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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칼럼] MZ 세대의 정치 참여

어떤 문제를 만나거나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역사적 경험에서 시사점을 찾아 해결의 실마리로 삼기 위해서다. 경험 많은 사람들의 조언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들의 경험이 미래의 길라잡이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독서를 하고, 체험을 하면서 경험을 하고, 미래의 자산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역사학자 카(E.H. Carr)가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 정의하듯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매우 유용한 교훈이다. 하지만 새로운 인식과 사유가 필요한 상황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PC가 보급된 것이 불과 20~30년 전이었지만 이제 디지털은 필수 요소가 됐다. 디지털은 아날로그와 구분되는 단순한 매체의 문제가 아니다. 디지털은 새로운 시대를 규정하는 키워드다.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전환이나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의 전환처럼 디지털은 새로운 시대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디지털 환경에서 가치와 사유체계를 형성한다. 마침내 디지털 시대를 대표하는 청년정치가 등장했다. 디지털과 함께 태어난 MZ 세대가 인구의 44%를 차지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공정과 능력이다. 디지털 공간 안에서는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동등한 신분이다. 토론과 논쟁의 장에서는 자기소개, 사회적 경험, 현직이 상관없다. 기업의 회장님도 초등학생과 꼭 같이 아이디로 접속하고 콘텐츠 자체로 평가한다. 자유롭게 의견을 표출하고 능력에 따라 가치를 인정받는다. 디지털 안에서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디지털 인간으로 활동했던 경험과 가치가 사회에 구현되기를 요구한다. 거칠 것 없는 디지털의 수평적 문화의 영향이다. MZ세대는 우리나라가 OECD 가입된 상태와 민주화 이후에 태어난 세대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경험한 세대와는 다른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과거에는 이념, 물질주의,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했다면, 경제위기, 저성장 등을 경험한 이들은 삶의 질이 중요하다. 좋은 미래를 위해서는 공정한 가치가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정 사회를 향한 욕망도 크다. 문재인정부 출현도 공정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열망과 연관됐다. 하지만 새로운 정치세대의 등장은 기성 정치의 공정성에 의문을 품는다.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어느새 특권에 익숙한 기득권이 되어버린 기성 정치를 선거로 판단했다. 정치권은 변화해야 한다. 연장자를 우선으로 하는 정치 행태와 제식구 감싸주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변화에 적응하는 정당이 진정한 의미의 진보정당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의 정치지도자를 체계적으로 키워야 한다. 정치를 경험하고 구체적인 정책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의 공간을 크게 열어야 한다. 세계는 새로운 정치, 청년정치의 무대로 접어들었다. 오스트리아 쿠르츠총리는 10대부터 국민당 활동으로 정치경력을 쌓아 31세에 첫 총리가 됐다.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 역시 청년보수당 출신이다. 또한 능력에 의한 파격적 인사도 청년정치참여에 지렛대가 될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임명된 32세 파키스탄계 리나칸이다. 그녀는 기업규제 프레임을 전환하는 획기적 논문으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청년 정치인의 건강한 성장은 국가의 미래를 위한 투자다. 기성세대의 가치와 경험을 고집하기보다는 디지털 환경을 경험한 새로운 세대의 가치와의 조화를 모색해야 한다. 과거의 정치문법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양극화, 환경, 다문화, 젠더등의 해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성수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유럽아프리카 연구소장

