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미국대학원에서 죽기살기로 공부할 때였다. 현대사회의 관료제 문제를 다루는 세미나에서 이 주제에 대한 세계 석학들의 논의들을 내 나름대로 명쾌하게 정리해서 자신있게 발표했다. 서울대학 같으면 교수님께서 참 잘 요약 정리했다고 칭찬할 것으로 나는 확신했다. 그런데 발표 끝나자 미국 교수님의 칭찬은커녕 나무라듯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자네의 견해는 무엇인가? 대가들의 논의는 잘 정리했으나 자네의 생각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 나는 당황했다. 서울대학에서 그렇게 배웠느냐고 따지듯 물으셨다. 이때 나는 한국 교육이 학습자의 창의력을 북돋아주는 교육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교과서를 절대표준으로 신앙하기에 그 내용을 암기시키는 비창조교육임을 새삼 깨닫고 부끄러웠다. 암기교육에는 창조적 도전이 들어설 공간이 아예 없다. 이런 교육에서는 교과서가 종교적 경전처럼 여겨지기에 감히 그 표준적 진리에 창조적 토를 달 수 없다. 그저 그대로 암송해야 한다.
이같은 교육문화에서는 루터, 뉴튼, 코페르니쿠스, 다윈,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같은 걸출한 창발적 인물이 나올 수 없다. 대신 요령과 꼼수, 잔머리 굴리기와 위선적 처세에 뛰어난 인간들이 권력과 금력의 갑이 된다. 그들의 갑질로 많은 을들이 외로워하고 괴로워하게 된다. 14년 전, 나는 교육부총리로 부름을 받았다. 이때 한국 교육은 반드시 공공적 인물, 온정적 인재, 창발적 인간을 가르쳐 길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통교육 수준에서는 약자들과 동고하는 온정적 인품을 교육시키고, 고등교육 수준에서는 창조적 발상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새 것을 만들어내는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래야 공교육다워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내가 새삼 확인한 교육현실은 암기력이 출중해야 최고 일류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현실이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교육풍토에서는 비정한 편법주의적 인간들이 사회정치적 표준세력이 되고, 경제적 적자(適者)로 군림하게 된다는 비극에 나는 주목했다. 그래서 학벌타파를 정책적으로 추진하려 했다. 국가 엘리트 상층의 압도적 다수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현실을 아프게 감지했기 때문에 더욱 학벌의 폐해를 극복하고 싶었다.
못된 갑질하는 인간들이 학벌로 양산된다면, 이 땅에 을, 병, 정(丁) 들의 아픔은 그만큼 억울하게 확대확산될 것 아니겠는가. 이들은 비표준 비주류로서 민주주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구조적 음지에서 불안해하고 불행해질 것 아니겠는가. 마침 지난 연말에 둘째 손녀가 귀국해서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손녀는 엄마로부터 줄곧 홈스쿨 교육을 받았는데, 세계 명문대학으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한국에선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첫 학기를 마칠 때까지 나는 심히 걱정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학이라는 조직에 들어갔으니 적응을 제대로 해내는지 염려되었다.
그래서 손녀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당당하게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 엄마의 자기주도적 가르침에 익숙해졌기에 대학 첫 학기를 잘 마쳤어요. 학생들이 어렵다는 철학과목을 가장 즐겼거든요. 교수님과의 대화가 신났어요 나는 이 얘기를 듣고, 놀랐고 감사했다. 홈스쿨에서 인격 교육, 창의교육, 학습자 주도 교육을 모두 잘 배웠던 손녀가 대견스러웠다. 그의 스승이었던 내 딸을 존경의 눈으로 다시 쳐다보게 되었다. 지금 우리 정부는 창조가치를 매우 강조한다. 창조경제, 심지어 창조국방까지를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진정한 창조력은 자기주도적 과감한 사고와 실험정신, 자유로운 발상과 거침없는 소통에서만 꽃핀다는 진리를 국무위원과 청와대 간부들은 전혀 모르는 듯하다.
대통령의 글읽는 듯한 훈시를 일일이 받아 적는 그들의 딱한 모습에서 나는 아무런 창조력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 엘리트들의 비창조적 행태에서 어찌 창조정책이 나올 수 있겠는가. 한완상 前 교육부총리
오피니언
한완상
2015-02-02 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