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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돋보기] 사랑한다면 처벌할 수 없는가

서른여덟 살이었던 그녀는 존경받는 중학교 선생님이었다. 이미 결혼하고 출산해 어린 아이를 두었던 그녀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그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출산과 함께 부부관계에 시들해진 남편 대신 그의 정열은 육아로 지친 그녀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의 구애는 젊은 시절을 어딘가에 잃어버리고 온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그녀에게 일깨워주었고 둘은 결국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나 사랑의 대가는 컸다. 결국 그녀는 구속됐고 그와의 사랑 때문에 징역살이를 하게 됐다. 간통죄는 미국에 없지만 만 16세 미만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성관계를 갖는 것은 엄격히 금지돼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만 15세 제자와 사랑에 빠졌던 여선생님은 의제(擬制)강간죄로 처벌을 받게 됐다. 수감될 당시 제자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던 여교사에 대해 플로리다 법정은 엄중한 법집행을 했고 그녀는 파렴치범이 됐다. 우리나라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 미성년자와의 성관계로 처벌받는 경우는 아래 네 가지다. 첫째 미성년자를 폭행ㆍ협박해 강제로 성관계를 가진 경우 아동ㆍ청소년에 대한 강간죄로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해진다. 둘째 형법 305조는 13살 미만의 사람에 대해 간음한 자는 강간죄로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의제(擬制)강간 조항이 이것인데 미성년자가 아무리 자발적 의지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만 13세 미만 아동의 성은 보호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형사처벌을 내린다. 셋째 성관계를 가진 미성년자가 만 13세 이상~만 19세 미만인 경우 자유의사에 의해 성관계를 했어도 속아서 했다고 인정되면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처벌된다. 넷째 성관계를 한 미성년자가 만 13세 이상~만 19세 미만인 경우 자유의사로 성관계를 했어도 대가가 있었다면 성매매로 인정돼 처벌받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만 13세가 넘어서면 사제지간과 같은 특수 관계에 있어 발생하는 다양한 성적 유인으로부터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위에 제시한 사건도 만일 미국이 아니라 우리나라였다면 물질적인 대가나 폭력 혹은 명시적인 속임수 등이 없었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만 15세 이하의 아동ㆍ청소년은 아직까지 의사결정력이 성인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확실히 성보호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때 물론 또래들끼리의 연애는 처벌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작년에도 금년에도 우리나라 사법부는 비슷한 연령대의 청소년과 성관계를 맺은 어른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만 15세 여중생을 연예인 만들어주겠다고 꼬드겨 내연관계를 맺은 기획사대표에게 대법원은 무죄 평결을 내렸고 얼마 전에도 만 15세 학생과 성관계를 맺은 교사에게 사랑했었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줬다. 과연 우리나라의 만 15세는 미국이나 영국 호주나 대만의 또래들보다 더 성적으로 성숙한가? 의사결정력 역시 더 우수한가? 갑자기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의제(擬制)강간의 연령기준이 적합한 것인지 공론을 모아볼 때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세상 돋보기] 미래가 걱정이다

주말에는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시부모님을 돌봐드리러 간다. 팔십이 넘으신 시어머님은 치매로 휠체어 생활을 하시며 아직 정정하신 시아버님이 아픈 시어머님을 돌보신다. 두 분을 도와주시는 요양인 아주머니가 계시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며느리인 필자가 직장이라도 그만둘 판이다. 간혹 요양시설에서 부모님들이 생활하시도록 하는 가정도 있으나 맞벌이 가정인 우리 부부는 조금 남는 여유로 요양인 아주머니를 고용해 두 분을 집에서 모시기로 했다. 내게는 장성한 아들과 딸이 있다. 혹시나 이들이 나중에 우리를 부모님 모시듯 돌봐줄까 생각해보면 절대 그렇지 못할 것 같다. 5포세대인 이들은 아직도 반반한 직장도 가정도 꾸리지 못했다. 대학을 4년 이상씩 다니면서 취업준비를 하는 이들은 안정적인 연애나 혼인은 아직 꿈도 못 꾸고 있다. 이십년 전까지만 해도 이십대 후반 정규직으로 시작하던 청춘들이 이제 비정규직 직장도 구하기 어려운 판이니 이들에게 부모에 대한 부양의 의무까지 짐 지우기란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인구학자들은 2020년 우리나라의 65세 노인인구는 전체 인구의 약 15%에 이르게 된다고 예측한다. 확실히 고령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노인이 되는 2030년에는 1명의 젊은이가 2명의 노인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 이는 모두 1.2명이라는 출산율 때문에 발생하는 일인데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이 현재보다 더 나아지지 않는다면 현재의 출산율은 더 떨어질 수도 있겠다. 노동시장이 나아지지 않으면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얻기 어려울 것이며 일자리 없는 이들은 혼인이나 출산을 모두 기피할 것이므로 지금 같은 만혼과 노산의 현상은 결국에는 아이를 생산하지 않고 사는 가구 수를 증가시키게 될 것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 집 아이들 둘은 별로 결혼에 대한 달콤한 꿈이 없다. 극한의 경쟁으로 내몰린 중고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진학을 했으나 꽁꽁 얼어붙은 취업시장으로 인해 사회진출은 암초에 부딪혔고 그러다 보니 연애나 혼인 출산 등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썸탄다라는 말이 유행이다. 가끔 여자 친구를 만나는 기미가 보이는 아들에게 하루는 사귀지만 말고 결혼도 생각해보라는 취지의 말을 꺼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자기들은 사귀는 것이 아니란다. 그냥 썸 좀 타는 사이라는. 썸과 연애의 차이는 책임을 지느냐 안 지느냐의 차이라는 답변과 함께. 자신은 아직 부양의 책임을 질 위치에 있지 않으니 누구에 대해서도 부담감을 갖고 싶지 않단다. 이렇듯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것이 힘든 젊은이들에게 있어 미래에 대한 불안은 불같은 연애 감정조차 누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경제사정이 나아지지 않는 이상 젊은이들의 좌절은 계속될 것이며 이들이 좌절하는 동안은 1.2명이란 출산율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이번 주말에도 어김없이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어른들께 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이런 수발을 받을 기회조차 없을 것이란 사실이 맘을 울적하게 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세상 돋보기] 위기대응력, 이대로는 안된다

