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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린 칼럼] 앞서 가는 전략, 양궁에서 배워라

2012 런던 올림픽이 마침내 끝났다. 유례없이 혹독하게 더운 여름을 이 올림픽 덕분에 그나마 잘 견뎌냈다. 여름은 덥고 힘들었지만, 올림픽의 젊은 건아들이 보여준 쾌거는 한국인의 자부심을 만끽하게 해준 고귀한 기회였다. 이는 사실상 이미 높아진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스포츠 분야에서 다시 한번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은 이미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세계 260여개 국가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나라 중의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변신한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런던 올림픽에 모인 엄청난 인파의 5명 중 2~3명은 국산 휴대폰을 쓰고 있었을 것이며, 전세계 65억 인구 중의 상당수가 국산 LED TV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잘 모르긴 해도 당분간 대한민국을 선진국이든 개발 도상국이든 간에 경제발전 또는 경제운용의 모범적 사례로 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언제까지 이런 모범적 사례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은 이제 기로에 서 있다. 지금까지의 성공은 다른 나라를 추격해온 따라잡기 발전 전략의 성공이었다고 하면, 이제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에 앞장서서 새 길을 열어 가야하는 발전전략으로 전환해야하는 기로에 서 있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듯이 양궁은 따라잡기 전략으로 이미 오래 전에 선두에 서는데 성공했고, 그 선두에 서서 자기혁신과 창의적 발상으로 선두를 유지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태권도 영역에서는 선두유지를 위한 창의적 발상과 혁신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지금 이처럼 추격하는 전략에서 앞장서 가는 전략으로 전환해야 하는 분기점에 와 있다. 삼성과 애플 간의 스마트 폰 특허침해 소송도 그런 분기점에서의 위기로 보아야 하고, K-팝에 대한 이웃 나라들의 곱지 않은 시선 등이 선두를 유지하는 전략으로 전환하는 분기점에서 일종의 부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분기점에서의 부작용의 본질은 뒤쫓는 전략에서의 덕목과 앞서가는 전략에서의 덕목이 갈등하는데 있다. 투지와 의욕은 뒤쫓는 전략의 핵심 덕목이다. 나도(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며 경제적 부에 대한 투지와 열망을 불태우던 지난 50여년의 우리 발전전략이 바로 그랬다. 반면, 혁신과 창의성은 앞서가는 전략의 핵심 덕목이며, 끊임없는 자기 혁신이 언제나 화두가 된다. 투지와 열망이 혁신과 창의성과 조화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전자는 욕심과 감정이고 후자는 합리성과 이성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성취에 도취되어 손에 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 욕심을 부리는 사이, 창의적 혁신의 기회를 놓치면, 결국 다시 뒤쳐지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많은 분야에서 빠르든 느리든 간에 불원간 이런 분기점 전환의 성장통을 겪게 될 것이 틀림없다. 우선 기업들, 특히 대기업은 이미 뒤쫓아가던 전략에서 선두를 달려가는 전략으로 바뀐지 오래 되었다. IT와 가전제품, 조선과 철강, 자동차 등이 그렇지 않은가? K-팝을 포함한 한류 분야는 이미 뒤쫓는 전략을 과감히 포기하고, 일찌감치 앞서가는 전략으로 탈바꿈한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분기점 전환에 가장 무디고 무능하게 대처한 영역이 정치분야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미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언론, 지성의 발전양상은 냉전시대 즉, 1990년대의 양상과는 현격한 거리가 있다. 인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평등과 인권의 향유 양상도 대한민국에서는 냉전 시대와는 아주 다르게 성숙했다. 그런데도 왜 유독 정치분야는 여전히 외국의 정치제도와 이념을 찬탄하며 뒤쫓는 전략을 에워싸고 이전투구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에서 창의성과 혁신이 가장 필요한 분야가 바로 정치권이 아닌가 한다. 이미 폐기된 서양의 유물인 이데오로기 중심의 정치에 함몰되어, 대한민국의 정치를 창의적으로 혁신하는데 그들은 너무 게으른 것 같다. 문용린 서울대 교수前 교육부 장관

