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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종교] 가장 귀한 금은 바로 ‘지금’

입추가 지나니 가을의 기운이 느껴진다. 아침저녁으로 조금 선선해진 날씨에 기분이 좋아진다. 음력 8월은 오행으로 볼 때 금(金) 기운이 왕성하다. 금속은 딱딱하고 밀도가 높은 성질이 있다. 금 기운이 왕성한 이 시기에는 모든 만물도 이제 왕성한 성장을 멈추고 단단하게 안으로 응축해 결실을 맺는 때다. 지수화풍, 흙과 물과 햇볕과 바람의 기운으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기나긴 시간이 열매로써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24절기로는 백로(白露)가 들어있는 때다. 일교차가 커져 밤을 지새운 풀잎마다 하얀 이슬이 맺힌다고 해서 백로이니 본격적으로 가을을 체감하는 절기다. 벼 이삭도 이 무렵에는 여물어야 하기 때문에 ‘백로가 지나서는 논에 가볼 필요가 없다’고 한다. 왕성하게 성장해야 할 때 성장했기 때문에 밀도를 응축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때에 맞게 성장하고, 익어가고, 열매를 맺는 것이 마치 우리의 인생과 같다. 가을은 한 호흡 쉬어가기에 좋은 계절이다. 힘껏 달리기만 했다면 한 번쯤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시간도 반드시 필요하다.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의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는 천하를 정복할 당시 아테네에 이르렀다. 모든 사람이 정복자 알렉산더에게 무릎을 꿇었으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를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알렉산더는 직접 그를 찾아 나섰는데, 가서 보니 한 늙은이가 몸에는 누더기를 걸치고 머리는 언제 빗질을 했는지 산발한 채 나무통 옆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를 쳐다보았으나 철학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둘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디오게네스가 물었다. “폐하께서는 지금 무엇을 가장 바라십니까.” “그리스를 정복하길 바라네.” “그리스를 정복하고 난 다음에는 또 무엇을 원하십니까.” “아마도 소아시아 지역을 정복하길 바라겠지.” “그 다음은 또 무엇을 원하십니까.” “아마 온 세상을 정복하길 바라겠지.” “그러면 그 다음은 또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렇게 하고 나면 아마 그때쯤이면 쉬면서 인생을 즐기겠지.” “이상하군요. 왜 지금 당장은 쉬지 못합니까. 인생은 짧고 세상은 넓습니다. 당신은 곧 이 말을 실감하게 될 겁니다.” 철학자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언제 쉴 수 있을까. 계속 달려가기만 하기에는 인생은 매우 짧고 무상하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도 알렉산더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면서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나를 채우면 둘을 채우려고 하고 둘을 채우면 셋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채우려고만 하는 탐욕 때문에 마음은 늘 괴롭고 공허하다. 이제는 밖으로만 치닫던 마음을 안으로 돌려 스스로 돌아봐야 할 시간이다. 채우려고만 했던 탐욕심 때문에 가려진 진짜 마음으로 돌아보기 위해 잠시 멈추고 호흡해보자. ‘금 가운데 가장 귀한 금은 바로 지금’이라고 했다. 지금 실재하고 있는 우리 자신보다 소중한 존재는 없다. 이 순간 이 자리에 진정한 주인공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자문해 보기 바란다.

[삶과 종교]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은

적잖은 종교인이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 혹은 무신론자와 대화할 때 자기네 종교의 신을 비호하려고 애쓰거나 섣부르게도 상대를 설득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럴 때 그들은 자신의 신을 비호하는 게 아니라 결국엔 자기 자신을 더 비호하고 있는 셈이다. 신은 인간의 두둔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물론 나에게 소중한 분을 누군가 대놓고 비하한다면 그것은 분명 무례한 일이고 또 마음 상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신은 우리의 두둔이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이 그런 때 차라리 해야 할 일은 자신이 믿는 신이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이에게 과연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할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마 신은 애써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신을 부정하는 그 사람의 마음, 그가 지나온 삶의 역사, 그 안의 아픔들을 온전히 껴안아 주고 싶어 할 것이다. 또 기존의 종교인들이 저질렀던 과오들을 자신이 대신해서라도 사과하고 싶어 할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며 그의 상처와 분이 풀릴 수만 있다면 자신의 뺨이라도 치라고 내줄 것이다. 필자가 아는 신은 그런 분이다. 사실 인간들이 저마다 신을 뭐라 부르든, 그게 예수든 부처든 하느님이든 하나님이든 여호아든 알라든 뭐든, 혹은 자연의 이치든 뭐라 부르든, 신은 고작 그런 인간들의 언어나 개념 안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니다. 그렇기에 지존께서는 한낱 인간이 신을 비호하고 설명하고, 오만하게 다른 이를 설복하려 하고, 또 실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한 일일 뿐이면서 거기에 신의 이름을 팔아 다투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 신은 인간들에게 자신이 설명의 대상이나 비호의 대상이 되길 바라지 않으신다. 그보다 신은 인간에게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곧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되는 길이므로. 그래서 신은 ‘경직되고 메마른 종교인’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을 두고 더 기뻐한다. 예컨대 세상의 부조리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우러러 ‘신 너는 대체 뭐하고 있냐’고, ‘너 같은 신은 필요 없으니 나라도 이들을 돕겠다’고, 그렇게 하늘에 대고 욕을 퍼붓는 인간, 그렇게 뜨겁게 살아 있는 인간이 오히려 신과 더 친하다. 그는 누구보다 간절히 정의를 찾고 있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신을 사랑하고 있고, 이미 신께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한 사람은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하면서 온전히 ‘자기 삶을 책임’지고 있으니 과연 신과 친구가 될 자격이 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성당이며 교회며 절이며, ‘거룩한 곳’에 오래 앉아 있는다 해도, 제 아무리 무슨 성직자라 해도, 그렇게 아예 ‘그런 곳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제 것이 아닌 남의 말만, 남에게 들은 교리만 앵무새처럼 말하며, 그렇게 스스로 고민하지 않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 이는, 자기 종교에서 정해진 의무는 했으니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안타깝지만 이미 영성의 불이 꺼져 가고 있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3,16)