메르스 공포로 온 나라가 떨고 있다. 인파로 붐비는 곳을 모두 피하다보니 날씨 좋은 주말이었음에도 대형마트나 고속도로가 붐비지 않았다. 놀이터에는 아이들을 찾아볼 수 없고 주중 행사들은 휴교령과 함께 앞 다투어 취소됐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승객 수도 줄었고 외식을 피하다보니 영업점들은 울상이다. 대신 온라인 배달업체만 호황이라니 메르스로 인해 가파르게 변해가는 풍속도가 신기하기만 하다. 어차피 이렇게 모든 일들이 점차 마비되어갈 것이었다면 왜 애당초에 소수의 환자들과 특정 병원을 격리조치하지 않았던 것일까? 평범한 시민으로 생각해보아도 감염의 공포가 이 나라를 휩쓸고 지나갈 것이 뻔한데 왜 이 지경이 될 것을 미리 손을 쓰지 못했던 것인지 궁금하다. 정부의 대응능력에 대한 불신은 이미 도를 넘었다. 과연 정부만 사태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일까? 생각해보면 국민들도 경각심을 갖지 못하였던 것은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채 여러 가지 행사에 참석한 의사나, 자가격리를 명령받고도 버젓이 동네사람들을 만나고 시장도 보면서 일상과 다름없이 생활했던 시민들, 반면 공기 중 감염이 안 된다고 알려져 있음에도 사실관계에 대한 정확한 확인 없이 언론보도부터 해 극도의 불안을 조장한 지자체, 모두 메르스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하겠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되는 점은 위기 앞에서 우리나라의 행정질서에는 일사분란한 위계가 존재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메르스에 대한 공포에 떨고 있는 국민들은 각종 인터넷괴담을 유일한 정보의 원천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무정부적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오월 한 달을 외부 위원으로서 국고보조금으로 집행되는 각 부처의 과제에 대한 예산 평가에 참여했다. 과제 발주기관 중에는 메르스에 대응해야 하는 책임부처도 포함돼 있었다. 서른 개가 넘는 보조금 과제의 예산을 평가하면서 느낀 인상은 너무도 많은 예산이 별로 예산집행이 절박하게 필요하다고 판단되지 않는 기반시설의 설치 및 시설관리에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라기보다는 특정 지자체를 지원하는 듯한 예산의 비중이 과도하게 크게 책정돼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법적 장치는 이런 예산들을 대폭 삭감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발생하도록 그 근거를 떠받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이기적인 입법과정 역시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메르스로 인한 총체적인 난맥상을 보면서, 국고로서 수많은 불필요한 사업들이 수행되고 있다는 점이 다시 떠올랐고 국고는 오히려 이번 사태처럼 온 국민을 혼란과 불안에 빠뜨리는 문제에 집중 투자돼 보다 선진적인 행정시스템의 구비에 사용돼야 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반문을 하게 된다. 국민에 대한 긴급하고도 일사분란한 정보의 제공과 행동지침 안내가 특정 지자체에 전시관들을 짓거나 길을 넓히는 일보다 우선돼야 하는 것이 아닌지 회의감마저 들었다. 안타깝기 짝이 없는 한심한 상황을 한 주 이상 대면하면서 정부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이런 총체적 난맥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세상돋보기] 자살예방법, 비교하지 않는 삶

