며 맞서던 용맹한 사람이었다. 그가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는 백성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당시 민중으로부터 최고로 존경받던 지도자이자 막강한 힘과 영향력, 권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새로운 시대를 이끌고 갈 새로운 지도자가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만한 자격도 없다!라며 모든 권력과 권위를 스스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정신, 새로운 깃발, 예수에게 양보한다. 억압적인 전통과 당대의 권력, 기득권 세력과의 투쟁에 가장 치열한 사람이었지만,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믿음, 새로운 사람,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예수도 스스로 광야를 가로질러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가 머리를 숙이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사람의 몸에서 난 사람 중 가장 큰 사람이라며 요한의 업적을 인정해준다. 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전환인가! 인류의 생존이 위협에 처해 있는 이 대전환의 시기에 생태적이고 정의로운 전환을 이루어갈 지도자와 세력이 나타나 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생태적이고 정의로운 대전환 계획안에서 당면한 문제인 불공정, 불평등, 이대남, 이대녀로 표상되는 세대ㆍ젠더 갈등이라는 문제도 조명되고 해결책을 찾아 나가기를 바란다. 인류사 중 가장 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인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이야기는 권력의 승계, 또는 교체가 아니라 시대정신의 교체였다. 세례자 요한으로 대표되던 과거의 전통과 방식이 미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면 세계를 뒤흔든 예수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은 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과거의 헌신, 힘과 영광만으로 미래를 밝힐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시대정신에 길을 내어준 세례자 요한처럼,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미래에 기꺼이 고개를 숙이고 길을 내어주는 정치, 기업, 노동, 시민이 많아지기를, 그런 시대가 되기를 기대하고 기도한다. 송경용성공회 신부

[송경용의 이심전심] 자신을 비추는 거울

지금 형태의 유리 거울이 나타난 것은 12세기 유리 제조 기술이 발달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청동이나 금속 표면을 잘 닦아서 사용했는데 당연히 귀족이나 돈이 많은 사람이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물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춰 봤을 것이다. 물에 비춰지는 모습도 물의 표면 상태에 따라 달라지지만 유리로 만들어진 거울 역시 어떤 물질을 바르는지, 오목 거울인지, 볼록 거울인지에 따라 대상의 모습이 달라지게 만든다. 놀이동산에서나 마술사들이 사용하는 요술 거울은 긴 다리를 짧게 만들고(물론 짧은 다리를 길게 만들기도 한다.), 얼굴을 넓게도, 길게도 하면서 재밌는 모습을 연출해주기도 한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춰 주기도 하지만 표면과 이면에 어떤 물질을 발랐는지에 따라, 어떤 형태의 거울이냐에 따라 사실이나 사물의 모습을 크게 변형왜곡시키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서너 번은 바라보면서 자신을 비춰 보는 거울은 평면거울이다. 왜 바라보는 것일까? 어떻게 비춰지기를 원하는가? 자신을 비춰 주는 거울의 기능을 빗댄 말들도 많다. 그중에서도 어른은 아이의 거울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의 눈에 비춰지는 모습대로 아이들이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른들은 아이들 눈에 나쁜 모습을 보여주지 말도록 노력하고 행동을 삼가라는 말이다. 거울을 보면서 우리는 외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은 쉬이 알 수 없는, 표정에 나타나 있는 내면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래서 거울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외모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성찰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고, 옷을 고쳐 입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점검하면서 자신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거울은 또한 사랑의 증표로 사용되기도 했다.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 돼주기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부부가 이혼하는 것을 거울이 깨졌다는 의미의 파경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몽룡이 춘향과 헤어질 때 거울을 주면서 내 마음이 명경 빛과 같으니 잘 간직하면서 내 생각이 날 때마다 나를 보는 듯이 꺼내서 보라고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내가 바라보는 거울은 어떤 거울인가. 표면은 깨끗한가, 이면에는 어떤 물질이 발라져 있는가. 오목 거울인가, 볼록 거울인가? 나는 내 아이들에게,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그들은 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를, 이웃을, 사물을, 세상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비춰 주는 좋은 거울을 가진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거울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겠는가? 거울을 빗댄 말 중에 명경지수라는 공자의 말씀도 있다.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처럼 허망한 욕심과 삿된 생각이 없는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특별한 재주가 없던 황태라는 제자에게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황태의 마음은 그쳐있는 물처럼 조용하고 고요하기 때문에 그를 거울삼아 몰려드는 것이다. 그에게서 마음의 평안을 얻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친 물처럼 조용하고 고요함으로 마음에 평안을 주는 상태를 공자는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했다. 세상에 평안을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오히려 불안을 조장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경우를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국민에게 맑은 거울이 돼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이면에 자신의 욕심과 욕망의 이물질을 잔뜩 칠했거나 마음대로 이리저리 형태를 변형시킨 거울을 들고나와 사실과 진실을 왜곡시키며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 모쪼록 정직하고 맑은 거울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내 삶이, 세상이 평안하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먼저 비춰 보기를, 겉모습뿐만 아니라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내면의 모습까지도 비춰 보기를 바란다. 서로서로 맑고 밝게 비춰 주는 아름다운 거울이 많아지기를 기원한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물살이 일어도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명경지수, 고요함과 평안함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거울 앞에 서보자. 송경용 성공회 신부

