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을 당해 임금이 남한산성에 머물면서 백제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에게 제사를 지낸 일을 계기로 1638년 사묘가 세워졌다. 1661년 현 위치로 옮겨진 이후 정조 때 ‘숭렬전’이란 전호(殿號)가 내려졌으며 다른 역대 시조묘에 올리는 격식을 따라 제사를 거행하며 현재까지 그 위치를 지키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역대 시조묘 가운데 숭의전(崇義殿·고려 태조)은 6·25 전쟁 후 1970년대에 복구됐고 숭덕전(崇德殿·신라 박혁거세)과 숭선전(崇善殿·가락국 수로왕)은 19세기 고종 연간에 고쳐졌거나 신축됐다. 반면 남한산성 숭렬전은 17세기 이건한 뒤 지은 건물이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창건 사실이 역사 문헌을 통해 증빙되며 현재까지 원위치를 지키고 제향이 계승되고 있어 역사적·문화사적 가치가 높다. 간결하고 절제된 건축 형식과 구조는 17세기에 건립된 조선시대 사묘의 전형을 따르고 있어 국가지정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헌종이 1827년 태어난 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에 태실을 만들어 태를 안치한 태실과 주변 경관을 그린 작품이다. 헌종이 1834년 즉위한 후 13년이 지난 1847년에야 태실가봉(胎室加封)이 이뤄졌으며 이 그림은 당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태봉도와 달리 지도식 표현이 거의 없고 산수화풍이 많이 가미된 것이 특징이다. 능숙한 필치로 괴량감 넘치는 산봉우리를 표현했고 부드러운 색채로 입체감을 나타냈다. 옅은 청색과 연두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지던 장태(藏胎) 문화를 의례화해 새로 태어나는 왕자녀의 태를 길지(吉地)에 묻는 독특한 안태의례(安胎儀禮)를 정착시킨 조선 왕실의 전통을 보여주는 작품이자 장조의 태실을 그린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역사성·희소성이 돋보인다. 국가유산청 제공
정조의 친위부대였던 장용영(壯勇營)이 주둔한 청사의 본영을 1799, 1801년에 그린 계화(건축화)로, 채색화 1점과 일종의 평면도안인 간가도 2점으로 구성됐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및 고려대 박물관에 각각 소장돼 있다. 장용영은 1793년(정조 17년)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호위부대로 도성 안에 본영(本營), 수원화성에 외영(外營)을 두고 운영됐다. 따라서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은 도성 안(지금의 서울 종로4가 이현궁 터 추정)에 설치된 장용영 본영에 대한 전반적인 현황과 관청의 변화를 기록해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료다. 정확한 축척에 기초한 평면도를 통해 상세한 건물의 배치를 그렸고 정교한 필치로 건축물을 묘사해 당시 장용영을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로써 지금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장용영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 세부 건물의 배치와 기능을 알 수 있게 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국가유산청 제공
화수동에 위치한 도쿄시바우라제작소 사택은 공장의 길 건너편에 있으며 현재 2동이 남아 있다. 한 동은 8호 연립으로 지금까지 주택으로 사용 중이다. 한 동은 10호 연립이었으나 일부가 철거되고 나머지는 어린이집으로 이용 중이다. 건축물대장의 건축 연도는 1943년이고 광복 후인 1956년 이천전기회사에 불하돼 사택으로 이용됐다. 현재 건물의 용도는 사택이다. 인천시 제공
