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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광복·전쟁 겪으며 희생… 재외동포의 뿌리

파독 광부·간호사 등 현대사 이민자들 '살아 숨쉬는 역사'
멕시코 동포, 에네켄 농장 참혹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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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1905년 한인 1천33명을 태우고 멕시코에 도착한 일포드 호의 모습. 1960~70년대 경제 개발을 위한 원조 및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독일 탄광에서 일을 하고 있는 광부들의 모습.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⑤ 멕시코·사할린 강제이주, 파독광부

인천 제물포에서 120년전 시작한 ‘코리아 디아스포라’는 격동의 근현대사를 지나오면서 다양한 색의 이민 역사를 만들고 있다. 하와이 이민 이후 국권을 침탈 당하고, 해방과 전쟁이라는 국가의 주요한 분기점 때마다 이민자들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들의 이민 역사는 자의와 타의가 뒤섞인 형태다.

3일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 따르면 인천 제물포에서 출발한 첫 공식이민인 하와이 이민 이후 국가의 운명에 휩쓸린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삶이 이어진다. 1890~1910년 농민과 노동자들은 기근과 빈곤 등을 피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중국과 러시아, 하와이, 멕시코 등의 이주를 선택한다.

이어진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독립운동과 경제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망명 등을 선택한 이민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반면 일본의 폭력적인 강제이주의 희생자들도 생긴다. 이후 해방과 전쟁이라는 주요한 사건을 겪으면서 한인 이민 역사는 자의와 타의가 섞이는 형태로 이어진다. 이들은 전쟁신부와 해외입양, 외화 벌이를 위해 떠났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 등 다양한 이민 역사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현재 세계 곳곳에 뻗어 나가 있는 재외동포의 뿌리이다. 전 세계에 살고 있는 730만명의 재외동포는 각자의 디아스포라 삶을 이겨낸 결과물이다. 멕시코 재외동포들은 에네켄 농장의 참혹한 생활을 견뎌낸 이들의 산물이고, 사할린 영주귀국자들은 대한민국을 가슴에 품고 무국적자로 배회해야했던 역사의 증거이다. 이 밖에도 파독 광부와 간호사는 외화벌이를 위해 희생한 현대사의 일꾼이기 때문이다.

신은미 전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이민사는 사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파독 광부와 간호사 뿐 아니라 선박을 제조하는 조선사들도 독일로 외화벌이를 하러 가는 등 다양한 사람들의 디아스포라 형태가 한국 역사의 주요 분기점마다 나타난다”고 했다.

특히 1890~1910년 일제강점기 이전 시대부터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속 해방과 전쟁, 산업화 등은 이민 역사의 주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또 역사의 분기점마다 예상하지 못한 피해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일본의 강제이주의 희생자와 전쟁으로 인한 해외입양 활성화 등이 그것이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한인의 이민 역사는 고된 역사적 사건에도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뿌리내리려고 했던 투쟁의 역사”라고 했다. 이어 “재외동포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이들의 역사와 근원을 알게 된다면 나타나지 않을 일이다”며 “자의와 타의가 뒤섞인 채 조국을 떠나야 했던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재외동포 정책의 시작이다”고 했다.


머나먼 이국서 ‘노예의 삶’… 망국의 백성 ‘한 많은 일생’

1905년 4월4일 인천 제물포에서 출발한 ‘일포드 호’에 탄 한인 1천33명은 광활한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참혹한 노동을 견뎌야 했다. 사진은 멕시코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 노동자들이 기념촬영 하는 모습. 돌로레스 가르시아 관장 제공

에네켄 노동자의 눈물 ‘지상낙원’ 거짓말에 속아 ‘멕시코 악몽

“멕시코 이민자들은 넘어갈 아리랑 고개가 없는 끝 없는 평원에서, 지평선에서 막막함과 공허로 뒤척였다.”

