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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준영 칼럼] 비겁한 변명입니다

2003년 개봉한 영화 ‘실미도’를 보면 당시의 시대상이 나타나 있다. 군부독재로 정권을 잡은 시절, 박정희가 나라였고 나라가 박정희인 시절이었다. 주인공인 안성기가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684부대를 해체하라는 부당한 명령을 내리자 “중앙정보부가 국가입니까”라는 당찬 발언을 하며 머리에 총을 겨눈 중앙정보부장에게 맞서 자신들의 부하들을 지키려 하는 장면은 아직도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런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군인으로서 명령이기에 지킬 수밖에 없는 자신을 향해 “날 쏘고 가라”라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부하들을 지키고 불의에는 굴복하지 않는 참군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모든 상황을 다 알고는 있지만 설경구는 “비겁한 변명입니다”를 외치며 오열한다. 요즘 나라가 어수선하다. 특히 청문회가 진행되는 법사위나 방통위를 보면 과연 그들이 지키고 싶은 것이 ‘국가일까 아니면 자리나 사람일까’ 싶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진숙 방통위원장 후보자는 청문회 내내 시종일관 ‘답변하지 않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등의 말로 청문회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탄의 목소리를 내게 했다. 많은 의혹과 논란이 있는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해 ‘논쟁적인 사안이라 답변하지 않겠다’고 답변하며 ‘누구와 누가 논쟁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선 답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과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관급의 공직자가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품어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자국민의 아픈 역사를 모욕할 수 있는가. 이는 이념이나 사상과는 관계없는 일본의 만행이고 응당 정부 고위급 공무원이라면 이에 대해 바른 역사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어야 함이 마땅함에도 이를 ‘역사’가 아닌 ‘이념’으로 빠뜨려 정쟁을 만들고 있다. 이진숙 후보자의 잘못된 역사관은 이것만이 아니다. 연예인들을 그들이 출연한 영화와 발언으로 좌파와 우파로 나누고 이를 설파하는 강연을 하고 다녔다. 일제와 변절한 친일파들에 대한 저항을 다룬 ‘암살’, 5·18민주화운동의 내용을 담은 ‘택시 운전사’, 헌법에도 나와 있고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역사적 상황이 어떻게 좌우의 이념일 수 있는가. 과연 우리나라의 분열과 갈등을 만드는 세력이 진정 누구인가. 역사적 가치관과 더불어 더욱 기막힌 것은 본인이 오랜 세월 몸담고 있었고 심지어 자회사의 사장까지 했던 조직인 MBC에 대한 적대감으로 자신의 부하직원이었던 사람들과 자신의 출세와 욕망을 실현해 줬던 조직을 이제는 싸우고 대립해야 하는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직업관과 대인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라면 아무리 감정이 좋지 않더라도 본인과 동고동락했고 자신을 키워줬던 조직과 동료를 절대 적대시까지는 하지 않는다. 후보자에게 MBC는 이제 고작 ‘내 맘에 안 드니까 손봐야 하는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외에도 이렇게 많은 의혹과 논란을 지닌 후보자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극우성향, 노조 사찰, 법인카드 부정 사용, 부정보도 등 수많은 논란을 만들어 내며 변명과 의혹의 끝판왕을 보여줬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염치를 안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그동안 정권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하며 자신에게 맞지도 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반성하고 염치를 챙겨 사퇴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진숙 후보자에게 진심으로 말하고 싶다. 당신이 얘기한 모든 것이 “비겁한 변명입니다!”

[윤준영 칼럼] ‘민주주의’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해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명연설로 역사에 기록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민주주의의 정신과 기본원리를 아주 잘 설명하고 있는 명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행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필수요건이 있다. 선거를 통한 1인 1표의 투표권도 보장돼야 하고 반란이나 쿠데타가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권교체도 이뤄져야 한다. 20대 대통령선거에 국민은 지난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국민의힘 대선주자인 윤석열 후보를 선택해 더 많이 투표했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권교체가 진행돼 현재 대통령이 됐다. 내용이 어떻든 민주주의에 입각해 더 많은 국민의 선택이었고 그로 인해 막강한 국가권력을 대통령의 권한으로 윤석열 대통령은 현재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은 야당과의 관계를 협치로 하지 않았다. 야당 대표와의 만남도 취임 후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뤄졌다. 즉, 어떠한 형태로든 야당과의 소통이 아닌 본인과 정부 여당의 의지대로 더 많은 민의에 의해 선택됐다는 이유로 본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2년 이상 국정을 원하는 대로 운영했다. 분명 아쉬운 부분도 있고 이해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대통령이 하는 일에 비판할 수는 있지만 선거라는 민주적 결정 과정에 의한 결과라는 점에서 승복해야 했다. 하지만 선거는 대통령선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삼권분립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행정부의 수장을 뽑는 대통령선거와는 별개로 입법부의 국회의원선거도 시행한다. 4월10일 22대 총선은 정부 여당의 완패로 끝났다. 그런데 여당은 본인들의 1호 당원이라는 대통령도 하지 않은 협치를 관례를 운운하며 특정 상임위원장을 내놓으라고 겁박하며 협치와 소통을 얘기하니 아이러니하다. 특히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고 툭하면 ‘민주주의 사수’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본인들에게 유리했던 대통령선거에서 드러난 민의는 존중받아야 하고 본인들에게 불리하게 나타난 국회의원선거에서 나타난 민의는 존중받지 않아도 되는가? 보수 정부의 적통성을 강조하며 국민의힘 당사에는 건국과 근대화, 민주화를 이끈 대통령이라며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3명의 대통령 사진만이 걸려 있다. 과연 이들이 매번 외쳐 대며 가지는 ‘자유민주주의’의 의미는 무엇인가? 초대 대통령이면서도 부정선거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한 대통령, 경제를 발전시켰다고 하지만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 국가의 혼란을 틈타 권력을 무력으로 찬탈한 대통령, 본인의 권력을 위해 국민의 민주주의 열망을 짓밟은 배신의 민주인사인 3당 합당 주역의 대통령 사진을 걸어 놓고도 감히 떳떳하게 ‘자유민주주의 사수’를 외칠 수 있는가? 국민은 더는 어리석지 않아 말장난에 속아 나지 않는다. 당장 본인들에게 조금의 이익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바로 신뢰한다는 행동을 더는 하지도 않는다. 법치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며 “꽃피는 봄이 오면 김포는 서울이 된다”며 시인처럼 읊조린 그 약속은 현재 무더운 여름이 돼서도 지켜지지 않았다.

[윤준영 칼럼] 언행일치

인간은 누구나 선천적으로 자신의 생존 이유에 대해 확신해야 하고 생존력의 완성을 위해 생리적 욕구인 식욕과 수면욕 외에도 심리적 욕구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남에게 보여주고 이를 인정받으려는 인정욕구가 있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어필해 추종세력을 만드는 것은 생존을 위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남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인정받는 일은 자기가 생존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일로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믿음, 즉 자신감이나 자부심을 갖게 함으로써 살아갈 맛을 느끼게 하고 삶의 목표까지 생기게 만드는 기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생존적 필수 욕구인 인정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많은 수단을 활용하지만 대부분은 일차적으로 사람에 대한 호감을 그가 이야기하는 ‘말’에서부터 찾는다. 역사만 보더라도 대중의 심금을 울리고 대중을 선동하는 멋진 연설들로 역사를 바꾼 사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너무나도 많다. 성경 신명기에 나오는 이스라엘로 가는 방랑을 끝내며 모세가 한 연설이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처칠의 연설은 국가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바꿔 놓은 훌륭한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분명 말은 일차적으로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훌륭한 힘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말이라도 이를 실행하는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말은 순간적으로 대중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마음을 움직이기는 힘들다. 특히 대중의 생각을 움직이고 대중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정치 지도자들이라면 순간적인 말로 대중을 현혹할 수는 있지만 말 뒤에 그가 취하는 행동을 보면서 그 말의 진정성 유무를 대중들은 평가한다. 얼마 전 총선 직후 총선 참패로 인해 “총선 민심을 잘 살피고 민의에 귀 기울이겠다”며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1년11개월 만에 야당과의 소통, 협치를 위해 야당 총수와의 영수회담을 개최했다. 하지만 채상병 특검법의 국회 통과로 인해 여당은 채상병 특검법에 대해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건의한다고 시사했고 대통령실은 이에 대해 입법 폭주라고 대응하며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비서실장을 통해 밝히며 결국 2년간의 긴 기다림으로 성사된 영수회담의 협치는 ‘삼일 협치’로 끝나 버렸다. 여당의 총선 참패에 죄송하고 총선 민심을 잘 살피겠다던 대통령이 총선이 끝나자 강조하던 협치는 온데간데없이 바로 거부권을 시사한 것이다. 이번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다시 실행한다면 벌써 10번째 거부권 행사로 문재인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거부권을 단 한 차례도 행사하지 않았지만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이 재임 동안 행사한 거부권을 합한 것보다도 많다. 더욱이 문제는 총선 민심을 살피고 야당과의 협치를 얘기하면서 16일 여당 초선 의원들과의 만남에서는 “정부, 여당으로서의 권한이 있으니 소수라고 기죽지 마라”며 거부권을 야당과의 협상 카드로 적극 활용하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보아 대통령의 협치는 말과 행동이 달라 진정성이 없었고 성난 민심을 잠깐 달래주는 ‘정치적 쇼’에 불과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말했다. “당신은 모든 사람을 잠시 동안 속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을 항상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항상 속일 수는 없다.” 대통령이 총선 이전에 대국민 간담회를 개최하며 국민께 약속한 지원액만도 1천조원이 넘는다. 이를 실행하는 계획은 진행되고 있는가? 달콤한 말로 잠깐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잠깐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뱉었던 말이 행동으로 실행되지 않으면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음을 대통령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윤준영 칼럼] 총선이 남긴 것

