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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인천 - 월미도

월미도는 인천을 상징하는 명승 중의 한 곳이다. 주소는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월미로다. 같은 동내에 있는 자유공원에 올라 내려 다 보면 수문식 독이 있는 인천내항 오른쪽으로 울창한 숲으로 덮인 육지와 연계된 곳 인천 앞바다의 육계도가 바로 월미도다. 월미도는 섬(島)이라는 이름 그대로 하나의 작은 섬으로 육지와는 그 거리가 약 1㎞ 떨어진 곳이었다. 1920년대 초 돌축대를 쌓아 내륙과 연결됐다. 이후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육지가 된 경우다. 월미도는 비록 작은 섬이었지만 지금의 인천항 제물포가 항구 역할을 제대로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월미도가 제물포 앞에 버티고 있었기에 파도와 바람으로부터 제물포에 정박한 배들을 지켜줬다. 역사적으로는 병자호란 때 적군의 기습작전으로 조선조정의 강화도 파천길이 막혔고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러고는 치욕의 역사를 남겼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때는 한양으로 들어가는 뱃길을 찾으러 인천에 접근한 이양선들이 입항 전 한 차례 머무르는 섬이 됐고 러일 전쟁의 첫 포성이 울린 제물포해전은 월미도 앞바다 월미해협에서 벌어졌다. 625전쟁 때는 나라의 존망이 걸린 누란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를 창출시킨 인천상륙작전 승리의 주무대가 됐다. ■즐거움 넘치는 월미도에서 아름다운 추억 만들기 60년도 더 지난 1958년, 정상급의 인기가수 심연옥과 남백송이 청춘남녀가 통화하는 형식의 노랫말로 부른 대중가요 전화통신이 크게 히트했다. 이 노랫말에는 다가올 일요일은 단둘이 만나 월미도로 아베크.라는 구절이 나온다. 625전쟁이 휴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그 당시에도 월미도는 멋쟁이 청춘남녀의 아베크 필수코스였음을 잘 말해 주는 대목이다. 이 노래는 지금도 일요일의 남자 송해가 진행하는 KBS 간판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에 가끔 등장한다. 월미도가 관광지로의 명성을 간직한 것은 오래다. 일제 치하, 1920년대부터 월미도는 동양 제일의 절경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실제로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즐겨 찾았다. 당시의 교통사정으로는 월미도는 매우 편안한 길이었다. 기차로 서울에서 인천역까지는 1시간40분, 당시의 인천역에서 월미도까지는 도보로 20분의 거리였다. 서울에서 오전에 출발에 월미도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기차로 귀환, 집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당일치기 나들이 길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자동차의 홍수시대가 된 지금의 사정은 어떠한가. 월미도 나들이는 굳이 자가용을 이용할 필요가 없다. 월미도 나들이 길은 역시 철길이다. 철길 인천역을 월미도 나들이길의 나들목으로 잡으면 아주 편안하게 즐거움 넘치는 월미도 추억 만들기를 할 수가 있다. 인천역까지는 수도권 1호선 전철이 있고 4호선도 있다. 지난해 가을에 완전히 개통된 수인선 전철까지 합치면 5천만 전 국민 절반 정도가 월미도 나들이를 쉽고 편안하게 할 수가 있다. ■월미바다열차를 타고 하늘에서 서해를 품는다 인천역에 내려 출구로 나오니 바로 눈앞이 월미바다열차를 탈 수 있는 월미바다역이다. 열차에 오르니 인(仁)하고 자(慈)한 인상의 민명숙 문화관광해설사가 다정스런 환영인사를 한다. 자신을 소개한 다음, 오늘은 매우 뜻깊은 5월15일이라며 어머니와 함께 탑승한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어린이에게 물었다. 오늘 5월15일이 무슨 날이지요? 하는 질문을 했다. 어린이는 씩씩하게 오늘 15일이 저 생일인데요 하는 정확한 답변에 열차 안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됐다. 5월15일은 스승의 날 - 세종대왕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정했다는 해설사의 첫 해설부터 열차 안은 즐거운 분위기, 화기가 가득해졌다. 월미바다열차는 한국관광공사가 한국관광 100선으로 선정한 바 있는 인천 월미도를 순환하는 국내에서 가장 긴 도심형 관광모노레일이다. 총 운행거리 6.1㎞, 평균 시속 10㎞의 속도로 월미도를 한 바퀴 돈다. 기준소요시간 42분, 궤도 차량 2량을 1편성으로 구성해 최대 46명이 탑승할 수 있다. 월미바다열차는 지상 7m부터 최고 18m까지의 높이에서 월미도의 자연경관과 인천내항, 서해와 멀리 인천대교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서해의 낙조는 오래도록 뇌리에 각인될 절경이다. ■열차 좌우 차창 밖으로 월미바다열차 8경을 감상하다 열차가 시발역 월미바다역을 출발하자 해설사는 열차 좌우 창밖을 내다보며 소상한 해설을 해 준다. 해설 대상이 월미바다열차8경인데 8경 모두 훌륭한 문화자산이다. 열차에서 내려 살펴볼 수 있는 곳은 샅샅이 살펴보기로 했다. 8경 중 제1경은 사일로벽화다. 벽화가 그려져 있는 원통형 대형건물은 1979년에 건립된 곡물저장고인 사일로이다. 열차가 시발역을 떠나 월미공원 역 도착 전에 본 그림이다. 높이가 48m로 아파트 22층과 같으며 외벽에 그려진 벽화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 벽화로, 2018년 12월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그림의 내용은 한 사람의 일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 1년 사계로 나눠서 표현했다. 차창 밖 한편으로는 바다가 전개됐고 다른 편에는 섬의 중앙 월미산이 눈으로 들어온다. 월미산은 인천상륙작전 격전지로서 반세기 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면서 자연의 숲과 야생동물의 천국이 된 소중한 산이다. 2001년 인천시민의 품으로 돌아왔고 인천시는 이곳에 산책로를 다듬는 등 자연과 역사, 전통문화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문화관광공원, 월미공원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정상(108m)에 오르면 인천항과 서해, 인천국제공항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심신을 편안하게 해 주는 월미공원 산책 지난 반세기, 군부대의 주둔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차단됐던 월미도의 일부 지역이 2001년에 인천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울창한 숲으로 잘 보존돼 온 총 면적 58만8천102㎡(17만8천평)의 땅은 지금 자연과 역사, 전통문화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문화관광공원, 시민들의 심신을 편안하게 해 주는 월미공원이 돼 시민들의 사랑을 크게 받고 있다. 잘 다듬어진 산책로와 공원의 중심, 월미산과 그 정상에는 인천시가지와 인천 앞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월미공원 한편에는 2007년 가을, 조선시대의 궁궐정원과 별서정원, 민간정원을 재현한 한국전통정원이 조성돼 있다. 궁궐정원으로는 부용지와 애련지, 아미산 굴뚝이 원모습 그대로 재현돼 있어 창덕궁을 걷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별서정원으로는 소쇄원과 국담원, 서석지를 볼 수 있고 민가정원인 양진당에서는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생활상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재현해 놓은 민가인 초가집에서는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을 떠올리게 했다. 한국전통정원 가운데 길 벽면에 새겨 놓은 월미24영(月尾24影)은 두고두고 읽어 볼만한 글귀들로 생각됐다. [월미도번영회 장관훈 회장고객에는 각별한 배려... 후배들엔 꿈과 용기를] 어느 지역이나 잘 사는 마을에는 훌륭한 민간인 지도자가 있게 마련이다. 인천에서는 월미도가 풍요롭고 잘 사는 마을로 알려졌다는데 그 중심에는 장관훈 회장이 우뚝 서 있다. 코로나19라는 악마 때문에 모두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래도 관광명소인 월미도에는 탐승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먹어야만 산다니 월미도의 식음료 업소는 어려움을 비교적 잘 헤쳐나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올해 50세 나이, 장관훈 회장은 인천에서 초중고대학까지 마쳤다는데, 월미도는 고등학교 2학년의 알바생활로부터 인연이 시작됐다. 알바생활 이후 밑바닥에서부터 한칸 한칸 사다리를 타고 올라 오늘의 위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수많은 역경을 딛고 또 딛으며 모범적인 외식업소를 이룩한 것이니 지역의 지도자로 인정돼 지역사회발전을 이끄는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지난 수년간 지역사회의 각종 축제를 잘 치러 왔는데 코로나사태로 모두가 취소되고 있는 것이 몹시 안타깝다고 전했다. 글=우촌 박재곤 / 사진=인천교통공사 제공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안성 팜랜드

