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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수립 100년과 새로운 인천] 하. 새로운 100년 위한 인천의 도약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인천은 김구 선생의 남북통일과 평화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어떻게 품고 펼쳐나가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면 모든 국민이 김구와 상해 등을 떠올린다. 특히 김구와 인연이 깊은 인천은 그의 정신을 살려 미래 100년을 열어 나가야 한다. 지난 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에 의뢰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국민인식 여론조사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는 김구(31.4%), 상해(11.4%), 이승만(2.7%) 등의 순이었다. 이 같은 결과는 임정의 수립과 정통성, 대외 영향력을 확보하는데 김구 선생의 의지와 노고가 절대적이었다는 반증이다. 김구 선생이 가진 불굴의 의지와 한반도 통일평화에 대한 사명감은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그의 인생 역정과 인천의 역사가 닮아있는데 주목해야 한다. 1919년 상해 임정으로 떠나기 전 김구 선생은 1887년과 1914년 애국 활동으로 2번이나 인천 감옥에 갇혔고 한국 독립과 평화에 일생을 바치려는 뜻을 보였다. 인천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신문물과 외세의 침략을 직접적으로 겪은 경험이 있다. 또 고려시대 때는 왕이 인천으로 피난해, 수십 년간 몽골의 침입에 대항했던 역사도 있는데 이 부분이 김구 선생에게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와 함께 김구 선생이 암살된 후이지만, 인천은 한국전쟁(6.25) 때도 전쟁의 중심에 있었고 북한의 연평도 포격, 천안함 사건 등으로 항상 분단과 긴장 상태의 지역으로 남아있다. 이용헌 인천시 남북교류협력담당관은 김구 선생이 인천 감옥에 수년간 갇혀 있으면서 인천의 역사적 특성을 통해 본인의 사명감을 되새겼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광복 이후 인천을 찾아 통일 한국, 평화 통일을 외쳤다. 김구 선생의 정신을 통해 인천이 남북평화 의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대한민국 전체에 확산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2월 정부 여론조사에서 또 주목해야 할 부분은 100년 후 우리나라를 위해 가장 중점을 둬야 할 영역에 대한 질문이다. 경제성장(23.5%), 국민갈등 해소(15.9%), 남북군사 대치 해소(13.8%), 국제적 영향력 증대(11.7%) 등의 답변이 나왔다. 남북 경협은 경제성장과 남북 대치를 없애는 지름길이다. 수출 경제인 대한민국은 글로벌 경제난에 체감 경기가 나아지지 않고 있고, 저출산 등 인구절벽으로 생산 가능 인구마저 2020년부터 매년 33만명씩 줄어들 것으로 예측된다. 인천과 가장 가까운 북한 황해도는 같은 수로 경제권으로 활발히 교류했다. 특히 황해도는 김구 선생의 고향이고 인천은 주된 활동지로서 인연도 깊다. 전문가들은 분단과 긴장의 최전선인 인천이, 남북 교류 활성화 및 통일 이후 경제 성장과 교류의 중심이 되고자 김구 선생과 같은 사명감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락기 인천역사문화센터장은 멀리 갈 필요없이 김구 선생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황해도와 인천은 공유할 수 있다며 분단 전에 이곳은 같은 민요를 부르고 같은 경제권을 형성해 융성했다고 말했다. 이어 인천이 김구 선생의 평화통일에 대한 정신과 지향점을 어떻게 배우고 퍼뜨릴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때다라고 덧붙였다. 주재홍기자