2024년 4월10일, 역사적인 22대 국회의원선거가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의 참패로 끝났다. 대한민국이 현재 마주하고 있는 정치 경제적 문제에 대해 모두가 항변하듯 32년 만에 최고로 높은 투표율을 보였고 ‘현 정권의 심판’이라는 야당의 선거전략을 대변하듯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집권 여당이 이렇게 큰 격차로 패배한 건 처음이었다. 대통령의 권력이 가장 강한 시기인 집권 만 2년 차에 집권 여당의 참패는 과연 무엇을 얘기하는 것일까? 여당은 시작부터 흔들렸다. 대통령의 불통과 무능이라는 프레임으로 ‘정권심판’이라는 명확한 선거전략을 가진 야당에 반해 여당은 집권당임에도 아무런 선거전략이 없었다. 이러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아무런 검증도 되지 않은 정치 신인이자 대통령의 최측근을 전면에 내세워 오히려 대통령과 오마주를 시켜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어 버렸다. 정치 신인 대표가 이끄는 선거는 마지막으로 갈수록 ‘선거전략의 부재’가 돋보였다. 초기에는 ‘운동권 청산’을 얘기하며 행정권을 모두 가진 여당의 선거전략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전략을 이어가다 마지막에는 이른바 ‘정권심판’에 맞서 ‘이조심판(이재명, 조국 심판)’을 외치며 “도대체 집권 여당이 왜 아무런 힘도 없는 야당 대표를 심판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라는 의구심마저 자아냈다. 이에 반해 성난 민심은 매서웠다. 대통령은 선거전 전국을 순회하며 24차에 걸쳐 민생토론을 진행하며 선거 개입이라는 야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힘 있는 정권임과 이를 시행해줄 여권의 결속을 노골적으로 어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성난 민심은 이른바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조국혁신당)’가 대세를 이뤘고, 정권 심판을 갈망하는 좀 더 선명성을 가진 국민이 선택한 조국혁신당은 지역구에 국회의원 후보자를 단 한 명도 내세우지 않았음에도 비례대표로만 12석이나 얻어 원내 제3당이 됐다. 이번 총선 결과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미 많은 뉴스와 기사로 총선의 결과에 대한 논평으로 연일 뉴스가 도배된다. 유교주의 사상으로 본다면 대통령은 국가의 아버지다. 우리나라 국민 누구도 아버지가 고통받고 손가락질받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아버지라 할지라도 모든 것이 옳을 수 없으며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행복한 가족 공동체를 위해 쓴소리도 들어야 한다. 하지만 지지율이 집권 초기부터 계속 30%의 정체 현상에 있음에도 대통령과 여당은 이를 듣지 않고 어떠한 소통도 하지 않았다. ‘공정과 상식’으로 본인들의 선명성을 강조했지만 그저 남들에게만 냉철한 잣대를 대고 본인들은 공정하게도 상식적으로도 행동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대통령의 집권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구성원을 어루만지고 보듬어줘 행복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이번 선거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있겠지만 이것이 주된 이유다. 선거는 분명한 전쟁이다. 예전에는 총에 든 탄환으로 서로를 저격하고 심판했다면 이제는 투표용지로 서로를 저격하고 심판하는 시대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승리한 야당도, 패배한 여당도 명심하라. 누구라도 지도자가 되려 한다면 선거는 선명성 있게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 일일지라도 선거가 끝난 후에는 우리 모두의 편이 돼 줘야 한다는 것을.... 지금의 대통령처럼 나에게 총을 쏘지 않은 국민만을 바라보다가는 이번 총선처럼 더 매서운 총알이 날아오리라는 것을....

[윤준영 칼럼] 누가 헌법정신을 훼손하는가

헌법이란 국가의 기본법으로서 국가의 구성·조직·작용과 기본권 보장에 관한 기본적 원칙을 규정한 근본법으로 최고의 수권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헌법은 광복 이후 1948년 5월10일 남한 총선거로 구성된 국회에서 제정됐고 이후 아홉 차례의 개헌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재의 헌법은 여당(현 국민의힘) 뿌리인 과거 6공화국에서 신설된 조문으로 헌법의 조항을 보면 전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의 계승 및 조국의 민주개혁을 천명하는 내용이 분명하게 나와 있다. 분명히 누군가의 압력이 아닌 당시 여당(현 국민의힘)의 주도 아래 여야 합의를 통해 개헌이 진행됐지만 2024년의 대한민국은 헌법에서 명시하는 내용에 대한 본인들만의 재해석으로 연일 시끄럽다. 이미 헌법 전문에도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의 계승이라고 분명하게 돼 있는 바 4·19의 원인을 제공한 이승만 정권 자체가 이미 ‘불의의 정권’이라는 절대 변하지 않을 사실에 국민이 모두 법 앞에 동의한 셈이다. 그런데 이미 60여년 전에 시민들의 손으로 끌어내린 초대 탄핵 대통령이며 불의의 정권 수장인 그를 재평가한다고 하며 다시 치켜세워 영화로 제작하고 국부로 숭배하며 기념관까지 만든다고 하면서도 법치를 입에 담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울 뿐이다. 분명 모든 일에는 공과가 있고 이승만 역시 예외는 아니다. 역사적 사실로 본다면 당시 대한민국의 가장 뛰어난 스펙을 지녔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과 대통령이 된 이후의 농지개혁정책 등은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업적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승만의 악행은 알려진 것만 해도 한둘이 아니며 독립운동 역시 나라에 대한 애국심보다는 출세와 권력욕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일부 역사학자들은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대중을 살해한 1위가 김일성이라면 2위는 이승만이라는 평가까지도 한다. 이런 그를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건국 전쟁’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로 포장해 영화로 선동하며 이미지를 바꾸려 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헌법 전문에 새겨진 4·19라는 불의에 항거한 민주정신의 가치가 바뀔 수 없기에 그는 분명 헌법에도 명시돼 있는 불의의 세력이다. 물론 보수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건국절 논란은 일어 왔고 어김없이 이승만을 다시 치켜세우려고 노력했으나 특히 심각한 이번 정부의 유체이탈 화법에 대해서는 지적하고 싶다. 얼마 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3·8 민주의거’ 64주년 기념식 기념사에서 한덕수 총리는 “정부는 3·8 민주의거 정신을 받들어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를 이뤄 나가겠다”며 “대전의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의거는 지금도 ‘정의의 들꽃’으로 빛나고 있다”고 치하했다. 자칭 법 전문가라고 하는 총리가 입으로는 정의를 외치고 있지만 다른 한 곳에서는 그와 반대되는 불의의 수장인 이승만의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심지어 윤석열 대통령조차 ‘건국 전쟁’ 영화에 대해 ‘우리나라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는 것은 충격 그 자체다. 현재 우리나라는 극심한 이념 갈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 시작이 어디서부터, 누구부터였는지 잘 생각해 보라. 한쪽은 친일이라 얘기하고 또 다른 쪽은 빨갱이라 칭한다. 역사에 ‘만약에’라는 말은 없다고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과연 누구로부터 무엇 때문에 시작된 분열인가를 단 한 번만이라도 진실을 마주하며 생각해 보라.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사회다. 가장 상위법인 헌법 전문에서조차 불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정권의 수장인 이승만을 재평가해 우상화하고 헌법정신을 훼손하며 법치를 논하지 말라.

