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을 실천한 강재구 소령(1937~1965)은 1937년 7월 26일 인천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1944년 인천소화동국민학교(현 부평동초) 입학 후 1948년 창영국민학교로 전학했다. 6·25 전쟁을 겪은 후 1956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960년 육사 16기로 소위로 임관한다. 그는 1965년 8월 파월 맹호부대에 지원, 수도사단 1연대 10중대장으로 부임했다. 그 해 10월 4일 오전 10시 37분. 강원도 홍천 수류탄 훈련장 교육 진행과정에서 한 훈련병이 수류탄을 놓쳐 병력들이 모여있는 한 가운데로 떨어지자 그는 수류탄을 자신의 몸으로 덮어 수많은 인명을 구하고 순직했다. 육군은 강재구의 군인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가 몸담았던 맹호부대 1연대 3대대를 ‘재구대대’로 명명, 매년 모범중대장을 선발해 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가 순직한 강원도 홍천에는 강재구 추모공원과 기념관이 있으며, 인천에는 그가 졸업한 창영초등학교에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인천시 제공
인천 출신의 미술사가이자 미학자로 한국 미술사 및 미학 연구분야를 개척하고 기틀을 형성한 우현 고유섭 선생(1905~1944)은 1905년 인천 용동에서 태어났다. 고유섭 선생은 열살이 되던 1914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입학했으며, 1925년 경성제대 예과(문과)에 입학 이후 법문학부 철학과(미학 및 미술사 전공)로 진급했다. 그는 1933년 개성 부립박물관장 부임 이후 194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년 간 미술사 연구작업에 주력했다. 진단학보를 비롯한 국내외 학회지와 신문·잡지에 150편에 달하는 연구 논문을 발표했으며 한국 미술과 공예의 역사적 성격을 개괄한 ‘한국미술문화사논총’을 펴내기도 했다. 인천지역에서는 1974년 우현 추모비를 인천자유공원에 세우며 그를 기리는 사업이 시작됐다. 이후 1992년 새얼문화재단에서 고유섭 선생을 제1회 새얼문화대상 수상자로 선정, 인천시립박물관 뒷터에 우현 동상을 건립하는 등 기념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인천시 제공
한국 최초 영세자이자 조선천주교회를 세운 이승훈(1756~1801)은 1756년 서울 남대문 밖 반석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향리는 인천 샛골 평창이씨 집성촌으로 현재 남동구 만수동 일원이다. 그는 1780년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다 서학을 접하게 됐다. 1783년 동지사로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 북경을 방문, 예수회 선교사에게 교리를 배운 뒤 L.그라몽 신부에세 세례를 받아 한국 최초 영세자가 된다. 그의 세례명은 베드로이며 가톨릭 서적과 십자고상, 묵주 등을 가지고 조선에 돌아온다. 1785년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조선천주교회를 창설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이가환, 정약종 등과 함께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고향 인천 샛골로 옮겨져 선영에 모셔졌다. 1981년 천주교 복자로 서품된 후 경기도 천진암으로 이장했으며 현재 그의 가묘는 남동구 만수동 남동정수장 뒷산으로 모셔졌다. 인천시 제공
인천 개항장을 주무대로 활동한 대표적인 조선 상인으로 꼽히는 서상집(1854~1912)은 열강의 상권경쟁 각축장으로 전락한 개항장 내 민족상인 단결을 도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54년 태어난 서상집의 출생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선산이 경기도 김포에 있는 것으로 미뤄 김포군이나 인천 인근 지역으로 추정된다. 미국계 무역회사와 일본, 중국 등 국제네트워크를 익히고 각종 거래과정에서 부를 축적한 서상집은, 인천항 객주 8~90인을 모아 인천신상회사를 설립해 대표로 활동했다. 또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최초 은행인 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 지배인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러일전쟁에 일본이 승리하고 유길준이 귀국하자 1912년 상해로 건너간 서상집은 1912년 사망했다. 그는 경기도 김포시 장기동의 선산에 묻혔다. 인천시 제공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을 남긴 홍진(1877~1946) 선생은 1877년 8월 서울 서소문에서 태어났다. 