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은 고려 조선시대에 향교가 있던 유서 깊은 동네를 일컫는다. 내가 30년 넘게 살아온 수원의 교동도 향교가 있고 예전엔 시청과 시민회관, 보건소, 문화원, 소방서 등을 곁에 둔 문화 행정의 중심지였다. 시청이 신도시로 떠나면서 인쇄골목도 활기를 잃었고 빈 가게들이 많아졌지만, 이 거리는 여전히 오랜 친구 같은 정감이 있다. 춘천막국수집 할머니는 30년 넘게 대를 물려 장사를 하고 있다. 요즘은 삶은 메밀 면을 말리는 일과 식대 받는 일을 하고 계신다. 여름날 점심시간은 줄을 서야 할 때가 많다. 구수한 메밀 삶은 물을 마시며 퇴색한 식탁에 기대 앉아 적당히 지루한 시간을 삭인다. 선풍기가 삐걱대며 힘겹게 돌아가고 육수와 함께 밑반찬이 나오면 머잖아 담백한 막국수가 나온다. 식사를 기다리는 평온감은 삶의 가장 중요한 의례이며 낙일 것이다. 창포꽃 피는 유월이 올 때 붓을 거둔다. 4년을 산 찾아 물 따라 걸었다. 성원해준 독자들이 벌써 그립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필암서원은 이황과 함께 성리학을 닦았던 인종, 명종조의 하서 김인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하서는 도학, 절의, 문장에 모두 탁월하여 호남에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었다. 출입문이 좌우에 따로 있는 확연루는 문루역할을 겸한 유생의 휴식공간으로서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트여있고 크게 공정하다는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따온 것이며 현판글씨는 송시열 선생이 쓴 것이다. 확연루와 마주한 경장각은 정조가 하서를 문묘에 배향하면서 지어졌고 편액 또한 정조의 어필이다. 내부에는 인종이 하사하신묵죽도의 판각이 보관되어있다는데 닫혀있어 아쉬웠다. 하지만 이곳엔 유물전시관이 따로 있어 서원의 내력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장미꽃 붉게 타는 오월이 아직 곁에 있다. 흉흉한 세월은 아픈 상처를 떼어놓고 릴케의 묘비명처럼 흘러간다. 장미여! 오오 순수한 모순이여! 라는.
찔레꽃 아카시아 꽃 상큼한 향기에 녹아드는 눈부신 오월입니다, 화장한 도시여인처럼 타는 몸을 비틀며 사랑을 갈구하는 모란도 그윽합니다. 봄 햇살에 상기된 영산홍은 더욱 매혹적 이구요. 백양사는 경내보다 입구가 더 아름답지요. 연둣빛 녹음을 끌안은 냇물은 작은 물고기가 파닥거리고 햇빛에 반사된 은빛 물비늘이 더없이 맑습니다. 돌다리를 건너며 투명한 물속에 비친 나를 씻습니다. 대웅전 앞마당엔 색색의 연등이 가득 매달려 소원을 비는 신심을 소박하게 전하고 있네요. 담장 아래 300년 묵은 매화 한그루가 새잎을 피운 채 지긋이 눈감고 세월을 관조하고 있고요. 백양사는 자유로운 형식으로 가람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대웅전 앞에 있어야할 석탑이 뒤란에 있지요. 한 무리 젊은이들이 일시에 뛰어오르며 카메라 앞에서 연속촬영을 하는군요.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했듯이 청춘의 한순간이 축약 되는 빛나는 달입니다.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해요. 가장 젊고 소중한 지금.
파스텔 톤 라일락향기가 교정에서 풍겨온다. 그러나 잔인한 사월이다, 바다 밑에 갇힌 젊은 청춘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대부분의 꽃들은 화장을 지우듯 서둘러 졌다. 길섶의 찔래꽃만이 원혼처럼 하얗게 피었다. 산야를 뒤덮은 신록은 봄의 동화처럼 싱그럽다. 오랜만에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선창을 찾았으나 포구는 황량했다. 주인 잃은 횟집들은 그대로 주저앉아 폐허가 되었고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달래랑 미나리를 팔고 있는 할머니도 의욕을 상실한 채 노곤해 보인다. 수년전 긴 방죽에 주저앉아 배들이 떠있는 선창을 그렸던 기억이 새로운데 그때의 푸른 바다는 간데없고 넓은 땅은 황무지가 되었다. 녹슨 철조망 사이로 보이는 아스라한 기억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알린다. 화옹방조제는 그 어떤 욕망의 지시로 이렇듯 자연을 변형시켜 놓았을까? 몇몇 남아있는 난전에서 힘없이 꿈들 대는 낙지랑 꽃게들이 서글프다. 한때 이곳은 새우와 젓갈 시장으로 쉼 없이 북적댔다. 봄날도 벌써 어둡다.
