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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탁 칼럼] 우주달력에서 보는 미래변화의 준비

칼 세이건의 우주달력(Cosmic Calendar)은 우주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150억년의 역사를 1년짜리 달력으로 만든 것이다. 우주달력에 의하면 우주는 1월1일 0시 빅뱅에 의해 탄생했고 지금 이 순간은 12월31일 자정이다. 우주달력에서 1개월은 12억5천만년, 1일은 4천만년, 그리고 1초가 500년이라는 시간에 해당된다. 우주달력에서 보면 우주가 탄생한 1월부터 11월까지는 대체적으로 별다른 변화가 보이질 않는다. 12월로 넘어와서도 14일까지 우리가 속한 지구라는 행성에서는 조용하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인간이 기억하는 큰 변화의 시작은 12월31일 밤 10시30분에 인류가 탄생한 시기부터 출발한다. 11시59분경에 고대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콜럼버스가 미지의 대륙을 찾아 항해를 시작했다. 자정이 되기 15초 전에 문자가 발명됐으며, 10초 전에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건설되고, 4초 전에는 예수가 탄생했다. 요약하면 150억년의 우주 역사에서 지구 탄생 이전은 물론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가 마지막 10여초 사이에 큰 변화가 빠르게 진행된 것이다. 근래에도 농경시대는 5천년이나 지속되었지만 산업화시대는 200년, 정보화시대는 50년으로 그 기간이 짧아지고 있고 후기 정보화시대는 10년 내지 15년에 그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미래변화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선 갈수록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범위가 확대됨으로써 순식간에 전 지구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 조그만 변화라도 그것이 누적되어 어느 순간 봇물이 터지듯 심각한 사태로 번질 수도 있다. 지구온난화와 같이 작은 것들이 쌓여 일정 기간이 지나면 걷잡을 수 없는 폐해가 닥치는 것이 그것이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금방 세계경제위기로 번진 것처럼 어느 한 곳에서 발생한 문제가 단기간 내에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갈 수도 있다. 결국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갖가지 사태가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적응하기보다는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이 의사소통의 수단이었던 시대에 문자가 출현하자 문자의 편리함을 인정하기보다는 생소한 것에 대한 저항이 컸다. 문자가 없던 시대에는 성현들의 말씀이 구전으로,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몇몇 사람들을 통해 전달됐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글자가 출현하면서 기록의 시대가 되자 구전을 통해 일종의 기득권을 가진 계층들은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고, 이것은 곧 문자의 출현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 산업혁명 초기에 노동자들이 산업현장에서 강하게 저항한 것도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 외에 라디오 시대에 TV가 처음 나왔을 때의 거부감, 전통적 셈의 도구였던 주판이 계산기를 거쳐서 컴퓨터로 진행되는 동안의 저항, 책에서 디지털 출판시대로의 변화와 저항 등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렇게 새로운 기계나 제도가 나타날 때마다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생활의 편리함과 유익함이 컸지만, 거부감 역시 동반해서 나타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앞으로 변화의 폭이 커지고 속도도 더 빨라질 텐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럴 때마다 기득권을 지닌 힘 있는 사람들이 현상 고수를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텐데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경우 어떤 상황에서든 답은 분명하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변화를 리드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변화를 뒤따라가서는 승자가 될 수 없다. 최악은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누가 아무리 변화를 가로막으려 해도 변화의 흐름을 저지할 수 없기 때문에.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멀리 내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걷는 사람은 10m 정도 앞을 주시하면 되지만, 차로 달릴 때는 100m 전방을 살펴야 하는 것처럼 앞으로 인간에게 있어 미래를 보는 안목은 계속 커져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우주 달력과 역사가 분명히 얘기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영탁 세계미래포럼 이사장 전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