[김성수 칼럼] 불확실성 시대의 확실한 안보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인류 역사에 전쟁이 없었던 시간은 많지 않다. 한반도에 불안정한 평화가 유지되는 이 시간에도 세계 어느 곳에서는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도 2차대전 종전 후 자유국제주의가 나름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역설적으로 불안함이다. 핵의 공포, 미소 양극적 국제체제, 전략무기 개발에 따른 위협 등에 힘입은 것이다. 전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긴 평화는 자유주의적 평화 사상보다는 현실주의적인 국제관계 관리 때문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오늘의 평화는 곧 긴장 속 평화다. 세계 평화에서 한국의 역할을 무엇일까? 안보전략가 바넷(Thomas Barnett)은 전 세계를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 세계화 흐름의 수용 정도에 따른 핵심 지역(코어)과 그 흐름을 거부하는 비통합 국가(갭) 지역으로 구분하고 한국의 교량 역할을 강조했다. 그의 주장은 국제지역체제 차원에서 중견국 지위 획득을 위한 한국 역대 정부의 주요 담론 김영삼 정부 세계화, 노무현 정부 동북아 균형자론, 이명박 정부 지구적 중견국 이론의 토대가 됐다. 미국발 금융위기, 유럽 채무위기, 코로나 펜데믹 등으로 세계화 담론이 약해지는 상황에서 이러한 구분이 얼마나 유효할지는 의문이다. 한국은 미중 양강 구도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바넷식으로 표현하자면 코어-코어 경쟁의 접점일 것이다.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중시해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한미일 안보협력만으로 풀릴 수 없는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안미경중(安美經中) 논란에서도 확인되듯이 한국의 선택은 정치, 경제, 안보 문제가 혼합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선택지가 별로 없는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바이든 행정부의 다자주의적 접근이 반가울 따름이다. 모든 문제를 분리하여 다자협의 채널의 다각화활성화를 통해 복합적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외교 공간을 확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안보협력 태세를 명확히 하되, 정치경제적 성격을 지닌 문제를 순수 군사안보 문제와 분리해 한반도 평화의 지속 효과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쿼드(Quad)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인 쿼드를 태평양과 인도양의 합류 및 연결로 봐야 한다. 쿼드는 지정학적으로 동아프리카 소말리아 해역과 중동의 호르무즈 해협, 아시아의 남중국해 해역을 아우르는 자원 통로다. 쿼드 참여를 군사적 관점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쿼드 성격 규정을 자유로운 통상협력으로 재설정하며 광의의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참여한다면 한미동맹이 지니는 상징적실질적 중요성에 대한 모멘텀을 지속해 나가는 동시에 대양 해군으로 몸집을 바꿔 해양 공공재 확보라는 실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유럽아프리카 연구소장

[김성수 칼럼] 더 나은 진보정치를 원한다면

가치가 시장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다. 승자독식의 1%가 되려고 모두가 경쟁한다. 서로의 성공 확률을 낮추고, 국가 전체로 보면 소중한 자원을 낭비하며 사회적 격차는 심화되는 불나방 효과다. 각 계층의 이익을 보장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정치의 출현이다. 미국은 루즈벨트 대통령 때 소수자 권익 운동을 고리로 민주당의 지지기반을 만들었다. 진보의 무기는 연대, 공동체, 공정의 가치였다. 하지만 산업화와 함께 노동의 분화가 세분화되고 언론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범 대중적인 지지기반 확보가 어려워진다. 사회적 연대도 무너진다. 진보의 대안은? 인문학자 릴라(Mark Lilla)는 정체성 정치로 설명한다. 성별, 성적지향, 직업군, 특정계층 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치세력을 구성해 그들의 이익과 관점을 대변하며 지지를 이끄는 정치를 말한다. 진보 스스로 좁은 정체성에 갇혀 비도덕적 행태에 목소리를 못 내니 비도덕적 동의로 비쳐지게 된다. 결국 보수주의의 반격에 맥을 못 추게 된다. 미국인들은 진보정치의 실망감으로 트럼프를 선택했다. 역사학자 프랭크(Thomas Frank)는 그 이유를 계급배반투표로 설명한다. 소시민일수록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의 강성 페미니즘, 동성애, 불법 체류자, 강성 노조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모습 속에서 사회적 규범과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고 봤다. 불안감은 경제적 이슈보다 문화적 이슈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반이민과 대중적 국수주의 정치는 미국사회를 양분화시켰다. 결국 통합을 내세운 바이든이 46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택됐다. 우리 사회의 진보 모습은 어떨까? 일반적으로 좌파는 진보로, 우파는 보수로 발전되면서 사회 속에 함께하며 서로 앞서기 위해 경쟁한다. 우리 사회의 진보는 냉전시대의 흑백논리와 권위주의 체제 안에서 투쟁하는 모습을 보인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이겨내야 한다고 본다. 진보의 시각은 분명하다. 과거 권위주의 체제와 냉전 시대 패러다임이다. 권위주의 체제가 여전하고, 냉전 청산의 운동권적 사고에 빠져 대화보다는 상대방을 투쟁의 대상으로 사회를 변혁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을 견지한다. 진보정치의 약화는 역설적으로 우리 편 만들기에 있다. 우리 편이라는 좁은 의미의 정체성을 강화하다 보면 점점 더 많은 반대세력을 만들게 된다. 정치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자기편을 설득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설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진보정치의 강화는 통합적이고 넓은 성격의 국가 정체성을 만드는 일에 집중력을 보여야 한다. 정체성은 분열로 가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통합으로 가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성수 한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유럽-아프리카 연구소장

