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도박 사이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가쓰시카 호쿠사이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

일본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우키요에 화가인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그가 70대에 후지산의 다양한 모습을 그린 ‘후지산 36경’의 첫 작품으로 일본의 정서와 호쿠사이 특유의 화풍이 잘 드러나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호쿠사이는 당시 여러 우키요에 화파에서 다양한 화풍을 배웠고, 중국화와 서양화도 공부하며 자신만의 개성 있는 우키요에 화풍을 확립했다. 이는 그가 매너리즘을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경향은 평생 93번 이사를 하고 30번 이상 호를 바꾼 그의 행동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그림에 미친 화가라 칭하며 죽기 직전까지 그림을 그려 3만 점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우키요에는 장식적인 선명한 색상과 평면적인 구성, 단순하고 검은 윤곽선 등으로 가부키 배우나 명소 등의 세속적인 주제를 그린 풍속화로 주로 목판화로 제작돼 저가로 대량 생산됐다. 대중적인 쉽게 소비되던 우키요에를 호쿠사이는 독특한 자신만의 화풍을 담은 예술로 승화시켰다.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는 우키요에 기법과 서양의 기법을 접목시킨 최초의 작품으로 가나가와의 바다에 몰아치는 거대한 파도를 그렸다. 원근법을 도입하여 입체적이며, 흩날리는 물방울까지 세밀하게 묘사된 파도는 화면을 압도하며 몰아치고 있고 파도의 끝은 쇠스랑처럼 그려져 위압감을 더한다. 또한 일본 판화에서 처음으로 서양의 청색 안료인 프러시안블루를 사용해 파도를 표현했다. 파도 사이에 풍랑에 휩쓸린 세척의 배가 있는데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뱃사공들은 생존을 위해 몸을 바닥에 붙이고 있어 압도적인 자연의 힘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그 뒤로 원경에는 파도보다 작은 후지산이 보인다. 작품은 일본에서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일본을 상징하게 됐다. 반 고흐, 모네, 드가, 르누아르, 등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이 연작에 속하는 판화를 소장했고,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는 이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어 교향시 ‘바다’를 작곡하는 등 많은 인상주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줬다.

[최문영의 그림산책] 조속(趙涑) ‘노수서작도 (老樹棲鵲圖)’

‘노수서작도’는 조선 중기에 활동한 문인서화가이자 금석학자인 조속의 대표작 중 하나다. 조속은 부친이 광해군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후 인조반정에 가담해 공을 세웠으나 공을 세운 자에게 주던 칭호인 훈명을 거부하고 지방관직에 나아갔다. 그는 지조가 높고 평생을 청빈하고 공정하게 살아 칭송받았으며 김제군수를 지낼 때 선정을 베풀어 암행어사가 임금께 고해 표리일습을 하사받기도 했다. 그는 끼니를 잇기 힘들 정도의 가난에도 괘념치 않았으며 고금의 명화와 명필을 수집하고 경치 좋은 곳을 보면 풍경을 그리는 것을 낙으로 살았다. 서화감식에도 탁월했으며 우리나라 역대 금석과 명적을 수집한 ‘금석청완’을 만들어 우리나라 금석학의 토대를 다지기도 했다. 조속은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시서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그림은 산수, 매죽, 영모를 잘 그렸다. 특히 수묵화조화에서 한국적이고 개성적인 화풍을 형성해 조선 중기 화조화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노수서작도는 그의 이러한 명성과 화풍상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그림은 활처럼 휘어진 가지 위에 앉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쌍의 까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화면의 구성요소들이 화면 좌측 하단 모서리에서 우측 상단 모서리로 이어지는 사선구도로 구성돼 있으면서도 나무의 곁가지들이 여백으로 뻗어 있어 안정감을 느끼게 해준다. 모자이크와 같이 세모꼴로 반복된 나뭇잎은 명나라 화조화가 임량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성글고 까칠한 붓질과 도안적인 형태들, 윤기 없는 묵법을 통한 담담한 색감은 문인의 기품과 조속의 특색 있는 화풍이 잘 느껴진다. 조속의 화풍은 조선 전기의 화풍과는 다른 새로운 문기 짙은 그림을 창출했고 이러한 화풍은 그의 아들인 문인화가 조지운을 비롯해 전충효, 이함, 이하영 등의 화가에게 이어졌다.

[최문영의 그림산책] 김식(金埴) ‘우도(牛圖)’

‘우도’는 조선 중기 소 그림의 대가인 김식의 대표작 중 하나로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를 그린 김시의 손자이다. 그는 가법을 이어 산수, 인물, 영모 등에 능통하여 인조 13년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 어진 제작에 참여했다. 김식은 소 그림이 특히 뛰어나 명성을 얻었고 그가 묘사한 소는 조선 중기의 전형이 됐다. 김식의 화풍은 할아버지 김시가 유행을 이끈 절파화풍과 영모화풍을 토대로 간결한 산수를 곁들여 그렸다. 소재의 표현에는 윤곽선이 없는 몰골법이나 바탕에 물을 먼저 칠하고 마르기 전에 붓으로 그려 번지듯 칠하는 선염법 등을 구사하여 전반적으로 필법보다 묵법에 중점을 둔 특색 있는 화풍을 보여준다. ‘우도’를 보면 큰 나무 아래 그늘에서 송아지와 어미소의 평온한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송아지는 젖을 먹고 있으며, 어미소는 고개를 기울인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어미 소는 뿔이 까맣고 길어 우리나라의 소가 아닌 중국 강남 지방의 물소임을 알 수 있다. 소의 몸은 선염법으로 음영으로만 간결하게 묘사하였고 눈에는 하얀 테두리를 그려 순박한 느낌을 준다. 또한 뿔과 꼬리털, 발굽 등을 농묵으로 표현하여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화면의 우측에는 몰골법으로 단순하게 표현된 삼각형 모양의 산들이 있다. ‘우도’는 경물이 좌측에 집중되어 있고 우측에 여백을 두어 절파 특유의 변각 구도로 구성하였으며, 흑백의 대비와 인물 영모 등이 중심이 된 소경화인 점에서도 절파화풍의 특징이 드러난다. 또한 조선 초 ‘모견도’를 그린 이암의 화풍에서부터 17세기까지 이어진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정취가 느껴지는 영모화풍은 한국 영모화의 특징으로 ‘우도’에서도 서정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화풍을 통해 ‘우도’는 관서나 도인이 없지만 김식의 진작임을 알 수 있다.