조선을 건국한 태조고황제의 능으로 구리 동구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됐다. 정자각은 제향(祭享•제사)을 지내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인 정전에 2칸의 배위청이 결합한 ‘丁’자형 평면의 건물로 태조가 세상을 떠난 1408년(태종 8년)에 건립됐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정자각의 전형적인 형태를 잘 따르고 있으며 기둥 상부의 익공(翼工) 형식은 18세기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1764년(영조 40년) 중수 당시의 시대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조선의 능침제도 중 정자각의 표준으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큰 건물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만석동 도쿄시바우라제작소 사택은 도쿄시바우라제작소 공장보다 동양방적 공장에 더 가까이 있다. 1947년 항공사진을 통해 사택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단독 사택 4동, 2호 연립 3동, 4호 연립 3동이 확인된다. 2층으로 추정되는 합숙소도 보인다. 합숙소 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일부 사택의 내부에는 화장실을 두지 않아 공동화장실을 이용 중이며 마당까지 건물을 확장하고 확장된 건물의 지붕은 슬래브 형태로 옥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천시 제공
조선 정조 18년(1794년) 건립됐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은 전시용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해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해 조성된 건물이다. 평면은 ‘ㄱ’자형을 기본으로 북측과 동측은 ‘凸’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해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꾸몄으며 조선 헌종 14년(1848년)에 중수,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 수리했다. 주변감시와 지휘라는 군사적 목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시대 정자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정약용 필적 하피첩(丁若鏞 筆蹟 霞帔帖)’은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고 얼마 후 아내 홍씨부인이 바래고 해진 치맛감 여러 폭을 부쳐온 것을 잘라서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구절을 직접 짓고 써준 것이다. 제작연대는 경오년, 즉 1810년(순조 10) 7, 9월로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이 서첩의 수량은 원래 네 첩이었으나 현재 세 첩만 알려져 있다. 현재의 ‘하피첩’ 3첩은 하나가 결락된 셈인데, 각첩 표지에 ‘하피첩’이란 제목은 일부 남아 있으나 그 아래의 ‘첩 순서’는 탈락돼 몇 번째 첩이 없는지를 알 수 있다. ‘하피첩’ 3첩은 그 중 두 첩에 각각 1810년 7월과 1810년 9월의 서문이 있어 강진 유배시절인 1810년 기년작이란 점에 의미가 있다. 현재의 세 첩 중에는 “두 아들에게 경계하는 구절을 지어 써주다(作戒語以遺二子·寫戒子句)”라는 서문이 있어 정약용이 직접 짓고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강진 유배 이후 정약용의 전형적인 행초서풍을 보여주며, 특히 세번째 첩에 실린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는 다른 서첩에서 좀처럼 볼 수 없다. 국가유산청 제공
용유도에는 근대에 조성된 늘목염전과 간척마을염전 등 천일염전이 두 군데 남아 있으나 지금은 늘목염전 일부에서만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천일염전이 조성되기 전에는 용유도와 무의도의 10여곳의 염전에서 염도가 높은 양질의 소금이 생산돼 배에 실려 각처로 팔려 나갔다. 농축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얻는 재래식 소금 제조법에 비해 근대에 도입된 천일염전은 바닷물을 가마솥에 끓여 소금을 만드는 방식보다 생산원가가 적게 들어 근대에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인천시 제공