안성팜랜드는 2021~2022 한국관광 100선의 한 곳으로 선정됐다. 한국관광 100선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국내 관광활성화를 위해, 국내의 다양한 대표관광지를 2년마다 한번 씩 선정해 홍보하는 사업이다.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의 한 곳, 농협경제지주 안성팜랜드는 1960년대 한국과 독일 양국 정부의 지원으로 설립된 한독목장이 그 시초다. 1963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에 불과한 가난한 나라의 농촌부흥과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우유를 배불리 먹이고 싶은 꿈이 있었다. 1964년에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의 뤼브케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이 꿈을 이야기 했다. 이후 1967년 대한민국을 답방한 뤼브케 대통령과의 경제협력회담을 통해 서독정부는 낙농시범목장건설과 젖소 200마리를 구매할 수 있는 차관자금을 제공, 우리나라는 이 차관자금으로 1969년 10월11일 한독낙농시범목장을 준공시켰다. ■즐거운 체험목장 안성팜랜드 축산업에 관광서비스를 결합 안성 공도읍 대신두길, 총면적 128만7천㎡의 안성팜랜드는 기존의 축산업 뿐만 아니라 보고 즐기는 축산업, 즉 사육과 가공에 국한된 축산업에서 관광서비스까지 결합시킨 6차산업으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이 사실은 한국관광 100선이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안성팜랜드는 문화체험시설과 교육시설, 놀이시설이 주축을 이룬다. 문화체험시설은 고품격 전시를 통해서 안성팜랜드를 보고 듣고 느끼게 해 놓았다. 교육시설에서는 안성팜랜드의 역할과 비전, 우리나라의 축산업과 교감할 수가 있다. 놀이시설은 온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시설로, 이색자전거, 어린이전용바이킹, 회전목마, 미니기차 등이 탐승객들을 즐겁게 해 준다. 칡소와 황소, 면양과 거위 등 25종 800여 마리의 가축을 바로 곁에서 보고 만지고 먹이를 주며 농축산업 현장을 체험할 수가 있다. 야외특설 가축공연장에서는 잘 훈련된 개와 오리 등 여러 종류 가축들의 묘기가 연출된다. 관람객들은 큰 박수를 보내며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를 뜬다. 목장안에는 2만550㎡ 넓이의 잘 가꾼 승마장이 있고 이 승마장에서는 숙련된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32두의 승용말(馬)로 누구나 승마를 즐길 수도 있다. ■황금빛 유채꽃 군락, 다시 찾은 봄날을 수 놓았다 안성팜랜드에는 계절 따라 각각 다른 색깔의 꽃들이 눈 앞에 펼쳐진 천지에 화려하게 수를 놓는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은 지금은 노오랑 황금빛 유채꽃 군락이 황홀하다. 노랑색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유채의 종자는 기름으로 많이 쓰인다. 그래서 그 이름이 유채(油菜)가 되었고 꽃봉오리가 맺히기 전의 여린 잎은 쌈채소, 국, 무침, 겉절이 등 여러 가지 식용으로 쓰인다. 하지만 꽃이 식용으로는 많이 쓰이지 않는 편이다. 유채가 관상용 봄꽃으로 자리매김을 하도록 한 신의 섭리인 것 같다. 유채꽃은 꽃 하나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군락을 이룬 꽃밭을 보는 것이 제격이다. 유채꽃밭은 제주도를 위시, 봄이면 전국 각지에서 많이 볼 수 있고 여러 지역에서 유채꽃축제도 열고 있다. 개화시기가 위도에 따라 얼마의 차이가 있지만, 안성팜랜드의 유채는 가정의 달인 5월 초에 만개하는 것으로 바로 지금 이 계절, 안성팜랜드는 가족단위의 탐방객이 크게 붐비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계절따라 펼쳐지는 꽃들의 향연, 화려한 꽃대궐 꽃들의 경영장 안성팜랜드는 추위가 물러나기 전, 봄의 전령 냉이로부터 봄의 시작을 알린다. 이어 4월과 5월, 초록의 호밀과 노랑의 유채로 봄의 절정을 이룬다. 호밀은 볏과의 한해살이 또는 두해살이풀이다. 밀과 비슷하나 키가 크고 잎은 작으며 짙은 녹색의 식물로 호밀열매의 가루는 식용이나 사료용으로 쓰인다. 영어의 라이(Rye)를 어원으로 라이보리로도 불린다. 한국에서는 100년 전인 1921년 강원도 난곡의 독일인 농장에서 독일로부터 도입된 호밀이 처음 재배되었기에 재배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 곡식이다. 계절이 바뀌어 여름으로 접어 드는 6월부터는 장미와 양귀비, 메리골드 그리고 수국과 백합 등의 꽃들로 화려한 꽃의 향연으로 탐승객들을 꽃대궐로 불러 들인다. 뜨거운 태양의 계절, 여름이 되면 천만송이의 해바라기가 장관을 이룬다. 해바라기의 꽃말은 애모(愛慕)다. 바라기는 한쪽만 바라보도록 목이 굳은 사람을 말한다. 해바라기는 오직 태양만 바라보는 꽃으로 일편단심의 뜻도 지니고 있다. 뜨거운 빛갈의 해바라기로 여름꽃의 계절을 마감하면 바로 9월의 핑크뮬리와 핑크빛 코스모스, 황화코스모스의 화원이 연이어 전개된다. 핑크뮬리는 쥐꼬리새속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미국이 원산지다. 미국 서부와 중부지역에서 많이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꽃의 영문명을 음독한 핑크뮬리나 이를 직역한 분홍쥐꼬리새라고도 부른다. 다채로운 경관, 계절마다 달리 하는 꽃들의 색과 분위기의 안성팜랜드는 꽃들의 향연이 연속 상영되는 꽃들의 경연장으로 보아도 좋겠다. ■안성팜랜드 나들이길의 식도락, 목원식당 식도락을 즐길 수 있는 나들이길은 행복하다. 나들이길에서는 볼거리, 즐길거리, 살거리, 먹거리 등이 있지만, 혹자는 먹거리를 최우선으로 꼽기도 한다. 안성팜랜드에서는 최고의 수준이라는 박재홍 쉐프가 신선한 식재료들만을 골라서 정성을 다한 준비로 차려 내는 음식들을 만날 수 있다. 안성시내 도심에서 만난 어느 현지 지도급 인사가 정중하게 식사대접을 하겠다며 도심을 벗어 난 먼 곳, 이 곳 안성팜랜드의 목원식당으로 안내를 했다. 안내를 한 분의 극찬이 지나치다는 엉뚱한 생각, 고약한 심뽀로 이 업소의 흠을 한 번 잡아 보겠다고 했는데, 실패를 했다. 음식점의 음식 맛이야 기본이지만, 다른 곳 어느 하나, 나무라고 싶은 점을 찾지를 못했다. 완벽하다고 할 만큼의 업소였다. 넓은 목장안을 이동하는 동선에는 광장푸드박스, 공연장푸드박스, 푸드트럭 등을 운영, 나들이길의 목마름과 시상끼를 쉽게 해결할 수가 있다. 특히 안성팜랜드에서 유기농으로 키운 조사료를 인근 젖소목장에 공급, 그 풀을 먹은 소가 준 유기농 우유를 원료로 만든 유기농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 매우 이채로운 아이스크림이다. 그리고 봄에 자란 안성팜랜드 호밀이 들어간 호밀츄러스, 호밀핫도그는 안성팜랜드에서만 맛 볼 수 있는 특별한 먹거리다. 글=우촌 박재곤 / 사진=대송 심재운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군포 수리산&반월호수