[삶과 종교] 평범함이 만드는 기적

프랑스 파리 올림픽에서 기대 이상의 선전을 거듭하는 대한민국 대표 선수들의 소식은 연일 거듭되는 폭염으로 몸과 마음도 지치는 이 여름을 지나는 우리 국민에게 좋은 청량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최선을 다해 감동을 전해주는 모든 선수에게 찬사를 보낸다. 필자의 청소년 시절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높은 스포츠 종목은 누가 뭐래도 당연히 농구였다. 국내 농구 리그는 물론이고 미국 NBA 리그까지 친구들 사이에서 농구와 농구 스타들은 늘 중요한 놀이와 이야기 주제였다. 또 그 시절 필자 또래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만화는 ‘슬램덩크’였다. 풋내기 고등학생 주인공의 농구와 인생 성장기를 그린 이 만화는 당시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고 지금까지도 애독되고 회자되는 명작이다. 그 당시 어떤 인기 가수의 노래 제목이 ‘덩크슛’일 정도로 농구를 좋아하던 또래 친구들에게 덩크슛은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하나의 로망이었다. 그런데 이 만화의 마지막 슛은 모두의 기대와 달리 멋진 슬램덩크가 아닌 아주 평범한(?) 중거리 야투로 버저비터를 성공시키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 평범한 슛 하나를 위해 주인공은 정말 많은 훈련과 연습을 거듭하고 견디며 실전에서 성공시킨다. 그리고 한 단계 성장한 주인공의 모습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다양한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할 때가 있다. 이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기에 기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이에게는 믿음의 주제가 이 기적만을 바라는 것에 있다. 그런 신앙은 결국 보이는 기적이 없으면 신앙도 끝나고 마는 문제가 있다. 마치 농구 경기에서 매번 멋진 덩크슛만 바라는 마음과도 같다. 이런 상황을 두고 예수께서도 “너희는 표징이나 기이한 일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복음 4:48·새 번역)라며 탄식하듯 말씀하셨다. 바울 사도는 당시 있었던 고대 올림픽 경기 종목들과 선수들의 삶을 비유로 들며 믿는 이들이 달려가야 할 방향과 태도(삶의 절제)들을 이야기했다(고린도전서 9장 24절 이하). 평범한 일상에서도 주님을 믿으며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하고 섬기며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정말 평범함 속의 기적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수많은 절제와 노력과 참된 믿음이 그 그리스도인의 평범함 또는 생활 표준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로마서 12:17·새 번역) 사도 바울이 남긴 그리스도인의 ‘생활 대헌장’인 로마서 12장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살아야 할 덕목들을 말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상식이고 평범함이라고 말한다. 1.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 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 2. 인자한 말을 가지고 사람을 감화시키며 갈 길을 잃은 무리를 잘 인도하게 하소서. 필자가 즐겨 애창하는 찬송가 212장의 1, 2절 가사다. 이 가사처럼 예수를 믿어 신앙으로 말미암아 내 안의 죄성이 치유되며 내 이웃과 공동체를 감화시키며 치유하는 평범함의 기적이 우리 현장에서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삶과 종교] 더위를 이겨내는 힘

1년 중 가장 더운 달은 8월이 아닌가 싶다. 무덥고 습한 날씨가 지속되니 불쾌지수는 올라가고, 짜증과 화가 자주 나게 된다. 이렇게 덥고 습해 지치는 때는 어떤 마음으로 더위를 이겨낼 수 있을까? 부처님 경전, ‘열반경’에는 ‘흑암녀 공덕천’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한 장자의 집에 아리따운 아가씨가 찾아와 대문을 두드렸다. 장자가 문을 열며 ‘누구냐’고 물었다. 그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공덕천(功德天)이라고 하는데 당신 집안에 행운과 재물을 가져다주며 행복한 일만 가져다주는 사람입니다.” 장자는 너무 기뻐 여인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그런데 바로 뒤에 검은 옷을 입은 험상궂은 여인이 따라 들어왔다. 장자가 그 여인을 제지하며 ‘도대체 누구인데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느냐’고 묻자 여인이 말했다. “저는 흑암녀(黑暗女)라고 하는데 당신 집안에 불행한 일이나 사람이 아프거나 죽거나 하는 좋지 않은 일만 가져다주는 사람입니다.” 장자가 그 말을 듣고 그녀를 내쫓으려고 하자 흑암녀가 말했다. “나는 앞의 공덕천 언니와 늘 붙어다니는 자매로 잠시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영원하다고 착각해 집착하고 괴로움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행운이 생기면 계속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붙잡으려고 하고 불행이 생기면 나에게만 왜 이런 일이 생기냐며 원망하면서 괴로움 속에 더 깊이 빠지기도 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나 일은 생겨날 수 있는 일이다.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 줄 알고,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좋은 일이 생겼다고 너무 자만하고 들떠 있거나 나쁜 일이 생겼다고 마냥 의기소침해지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이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들떠 있는 마음을 잘 다스려 다가올 안 좋은 일에 대비하면서 차분히 대처한다. 나쁜 일이 생겼을 때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어떻게 하면 역경과 고난을 잘 이겨낼 수 있는지를 심사숙고해 결정을 내린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오지 말라고 막는다고 해서 오지 않는 것이 아니고 세월을 흘러가지 말라고 해서 흘러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어나야 할 일이면 일어나게 돼 있으며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도 영원히 살아있을 수 없듯이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은 ‘인’과 ‘연’에 의해 잠시 모였다가 흩어지게 돼 있다. 지금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변화할 수 있는 것은 대처하는 마음 자세와 태도일 것이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 때 행복과 불행을 즐기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진짜 무더위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변하지 않는 이 상황을 즐기는 것밖에는 없다.

[삶과 종교] 경직성은 영성에서 멀다

천주교인을 포함해 종교인들이 도덕이나 윤리규범 혹은 자기네 종교의 규율이나 전통에 집착하다 오히려 거기에 갇혀 버리는 경우들을 간혹 본다. 그러나 종교의 본질은 도덕이나 율법이 아니다. 종교의 본질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2)라고 하신 것처럼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에 있다. ‘믿음’을 통해 ‘자유’와 ‘책임’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게 해주는 것에 있다.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 우리가 신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우리 안에 신적인 가능성이 있다는 것, 우리가 정말 사랑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 그러한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에 있다. ‘세상은 주지 못하는 것’을 ‘증거’하는 삶에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적지 않은 종교인이, 또 자기반성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한국 천주교 역시 이따금 자기 안에 갇힌 모습을 본다. 사람들과 직접 부대끼는 ‘현장’에서는 예수의 핵심 가르침은 놓친 채 그저 ‘희생해야 한다’, ‘순교해야 한다’는 “~해야 한다”에 집착하다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고 중앙 부처에서는 종교 밖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모른 채 ‘우물 안’에만 안주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또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휩쓸려 버릴까 봐 두려워하며 그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도 본다. 물론 필자 역시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 않다. 필자를 포함해 종교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경직성이다. 사실 ‘여정을 떠나지 않는 이’, ‘이미 답을 가진 이’, 즉 ‘답정너’는 구도자일 수 없다. 구도자는 말 그대로 길을 찾는 사람이지 길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다. 그 누구도 신을, 진리를, 답을 독점할 수 없다. 묻지 않는 사람, 찾지 않는 사람,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 여정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구도자일 수 없다. 그 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연인들은 상대방을 사랑함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되는 것’, 즉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고 ‘물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걸 두려워하는 이는 사랑을 할 수 없다. 종교가 정말 세상을 사랑하고, 신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고 싶다면 세상의 영향을 받을까 봐 두려워 문을 닫아 걸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고립과 도태를 자초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종교가 사회를 위해 해야 할 기본 역할도 못하게 되는 길이다.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다 나온 이야기다. 사실 정말로 신을 믿는 이는 신이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도 활동’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미지의 도전을 오히려 설렌 모험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늘 신과 함께 새로운 꿈을 꾼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든 구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정을 떠날 준비가 돼 있다. 치기 어린 마음으로 새것만 좇거나 게으름에 빠져 옛것에만 안주하는 경직성에 사로잡히지 않고 생동감 있게 옛것과 새것을 오가며 ‘살아있는 삶’을 산다. 그렇게 ‘생명력’을 전하는 참된 삶을 산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그의 나이 일흔다섯 살이었다.”(창세12,4)

