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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봉 칼럼] 멋있는 남자로 사는 법

뜨겁게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막바지에 이르러서 벌써 입추를 맞이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남성들이 애환이 사회 전반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예전에는 기러기아빠라는 단어로 수면 위로 떠오른 적이 있지만 지금은 남성갱년기라는 말이 현대 사회에서 남성들이 마주한 문제들을 대표하는 것 같다. 그런데 가정에서 소외되었던 남성들이 라이프 스타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문제를 타개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에는 꽃할배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여행하는 남자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고 지금은 요섹남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요리하는 남자가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패션에 있어서는 아직 어려워하고 있는 것 같다. 몇 년 전 디자인하우스의 이영애 대표로부터 <행복이가득한집> 창간특집호로 이런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 남성을 변화시키자. 그리고 그 시작으로 남성들의 옷차림을 바꾸어 보자. 실제로 이 프로젝트에서 사회, 문화계의 리더 세 분을 선정해서 내가 옷을 디자인을 한 적이 있다. 한국의 많은 직장인들은 양복 하나로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 옷장만으로 삶을 가늠해본다면 천편일률적인 단조로운 인생으로 보일 것이다. 정장 셔츠 구두 넥타이로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최근에는 사석에서 정말 이것을 실감해서 남성 패션을 위한 강의를 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기도 한다. 우리 나라의 디자인이 발전하려면 남자들의 옷차림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옷차림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라이프스타일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주 5일 근무가 정착되어 휴식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여가 생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그것이 여행이든 요리든 패션이든 생활의 전반적인 것들은 성의 구분을 갖지는 않는다. 특별한 능력이라기보단 문화를 느끼고 향유하려는 관심이 필요하다. 나를 위한 관심이 결국 가정을 나아가 사회를 위한 것이다. 비싼 음식을 먹고 비싼 옷을 입는 것이 멋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 한 때 나는 이상봉 남성 언더웨어를 한 적이 있었다. 남성들의 셔츠와 속옷을 만들었는데 그 때 소비자 의식구조에 대해 접하고 놀란 적이 있다. 우리나라 남성들의 속옷 구매는 거의 여성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아빠의 셔츠나 속옷은 물론 아들의 것도 어머니가 구입한다고 한다. 심지어 젊은 대학생조차 말이다. 먹고 마시고 여행하는 것만이 인생의 즐거움이 아니다.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고 그것을 즐기는 것도 다른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다. 우리 남성들은 이런 즐거움을 포기하거나 여성들에게 빼앗긴 것은 아닐까. 이 즐거움을 되찾고 스스로 즐길 때 내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물론 자신의 주변도 풍요로워진다. 남성들은 작은 시간의 관심만 가진다면 누구나 패션피플이, 패셔니스타가 될 수 있다. 청바지 하나를 입어도 멋있게 입는 법, 셔츠를 입어도 자유로워 보이는 법 등. 웃을 때 사람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답다고 한다. 웃음 이상으로 그 사람의 옷차림을 보면서 편안하거나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문 밖을 나갈 때 한 번 거울을 쳐다볼 수 있는 여유, 아침에 무엇을 입고 출근할까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여유. 하지만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내가 골라준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출근한다.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정에 맞게 혹은 나의 기분에 맞게 옷차림을 선택해보자. 내가 나의 옷차림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행복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옷을 잘 입는 사람이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비싼 구두, 비싼 넥타이가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하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조화가 중요하다. 흔히 TPO라고 불리는 Time, Place, Occation을 비롯해서 트렌드나 자신의 체형과 직업 등에 맞는 옷차림에 대해 조금만 신경 써보자. 이상봉 디자이너