작가 김영하는 소설 ‘검은꽃’을 통해 에네켄 노동자의 막막하고, 공허한 심정을 ‘산이 없는’ 멕시코의 광활한 대지 탓이라고 비유하며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다.

인천 제물포에서 시작한 하와이 이민은 곧 멕시코 이민으로 이어진다. 1905년 4월4일 인천 제물포에서 ‘일포드 호’를 타고 떠난 1천33명의 한인이 그들이다. 당시 멕시코 한인 노동자 모집 회사인 대륙식민㈜는 횡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 멕시코 노동 이민에 대한 홍보에 열을 올렸다. 그들은 1904년 12월17일부터 1905년 1월13일까지 7번에 걸쳐 멕시코 한인 노동자를 모집한다.

1905년 4월4일 인천 제물포에서 출발한 ‘일포드 호’에 탄 한인 1천33명은 광활한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참혹한 노동을 견뎌야 했다. 사진은 멕시코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 노동자들이 기념촬영 하는 모습. 돌로레스 가르시아 관장 제공

당시 국내에는 하와이 이민을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은 멕시코와 하와이가 그리 멀지 않다는 문구를 내세워 노동자 모집에 흥행을 기록한다. 또 이들은 멕시코를 물과 토양이 매우 좋고, 따뜻해 전염병이 없다고 소개한다. 더군다나 이들은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 극히 어렵다는 이유를 앞세워 한국인들이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민은 대한제국 정부에서 허락하지 않은 비공식 이민이었다. 그렇게 제물포에서 출발한 한인 1천33명은 멕시코 서부 살리나크루스항로 향한다. 태평양을 건너면서 어린이 2명과 남자 어른 1명이 숨지고, 아이 1명이 태어나 1천31명은 멕시코 땅을 밟았다. 이들은 기차와 배로 갈아탄 뒤 5월15일 멕시코 남동부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시에 도착한다.

당시 멕시코에는 선박용 밧줄의 원료를 채취하거나 사탕수수를 포장할 수 있는 에네켄(용설란의 일종) 재배가 성행했다. 이들은 노예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해야 했다. 새벽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뜨거운 사막에서 가시 투성이인 에네켄 잎을 잘라야 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채찍이 날라왔고, 집세를 내고 나면 멕시코까지 온 비용을 갚기도 불가능 했다.

그리고 1909년에 그들은 4년 계약 노동이라는 가혹한 생활을 끝냈지만, 돌아갈 조국이 사라졌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멕시코 농장에서 재계약을 하는 등 자리를 잡는 방법만 남았다. 당시 멕시코로 향한 1천33명 중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온 이는 단 1명도 없다.

오성제 인천시 멕시코 국제협력담당관은 “중남미 이민 3~4세들은 미주 이민자들과 다르게 궁핍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이 얼마나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열악한 환경에 살아왔는지에 대한 방증”이라고 했다. 이어 “대부분 한인들은 멕시코인과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후세대에게는 한국에 대한 정체성이 매우 흐릿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럼에도 메리다 한국 박물관에 방문하는 후세대들도 있는 등 한국에 대한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이들도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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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영주귀국을 위해 비행기에 오르는 사할린 동포의 모습.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사할린 동포의 모진 삶 일제 동원령 ‘강제이주’… 하루하루 지옥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가장 큰 분기점은 근현대사 속 일제강점기 시대와 전쟁이다. 더욱이 사할린 동포들은 국가의 운명 앞에 강제 이산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장본인들이다.

