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도박 사이트

하와이 호놀룰루시, 매년 12월22일 ‘인천의 날’ 선포…이민 120주년 기념식에 1천300여명 참석

인천 제물포에서 떠나 미국 하와이로 간 ‘한인 이민 120주년’을 맞아 호놀룰루시가 한인 이민 역사의 시작인 12월22일을 ‘인천의 날’로 선포했다. 25일 인천시에 따르면 지난 22일(현지 시각) 호놀룰루시 하와이시어터에서 ‘이민 120주년 기념식 및 축하공연’을 했다. 행사에는 유정복 인천시장과 허식 시의회 의장, 실비아 장 루크 하와이주 부주지사, 릭 블랭지아르디 호놀룰루 시장, 타미 워터스 호놀룰루 시의회 의장 등을 비롯핸 현지 교민 1천300여명이 참석했다. 시는 이번 행사를 통해 하와이에서도 모국의 정상화를 위해 지원을 아기지 않았던 선조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뜻을 전했다. 특히 이날 블랭지아르디 시장은 12월22일을 ‘인천의 날’로 선포하고 “인천시와 호놀룰루시와의 교류와 우호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겠다”고 했다. 유 시장은 “120년간 인천과 역사를 함께한 하와이 동포들에게 유대감과 우정을 한층 깊게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인천에 재외동포청을 유치해, 대한민국 미래를 열어갈 핵심도시로의 성장에 힘이 되어 달라”고 했다. 한편, 시는 이날 행사에서 지난 2003년 위촉된 이래 인천시와 호놀룰루시 교류사업의 가교역할에 헌신한 고서숙 인천시 국제자문관에 대한 공로패 수여를 비롯해 인천시립무용단의 ‘울림’ 공연을 했다. 윤성주 예술감독과 41명으로 꾸려진 시립무용단은 대표 작품인 ‘담청(淡靑)’의 일부분과 ‘만찬-진, 오귀’ 중에 ‘무무(巫舞)’ 부분을 구성한 한국 전통무용과 창작무용을 선보여 큰 호응을 얻었다. 또 시립무용단은 왕실의 한 장면을 무대 위에 구현한 ‘태평성대’, 아박무를 바탕으로 창작한 ‘결(潔)’, 대표적인 우리춤인 ‘부채춤’으로 흥을 돋구기도 했다. 이 밖에 아름다운 자태가 돋보이는 산조춤 ‘춘흥’과 풍류를 즐기는 여인들의 설장구춤인 ‘풍류가인’, 그리고 역동적 군무와 강렬한 캐릭터가 인상적인 창작춤 ‘무무’를 차례로 선보여 관객들의 시선과 호흡을 사로잡았다. 이날 무용단의 멋진 공연에 관객들은 아낌없는 기립박수와 열광적 환호로 커튼콜을 연출하기도 했다.

[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인천시·호놀룰루시 교류 증진 20년, 우정 더욱 돈독히

인천시가 하와이 호놀룰루시와의 자매도시 20주년을 맞아 돈독한 우정을 이어나가겠다고 22일 밝혔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21일(현지 시각) 릭 블랭지아르디 호놀룰루시장을 만나 도시간 교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열린 논의에는 허식 인천시의장과 토미 워터스 호놀룰루시의장도 함께 했다. 유 시장은 “내년이 인천시와 호놀룰루시의 자매결연 20주년을 맞는 만큼 기념행사 개최와 문화 교류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유 시장은 ‘2050 호놀룰루 항만 마스터 플랜 설명회’에 참석해 제물포 르네상스 프로젝트 사업과의 연결 가능성을 살피기도 했다. 한편, 시는 하와이 이민 120주년을 맞아 ‘2022년 인천·하와이 디아스포라 미술국제교류전’과 특별 사진전을 선보이고 있다. 시는 우선 미술전에서 하와이에서 활동하는 작가 22명의 작품 43점을 포함해 총 작가 47명의 작품 68점을 전시한다. 1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특별사진전 ‘제물포에서 포와로, 다시 인천으로’라는 사진전에서는 1~4부와 에필로그를 거쳐 한민족이 하와이에 자리잡은 배경과 과정을 담았다. 유 시장은 “사진전과 미술전은 한민족이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했던 하와이 한인들의 발자취와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라며 “인천과 하와이 우호 협력관계가 이어지고, 양 도시가 더욱 발전하길 바란다”고 했다.

[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이민 시초’ 하와이 교민들도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 지지

인천 제물포에서 시작한 근대 이민 역사의 시초인 하와이 교민들도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에 힘을 보탠다. 21일 인천시에 따르면 20일(현지 시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시에서 연 ‘인천의 날’ 행사에서 하와이에 있는 한인단체들이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를 지지했다. 이는 지난 11월부터 이어진 유럽한인총연합회, 우즈베키스탄 고려인협회의 지지선언에 이은 3번째 공식 지지 선언이다. 이번 지지선언에는 인천 내리교회 성도들이 만든 하와이그리시도연합감리교회와 하와이한인회, 하와이한인문화회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하와이협의회 등 13곳의 하와이 경제·사회·문화 한인단체가 함께한다. 시는 이번 하와이 한인 단체들의 유치 지지 선언을 통해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 공감대가 미주사회를 파고들 것으로 보고 있다. 한인 단체들은 과거 대한민국 근대 이민사의 출발지인 점과 공항과 항구를 함께 두고 있는 관문도시의 특성, 재외동포 사회와 함께 초일류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미래발전성 등을 이유로 인천 유치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박재원 민주평통 하와이협의회장은 “하와이 한인사회와 인천은 대한민국 이민 역사를 공유하는 만큼, 인연을 계속 이어가길 바란다”며 “하와이 한인단체가 재외동포청의 인천 유치를 위해 적극 협력하겠다”고 했다. 이날 열린 ‘인천의 날’ 행사에는 유정복 인천시장과 허식 인천시의장, 조명우 인하대학교 총장, 실비아 장 루크 하와이 부주지사 등 200여명의 한인단체와 교포가 참석했다. 또 유 시장은 최대학 하와이한인문화센터 회장에게 감사장을 전달하고, 해리 김(Harry Kim) 전 하와이 카운티 시장에게 ‘올해의 인천인 대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유 시장은 “지금 우리나라가 있기까지, 재외동포의 노력을 외면할 수 없다”며 “이 중심에는 이민사의 태동지인 인천이 있다”고 했다. 이어 “하와이 동포들이 함께 보태준 힘을 토대로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한편, 하와이는 1902년 12월22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한 국민 121명 중 102명 1903년 1월13일 호놀루루항에 도착하면서 공식이민 역사가 시작했다. 현재 하와이를 포함한 미주지역에 한인은 263만여명으로 전 세계 재외동포의 36%를 차지하고 있다. 이민우기자

[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박경용 인천시 글로벌도시기획단장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는 민간외교관 730만명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박경용 인천시 글로벌도시기획단장은 재외동포청 유치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약 730만명에 달하는 재외동포들을 지원하는 재외동포청 유치가 곧 지역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특히 박 단장은 인천이 항구와 공항을 품고 있는 만큼, 재외동포에 필요한 시설과 공간 준비는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박 단장은 “최초의 근대 이민이 시작했다는 상징성에 더해 공항과 항구가 인접해 있다는 점은 어떤 곳보다 유리하다”며 “공항에서 모국에 도착한 뒤 ‘인천’이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완벽할 것”이라고 했다. 특히 박 단장은 “인천은 디아스포라 영화제를 통해 포용과 상생의 도시를 실현하고 있다”며 “뮤지엄파크의 주제 역시 ‘디아스포라’로 정하면서 포용과 관용은 인천을 상징하는 주요한 단어가 될 것”이라고 했다. 현재 인천은 영종국제도시에 들어서는 한상드림아일랜드와 근대 이민을 기록하는 한국이민사박물관과 디아스포라영화제 등 재외동포들을 위한 포용과 관용의 도시에 색을 담고 있다. 박 단장은 재외동포청 유치가 가져올 인천의 지역경제 활성화도 기대하고 있다. 박 단장은 “인천에 재외동포청이 들어오고, 이미 자리잡은 아메리칸타운과 유럽한인문화타운 그리고 외국인 정주여건을 강화할 수 있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이 함께 시너지를 내면 부수적인 효과가 분명하다”고 했다. 이어 “재외동포가 이곳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이들이 가져오는 경제적 투자와 이익은 곧 지역경제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박 단장은 정부의 조직개편안이 국회 문 턱을 통과할 때를 대비해 재외동포청 유치를 위한 물밑 작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박 단장은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를 위해 행정안전부와 외교부 등 중앙부처와 긴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며 “인천이 누구보다 먼저 재외동포청 유치에 대해 선점했으니,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김지혜기자