[송경용의 이심전심] “선호야 집에 가자”

지난 4월22일 300㎏이 넘는 철판에 깔려 죽은 23살, 대학교 3학년 이선호군의 추모제에서 이군의 아버지가 아들의 영정을 바라보고는 선호야 집에 가자, 왜 거기 있어, 빨리 집에 가자!라며 울부짖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옆에서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감싸주며 같이 슬퍼하고 울어주는 일밖에 없었다. 끔찍한 산업재해로 자식을 먼저 보낸 어머니 아버지들과 함께한 추모제를 끝내고 돌아오면서 갑자기 김민기 선생이 지은 강변에서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온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새벽에 나가 노을이 지면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함께 밥을 먹고, 걱정도, 기쁨도 나누면서 서로 보살피는 것이 정상이지 않은가. 어깨가 늘어지고 눈이 쑥 들어가도록 힘들게 일을 했어도 맛있는 된장국을 끓이며 기다리고 있을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아무리 힘든 하루였어도 다시 힘이 나지 않겠는가. 어스름이 짙어지고, 별들이 밝아지고 공장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올라도 가족들은 오늘은 일이 많은가보다. 그래서 조금 늦는가 보다 하면서 밥상을 준비하는 것이 지극히 평범한 우리네 일상이다. 그 가족이 끝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어린 자식이 일터에 나가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을 때 부모의 마음은 벌써 저 문밖에 나가 있을 것이다. 시간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부모의 마음과 발걸음은 마을 밖으로, 정류장으로, 점점 멀리 나가고 있을 것이다. 매일 만나고 같이 살고 있지만 컴컴한 저 길목 끝에서 다가오는 가족의 그림자만 보아도, 어깨는 축 처져 있고, 눈은 한 자도 더 깊이 퀭하게 들어가 있어도 얼마나 반가운가, 살아있는 그 손을 꼭 쥘 수 있고, 따뜻한 가슴을 감싸 안을 수 있다는 것이, 왜 이렇게 늦었느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느냐, 내가 늦고 싶어 늦었느냐, 종일 바쁘게 일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며 눈을 흘기기도 하고, 토닥거리기도 하면서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가! 지난 월요일에는 전철역 문틈에 끼어 죽어간 구의역 김 군의 추모식에서 또 한 번, 뚝뚝 끊어지며 좀체 이어지지 않는 숨을 다독이며 추모와 다짐의 말씀을 보태야 했다.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갔다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자식들의 가족과 함께 속 울음을 울어야 했다. 지난해 겨울, 자식을 잃은 어미, 아비들이 살을 에는 강추위 속에서도 30일 가까이 단식을 하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을 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침에 일터로 나간 가족이 멀쩡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너무나 상식적인 일을 위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연간 2천여명의 우리 가족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축소됐고, 더군다나 시행령 마련을 앞두고 경제(기업)단체는 물론이고 노동부까지도 유족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면서 법 자체를 무력화할 수 있는 시행령 안을 내어놓고 있다. 이토록 슬프고 끔찍한 현실을 언제까지 감내하라고, 견디라고 할 것인가. 모든 생명에게, 심지어 미물들도 때가 되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생명의 본능이다. 죽을 때가 되면 본능적으로 고향을 향해 돌아눕고, 울부짖는다는 수구지심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지금은 5월이다. 바깥세상이 너무나 밝고 아름다워서 더 어둡고 아픈 가족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 다시는 어린 자식의 영정 앞에서 집에 가자!며 울부짖는 어미, 아비가 없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댓전에 불을 밝혀놓아도, 셀 수 없이 많은 기차가 지나가며 강물이 일렁이고, 어두운 하늘에 별이 뜨고 지는 밤이 숱하게 지났어도 아직 집에 돌아오지 못한 내 가족, 우리 이웃들의 영혼이 부디 평안하기를, 본인들의 아픔을 딛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겨나지 않도록 서로 의지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는 유족들에게 크나큰 위로와 희망이 생겨나기를 기도한다. 자연을 찬미하며 밝고 명랑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는 5월이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송경용 성공회 신부