[김성수 칼럼] 병역의 의무, 기억의 의무

군인 여러분 국가를 위해 희생하지 마세요. 저희처럼 버림받습니다. 충격적인 이 말은 천안함 생존자 전우회에서 내 건 문구였다. 군 복무 중인 제자들과 아들이 떠올랐다. 어쩌다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군대는 언제 생겼을까? 기원은 18세기로 올라간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민족국가가 출현한다. 왕정이 무너지고 시민과 자유주의 귀족이 중심이 되는 공화정이 등장했다. 프랑스 시민혁명에 자극받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은 왕정 붕괴에 위협을 느꼈다. 시민혁명의 물결을 차단하고자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전투는 상대가 되지 않아 보였다.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군과 잘 훈련을 받은 용병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시민군의 승리였다. 시민군은 두려움이 없었다. 스스로 세운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볐다. 용병군은 달랐다. 돈이 우선이었다. 프랑스 시민군이 곧 근대적 개념의 군대였다. 병역은 의무다. 요즘에는 신념에 따라 대체 복무도 가능해졌다. 평화주의를 신념으로 집총을 거부하는 것과 국방의 의무를 다한 군인을 무시하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누구에게나 국방의 의무는 두렵고 싫지만,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어려움을 참으며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의무를 다한 것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명과 신체를 희생한 사람에 대해서는 최선의 예우를 다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과 공동체를 지키려다 희생된 사람을 위해서 예우를 다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원칙이다. 미국은 순국참전용사들을 각별하게 예우한다. 미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은 구호처럼 그들이 조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예우를 멈추지 않는다. 전사자가 돌아올 땐 대통령이나 부통령은 열일을 제치고 이들을 맞이한다. 군복이 존경받는 나라가 미국이다. 천안함 생존자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성찰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군 전역자나 희생자에 대한 예우는 몸에 배어 있다. 기차역이든 공항이든 어디든 미국인들은 그들에게 예의를 갖춘다. 운동경기장에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장병을 위한 빈 의자를 하나씩 두고 있다. 비 오는 날에는 빈 의자에 우산을 받치는 분도 있다. 살아 돌아와 가장 좋은 자리에서 경기를 관람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자리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여전히 휴전 중이다. 합리적 선택 이론가 레비(Margaret Levi)는 전시에 위험을 무릅쓰고 입대를 선택 하는 이유는 가치있는 행동이라는 사회적 믿음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순국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는 데 소홀히 한다면 누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겠는가.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수많은 희생의 결과임을 늘 감사해야 한다.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것은 살아남은 우리의 의무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유럽아프리카 연구소 소장

[김성수 칼럼] 여론조사를 믿을 수 있을까?

보궐선거를 앞두고 언론기관들은 앞을 다투어 지지율을 게시한다. 여론조사와 체감온도는 과연 일치할까? 1982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당의 전 LA 시장 톰 브래들리와 공화당의 조지 딕메지안 후보자가 맞붙었다. 시장 재임 시 보여준 탁월한 능력으로 선거전부터 브래들리의 압도적 승리가 예상됐다. 여론조사에서 86%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선은 기정사실이었다. 선거 결과가 발표되기 전 브래들리 당선을 확정하고 결과를 기다린 지역신문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절대 열세였던 딕메지안이 1.2%p 차로 브래들리를 눌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딕메지안 후보 측의 분석이 흥미롭다. 선거를 총괄했던 빌 로버츠는 백인 유권자들의 대답에서 원인을 찾았다. 백인 유권자들이 속으로 딕메지안을 지지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높은 지명도와 능력을 갖춘 흑인 후보자를 부정하는 것이 인종차별자로 보일 수 있어서 응답을 회피했다는 것이다. 이 선거 이후로 유권자들이 자기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절제된 행태를 의미하는 브래들리 효과(Bradley Effect)라는 정치 용어가 생겼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론 조사와 결과가 달랐던 선거 사례가 있었다. 2010년 지방 선거였다. 선거 전에 발생한 북한의 천안함 도발 등으로 선거는 당시 한나라당에게 유리한 분위기였다. 여론조사도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높았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228개 기초단체장 선거구에서 민주당이 91곳을 차지하였고, 한나라당은 83곳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특히 서울에서는 민주당이 25개 구청장 가운데 21개를 차지했다. 안보 위기감이 높아지고, 46명 수병의 희생에 대한 북한 책임론을 질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칫 친북주의자로 더 나가 빨갱이로 낙인찍힐 두려움 때문에 민주당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숨기거나 회피했던 것이다. 2017년 헌정사상 초유의 현직대통령 탄핵이 있었다. 다수 국민의지지 속에 더불어민주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이후 여러 의혹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이 유지됐다. 악재에도 지지율이 유지된 이유는 무엇일까? 인지부조화 때문이었다. 과거를 단죄하며 옹립한 정부에 대한 부정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부정이 된다. 동시에 정부를 부정하는 것은 과거의 모순을 지지하는 적폐세력으로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는 인간은 자신의 신념과 행동의 일치를 보이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기존에 믿고 있던 생각과 모순될 때 합리적이거나 상식적인 선택보다는 부조리하지만, 기존 생각에 부합하는 생각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론조사에서 모호한 입장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반대를 수용하는 태도도 문제다. 반대 의사를 표현하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경우에는 누구든지 좌표를 찍고 무차별에 가까운 공격이 이어진다. 극렬반대자가 아니고서는 입장표명이 어렵다. 정치인들은 여론조사에 너무 취해서는 안 된다. 비난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의 마음을 움츠리게 한다. 진심을 말하지 못하게 한다. 단순다수 대표제 선거제도는 단 한 표로 당락이 결정된다. 노인이 앉아서도 보는 것을 어린아이는 산꼭대기에서도 못 본다라는 나이지리아 속담이 있다. 성숙하며, 낮은 자세에서 국민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네거티브 선거보다는 정책대결 선거가 돼야 하는 이유이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유럽 아프리카연구소 소장

