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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호의 이미지읽기] “성공하려면 고향을 떠나라”

전북 완주군에서 세계막사발축제가 열렸다. 올해로 16회째를 맞는 행사로 완주군의 후원과 지역주민들의 지대한 관심 속에 성공리에 개최될 수 있었다. 특히 이번 행사가 값진 이유는 축제와 더불어 국내 최초로 막사발이라는 단독 콘텐츠로 미술관이 건립되었다는 점이다. 조직위원장인 김용문 작가의 아카이빙 전시와 더불어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됐고, 기념전시에 참여한 터키, 미국, 중국 등 13개국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 22점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완주군은 얼마간 용도를 잃고 방치된 (구)삼례역을 개조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막사발은 흔히 막사기라 불리며 밥그릇이나 국그릇 등으로 쓰이는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생활용품이다. 막사발의 막은 막걸리의 그것과 같은 의미로 서민들이 친숙히 접하고 할 수 있는 그릇을 의미한다. 우리 땅에서 채취한 황토로 빚어낸 막사발은 두툼하고 비정형적인 몸체와 갈라지고 까칠하지만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멋스러움을 지녀 소박하지만 담대하며 자연과 일체가 되는 고유한 우리 정서를 담고 있다. 과거 높은 분들이 사용했던 청자, 백자의 노련함이나 정밀함과 달리 인위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시켜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이루고자 했던 선조들의 깊은 속내를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막사발에는 무한한 인간애가 녹아있다. 그러나 막사발이 국내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천민들의 개밥그릇이라 불리며 천대받던 막사발. 오히려 일본이나 중국 등 해외에서 각광 받고 우수성을 인정받자 국내에서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도예가 빚재 김용문이 서 있다. 경기도 오산 태생으로 30여년을 막사발에만 매달려온 그는 자신의 고향인 오산에 가마터를 잡고 한국 고유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달려왔다. 이른바 막사발 실크로드는 중국을 넘어 실크로드의 시작점인 터키까지 매료시켰다. 현재 터키의 하제태페 대학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인 김용문은 한국과 터키를 오가며, 국제막사발 축제를 진행 중이다. 본래 막사발 축제의 시작은 작가의 고향인 경기도 오산에서부터였다. 1998년에 시작해 지난 2012년에 15회가 진행될 때까지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예산 속에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그였다. 하지만 지자체의 지원부실과 지역주민의 차가운 무관심은 고향땅을 지켜온 자부심을 무너뜨렸고 결국 타향 땅에 둥지를 틀게 만들었다. 문화는 개인에서 시작하더라도 공동체의 유산으로 확장 될 수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돌중에 옥석을 가리기가 힘든 것인가. 남의 떡이 커 보인다 하지 말고 주변을 살펴보도록 하자. 막사발이 전북 완주에 자리 잡아 명맥을 이어가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경기도의 우수한 문화자원이 타 지역으로 이탈한 것에는 큰 아쉬움이 남는다. 조두호수원미술전시관 학예팀장

[조두호의 이미지 읽기] “생태를 부탁해”

동태를 생태로 속여 팔아가격차 최대 5배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도된 내용이다. 혹시라도 생태탕을 즐겨 드신 분들이 있다면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 근래에 당신이 먹은 생태탕의 대부분이 동태일지도 모르겠다. 항상 생태전문 식당에서 비양심 판매행위를 벌이는 것은 아니겠지만, 생태의 포획물량이 계절에 따라 다르다보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생태와 동태는 글자 하나 차이임에도 작지만 큰 다름이 존재한다. 생태는 명태의 생물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명태를 얼린 것이 동태다. 이 둘은 같은 몸이나 보관 상태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며 맛 또한 다르다. 육류도 얼린 것보다 생고기가 더 부드럽고 육질의 감칠맛을 느낄 수 있지 않던가. 그 미세한 맛의 차이 말이다. 왜 생태나 동태처럼 먹는 음식가지고 운운하냐 하겠지만, 요즘 이 생태란 녀석이 여기저기서 거론되는 뜨거운 이슈이기에 불현듯 가짜 생태탕 뉴스가 떠올랐다. 먹는 생태도 중요하지만 우리 일상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주변을 둘러싼 생태(ecology)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환경을 일컬어 생태라 하는데 자연생태, 도시생태, 사회생태 등 다양한 구조에 병열로 사용된다. 불과 100년 전만해도 자연생태는 그저 인간이 사용하고 소비하는 대상이었다. 인류를 보다 편리하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무한의 오아시스라고 할까. 하지만 지구온난화, 오존층파괴, 자연재해 등 각종 문제가 대두되면서 생태는 한계에 달했고 이제는 공존해야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대상으로 변모했다. 과거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본 자연생태의 역습에 인간은 인류 전체의 존망을 건 전쟁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이미지의 모습은 바로 그 전쟁터. 수원시 장안구 행궁동에 위치한 신풍로와 화서문로의 기존 도로를 들어내고 새로운 보도블록으로 교체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70년대에 지어진 오래된 교회를 배경으로 특화거리 조성이라는 현수막이 크게 내걸렸다. 몇 달 후면 이 곳에서 생태교통 페스티벌이 펼쳐진다고 한다. 9월 한 달간 도보와 자전거를 비롯해 태양력이나 풍력 등 친환경적 에너지로 이동하는 소위 생태교통을 구현해 인간과 자연의 공존의 장을 마련한다는 취지다.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시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자동차에 길들여져 있는 시민들에게 생태교통은 반대로 폭력적일 수 있다.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편리한 교통수단을 포기하라는 것은 머리로는 이해하겠지만, 하필 자신의 동네에 일이 닥칠 경우 맹렬히 반발하는 이중적인 사고를 갖는다. 생태와 인간의 소통을 통한 공존의 모델은 단순히 형식적인 변화를 꾀해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지속적인 교육과 인식개선 사업을 통해 느리지만 지속가능한 방식을 취해야 한다. 그래야만 동태가 아닌 생태가 될 수 있다. 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학예팀장

