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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식 칼럼] 축적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

서울대 공대 26명의 교수가 한국의 주요 산업에 대해 던지는 조언을 묶은 책 ‘축적의 시간’은 대한민국산업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곱씹어 볼 대목이 많다. 저성장 기조가 이어질 것이라는 뉴 노멀(New Normal) 시대에 그동안 한국경제를 이끌었던 제조업과 선박, 반도체, 자동차, 건설 등 주요산업이 주변국가와의 비교, 인재양성 과정 등에 대한 과제가 담겨 있다. 개별 산업마다 위기와 처방은 다르지만 일관되게 제기된 단어가 아키텍처(Architecture)의 부족이다. 세부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전체적인 시스템 설계 능력을 말한다. 결국 이 같은 능력은 경험을 통해 축적된 무형의 지식과 노하우가 있어야 가능하다. 메모리반도체와 원자력을 제외한 우리 산업에는 이 같은 아키텍처가 부족하고 이를 길러내기 위한 연구와 투자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 우려스럽다고 지적하고 있다. 모방 추격형 산업발전 모델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아키텍처가 가능할 수 있는 인재의 개발과 축적의 시간을 강조한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서구의 기업들에는 그 역사가 수백 년에 달하는 강소기업들이 많다. 일본도 부품소재 등 기술력이 집약된 노하우로 대기업은 아니지만 저성장을 극복하고 각 산업분야별로 부활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단순히 내려온 전통이 아니라 현장의 경험자들이 축적해 놓은 노하우를 통해 그 시대에 필요한 창조적인 기술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열광하는 산업 아이디어 대부분은 축적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창조물이다. 하늘 아래 새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창조는 이전의 이론과 경험이 만들어 낸 결과다. 하지만 우리현실은 기초적인 경험(기계중심, 노동중심)을 중단하고 변형과 창조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위기에 처해있다. 축적된 경험의 중요성은 산업분야만이 아니다. 정치제도나 예술,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축적의 시간이 세상을 변화시켰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사조도 그 시대정신을 담지 못할 때마다 새로운 사조에 퇴조 당했다. 시대 전체 흐름을 역류하며 탄생한 화가의 한 장의 그림이 새로운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축적된 시간이 가져다준 결과다. 열광하는 맛집도 오랜 시간 고객과 함께 만들어 낸 그 집만의 노하우가 있어야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별다른 맛의 차이가 없는데도 장소를 옮기거나 주인이 바뀌면 손님의 발길이 끊기는 것은 축적된 경험의 효과 때문일 것이다. 오랜 농부여야 일소의 눈빛을 알 수 있듯이 우리사회가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축적의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풍토가 절실하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미국독립선언과 프랑스혁명이 가져다준 민주주의가 지금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는데 250년의 역사가 있었다. 많은 국가들이 이 기간 동안 좌절과 성공을 반복했다. 대한민국의 촛불시민혁명도 실패를 거듭한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평화적인 집회로 새 역사를 쓸 수 있었다. 탄핵반대세력의 집요한 도발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끝까지 평화시위를 고수한 것도 이전의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경험이 있었기에 평화집회가 가능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새로움은 기존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경험이 많음은 그 시기에 적절한 창조물을 만들어내는 가장 기본적인 동력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희망적인 것은 기간이 짧음에도 반복적인 민주화 운동을 축적하고 있다는 데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선택하는 대선이 시작됐다. 그 뜨거웠던 광장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의 태도는 이전의 축적된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민주적인 제도와 제안이 산적한데도 사소한 사진 한 장으로 또는 말 한마디에 시간을 낭비하고, 표피적인 단어에 후보진영이 올인하는 여론전에 우려가 커지고 있다. 대선은 재미있는 불구경, 싸움 구경판이 아니다. 후보자들이 만들어 낸 시민중심의 통찰을 보고 싶어 한다.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정치인은 살아남을 수 없다. 아니 그들에게 정치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촛불을 통한 경험이 증명해 주었다. 대선 후보들은 ‘위기의 경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심화되는 불평등은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초고령사회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세계의 화약고가 된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축적의 역사가 증명해 주었다. 최종식 미디어전략실장

[최종식 칼럼] 촛불집회 이후의 민주주의가 중요하다

달팽이는 집을 지고 길을 떠난다. 어디를 가든 걱정이 없다. 기어가 닿는 곳이 곧 달팽이의 집이다. 달팽이의 여행은 여간 고단한 것이 아니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이가 많다. 인간도 숙명적으로 이동하며 살아가야 하는 여행이다. 그것이 무거운 몸이든 아니면 생각이든 간에 움직임 자체가 여행이다. 영원한 여행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움직임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그래서 이 여행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끝이 없다. 숨 가쁘게 달려 온 촛불여행이 종착점에 왔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함께하는 이들이 있어 즐거웠다. 하지만 이 여행도 끝나는 지점이 또 다른 민주주의를 위한 출발점일 수밖에 없다. 고단하지만 여행은 우리의 숙명이다. 촛불시민혁명은 민주주의라는 거대 담론의 장 이었다. 노동계와 인권단체, 환경단체 등 저마다 가진 요구들은 접어둔 채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요구에 힘을 모았고 따라서 촛불집회는 그 어느 때보다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로 마무리됐다. 이제 찬란했던 시민축제는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 파괴된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노동법 개정, 최저임금제의 개선을 비롯 후퇴한 인권을 찾기 위한 인권단체들의 요구도 구체화 돼야 한다. 생계가 막막한 농민과 도시서민들의 팍팍한 삶을 위한 정책도 마련돼야 하고, 왜곡된 교육과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며, 파괴된 환경도 살려야 한다. 더욱이 촛불집회의 원인이 됐던 정치권의 적폐와 이들을 용인해 온 정치제도의 개선도 핵심적 사안이다. 폐허 위에 집을 짓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자재가 필요하지만 제각각의 모양을 그대로 두고서는 균형을 잡을 수 없다. 모난 돌은 깨야하고 구부러진 나무는 잘라야 한다. 봇물처럼 터지는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기는 분명 한계가 있다. 더욱이 대선이라는 큰 무대가 만들어지면서 이 요구가 사생결단식 대결로 이어진다면 애써 닦아 놓은 민주주의의 터전이 무너질 수도 있다. 미국의 사드배치와 중국의 보복, 북한의 핵개발이라는 정치적인 갈등은 물론 세계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국가주의가 우리를 옥죄고 있는 현실적인 고민까지 더하면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이 중요하게 보도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복은 어쩌면 고민하지 않아도 될 지엽적인 문제일 수 있다. 정치적 통합은 그 의미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통합하자는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하지도 않다. 정치세력에 따라 해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모호함 자체의 통합이 아니라 내용을 가진 통합이 중요하다. 연정이나 협치도 그 프레임이 국민들을 중심에 놓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의미가 없다. 대상이 되지 않은 세력과의 물리적 통합에 동력을 쏟을 겨를이 없다. 촛불시민세력 내에서의 통합 내용이 더 다양해야 하고 이는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주장과 요구가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부합하느냐는 단순한 기준이다. 내 목소리가 소중한 만큼 상대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의 자유와 권리가 소중한 것처럼 상대방의 자유와 권리도 똑같이 중요하다. 다른 사안들을 민주주의 틀로 모아내는 일은 상대의 내용에 대한 공감이 있어야 가능하다. 공자는 사람이 꼭 간직해야 할 단어로 서(恕)를 이야기 했다.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이 더해진 서(恕)는 상대방의 마음을 나의 마음과 동일하게 여긴다는 의미다. 이어 공자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을 강조했다. 상대방에 대한 공감과 소통이다. 개별적인 인간관계는 물론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과정에서도 매우 유용한 가치임이 틀림없다. 이제 막 시작되는 대선은 촛불시민혁명을 어떻게 완성하느냐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큰 틀에서 각각의 사안을 정확하게 반영해야 한다. 공약을 통한 정책 추진이 이전의 대선과 다르기 때문이다. 국가의 권력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첫 정부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나 아닌 다른 이들의 입장을 생각하는 배려와 소통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은 새로운 분열을 막고 어렵게 만들어 낸 민주주의의 꽃을 피울 수 있는 바탕이다. 최종식 미디어전략실장