[윤준영 칼럼] 간신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육사신(六邪臣)의 하나로 간사한 신하를 뜻하는 간신(奸臣)은 동서고금을 통해 존재해 왔다. 일찍이 공자는 간신의 유형을 다섯 가지로 구분했는데 ‘마음을 반대로 먹고 있는 음험한 자, 말에 사기성이 농후한데 달변인 자, 행동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고집만 센 자, 뜻은 어리석으면서 지식만 많은 자, 비리를 저지르며 혜택만 누리는 자’라고 했다. 간신들은 본인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군의 심기를 살펴 명령에 따라 충성을 다한 것뿐이라고 열변을 토한다. 2015년 개봉한 한국 영화 ‘간신’은 연산군 재위 시절 채홍사로 일했던 대표적인 간신이라 불리는 임숭재에 관한 이야기다. “단 하루에 천년의 쾌락을 누리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나이다”라는 대사는 소름 끼침을 넘어 무섭기까지 하며 죽을 때에도 “오직 임금께 미인을 바치지 못하는 게 한스럽다”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다. 과연 그를 임금이 원하는 것에 심기를 살펴 최선을 다해 일했기에 충신이라 할 수 있을까? 과거 절대적 권력의 군주제 시절에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현대사회에도 많은 사람은 주변에서 간신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을 상당히 많이 보고 겪고 있을 것이다. 간신은 사회의 악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간신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현대사회에서도 과거와 다르지 않게 권력이 있는 곳이면 간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오히려 과거보다 현대에서 더욱 그들은 웬만해서 실패하거나 좌절할 일이 없다. 그들이 지니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는 뒷걸음치는 처세술과 자기 이득에 따라 남을 위하는 척하며 이용하는 권모술수, 그리고 윗사람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늘 심기를 파악하며 한편으로는 정적들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기회를 잡아 도태시키는 기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권력 1위라는 대통령의 주변을 한번 살펴보라. 과연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게 일하는 것을 충신이라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절대로 대통령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의 눈에는 본인을 방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듣기 싫은 말이고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하더라도 충언과 직언을 하는 참모들과 이를 꼬집는 언론들도 주변에 둬야 한다. 하지만 지금 대통령의 주변을 보면 간신 임숭재같이 모두 다 대통령의 의중만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있을 뿐 진정으로 대통령을 위해 일하는 참모들이 보이지 않기에 수많은 언론에서 지적하는 문제의 내용에 대해서도 대통령의 행동은 변화가 없을 수밖에 없다. 간신들의 노림수는 간단하다. 윗사람 한 사람에게만 충성하면 나머지 모든 사람을 자기의 발 아래 두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권력을 누릴 수 있기에 이러한 방법이 본인이 최고 권력자가 되지 않고도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간신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그렇기에 현명한 권력자는 본인에게 무한한 신뢰와 지지를 보내는 사람뿐만 아니라 본인의 심기를 거스르는 언행을 할지라도 직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주변에 둬야 한다. 권력자들에게 충언한다. 역사를 보고 명심하라!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권력은 영원할 수 없다. 현재는 본인에게 충성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간신들은 권력이 사라지면 또 다른 권력을 찾아 하이에나처럼 두리번거린다. 공자는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는 이롭고, 충직한 말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다”고 했다. 귀나 심기에 거슬리는 사람도 곁에 두고 늘 충언을 듣도록 귀와 마음을 열고 있으라.

[윤준영 칼럼] 대한민국의 시계는 어느 방향으로 돌고 있는가?

2022년 5월10일, 대한민국의 20대 대통령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공식 취임했다. 전 정부의 검찰총장을 지냈으나 대통령 출마와 선거운동 과정 동안 전임 정부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의 선회를 통해 ‘공정과 상식’을 실현하겠다고 힘줘 강조하면서 역대 최근접 표차로 당선됐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 여야가 각 두 번씩 정권을 가져갔으나 여당인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단 한 번만에 정권을 되찾아 올 정도로 국민적으로 많은 기대를 받으며 출범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권 등장은 화려했다. 아마 그동안의 기성 정치인에게서는 받을 수 없는 신선함으로부터 나오는 파격적 행보와 검사로서 권력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다는 청렴함에 많은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 단 한 번의 국회의원이나 행정부의 경험도 없이 바로 대통령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그 많은 기대를 받고 출범한 신임 대통령이 취임 이후 1년6개월 동안 보여준 횡보는 가히 실망적이었다. 기성 정치인과 다름을 강조했던 신선함은 미숙함으로 청렴함은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압수수색하는 사정정국으로의 국가폭력을 만들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은 코로나 이후 대내외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경제적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중차대한 갈림길에 서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 시계는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자유로운 토론문화는 사라졌고 “우리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생각으로 다름이 아닌 틀림이라 세뇌하고, 대한민국의 성장을 견인했던 교육은 시작부터 삐걱대며 방향을 전혀 잡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방부는 이미 30년도 넘은 이념의 문제를 다시 꺼내 들고 나와 논란을 만들고 있으며 여성이며 약자를 대변하기 위한 여성가족부 장관은 현재 실종 상태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국정 운영의 3대요소인 ‘정책’, ‘인사’, ‘소통’ 모두가 불협화음뿐이며 뚜렷하게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없다 보니 지금 대한민국은 방향을 잃어 가고 있다. 과연 대통령이 강조하는 ‘공정과 상식’이란 무엇일까? 여소야대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취임 이후 1년6개월 동안 수많은 대내외 산적한 문제에 대해 단 한 번도 야당 대표를 만나지 않는 행동은 기성 정치인에게서 보지 못한 참신함이 아니다. 여야 모두 지향하는 바가 다르지 틀린 것은 아니기에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유연함이 필요하고 그러한 과정을 이겨 나가는 것이 바로 민주적 정치이다. 본인이 원하고 바라는 것만이 옳다고 생각하여 강직하게 밀어붙이는 것은 대통령이 늘 강조하는 공정, 상식도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도 아닌 독재와 파시즘이라는 걸 대통령은 깨달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현재 커다란 변곡의 나침반 위에 서 있다. 미래로의 전진이냐 과거로의 회기냐는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이라는 길잡이가 보여 주는 방향이 좌우한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대한민국은 영화 쿠오바디스의 네로 황제 시절과 다를 바 없다. 정치판에는 아첨꾼들이 판을 치고 정치는 민생을 돌보지 않으며 국정 운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로마의 기독교인처럼 정치색을 씌워 박해한다. 그렇다면 왕정시대에 네로 황제가 마지막까지 행복했는가? 국가적 폭력과 독재는 그 끝이 명확하다. 지난해 말 ‘서울의 봄’ 영화를 보며 눈길을 끌었던 거리의 현수막이 생각난다. “1979년 12월에는 군인들이, 2023년 12월에는 검사들이 대거 몰려온다.” 두 번 다시는 대한민국 역사의 시계에 아픈 상처와 분열을 만들지 않길 기원해 본다.

[윤준영 칼럼] 대응과 응징은 ‘안보’일 수 없다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대한민국. 남과 북은 현재에도 군사적인 이해 충돌이 무력으로 번질 수 있는 많은 요소를 가지고 있기에 국가 안보만큼 중요한 국정 기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군사적 불안요소에 대한 안정감을 보수 정권은 늘 강조해 왔고 현재 윤석열 정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 우리는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남북의 두 정상이 9·19 군사합의서를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도발을 명백하게 이어 왔듯 북한이 비상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국가라는 것은 이미 전 세계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작년 12월, 북한의 무인기가 우리의 영공을 무단으로 침입해 대통령실의 집무실 근처까지 침범했으며 연이은 위성과 탄도미사일 발사로 군사합의를 수차례 위반해 왔다. 그렇기에 새로이 출발한 윤석열 정부는 이미 실효가 없고 사문화됐다는 이유로 9·19 군사합의서를 파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몇 차례 되풀이했고, 결과적으로 지난 21일 밤에 정찰위성을 또다시 발사했다는 이유로 22일 비행금지구역을 정한 합의서 1조 3항을 우리 정부가 무력화하자 다음 날인 23일 북한도 군사합의 전체를 무효로 한다고 발표하고 말았다. 우리 정부는 강한 군대를 강조하며 북한의 도발에 강경한 대응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대응과 응징으로 안보를 이어갈 수 있을까? 실제 9·19 군사합의가 실효성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라. 남북이 분단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단 한 번의 군사적 합의가 없었던 상황에 실효가 없다 하더라도 최초이자 유일한 단 하나의 안전장치인 합의서를 파기해 군사적 긴장과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행했던 조치들을 철회하고 군사적 긴장감을 높이며 어려운 경제 상황에 국방비까지 증액시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물론 합의서 파기로 인해 북한에 대한 첩보 활동이 자유로워져 북한의 움직임을 예견해 대응과 응징을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하더라도 과연 안보를 대응과 응징으로 지킬 수 있을까. 더욱이 정부의 발표와 대응 또한 들쑥날쑥해 발표의 신뢰감을 스스로 떨어뜨리고 있다. 지난 3월과 8월에도 북한은 정찰위성을 발사했지만 당시 합동참모본부는 “큰 위협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며 안보에 대한 불안감은 없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하지만 이번에는 불과 3개월 만에 “심각한 위협”이라고 얘기하면서도 북한의 작전 성공 발표에 대해서는 “신뢰할 수 없다”는 일관성 없는 태도에 국민은 ‘정부의 발표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하는 의아심을 표출하고 있다. 특히 신임 국방부 장관과 합참의장은 많은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며 지난 10월에는 고위 장성들을 전원 물갈이하고, 더욱이 국정원장과 국정원 차장들을 갑자기 경질하는 정부의 인사와 대응을 보며 국민이 안보에 안심할 수 있을까. 수도 서울에서 군사작전을 하듯 강한 군대를 어필하며 국군의 날 퍼레이드 행사를 진행하고 미국과의 연합작전을 수행하며 국가 차원에서 최첨단 정보 수집 능력을 통한 안보를 어필할 수도 있지만 세계 최고의 정보력과 최첨단 방어망을 구축했다고 자부하던 이스라엘도 하마스라는 국가도 아닌 무장단체의 기습공격에 무방비로 피격돼 현재 전쟁 상황인 점을 생각하면 철저한 대응과 강한 응징보다는 예방이 더 최선임을 정부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9·19 군사합의가 실질적 효력이 있고 없음을 떠나 실오라기와 같이 잡고 있던 남북의 유일했던 군사적 합의 자체가 사라져 버린 작금의 현실에서 과연 우리의 안보가 제대로 지켜질 수 있는가에 대한 불안감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정권마다 지향하는 정치적, 군사적 방향은 분명 다를 수 있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번 9·19 군사합의 파기는 마치 안보를 군사작전 실험하듯 너무도 성급했다. 잊지 마라! 안보는 ‘대응하는 것’이 아닌 ‘지키는 것’이다.