3일 한국이민사박물관과 인천시 등에 따르면 현재 인천은 경기도 안산시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할린 동포들이 살고 있다. 인천 연수구의 사할린동포회관에서 살고 있는 89명을 포함해 인천 남동구 논현동에 살고 있는 사할린 동포까지 총 500여명의 사할린 동포들이 인천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인천은 공항과 가깝고, 항구도 있어 가족을 두고 온 사할린 동포들에게 선호도가 높은 지역이다.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 당한 인천 인구는 1만630명명이다. 이들은 일본의 전쟁 물자를 감당하기 위해 강제로 동원해 이주를 당한 이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조국을 떠나 군대와 군수물자를 만드는 사업장으로 떠나야 했다. 이들 중 사할린 동포들은 1939~1945년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 소련의 남사할린 지방으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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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할린 지역의 이시히라 산업 주식회사의 비다 탄광에 강제 동원 당한 피해자 김종학씨(뒤에서 2번째 줄 오른쪽에서 3번째) 사진으로 상단에 '비다(美田)광업소 종업원 35명 결의형제 일동'이라고 기록.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제공

일본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만들고, 한인들을 남사할린으로 이주해 30여개 탄광과 벌목장, 비행장, 도로, 철도 등 건설현장에서 강제로 일하게 했다. 이들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는 동안 필요한 전쟁물자와 원자재 등을 마련하는 데 노동을 착취당했다. 이렇듯 남사할린으로 강제 이주 당한 한인 수는 약 6만~12만명에 달한다. 사할린 동포들은 고된 노동 착취를 당하면서도 해방과 동시에 돌아갈 고국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았다.

그러나 사할린 동포들은 해방과 동시에 일본 국적도, 소련 국적도 갖지 못한 채 ‘무국적자’로 전락한다. 이후 사할린 동포들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조국을 두고 또 다시 이별의 아픔을 겪는다.

2007년 영주 귀국한 문정현 인천사할린동포경로회장은 “‘나라 없는 설움’은 경험하지 못하면 알 지 못한다”며 “사할린 한인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하면서, 소련국적도 받지 않았던 무국적자들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시간이 갈수록 조국은 우릴 찾지 않고, 전쟁 등으로 상황이 악화하면서 결국 소련 국적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들은 소련 정부가 1988년 사할린 한인의 모국방문과 영주귀국을 허용하면서, 대한적십자사를 통한 영주귀국 사업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부는 지난 2021년 최초로 사할린 동포들의 영주귀국을 지원할 특별법에 따라 첫 사할린 동포 350명의 영주귀국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사할린 동포 단체들과 시민단체들은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여전히 정부의 영주귀국 대상자가 되기 위해서는 1945년 8월 이전 출생자이거나 이들과 8촌 이내의 직계비속 1명 혹은 배우자 등으로 국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 회장은 “아직 갈 길이 멀다”며 “국가가 나서서 이산의 역사를 경험한 희생자들을 품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자식이고, 손자고 러시아에 두고 보러 가지 못하는 동포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인터뷰 돌로레스 가르시아 멕시코 메리다한국박물관장

“죽는 날까지 한국 그리워한 조부위해 박물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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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레스 가르시아 메리다 한국사 박물관 관장. 본인 제공

“한국은 제 정체성의 일부입니다, 눈 감는 날까지 한국을 그리워한 할아버지를 위해 한국박물관을 운영하려고 합니다.”

멕시코 메리다시에 있는 한국박물관의 관장을 맡고 있는 돌로레스 가르시아 관장은 1904년 제물포에서 멕시코로 떠난 김수봉씨(1989년 사망)의 손녀다. 돌로레스 관장은 한인 3세로 메리다시에 유일한 한인 이민사를 담은 ‘한국 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다. 그는 할아버지가 에네켄 농장에서 살아온 삶을 보며 “상상할 수 없이 고된 날들”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김씨는 14살의 나이로 에네켄 농장인 ‘체첸데스토레’에서 일을 시작한다. 김씨는 큰 돈을 벌어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의 노동을 버텨냈다. 돌로레스 관장은 할아버지의 입에서 들은 ‘담배’라는 단어와 ‘안녕’이라는 한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돌로레스 관장은 “할아버지는 늘 식당 ‘제물포’에서 술을 마셨다”며 “그곳엔 한인들이 많이 오갔고, ‘제물포’가 인천에 있는 곳이라는 점은 최근 알았다”고 했다.

