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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칼럼] 제도 위에 문화가 있다

어느 날 회의 참석차 KTX를 타고 지방의 한 도시에 가면서, 좀 더 쾌적하게 가고 싶어 특실을 탔다.하지만, 가는 내내 큰 소리로 통화를 하는 사람 통에 쾌적하고 싶은 나의 바람은 고통으로 바뀌어버렸다. 그 곁을 지나는 역무원이 제지할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그냥 지나쳤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다시 지나가는 역무원에게 객실 안에서 전화를 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역무원이 주의를 주자 목소리만 조금 낮출 뿐, 통화는 막무가내로 계속되었다. 역무원은 더 이상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다.더욱 놀라운 일은 전화 통화를 줄곧 해대던 그 사람을 회의장에서 다시 마주친 것이다. 모른체 하면서 인사를 나눴지만, 내내 찜찜하였다.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도 높은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는 쾌적한 여행을 위한 고급 기차뿐만 아니라 시스템까지도 잘 갖춰져 있다. 그렇다고 하여 잘 갖춰진 시스템이 쾌적함을 바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제도가 잘 갖춰져 있더라도 제도 사이를 왕래하는 사람에 따라서 제도가 보장하려는 목적의 실현 여부가 좌우된다. 이렇게 보면, 핵심은 사람이다. 동양의 역사는 아편전쟁을 계기로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아편전쟁으로 서양에 의한 ‘완전 패배’를 맛보고 나서 동양의 패권국이었던 중국의 핵심 과제는 서양극복이었고, 그 첫 번째 시도는 과학기술문명을 하루바삐 배워 따라잡자는 것이었다. 이 시도를 역사에서는 양무운동이라고 부른다. 양무운동은 큰 결실을 맺는다.리홍장(李鴻章)의 주도로 강력한 북양함대(北洋艦隊)를 재건한 것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북양함대가 참패하자 중국인들은 과학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철저하고도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한다. 결국 서양의 강점이 단순히 과학기술문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강력한 과학기술 문명을 가능하도록 한 배후의 힘, 즉 정치제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그들은 과학 기술을 넘어 제도를 배우려는 노력에 집중하면서 바로 제도 개혁을 추구하는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운동은 큰 성취 없이 실패로 끝나버린다.변법자강운동이 좌절하자 그들은 바로 정치나 제도 너머에 있는 더 근원적인 힘을 찾아 나섰고, 그것을 문화, 윤리사상, 철학으로 포착한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문화, 새로운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만 건강한 정치제도가 가능하고, 이 건강한 정치제도가 가능해야만 과학기술문명이 발전하게 된다고 인식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량쑤밍(梁溟)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로 윤리사상 ― 인생철학이다. 그래서 천두슈(陳獨秀)는 그가 쓴 ‘우리의 궁극적 자각(吾人最後之覺悟)’에서 각종 개혁이 통용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윤리사상에 있음을 깨달았다고 하였다.이 근본을 개혁하지 않으면 모든 개혁도 효과가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이런 깨달음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사상의 개혁 ― 문화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¹ 서양을 극복하여 새롭고 강한 나라를 만들려는 중국인들의 노력은 최종적으로 사상과 문화에 귀착하였다. 작금의 우리나라 국정농단 사고의 내용도 사실은 공적인 시스템을 사람들이 멋대로 무력화시켜버린 것이다. 정말 시스템과 제도만의 문제일까?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어도,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이 공적인 사명감이 내면화될 정도로 성숙되어 있지 않으면 그 제도가 목적으로 하는 효과를 낼 수 없다. 그래서 다시 핵심은 사람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길러내는 교육과 문화를 중요하게 다시 들여다볼 때이다. ¹량쑤밍(梁溟) 저, 강중기 옮김, 동서 문화와 철학(솔 출판사 刊), 2005년. 41~42쪽 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최진석 칼럼] 영재가 영재인가