도시가 산을 에워싸고 산자락 주위를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갔다. 도시는 바다가 되고 산은 바다 한 가운데 솟아 있는 외로운 섬처럼 되어 버렸다. 산 주위로는 사통팔달 큰 길들이 뚫리고 산자락에는 전철 철길이 깔렸다. 그것도 모자라 땅 아래로는 터널까지 뚫렸다. 군포시와 안양시의 아파트들로 둘러 싸인 수리산의 모습이다. 뽕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고 했다. 상전벽해(桑田碧海). 메트로폴리스 서울 주변의 도시들이 아파트도시를 형성하면서 변천해온 과정들을 보면 바로 이 말을 실감케 한다. 안양과 군포 등 수도권 도시들이, 얼마 남지 않은 숨통인 녹지공간과 산들을 계속 침식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도시여! 이젠 더 이상 산으로 올라가지 말자!! ■반월저수지 호반의 빨간 지붕물가에는 벤치 자연의 명화는 어느 시점, 어디에서 보아야만 하는 걸까 서울행 KTX를 타고 천안 아산역을 지났다. 여기서 광명역까지는 20여 분의 거리, 기차 진행방향 오른쪽 창 밖 풍경을 내다본다. 잠시 후 열차는 호수 위로 놓인 철길을 달렸다. 차창 밖으로 나즈막한 산들이 시야를 스치고 지나간다. 곧바로, 눈 깜빡할 사이에 열차가 건넌 호수는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의 어천저수지이고, 손에 닿을 듯 시야를 스친 산은 수원시와 화성시의 경계를 이루는 칠보산(239m)다. 잠시 후 열차가 또 하나의 작은 저수지 송라저수지를 건너고 나니 이번에는 차창 밖으로 조금 더 큰 저수지가 한 폭의 그림인양 펼쳐졌다. 경기 군포시 둔대동의 반월저수지다. 유명한 화가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호수 건너편에 솟아 있는 수리산 슬기봉 정상, 돔형의 시설물이 멋진 조각작품인양 시각을 즐겁게 한다. 산 정상을 망가뜨린 시설물에 대한 평소의 불만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풍경이다. 그런데 마음속 깊은 곳에 깊이 각인되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그림 하나가 있었다. 호수 건너편 물가에 있는 집이다. 시속 300km가 된다는 고속열차 속에서 찰나에 스치고 간 그림이라 머릿속에서도 스케치가 되지 않았다. 다만 상상의 나래 속에다 빨간 색 지붕과 벤치가 놓여 있을 것만 같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담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내 님은 누구일까, 어디 계실까, 무엇을 하는 님일까, 만나 보고 싶네. 1960년대에 유행했던 가요의 노랫말 끝 소절 호반의 벤치로 가 봐야겠네를 흥얼거려 본다. 호반의 그 집 지붕 색깔은 빨강이었고, 물가 넓은 잔디마당에는 벤치가 놓여 있었다. 아! 상상 속의 풍광만이 아니었다. 한 폭의 아름다운 풍광은 어느 싯점, 어느 장소에서 보아야만 가장 아름다운 것인지 -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겠다는 점, 아름다운 풍광 감상법을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수리산 정상의 빼어난 조망많은 등산객들의 발길 이끌어 군포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수리산은 태을봉(489m)을 중심으로 남서쪽으로 슬기봉(469m), 동북쪽의 관모봉(426m)과 북서쪽의 수암봉(395m)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리산이라는 이름은 산본이나 군포에서 바라볼 때 산세가 비상하는 독수리 형상으로 보이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수리산은 2009년, 남한산성(1971년)과 연인산(2005년)에 이어 경기도의 세 번째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51년 한국전쟁 때는 수리산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고 시흥~안양~수원의 방어선 역할을 하였다. 평지에서 갑자기 솟아 오른 듯한 산계 덕분에 여러 개의 봉우리 정상에서 바라보는 빼어난 조망이 많은 등산객들의 발길을 정상으로 정상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그만큼 등정(登頂)의 등산로도 많다. 수리산은 군포수리산과 안양수리산으로 대별, 도립공원측에서는 년간 탐방객이 200만명으로 집계가 된다고 했다. 수리산 산행은 산 동쪽인 인구밀집지역에서 오르내리는 코스가 가장 많다. 이 지역은 4호선 전철 산본역과 수리산역을 기점으로 도보로 걸어도 20분 정도면 등산로 나들목에 닿을 수 있다. 산본역에서 내리는 경우, 산본동 엘림복지원을 산행시발점으로 삼으면 힘기르는 숲과 독서의 숲을 거쳐 태을봉을 오르는 가장 짧은 코스가 된다. 약 1.45km의 거리에 1시간 반 정도로 정상을 오를 수 있다. 노약자에게는 대단한 인기의 코스다. ■20만 그루의 철쭉군락 철쭉동산봄날의 수리산 산행의 백미 누가 뭐래도 수리산 산행은 철쭉의 계절, 봄날의 산행이다. 수리산역에서 20만 그루의 철쭉군락, 철쭉동산은 지척의 거리다. 신록의 산록, 도심에 이러한 철쭉의 군락이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따사로운 봄 햇살, 분홍빛갈 철쭉의 바다 속, 연인과 함께 꽃길을 걸으며 철쭉의 꽃말 그대로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즐거움 을 만끽해 본다. 억급의 세월에 비하면 100년 안쪽의 인생은 찰라, 하물며 꽃이야 말할 여지가 없겠다. 그래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도 했다. 매년 4~5월 철쭉이 만개하는 시기에 다양한 행사로 손님들을 모시던 군포철쭉축제가 올해는 코로나19라는 악마 때문에 그냥 넘어 간다니 아쉽다, 철쭉동산에서 얼마의 발품만 팔면 용진사 입구에 닿을 수 있다. 용진사 입구에서 성불사와 임간교실, 만남의 광장을 거치면 슬기봉에는 금방 닿을 수가 있다. 용진사 입구~슬기봉 구간은 소요시간 1시간으로 넉넉한 거리, 1,1km다. 대야미역을 수리산 산행나들목으로 잡을 수도 있다. 산자락까지 걷기에는 약간의 무리이겠지만 건각이라면 트레킹코스로 삼아도 좋겠다. 대야미역에서 수리사 방향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산자락까지 쉽게 닿을 수 있다. 이 코스에서는 아름다운 갈치호수를 지나게 되는데 갈치호수에서 슬기봉을 바라보는 경치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풍광이다. 물오리들이 호수위에서 유영이라도 하는 순간은 사진촬영의 훌륭한 포인트가 된다. 버스종점에서 산행안내를 받을 수 있는 수리산도립공원 사무소는 멀지 않는 거리다. ■반월호수둘레길의 거점 허니 듀 Honey Dew, 나들이길의 즐거움을 배가 군포 대야동에 있는 반월호수는 수줍어 하는 시골색시 같은 호수다. 소리 없이 눈으로 웃어 주는 듯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10여년 전 어느 봄날, 글 쓰는 작가 몇 사람이 한 폭의 그림 같은 이 호수 호반의 한 카페에서 회동을 했다. 이들은 수시로 만나 겨울의 산, 봄날의 호수와 여름의 해수욕장, 가을의 강가 등 아름다운 곳을 찾아 다니며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작품의 소재들을 얻는 작업을 했었다. 그 때만 해도 반월호수는 둘레길이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 시절 우리가 만났던 감로수는 빨강지붕의 카페, 영화나 TV드라마의 배경으로 나올법한 분위기였다. 그 카페앞 호수가에는 벤치가 놓여 있었고 자그만 공원같은 넓은 마당은 계절따라 분위기가 바뀌었다. 하루 중에서도 호수를 붉게 물들이는 해질녘의 주홍빛 낙조는 바로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화였다. 이에 우리는 아낌없는 찬사가 절로 나왔었다. 지금의 반월호수는 주변의 경관과 멋진 조화를 이루는 자연 친화적인 둘레길과 작은 공원이 조성돼 있다. 한 시절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쳤던 감로수는 그 명성을 이어 받은 허니 듀 Honey Dew라는 새 카페가 보다 새롭고 젊은 감각으로 반월호수 나들이 길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글_우촌 박재곤 / 사진_군포시청 제공

[아름다운 강산 산 山 내 川 들 野] 여주 여강길

여강길은 시詩요 그림이다 이 길을 걷는 즐거움은 행복이다 강은 좋은 길이 된다. 순풍에 돛이라도 달면 물길은 땅 길보다 훨씬 빠르기도 하다. 강안에서 바라보는 풍광 또한 얼마나 멋진가. 그리하여 오래 전부터 물길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삶을 이어 왔다. 여강은 물길 중에서도 더 없이 중요한 길이다. 서울 한가운데를 흐르는 한강 상류가 바로 여강이며, 수많은 물산을 실은 배가 여강을 지나갔다. 조선시대 큰 나루터 네 개 중에 두 개가 여강에 있을 정도였다. 서울의 마포나루와 광나루, 여강의 이포나루와 조포나루가 그 넷이다. (장주식의 여강길 이야기중에서) ■ 첩첩산중 구곡양장 겹겹의 계곡을 돌고 돌아 여주땅에 닿는 수려한 풍광 여강 여강(驪江)은 남한강의 물줄기 중 여주땅을 관통하는 물줄기의 별칭이다. 여강은 유난히 수려한 강이라는 뜻에서 얻어 진 이름이다.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1천418m)의 깊은 계곡 안쪽, 검룡소에서 한강 물줄기가 시작된다. 514km, 1천300리 한강 물줄기에는 수많은 이름들과 사연들이 담겨져 있다. 검룡소에서 분출하는 힘찬 물줄기 골지천은 백두대간의 서편자락, 첩첩산중 겹겹의 계곡을 돌고 돌아 정선땅 여량에 닿는다. 이곳에서 대관령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송천과 아울려 조양강이 된다. 그래서 이곳 이름이 아우라지가 되었다. 옛날에는 마포나루까지 물길로 뗏목을 띄어 보내던 곳이었다. 조양강은 영월에 닿고 그 이름도 동강으로 바뀐다. 구곡양장 동강은 영월땅을 관통하고, 평창에서 흘러 온 서강과 만나 드디어 남한강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는다. 서강에는 굽이쳐 흐르는 하천의 침식과 퇴적 등에 의하여 만들어진 한반도를 빼닮은 지형도 있다. 남한강은 충청도 단양땅을 적시면서 단양팔경의 네 곳, 석문과 도담삼봉, 구담봉과 옥순봉의 절경도 연출한다. 강물은 계속 흘러내려 충주땅에서는 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인공호수 충주호를 펼쳐 놓는다. 충주호를 떠난 물길이 드디어 여주땅에 다다르고 아름다운 강마을을 휘감는다. ■ 곱고 아름다운 모래가 빚은 여강의 수난시민정신, 수난을 딛고 삶이 흐르는 여강길을 탄생시키다 강물이 흘러 흘러 천년만 가리, 만년만 가리 - 수천년 맑은 물과 아름답고 고운 모래. 수많은 철새와 물고기가 공생하던 아름다운 강 여강!! 이 아름다운 여강의 고운 모래가 수난을 불러 왔던 때가 있었다. 2000년 초부터 경기도에서는 남한강 정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골재채취사업이 추진됐다. 이에 여주에서는 여러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맑은 물과 고운 모래를 지키자는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이 반대운동에 참여한 여러 단체와 성직자 그리고 강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우선 여강의 가치를 바르게 알아 보자는 취지로 여강 강변을 찬찬히 걸어 봤다. 당시는 정부의 4대강 사업 이전이라 맑은 물, 고운 모래, 아름다운 여울들과 생명을 품고 있는 습지들이 잘 보존돼 있었다. 처음 택한 순례길은 여주시청에서 이포대교까지 여강의 하류였고 연이어 남한강의 숨은 길들을 연결하며 걸었다. 그 결과 여강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세상에 알려졌고 뒤이어 해마다 지역의 학생들과 함께 본격적인 여강의 도보순례가 진행됐다. 이후 4대강 사업을 추진하던 정부에 의해 경기도에서는 최초로 여강길은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생태탐방로 여주여강길로 지정됐다. ■ 이야기가 많은 문화생태탐방로 11개 코스, 여강길은 지친 삶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여주 나들이길에는 각양 각색의 다양한 테마가 있다. 문화역사탐방코스와 여강길 둘러보기코스가 큰 기둥이지만 긴 구간의 자전거코스와 농촌체험코스, 쇼핑나들이코스도 만만찮은 코스다. 11개 코스로 구성된 여강길 코스에서는 볼거리가 너무 많아 여러 차례의 계획을 세워야만 한다. 외지인들이 가장 선호하고 많이 찾는 코스는 제1코스 옛나루터길이다. 옛 여강에는 총18개의 나루터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 나루터를 통해 장을 보고 소와 땔감을 실어 날랐다. 강길을 걷다 보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곳이 옛 나루터의 흔적이다. 여주역에서 시작하여 도리마을까지 걷는 1코스 옛 나루터길에는 현재 부라우, 우만리, 흔암리 나루터 세 곳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여주역에서 출발해 여주터미널을 지나 달을 맞는 누각이라는 뜻의 영월루를 시작으로 여강을 볼 수 있는 구간이다. 제방을 쌓기 전 모래에서 은빛이 난다고 해서 금은모래라고 부르는 강변유원지를 지난다. 지금은 캠핑장소로 연중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남한강이 연양천과 만나는 합수지점에서 복원된 황포돛배를 탈 수 있고 수운이 발달했던 시대의 정류장인 나루터를 지나는데 이호, 부라우, 우만리 나루터를 만난다. ■ 신륵사와 파사성, 그리고 여주의 먹거리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이 산속에 지어졌는데 신륵사는 유별나게 강변에 있는 절이다. 남한강변의 수려한 자연 경관과 어우러진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고, 고려 우왕 2년(1376년)에 고승 나옹선사(懶翁禪師ㆍ13201376)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여강을 굽어볼 수 있는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강월헌은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명소다. 파사성은 파사산(해발 251m)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한 삼국시대의 석축산성이다. 성 전체 둘레는 936m이다. 정상에 서면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와 이포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외식업계에서는 여주는 몰라도 천서리는 안다 는 말이 있다. 천서리 가 지명인 것도 모르는 경우도 많다. 천서리는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 의 지명이다. 이광정 할아버지가 젊은 날, 이곳에서 막국수집을 시작해서 유명해지자 주변에는 막국수집 여러 곳이 문을 열어 이곳은 천서리막국수촌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 졌다. 지금 이곳에는 천서리막국수 홍원막국수 강계봉진막국수 세 곳이 모범음식점으로 성업중이다. 글_우촌 박재곤 / 사진_사진단체 여강길 제공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의왕 철도 박물관