[조두호의 이미지읽기] 더러운 한 방울

15세기 대항해시대가 열리자 세계는 지금의 지구온난화만큼이나 후끈 달아올랐다. 신대륙 발견, 미지세계의 탐험, 미개문명의 개척 등 다양하고 멋진 말들로 치장한 백인탐험가들은 발길 닿는 곳마다 자신의 깃발을 꽂아댔다. 여러 유럽 국가는 신대륙을 통해 이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다양한 과일과 채소, 값진 금, 은, 보석 광물 등을 확보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이는 본격적으로 백인중심 사회가 비 기독교 세계를 지배하는 혁명적 계기로 작용했다. 대항해시대를 말할 때 신대륙발견 같은 건설적 업적 외에 인류역사상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언급되는 것이 노예시장의 활성화다. 노예제도는 과거부터 존재해왔지만, 인종에 따른 계급분화는 이때부터 정착된 것이 아닐까 싶다. 흑인 대다수와 하층민 신분의 백인으로 이뤄진 노예들은 아메리카대륙에 터를 잡았고 권력의 노예, 인종의 노예로 수세기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 백인도, 흑인도, 아메리카인디언도 아닌 혼혈을 뜻하는 메스티조(mestizo), 뮬라토(mulatto), 잠보(mambo) 등이 탄생했다. 권력의 중심에선 그들의 피부색 혼탁 여부에 따라 신분의 우열을 가렸고 혼혈을 좀 더 세분화하기 위해 물리토, 알비노, 토르나트라스 등 100개도 넘는 단어를 만들었다. 하지만 언어적 구분이 한계점에 다다르자 어느 백인 권력자가 기막힌 인종 구분법을 고안해낸다. 이름하야 한 방울 법칙(one-drop rule)이다. 완전무결한 백인의 피를 더럽힌 단 한 방울의 피가 섞인 자는 백인과 유사한 외모, 피부색을 막론하고 black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색의 권력, 백인 우월주의 정수이자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지배하는 철두철미한 통치방식인 것이다.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권력계층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통치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왔다. 앞서 언급된 시대의 권력이 백인의 자존감 같은 것이라면 지금은 철저히 자본에 의해 권력의 층위가 결정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미지에서 보이는 흑과 백, 빛과 어둠이 나뉜 어느 철거촌의 풍경처럼 말이다. 벽돌로 적층된 벽체에 대충 얹혀진 슬레이트 지붕은 금세 날아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천막을 덮고 버려진 폐타이어를 올려놓지만 자본의 폭풍 앞에서 버틸 재간이 없다. 이미지 속 마을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피난민, 이주민 등 세상의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의 보금자리 한 칸짜리 쪽방에서 기거하는 빈민들의 삶이 투영된 장소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편집되는 빈민의 삶, 한 장의 사진 속 풍경은 대항의 시대를 살았던 노예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고결한 자본에 떨어진 오염되고 더러운 한 방울의 피. 지배와 피지배계층을 나누는 한 방울의 법칙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학예팀장

[조두호의 이미지읽기] 자연을 살리는 디자인

백발의 사내가 힘찬 붓질로 무엇인가를 그려나간다. 하얀 바탕 위에 녹색을 띤 드로잉자국이 선명해지고 있다. 세로로 한 줄을 긋고 상단에서부터 타원형의 도형을 그려나간다. 짐작컨대 이것은 나무줄기와 푸른 잎사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하얀 바탕의 정체가 요상하다. 도화지도 캔버스도 아닌 살아있는 사람의 가슴팍이다. 말끔히 차려입은 청년이 무슨 연유로 바닥에 드러누운 것인가. 이유는 그린디자이너 윤호섭(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과 명예교수)의 그린페인팅 퍼포먼스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그는 오래 입고 헐거워져서 이제는 버려질 처지에 놓인 하얀 티셔츠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푸른 잎사귀, 돌고래, 별 등 다양한 드로잉을 새긴다. 미리 헌 티셔츠를 준비하지 못한 청년이 급한 마음에 착용한 상의에 직접 드로잉을 받게 된 것이다. 윤 교수를 만난 것은 따뜻한 봄날 오후다. 오래된 야구 모자와 흰 티셔츠를 착용한 그는 수염조차 정리되지 않아 삐죽삐죽 튀어나온 자연인 자체였다. 교수이자 세계적 인지도를 지닌 디자이너인 그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행색에서 그가 추구하는 정신과 실천의 일치를 느낄 수 있다. 그는 거의 자가용을 타지 않는다. 가능한 거리는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탄다. 먼 거리를 이동할 때만 할 수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뿐만 아니라 버려지는 모든 것들을 활용해 다양한 볼거리와 실용적인 무엇을 만들어낸다. 종이나 플라스틱 폐품을 활용한 디자인 제품이나 광고를 위해 잠시 쓰다 폐기되는 현수막의 천의 재활용 등이 그것이다. 다양한 소재에서 무한한 아이디어를 창출시키고 그곳에 환경의 푸름을 새겨 넣는다. 윤호섭은 국내 그래픽디자인 1세대로 70~80년대에 이미 88올림픽, 대전엑스포, 펩시콜라 한글로고 디자인 등의 대중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후 환경에 대한 관심을 디자인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그린디자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했다. 프로젝트의 비전, 의도, 개념 등이나 선전하고 제품의 상품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호와 사인을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그래픽디자인의 광고적 특성을 생태, 환경, 자연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활용했다. 그는 환경보호와 친자연적인 삶의 실천은 작은 행동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주변을 살피고 약자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자존심을 지키는 것부터라고 말이다. 자신을 보호하고 고집을 지키기 위한 개인적인 자존심이 아닌 지구의 환경, 생태를 아끼고 지키는 것이 진정한 자존심이라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사용하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닌 보존하고 지켜서 후세에 온전히 전달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린페인팅 퍼포먼스, 그렇게 예술은 환경을 지키는 희망의 몸짓이 된다. 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학예팀장

[조두호의 이미지읽기] “위험한 폭탄”