[삶과 종교] 사랑의 동기

일주일에 몇 번씩 차를 가지고 출타할 일이 있을 때 매번 들르는 드라이브 스루 카페가 있다. 그런데 주문할 때 어떤 직원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고 어떤 직원은 그렇지 못한 때가 있다. 주문하면서 몇 마디 주고받지 않지만 그 태도에 따라 사람의 기분을 움직인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어떤 이는 항상 긍정적이고 밝은 태도로 임하지만 어떤 이는 마지못해 하는 경우를 우리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본다. 교회라는 공동체에서도 이런 비슷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교회에는 안내, 교사, 찬양, 식당, 주차 등등 많은 봉사와 헌신의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봉사들은 교회의 예배와 신앙생활을 풍성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런데 봉사하는 분 중에도 그 봉사의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분도 있고 소수지만 자신의 직분 때문에 마지못해서 하는 분들도 있다. 쉽게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목회의 연수가 조금 쌓여갈수록 느껴지는 것은 그런 상반된 태도의 이유가 ‘사랑’과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사랑의 사도’로 알려진 사도 요한은 요한1서 4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사랑’이 동기(動機)가 되면 ‘최대한’의 것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하는 일에는 어떤 두려움도 있지 않고 그 모든 것이 아깝지 않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하는 일은 우리 삶 속의 모든 두려움을 제어하고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반면 어떤 일에 대해 ‘두려움’이 동기가 되면 ‘최소한’의 것만, 즉 혼나지 않을 만큼만 하려 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으로 하는 일은 오직 결과와 평가에 대한 걱정만 있을 뿐이고 그 하는 모든 것이 아깝게만 느껴진다. 이승우 작가의 소설 ‘사랑이 한 일’에서 인상 깊게 읽은 내용이 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드릴 때야 ‘바친다’라고 말할 수 있고 우리에게 귀하지 않은 것을 드리는 것은 ‘버리는’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과연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사랑이 동기가 돼 전혀 아깝지 않은 일이라 느껴지는지, 아니면 두려움이 동기가 돼 아깝게 버리는 것이라 느껴지는지 생각해본다. 이는 단지 신앙생활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가정, 직장, 사회 등 모든 삶 속에서 하는 일이 사랑이 동기가 되면 나와 공동체의 삶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삶과 종교] 맑고 향기로운 연꽃 같은 삶을 꿈꾸며

불교를 상징하는 꽃인 연꽃으로 꽃 공양을 올린 이야기가 많다. 부처님의 전생인 선혜동자가 과거 부처님인 연등 부처님께 연꽃 공양을 올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꽃 공양을 올리면 다음 생에 꽃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부터 연꽃은 불교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꽃이다. 연꽃은 인도 중북부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으며 5천년 전부터 식용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인도 신화에서는 비슈누 신의 배꼽에서 연꽃이 피어나 그곳에서 창조신이 태어났다고 하며 이집트 신화에서는 연꽃이 수면 아래 있다가 낮에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꽃을 피우는 특성으로 재생과 부활을 상징한다. 특히 불교에서 연꽃은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와 항상 함께하고 있어 불교 자체를 상징하는 귀하고 소중한 꽃이다. 연꽃은 부처님의 탄생 장면을 장엄하고 있는데 아기 부처님이 탄생했을 때 땅에서는 연꽃이 피어 아기 부처님의 발이 땅에 닿지 않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찰의 부처님은 보통 연꽃의 모양의 좌대인 연화대에 앉아 계신다. 부처님의 경전인 ‘묘법연화경’에서는 진리의 결백하고 미묘한 뜻을 흰 연꽃에 비유했는데 “묘법은 추함을 버리고 미묘함을 취한 것이 아니고, 추함에서 곧 미묘함을 나타내심이다. 추함에서 곧 미묘함을 나타내심은 연꽃이 더러운 곳에서도 항상 깨끗함과 같다”고 하셨다. 곧 더러움을 버린 곳에 깨끗하고 미묘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추하고 더러움, 그 자체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이야말로 참된 아름다움이며 깨끗함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시기, 질투가 있는 사람들로 인해 때 묻고 얼룩져 있지만 이 속에서도 맑고 은은한 연꽃의 향기를 품고 세상을 맑고 청정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불교의 영향을 받은 송나라의 주돈이(周敦頣)는 참선수행을 해 불교에도 조예가 깊은 뛰어난 유학자다. 그는 연꽃을 감상하며 ‘애련설(愛蓮說)’이란 글을 지었는데 “연꽃은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속이 비어도 곧으며, 향기는 먼 곳에서 맡을수록 맑기에 군자를 상징한다”며 연꽃을 노래해 보살을 상징하는 연꽃을 군자의 꽃이라고 말했다. 연꽃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은 연꽃의 향기로움, 고결함, 맑음, 깨끗함을 본받고 싶었을 것이다. 또 하나 더 있다면 깨끗한 물이 아닌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의 강인함일 것이다. 보기에는 약하지만 진흙에서 꿋꿋이 피어나는 연꽃은 그 어떤 꽃보다도 내공이 강한 꽃이라고 생각한다. 연꽃을 바라보면서 그 어떤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물들거나 흔들리지 않고, 그 어디에도 집착 없이 고고하고 맑고 향기로운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연꽃 같은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삶과 종교] 우월감은 열등감의 표시