[윤준영 칼럼] 의료 문제를 바라보는 개인적 시각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더 많은 재화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은 필연적이다. 특히 우리나라같이 불안감이 팽배해 있는 사회일수록 미래에 도래할 불안감을 떨쳐내는 방식에 있어 사회적 합의와 협동의 가치는 낮아지고 혼자만이라도 성공하려는 이기심만 점차 커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의미로 본다면 현재 고수입인 의사는 타 직군에 비해 사람들의 쏠림 현상이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직업의 자격을 ‘다른 변수 없이 단순히 성적으로만 판단해 줄 세우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는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만든다. 최근 다시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의사단체는 즉각적인 반대를 표명하며 강경대응을 예고했지만 의사단체를 제외한 정부와 시민들의 반응은 찬성에 가깝다. 건보재정의 악화와 특정 진료과의 쏠림현상으로 정원 확대가 의료공백의 해소에 실효를 거두기 힘들다는 의사단체와 필수의료서비스 인력의 공백으로 지방의 의료 공백이 가시화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정부의 입장을 들어보면 양측의 주장이 다 이치에 맞는 말이다. 분명 민감한 시기에 정부에서 이러한 화두를 던지는 데에는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이슈를 선점하겠다는 정치적 색깔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의사단체도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춰 설득하지 못했다. 의사단체들은 의대 정원 확대가 국민의료비 증가가 가속화돼 건보재정의 악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한다. 건강보험공단 통계에 따르면 지난 7년간 국민 1인당 건강보험 급여비는 50% 이상 증가했고 전체 인구의 16%인 65세 인구가 건보재정의 43%를 사용한다. 건보료를 내지 않는 65세 이상의 노인층에서 절반 가까운 건보료를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나라같이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나라에서 젊은 세대가 짊어져야 할 재정의 무게와 동시에 의료가 단순히 노인에 대한 복지의 혜택으로만 작용되기 힘들다는 점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기존에는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이 대세를 이뤘으나 최근에는 정재영(정형외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및 신경과 등 노인 위주의 진료과목이 늘어난 것은 이를 대변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의사면허 및 건강보험제도만 공공영역으로 관리하고 병·의원급 개원의에 대해서는 경쟁적으로 수입을 창출하게 만들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이 혼재돼 있기에 진료과목에 상관없이 수입이 일정하거나 하루에 볼 수 있는 환자가 정해져 있는 외국과 달리 의사들의 얼마나 일하느냐에 따라 수입이 천차만별이고, 진료에 소비되는 시간은 타 국가에 비해 월등히 짧아 ‘시간=돈’이라는 현상을 만들어 진료시간은 길고 환자의 수요 메리트가 없는 소아과나 산부인과 같은 진료과목은 기피하는 현상을 만들었다. 실제로 이러한 현상은 저출산, 고령화가 중요한 요인이다. 하지만 모두가 산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고 있기에 노력에 비해 수입이 상대적으로 적은 공적영역이나 기피하는 진료과에 지원하는 사람은 적어지고 사적영역에서 고수입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공적·사적 영역이 혼재된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 문제에 대해 한마디로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지만 의료는 정부 재정이 막대하게 투여되는 만큼 공적영역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선진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의사가 단순히 고수입을 보장하는 양질의 직업이라는 사회적 특권의식의 변화와 더불어 의사들도 공공재의 일환으로 본인들이 국가와 사회의 변화에 순응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도 앞서 의료 문제 역시 인구 구조의 변화가 낳은 문제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하루빨리 저출산, 고령화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뤘으면 하는 바람이다.

[윤준영 칼럼] 누가 청년의 희망을 빼앗았을까?

지난 16일, 9월의 셋째 토요일은 청년의 권리를 보장하고 청년의 중요성을 알리며 청년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인 ‘청년의 날’이었다. 올해로 7회를 맞은 기념일 행사에 윤석열 대통령은 서면 축사에서 “청년들이 청년 정책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청년위원 위촉 확대, 청년보좌역과 2030 자문단의 전 부처 확대를 차질 없이 추진할 것”이라고 했고 청년들을 대표해 선언문을 대독한 아나운서는 “이 땅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피땀 흘린 선현들처럼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정진하겠다”며 “우리 청년들도 이 청춘을 의미 있게 꾸려나가 보겠다”고 화답했다. 이날 참석한 5만5천여명의 청년들은 모두가 한뜻으로 젊음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하나 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정치권은 달랐다. 여야 모두 청년을 위한 정책을 펼치겠다면서도 여당은 “조국 사태에 이어 최근 야당 의원의 수십억원대 가상자산 투기 의혹까지 공정과 상식을 무너뜨리는 작태가 청년에게서 희망이란 단어를 빼앗아 가고 있다”며 야당을 비판했고, 야당은 “윤석열 정부가 청년을 위한 예산을 대거 삭감했다. 표가 필요할 때는 청년을 찾고 당선되고 나서는 나 몰라라 하는 후진적 행태부터 바꿔 예산 심사 과정에서 청년 예산이 정상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서로 다른 입장을 소리 높여 외쳤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미래세대’와 ‘청년’을 강조해 왔다. 지난 14일 부산에서 열린 ‘2023 청년의 날 기념식’에는 직접 참석해 “청년들이 자기들에 관한 청년 정책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며 “청년들이야말로 국정의 동반자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말로는 청년들에게 목소리도 내고 함께하는 동반자라면서도 작년 ‘윤석열차’로 홍역을 치른 뒤 올해 열린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는 수상작 전시회도 하지 않았고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듯 지난해까지 후원에 이름을 올렸던 문화체육관광부와 경기도교육청의 이름도 뺐다. 고(故) 채수근 상병의 사건 처리 과정도 한번 생각해 보라. 이 땅의 젊은 청년이 나라를 위해 명령 하나에 귀한 목숨을 바쳤는데 진실을 폭로한 수사단장은 항명이라 규정하며 어떻게든 피해를 주려 하면서도 대법원에서까지 형이 확정돼 집행유예를 받은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은 사면권을 발휘해 다시 공천을 줘 선거에 나가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청년들이 무슨 희망을 가지겠는가?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어린 학생의 작품에 보복하고, 나라를 위해 젊은 피를 바친 해병대 채 상병에게는 진실을 감추고, 대법원의 판결을 대통령의 사면권이라는 권한으로 무력화해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원칙도 없애 버리는 일도 자행하고 있으니 과연 누가 청년들의 희망을 무너뜨렸는가 생각해 보라! 공정과 상식을 연신 외치면서도 본인들을 비방하거나 의혹을 제기하면 전부 ‘괴담’ 또는 ‘가짜뉴스’로 치부하고 기회를 주고 목소리를 듣겠다던 미래세대와 청년들은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이 오히려 시계가 거꾸로 가는 듯 논란이 많았던 MB시절의 인사들만 대거 기용하며, 경제와 사회 전반에 걸쳐 지표들이 바닥으로 치닫는 상황임에도 공정성과 중립의무를 가진 장관들을 부추겨 30년 전에 이미 끝난 ‘공산전체주의’라는 용어까지 번번이 사용하며 철 지난 이념전쟁을 하고 이것을 국가가 지향해야 할 가치라고 하는 대통령에게 청년들은 과연 어떠한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희망은 말이나 구호가 아니다. 희망은 과정 속에서 행해지는 행동의 결과로 생겨난다는 것을 명심하고 더 이상 청년의 희망을 감언이설로 설득하려 들지 말라.