여행은 인생의 시(詩)요 기차는 여행의 연인이다. 기차는 어떠한 기상조건에도 어김없이 정해진 시간에 떠난다. 풍랑으로 출항하지 못하는 뱃길이나 일기 때문에 회항하는 비행기 같은 경우는 없다. 도로가 막혀 거북이처럼 기어가는 차 속에서 짜증을 내지 않아도 되고 안전벨트로 가슴과 아랫배의 압박을 받지 않아도 된다. 느긋한 마음으로 차창 밖 풍경에 취할 수도 있고 캔 맥주 한 잔쯤은 마셔도 된다. 기차가 철길곡선구간을 달릴 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기차꽁무니의 움직이는 별난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다. 기차 안 넓은 공간은 아이들과 함께 여행하기에도 좋다. 노약자나 장애인도 편안한 마음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여행수단이 기차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명상에 잠겨 볼 수도 있고 심야의 열차라면 숙박료를 내지 않고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다. 이동 수단만이 아니라면 완행열차가 좋았다. 시골길의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보며 고향의 정취를 느끼기도 하고, 잠시 머무는 역 승강장에 내려 급하게 후루룩 먹던 따끈한 우동 한 그릇의 맛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됐다. 기차가 서는 역마다 올라타는 승객들의 각기 다른 억양의 사투리가 구수하고 정겨웠다. 메아리치는 열차의 기적소리는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향수, 그리고 정다웠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베어 나오게 했다. ■ 우리나라 철도 127년의 역사와 문화, 한 곳에서 한 눈으로 본다 의왕 철도박물관로에는 한국철도공사의 철도박물관이 있다. 1988년 1월에 개관한 철도박물관은 우리나라 철도 127년의 역사가 담겨져 있는 산교육장이며 수도권의 대표적인 박물관으로 꼽힌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으로 볼 수 있고 다양한 자료와 전시물들을 통해서 쉽고 재미있게 공부도 할 수 있다. 실내 전시관에는 약 4천여점의 각종 자료들이 각 분야별로 전시되어 우리나라 철도의 발전과정을 잘 보여준다. 야외전시장에는 우리나라에서 실제 운행됐던 차량과 철도장비 등 34점이 전시되어 있다. 지금 세대의 사람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오늘날 타고 다니는 객차들이 실물 그대로 전시돼 있기도 하다. 협궤열차와 그 열차가 다니던 협궤의 좁은 철길도 볼 수 있고 한 동안 가장 빨랐던 통일호 객차와 무궁화호 급의 우등형 전기동차, 비둘기호 열차도 볼 수 있다. 위용을 자랑하는 대통령 특별동차도 경호차량과 함께 나란히 전시돼 있다. 한편, 흥미로운 철도문화교실과 철도체험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 중이다. 매우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철도의 역사와 문화를 읽힐 수 있는 교육현장이다. ■ 기차의 다양한 기능, 낭만의 대명사 관광열차는 아름다운 추억의 산실이다 기차는 여객열차만이 아니라 화물열차를 위시해 수많은 다른 기능의 열차도 있다. 이들 기능 중, 낭만의 대명사 관광열차는 열차의 꽃이요 아름다운 추억의 산실이다. 2021년 현재,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기차길이 깔려 있다. 이들 철길 중 가장 대표적인 철길, 경부선과 호남선, 전라선과 장항선 등 주요 철길은 모두 경기도 땅을 거친다. 이 철길이 지나는 곳곳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들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경기도 땅에는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지하철이 깔려 있다. 소위 지공파, 지하철을 공짜로 탄다는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지하철은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도 한다. 일년 내내 이 지하철을 이용, 경기도의 명승지를 둘러 볼 수가 있다. 조금만 더 눈길을 먼 곳으로 돌려 본다. 한 평생 금강산은 꼭 한번 가 보아야 한다던 시절, 1924년에는 금강산 전기철도가 개통됐다. 경원선 철원역에서 시작되어 내금강에 이르는 116.6㎞의 노선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10여개 전용노선의 관광열차가 있다. 서해금빛열차(West Gold-Train)는 세계 최초의 한옥식 온돌마루와 온천 족욕시설을 갖췄다. 이 열차로 갯벌과 섬, 낙조 등 풍요로운 자원이 가득한 서해안 7개 지역의 명소를 찾아간다. 정선아리랑열차(A-Train)는 유네스코 세계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아리랑의 고장, 정선의 비경을 파노라마로 즐길 수 있도록 천장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유리창으로 이뤄져 있다. 백두대간협곡열차(V-Train)는 백두대간 협곡구간을 왕복 운행하는 국내 최초의 개방형 관광열차다. 백호를 형상화한 외관과 복고풍 실내장식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중부내륙순환열차(O-Train)는 강원도와 충청북도, 경상북도 두메산골의 수채화 같은 자연경관을 끼고 순환 운행하는 관광열차로 V-Train과 연계된다. 남도해양열차(S-Train)는 영남과 호남을 이어 주는 열차로 차 안에서 각종 공연과 다례체험을 즐기며 천혜의 자연경관과 풍성한 문화자원을 지닌 맛과 멋을 찾아 떠난다, 이 밖에 강릉~동해~삼척 구간의 바다열차와 서울~영동 왕복의 국악와인열차도 있다. 경북나드리열차는 동대구~영주~분천, 포항, 청도로 이어지는 관광열차다. 국내 최초 호수 순환 의왕레일바이크...아름다운 자연경관 어우러진 수도권 명소 경북 문경에서 최초로 레일바이크가 운영되기 시작한 이후 전국에는 지금 20여개의 레이바이크가 운영 중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2016년 4월 경부선 철길 옆, 의왕의 왕송호수를 중심으로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개장한 의왕레일바이크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수순환 레일바이크다. 경기 남부지역과 수도권에서는 1시간 이내에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주변경관 또한 수도권에서 유명한 일몰 여행지이면서 철새들의 쉼터로 명성이 자자하다. 사계절 찾아오는 다양한 철새들과 호수에서 살아가는 물고기와 식물들은 아이들에게 다양한 자연을 경험하게 해줄 수 있는 아주 훌륭한 교육장이기도 하다. 청량한 호수바람과 함께 왕송호수를 둘러보는 재미와 여유를 느껴볼 만한 나들이 코스다. 글=우촌 박재곤 / 사진=철도박물관 제공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강화 : 원도심 도보여행