[이상봉 칼럼] ‘위기 혹은 도약’ 한국패션의 미래

올해 여름은 폭염이나 태풍보다도 먼저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MERS)가 불쑥 찾아와 우리 사회에 큰 피해를 입히고 있다. 패션도 예외가 아니다. 명동이나 동대문에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크게 줄었고, 이에 따라 외국인 관광쇼핑을 대표하는 두타는 매출이 70~80%나 줄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7월 예정이었던 한국콘텐츠진흥원의 패션코드도 메르스 때문에 연기되었다. 하이패션 업체는 영세 기업에 가깝다. 이런 위기는 디자이너들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금 디자이너들은 서울패션위크(SFW)의 큰 변화에 맞닥뜨렸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혼란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소통없는 일방적 진행은 패션계의 자유로움을 해칠까 우려된다. CFDK와 소속된 일부 디자이너들은 이런 SFW에 대해 보이콧을 발표하기도 했다. 많은 유수의 패션의 국가, 도시와 마찬가지로 한국 패션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컬렉션과 전시회 두 가지 모두가 동반 성장해야 한다. 컬렉션의 경우 서울패션위크를 중심으로 부산이나 대구의 소규모 컬렉션까지 지속적으로 열리고 있다. 반면 전시회의 경우에는 86년부터 작게 시작되었지만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수준이었다. 서울패션위크에서도 10여년을 진행했었지만 애물단지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주관하는 패션코드나 인디페어가 생기면서 몇 년 전부터 바이어들 수주가 중심이 되는 제대로 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고 지금까지 계속 성장하고 있다. 서울은 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도시이다. 세계의 패션 피플, 기업들이 앞다투어 서울로 몰려들어 패션쇼와 전시를 하려고 한다. 광화문에서는 루이 비통의 전시가 있었고 DDP에서는 샤넬의 크루즈 패션쇼가 있었고 현재는 디올의 디올정신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올 가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소재 박람회가 세빛둥둥섬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렇게 서울이 아시아의 핫한 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가운데 패션도시로서의 글로벌화를 위한 서울시의 정책은 우려스럽다. 특히 신진 디자이너의 등용문이라고 할 수 있었던 제네레이션 넥스트가 없어진 것은 정말 안타깝다. 소수정예의 디자이너에게 집중된 프로젝트로 인해 많은 신진 디자이너들이 목표를 잃고 방황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소수정예에게만 지원이 집중된다면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신진의 젊은 디자이너들의 성장과 패션 산업 전반의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또한 패션쇼의 궁극적인 목적은 판매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서울시의 정책은 홍보전략에만 치중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좋은 청사진이었을 수 있지만 이제는 홍보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많은 디자이너들이 혜택을 받고 전반적으로 한국패션을 선진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서울패션위크의 선발 기준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시하기 전에 공론화나 공청회 등을 했다면 얼마나 발전적인 모습으로 나갈 수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리 새롭고 획기적인 기획안과 심사기준을 도입한다고 하더라도 독단적 진행은 소통의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특히 관이 진행하는 일은 다수를 위한 일임은 물론이고 또한 다수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많은 디자이너들은 한국 패션에 희망을 갖고 있다. 한국패션은 많은 시련을 겪으며 부단하게 발전의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 계속 걸어가야한다. 4대 컬렉션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서 그들을 모방하며 따라가기보다는 한국패션이 서울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며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한류는 잠깐의 바람이라는 말들도 많았지만 지금까지 10년 넘게 지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문화를 넘어 산업으로 나아갈 시점이고, 그 선두는 패션이라고 생각한다. 이상봉 디자이너