[최종식 칼럼] 중국의 사드보복에 한 목소리로 분노하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에 대한 중국의 보복이 도를 넘고 있다. 롯데마트 중국내 99개점포 중 55곳이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안전미흡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다. 미국 허쉬사와 합작인 롯데상하이 푸드코퍼레이션 초콜릿 공장도 영업정지처분을 받은 것에 이어 롯데케미칼 등도 세무조사를 받고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중국내 한국산 판촉전 10여 개가 취소되고 항공사들의 한국여행 모객도 중단시켰다. 사드를 핑계로 중국은 경제 보복을 전 산업분야로 확대하고 있다. 단순한 경제보복이 아니라 전면적인 폭격 수준이다. 직접적인 피해가 현실화되는 국면인데도 사드보복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 한국 정부가 내놓은 대응이라는 것이 고작 신중한 접근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중국의 공세에 한목소리를 내야할 국민들 사이에서도 우리가 자초한 문제라는 태도로 남남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책임을 따지자면 그 첫 번째는 북한이지만 중국의 책임도 크다. 한반도비핵화는 어쩌면 남북의 공멸을 막는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북한의 핵무기도 미군의 전술적인 핵의 한반도 배치도 반대한다. 핵은 어떤 이유든 간에 한반도에 있는 것 자체가 위협이다. 전쟁억제용이라고 하더라도 한반도를 화약고로 만들어 언제든지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의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반민족적 행위다. 중국은 북한의 핵무장을 막을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가지고 있음에도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동안 중국이 보여준 태도에 우리는 여러 가지로 우려스럽거나 미흡한 대응에 볼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의 경제성장이 우리에게 돌려주는 달콤함에 취해 애써 중국의 태도에 드러내놓고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기업을 끓여 들여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중국이 이제는 사드를 이유로 한국의 경제를 압박하는 모양은 참담함 그 자체다. 중국은 남중국해에 군사기지를 건설하는데 대해 미국 등 서구사회가 반발하자 그들 스스로 “자국영토에 대해 외국이 관여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했다. 이 논리라면 사드는 중국이 반발할 문제가 아니다. 모순덩어리의 주장이다. 더욱이 한국은 대통령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정치적으로 책임질 분위기가 아님에도 총공세를 펴는 것은 소인배의 행동임이 틀림없다. 우리 내부의 대응도 우려스럽다. 사드배치를 둘러싼 찬반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사드배치를 결정한 박근혜정부의 막가파식 추진이나 외교 관례를 깨고 일주일 전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던 황교안 총리의 태도 등은 정치적인 평가의 대상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현재 파생되고 있는 사드에 대한 중국의 경제 보복은 정치적 찬반으로 나눠서 남남갈등을 할 사안이 아니다. 함께 대응해야 할 생존의 문제다. 일부 시위자들이 부지를 제공한 롯데백화점 앞에서 부지제공 철회를 주장하는 시위는 생경스럽다. 롯데의 부지제공은 성주주민들의 반대로 골프장을 내놓으라는 정부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제공한 것이다. 결정에 대한 책임은 현 정부의 몫이지 롯데는 또 다른 피해자다. 기업 입장에서는 거대 시장 중국을 잃고 존폐의 위기에 처한 초상집이 아니겠는가? 또 롯데에서 일하는 수많은 근로자는 일자리를 잃어야 하는 불안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자국민이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다. 중국의 치졸한 경제보복을 정당화시켜 주는 행동이 될 뿐이다. 심리학에서 후견지명이라는 말이 있다. 선견지명을 빗대어 부르는 이 말은 영어의 hindsight(behind와 sight의 합성어)로 뒤에서 보면 분명해진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일상에서의 가장 분명한 것은 결과이다. 일어난 결과를 보고 아는 체 하는 것을 말함이다. 실상 우리는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분석하고 원인을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상당수의 식자들이 결과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와 달리 대책에 대해서는 말꼬리를 감추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다만 그 시점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간사의 이치다. 사드와 관련된 우리의 대응도 현 시점에서 최선이 무엇이냐이다. 그것은 상식을 초월한 중국의 치졸한 보복에 대해 온 국민이 한목소리로 대응하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의 이성을 잃은 비상식과 싸워야 한다. 중국 정부의 오만한 행동과 혐오스러운 조치에 전 국민이 단합된 목소리로 대응하는 것이 우선이다. 오늘 헌번재판소의 탄핵판결이 나오겠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중국의 경제보복에 대해서는 생존의 차원에서 하나가 돼야 한다. 최종식 미디어전략실장