[윤준영 칼럼] 일제강점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나라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서구의 국가들이 부러워할 만한 반만년이라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그렇기에 고조선부터 현재 대한민국까지 여러 왕조와 국가, 정권이 탄생하고 소멸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이에 대한 평가도 역사학자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가장 논란이 큰 부분은 아마도 근현대사일 것이다. 역사는 이미 지나간 일이기에 역사학자마다 다른 사고와 해석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오히려 다양성으로 인해 공과를 구분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제대로 정의 내려지지 못한 진실들에 대해 정치인들은 간악하게 정치적 구도에 맞춰 본인의 세력 결집을 위해 이용한다. 특히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보면 가장 논란이 심각한 대상인 일본과 북한과 관련되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정치권의 거짓 선동과 국민 갈라치기로 인해 진정으로 역사가 말해주고 싶은 교훈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곡된 내용을 정권의 입맛대로 설계된 ‘설계된 가짜 역사관’으로 학습 받았다. 그렇기에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역사적 가치관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역사적 사실에 본인이 성장하며 가지는 정치적 성향을 결합해 스스로 역사를 본인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판단해 버리며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의 주장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딱 정치권이 요구하는 술수대로 분열됐다. 하지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라. 아무리 해석이 다를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끼리의 내전과 외침을 어떻게 같게 볼 수 있을까? 삼국을 통일한 신라이지만 같은 민족인 고구려, 백제와 전쟁을 했다고 해서 우리는 역사에서 고구려나 백제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도 우리 민족의 일원이었기에 갈라져 있어 이념이 다르다 해도 어찌 신라의 한민족 통일 전쟁이 당나라와의 전쟁과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 전체에 크나큰 불행이었고 대한민국의 주적인 북한 정권이지만 어찌 북한과의 전쟁을 일제강점기 일본과 치른 독립전쟁과 비교할 수 있을까? 같은 민족끼리의 내전을 외침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갈라치게 하는 정치인의 간악한 술수가 국민 모두를 현혹하고 있다. 최근 육군사관학교의 교내에 설치돼 있는 독립전쟁 영웅 5인(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이회영)의 흉상을 철거해 외부로 옮기고 그 자리에 일제 만주군 출신 백선엽 장군의 흉상 설치를 검토하고 있고 특히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의 경력이 있기에 문제가 있다고 하며 내부적으로 홍범도 장군을 대체할 인물로 백선엽 장군이 거론됐다는 뉴스는 충격 그 자체다. 백선엽 장군은 2009년 보수정권인 이명박 정부 당시 편찬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이름을 올린 친일파이고 본인의 자서전에서도 본인의 이력과 잘못을 인정하며 반성한 인물이다. 만약 공산주의 가입 이력이 문제가 된다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출신에 남로당 가입 이력까지 있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인이 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놨다.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80년 전 조선의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가 조선을 떠나며 했던 말이다. 참으로 애석하지만 아베 노부유키의 말처럼 역사적으로 일제강점기는 끝났지만 정신적으로 일제강점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윤준영 칼럼] ‘K-seed’를 아십니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고 사랑하는 ‘청양고추’를 먹을 때마다 독일 기업이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마트에서 청양고추를 사면 분명 ‘국내산’이라고 돼있다. 청양고추뿐만 아니라 팽이버섯, 양송이버섯 등의 버섯류, 양파, 양배추, 파프리카, 고구마 등 모두 국내산이라고 돼 있어 애국하는 마음으로 국내산만 고집했는데 ‘외국에 로열티를 낸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씁쓸하지만 한국인 대표 먹거리인 청양고추의 종묘권은 한국 기업인 중앙종묘가 가지고 있었으나 IMF 시기에 미국의 몬산토에 인수됐고 몬산토는 다시 2018년 독일 바이엘에 인수돼 우리가 청양고추를 먹을 때마다 독일 바이엘에 일종의 저작권과 같은 지식재산권으로 종자 로열티를 내고 있다. 음식물뿐만 아니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각종 장식을 달고 있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바로 구상나무인데 구상나무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나는 토종식물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이런 구상나무를 신품종으로 개량했고 개량한 종묘를 다시 한국에 역수출하고 있으니 우리의 자원이 해외로 유출돼 오히려 해외의 국부에 도움을 주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2010~2019년 해외에 지불한 종자 로열티는 1367억원인 데 반해 해외에서 받은 로열티는 고작 26억원으로 경상수지 불균형이 아주 심각하다. 21세기 가장 주목받는 산업은 단연 반도체산업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근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식품 원재료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갔고 기후변화로 식량자원이 무기화될 가능성이 커지자 각국은 식량 자주권을 수호하려 자국의 종묘산업을 육성하기에 혈안이 돼 있다. 세계 종자 연관산업은 약 86조원으로 추정되고 매년 약 5%씩 성장하고 있어 반도체 시장을 뛰어넘는 이른바 ‘제2의 반도체산업’이라고도 불린다. 실제로 금 1g의 가격이 4만8천원인 데 반해 파프리카 종자 1g은 12만원, 검은빛을 띠는 방울토마토 종자는 1g당 7만5천원으로 금값보다도 비싸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하고 부가가치가 확실한 전 세계 종자 산업은 미국과 중국이 50%를 차지하고 있고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선진국들이 대부분 독점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식량 자급률이 50%가 채 되지 않고 식량자원 수입의존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인 데 반해 한국의 종자 산업 점유권은 겨우 1.4%로 초라하다. 결국 6차 산업으로 불리는 농업의 핵심은 ‘종자’다. 그렇기에 다른 선진국에 비해 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나라도 열심히 종자 개발을 위해 애쓰고 있다. 올해 2월 정부는 향후 5년간 1조9410억을 투자해 디지털 육종 등 신기술 상용화에 나서고 핵심 종자 개발도 추진하는 등 ‘제3차 종자 산업 육성 종합계획’을 발표하며 ‘K-seed’ 브랜드화에 나섰다. 이제 종자는 인류의 생존 및 국가의 안보를 담보하는 아주 중요한 생명체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고(故) 우장춘 박사는 ‘씨앗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라고 말했듯이 불확실한 미래에 국가의 존망과 식량 자주권을 위해서라도 종자 경쟁력을 강화하고 이를 육성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머지않은 미래에 K-seed 브랜드가 한국을 넘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 대한민국이 식량부국으로 우뚝 서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

[윤준영 칼럼] 착각하지 마라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한 방류 시운전이 12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도쿄전력 관계자는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구조물인 ‘차단장치’의 동작 확인 등을 목적으로 한 시운전을 12일부터 2주 동안 실시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맞춰 뉴스에서도 “이런 속도라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예정대로 7월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오염수 방류에 대해서는 인근 국가 모두가 반대하는 상황이지만 이에 대해 정작 거리상 가장 가까운 나라인 대한민국 정부는 아직도 오염수 방류에 찬성인지 반대인지에 대한 입장조차 국제사회에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한 찬반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야권의 3개당은 적극적으로 방류를 반대하고 있지만 여당은 찬성의 관점으로 ‘후쿠시마 오염수’가 아니라 ‘후쿠시마 오염 처리수’라고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부터 오염수의 안전을 제대로 알린다는 이유로 세계적인 석학을 초빙해 세미나까지 하며 ‘10ℓ를 마셔도 괜찮다’고 주장하고 일상생활에도 그 이상의 방사능에 노출돼 있어 ‘극미한 양으로 문제가 될 수 없다’라는 말로 국민을 안심시키며 오히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야당을 상대로 ‘제2의 광우병 괴담’이라고 괴담 수준의 선동질을 멈추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과학 전문가가 아니기에 오염수가 해로운지 해가 없는지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이번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인재’가 아닌 ‘자연재해’로 인해 발생한 명백한 사고인 만큼 아무리 우리나라에 반일 감정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본이라는 한 국가가 혼자서 자연재해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감당하라고 하는 것에도 국가의 인도적 차원에서 무리가 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다만 이번 사태를 바라보며 느끼는 진정한 문제는 일본과 한국 정부의 태도라고 말하고 싶다. 분명 자연재해에 대한 책임이 온전히 한 나라에만 있다고 할 수 없다. 지구라는 공존의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다 보니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님에도 피해를 받는 경우와 작은 몸집이 커다란 태풍으로 번지는 ‘나비효과’는 분명 존재한다. 자연을 함부로 대하고 사용해 겪는 자연재해를 맞은 많은 국가의 문제가 오롯이 그 나라만의 몫이겠는가? 이번 일본 지진의 경우에도 분명한 자연재해였다. 만약 일본이 지리적 약점을 부각하고 향후 주변국들과,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 원전에 대한 위험을 알리며 세계 어느 나라든지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을 수 있음에 호소하고 향후 원전에 대한 좀 더 세심한 관리를 얘기하며 국제사회의 이해를 구했다면 의도적이지 않은 사고에 대해 국제사회가 이렇게 호된 평가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그들의 체면과 이권을 위해서라도 국제사회의 이해를 구하는 대신 독선적으로 ‘우린 아무 잘못이 없다’며 주변국들과 국제사회에 폭압적이고 강제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한국 정부도 악화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다며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형국이다. 설령 일본의 주장이 100% 과학적 기반에 비춰 사실이라 할지라도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국민의 건강에 단 0.1%라도 유해를 가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오염수 방류 결정이야 국제법이 정한 대로 결정되겠지만 국민을 대변하는 정부로서 이는 분명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에 대해 국민을 설득할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피해가 갈 수 있는 자국민을 보호할 방법을 찾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함구해 분쟁을 만들었고, 여당은 더 나아가 일본에서나 할 법한 행동으로 일본의 독선에 면죄부만 주며 국민을 정쟁 속에 빠뜨리고 있다. 한일 양국의 정치인들이여, 제발 착각하지 말라. 오염수의 안전도 문제이지만 양국의 국민은 정부의 국민을 대하는 태도에 더 많이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윤준영 칼럼] 외교라는 고급 마케팅 기술에 대한 조언