오늘날엔 자존감 혹은 강함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이에게 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마음은 개의치 않고 행동하는 것을 자존감이 강한 것으로 오인하거나 큰 능력과 부를 갖춰 자기보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너는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핀잔을 줄 수 있을 정도가 되는 게 강해지는 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말로 강한 사람, 진짜 품격 있는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고 싶어 하고 특히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의 성공이 자신의 힘만으로 이뤄진 게 아님을 알기에 오히려 겸손하다. 그 겸손이 그가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는 다른 이의 마음을 섬세하게 돌봐주고 싶어 하고, 그들의 연약한 모습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떠올릴 줄 알며,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도움을 청하거나 사과할 줄 알 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에 눈물마저 흘릴 줄 안다. 사실 스스로를 잘났다고 여기며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깔보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 것, 즉 우월감이라고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열등감의 표지다. 왜냐하면 정말로 우월한 존재는 애초에 타자와 자신을 비교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우월한 존재라면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와의 비교에서 어떤 가치도, 어떤 즐거움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말로 강한 존재는 부족한 존재를 보면 짓밟고 싶은 게 아니라 오히려 가엾게 여기고 도와주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보고 연민이 아니라 화가 더 나는 사람은 실은 자신의 부족함과 화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확률이 크다. 즉, 의노(義怒)가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잊기 위해 그것을 타자에게 투영해 그를 공격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한 것일 뿐인 경우가 더 많다. 그 점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가 서로 헐뜯기에 열중인 것을 보면 그만큼 사람들이 애정에 목말랐구나, 어릴 적 열등감에서 치유되지 못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어릴 적부터 경쟁의 줄을 세우고 우열에 집착하게 만드는 우리 교육이 정말 사람들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구나, 생각돼 안타깝고 가엾은 마음이 앞선다. 강자라면 여유와 자비가 있는 법이다. 개들만 보더라도 치와와처럼 작은 개들은 항상 공격적이고 주변에 나뭇가지만 떨어져도 시끄럽게 짖어댄다. 겁이 나기 때문이다. 자기가 약하고 열등하다는 걸 숨기기 위해서다. 그래서 “화가 많은 사람은 실은 겁이 많은 것이다”, “소인배일수록 권위에 집착한다” 같은 말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리트리버처럼 큰 개는 작은 개들이 몰려와서 시끄럽게 짖어대도 개의치 않는다. 겁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강한 사람, 즉 정말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개구리처럼 헛바람으로 부풀린 몸으로 남을 깔보며 싸구려 우월감을 좇을 게 아니라 자신과 화해하는 시간부터 가져야 한다. 다만 거기서도 자기합리화나 안주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신 앞에 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자기합리화나 아집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신과의 ‘관계성’ 안에서 진정으로 열린 자아에 이를 수 있다.

[삶과 종교] 신비와 저항

목사로 살다 보면 이런저런 행사들에 참석할 때가 종종 있다. 그렇게 참석하면 그 행사와 관련한 책자(팸플릿)를 받는다. 대개 그 책자들의 앞부분은 행사에 관련된 개요와 안내 그리고 행사 순서 등이 담겨 있고, 책자의 뒷부분에는 그 행사에 여러 도움을 준 단체들의 광고가 실려있다. 행사는 당연히 그 프로그램이 중요하기에 앞부분은 꼼꼼히 살펴보아도 광고가 담긴 뒷부분은 그냥 대충 훑어볼 때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얼마 전 참석한 행사의 책자에 실린 광고 중 어떤 교회의 표어는 내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 표어는 내 마음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신비와 저항: 말씀으로 살아지는 신비 / 돌로 떡을 만들지 않는 저항” 사전적 의미로 ‘신비(Mysterious)’는 “일이나 현상 따위가 사람의 힘이나 지혜 또는 보통의 이론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묘함. 또는 그런 일이나 비밀”(사전 발췌)을 말한다. 신비는 종교의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신비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한계와 유한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한계와 유한함을 인정하는 것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과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말하는 ‘창조’, ‘부활’도 신비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이 분명 일어난 사실로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그 신비에만 집착해 종교가 오직 신비만을 보여주기를 바라고 집착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것을 일컬어 ‘신비주의’라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 ‘신비’와는 다른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이 신비주의는 수없이 한 개인, 가정, 공동체를 파괴했다. 마태복음 3장에는 예수께서 그의 본격적인 사역(공생애)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40일을 굶주린 예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이라는 전제를 붙이면서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시험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몸 하나 상하지 않는 ‘기적쇼’를 보이라고 하고, 그것도 통하지 않자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굴복하면 세상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그 거듭되는 시험과 유혹 속에서 예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그 유혹들에 대해 저항하시고 이겨내신다.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을 신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수없이 그런 것을 삶 속에서 희구하며 살아간다.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아들)라면 삶 속에서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수많은 유혹에 저항하며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섬기며, 삶 속에서 먼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용기를 가지고 사는 것이 진정한 신비가 아닐까 생각한다.

[삶과 종교] 호국선열의 은혜

평소 대한민국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을 느끼고 살아가는가? 마치 늘 마시고 있는 공기와 물은 당연한 것이기에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 풍요도 당연한 권리라고 여기기에 감사하게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있기 이전부터 우리나라가 있었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를 지켜주고 희생하셨던 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에는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현충일과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졌던 6·25전쟁이 있었던 달이다. 6월 한 달은 애국심과 호국선열의 은혜를 생각하면 좋겠다.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뤄낸 아쇼카왕은 부처님 열반 후 130년에서 200여년 뒤의 실존 인물로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왕이다. 그는 기원전 3세기경 인물이지만 지금도 인도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역대 가장 위대한 왕 중의 왕인 전륜성왕으로 추앙받고 있다. 아쇼카왕의 삶은 굉장히 드라마틱하다. 아쇼카는 왕이 되기까지 98명의 배 다른 형제를 다 죽이고서야 비로소 왕이 된다. 그가 죽이지 않은 형제는 친동생 비타쇼카와 스님이 된 띳샤뿐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왕이 되기 위해 잔악무도했던 그가 가는 곳은 어디나 죽음과 정복뿐이고 자비는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짠다쇼카(사악한 아쇼카왕)’라고 불렀다. 그러나 통일을 완성한 그는 수많은 시체와 포로들을 지켜보며 괴로움을 느끼게 되고 우연히 한 스님과의 긴 대화 속에 가르침을 받고 불교에 귀의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결국 약한 나라를 보호하고 지켜주며 자비를 베풀어 행복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는 위대한 왕이 된다. 법구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전쟁에서 백만 대군을 정복하는 것보다 하나의 자신을 정복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전쟁의 가장 큰 승리자다. 다른 사람을 정복하는 것보다 참으로 자신을 정복하는 것이 더 낫다. 자기를 다스린 사람, 항상 절제 속에 살아가는 사람. 그 어떤 신도 모두 이 같은 사람의 승리를 패배로 만들 수 없다.” 아쇼카왕의 이야기처럼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은 아니다. 겉으로는 승리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서 차오르는 끝없는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 패배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고 절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가장 멋진 승리자다. 내면의 승리자가 많아지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조화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철저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나’는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나’를 둘러싼 주위의 수많은 인연들과 관계를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지금의 풍요와 자유는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호국선열의 희생이 있기에 가능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분들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이 세상을 좀 더 행복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마음을 모으고 힘을 보탰으면 좋겠다.