[이영탁 칼럼] 경제민주화의 해법 소설 ‘이정구’가 답이다

요즘 경제민주화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기본적으로 경제에 관한 이야기인데 정치권에서 먼저 갑론을박하다 보니 정작 학계나 정부에서는 수수방관하고 있는 모습이다. 잘못 끼어들었다간 면박을 받을 테니 그렇겠지 하면서도 전문가나 책임질 사람들이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다. 비전문가, 그것도 정치인들의 게임이라 그런지 정당간은 물론이고 같은 정당 내에서도 경제민주화에 대한 이해나 해법이 다르다. 차제에 논란이 되고 있는 경제민주화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경제민주화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 목표는 어디까지나 성장과 복지이다. 국민 모두가 골고루 잘사는 사회로 가기 위한 수단이요, 과정으로서 경제민주화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목표를 얘기한 다음 수단을 제시했더라면 많은 사람들의 이해가 훨씬 수월하지 않았을까. 둘째, 경제민주화를 실천하는 방법상의 문제이다. 지금은 경제민주화의 표적이 재벌문제로 집중되는 형국이다. 그것도 법과 규정을 고쳐 정부에다 더 많은 칼자루를 쥐어주는 등 강제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자는 식이다. 한편으로는 소통과 섬김의 리더십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식의 경제민주화 해법을 제시하는 모습에서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고 말만 무성하다고 느끼는 건 비단 필자만의 생각일까. 최근에 와서 경제민주화 이슈가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양극화라든가 1% 대 99%간의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의 심리는 묘한 데가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돈이나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을 때는 심사가 뒤틀어진다. 자신의 능력을 탓하기보다는 그들이 미워지고 그들의 약점을 들춰내 욕을 하기 일쑤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옛말이라든가 옆집 암소를 죽여주세요.라는 서양 속담이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99%에 해당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미워하는 건 1%에 해당하는 사회지도층 즉 벌족(閥族)들이다. 대표적인 벌족으로 돈이 많은 재족(財族)이나 권력이 많은 정족(政族)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다수는 오늘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노력과 고생도 많이 했지만 불법, 비리, 편법 등 부끄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결국 벌족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변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내려앉고, 배려하고, 나누고, 손해 보는 길을 가야 한다. 과거는 과거로 치고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한다. 1%끼리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공격하는 건 해법이 아니다. 최종적으로는 99%까지 변해야 될 일인데 그렇게 해서는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이러한 일련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해답이 소설 이정구에 잘 제시되어 있다. 이정구는 당대 최대 재벌 그룹 총수로서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벌족의 대표요, 재족의 상징이다. 그런 그가 온갖 고뇌와 시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것을 비우는 일대 결단을 내린다. 사업보국에 걸었던 본인의 인생을 기부선언으로 전환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엄청난 것을 얻어낸다. 갈수록 무거워지던 어깨가 홀가분해진다. 인생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드디어 찾아내게 된 것이다. 이정구의 결정은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그 중에서도 그토록 지독하게 그룹을 공격하고 이정구를 미워하던 유능한 젊은이가 절필을 선언하면서 신뢰와 존경을 보내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계층 간 화합의 길을 연 셈이다. 이렇게 되면 나머지 99%의 사람들도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보다 따뜻하고 공정한 사회를 열어가는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이정구는 알고 있다, 경제민주화의 해법을! 이정구에게 거듭 찬사를 보낸다. 이영탁 세계미래포럼 이사장 전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

[이영탁 칼럼] 소설 작가 유감(有感)