“국가의 이익을 위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외교의 사전적 의미다. 즉, 외교란 국가의 이익을 바탕에 깔고 주권국가 간의 평화적인 방법으로 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일종의 고급 마케팅 기술인 것이다. 마케팅 측면에서 보면 본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는 버리고 일부는 취하면서도 가장 이익이 됨 직한 사안에 심혈을 기울이는 게 기본이다. 그렇기에 외교는 양자가 동등한 입장에서 마주해야 하며 미리 예단해 많은 것을 내어 줄 필요는 없으나 많은 것을 얻어 왔을 때 외교적으로 성공했다고 통상적으로 얘기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영업사원 1호를 자처했던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는 어떠한가? 무엇을 주고 무엇을 얻어 왔을까? 우선 일본과의 외교 성과를 한번 보자. 애석하게도 방일 정상회담을 통해 기억나는 단어는 ‘제3자 변제’, ‘후쿠시마 농산물 수입’ 등 우리가 준 선물 보따리에 반해 물잔의 반을 채우면 일본이 나머지 반을 채우리라던 당찬 외교적 포부와는 전혀 다르게 강제징용, 독도의 교과서 기술 등 국가적 자존심은 사라지고 굴욕적 외교에 대한 청구서만 잔뜩 받고 돌아왔다. 이를 증명하듯 광복 이후 70년 만에 처음으로 대학교수를 중심으로 일본과의 외교에 대해 시국선언이 릴레이로 이뤄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한두 곳의 대학도 아니고 시대의 거울이라 할 수 있는 대학교수들이 학교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이러한 시국선언을 릴레이로 진행한 경우가 또 있을까? 그렇다면 이를 계기로 한 번쯤은 외교정책을 되짚어봐야 했다. 하지만 수많은 교수의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그러지 않았다. 이번 방미의 성과는 무엇인가? 대통령실과 여당은 역대급 성과라며 벌써 온 거리에 현수막으로 방미 성과를 자찬하고 있다. 하지만 방미 전부터 대통령실 도청 문제로 인해 동맹임을 의심케 하는 일들이 벌어졌으며 방미 전에 가졌던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를 통해 전 국민은 대통령의 미국 방문 이전부터 ‘바이든, 날리면’의 듣기평가에 이어 “주어가 생략됐다”는 독해평가까지 해야 했다. 이로 인해 현재 경제적, 안보적 위기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한 중요한 방문임에도 미국과의 회담으로 인한 줄다리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됐고 힘이 빠져버려 외교적 성과는 시작부터 엉망진창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방문의 실제적 효과는 있었을까? 대한민국 영업사원 1호를 자처했던 대통령인 만큼 안보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경제 쪽에서 무언가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나 반도체지원법 등 굵직한 문제가 많이 있었음에도 너무 안보 문제에 치중하느라 정작 중요한 경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성과를 만들지 못했다. 7조원대의 투자를 유치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으나 오히려 한국 기업들은 미국에 지난 2년간 133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누가 봐도 손해가 막심한 거래다. 오죽하면 대통령의 의회 연설에서 미국 내 한국 기업의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얘기할 때 모든 의원이 기립 박수를 쳤겠는가? 이것만 봐도 누가 이익을 본 거래인지를 알 수 있다. 더욱이 역대급 성과라고 자찬하고 있는 안보에서도 미국이 요구하는 진영론적 국제관계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적 아니면 아군’이라는 인식을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북·중·러의 거센 반발이 예상되며 특히 북한의 무력시위와 핵 개발이 오히려 거세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대통령실과 여당은 ‘사실상 핵 공유’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미국은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는 것만 봐도 미국은 겉은 손을 맞잡은 동맹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대한민국이 미국의 대리전으로 직접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게 한다는 화려한 포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외교는 ‘적 아니면 아군’이라는 가치보다는 실리다. 당연히 미국과의 동맹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는 미국과의 평등한 입장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외교는 상황을 좋게 만드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상황 악화를 방지하는 것도 중요함을 명심하라. 제발 미국에만 편중돼 있는 ‘서방외교’가 아닌 전 세계 누구와도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사방외교’를 하라.

[윤준영 칼럼] 쿠오 바디스, 대한민국?

요한복음서 13장 36절, 시몬 베드로가 물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도미네, 쿠오 바디스?·Domine, quo vadis?).” 예수께서 답하시길 “지금은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쿠오 바디스’는 고대 로마의 부패와 잔인함을 묘사한 서사시로 출간된 지 10년 만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여 향락을 일삼고 국정을 돌보지 않으며 시적 영감을 얻기 위해 로마에 불을 지르고 수많은 사람들이 배수로를 통해 급박하게 대피하는 장면과 같은 네로 궁정의 퇴폐적인 향연이나 초기 기독교도들이 겪는 박해 등의 생생한 묘사가 일품인 작품이다. 네로 황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로마시민들이 폭도로 변하자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콜로세움에서 사자의 먹이로 주고 불태워 죽이기도 하며 살육쇼를 벌인다. 이를 영화화한 영화 ‘쿼바디스’에서 네로 황제는 “난 군중의 목이 딱 한 개였으면 좋겠어. 그걸 잘라 버리게”라는 소름 돋는 대사까지도 날린다. 고대 왕정시대에나 가능한 폭력적인 정권과 말로를 보여주는 영화사에 길이 남는 수작이다. 현재의 대한민국과 비교해 생각해 보자.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왕정시대에나 가능했다고 생각했던 참혹한 국가폭력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대한민국을 감싸고 있다. 일관된 기조의 국정운영 철학이 없다 보니 지향하는 바 없이 우왕좌왕하며 삐걱거리는 일이 허다해 ‘국정난맥’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으며 국정 운영의 기본 3요소인 ‘정책’, ‘인사’, ‘소통’ 모두가 불협화음뿐이다. 전 정부와의 차별로 소통을 강조하며 시작했던 ‘도어스테핑’은 어느샌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오히려 미국 국무부 국가별 인권보고서에는 대통령실과 여권의 언론에 대한 과도한 대응이라며 ‘폭력적’이라고 했고 인사는 장관부터 얼마 전 발생했던 국가수사본부장 자리까지 참사라고 할 지경으로 망가졌으며, 정책은 대표적으로 주 69시간제 근로에 대해 정부, 대통령, 대통령실 모두 다른 얘기로 우왕좌왕하며 중심을 못 잡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반도체 위기로 7개월째 수출은 급감해 사상 최악의 무역적자를 연일 경신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대비는 없고, 더욱이 얼마 전 친일외교 논란으로 역사적 인식과 민족적 자부심마저 흔들리고 있는 지경이다. 이에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중요한 일들은 다 입법이 필요하다. 간절한 목표가 있으면 야당이 원하는 걸 좀 주면서 내가 진짜 원하는 걸 할 텐데 지금 정부는 하고 싶은 일이 없다. 그래서 국회 의석이 적어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다. 노태우 대통령 때도 여소야대였다지만 그때와 달리 통과시키고자 하는 법이 없어 소수파이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이런 여당 처음 봤다”라고까지 말한다. 특히 일본과의 정상회담에 대해 종교계와 학계, 심지어 학생들까지도 유례없는 릴레이 시국선언을 하는 상황임에도 그들을 ‘반일감정으로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세력’으로 치부하고 일본은 연일 정상회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한국 정부를 믿어 달라”는 얘기뿐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이 소통 자체가 부재다. 과연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quo vadis, korea?).” 안타깝지만 이런 상황들을 정리해 생각해 본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혼란의 연속으로 흡사 고대 로마 네로 황제 시대와 다를 것이 없다. 정치판에는 아첨꾼들이 판을 치고 민생을 돌보지 않으며 국정 운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로마의 기독교인처럼 정치색을 씌워 박해한다. 그렇다면 왕정시대에 네로 황제가 마지막까지 행복했는가? 국가적 폭력과 독재는 그 끝이 명확하다. 영화의 마지막처럼 로마시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위정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현명하고 강한 의지를 지녀 지금은 촛불이지만 예수께서도 말하신 대로 나중에는 모두가 따라와 들불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라.