[김성수 칼럼] 승자독식 사회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갈망한다. 정의로운 사회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반칙과 특권 없이 능력으로 평가받는 사회를 떠올린다. 누구든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발전의 동기가 된다. 그렇다면 능력주의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일까? 능력을 기준으로 평가받는 사회를 원하는 것은 근대의 산물이다. 신분이 세습되는 시대에서는 신분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가 규정돼 있었다. 계몽주의가 등장하면서 기반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확대됐고 능력이 신분 변화의 기준이 됐다. 능력주의는 산업화와 함께 신분 상승을 가져왔다. 상상할 수 없는 경제적인 발전 속에서 기회를 잡은 소수가 부를 축적했다. 부의 독점은 사회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평등과 기회를 촉진해야 한다는 현대적 자유주의가 등장하였다. 현대적 자유주의자는 정부가 시장에 적절하게 개입하면서 과도한 부의 집중을 막고, 기회를 균등하게 제도적으로 통제할 것을 주장한다. 정치학자 샌델(Michael Sandel)은 기회의 평등은 단지 정의롭지 못한 사회 구조를 바로 잡으려는 원칙이지만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이상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불평등한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노력 없이는 능력만으로 성공하는 기회를 열어놓은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능력이 우선인 신자유주의는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능력에 기반으로 한 고학력 엘리트사회가 등장했다. 상대적으로 불평등한 구조는 더욱 고착되고 있다. 능력주의는 법률학자 마코비츠(Daniel Markovits)의 주장처럼 또 다른 형태의 세습사회가 만들어졌다. 고학력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부와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자산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한다. 자신들의 위치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혁신적인 기술개발을 통해 자본과 노동생산력까지 독점해 가고 있다. 결국 저소득층과 중산층들은 경제적인 부를 축적할 기회를 상실해가고 있다. 다음 세대로의 경제적 전이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경제적 빈곤의 세습에 대한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불안정한 심리상태는 이성에 의한 사회적 연대보다는 선동가들의 선동과 언술에 끌리게 된다. 능력주의에서 오는 불평등을 정치인의 갈라치기와 선동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독식 구조를 바꿔야 한다. 사회 구성원 누구나 건강하게 참여하고 배우고 즐길 수 있도록 균형적 경쟁으로 바꿔야 한다. 의료와 교육 접근성의 강화이다.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며 자기 창조를 해나갈 수 있는 열린 사회가 돼야 한다. 분노에 의해 선동되지 않고 자신의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자가 강자이다. 선동은 사자와 같다. 아프리카 속담에 사자와 놀지 마라, 그랬다가는 사자 입에 손을 넣게 된다라는 격언이 있다. 자아실현이 중요한 이유이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유럽 아프리카연구소장