[최종식 칼럼] 삼일절에 생각하는 새로운 역사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이 얼마나 될까? 불행하게도 이름 없이 쓰러져간 꽃다운 이들이 우리는 아직 몇 명인지도 모른다. 다만 학계에서는 15만명에서 30만명이라고 추측할 정도다. 그럼에도 확인된 수는 겨우 3천315명이다. 우리는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순국선열들을 잊어버렸다. 활동은 물론 이름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순국선열들을 어쩌면 의도적으로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광화문광장에 순국선열을 기리는 기념비 하나 없는 대한민국은 과연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는 나라인가? 이같은 반성문을 쓰면서 그래도 소리 없이 정의의 역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대한민국 순국선열 유족회와 ㈔한가람연구소는 최근 잊혀져 가는 순국선열들을 찾기 위한 스토리펀딩을 했다. 순국선열들의 활동을 애플리케이션으로 제작하기 위한 이 펀딩은 마감일인 2월말이 되기 전에 이미 목표액 2천315만원(확인된 순국선열 3천315명)을 채웠다. 순국선열 앱이 만들어지면 많은 이들이 쉽게 이들의 활동을 볼 수 있다. 또 이 활동을 시작으로 이미 밝혀진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행적은 물론 그동안 알아내지 못했던 순국선열을 찾아 낼 것으로 기대된다. 또 다른 노력도 있다. 여고생들이 중심이 돼 전국의 100여개 학교에 미니소녀상을 세우겠다는 스토리펀딩이 진행 중이다.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역사동아리 ‘주먹도끼’가 오는 4월25일까지 진행하는 펀딩은 이미 목표액 300만원을 넘어 600여만원에 이르렀다. 30cm30cm의 미니소녀상이지만 학교의 도서관이나 화단에 설치되는 상상에 가슴 벅찬 활동이다. 이들 여고생들의 외침은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졸속 합의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됐다. 결과적으로 일본 정부는 위안부에 대한 기억과 책임감을 10억 엔으로 해결했다. 당사자가 빠진 합의를 한 뒤 가해자인 일본은 ‘강제적인 동원은 없었으며 돈으로 보상했다’고 떠들고 있다. 그러나 당사국인 대한민국 정부는 한마디의 반박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산 일본 영사관 앞에 세운 소녀상을 철거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본질이 뒤바뀐 상황이 된 대한민국정부는 어느 나라 정부일까. 여고생들은 그 퇴행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끌려갔던 소녀는 바로 우리자신’이라며 이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일본이 그렇게 확산을 막고 싶어하는 소녀상은 그들의 바람과 달리 오히려 확산되고 있다. 삼일절 98주년을 맞아 경기도내에서만 안양과 평택시, 양평군 3곳에서 소녀상이 제막된다. 이미 소녀상을 세운 지방자치단체를 합하면 모두 17개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또 수원시는 독일자치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지 시민단체와 함께 독일에 소녀상을 세웠다. 진실을 막고자 하는 억압이 커질수록 오히려 소녀상은 확산되고 있다. 무엇이 정의인가를 보여주는 당연한 결과이다. 순국선열의 항거와 그 뜻에 묵념을 올려야 할 삼일절. 대한민국의 눈들이 광화문으로 향하고 있다. 쉼 없이 달려온 탄핵정국이 그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눈물 흘리며 사죄하던 박근혜대통령은 끝내 수사를 받지 않았다. 스스로 국민 앞에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탄핵심판장에도 나오지 않았다. 떳떳하다면 오히려 나와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도 나오지 않은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제 무관심이 됐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답변할 능력이 없다는 것인지 대리변호인들의 막말만 이어졌다. 더욱이 아스팔트에 피가 흐를 수 있다는 극언에다 헌재의 탄핵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국민을 협박하고 있다. 특검도 청와대 압수수색도 하지 못하고 대통령 대면조사도 없이 총리의 판단만으로 끝이 났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고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오늘도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된다. 역사는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이 분노가 고통스럽지만 삼일절 소녀상을 세우기 위한 여고생들의 역사바로세우기처럼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역사가 될 것을 믿는다. 최종식 미디어전략실장

[최종식 칼럼] 안희정 도지사의 대연정과 협치

안희정 도지사의 대연정을 두고 정치권이 소란스럽다. 선거전에서는 아무리 좋은 정책이나 말이라도 시끄러울 수 있다. 기본적으로 내가 말하면 진실이고 다른 이가 주장하면 이탈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야권내 논란이 커지고 있는 대연정도 아마 문재인 전 대표가 이야기했다면 안희정 지사를 비롯 야당 경쟁자들도 ‘진의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했을 것이다. 더욱이 문 전대표의 경우 이미 당선된 것처럼 행동한다고 비난했을지 모른다. 선거전에서의 논쟁은 대체적으로 진의가 과하게 평가되거나 미치지 못하는 과불급(過不及)이다. 다만 대연정 논쟁에 앞서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미는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연정은 두 정당 간의 연합이요 두 정당 이상이 합쳐 권력을 나누는 것이다. 유럽의 일부 나라가 하고 있다. 경기도는 중앙정부는 아니지만 지방정부 수준에서의 연정을 시행하고 있다. 물론 이 연정을 무시하거나 폄하하기도 하지만 시작 자체에 많은 이들이 긍정적으로 동의한 것도 사실이다. 그 배경에는 우리 정치가 승자독식을 통한 대립과 갈등의 반복에서 오는 피로감이 작용했다. 남 지사는 당선과 함께 정무부지사를 야당에게 주겠다며 했고 당시 더민주당 경기도당위원장인 김태년 의원은 형식적인 자리가 아닌 제도적 구속력을 지닌 정책연대를 하자고 했다. 이것이 경기연정의 출발이다. 특히 김 의원의 정책연대에는 도정의 방향이 당리당략 차원의 대결이 아닌 도민을 위한 정책을 함께 만들어가자는 협치의 성격이 강했다. 다시 말해 당 대 당의 대결이 아닌 정책의 옳고 그름에 대한 연대다. 좋은 정책이라도 야당이 반대하고, 야당이 내놓은 좋은 정책을 집행부가 반대해 무산되거나 논쟁거리로 변하는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자는 의미다. 따라서 연정은 정치인의 협치가 아닌 정책에 대한 협치의 성격으로 프레임의 대전환이다. 즉 정치의 본질이 정치인이 아니라 바로 국민이자 시민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살리는 방법을 찾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수자도 국민이지만 소수자도 국민이다. 다수가 모두 맞는 것도 아니고 소수가 모두 틀린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연정은 정치인끼리의 야합과는 다른 정책에 국민을 중심에 둔다는 의미이다. 국민들은 정치권이 보여준 끝없는 대결이 피곤하다. 극과 극이 아닌 옳고 그름을 찾는 중용의 덕을 함께 살리는 연정을 보고 싶어 한다. 여기서의 中庸은 정치의 본질로서 국민을 중심에 두고(中) 그 시기에 따라 사안별 본질을 찾아내는 정책을(時中) 찾는 것을 말함이다. 안 지사의 연정은 어쩌면 이런 국민적 요구를 잘 반영한 발표라는 점에서 이념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은 물론 정쟁에 지친 국민들로부터 지지도를 올리는 효과를 얻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있다. 그것이 한국정치의 발전을 위한 통찰에서 온 것인지 일시적인 선거용인지가 구분하기 힘들다는데 있다. 적폐를 호소하는 국민들의 목소리와 달리 책임 주체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나 여소야대 국면에서 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단순한 협치라면 그 의미는 다를 수 있다.즉 연정의 출발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연정에 있어서도 기본은 국민에게 있어야 한다. 안 지사의 연정행보도 이 같은 시각에서 판단해야 한다. 시민을 위한 연정과 정치인들간의 편의를 위한 협치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사실 대한민국 정치가 그동안 극과 극을 달리면서 파행을 겪었던 경험에 비추어보면 대연정은 안 지사의 것이 아니라 대권을 꿈꾸는 후보자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동양의 위대한 성군인 순임금도 ‘묻고 들어서 그것이 도이면 널리 알렸다’고 한다. 이 말은 하늘의 이치를 깨달은 성군이라도 옳고 그름의 목소리는 수용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대선은 본인의 정책을 알리는 것보다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재전달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문재인 전 대표도 그동안 탄핵기각에 대해 혁명 등의 과격한 발언을 뒤로하고 헌재의 판단을 수용하겠다고 했으며 포용이라는 단어로 개혁에 동참한다면 친박 인사도 함께할 수도 있다고 했다. 당연히 우클릭으로 지적받을 수 있다. 안 지사의 대연정이나 문재인 전 대표의 포용에 대한 판단은 선거판에서 적대적 비방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비방에 앞서 우리들은 그 발언의 중심에 시민이 있는지에 대한 평가를 우선해야 한다. 탄핵 판결이 가까워지고 정치인과 국민들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 필연적으로 시끄러운 소리는 정치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권력을 쥔 자들은 국민들의 무관심을 유도해 왔고 그 무관심 속에 권력을 남용해 왔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국민들이 끝까지 깨어서 소리를 듣고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민들이 주인인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다. 머리가 아프지만 지금의 이 논쟁과 소란이 즐겁다.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말한 것처럼 촛불정국과 대선의 혼란스러움이 당장은 비극처럼 보이지만 역사적으로는 희극이 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최종식 미디어전략실장