주말이라도 한국인들은 다들 바쁘다. 고속도로는 평일보다 더 막히고 주요 간선도로들도 흐름이 느리긴 마찬가지다. 새벽부터 골프나 등산 등 운동을 나가는 인파에, 오전 시간대엔 교회를 다녀오는 사람들, 그리고 이어지는 저녁 귀갓길까지, 심지어 휴일이라도 하루 종일 번잡하기가 이를 데 없다. 일찍이 사회심리학자 페스팅거(Festinger)는 자신과 타인을 비교해보려는 심리를 사회적 비교(social comparison)라고 지칭했지만 한국에서 이 개념은 상호경쟁주의와 더불어 더욱 극대화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학업이나 일의 영역에서만 서로 비교하고 경쟁할 뿐 아니라 휴일 여가 시간마저 내가 제일 잘 놀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 같다. 한동안 너나할 것 없이 골프에 매달리다가 요즘에는 또 캠핑이 대세인 것 같다. 간혹 산이라도 오를라치면 대부분 등산객들이 비슷비슷한 복장을 한 것도 우리나라 사람들 고유의 상호비교와 경쟁의 원리에서 유래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대세로부터 뒤처지지 말아야 할 것 같은 강박은 심지어 휴일까지도 지치고 피곤하게 만들게 된다. 우리의 지나친 비교의식과 경쟁주의가 한국인 특유의 성실근면성과 결합되면 더욱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는 것 같다. 매년 수백억 단위의 자살예방 예산을 쏟아붓고도 여전히 8년째 자살통계가 OECD 국가들 중 1위를 달리고 있는 점도 이 같은 우리들의 심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경쟁적인 비교를 통한 상대적 박탈감,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보려는 쉼 없는 몸부림, 그래도 여전히 남들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조급한 좌절감, 이것이 악순환 돼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결국에는 극단적인 결말을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끔 외국에 나가보면 현지인들의 생활이, 평일이나 주말이나 너무나 한가롭고 단조롭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우리는 국회에서, 청와대에서, 혹은 광화문 시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마치 내 일인 양 관여하고 개입하지만 외국의 경우 이런 문제가 관심의 중심이 되는 사람을 만나긴 쉽지 않다. 공적 영역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적 영역, 본인이나 가족의 안위로 하루 일과를 보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일터에서는 최소한의 시간만을 보낼 뿐 저녁시간대는 늘 가족과 함께 한다. 그러다 보니 매일매일이 우리로서는 주말에나 보낼만한 그런 시간들로 채워진다. 정치나 경제 이슈는 저 건너 이야기일 뿐 아내와 자식이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가 늘 화제의 중심에 가 있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잘 나가는 사람들과의 비교는 중요한 삶의 준거가 아니다. 치솟기만 하는 자살률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정신보건 예산을 대폭 늘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항우울제의 투약이 근본적으로 삶의 패턴을 바꿔 놓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추정케 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오래된 삶의 패턴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해볼 때가 된 것 같다. 인구 십만 명당 거의 삼십 명이 자살하며 아동청소년기 사망의 제 1원인이 자살인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남들과 경쟁하고 비교하지 말자. 바깥일로 바쁜 일상을 살기보다는 내 집 식구들의 일상을 챙기자. 퇴근 후 술좌석도 줄이고 주말까지 일하는 경우도 줄이자. TV도 끄고 식구들이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그들의 일상에 관심을 갖자. 내가 그리고 내 가족이 세상의 중심이 돼야 남들로부터의 소외감과 열등감으로 세상을 등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수정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교수