[김성수 칼럼]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시위 문화가 법치를 대신할 수 있을까? 광장의 정치가 숨 고르기를 할 때 여론기관에서 보도하는 지지율과 선동이 법치를 대신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책결정 과정에서 국민의 명령이 다른 것보다 중요한 기준이 된다. 주한외신기자 전 협회장이었던 브린(Michael Breen)은 한국인들은 국민의 뜻에 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어떤 쟁점에 대한 대중의 정서가 특정한 임계질량에 이르면 뛰쳐나와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이것을 민심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인사청문회에서 법무장관 후보자의 절차적 정의에 대한 선택적 법치주의 발언처럼 현재 우리 사회는 법치보다 진영이 우선이다. 진영에 속하면 비판해서는 안 되는 성역, 동조해서는 안 되는 금기 영역으로 양분된 결정을 강요받게 된다. 아니면 어느 한 쪽도 선택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정치학자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이러한 현상을 프레임이라고 정의한다. 프레임이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이다. 프레임이 반복되는 선동으로 무의식적 생각을 의식적으로 행동하게 하고, 민심을 형성하게 한다. 프레임을 반복하면서, 집단주의적인 사고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게 된다. 진영 논리로 만들어진 성역은 사회의 근간을 위협할 수 있다. 학문과 양심의 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리이자 희생과 투쟁으로 지켜온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위협할 수 있다. 금기는 사실보다 감정에 치우쳐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어 대중주의 또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로 함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에 의한 통치가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법치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국민주권, 권리와 자유 그리고 복지에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법은 민주적 가치의 종합체이다. 편파적이지도 비이성적이지도 않다. 법이 보호하는 공통적 가치 중 자유가 있다. 언론의 자유, 사상과 종교의 자유 그리고 집회결사의 자유라는 명시적 가치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와 강자 등 누구나 차별 없이 권리와 자유를 누려야 하는 포괄성이 있다. 자유가 동등하게 분배돼야 하는 평등, 기회의 평등, 개인과 소수자에 대한 존중, 다른 의견을 인정하는 관용, 기본적 복지, 거래와 타협에 의한 협력, 국가와 사회 간의 상호신뢰, 그리고 개인 생명과 사유재산 보장에 대한 안보가 적절하게 어우러질 때 민주주의의 근간이 지탱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운명하셨는지 잘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 역시 젊은이들을 선동시켰다는 민심 위반죄로 독살되었다. 바로 대중주의를 등에 업은 법을 통한 통치가 아니라 법에 의한 통치가 사회 운영의 기본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유럽 아프리카연구소 소장

[김성수 칼럼] 제도의 역설

넘쳐나는 규제와 제도로 정신이 없다. 제도는 보편적 기준에 따라 사회적 동의를 통해 만들어진다. 제도는 시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맞지 않은 것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지난 제도를 바로 잡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제도를 바로 잡으려면 신중해야 한다. 제도가 임의로 만들어지거나 필요에 따라 남용될 때는 사회적 합의라는 공정성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사회의 규제와 규칙이 느슨해지면 무질서 현상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사회는 신뢰가 기반이다. 사회적 신뢰를 법제화한 것이 제도이다. 제도는 수평적인 사회 연대를 통해 실현된다. 사회적 연대 없이 임의로 작동하는 제도는 제도로서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어떨까? 사회적 합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어느 분야이든 편이 갈리지 않는 곳이 없다. 이념을 떠나 이제는 임대인과 임차인 등 실생활까지 나누어져 상식이 무너졌다. 어느 한편에 서기를 강요한다. 편을 만들어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지 않으면 밀려날 것 같다.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의 하나는 제도이다. 사회적 합의에 의해 마련되어야 할 제도가 깊이 있는 토론과 심의 과정, 전문가의 자문 없이 만들어져 사회 갈등을 부추긴다. 제도의 역설이다. 제도는 한 번 만들어지면,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그 과정에서 상식을 방해하는 우상이 만들어진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공유지의 비극으로 인위적 규제가 어떻게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는지 설명했다. 어자원이 고갈될 것을 우려한 금어기를 설정해 어족을 보호하고자 한다. 결과는 어떨까. 어민들은 정부가 어족보호를 책임질 것이라는 믿음에 마구잡이로 어자원의 고갈이 더 빨리 나타났다. 자원을 공유하는 어민들이 시행착오 끝에 스스로 체득한 어획량 조절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무너진 것이다. 상호신뢰가 우선시 되는 이유이다. 규제나 제도는 보조수단일 뿐이다. 한번 만들어진 제도는 정해진 경로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볼링공이 거터에 빠지면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 시작된 원인이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인과관계나 어느 시점에서 만들어진 제도가 미래의 선택을 제약하는 것도 경로의존성 때문이다. 균형과 견제가 필요한 이유이다. 항공기는 부기장이 조정할 때보다 기장이 조정할 때 사고 확률이 높다고 한다. 부기장이 조정할 때는 기장이 옆에서 쉽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지만, 기장이 조정할 때는 부기장이 반론을 제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화이론가 헤이르트 호프스테더(Greet Hofstede)는 권력집중의 위험성을 권력거리 현상으로 설명한다. 여당은 권력과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야당은 견제와 협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다수 의견이 존중 되는 것이 민주주의 체제라면 협치는 민주주의의 가치이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사회적 연대가 우선시 돼야 하는 이유이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유럽 아프리카연구소 소장