[삶과 종교] 사랑이 가득한 삶을 꿈꾸자

이전 글들에서 필자는 충만한 삶이란 자신을 채우려는 삶보다 오히려 소명과 연관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참행복의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삶의 소명에 관심을 갖는 게 중요하다. 한데 소명의 구체적인 형태는 사람마다 매우 다르고 소명을 찾기 위한 탐색의 과정도 모두 제각각이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고정된 답 같은 건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구체적인 소명 탐색을 돕는 일은 개인적인 동반 안에서 이뤄져야지 이런 글에서 ‘어찌하라’기엔 적합하지 않다. 그럼에도 보편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젊은이들과 영적 동반을 하다 보면 유독 소명 탐색을 어려워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경우 “내가 될 수 있는, 내가 꿈꾸는 나의 최고 버전부터 그려봐라. 그리고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라”고 말해주기도 한다. 소명은 ‘내면의 깊은 열망-잠재력-존재목적-자기완성’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초의 존재 목적은 주위를 밝히는 것이다. 즉, 초는 자신 안에 있는 심지(잠재력)를 꺼내 그것으로 자신을 태울 때 비로소 자신으로서 완성된다(존재 목적 달성). 그런데 천주교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신의 모상(模像)이다. 그리고 천주교에서 신은 삼위일체, 즉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일체’이신 분이다. 따라서 인간은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줄 때 자신 안에 있는 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비로소 자신을 완성한다. 그렇다면 저마다 그 구체적인 형태는 다를지라도 ‘인간으로서’ 갖는 보편적인 소명의 방향성은 이와 무관할 수 없다. 실제로 우리는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람에게서 어떤 신성함, 거룩함을 느끼게 된다. 억만장자, 무소불위의 권력자에게서 거룩함, 충만함을 느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노숙인들을 위해 허리 숙여 더럽고 힘든 일조차 마다하지 않는 김하종 신부님 같은 분에게서 우리는 어떤 거룩함을 느낀다. 그렇게 남을 위해 땀 흘리는 얼굴 속에서 오히려 어떤 평화로움, 행복감, 충만함 같은 걸 발견한다. 그렇다면 각자 자신의 소명을 탐색할 때에도 이를 참고할 수 있다. 꼭 그렇게 멀리 갈 필요 없이 ‘부모가 되는 것(하다못해 양부모나 영적 부모의 형태로라도)’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인간이 신을 닮을 수 있는(신으로서의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은 부모가 되는 것이다. 남녀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 버전만 생각해 보더라도 아버지 어머니를 빼놓을 수 없다. 아무리 대단한 커리어가 있어도 사랑으로 남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어떤 거룩함(신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행복의 삶, 충만한 삶은 ‘나의 만족’이 아니라 사랑의 삶에 있다. 세상 모든 어버이들에게 존경과 축복을 전하며 소명의 여정에 있는 모든 이가 부디 사랑의 삶, 사랑 넘치는 어머니 아버지가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남을 돌볼 줄 아는 내가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특히 우리 사회가 젊은이들의 그 꿈을 도울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부디 젊은이들이 미래를 그리고 꿈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13,2)

[삶과 종교] 상처 입은 치유자

지난달 글에서 필자는 ‘내 전존재보다 더 큰 사랑에 안기면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신과의 화해가 일어난다’고 했다. 오늘은 그 다음 단계에 대해 나눠본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저마다의 역사가 있고 그 안에는 당연히 상처와 아픔, 부서진 순간들도 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무덤덤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 대부분은 정말로 자유로워져서 그런다기보다는 그저 잊고 살아서 그렇거나 혹은 마음이 메마르면서 그리 되는 경우도 많다. 어떻든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상처는 우리를 본연의 모습에서 뒤틀어 버리기도 한다. 신체의 부상만 떠올려 봐도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운동 중 한쪽 팔을 부상당하면 팔이 낫고 나서도 무의식적으로 부상당했던 팔을 멀쩡한 팔보다 덜 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신체의 불균형이 생기기도 한다. 이처럼 상처와 아픔, 그리고 그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은 많은 영향을 남긴다. 몸도 그러한데 마음의 상처야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상처를 두려워하며, 자신에게 상처가 있다는 사실까지도 부정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연약한 존재, 부서지기 쉬운 존재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데 어떤 이들은 그러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의 상처와 연약함을 직면하고 인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상처를 다른 이를 위한 쉼터로 열어주기까지 한다. 그는 자신의 상처로 다른 이의 상처를 안아준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톨릭의 아주 오래된 영성을 현대 영성가 헨리 나우웬 신부가 재조명하면서 쓴 표현이다. 가톨릭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는다. 그런데 정작 부활한 예수에 대한 가톨릭의 증언은 좀 이상하다. 왜냐하면 부활은 결국 신성(神性), 즉 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부활한 예수는 힘과 권세가 넘치는 완전무결한 모습이어야 할 텐데, 가톨릭은 오히려 부활한 예수를 ‘상처를 지닌 모습’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자신의 상처를 보여준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그토록 무력하게 죽었던 바로 그 사람임을 인정한다. 그는 자신의 상처와 부서짐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승리의 표지요, 용서와 사랑의 표지, 공감과 연대의 표지로 만든다. 제자들은 예수의 상처에서 용서와 화해, 치유와 사랑을 체험하고 용기와 믿음을 얻는다.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53, 3) 실제로 우리는 자신의 상처로 다른 이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한다. “당신의 아픔을 다 안다고 할 순 없겠지만 내게도 비슷한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당신의 아픔에 함께 있겠습니다.” 그의 상처 안에서 누군가는 위로와 용기, 믿음과 희망을 얻는다. 가톨릭의 오래된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애써 십자가를 지려고만 하지 말고(혹은 십자가에서 도망치려고만 하지 말고) 십자가를 안고 가라. 그러면 어느새 십자가가 너를 안고 갈 것이다.” 과거의 상처든 미래의 걱정이든 무엇이든 거기서 도망치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 모든 것은 결국 부활의 여정이 될 것이며 언젠가 그것은 내 구원의 다리가 되고 누군가의 쉼터가 돼줄 것이다.

[삶과 종교] 받고 싶은 것과 주고 싶은 것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있는 5월을 두고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부른다. 거기에 노동절과 스승의 날까지 있어 5월은 챙겨야 하는 기념일이 가장 많은 달이다. 그래서 필자는 5월을 가리켜 ‘선물의 달’이라고 부른다. 선물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매개체다. 그러나 그 선물이 너무 자주, 과하게 챙겨야 할 때는 부담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 그냥 받기만 하던 5월은 참 행복한 달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조금 드니 5월이 되면 각종 선물 고민이 생긴다. 경제적인 부담은 차치하고라도 어떤 것을 선물해야 받는 사람이 좋아하고 주는 나에게도 보람이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 중에 ‘뭐니 뭐니 해도 머니’라는 말이 있지만 과연 최고의 선물은 ‘돈’일까 생각을 해본다. 특히 어린 조카들에게 용돈으로 선물할 때면 이 용돈을 올바르고 소중히 사용하기를 바라게 된다. 선물하는 모든 부모님과 어른들의 마음도 필자와 같을 것이다. 그래서 선물은 받는 이의 마음과 주는 이의 마음이 다를 수 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께서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장면이 기록돼 있다. 이 여인은 이전에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은 여섯 번째 남편과 사는 중이었다. 이 여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그의 상황에서 평범하지 않은 굴곡진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우물가에서 ‘물’이라는 주제로 대화의 접점을 찾으시고 여인과의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예수께서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물’, 즉 구원과 영생의 길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여인은 그저 육신의 갈증만 풀어주고 물을 긷는 수고로움만 덜어주는 것을 생각하고 말했다. 여기에서도 받고 싶은 것과 주고 싶은 것의 차이가 드러난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자주 있다. 내가 받고 싶은 것과 주님께서 주시고 싶은 것이 다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7장 9~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가장 좋은 것’,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것은 다름 아닌 ‘가장 좋은 것’이다. 자녀들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부모님이 자녀에게 주는 선물의 기준은 그저 받고 싶은 것보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을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는 로마서 11장 29절에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가정의 달 그리고 선물의 달 5월에 서로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기원한다.