[이상봉 칼럼] 아시아 패션의 허브 ‘드림로드’는 K-패션의 소울메이트

신록의 여름 냄새를 미리 맛보며 패션 여정을 떠난 5월 28일. 경기도 양주시에서 2015 경기 니트 콜라보레이션 패션쇼 및 경기섬유인의 날 행사가 열렸다. 지난해에 이어 필자가 회장을 맡고 있는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회원들과 함께 하는 패션쇼 행사라 기대와 걱정이 교차했다. 패션과 소재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열린 패션쇼는 섬유와 패션의 만남을 통해 경기도 섬유 소재의 우수성을 알리고, 한국 섬유산업을 활성화시키는 뜻 깊은 행사였다. 올 행사에는 경기도 소재 섬유 기업 대광레이스, 현일텍스, 성신섬유, 고려상사 등 12개 회사가 제공한 원단으로 필자와 장광효, 루비나, 홍은주, 정훈종, 신장경, 한동우, 곽현주 등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소속 8명의 신구 디자이너들이 직접 의상을 제작해 패션쇼로 선보였다. 사실 패션 디자이너들이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특별한(?) 패션쇼를 여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더욱이 업체에서 제공된 원단을 활용해 각자 개성이 드러나는 의상을 제작해 선보이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패션 행사가 여럿 있었지만, 그 때는 디자이너들과 섬유 기업 간의 B2B 소통은 거의 전무했다. 이런 특별한 패션쇼, 좋은 의상이 만들어지려면 디자이너와 섬유 기업 간의 우호적인 연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패션 디자이너와의 콜라보레이션이나 협업은 필수 사항이다. 한국 패션은 이제 중국을 넘어 아시아로 확대되고 있다. 지금 동대문 두타매장에 입점한 몇몇 패션업체들은 매출의 70% 이상을 중국 관광객들이 구매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중국에서 생산된 옷이 국내에 들어올 뿐 아니라,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생산된 메이드인코리아 패션 제품이 중국 현지로 수출되기도 한다. 어쩌면 앞으로 몇 년 뒤에는 중국 패션 산업이 한국 패션 산업을 추격하는 것을 넘어 추월하는 시대에 접어들 것이다. 중국은 이미 소재에서는 일부 한국을 앞서고, 봉제와 액세서리 같은 경우에는 한국을 뛰어넘는 엄청난 수준의 제조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런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유럽의 럭셔리 브랜드, 중국의 저가 제품도 아닌 바로 한국의 디자이너의 감성이 담긴 제품이다. 한류에서 패션은 어디로 향할까? 이제는 중국의 소재, 제조와 우리의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새로운 창조경영의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이번 경기 니트 콜라보레이션 패션쇼를 통해 섬유산업에 종사하는 많은 분들과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 패션 디자이너들이 손을 잡는다면 아시아 패션 허브를 꿈꾸는 K-패션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찬 꿈을 꾼다. 현재 경기도 섬유지원센터에서는 K-패션의 미래인 젊은 패션 디자이너들을 위한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 양성과 교육을 통해 낙후된 한국 섬유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지자체 경기도의 노력이 섬유산업에 종사하는 많은 영세 사업자와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꿈과 용기를 준다. 패션은 꿈꾸는 자들을 위한 희망로드다. 과거에 중국의 실크로드가 서양 패션에 영향을 주었듯이 K-패션의 미래는 드림로드를 통해 세계인들의 공감하고 소비하는 열린 패션 창을 여는 것이다. 이상봉 패션디자이너