1893년 파리외방전교회의 임 가밀로 신부는 서품을 받자마자 바로 입국해 이듬해 여주 본당 부엉골에 부임하였다. 하지만 본당 사목지 위치가 적합하지 않아 고심하던 중 장호원 산 밑에 대궐 같은 집을 발견하고 간원한다. 그 집은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피신하기도 했던 민응식의 집이었는데 1896년 집터와 산을 매입 본당을 설립하게 되었다. 1903년 한옥과 서양식이 절충한 사제관과 성당을 짓고 뮈텔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했다. 또한 일제하에 지방민의 교육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1907년 매괴 학당을 설립하였다. 화강석으로 만든 박물관과 지금의 고딕식 성당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감곡 봄 들녘에 아지랑이 가몰 거리고 매괴 학교에서 들려오는 학생들의 노는 소리가 새소리처럼 맑다. 사람이 아름다운 건 더불어 사랑함이 있기 때문이리. 세월호에 갇힌 학생들이 몹시 안타깝다. 꽃핀 신록의 봄에 더욱.
1889년 프랑스외방선교회 빌헬름이 초대신부로 부임하면서 답동언덕에 정초식을 갖고,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1897년 고딕양식의 건물을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937년 개축공사를 하면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이 성당의 백미는 다양한 건축양식이 혼재된 후면이다. 후문 쪽 옆 건물의 3층쯤에서 내려다보면 현란한 광경을 미학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예배당 안에서 한 쌍의 청춘이 혼례를 올리고 있었다. 스탠드글라스 창에서 쏟아지는 은은한 빛을 받은 신랑 신부는 일생의 단 한번 가장 성스러운 순간을 마주했다. -알랭드 보통은 <미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서양건축 양식이 동양의 이곳까지 옮겨온 변증이다. 3개의 종탑과 장미꽃 모양의 창, 붉은 벽돌이 받드는 이채로운 지붕, 모두가 그리운 옛 향기로 가득하다. 발길이 만두냄새 구수한 신포시장으로 옮겨 간다.
국보 제 48호 8각 9층 석탑은 고려시대 다각 다층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 앞의 석조 보살 좌상(보물 제139호)의 공양하는 모습도 이채롭다. 적광전과 남한에 남아있는 유일한 다각 다층석탑의 조화로운 풍경 또한 무척 포근해 보인다. 청명 지나 한식행렬이 고속도로를 메운 전국의 교통망아래 상춘객의 아우성은 간절하고 숨 가쁘다. 그러나 어찌하랴 인생은 속도로만 견인할 수 없는 질서의 대열이 필요한 것. 스스로를 통제하는 단기출가학교의 힘든 수행 아래 동안거를 끝낸 월정사는 평화롭다. 청정한 전나무 숲길도 텅 빈 공허 속을 또 다른 포만감으로 충만케 한다. 전국에 동시다발로 피어난 꽃들은 무슨 궐기처럼 고개를 재끼더니 일부는 벌써 꽃비를 내린다. 자연계의 프로그램대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인생과 의 부합이련만, 한꺼번에 피었다 일시에 지는 모습은 참혹하다.
좀처럼 올 것 같지 않던 봄이 어느새 개나리 진달래꽃 피워놓고 꽃 대궐을 이뤘다. 죽령너머 먼 영남 안동 땅은 仁義禮智가 바른 선비의 땅이다. 길가의 산수유 꽃이 노란웃음으로 반긴다. 도산서당은 움 솟는 모란과 퇴계 선생이 분신처럼 사랑했던 매화꽃이 하얗게 피어 상춘객을 맞았다. 선생의 유언이 <매화분에 물 주어라>였다니 저 세상에서도 매화를 그리워하고 계실 것이다. 초가삼간이라 했던가. 퇴계서당은 방 한간, 부엌 한 간, 마룻방 한간, 전형적인 삼간 구조다. 이 단출한 집하나 짖는데 4년이나 걸렸다니 이는 선생의 무욕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퇴계선생이 정성으로 가꾼 매화, 국화, 대나무, 소나무화단 절우사는 화려한 서원의 뜰에 핀 꽃들보다 빈약하지만 따뜻한 기슭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 도산서원의 매화를 보았으니 이봄의 모든 꽃을 다본 것보다 충만하다.