[임시정부 수립 100년과 새로운 인천] 중. 다양한 행사, 의미 되새겨

100년 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강점기 시대 속에서 민족해방이라는 사명 추구와 함께 근대사회로 나가는 길을 열었다. 임시정부의 이 같은 방향성은 내부의 이견을 좁히는 촉매제가 됐고, 수차례 개헌을 거쳐 현재 대한민국의 정통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임정 수립 100년이 된 2019년 대한민국, 그리고 300만 인천은 한반도 평화의 중심축임에도 남북 분단 해결에 주도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막강한 중앙정부 중심의 통일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다. 특히 지방분권 시대를 맞아 대한민국 평화통일 정책 근간의 변화를 이뤄내려면 인천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항일과 애국의 이념을 기초로 조국의 통일과 평화를 염원했던 애국지사들의 정신을 계승해, 인천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에 따라 인천시와 산하 군구는 임시정부의 정신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나섰다. 우선 인천시와 군구는 김구 선생의 독립을 향한 불굴의 의지와 평화 통일 정신을 계승하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 시는 오는 23일 열리는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김구 선생의 외세를 배제한 민족 중심의 평화 통일 정신을 계승하는 학술대회를 연다. 김구 선생은 광복 이후인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외세가 만들어놓은 38선을 무너뜨리고 민족의 자주독립 통일 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했다. 시는 김구 선생의 민족자주, 평화통일 정신을 시민에게 알리고, 인천이 남북통일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정신적인 토대를 쌓을 방침이다. 중구는 백범 김구 역사거리 조성사업을 오는 8월까지 마무리한다. 김구 선생이 청년 시절인 1887년과 1914년 애국 활동으로 인천 감옥에 갇혔는데, 이곳에서 김구 선생은 불굴의 의지로 한국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치려는 뜻과 행적을 보여줬다. 인천문화재단은 한성정부와 인천 다큐 제작에서는 독립운동가 홍진 선생의 업적을 조명한다. 홍진 선생은 3.1운동 직후 인천 만국공원(자유공원)에서 13도 대표자 회의를 주선해, 한성 임시정부의 태동을 만들었고 이후 상해로 망명해 평생을 상해 임시정부에서 몸바쳤다. 국내 유일의 임시정부였던 한성 임시정부의 의미와, 인천의 항일독립운동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함께 그는 김구 선생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만들어 광복군 창설의 토대를 쌓은 인연도 있다. 한국독립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를 중심으로 결성한 대표적인 독립운동 정당이다. 시 관계자는 임시정부 수립 100년 만에 남북 관계가 따뜻한 봄을 맞았지만 지난 하노이 북미 회담 결렬 이후 남북 관계도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다며 김구 선생 등 애국지사들이 인천에서 꿈꿨던 평화와 민족 통일을 실현할 수 있도록 그들의 정신을 계승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주재홍기자

[임시정부 수립 100년과 새로운 인천] 상. 독립위해 활약한 애국지사

100년 전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주독립과 근대국가 건설의 뜻을 품고 이역만리 이국땅으로 흘러간 인천의 후손들은 새로운 국가 만들기에 진력을 쏟아 부었다. 더욱이 인천과 인연을 맺고 활발한 활동을 한 김구홍진 선생 등은 임시 정부의 주요 인물로 활약, 현재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일조했다. 특히 시선을 끄는 점은 이들의 사상과 의지가 대한민국 2대 도시로 도약하고 있는 인천에 전달돼 새로운 100년을 열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이에 본보는 임정 수립과 독립에 기여한 인천 애국지사들의 업적을 살펴보고, 이를 본받아 완전한 자치분권 수립이라는 과제 속에서 인천이 나아갈 앞으로 100년의 길에 대해 모색해 본다. 편집자주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연해주와 상하이 그리고 국내에서 각각 수립이 추진돼 거의 동시에 선포됐다. 임시의정원 구성과 대한민국 임시헌장 결의채택 등을 거쳐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군무총장 이동휘 등을 선출한 뒤 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했다. 이 같은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수많은 인물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 지금의 대한민국에 이르렀다. 특히 인천을 기반으로 한 독립 운동가들도 임시정부 안팎에서 활약, 300만 인천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있다. 인천과 인연이 깊은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까지 지낸 핵심인물이고, 홍진 선생 역시 임시정부 수립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주요 인사다. 김구 선생은 밀정으로 들어온 일본군 쓰치다를 처단해 1887년 인천 감리영에 수감됐고, 1914년에는 안명근 사건과 신민회사건으로 인천 감옥에 갇혔다. 한국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치려는 김구 선생의 뜻과 구상도 이곳 인천에서 마련된 셈이다. 이때 청년 김구를 돕고자 인천출신 김주경, 유완무 등과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섰고, 김구 선생은 광복 후 첫 행선지로 인천을 찾아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1919년 직후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을 맡았다. 이후 임시정부 내무 총장, 국무총리 대리, 국무령에 취임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했다. 김구 선생은 임시 정부 내 활동뿐 아니라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원했다. 홍진 선생은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 임시정부가 탄생할 수 있게 한 인물이다. 31 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자유공원)에서 13도 대표자 회의를 주선했는데, 이 대표자 회의 인물을 중심으로 한성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홍진 선생은 13도 대표자대회를 통해 한성 임시정부 각 책임자 명단을 선정한 후 임시 헌법 초안과 명단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통합 임시 정부인 상해 임시정부에서 평생 활동했다. 항일학생 운동과 의병활동 등에 몸바친 이들도 있다. 최응순 선생은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 졸업생과 함께 학병 반대운동을 전개했고, 윤윤용 선생은 3.1운동 당시 일본군에 끌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중국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 활동에 뛰어든 김동수 선생, 독립군 군자금 마련에 나섰다가 옥고를 치른 이재연 선생, 의병 활동을 하다 체포된 정기인 선생 등도 있다. 강덕우 개항장연구소장은 인천에서 큰 영감을 얻어 독립운동을 펼쳐간 독립지사들의 의지를 이어나가야 한다며 현재 추진되는 각종 김구 기념관 건립 등도 조속히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주재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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