[최문영의 그림산책] 김시(金禔)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

‘동자견려도’는 16세기 후반의 조선 화단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화가 중 한 명인 김시의 대표작으로 그는 산수 인물, 우마, 화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줘 당시 최립의 시문, 한호의 글씨, 김시의 그림을 일컬어 삼절(三絶)이라 불렸다. 김시는 좌의정을 지낸 아버지 김안로가 권력 남용으로 사약을 받고 그로 인해 벼슬길이 막혀 독서와 서화에 몰두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도 뛰어난 실력으로 잠시 도화서 별제의 자리에서 궁중의 그림 그리는 일에 참여했을 정도로 명성이 높고 실력이 뛰어났다. 퇴계 이황은 ‘퇴계집’에서 김시의 그림에 대한 찬문을 썼고 ‘자화상’으로 익숙한 문인화가 윤두서도 김시를 안견에 버금가는 화가라 평했다. 동자견려도는 김시의 뛰어난 묘사력이 잘 나타나는 작품으로 해조묘로 표현된 나무는 조선 초기의 화풍이 엿보이며 부벽준으로 대담하게 표현된 바위와 주봉, 흑백 대비가 뚜렷한 묵법 리듬감 있는 윤곽선 등에서 절파 화풍의 특징이 드러나고 있다. 구도를 보면 바위와 소나무, 주봉이 좌측에 배치된 변각구도이며 근경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근경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개울 위의 통나무 다리를 사이에 두고 건너지 않으려고 버티는 나귀와 고삐를 안간힘을 쓰며 당기고 있는 동자의 생동감 있고 익살스러운 모습이다. 그 앞에는 농묵으로 처리된 바위가 있으며 그 위로 나뭇가지를 게의 발처럼 날카롭게 그리는 해조묘법이 사용된 소나무가 율동감 있게 구부러져 뒤에 보이는 주봉까지 치솟아 물안개 자욱하게 깔린 중경의 여백을 메우고 있다. 그 뒤에 비스듬히 솟아 있는 주봉은 흑백 대비가 뚜렷한 묵법과 도끼로 팬 나무 표면과 같이 바위를 표현하는 부벽준을 사용해 묘사했다. 김시는 조선 초기 안견파 화풍을 계승하는 동시에 가장 먼저 절파 화풍을 도입하며 이후 유행하는 조선 중기 절파 산수화의 새로운 흐름을 연 선구적인 화가로 미술사적 의미를 가진다.

