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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희망세상] 프란치스코 후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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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강의를 많이 하다보면 호불호를 넘어 별별 말을 다 듣게 된다. 나는 어느 성당 신부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 전해들은 적도 있다.

“그런 신부 한번 다녀가면 그 후유증이 얼마나 큰 줄 아십니까?”

나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십분 이해한다. 아무래도 잠시 다녀가는 이의 강의는 온갖 좋은 말은 다 동원하여 화려하기 마련이다.

음식으로 치자면 일 년에 한번 먹을까 말까 하는 ‘성찬’인 셈. 그러나 본당 신부는 다시 평범으로 돌아와서 일상의 양식을 공급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 괴리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것이 본당 주임 신부의 몫인 것이다.

요란하고 흥분스러웠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4박 5일 방한 일정을 마음으로 동행하면서 그 끝자락에서 문득 그 일이 떠올랐다. 모르긴 모르되 지금 이 사회 지도층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마음 한켠에 신선한 감동을 품고 있은 채, 뭔지 모를 부담감으로 인해 속이 개운치는 않을 터다.

“이건 뭐지? 이 감정! 은혜를 받은 것 같으면서도 괜히 죄인 같은 이 기분….”

그러지 않아도 요즈음 모든 잣대를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행에 맞추어 볼멘소리를 하는 이들을 여기저기서 만난다. “왜 정치권은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약자들을 안아주지 못하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우리 식탁에 빈자리를 마련하자고 했는데, 왜 경제인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가난한 이들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해주자고 했는데, 왜 당신네들은 용서를 못하는가?”

프란치스코 교황 덕에 우리의 눈과 귀는 고급스러워졌고, 우리의 이상은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높아진 잣대를 자신에게 돌릴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늘 하던 버릇대로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향하기 일쑤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비겁한(?) 손가락질에 진즉 일침을 놓았다.

“한 도시의 모습은 그 안에 사는 구성원 모두의 얼굴로 만들어진 모자이크와 같은 것으로 지도자나 관리들이 보다 큰 책임을 지고 있겠지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시민들도 공동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니 남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자신의 책임을 추슬러 볼일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오늘 발생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사건들과 관련하여 나에게는 과연 어떤 ‘책임’이 있을까. 나는 그 책임만큼 행동했던 사람인가, 아니면 입만 살아 있던 사람인가.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남에게 돌렸던 성찰의 시선을 이제 자신에게로 회수하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도 우리의 파파(papa)께서는 친절하게 도움말을 준다.

“나는 등반가에게 조언을 해 줄 수는 있지만, 그를 위해 대신 산을 올라 줄 수는 없다.”

풀어 알아듣자면 이런 말씀일터다.

“나는 당신들을 기꺼이 안아 줄 수 있습니다. 위로든, 격려든, 조언이든, 당신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다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산은 당신들이 오르는 것입니다.”

교황이 우리에게 남겨준 진정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 아닐까 한다. 현금의 절망 문화에서 벌떡 일어서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말이다.

차동엽 미래사목연구소장ㆍ인천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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