[김성수 칼럼] 정치인을 향한 팬덤

정치인에 대한 팬덤 현상은 비단 어제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를 좋아하듯 정치인에 대한 팬덤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소속본능을 갖고 태어난다. 가족이 시작이며 그 다음이 또래들이다.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 환경에 따라 소속감을 만들어 간다. 니체(F.W. Nietzsche)는 르상티망(ressentiment: 시기심)이라고 하였다. 조직이 정한 가치 기준에 충성하면서 동질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반대의 가치 기준을 따르며 동질감을 만든다. 이도 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는 우월하고, 다른 사람은 열등하다는 믿음 속에서 우월감에 도취되기도 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시민의 권리와 자유는 자유주의, 시장경제, 합리성, 평등, 세속주의 등의 보편적 가치를 통해 강화되었고, 발전되었다. 보편적 가치는 개인적인 차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인류를 대상으로 한 계몽주의의 이상적 가치였다. 보편적 가치로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를 구조화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구조화된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잊고 순응하면서 살아왔다.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현대인의 마음속에서 보편적 가치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상주의는 보수, 진보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엘리트들의 산물이기에 배타주의가 내재되어 있다. 결국,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취향, 감수성, 가치관뿐만 아니라 반복되는 실수와 책임회피까지 비슷한 정치인을 연예인처럼 우상하는 팬덤을 만들게 된다. 명백한 물질적 대가는 없다. 하지만 나의 정체성이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는 순간 기쁨의 동질감을 갖게 된다. 미국 법률학자 추아(Amy Chua)는 정치적 부족주의라 정의를 내린다. 삶이 피곤한 현대사회에서 보편적 가치의 공유보다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차별의식이 강화되면서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모습에 마음이 끌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잘해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지하기 때문에 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그들을 매개로 자신은 정의롭다는 자기의식을 지속적인 자기증명으로 자존감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동시에 정치인은 계층, 계급, 성, 분파 등의 집단화로 응집력을 강화시킨다. 편 가르기를 통해 위기와 공포로 군중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이성적인 개인과는 다르게 선동에 휘둘리는 군중으로 만든다. 러시아 혁명에서 레닌은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자연 발생적 혁명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한다. 레닌은 전위정당을 이용해 사회를 나누는 갈라치기 신공으로 공포를 표면화시켜 혁명에 성공한다. 이순신 장군의 말씀처럼 공포가 군중에게 용기를 만든 것이다. 결국 선동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죽음도 불사하는 팬덤이 된다. 정치공학은 우파건 좌파건 다르지 않게 편 가르기를 해대고 있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의 팬덤은 사적 공간에서 자기 욕망을 해소할 뿐이다. 그러나 정치적 팬덤은 공적 공간을 변형시켜 사적 욕망을 충족한다. 반대 의견은 가짜뉴스고 반대파는 거대 악이 되고 만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 민주적 규범의 핵심은 상호 존중과 권력의 절제이다. 아프리카 속담에 혼자 가는 것 보다 함께 가야 멀리 간다라는 말이 있다. 길동무가 있어야 힘이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유럽 아프리카연구소 소장