[최종식 칼럼] 시민이 나서 시대정신을 지켜야

동양고전을 읽으면 자주 언급되는 인물 중에 하나가 백이숙제(伯夷叔齊)다. 백이숙제는 기원전 650년경에 망한 은나라의 제후국인 고죽국의 왕자들로 군주의 자리를 마다하고 숨어 지내다가 주(周) 문왕이 취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았으나 은나라를 징벌하러 가는 주공(周公)의 출정을 막지 못하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와 이슬만 먹고 아사했다는 인물이다. 당서(唐書)에는 고죽국이 지금의 베이징 근처이며 고려(고구려의 옛 이름)의 뿌리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백이숙제는 고려인으로 보인다. 동양철학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백이숙제라는 이름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의 핵심은 충절(忠節)로 상국인 은나라를 제후국인 주나라가 징벌하는 것이 예(禮)에 어긋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조선건국을 반대한 정몽주(鄭夢周)나 태조 이성계에게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벼슬을 거절한 길재(吉再), 세조를 몰아내려다 죽은 성삼문 등 사육신들은 백이숙제와 함께 충절이라는 의미로 남아 있다. 이처럼 백이숙제가 2천년 넘게 평가받는 것은 동양의 주류철학인 유학이 가지고 있는 기본 가치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 주공인 반면 백이숙제는 주공의 은나라 정벌에 반대해 수양산으로 들어갔다. ‘주공이 꿈속에 나타나지 않는다’며 한탄할 정도로 주공을 롤모델로 여긴 공자가 주공의 전쟁을 반대하며 아사한 백이숙제를 ‘만세에 칭송을 받고 있다’며 높이 평가한 것은 아이러니(irony)다. 반면 묵자는 공자처럼 충절로서의 백이숙제가 아니라 반전평화운동가로서 평가한다.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것은 지배층이 아니라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공물을 바쳐야 하는 백성들인 만큼 백이숙제가 이 같은 전쟁을 반대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반전평화주의자 백이숙제는 익숙하지 않다. 사기(史記) 백이열전에는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는데 그 잘못을 모르는 구나’라며 백이숙제가 슬퍼했다고 표현돼 있다. 연암의 열하일기 이제묘기(夷齊廟記)에도 후대의 왕들이 쓴 백세지사(百世之師), 만세표준(萬世標準), 윤상사범(倫常師範)이라는 글 속에 충절이라는 지배가치를 소개하면서도 폭력이 폭력을 부른다는 이폭이폭(以暴易暴)에 대해 적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백성들은 백이숙제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제후국들의 영토전쟁이 시작돼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진 시기라는 점에서 평화가 시대정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반전평화의 시대정신은 충절이라는 지배가치에 눌려 역사 속에 소멸됐다. 시대정신이란 한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소산에 공통되는 인간의 정신이나 이념 등이다.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가치가 시대정신이 되길 원한다. 하지만 시대정신은 지배가치와 지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지배자들은 종교와 예술, 문학 등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공고히 하려 했지만 오히려 이 예술이 숨겨져 있던 시대정신을 고양시켜왔다. 중세봉건시대의 종교적 가치는 르네상스를 통해 무너졌고, 절대왕정은 신흥자본가에 의해 공화정으로 변화됐다. 우리 현대사도 마찬가지다. 조선말 민중들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요구하며 동학혁명운동을 벌였지만 지배자들은 기존 질서의 유지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였으며, 일제 강점기 민중들의 독립운동에 친일지배자들은 동북아공영을 주장했다. 유신시대는 경제발전이라는 지배가치가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억눌렀으며 그 기저에는 반공이라는 괴물이 자리 잡았다. 지금 광장의 촛불도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권력자들의 권위주의와 불평등한 사회에 대항하는 시대정신의 표출이다. ‘이게 나라냐’고 외친 분노한 목소리가 곧 시대정신이다. 이게 민주주의공화정이냐의 목소리에는 우리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적폐를 없애고 구조적인 모순인 경제 양극화를 해소하고, 권력의 비민주적 행태를 막아내 자유와 평등, 인권이 지켜지는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다. 탄핵정국이 길어지고 반대세력들의 움직임도 커지면서 시대정신에 대한 담론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우려스럽다. 언론도 진보와 보수, 각 진영 내 갈등 등 정치세력 간의 대결을 부추기고 있다. 시대정신이 빠진 논쟁은 과거로의 회귀다. 따라서 시민들 스스로 새로운 미래를 위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더욱 확산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새로운 지도자를 찾는 것도 이 같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가? 시대정신을 잘 구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평가와 공론화의 과정으로 이어져야 한다. 최종식 미디어전략실장