[최문영의 그림산책] 이암(李巖)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

이암(李巖)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 ‘화조구자도’는 조선 전기 영모화조도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모견도’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암의 걸작이다. 그는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증손으로 정5품 두성령을 지낸 선비화가이다. 당시 이암은 새와 동물을 소재로 하는 그림인 영모도에서 탁월한 솜씨로 유명했으며, 인물화에도 뛰어나 중종의 어진을 제작하였다. 이암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강아지들의 순진무구한 모습과 아름다운 화조의 배경으로 한국적 정취를 자아내며 평온하고 정감 어린 분위기를 연출하는 독자적 화풍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화풍이 잘 드러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화조구자도’이다. ‘화조구자도’는 화사한 봄날에 작은 꽃나무에 앉아 있는 한 쌍의 새 그리고 그곳으로 날아드는 나비와 꿀벌, 그 밑에서 따스한 햇볕 즐기고 있는 세 마리의 강아지들을 그린 작품으로 조화롭게 배치된 소재와 자연스러운 화면 구성으로 평온한 봄날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화면을 보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검은 강아지는 흥미로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곳을 응시하고 있으며, 그 뒤에 있는 누렁이는 앞발에 얼굴을 괴고 곤히 잠들어 있다. 그 앞에 있는 하얀 강아지는 꼬리를 길게 늘이고 방아깨비를 입에 문 채 장난을 치고 있다. 강아지들 뒤에는 꽃나무가 있으며 왼쪽으로 뻗치다 우측으로 꺾인 나뭇가지에는 두 마리의 새가 앉아 있는데 이들의 시선은 꽃나무로 날아오는 검은 나비에게 향하고 있다. 꽃나무 밑과 화면 좌측 하단의 바위는 조선의 고유 준법인 단선점준으로 표현되었고 화면의 우측 상단에는 ‘鼎(정)’ 모양의 도장과 이암의 자인 ‘정중’의 백문방인이 찍혀 있다. 강아지를 즐겨 그린 이암의 작품은 일본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고 19세기 유럽과 미국에도 알려졌다. 특히 이암의 강아지 그림은 17세기 초 일본에 전해져 에도시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당시 유행한 선종화에 등장하는 강아지들은 생김새와 자세까지 이암의 화풍과 유사하다. 이렇듯 이암의 개성 있는 화풍은 조선 시대 영모화풍의 근간이 되었고 일본에도 큰 영향을 줘 한국회화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최문영의 그림산책] 강희안(姜希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고사관수도’는 조선 초 시, 서, 화에 모두 뛰어나 세종 때 안견, 최경과 더불어 삼절로 불린 서화가이자 명문 사대부인 강희안의 대표작이다. 강희안은 세종이 이모부일 정도의 지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나 다양한 관직을 성공적으로 역임해 관료로도 활약했다. 전서, 예서, 팔분체에서 뛰어난 경지를 보여주어 글씨로 왕희지와 조맹부에 비견됐으며, 그런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세종이 옥새를 만들 때 전자 쓰는 일을 맡겼다. 강희안은 산수, 인물화 등에 뛰어나 곽희에 견주어졌으며 왕성한 활동으로 당시 화단에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성품이 소박하고 겸손하였으며 그림과 글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 여겨 전해지는 그의 작품은 매우 적다. ‘고사관수도’를 보면 화면의 중심에 있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선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는 덩굴이 드리워진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배경으로 바위 위에 앉아 양손을 교차해 소매에 넣어 바위에 올린 뒤 그 위에 얼굴을 기대어 잔잔하게 흐르는 수면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 있다. 화면의 좌상단의 덩굴 옆에는 강희안의 호인 ‘인재’라고 새긴 백문방인이 찍혀 있다. 암벽과 바위에 보이는 짙은 묵, 진하고 힘 있게 표현된 옷 주름과 윤곽선과 다르게 흰옷과 잔잔한 수면, 충분한 여백을 통해 흑백 대비를 극대화하고 있다. 또한 산수의 조그마한 한 부분을 배경으로 인물을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한 점이나 좌상단에 여백을 많이 준 변각 구도를 사용한 점에서 조선 중기에 유행한 소경산수인물화풍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개성 있고 선구적인 화풍으로 인해 ‘고사관수도’는 그의 진작이 아닐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지만, 그가 중국으로 직접 가서 선진문물을 보고 배웠다는 점과 명문 집안에서 다양한 소장품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선진적 화풍을 이해할 수 있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은 조선 초 화원 화가들이 화단의 중심이던 상황에서 개성 있고 선도적인 화풍으로 당시 화단을 풍성하게 했고 이후 화단에도 큰 영향을 끼쳐 미술사에서 의미가 깊은 작품이다.

[최문영의 그림산책] 범관(范寬) 계산행려도(溪山行旅圖)