가위손, 배트맨시리즈, 유령신부 등으로 널리 알려진 영화감독 팀 버튼(Timothy Walter Burton, 1958~)의 역사를 다룬 전시가 얼마 전 국내 미술관에서 개최됐다. 대기업의 후원으로 이뤄진 이 전시는 그야말로 人山人海. 미술관 전시 관람에 대해 조용하고 적막한 가운데 홀로 지적감수성을 만끽하는 환상을 가졌다면 진작 버리시길. 이름 하여 블록버스터(Blockbuster)형 전시에서는 말이다. 막대한 제작비용을 들여 만든 거대한 규모의 제작물이거나 수많은 관객을 동원해 엄청난 이윤을 올린 문화콘텐츠를 일컬어 블록버스터라 부른다. 처음 영화계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단어로 단시간 안에 어마어마하게 흥행한 영화를 통칭하기도 한다. 본래 어원은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영국 폭격기에 장착된 위력적인 폭탄을 빗댄 말이다. 시간이 점차 흘러 비교적 대중에게 친숙한 문화콘텐츠인 블록버스터형 콘서트, 뮤지컬 등의 공연이 제작되는가 싶더니 뒤이어 시각예술계도 블록버스터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정적인 전개와 불규칙적인 서사구조를 지닌 난해한 소통방식의 시각예술분야에서 블록버스터 전시가 가능하다니. 의문하는 것도 잠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마치 아이돌 가수의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뜨거운 열기 속의 그것이었다. 들어오고 나가는 관객들이 얽히고 설킨 것도 모자라 비좁은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는 관객들까지 다양하다. 블록버스터 전시는 대부분 대형기획사에 의해 막대한 자금을 들여 기획된다. 국내에서 이미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등 의무교육과정만 이수해도 알만한 서양미술의 거장 전시가 수차례 개최된 바 있는데 대중이 선호하는 친숙한 이미지의 서구 예술가들을 홍보하여 흥행을 거두곤 했다. 이 지점에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대중적 선호도에 의해 만들어진 블록버스터는 미술관이 지니는 교육적 순기능을 저해할 수 있다. 미술관 전시는 예술작품을 보여주는 단순 기능을 넘어 예술품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사회의 창조적인 사고와 창의적 인식을 심어주는데 의미가 있다. 이미 익숙한 서구 미술의 이미지를 단순 나열방식으로 반복 전시하는 것은 또 다른 문화사대주의를 야기할 뿐 더 나은 무엇을 기대할 수 없다. 무작정 블록버스터 전시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구미술이건 전혀 다른 장르의 유명인의 전시이건 동시대 미술관에서 일어나는 예술적 사건들은 지역국가적 특수성을 반영해야하며,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단편일률적일 수 있는 문화적 취향의 다양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폭탄이 떨어진 근방의 모든 생명체가 전멸하는 것처럼 블록버스터는 문화생태계의 파괴자가 될 수 있다. 유의하시길, 블록버스터에는 안전핀이 달려있지 않으니 말이다. 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학예팀장

[조두호의 이미지읽기] ‘하얀 눈을 가진 사내’

파란 눈을 가진 소녀가 있다. 소녀는 고양이, 도깨비, 괴물로 불린다. 얼마 전 TV에 방영된 인기 예능프로그램에 소개된 사연이다. 이제 5살인 소녀는 또래의 아이들과 자유롭게 어울릴 수 없다.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가 소녀와 함께 있기라도 하면 기겁을 하고선 도망친다. 손가락질 하며 괴물이라고, 전염병을 옮긴다고 이야기하는 어른들. 심지어 한 남자는 손가락으로 아이의 눈꺼풀을 뒤집어 내려 눈동자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미 주눅이 들대로 들어버린 아이는 언제부턴가 낯선 사람만 보면 엄마의 등 뒤에 숨는다. 하지만 소녀의 엄마조차도 온전한 방패막이 되어주지 못한다. 엄마는 소녀와 같은 눈을 가진, 선천적으로 멜라닌 색소가 부족해 파란 눈으로 세상에 맞서 살아왔다. 그녀는 결혼 후 가진 아이가 자신을 닮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자신이 경험한 세상의 벽을 아이가 다시 겪지 않게 끔 하고 싶었을 게다. 우연히 접한 가슴 먹먹해지는 사연은 이 사회에 만연한 소수자를 바라보는 인식의 현주소를 꼬집었다. 단지 눈동자의 색이 틀리다는 이유만으로 감수해야하는 차별의 장애물을 개인의 힘으로 넘기에 버거워 보인다. 여기 하얀 눈을 가진 사내가 있다. 사내의 눈동자에는 안개처럼 자욱한 무엇이 가려져있다. 초여름 습한 날씨 탓에 내려온 안개처럼 뿌옇게 가려진 그의 망막은 심각한 질환으로 인해 하얀색으로 변해버렸다. 그의 눈동자는 하얀색이지만,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온통 어둠일 것이다. 짐작한대로 사내는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으로 단 한 번도 시각적인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가 바라본 세상은 크고 작은 소리들과 손으로 만져지는 무수한 촉각적 체험의 결과물이다. 그의 하얀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그것은 적어도 파란 눈의 모녀가 겪은 그것보다 몇 배는 고단했으리라. 모든 장애가 그렇겠지만, 그 중에서 시각을 잃었을 때 포기해야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많다. 어느 휴대폰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볼 수도 없고 어두운 밤이 찬란한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볼 수 없다. 멋들어지고 거창한 말을 집어치우더라도 간단한 여가거리인 영화관을 가는 것도 먼 나라 이야기다. 무수한 시각적 환영과 문자 자막으로 나열된 영화는 다수자인 일반인에게 팝콘을 곁들인 일상이겠지만, 하얀 눈의 사내에게 영화는 듣고 상상하는 것에 그친다. 하얀 눈의 사내는 이제까지 상상에서 그쳤던 영화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시각적 영역이라 믿었던 영화를 시각장애인이 만든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그는 편견과 선입견, 차별로 높은 성을 쌓은 다수자의 사회에게 보란 듯이 반격에 나선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 그의 도전은 어떤 의미에서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 도전의 이름은 손끝 시네마, 사내의 손끝에서 만들어질 영화는 올해 6~7월 중에 공개될 예정이다. 기대하시라. 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학예팀장

[조두호의 이미지 읽기] ‘붉은 쇳덩어리’