한국관광공사가 2021~2022 한국관광 100선의 한 곳으로 선정한 강화 원도심 스토리워크는 1970년대까지 직물산업을 이끌던 강화읍 원도심을 걸으며 숨은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는 도보나들이코스다. 1300년경 고려시대에 심었다고 알려진 은행나무를 비롯해 폐 직물공장을 리모델한 소창체험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방직공장이었던 조양방직, 동서양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등 특색 있는 건축물들을 볼 수 있다. 스토리는 1970년대 한국 최고의 직물공장 심도직물로부터 시작된다. 심도직물은 1947년에 창업한 국내굴지의 직물회사였다. 1970년대에는 역직기 210대와 섬섬옥수의 1천200여명 미혼근로여성들이 정부의 수출입국의 기치아래 외국으로 수출할 제품들을 생산해 내었다. 웸블리넥타이는 심도직물의 대표적인 수출상품으로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 여러 나라로 수출되었다. 강화의 직물산업을 주도하며 국가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심도직물 터는 지금 용흥궁공원이 되었다. 30m가 넘었던 높이의 공장굴뚝 윗부분은 공원옆에다 세워 놓았고 그 주변에는 8월에 개화하는 직물의 원료인 목화나무도 심어뒀다. ■ 지붕없는 역사박물관 강화도, 둘레십리 도심공간은 이색적인 역사와 문화의 관광보고 강화도를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고 한다. 강화의 역사와 문화가 소록소록 숨쉬는 이 박물관의 중심지역 강화의 원도심, 용흥궁공원에서부터 스토리가 시작된다. 이 공원은 삼도직물이 있었던 터다. 공원 한 켠에 이웃한 용흥궁은 조선왕조 제25대 왕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집이다. 철종이 왕위에 오르고 4년 후에 지금처럼 짓고 용흥궁이라고 불렀다.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처럼 살림집 형태로 지어졌다. 용흥궁의 다른 한 쪽으로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언덕 위에 있는 대한성공회강화성당이 눈에 들어 온다. 이 성당의 내부는 유럽식이지만 외형은 전통 한옥양식으로 지어졌다. 1900년 11월에 축성, 처음 형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공원의 한 쪽 길가에는 강화31독립만세기념비가 서 있다. 강화도에서는 1919년 3월7일, 강화읍 장날을 맞아 관청리 웃장터에서 강화군민과 김포군민 2만4천여명이 합세하여 대규모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어서 우리나라 가톨릭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노동사목 표지석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언덕으로 올라 서면 고려로부터 이어온 생명의 역사 700년 은행나무를 만나게 된다. 식물분류학의 이학박사 박지극 시인은 은행나무라는 그의 시 여러 편에서 은행나무는 100년의 세월, 나이를 먹게 되면 소리를 낸다고 했다. 강화도의 이 은행나무는 치욕의 병자호란 때는 슬픔의 소리를 질렀고 나무 바로 아래 쪽에 살던 한 농부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환희의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물론 시인의 감성이겠지만, 큰 은행나무는 실제로 세찬 바람에 큰 소리를 낸다. 강화의 은행나무는 강화의 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떠났지만, 오랜 세월 국태민안을 기원하면서 강화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보며 굳건하게 서 있다. ■ 강화에는 산업종교전쟁이 있었다 발길은 계속, 강화 직물산업의 흔적 이화견직 담장길 스토리보드를 걷는다. 1970년대까지 강화읍은 우리나라 최고의 직물 생산지로 당시 직물업계의 선두를 달리던 대구와 견줄만큼 직물산업이 번성하였다. 당시 강화읍에는 심도직물을 위시하여 이화직물(견직), 조양방직, 평화직물 등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직물공장이 있었다. 스토리보드는 강화 직물산업의 역사, 강화 사람들, 직물공장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1953년에 설립한 이화직물이 있었던 공장의 담장은 최대한 원래의 모습대로 살려 놓았고 직조기와 공장전경은 부조형식으로 제작해서 당시의 모습을 재현시켜 놓았다. 강화의 직물역사를 품은 핵심, 조양방직은 지금 리모델링으로 카페로 변신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조양방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방직공장으로 1960년대까지 국내 최고의 인조직물을 생산했지만, 1990년대로 접어 들면서 값싼 중국산 직물에 밀려 쇠락하게 되었다. 강화도는 이들 직물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1934년부터 전기가 들어 왔고 전국의 어느 곳보다 먼저 발전한 곳이 되었다. 1900년에 창립, 섬사람들의 교육과 계몽, 민족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잠두교회는 강화읍교회를 거쳐 1976년 강화중앙교회로 명칭을 바꾸고 위용을 자랑하면서 강화읍 향나무길에 우뚝 서 있다. 1901년 잠두교회 부설 잠두의숙으로 시작된 합일초등학교는 기독교신앙으로 민족의식을 강화하고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펼쳤다. 합일초등학교 독립운동길 스토리보드는 김구선생의 휘호 홍익인간과 독립운동을 했던 강화사람들에 대한 판결문을 부조형식으로 만들었다. 원도심스토리워크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한 곳이 소창체험관이다. 반 세기 전 우리가 사용했던 많은 면직물이 소창이었다. 소창체험관은 1956년에 설립된 평화직물을 강화군에서 매입해서 체험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체험들을 할 수가 있다. 원도심의 상징같은 고려궁지와 강화산성은 전쟁과 관련된 시설물로 섬 주변 해안에 즐비한 돈대와 함께 전쟁을 말해 주는 흔적들이다. 그 만큼 강화도는 전쟁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섬이다. 글=우촌 박재곤 / 사진=강화군청ㆍ심재운 제공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우리나라 최초 배달음식 ‘효종갱’

어느 현직 대통령이 청남대에 갔다가 구인사 나들목에 있는 금강식당 산채도토리쟁반냉면이 맛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이 음식을 배달시켰다. 식당에서는 정성을 다해 음식을 장만하여 단양 영춘에서 청주 청남대까지, 그 먼 거리를 택시를 대절해서 배달했다. 구인사는 충북의 동북단이고 청남대는 서남단으로 같은 충북 땅이지만 몇 백리 길이다. 그런데 이 음식을 배달받은 쪽에서는 달랑 음식값만 줘 보냈다. 이 대통령은 퇴임 후, 재임중에 수천억이란 천문학적인 돈을 부당하게 챙긴 것으로 밝혀져 감옥살이까지 ?다. 참으로 기찬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야기는 2막으로 넘어간다. 다음 날, 또 한번 같은 음식을 주문해 왔다는 것이다. 식당주인(이남규김순희)인들 감정이 없겠는가. 지금 우리 식당에는 왕(王)대접을 받는 손님들이 많아 배달은 할 수가 없다. 이 음식을 꼭 드시겠다면 우리 식당에 오셔서 드시라고요. 식당주인이 대통령 측의 음식주문을 단호히 거절한 것이다. 이로 인해 엉뚱한 곳에서 불똥이 튀었다. 바로 군청직원들이 사색이 되어 식당주인에게 애걸복걸 배달요청을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엄연한 실화다. (산따라 맛따라 02. p213) 조선말기의 문신이자 서예가 최영년(1856~1935)이 1925년에 지은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광주 성내사람들은 효종갱을 잘 끓인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효종갱(曉鐘羹)은 배추속대, 콩나물, 송이, 표고, 쇠갈비, 해삼, 전복에 토장을 풀어 온종일 푹 곤 해장국이다. 밤에 국 항아리를 솜에 싸서 한양(서울)으로 보내면 새벽종이 울릴 무렵에 재상집에 도착한다. 국항아리가 그때까지 따뜻하게 보온되어 해장에는 더 없이 좋은 음식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1800년대에 등장한 효종갱은 양반들의 해장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한자로 새벽 효(曉) 쇠북 종(鐘) 국 갱(羹) 자로 새벽종이 울릴 때 먹는 국이라는 뜻이다. 2021년 2월, 지금은 코로나19라는 악마로 전국이 배달음식의 전성시대가 되었다. 음식점에 가서 먹었던 음식들이 가정으로 배달되어 가정에서 먹고 있다. 남한산성 안에서는 2019년 11월까지 효종갱을 전문으로 차려 내던 음식점이 있었다. 고향산천이라는 간판의 음식점에서 성백일-김명주 내외가 이 음식을 1인분 1만2천원으로 차려 냈는데, 음식값을 더 이상 올리기에는 무리라 이 값으로는 영업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내외는 같은 장소에서 여담으로 간판을 바꾸고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광주 남한산성 2편

역사의 고장이자 사통팔달의 교통요충지인 남한산성은 전 지역이 수려한 자연경관이다. 그만큼 경기도민들에게는 일일 관광나들이길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사적 제57호인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은 도민들의 큰 자랑거리다. 남한산성행궁은 사적 제80호이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수어장대를 위시하여 제6호 연무관까지 문화재 여섯 곳이 남한산성안에 산재해 있다. 경기도도민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한 차례는 둘러 보아야만 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수어장대는 1624년(인조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수어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수어청의 장관(將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으로 1972년 5월 4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수어장대는 1624년(인조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수어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며, 수어청의 장관(將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1972년 5월4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제2호 숭렬전, 제3호 청량당, 제4호 현절사, 제5호 침괘정, 제6호 연무관도 쉽게 찾아 가 볼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남한산성 나들이 길에서 빠뜨릴 수 만해기념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계승하는 현충시설로 한평생을 만해 한용운 연구에 몰두한 전보삼 관장이 설립하였다. 내부에는 님의 침묵 초간본과 200여 종의 판본 및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다양한 판본이 전시되어 있다. 31독립운동 당시 만해 한용운의 옥중 투쟁을 보여주는 신문자료와 각종 만해 관련 학술 논문을 포함한 귀중한 자료 1천여 편도 함께 만날 수 있다. 31절을 앞 둔 시점, 만해기념관에서는 31독립선언서 원본의 복사본을 방문객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이 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과 탑골공원에서 최초로 배포한 독립선언서다. 글_우촌 박재곤 사진_윤광규 제공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광주 '남한산성'