김씨는 멕시코에서 양배추로 김치를 담그면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돌로레스 관장은 “양배추로 김치를 먹으면서 ‘한국인이구나’는 생각을 많이 했다”며 “할아버지는 늘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돌아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지난 2019년 한국이민사박물관의 초대로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 하던 고향이자, 자신의 뿌리인 한국의 땅을 밟았다.

돌로레스 관장은 “처음 한국에 방문을 했을 때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며 “이곳이 나의 모국이라는 생각에 감정이 격해진 탓이다”고 했다. 돌로레스 관장은 어릴 적부터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한국인을 낮춰 부르는 ‘치노’라는 놀림에 시달려왔다. 그는 ‘치노’라는 놀림을 받더라도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았다.

돌로레스 관장은 “멕시코인들이 ‘치노’라고 우리를 낮춰 부르더라도 절대 기죽지 않았다”며 “묵묵부답으로 의연하게 살아왔다. 메리다시 한 복판에 한국거리와 한국사 박물관이 있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고 했다. 이어 “멕시코에 사는 한인 4세, 5세에게 이런 자부심을 전달해주는 것이 나의 소임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인터뷰 문정현 인천사할린동포경로회장

“사할린 동포들의 역사는 가슴 시린 이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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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 사할린경로회장(83)

“사할린 동포들의 이주 역사는 가슴 아픈 이산의 역사 입니다.”

문정현 인천사할린동포경로회장(84)는 “강제징용으로 시작한 뼈 아픈 사할린 동포들의 역사는 계속 가족과 헤어진, 이산의 역사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직도 일본을 ‘일제 놈’이라고 스스럼 없이 칭한다. 그에게 일본은 이산의 역사를 만든 원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본 때문에 강제징용을 당한 피해자이자, 돌아갈 곳이 없어 한 동안 ‘무국적자’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문 회장은 현재 남동구 논현동에 있는 사할린경로당의 구심점이자, 영주귀국을 선택한 사할린 동포들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뛰고있다. 이제는 80~90대가 대다수인 사할린 동포들의 역사의 아픔과 피해를 힘 주어 말하고,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문 회장의 아버지는 일본에 의해 이뤄진 ‘이중징용’의 피해자이다. 문 회장의 아버지는 1938년 조선에서 사할린 삭조르스크 탄광으로 강제징용을 당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으로 다시 징용을 가야했다. 이 때문에 문 회장은 어린시절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어 본 적이 없다.

문 회장은 “초등학교 시절, 나에게 ‘아버지’란 단어는 어색한 단어였다”며 “아버지를 24년만에 찾아서 얼굴을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입이 잘 안떨어질 정도로 어색했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가 탄광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듣지도, 기억나지도 않는다”며 “아버지라는 존재는 늘 나에게 아프다”고 했다.

특히 문 회장은 거대한 역사적 파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친 날들을 기억하고 있다. 1945년께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사할린 동포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사할린 동포들은 소련과 일본 양쪽의 칼과 총에 살아남아야 했다. 문 회장은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사할린 동포들은 더욱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어 “해방 후 조선어학교를 다녔는데, 한국어를 못 배운 내가 소련어를 하면 교사들은 무자비하게 때렸다”고 했다.

그는 이곳 사할린 동포 거주 마을에서 살고 있는 350여명의 사할린 동포와 후세들에게 아직도 못 다 이룬 꿈이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문 회장은 “2007년 영주귀국을 선택할 때는 1945년 8월 출생 이전 당사자와 배우자 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며 “이곳에 사는 사할린 동포들에게는 아직도 러시아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 많다”고 했다. 이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족을 놔두고 영주귀국을 선택하는 사사할린 동포들의 상처가 커지고 있다”며 “국가는 현재진행형인 이산의 역사를 해결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김지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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