얼마 전 장편소설 이정구(李鄭具)를 출간했다. 벌족(閥族)의 미래 시리즈 제 1탄, 재족(財族) 이야기다. 이정구는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책의 제목이 되었다. 그는 당대 최대 재벌 그룹 총수로서 벌족의 대표요, 재족의 상징이다. 나이 70인 그가 고민 끝에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스토리이다. 저자로서 좀 곤혹스러운 것은 재벌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소설은 주인공 이정구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삶을 택함으로써 개인적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고 사회적으로는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는 긍정적인 스토리이다. 대대로 이어지는 경영권 세습의 문제를 제기한 것도 결국은 더 나은 재벌의 모습을 바라는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나오자마자 주요 서점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1% 대 99% 간의 문제를 다룬 데다가 장차 우리 사회가 이런 모습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져 있어 그런 것 같다. 시의적절하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오는 것일 게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저자는 많은 인생 경험을 하고 있다. 방송 출연이나 언론 인터뷰 등으로 바쁘기도 하지만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로부터 갖가지 인사를 받는다. 그 중에는 건성으로 축하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진심으로 자기 일처럼 좋아해 주는 사람이 많다. 물론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양한 반응 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우선 진심으로 좋아하는 경우이다. 출판기념회에서 받은 책을 차 안에서 펴보니 재미가 있어 밤잠 안자고 새벽까지 다 읽었다는 사람,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책 한권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는 사람, 최근에 읽은 여러 책 중에 가장 좋았다는 사람. 선배 한분은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해서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이정구 얘기로 난리라고 하시길래 얼른 책을 한권 보내드리겠다고 했더니 아니야, 책은 내가 직접 사 봐야지 하면서 오후에 서점에 나가 책 몇 권을 사서 친구들과 나누어 읽어보겠다고 한다. 축하 문자 메시지의 내용도 각양각색이다. 엄청난 충격! 또 충격!하고 외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놀라운 것은 이런 사람을 친구로 둔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이라고 전해 온 사람도 있다. 어디서 그런 발상과 열정이 나오나요?하고 묻는 이도 있고 벌써 제2탄이 기대됩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따금씩 엉뚱한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다. 잘 읽어볼 테니 책 한 권 보내달라고 한다. 저자한테 책을 사서 보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볼 테니 보내달라고 하는 것은 여간한 배짱(?)이 아니다. 물론 잘 몰라서 그랬겠지만. 또 어떤 사람은 책을 구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한다. 책은 서점에서 구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단 말인가? 이런 사람들은 뭔가를 깜빡한 게 틀림없다. 전화라도 한 번 할 법한데 아무 반응이 없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분이 별로다. 아는 사람이 잘 나가는 게(?) 썩 기분이 좋지 않는 모양이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한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상대방에 동정심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그보다는 상대방이 잘될 때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게 그토록 내키지 않는 일인가? 이처럼 저자는 요즘 많은 인생 경험을 하고 있다. 책에서 인용한대로 인간은 기본적으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인데 살아가면서 맺은 인연이나 지니게 된 소유물은 일시적인 것, 집착의 염(念)은 부질없는 일이다. 나를 더 알아준다고 크게 기뻐할 일도 아니고, 덜 알아준다고 마냥 서운해 할 일도 아니지 않는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도 너무 쉽게 하는 것 같다. 누구든 생각하는 대로 말은 쉽게 할 수 있어도 그것을 실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그래서 인생에 있어 머리에서 발끝까지 가는 여정이 하도 멀어 평생을 가도 못간다고 하는데. 지금부터라도 말은 신중하게 하고 대신 행동은 좀 더 열심히 하도록 해야겠다. 이영탁 세계미래포럼 대표 전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

[이영탁칼럼] 소설 이정구:벌족의 미래

2011년 초 시리아에서 일어난 재스민 혁명은 23년이나 권좌를 독점했던 벤 알리 정권을 불과 두 달 만에 무너뜨렸다. 뒤이어 이집트, 리비아 등에서도 독재정권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며 독재자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목숨까지 잃는 일이 벌어졌다. 이러한 시민혁명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두 말 할 것 없이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의 위력 덕분이다.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무장한 똑똑한(smart) 군중들이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연결되고 소통하면서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라 밖에서 벌어지는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나에게 문득 불길한(?) 예감 하나가 떠올랐다. 다름 아닌 시민혁명에 참가한 시민들의 공격목표였다. 후진국에서는 독재 권력이지만, 선진국이라면 시민들의 분노가 과연 어디로 향할까? 바로 기업권력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던 것이다. 세상이 온통 양극화의 결과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사회, 중산층의 멸종, 1% 대 99% 간의 싸움 등으로 시끄러운 것은 이미 전 지구적 현상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된 것은 전적으로 최근에 일어난 미국 발 금융위기의 여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으로까지 거론되면서 새로운 경제사회 제도를 모색해야 한다고 할 정도에까지 이른 것이다. 여기서 과연 누가 1%인가? 누가 소위 잘나가는 소수의 기득권층으로서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 있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각 분야의 고위층 인사들이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일반시민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에게 벌족(閥族)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벌족은 다시 돈이 많은 사람을 일컫는 재족(財族), 권력이 많은 사람을 일컫는 정족(政族), 그리고 관족(官族), 법족(法族), 언족(言族), 의족(醫族), 교족(敎族), 종족(宗族), 노족(勞族)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들 1%를 보는 99%의 시각은 어떤가? 절대로 곱지 못하다. 처음에는 부러움이나 시기의 대상이었을 텐데, 어느새 분노와 타도의 대상으로 변했다. 원천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올라갈 수 없는 나무에 대한 저주가 있다. 거기다가 1%가 저지른 불법, 비리, 편법 등이 누적되면서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서로 편을 가르게 되었다. 각자의 노력에 따라 계층 간 이동이 이루어진다면 문제가 없을 텐데, 중산층이 자꾸 하위층으로 전락하면서 계층 간의 갈등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99%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1%가 먼저 변하는 수밖에 없다. 이들이 절제하고, 배려하고, 양보하고, 손해보고, 때로는 희생해야 한다. 말로만 할 게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99%를 감동시키고 그들의 흥분을 자제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당대 최대의 재벌그룹 총수 이정구(李鄭具)가 그 선봉에 섰다. 그리하여 벌족의 바람직스러운 미래를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 이번에 발간되는 이정구(李鄭具)는 벌족의 미래 시리즈의 제1탄이다. 하반기에는 제2탄으로 정족(政族) 이야기를 쓸 계획이다. 제3탄부터는 크라우드소싱(crowd sourcing) 방식을 통해 많은 전문가들과 관심 있는 일반인들이 집필에 참가해 관족(官族), 법족 (法族), 언족(言族) 등 여러 분야의 책을 동시에 출간하는 시스템을 마련해볼 계획이다. 이 소설의 내용을 구상한 뒤 완성본을 내놓기까지는 이완배 작가의 도움이 컸다. 처음 쓰는 소설이었기에 부족하고 서투른 점이 많았는데도 좋은 콤비를 이룰 수 있었음에 감사드린다. 또 만날 때마다 특유의 초저음으로 자리를 편하게 이끌어준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김상호 대표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며, 따라서 등장인물은 모두 가공의 인물이다. 혹시라도 글을 읽고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너그러운 이해를 바랄 뿐이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 더 큰 미래를 기대하면서. 이영탁 세계미래포럼 이사장 前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