1636년 12월1일, 중국 땅의 청나라 제2대 임금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가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 왔다. 조선의 용장으로 알려진 임경업 장군이주둔했던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바로 한성쪽으로 진군했고 임경업 장군의 장계는 12일에 왕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다음 날 청군이 평양까지 진군했다는 장계가 다시 올라 왔다. 조정에서는 급하게 세자빈과 왕자들을 강화도로 파천시켰다. 조선의 임금 인조와 세자는 뒤따라 강화도로 가기로 했는데, 그 시각 청군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아 섰다는 탐색병사의 보고를 받게 됐다. 어쩔 수 없이 인조는 남한산성속으로 파천했다. 이 때 산성주변의 관리들이 산성안으로 모여 들었고 병력은 1만3천여명, 식량은 50일 분 정도가 전부였다. 이것이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 시강원의 대사간 정지호의 남한일기 치욕의 역사지만 교훈으로 삼아야만 청군이 남한산성에 처음 당도한 것은 12월16일, 이런 상황에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왕조의 조정은 항전을 주장하는 척화파와 항복하자는 주화파의 극심한 갈등으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청 태종은 해가 바뀌자 군사를 12만명으로 늘려 남한산성 아래 쪽 탄천에다 진을 크게 치고 조선왕조를 강렬하게 압박했다. 청군과 대항한 각 지역의 전투는 승전보 보다는 참패한 내용이 계속 전해졌고 군사들은 지쳐서 탈진상태가 됐다는 보고가 계속 들려 왔다. 혹독한 추위와 눈바람을 이겨 내야 하는데, 식량마저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강화도마저 함락돼 세자빈과 왕자들이 포로가 됐다는 비보까지 접하게 됐다. 전황은 막다른 지경까지 왔는데, 청나라의 용골대와 마골대 두 장수는 성문까지 와서 인조의 출성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더 이상 버틸 방법이 없었던 인조는 산성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인조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대사간(大司諫) 정지호(鄭之虎)의 남한일기 47일간의 기록이다. 일기는 계속된다. 임금은 남색 옷에 백마를 탔다. 모든 의장을 다 버리고 신하 50여명만을 거느리고 서문을 나가니 세자가 뒤를 따랐다. 뒤따른 백관들은 서문에 서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했다. 임금이 산을 내려 온 조금 뒤에 갑옷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명이 달려 왔다. 임금은 삼정승과 판서, 승지 각 다섯 사람과 한림원 주서 각 한 사람, 세자는 시강원과 익위사의 관원들을 거느리고 삼전도로 향해 나아갔다. 삼전도에는 청태종의 수항대가 설치됐고 인조는 이곳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땅에 닿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를 올렸다. 1636년 병자호란은 전쟁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그 부인이 볼모가 돼 청나라로 잡혀 가게 됐고 조선은 해마다 금은보화와 수많은 물품을 조공해야만 했다. 게다가 무고한 백성 60만명이 끌려가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 됐다. 참으로 처참한 역사의 기록이다. 후손들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며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남한산성, 한양의 보장처이자 적군의 방어선 유사시 임시수도의 기능까지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둘레가 12㎞에 이르며 산위에는 도시가 형성될 만큼의 넓은 분지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임금과 조정이 백성들과 함께 대피할 수 있는 왕실의 보장처(保障處)이기도 했다. 남한산성의 축성시기와 주체에 대해선 2가지 주장이 엇갈린다. 하나는 백제가 한성을 수도로 삼던 때 세운 성이란 것, 다른 하나는 신라가 쌓았다고 하는 주장성(晝長城)이라는 의견이다. 남한산성이 백제 때 쌓은 성이란 주장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나왔다.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백제는 내외적인 여건 때문에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산-한성 등 여러번의 천도를 단행했다. 남한산성이 전략상 요충지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남한산성이 백제의 왕도 중 하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하듯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대동야승(大東野乘)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지(大東地志) 등 대부분의 조선시대 고서들은 남한산성은 백제의 고성이라고 적어 놓았다. 주장성이란 주장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직후 한창 나당전쟁이 벌어지던 문무왕 12년(672), 당나라 군대를 임진강선에서 막지 못할 경우 그 다음 방어선 전략을 짰다. 그 전략이 지금의 남한산 주위에 둘레 4천360보 규모로 성을 구축했는데, 그 성의 이름이 주장성(晝長城)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 임진왜란 중인 선조 28년(1595), 남한산성 자리에 다시 성을 축조했고, 광해군 13년(1621)에 다시 증축했다. 인조 2년(1624)에는 인조가 총융사 이서에게 명해 남한산성을 다시 개축했다. 남한산성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강화를 맺은 이후 재침에 대비해 수축됐고 수축 완료 후에는 광주목의 읍치(邑治)가 성내로 이전됐다. 이후 광주부로 승격됐는데, 남한산성이 기본적인 수도방어목적만이 아니라 행정의 중심지이자 유사시 임시수도로서 기능도 했다는 것을 시사해 주기도 한다. 조선시대 당대에는 광주성이라고도 불렸다. 황성 옛터에 밝은 햇살이 1999년 복원까지 군사적 요새였던 남한산성이 병자호란 이후에는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장소가 됐다. 천주교 최초의 박해인 신유박해(1791년) 때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됐다. 한덕운 토마스가 최초의 순교자가 됐고 이어서 병인박해 때까지 약 300여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 교수, 장살 등의 방법으로 이곳에서 순교하게 됐다.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탄압을 받았다니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조선시대의 천주교 탄압은 엄연한 사실(史實)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임시 궁궐로 사용했던 남한산성의 행궁은 지리적으로 4대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17대 효종의 영릉(寧陵)과는 근접한 위치라 19대 숙종, 21대 영조, 22대 정조 임금이 영녕릉 참배를 위해 이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일제의 조선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행궁이 불 태워 졌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남한산성을 조선왕조의 치욕의 역사로 부각시키는 소재로 삼기까지 했다. 당연한 결과로 남한산성은 폐허의 성터로 남게 됐다. 여기에 1917년에는 성안에 있던 군청마저 지금의 광주시내가 된 경안으로 이전, 남한산성은 쇠락의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더해 일제의 방화로 터만 남아있던 남한산성 행궁터도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산성의 일부와 함께 행궁터는 완전히 매몰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오랫동안 방치됐던 남한산성은 1975년부터 성벽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행궁터 복원은 2002년부터 시작돼 2014년 마무리 됐다. 남한산성 복원에는 만해기념관의 전보삼 관장의 집념과 열정 그리고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이 있었다. 이것은 남한산성복원의 초석이 됐다. 여기에 1999년 임창열 경기도지사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은 남한산성 복원에 큰 힘이 됐다. 폐허가 된 황성의 옛터에 밝은 햇살이 내려 앉고 아름다운을 꽃을 피워 세계가 인증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킨 많은 분들의 노력은 역사에 길이 길이 남으리라. 글=우촌 박재곤 / 사진=김태홍 제공

[한식 맛집 ‘초록향기’] 싱싱한 유기농 채소 한가득...식탁 위 펼쳐진 맛의 즐거움

수종사 가는 길, 남양주 조안면 진중리에 위치한 초록향기는 유기농채소의 천국이다. 대도시 식당에서는 아주 귀한 식품으로 대접받는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싱싱한 채소들이 초록향기에서는 아주 평범한 식품으로 푸짐하게 식탁 위에 올라 온다. 초록향기는 농촌진흥청으로부터 농촌교육농장으로 인증 받은 자가농장에서 재배한 상추와 쑥갓을 위시, 아홉 종의 쌈채소들을 싱싱한 상태로 손님들에게 제공한다. 상추는 육류를 곁들여 먹는 쌈채소의 대표격인데 돼지고기와 함께 쌈으로 먹을 때는 콜레스테롤 축적을 억제하고 동맥경화를 예방할 수 있는 식품으로 알려졌다. 상추는 거의 대부분 생채로 먹기 때문에 신선도가 요구되는 작물로 그야말로 싱싱함이 생명이다. 다른 엽채류에 비해 철분과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해 체내의 혈액용량을 증가시키고 피를 맑게 하는 청혈작용을 하고 저혈압을 예방해 주기도 한다. 상추의 줄기를 꺾어 보면 우윳빛의 액즙이 나오는데 이 액즙이 락투카리움(Lactucarium)이라는 성분으로 심신을 안정시켜 스트레스와 통증, 불면증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상추를 많이 먹으면 졸린다라는 것도 이 성분이 신경안정작용을 하기 때문이며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두통을 해소시키는 것으로 증명이 된다고 한다. 글=우촌 박재곤/사진=윤광규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남양주_물의정원, 운길산, 수종사