주로 중국에서 활동한 그를 인천과 관련짓기 위해서는 그의 가문 선영이 인천에 있었다는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그는 1919년 4월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대회를 열었으며, 이후 상해로 망명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주로 법무와 관련된 직을 맡았으며 임시정부 수반을 거쳐 지금의 대통령직과 비슷한 국무령에 올랐다. 1939년 다시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며 1943년 미국과 영국 사이에서 전후 한국을 국제공동관리(신탁통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1946년 2월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비상국민회의 창립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됐지만 고령과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9월 9일 향년 70세로 별세했다. 그는 가문의 선영이 있는 관교동에 안장됐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1984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됐다. 인천시 제공
대한제국 최후의 근대식 군함 광제호의 함장을 지낸 신순성(愼順晟, 1878~1944) 선장은 187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경고등상선학교에서 4년간 근대식 항해교육을 받고 갑종 항해사 자격을 딴 우리나라 최초 항해술사가 됐다. 구한말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일본으로부터 군함을 도입, 나라의 무력을 키운다는 뜻의 양무호로 명명했다. 신순성은 바로 이 군함을 이끌고 1903년 인천항에 닻을 내렸다. 신순성 선장은 대한제국 두번째 군함 광제호 인수도 맡았지만, 광제호는 1910년 치욕의 한일합방조약 공포로 일본상선회사에 팔렸다. 당시 광제호에 걸려있던 태극기를 집에 보관한 신순성 선장은 1917년 가족을 이끌고 인천에 정착, 실습선으로 개조된 광제호 선장으로 계속 근무했다. 1944년 영면한 신순성 선장의 장남은 인천 최초 의학박사인 신태범(1912~2001)선생이다. 신태범 선생은 해방 후 한국기선 취임식이 열리자 선친이 보관하던 광제호 태극기를 일장기와 바꿔달았다. 광제호는 현재 인천개항박물관에 모형으로 전시돼있다. 인천시 제공
인천 강화지역에 은거하며 우리 고유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이룩한 이광사(李匡師) 선생은, 가족의 아픔을 새로운 필법으로 이룬 서예가로 꼽힌다. 1705년에 태어난 이광사 선생은 17세가 되던 1721년 소론파인 부친 예조판서 이진검 노론 4대신 탄핵에 휘말려 밀양으로 유배되는 등 집안이 몰락하며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부친과 모친이 모두 사망한 이후인 1731년 가족을 거느리고 강화로 거처를 옮겨 정제두, 윤순 등에게 글씨를 배웠다. 이때 우리 고유서체인 동국진체를 집대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1755년 소론이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나주괘서사건의 여파로 이광사 선생은 제주, 함경도 부령, 전라도 진도, 신지도 등지로 무려 23년간 유배됐다. 그는 노론과 소론간 당쟁에 희생된 불행한 인물로 기록됐다. 인천시 제공
일제강점기 강화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 유봉진 선생(劉鳳鎭, 1886~1954)은 1886년(고종 23) 강화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 강화 길직교회 권사를 지냈다. 그는 1919년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길상면 온수리 교회에서 신뢰할 수 있는 인사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거사일인 그해 18일 그는 강화읍내 장터에 모인 1만여 명의 군중들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는 강화경찰서와 강화군청을 포위하고 ‘강화군민에게’라는 권유문과 ‘독립선언서’ 등을 배포했으며, 장터 내 종루에 올라 종을 치는 등 격렬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읍내 시위를 주도한 유봉진 선생은 고려산, 장봉도, 마니산 등에 은신하다 일제경찰에 체포돼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은신기간 자신의 수첩에 만세시위 재기를 준비했으나 안타깝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인천시 제공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한글점자인 ‘훈맹정음(訓盲正音)’을 창안,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송암(松庵) 박두성 선생(1888~1963)은 강화군 교동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현재 국립 서울맹(盲)학교 전신인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부임하며 시각장애인 교육에 뛰어들었다. 