[문용린 칼럼] 희망에 가슴 뛰게 할 대선주자, 어디 없나요

그리스 신화에 희망이 신의 선물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의 호기심이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제우스 신은 인간에게 벌을 주려고 아름다운 보물 상자를 만들고, 신들에게 인간을 위한 귀한 선물을 하나씩 넣으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그 상자를 한 여인에게 맡긴다. 그 상자를 열지 않는 한 그것들은 인간의 보물로 남아 있지만, 궁금해서 열어 제치면 연기처럼 사라진다. 제우스는 바로 그것을 노린 것이다. 역시 제우스는 옳았다. 인간의 호기심은 치명적 약점이었다. 그의 생각대로 호기심 많은 여인, 판도라는 궁금증에 못이겨 그 상자를 연다. 여는 순간 그 좋은 신(神)의 선물들이 새 나가기 시작한다. 용기와 절제, 정의와 배려, 용서와 인내, 신뢰와 성실, 신앙과 경건 등등의 황금같은 보물들이 눈 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황급히 상자를 도로 닫았다. 그 덕분에 오로지 한가지 보물만 남았는데, 그게 바로 희망(希望)이다. 우리가 이룩한 경제발전도 나도 한번 잘 살아 보자는 국민들의 희망을 성공적으로 관리한 덕분이다. 공부를 잘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교육으로, 열심히 일하면, 승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기업으로, 알뜰하게 저축하면 돈을 모을 수 있다는 희망을 금융으로, 질 좋고 값이 싼 물건을 만들면,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을 정부정책으로 관리했다. 이런 식의 희망관리가 사회 각 분야에서 그런대로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덕분에 오늘의 한국이 가능했다. 신의 보물중 마지막 남은 희망 이러한 건강한 희망의 관리는 앞으로도 여전히 필요하다. 우리가 이룬 발전이 대단한 것이긴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우리보다 앞선 나라는 일본을 포함해서 10개 국가가 넘는다. 현재 수준의 경제발전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성장하고 발전하지 말자는 국민들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온 희망의 관리를 계속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국민들이 성장과 발전에 대한 건강한 희망을 갖고, 그 희망의 실현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작금의 돌아가는 정치적 상황은 이런 희망관리에 어두운 먹구름을 드리운다.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진보 혹은 보수라는 관념의 시나리오에 사로잡혀, 눈앞에서 전개되는 생생한 현실은 외면한 채 공허한 대사집만 외워대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대신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북한을 돕는다는 진보는 관념의 편향 때문에, 세계최악의 인권현실과 탈북자들의 생지옥 상황 그리고 3대세습이라는 시대착오적 독재권력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의 인도주의적 삶의 개선에 대한 희망을, 관념으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적 가치가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문제 해결에 대한 국민들의 희망을 정치권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 희망을 발전실현할 수 있도록 자유와 성장을 내세우는 보수도 관념의 편향 때문에, 강자에 의해서 자행되는 약자에 대한 악습과 폐해 그리고 정경관(政經官)의 유착과 부패의 카르텔 그리고 그 결과로 심각해진 빈부간 양극화, 도농간 양극화 및 교육 양극화라는 자본주의적 해악을 강건너 불을 보듯 해왔다. 건강한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국민들의 희망을 유지발전 시키기보다는 보수들 스스로가 약화시키고, 파괴해 온 것이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관념의 싸움에 취해있는 정치권은, 삶의 실질적 개선에 대한 국민과 북한주민들의 희망을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 외면하고 있을 것인가? 공허한 관념의 역겨운 싸움을 중지하고, 모든 국민들이 삶의 실질적(인도주의적) 개선에 몰입할 수 있도록, 그들의 희망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천만을 희망에 취하고 가슴 뛰게할 대선 주자가 나오길 기대한다. 문용린 서울대교수前 교육부장관

[문용린 칼럼] 아키타의 교육기적과 대선공약

세계 어디를 가나 교육은 언제나 최고의 민생문제다. 유럽의 여러 잘 사는 나라에서도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교육이다. 교육 선진국으로 손꼽히는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도 20여 년 전부터 교육문제로 항상 시끄럽다. 아시아 쪽으로 오면 교육은 가히 전쟁과 같다. 특히 중국,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공통적인 교육문제로 국가 전체가 힘든 싸움을 치르고 있다. 공통적인 문제란 무엇인가? 좋은 명문 학교에 대한 과열된 입학 경쟁이다. 1945년 이래 지금까지 거의 70년 가까이 이와 같은 입시중심교육이 동아시아 지역에 고착되면서, 거의 유사한 형태의 문제점을 누적해 오기 시작했다. 즉, 네 종류의 다양한 양극화 현상이 그것이다. 첫째 부 양극화로 부잣집 자녀들의 명문대 독점, 둘째 도농 양극화로 도시출신 학생의 명문대 독점, 셋째 학교 양극화로 소수 우수 고등학교의 명문대 독점, 넷째 학생 양극화로 소수의 우수학생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엘리트로 분류돼 집중교육을 받아 결국 명문대를 독점하는 등의 네 가지 양극화가 이들 나라에서 심각한 부작용을 내포하면서 곪아 왔다. 이런 양극화의 모습은 결국 교육이 권력과 부의 대물림을 보장하고 조장하는 수단이자 도구로 기능해온 측면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로 인한 교육제도와 정책에 대한 빈부 계층 간의 긴장감, 농어촌 지역 주민들의 교육수혜에 대한 박탈감, 우수학생의 소수 학교 독점으로 인한 대다수 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무력감, 엘리트로 분류되지 않은 대다수의 학생들의 열등감과 좌절감은 동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이 겪고 있는 공통적인 교육적 위기다. 이 위기에 희망의 무지개를 드리워 준 기적이 일본의 아키타 현(縣)에서 일어난다. 2007년 일본에서는 전국의 학력평가를 목적으로 43년 만에 일제고사가 부활했다. 그 결과 놀랄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평균소득이나 취업률이 일본 최하위인 그 지역의 학교들이 전국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사람들은 착오이거나 1회적인 것에 불과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도 다시 전국 1위를 기록하자 교육계가 온통 놀라움에 빠지게 되고, 드디어 아카타 현의 교육방식에 진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럼 이들 학교들에는 무슨 특이한 비법이 있었던가? 아키타의 아이들은 학원에 다니거나, 별도의 과외수업을 받지 않았다. 특별한 교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성적을 올리기 위한 별도의 대책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평범한 일들 즉, 복습하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부모와 함께 아침 밥 먹기, 노트 필기하기 등 가장 기초적인 생활습관이 교육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항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교사, 학부모, 학교, 지역사회가 협동해서 아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하게 만들고, 스스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교육적 열정을 가진 교사들이 헌신적으로 몰입한 덕분이다. 그들의 열정이 동료교사와 교육 행정가를 감동시켰고, 학부모와 지역사회를 감동시켰으며, 마지막으로 학생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아키타의 기적은 이제 더 이상 기적이 아니다. 왜? 우리나라 아주 시골의 작은 학교인 삼동초등학교에서 이 기적이 EBS의 의도적 노력으로 재현됐기 때문이다. 아키타의 기적은 동아시아의 교육문제를 혁명적으로 바꿀 잠재력을 충분히 갖고 있다. 금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교육공약이 쏟아질 것이다. 현란한 미사여구와 실속없는 공약으로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말고, 한국판 아키타 교육기적같은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희망의 푯대를 세워 주길 바란다. 문용린 서울대교수前 교육부장관