[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인천, 재외동포청 유치해 이민자 포용의 도시로 우뚝…재외동포 기본법 시급

인천이 정부의 재외동포청을 유치해 포용의 도시의 특색을 지키는 등 이민자의 도시로 우뚝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20일 인천시 등에 따르면 전국 지자체들은 정부 기관이자 재외동포의 구심점인 재외동포청 유치를 위한 경쟁에 나서고 있다. 인천시가 전국 지자체 중 가장 빠른 시기인 지난 9월부터 본격적인 행보를 보인 가운데, 대전시과 광주시, 경기도 안산시 등 다양한 지자체에서 재외동포청 유치를 요구하고 있다.이는 지자체들이 재외동포청 유치를 통해 재외동포들이 가져올 정치·사회·경제적 효과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정부는 지난 10월 재외동포청을 신설을 포함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현재 재외동포들에게 필요한 업무인 출입국·영사·세금 등의 업무는 각각 출입국사무소·외교부·국세청 등에 산재해 있다. 해외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재외동포들은 모국에서 행정 관련 업무를 보기 위해서는 각 다양한 부처에 문의를 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재외동포재단은 재외동포들의 교육과 문화 사업에 방점을 찍고, 재외동포 단체별 지원에 집중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재외동포재단을 통한 재외동포 지원 사업에서 나아가 행정 업무를 맡을 수 있는 재외동포청을 구상하고 있다. 정부는 재외동포청을 마련해 재외동포·단체 교류 협력, 네트워크 활성화 및 차세대 동포교육, 문화홍보사업 뿐 아니라, 관계 부처 협업을 통해 영사와 법무, 병무 등 원스톱 민원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특히 지역 안팎에서는 재외동포청 유치 이후의 지속성 있는 발전을 위해서는 ‘재외동포 기본법’이 필수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재외동포재단의 설립 근거인 재외동포재단법은 있지만, 재외동포 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방향성을 제시하는 기본법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즉 정부가 재외동포청을 만드는 것에서 나아가 ‘근거 법령'인 기본법을 마련하고, 기본계획과 실현계획을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재외동포청의 인천 유치가 가져오는 효과가 명확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진영 인하대학교 국제관계연구소장은 “재외동포청 유치에 대한 구호적인 논의만 이어갈 것이 아니라 재외동포들을 위한 지원 정책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기본법 마련이 필수적이다”고 했다. 이어 “재외동포기본법을 통해 동포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지자체와 정부가 같이 고민을 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종전의 정부가 외국인에 집중해 논의를 이어갔지만, 이제는 재외동포들에 대한 논의도 함께 해야 한다”고 했다. 김지혜기자

[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인천시, 이민자 포용 정책 앞서야…이제는 ‘유입 이민사’

인천시가 재외동포청 유치에 이어 이민자 포용 정책에도 앞장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0일 시 등에 따르면 인천 지역 외국인 주민은 13만1천369명으로 전체 인구인 294만 5천454명의 4.5%에 해당한다. 이는 전국 평균 비율인 4.1%보다 높은 수치다. 인천이 산업단지를 배후로 두고 있는 탓에 외국인 노동자가 2만2천450명으로 가장 많고, 외국국적 동포(재외동포)가 2만2천213명, 결혼이민자 1만1천771명, 외국인 유학생 5천177명 순이다. 시는 높은 재외동포 비율을 근거로 재외동포청 유치 발걸음을 더하고 있고, 이에 더해 유럽한인문화타운 조성과 아메리칸타운 2단계 사업, 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 등 다양한 포용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이로 인해 지역 안팎에서는 재외동포청 유치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외국인 주민 비율이 높고, 재외동포의 선호가 높은 인천의 특성에 더해 ‘이민자 포용 정책’을 함께 아울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인천은 항구와 항만이 인접해 있어 이민자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데다 연수구 함박마을에 고려인들의 마을과 남동구 논현동에 사할린 동포들이 함께 삶터를 이루고 있는 등 이민자 포용 정책이 절실하다. 또 해양수산부와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추진하는 영종도 준설토 투기장의 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는 재외동포 상공인과 모국간의 교류협력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에서 시작하는 등 인천 곳곳에 재외동포와 이민자에 대한 포용 정책이 포함하고 있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재외동포청의 핵심은 ‘나간 이민사’이지만, 이제 ‘유입 이민사’를 외면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고 했다. 이어 “재외동포청 유치가 더욱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유입 이민자들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 함께하는 지역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또 인천이 재외동포청 유치와 이민자들에 대한 지원이 함께 이뤄진다면 세계적인 교류의 길목으로 거듭나면서 경제적 이점이 증가할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류를 뜻 하는 ‘K-컬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만큼 이를 이용한 부가가치 창출도 수월해 질 수 있다. 재외동포청 유치가 ‘나간 이민사’에 대한 논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입 이민사’에 대한 확장적 사고의 시작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백태웅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연구소장은 “현재 이민자 세대들의 정체성 위기를 겪는 만큼, 모국의 재외동포 지원은 개인의 정체성 확립을 도울 뿐 아니라 지역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어 “혐오범죄와 차별로 인한 이민자의 아픔을 함께 고민하는 포용적 자세가 곧 재외동포청 유치 성패를 가릴 수 있다”고 했다. 김지혜기자

[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유정복 인천시장 ‘디아스포라 도시’ 선점 잰걸음

⑥ 세계 속의 대한인, 730만 해외동포 ‘국위 선양’ 인천시가 지난 1902년 12월22일 121명이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해 시작한 이민 역사를 기념하고, 디아스포라 도시에 걸 맞는 위상을 선점하기 위한 잰걸음에 나선다. 20일 시에 따르면 유정복 시장은 오는 24일까지 3박5일 일정으로 인천 제물포에서 떠난 이민자 121명이 자리 잡은 하와이 호놀룰루를 방문한다. 유 시장은 이번 하와이 방문을 통해 120주년을 맞이한 근대 이민 역사를 기릴 뿐 아니라 730만명 재외동포들의 편의와 지원을 위한 재외동포청 유치에 필요한 협력을 구상할 계획이다. 유 시장은 이번 출장을 통해 하와이 이민 120주년을 기념해 개최하는 ‘하와이 이민 120주년 특별 사진전’에 참석하고 하와이 교민과의 대화를 이어갈 계획이다. 또 유 시장은 이민역사 120주년 기념식 및 축하공연에 참여해 하와이 이민의 의미를 기리고, 재외동포청 유치에 대한 필요성을 언급할 계획이다. 시는 ‘인천·하와이 국제미술교류전’을 시작으로 특별 사진전, 인천의 날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유 시장은 이날 인천의 날 행사에서 현지 교민들을 만나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를 위한 설득과 협력 작업에 나설 예정이다. 앞서 유 시장은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를 위해 관련 단체와의 지지 선언을 받고 있다. 유 시장은 지난 9월 말 첫 해외출장지인 싱가포르와 호주에서 교민들에게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에 대한 구상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이상민 행정안전부장관을 만나 재외동포청의 인천 설치를 건의하기도 했다. 특히 재외동포청 논의는 인천경제자유구역(IFEZ)내 유럽한인타운 조성 사업이 가시화 하면서 속도를 내고 있다. 유 시장은 지난달 17일 유제헌 유럽한인총연합회장과 ‘유럽한인문화타운 조성을 위한 상호 협력 양해각서’를 하고, 재외동포청의 인천 유치에 힘을 실어 달라 부탁했다. 이를 받아 유럽한인총연합회는 이날 재외동포청이 공항과 가까운 인천에 위치해야 한다고 지지했다. 유 시장은 “이민 120주년을 맞아 선조들의 노고와 강인한 애국심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고, 교민들과 만남을 통해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지지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김지혜기자