적색의 강판이 반복적으로 굴곡져 시선을 따라 곧게 뻗어 있다. 화면상의 높이와 길이로 말미암아 꾀나 거대해 보이는 건물전체를 감싸고 있는 적색으로 도색된 붉은 쇳덩어리의 용도는 무엇일까. 침입자를 막기 위함일까. 외부로 부터의 소음을 막기 위함일까. 아니, 그러기에는 사이사이에 틈이 벌어져 있는데다 대부분의 면이 펀칭으로 뚫려있어 오히려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조차도 못 막을성싶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두께가 3㎝를 넘어서는 붉은 강판의 정체는 바로 에너자이징 알루미늄이라 불리는 외장재이다. 그리고 이것이 감싸고 있는 건물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위치한 레이나 소피아 왕비 미술관(이하 소피아미술관)이다. 소피아 미술관은 스페인의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국립병원을 재생, 활용한 것이다. 자국민뿐 아니라 세계인이 찾는 현대미술관이기도 하다. 스페인이 낳은 예술가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작품 게르니카(1937년作)가 전시되고 있기 때문.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지방의 게르니카라는 시골마을을 독일군 전투기가 폭격해 수많은 인명사고를 낸 사건에 분개한 피카소가 당시의 전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이제는 스페인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작품이 된 게르니카의 인기는 소피아미술관을 게르니카만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도 불리게 한다. 또 근현대미술의 거장인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후안 그리스 등의 작품들이 소장전시되고 있다. 소피아미술관은 건축 역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공공시설물 공간재생의 긍정적 사례로 프랑스의 오르세이미술관(기존 기차역)이나 영국의 테이트모던뮤지엄(기존 화력발전소)과 함께 거론된다. 그리고 최근 기존의 건축과 새로운 신관을 잊는 증축공사가 완료됐다. 디자인을 맡은 이는 프랑스의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 1945~)로 리움미술관(서울시 한남동)의 건축으로 국내에서도 유명하다. 그는 돌로 이루어진 기존의 소피아미술관에 쇠, 유리, 조명을 더했다. 주변 건물들과의 조화, 시시각각 변화하는 하늘 풍경과의 조화, 그리고 시대를 뛰어넘는 미래지향적 표현양식을 미술관에 입혔다. 그리고 완성된 소피아미술관의 신관에는 붉은색 에너자이징 알루미늄이 입혀졌다. 강렬하면서 도발적인 인상을 풍긴다. 밝은 하늘의 빛과 만나면, 그리고 어두운 밤을 밝히는 프로젝션 조명과 만나면, 마지막으로 공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움직임이 더해지면 공간은 생동감이 넘치는 새로운 장소로 변한다. 별도의 기능이 없고 실용적 측면에서 벗어난 그리고 무지막지한 예산을 소요하는 건물의 외관은 산술적 수치로 따질 수 없는 무한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시키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라. 예술마저도 굳이 실용적일 필요가 있겠는가. 논리적으로 설득되고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곳에 예술이 있었다면, 인류의 진화도 멈췄으리라. 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학예팀장

[조두호의 이미지 읽기] “감동의 가위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세상은 온통 침묵일 것이다. 빛을 느낄 수 없다면 그리고 보이는 것이 없다면 세상은 완전한 어둠 속에 놓이게 된다. 영화 블랙(2005년작릴라 반살리)에 나오는 8살 소녀 미셸의 이야기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소녀는 아무런 규칙도, 질서도 몰랐다. 짐승처럼 몸에 종을 단 소녀는 음식을 주워먹고 걸치고 있는 옷은 찢어버리기 일쑤였다. 결국 부모에게조차 외면 받은 소녀. 모두 포기하는 마음으로 미셸을 장애아동 전문 가정교사 사하이에게 의탁한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부서트리는 미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되는 사하이의 가르침. 여러 번의 아찔한 상황이 지나고 창밖에 시원한 물줄기가 내렸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뛰어나간 미셸은 집 앞 마당에 넘어지면서 온몸을 적시는 소나기를 만지며 나지막이 내뱉는다. 물water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아이가 행한 첫 번째 기적이다. 사하이의 진심어린 교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적. 이제 미셸은 세상 밖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영화는 실존인물인 헬렌 켈러(Helen Keller1880~1968)의 감동실화를 모티브로 한다. 극적구성이나 재미요소 때문에 사실과 다르게 연출한 내용이 다소 있겠지만 영화는 헬렌 켈러의 리얼리티를 부각시키면서 당시 사회에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영화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소녀의 장애를 극복한 이야기를 통해 사회가 장애를 바라보는 곱지 못한 시선과 인식의 문제를 지적했다. 사진에 보이는 소년이 지그시 눈을 감고 가위에 힘을 실어 종이를 자른다. 수원미술전시관에서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진행된 예술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희준이(엄희준 11세화성시 반송동)는 이제 꽤나 여유 있고 숙달된 표정으로 가위질을 한다. 희준이와 처음 만난 날, 소년의 모친은 아이가 이전에 지적장애를 함께 겪으면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했다. 트라우마라도 있는지 칼이나 가위처럼 날카로운 물체는 근처도 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몇 개월이 흘러 아이의 손에는 가위가 들려져있고 무엇인가를 오리고선 이것은 왕관, 앵무새, 나무 등 자신이 표현한 대상에 관해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희준이의 엄마는 아이의 손에 가위가 들려진 것도 신기한데, 무엇을 표현하니 감동적일 뿐이다. 희준이의 가위질과 미셸의 물은 기적의 제스처가 아니다. 장애를 기준으로 정상인 또는 비장애인의 사회가 규정한 경계가 희준이의 작은 변화를 기적으로 보이게끔 종용했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이 외국어를 배우듯 조금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장애인이의 눈에 비친 장애인은 조금 더디고 느릴 뿐이다. 장애인은 더 이상 결핍, 손실된 존재가 아닌 다수의 비장애인의 소통 양식을 빗겨간 소수자일 뿐이다. 장애를 차별하는 것은 백인이 흑인을, 남성이 여성을,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공격하는 전근대적인 발상이다. 과거에 피지배계층이던 흑인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되고, 100년 전까지 유교사회였던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이제 여성이다. 사회의 인식과 고정된 사고의 틀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 헬렌 켈러와 희준이가 더 이상 감동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를 바란다. 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학예팀장

[조두호의 이미지 읽기] “빌바오 구겐하임 이펙트”