[문용린 칼럼] 좌절이 많은 사회, 회복탄력성 높이자

심리학이 변하고 있다. 하나는 대중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밝은 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첫째로 그간의 심리학은 너무 고답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기억, 인지, 학습, 정보처리 등 일반인이 듣기엔 명칭조차 생소한 주제를 가지고 실험실에서 쥐나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는 하얀 가운을 입은 교수나, 학자를 연상시키는 학문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심리학은 이제 친근한 학문으로 서점에서, 매스컴에서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 둘째로 그간의 심리학은 주로 인간심리의 어둡고 그늘진 측면에 관심을 가져왔던 게 사실이다. 정신병, 우울, 최면, 변태, 자살, 중독, 범죄, 상담 등이 심리학과 연관된 중요한 단어들이다. 그런데 최근들어 인간의 밝은 측면 즉, 행복, 몰입, 성공, 성취, 회복탄력성 등에 대한 연구가 점증하면서 심리학이 어두운 학문이 아니라 밝고 환한 학문으로서 새롭게 재인식되기 시작하고 있다. 긍정심리학이 바로 이런 심리학의 재인식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긍정심리학의 관심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심리로 쏠린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경쟁이 일상화된 역동적 사회에서는 성공하는 사람도 많지만 실패하는 사람도 많다. 실패의 아픔을 견디고 다시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 회복탄력성의 핵심주제다. 학교폭력을 포함한 초중고 시절의 살벌한 경쟁과 다양한 긴장과 갈등을 견디고 재기하는 장(壯)한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특성도 바로 이 회복탄력성으로 설명이 된다. 회복탄력성은 문자 그대로 좌절로부터 회복하는 오뚜기 같은 힘을 가리킨다. 쓰러지고 넘어져도 오뚜기는 다시 일어난다. 오뚜기는 내면에 다시 일어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오뚜기 같은 사람을 우리는 회복탄력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다.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다. 출세하고 성공할 가능성도 높다. 왜 그런가? 한두 번의 시련으로 좌절하고 비관하고 포기해서 다시 일어서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으며, 출세하고 성공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삶은 언제나 불루오션이 아니다. 또는 항상 평탄한 아스팔트 길도 아니다. 비포장 길도 있고, 자갈 길도 있으며, 때로는 무너져 내린 절벽과도 만난다. 이런 길에서 멈추어 주저앉지 않으려면 회복탄력성이 높아야 한다.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통치자였지만, 그도 엄청난 좌절과 절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를 괴롭힌 많은 질병이 그들 절망시켰고, 한글창제를 죽어라 반대하던 충성스런 신하들이 그의 마음을 헤집어 놓곤했다. 그러나 그는 나약해지고 무너져 내리는 자기 자신을 추슬러 질병과 싸웠고, 한글창제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를 절망과 무기력으로부터 버텨준 힘이 바로 회복탄력성이다. 이순신 장군은 어떤가? 일부 신하들의 시샘으로 오히려 역적으로 몰린 이순신, 그가 겪은 절망과 배신감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높은 회복탄력성이었다.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 회장, 현대의 신화를 이룬 정주영 회장도 그냥 운이 좋아서 한순간에 떼돈을 번 것일까? 위대한 기업을 이루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좌절과 절망, 억울함과 분노를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7전8기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한 건강한 회복탄력성이 결국 그런 위대한 대기업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영어, 수학 좀 잘해서 수능점수 몇 점 올리는 일보다 회복탄력성을 갖도록 길러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 인생길은 험하다. 그리고 그 험한 길을 미리 알고 피할 방법도 없다. 요즈음 학교폭력으로 힘들어 하는 학생들이 많다. 회복탄력성이 높은 아이는 어떻게든 살아 남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계속 힘들어 할 것이다. 좌절이 많은 사회,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게 한 대안이다. 문용린 서울대 교수前 교육부장관

[문용린 칼럼] ‘디지털 문맹자 노인세대, 당신은 입장금지’