[세상 돋보기] 봄꽃처럼 희망이 도래하려면

지구온난화의 영향인지 온천지에 꽃잔치다. 날리는 벚꽃 잎 아래를 걷다보면 빡빡한 일상에 얼어붙었던 마음까지 다 녹아내리는 듯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잠시뿐, 언론매체에서 연일 보도되는 높은 분들의 부당행위는 평범한 우리들의 맘을 도로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법 개정을 하면서까지 정부는 전직 고위인사들을 산하기관으로 내려 보내고 민주투사 연하던 국회의원들은 국가예산을 투입하는 각종 개발사업으로 자신의 재산 불리기에 나서고 있다. 대통령은 늘상 적폐해소가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강조하고는 있으나 심지어는 비리로 수사 받던 재벌기업 회장이 목을 매면서 이름만 대도 알만한 우리나라 전ㆍ현직 청와대 고위층까지 상납고리라고 발고하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이지경이 되고 보니 평범한 시민들은 누구를 신뢰하고 따라야 할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평범한 납세자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위정자가 출현해줄 것을 기대했었지만 보궐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정치권의 행태는 세태가 전혀 나아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여전히 과거 정권의 부패비리에 앞장섰던 전직 정치인들의 목소리는 오늘날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뻔히 넌센스임을 알면서도 각 지역의 맹주라는 과거의 그분들에게 알만한 정치인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유권자들에게 혀를 끌끌 차도록 만드는 구태로 재연되고 있다. 세월호는 그것대로 미완의 과제를 남긴 채 막을 내리고자 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의 싸움판이 됐고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논의하던 노사정 협상은 결국 결렬돼 이번 봄 노동계의 대정부 투쟁이 예상되고 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다보니 매달 월급봉투를 들여다보며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월급쟁이 소시민들은 점점 정치에 냉소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정치얘기는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과연 정치권은 이 같은 사태를 알고나 있을까? 정말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다. 누가 누구를 다스린다는 것인가? 령이 서지 않는 권위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적폐해소를 한답시고 제일 힘없는 정부 산하기관의 과거 정산내역을 들쑤시는 일로 세상이 깨끗해질 것이며 그것으로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만에 하나 이 정도로 보통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면 시대착오적이다. 검찰총장은 자살한 기업인의 옷 주머니 속에서 발견한 메모지 한 장으로 부패비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한 부처의 수장이 자신보다 더 강력한 권력 속 핵심인사들의 비리를 제대로 들춰내기나 할까? 국민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만일 이번에도 세월호 사건 때처럼 가장 힘없는 공무원 한두 명 처벌하고 말 일이라면 그냥 수사니 재판이니 하지 말고 현재 논쟁에 휩싸인 사람들 모두가 앞에 나와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부터 하는 게 옳다. 과거 학창시절 단체기합을 받을 때, 잘못한 친구와 함께 공동책임을 진다는 차원에서 벌받았던 일, 기억나지 않는가? 당시를 회상해보면 좀 억울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비행을 저지른 친구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책무의 방기, 그것이 내 잘못이었다. 국민들이 보고 싶은 장면은 잘잘못을 따지는 아전인수 격 난장판이 아니라 동료들의 잘못도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바로 그런 리더십이다. 맘 좀 편하게 아름다운 봄을 만끽하고 싶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세상 돋보기] 어떤 의료인의 죽음

내게는 팔십을 넘기신 두 어머님이 계신다. 한 분은 아직까지 혼자서도 거동이 가능하신 친모와 다른 한 분은 거동이 힘드신 시모이다. 친어머니의 경우 정신이 맑으셔서 노년기 전형적인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시지만 시어머니의 경우 노인성 치매에 의한 인지장애로 어린 아이가 되셨다. 식사만 잘 챙겨드리고 돌봐드리기만 하면 별다른 불편함을 호소하지 않으신다. 노인 특유의 우울감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이 분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제 대학동기가 목숨을 끊었다. 성형외과 의사였던 그는 안산 자신의 병원에서 20ml짜리 프로포폴을 네 병이나 맞고 유명을 달리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3주 전 동아리 모임에 나오지 않았던 그에게 전화를 걸어 늦게라도 나오라고 보채던 우리들에게 응이란 외마디만 하던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 날 그는 오지 않았다. 그에게는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이 있었다. 상가에서 만난 유족들은 그의 뇌종양은 회복 불가능한 악성이었으며 4㎝ 이상 되는 덩어리가 머릿속에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퍼져있었다고 한다. 특히 두정엽 깊숙이 박힌 종양덩어리는 제거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부인이 전하는 말로는 자신의 변해가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가장 무섭다고 했단다. 신경계 마비가 오기 시작한 그는 언어기능에도 문제가 생겨 의사소통이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기억력에도 손상이 왔다고 한다. 특히 구정 때부터는 증세가 급속히 악화돼 언제라도 입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엘리트로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가 자신의 변해가는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아이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싫었던 그는 희망 없는 치료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지난 달 뇌종양이 걸린 검사의 마지막 분투기를 소재로 한 펀치라는 지상파 드라마가 있었다. 주인공은 거의 6개월 정도의 시간을 자신의 잘못된 과거력을 바로잡는 데에 사용했다. 결국 드라마는 마지막 순간 아내의 도움으로 사필귀정의 결말로 막을 내렸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에게는 뻔한 결말이지만 마지막 시간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명확히 의식하지만 시간이 너무 짧아 준비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조문을 온 많은 동기 의사들은 그의 죽음에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의료인으로서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었던 듯하다. 안락사가 불법인 한국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눈앞에 둔 전문의료인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 그래도 의료적 지식이 없는 필자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우리는 그의 부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자신의 죽음을 알려야 할 지인들의 명단만을 남겨 둔 그의 막막했을 심정이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통을 좀 나누어 줄 수는 없었을까? 그것이 그가 없을 자리를 미리 준비토록 하는 배려라고는 생각지 않았을까? 죽음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특히 이번처럼 경황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은 더욱 그렇다. 남은 자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해 보인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세상 돋보기] 분노폭발장애에 수긍하는 사회, 그것이 바로 문제다