미처 몰랐었네/그것이 행복인 줄을/하루치 땀방울 흠뻑 쏟아내고/둥지 들어 도란도란 어둠을 사를 때/지금 발 디딘 여기 이 자리/하찮은 일상에서 흐뭇함을 느낄 때/이 순간이 행복인 것을/뜬구름 잡으려 헤매는 무리들/오늘도 빈 하늘만 찾아 떠도네<중략> 행복은 언제나 /이름표도 색깔도 없이/지금 나 있는 여기/이 순간을 나그네로 서성이고 있네 전석홍의 시 행복 찾기는 지금 내가 서성이는 곳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수년전에 찾았던 괭이부리 마을은 거대한 포크레인에 무너지고 있었다. 가난했지만, 외로웠지만, 한 시절 살아온 희노애락들이 사라진다. 잊지 못할 애환의 증거가 지워지는 것이다. 뻘건 황토가 핏덩이처럼 속살을 드러낸 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능청을 떨고 있다. 새로 지은 깔끔한 아파트가 바로 옆에 점령군처럼 서서 괭이부리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새 시대가 열리고 있다.
오대산에 올라 적멸보궁을 지날 때 산지기가 제지를 한다. 산불 예방기간이라 더 이상 입산을 금지한다며 단호한 어조다. 발길을 옮겨와 대관령에 오른다. 뿌연 허공에 눈발이 곤두박질친다. 통속한 선자령보다 능경봉으로 치달았다. 순백의 눈은 조밀한 졸참나무 숲에서 뽀송뽀송한 속살을 덮고 있다. 한창 지기가 움 솟을 시기에 춘설은 자꾸만 땅을 덮고 심술을 부린다. 르네마그리트가 봄눈을 내려놓고 <이것은 눈이 아니다>라는 심리적 표현을 하는 것 같다. 미끄럽고 가파른 등산로가 더욱 걸음을 왕성하게 이끈다. 산꼭대기를 올라야 직성이 풀리는 심사는 아직 유효하다. 산속에서도 급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다니. 정상에 오르자 백두대간 등뼈가 흰 눈 사이로 앙상하게 드러났다. 가쁜 숨 쏟아내고 가슴을 연다. 춘분이 가깝다. 봄은 정녕 오는 것일까?
안산시 선감도에 위치한 경기창작센터는 국내 최대의 예술레지던시다.경기도립직업전문학교와 이전의 선감학원을 리모델링해 창립됐다.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부랑아 감화시설로 설립했으나 이를 구실로 일제에 순응하는 군사양성소로 운영됐다. 해방 후 1982년 폐쇄될 때까지 40년을 그렇게 보냈다. 이 기간 수많은 소년이 인권유린과 혹독한 수용생활을 견디다 못해 바다에 빠져죽거나 구타와 영양실조로 사망하기도 했다. 빠삐용에 비견되는 한 서린 곳. 현재 36개의 협력스튜디오와 공방, 전시실, 교육공간 및 다목적 홀을 갖추었다.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선감학원기록실 등이 눈길을 끈다. 지난 봄 후배 작가 이주영 아우와 故 최춘일 센터장을 찾아갔던 것이 엊그제 같다. 병마를 부둥켜안고 열정을 바친 센터에서 발을 떼지 못하던 그는, 그로부터 열흘을 견디지 못하고 이름처럼 봄날에 갔다. 갯바람이 차다.
남한산성 자락에 널따란 후원을 거느린 행궁이 있다. 임금이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거처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행궁이지만 남한산성 행궁은 1626년 전란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 까지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인조는 1632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기도 했으며, 우리나라 행궁 중 종묘와 사직을 둔 유일한 행궁으로 임시수도의 역할을 수행한 곳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 신청된 이 고즈넉한 궁전은 보호수로 지정된 멋진 느티나무들이 궁궐 안팎에서 호위병처럼 서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벌써 달력 두 장이 바람난 봄 처녀처럼 떠나갔다. 행궁 앞 식당에서 산채 비빔밥에 곡주 한 잔 들이킨다. 왕 없는 빈 방의 일월오봉도가 외로웠다. 청나라 병졸 무엄하던 그 옛날 하늘빛처럼.