[삶과 종교] 오월은 감사의 계절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도 하고 가정의 달이라고도 한다. 부모와 자식, 스승과 부부에 이르기까지 이제까지 살아온 동안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고 표현하는 달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근로자의 날, 성인이 돼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기둥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서로 챙기는 성년의 날도 있다. 또 꽃피는 아름다운 계절에 아기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연등축제를 하는 부처님 오신 날도 있다. 이렇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자연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 따뜻하고 화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어느 날 대중들을 이끌고 길을 가다가 마른 뼈 한 무더기를 보자 다섯 활개를 땅에 던져 그 뼈에다 절을 하셨다. 제자 아난이 이유를 여쭸더니 “이 한 무더기의 뼈는 혹시 나의 전생의 부모일 것이기에 절을 하였느니라. 일체의 남자는 모두 나의 아버지이고, 일체의 여자는 모두 나의 어머니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불교에서는 수많은 생을 거듭하는 동안 모든 존재는 서로 얽히고 설킨 인연으로 연결돼 있다고 말한다. 이 세상이 거대한 그물과 같다고 해 ‘인드라망’이라고 부른다. 그물망의 촘촘한 그물코가 끊임없이 이어져 한없이 넓고, 그물마다 구슬이 달려 있어 서로를 비춘다고 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는 그냥 우연히 만난 존재가 아니라 오랜 생을 거쳐 오면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해왔다. 그러니 지금 함께하는 인연은 결코 그냥 스쳐 지나칠 가벼운 인연이 아닌 것이다. 인간과 인간, 모든 존재와 자연이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돼 있으며 서로를 비춰 주는 아주 가깝고 친밀한 관계다. 서로를 비춰 주는 무수한 존재와 함께하고 있는데 나 혼자만 생각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반성해 보게 된다. 중국 당나라에 양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불교에 깊이 심취해 무제(無際)보살이 사천지방에 와 계신다는 말을 듣고 먼 길을 떠났다. 길 떠난 지 며칠 만에 신선의 모습을 한 비범한 노인을 만났고 노인이 그에게 물었다. “젊은이는 어디를 그리 바쁘게 가시오?” “무제보살을 뵙고 스승으로 모시고자 찾아가는 길입니다.” “보살을 찾으러 가느니 부처를 찾으러 가지 그러오?” “부처님이 어디 계시는데요?” “집에 돌아가면 이불을 두르고 신발을 거꾸로 신은 분이 있을 것이오. 그분이 바로 부처님이지요.” 노인이 보통 분이 아님을 느낀 양보는 알겠다며 걸음을 되돌려 부지런히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밤은 깊을 대로 깊어 있었다. “어머님! 제가 왔습니다” 하고 문을 두드리자 어머니가 반갑게 뛰쳐나왔다. 어머니는 이불을 두른 채, 신발도 거꾸로 신은 채였다. 부처님이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계신 부모님이 부처님이다. 불교의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함께하고 있는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고,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다. 지금 내 주변의 가족, 친척, 스승, 친구, 이웃에게 감사하는 그 마음이 부처님을 향한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귀하고 소중하지 않은 존재가 없기에 모든 사람과 사물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아낌없이 베풀었으면 좋겠다.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삶과 종교] Love Myself의 함정과 한계를 넘어

‘Love Myself·나를 사랑하기.’ 현대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다. 그러나 영적식별에서 보면 한계가 분명한 말이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유한한 자신에게서 사랑의 원천을 둔다는 것이고 심지어 그 종착지마저 자기라는 것이다. 즉, 자기 안에 맴도는 것이다. 한데 사랑은 물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순환 펌프를 돌려도 새 물을 갈아주지 않는 수조는 금방 때가 끼고 죽은 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럼 천주교인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나?’ 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인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해 자신도 사랑한다. 그래서 그 사랑을 전하길 우선한다.” 원천이 자기가 아닌 것이며 그 종착지도 자신이 아닌 것이다. 물을 가둔 수조가 아니라 ‘통로’로 산다는 것이다. 비종교인도 예수의 가르침은 대강 안다. 원수 사랑으로 대표되는 극단적 사랑과 용서다. 한데 이렇게만 알면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을 모르는 것에 가깝다. 사실 예수는 단 한 번도 “네가 네 힘으로 누구를 용서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형제를 섬기고, 원수도 사랑해라. 그리고 나한테 검사 받아라. 그래서 통과되면 천국 보내줄게. 복 줄게”라고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어찌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느냐. 너희는 먼저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고 했다. 가지가 제 힘으로 열매 맺는 게 아니듯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마르지 않는 진짜 사랑의 원천에 연결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그마한 내 사랑으로 뭘 하려 하지 말고 당신의 무한한 사랑의 힘을 입으라는 것이다. 가톨릭 격언에 ‘자신의 부족함과도 화해하지 못한 이가 어찌 다른 이의 부족함에 너그러울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 있다. 한데 자신의 전존재와 화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보다 더 큰 사랑에 뒤덮이는 것뿐이다. 그때에만 비로소 자기 연민, 합리화,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고 참된 화해가 일어난다. 그때는 ‘이런 나라도 이토록 사랑해 주시다니 너무나 감사하다. 부정하고 싶었던 내 모습들조차 이미 품에 안고 계셨구나. 그분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해드리기 위해서라도 나를 돌봐야겠다. 이렇게 큰 용서와 사랑을 받았는데 내가 누구를 심판하겠나. 아, 그렇다면 저 사람들도 이처럼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였겠구나. 그토록 귀한 존재였구나.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다. 이 사랑에 조금이라도 응답하고 싶다. 나도 이 사랑을 전할 수 있다면’ 하게 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면서도 합리화하지 않고 겸손하게 되고 타인을 향한 마음이 커지며 사랑의 계명을 짐이 아니라 초대로 느끼게 된다. ‘사랑의 통로’가 된다. 그러나 ‘내가 나를 사랑한다’에 심취하는 사람들 중엔 자기합리화, 나르시시스트, 소시오패스로 빠지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런 이는 남을 도울 때조차 정말로 타인을 귀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서, 즉 자기만족을 위해 그리한다. 나쁘다고 할 것은 없어도 진실한 사랑은 아닌 것이고 그만큼 참된 기쁨도 없을 수밖에. 참 기쁨은 ‘Love Myself’가 아니라 무한한 사랑에 나를 열고 사랑의 통로가 되는 삶에 있다.