[김성수 칼럼] 소통과 타협의 위기

여러 논란을 야기하는 정부 정책, 코로나19 방역을 매개로 한 선택적 자유권의 침해와 보장, 내로남불인 일부 정치인들의 그릇된 행태와 막말을 꼬집는 풍자청원은 심상치 않은 비판적 기류를 느끼게 한다. 위기는 정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주요 언론 매체 보도 역시 일반인이 느끼는 정서와는 확연히 먼 거리에 있다. 미국 정치학자 이스턴(David Easton)은 복잡한 정치현상을 정치체제의 순환구조로 명료하게 설명했다. 정부 정책이 발효되면 국민은 지지 또는 요구로 정책에 반응하고 정부는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정책을 유지하거나 정책을 조정함으로써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의 기본 논리로 정부와 국민 사이의 소통을 강조한다. 여당은 총선에서의 압승으로 확고한 지지라는 현상에 매몰되어 있다. 대화나 타협 없이 일방통행 중이다. 높았던 지지율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과연 공감하는 정책과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에서 비롯되었을까. 정치현상을 분석하는 여러 이론이 존재한다. 가장 일반적이며 전통적인 이론은 위기상황이 되면 지도자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고, 지지율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정권유지 또는 재창출에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존 이론과 다른 새로운 접근법은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설정한다. 현대사회에서는 경제위기라는 책임소재가 명확한 경우에는 지도자의 신뢰를 하락시켜 선거패배로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천재지변이나 전염병 등의 재난은 책임소재가 불명확하기 때문에 지도자의 신뢰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단지 어떻게 위기상황에 대응하느냐에 따라 정치적 기회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4월15일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중국발 입국자들을 금지하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은 무시되었다. 초기 대응 실패로 코로나19가 확산되었다는 국민적 공분을 사면서 여당의 승리를 예측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투표일이 다가오면서 정부와 여당 지지율까지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의 대응이었다. 과거 정부부터 축적된 감염 매뉴얼에 따라 정부가 적절하게 감염자와 전염원의 통제를 강화하면서 대규모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 결국 정부의 신뢰도와 지지율이 완만하게 상승하는 현상을 보였다. 물론 순간순간 지지율의 위기도 있었지만, 야당 후보자 막말, 외국정부의 무질서한 대응, 외국 감염자 숫자의 증가, 외국매체의 K-방역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4년 전 메르스 사태를 비교 평가하게 되면서 다시 상승곡선을 그렸다. 재난지원금도 지지율 강화에 불을 붙였다. 결과는 정부대응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우리가 모두 알듯 여당의 압승이었다. 과연 코로나19가 확산되지 않았다면 여당이 선거에서 압승할 수 있었을까. 단순다수대표제 방식으로 지역구 득표율을 볼 때 2%대에서 당락이 결정된 결과가 많았다.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의미이다. 승리에 도취하지 말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유주의자 존 로크(John Locke)의 타블라라사가 말하듯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하얀 석판에 그동안 경험하고 학습한 내용을 적어가면서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고자 고민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국민과 소통해야 한다. 그리고 타협해야 한다. 함석헌 선생님께서 남기신 단지 선거란 덜 나쁜 놈을 뽑고 더 나쁜 놈을 도태시키는 과정일 뿐인가라는 말이 생각나는 하루이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유럽 아프리카연구소 소장

[김성수 칼럼] 공정사회의 허상?

지난 9월19일은 제1회 청년의 날이었다. 행사의 주제는 공정이었다. 물론 이 시대의 화두 역시 공정이다.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과거의 반칙과 특권이 난무하던 사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축하문이 있었다. 맞는 말이다. 사회가 공정해지고 특권이 없어지는 사회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다. 반칙과 특권은 누가 만들어 낼까. 청년들이 만들지는 않는다. 반칙과 특권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이 오히려 자기들만의 특권과 반칙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최근 KBS가 의뢰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60% 이상이 공정성이 나아지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응답했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다른 형태의 불공정이 만들어진 것이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국정감사 증인 채택 거부와 원칙도 없는 자기편 옹호가 그 연장선일 것이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러너(Melvin Lerner)는 공정한 세상 가설을 주장했다. 보이지 않는 노력이 언젠가 보상받을 것이라는 믿음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가설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그만큼 노력했다는 논리를 뒤집어 보면 불행한 사람은 그만큼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논리가 되기도 한다. 오히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멸시로 곤경에 처한 사람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 편견, 자업자득, 인과응보 등 을 생산할 수 있다. 살다 보면 노력과 보상은 비례하지 않는 경우를 훨씬 많이 보게 된다. 노력은 항상 보상받는다는 믿음만 있다면,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자기성찰보다는 원망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뿐 아니라 무엇 때문에 노력해야 할까 하는 회의론에도 빠지게 된다. 면죄부가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허구라는 종교개혁의 주장처럼 베버(Max Weber)는 신에게 선택된 인간이라는 증거를 얻으려고 더 열심히 일하는 소명의식이 사후 신과 함께 영생할 수 있다는 동기를 만들어 준다고 했다. 성실하고 근면한 노력의 과정이 축척과 투자라는 선순환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등장하게 된 문화적 배경이었다고 주장한다. 노력에 대한 대가가 명백하게 수직적 관계를 보인다면 과연 노력하는 사람보다 불만에 차 있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노력했는데 왜 성공하지 못하지. 우리 사회는 공정하지 못하며 균등하지 않아라고 하면서, 불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생각의 전환이다. 역설적으로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희망이 있는 것이다. 보상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올 수 있다. 그런 보상은 엄청나게 큰 기쁨을 선사할 것이며 다음 단계로 달려가게 하는 동기부여가 된다. 만약 아무런 준비 없이 달콤한 선동가들의 속삭임처럼 남 탓과 구조 탓만 하면서, 누군가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면 실패한 인생이 될 것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따듯한 위로로 포장된 공정한 세상은 존재하지도 동기도 만들어 주지 않는다. 선동하는 언어들의 향연에 어떻게 느끼느냐에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 당당하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는 감사를 해야 하고 누군가에 분노하기보다는 존중해야 한다. 누군가를 비난하기보다는 사랑할 때 행복을 찾아낼 수 있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Friedrich Hayak)가 주장하듯 불확실성이 동기부여이다. 어려울 때 우리는 가장 많이 성장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남 탓도 하지 말고 절망도 하지 말고 항상 큰 기쁨을 맞이할 자아실현의 준비된 자세가 요구된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유럽 아프리카연구소 소장