[최종식 칼럼] 덧칠해진 프레임의 껍데기를 벗겨라

어떤 사물을 보는 시각이나 방향 등을 우리는 프레임(frame)이라고 한다. 창틀이나 뼈대 등 특정한 모양 등을 지칭하던 이 단어는 정치, 경제 등의 분야에서는 그 집단이 가지고 있는 속 뜻, 본질, 방향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된다. 프레임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오히려 고정화된 프레임을 거부하거나 새로운 프레임을 만드는 과정이 창조적 활동일 수 있다.하지만 프레임이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해 종북, 좌파 등 정치권의 프레임으로 만들어질 경우는 전혀 다른 문제를 낳는다. 정치인들은 진실을 감추거나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기 위해 특정 프레임을 만들어 왔다. 역사적으로도 인종이나 종교, 계급 등의 프레임으로 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정치인은 부지기수다.프레임을 왜곡시키는 방법도 교묘하다. 작은 우려를 확대하거나 소소한 원인을 전체인양 지목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이처럼 교묘하게 덧칠해진 프레임을 벗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더욱이 현대사회에서 언론과 권력이 결합된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 문화까지 덧칠해진 프레임은 혁명적인 담론이 나오기 전에는 그 껍데기가 벗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프레임을 바꾸는 여정은 길고 고단할 수밖에 없다. 국정농단의 핵심인물인 김기춘 전 대통령실장은 프레임을 만들어내는 귀재다. 그는 왜곡된 프레임으로 40년간 권력을 누려 왔다. 박정희 정권시절 젊은 검사 김기춘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침몰시키는 유신헌법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민주주의를 말살한 공로로 초고속 승진, 중앙정보부 대공국장을 맡아서는 재일유학생간첩단 사건을 조작했다.고국에서 공부하겠다고 온 젊은 유학생들에게 반공프레임을 뒤집어 씌웠다. 소수의 지식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그가 만들어 낸 프레임을 부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가 덧붙인 프레임이 허구였다는 사실은 40년이 지나서야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확인됐다. 너무 긴 시간이 걸렸다.그럼에도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 단죄를 내려할 시점이다. 십상시 문건이 터졌을 때도 김 전 실장은 문건 내용을 확인하고 사실을 밝혀내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오히려 문건 유출자를 처벌하는 프레임으로 본질을 왜곡시켰다.부산 초원복집 사건도 선거법 위반 문제가 아닌 도청의 위법성 문제만을 부각시켰다. 이번 국정농단 사건에서도 테블릿 PC의 내용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언론사의 습득과정을 문제 삼았고,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에게는 좌익 프레임을 덧붙였다. 역사의 심판대에서 그는 또 어떤 프레임을 들고 나올지 자못 궁금해진다. 묵자는 공자와 같은 춘추시대에 살면서 공자와는 전혀 다른 사회운동을 벌인 철학자이다.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에 반대하며 침략국을 직접 찾아가 설득하는 등 전쟁을 막는데 온 힘을 기울인 반전 평화주의자였던 묵자는 인의(仁義)로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공자를 강하게 비판했다. 극기복례( 克己復禮), 술이부작(述而不作) 등 공자의 중요한 아젠다인 주례(周禮)로의 회귀가 계급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술책이라는 것.노동자, 농민, 천민들과 함께 대동사회를 주장한 묵자에게는 유자들이 만들어 낸 계급사회의 프레임을 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묵자는 현대의 민주주의에서도 참고해야 할 중요한 정치철학을 갖추었음에도 시대의 이단아로 2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고정화된 프레임을 벗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선거는 프레임 전쟁이다. 후보자들마다 각양각색의 프레임을 만들어 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낸 프레임 모두가 진실은 아니다. 포장된 프레임은 그 껍질을 벗겨내야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특히 유력한 후보자들이 만들어 낸 프레임은 그 배경과 내용을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이런 연유로 10년 넘게 활동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에 대한 프레임은 좀 더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국내 활동 정치인들은 그동안 사안에 따라 평가가 있었지만 반 총장은 객관적으로 평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의 공동 아젠다에 얼마만큼 기여했는가? 전쟁과 기근으로 국경을 넘다가 숨진 수많은 난민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왜 해외언론은 그에게 ‘우려총장’이라는 별명을 붙였는가? 기름장어는 또 무엇인가? 남북의 긴장과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등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평가는 유엔사무총장이라는 이름에 대한 프레임이 아니다. 그가 국제사회를 위해 대한민국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덧칠해진 프레임을 찾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프레임 자체에 의문을 갖고 ‘왜’라는 질문을 통해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왜라는 질문 자체가 껍질을 벗기는 과정이다. 왜라는 질문과 사실에 대한 의문이 학문의 시작이기도 하다. 흔히들 인간은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만큼만 보인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더 보려고 하면 진실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역사적인 시험대에 서 있다. 더 이상 왜곡된 역사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덧칠해진 프레임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내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최종식 미디어전략실장

[최종식 칼럼] 소란스러운 정치, 이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소란스럽다. 다양한 사람들,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과정이 정치이자 민주주의의 과정이다. 조용하다면 그것은 이미 독재 권력일 가능성이 높다. 이 소란스러움을 즐겨야 만이 진정한 민주정부를 만들 수 있다. 천만 촛불잔치를 정리하는 자리가 어찌 조용할 수 있는가. 당연히 시끌벅적해야 하지 않는가. 소란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다. 천 만 촛불이 타올랐던 2016년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대한 주권자들의 권리 찾기 대 장정이 이었다. 2017년은 이 촛불 장정을 넘어서 촛불의 명령이 실현돼야 한다. 그래서 새해 벽두부터 걱정스러운 일들이 많다. 우선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목소리가 다양하다. 촛불현장에서는 한목소리를 냈던 야권이 다른 입장을 보이고 보수진영도 각자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이래저래 정치권의 말잔치가 최고조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 말 잔치를 통해 국민들도 갈라져 분열할 것이다. 또 일부에서는 이 현상을 두고 자조 섞인 목소리를 낼 것이다. 분열주의자들은 이때쯤이면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을 꺼내며 정치권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또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 같은 냉소주의에 편승해 정치권에 등을 돌린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중요한 시점마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것도 이 같은 냉소주의와 시민들의 무관심, 패배 분위기에 기인한다.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한 그리스의 폴리스(정치공동체 도시국가)를 보자. 이들은 신전인 아크로폴리스(acropolis)와 아고라(agora)에 모여 직접 자신들의 대표자를 뽑았다. 일정한 자격검증을 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대표자를 선출하기도 했다. 기회의 균등과 시민들의 참여가 보장된 직접 민주주의다. 아고라 광장은 아마 거대한 소음공장처럼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해관계가 다른데 조용할 리가 없다. 민주주의는 소란스러움이 싫으면 조용한 독재국가나 전제국가에 살아야 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철인정치를 이야기하고 계층간의 이동이 불가능한 국가를 말하기도 했다. 서양사는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에 이어 신정, 왕정이라는 절대 권력자에 의해 지배돼 왔으며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리는 시민혁명을 통해 공화정을 부활시켰다.우리의 공화정은 서양의 정착 과정과 다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자본제의 발전 과정에서 부자로 등극한 제3신분 즉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한 시민혁명이다. 이후 가난한 사람과 여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다.이에 비해 우리는 왕정에서 지금의 공화정으로 오는 과정이 짧았다. 그래서인지 나라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 좀 더디기도 했다. 하지만 2016년 촛불은 달랐다. 이전과 달리 자각한 주체들이 스스로 나라의 주인임을 확인하고 그 요구를 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새해에는 민주주의의 이 소란스러움을 동력으로 세워야 한다. 이를 두고 분열이라 말하고, 자기 이권 찾기라며 비난하며 시민들에게 무관심을 조장하는 집단과 언론이 있다면 이들은 반민주적 무리들이다.이 소란스러움을 그대로 인정하고 전 국민이 원하는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함께 즐기는 것이 마땅하다. 목적이 뚜렷한데 그 과정이 좀 시끄럽고 복잡하다고 우리가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불경에 “달을 가르키는 손을 본다”(능엄경)는 말이 있다. 해탈을 하라는데 그것은 보지 않고 해탈의 방편인 손가락에 집착한다는 의미다. 손가락은 좋은 선법이나 부처님의 가리침 등이므로 이를 잘 따라가면 달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다양한 방편을 두고 좋으니 나쁘니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방편이 없으면 달을 볼 수가 없다. 민주주의의 소란함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방편은 다양하고 소란스러울 수 있지만 민주주의 완성이라는 목표는 같다. 이제 우리들은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누가 민주적인가 아니면 반민주적인가를 가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깨어있어야 한다. 서암화상은 스스로 깨어있기 위해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했다고 한다. “주인장, 예, 정신 차려야 해, 예, 차후로 다른 사람한데 속아선 안 돼, 예 알겠습니다”.새해 대한민국 시민 스스로가 해야 할 자문자답이다. 깨어 있어야만 정치인의 달콤한 말에 꼭두각시처럼 따라가지 않을 수 있으며 진실과 거짓을 분리할 수 있다. 깨어있는 시민이어야 자신의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최종식 미디어전략실장