[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광복·전쟁 겪으며 희생… 재외동포의 뿌리

⑤ 멕시코·사할린 강제이주, 파독광부 인천 제물포에서 120년전 시작한 ‘코리아 디아스포라’는 격동의 근현대사를 지나오면서 다양한 색의 이민 역사를 만들고 있다. 하와이 이민 이후 국권을 침탈 당하고, 해방과 전쟁이라는 국가의 주요한 분기점 때마다 이민자들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들의 이민 역사는 자의와 타의가 뒤섞인 형태다. 3일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 따르면 인천 제물포에서 출발한 첫 공식이민인 하와이 이민 이후 국가의 운명에 휩쓸린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삶이 이어진다. 1890~1910년 농민과 노동자들은 기근과 빈곤 등을 피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중국과 러시아, 하와이, 멕시코 등의 이주를 선택한다. 이어진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독립운동과 경제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망명 등을 선택한 이민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반면 일본의 폭력적인 강제이주의 희생자들도 생긴다. 이후 해방과 전쟁이라는 주요한 사건을 겪으면서 한인 이민 역사는 자의와 타의가 섞이는 형태로 이어진다. 이들은 전쟁신부와 해외입양, 외화 벌이를 위해 떠났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 등 다양한 이민 역사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현재 세계 곳곳에 뻗어 나가 있는 재외동포의 뿌리이다. 전 세계에 살고 있는 730만명의 재외동포는 각자의 디아스포라 삶을 이겨낸 결과물이다. 멕시코 재외동포들은 에네켄 농장의 참혹한 생활을 견뎌낸 이들의 산물이고, 사할린 영주귀국자들은 대한민국을 가슴에 품고 무국적자로 배회해야했던 역사의 증거이다. 이 밖에도 파독 광부와 간호사는 외화벌이를 위해 희생한 현대사의 일꾼이기 때문이다. 신은미 전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이민사는 사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파독 광부와 간호사 뿐 아니라 선박을 제조하는 조선사들도 독일로 외화벌이를 하러 가는 등 다양한 사람들의 디아스포라 형태가 한국 역사의 주요 분기점마다 나타난다”고 했다. 특히 1890~1910년 일제강점기 이전 시대부터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속 해방과 전쟁, 산업화 등은 이민 역사의 주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또 역사의 분기점마다 예상하지 못한 피해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일본의 강제이주의 희생자와 전쟁으로 인한 해외입양 활성화 등이 그것이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한인의 이민 역사는 고된 역사적 사건에도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뿌리내리려고 했던 투쟁의 역사”라고 했다. 이어 “재외동포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이들의 역사와 근원을 알게 된다면 나타나지 않을 일이다”며 “자의와 타의가 뒤섞인 채 조국을 떠나야 했던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재외동포 정책의 시작이다”고 했다. 머나먼 이국서 ‘노예의 삶’… 망국의 백성 ‘한 많은 일생’ 에네켄 노동자의 눈물 ‘지상낙원’ 거짓말에 속아 ‘멕시코 악몽 “멕시코 이민자들은 넘어갈 아리랑 고개가 없는 끝 없는 평원에서, 지평선에서 막막함과 공허로 뒤척였다.” 작가 김영하는 소설 ‘검은꽃’을 통해 에네켄 노동자의 막막하고, 공허한 심정을 ‘산이 없는’ 멕시코의 광활한 대지 탓이라고 비유하며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다. 인천 제물포에서 시작한 하와이 이민은 곧 멕시코 이민으로 이어진다. 1905년 4월4일 인천 제물포에서 ‘일포드 호’를 타고 떠난 1천33명의 한인이 그들이다. 당시 멕시코 한인 노동자 모집 회사인 대륙식민㈜는 횡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 멕시코 노동 이민에 대한 홍보에 열을 올렸다. 그들은 1904년 12월17일부터 1905년 1월13일까지 7번에 걸쳐 멕시코 한인 노동자를 모집한다. 당시 국내에는 하와이 이민을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은 멕시코와 하와이가 그리 멀지 않다는 문구를 내세워 노동자 모집에 흥행을 기록한다. 또 이들은 멕시코를 물과 토양이 매우 좋고, 따뜻해 전염병이 없다고 소개한다. 더군다나 이들은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 극히 어렵다는 이유를 앞세워 한국인들이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민은 대한제국 정부에서 허락하지 않은 비공식 이민이었다. 그렇게 제물포에서 출발한 한인 1천33명은 멕시코 서부 살리나크루스항로 향한다. 태평양을 건너면서 어린이 2명과 남자 어른 1명이 숨지고, 아이 1명이 태어나 1천31명은 멕시코 땅을 밟았다. 이들은 기차와 배로 갈아탄 뒤 5월15일 멕시코 남동부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시에 도착한다. 당시 멕시코에는 선박용 밧줄의 원료를 채취하거나 사탕수수를 포장할 수 있는 에네켄(용설란의 일종) 재배가 성행했다. 이들은 노예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해야 했다. 새벽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뜨거운 사막에서 가시 투성이인 에네켄 잎을 잘라야 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채찍이 날라왔고, 집세를 내고 나면 멕시코까지 온 비용을 갚기도 불가능 했다. 그리고 1909년에 그들은 4년 계약 노동이라는 가혹한 생활을 끝냈지만, 돌아갈 조국이 사라졌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멕시코 농장에서 재계약을 하는 등 자리를 잡는 방법만 남았다. 당시 멕시코로 향한 1천33명 중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온 이는 단 1명도 없다. 오성제 인천시 멕시코 국제협력담당관은 “중남미 이민 3~4세들은 미주 이민자들과 다르게 궁핍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이 얼마나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열악한 환경에 살아왔는지에 대한 방증”이라고 했다. 이어 “대부분 한인들은 멕시코인과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후세대에게는 한국에 대한 정체성이 매우 흐릿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럼에도 메리다 한국 박물관에 방문하는 후세대들도 있는 등 한국에 대한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이들도 많다”고 했다. 사할린 동포의 모진 삶 일제 동원령 ‘강제이주’… 하루하루 지옥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가장 큰 분기점은 근현대사 속 일제강점기 시대와 전쟁이다. 더욱이 사할린 동포들은 국가의 운명 앞에 강제 이산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장본인들이다. 3일 한국이민사박물관과 인천시 등에 따르면 현재 인천은 경기도 안산시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할린 동포들이 살고 있다. 인천 연수구의 사할린동포회관에서 살고 있는 89명을 포함해 인천 남동구 논현동에 살고 있는 사할린 동포까지 총 500여명의 사할린 동포들이 인천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인천은 공항과 가깝고, 항구도 있어 가족을 두고 온 사할린 동포들에게 선호도가 높은 지역이다.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 당한 인천 인구는 1만630명명이다. 이들은 일본의 전쟁 물자를 감당하기 위해 강제로 동원해 이주를 당한 이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조국을 떠나 군대와 군수물자를 만드는 사업장으로 떠나야 했다. 이들 중 사할린 동포들은 1939~1945년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 소련의 남사할린 지방으로 이주했다. 일본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만들고, 한인들을 남사할린으로 이주해 30여개 탄광과 벌목장, 비행장, 도로, 철도 등 건설현장에서 강제로 일하게 했다. 