[윤준영칼럼]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이념의 차이와 지배층 및 피지배층의 견해차로 인한 갈등을 정치적 이슈화해 이익을 챙기려 하는 사람들은 시대를 초월해 분명히 존재한다. 일제강점기가 그러했고 6·25전쟁이 그러했으며 5·18민주화운동과 제주4·3사건도 그러했다. 일제강점기는 나라를 빼앗긴 상태였고 6·25전쟁 또한 국가와 국가 간의 갈등이었다. 하지만 5·18민주화운동과 제주4·3사건은 사회가 불안정한 시기에 자국민을 향해 정치적 반공 정서를 부각하며 “북한이 개입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이용해 본인들의 정치적 세력을 단합시키고 적대 감정이 남아있는 북한이라는 곳으로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의도로 자행됐던 국가폭력이었기에 어떤 의미로 본다면 오히려 일제강점기나 6·25전쟁보다 더 잔혹하고 무거운 정치적 사건이다. 지난 13일 국민의힘 최고위원 후보로 나선 모 의원은 제주 4·3평화공원을 방문해 “4·3사건은 명백히 (북한) 김씨 일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라고 얘기하며 진상조사가 이뤄지기까지 오랜 세월 제주도민 사회를 ‘색깔론’으로 괴롭혀 온 ‘제주 4·3 북한 지령설’을 또 꺼내 화두가 됐다. 곧바로 관련 단체들은 성명서를 내며 사과를 촉구했지만 “나는 북한 대학생 시절부터 4·3사건을 유발한 장본인은 김일성이라고 배워 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진보와 보수정권 모두에서 이념을 초월하며 인정해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추념일로 지정된 대한민국의 기념일을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닌 탈북 국회의원이 부정했다. 오히려 단 한 번의 실언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과를 요구하는 관련 단체의 입장이 무색하게 이후의 합동연설회와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지속적으로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고, 기자회견에서도 “역사적 사실을 얘기하는데 뭐가 망언이고 뭐가 피해자들과 희생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된다”고 강조하며 말했다. 너무나 충격적인 해당 의원의 발언에 선관위에서도 “선관위원이 해당 의원에게 지역 민심이나 국민 정서에 반하는 언행은 삼가줄 것을 구두로 공식 전달했다”고 MBC와의 통화에서 밝혔다. 전 세계 유일한 이념의 차이로 인한 분단국가 대한민국! 그렇기에 아직도 이념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한국 사회의 주요한 정치적 이슈이기에 교육현장에서는 통일을 강조하면서도 한국의 주적은 북한이라고 가르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의 헌법 3조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돼 있어 북한까지도 우리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우리가 실질적 지배를 하고 있지 않은 이북 5도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에서 도지사 및 시장, 군수를 임명한다. 이 말은 통일은 분명한 민족적 과제이지만 우리의 주적은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북한 정권이지 북한 주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나라는 북한이 무력 도발을 한다고 하더라도 북한 정권에 대한 규탄을 하면서도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4·3사건을 북한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모 의원은 다르다. 해당 의원은 소위 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 정권의 최일선에 있었던 분이었고, 북한의 엘리트층으로 단 한 번도 배고픔을 느낀 적이 없었던 분으로 정확히 얘기하면 우리가 인도적 입장으로 대해야 하는 북한의 일반 주민이 아니고 우리의 주적인 북한 정권과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분이 북한 대학생 시절부터 배워온 내용이 역사적 진실이라고 주장하며 망언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북한에서 배워온 모든 것이 본인 말대로 사실이라는 얘기인가? 그런 논리라면 얼마 전 북한에서 조사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2위인 북한을 두고 152위인 대한민국으로의 망명을 왜 선택했는가? 북한이 정상 국가가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 망명을 선택해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나 되신 분이 북한 체제에서 학습하고 배워 온 내용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망언이 아니라는 발언은 상당히 모순적이며 상식 밖이다. 그동안 많은 그릇된 이념과 신념, 이념 간의 대립과 정치적 분쟁으로 우리는 같은 민족임에도 서로를 많이도 죽이고 다치게 했다. 그들에게 다시는 이러한 아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죽어 버린 망자의 명예까지 2차로 죽음에 이르게 하지 말라. 해당 의원뿐만 아니라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정치인 모두에게 명한다. 제발 “더 이상 죽이지 말라.”

[윤준영 칼럼] 교육은 정치의 대상 아니다

2021년 5월16일,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이틀 앞둔 이날 당시 유력한 대선 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5·18은 현재도 진행 중인 살아있는 역사이며 자유민주주의 헌법정신이 우리 국민 가슴에 활활 타오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머니투데이에 “(5·18이) 지금의 헌법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만드는 원동력”이라며 “역사의 교훈을 새겨 어떤 독재에도 분연히 맞서야 한다. 독재와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게 자유민주주의”라고 했다. 자유민주주의와 5·18정신을 강조하며 자유와 정의를 앞세워 윤 전 검찰총장은 그로부터 약 1년 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2023년 신년사를 통해 화두로 던진 윤석열 대통령의 교육개혁으로 새해 벽두부터 연일 시끄럽다. 특히 5·18민주화운동의 교육과정 삭제는 불과 1년 전 “5·18정신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숭고한 정신으로 국민 전체가 공유하는 가치로 떠받들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며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헌법 전문(前文)에 삽입하는 데 찬성한다”고까지 했던 대통령의 발언으로 볼 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역사의 교훈이며 국민 전체가 공유하는 가치라고 강조했던 발언대로라면 오히려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그토록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5·18 교육을 강화하고 강조해야 하는 사안이 아닌가? 러닝메이트제 추진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러닝메이트제는 시·도지사 선거를 하면 공동 등록한 교육감이 자동으로 선출되는 제도로 사실상 시·도지사가 교육감을 지명하는 것으로 정당 공천을 금지하고 있는 기존 직선제를 완전히 뒤엎는 내용이다. 보수정권이 탄생할 때마다 나온 교육감 러닝메이트제 추진은 지난 MB정권에서도 시도했던 일로 교육의 정치화와 편 가르기만 두드러지는 모양새라는 지적이 강해 그동안 무산됐는데, 광역단체장이 12 대 5로 보수의 우세가 강했던 이번 선거에서조차 진보 교육감이 아홉 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눈엣가시인 진보 교육감들을 배제하기 위해서라도 러닝메이트제를 화두로 던진 듯하다. 하지만 교육은 미래의 대한민국을 육성하는 ‘백년지대계’가 아닌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의 목표가 다를 수는 있지만 12년 동안 공교육 체제 안에서 배우고 학습해 나아가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정권이 최대 세 번 바뀔 수 있는데 이때마다 학습해 온 목적과 방향이 다르다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생각을 정권의 입맛대로 바꿔 강조하거나 축소해 가르친다면 자라나는 학생들이 사실에 입각한 올바른 역사관을 지닐 수 있겠는가. 하물며 헌법 전문에 삽입하는 것도 찬성한다던 윤석열 정부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후 거의 대부분의 세월 동안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다가 명예회복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금 이들에게 상처를 주려 하는가. 정치적 관점이 아닌 교육적 관점으로 본다면 오히려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올바르게 기록하고 가르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 아닐까. 물론 교육부는 이번 사건이 해프닝이라고 땀 흘리며 변명하고 있지만 이주호 장관은 이미 MB정부에서 5·18민주화운동의 삭제를 지시한 바 있어 진의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금번 교육개혁에서 나온 5·18민주화운동, 성평등, 성소수자, 노동존중교육 등의 용어 삭제나 교육감 러닝메이트 같은 이 모든 상황이 정치적인 목적이기에 정치가 교육에 개입되는 현실이 현직 교육자로서 너무나 안타깝다. “교육의 진정한 목적 중의 하나는 부단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인간을 두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맨델 크레이턴은 말했다. 교육을 정치적으로 보고 득과 실을 판단하지 말고 역사적 상황과 사실 속에서 부단히 문제를 제기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 능동적 역사관과 가치관을 가지는 아이들을 길러내도록 교육만큼은 정치의 정쟁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라.