그는 맹인으로 불리며 사회적 천대를 받던 시각장애인의 사회적응 교육에 관심을 갖고 한글점자 모델개발에 뛰어들어 1926년 11월 마침내 점자 개발을 마쳤다. 세종대왕이 반포한 훈민정음을 본따 훈맹정음이라 이름을 붙였다. 1936년 인천 영화학교 교장에 취임한 그는 일평생 76점의 한글점자 책을 펴내는 등 한글점자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집안에 점자번역기 아연판을 설치해 영면 직전까지 점자 번역일을 그치지 않았다. 그의 묘소는 현재 남동구 수산동 남동구청 옆 공동묘지에 자리하고 있다. 인천시 제공
1936년 8월 25일 자 동아일보 2면에는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이 게재됐다. 그런데 유니폼 속 일장기가 교묘하게 지워진 채 게재돼 신문사 안팎이 발칵 뒤집혔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 숨죽여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통쾌함을 안겨준 일장기 말소사건의 중심에는 당시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이길용(1899~미상)이 있었다. 1899년 8월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이길용은 어린 시절 인천으로 건너와 인천영화학교, 서울 배재학당, 일본 동지사대학에서 수학했다. 1919년 임시정부 비밀문서 배포사건에 연루돼 수감, 1922년 감옥에서 나온 뒤 한동안 동아일보 대전지국 기자로 일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한 정간당하면서 일제에 체포돼 서약서를 쓰기도 했다. 해방 후 이길용은 동아일보 출신들과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동아일보 사업부 차장으로 복귀했다. 6·25 전쟁 발발 후 서울에 잔류했던 그는 그 해 7월 17일 북한군에 연행된 뒤 돌아오지 못했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인천시 제공
일제강점기 인천지역에서 발생한 최초 3·1운동을 주도한 김명진(1900~1965)은 1900년 중구 북성동 1가에서 태어났다. 1916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입학한 김명진은 1919년 3월6일 동맹휴교를 주도, 인천공립상업학교(현재 인천고) 학생들과 인천 도심을 돌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인천공립보통학교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나자 일본경찰은 주도 학생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했다. 김명진은 일제 통신망 단절을 목적으로 동급생 이만용, 박철준 등과 함께 그 해 3월8일 학교에 잠입해 전화선을 절단하고 사무실 전화기를 부숴 외부 통신 차단에 성공했다. 인천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 투쟁은 일제강점기 인천지역 최초의 3·1운동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김명진은 같은해 6월 보안법 등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며 1년6개월 간 옥고를 치뤘다. 1996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인천시 제공
동명왕편, 술을 의인화한 국선생전 등을 남겨 고려시대 최고 문장가로 꼽히는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1168년 경기 여주에서 태어났으며, 여러차례 과거에 낙방한 끝에 1191년 과거에 급제했다. 그는 1219년 계양도호부사로 좌천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13개월 간 부평의 지방관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피난수도 강화도에서 지냈다. 그의 문집에는 계양도호부사로 부임하던 심정을 적은 조강부(祖江賦)가 있다. 또 계양산 주변을 돌며 망해지(亡海志), 초정기(草亭記)를 각각 지었는데, 그의 글에서 묘사된 당시 계양산은 바위틈에서 매우 차고 맑은 물이 나오고, 무성한 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피서하기 좋은 곳이라 했다. 대몽항쟁기 몽고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관리로 활동한 이규보는 최씨 무인 정권에 협조하여 기회주의자란 비난도 들었지만 강화도에 학당을 세워 후학을 가르치며 문신의 본분을 다하기도 했다. 그의 묘소는 현재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다. 인천시 제공