[이영탁 칼럼] 출산율 1의 재음미

얼마 전 나이 70이 넘은 선배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최근에 마흔 몇 살 된 아들이 장가를 갔다고 한다. 얼마나 속이 후련하고 기분이 좋은지 마구 자랑을 하고 싶었다. 마침 친구들 모임이 있어 이때구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나선 차마 운을 뗄 수 없었다고 한다. 아직 아들 딸 결혼을 못시켜 안달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몇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요즘 우리 젊은이들은 결혼을 하는 데 인색하다. 나이 서른다섯 이전에 결혼을 해주면 그런 효자 효녀가 없다고 할 정도다. 결혼을 잘못할 뿐 아니라 애기를 낳는 일도 잘하지 못한다. 늦게 낳는 건 물론이고 기껏해야 하나만 낳고 만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세계에서 제일 별나다고 해야 할 것이다.왜 요즘 가임여성의 출산율이 1 가까이까지 떨어졌을까?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출산율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아기를 키우는데 경제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맞벌이 부부의 입장에서 여러 모로 애로가 많다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맞벌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애기를 더 낳는단 말인가. 우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과거 소득수준이 낮았던 때보다 소득이 높아진 요즘 오히려 출산율이 떨어지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이 되는가.아이를 낳고, 안 낳고 또는 몇을 낳고는 부부가 상의해서 결정할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부모의 입장인가, 아기의 입장인가? 키우기 힘들고, 돈도 많이 들고, 어쩌고 하는 것은 전부 부모의 입장에서 하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아기의 입장에서나 국가의 입장에서는 어떤가. 국가의 입장은 물론이고 아기의 입장에서도 외둥이로 크는 것이 좋다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여기서도 부모의 me first적인 사고 즉 이기적인 판단이 너무 강하게 작용한 나머지 we first 적인 사고의 개입 여지가 적었다고 본다.외둥이가 혼자서 주위의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갈 미래 세상은 절대 순탄치 않다. 장차 외둥이는 급변하는 환경에 잘 적응할 줄 알아야 한다.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야 하고 불법과 비리에 당당히 맞서 싸울 줄 알아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때로는 참을 줄도 알아야 하고 양보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험한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혼자서 자라는 외둥이는 아무래도 불안하다. 형제자매가 함께 뒹굴며 서로 사랑하고, 돕고, 경쟁하고, 지지고, 볶고, 울고, 웃는 가운데 참고, 양보하는 인생살이의 지혜를 어디서 배운단 말인가. 이렇게 되면 장차 형, 누나를 비롯해서 삼촌, 숙모, 외삼촌, 외숙모, 이모, 고모, 사촌 등 정겨운 친척들이 전부 없어지는 게 아닌가.미래는 평등한 세상이다. 이제 소수의 엘리트가 주도하는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특별히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는, 모두 잘난 사람들이 모여 세상을 만들어간다고 한다. 이들이 SNS를 이용해 서로 연결되고 소통하면서 집단지성을 활용하고 협업의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미래에는 다른 분야 또는 다른 사람과의 융합, 통섭 또는 협업이 필수적이라고 하지 않는가.누구에게나 자식은 소중하다. 소중한 자식을 잘 키우자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어렵고 하도 이기적인 사고가 판을 치다 보니 우리네 자식 키우는 데까지 그렇게 되어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세상의 부모들이여! 사랑하는 자식의 입장에서 외둥이 문제를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지금처럼 형제자매 없이 혼자 자라는 애기가 장차 미래 세상을 멋지게 살아갈 수 있을지, 그들이 만들어내는 미래 세상이 과연 바람직할지. 결국 아이 하나면 된다는 부모의 me first적인 입장이 애기 또는 국가사회의 견지에서 we first적인 사고로의 전환을 통해 동생을 두는 쪽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이영탁 세계미래포럼 이사장前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