[김성수 칼럼] 갈라치기와 아우르기

코로나19 의료계 파업, 의정관계, 장관 아들의 병역문제 등에 관한 가짜뉴스(disinformation)로 세상이 혼란스럽다. 가짜뉴스의 탄생은 생각보다 오래됐다. 여러 경로가 있을 수 있지만 민족국가의 탄생과 함께 시작됐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양치기소년의 이야기처럼 가짜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가짜뉴스가 빠른 시간에 퍼지려면 매체가 필요하다. 과거 문명세계의 정보는 독점적이었다. 소수 성직자 그리고 귀족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라틴어로 특권층만이 소통하며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했다. 많은 사람이 동시에 정보를 접하게 된 것은 인쇄기의 발명 이후였다. 인쇄기의 발명으로 정보는 라틴어의 독점적 정보를 공용언어의 다수 정보로 만들었다.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종교혁명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라틴어로 이뤄진 성경을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했고 틴데일이 영어로 번역했다. 어려운 라틴어를 대신해 지역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공유하면서 문자 해독력이 급격히 증가했다. 사람들 간의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우리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주장하는 상상의 공동체라는 민족의식이 형성됐다. 1678년 영국 성공회 사제인 옷츠(Titus Oates)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뉴스는 끔찍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옷츠는 교황청이 영국 왕실을 붕괴시키려 한다는 내용의 소책자를 배포하였다. 당시 영국은 종교개혁의 여파로 천주교, 성공회, 장로교 등의 종파적 긴장 관계가 극심했다. 사회적 분열과 불신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옷츠의 뉴스는 기름을 부은 효과가 되었다. 비록 성공회가 영국의 국교로 자리매김했지만 가짜뉴스와 음모론으로 3년 동안 수많은 천주교인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회적 불신과 분열이 옷츠의 가짜뉴스의 필요조건이었다면 인쇄술 발달로 야기된 정보혁명은 가짜뉴스를 확산하는 충분조건이었다. 우리는 왜 가짜뉴스에 빠져들까.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불안한 삶과 불투명한 미래가 주는 불안감 때문이다.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부터 탈출해 생존하기 위한 반응이 심리적 기재가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342년 전 영국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양 진영에서 만들어내는 가짜뉴스로 사회 분열과 불신이 팽배했다. 여론재판과 마녀사냥이 곳곳에서 벌어지며 법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가짜뉴스는 정치지도자들의 선택된 지표와 지원사격으로 왜곡되고 강화된다. 언론 매체와 더불어 SNS, 유튜브, 팟캐스트 등을 통해 빛의 속도로 확산된다. 그리고 다시 정치적 분열로 돌아온다. 불확실하고 답답한 현실에서 명확한 답을 찾고 싶은 마음은 출처나 근원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분노부터 하고 마음속의 불안감을 가짜뉴스로 해소한다. 넘쳐나는 정보는 자기 성찰의 시간을 삭제한다. 남 탓과 구조적 모순을 탓하면서 시공간을 넘나드는 투사로 변신하며 특정세력을 대변하는 세력으로 확대 강화된다. 분석보다는 감정, 합의보다는 갈등, 통합보다는 분열을 앞세우며 보편보다는 특수한 것을 내세우고, 분열을 조장하는 가짜뉴스로 파생되는 양극화를 대체할 방법은 무엇일까. 후설(Edmund Husserl)이 주장한 확신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해보는 중용의 태도인 에포케가 요구된다. 정치지도자들은 가짜뉴스의 필요조건인 사회적 분열을 강화하는 좁은 정체성의 갈라치기 정치가 아니라 통합적이고 넓은 성격의 국가 정체성을 구축하는 아우르기 정치를 지향해야 한다. 필요조건이 상생의 모습으로 변한다면 충분조건인 정보혁명은 사회 신뢰의 선순환 기제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가짜뉴스로 국력을 낭비하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라 기대해 본다. 김성수 한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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