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관직 머문 조선후기 개혁 정치가
1710년 급제한 김재로는 홍문관과 사헌부의 여러 관직을 거치다, 경종2년 연잉군(영조) 대리청정 문제로 노론 4대신을 사형시킨 신임사회에 연루돼 평안도 이산군으로 유배됐다. 그러나 김재로는 영조 즉위 후 복직돼 대사간, 홍문관 제학, 병조판서, 좌의정, 영의정을 지내는 등 50년간 관직에 머물며 영조의 탕평책 등 개혁정치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칠순을 넘긴 1754년 영조에서 면직을 요청, 국왕의 자문역을 맡았다가 1759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그는 영조 개혁정치의 최대 성과인 탕평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 하는데 큰 역할을 맡았다.
그의 묘소는 남동구 운연동 청량산 자락에 있다. 그가 남긴 ‘본말록’, ‘청사일기’ 등은 당시 인천의 여러사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인천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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