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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도시이야기] 국제도시 ‘장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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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라는 것이 커지고 발전하다 보면 이곳저곳의 문화와 산물 혹은 다양한 인종이 모이게 된다. 이른바 국제도시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꽤 많은 국제도시가 존재해왔다.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알렉산드리아나 로마제국의 로마는 물론 중세에도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등이 유럽의 국제도시의 맥을 잇고 있었고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사라센 제국의 바그다드가 이슬람 문명을 내걸고 국제도시로 번성하고 있었다. 아시아 쪽에서도 역시 국제도시는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당나라의 장안이라는 도시였다.

당나라(618~907)의 수도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도시였던 장안은 “새벽 북소리에 사람들 벌써 나다니고 저녁 북소리에도 쉬지를 않네. 산 넘고 바다 건너 만국에서 몰려와 앞 다퉈 황금과 비단을 바친다”라는 당나라 시인 왕정백의 ‘장안도(長安道)’의 한 구절처럼 온 종일 살아있는 도시이자 거대한 도시였다.

실제로 장안성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던 남쪽 외곽지역까지 합하면 당시 국제도시였던 비잔티움의 7배, 바그다드의 약 6.2배 규모였고 전성기의 인구가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하니 과연 대성(大城)이자 오늘날 말하는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였던 셈이다. 게다가 당나라는 한나라 무제 때 만든 실크로드를 통해 외래문명이나 문화 및 기독교 같은 종교까지 개방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장안에 거주하는 외국인도 한때는 5만 명에 이를 정도였으니 당시로서는 그 국제성과 포용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당나라는 한발 앞서갔으며 무엇이든지 포용하면서 점차 강대해져갔으며 국제화됐다. 장안성의 모든 것이 주변의 나라에 영향을 끼쳤다. 신라는 당나라의 관제와 복식을 일부 채용하기도 하였고 일본은 장안을 본 따 헤이안교(平安京) 등의 도시를 만들고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을 가져와 일본의 기모노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른바 당류(唐流)였던 셈이다.

장안은 전한시대부터 수 및 당(唐)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세월을 이어오면서 고대 중국의 명실상부한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도시였다. 특히 당나라 시기의 장안성은 수나라의 개황 2~4년(582~584)에 건설한 대흥성을 계승 발전시켜 북 9천570m, 서 8천470m의 장방형의 성벽 안에 동남 모서리 부분을 돌출시킨 형태로 지어졌으며 북 성벽에 연해 중앙부에는 궁성을 위치시키고 그 남쪽에 정부관청의 집합인 황성을 설치하였다.

그야말로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도시는 완전한 바둑판형으로 구획되었으며 성곽과 방장을 먼저 만들어 놓은 후 주민들을 그 속에 들어가 살게 하는 봉쇄식 방장제를 도입하였다. 주민들은 성 밖에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두 개나 네 개의 방문을 통해서만 오직 주간에만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 거대하고 자유분방한 도시를 관리하기 위해 얼마나 철저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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