이들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는 동안 필요한 전쟁물자와 원자재 등을 마련하는 데 노동을 착취당했다. 이렇듯 남사할린으로 강제 이주 당한 한인 수는 약 6만~12만명에 달한다. 사할린 동포들은 고된 노동 착취를 당하면서도 해방과 동시에 돌아갈 고국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았다. 그러나 사할린 동포들은 해방과 동시에 일본 국적도, 소련 국적도 갖지 못한 채 ‘무국적자’로 전락한다. 이후 사할린 동포들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조국을 두고 또 다시 이별의 아픔을 겪는다. 2007년 영주 귀국한 문정현 인천사할린동포경로회장은 “‘나라 없는 설움’은 경험하지 못하면 알 지 못한다”며 “사할린 한인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하면서, 소련국적도 받지 않았던 무국적자들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시간이 갈수록 조국은 우릴 찾지 않고, 전쟁 등으로 상황이 악화하면서 결국 소련 국적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들은 소련 정부가 1988년 사할린 한인의 모국방문과 영주귀국을 허용하면서, 대한적십자사를 통한 영주귀국 사업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부는 지난 2021년 최초로 사할린 동포들의 영주귀국을 지원할 특별법에 따라 첫 사할린 동포 350명의 영주귀국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사할린 동포 단체들과 시민단체들은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여전히 정부의 영주귀국 대상자가 되기 위해서는 1945년 8월 이전 출생자이거나 이들과 8촌 이내의 직계비속 1명 혹은 배우자 등으로 국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 회장은 “아직 갈 길이 멀다”며 “국가가 나서서 이산의 역사를 경험한 희생자들을 품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자식이고, 손자고 러시아에 두고 보러 가지 못하는 동포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인터뷰 돌로레스 가르시아 멕시코 메리다한국박물관장 “죽는 날까지 한국 그리워한 조부위해 박물관 운영” “한국은 제 정체성의 일부입니다, 눈 감는 날까지 한국을 그리워한 할아버지를 위해 한국박물관을 운영하려고 합니다.” 멕시코 메리다시에 있는 한국박물관의 관장을 맡고 있는 돌로레스 가르시아 관장은 1904년 제물포에서 멕시코로 떠난 김수봉씨(1989년 사망)의 손녀다. 돌로레스 관장은 한인 3세로 메리다시에 유일한 한인 이민사를 담은 ‘한국 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다. 그는 할아버지가 에네켄 농장에서 살아온 삶을 보며 “상상할 수 없이 고된 날들”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김씨는 14살의 나이로 에네켄 농장인 ‘체첸데스토레’에서 일을 시작한다. 김씨는 큰 돈을 벌어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의 노동을 버텨냈다. 돌로레스 관장은 할아버지의 입에서 들은 ‘담배’라는 단어와 ‘안녕’이라는 한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돌로레스 관장은 “할아버지는 늘 식당 ‘제물포’에서 술을 마셨다”며 “그곳엔 한인들이 많이 오갔고, ‘제물포’가 인천에 있는 곳이라는 점은 최근 알았다”고 했다. 김씨는 멕시코에서 양배추로 김치를 담그면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돌로레스 관장은 “양배추로 김치를 먹으면서 ‘한국인이구나’는 생각을 많이 했다”며 “할아버지는 늘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돌아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지난 2019년 한국이민사박물관의 초대로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 하던 고향이자, 자신의 뿌리인 한국의 땅을 밟았다. 돌로레스 관장은 “처음 한국에 방문을 했을 때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며 “이곳이 나의 모국이라는 생각에 감정이 격해진 탓이다”고 했다. 돌로레스 관장은 어릴 적부터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한국인을 낮춰 부르는 ‘치노’라는 놀림에 시달려왔다. 그는 ‘치노’라는 놀림을 받더라도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았다. 돌로레스 관장은 “멕시코인들이 ‘치노’라고 우리를 낮춰 부르더라도 절대 기죽지 않았다”며 “묵묵부답으로 의연하게 살아왔다. 메리다시 한 복판에 한국거리와 한국사 박물관이 있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고 했다. 이어 “멕시코에 사는 한인 4세, 5세에게 이런 자부심을 전달해주는 것이 나의 소임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인터뷰 문정현 인천사할린동포경로회장 “사할린 동포들의 역사는 가슴 시린 이산의 역사” “사할린 동포들의 이주 역사는 가슴 아픈 이산의 역사 입니다.” 문정현 인천사할린동포경로회장(84)는 “강제징용으로 시작한 뼈 아픈 사할린 동포들의 역사는 계속 가족과 헤어진, 이산의 역사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직도 일본을 ‘일제 놈’이라고 스스럼 없이 칭한다. 그에게 일본은 이산의 역사를 만든 원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본 때문에 강제징용을 당한 피해자이자, 돌아갈 곳이 없어 한 동안 ‘무국적자’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문 회장은 현재 남동구 논현동에 있는 사할린경로당의 구심점이자, 영주귀국을 선택한 사할린 동포들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뛰고있다. 이제는 80~90대가 대다수인 사할린 동포들의 역사의 아픔과 피해를 힘 주어 말하고,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문 회장의 아버지는 일본에 의해 이뤄진 ‘이중징용’의 피해자이다. 문 회장의 아버지는 1938년 조선에서 사할린 삭조르스크 탄광으로 강제징용을 당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으로 다시 징용을 가야했다. 이 때문에 문 회장은 어린시절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어 본 적이 없다. 문 회장은 “초등학교 시절, 나에게 ‘아버지’란 단어는 어색한 단어였다”며 “아버지를 24년만에 찾아서 얼굴을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입이 잘 안떨어질 정도로 어색했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가 탄광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듣지도, 기억나지도 않는다”며 “아버지라는 존재는 늘 나에게 아프다”고 했다. 특히 문 회장은 거대한 역사적 파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친 날들을 기억하고 있다. 1945년께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사할린 동포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사할린 동포들은 소련과 일본 양쪽의 칼과 총에 살아남아야 했다. 문 회장은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사할린 동포들은 더욱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어 “해방 후 조선어학교를 다녔는데, 한국어를 못 배운 내가 소련어를 하면 교사들은 무자비하게 때렸다”고 했다. 그는 이곳 사할린 동포 거주 마을에서 살고 있는 350여명의 사할린 동포와 후세들에게 아직도 못 다 이룬 꿈이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문 회장은 “2007년 영주귀국을 선택할 때는 1945년 8월 출생 이전 당사자와 배우자 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며 “이곳에 사는 사할린 동포들에게는 아직도 러시아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 많다”고 했다. 이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족을 놔두고 영주귀국을 선택하는 사사할린 동포들의 상처가 커지고 있다”며 “국가는 현재진행형인 이산의 역사를 해결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김지혜기자