[최종식 칼럼] 알려지지 않은 판결 그리고 표현의 자유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직전인 지난달 3일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판결이 있었다. 재야사학자로 ‘한국의 식민사학 카르텔을 끊겠다’며 자비를 들여 연구소를 설립해 후학을 가르치며 저술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덕일 한가람연구소장에 대한 판결이었다. 역사학계에서는 관심거리였지만 주류 언론들은 이 판결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이 소장은 강단사학계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담은 책을 잇따라 출간하면서 단단한 독자층을 갖고 있는 사학자다. 이런 이 소장이 명예훼손이라는 형사소송에 휘말린 것은 ‘우리 안의 식민사관’이라는 책을 통해 김 모 전 고려대교수를 식민사학자이자 친일파라고 비판하면서다. 이 소장은 김 교수가 쓴 책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라는 책의 내용이 우리 고 사서를 부정하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거나 책 곳곳에서 일본학자나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사실상 임나일본부설을 따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김 교수와 같은 방식의 언설이 해방이후 친일사학자인 이병도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강단사학자들의 카르텔이라며 거칠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소장을 통해 임나일본부는 허구라고 책에서 밝혔기 때문에 이 소장이 내용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과 관련 서울서부지방법원 제1형사부(재판장 지영난)는 이 소장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무죄 취지를 통해 ‘이 소장의 비판은 학자로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이 비판은 개인을 비방할 목적이 아니라 학문적인 경향과 행태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온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덧붙여 출판물을 이용한 의사소통의 경우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폭넓게 보장해야 하고 사법권이 신중한 고려 없이 학자들 사이의 학문적 비판과 논쟁에 과도하게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초부터 이 소송은 책의 본문 곳곳에 제시된 사례나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가 논쟁거리였다. 당연히 학문적 비판의 대상이 됨에도 김 교수는 학문적 토론을 배제하고 소송의 대상으로 삼았다. 어쩌면 평소 주류사학계를 비판해 온 것을 못마땅해 오던 주류사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글이나 책을 통한 의견은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의 문제임에도 이를 소송으로 연결시킨 것 자체가 학자의 자기부정일 수 있다. 사실 글이란 전체가 아닌 본문 속의 단어나 작은 사례와 자료만으로도 그 자체의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 표면적으로 제시하는 담론보다 오히려 작가의 의도가 소 담론에 더 강하게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와 관련 재판부도 친일사학자라 비판하면서 제시한 내용이나 근거가 학문적인 의미가 친일사학자 사실 자체를 떠나 학문적 논쟁으로서는 충분하다고 인정했다. 이는 글의 전체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개별 문장이나 자료 자체에 대해서도 저자가 유한 책임을 져야함을 인정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글은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례와 근거를 제시해 독자들에게 동의 받는 과정이다. 대표적인 것이 기자들이 작성하는 기사로 객관적인 사실을 통해 그 주장에 공감을 받아낸다. 하지만 작가가 펼치는 의견이나 주장이 되는 근거가 부적절하거나 오히려 결론과 상반되는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읽고 나서도 뭔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고 오히려 그 주제를 부정해야 하는 상황이 빚어진다. 이쯤 되면 읽어서 독이 되는 글이 될 수 있다. 재판부의 판결문 중 주목되는 부분은 공공의 범위를 확대하고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부분이다 ‘공공의 이익이란 국가, 사회 기타 일반 다수인의 이익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특정한 사회집단이나 그 구성원 전체의 관심과 이익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적시했다. 이 표현은 대학교수로서 활동과 출판 자체가 공공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공인은 사인과 달리 당연히 비판을 수용할 자세를 갖추어야 하고 그 비판에 대해 학문적 책임을 져야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사실 한국사회 주류들은 그동안 자신들을 향한 비판을 외면하거나 애써 무시해 왔다. 오히려 카르텔을 통해 비판자들을 매장시켰다. 이는 학문분야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 기득권자들의 자기존재방식이며 한국사회 전체의 적폐이기도 하다.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사회는 공공적인 사안임에도 자유로운 비판을 수용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사회적 공공선도 만들 수 없다. 대한민국의 국정농단도 어쩌면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자 스스로 자신이 공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널리 알리고 싶은 의미 있는 판결문이다. 최종식 미디어전략실장