[삶과 종교] ‘삐끗’했습니다

얼마 전 아무 생각 없이 무거운 것을 드는데 허리에 ‘삐끗’함을 느꼈다. 순간 생각했다. “아?또!” 나는 오래된 허리디스크 환자다.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퇴행성 디스크를 가지고 살았다. 그래서 이 ‘삐끗’을 수없이 경험했고 고생도 많이 했다. 허리 병이 도질 때 시작되는 증세가 바로 ‘삐끗’이다. 그런데 ‘삐끗’하는 데는 0.1초도 안 걸리는 것 같다. 그런데 그 후유증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몇 달이나 간다. 우선 허리가 뒤틀어지고 허리 균형이 안 맞으니 다리를 절게 되고 허리를 쓸 수 없어 팔을 주로 사용하니 팔과 어깨 목까지 아파 오고 아픈 허리 쪽을 안 쓰려고 하니 나중에는 반대쪽까지 아프고 자다가 뒤척이다 통증이 오면 잠을 깨기 다반사니, 일상의 질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처음엔 허리의 작은 문제가 온몸 전체로 그리고 삶 전체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게 정말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 ‘삐끗’ 때문이다. 그런데 ‘삐끗’의 원인 대부분은 ‘방심’에서 온다. 방심(放心)은 말 그대로 마음을 놓아버린다는 말이다. 허리 병 환자들에게 의사 선생님이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구부정하고 어정쩡한 자세는 허리에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물건 들 때는 꼿꼿이 허리를 펴고 해야 하고 세수할 때조차도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충고도 그때 뿐이다. 살아가면서 수없이 방심하다가 ‘삐끗’하고 ‘고생’하고 ‘후회’한다. 이번에도 방심하다 ‘삐끗’했고 일주일 넘게 고생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 주변에 ‘삐끗’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유명인들의 기사를 심심치 않게 접한다. 내가 그분들의 마음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들도 순간 방심하다가 삐끗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도 ‘삐끗’했다. 돈에, 배신감에, 자만심에, 공포심에.... 그런데 어떤 이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복했고, 어떤 이는 자기 생각에만 빠져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선택했다. 성경 에베소서 4장 27절에 바울 사도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한다. 영어로는 “and do not give the devil a foothold.”, 즉 “마귀(악)에게 발 디딜 곳조차 허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방심하지 말자”, “바른 자세로 살자”. 이번 허리 병을 통해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다짐이다. ‘삐끗’은 순간이지만 그 후유증이 언제까지 갈지 알 수도 없고 장담할 수도 없다. 잘 쉬고 치료하면 몸도 회복되듯이 살아가면서 우리가 영적으로도 회복할 기회가 있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인생은 수없는 갈림길 앞에서의 선택의 연속이다. 처음에 시작점은 같을지라도 불과 몇 분만 걸어가다 보면 다른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는 것이 선택의 결과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이사야 55:7) 예언자 이사야는 당시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회복과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며 바른 길로 돌아오길 촉구했다. 지나간 ‘삐끗’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의 ‘회복’이다. 결국 사람은 오늘을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방심하지 말고 삐끗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삶과 종교] 한 송이 꽃이 피기까지

꽃샘추위 끝에 드디어 온 세상이 봄의 생명력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는 아름다운 봄이 왔다. 화사하고 따뜻한 봄 내음이 향긋하게 코끝을 간지럽히고,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오고, 꽃잎이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꽃비 내리는 듯하다. 봄이 무르익기 시작하면서 자연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야외로 봄나들이를 한다. 생명력 가득한 이 계절에 봄처럼 밝은 기운을 서로 전해보는 것도 좋겠다. 봄비가 내리는 봄에는 부처님 경전인 법화경 ‘약초유품’에 나오는 구절이 생각난다. “비유컨대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내와 골짜기와 땅 위에 나는 모든 초목이 많지만 각각 그 이름과 모양이 다르니라. 먹구름이 가득 퍼져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고, 일시에 비가 고루 내려 흡족하면, 모든 초목의 크고 작은 줄기와 가지와 잎과 뿌리가 제각기 비를 받느니라.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가 그들의 종류와 성질을 따라서 자라고 크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나니, 비록 한 땅에서 나는 것이며 한 비로 적시는 것이지마는, 여러 가지 풀과 나무가 저마다 차별이 있느니라.” 큰 구름이 비를 내려 온 대지를 골고루 적시지만 모든 수목은 각기 종류와 성질에 맞게 비를 흡수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비가 내려 온 대지를 적시듯이 부처님의 가르침도 일체 중생에게 조금도 차별이 없이 평등하지만 중생들의 근기와 성품과 욕망이 달라 각자 자기의 그릇만큼 받아들이고 성장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 피어나는 꽃들도 마찬가지다. 차별 없이 봄비는 내리지만 서로 다르게 받아들인다. 꽃의 모양과 색깔, 피어나는 시기, 향기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꽃은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 꽃은 서로를 비교하면서 우월을 다투지 않는다. 좀 더 빨리 피어 우쭐대지도 않고, 늦게 핀다고 해서 슬퍼하지도 않는다. 또 꽃은 크기와 모습이 달라도 서로 비교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개성과 특색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운다. 피어난 꽃은 때가 되면 미련 없이 꽃잎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언젠가 때가 되면 꽃을 피우게 될 것을 기약하면서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송이 꽃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해 우열을 가리고, 우월감 또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괴로움에 빠진다. 또 꽃을 피운 결과만 보고, 꽃을 피우기까지의 과정을 보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 한 송이 꽃이 그냥 피어난 것이 아니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햇볕과 비, 흙, 바람의 노력이 필요하다. 봄이 되기를 기다린 인내심까지 더해져야 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피와 땀과 눈물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의 노력 외에도 주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줬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어떤 일의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우리는 눈앞의 결과보다도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여정을 거쳐 왔는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 눈앞의 실패와 성공의 여부보다 어떤 과정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더 중요하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더 빨리 성공하려 하다 보니 욕심이 눈을 가리고 판단력이 흐려져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조금은 느긋하게 시절 인연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능력과 잠재력을 믿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좋겠다. 때가 돼야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듯이 언젠가 때가 되면 각자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삶과 종교]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