[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④ 이민자의 교육적 열망

“우리는 비록 가난했지만 하와이 농장에서 번 돈, 떡을 만들어 판 돈을 모아 땅을 사고 학교를 지었다.” 인천 제물포에서 시작한 하와이 이민자들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학교 설립으로 승화했다. 하와이 이민자들이 이민 50주년을 맞아, 떠났던 곳으로 되돌아와 ‘인하대학교 설립 운동’에 코리아 디아스포라 삶을 투영하고 있다. 이 같은 인하대 설립은 한인 이민사를 비롯해 민족운동사, 지역 경제사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22일 인하대와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담화문 ‘인하대학 설립에 관하여’를 발표하고 학교 설립의 구상을 밝힌다. 인하대는 이민자들이 굶주림으로 벗어나기 위해 하와이로 떠났던 이민 행보에 대한 보답이자, 조국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이민 역사의 주요한 분기점이다. 이민자들은 국내의 공업기술 수준을 높여 조국의 근대화와 발전이 이뤄지길 염원했다. 특히 인하대는 국민회와 동지회 등 하와이 이민 사회 속 독립운동의 결실이다. 여기에 인하대는 옛 경인공단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인천시는 40여만㎡을 학교 부지로 제공하며 힘을 보탰고 인하대를 통해 인천은 대한민국 제1의 공업지대로 발전했다. 이러한 역사적 함의를 가진 인하대는 현재까지 ‘코리아 디아스포라’ 연구에 다방면으로 뛰어들고 있다. 인하대는 지난 1985년 국제관계연구소를 만들어 국제관계 속 한국을 연구하는 비교정치, 국제정치의 대표적 연구를 도맡아 해오고 있다. 국제관계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영문저널 퍼시픽포커스(Pacific-Focus)는 2007년 국제수준 학술지로 거듭났다. 또 인하대는 2007년 국제관계연구소 내 이주 및 재외동포센터를 만들고, ‘코리아 디아스포라’에 대한 다방면의 학술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인하대는 이민·재외동포·공공외교·개발협력 등을 특화 분야로 정하고 재외동포의 삶과 정책에 대한 학문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인하대는 지난 2008년에는 다문화사회통합 거점대학으로 선정 받고, 다문화사회통합연구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인하대는 이 센터를 통해 다문화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책 등을 고민하고 있다. 이어 2019년에는 한국이민사박물관과 ‘하와이 소재 한인 이민 및 독립운동 자료 조사연구 사업’에 참여하고, 2021년에는 재외동포재단과 차세대 재외동포정책 개발을 위한 실태조사 사업에 뛰어드는 등 이민 역사와 현재 재외동포 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이 밖에도 인하대는 지난 2021년 7월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이용한 국제정치와 외교를 연구하는 ‘K학술확산연구센터’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호주와 동유럽 등 국외에서 추진하고 있는 한국학의 현주소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제언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이진영 인하대 국제관계연구소장은 “인하대는 이민 역사의 상징적 기관에서 나아가 이민역사와 디아스포라 정책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며 “현 한국의 교육과정에서 공공 외교와 재외동포 정책의 전문성을 가질 수 있는 전무후무한 기관”이라고 했다. 이어 “인하대는 ‘코리아 디아스포라’와 뗄 수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재외동포를 위한 정책과 사업 등에 선두주자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하와이에서 전해온 부국에 대한 소원 ‘인하대학교 설립 운동’ 인천 제물포에서 시작한 하와이 이민자들은 1일 10시간 이상 노동을 하면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 보다 조국에 기여할 방법을 찾았다. 이는 한인 이민자들의 열띤 교육열과 만나 ‘인하대학교 설립 운동’을 이끈다. 22일 인하대와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 따르면 이들은 1952년부터 조국의 공업화를 돕기 위해 본격화 한 ‘인하대학교 설립 운동’에 뛰어든다. 이민자들은 인천의 매사추세츠공업대학교(MIT)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운동을 본격 착수한다. 이를 위해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2년 부산에서 당시 김법린 문교부 장관에게 ‘인하공과대학’의 설립을 지시하고, 인하대 설립운동의 방아쇠를 당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3년 하와이이민 50주년을 맞은 기념사에서 인하대 설립에 대한 구상을 밝힌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은 ‘인하대학을 세워서 50년 기념에 영구한 기념물을 만들려고 하는데, 인천과 하와이 사이를 본 따 이름은 ‘인하(仁荷)’로 하고’라며 인하대 이름의 어원이 등장한다. 이후 1953년 인하공과대학 설립기성위원회가 발족하고, 1954년 2월5일 재단법인 인하학원이 등장해 그해 4월24일 인하공과대학으로 개교한다. 특히 인하대 설립의 모체인 한인기독학원 역시 한인 이민자들의 교육열이 서린 곳이다. 이 전 대통령은 대한인국민회 지원으로 토지를 구입해 한인기독학원 전신인 한인여자성경학원을 만든다. 이어 1918년 한인기독학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남녀공학과 민족교육에 방점이 찍힌다. 한인기독학원은 1928년까지 15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미국 하와이에서 민족교육의 한 갈래를 담당한 중심 기관이다. 이민자들은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한인기독학원 부지대금 15만불을 학교 설립 자금으로 사용하는 데 동의한다. 인하대 설립에는 부지대금 15만달러, 정부출연금 6천만환, 국민기부금 2천774만3천여원을 투입했다. 여기에 인천시가 이런 상황에 땅 40여만㎡을 기증하면서 다시 인하대 설립 운동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이렇듯 인하대 설립에는 이민자들의 독립 자금을 비롯한 조국의 공업산업의 성장을 바라는 마음이 함께 담겨있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은 “인하대 설립은 이민자들의 공통적 정체성인 ‘교육열’과 ‘떠나온 조국에 대한 책무와 그리움'이 함께 공존한다”며 “인하대의 전신인 한인기독학원은 조국의 부국강병을 바라며 민족교육기관인 점도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이어 “인하대는 이민자들이 떠났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오면서, 타지에서 꽃 피워낸 조국에 대한 사랑의 최초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나라 잃은 국민의 설움은 독립운동에 대한 헌신으로…국민회와 동지회, 인하대 설립 씨앗 인하대학교 설립 운동의 씨앗은 고된 노동에도 조국의 부국강병을 위해 독립자금 모금에 헌신한 단체들의 결속력에 있다. 22일 인하대와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 따르면 인천 제물포에서 출발한 한인 이민자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며 번 돈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정기적으로 지급했다. 이는 당시 김법린 문교부 장관이 인하대 설립에 대한 담화문에도 담겨있다. 김 장관은 인하재단의 설립의 종잣돈은 ‘하와이 동포들의 눈물겨운 기부금’이라고 표현한다. 인하대 설립에 앞서 모금운동을 추진할 수 있던 배경에는 이렇듯 이민자들이 조국을 위해 정기적으로 기부금이나 모금 운동에 뛰어든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한인 이민자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세금’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했다. 1일 10시간이 넘는 혹독한 노동을 하면서도 1개월에 1~2달러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조국을 떠나온 이민자로서, 조국을 잃은 국민으로서의 책무라고 해석했다. 이들이 타국에서 자리를 잡고 돈을 버는 동안에도 조국의 부국강병과 독립은 늘 미완의 과제처럼 마음 속에 남아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부채감은 해방과 인하대 설립 운동을 만나 결실을 맺는다. 초창기 하와이 이민자들의 구심점은 대한인 국민회다. 국민회는 1909년 미주 한인 최고 민족 운동 기관으로 성장하면서 ‘임시정부’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또 국민회는 ‘국민의무금제도’를 운영하면서 한인 이민자들의 결속력을 다졌다. 국민회는 안정적인 자금 수납에 대해 고민했고, 흩어진 한인들의 안정적인 자금과 결속력을 위해서는 의무금제가 절실했다. 국민회는 기관지인 ‘신한민보’를 통해 국민의무금 수입을 지면에 공개하기도 하면서 결속력을 다졌다. 국민회는 이를 통해 재정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대비했다. 대한인동지회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시작한 독립운동단체이다. 동지회는 국민회보다 낮은 인지도로 시작했으나 1920년대 후반부터는 미주 지역의 연합 독립 운동 단체로 성장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동지회는 민족경제력과 자급자족을 중요하게 강조하며 각종 기금 모금과 독립자금후원제를 운영 했다. 백태웅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소장은 “1902년 하와이로 떠난 이민자들은 1905년 외교권의 박탈로 ‘나라 잃은 국민’이 된다"며 “이들이 독립운동 단체를 통해 이런 정체성의 위기를 해결했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17~20달러를 받는 월급에서 1~2달러, 본인 월급의 10%를 떼서 독립운동단체에 지원할 것은 이런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행동이다”고 했다. 인터뷰 이진영 인하대학교 국제관계연구소장 “재외동포 통한 공공외교 필요” “재외동포를 통한 공공외교 정책 발전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진영 인하대학교 국제관계연구소 소장은 다문화 사회가 자리 잡고, 이민자 유입이 활발한 현 시대를 이렇게 진단했다. 이 소장은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외동포를 비롯한 다문화 사회, 이민 사회를 연구하고 있다. 그는 우선 재외동포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소장은 “재외동포들과 모국은 수평적 관계로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재외동포와 이민사를 바라보는 연구의 핵심은 시혜적인 관점이 아닌 ‘수평’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730만명 이상의 재외동포가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면 무엇보다 강력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고 했다. 국제관계연구소는 4개의 센터로 이뤄졌다. 4개의 센터 중 이주 및 재외동포 센터는 하와이 동포들의 한국역사에 대한 기여를 책자로 만들기도 했다. 이 소장은 “인하대학교의 역사 시작부터 이민 역사와 재외동포 관련 학술 성과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며 “국내에서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널로 꼽히고 있다”고 했다. 특히 이 소장은 K학술확산연구센터를 통해 민족 정체성의 정치와 재외동포를 통한 공공외교를 연구하고 있다. 이 소장은 재외동포들이 관심이 많은 한류를 이용한 공공외교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는 “재외동포 중에서는 한류와 한국에 대한 관심이 크지만, 한국 자체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은 경우가 있다”며 “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정치·외교·사회에 대한 과목을 만들어 수업을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어떻게 이 나라에 왔는지 이주 역사도 배우고, 한국의 이민 정책과 다문화 사회 통합 등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했다. 이 소장은 무엇보다 ‘세계시민의식’을 바탕으로 한 재외동포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한국 사회과 난민 문제에서부터 유입 이민자에 대한 반감이 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이곳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 소장은 “성공한 재외동포는 좋아하고, 그렇지 않은 동포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지는 형태의 재외동포를 바라보는 시각으로는 성장할 수 없다”며 “그런 생각들이 유입 이주민에 대해서 굉장히 폭력적인 시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고 했다. 이어 “점점 더 외국인 노동자와 유입 이민자들은 늘어날 수 밖에 없다”며 “폐쇄적인 생각이 아닌 세계시민의 생각으로 동포들을 바라보아야 문제가 안 생길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 소장은 최근 미래세대를 위한 재외동포 관련 강의를 준비하면서 한국사회의 재외동포 역사에 대한 인식이 부실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소장은 또 다시 현재 대학생들을 위한 재외동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 몰두하고 있다. 이 소장은 “공공외교를 가르치려고 강의를 열었는데, 재외동포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는 한국 학생들이 많았다”며 “재외동포, 이주민에 대한 포용과 환대의 정책 등을 연구하는 곳이 절실하고, 그 곳이 바로 인하대 국제관계연구소의 역할이라는 소명으로 임하고 있다”고 했다. 김지혜기자