■물의정원 강가의 일출조망 명소 차가운 강바람 마시며 한적한 물위를 걷다 2012년에 조성한 물의정원은 봄날의 양귀비 꽃밭이 사람들의 발길를 끈다. 한 편 이 강변의 새벽안개는 사람들을 환상의 세계로 끌어 들인다. 헤르만 헤세의 시 안개속에서의 장면 그대로다. 짙은 안개속에서는 하나의 나무와 하나의 바위가 서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고독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안개가 걷히고 나면 나무와 바위가 서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 해맞이의 명소이기도 한 물의정원, 새벽의 짙은 물안개속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순간 안개가 걷치고 강 건너 산 능선위로 찬란한 아침해가 떠 올랐을 때의 황홀함은 감동! 감동! 그대로였다. 강렬했던 아침 햇살은 흐드러지게 피어난 양귀비 꽃밭 위로 내려 환하게 비췄다. 물의정원 양귀비 꽃밭의 일출, 아! 강렬한 햇빛과 아름다운 양귀비꽃. 양귀비의 꽃말은 망각과 위안이다. 물의정원은 중앙선 전철 운길산역에 내리면 500m, 지척의 거리에 있다. 지금은 한 겨울, 봄날의 양귀비꽃과 무리지어 피어나는 가을의 노랑 코스모스는 볼 수 없지만 차가운 강바람을 마시며 한적한 강물을 따라 걸어 보는 것도 좋다. 눈이라도 내려 쌓이는 날이라면 더 더욱 좋겠다. ■그윽함이 감도는 명산 운길산 가벼운 산행코스의 대명사 운길산역이 나들목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되는 두물머리 북서쪽에 위치한 운길산은 교통이 편리한데다 산세가 부드럽고 등산로가 순탄하다. 자가용으로 가는 편이 편하기도 하겠지만, 대중교통편이라면 중앙선 전철로 운길산역까지 가는 것이 상책이다. 즉 운길산역을 운길산 산행의 나들목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운길산역에서 운길산 속의 수종사(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 433번길 186)까지는 택시요금으로도 큰 부담이 되지 않는 거리다. 운길산 등정은 수종사에서 출발하면 된다. 정상까지는 800m의 거리다. 건각이라면 예봉산(683m)까지 종주, 하산길을 팔당역으로 잡는 것도 기억에 새겨둘만한 산행이 되겠다. 종주구간에서 조망하는 팔당댐의 절경과 한강의 풍광, 그리고 팔당호를 호위하듯, 동쪽과 서쪽을 맡아 솟아 있는 광주의 정암산과 하남의 검단산, 그 자연의 조화로움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길 수도 있겠다. ■동방 제일의 풍경 수종사 차 한잔의 행복, 다실 삼정헌 문화재청은 2014년 3월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위치한 운길산 수종사 일대를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109호로 지정하였다.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머리를 맞대는 이 일대의 풍광을 우리나라 강풍경의 제일경으로 찬사를 보냈는데, 지금은 국가에서도 이 지역을 자연경관가치가 높은 곳으로 공식적인 인증을 하게 된 것이다. 운길산 수종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조망지점으로 확인을 해 준 셈이다. 조선의 임금 세조가 1458년 지병치료를 위해 금강산을 다녀오던 길에 양수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야심한 밤에 세조의 귓가에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자마자 세조는 종소리가 들려 온 토굴을 찾아 나섰다. 토굴속에는 열여덟 개의 나한상이 있었고 바위틈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바로 지난 밤 귓가에 들리던 종소리와 같은 소리였던 것이다. 곧바로 세조는 이 곳에다 절을 짓게 하고 수종사(水鐘寺)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서거정(徐居正ㆍ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제일의 풍경을 지닌 사찰로 칭송했다. 운길산 끝자락 한강변에서 태어 난 정약용(丁若鏞)은 수종사에서 보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이라며 다선(茶仙)으로 이름 높았던 초의선사(1786~1866)와 천하절경, 한강의 풍광을 바라보며 찻잔을 나누기도 했다. 수종사는 불교의 차문화를 잇는 사찰로, 경내의 다실 삼정헌(三鼎軒)에서는 수종사를 찾아 온 손님들에게 차를 대접한다. 글=우촌 박재곤 사진=윤광규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수원화성&화성행궁

사람이 반갑습니다!! 휴먼시티 수원! 수원시가 특례시로 지정된다. 특례시는 기초자치단체 지위를 유지하면서 광역시급 위상에 걸맞은 행정재정자치 권한을 갖는다. 아울러 일반 시와는 차별화가 되는 법적지위를 부여받는 새로운 지방자치단체의 유형이다. 그동안 인구 123만명에 이르는 수원시가 인구 10만명의 도시와 같은 반열에서 대접을 받아 온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었다. 수원시는 도시규모로는 광역자치단체 급이었지만 광역시가 아니라는 이유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공무원의 숫자나 예산 등에서 상대적으로 불익을 계속 받아 왔었다. 이제는 전국 도시 중 인구수 순위로 7위인 수원이 광역지자체와 기초지자체의 중간 형태인 수원특례시가 돼 도시규모에 걸맞는 법적인 지위와 권한을 확보하게 됐다. 이로써 수원시민들의 오랜 숙원이 이뤄졌다. 시민 모두가 자축해야 할 일이다. ■정조대왕의 지극효심,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으로 꽃을 피우다 열한 살 나이 소년의 할아버지는 나라의 임금님 영조였고 아버지는 앞으로 왕위에 오를 왕세자 사도세자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 줄기 빛, 한 모금의 물도 허용되지 않는 깜깜한 좁은 뒤지 속에서 죽임을 당했다. 당쟁에 희생된 것이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왕세손 역시 항상 죽임의 위협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1775년 82세로 연로한 영조는 이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고 이듬해 3월 영조는 재위 51년 7개월, 조선왕조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임금으로 별세했다. 25세 나이로 조선의 22대 왕위에 오른 사도세자의 아들이 바로 조선의 임금 정조다. 조선의 이 비극적인 왕조의 역사는 특이하게도 바로 오늘날의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의 시작이자 싹이 됐다. 정조의 지극효심이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으로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뜻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이어진 관광자원의 보고가 된 정조대왕의 발자취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의 꿈이 담긴 성이다.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52㎞의 화성은 우리나라 성곽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면모를 자랑한다.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됐으며 지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수원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춰 한국의 성곽 건축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성곽을 따라 조성돼 있는 둘레길을 천천히 걸어며 효심과 애민정신이 지극했던 정조대왕의 숨결을 느껴 보는 것은 매우 소중한 나들이길로 남게 되겠다. 한 편, 토목건축의 백미를 보여 준 정약용의 빼어난 과학성을 살펴 보는 것도 유익하겠다. 화성행궁은 정조대왕이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소를 현재의 융릉, 현륭원으로 옮기면서 수원신도시를 건설하고 수원화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건립한 궁이다. 평상시에는 수원부 관아로 사용하다가 정조대왕의 행차 때에는 이곳에 머무르며 진찬연과 과거시험 등 여러 행사를 거행했다.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루를 들어서면 맨 안쪽이 행궁의 정당 봉수당인데 정조대왕은 이곳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기도 했다. 행궁 안의 한 곳, 화령전에는 정조대왕의 어진이 모셔져 있다. ■200년 전통의 재래시장과 볼거리와 즐길거리, 그리고 성내사람들과 먹거리 수원화성 권역에는 여러 전통시장이 발달해 있다. 그 중 팔달문시장은 왕이 만든 시장으로 20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영동시장은 종합시장이자 한복 특화시장으로 유명하다. 지동시장과 미나리광시장, 못골종합시장은 농축산물과 먹거리를 판매하는 시장이다. 이들 시장들 중 먹자골목 안에는 20여곳의 순대전문음식점들이 모여 순대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다양하고 푸짐한 순대요리를 맛볼 수 있다. 화성 성내에서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고 체험할 수도 없는 일들을 만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조선시대와 현재를 이동하는 수원화성 순환열차인 화성어차다. 이 열차를 타면 화성성곽 주요지점과 전통시장을 가장 편안하게 일주할 수 있다. 시속 10~15㎞의 2인용 전기자전거 택시를 타고 수원화성의 숨겨진 구석구석 명소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드라이브 하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여기에 먹거리가 빠질 수 없다. 수원을 대표하는 음식으로는 수원갈비가 대표주자다. 1940년대부터 영동시장의 싸전거리 화춘옥에서 시작된 수원갈비는 1985년 수원시 고유 향토음식으로 지정되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갈빗대가 큰 왕갈비를 소금으로 굽는 것이 특징이다. 수원시내의 대형 수원갈비집들은 성밖 요소요소에서 영업 중이며 이들 업소들 대부분이 경기도가 지정한 으뜸음식점이다. 화성 성내에는 수원갈비의 원조 화춘옥의 후손이 선대의 가업을 이어 받아 수원화성박물관과 팔달구청에 인접한 지점에서 문을 연 화청갈비가 있다. 장안문(북문)과 화홍문 사이에는 대형식당 연포갈비가 성업중이다. 연포갈비는 경기으뜸맛집(경기도 지정 제314호)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대표음식 통닭의 거리가 필달문로 일원에 형성되어 있다. 행궁의 앞쪽 수원천 매향교에 있는 매향통닭 집은 1970년에 창업한 가장 오래된 업소이다. 통닭집이 밀집해 있는 통닭거리의 진미통닭은 넓고 시원한 식당공간과 맛으로 승부한다는 기업정신으로 이 일대만이 아니라 외지에서도 많은 손님들이 찾는 업소로 크게 알려져 있다. 글=우촌 박재곤 / 사진=경기일보 DB