인도에서 가져온 향나무로 만든 세계 최대의 목불상이 누워있는 집(舍)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석탑위에 얹힌 불두가 시선을 압도한다. 산책을 하다 보니 집도 절도 다소 낯선 비정형의 풍경이다. 이곳의 부처상과 유물들은 인도나 중국, 태국, 라오스, 스리랑카, 미얀마 등에서 기증한 것들이 대부분이고 관광객도 동남아 사람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지난해 외국 관광객이 30만명이라고 하니 불국사의 관광객 10만명 보다 3배나 많았다. 베를린 장벽, 북극, 히말라야 등 세계의 돌을 쌓아 만든 통일의 탑도 인상적이고 각국에서 온 불상 3천여 점, 특히 태국왕실에서 기증한 금동불상은 이국적이다. 옛 향기는 없지만 상큼한 공기와 따사로운 햇살이 나지막한 산자락에 종일 머문다. 봄바람 서성이는 2월의 끝자락, 올 한해를 비는 축원문을 와불 입구에 걸었다. 무사무사의 한해가 되었으면 하는.
화성시에 소재한 920살 향나무다. 수령 900년이라면 속장경이 간행되고 윤관이 여진정벌 하던 고려시대 사람들과 살아와 지금에 이른 것이다. 수년전 이 나무를 찾았을 땐 이미 불에 탄 듯 까만 고사목이었다. 그땐 그래도 잔가지가 꽤 뻗쳐있었다. 제 몸을 비틀어대는 단단한 근육질이 인상적이어서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월의 풍화는 죽은 나무조차 휩쓸고 갔다. 날카롭던 잔가지들이 사라지고 앙상한 뼈만 남은 것이다. 그래서 더욱 강렬한 형상이다. 악어와 싸우는 아나콘다처럼. 파릇한 보리밭위에서 나무는 아직 이집트 왕의 미라같이 영생을 꿈꾸고 있는 듯하다. 주검의 힘! 그곳에 가면 늘 생명을 기억하는 푸른 봄을 꿈꾸게 된다. 문득 답청踏靑이라는 민중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풀을 밟아라/들녘에 매 맞은 풀/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풀을 밟아라/밟으면 밟을수록/푸른 풀을 밟아라>
1889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태어나 125년의 세월을 잇고 있는 이 성당은 한국전쟁 때 미사를 참례한 빨치산들과 인민군을 몰살하려고 불을 질러 전소된 것을 재건한 것이다. 전주의 전동성당과 함께 태어났고, 나바위 성당에 버금가는 목조건물이었다고 한다. 1859년 다시 지은 벽돌 조 건물이 현재의 모습이다. 은은한 아이보리색 벽과 성스러운 내부모습이 인상적이다. 아름다운 순례길 7코스 금산사 수류구간은 가장 많은 종교성지가 있는 곳. 금산사를 비롯해 증산교, 대순진리교 등 신흥종교와 금산교회 원평성당, 원평교회 등이 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대적한 구미란 전적지도 볼 수 있다. 동학군이 패배한 뒤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진 곳이다. 구미란 전적지부터는 한적한 길이 이어졌다. 산티아고 가는 길 같다는 아름다운 순례길 위로 진눈깨비가 흩어진다. 농민군의 원혼처럼.
맑은 바람 밝은 달, 순결하고 온건함의 동의어인 청풍명월의 고장이 남한강 상류에 떠있다. 청풍문화재 단지는 충주 다목적 댐의 건설로 수몰된 인공실향민촌이다. 망월루에서 바라보는 청풍호와 청풍대교의 모습은 자연을 그 어떤 수식어로도 비견할 수 없다는 한계에 봉착한다. 마주하는 비봉산의 모습도 선경을 이루었고 먼 호반에서 들려오는 트로트 망향가는 켄터키 옛집보다 향수적이다. 산수유 붉게 타는 주인 없는 동네에서 나의 고향을 그려본다. 언제 다시 색동옷 입고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향을 물밑에 가라앉힌 수몰민의 심정은 어떠할까. 지석묘, 문인석, 송덕비, 선정비 등이 이곳에 옮겨왔고 정자와 관아 및 주요 민가가 옮겨와 향수를 달래고 있다. 문득 제천 후산리 고택 마루에 전시된 가마를 바라본다. 꽃가마 타고 시집간 누이들이 그립다. 칼바람은 기세를 잃었고, 입춘의 지기가 움 솟는 땅은 이미 부드럽다.