[이상봉 칼럼] 패션쇼의 꽃 모델, 아시아 모델들 서울에 모이다

얼마 전에 배우 조달환과 영화 기술자들 출연진과 함께 회식 자리가 있었다. 멋진 카리스마를 지닌 학교 후배 고창석, 10년 전 오랫동안 나의 무대를 빛내주었던 임주환, 5년 전 한류패션쇼 무대에서 한글 의상을 멋지게 입었던 김우빈이 있었다. 우연한 만남이었다. 신기했던 건 오래 전 모습들이 다 그대로 남아있었다. 예전엔 모델이었지만 어느새 그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남자연예인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델 이야기를 한창 꽃피웠다. 지난 4월 24일 올림픽 공원에서 아시아 모델 시상식이 열렸다. 올해로 10번째를 맞이하는 아시아 모델 시상식은 아시아 최대의 모델 축제로 20개국을 대표하는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축제이다. 이제는 모델도 한류의 중심에 당당히 위치한다. 이번 아시아 모델 시상식에 참가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예선심사까지 열렸다. 그리고 서울이 하나의 아시아 패션의 중심으로써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모델은 패션디자인의 꽃이다. 예전 패션을 공부하며 처음으로 보았던 패션쇼, 높은 무대 위에서 구름 위를 나는 가벼운 워킹과 옷자락을 날리며 날렵하게 턴을 하는 모델들의 모습은 바람에 치마를 휘날리며 포즈를 취한 마릴린먼로 그 이상으로 날 매료시켰다. 차승원, 김민준, 김우빈. 탄탄한 몸매만큼이나 탄탄한 연기력으로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는 톱스타인 이들 남자 배우 삼인방은 모두 패션모델 출신이다. 그리고 박지혜, 슈조, 박성희, 곽지영 등 최근 해외에서 활동하는 우리나라 여자 모델들이 현지에서 톱 모델로 인정받으며 활발히 활동하는 것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서 최근 국내에서 모델을 꿈꾸는 어린 학생들이 부쩍 늘었다. 특히 최근 들어 국내 톱모델 출신들이 방송에 자주 등장하게 되면서 모델이란 직업은 연예인이 되기 위한 전 단계처럼 인식돼 더욱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되었다. 모델이란 경력 하나만으로도 늘씬한 키와 몸매 그리고 감각적인 센스를 인정받을 수 있어 더 많은 지망생들이 이곳에 몰린다. 대학에서도 모델학과들이 생겨날 만큼 모델이란 직업은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남자모델들이 국내에서 연기자로 성공하며 자신의 끼를 이어나간다면 여자모델의 경우는 해외진출로 자신들의 꿈들을 키워나가고 있다. 10년 넘게 파리컬렉션에 진출하면서 외국 모델들과 작업을 해왔는데 해외에서는 최근 아시아계 특히 한국과 중국의 모델들이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이 아시아모델에 주목하는 이유는 물론 신흥 아시아 시장의 확대를 위한 선택일수도 있지만, 최근 들어 국내 모델들도 서양 모델과 차이가 없다고 해도 될 만큼 좋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과 중국모델이 아시아를 대표하면서 이전에 그 자리를 차지했던 일본 모델들은 자연스럽게 그 뒤로 순위가 물러나게 되었다. 패션모델은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다고 할 만큼 신체조건이 중요하다. 키와 비율, 개성있는 얼굴, 그리고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워킹과 포즈, 이 모든 것을 골고루 갖춰야만 완벽한 패션모델이 될 수 있다. 그만큼 모델들은 철저한 자기 관리와 노력이 필요하다. 축복받은 몸은 그 만큼의 노력과 열정으로 가꾸어 나갈 때 비로소 세계적인 모델로 나설 수 있다. 패션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만큼 나는 그동안 내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 그 자리를 빛내준 모든 모델들에게 이 기회를 통해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이상봉 디자이너