‘계산행려도’는 북송대 회화를 대표하는 산수화가 중 한 명인 범관의 대표작이다. 범관은 초기에는 이성과 형호 등 뛰어난 선대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배웠으며, 이후 그림의 이치와 자연의 이치를 융합한 창작 활동을 추구해 자연을 스승으로 삼아 보고 느끼고 그리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종남산과 태화산으로 거처를 옮겨 산수를 감상하고 그리는 일에만 집중했다. 범관 산수화 화풍의 특징은 웅장한 거대 암벽이 물가에 우뚝 솟아 있고 그 산 위에 나무숲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또한 사실적인 바위 표현을 위해 빗방울 모양의 타원형 점을 밀집시키는 우점준을 사용해 화북지방의 황토 암석의 견고한 질감을 잘 표현했다. ‘계산행려도’에는 범관의 그의 대표작답게 화풍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우선 작품을 보면 화면의 중앙에 화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괴량감이 느껴지는 거대한 산이 우뚝 솟아 있어 '거비파'(巨碑派) 산수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산의 암벽에는 우점준을 사용하며, 우점준 사이에 짧은 준선을 가미하여 질감 효과를 극대화했다. 산 아래 협곡에 짙게 드리운 물안개를 깔아 산세의 험함과 깊음을 표현했다. 산꼭대기에는 짙은 묵색 점으로 표현된 수림이 있으며 산의 오른편 깊은 골짜기에는 새하얀 폭포가 수직으로 길게 떨어지고 있어 물안개와 함께 화면에 부드러움을 주고 있다. 화면의 하단에는 바위 언덕들 사이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고 언덕 위에는 세밀하고 정교한 필치로 그려진 고목이 있다. 고목의 나뭇잎은 농담의 조절을 통하여 다양한 잎을 표현해 울창한 느낌을 더한다. 우측 하단의 길에 네 마리의 당나귀가 짐을 지고 그 앞뒤로 사람이 한 명씩 이끌고 가는 모습이 조그마하게 그려져 자연의 압도적 위용이 더욱 잘 느껴진다. 계산행려도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범관의 화풍은 뛰어난 사실주의 산수화로 이후 중국 산수화의 한 전형이 되어 송대뿐 아니라 이후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최문영의 그림산책]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대표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의 대표작이다. 들라크루아는 강렬한 색채와 명암의 대비, 역동적인 구도로 호소력 있고 극적인 화면을 구성하며 신고전주의 회화에 정면으로 도전한 화가다. 이 작품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왕인 샤를 10세가 입헌군주제를 거부하고 왕정체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에 시민들이 반발하며 1830년 7월 27일에 발생한 7월 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혁명 이틀째인 28일 파리에서 진격하고 있는 혁명군의 모습을 그렸다. 화면 중앙의 여신을 중심으로 한 삼각형 구도를 취하고 있으며, 여신은 밝게 그녀를 따르는 시민군은 어둡게 그려 명암의 대비가 잘 드러난다. 또한 진하고 선명한 색채, 인물과 배경의 세밀한 표현 등 화폭에 낭만주의 미술의 정수가 담겨있다. 중앙의 자유의 여신은 프랑스를 상징하는 의인화한 인물인 마리안느로 왼손에는 총을 들고 오른손에는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를 휘날리며 민중을 이끌고 있다. 가슴을 크게 풀어헤친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시민들을 바라보며 희생자들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전 미술에서 우아하고 아름다움을 표방하는 여성상과 달리 힘차고 주도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여신이 바라보는 곳에 검은 실크해트에 검은 정장 상의를 입고 총을 든 부르주아 남성이 있는데, 들라크루아 자신을 그려 넣은 것이다. 그의 뒤에는 칼을 들고 셔츠를 풀어헤친 작업복 복장의 노동자가 있으며 여신의 발 아래에는 혁명의 희생자들과 상처 입고 그녀를 바라보는 인물이 그려져 있어 혁명의 희생을 보여준다. 화면 우측에는 자욱하게 피어 올라오는 연기를 배경으로 양손에 총을 든 어린 소년이 있다. 이렇듯 다양한 계층의 인물을 그려냄으로써 7월 혁명이 사회의 전반적인 지지를 받았음을 드러내고 있다. 들라크루아의 역동적이며 혁신적이었던 화풍은 낭만주의뿐 아니라, 르누아르 쇠라부터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최문영의 그림산책] 안견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는 조선 초기의 화단을 이끌었던 화원 화가 안견에게 안평대군이 꿈에서 도화(桃花)가 만발한 도원을 친구인 박팽년, 신숙주, 최항과 함께 어울려 노닌 것을 이야기해 주자 안견이 3일 만에 꿈의 내용을 화폭에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이다. 몽유도원도에서 안견의 필묵법과 준법 등을 통해 그가 곽희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으며 좌하단에서 우상단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사선 구도로 작품을 구성한 점이나 좌측은 정면에서 바라보는 평원법을 사용했고 우측에는 위에서 바라보는 부감법으로 시점 처리를 해 대비를 주는 등의 안견 고유의 화풍도 잘 나타나고 있다. 화면의 좌측을 보면 현실 세계를 의미하는 익숙한 토산으로 구성돼 있어 우측으로 이어지는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도원으로 가는 길과 대비된다. 좌측 하단부에 두 갈래 길이 있는데 한 길은 복사나무를 따라 이어져 있고 다른 길은 우측의 거대한 바위산으로 휘감듯이 길이 나 동굴로 이어지고 있다. 그 옆으로는 물이 흐르며 운치를 더한다. 다시 그 우측을 보면 도화가 핀 곳에 2단 폭포가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 도화가 만발한 도원향이 펼쳐진다. 도원향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부감법으로 시점을 전환했다. 도화는 선홍색으로 그어졌으며 꽃 사이사이에 금박을 넣었고 잎은 초록의 고운 설채로 그려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나무 등의 경물은 구륵법으로 표현돼 있으며 도원의 우측의 끝에는 자그마한 집이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복사나무 사이와 화면 곳곳에 물안개가 깔려 있어 몽환적인 느낌을 더한다. 몽유도원도에는 그림과 함께 시문이 쓰인 두루마리가 있는데 여기에는 안평대군과 신숙주, 최항, 김종서 등 당대 뛰어난 학자들이 쓴 글이 남아 있어 예술적·문학적 가치는 물론이고 서예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조선 초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오원 장승업 ‘호취도(豪鷲圖)’

‘호취도’는 안견, 김홍도, 정선과 함께 조선 시대 대표하는 화가로 꼽히는 조선 말의 천재 화가 장승업의 대표작 중 하나다. 장승업은 사의적인 문인화풍이 아닌 뛰어난 기교로 그의 감성을 작품에 담아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짜임새 있는 구성과 힘 있는 필법, 강렬한 묵법 등으로 생동감과 활력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장승업은 자신의 예술에 대한 확고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것이 그의 호인 오원에서 드러나는데, 오원은 그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과 같이 본인도 원이라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그러한 자부심은 그의 뛰어난 실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는 산수, 인물, 영모, 화훼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보여줬으며 기명절지도를 창안하기도 했다. 장승업의 작품 중 화조영모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데 섬세하고 생동감 있는 묘사가 특징이다. ‘호취도’는 이런 장승업의 작풍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두 마리의 매가 위아래 대칭되는 위치에 배치돼 작품에 안정감을 준다. 두 매는 날카로운 부리와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깃털이 몰골법으로 표현됐다. 두 마리의 매는 앉아 있는 자세는 완전히 대비된다. 위의 매는 먹이를 노리는 듯 몸을 크게 비틀어 아래를 보고 강렬한 눈빛과 곤두서있는 털로 긴장감이 팽팽하게 느껴진다. 그 나뭇가지도 매와 같은 형태로 뒤틀려져 있다. 그와 반대로 아래가지의 매는 위를 쳐다보고 있으며 털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여유로워 보이며 나뭇가지도 부드럽게 뻗어 나가고 있다. 고목의 줄기와 옆의 바위 역시 몰골법과 적절한 먹의 농담으로 견고함을 느끼게 하며 섬세하게 표현된 나뭇잎과 잔가지, 흰 꽃들은 안정적이고 운치를 느끼게 해 화면을 조화롭게 한다. 또한 절제된 색상 사용으로 매의 기운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 중점을 뒀다. 장승업은 자유분방하며 강렬한 화풍으로 많은 작품을 그렸고 이러한 그의 그림은 암울했던 조선 말기를 찬란하게 빛내었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혜원 신윤복 ‘주유청강(舟遊淸江)’