[이영탁 칼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서양에서 오랜 역사를 두고 발전해 온 정치 경제 체제이다. 양 체제는 선진국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얼마 전부터 세계 각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 몇몇 후진국을 보면 독제체제가 무너지면서 시장경제를 채택하게 된 경우도 있고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정치적 민주화가 앞당겨지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독재인 후진국도 예외 없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들이 썩 잘 어울리는 커플은 아닌 것 같다. 최상의 커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견해가 나눠진다. 상호 보완적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긴장과 대립관계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누가 선행하고 누가 뒤따라온다는 점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마치 좋은 커플이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려갈 때 부부는 좋은 것이고, 그렇지 못할 때 나빠지는 것처럼 말이다.어쨌든 1970년대 이후 30여년간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전성기를 누리는 동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지구상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시장은 큰 역할을 했고 거기에 비례해서 민간의 자율영역도 넓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여러 나라로 확대돼 세계화를 촉진시킴으로써 많은 후진국들도 경쟁적으로 참여하게 됐다.그런데 이를 어쩌랴, 지금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가 덫에 걸려 있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위기를 논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자본주의가 자율과 경쟁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공정한 게임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부익부 빈익빈, 강익강(强益强)약익약(弱益弱)현상이 나타나 양극화가 심해짐으로써 1대 99의 사회가 되고 말았다고 진단한다. 실제로 시장 중심의 경제운영에 대해 여러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자본주의 4.0 또는 따뜻한 자본주의에서부터 정부 규제의 강화, 대중소기업 간 동반 성장, 토빈세 도입, 무상 보육 등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내용들이 거론되고 있다.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 시장경제 자체에 있다기보다 시장경제의 운영 잘못에 있을 것인데도 말이다. 어쨌든 계층 간 불균형이 심화되고 경제가 어려워지다보니 정치가 마구 끼어들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는 형국이다.이처럼 자본주의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데도 민주주의는 아직 문제를 인식하는데 매우 둔감한 것 같다. 양자가 근래 들어 잠자리를 같이해 온 부부와 같은 관계인데도 말이다. 한 쪽이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고 갖가지 혼란과 아픔을 겪으면서 변화를 준비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옛 모습 그대로다. 정권 말기와 총선 등 정치의 계절을 맞아 전에 하던 못된 짓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 상황이다.연일 정치지도자들의 말 뒤집기, 거짓말하기, 탈법불법 등이 매스컴을 타고 있다. 과거 어리고 배고팠을 때 한두번 저지른 실수가 아니라 지금처럼 고지를 점령한 사람들이 계속 이래도 되는가? 왜 이럴까? 이게 결국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라면 각자가 후흑학(厚黑學)이라도 배워서 실천해야 한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선거에서 본때를 보여주자고 한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얘기이다. 전에는 안 그랬던가. 매번 그렇게 하자고 해 놓고는 제대로 하지 못해 같은 일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역사가 나서서 경고하고 있다. 200년 대의민주주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SNS라는 신무기를 타고 간접민주주의 대신 직접민주주의가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자본주의의 변모와 함께 민주주의도 변모가 있어야겠다. 지난 세기가 끝날 무렵 밀어닥친 전 지구적 혼란과 불안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럴 때 지금은 따로 놀고 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새롭게 진화해 소수의 특권층이 아니라 다수의 보통 사람들에게 다 같이 기회와 만족을 주는 정치경제 시스템으로 조속히 자리 잡기를 기대해 본다.이영탁 세계미래포럼 이사장前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