분풀이 범죄로 세상이 시끄럽다. 슈퍼마켓 인수계약이 불발하자 상대방 영업장에 가서 분신을 하며 홧김에 방화까지 벌여 현장에 있던 손님과 형사를 다치게 한 아주머니, 운전 중 양보를 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삼단봉을 꺼내 상대 운전자를 마구 내리친 멀쩡한 젊은이, 이별을 통보한 애인이 계속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차량으로 몰아붙여 무고한 길가 전시장으로까지 차량을 돌진시킨 구애자, 과거에는 듣도 보도 못한 사건들이 연일 우리를 경악하게 만든다. 건강보험심사원은 최근 충동을 조절하지 못해 진료를 받은 환자들이 2009년도에는 3천700여 건, 2011년에는 4천400여 건, 2013년에는 4천900여 건에 이르렀다고 보고했다. 이는 최근 자신의 충동적인 분노를 억제하기 못해 폭력사건에 연루되는 사람들의 증가추세가 왜 발생하고 있는 것인지를 추론하게 만든다.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병, 왜 생기는 것일까? 혹자는 지나친 경쟁으로 일상에서의 스트레스에 지치다보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게 되어 분노가 폭발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이런 경우에는 한계상황에 되기 전에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설명을 곁들이는데 혹자는 아주 정반대의 설명을 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자신의 충동이나 사소한 분노를 참는 훈육에 아주 익숙한 사회였는데 요즘 세대들은 거의 모두 혼자 성장하다 보니 분노나 충동을 애초에 억제할 줄 모른다고 지적한다. 전자의 설명은 분노의 지나친 조절이 문제가 된다는 입장인데 반해 후자의 입장은 분노의 조절력 부재가 이 같은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반대 입장인 듯도 보이는 이 두 원인론은 근본적으로 보자면 동일한 뿌리를 지니는데 원인이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보자면 분노감이 팽배해 있는 상태가 문제라는 것이다. 바람이 꽉 찬 풍선처럼 가슴에 분노와 적개심이 가득 차게 되면 언젠가는 펑하고 터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들의 맹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최근 발생하는 분노범죄의 원인을 개인 안에서만 찾는다는 점이다. 아마도 예전에도 이런 사소한 이유로의 다툼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헌데 왜 유독 요즈음 이런 사례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다양화된 매체를 통해 지상파와 인터넷 방송으로 비이성적인 분노의 순간이 캡쳐되어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 바로 문제라고 판단된다. 이런 장면의 파괴력은 생각보다 크다. 그것은 비제지(disinhibition) 효과 때문인데 이렇게 자주 보도가 되고 있으니 이런 분노폭발행동은 실상 제지(inhibition)되고 있지 않는 것이며 그러니 무의식중에 나도 화를 참지 않아도 되겠지 하는 일종의 도덕적 해이의 상태로 사람들의 생각을 빠지게 만드는 효력이 문제다. 이것이 바로 분노가 사회적으로 만연되게 만드는 기제가 될 것이다. 결국 분노의 과도한 노출은 경각심을 일으키기보다 분노 폭발을 시대적 트랜드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사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지점은 특정 개인의 비이성적인 문제행동이 아니라 사회적 둔감화의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 이수정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교수