스페인 북부 바스크지방에 위치한 빌바오市는 철광석이 풍부한 분지로 둘러싸여 15세기 이래로 철광석을 채굴하는 광산과 제철소, 조선소 등이 성행한 중소 공업도시다. 하지만 1970년대에 이르러 철광, 조선사업 쪽에서 아시아의 약진이 두드러졌고 빌바오의 중심사업인 중공업과 해운 조선업은 이내 사양길을 맞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조선기술 발전이 빌바오의 몰락에 치명타를 가했다는 설득력 있는 의견도 있으니 빌바오에 가신다면 약간의 웃음섞인 주의를 당부한다.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공존하는 스페인에서 가장 자존감이 세기로 유명하다는 바스크지방의 핵심도시인 빌바오의 추락은 당시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실업률은 날로 높아졌고, 경기침체 속에 지역경제는 파산 위기에 이르렀다. 오랜 터널의 끝자락에 서광이 보이기 시작한 것인가. 바스크 지방 정부는 80년대 말, 마침내 회생의 해법을 찾아냈다. 바로 공업도시 빌바오를 문화예술의 도시로 재생시키는 것이다. 도시경관을 디자인하고 유명건축가를 초빙해 획기적인 디자인의 미술관과 공연장 등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미국에 위치한 구겐하임미술관의 분관이다. 1997년에 설립한 것으로 바스크 지방 정부가 한화 2000억이라는 예산을 들여 빌바오에 유치했다. 스페인정부와 유럽연합의 지원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인구 200만이 겨우 넘는 지방 정부가 이 정도 예산을 확보해 미술관을 설립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이 보다 더 놀라운 것은 건축물 형태다. 미술관하면 떠올리던 고전적이고, 육중하며, 네모난 형태감 대신 자유로운 곡선으로 표현된 디자인은 마치 종이를 구부리고 펴서 피운 장미꽃이나 거대한 함선의 모습이다. 외관을 둘러싼 티타늄강판은 주변의 빛을 반사시켜 매시간 변화하는 색을 선사함으로써 건축물 자체가 주는 서사성과 극적 긴장감을 연출했다. 앞, 뒤, 옆 그리고 근거리와 원거리, 어디서 보아도 전혀 다른 형태를 띠는 미술관은 그 안에 들어있는 미술품을 압도하는, 자체가 예술품인 미술관인 것이다. 주변경관과의 어울림을 무시하고도 빌바오의 랜드마크가 돼버린 이기적인 건축물을 보기위해 찾아오는 관광객은 연간 120만 명을 뛰어넘었다. 인구 30만 명이 조금 넘는 소도시에서 구겐하임 효과는 가히 폭발적이다. 이제 빌바오는 세계에서 문화예술로 살아난 도시재생의 긍정적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실험적이고 획기적인 미술관이 지어질 수 있도록 노력한 지방 정부의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도와 시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몰락한 도시를 하늘에서 유독 빛나는 별이 되게 했다. 문화시설을 건립하기 전 반드시 유념해야 할 별이다. 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학예팀장

[조두호의 이미지읽기] 위대한 유산

수원과 용인의 경계에 위치한 광교산(光敎山)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모인 광교천은 수원의 생명수였다. 하지만 여름마다 발생하는 잦은 범람은 큰 골칫거리였고 이에 1796년, 정조 즉위 20년에 수문인 화홍문(華虹門)이 건립됐다. 북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을 관장하여 북수문(北水門)이라 불린 화홍문. 한자의미를 해석하면 찬란한 무지개 문이라 읽혀진다. 하단에 위치한 7개의 석조아치를 아래로 흐르는 물이 따스한 오후 햇살과 만나며 발하는 빛이 화홍문의 무지개를 증명한다. 석조아치 위로는 사람의 통행로가 나있고 한 칸 위에 누각이 서있는데 이것이 화홍문의 본체다.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지며 빼어난 경치를 선사함은 물론, 토목기술과 건축미적 면에서 조선시대 건축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화홍문이 서고 216년이 지난 현재, 전통과 현대를 잇는 새로운 예술적 시도가 펼쳐졌다. 본래 그 자리에 있는 고건축의 외피에 빛으로 만든 옷이 입혀지고, 형형색색의 영상이 극적으로 연출됐다. 미디어 아트의 한 분야인 프로젝션 매핑(Projection Mapping이하 매핑) 방식으로 연출된 이 프로젝트는 수원에서 지난 10월에 열린 화성문화제의 일환으로 기획됐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이라는 고건축과 어우러진 영상은 약 10분여 동안 화홍문의 건축미적 요소와 생태하천인 수원천의 복원과 만인의 행복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펼쳐졌다. 국내 최초로 시도된 고건축 매핑이라 더욱 의미가 깊은, 위대한 유산(작품명)이었다. 매핑은 영상장비인 프로젝터가 투사하는 빔을 통해 대상이나 오브제가 되는 공간에 영상 및 이미지를 구현하는 기술이다. 영화 상영이나 회의실에서 프리젠테이션 화면으로 활용되던 것이 최첨단 기술과 콘텐츠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했다. 매핑은 건축과 미술이 미디어와 만나 창출된 새로운 예술의 형태이다. 최근 UAE에서 전통양식의 모스크에 49대의 프로젝터를 연결해 하나의 작품을 구현했는가 하면 미국 뉴욕의 IAC빌딩의 전체외관을 감싸는 비디오 페스티벌 등 건축과 미술의 한계를 뛰어넘는 스펙터클이 현실 속에서 펼쳐졌다. 국내에서는 여수엑스포와 광주비엔날레 등 대규모 국제 행사와 수원화성에 이어 덕수궁에서 진행된 바 있다. 매핑은 과거 건축과 미술이 갖는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거대하고 화려한 예술의 향연을 눈앞의 시공간에 가져왔다. 매핑의 또 하나의 장점은 이야기, 스토리텔링이다. 건축이 가지는 형식적 특성과 고유의 역사성 그리고 현재의 이야기를 담아냄으로써 휴머니즘을 창출하는 것이다. 단순히 빛을 활용한 조명이나 레이져쇼였다면 절대 담아낼 수 없는 인문학적인 가치 말이다. 매핑은 또 기존 공간에 유기적이고 가변적인 다양한 콘텐츠를 입힐 수 있다. 도시를 바꾸는 힘이 어디에 있겠는가. 거대하고 높다란 건물을 짓고 공격적인 언어로 힘자랑을 하는 시대는 지났다. 콘텐츠의 힘이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에 돌입한 시점에서 새로운 문화의 패러다임을 구축하려한다면 매핑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수석 큐레이터