[최종식 칼럼] 탄핵 이후의 민주주의를 생각하다

30년 만에 ‘동을 떴다.’ 골목길에 숨어 있거나 찻집에 앉아 있다가 약속시간이 되면 구호에 맞추어 거리로 뛰쳐나오는 기습시위에서 첫 구호를 외치는 것을 우리들은 ‘동을 떴다’라고 했다. 87년 신촌사거리. 이미 기습시위를 대비한 전경들이 곳곳에 진을 치고, 청재킷을 입은 백골단은 시위주동자를 체포하기 위해 대기하는 순간, 구호가 외쳐진다.최루탄이 터지고 대열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면 시위자들은 골목길을 따라 각자 흩어졌다가 다시 거리로 나왔다. 대학생활 대부분을 우리는 함께 ‘동’을 떴다. 그렇게 흩어졌던 50대들이 2016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에서 ‘동’을 떴다.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나는 모습으로 2016년 겨울 광장에 모였다. 촛불은 분명 이전의 시위와는 달랐다. 집회라면 항상 존재하던 조직적인 참가자들, 정형화된 구호, 붉은 머리띠, 운동가요 등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밀리면 천천히 움직이고 서면 함께 섰다. 조급함이 없고 긴장감도 없다. 함석헌 선생의 표현대로라면 ‘씨알의 꿈틀거림’ 그 자체였다. 2차 행진이 시작될 무렵 인사동 어느 식당으로 모여들었고 대화의 주제는 대학시절 함께 거리로 나왔던 87년 항쟁이었다. 이제는 당시를 평가할 기억도 없지만 그래도 한마디씩 입을 연다.시민혁명을 일궈냈음에도 7~8월 노동자투쟁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는 평가, 경제민주화에 대한 합의가 없었다거나 우리 스스로 돈의 탐욕에 눈이 멀어 민주주의가 농락당하도록 방치했다는 회한도 나온다. 경제성장의 달콤함에 취해 커지는 빈부격차를 애써 외면한 것. 기회가 사라진 젊은이들에게 오히려 그들 탓으로 돌렸던 것에 대한 미안함을 쏟아낸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것은 친일분자들과 군사독재자 무리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용서하고 잊어버렸다는 것. 이번 시민혁명은 철저한 인적청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회를 엿보다 권력에 편승한 자들이 주도하는 대한민국을 더 이상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였다. 사실 우리역사는 중요한 시점마다 피흘려 일권 낸 시민혁명을 통해서도 인적청산을 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정부수립 후 국민들의 열망을 받고 출발한 반민특위는 친일인사들의 조직적인 반대로 682건을 취급했지만 재판을 종결한 건은 38건에 불과했다. 이들 대부분도 2심에서 석방되거나 병 등을 이유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결국 반민특위는 친일분자들에게 면죄부만 주고 말았다. 87년 민주항쟁도 인적 청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야당 일부 인사들의 권력욕이 군사독재자들과 함께 권력을 나눠가지면서 시민혁명은 반쪽짜리로 전락했다. 인적청산에 대한 열망은 대한민국의 과거에 대한 기성세대의 반성과 참회록이 돼야 한다. 또 탄핵정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웃거리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민을 이용하는 자들에 대한 평가 기준이 돼야 한다. 광장의 민심은 국민의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자와 자신과 자신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 자들에 대한 분리의 목소리다. 국민들이 촛불로 보여주는 명령은 명확하다. 즉시 탄핵이다. 더 나아가 그 부역자를 심판하라는 것이다. 그 명령을 어기는 자를 이번만큼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국민들 마음에는 이미 탄핵이 이뤄졌다. 오히려 국민들은 탄핵 이후를 생각하고 있다. 정치권은 권력을 잡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권력을 잡아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박대통령과 그의 부역자들에 대한 청산은 선결 과제이지만 야당도 왜 권력이 필요한지를 그 권력이 어디서 나왔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오로지 권력을 얻고자 하는 탐욕만 보인다면 그 부역자와 다를 바가 없다. 이제 정치권은 주권자가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한 그림을 보여 주어야 한다. 여기에는 자유, 평등, 인권 등 민주주의의 기본개념이 지켜지는 사회로의 전환이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탐욕의 사회가 아니라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의 가치과 상호 존중되는 사회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평화적인 촛불집회는 어쩌면 낭만적인 시민혁명이다. 하지만 평화적이라는 이름의 시민혁명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완성이 아니라 보수와 진보의 해묵은 이념논쟁이 되거나 야당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이어질 경우 광장의 촛불은 혁명의 횃불이 될 수도 있다. 최종식 미디어전략실장

[최종식 칼럼] 촛불 광장에서 딸에게 보내는 편지

30년 전 광화문과 서울시청 뒷골목에서 최루탄에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된 대학생이 반백의 얼굴로 다시 그 자리에 섰다. 6·10항쟁이 미완성 민주주의라고 말할 때도 믿고 싶지 않았다. 개헌 논의에 30년 전의 직선제가 수명이 다 됐다고 말할 때도 왠지 서운한 마음에 아직도 아물지 않는 최루탄의 파편 흔적을 만지며 애써 위로했다. 30년이 지난 오늘 대학생이 된 딸아이의 손을 잡고 다시 이 자리에 선 현실이 떨리고 서글프기만 하다. 미안하다. 참으로 미안하다. 너에게 좋은 세상 만든다고 일해 온 그 세월이 오늘에서야 허상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구나. 백골단에 쫓겨 이리저리 뛰어가던 골목길이 단장되고, 최루탄 발사기가 물대포로 바뀌고, 손에 들었던 화염병이 촛불로 바뀌었어도 그 때의 고통과 분노는 변한 것이 없구나. 너의 초롱한 눈빛과 광장을 가득 메운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함성을 들으면서 흰머리를 숙여 사죄의 절을 올린다. 고맙다. 정말로 고맙다. 그래도 우리 세대는 올라갈 사다리가 보였다. 물론 사다리에 오르지 못한 이들도 있고 사다리 중간에 앉아 있기도 하지만 그때의 젊음은 희망이 있었다. 우리 기성세대가 그 희망을 낭만이라 여기며 스스로 위로하고 있는 동안 너희에게는 무너진 민주주의와 헬조선, 흙수저만 남겨 놓았구나. 보수라고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진보라고 모두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면 생각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누구든 거짓말을 하고 남의 물건을 훔치고 강도짓을 하며 민주주의를 유린했다면 그것은 용서할 수 없다. 국민에게 거짓말을 하고, 국민의 세금을 도둑질하고, 기업을 협박해 돈을 빼앗는 강도짓을 하고도 ‘내가 뭘 잘못했느냐’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자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믿지 않았던 검찰이지만 다행히 현직 대통령을 피의자로 규정했다. 범죄사실이 명백한 이유도 있지만 검찰이 대통령을 피의자로 전환한 것은 온 국민이 오늘처럼 한마음으로 광장에 밝힌 촛불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저들은 이제 수사발표를 인정하지 않으며 수사를 받지 않겠다고 한다. 국민 앞에 눈물을 글썽이며 밝혔던 총리임명, 특검까지 수용하지 않겠다며 시간 끌기에 들어갔다. 국민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자들이 촛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상식을 넘어선 독선과 아집으로 국민들과 싸우겠다고 나서는 저들의 꼴을 잘 기억해야 한다.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된다. 촛불은 이제 시작이다. 우리는 일제 부역자를 청산하지 못했다. 또 그들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에 피를 뿌리며 저항했지만 그들을 제대로 몰아내지 못했다. 그 뿌리들이 우리사회의 주류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매국의 후손들이 지금 금수저를 들고 대한민국을 농락하고 있다. 그러니 기성세대가 실패한 과거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차가운 광장 바닥에 얼마나 더 오래 불을 밝혀야 할지 모른다. 어쩌면 한 달 아니 1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쉽게 촛불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범죄자 박대통령과 그 주변 무리들을 단죄하고 그에게 부역한 자들이 더 이상 권력을 탐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고 촛불이 바람에 흔들려도 함께 손을 잡고 민주주의의 깃발을 지켜내자. 떨리는 손은 내가 잡아 주마. 흐르는 눈물도 닦아 주마. 함께 목 놓아 민주주의를 노래하자. 오늘 너와 촛불을 밝혔듯이 30년 뒤 오늘처럼 네가 너의 아이와 함께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 최종식 미디어전략실장