[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고국의 그리움·열망, 독립운동 마중물로

②한인노동자의 고통 인천 제물포를 떠나 하와이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이들은 고된 노동을 견디면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을 이어갔고, 이는 이후 미주 한인사회 독립운동의 마중물로 작용했다. 26일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 따르면 하와이 첫 이민자들은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13일 새벽에 호놀룰루 항에 발을 디딘다. 이민자 102명은 항구의 검역과 입국절차를 마치고 협궤열차에 탑승해 오아후 섬 와이알루아농장 모쿨레이아에서 본격적인 이민 생활을 시작한다. 일본에 의해 하와이 이민 금지 조치가 내려진 1905년 전까지 대한제국 땅에서 하와이로 향한 이민자 수만 7천500여명에 달한다. 이민자들은 1일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들은 매일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뜨거운 햇볕 아래 일했고, 잠시 쉴 수 있는 점심시간은 고작 30분이 전부다. 특히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같은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야 했다. 이들 중에는 노동자들의 근무를 감시하는 ‘루나’도 존재했다. 이민자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 사탕수수 농장 주변의 잡초를 뽑고, 줄기를 자르고, 이파리를 잘라내 차곡차곡 쌓아 물을 대는 일을 했다. 하지만 고된 노동에 비해 급여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민자들이 1개월 동안 일을 마치면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던 ‘방고’에 따라 현금으로 월급을 받았다. 방고는 그들이 이름 대신에 불리던 번호를 뜻한다. 당시 성인 남자의 월급은 1개월에 17달러였고, 여자나 소년의 경우 1일 50센트에 불과했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역사적 자료와 개인의 증언에 따라 이민자들의 생활은 농노처럼 일하면서도 일부 자유가 주어지는 등 다양했다”고 했다. 이어 “다만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직 그들이 자율적 의지의 삶이었는지, 농노와 가까운 삶인지는 의견이 갈린다”고 했다. 일부 이민자들 중에는 미국 본토보다 턱 없이 낮은 월급에 불만을 가지고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이주를 결심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이 역사학자들이 하와이 공식 이민이 미국 대륙의 본토 이민의 마중물로 보는 이유다. 김 관장은 “분명한 점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돈을 벌고 조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이들이 일본의 침략 이후엔 아예 뿌리를 내릴 생각을 했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진영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964년 미국 이민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진 미국 대륙의 이민자들의 대다수는 하와이 이민자의 성격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고국에 대한 구국운동과 높은 희생정신 등이 미국 이민자 사회 전반의 성격을 담고 있다”고 했다. 하와이行 ‘사진신부’… 독립운동 ‘해방신부’ 신랑감 사진 1장 의지한 채 머나먼 뱃길 올라...근대 문화 열망·봉건제 반감 깨어있는 여성들 “어머니의 삶엔 스스로를 위한 시간이 한 순간도 없었다…(중략)…하지만 ‘포와(하와이)’ 에선 결혼한 여자들도 공부할 수 있다. 그것 만으로도 ‘포와’는 낙원이었다.” 작가 이금이의 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사진 1장에 평생의 운명을 걸고 하와이로 떠난 열여덟 살 여성의 삶을 조명한다. 이 책에서 ‘사진신부’는 단순히 결혼을 위해 하와이로 향하는 여성들이 아닌, 근대 문화에 대한 열망과 봉건 제도에 대한 반감을 가진 역동적인 선택으로 비춘다. 26일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 따르면 사진신부는 사진만 보고서 결혼을 하기 위해 하와이로 향한 1910~1924년까지의 여성 이민자들을 통칭한다. 당시 미국은 노동이민은 금지했지만, 결혼에 따른 입국은 예외적으로 허용했다. 최사라씨가 23살의 나이로 하와이 땅을 밟아 사진신부 1호에 이름을 올린 뒤, 24년간 1천56명의 여성이 사진신부를 택했다. 앞서 이민 초창기인 1903~1905년 사탕수수 농장으로 노동 이민을 떠난 이민자의 대다수는 돈만 벌어 조국으로 돌아가려했다. 이 때문에 이민자 대부분은 가족 단위가 아닌, 노동력이 있는 성인 남성 1인이다. 다만 이들은 1905년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일본의 주권 침탈이 가속화하자,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 대신 가족을 이루고 (하와이에)자리 잡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사진신부가 등장한 것이다. 사진신부는 하와이 이민 사회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주요 변곡점으로 꼽힌다. 노동이민자 중심의 이민자 문화가 가족 단위의 한인 사회로 꾸려지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사진신부들은 이민사회의 주류 문화인 높은 교육열·구국운동·여성을 중심으로 한 경제 활동 등을 형성했다. 사진신부들은 대체로 노동이민자인 남편보다 학력이 높고, 근대교육을 받은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이들은 사진을 보고 결혼을 결심한 탓에 남편과 나이 차이가 평균 15살 이상이 차이가 났고, 이 때문에 더 오랫동안 경제활동을 하면서 이민자 사회의 주축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사진신부들은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은 많았지만,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매우 높았다. 이들의 교육열 덕분에 1930년대 한인 청소년들(10~20세)의 문맹률은 전체 평균 3.1%는 물론, 중국(0.7%)이나 일본(0.5%)보다 훨씬 낮은 0.1%에 그친다. 특히 사진신부의 등장으로 하와이 사회의 독립운동은 무장 투쟁운동에서 나아가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으로 전개할 수 있는 자양분으로 작용한다. 사진신부들은 시대에 따라 신명부인회, 대한부인회, 대한인애국부인회 등을 만들어 직접 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여성들은 자녀들의 국어교육을 도맡아서 하거나, 가정 내 일본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운동을 하기도 했다. 책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 이야기’ 집필에 참여한 김점숙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부교수는 “사진신부의 등장은 한인사회를 만드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며 “여성들은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한인사회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이어 “미주한인사회의 높은 교육열과 헌신적인 삶이라는 정체성은 이때부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하와이 이민사회와 종교 기독교·천도교, 평등·자유를 깨우다 고국 패망 소식에 민족주의까지 더해져 독립운동 전초기지 역할… 각종 자금줄 하와이 이민자 사회는 평등과 자유를 기초로 한 기독교와 천도교(동학)가 자리잡은 뒤, 민족주의 이념까지 더해져 종교단체들이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 우뚝서기도 했다. 26일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 따르면 하와이의 첫 한인이민자 102명 중 절반 이상이 기독교인이다. 이민자들은 하와이 땅에서 교회를 가장 먼저 만들면서 유입 이민자들의 적응을 도왔다. 이민자 대부분은 한인감리교회에서 한국어 교육을 배우고, 고국에 대한 정체성을 키우는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천도교는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가 손병희를 주축으로 조선 사회에 퍼져나가다, 이듬해에는 하와이 이민사회에까지 등장했다. 1928년에는 하와이 호놀룰루 리버스트리트에 ‘천도교하와이종리원’이 자리잡기도 했다. 종리원은 하와이 이민자 사회에서 천도교가 발행하는 종합 월간지 ‘개벽’을 통해 대대적으로 천도교의 정신을 홍보하고, 민족주의 이념까지 확장했다. 종리원은 종교활동 뿐 아니라 민족교육활동을 활발하게 이어나간다. 또 이들은 조선어학교를 만들어 한글을 통한 민족해방운동에 전념했다. 비록 이들의 규모는 기독교에 비해 작았지만, 한인사회의 통합과 민족주의 이념을 퍼뜨리는데 집중했다. 그 결과 하와이 한인 사회에서 감리교(기독교)와 천도교는 일본의 극심한 한글 탄압에도 민족의 얼을 지킬 수 있는 한글학교 25곳을 운영했다. 백태웅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연구소장은 “을사늑약 이후로 하와이 이민자들은 고국이 망했다는 사실에 절망적인 마음을 독립운동에 투사했다”며 “그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 바로 종교단체”라고 했다. 이어 “종교단체를 근간으로 이민자들은 임시정부에 준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단체로 발전했다”며 “이들 종교단체는 안중근 의사의 재판을 위한 변호사 비용 같은 각종 자금을 모으기도 하는 등 이민사회 독립운동의 핵심 역할을 했다”고 했다. 인터뷰_ 하와이 이민 3세 개리 박 교수 “안타까운 고국 소식… 독립 열망 활활” “외할머니는 가족들을 위해 불고기와 만두와 같은 고향의 음식을 만들면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습니다.” 하와이 이민 3세 개리 박(Gary Park) 하와이대학교 명예교수는 26일 중구 하버파크호텔 1층 카페에서 종이에 본인의 한국 이름인 ‘박영기’를 또박또박 정자로 써 내려가며 이 같이 말했다. 그의 외할머니는 지난 1910년 하와이로 이민간 사진신부 임옥순 여사다. 박 교수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는 낯선 땅에서 12명의 자식을 억척스럽게 키워낸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그는 “영어를 못하는 할머니와 사실 언어로서는 소통이 어려웠다”며 “그래도 몸짓 발짓으로 가까워져 누구보다 절친이라 자부한다”고 했다. 임 여사는 1894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으며, 4살에 일본군의 손에 부모님을 잃는다. 박 교수는 “외할머니의 부모님은 교사였다”며 “위태롭던 시절에 바른 소리를 하다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임 여사는 일본의 침략에 결국 16세 어린 나이에 사진신부로 하와이행을 택했다. 임 여사는 오하이우 섬의 쿠니아 농장에서 사탕수수밭과 파인애플밭에서 15년 동안 매일 힘든 일을 했다. 박 교수는 한국에 대한 정체성을 외할머니의 음식을 통해 전달받았다. 박 교수는 “명절에 온 가족들이 둘러 앉아 송편이나 만두를 빚었는데, 그때마다 ‘아 내가 한국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외할머니가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그는 “외할머니는 매일 10시간씩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고작 17달러의 월급을 받았다”며 “이중 상당 부분은 독립운동을 위해 기부하는 등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조국에 대한 사랑이 컸다”라고 했다. 박 교수는 차세대 이민자들에게 한국에 대한 정체성 확립 교육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이민자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모국에 대한 정체성을 이해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는 하와이인, 한국인 2가지 정체성을 모두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단, 초대 이민자들의 희생적 삶과 고통을 자양분으로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김지혜기자