오늘날 노인세대는 또 하나의 문맹(文盲)이라는 / 난제에 부딪쳐 있다. 그들이 겪은 첫 번째 문맹은 1950대 이후의 문맹 퇴치 사업이었다. 그 당시에 초중고, 대학생이었을 지금의 65세 이상의 노인세대는 문맹퇴치 사업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겪는 두 번째 문맹은 그 스스로가 문맹자가 되어 문맹의 갑갑함과 아픔을 몸소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겪는 문맹의 아픔은 매우 큰 데도, 그 스스로를 포함한 주변의 아무도 그 문맹을 문맹으로 진지하게 보아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1945년 해방되던 때, 우리나라에서 글자해독이 불가능한 인구가 전체 성인인구의 70%를 넘었고, 특히 여성의 경우 90%에 가까웠다. 국민 대다수가 까막눈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해방 후 정부수립하랴, 625동란을 치루랴, 정신이 없던 정부는 드디어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말까지 강력하게 문맹퇴치 사업을 벌리게 된다. 그 때 주축 강사가 누구였을까? 초 중고대학생이었다. 대학생들은 방학 때면 봉사단을 조직해서 농촌 계몽차 시골로 내려갔고, 주된 일이 저녁 때 농민들을 모아 놓고 한글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가르칠 마땅한 강사가 없는 경우에는 초등학생들조차도 나서서 마을 주민들을 가르치곤 했다. 이런 문맹퇴치사업 덕분에 1960년대 이후부터 우리나라 문자 해독력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이런 문해력의 증가가 1970년대 이후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가능하게 한 국가 경쟁력의 바탕이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다.이렇게 문맹 퇴치의 주역이었던 오늘날의 노인세대는 지금 그들 자신들이 또 하나의 문맹을 몸소 겪고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들이 참여한 문명퇴치 사업은 종이 위에 쓰여진 글을 읽게하기 위한 노력이었는데, 이제 그들은 스스로가 컴퓨터와 핸드폰 속에 쓰여진 글을 못 읽고, 못 쓰고, 못 보내는 문맹자로 전락해 있는 것이다.과거의 문맹자는 신문과 책을 못 읽고, 간판을 못 읽고, 공문서와 계약서를 읽지 못해 경쟁력이 없었고, 친구와 가족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데에 경쟁력이 없었다. 문맹이기 때문에 사회, 경제, 정치,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가 불가능 하거나 어려웠다. 문맹은 결국 적극적인 사회 참여의지와 능력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 운영에 치명적인 약점인 셈이다. 그런 약점을 단시간 내에 극복한 덕에 한강의 기적도 가능했던 것 아닌가?현재 노인세대가 겪고 있는 문맹은 디지털 문맹(digital iliteracy)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제 이 세상은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접속해서 입장해야 만하는 사이버 세상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대다수의 중요한 일들이 이루어 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신문을 거의 읽지 않는다. 왜 그런가? 모든 신문의 기사들이 컴퓨터로 핸드폰으로 접속하는 사이버 세상 속에 모두 있기 때문에, 돈을 주고, 거추장스럽게 종이로 들고 다니면서 볼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인가. 백과사전도 그 안에 있고, 우리나라(아니 전세계)에서 나온 모든 옥편과 국어, 영어 및 모든 외국어사전이 그 안에 다 있어서 핸드폰만 들고 다니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 어디 그 뿐인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간에 원하기만 하면, 글을 보낼 수 있고, 토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정보, 재미, 오락, 식, 문화, 예술 등등의 대다수의 것들이 사이버 세상 속에서 현재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이 사이버 세상에 노인세대의 대다수는 입장금지 상태인 것이다. 디지털 문맹자, 노인세대, 당신은 입장 금지인 채로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이 돌아가고 있다. 국민이 골고루 참여하고, 모두의 의사를 골고루 반영하는 민주주의 정신은 노인세대가 디지털 문맹인 한, 제대로 실현되기 어렵다. 그래서 노인세대의 디지털 문맹 극복을 위한 노력이 1950~60년대 문맹퇴치 사업만큼 강력하게 국가정책으로 펼쳐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노인세대여, 우선 먼저 최신의 스마트 폰을 마련하라. 그리고 교육을 요구하라.문용린 서울대 교수

[문용린 칼럼] 독서가 위기, 국가독서교육진흥청 필요하다

문화관광부는 2012년을 독서의 해로 선포하고, 올 한해를 독서증진의 큰 계기로 삼고자하는 의욕을 보였다.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디 소기 한 그대로의 성과를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한다. 왜냐하면 독서에 대한 범국민적 관심의 증가와 책 읽기의 참여는 곧 우리들의 삶의 총체적 품격의 진보와 관련된 활동이기 때문이다. 인간진화의 역사는 두뇌발달의 역사이며, 두뇌발달은 독서를 통한 상상력과 간접체험으로 활성화 되고 촉진된다. 그래서 책읽기 즉, 독서는 문명사회의 한 척도가 되어 왔으며, 한 개인의 교양과 경쟁력을 판단하는 준거로 간주되어 온 것이다. 독서의 힘은 놀랍다. 특히 교양과 상식이라는 정신적 자산을 풍부하게 해주는 거의 유일무이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교양과 상식의 심화와 확대는 개인의 내적 성찰을 깊게 해 줄 뿐만이 아니라, 역지사지하는 공감능력을 높여서 대화와 소통의 빈도와 질을 높여준다. 아울러 독서는 인격적 단련과 더불어 상생하는 능력을 길러 주는 신비스런 힘을 갖는다. 이 힘 때문에 독서는 개인의 문명을 위한 희망이고, 나아가 사회와 국가와 인류의 문명을 위한 희망이기도하다. 독서는 현재의 우리를 희망의 미래로 연결 시켜주는 밧줄과 같다. 우리나라가 지정학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5천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견디어 왔고, 현재와 같은 번영을 구가하는 것도 항상 책읽기를 가치롭게 여기고, 책읽기에 전념하여 교양과 상식을 겸비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읽기는 우리의 귀한 문화정신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우리 한국인들 내면에 흐르는 정신적 가치와 삶의 이상은 책 읽는 선비들의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우리의 이런 귀한 책읽는 선비 정신이 서서히 시들어 부끄러운 형편에 처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독서율은 66.8%(10명 중 6.7명)로 EU 평균 독서율(71%)보다 4.2%나 낮다.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에서 3.3명은 1년에 한 권의 책도 안 읽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올해 독서의 해의 기본 철학은 책 읽는 선비들의 정신을 회복하고 활성화하는 일로 요약 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 삼천리 금수강산 곳곳의, 서당에서 사랑방에서 향교에서 사찰에선 글과 경 읽는 소리가 낭랑했었다. 이제 다시금 우리나라 방방곳곳에서 책 읽는 소리가 다시금 낭랑하게 울려 퍼지게 해야 할 것이다. 최근들어 정부가 평생교육을 강조하면서 엄청난 노력과 재정을 투입하고 있지만, 책읽기 이상의 평생교육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면, 독서진흥에 대한 국가적 관심의 열기는 그래도 여전히 너무 낮다. 독서진흥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관심과 지원이 너무나 미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2012 독서의 해 운동은 독서진흥을 국가의 평생교육정책의 핵심내용으로 진작 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연결 되어야 한다. 국가독서교육진흥청 정도는 하나 세워서 국민들의 독서력을 강화하기 위한 체계적인 노력과 재정 지원을 해야 한다. 농업이 처한 어려움의 극복을 위해서 농업진흥청을 세웠던 것처럼, 약화되어가는 책읽는 정신을 회복하지 않으면, 국가가 어려워진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을 가지고 독서교육진흥청을 만들어야 한다. 독서 전문가를 모으고, 국가 내 모든 도서관과 출판계, 그리고 독서동아리를 유기적으로 연계 시켜서 방방곳곳에서 어린이, 청소년, 어른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의 책 읽는 소리가 울려 퍼질 수 있게 해야 한다.이번에 문화관광부가 2012 독서의 해를 선포해서 범국민적 독서운동을 펼치게 된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지만, 내년부터가 걱정이다. 내년은 독서의 해가 아니니, 그나마의 관심도 이제 사라질 것 아닌가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래서 매년을 독서의 해로 간주하고, 끊임없이 독서운동을 전개할 주체가 상설로 필요하다. 국가독서교육진흥청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문용린 서울대교수前교육부장관