[이상봉 칼럼] 즐기고 소통하는 K-패션과 중국의 바잉 파워

패션은 축제 그리고 비지니스다. 패션을 사랑하는 전국의 젊은 청춘들과 멋쟁이 패셔니스타들은 꽃샘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춘삼월을 맞아 서울의 랜드마크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로 몰려들었다. 젊은이들의 다양한 패션은 자신만의 개성과 트랜드를 맘껏 뽐내며 DDP를 우주의 정거장 같은 패션 해방구로 만들었다.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청춘들은 마치 파파라치처럼 패션피플들을 쫓고 그 대상인 피사체들은 매일 화려하게 시크한 표정으로 바뀐다. 찍는 사람이나 찍히는 사람이나 한 낮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 모두가 패션마니아들이었다. 행사 때문에 DDP를 방문한 바이어와 프레스는 말할 것 없고 동대문 시장을 찾은 관광객들도 이러한 패션 축제를 같이 즐기고 소통한다. 지구촌 멋쟁이들로 가득 채워진 DDP는 분명 서울의 또다른 얼굴이다. 올 가을/겨울 유행 경향을 미리 선보인 서울패션위크에서는 실내에서 진행된 기라성 같은 디자이너들의 58회에 걸친 서울컬렉션과 야외무대에서 펼쳐진 젊은 루키들의 21회에 걸친 제너레이션 넥스트 컬렉션 등 모두 79회의 패션쇼가 6일간 숨 가쁘게 진행됐다. 약 5만5천6백명에 달하는 수많은 관객들은 마치 밀물과 썰물이 빠져나가듯 파도처럼 DDP를 휘감아 돌아 마치 강강수월래를 보는 듯했다. 젊은 스트리트 사진작가들이나 스타일 블로거들은 자신의 블로그를 위해, 아니면 새로운 트랜드를 포착하기 위해 야수의 눈빛으로 사람들의 옷차림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했다. 옷차림으로 수많은 시선들을 유혹하는 특별한 광경은 시골 사람들을 서울 나들이에서 미아로 만들어 버린다. 보름 가까이 오디션, 피팅, 리허설 등으로 지친 모델들이지만 패션쇼 음악이 시작되면 긴장한 눈빛과 카리스마로 수천 개 눈동자들을 클론으로 만들어 버린다. 시간과 공간이 교차되는 동대문의 거대한 우주선 안은 일주일간 지구촌 패션 축제의 장이 된다. 이번에 선보인 이상봉 컬렉션은 지난 2월에 진행된 뉴욕패션위크 때와 다른 이미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진정한 나를 담고 싶었다. 영화 와호장룡에서 나온 주윤발과 장쯔이의 대나무밭 결투를 생각하며 두 마리 새가 위태롭게 지탱하며 춤추는 모습에서 무엇이 강함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얀 천 350야드를 길게 겹겹이 늘어뜨리고 영상으로 화려한 목단을 먹으로 그려놓아 잠시의 영광도 순간의 먹물처럼 흘려내리는 하얀 백지의 미학을 비움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왜 와호장룡의 죽음의 결투에서 극단적인 아름다움을 느꼈을까. 세상의 미련을 버리는 초탈의 무념무상을 느끼고 싶었을까. 사실 이번처럼 담담하게 패션쇼를 마친 건 처음인 것 같다. 패션쇼가 끝난 뒤 프랑스 파리 모드아트의 학장, 학생들과 함께 K-패션 쇼룸인 르돔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섬유, 패션, 봉제의 행사장마다 열정으로 참여하는 전순옥 의원과 함께 한국 패션과 프랑스 패션의 만남을 가졌다. 지금 하이엔드 패션 수출에서 중국 바이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70%가 넘는다. 이것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지만 5년 정도는 유효할 듯하다. 그들은 이미 서울에서 빅 바이어로 바잉 파워를 과시하고 있으며 동시에 K-패션을 즐기고 있다. 어느새 한국 디자이너들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야하는 시대에 와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하이패션이 중국 수출에 있어 작은 비중을 차지할지는 모르지만 우리 디자이너들은 감성과 문화를 파는 디자인의 최첨단에 서 있다. 이제 매일 찾아오는 중국 바이어들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친숙해졌다. 어쩌면 그들을 위해 중국에서 따로 패션쇼를 해야 하는 날이 곧 올지도 모른다. 중국인들의 옷차림과 얼굴이 변해가고 이제는 감성마저 우리를 닮아간다. 몇 년 뒤에는 한국 패션 잔치를 그들을 위해 벌일 수도 있음을 걱정하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마지막으로 이번 서울컬렉션에서 패션쇼를 열고 동료 디자이너들의 패션쇼를 보면서 문득 떠오른 진실이 있었다. 바로 패션 행사의 주체가 관에서 패션 전문가로 전환이 되어야 창의적인 디자이너 육성을 할 수 있고 한국 패션의 발전에 무지개가 뜰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진실이 꿈이 아닌 현실이 되길 기원해 본다. 이상봉 디자이너

[이상봉 칼럼] “패션쇼는 나에게 소설이자 영화이자 운명이다”