[세상 돋보기] 을미년, ‘우리’를 한 번 돌아보시길…

지난해부터 시작된 갑질 논란이 새해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다. 대형 항공사의 상속녀가 보인 부적절한 행위가 문제 되더니 백화점 고객 모녀의 주차요원에 대한 언행이 언론의 포화를 맞았다. 가진 자들의 특권의식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서는 거의 모든 논쟁을 갑과 을의 관계로 해석하려는 시도마저 엿보인다. 한번 갑으로 낙인을 찍히게 되면 더 이상 그들의 변명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서초동에서 일어난 소위 갑에 해당하는 일류대 출신 가장의 가족살해 사건은 우리에게 매우 색다른 시각을 제공하였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언론사에서 필자에게 묻는 가장 많은 질문은, 대관절 통장에 일억 이상이 있었으며 서울의 잘 나가는 강남에 중형 아파트까지 있었던 일류대 출신인 자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느냐는 것이었다.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으려면 사실 서초동 세 모녀 살인사건 피의자의 범행 당시 심정을 곰곰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피의자는 한때 틀림없는 갑이었다. 하지만 실직한 이후 그는 삽시간에 을의 처치로 추락하였다. 특히 2012년도부터는 거의 혼자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던 것 같다. 미래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과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내와 아이들과의 동반자살을 선택하게 만든 것 같다. 끔찍한 가족살해를 동반자살로 미화시키려는 사회적 시각에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논쟁을 잠시 뒤로하고, 이 대목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다름 아닌 갑과 을의 경계선이다. 과연 갑이란 지위가 인터넷이나 유선방송에서 목청 높여 성토하는 것처럼 그리도 공고한 것인가? 서초동 사건은 결코 그런 주장이 맞지 않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무리 갑이라 할지라도 한순간에 을의 위치에 놓일 수 있으며, 누구에겐가는 갑인 사람도 자기 자신은 막상 을이라고 여길 수 있다는 점. 세상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양분시키려는 이분법적 논쟁은 이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 가족의 병리에 대한 몰이해를 이끌었을 뿐, 설명의 논리로는 매우 부적절하였다. 장기적인 저성장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는 점점 더 고통받는 이들의 숫자가 늘고 있다. 이제는 중산층조차도 이 고통을 피해 갈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나도 금방이라도 절망의 나락으로 빠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각박하게 만들어 조금이라도 처지가 다른 사람을 발견하게 되면 적대감부터 갖게 만드는 것 같다. 영국 속담에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곧 이웃과의 고통분담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임을 시사한다. 공동체의식,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모습, 그것이 대안이 될 것이다. 서로를 갑과 을로 나누어 싸우고 헐뜯기보다는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이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혜안이 될 것이다. 이수정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교수

[세상 돋보기] 다문화사회, 멀고도 힘든 길

수원의 구도심에서 또다시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오원춘 사건을 연상시키는 토막살인사건으로서, 인근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하교시간이나 퇴근시간을 다들 앞당겨야 할 만큼 불안감이 비등하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검거된 피의자가 조선족이라는 점에서 외국인 거주자들에 대한 경계심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다. 외국인 범죄통계를 잠시 찾아보니 아니나 다르게 우리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경찰청은 살인, 강도, 강간, 폭력 등 외국인이 저지른 4대 강력범죄는 2010년도에는 6천444건이던 것이 2013년도에는 9천441건으로 늘어났다고 보고하였다. 이중에서도 성범죄의 증가추이는 심각한 수준인데, 2008년도에 비하여 거의 7배(같은 기간 다른 강력범죄는 증가추세는 약 4배가량 증가)가 늘었다고 한다. 산업구조의 특성상 외국인이 국내에 유입되는 추이가 감소치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이 같은 범죄발생률 역시 앞으로 감소하기보다는 지속적인 증가추세를 보일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 이제는 단순한 경계심 외에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야 할 때이다. 우리나라의 다문화 정책의 기조는 대부분 가족과 아동을 지원하는 정책 위주로 편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다문화가정지원책, 다문화교육정책 등 장기체류자의 가족지원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단기 체류자 혹은 합법적인 기간을 넘어 불법으로 체류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 불법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숫자는 약 18만 명 이상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들에 대하여 한편에서는 열악한 근로환경에서 근무하는 보호의 대상이라고 여기는 입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은, 불안정한 생활환경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탈법행위에 관한 부분이다. 범죄학의 주요 이론인 사회통제이론에서는 개인이 합법적인 집단에 소속되어 있어야 사회적 규범을 습득하고 범죄행위를 억제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또한 사회문화이론에서는 비행집단 등 일탈된 문화권에 놓여 있을 때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고도 하였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불법체류자는 현재 탈법적인 환경에 놓여있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주도적인 문화와의 동떨어진 일탈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오원춘은 살인사건을 저지르기 전 불법성매매와 음란물에 중독된 상태였던 것이 확인되었다. 이번 팔달산 사건의 주인공인 박춘봉 역시 동거녀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는 또다른 여인과 모텔을 들어가다가 검거되었다. 불안정한 체류방식, 그리고는 사회적 격리, 성매매나 음란물 등으로 인한 불법적인 자극에의 상습적 노출 등이 거대 사회에서 고립된 불법체류자들을 점점 더 한국사회의 규범으로부터 일탈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경찰의 순찰활동 등 단순한 치안정책 이외에 이들을 단단한 끈으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합법적인 사회적 규범에 단단히 묶어놓을 수 있는 부가적인 정책이 절실하다. 자진신고 기간 등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이들을 사회적으로 고립된 음지로부터 양지로 끌어올릴 대책이 시급하다. 불법체류자의 자발적 의지가 부재하다면 내국인에 의한 신고제도 등을 촉진하여 불법체류를 적극적으로 줄일 방법도 고려해 봄직하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세상돋보기] 정말 오해나 실수였을까?

