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수는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하남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1768년(영조 44) 문과에 급제해 예조정랑, 홍문관 부수찬을 지내고 왕세손 시강원 필선으로 활동했다. 이때 외척의 정치관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뒷날 정조의 지극한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경술로써 세상에 이름을 알렸으며 저서로는 몽오집(夢梧集)이 있다. 묘소는 하남 광암동에 있었으나 현재는 의왕 고천동 산 31번지(오봉산하)에 위치했다. 하남문화원 제공
임상원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천이나 현재는 하남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과거 송시열이 유배되던 당시 방면을 주장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조참판 임중의 아들인 그는 1660년 22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27세의 나이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해 평안도 도사를 지냈다. 이후 대사헌과 도승지를 역임했으며 사은부사가 돼 청나라에 다녀왔다. 말년에는 공조판서와 우참찬, 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염현집 10책과 교거쇄편 등이 있다. 그가 1692년에 자필로 작성한 임상원 편지는 귀양 가 있는 벗에게 쓴 안부 편지로 현재 성균관대 박물관에 소장됐을 정도로 가치가 높다. 그의 시호는 효문이며 현재 묘소는 하남 초일동에 있다. 하남문화원 제공
오달제는 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1634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관직에 입문했다. 후금의 세력이 날로 커져 국호를 청으로 고치자 삼사의 공의를 위협, 제지하여 임의로 사신을 보낸 최명길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했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게 되자, 청나라측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윤집과 더불어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서서 적진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가게 됐다. 적장 용골대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또 협박하기도 했으나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쫓으면 오랑캐가 되고 마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했다. 마침내 심양성 서문 밖에서 윤집홍익한과 함께 처형 당했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여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됐다. 그는 묵매화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조속허목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의 묵매화풍의 영향을 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다. 경기도 제공
김희춘 서울대 교수는 해방 이후 경기도청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을 신축한 건축가다. 1937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후 황해 재령 소재 명신중학교와 서울 명동의 백정빌딩 등의 설계에 참여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청 건축서 설계과장을 맡아 공공기관 건축을 담당했다. 6ㆍ25 전쟁이 끝난 뒤에는 서울대 공과대학 건축과 교수가 돼 설계사무소 경영, 대학 건축교육의 본격적인 추진, 건축유관단체 참여가 폭넓게 이루어졌으며, 한국건축가협회와 대한건축학회의 회장도 그즈음 거쳤다. 그의 작품으로는 경기도청사(수원, 1963년, 나상진 합작), 한국정신문화연구원(성남, 1978년, 안장원 합작) 등이 있다. 정년퇴직 후에는 계속 건축학과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건축연구소를 자영했다. 별세 후 충남 천안 풍산공원 묘지에 안장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안희문은 지난 3ㆍ1운동 당시 평택을 대표하는 인물로 운동에 적극 나선 걸로 알려졌다. 그는 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그해 4월 1일 밤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에서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백봉리 노상에서 주민 다수를 규합해 만세시위를 선도했고 정해진 장소에서 횃불을 들어올리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또, 당시 운동에 함께한 안육만과 김원근은 왜 운동에 함께하지 않느냐며 주민들을 적극 이끌었다. 이후 이들은 일본군에게 연행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안희문은 6개월을 선고받았으며 안육만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받으며 국가유공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았다. 국가보훈처 제공
안성 출신 이상신은 3ㆍ1 운동 당시 해당 지역을 대표해 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당시 안성에서 열린 독립만세시위사건에 가담해 적극 주도했다. 그는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해 기물을 파괴했으며 일본인 배척추방에 앞장서는 등 물리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에 3ㆍ1 운동이 진압되면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1920년대 중반이 돼서야 복역을 마쳤다. 그는 이 같은 공적을 인정받아 지난 1990년 애국장을 포상받으며 국가보훈처에 이름을 올렸다. 국가보훈처 제공
박종설은 이천 출신 인물로 이천에서 3ㆍ1 운동을 적극 전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 선생은 1919년 3월30일 이천 마장면에서 오천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당시 거사일을 정한 뒤 마장면 각 마을에 사발통문을 발송해 만세 운동을 펼쳤다. 1천 명의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이후 신둔면, 호법면, 모가면, 장호원읍 등을 오가며 운동을 전파했다. 이후 징역 5개월을 선고 받았으며 지난 1995년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국가보훈처 제공