‘주유청강’은 조선 시대 3대 풍속화가로 꼽히며 미인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의 작품으로 국보 135호인 ‘혜원전신첩’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신윤복은 산수화, 인물화, 영모화 등 전통회화 모든 부분에서 뛰어났으며 자신의 작품에 쓴 화제(畵題)를 통해 유려한 글씨를 보여준다. 신윤복은 뛰어난 그림 실력만큼 개성 있는 소재로 눈길을 끈다. 보수적이던 조선 후기에 양반들의 향락문화와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루었으며,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 그것도 가장 천한 신분이었던 기생을 주요 소재로 삼는 과감함을 보여줬다.  신윤복은 이러한 소재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 담채 바탕에 빨강, 노랑, 파랑 등의 원색을 사용해 선명하고 세련된 화면을 구성했다. 또한 치밀한 배경 묘사와 화면에 담긴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 등을 사실적으로 담아내어 생동감을 부여한다. ‘주유청강’은 양반들이 기생들을 데리고 강에서 뱃놀이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차일을 드리운 나룻배에는 8명이 타고 있다. 배의 가운데 강물에 손을 적시고 있는 여성이 있으며 그 모습을 한 남성이 턱을 괴고 바라보고 있다. 그 뒤에는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남성이 멀찍이 떨어져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 우측에는 대금을 부는 소년이 서 있고 여성의 어깨에 손을 얹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남성이 있다. 뱃머리에는 생황을 연주하는 여성이 앉아 있으며 배의 후미에는 뱃사공이 서서 삿대질에 집중하고 있다. 기생들은 뱃놀이에 어울리는 시원한 푸른색 계열의 치마를 입고 있어 푸른 강물과 함께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그 뒤로는 암벽이 병풍처럼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으며 우측 암벽에는 신윤복이 쓴 화제가 있다. 신윤복의 풍속화는 개성 있는 소재와 화풍으로 풍속화의 영역을 확장하였고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던 조선 후기 다양한 사회상과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클로드 모네 ‘수련이 핀 연못 : 녹색의 조화’

인상주의를 이끈 프랑스의 화가이자 빛과 물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 중 하나다. 모네는 순간 우리의 눈에 포착된 이미지를 그대로 화폭에 담아내는 것을 추구했다. 이러한 그의 작품을 보고 폴 세잔은 ‘모네는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며 찬탄했다. 모네는 1883년 파리에서 서쪽에 위치한 지베르니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지베르니는 센 강을 끼고 있으며 경관이 수려해 모네의 창작욕을 자극했고 그는 과수원이었던 집을 개조해 자신만의 아틀리에를 만들었다. 강의 물을 끌어와 연못을 만들고 버드나무와 수련 등을 심으며 정성을 다해 정원을 가꾸었고 그곳에서 예술작업을 했다. 지베르니에서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많이 제작했는데 대표적인 연작이 200점 이상 그린 ‘수련’ 연작이다. 모네는 연작을 통해 동일한 소재가 대기의 상황, 계절이나 시간에 따라 우리에게 다르게 인식됨을 화폭에 드러냈다. 그가 수련을 좋아해 소재로 삼은 이유는 꽃과 물에 반사된 빛, 수면에 비치는 꽃을 한꺼번에 화폭에 담을 수 있어서였다. 수련 연작 중 하나인 ‘녹색의 조화’는 다른 수련 작품들이 수면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과 달리 그가 사랑한 연못의 모습이 아름답게 묘사돼 있다. 작품의 가운데로 아치형 다리가 가로지르고 있으며 그 밑의 그림자는 짙은 녹색으로 표현했다. 연못의 수면 위에는 분홍색과 흰색의 수련이 떠 있고 물풀들과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나무들이 비치고 있다. 좌상단에는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비치고 있는 버드나무가 늘어져 있고 연못을 둘러싸고 녹음이 우거진 풍경이 묘사돼 있다. 수련은 점묘법으로 식물들도 윤곽선 없이 색채만으로 표현돼 윤곽이 흐릿하게 표현돼 빛을 받는 수면과 수련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하규(夏珪) ‘서호유정도(西湖柳艇圖)’