우리나라의 많은 부모나 젊은 인재들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아직도 집착하는 길이 있다. 고시다. 대개는 시험에 최적화된 영재들이 도전하는 길이다. 한 번 붙기만 하면 평생 권력을 누릴 수 있다. 대부분은 부도 쌓는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모두 누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성적 좀 좋다는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여기에 매달린다. 20살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젊은이가 있었다. 사법고시 최연소 합격자다. 벽촌 시골 출신에다가 최연소 사법고시 합격생이니 세상이 모두 칭송할 만하다. 약관의 나이부터 ‘영감’ 대접을 받았다. 아이 키우는 많은 부모들이 꿈꾸는 그대로 승승장구하였고, 최근에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핵심 요직을 맡았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의 대부분 부모들이 제일 갖고 싶은 자식이 아닐까? 그러나 이 사람이 근무시간에 처가 부동산 거래를 하는 곳에 나타나는가 하면, 처가 농지 매입 건과 관련되어 논란을 빚고, 수상한 가족 회사의 세금 축소 의혹까지 받는 등, 수준 높은 인재의 품격은 사라지고 없다.더 심한 것은 대통령 옆에서 핵심적인 보좌를 해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무당 끼 있는 아낙이 대통령을 조정하여 국사를 주무르는 데도 아무런 긍정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더 나아가서 오히려 그 아낙의 그늘을 이고 산 것 같다. 자존감이나 자부심이나 사명감이나 자긍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게 허물어진 대한민국 최고 영재의 모습이다. 다른 부문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어떤 수석은 미국 유명 대학의 경제학 박사다. 대학 교수도 지냈을 뿐 아니라, 경실련의 한 위원회 위원장도 맡은 적이 있다. 이 정도면 세상의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식에게 저런 사람처럼 되어보라고 말할 만하지 않겠는가.그러나 이 사람도 역시 그 아낙의 기획에 따라 기업을 돌아다니며 거금을 갈취하고,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이 정도면 그 아낙의 집사 격에 불과하다. 대포폰을 사용하여 회유도 하고 증거를 없애려 허둥댔다. 여기 어디에서 영재의 품격이나 고고함을 발견할 수 있겠나. 우리의 영재들은 왜 고작 이 모양인가.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이렇게 길러졌기 때문이다. 주위에서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시험만 닥치면 해야 하는 어떤 일에서도 면제된다. 우선 성적만 좋으면 된다. ‘사람’으로서 교육되지 못하고, 시험 기계로만 길러진다. ‘본질’과 ‘기능’ 사이에서 우선 ‘기능’만 다듬고 서두르다가 자초한 일들이다. 고등학생들에게는 우선 대학만 합격하면 된다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젊은이들에게 예의를 가르치지도 않았다.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도 가르치지 않았다.왜 사람은 공동체와 함께 해야 하는지도 가르치지 않았다. 친절이나 착함이 어떻게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지도 가르치지 않았다. 이렇게 길러진 인재는 사실 ‘사람’이라기보다는 ‘기계’에 가깝다. 부과되는 기능만 잘 수행하면 스스로도 만족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기계 말이다. 여기에 삶의 품격이니 자아의 완성이니 하는 것들은 말을 꺼내기도 낯 부끄럽다. ‘사람’이라면 ‘기능’을 제어하는 더 근본적인 능력, 즉 ‘덕’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덕’은 지식보다도 심부름이나 노동이나 여행이나 방황이나 지루함이나 실패의 경험이나 봉사나 자발적 독서 등에서 길러진다. 문제는 우리가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이렇게 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덕’의 존재로 키우지 않고, ‘기능’적 기계로 길러온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기계는 행복도 모르고, 희생도 모르고, 헌신도 모른다. 자존심도 없고 자부심도 없다. 품격이나 기품에 가치를 둘 줄 모른다. 기능적 교육의 징벌적인 업보가 지금 진행되고 있다. 우선 각자 자기 자식을 어떻게 기르고 있는지부터 돌아보면 좋겠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최진석 칼럼] 위대함의 원천

인간은 근본적으로 문화적 존재다.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여 인간과 관계없이 존재하던 자연의 세계 위에 무늬를 그린다.무늬를 그리면서 자연 세계를 변화시키는 인간의 행위를 ‘문화’라 하고, 문화적 활동의 결과로 눈앞에 세워진 다양한 내용들을 ‘문명’이라 한다. 한 인간의 높이는 문화적인 수준이 얼마인가가 결정한다. 개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국가의 문명적인 수준도 마찬가지로 문화의 눈금으로 결정된다. 문화도 가장 원초적으로는 ‘생각’에 의해 지배된다. 결국 생각의 수준이 그 문화나 문명의 내용과 높이를 좌우한다. 한 인간의 높이가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의 수준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도 매우 당연하다. 국가도 그러하다.그런데, 문화나 문명의 내용에 방향성을 제시하는 ‘생각’은 많은 경전들에 집약되어 축적되고 전승된다. 그래서 문명국에는 문화가 응축된 경전들이 존재한다. 그 경전들은 인종과 지역에 상관없이 보편적인 존경을 받으며 긴 시간동안 비판과 반대나 전쟁뿐만 아니라, 햇빛이나 비바람 그리고 천둥 번개들까지도 이겨내며 계속 이어져 지금까지도 인류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따로 ‘고전’(古典)이라고 존칭한다.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발휘하는 탁월한 능력은 모두 ‘고전’으로 모인다. 따라서 선도국에는 생각을 선도하는 증거로서 ‘고전’이 존재한다. 지금 이 단계에서 우리는 ‘고전’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도 고전의 생산국이 되는 도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찾아와 도움이 될 만한 좋은 고전을 추천해 달라 했다. 서양 현대 철학을 연구하는 학생이어서, 나는 오히려 전혀 다른 쪽에서 더 도전적인 영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중국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장자’를 권해 주었다. 사실 ‘장자’라는 책은 서양 현대의 철학자들이나 예술가뿐만 아니라 심리학자들에게까지도 매우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책이다.몇 개월 후에 학생이 다시 찾아왔다.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으며,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하면서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는 이제 장자처럼 살아보려고 합니다.” 이 말은 요즘 나의 문제의식을 매우 부정적으로 자극하였다.나도 한 마디 했다. “이 사람아, 장자를 감명 깊게 읽고 나서 기껏 한다는 말이 장자처럼 살아보겠다는 것인가? 그럼 자네는 어디 있을 요량인가?” 장자는 절대 자신 이외의 그 누구처럼 산 사람이 아니다. 장자 자신처럼만 살다 간 사람이다. 자신처럼 혹은 자신으로만 사는 자신을 자신의 눈으로 들여다보면서 한 사유의 결과물로 ‘장자’가 태어났을 뿐이다.우리에게 존경받는 수많은 고전 가운데 어느 한 권이라도 자신 이외의 누구처럼 살다가 나온 것이 있겠는가. 플라톤은 플라톤 자신처럼 살다가 ‘국가론’을 남겼고, 노자도 공자도 다 각자 자기 자신으로만 살다가 ‘도덕경’과 ‘논어’를 남겼다.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도 오직 자기처럼만 산 사람이다. 그 결과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인류의 빛으로 세워놓았다. 이제 알겠다. 위대한 고전들은 다 자기 자신처럼 산 사람들이 남긴 결과라는 것을. 그렇다면 위대함은 다 자기 자신으로만 산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것도 알겠다. 고전을 생산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으로만 살았는데, 고전을 존숭하는 자들은 그 고전을 따라 살려 한다.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만 위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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