인천 천주교회 본당인 제물포성당 4대 신부를 지낸 에우제니오 드뇌, 한국명 전학준(全學俊, 1873~1949) 신부는 20대의 나이로 인천과 인연을 맺은 인물이다. 그는 인천 답동성당 주임신부, 박문학교 교장으로 48년 이상을 인천에서 보냈다. 1873년 7월 프랑스 웨스트 햄에서 태어난 전 신부는 1896년 12월 천주교 사제서품을 받은 이후 한국에 파견됐다. 인천에서 전 신부의 가장 큰 업적은 교육사업이다. 그는 인천에 둥지를 튼 뒤 1900년 9월 인천박문학교를 설립해 가난한 이들의 기초교육사업에 주력했다. 1909년 사립학교로 정식인가받은 인천항사립박문학교 초대교장으로 취임해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의료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3층으로 된 현대식 혜성병원을 개설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일본인들의 방해에도 꿋꿋히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한 전 신부는 1947년 74세를 일기로 인천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현재 서구 백석동 천주교 인천교구 하늘의 문 묘원에 모셔졌다. 인천시 제공
조선 후기 인천지역을 대표하는 학인(學人)으로 꼽히는 정우량(鄭羽良, 1692~1754)은 인천 문학산 남쪽 동막에서 연일정씨 승지공 정여온의 6세손이자, 예조판서를 지낸 정수기(1664~1752)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학남(鶴南)인데, 이는 그의 집이 학산(문학산) 남쪽에 자리잡은 데서 비롯됐다. 1723년(경종 3년) 문과 급제 후 승정원 가주서로 관직에 나선 정우량은 사간원 정언으로 관직자의 잘못을 서슴없이 지적하며 이름을 드날렸다. 이후 홍문관 부제학과 사원부 대사헌을 거쳐 1749년 우의정에 올랐다. 정우량은 글재주가 뛰어나지만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임금의 뜻에 부합하는 행동으로 통애를 받아 정승에 올랐다는 평가가 많았다. 1754년 그가 죽자 영조는 제사물품과 문충이라는 시호을 내렸다. 조선후기 인천지역은 연일정씨를 비롯한 서인과 소론계 세력이 우세했다. 정우량과 아우 정휘량 형제 모두 정승에 오르면서 권력과 학맥 모두 전성기를 이루었다. 인천시 제공
조선 후기 문인인 김재로(1682~1759)는 청풍김씨 인백파 4세손인 영의정 김구(1605~1704)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재로의 가계는 현재 소래산 아래인 남동구 운영동에서 경기 시흥시 안현동에 이르는 지역을 두고 있다. 1710년 급제한 김재로는 홍문관과 사헌부의 여러 관직을 거치다, 경종2년 연잉군(영조) 대리청정 문제로 노론 4대신을 사형시킨 신임사회에 연루돼 평안도 이산군으로 유배됐다. 그러나 김재로는 영조 즉위 후 복직돼 대사간, 홍문관 제학, 병조판서, 좌의정, 영의정을 지내는 등 50년간 관직에 머물며 영조의 탕평책 등 개혁정치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칠순을 넘긴 1754년 영조에서 면직을 요청, 국왕의 자문역을 맡았다가 1759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그는 영조 개혁정치의 최대 성과인 탕평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 하는데 큰 역할을 맡았다. 그의 묘소는 남동구 운연동 청량산 자락에 있다. 그가 남긴 ‘본말록’, ‘청사일기’ 등은 당시 인천의 여러사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인천시 제공
송암 유경근 선생(1877~1956)은 강화 출신으로 한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바친 독립운동가이자 지역사회 민족정신 함양에 힘쓴 교육운동가이다. 1877년 강화에서 출생한 유경근 선생은 광업에 종사하며 사재를 털어 강화에 광창학교를 설립했다. 전국에 3·1운동이 발발한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부내면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체포되기도 했다. 유경근 선생은 또 3·1운동 직후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에도 가입해 활동했다. 만주 독립군을 모집하는 대동단 활동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유경근 선생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자신의 집이나 학교의 문을 조선총독부가 있는 동쪽, 일본땅이 있는 남쪽으로 내지 않고 찬바람이 부는 북쪽으로 내는 등 투철한 의식을 지켜왔다. 해방 후 김구 선생을 만나는 등 독립운동 주요인사들과 교분을 나누기는 했지만 강화를 크게 벗어난 적은 없다고 한다. 정부는 1990년 고 유경근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인천시 제공