‘서호유정도(西湖柳艇圖)’는 남송사대가로 칭송받으며 남송 후반 화원 산수화를 이끈 하규의 작품으로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서호의 모습이 그대로 화폭에 담겨 있다. 하규는 남송의 수도인 저장성 항주 출신으로 인물화와 산수화 모두 다 뛰어나 영종에게 금대를 하사받고 화원의 대조가 되어 당시 화단을 책임졌다. 하규는 같은 시기 화원에서 활약한 마원과 함께 마하파라 불렸는데 이는 둘 다 이당의 화풍을 기반으로 한쪽 모서리에 치우치게 경물을 배치하는 일각구도의 사용, 여백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필묵을 간략화하는 등의 유사한 화풍을 보였기 때문이다. 단 하규는 마원과 달리 필선이 자유롭고 농담을 잘 사용하여 세련미가 있으며 서정성이 강하다. ‘서호유정도’는 항주 서쪽에 있는 거대 호수인 서호의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서호는 중국의 미인 서시처럼 아름답다 하여 이름 지어졌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찬양한 호수이며 현재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중국 최고의 관광지이다. 이렇듯 아름답고 평화로운 봄날의 서호를 광활한 풍경을 보기에 적합한 평원법으로 시원스럽게 그렸다. 화면의 중앙에는 제방에 심어져 있는 버드나무가 한들거리며 늘어져 있고 곳곳에는 복숭아꽃이 피어 봄날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버드나무는 진하고 촘촘하게 그려졌지만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그 사이로 두 사람이 가마를 타고 유람하고 있으며 하인들이 찬합들의 물건을 메고 뒤따르고 있다. 그 아래 호숫가에는 가옥들과 정박 된 배들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고 그 안 사이사이에 인물들의 생활상이 그려져 생동감을 더한다. 호수 위에는 작은 배 2척이 오가고 있다. 화면의 상단에는 담묵으로 표현한 하늘이 그려져 있는데 흰 구름과 좀 더 진하게 표현된 물안개를 통하여 강남의 습한 기후를 화면에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의 재미있는 점은 하규 화풍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 점과 그의 낙관이 없는 점이다. 또한 작품의 상단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제화와 어인이 있어 눈길이 간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 산책] 이당(李唐) ‘만학송풍도(萬壑松風圖)’

만학송풍도는 중국 북송 말 남송초의 산수화의 대가이자 남송 사대 화가 중 으뜸으로 추앙받는 화원화가 이당의 걸작이다. 이당의 화풍은 북송대와 남송대로 구분할 수 있는데, 북송 대 화풍은 복고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남송 대 화풍은 독창성이 드러난다. 만학송풍도는 그가 북송의 화원에 있을 때 그린 작품으로 복고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이러한 성향은 이 작품이 수묵산수가 아닌 짙은 청록산수로 이사훈의 영향을 받았는 점과 우뚝 솟은 거대 바위와 산꼭대기의 빽빽한 수림, 암석의 모양 등에서 범관과 형호 화법의 영향 받은 점에서 드러난다. 만학송풍도는 처음으로 부벽준이 사용된 작품으로 화면의 중앙에 형세가 험준한 큰 바위산이 있고 그 좌우로 크고 작은 바위산과 봉우리들이 있다. 암석의 단단한 질감을 부벽준으로 표현하였고 윤곽선을 진하게 그려 산세의 웅장함이 잘 느껴진다. 가운데 바위산 바로 왼편의 산봉우리 안에는 관지가 남아 있어 이당의 진적임을 알 수 있다. 바위산 사이로 은은하게 연운이 깔려 작품에 서정성을 추가하였고, 화면의 하단 전경에는 소나무들이 서너 그루씩 서로 교차하며 어우러져 있으며 그 우측에는 산길이 산비탈을 따라 산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당의 화풍은 이후 산수화사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는 그의 작품이 특출나기도 했지만, 금나라에 의해 북송 황제의 소장 작품이 모두 약탈당하여 남송의 화가들이 공부를 위해서 이당의 작품으로 임모한 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로 인하여 마원, 하규, 유송년도 그의 작품을 임모하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했고 조맹부, 원사대가 명사대가들 모두 이당을 찬양하며 익혔다. 명대에는 오파 절파 모두에 영향을 끼치며 당시 화단의 주류화풍이 되었고 남송 말 승려들을 통해 일본 교토에 이당 화풍이 전해지며 유행했다. 이렇듯 이당은 부벽준과 강경하고 맹렬한 필선 등으로 이후 거의 모든 산수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웅장하고 종합적인 북송 산수화를 시적 정취가 느껴지는 소품 중심의 화풍을 열어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장 미셸 바스키아 ‘죽음과 합승’