[송경용의 이심전심] 생명·인간·행복이 중심인 세상을 꿈꾸며

황무지(T.S.Eliot)라는 시에 나오는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본디 특정한 어떤 사건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4월이 되면 겨우내 움츠리고 잠자던 삼라만상이 깨어나고 약동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데 아직도 두꺼운 껍질 속에 잠들어 있는 인간이 깨어나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껍질을 뚫고 나온다는 것은 자신을 이겨내고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일이다. 새로운 생명으로 세상과 만나는 일은 참으로 아름답고 설렌다. 그러나 4월이 오면 저절로 화려한 꽃들이 피어나고 연초록 세상이 열리는 것이 아니다. 기나긴 겨울 동안 견디고 버티면서 자신을 키워온 자들만이 열 수 있는 아름다운 특권이다. 두꺼운 흙더미와 껍질을 뚫고 온 산천을 물들이는 생명의 약동을 보면서 생명의 가치를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생명은 얼마만큼의 가치를, 값어치를 지닌 것일까? 특별히 우리 삶을 지배하는 가장 큰 권력인 경제(우리는 모두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살고 있다), 경제활동, 경제학에서 우리들의 생명은 어떻게 취급되고 있을까? 봉건제 사회에서는 왕족과 귀족을 제외하고 대부분 사람이 신민, 농노로 묶여 있었다. 시민혁명이 일어나면서 시민으로서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획득하였고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우리는 또다시 계약이라는 형식으로 자본, 더 많은 이익 창출에 묶여 있는 존재가 되었다. 노동은 생산의 한 요소가 되었고 경쟁력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상품이 되었다. 인간, 생명, 가족, 이웃, 연민, 자비, 사랑, 이런 단어는 경제와는 무관한 것이 되었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이자 경제학자인 존 러스킨은 생명, 인간이 무시되고 도구가 되어버린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달 시기의 참상(!)을 보면서 생명의 경제학을 주창했다. 성경에 나오는 포도밭 주인의 이야기(마태복음 20장, 아침에 온 사람이나 오후에 온 사람이나 똑같은 보상을 주었다는)를 주제로 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책에서 경제학에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정신과 영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 노동자는 생산에 부속되어 소모되는 부품이 아니라 영혼과 마음, 꿈을 지닌 존재다, 생명은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유일한 부라고 했다. 아무리 굶주려도 어머니와 아들이 빵 조각을 두고 싸우지 않는 것처럼 서로를 이겨야만 하는 경쟁만이 유일한 인간관계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모두가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달려갈 때 생명과 인간의 존엄을 설파한 존 러스킨의 생명의 경제학은 많은 비난에 시달렸지만,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 간디, 톨스토이 등 수많은 지성의 인생관을 바꿔놓을 정도로 영향이 컸다. 경제, 기업활동에서 인간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인간적 경제, 모두를 위한 경제를 주창하는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의 아래와 같은 주장도 깊이 새기면 좋겠다. 서구의 근대 경제학은 인간의 행복을 개인의 물질적 향유의 경쟁적 증가로 대체해 버렸다. 화폐로 계산되지 않고 손익을 따지지 않는 공감과 배려, 무상성(Gratuitousness)의 나눔으로 풍요로워지는 인간관계는 무시되었다. 브루니 교수는 경쟁, 성과주의가 마치 경제, 기업 운영의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연민, 자비, 사랑, 자신과 이웃의 존재를 잃어버림으로써(통제하거나 버림으로써) 오히려 지속가능성의 기반인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 자유는 더욱 축소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사랑, 자비, 연민 등 생명의 존엄을 기초로 기업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 공간을 함께 만들어가는 인간의 경제, 사랑의 경제, 공동체 경제(콤무니타스 이코노미)가 결국은 더욱 수준 높은 문명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상 최악으로 치달은 기후 비상, 불평등, 양극화, 세대 간의 갈등, 산업과 노동의 변화, 팬데믹 등 산적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해야 한다. 어려울 때 있을수록 근본을 돌아봐야 한다. 혁명이라는 영어 단어 Revolution의 의미도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무엇인가를 바꾸고 싶다면 근본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순간을 모면하고자 땜질하듯이 해서는 생명은 부차적인 것이 될 것이고, 인간은 여전히 생산의 한 요소로, 부품, 상품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듯이 우리 스스로 깨치고 변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너나없이 모든 생명과 인간이 존엄한 대접을 받으려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회를 원한다면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처럼 우리 스스로 깨치고 변화해야 한다. 우리를 덮은 관습, 패배의식이라는 두꺼운 껍질을 깨트려야 한다. 생명, 인간, 행복이 중심인 새로운 세상은 가능하다. 우리가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여러모로 가장 큰 책임을 감당하고 있는 정치하는 사람들,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존 러스킨의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생명을 제외하고는 어떤 부도 있을 수 없다. 가장 부유하고 풍요한 나라는 최대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사람을 양성하는 나라이다. 송경용 성공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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