지난여름 어느 지방검찰청의 수장이 공공장소에서 낯부끄러운 도착행위를 벌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더니 이번에는 전 검찰총장이 골프장 여직원을 성추행 한 혐의로 고소당하였다. 피해 여성은 피고소인이 여직원들만 사는 골프장 기숙사 방에 찾아와 샤워하고 있던 자신을 밖으로 불러내어 강제로 껴안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성추행 혐의를 입증하기 위하여서는 아직 조사가 더 필요한 것으로는 보이나, 대체 야심한 시간에 왜 전 검찰총장씩이나 하던 분이 여직원의 기숙사 방으로 찾아간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별다른 합리적 설명이 존재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 특정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대체 왜 특정 기관 고위직들에 의한 성 스캔들은 끊이지 않는 것인가? 누구보다도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명확히 알고 있을 수사기관의 수장들이 어찌하여 이 같은 일에 연루되는 것인가? 혹자는 성범죄의 발생은 사회전반에 퍼져 있는 성인지왜곡, 일명 강간통념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성범죄가 발생하는 데에는 피해자에게도 책임(그것이 야한 옷차림이던 애매한 행동이든)이 있으며, 사실 합의 하에 성적 접촉을 해놓고도 문제 제기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자신도 좋아해놓고는 왜?), 그리고 극소수의 행실이 좋은 않은 여성들에게만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오해 등이 바로 강간통념의 핵심이다. 수많은 연구들은 재판에 회부된 성범죄자들에게 있어 이 같은 강간통념이 매우 강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피고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혐의가 오해 혹은 무고에 의한 것이라 믿고 있었는데, 피해자가 사건 당시에는 자신의 행동에 동의를 했었는데 나중에 변심을 하여 고소한 것이고, 사실상은 애초 유혹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피해자였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강간통념은 성에 대하여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더 심하다고 알려진다. 특히 가부장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일수록 성에 대한 이중 잣대가 심하며 그에 따라 더 많은 강간통념을 지닌다고 한다. 최근 어떤 대학에 제출된 학위논문에서는 흥미로운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것은 나이에 따라 강간통념의 정도가 달라지며 그에 따라 청소년기 성비행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사실인데, 즉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성적인 인지왜곡이 적지만 나이를 먹어 사회화가 되면 될수록 강간통념이 늘어나면서 동시에 성비행에 연루될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결국 초등학생에게는 명백한 잘잘못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희석되고 왜곡되어 사소한 비행에는 무딘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이렇게 사태가 악화일로를 걷지 않도록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자신의 잘못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서는 잘못이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행위임을,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합의라는 것은 상대방의 뜻을 찾아 존중하는 것임을 제대로 교육하고 있는지 세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초등학교 오륙학년 때는 명백히 알고 있던 사실을 왜 어른이 되어서는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일까? 결국은 예방교육만이 이 모든 구설수를 피하는 길이란 생각이 든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세상 돋보기] 새로운 교육현장 공유하기