‘죽음과 합승’은 지하철과 거리의 낙서를 예술로 승화시켜 검은 피카소라 찬사를 들은 그라피티 화가인 장 미셸 바스키아가 생의 마지막 해에 남긴 작품이다. 바스키아는 죽음, 인종차별, 흑인 영웅 등의 주제를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담은 충격적이며 도발적인 그림으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담론을 제시했다. 바스키아는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과도 매우 친해 워홀의 스튜디오인 팩토리에 들어가 예술적 관점을 더 확장하기도 했다. 그는 1987년 앤디 워홀의 사망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아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마약에 중독돼 다음 해에 2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바닥에서 시작해 짧은 시간에 성공해 천재로 살다 떠난 극적인 그의 삶은 영화화되기도 했다. ‘죽음과 합승’은 열광적이고 다채로운 색상과 풍부한 구도로 그려진 바스키아의 전작들과는 다르게 단순하고 명료하게 그려졌지만, 그의 핵심 주제인 죽음은 여실히 표현하고 있다. 화면의 가운데는 네 발로 걸어가는 해골 위에 검은 피부의 남성이 타고 있으며, 그 남성의 얼굴은 얽혀 있는 원으로 그려졌고 오른 다리는 윤곽선으로 양팔은 움직임을 표현하는 듯한 선으로 묘사돼 추상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네 발로 걷는 해골은 X자로 그려진 눈으로 관객을 무심하게 응시하고 있다. 또한 배경의 금색은 엄숙한 종교화 같은 느낌을 주며 평면적인 인물들은 아프리카의 암벽화 같은 느낌을 준다. 죽음과 합승은 바스키아가 사랑한 르네상스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질투의 두 가지 알레고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질투의 두 가지 알레고리’는 네 발로 걷는 해골 위에 탄 여성을 그린 드로잉으로 ‘죽음과 합승’과 해골의 모습 및 화면이 삼각형의 구도로 구성된 점이 동일하다. 그는 짧은 예술 활동 안에서 큰 예술적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너무나 개성 있는 작품과 주제로 인해 많은 기관에서 외면했다. 하지만 사회를 관조하며 작업한 바스키아의 작품들은 1980년대 미국의 미술계를 드러내고 있다. 최문영 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The Scream’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절규’는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대표작으로 현재까지 매우 사랑받는 작품이다. 절규는 오늘날에도 광고부터 시작하여 만화, 이모티콘 등 다양한 매체에서 그대로 쓰이거나 패러디되고 있다. 이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는 누구나 살면서 느끼는 삶 속의 심리적 긴장감이 잘 묻어나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뭉크는 신경증과 우울증을 앓았는데 그 원인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나를 폐병으로 잃고 자신의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증상이 자신의 예술 활동에 촉매가 된다고 생각하여 공포, 절망, 고독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작품에 드러내었다. ‘절규’는 뭉크가 두 친구와 교외에서 산책 중 직접 체험한 것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산책 중에 노을이 지는 것을 보고 그것이 불꽃과 피로 느껴지며 신경증이 도졌다. 그에게는 자연의 비명이 들렸고 제자리에 서서 공포에 떨었는데 이때 느낀 감정을 화폭에 생생하게 담아내었다. 화면 중앙에는 공포에 떨었던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남성이 서 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성은 해골과 같은 얼굴 모양으로 두려움에 떨며 자연의 비명을 막으려는 듯 귀를 손으로 막고 절규하고 있다. 남성의 몸이 곡선으로 왜곡되어 그가 느끼고 있는 공포감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뒤의 배경은 사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선의 좌측에는 다리 위로 공포에 떠는 남성의 상황에 동떨어진 듯 걸어가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여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우측에는 중앙 남성과 연결되듯 굽이치는 검푸른 해안선과 붉게 노을 진 하늘이 있다. 당시 예술계에 뭉크가 끼친 영향은 매우 커 노르웨이 정부와 프랑스 정부에게서 훈장을 받았으며 유럽의 모든 중요 도시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또한 인간의 감정을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색채, 율동감이 느껴지는 선으로 드러내어 관람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양식은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김홍도 ‘황묘농접(黃猫弄蝶)’