인천 강화에서 미군과 격돌한 신미양요로 순절한 어재연(1823~1871)은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땅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 조선 군인의 본분을 다 했다. 어재연 장군은 1823년 2월 경기도 이천군 율면 산성리에서 태어났다. 18살이 되던 1847년 정시 무과에 급제한 뒤, 부장, 훈련주부, 판관, 총위영 초관, 형조정랑 등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1871년 미국 로저스 함대가 강화도 손돌목 돈대를 포격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하자 어재연은 당시 병이 깊었음에도 금위영 중군으로 임명돼 포군 5초(1초는 125명)를 이끌고 광성보 전장에 나섰다. 로저스 제독의 미 해병에 맞서 어재연은 열악한 무기를 들고 쏟아지는 포탄에도 물러섬 없이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하고 만다. 현재 강화도 광성보에는 어재연과 당시 함께 순절한 동생 어재순, 59명의 병사를 기리는 순절비가 세워져있다. 인천시 제공
일제강점기 인천지역의 대표적 3·1 만세운동을 이끈 심혁성 선생은 1888년 당시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현재 인천시 계양구 장기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번지자, 심혁성 선생은 같은해 3월 24일 오후 당시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의 황어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날 오후 2시께 장이 파하는 시각, 심혁성 선생을 비롯한 600여명이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는 뜻을 표시했다.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가담한 심혁성 선생 등 40여 명은 일본군에 체포돼 면사무소로 연행됐다. 심 선생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으며 재판 기간까지 포함해 1년 3개월의 옥고를 치뤘다. 이후 1953년 12월 별세했다. 인천지역의 대표적인 만세운동으로 평가받는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기리는 기념관은 현재 계양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년 3·1절에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인천시 제공
인천이 배출한 대표적인 정치인인 죽산 조봉암 선생은 1899년 강화에서 태어났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열정적 독립운동을 전개한 조봉암은 1925년 박헌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에 참여하며 검사위원, 만주총국 책임비서 등으로 활약했다. 1945년 8월 15일 민족해방일에 조봉암은 인천에 내려와 치안유지회를 결성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다. 이후 공산주의 노선을 배격한 조봉암은 은 제헌의회에 인천 을구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국회에 입성한 조봉암 선생은 초대 농림부 장관, 2대 국회부의장을 지냈으며 1952년, 1956년 연이어 대통령 선거 출마, 이승만 정권을 위협했다. 결국 이승만 정권 하에 발생한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은 1959년 7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이후 2011년 1월 진보당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대법원은 조봉암에 대해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인천이 낳은 거물 혁명가·정치인인 조봉암의 법적 복권이 이뤄졌다. 인천시 제공
한센인(나병환자)들의 자활을 이끈 ‘보리피리’로 유명한 한하운 시인은 그 자신도 한센병을 앓았다. 1920년 3월 10일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태어난 한하운은 1936년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한센병 확진 판정을 받았다. 세습 지주였던 한하운은 1945년 해방 이후 소련군이 단행한 토지몰수, 아우의 반국가음모활동 연루 등의 일로 함흥을 등졌으며, 1949년, 한센인 70여명과 함께 인천 부평으로 옮겨와 성혜원이라는 요양소를 설립했다. 한하운은 부평에서 거주하며 1955년 자신의 두번째 시집 보리피리, 정본 한하운시집(1964), 나의 슬픈 반생기(1958), 황토길(1960) 등을 잇따라 발표하며 문학인으로써 생을 보냈다. 또 6·25 전쟁 중인 1952년 신명보육원 창설, 1973년 한국가톨릭사회복지협의회를 창설하는 등 한센인들의 자립과 치료를 위해 노력했다. 한하운은 1975년 (당시)인천 북구 십정동의 자택에서 간경화로 사망했다. 전남 고흥 소록도에는 그의 시비가 건립됐다. 인천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