내 탓이오

지금 전 세계적으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양극화 현상이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골고루 나누어 가져야 할 몫을 소수의 사람들이 독차지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다수(99%)가 소수(1%)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처음에는 갈등 정도로 표현했지만 언제부턴가 아예 전쟁으로 얘기하는 걸 보아도 문제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공격을 받고 있는 1%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크게 보면 가진 자들이다. 권력이나 부를 많이 소유한 사람들 말이다. 정당한 노력을 통해 부와 권력을 획득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받는 현실에 대해 안타깝고 억울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그러나 과연 정당한 노력만으로 오늘의 고지를 점령하였는지 되살펴 보아야 한다. 동시에 사람들이 꼭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도 이해해야 한다. 처음에는 부럽다고 생각하다가도 아무리 노력해도 내 몫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면 욕을 하거나 부숴버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여기서 지금까지 거론되지 않고 있는 문제 하나를 제기하고자 한다. 1%의 가진 자를 공격하는 99%도 책임이 있다는 점이다. 가진 자의 오늘이 누구 때문에 가능했는가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예를 들어 막강한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이 보여주는 실망스러운 행태를 비난하는데 누가 그들을 그 자리에 앉혔는가. 매번 뽑아놓고 나서는 이들을 뽑아준 자기 탓은 않고 뽑힌 사람 욕만 한다. 그러니 똑같은 과오가 되풀이되고 있지 않는가. 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대기업이 거래 중소기업을 핍박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내어 보너스 잔치를 한다고 비난하는데 그 대기업의 매출은 누가 올려주었는가. 결국 99%에 해당하는 소비자들이다. 이들은 그 기업이나 기업주를 비난하면서도 여전히 그 기업의 제품을 선호하는 고객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 기업에 자녀를 취직시키지 못해 안달을 하는 수도 있다. 이처럼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수많은 소비자들의 행태이다. 결국 그들만의 잔치가 가능하도록 도와주고 나서 그렇게 한다고 욕을 하는 셈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우리 사회에서 자기 탓은 하지 않고 남의 욕만 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요즘 하루도 빠짐없이 사회지도층 인사의 비리가 매스컴을 탄다. 그런데 거기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누구도 먼저 자기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는다.대신 우선 변명이나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 금방 들통이 날 것이 뻔 한 데도 그런 짓을 하는 걸 보면 그 사람들로부터 자성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하다.그러니 어쩌랴. 이제 방법이 없다. 세상은 바꿔야겠고 지도층 인사들은 자기네 기득권 지키기에 바빠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럴 때 누가 어떻게 해야겠는가. 대중들이 변하는 수밖에 없다. 대중들이 각자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비리나 잘못을 두고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내 탓이오!를 외쳐야 한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미래의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정치도 기업도 아닌 개인에게서 나온다고 한다.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무장한 똑똑한 개개인들이 서로 연대하고 소통하면서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다. 이른 바 새로운 형태의 시민혁명으로서 이미 세계 각지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세상을 바꿀 뿐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방식까지도 바꾸어 나가고 있다.앞으로 남을 탓하는 일은 그만 하고 99%가 먼저 변하자. 대중들이 내 탓이오!를 크게 외치고 난 다음 유권자로서, 그리고 소비자로서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자. 그리하여 제대로 된 지도자를 뽑고, 제대로 된 기업을 키워내도록 하자.이 과정에서 정치가나 기업이 또 말썽을 일으키면 대중은 소셜 미디어를 동원하여 엄하게 응징함으로써 매서운 맛을 보여주자. 이제 SNS를 타고 개개인으로 넘어오고 있는 파워를 본격적으로 보여줄 때다.이영탁 세계미래포럼 이사장前 국무조정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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