[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차세대 동포 토크콘서트…“한국에 가고프다”

‘나는 한국에 가고 프다’ 인천에서 시작한 한인이민사 120주년을 맞아 차별과 혐오를 넘어선 한인 이민자들의 삶에 대해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25일 인천 중구 하버파크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차세대 재외동포들의 삶의 역사와 조상들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주제로 한 ‘차세대 재외동포 토크콘서트’를 했다. 이날 토크콘서트에는 세계 각국의 재외동포이자 문화계 인사 6명이 참석해 타국에서 꽃 피운 디아스포라의 삶을 발표하고, ‘이중 정체성’에 대한 수용성을 높이자는 데 공감했다. 개리 박(Gary Park) 하와이대학교 명예교수는 기조 발표를 통해 하와이 이민자의 후손으로서 본인이 보고 들은 이민 노동자들의 삶을 전달했다. 박 교수의 조부모는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이민 생활을 시작한 1세대이자, 그의 외할머니는 사진만 보고 결혼을 결심했던 사진신부이다.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사탕수수 농장의 생활을 전달했다. 박 교수는 “와이알루 한인 농장 캠프에서 여성들은 모두 서로의 가족을 돌보는 데 고군분투 했다”며 “외할머니의 미완성의 꿈은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다”고 회상했다. 이어 “이제서야 선조들이 그리던 한국의 땅을 밟고, 하와이 땅에서 인고의 시간을 함께 한 수천명의 한국을 대신해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고 했다. 이어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작품을 출품한 재미동포인 피터 리 감독은 미국 뉴욕에서 어머니와 함께 이민 간 기억을 표현하는 자전적 영화 ‘글동냥’을 선보였다. 그는 “전 미국 학교에서 미국 국기에 대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지만, 제 절반의 정체성은 한국인이다”며 “타국에서 경험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제가 작품을 통해 표현 할 수 있는 디아스포라적 영감이 됐다”고 했다. 그는 재미한인들로 만든 ‘제비 프로덕션’을 운영하면서 이민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어 사진작가이자 고려인 3세인 알렉산더 우가이는 고려인이 경험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지켜온 한민족의 정신을 표현했다. 그는 “정체성에 대해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으로 묶이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이 밖에도 이날 토크콘서트에는 재일동포 3세인 김인숙 작가와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간 방형식 음악가와 재미동포인 전후석 작가의 발표가 이어졌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은 “우리 민족의 첫 공식이민이 시작한 지 120주년이 되는 때에 이민 조상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차세대 이민자들이 타국에서 지켜낸 정체성에 대해 소개하고 싶다”며 “모국과 거주국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그들 자체의 삶을 간접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김지혜기자

[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한국이민사박물관, ‘코리아 디아스포라’ 삶 조명

한국이민사박물관이 각자의 자리에서 꽃 피운 재외동포의 삶을 조명한다. 20일 한국이민사박물관에 따르면 오는 25일 인천 베스트웨스턴 하버파크호텔에서 ‘차세대 재외동포 토크콘서트’를 한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한민족 공식 이민 1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번 토크콘서트를 구상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전세계를 무대로 문화와 예술계에서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떨친 재외동포 6명을 초대해 강연과 대화를 할 계획이다. 우선 한국이민사박물관은 한인 3세이자 하와이대학교 명예교수인 개리 박(Gary Pak)이 사진신부인 외할머니와 자랐던 곳을 중심으로 한 기조강연으로 토크콘서트의 문을 연다. 이어 재미동포 1.5세인 감독 피터 리(Peter Lee)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발표와 고려인 3세인 알렉산더 우가이(Alexander Ugay)의 이민자들의 애환을 담은 설명을 준비한다. 이어 2부에서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차별과 배제를 경험한 재외동포 김인숙 사진작가와 아르헨티나 이민자인 방형식 사물놀이 예술가이자 배우가 함께 본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마지막으로 재미동포인 전후석 감독의 이민자에 대한 성찰이 담긴 ‘디아스포라가 미래다’는 주제의 강연으로 막을 내린다. 이 밖에도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오는 11월에는 한민족 공식 이민 120주년 특별전과 연계한 다양한 행사를 개최한다. 11월 8일과 15일에는 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의 작가 이금이씨와 ‘상하이 올드 데이즈’ 작가 박규원씨와의 갤러리 북토크를 진행할 예정이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인천시민이면 누구나 토크콘서트와 북토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풍성한 행사를 준비했다”며 “이민자들의 삶의 애환 속에서도 고국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김지혜기자