임진년과 정치인들의 대실패

육십갑자의 60개 해중에 서운(瑞運)의 해가 세 개 있다. 정해년의 돼지해 중에 황금돼지 해가 있고, 경인년의 호랑이 해 중에 백호의 해가 있고, 임진년의 용의 해 중에 흑룡의 해가 있다. 올해가 바로 그 임진년 중의 흑룡의 해에 해당된다. 흑룡이 검은 바닷물 위로 솟구치는 형상을 그리며 많은 사람들이 연초에 덕담들을 나누곤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대한민국 전체가 흑룡처럼 솟구쳤으면 좋겠고, 우리 국민 하나하나에 흑룡의 서기(瑞氣)가 가득히 어렷으면 좋겠다.그러나 한국인들에게 임진년은 그렇게 만만한 해가 아니었다. 60년 단위로 되돌아 보면, 1952년, 1892년, 1832이 임진년이었고, 420년 전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1592)도 임진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의 임진년(1952)에 우리는 625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그 와중에도 여야로 나뉘어 싸움에 바빴고, 국민 대다수는 폐허가 된 자연과 마을에서 거지처럼 살았고, 젊은이들은 전쟁터에서 죽도록 싸웠다. 이 전쟁의 여파로 450만 명이 죽거나 다쳤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미국의 원조 농산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지금도 아직 우리는 이 전쟁의 종전이 아니라, 휴전상태에 있다. 120년 전의 1892년 임진년에 우리나라는 양반과 세도가의 부정부패와 가렴주구 및 동학에 대한 탄압 때문에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기 시작한 때다. 이런 기운에 미리 대처 하지 못한 정치인들 덕분에 마침내 동학난이 일어나고, 이 여파로 청일전쟁이 일어나 그 피해를 우리 백성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180년 전의 1832년 임진년에는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력 타툼 속에서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과 살육이 날로 심해져, 한반도 땅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시기였으며, 420년 전의 1592년 임진년에는 오랜 당파싸움으로 국력이 피폐하고, 기강이 땅에 떨어진 상태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일본이 2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물밀듯이 쳐들어 온 해다. 이른바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다. 우리의 대비가 얼마나 허술했으면, 왜군이 부산에 발을 디딘지, 2개월도 안 되어 평양과 함경도까지 순식간에 점령되어 버린다. 백성들의 정치에 대한 원성이 얼마나 높았으면, 경복궁, 창덕궁에 불을 질렀고, 피난길의 임금행차에 돌을 던져 댔을까?올해 2012년 임진년은 종래의 임진년과는 좀 달랐으면 좋겠다. 임진왜란의 처참한 전쟁도 아니고, 피비린내 나는 종교탄압도 아니고, 동학이라는 민중의 소리를 무참히 짖밟는 것도 아니며, 동족끼리 단지 이데올로기 차이 하나로 죽고 죽이는 전쟁도 아닌 그런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자면 무엇이 중요한가? 정치인들이다. 임진왜란도, 동학과 천주교에 대한 탄압도, 이데올로기 편가름으로 일어난 전쟁도, 결국은 정치인들의 무능 때문이었다. 그들이 하라는 정치는 제대로 안하고, 권력의 장악에만 골몰했기에 때문이었다. 국가전체의 이익보다는 권력의 장악이 그들에게는 더 중요한 관심사였다. 국민들의 행복과 복지보다는 자신들의 행복과 출세가 더 먼저였다. 그런 정치인들 덕분에 우리는 불행한 임진년을 연이어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올해는 4월11일에는 총선을, 12월19일에는 18대 대선을 치러야 한다. 이 정치인들이 과연 임진년에 요구되는 정치가의 막중한 책임을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임진왜란, 동학난, 천주교박해, 625전쟁 모두가 정치인들의 직무유기로 일어난 정치인들이 대실패임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는 있을까? 올 임진년은 과거의 임진년과 달라야 한다는 정치의식의 각성이 없는 정치인은 총선과 대선에서 좀 빠져줬으면 좋겠다.올 임진년이 과거의 다른 임진년들과 다른 해가 되려면, 정치인들의 행태가 바뀌어야 한다. 첫째는 자기 선입견(당파)과 도그마(이데올로기)에서 빠져 나와 사실과 진실, 교양과 상식에 입각해서 정책선택에 참여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양보와 희생과 배려라는 덕목을 정치적 협상과 타협에서 우선시 하라는 것이다.자기도그마에 빠져 고집 피우던 정치인들 때문에 우리 백성들은 임진년마다 생고생을 겪었다. 이제 상대편, 상대당(여당이든 야당이든)에 대한 양보, 희생, 배려도 좀 했으면 좋겠다. 그것들이 정치인들의 우선적 미덕으로 자리 잡게 될 때, 올 임진년은 분명히 흑룡의 해가 되리라 본다.문용린 서울대 교수