[최종식 칼럼] 새누리당은 박근혜 대통령을 출당 시켜라

국회가 추천한 국무총리에게 내각통할권을 주겠다는 박대통령의 제안을 야 3당이 거부했다. 대통령 권한 문제에 대한 해석의 차이다. 국무총리는 헌법에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국정을 총괄한다’라고 명시돼 있는데 박대통령의 제안이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 이유다. 대통령이 지시를 하지 않겠다는 부분이 빠지면서 허수아비 총리를 국회가 추천해 달라는 말로 해석한 결과이기도 하다. 김병준 교수를 총리로 지명한 뒤 헌신짝처럼 버린 박대통령이 지명 절차만 바꾼 국회 총리를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똑 부러지게 “권한을 이양하겠다.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2선으로 물러 나겠다”고 하면 될 것을 이전의 사과처럼 말 꼬리를 흐린 것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마지막까지 권력을 유지하려는 것이 치욕스럽다. 그런데 이같이 불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배경에는 새누리당이 있다. 국회의원 수를 양분하고 있는 새누리당이 마지막까지 권력을 지지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야 검찰 수사도 적당히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국민들의 분노는 대통령만큼이나 새누리당에게도 향하고 있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하는 짓이 가관이다. 당 대표의 얼굴이 언론에 보도될 때마다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는데도 듣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 정국을 정리한 뒤 물러나겠다며 치맛자락을 붙잡고 또 다른 친박들은 권력의 줄을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중립내각이 헌법을 위반할 수 있다며 국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고 있다.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을 보지 못하고, 언론의 지적을 해독하지 못하는 새누리당은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이성이나 공감이 전혀 없는 듯하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마당에도 의원직 하나 내던지는 자가 없다. 나라를 망친 주체가 또다시 정국수습을 위해 기웃거리는 것 자체가 구역질이다. 새누리당이 대통령에게 줄을 서고 있는 한 이 난국은 해결되지 않는다. 박대통령을 당의 후보로 추천하고 당선시킨 뒤 함께 권력을 누려온 새누리당이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탈당하지 않는 박대통령을 출당시켜라. 개인적인 비리도 출당시키는데 국가를 농락한 자를 왜 출당시키지 않는가? 또 그동안 스스로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 친박이라며 맹종해 온 의원들도 함께 출당시키고 합리적인 보수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새누리당을 지지해 준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대한민국이 위기다. 미국의 질서도 변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새누리당이 사적으로 누려 온 권력을 내려놓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결단해야 할 시기다. 개혁군주 정조는 지식인들은 公이라는 명분으로 私를 취하는 자들이라고 질타했다.(公中之私) 소인들은 드러나게 이익을 추구하기에 덜 위험하고 지식인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잘 드러나지 않기에 더 위험하고 피해는 오래간다고 했다. 국민들은 공을 말하며 사를 취한 자들에게 물러나라 요구하고 있다.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아는 자가 없다고 하는가.(天知 地知 子知 我知 何謂無知) 야권도 국민들의 눈높이에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맹자는 전쟁 중에 50보 도망간 병사가 100보 도망간 병사를 역적이라고 꾸짖을 수 있는가( 五十步百步)라고 물었다. 도망간 거리를 떠나 도망간 사실 자체는 같다는 의미이다. 어쩌면 국민들은 야당을 一十步百步 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당리당략에 따라 섣부른 결정을 하지 말아야 한다. 책임이 무섭다면 정권을 잡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30년 만에 찾아온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에 찬물을 붓지 말아야 한다. 최종식 미디어전략실장

[최종식 칼럼] 대통령답지 않은 대통령은 대통령이 아니다

“한 사람의 필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의 자격을 가진 자를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맹자는 탕 임금이 걸(桀)을 쫓아내고 무왕이 주(紂)를 징벌한 것을 예로 들며 신하가 임금을 시해해도 되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같이 대답했다. 임금답지 않은 임금은 필부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대통령답지 않은 대통령은 필부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최순실씨의 국정논단이 속속 드러나면서 국민들이 경악해하고 있다. 대통령을 언니라고 부르며 국가기밀인 대북관계와 장관의 인사까지 관여한 사실이 하나둘 나올 때마다 국민들은 자신의 옷이 벗겨져 벌거숭이가 되는 것처럼 대한민국이 부끄러워진다. 청와대 문건유출사건으로 구속된 박관천 전 청와대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이 “우리나라 권력 1위가 최순실, 2위가 정윤회이고 박대통령이 3위에 불과하다”고 말했을 때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참 싱거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다. 국민들은 권력 1위 최씨를 ‘요괴’라 부르며 요괴에 홀려 장단을 맞춘 박대통령 행적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박대통령이 서둘러 발표한 사과에는 국민들의 기대가 들어있지 않다. 앞뒤 내용도 없이 청와대 비서진이 갖춰지기 전 최씨에게 자문을 받았다고 밝혔다. 달리 해석하면 어려운 시기에 자문해 준 최씨에게 국민들이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로 들린다. 그래서 인터넷에는 사과문도 최씨가 자문해 준 것이라는 말들이 돌고 있다. JTBC가 입수한 2014년까지 자문을 받았다고 했지만 이후에도 최씨가 국정에 관여했다는 증언이 최씨 주변인들을 통해 쏟아지면서 대통령의 사과도 초라한 거짓말일 가능성이 커졌다. 애초부터 박대통령은 군주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공(公)사(私)를 구분할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국민들은 그동안 의혹이 불거지거나 국민의 정서와 동떨어진 인식과 발표를 할 때도 대통령으로서 공적 고민의 결과라고 이해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그 공적 이해라는 말은 허망한 기대가 됐다. 어릴 적부터 청와대에 생활하면서 청와대 자체를 私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 유학의 전통을 지닌 조선은 임금의 사를 없애 공에 이르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그 지루한 경연을 했다. 공주의 집을 지어주는 임금에게 신하들은 사적인 일에 국비를 사용한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공과 사를 구분하기 싫었던 세조, 연산군은 경연을 폐지했고 역사는 그들을 폭군이라 일컸는다. 박대통령의 모교인 서강대 학생들이 오늘 시국선언문을 통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사과문’이라며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금기시되는 단어인 하야와 탄핵이라는 단어가 대학가를 비롯한 시민단체를 통해 터져나오고 있다. 어쩌면 이 같은 요구와 주장이 들불처럼 번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단어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이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때와는 전혀 다르다. 현실적으로 탄핵과 하야가 가능하냐의 문제를 떠나 그 주장이 국민들 사이에 과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국민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진실이다. 기자들이 발품을 팔아 나오는 보도가 나올때마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 관심을 갖는 것은 실체적 진실이다. 이 관심은 밝히면 좋고 밝혀지지 않으면 끝나는 것이 아닌 민주주의의 핵심인 국민들의 권리다. 문건을 전달한 청와대의 비선이 누구인지 최씨의 관여가 어떻게 정책에 반영됐는지, 최씨가 그동안 누린 특권이 무엇이지 모두를 밝히는 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이다.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은 박대통령 뿐이다. 대통령의 하야와 탄핵은 이후에 국민들이 판단하면 된다. 국민들은 대통령답지 않은 대통령을 대통령이라 부르고 싶지 않다. 그 선택은 이제 박대통령이 해야 한다. 최종식 미디어전략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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