양평은 잘 보전된 자연환경과 전철, 고속도로 개통 등 교통 접근성 개선으로 안락한 전원 휴양 도시로 주목받으며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유튜브 등 각종 콘텐츠에 은퇴 후 살기 좋은 도시로 1위 제주, 2위 속초, 3위로 양평을 소개하고 있는데 바다를 접하지 않은 내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양평의 인기는 최고라 할 수 있다. 1966년 11만8천697명이던 양평군 인구는 1995년 7만603명까지 감소했고 이후 6번 국도 확장과 전철, 고속도로 개통으로 2010년에는 9만5천833명, 2015년 10만8천810명, 2020년 11만8천810명, 2024년 6월 말 12만7천921명으로 민선 8기가 시작된 2022년 7월 이후 2년 동안 4천261명의 양평 인구가 증가하며 전국 군 단위 인구 수 1위를 기록했다. 인구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출생인구 감소’와 ‘적은 인구 유입 및 전출 증가’로 볼 수 있다. 이에 출산 장려를 통한 인구 증가를 위해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많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양평군도 출산장려금(첫째아 500만원, 둘째아 500만원, 셋째아 1천만원, 넷째아 2천만원) 지급, 첫만남 이용권, 출산장려행사(아기사진공모전, 동요제) 추진 등 출산 장려 문화 조성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 밖에도 양평군은 인구 유입과 전출 방지를 위한 특별한 정책을 병행하고 있다. 민선 8기 시작과 함께 매월 개최하고 있는 ‘양평살이 설명회’는 신규 전입자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에게 쓰레기 배출, 대중교통, 공공기관 이용 정보 등을 비롯해 양평의 역사·문화와 더불어 먼저 전입한 주민의 양평 생활 경험담을 들려주는 유익한 설명회다. 올해는 12개 읍·면에서 ‘찾아가는 매력양평살이 설명회’를 개최해 각 읍·면의 특색을 담은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양평군은 주민과 가장 가까이에서 양평살이를 돕고 있는 이장들에 대해 직무교육을 실시하고 이장 업무 매뉴얼을 만들어 배포했다. 지역 공동체의 리더인 이장들에게 소속감과 적응력을 높여 책임감을 일깨움으로써 선후(先後) 주민이 함께 마을의 화합과 지역공동체 발전의 초석이 되고 있다. 어울림 공동체 지원사업은 금년도 총 43개 공동체가 활발히 활동 중이다. 장수체조, 김치 담그기, 아나바다, 오케스트라 활동 등 연령과 계층을 넘어 선후 주민이 조화롭게 참여하고 있다. 자신이 사는 지역의 사람과 자연, 역사, 문화를 더 알게 되면 자긍심이 생기고 이는 곧 내 고장에 대한 애향심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출산 장려 정책과 양평살이 설명회, 어울림 공동체 지원사업으로 애향심과 정주의식을 키워 인구 유입은 늘리고 전출은 방지하는 양평군의 정책은 인구감소로 지방소멸이 국가적인 화두로 대두되는 요즘 주목할 만한 일임은 확실하다. 민선 8기 절반을 지나 후반기에는 양평~강상 교통소통사업, 양강 사랑 친수공간 조성, 양근강변길 특화거리 조성, 두물머리 국가정원 추진과 고향사랑기금 1호 사업인 추읍산 진달래·철쭉 관광자원화 사업을 비롯해 동부권의 정주 여건 개선과 농촌생활권 활성화를 위한 농촌협약, 채움사업 등 역점사업에 더욱 매진해 지방소멸을 극복하는 양평군을 만들어 갈 것이다.
‘천자문(千字文)’은 석봉 한호(石峰 韓濩·1543~1605)가 서사한 필체를 판하본으로 간행한 목판본이다. 현전하는 유의 초간본이라는 점에서 석봉서체(石峰書體)의 연구에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선조 16년(1583년)에 처음 간행된 이래 왕실, 관아, 사찰, 개인에 의해 여러 차례 간행되면서 조선시대 천자문 판본 가운데 가장 널리 전파돼 초학자의 한자, 글씨 학습에 큰 영향을 줬으며 오늘날 국어학, 서지학, 서예사 연구자료로서의 가치도 크다. 국가유산청 제공
송림동 부영주택은 송림토지구획정리지구의 132, 133, 146호 가곽(블록)에 건설됐다. 1941년 10월24일 용현동 부영주택과 함께 신청됐으며, 신청서에 첨부된 도면에 따르면 4호 부영주택 55호와 2개의 우물이 계획됐다. 3개의 가곽에 폭 4m 도로 2개를 건설해 5개의 가곽으로 나눠 주택을 건설했다. 송림동 부영주택은 조사된 부영주택 중 유일한 한옥형의 주택으로 현재 26동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부영주택 대부분은 큰길 안쪽 골목에 위치하며 큰길가의 부영주택은 철거돼 상가 및 다세대주택으로 바뀌었다. 인천시 제공
숙종(1661~1720)이 인조 때의 명상(名相)이던 이경석(1595~1671)의 문집 ‘백헌집(白軒集)’을 살펴본 뒤 이경석 후손에게 내려준 어제어필의 칠언시다. 현재까지 알려진 묵적(墨蹟)의 숙종 어필 가운데 가장 신빙할 만한 예로 채색 꽃무늬를 찍은 어찰지(御札紙)를 사용한 이 어제어필은 열성어제(列聖御製)인 ‘숙종어제(肅宗御製)’에도 실려 있어 어필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국가유산청 제공