가을시를 쓰려고 책갈피에 넣어둔 단풍잎은 수액을 빼앗긴 채 정숙한 미라가 되어있었다. 장롱 속 나프탈렌 같은 시간의 탈색은 얼음 속에 흐르는 냇물처럼 형체 없이 지나간다. 겨울의 시는 언제 쓸 수 있을까? 대한 지난겨울은 영혼 없는 눈사람처럼 여전히 부동자세다. 대춘을 꿈꾸고 있는가? 이천의 백송은 하얀 가지를 깃발처럼 날리며 봄의 양광을 그리워하고 있다. 다소 불안정한 기슭에서 포즈를 잡은 백송은 나의 마음을 단숨에 당겨왔다. 안정된 구도를 유지하고 있는 자세가 사뭇 멋지다. 시골조합장 같은 포즈도, 루이비똥 백을 든 도시 여인도 아닌, 이 나무의 형상은 독립투사 같다. 일송정 푸른 솔이거나 혜란강 건너 말달리던 선구자 같은. 겨울이 갈 때 까지 이 하얀 소나무를 내안에 심어두리라. 순결한 마음처럼.
옛 김제 지역은 민족 정서가 강했지만 종교와 사상이 이동하던 통로였으며, 유곽을 지난 길손이 서울 가는 재를 넘던 통행의 요지였다. 1905년 전주에서 온 미국선교사 테이트 최의덕(L.B Tate)이 설립했으며 조덕삼, 이자익, 박희서 등을 전도했고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후 신도가 늘어 1908년 이씨 문중의 재실을 뜯어 지금의 자리에 옮겨 지은 것이다. 기와 담장도 단아하지만 목조 종탑은 새로 지은 붉은 탑에 비해 너무나도 고풍스럽고 아름답다. ㄱ자형 예배당은 남녀를 분리시킨 구조인데 여자들은 커튼에 가려진 채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남자의 예배당 대들보엔 한문으로, 여자의 대들보엔 한글로 성경구절이 쓰여 있다. 이는 남녀유별, 특히 남성 우위의 미묘한 권위가 엿보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예배당의 풍금은 소리를 잊은 채 정숙하고, 뒤란의 두레박은 우물에 잠긴 채 아직 깊은 세월의 줄을 놓치지 않고 있다.
포말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백사장을 덮치고 빠진다. 간혹 성난 듯 가까이 올라오기도 하며. 수평선을 보면 지구 밖 우주가, 우주 밖 우주가 궁금해진다. 과학이 신을 정의할 수 없듯이 우주의 이치를 규명할 수 없을 것이다. 안목항은 커피해변으로 불린다. 흔한 횟집도 없다. 다양한 커피점이 길게 늘어서 있고 창가엔 관광객이 다리를 꼬고 앉아 그윽한 표정으로 겨울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강릉은 200여 점포의 커피점이 있는 커피의 메카다. 해변엔 카루소, 이탈리코, 엔제리너스, 씨 엘, 엘빈 등 이름도 건물 모양도 다양하다. 지중해 여행에서 본 하얀 벽과 파란 지붕이 있는 산토리니 커피점도 멋지다. 나는 자판기에서 해즐럿 블랙커피 한잔을 뽑아들었다. 종이컵의 커피는 매우 육감적이다. 파도 출렁이는 백사장을 걷는다. 충분히 우아하다.
광화문의 정 동쪽에 있는 바닷가. 옛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방향을 관통했을까.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 정동진에 온 건 서울에서 수 시간을 지나 한해가 바뀐 새해 벽두다. 동쪽은 해가 뜬다는 상징적 방향성 때문에 설레는 첫 마음을 모두가 옮겨 오나 보다. 붉은 해가 떠올라 가슴을 환히 밝혀줄 때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리. 함께 한해를 가자는 결속을 위해, 감춰진 것들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구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밤새 이곳으로 와 새벽 바다를 거닌다. 가족, 연인, 친구처럼, 사랑의 울타리가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 그런 사랑의 영원성이야말로 우리 곁에 존재하는 가장 큰 희망과 용기가 되리라. 해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아주 협소하게 떠올랐다. 한해 한번뿐인 이날 이 순간은 여전히 흥분된다. 내 앞에 전개될 올해의 일들이 새삼 궁금하다. 첫줄이 아름다운 시를 어서 쓰고 싶다. 첫 마음을 잊지 말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