학생들의 숨겨진 삶과 폭력

학생들은 두 개의 삶을 살고 있다. 하나는 공개된 삶이고 다른 하나는 숨겨진 삶이다. 공개된 삶이란 집에서 먹고 입고 자고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학원에 들러서 공부하고 집에 오는 그런 세계다. 숨겨진 삶이란 학교와 학교사이를 오가면서 친구들 또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겪는 희로애락애오욕의 정서적 경험을 수반하는 체험적 사생활이다. 이러한 그들의 사생활은 부모도, 교사도 잘 모른다. 오직 학교에 함께 다니고 있는 친한 친구 중의 일부만이 공유하는 비밀스런 세계다. 이 숨겨진 삶 속엔 환희와 감동도 있고 아픔과 눈물도 있고 갈등과 긴장, 증오와 투쟁과 폭력도 있다. 학교폭력은 바로 이 숨겨진 삶에서 발생하는 학생들 사이의 범죄현상이다. 요즈음 학교폭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기성세대가 미처 몰랐던 학생들의 숨겨진 삶 속에 잔인하고 비열하며 섬득한 폭력범죄가 무성하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뉴스에서는 연일 도를 넘어선 학교폭력 문제가 보도되고 있지만, 해결책 마련은 쉽지 않아 보인다. 숨겨진 삶 속의 현상이기 때문에, 안개 속에 숨은 그림자처럼 실체가 분명하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숨겨진 삶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학교폭력이라는 범죄는 보통의 일반범죄와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 이러한 특수성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학교폭력의 예방과 단속 그리고 대처에 관심을 갖는 기성세대 즉, 부모와 교사, 사회복지사와 청소년지도자, 경찰관과 검사 그리고 판사들에게 중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학교폭력은 기성세대가 인지하거나 관찰하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학교폭력은 영웅심리에 입각한 과시욕구를 동반하므로 언제나 목격자(동료학생)가 있는 상태에서 발생하지만, 피해자도 동료학생도 발설하거나 신고하기를 지극히 꺼리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동년배 학생에게 맞는다는 수치심과 가해자의 협박 때문에 신고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목격자인 동료 학생들은 자신도 맞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스스로 입을 다물고 만다. 이렇게 폭력은 학생들 사이의 숨겨진 삶이고, 그들 중 누구도 그 속에서 벌어진 일에 대하여 함구하고 있으니, 우리들 기성세대가 어떻게 그 숨겨진 폭력을 눈치챌 수 있겠는가? 얼마 전 대구에서 세 가해 학생의 잔인한 폭력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중학생이 있었다. 부모들은 그 학생이 희생당하고 난 후에야, 그렇게 잔인한 폭력이 오래 지속되었음을 알았다고 하니, 학교폭력이 학생들 삶 속에 얼마나 꼭꼭 숨겨진 비밀들인지 알 수 있다.기성세대가 학교폭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숨겨진 삶을 들여다 보아야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폭력이 진행 중인 상태에서는 가해자는 자신의 범행을 이야기할 리가 물론 없고, 피해자도 가해자의 위협 때문에 감히 신고하고 상담 받을 생각을 못한다. 폭력이 드러나서 사후처리가 된 이후에도 가해자나 피해자나 자신의 아프고 수치스런 과거를 쉽사리 털어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10대 성장기 아이들의 상처라서 학부모나 교사들도 그런 아픈 경험의 공개를 극히 꺼린다. 그러나 그 학생들의 삶 속에 숨겨져서 진행되고 있는 폭력상황을 어떻게든 넘보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학생들 사이에서 폭력의 발생 유무를 확인하고, 어떻게 발생했고, 전개됐으며, 어떤 결과로 치닫게 될 것인지에 대한 사실적 관찰과 통찰없이 도대체 우리 기성세대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학생들의 숨은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을 발견하고 인지하는 일처럼 중요한게 없지만, 신고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아마도 모든 범죄 중에서 피해자의 자진 신고율이 가장 낮은 게 학교 폭력일 것이다. 그리고 목격자가 항상 있는 범죄인데도, 목격자의 신고가 가장 낮은 것 역시 학교 폭력일 것이다. 그래서 신고에 의존하는 학교폭력대책은 성공하기 어렵다. 기성세대의 적극적인 발견 노력이 강화돼야 한다.가해자나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인 동료 학생들은 분명히 어떤 징표를 가지고 있다. 전개되는 폭력이 심각할수록 그 징표는 피해자, 가해자, 동료학생들의 외양과 내양, 그리고 행동거지 속에 아주 분명하게 배어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들을 읽어내지 못할 뿐이다. 폭력의 징표를 읽어 내는 기술과 지혜를 기성세대가 제대로 갖출 때, 폭력은 줄어들기 시작할 것 같다.문용린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아들이 겪는 성장고통은 딸과 다르다