[조두호의 이미지 읽기] 진짜 리얼리티 쇼

건축공사장 가림막 설치 붐 1994년 매일경제에 올라온 기사제목이다. 당시 신축공사장은 자재의 노상적치나 눈가림식의 엉성한 칸막이 설치 등 각종 안전사고와 미관상의 문제로 골머리를 썩었다. 하지만 몇몇 대기업의 솔선수범으로 산뜻한 철제펜스가 설치되었고 이로 인해 긍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보도이다. 공사장에서 발생하는 소음이나 분재, 낙석 등을 막아주는 가림막이 생겨난 때가 불과 몇 년 사이였다. 건축공사장 울타리 설치 의무화 2002년 연합뉴스에 보도된 기사이다. 서울시내 20m 이상 도로변 건축공사장에 대해 가설 울타리 설치가 의무화된다는 내용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공사장 가림막에 대한 설치기준이 마련되고 의무화된 것이다. 이로부터 8년 후 2010년, 안전펜스의 기능인 낙하물분진 등의 오염과 소음을 방어하는 역할 이외에 또 하나의 역할이 추가된다. 도시경관을 생각한 디자인을 가림막에 입히라는 의무사항이다. 심미적 기능 추가였다. 서울시는 자연소재인 식재나 목재를 활용해 친자연적 이미지를 디자인하라는 구체적 내용을 마련했으며, 이것이 바로 에코형 아트펜스라 불리는 가설 가림막이다. 앞에 보이는 이미지는 수원 광교신도시 소현초등학교 주변 신축현장의 아트펜스다. 임수현이라는 사진작가의 작품인데, 그의 사진 속 풍경은 청정한 자연의 숲이다. 어떠한가. 자연의 초록이미지가 눈을 시원하게 만드는가. 깊은 숨을 들여 마시면 무지막지한 양의 산소가 흡입될 것만 같지 않은가. 환상을 깨고 싶진 않지만 아쉽게도 이곳에서 마신 공기에는 산소보다 공사장 유해먼지가 더 많을거다. 본래 이것은 회색의 아연도금강판으로 만든 가림막인데, 실사인쇄를 통한 씨트지를 접착해 자연의 이미지를 투사한 것일 뿐이다. 순간 이것이 실재하는 초록의 자연이라 믿었다면 미안하다. 이제 살짝 비틀어 대상을 직시해보자. 이것이 착시이건 환영 덩어리이건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초록의 이미지를 접했을 때 자연을 기대하며 실재하는 자연과의 혼동을 겪는다. 자연은 본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편리함과 윤택한 라이프 스타일을 위해 멀쩡한 산을 자르고 땅을 파헤쳐 철을 심고 콘크리트를 부었다. 그리고 도시안의 인간은 사무실 책상 위에 작은 산세베리아를 하나 올려놓고 자연을 떠올린다. 자연은 이제 초록이미지로 대변되는 허상이 돼 버렸다. 가림막에 입혀진 자연의 이미지처럼 초록으로 선전된 친자연적이미지는 대중을 눈뜬장님으로 몰아간다. 친자연적 행위를 역행하는 가운데 이율배반적, 모순적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이 해체해 버린 자연은 인간의 편의에 따라 다시 조립된다. 편집자로서의 인간에게 자연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다. 결국 자연 속의 인간은 인공으로 장식된 초록이미지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그것은 자신의 세계와 현실을 철썩 같이 믿고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이야기, 영화 트루먼 쇼와 묘하게 닮아있다. 극중 주인공(짐 케리)이 작은 세트장에 가둬져 철저히 우롱당한 이야기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수석 큐레이터

[조두호의 이미지 읽기] ‘큐레이션의 시대 : 코드 그린’

큐레이터(Curator)는 수많은 과거의 유물 또는 작품, 현재 시도되는 예술을 연구하고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선별하고 범주화시켜 전시하고 교육하는 일을 한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잡무와 노역은 빼놓을 수 없겠지만, 이것은 사족이고 큐레이터가 진짜 하는 일이 바로 큐레이션(Curation)이다. 정보의 바다에서 쏟아지는 데이터들을 분석하고 필요한 콘텐츠를 추려내는 작업을 통해 주제를 설정하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기획의 영역에 진입한다. 큐레이션은 기획에 있어 선행되는 필수요소이며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 등을 포함한 유행이나 시대성, 문제를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기획을 업으로 하는 필자는 항상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의식적 큐레이션을 진행한다. 이는 습관적 행위로 정리된 카테고리가 때때로 전시 또는 교육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대부분이 동시대의 유행이나 문제성을 인식한데서 출발하는데, 이것이 큐레이션의 시작이라 하겠다. 최근 진행한 큐레이션의 사례는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이 녹색 덩어리의 집합이었다. 그림 속 초록의 식물들은 자연의 잡초나 풀 따위를 실내 공간에 옮겨 설치한 On the hill(최성임 作)이다. 공간의 본래 목적이 인문학강좌나 세미나 등을 위해 쓰이는 시청각실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독특한 설정으로 예술가는 목적을 상실한 공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적용했다. 이 작품은 수원미술전시관에서 열리는 울트라 네이처展에 참여한 작가의 작품으로 전시의 주제를 결정하는 큐레이션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큐레이션을 통한 전시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바로 녹색(Green)이다. 주제를 정했다면 정보를 수집하고 선별작업을 진행해 보자. 먼저, 코드 그린, 녹색세대, 녹색당 선언, 녹색소비, 녹색파워 등의 다양한 관련 서적을 읽어 내려간다. 온통 녹색으로 디자인된 책들이라 눈은 시원했지만 큐레이션을 거친 결론은 쿨(Cool)하지 못하다. 녹색은 환경, 자연, 생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녹색에 반하는 인류의 파괴적 현대물질문명을 경고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청정한 녹색과 반대로 아주 핫(Hot)한 내용들뿐이며 울트라 네이처는 반생태, 반환경적 인간에 대한 권고를 담는 내용으로 정리된다. 큐레이션을 통해 전시의 성격이 결정된 것이다. 녹색 슬로건을 내세운 기업들이 앞다퉈 친환경 자동차, 친환경 주택, 친환경 냉장고 등을 만들고 있다. 친환경 제품을 사용하면 정말로 환경과 친해질 수 있는 것인가. 누군가의 그릇된 큐레이션을 통해 만들어진 녹색의 이미지는 진실을 포장하고 대중의 눈을 가려 버렸다. 여기에 올바른 큐레이션을 적용시켜보자. 녹색 이미지의 선전적 허상에서 벗어나 현실의 자연, 생태, 환경을 온전히 인식해보자는 말이다.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누적된 이산화탄소로 인해 오존층이 파괴되고 지구온난화가 가속화 될 것이며, 갈수록 늘어가는 인구는 40년 후 90억을 돌파해 물 부족, 식량 부족, 연료 부족 등으로 이어질 것이다. 2012년12월, 마야인이 말한 지구 종말의 날이 온다면 모를까 적어도 본인의 큐레이션을 통한 인류의 멸종의 시기는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이런 결론이 따분한가. 굳이 책을 읽지 않고 디지털로 이뤄진 시그널만 뒤져봐도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큐레이션의 시대를 살고 있는 당신의 미래는 어떠한가. 직접 큐레이션 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수석 큐레이터