매달 소년원 아이들에 대한 가퇴원, 즉 가석방 심사를 할 때마다 상당수의 아이들이 검정고시 통과나 자격증 취득 등 상당한 성과를 내는 것을 보면서, 왜 이들은 애당초 原학교 시절에는 열심히 생활하지 않았던 것인지가 궁금해지곤 하였다. 지금까지는 이들이 열악한 가정환경으로 해서 가출하였고 그 결과 비행에 빠지게 된 것이겠거니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경기도 교육청의 命을 받아 특성화고등학교들을 탐방하면서 가정환경의 결핍만이 이들의 문제는 아니란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현재 필자가 방문하여 평가컨설팅을 하고 있는 학교들은 경기도 남부권의 특성화고등학교들이다. 특성화고등학교는 1997년에 신설된 초중등교육법에 의해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기존 실업계 고등학교의 대안적인 학교 모형으로, 과거로 따지자면 실업계학교들이나 대안학교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 학교에서는 고등학교의 일반 교과과정 대신 만화나 애니메이션, 요리, 영상제작, 관광이나 통역, 멀티미디어 등 IT 기술, 디자인 등 다양한 커리큘럼을 운영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고등학교는 일반계고등학교, 실업계고등학교, 특수목적고등학교, 산업체부설고등학교, 방송통신고등학교, 특성화고등학교 등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들 학교를 직접 방문하기 전에는 직업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하여 예전의 상고나 공고 정도를 연상하였다. 하지만 현장에서 지켜 본 특성화고등학교의 현실은 매우 달랐다. 획일화된 교육과정을 운영하던 과거 실업계고등학교들에 비하여 특성화고등학교의 학과들은 매우 특화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각고의 노력을 들여 현대사회의 시장수요에 맞춘 학과들을 갖추고 있는 학교들의 성과는 눈부셨다. 재학생의 65%가 졸업 전후에 모두 취업이 되며 20% 정도가 관련 전공으로 대학을 진학하는 이들 일부 특성화고등학교의 상황은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필자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일반계고등학교의 80% 이상을 선발하여 4년을 공부시키고도 제대로 된 직장에 학생의 반도 취업을 못시키는 대학의 현 상황을 고려할 때, 특성화고등학교의 취업 및 진학률은 가히 감동적이었다. 이런 학교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사회적 수요에 부응하여 교과과정의 혁신을 도모했다는 사실 이외에도 시장과 학생들을 직접 연계시키려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교사들에 의해 다양하게 발굴운영되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교육과정 및 대안교실들을 운영한다손 치더라도 학생들의 호응 없이는 성공하기 힘들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통제보다는 어린 학생들과의 신뢰관계를 맺기 위해 헌신하였다. 새벽부터 출근하여 주먹밥을 만들어 학생들의 등굣길을 환영해준다거나 상담교실을 만들어 청소년기 아이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부모 대신 보호기능을 담당해주고 있었다. 부모역할에 익숙하지 않은 보호자들을 대상으로 하여서도 양육기술에 관한 특강을 제공하고 자식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도록 유도하였다. 성공한 특성화고등학교들은 이렇게 사회적 안전망의 역할을 충분히 이행하고 있었다. 방과후교실이 끝난 다음에도 불 켜진 학교를 보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에도 환한 불이 함께 켜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교단에 함께 서는 입장으로서도 고개가 숙여지는 현장이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이수정 교수의 세상 돋보기] 음주폭력을 두고만 볼 수 없는 이유

술에 의한 범죄는 대부분 우발적으로 발생한다. 평소에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인데 술만 마시면 돌변하는 사람도 있고, 바깥에서는 자상한 아버지 훌륭한 직장인이 집에 와서 술을 마시면 부인을 때리고 자녀를 학대하는 괴물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형사사건 중 간혹 술김에 붙은 사소한 시비가 큰 싸움으로 번져 심각한 상해로 이어지거나 인명피해를 야기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의 원인이 술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더욱이 한 번 말썽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자신이 평상시에는 멀쩡하다가도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음 몸소 체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설마 나한테 무슨 일이 가볍게 한잔 하자는 건데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또다시 술잔을 기울이는 상황에 노출된다. 범죄와 술의 관계를 밝히기 위한 연구물들은 많다. 술을 마시면 중추신경계가 마비되어 행동에 대한 이성적 제어력을 잃기 때문에 의사결정능력 상에도 취약성이 발생한다. 우리나라의 형법은 이런 점을 인정하여 지금까지 술김에 저지른 범죄들에 대하여서는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인정해왔다. 하지만 문제는 음주습벽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임의명정, 즉 자발적으로 술을 마셔서 만취한 상태에서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음을 대부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즉 문제행동이 발생할 것을 예견하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은 채 다시 음주상황으로 자신을 내몬다는 점인데,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외국의 형사사법제도 내에서는 임의명정을 통한 형사책임의 조각을 잘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최근 아동청소년 성범죄에 관하여서는 음주감경의 관행을 적용하지 않기로 하였다. 즉 성의 대상이 되어서는 결코 안되는 아이들에게 성폭행을 저지르고는 만취해서 기억이 안난다고 주장하여 책임을 면하려는 악순환의 고리를 이번만큼은 꼭 끊어버리겠다는 취지이다. 상습 주취 폭력에 관하여서도 당사자들끼리의 합의로 처벌을 무효화하던 관행을 뒤로 하고 징역형까지 엄벌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음주폭력에 관하여서는 이미 면책의 범죄를 상당히 제한하였다. 이번에는 국회의원이 연루된 음주폭행 사건이 발생하였다. 물론 술김에 발생하는 폭력은 최근의 엄벌 위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늘상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약자보호와 관련을 지어보자면 이야기는 좀 달라지는데, 음주폭행을 엄벌하겠다는 조치의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약자를 제대로 보호하려는 것이다. 성폭력에 무력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아이들에 대한 보호, 주폭들에게 노출되어 부당한 착취를 당해 온 중소 상인들에 대한 보호 등, 사실상 음주상태에 놓인 강자들로부터 약자를 보호한다는 점이 국민들에게 큰 공감을 얻은 바 있다. 그렇다면 이번 국회의원이 포함된 폭력사건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사건의 본질 역시 만취상태에서 발휘된 강자의 안일한 폭력행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약자보호를 주장해 온 국민의 대표라는 사람으로서는 정말 뼈저리게 반성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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