양평군 용문면에서 나고 자란 조영호는 일제강점기 당시 만세 운동을 하다 징역 8개월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그는 우리나이로 38세가 되던 1919년 당시 3ㆍ1운동이 일어나자 그 해 3월30일 양평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용문면 광탄리에서 김윤구 등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이어나갔다. 아울러 군중 앞에서 일본인은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라며 큰 소리로 연설을 하던 중 일제 순사들에게 체포됐다. 그리고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출소 이후에도 암암리에 독립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높게 사 지난 2005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며 국가유공자로 지정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김순오는 지난 1919년 3ㆍ1 운동 전후로 고양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1856년 2월17일에 태어난 그는 1919년 당시 3월27일 밤에 고양군 신도면 진관외리 뒷산에서 다수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 만세를 고창하다 체포됐다. 당시 만세 운동은 행주나루, 벽제면 등지에서 산과 강을 가리지 않고 열렸다. 당시 만세 운동의 주축으로 활동했던 그는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 받았다. 이후 1930년 11월18일 숨을 거뒀다. 광복 이후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고자 지난 200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고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김종환 선생은 지난 1878년 8월7일에 태어난 인물로 고양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 선생은 지난 1919년 3월27일 당시 고양군 벽제면 관산리에서 만세운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는 마을에서 운동을 전개하기로 약속이 된 상태였다. 그는 군중들이 촌내 가장곡 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고창할 때 이에 호응해 관산리 자택 일대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바 있다. 김 선생은 국가보훈처로부터 이 같은 공적으로 지난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국가보훈처ㆍ공훈전사사료관 제공
임성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를 마지막까지 지키려 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1755년(영조 31년) 진사로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세자시강원 설서로 관직에 입문했다. 세자시강원은 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된 관서로서 설서는 정7품 관직에 해당한다. 당시 세자인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게 되자 그 측근에서 보필했으며 1758년부터는 강직한 성격을 인정받아 오랫동안 사간원의 관원을 역임했다. 그러던 중 1762년 사서로 재직 중일때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상주하자 영조가 크게 노해 세자를 죽이려 했다. 당시 임성은 세자의 잘못을 간곡히 빌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자가 죽은 뒤 그는 세자의 보필을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파직됐다. 이후 그의 능력을 아깝게 여긴 영조가 다시 지평, 교리, 승지, 대사간 등을 맡겼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됐으며 시호는 충희다. 현재 그의 묘소는 하남 초일동 일원에 위치했다. 하남문화원 제공
이한규는 조선시대의 문ㆍ무신으로 부천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그는 세종대왕의 9남 충경공 화의군의 6세손으로 숙종 2년(1676) 무과에 급제해 형조판서, 정헌대부, 오위도총관 등을 지냈다. 그는 성품이 독실하고 공을 위해 사사로움을 버려 그가 근무한 곳 마다 덕을 칭송하는 비가 세워졌다. 영조 4년(1728)에는 영남에 난적이 창궐할 때 왕의 친위병을 이끌고 남하해 오랑캐를 토벌한 후 이듬해 타계했다. 생전 벼슬에 물러나서는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며 덕을 베풀었고 벼슬에 있을 때는 주 근무지에서 부패를 없애는데 앞장섰다. 이 공을 기려 처음 장사를 지낸 양주에서는 하마비를 세워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나갈 경우 말에서 내리도록 했다. 현재 그의 묘소는 부천 오정구 여월동 산55번지 일원에 위치해 있다. 부천문화원ㆍ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동북 9성으로 이름을 알린 윤관은 고려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파평면 금파리(현재의 파주)에서 출생했으며 광탄면 분수리에 묘소가 있다.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윤신달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윤집형의 아들이다. 1073년(문종 23년)에 문과에 등과했으며 1104년 2월 동북면행영도통으로 임명돼 여진 정벌을 시작했다. 당시 여진은 고려를 상국으로 모시고 있었지만 차츰 세력을 확대해 고려의 국경 요새 등을 잠식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이에 윤관은 1107년에는 5만 3천명의 병사로 동음성을 습격해 여진군을 격파했다. 이를 시작으로 여진군이 숨은 석성을 공격해 적을 섬멸하고 135개 처에 달하는 적의 전략 거점을 점령했다. 당시 여진군의 전사자는 4천940명, 생포자는 130명에 이르렀다. 이후 고려는 윤관을 필두로 동북 9성을 축조하고 이주민 약 5천 가구가 살도록 했다. 그 규모는 사방 700여 리에 달했고 선춘령에 경계비를 세워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파주 문화관광포털 제공
광주군 남종면 배알미리에서 태어난 이벽은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이승훈, 정약전, 권철신, 이총억, 김원성 등과 함께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 천진암에 모여 천주학을 연구했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새벽 등 4번씩 규정된 경문을 외우며 이벽은 천주비경가를, 정약종은 십계명가를 지어 학문으로서의 천주교를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1783년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 영세를 받고 오게 했으며 이듬해 봄 천주교 서적과 성물을 사 가지고 오게 하는 등 천주교 신자로서 열띤 활동을 보였다. 하지만 1785년 당시의 사복경찰관인 추조에게 발각돼 을사추조 적발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관가와 경주이씨 종친회에서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에게 각종 압력을 가해 온 집안은 삭탈관직되기에 이른다. 이때 단식하며 방에만 기거한 채 경서만 읽자 전염병에 걸려 33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됐다. 현재 그의 묘소는 포천시 화현면에 있으며 2012년 9월10일 포천의 향토유적 제48호로 지정됐다. 광주문화원 제공