[조두호의 이미지 읽기] 미술관 랩소디

런던의 뱅크사이드에 위치한 테이트 모던은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공공미술관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컬렉션의 전시, 예술과 타 장르와의 융합을 통한 실험적인 시도가 끊이지 않고 진행되는 곳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울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이 날씨프로젝트로 태양을 미술관의 내부로 들여와 전시하기도 했고, 도리스 살체도(Doris Salcedo)는 미술관 로비공간을 세로로 쪼개서 마치 지진이 나서 갈라진 아스팔트를 연상시키는 전시를 만들기도 했다. 미술관 안에 들어온 태양과 바닥이 쩍쩍 갈라진 미술관이라니 상상은 잘 가지 않겠지만, 거짓말을 덧붙이지 않고 정말 그대로 이루어졌다. 굳이 이 현상에 대해 파고들자면 태양은 많은 양의 조명등과 거울 등을 활용하여 만들었고 갈라진 바닥면은 중장비를 이용해 쪼갰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관에서 이러한 진실이 무엇이 중요하랴. 눈앞에 보이는 시각적인 환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의미를 해석하면 그뿐. 마술사가 마술쇼를 할 때 현란한 손동작에 속지 않으려고 눈알이 빠지도록 속임수의 여부를 살피다가 번번이 당하고 마는 헛수고는 하지말기를 바란다. 런던의 날씨는 1년 중 대부분이 흐리고 비가 온다. 해라도 비추는 날에는 모두들 나와서 태양을 만끽한다. 이내 사라질 햇님을 온몸으로 맞이한다고 할까. 런던 사람들에게 태양은 예술이 갖는 그 어떤 의미보다도 찬란하고 아름다웠으리라. 미술관에 들어온 태양은 거대한 조명이 만들어낸 쇼가 아니라 시민의 바람과 예술가의 창의성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지진이 일어난 바닥은 또 어떤가. 필자도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갑자기 어느 예술가가 미술관의 로비를 세로로 갈라버린다고 하면 선 듯 네, 마음대로 하소서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저번에는 태양을 띠우더니 이번에는 지진이다. 갈라진 틈에 끼어서 다리가 부러지는 사람에 발목을 삐는 사람까지 각종 사고까지 도출시켰다. 멀쩡한 바닥을 부수고 뚫어서 틈을 벌리고 심한 흉터를 남기는 불경한 짓을 저질렀으니 하늘이 노한게다. 한술 더 떠서 미술관이 무슨 놀이동산쯤이라도 되는 줄 아나보다. 미술관 내부의 로비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경사면임을 이용해 달리기 트랙처럼 경계선을 그리고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내려가는 퍼포먼스도 벌어진다. 이 모든 것이 런던의 현대미술관인 테이트 모던에선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관이란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며 위대한 마스터 피스를 보관하며 고요하고 성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발걸음조차 조심스러운 곳이 아니던가. 영국이란 나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앞서 말한 불경을 저질러도 된단 말인가. 정답은 그렇다인 모양이다. 엄밀히 따지면 현대미술관 또는 동시대미술관에서는 그렇다. 박물관이 역사를 보존하고 연구한다면, 현대미술관은 실험적이거나 창의적인 실험을 통해 미래를 개척하는 장소다. 미술관은 더 이상 예술품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에서 벗어나 공공과 소통하고 미래를 열어가는 교두보로서 자리해야한다.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건축가를 모셔다가 삐까뻔쩍한 미술관을 세우던지, 화력발전소를 개조하건 기차역을 개조하건 혹은 돼지우리를 개조하건 간에 현대미술관은 교육의 공간이자 놀이터가 돼야한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허나 확실한건 이 시대에 창조적인 미술관은 반드시 필요하다. 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수석 큐레이터