딸과 아들은 서로 다른 지향성과 예민성 그리고 서로 다른 성장과 발달의 속도를 갖기 때문에 서로 다른 양육철학과 방식으로 키워져야 한다는 주장이 요즈음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국에서 아들 양육방법이 새로운 관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예 중의 하나다. 소년과 소녀는 같은 이론과 원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독특한 성장과 발달의 경로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방식의 양육철학과 기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들 심리학(Raising Cain)이란 책을 쓴 댄 킨들론(D. Kindlon)은 이런 말을 한다.나는 소년을 대상으로 한 상담을 35년간 해왔다. 그 과정에서 소년들은 소녀들과는 전혀 다른 심리적 좌절과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도 물론 그렇지만, 가정에서도 소년들은 여자 아이들과는 엄청나게 다른 고통과 좌절을 겪는다. 이런 그들만의 고통을 이해해 주는 부모는 거의 없다.이런 킨들론의 이야기를 우리는 스쳐듣고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아들들만의 성장 고통이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남자 아이들의 비행률이 여자 아이들에 비해서 5배 이상이 높다. 학교폭력의 60%이상이 남학생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교사나 부모에 저항하고 대드는 아이들의 대다수는 남자 아이들이다. 왜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과 이렇게 다른가? 미국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은 모두 남자아이들이 일으킨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에 친모를 살해한 남자 고교생도 있었다. 아들들의 성장고통의 암시인 셈이다.이런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년과 소녀의 차이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컨대 소년과 소녀 간에 목소리의 차이가 분명히 있는데, 그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그 차이를 화음으로 이용하면 훨씬 더 아름다운 화음으로 만들 수 있다. 그 차이를 잘 활용한 예가 소년소녀 혼성합창단의 아름다운 노래가 아닌가? 소년 소녀간의 청력차이 동시수행 능력 차이 등 남자아이 성장 고통 만들어 아들 양육방법 새로운 부상남자와 여자 아이의 행동을 동일한 기준으로 비교하면 남자아이의 행동은 언제나 불량스러워 보일 뿐이다. 소년과 소녀간의 차이에 대한 객관적 이해는 아들양육에 대해서 새로운 지평을 연다. 아주 간단한 것 몇 가지만 살펴보자.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케이블인 뇌량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의 굵기가 소년과 소녀 간에 크게 차이가 난다. 소녀의 뇌량이 훨씬 더 굵다. 이 뇌량 굵기의 차이가 어떤 남녀차이를 만들어 낼까?첫째로 소년과 소녀 간에 청력의 차이가 생겨난다.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에 비해서 청각자극에 훨씬 더 예민하다. 여자아이들은 소리를 들을 때, 좌우뇌 모두를 활용해서 듣지만,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한 쪽 뇌만을 활용해서 듣기 때문이다.두 번째로, 소년소녀 간에 동시수행 능력의 차이가 난다. 여자아이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잘 할 수 있지만, 남자아이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세 번째로, 감정표현의 차이능력이다.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에 비하여 훨씬 다양하고, 섬세하며, 유능하게 감정표현을 할 수 있다. 이런 남녀차이가 모자이크처럼 모아져서 작용한 결과로 남자아이들만의 성장고통을 만들어 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실체는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이런 성장의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한 이상, 아들에 대한 차별적 양육은 이제 불가피해 보인다.문용린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월버 포스와 의회 정치 그리고 우리 국회

노예해방 하면 누구나 미국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을 떠올린다. 그러나 사실 노예해방 즉, 노예제도 폐지의 인류사적 쾌거는 이미 1833년, 미국보다 30여년 앞서서 영국 국회에서 오랜 논란 끝에 이뤄진다. 윌버 포스(Wilber Force)라는 왜소한 체격의 한 국회의원이 제안한 노예제도의 영원한 폐지에 관한 법안이 통과된 덕분이다.미국은 노예제 폐지를 둘러싼 논쟁과 갈등을 대표자들의 회의(국회)를 통해서 해결하지 못해서 미국 역사이래 최대의 비극으로 불리는 남북전쟁이라는 불행한 내전을 치렀지만, 영국은 국회 내에서 평화로운 법제정절차를 통해 노예제폐지를 공표하게 된다. 의회정치가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는 성공적 장치임을 만천하에 실증해준 쾌거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전쟁까지 치르게 한 이 복잡한 노예폐지문제가, 영국에서는 어떻게 의회내의 토론과 협상만으로 해결될 수 있었을까? 이 문제가 미국에서만큼 심각하지 않아서였을까? 천만에, 그렇지 않다. 1800년 초반 당시 노예제 폐지 문제는 강대국 영국의 위상을 크게 뒤흔드는 문제였다. 노예제의 폐지는 곧 대영제국 전체 예산의 3분의1을 포기해야할 정도의 경제적 손해를 각오해야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왕족과 귀족 등 상류층 유명 인사들은 거의 모두가 노예무역으로 큰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 페지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노예제의 폐지는 영국재정의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것이 분명했고, 그 여파로 영국은 최고 강대국의 자리를 빼앗길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서 찬반의 극렬한 대립과 논쟁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노예제 폐지로 야기될 국가적 손해의 규모는 영국의 경우가 미국에 비해서 더 컸으면 컸지, 결코 작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영국은 전쟁과 같은 내부 갈등 없이 의회 민주주의를 통해서 해결했고, 미국은 의회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서 결국 전쟁까지 치러 그 결과로 60만 명의 아까운 목숨을 버려야 했다. 윌버 포스의 노예제 폐지법안을 에워싼 영국의회의 토론과 타협의 민주주의는 의회민주주의의 핵심을 보여준다. 토론하고 또 토론하라. 설득하고 또 설득하라. 그리고 난 후에 모여서 찬반투표를 하라. 다수의 찬성을 받은 안이 나오면, 조건 없이 수용하라. 이런 정신에 투철한 게 의회 민주주의다. 윌버 포스는 이런 의회 민주주의 신념이 몸에 밴 진정한 국회의원이었다. 노예제 폐지는 그가 27세 때 처음 국회의원이 되면서 맹세한 자기와의 약속이었다. 그가 처음 이 법안을 만들어 상정했을 때, 그에게 쏟아진 비난과 경멸 그리고 적대감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대화-토론-설득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의회 내에 노예제 폐지론자의 수를 늘려가기 시작한다. 원래 말이 어눌했던 윌버 포스는 이런 대화, 토론, 설득의 반복을 통해서 영국 최고의 웅변가로 변신한다. 노예제 폐지의 당위성을 설득하고 확산시키기 위해서 그는 국회의원 재직 중에 무려 150여회에 걸친 명연설을 쏟아냈다. 27세(1787)에 국회의원이 되어 이 노예제 폐지에 진력한 윌버 포스는 마침내 46년 만에 그 법안을 통과(1833)시키는데 성공하고. 3일 후 숨을 거둔다. 그 긴 기간 동안에 그는 자신의 법안 통과를 위해서 꼼수도 쓰지 않았고, 폭력도 행사하지 않았고, 욕도 하지 않았으며, 돈도 받지 않았으며, 매수는 더 더욱 하지 않았다. 의회민주주의의 행위 규칙을 철저히 존중했고 준수한 것이다.한미 간 FTA 협정의 비준문제를 다루는 요즘의 여의도 국회를 보면서, 의회 민주주의 정신의 가출(家出)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간 그만큼 떠들고 싸우고 소리쳐댔으면(대화-토론-설득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해두자), 이제 한자리에 모여서 다수결 투표를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해서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 주어야, 국가가 움직이는 것 아닌가? 찬반 논쟁을 멀리서 바라다보는 국민들은 답답하다. 윌버 포스같은 사람은 물론 보이질 않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선입견없이 귀담아 들어 주려는 그의 동료 의원같은 사람도 하나 보이질 않는다. 20~40대의 반란이 일어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문용린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소통의 기술, 그것이 더 문제다.