[윤준영 칼럼] 대통령의 가치관

사람의 행동이나 생각은 가지고 있는 가치관으로 투영되고 우리는 그가 지니는 가치관으로 사람을 예측하거나 판단한다. 폴란드 출신의 심리학자 밀턴 로키치는 가치관에 대해 ‘특정한 행동 방식, 존재 양식이 그 반대의 것보다 개인적, 사회적으로 더 바람직하다는 기본적인 신념’이라고 말하며 가치관은 옳고 그름, 바람직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을 선호하고 선택해 행동과 태도를 결정하는 준거가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통령이 가지는 가치관은 어떠할까. 최초의 출퇴근 대통령, 홍수 피해와 10·29 참사라는 국가적 재난, 노동계와의 협상, 야당과의 예산안 협의, 해외순방 등을 보며 대통령의 생각과 태도는 대한민국이 나아가는 방향이며 국민들의 생활과 직결돼 있기에 그동안 보여 온 대통령의 언행을 통해 대통령의 가치관을 생각해 봤다. 첫 번째로는 언론관이다. 첫 용산 출퇴근 시대를 연 대통령답게 그는 언론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약속하며 첫 출근날부터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을 시작했고, 대통령의 첫 대답은 “일해야죠”라는 웃음 띤 얼굴이었다. 하지만 8월 미국 순방을 계기로 이 모든 것이 변했다. 정부와 여당은 대통령의 욕설을 보도하며 대통령을 비판했던 언론에 ‘가짜뉴스’라는 프레임을 씌워 항의와 보복을 강행했고, 대통령은 사적으로 가까운 관계라며 특정 언론과는 사유재산이 아닌 전용기에서 환담을 나눌 정도로 가깝게 지내나 비판적인 언론은 국익을 이유로 탑승도 배제했으며 대통령에게 이에 대한 사유를 따져 묻는 기자와 대통령실은 언성을 높이며 언쟁까지 벌였다. 그 결과는 잠정적 출근길 문답의 폐지이며 국익을 이유로 대통령의 회담과 활동에 대한 취재도 대통령실에서 주는 사진과 내용으로만 보도하라고 하고 있다. 맘에 안 드는 언론에 눈과 귀를 철저히 막았다. 두 번째로는 노동관이다. 불과 6개월 전인 6월10일, 화물연대 총파업 돌입 나흘째 되던 날 대통령은 “노동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은 정치인이 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쟁점에 대해 정부가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정부의 중립을 강조한 후 나흘 뒤인 6월14일 화물연대와 국토교통부의 협상이 타결됐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난 현재 정부는 노동계와의 대화보다는 마음에 들지 않는 노동계에 매정하게 권력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 여당은 소위 ‘노란봉투법’에 대해 ‘황건적 보호법’이니 ‘불법파업 조장법’이니 하는 자극적인 언사로 몰아가고 안전운임제와 일몰제의 법제화를 부르짖는 노동자를 외면하며 국제노동기구(ILO)가 화물연대 업무개시명령에 대해 정부의 의견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직접 ‘범죄행위’라는 말로 강경 대응을 시사했다. 운송 거부를 범죄행위라고 대통령이 직접 정의 내린 것이다. 대통령은 본인의 말처럼 노동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다만 비정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정치관이다. 대통령은 여당의 지도자가 아니고 국민 모두의 지도자가 돼야 함에도 6개월 동안 여당의 지도부와 심지어 ‘윤핵관’이라고 불리는 인사들과는 부부 모임을 할 정도로 가까이 지내면서 야당의 지도부와는 단 한 차례도 면담하지 않았다. 임기 초반부터 내년도 예산안 처리를 코앞에 둔 지금까지 협치를 강조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거대 야당이 협조해 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여당은 책임 있는 자세로 설득하는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협치는 고사하고 야당과는 아예 담을 쌓겠다는 얘기다. 우리는 사상 초유로 맘에 안 드는 언론에는 눈과 귀를 막고 맘에 안 드는 노동자에게는 비정하며 맘에 안 드는 정치인에게는 담을 쌓고 있는 이분법적 가치관을 지닌 대통령을 맞이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대통령의 가치관은 ‘내 편 아니면 적’이다. 이분법적인 가치관을 지닌 대통령에게 대통령의 편이 아니라도 부디 많은 국민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윤준영 한세대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민주주의는 죽었다

논어를 보면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체계에 대해 물었고 공자는 답했다. “첫째, 식량을 충족시키고 둘째, 군비를 충분히 하고 셋째, 백성들을 믿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자공은 다시 “만부득이하여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셋 중에서 어느 것을 버려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무기를 버려라”라고 했다. 자공이 또 묻기를 “만부득이하여 또 하나 더 버려야 한다면, 나머지 둘 중에서 어느 것을 버려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양식을 버려라. 자고로 삶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그러나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공자의 말을 넓은 의미의 현대식 표현으로 바꾼다면 국가보다는 정권이, 백성보다는 국민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기에 이를 현대식 의미로 표현한다면 “국민의 신뢰를 잃은 정권은 성공할 수 없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지배’를 뜻하는 말이기에 꼭 자유롭지 않고 폭압적일 수도 있어 다수의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는 때로 어이없는 결정을 하게 된다. 프랑스 철학의 거장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에서 “민주주의는 신을 모독하고 젊은이를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죽였고, 히틀러와 같은 인물을 지도자로 선출해 전쟁을 이끌기도 한다”며 국가의 주인인 국민 다수가 결정하는 민주주의의 모순을 역설한다. 하지만 심지어 공산 독재 정권을 포함해 자유롭지 않고 폭압적인 모순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하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다. 그래서 아무리 다수를 차지해 정권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단 한 번의 투표로 인한 선택이기에 국민들이 시시각각 정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여론에 지도자들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결국 다수의 국민이 바라보는 바로미터이고 ‘다수에 의한 지배’의 상징성에 있어서도 여론은 무시할 수 없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매주 지도자에 대한 지지도와 정책의 찬반을 체크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한번 보자. 분명 윤석열 대통령은 근소한 차라 할지라도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획득했고,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투표를 통한 선택이었기에 그 결과는 5년이 지속돼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다수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가졌어도 그 뜻을 국정에 반영해야 그것이 비로소 대통령 스스로가 연신 입에 담고 있는 ‘민주주의’인 것이다. 여론이라는 것은 투표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단 한 번의 결과로 승자와 패자를 가르지 않고 국민들의 계속적인 참여를 통해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지속적으로 알려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권 창출 5개월 만에 지지율이 30%도 되지 않음에도 “지지율은 신경 쓰지 않는다. 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한다면 그 국민은 대체 누구이며, 본인을 지지해 주는 30%만이 국민인가. 거의 49%의 선택을 받아 정권을 창출했음에도 불구하고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30%도 안 되는 지지율로 떨어진다는 것은 결국 본인을 선택했던 국민들도 본인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특정 정당의 수장이 아닌 국민의 수장이기 때문에 이것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해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과연 현재의 대한민국이 정녕 국민을 위하고 있는가. 30%의 국민만을 보고 가는 대통령을 가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애석하게도 이미 죽었다. 윤준영 한세대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노란봉투법’을 아십니까?

‘노란봉투법’. 노조의 파업으로 발생한 손실에 대한 사측의 손해배상을 제한하는 내용 등을 담은 법안으로 2014년 법원이 쌍용차 파업 참여 노동자들에게 47억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자 한 시민이 언론사에 4만7천원이 담긴 노란 봉투를 보내온 데서 유래된 것이다. 이로 인해 시작된 해당 법안은 노조법상 손해배상 책임이 면제되는 합법 파업의 범위를 확대하고 노동자 개인에게는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게 한 것이 핵심이었으나 19, 20대 국회에서 연이어 폐기됐고 현재 21대 국회에도 발의돼 계류 중이다. 얼마 전 다리도 마음대로 펼 수 없는 0.3평의 조그만 철골 감옥에 하청업체 노동자가 스스로를 가둔 사건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스스로를 몰아 놓고 목숨을 걸어가며 투쟁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임금과 근로조건의 개선이다. 노사 양측의 극적인 타결로 문제가 해소되나 싶었지만 사측인 대우조선해양은 파업을 벌인 하청노조 집행부 5명에게 불법 파업을 이유로 47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배상금액은 1인당 95억원으로 근로조건 향상을 외치며 최저임금 수준의 200만원을 받는 노동자에게 월 200만원씩 400년을 갚으라는 건 말도 안 되고 불가능한 금액으로, 노동자에게는 거의 ‘살인행위’나 마찬가지다. 소송에서 승소한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받을 수 없는 금액임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사측은 하청노동자에게 배상금을 받아 손실을 메울 목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는 것일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표면적 이유로는 법과 원칙에 따라 불법 파업을 근절한다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노조 길들이기’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부터 국민의힘 의원, 대통령실까지 모두 이 사건에 대해 단호한 메시지를 내고 있기에 대선 당시부터 노조와 대립각을 세우는 발언을 쏟아내고 부자감세를 실행하고 있는 대통령을 생각해 보면 상식선에서 ‘불법 파업 근절’이라는 이유보다는 ‘노조 길들이기’라는 명분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당연히 불법 파업은 근절돼야 한다. 하지만 법은 사람을 이롭게 할 때 가치가 있는 만큼 그 판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누구를 이롭게 하는 것인가를 판단하는 게 아닌가. 교섭 당사자가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한 대우조선해양이나 원청이 대화에라도 나섰다면 손해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도급계약에서 이미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이 결정됐다는 이유로 헌법이 보장하는 파업권조차 원청과 하청의 구조적 모순의 계약서 앞에서는 불법이 돼버린다. 결국 법과 원칙을 강조해 불법과 합법으로 나눠 판단했다고 하지만 원청과 하청 사이의 구조를 정당화하는 불합리하고 나쁜 법을 지키기 위해 손해배상이라는 더 나쁜 법이 이를 보호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 모두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노란봉투법은 시작부터 생겨난 원청과 하청의 구조적 모순의 룰을 현재의 잘못된 잣대로 판단하지 말자는 얘기로, 노조의 불법을 다 면책하자는 것이 아니고 원청과 하청의 잘못된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권성동 의원은 이를 두고 “불법 파업을 조장하는 ‘황건적 보호법’에 불과하다”는 모욕적인 발언까지 했다. 그렇다면 황건적의 난 당시에 황제와 사적 관계를 이용해 농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환관과 외척이 그들의 폭정으로 인해 좌절과 실의에 빠진 선량한 농민인 황건적보다 낫다는 이야기인가.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에 명언이 숨어 있다. “뭉치면 백성이요 흩어지면 도적이다.” 대통령실이나 여권의 정치인들이 이 영화를 봤다면 노란봉투법이 다시 쟁점으로 떠오른 이 시기에 뭉쳐 있는 백성의 절규를 단 한 번만 되돌아보라. 진정 그들이 흩어진 도적이 되길 원하는가. 윤준영 한세대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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