[조두호의 이미지 읽기] 원더풀 라이프

얼마 전 안산시에 거주하는 어느 작가의 작업실에 방문 했더랬다. 그는 까까머리를 하고선 반갑게 맞아줬는데 무슨 작업을 하냐고 물었더니 그림책을 만든다고 했다. 그림책이라, 동화책 같은 걸 만드는 것인가 갸우뚱 거리기도 잠시, 작가는 내게 차를 마시겠냐고 물어왔다. 의례 커피나 녹차 따위를 내오려나보다 하고 무슨 차가 있나요? 물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골판지에 손수 적은 메뉴판을 건넸다. 누군가 작업실을 찾아오면 무엇을 마실지 고민하는 수고를 덜고자 메뉴판을 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 빼곡히 적힌 차 이름들은 명쾌함 보단 혼란을 가중시켰다. 전문찻집을 가도 접하기 힘든 각종 한방차와 잎차들이 20종 이상 나열되어 있었다. 결국 자존심을 구기며 작가에게 차를 권해달라고 했고 우롱차와 엇비슷한 차를 얻어마셨다. 복잡한 차를 마시면서 작업 이야기를 시작하자, 작가는 그림책을 만든다고 했다. 그림은 두터운 선으로 한 번에 이어 그렸는데 단순하고 명확해서 어린 연령층도 쉽게 이해할 법한 드로잉이다. 내용은 또 어떠한가. 환경문제에 대단한 관심을 보여준 그의 작업 대부분은 인류가 행하는 반환경, 반생태적인 행위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말하고 있었다. 무심코 행하는 인간의 행동양식으로 지구가 망가지고 있는데 작은 노력을 통해 지구를 지키자는 것이 골자다. 이를테면 종이컵은 재생이 되지 않으니 꼭 자신의 컵을 가지고 닦아서 쓰자던지, 사용하고 난 전기제품의 콘센트는 반드시 뽑아야 흡혈전기를 막을 수 있다거나, 가까운 거리는 자동차대신 자전거를 이용하자는 등 수십 가지의 내용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지구온난화가 빙하를 녹이고 해수면을 높이게 되며, 빙하기가 도래해 생명체가 공멸한다는 강렬한 결론이다. 아이들도 보는 책이니 만큼 무서운 미래를 빨간 지구라는 말랑한 단어로 포장해놨지만 성인용 미래는 섬뜩해 보인다. 지구의 안전을 위해서는 일상 속의 편리함을 모조리 집어던져야만 하는 것인가. 앞서 이야기한 실천들은 말은 쉽지만 지키자니 갑갑한 것들뿐이다. 그렇게 안 좋은 거면 만들지를 말 것이지 줬다 빼앗는 것이 더 나쁜 거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60억 인류가 금욕적 생활을 하기는 우주가 통일 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 것이다. 지구가 행복해지는 궁극적인 대책을 내놓겠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찾아 없애면 그만인 법. 원인은 바로 인간, 인간이 적당히 살다가 죽으면 해결될 것이다. 앞서 초록 지구와 빨간 지구를 그렸던 작가는 한 번에 끊김없이 드로잉한 종이 그림을 오려 음양을 만들고 입체적인 삽화 이미지를 완성한다. 그렇게 탄생한 한 페이지를 바라보노라면, 작가는 지구상의 모든 생태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한 부분만 끊어져도 작품은 망가진다. 인간을 포함한 지구 생태계의 먹이사슬 중 한 가지만 잘못되면 상상하기 싫은 세계가 도래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당신의 평화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지구가 아닌 작은 단위에서의 인간, 결국 우리 족속들에 대한 이기주의일 뿐이다. 잘 생각해 보라. 진짜로 잘 사는 삶이 무엇인지.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수석 큐레이터

“나비야, 나비야”

여기 어두운 사진 한 장이 있다. 그 속에서 대각선으로 나뉜 화면이 보인다. 사선 구도로 공간을 나눈 거친 표면의 시멘트 계단은 빛이 들어오는 부분과 먹먹한 어둠의 극적 대비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반다이크스티치(네덜란드 화가의 회화기법)를 연상케 하는 좌측의 계단 아래 거친 질감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겨진 듯하다.계단의 정체는 무엇일까. 여기서 어떤 음침하고 무시무시한 사건이 벌어졌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재개발이 거론될 정도로 지어진지 오래된 한 상가의 지하실을 촬영한 것이다. 연일 신도시와 재개발 등의 단어가 쏟아지는 이 시대에 도심 어디서나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다.비록 그 대상은 평범하지만, 켜켜이 먼지가 쌓였던 지하실이 사진으로 다시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의 과정은 의미있게 볼 만 하다.이 사진은 사회와 도시, 사람 등을 주제로 특정 결과물 대신 작업 과정을 작품화하는 공공예술가 김새벽의 작품 중 일부다. 그는 수년전 뉴타운개발을 놓고 주민들의 찬반대립이 뜨거웠던 안양시 만안구 석수2동의 한 허름한 상가에 들어섰다. 거미줄과 먼지를 걷어내고 판도라의 상자처럼 온갖 재앙과 제악이 뛰쳐나올 것 같은 어두운 지하실 문을 열었다. 어둠은 인간의 시각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퀴퀴한 냄새만이 코끝을 후벼 파며 공간의 기억을 전했다. 그 냄새의 정체는 (주민 이야기에 따르면)버려진 생명체였다. 버려진 공간에는 길 잃은 고양이의 싸늘한 주검이 있었다고 한다. 작가는 저미는 악취와 고양이에 대한 주민의 기억, 지하공간 등을 촬영해 버려지고 외면당한 모든 것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앞서 지하실의 한 단면을 포착한 사진을 비롯해 그 과정을 담은 기록물을 전시하는 것은, 근현대사를 되새기고 미래를 바라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계단 아래 어둠속에서 죽어간 고양이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철저한 계획하에 지어졌지만 새로운 오벨리스크의 등장으로 버려진 지하실과 묘하게 닮아 있다. 안양시는 이 건물이 있던 만안구의 석수 2동을 비롯해 인근 안양 23동, 박달1동 일대 177만6천여㎡를 재정비지구로 지정해 뉴타운 사업을 추진했었다.하지만 개발을 요구하는 시민의 목소리에 사라질 처지에 놓였던 이 건물은 개발을 반대하는 또 다른 시민들에 의해 살아남았다.언론을 통해 간간이 들리는 소식에 따르면 뉴타운 사업은 취소됐어도 재개발을 두고 여전히 주민 반목과 대립이 비슷한 양상이라고 한다.결국 건물은 부서지지 않고 제 모습을 지켰지만 또 다시 주민들의 갈등과 외면속에 길 잃은 고양이를 불렀던 어둠만이 남았다.재개발 여부를 놓고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차갑게 식어버린 지하공간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것은 적막한 고요함 때문만은 아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공간을 쓰다가 낡으면 버리는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한없이 가벼운 인식에 대한 안타까움이다.뉴타운이든 재개발이든, 그 과정에서 철거 대상이든 재생 공간이든, 모든 건물과 공간은 그 외형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의 온기를 바탕으로 역사가 될 소중한 기억과 시간을 담고 있는 무형의 것이 더 큰 가치를 품고 있다. 정책 입안자나 시민, 개발자 등 도시를 공유하는 모든 주체가 이 공간에서 보존하고 복원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자세를 갖춰야 비로서 지하실의 짙은 어둠이 걷힐 듯싶다.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수석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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