서울의 어느 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국인 친구와 이야길 나눈 적이 있다. 신임 장관 청문회 문제로 국회가 한창 시끄러울 때여서 그랬는지, 내가 그에게 한국사회엔 문제도 참 많지요?라고 물어 본 적이 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번 던져 본 질문인데, 그가 정색을 하며 대답을 한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오늘날의 어려움은 문제가 많아서가 아니라, 문제를 풀어가는 기술이 모자라서 그렇습니다.그의 말인 즉, 선진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비하면, 한국의 문제는 문제거리도 안된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고질적 국내 문제는 주로 인종과 종교 그리고 지역과 이념 차이에서 오는데 한국의 경우 그 네 가지 문제의 심각성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훨씬 낮다는 것이다. 심각하다면 가장 심각한 것이 이념갈등인데, 그것마저도 다른 나라들이 겪은 갈등에 비하면 여전히 그 강도는 낮은 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인종갈등, 영국의 종교갈등, 러시아와 독일의 이념갈등, 일본과 중국의 지역갈등 등은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문제점에 비하면 훨씬 더 복잡하고, 심각하고, 어려운 것이지만, 이들 나라는 이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풀어 가는 기술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갈등으로 비치기보다는 그 나라 국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문제들을 잘 풀어 가고 있는 것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내겐 충격이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북한과의 체제우열 다툼으로, 진보와 보수 간의 사사건건 대립으로, 뿌리 깊은 지역감정으로, 해이된 도덕적 정신적 기강으로 대단히 문제가 많은 나라로 생각하면서 살아 왔는데, 그렇지 않다는 설명을 들은 셈이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를 푸는 슬기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는 대화 즉 소통의 기술을 이야기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산적한, 그리고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풀어 가는 유일한 방법은 대화와 소통을 통한 합의와 동의 뿐인데 한국사회에는 이런 대화와 소통을 가로막는 문화적 장벽이 높다는 것이다. 그가 열거하는 문화적 장벽이란 무엇인가? 나이와 신분과 지위의 격차 그리고 소속집단의 성격 차이가 클수록 진위를 밝히거나 다른 의견을 밝히거나 권리주장을 펼치는 대화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대화 외적인 문화요소가 개입되어 대화의 진행 자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건방지다, 예의가 없다, 위아래도 모른다, 은혜도 모르고 대든다. 젊은 사람이 까분다 등은 대화의 합리적 진행과 전개를 방해하는 한국적 문화다. 이런 문화는 한국의 모든 조직 속에 보편적으로 배어 있다. 가정 내에도 존재한다. 아들과 딸이 아버지 면전에서 다른 의견과 주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 있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크건 작건 많은 조직에도 이런 문화가 가득하다. 아랫사람들이 상사의 면전에서 다른 의견이나 비판적 주장을 마음 편하게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회사나 조직이 얼마나 되겠는가? 한국인들은 소속집단 애착감이 강한 대신 타집단에 대한 배척감도 강해서 집단 간의 대화와 소통은 지극히 어렵다. 집단을 대표하는 개인이 집단의 뜻을 고수하지 못하고 타협과 양보를 하면 배신자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한다. 그게 우리나라의 일반적 문화이고 전통이다. 국회와 지방의회에서 여야가 대화와 소통을 하기보다는 언제나 고함과 퇴장과 난투극을 벌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야 간에는 당연이 서로 의견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다른 나라에서는 여야의 대표가 모여서 대화와 소통을 통해서 타협의 접점을 마련한다. 서로가 양보하고 희생하고 인내심을 발휘한다. 그래서 합의와 동의를 이루어 낸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기대하기 힘들다. 여야의 대표가 양보와 인내로 타협의 접점을 찾아 낼 만큼, 집단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 부자유가 대화와 소통을 굳건히 가로막고 있다. 한미 FTA의 국회인준이 참으로 험난해 보인다.문용린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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