매년 9월과 2월 뉴욕으로부터 시작해 런던, 밀라노, 파리로 이어지는 패션쇼를 세계 4대 컬렉션이라 부른다. 그리고 파리 컬렉션이 끝나는 동시에 서울, 도쿄, 베이징, 모스크바 등 세계 각 도시에서 컬렉션이 열린다. 이제 컬렉션은 세계 패션이 소통하는 공간이 되었다. 1998년 1월, 나는 처음으로 파리 프레타포르테 전시회로 떠났다. 그로부터 5년 뒤 파리 컬렉션에 참가하기 시작해 12년 동안 1년에 네 번씩 파리를 찾았다. 그리고 2012년부터는 디자이너들의 해외 진출 지원 프로젝트 컨셉 코리아를 통해 뉴욕 컬렉션에 참가한 것이 계기가 되어 파리에서 뉴욕으로 컬렉션 장소를 옮긴지 세 시즌째다. 작년 11월부터 뉴욕 직영 매장을 준비하며 2015 가을/겨울 뉴욕 컬렉션도 함께 준비했다. 이번 출장에서 이상봉 뉴욕 매장을 처음 본 감정은 85년도에 명동에 처음 매장을 오픈했을 때 느꼈던 감정 그 이상이었다. 처음 고객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설렘과 두려움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라웠다. 지난 2월 11일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뉴욕 매장 오프닝 파티장으로 향했다.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많은 패션 피플들이 방문해 그들과 샴페인을 마시면서 축하 인사를 받았다. 이튿날인 12일부터는 2일간의 스타일링이 이어졌고, 이틀 동안 모델에게 수많은 옷을 입혀가면서 컬렉션을 완성해 나갔다. 이틀 뒤부터는 모델 오디션을 보았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수많은 미인들은 평균키가 178-180㎝였다, 힐을 신으면 2미터에 가까운 늘씬한 모델 앞에서, 작은 키의 디자이너들은 발뒤꿈치를 들고 옷매무새를 만진다. 오디션장에서는 그들이 정상이고 다른 이들은 난쟁이가 되는 이상한 풍경이 벌어진다. 패션쇼 하루 전 날 SNS를 통해 평소에 친분이 있었던 홍석천이 뉴욕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인 타운에 있는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군침이 도는 게장이 서비스로 나오니 손이 가는 건 당연지사. 그런데 처음 무는 순간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떨어졌다. 윗니 가운데가 허전했다. 너무 놀라 바닥을 뒤지다가 이가 부러졌다고 말하니 걱정과 염려로 주변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당장 내일이 패션쇼였기 때문에 쇼를 앞두고 이게 무슨 시련인가 싶어 마음이 무거웠지만 차라리 액땜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꿔야만 했다. 이가 부러진 내 얼굴은 코미디언을 보는 듯했고, 가운데 텅 빈 이빨에는 뉴욕 추운 겨울바람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다행히 일행 중 의사가 있어 치과 의사를 소개받아 다음 날 아침 패션쇼장으로 가는 대신 치과로 향했다. 약 한 시간 동안 무서운 드릴 소리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은 채 버텼다. 치료를 마치고 쇼 장에 도착하자 긴장이 풀렸다. 지금까지 200번 가까운 패션쇼에서 느꼈던 긴장감이 무색할 정도로 긴장이 되지 않았다. 헤어와 메이크업, 음악, 프로덕션 등 패션쇼를 준비하기 전 수많은 사람과 미팅을 하고 그들의 노력으로 패션쇼가 완성된다. 이번 패션쇼는 묵향이라는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곽선경 작가와 먹물이 꽃처럼 번져나가는 무대를 꾸몄다. 이번 패션쇼도 무사히 끝났다. 패션쇼의 1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10분의 시간은 내가 준비한 몇 달 간의 시간만큼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어느 순간에 끝났는지 모를 정도로 짧게 느껴진다. 전쟁 같던 쇼가 끝나고 백스테이지에는 축하 인사를 하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늘 패션쇼를 준비해 마지막으로 무사히 끝났을 때 느끼는 짜릿한 피날레 때문에 아직도 패션쇼를 계속하는지 모른다. 나는 오늘도 감사한다. 나는 늘 왜 파리와 뉴욕, 이 낯선 도시에서 패션쇼를 하는가에 대해 나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무속인의 몸짓이나 거룩한 종교 제례처럼 단순한 즐거움이 아닌 운명적인 의식이라는 점이다. 패션쇼는 내가 꿈꾸는 소설이자 영화가 되고 춤이 된다. 디자이너 이상봉에게 패션은 곧 삶이고 인생이다. 그래서 패션쇼는 늘 현재 진행형의 운명적 의식이다. 이상봉 패션디자이너