예전에 안나의 집(성남의 노숙인 무료급식 시설)으로 봉사 다닐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코로나 시기여서 식당 내부에서 배식하지 못하고 성남동 성당 마당에서 도시락을 배부하고 있었다. 한창 도시락을 드리고 있는데 한 노숙인이 김하종 신부님(안나의 집 원장)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 그러냐 물으니 고해성사를 하고 싶어서 그런다는 것이다. 한데 하필 김하종 신부님이 출타하신 날이었다. 그래서 부득이 필자가 “사실 저도 신부다(사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상대방이 먼저 알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해가 필요하신 거면 저라도 드릴 수 있다. 저라도 괜찮으시면 고해 드리겠다”고 했더니 좋다고 하셨다. 그래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사실 이분은 천주교 신자도 아니었고 심지어 술기운도 조금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들 어떠랴. 그분이 털어놓는 마음 깊이 숨겨뒀던 죄스러운 일들, 마음들, 삶의 이야기들을 다 들어 드렸다. 그렇게 다 듣고 나서 “사실 고해성사는 천주교 신자만 가능하다. 하지만 오늘 아버님이 진심으로 뉘우치며 사제를 찾아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셨으니 이게 성사적 유효성은 없어도 하느님이 그 마음을 굽어보시고 친히 도와주실 거다. 성사가 아니라서 사죄경은 드리지 못하지만 저도 아버님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드리겠다”며 설명해 드리고 그분이 실천하실 수 있는 작은 보속(고해성사를 하고 난 뒤 사제가 주는 과제로 선행이나 기도 등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하고 삶을 변화시킬 수 있게 돕는 일종의 처방전 같은 것)을 드린 뒤 그분 머리에 손을 올려 축복해 드렸다. 그러자 그분은 너무나 기뻐하며 자기 같은 사람에게도 따뜻한 밥을 주시는 김하종 신부님께 감사하고 송구해서라도 이제는 정말 새롭게 살려고 노력하겠다며 기뻐하며 도시락을 들고 가셨다. 이때 필자는 ‘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 있어 왔던 실수, 후회, 상처들, 그런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고 새로운 기회를 받고 싶은 마음이 있구나’ 깨달았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만드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새삼 느낀 적이 있다. 고해성사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혹자들 중에는 감히 인간인 신부가 뭔데 용서를 말하며 ‘인간인 신부에게 뭐하러 죄를 고하나. 그냥 다이렉트로 기도하면 되지’ 한다. 그런 물음에 신학적으로나 영성적으로 얼마든지 하나하나 응해드릴 수도 있지만 그런 물음들이 실은 무지와 두려움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기에 그보다는 그저 ‘고해성사 안에서 신의 자비를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 안에는 자신의 죄와 나약함을 고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조금도 없나요. 아니라면 저라도 당신의 고해를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고해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고해성사의 은총을 체험해본 사람은 안다.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그 안에서 얼마나 내밀한 신과의 만남이 일어나는지 신부는 정말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안에선 실로 신께서 친히 일하신다는 것을! 인간이 자신의 아집과 교만을 벗어 놓는 그 빈자리에서 놀라운 신의 치유가 시작된다.

[삶과 종교] 나그네 길에서

여행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 중 하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에 대한 접근과 도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알지 못함’은 여행의 가장 큰 불안함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마다 자유여행 또는 패키지여행 등 선호하는 여행 방식이 다르다. 얼마 전 안식년으로 한 주간 아내와 자유여행으로 미국 뉴욕을 다녀왔다. 뉴욕 여행에서 지금까지 두고두고 고마웠던 일 중 하나는 이름 모를 시내버스 기사의 배려였다. 자유의 여신상 투어를 위해 유람선 선착장으로 가기 위해 탑승한 시내버스에서 스마트폰 지도가 가르쳐 주는 대로 버스에서 하차했는데 사방이 캄캄한 거리였다. 게다가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음산한 날씨까지 겹쳐 길을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쩔 줄 모르는 우리 부부에게 버스 기사가 문을 열고 묻는다. “너희들 ‘Circle Line’(유람선 회사 이름) 가는 거 아니야? 이거 거기 바로 앞에 가니까 다시 타.” 우리 부부를 위해 기사는 다른 승객들이 불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절히 안내해 줬다. 비록 아주 짧은 한 정거장의 거리였지만 그 기사의 친절함은 뉴욕 여행에서 가장 큰 고마움으로 기억된다. 며칠 전 전철을 타고 가던 중 외국인 여행객들이 계속 스마트폰 번역 앱으로 노선도를 찍어 번역하는데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한 표정이다. 나는 이내 조금 망설이다가 그들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그들이 말한다. “인천까지 가는데 이 열차가 가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서 답했다. “이 열차의 종점이 인천역이고 지금부터 50분 정도 걸려요.” 어두웠던 그들의 표정이 밝아지며 내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렇다. 작은 친절과 배려는 나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두고두고 고마운 일이 된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기독교인들이 자주 언급하고 살기 원하는 ‘거룩’이란 용어는 히브리어로 ‘카도쉬(kadosh)’인데, 이는 ‘구별’, ‘다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흔히 생각하기를 세속과 구별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나 자신의 생활을 바로잡는 것을 거룩하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거룩함이란 나와 다르거나 익숙지 않은 것을 배척하지 않고, 그것을 성찰의 기회와 섬김의 대상으로 만들어 구별과 다름을 인정하며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금의 세속문화는 자기만 아는 이기성과 폐쇄성에 익숙해져 있다. 돈과 권력 명예를 위해서라면 타인과 다른 공동체를 비난하고 배척하는 데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진정한 거룩은 나를 챙기면서도 타인과 이웃을 챙기는 것이다. 그것이 거룩한 삶의 핵심이며, 나 중심주의와 집단 이기주의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항거’이다(배철현·‘신의 위대한 질문’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마태복음 25장 40절) 예수께서는 우리 주변에 있는 ‘작은 자’에게 행한 일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주님께 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들을 작은 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외면하는 건 아닌지, 아니면 ‘유심히’ 살피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작은 자들에게 보이는 관심과 환대는 나그네 같은 우리의 삶의 소풍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삶과 종교] 진정한 독립의 의미

봄의 시작을 알리는 3월에 우리의 역사 속에서 기억해야 하는 날이 있다. 바로 3월1일, 3·1 독립운동을 기념해 제정된 삼일절이다. 나라 잃은 슬픔과 치욕을 되새기게 되는 날이며 일제강점기 비폭력으로 저항한 날이다. 김구 선생, 유관순 열사, 그리고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독립운동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분들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던 만해 한용운 스님의 ‘님의 침묵’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중략)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에서 ‘님’은 부처님일 수도 있고, 우리나라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누군가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님’과 갑자기 이별하게 된다면 깊은 슬픔과 절망과 고통 속에 빠진다. 그런 상황 속에서 희망의 빛을 보고자 힘과 용기를 내어 보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삶의 무게가 있다. 기쁜 일, 슬픈 일, 화나는 일, 즐거운 일 등 많은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도망가려 해도 도망갈 수 없다.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은 다 겪어내고 견뎌야 한다. 우리 인생이 마치 한 편의 드라마 또는 장편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볼을 꼬집어본 적도 있지 않은가? 좋은 일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면 안 좋은 일일 수 있고, 안 좋은 일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일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절망에 빠지거나 상황이 더 나빠져 헤어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스스로 확고하게 마음의 주인이 돼야 한다. 마음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한다. 매 순간 깨어 있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이 있어야 한다. 지혜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 눈앞의 작은 이익과 욕심에 눈이 멀지 않고, 분노와 원한으로 일을 그르치지 않게 된다. 지혜롭게 일을 결정하고 판단해 실행에 옮기면 후회할 일이 적어진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나’임을 잊지 말고 당당하게 우뚝 서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또 깊은 내면의 지혜와 자비를 발현해 좀 더 넓은 마음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했으면 좋겠다. 삼일절의 의미를 가슴에 새기면서 지금의 ‘나’가 존재하기까지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나’와 내 주변을 소중히 여기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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