은성 목일신은 자전거, 누가 누가 잠자나, 자장가 등을 작곡한 인물로 부천을 대표하는 이다. 13세가 되던 해에 동요의 고전이라 불리는 자전거를 짓고 동요 산시내를 발표하는 등 비범한 면모를 보였다. 이후 부천에 교편을 잡은 그는 교사로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정년퇴직하던 1982년에는 교육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인정돼 국민 표창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우리 민족의 넋을 잠재워주고 흔들어 깨워주는 요람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아울러 어린이와 민중의 정서를 개척하는데 힘썼다고 여겨진다. 평생 동요, 민요, 시, 수필 등 400여 편을 발표했으며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다. 부천문화원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구종직은 시흥을 대표하는 역사 인물 중 한명으로 조선전기 행첨지중추부사, 지경연사,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역학과 경학에 밝았다. 한 일화로 문과에 오른 뒤 교서관정자로 있을 때 하루는 숙직을 하다가 경회루의 경치가 매우 좋다는 말을 듣고 평상복으로 경회루 연못가를 산책했다. 때마침 세종이 내시 몇 사람을 거느리고 경회루에 나타나자 황급히 왕 앞에 엎드렸다. 그러자 세종은 구종직의 신분과 밤중에 경회루에 나와 있는 까닭을 묻고는 경전을 외울 줄 아느냐?고 묻자 춘추 한 권을 줄줄 암송했다. 이에 세종은 크게 감탄하고 이튿날 교서관부교리에 임명해 9품직인 정자에서 하루 아침에 종5품직인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에도 조선 전기 내내 학식이 뛰어난 문신으로 자리잡았으며 62세에는 왕족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현재 그의 묘소는 시흥시 무지내동 부흥산 아래에 있다. 시흥문화원ㆍ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오달제는 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1636년에 부교리가 됐다.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했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게 되자 청나라측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윤집과 더불어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서서 적진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적장 용골대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고 협박했으나 그는 끝까지 항변했다. 결국 심양성 서문 밖에서 윤집ㆍ홍익한과 함께 처형 당했다. 후대는 이들을 삼학사라 부르며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됐다. 경기도청ㆍ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유길준의 아들 로 유명한 유억겸은 하남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1909년 계산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 중학교와 경도관립 제3고등학교에서 수학했다. 이후 1920년 동경제국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해 중앙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에서 후학 양성에 나섰다.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서대문경찰서에서 3개월 간 옥고를 치른 뒤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임했으며 1937년부터 변호사 사업을 시작했다. 광복 후 연희전문학교 고장에 취임해 학교의 기틀을 마련했고 1946년 미군정의 문교부장(교육부장관)에 취임했다. 이때 국립대학안 실현 등을 통해 대한민국 교육정책 수립의 기초작업을 해냈다. 정부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1962년 제17회 광복절을 맞아 교육부문의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현재 연세대에 유억겸기념관이 있으며 그의 묘소는 하남 창우동 일원에 위치해 있다. 하남문화원 제공
시인이자 영문학자인 수주 변영로 선생은 부천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본명은 변영복이었지만 영로라는 이름을 주로 썼고 회갑이었던 1958년 정식 개명 소송을 내 전격 개명했다. 1920년 순수 문예지 폐허의 동인이 되면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그때가 언제 옵니까, 논개등의 대표작을 발표하면서 일제의 탄압 속에서 민족의 해방을 기원하는 간절한 심정과 뜨거운 민족혼이 잘 표현돼 있다. 아울러 민족애와 서정성에서 높고 섬세한 경지를 보였다. 광복 후 성균관대와 해군사관학교 교수 등을 지냈으며 1955년 제1대 한국 펜클럽 회장에 선출됐다. 1961년 3월14일 인후암으로 사망했으며 이후 부천은 그를 기리고자 1996년 12월 문학의 해를 맞이해 중앙공원에 논개를 새긴 시비를 건립했다. 이듬해에는 고향집 앞에 풋돌을 세웠고 탄생 100주년이 된 1998년에는 고강동묘 앞에 그를 기리는 묘비를 세웠다. 2000년에는 수주로에 동상을 세우며 다시 한번 그를 기렸다. 부천문화원ㆍ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이벽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무반으로 이름난 가문 출신임에도 천주교에 귀의한 인물이다. 그는 이익을 스승으로 하는 남인학자의 일원으로 처남인 정약용과 동서인 이승훈을 비롯해 이가환, 권철신, 권일신 등과 교우 관계를 맺었다. 조선 후기 주자학의 모순을 인식한 그는 청나라 사신을 통해 반입된 서학서를 읽게 되고 천주교 교리, 서구의 과학ㆍ천문ㆍ지리 등 방대한 내용을 깨닫게 됐다. 이후 1784년 이승훈이 청나라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오자 그에게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천주교 신자가 됐다. 서울 수표교 일원에 집을 마련하고 천주교를 연구하는 등 교단조직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중 1785년 설법교회 모임을 주도하다 성균관 유생들의 척사운동에 의해 해산됐다. 이벽은 이듬해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으며 현재 그의 묘소는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일원에 있다. 하남문화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