[이상봉 칼럼] 한 해의 끝자락에서… 패션은 사랑이다

올해는 유난히 힘들고 아픈 사건들로 인해 상처투성이다. 매서운 바람과 강추위는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12월을 더욱 더 동토의 왕국으로 만들어 버리는 듯하다. 연말에는 그 어느 때보다 무서운 한파가 한반도에 몰아쳐 세상을 꽁꽁 얼리더니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아쉬운 마음마저 꽁꽁 얼게 만들었다. 거리에는 예년의 크리스마스 캐럴송도 사라졌고, 반짝이던 연말 경기조차 가벼운 주머니 단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마도 경기 침체와 세월호 참사 등으로 경제적심리적으로 위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고 도와주어 결국 함께 일어나는 것이 한국인의 저력이자 힘이다. 때문에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따뜻한 온정들이 사회에 온기를 불어 넣어준다. 덕분에 연말 송년회의 비틀거리는 발걸음은 사라지고 서로의 사랑으로 인해 길거리는 사랑방이 되어가는 듯하다. 얼마 전 내가 회장을 맡고 있는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CFDK)의 2014년 CFDK 어워즈 시상식과 송년 파티에 많은 분들이 응원의 발걸음을 해 주었다. 전순옥, 진선미, 이자스민 국회의원, 현삼식 양주시장과 포천시의회 이형직 부의장 등이 참석해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힘찬 격려와 용기를 주었다. 여기에 항상 우리 패션 디자이너들을 응원해주고 장소까지 빌려주신 두타 이승범 대표도 마지막까지 자리를 함께 하면서 패션 디자이너들과 한국 패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고민과 비전을 공유했다. 또한 10년 전부터 나를 비롯한 문화인들이 해오던 파티를 5년 전부터는 지인들과 함께 다문화가정 어린이 문화 예술 활동 지원을 위한 안최이임홍 파티도 며칠 뒤 열었다. 많은 분들의 도움 없이는 연말 행사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다. 두개의 큰 연말 행사를 치르는데 도움을 준 지인들과 협찬사에 지면으로 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며칠 전에는 천호동 소재의 명진아동복지센터에 산타와 함께 방문했다. 3년 전, 서울패션위크에서 박원순 서울시장님과 자선 패션쇼에서 만났던 아이들이 어느새 훌쩍 큰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작은 정성과 사랑을 잊지 않고 있는 아이들의 순박한 미소를 보고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들을 잊고 있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내가 누군가를 도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타가 나에게로 온 것 같았다. 물품만 보내 주는 것 보다 직접 방문해 사랑을 함께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꼭 다시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추운 겨울 그들의 따뜻한 배웅은 나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우리 섬유 패션계 역시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련의 시기였다. 국내 패션산업의 외형은 매년 확대되었지만 국내 중소 패션기업과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엄청난 물량 공세의 해외 SPA 브랜드와 럭셔리 브랜드들의 양극화 놀음에 새우등만 터지고 있는 격이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패션의 양극화 현상은 갈수록 심화될 뿐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패션은 단순히 브랜드나 가격 경쟁만이 전부가 아닌 창조적인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K-패션 역시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경기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K-패션 빌리지나 국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K-패션 엑스포는 대한민국 패션산업 발전을 위해서도 주목할 만한 일이라 생각한다. 디자인과 소재, 봉제까지 어우러진 패션산업을 중심으로 생활문화 분야까지 접목시킨 K-패션 빌리지, 국내의 패션 전시 산업 활성화 및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의 K-패션 엑스포는 우리 패션산업이 아시아의 중심이 되는데 커다란 밑거름이 될 것이다. 옛말에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다. 다가오는 2015년 새해에도 새해는 떠오르고 우리의 희망과 꿈은 계속될 것이다. 비록 지면으로 만나 뵙는 모든 분들에게 행복과 행운을 기원하며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상봉 패션디자이너