[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120년 전 낯섦과 설렘… 한국 이민사 뿌리가 되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장편소설 ‘파친코’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시대의 비극을 각자의 자리에서 이겨내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파친코는 4대에 걸친 한인의 이민사인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삶을 일대기 형태로 묘사한다. 코리아 디아스포라는 120년 전 인천 제물포항에서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닿은 102명의 삶에서 시작한다. 타국에서의 기대와 두려움속에 떠난 그들.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여정에 떠났을까. 영영 돌아오지 못한 그들의 삶은 조국에 대한 열망으로 남아있다. 본보는 ‘인천 태동, 한국 이민사 120주년’ 기획 보도를 통해 인천에서 시작한 이민자들의 삶의 궤적에서부터 타국에서 꽃피운 그들만의 역사까지 코리아 디아스포라를 조명하고, 740만의 재외동포와 함께할 수 있는 방향 등을 찾아본다. 편집자주 ① 인천 제물포에서 미지의 세계로 코리아 디아스포라는 역사라는 거대한 파도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지난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항. 대한제국의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와 일제의 무자비한 양곡수탈에 시달린 백성 121명이 일본 나가사키로를 거쳐 미국 하와이로 가는 겐카이마루선에 올라탔다. 한민족 이민 역사의 첫 발걸음이다. 이들 중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이뤄진 신체검사를 통과한 102명은 미국 하와이행 갤릭호에 몸을 싣는다. 이후 22일간의 긴 항해 끝에 이듬해 1월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해 조선인으로서 처음으로 미국의 땅을 밟았다. 이들은 오아후 섬의 와이알루아(Waialua) 농장 모쿨레이아(Mpkuleia)에서 이민자로서의 일을 시작한다. 19일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 따르면 하와이 이민은 국가가 허락한 첫 공식 이민이지만, 전형적인 노동 이민이다. 당시 대한제국을 둘러싼 서구 열강들의 침탈과 불안한 사회적 분위기로 백성의 빈곤은 커져 갔다. 때마침 미국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호황기를 맞아 이미 이민 와 있는 일본·중국인이 아닌 다른 나라의 노동자가 필요했다. 당시 서양의 최고 인기 향신료인 설탕은 하와이에 주요 농장이 많았다. 주한 미국 공사 알렌(Horace Allen)은 조선인의 하와이 노동이민을 위해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을 만나 설득한다. 고종은 1902년 11월 여권과 이민 업무를 담당할 정부 조직인 ‘유민원’, 즉 지금의 출입국사무소를 만든다. 이어 알렌의 지인인 미국인 데쉴러(D. W. Deshler)는 이민 대행사인 ‘동서개발주식회사(EWDC)’를 세워 이민을 본격화한다. 동서개발은 인천 제물포(현 중구) 내동의 옛 인천예식장터에 자리잡았다. 백태웅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소장은 “당시 이민자들이 고향을 떠나는 선택을 한 것은 엄청난 모험”이라며 “흉년 탓에 경제적으로 힘들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국가의 상황은 그들이 이민을 선택하게 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하와이에 뿌리를 내린 이민자들은 어느 민족보다 악착 같이 살아남았다”며 “조국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 당하고, 일제에 주권을 침해 받아도 그들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대한민국 관문도시 ‘K-디아스포라’ 출발점이자 종착지 하와이 호놀룰루行 이후 수많은 이민자 인천항·공항 통해 떠나고 되돌아 오고 한국이민사박물관 역사와 관통하는 곳 인천의 관문도시 역사는 ‘코리아 디아스포라’에서도 이어진다. 인천은 근대사회 시작과 더불어 제물포항을 개항했고, 현대에 와서는 공항과 항구를 모두 가진 관문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19일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 따르면 제물포에서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첫 이민자 102명 중 89명(87%)도 제물포를 비롯한 인천지역 출신이다. 이후 같은해 6월까지 하와이로 옮겨간 초기 이민자 515명 중 193명(37%)이 제물포·강화·부평·송도 등 인천지역 출신이다. 전문가들은 제물포항을 중심으로 한 항구도시의 특성이 하와이 이민의 번성을 이끌었다고 본다. 정든 고향을 떠나 외국에서 생활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은 굉장한 모험이지만, 항구도시인 인천시민은 유랑 노동계층이 많고, 외부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이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인천에서 이민의 역사가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이어 “근대시대 첫 항구도시라 새로운 문화와 물건들을 누구보다 빠르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환경 탓”이라고 분석했다. 이 같은 역사는 중구 월미도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인천시는 지난 2003년 하와이 이민 100주년을 맞아 한국이민사박물관 건립을 추진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2008년 전국 최초로 이민사를 연구하는 곳으로 탄생한 뒤, 지금은 하와이 이민의 출발부터 해외 입양까지 다루는 ‘코리아 디아스포라’ 흐름을 완성했다. 신은미 전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이민자 개인의 사진과 증언 등으로 시작해 지금은 그들의 삶과 전 세대들의 역사적 자료까지 보유·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인천의 이민 역사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시는 사할린 강제이주 피해자들을 위한 ‘인천사할린센터’를 만들고, 지금도 사할린 동포들을 위한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연수구에 있는 사할린 동포회관에는 90여명이, 남동구의 임대주택에는 300여명이 넘는 사할린 강제이주 피해자들이 살고 있다. 여기에 인천은 이민사의 출발지인 동시에, 현재는 인천국제공항을 품은 덕에 국내로 들어오는 외국인 이민자의 발자취가 남는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지역 안팎에서는 이민자 역사의 시작점이자 항구와 공항을 가진 인천이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대표지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 관장은 “인천은 관문도시로서 유입·진출 이민사의 거점이 되고 있는 만큼 한인 이민사를 연구하는 데 최적의 장소”라고 했다. 내리교회 존슨 목사 설교 듣고 ‘약속의 땅’으로… 교회 곳곳에 하와이 이민 발자취 생생히 남아... 당시 동서개발과 함께 이민자 모집의 중심지 ‘존슨(George. H. Jones) 목사를 쓰시어 1903년 1월 13일 미주 땅에 코리아 디아스포라를 허락했다’ 인천 중구 내동 29에 있는 인천 내리교회의 붉은 벽돌담에 그려진 동판에는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시작이 담겨있다. 내리교회에는 하와이 이민을 위한 설교에 앞장 선 존슨 목사의 동상도 함께 마련해 놓고 있다. 특히 내리교회 곳곳에는 하와이 이민에 발자취가 담겨있다. 사무실과 예배당이 있는 2층 한편에는 하와이 이민자들의 단체사진을 비롯한 선교 활동 사진이 걸려있다. 내리교회는 이민 역사에 대한 기록을 ‘역사관’으로 마련해 이민 역사에 대한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김흥규 내리교회 담임목사는 “해마다 이 곳을 찾는 재외동포들이 5천여명”이라며 “여기서 본인에 대한 정체성을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인천에서 시작한 ‘코리아 디아스포라’는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첫 하와이 이민자 102명 중 80명 이상이 내리교회 신도다. 당시 내리교회는 동서개발주식회사와 함께 이민자 모집의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 당시 동서개발과 내리교회가 내건 이민 공고문에는 ‘하와이 군도로 누구든지 정착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월급은 미국 금전으로 15달러, 1일 10시간 노동하고, 일요일에는 휴식할 것’이라고 하와이 이민을 홍보했다. 이어 ‘날씨가 좋고, 학비가 없어 자녀를 교육할 수 있다’는 문구도 함께 포함했다. 그러나 본인이 나고 자란 고국을 뒤로 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 삶을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동서개발의 대표 데쉴러는 내리교회의 목사 존슨에게 설교를 부탁한다. 존슨 목사는 당시 설교를 통해 하와이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등 적극적인 이민을 권했다. 이로 인해 교인들의 하와이 이민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 현재 하와이 지역의 감리교인 70%가 한국인이다. 이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하와이 현지에서 교회를 만들고, 단체를 조직했다. 결과적으로 하와이 이민자에는 단순 노동 이민을 선택한 사람들을 포함해 신문물과 평등사회를 꿈꾸는 기독교인들이 함께였다. 이는 이후 10년 후 본격화하는 미주 독립운동의 한 갈래인 ‘계몽운동’의 전초 기지가 될 수 있던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변휘장 하와이 한인문화회관 추진위 부회장 “교회·여성이 고국 독립운동 견인” “인천에서 시작한 하와이 이민자들이 미국에서의 고국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한 것은 바로 교회와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변휘장 하와이 한인문화회관 추진위원회 부회장(67)은 “미국이라는 낮선 장소에서 이민자들을 하나로 모을 구심점이 절실했다”며 이 같이 강조했다. 변 부회장은 40년전 하와이로 이민을 와 이덕희 하와이 한국사연구소장을 만난 뒤부터, 하와이 이민자들의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해석하고 있다. 변 부회장은 “이민자들에게는 먹고살기 힘든 조국의 상황과 더불어 평등한 사회로의 기대가 컸다”며 “이 때문에 교회가 학교가 됐고, 공간은 곧 지역사회의 구심점이자 독립 운동의 전초 기지 역할을 했다”고 했다. 변 부회장은 또 “특히 사진만 보고 중매결혼이 이뤄진 사진 신부가 등장했는데, 그들이 가족을 꾸리면서 한인 사회가 구축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변 부회장은 하와이 이민사의 의미를 알릴 수 있는 공간인 한인문화회관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하와이에 한인 역사와 문화를 볼 장소가 없다는 것이 한국인으로서 마음이 아프다”며 “하와이가 신혼여행지가 아니라, 한인들의 독립운동의 숨결과 역사의 도시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김지혜기자

[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120년 한국 이민史 들여다보다

‘그날의 물결, 제물포로 돌아오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이 120년 전 인천 제물포에서 미국 하와이로의 첫 이민 등 대한민국의 이민역사를 사진과 영상으로 재조명했다. 박물관은 6일 야외전시장과 지하 특별전시장에서 한민족 공식이민 120주년을 맞은 특별전을 개막했다. 이번 특별전은 다음달 20일까지 이어진다. 특별전은 재외동포들의 시작인 하와이 이민부터 일제강점기 강제이주, 70년대의 산업이민, 그리고 해외입양까지 다양한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700여점의 사진과 영상으로 공개했다. 박물관은 732만여명의 재외동포들의 삶과 역사를 1~5부로 나눠 조명한다. 1부에서는 재외동포재단의 교육지원사업·차세대사업·홍보문화사업·조사연구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재외동포들을 연결해온 역사와 현상을 선보인다. 이어 2부에서는 박물관은 이민 역사의 시작인 1902년 12월22일 제물포항을 출발해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닿은 102명의 삶을 조명한다. 이를 위해 박물관은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의 첫 이민선인 S.S갤릭호의 전신과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본토와 사할린 여러 대륙으로 이민을 간 과거의 형상을 사진과 영상으로 생생하게 선보인다. 특히 3부에는 세계 각지에서도 조국의 독립과 정체성을 위해 싸워온 재외동포들의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조명했다. 이들은 간도·연해주·미주로 떠났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단체를 조직하고 군인을 양성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이들의 독립운동 활동은 1919년 3·1운동은 해외로 퍼져나갈 수 있는 자양분으로 평가받는다. 마지막으로 4부와 5부에는 해방과 6·25전쟁 이후 생겨난 혼란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쿠바와 미국으로 떠난 이민자들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브라질 농업이민, 독일과 베트남으로 떠난 산업이민, 미군과의 결혼으로 등장한 ‘전쟁신부’ 등 다양한 모양의 이민자의 모습을 전시했다. 이 밖에도 박물관은 전시회와 함께 하와이 이민자 다큐멘터리 영화인 ‘무지개나라의 유산’ 상영과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재외동포, 다큐멘터리 감독과의 토크 콘서트도 함께 마련한다. 변휘장 하와이 한인문화회관 건립추진위원회 부회장은 “120년 전 그들이 마주했을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과 고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라며 “특별전을 통해 그들의 삶과, 시대적 사명, 생활양식 등을 알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너무 뜻 깊다”고 했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그 동안 집중했던 ‘나간 이민사’에서 더 나아가 ‘유입 이민사’에 대한 확장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이민사에서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과 영상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이번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새삼스럽게 더 크게 와 닿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천의 이민 역사,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이민 역사를 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한편, 인천시는 지난 2008년 전국 최초로 이민사를 연구하는 ‘한국이민사박물관’을 만들고, 이민사에 대해 다양한 주제와 국가를 주제로 전시를 기획했다. 김지혜기자

인천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