황묘농접은 강세황이 극찬하고 정조가 총애한 조선 후기의 천재 화가 김홍도의 작품으로 그는 산수, 인물, 화조, 풍속 등 모든 장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김홍도의 작품은 정교하고 세밀한 묘사를 보여주며 한국적 서정과 정감, 해학적 감성을 느끼게 한다. 황묘농접은 여름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정원에서 고양이가 나비와 노는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 화면의 좌측에는 바위와 패랭이꽃이, 우측에는 고양이와 나비가 배치돼 있다. 작품의 중간에는 접힌 자국이 남아 있어 족자로 보관되고 있지만, 원래는 화첩에서 떨어져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작품의 좌측에는 피마준에 절대준을 갈필로 표현한 바위가 그려져 있다. 그 바위 틈에는 보라색과 자주색의 패랭이꽃이 특유의 원형 문양을 뽐내며 활짝 피어 있는 것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바닥의 푸른 풀에서 여름의 정취가 느껴진다. 화면의 우측에는 주황색 털을 가진 고양이와 검은 긴꼬리제비나비가 있는데 고양이의 털과 나비의 무늬가 매우 섬세하고 세밀하게 표현돼 있다. 고양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고개를 돌려 나비를 바라보며 허리를 웅크리고 언제든 발을 뻗어 나비를 잡아보려는 듯한 자세로 있다. 나비는 고양이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꽃을 향해 팔랑거리며 날아들고 있다. 패랭이꽃과 덩치가 큰 긴꼬리제비나비를 통해 작품의 배경이 여름임을 짐작할 수 있다. 황묘농접은 장수를 축원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중국에서는 고양이와 일흔 노인을 칭하는 한자의 발음과 나비와 여든 노인을 칭하는 한자의 발음이 유사해 장수를 기원하는 것으로 자주 같이 그려졌다. 김홍도는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포상으로 발령 받은 연풍 현감 재임 기간 중에 황묘농접을 그렸다. 이는 화면 우측 상단에 ‘벼슬은 현감이고 호는 단원’이라는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고양이가 나비와 노는 모습이 그려진 이 작품에서 김홍도 작품 특유의 따뜻한 감성을 느낄 수 있으며 현재도 많은 민화 작가들에게 그려지고 있는 작품이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클림트의 <키스>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복제되어 사용된 작품 중 하나로 오스트리아 화단을 지배했던 황금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이다. 클림트는 사랑과 성, 죽음의 주제를 관능적이고 화려한 색채로 표현하여 보는 이들을 매혹시켰다. 클림트는 아카데미 예술에 반발하여 자유로운 표현 활동과 미술과 삶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살펴보고자 하는 ‘빈 분리파’를 창시하였다. 그의 이러한 움직임은 젊은 예술, 아르누보라 불렸고 이 운동에 에곤 실레와 같은 많은 예술가가 참여했다. 이후 분리파에 내부 대립이 발생하자 탈퇴하고 금을 사용하는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는데 이 시기가 클림트의 황금의 시대이다. 황금의 시대에는 금박과 다양한 색채를 이용하고 많은 곡선과 장식적 패턴, 상징주의 및 에로티시즘이 작품에 나타난다. 클림트의 <키스>는 종합 예술전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아 전시 종료와 동시에 빈 정부에서 구입하여 그의 명성을 확고히 해주었다. <키스>는 정사각형의 화면의 중앙에 두 남녀가 꽃밭 위에서 무릎을 꿇고 포옹을 한 채로 키스를 하고 있다. 여성의 뺨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키스하는 남성의 머리는 여성을 향해 숙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으며 여성은 눈을 감고 남성에게 몸을 맡기고 있다. 연인은 고개를 크게 젖히고 있고 여성의 손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나 그 외 다른 부분은 평면적으로 구성되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연인은 화려한 황금의 옷을 입고 있다. 남성의 옷에는 직사각형의 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여성의 옷에는 원형의 무늬가 그려져 있어 직선과 곡선의 대비를 느끼게 한다. 그들을 둘러싼 배경은 화려한 금박이 흩뿌려져 있다. 여성의 발이 절벽의 위태로운 위치에 있어 사랑과 죽음이라는 주제가 드러나고 있다. 클림트는 성적인 요소를 양지로 이끌어내며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등 예술에서 섹슈얼리티와 에로티시즘이 나타나게 되는 근간이 되었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조르주 쇠라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신인상주의의 창시자인 프랑스의 화가 조르주 쇠라의 대표적인 작품. 이 작품은 쇠라가 2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으로 60점이 넘는 드로잉과 스케치를 통해 그가 얼마나 이 작품에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1886년에 열린 마지막 <인상주의자 전시회>에 출품하며 알려졌다. 평소에 색채대비, 보색 관계와 고전 작품을 연구해왔던 쇠라는 직감적인 태도로 작업하는 인상주의에 부족함을 느끼고 당시에 개발된 광학 이론과 색채론을 도입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자 했다. 그렇게 등장하게 된 기법이 점묘법이다. 점묘법은 그림을 그릴 때 화폭에 붓질이 아닌 원색의 많은 점으로 형태를 구성하는 기법으로 보색 관계의 점을 찍어 바라보는 관람자의 시선에는 색채가 합쳐져 보이게 했다. 이를 통해서 원색의 순도가 유지되어 강하고 밝은 색채를 느끼게 한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은 점묘법으로 화면을 꼼꼼하게 채웠으며, 원근법과 균형감 있는 구도가 잘 나타나고 있다. 작품을 보면 프랑스 파리의 센 강 주변에 있는 그랑드 자트 섬에서 여유롭게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는 40여 명의 파리 시민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인물들은 얼어붙은 듯 움직임이 보이지 않으며 무표정하게 그려져 있어 배경의 밝은 분위기와 상반되는 차가운 느낌을 준다. 작품 속 인물들의 모습은 당시 파리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나무그늘에서 더위를 피하거나 양산을 쓰고 산책을 즐기고 있다. 화면 전경에는 큰 나무 그늘이 있으며 우측에는 뒷자락이 크게 부푼 치마를 입은 여성이 애완 원숭이를 데리고 남성과 서 있다. 그들 앞에 중산모를 쓰고 그늘에 앉아 있는 남성의 모습은 당시 유행했던 옷차림이다. 인상주의를 새롭게 정립하고 조형의 중요성을 다시 부각시킨 쇠라는 고흐, 고갱 등 당시 화가들뿐 아니라 이후 등장하는 큐비즘이나 추상회화에도 영향을 주며 20세기 회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문영 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장 앙투안 와토 ‘키테라섬의 순례’

〈키테라 섬의 순례〉는 ‘페트 갈랑트(우아한 연회)’ 로코코 회화 양식의 창시자이자 18세기 프랑스의 대표 화가 장 앙투안 와토의 작품으로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작품 제작의 경위와 내력이 알려진 작품이다. 와토는 이 작품으로 당시 미술계를 이끌던 왕립 아카데미에 인정받으며 인기 작가가 되었다. 페트 갈랑트는 우아하게 차려입은 남녀들이 담소를 나누고 춤추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말한다. 신화에 따르면 키테라 섬은 비너스가 바다의 물거품에서 태어난 뒤 처음 발을 디딘 곳으로 사랑의 여신의 섬이다. 이후 키테라는 사랑의 성지로 의미가 확장되어 이 섬을 순례하면 반드시 반려자를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와토는 사랑의 성지인 키테라 섬을 순례하는 젊은 남녀들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다. 〈키테라 섬의 순례〉에서 와토는 즐거워하는 연인들을 아름다운 색채와 부드러운 터치로 세련되게 표현하였다. 화면에는 총 8쌍의 남녀와 배와 사공, 큐피드 등 많은 등장인물을 전경의 완만한 언덕에 따라 인물을 배치하였고 화면 좌우 배경의 명암에 차이를 줘 구성을 탄탄하게 했다. 화면의 우측을 보면 나무들 사이에 이곳이 사랑의 섬 키테라임을 알게 해주는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비너스 조각상이 있다. 그 앞에는 섬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남녀가 앉아 있고 바로 옆에는 여성을 일으켜 세워주고 있는 남성이 있다. 그 옆에는 아쉬운 듯 여운이 남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고 있는 여성이 있고 그 여성의 허리를 감싸 안고 끌어당기는 남성이 있다. 언덕 아래에는 5쌍의 연인들이 팔짱을 끼거나 기대며 즐거운 표정으로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기 위해 금빛 배로 향하고 있다. 그들 머리 위로 비너스의 아들인 큐피드들이 순례자들을 축복하며 하늘을 날아오르고 있다. 〈키테라 섬의 순례〉의 섬세하고 우아한 작풍이 로코코 회화의 방향성을 제시하여 로코코 회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