[이상봉 칼럼] 이상봉의 삶,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

이상봉이란 브랜드가 이제 내년이면 30년이 된다. 그 세월 동안 나는 집시 같은 삶을 살아왔다. 서울은 물론이고 파리와 뉴욕, 런던, 아프리카, 남미 등 전 세계를 다니면서 패션으로 세상과 소통했다. 바람처럼 물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기를 원했고, 나는 불같은 열정을 닮고 싶었다. 나는 어린 시절 평범했지만 꿈 많은 소년이었다. 중학교 때는 오페라 가수를 꿈꾸었고, 고등학교 때는 글쟁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연극을 처음 본 후 나의 꿈이 바뀌었고 연극의 열정적인 에너지는 나에게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군 복무 중 아버지의 죽음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나는 연극을 포기하고 생계 수단으로 패션을 선택했다. 우연히 신문 광고를 보고 찾아간 복장학원에서 바느질부터 배우기 시작했고, 아들이 바느질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 흘리시던 어머니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어머니가 올해 초에 돌아가셨다. 뉴욕 컬렉션을 마치자마자 한국으로부터 어머니의 부음을 듣게 되었고 결국 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함께 하지 못한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2009년 파리 컬렉션 때도 여동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만 일정 때문에 장례식장에만 들르고 발인에도 참석하지 못했었다. 집시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패션 디자이너의 삶에 비행기 안에서 나는 속으로 한없이 울었다. 뉴욕으로 떠나 링컨 센터에서 2015 봄/여름 이상봉 컬렉션을 가졌다. 이번 패션쇼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디자이너를 꿈꾸던 소년에게서 영감을 받은 패션쇼였기 때문이다. 불의의 사고로 꿈을 채 피워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소년의 스케치를 보고 옷을 만들면서 꿈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결국 그 영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림 로드라는 하늘가는 길이 패션쇼 테마가 되었다. 패션을 통해 아픔도 고통도 꿈으로 승화시키고 싶었다. 1년에 2 번씩 치르는 홍역을 벌써 2002년부터 13년째 치르고 있다. 뉴욕에서 300명에 가까운 모델 오디션을 시작으로 스타일리스트와 새로운 룩을 만들고 헤어, 메이크업, 음악, 촬영, 인터뷰 등 하루 24시간이 수없이 쪼개진다. 이번에는 뉴욕 매장 오픈 건으로 인한 인테리어 미팅까지 이어지는 쉴 틈 없는 여정으로 인해 시차조차 들어올 틈이 없다. 뉴욕에서 돌아와서는 바로 인천으로 달려갔다, 이번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전야제 패션쇼를 열어야 했기 때문이다. 개막식을 위한 한류 스타 김수현과 장동건의 의상과 뮤지컬 배우들의 한글이 들어간 의상을 제작하고, 전야제 패션쇼에서는 한글과 단청, 창살문양 등 우리의 전통적인 요소를 패션에 접목한 의상을 선보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중국 천진에서 초청받은 패션쇼를 치르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천진의 고층 호텔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강은, 패션 디자이너로 산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 패션쇼의 긴장감은 이방인을 감싸는 안개 속에 묻혀 버리고, 오랜만에 어깨 힘을 빼고 멍하게 있었다. 그렇게 천진에서의 패션쇼가 끝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동대문 DDP에서 열린 이번 서울패션위크는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행사였다. 서울 패션 위크가 끝나갈 즈음 가을비가 축적추적 내렸다. 나는 잠시나마 진한 커피 향에 취해본다. 뜨거웠던 6일간의 K-패션의 열기도 어느새 가을 빗속으로 사라져 갔지만 패션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디자이너는 1년을 앞서서 살아가야 한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뿜어내는 창조적인 열기와 컬렉션 장을 오가는 패션 피플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일상적인 디자이너로 돌아가서 2015 가을/겨울 위한 새로운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새로운 패션에 대한 나의 열정이 뜨거운 만큼이나 직원들의 고통과 희생도 클 것이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늘 미안하고 고맙다. 서울을 떠나며 우리 직원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긴다. 이상봉 디자이너(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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