1934년 소래염전이 조성된 이후 60여년간 염전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을 보관하기 위한 소금 저장시설이었다. 벽체는 안에 쌓아놓은 소금의 무게 때문에 벽이 밖으로 밀리는 것을 막기 위해 위쪽이 안쪽으로 기울어지는 구조로 축조됐고,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부 기둥은 버팀목 형태로 지어졌다. 바닥은 벽체보다 가운데를 낮게해 널빤지를 깔고 가운데는 홈통을 만들어 쌓아둔 소금에서 빠져나오는 간수가 잘 배출되도록 했다. 버팀목은 낙엽송을 사용했고, 벽체는 소나무 판재를 덧대어 부식을 방지하고 방수기능을 높였다. 지붕은 목재 위에 함석을 덮어 마감함으로써 빗물 침투를 방지했다. 인천시 제공
19세기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 일대와 주변 지역을 그린 지도를 엮은 지도첩이다. 맨 앞장에는 지도의 목록이, 지도에는 지역별, 가구수, 인구, 물산, 군사관계, 거리 등이, 맨 뒤에는 김광훈과 신선욱이 쓴 ‘청아여지형정석의서’가 딸려 있다. 고급 펄프지인 양지에 수묵과 채색으로 그린 회화식 지도로 전통적인 관방도 형식을 따른 함경도와 러시아 동부지역 지도다. 제작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1885∼1905년으로 추정된다. 조선과 제정 러시아 및 청나라의 국경 분쟁 연구뿐만 아니라 지도 발달사와 회화사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의 방비책으로 영종도와 교동도에 대한 방비책이 대두돼 남양의 영종 만호를 영종도로 이설하고 감목관을 겸임하게 됐다. 이후 쇄국정책 속에서 국방강화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이 크게 강조돼 1866년 화포과를 신설하고 포군을 양성했다. 1869년에는 총포과를 설치했다. 그러나 운요호사건으로 인해 영종진에는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결국 함락됐다. 이후 영종진이 재건되면서 신 영종진터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는 그 자리에 영종진공원이 들어서 있다. 인천시 제공
유배지 영월에 남겨진 단종의 자취와 충신들의 절의가 깃든 장소를 8폭의 그림으로 제작한 화첩이다. 그림은 밝은 색채를 많이 구사해 화사한 인상을 준다. 매우 정교한 필치를 구사해 경물을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산악 표현과 나무 묘사에서는 진경산수화풍의 여운이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그림의 화격이 높아 어람용으로 보이며 제작 시기는 19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부립인천중학교는 인천 중구 전동 26, 웃터골을 운동장으로 기상대 아래 터전에 개교한 부립중학교였다. 1935년 4월1일 개교한 이곳은 당시 일본인을 위한 중학교였다. 1945년 11월27일 광복을 맞아 인천 유지들이 길영희를 교장으로 추대해 인천중학교로 재차 개교했다. 이에 따라 6년제 중학교로 개편되기도 했다. 1955년에는 제물포고등학교가 인가돼 중고등학교가 한 교정에 있게 됐다. 수많은 영재를 길러내던 인천중학교는 1973년 평준화 정책에 따라 폐교됐으나 2001년 3월1일 재개교했다. 인천시 제공
심환지(1730~1802)는 1798년 우의정, 1800년 영의정에 임명됐으며 벽파의 영수로 정국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심환지 초상’은 양손을 소매 속에 감추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구분면의 전신상으로 바닥에는 화문석 자리가 깔려있다. 화면 상단에는 ‘領議政文忠公晩圃沈先生眞’이라고 쓰여 있어 심환지가 영의정이 된 1800년 이후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비교적 낮은 족좌대와 원근법으로 처리된 화문석, 의복의 두드러진 명암법 등에서 19세기 초반의 사실적인 초상화 양식을 잘 보여준다.
1960년 지어진 도시형 한옥의 전형을 보여주는 주택이다. 현재도 생활에 필요한 부분만을 수리해 원형을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다. ‘ㅁ’자 집인 이 주택은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안방과 부엌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방 2개가 ‘ㄱ’자로 꺾여 있다. 도시형 근대한옥은 1920년대 이후 서울, 인천 등 도시지역에 보급된 토지절약형의 고급 주택으로 특히 실내 공간 안에 사랑방, 행랑채, 안방, 부엌 등이 통합된 형식이다. 인천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