[아름다운 강산 산 山 내 川 들 野] 송아당과 전통자수 류숙자 명인

2016년 10월8일과 9일 양일간,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능에 참배하러 가는 정조대왕 능행차가 서울 창덕궁~수원화성행궁~융릉 59.2㎞ 구간에서 오롯이 재현되었다. 수원화성 축조 220년 만의 일이다. 이 행사의 시민공모에서 혜경궁 홍씨로 뽑혀 행사의 일익을 맡았던 류숙자(柳淑子) 여사는 지금 화성행궁 안 동네에서 생활하고 있다. 1982년에 전통자수에 입문하여 2013년에 전통자수명인으로 인증을 받은 류여사는 장안문 농협 뒷쪽에 송아당이라는 아담한 갤러리를 열었다. 이곳에는 자신과 자신의 스승들의 작품이 상시 전시되어 있고 거실공간에서는 일반인들에게 자수를 가르치기도 한다. 수많은 수상과 수많은 전시회경력의 소유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활동은 2015년 수원문화의 전당에서 가졌던 가슴으로 수를 놓는다와 2016년 수원전통문화관에서의 정조를 수놓다라는 개인전이라고 한다. 이런 활동들로 많은 분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는데 앞으로 전통자수박물관을 여는 것이 필생의 꿈이라고 했다. 송아당 울안에는 방 3개를 게스트하우스로 꾸며 화성을 찾는 관광객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울안 한 편은 전통차를 마실 수 있는 조그만 공간, 행궁빙수라는 앙증(?)스런 간판이 걸린 아담한 카페다. 지금은 동짓달, 왕세자빈 혜경궁 홍씨 류숙자 여사가 따끈한 놋그릇에 담아 내는 동짓 단팥죽을 먹어 보는 것은 오랫도록 기억될 식도락이겠다. 글ㆍ사진_우촌 박재곤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양평 기흥성뮤지엄

■ 문화와 역사탐방 나들이코스로 각광 국내 유일의 모형전문박물관 그 동안 기흥성 관장이 제작한 다양한 분야의 모형작품은 무려 3천 여점이라고 한다. 2만3천여평방m(6,900여평)의 부지위에 2016년 1차로 제1전시관을 건립 개관했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이 전시관에 이들 작품들 중 일부만이 전시되어 선을 보이고 있다. 나머지 작품들도 지금 건설 중인 제2전시관과 제3전시관에서 볼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 연구관리동과 수장시설 등 부대시설까지 갖추어 지면 국내 유일의 모형전문박물관만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세계유일의 종합조형박물관이 될 것으로 내다 보고 있다. 지금의 전시관 지하1층 제1전시실은 한국전통건축관이다. 입구에 국보1호인 숭례문(통칭 남대문)이 2008년 화재 이전의 원래 모습대로 볼 수가 있다. 25분의 1로 축소 정교하게 제작된 작품이다. 보물 1호인 흥인지문(통칭 동대문)을 비롯하여, 경복궁의 원래모습과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대부 건물로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창덕궁 비원의 연경당도 볼 수 있다. 미륵사 9층 목탑, 백제 사비궁 등 한국전통의 건축모형작품들이 전시되어 한국 건축의 역사와 구조,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신라 최대의 왕실 사찰 황룡사는 1238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불타 사라지고 황룡사의 9층 목탑도 터만이 남아 있었는데 철저하고 엄밀한 고증을 거쳐 이곳에 4m 높이의 탑으로 재현되어 서 있다. ■ 옥외 나들이가 어려운 계절, 알찬 옥내 나들이와 무비용의 멋진 해외여행 2층 제2전시실은 근 현대건축실이다.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건물로 대한민국 수립 후 중앙청 청사가 되기도 했지만, 김영삼 대통령 정부때 철거되었다. 인구 50만명의 도시를 기준으로 건립한 옛 서울역의 원래 모습이 복원되어 있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병원인 대한의원(옛 서울대학병원)등 근대 건축물이 기흥성관장의 손에 의해 역사로 기록되었다. 전시되어 있는 88서울올림픽 주경기장, 2002월드컵경기장, 인천공항, 경동교회, 종로타워등을 보노라면 참으로 알찬 국내여행을 하는 기분이 된다. 특히 평양시가지의 모형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가지 다른 생각들을 할 것만 같다. 기흥성 관장의 모형 제작 인생 중 가장 심혈을 기울여 온 작품은 바로 통일에 대한 꿈이라고 한다. 현재 박물관 외부에 보관중인 설악산에서 금강산까지(10m x 20m)의 자연을 재현한 대작과 백두산천지(10m x 10m) 등도 빨리 관람객들에게 보여 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제2전시실에는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을 위시하여 근 현대 건축물들과 도시계획모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현존 세계최고층인 두바이 브르즈할리파와 911테러로 붕괴된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 그 자리에 새로 세워진 더원타워, 타이페이101,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페트로나스 쌍둥이 빌딩,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상하이의 진마오 타워 등 대표적인 세계초고층 건물모형들도 공개 전시하고 있다. 작품마다 해설문이 부착되어 있는 바 역사책 한 권이나 문화서적 한 권으로 공부를 한 셈이 되겠다. 야외 전시장에는 세종때 만들어진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가 실물크기로 전시중이고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축소조형물이 전시되어 있다. 실물크기의 조형물 백마 4 마리가 자신들의 등을 제공하겠다며 왕자를 기다리고 있다. 저녁 무렵 박물관 마당에 서서 서편을 보면 남한강 물 위로 떨어지는 석양이 매혹적이다. 뮤지엄 건물 1층은 관람객들을 위한 분위기 만점의 카페다. 현재 설계중인 제2전시관에는 항공모함, 범선등 수많은 선박과 보잉 747 점보 여객기 등 항공기, 석유시추선, 전기를 연결하면 실제와 똑같이 작동하도록 제작한 원자로와 터빈등이 전시, 보존되고 있다. ■ 국가발전 곳곳에 크게 공헌한 기흥성 관장의 활동 기흥성 관장의 모형제작활동은 우리나라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이어져서 국가발전에 큰 몫을 했다. 그는 국 내외로 큰 행사가 있을 때 마다 초청되어 그의 작품을 전시, 행사를 빛내었다. 1993년 국립민속박물관 개관기념특별전에서는 기흥성의 조형세계 한국의 건축문화가 열렸고 같은 해 대전엑스포 특별전도 열렸다. 해외 행사로는 캐나다 토론토 Royal Ontario Museum 한국관 상설초대전에 수준 높은 많은 작품들을 제작 전시하였다. 건축토목자동차선박, 공장시설항공자연조형물 등 그의 손을 거친 모형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960년대 우리나라 최대의 토목공사인 경부고속도로 모형제작에서부터 63빌딩, 88서울올림픽 경기장, 2002년 한일 월드컵경기장, 인천국제공항, 평촌, 분당, 일산 신도시 개발모형에 이르기까지 기흥성 관장은 모형을 통해 대한민국 근현대 역사와 국토개발의 일익을 담당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홍보를 위한 멀티미디어를 접목한 모형을 제작, IOC 현장 실사평가단의 찬사를 받는 등 동계올림픽 유치에도 일익을 크게 담당했다. 이러한 일들로 수많은 표창을 받았고 2010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 2013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 조형예술부문 명인으로도 선정되었다. 기흥성 관장은 대한민국 모형제작의 대가(大家)로 바깥세상에는 널리 알려 져 있다. 중국에서는 산학협동협약을 체결하고 금강산과 설악산 미니어쳐 모형 제작으로 기네스북 인증서를 받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캐나다 토론토 Royal Ontario Museum과 영국 대영박물관에도 전시되어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전시된 작품 하나 하나가 모두 보존해야만 할 문화유산인 만큼 뜻있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조선 왕조의 사고(史庫)처럼 현존의 문화유산들이 영구히 보전될 수 있도록 개인이 아닌 공공차원의 관심과 지원이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글=우촌 박재곤 / 사진=박종일 기흥성뮤지엄 이사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인천 - 개항장&차이나타운

세계의 新문물 유입 길목...최초의 역사가 시작된 곳 태초에 길은 없었지만, 인천의 앞바다 인천의 바닷길이 열리자 이 길은 세계로 통했다. 140여년 전, 한적했던 자그마한 인천의 한 포구가 새로운 문(門)이 돼 큰 문이 됐고 이 문을 통해 새로운 세계의 다양한 문물이 거친 밀물처럼 이 땅에 밀려 들어왔다. 그래서 인천은 수많은 최초의 역사가 된 것들이 쌓인 인구 300만명의 세계적인 대도시가 됐다. 나아가서 지금은 우리나라 최대의 국제공항이자 세계적인 공항, 인천국제공항을 통한 거대한 하늘길까지 열려 인천은 세계만방과 직결되는 명실상부, 위세 당당한 메트로폴리탄이 됐다. ■인천의 개항장, 우리나라 최초의 많은 역사가 한 곳에 이 땅에서 최초의 철길이 열린 곳이 인천이고 오늘을 사는 세계인들의 일상적인 음료, 커피를 이 땅에서 처음으로 마시게 된 사람들도 인천사람들이었다. 인천의 중구, 인천의 심장이 돼 있는 인천의 개항장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많은 역사가 한 곳에 몰려 있다. 1883년 개항과 함께 서구의 여러 나라와 청국과 일본의 상사들이 앞다퉈 인천에 진출하고 각국의 영사관이 설치되는 등 인천은 국제도시로 발돋움을 하기 시작했다. 청국과 일본인의 전용거주구역인 조계지가 계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설정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조계지가 들어서자 연이어 청국의 조계지도 조성됐다. 청국과 일본은 이 조계지에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치외법권을 누리면서 거주했다. 경계가 된 계단 양편으로 갈라진 청국과 일본, 두 지역에서는 지금도 100년을 훨씬 넘긴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나라의 건축양식인데 누구나 건축양식의 판이한 점을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 대불호텔도 이곳에서 개점, 영업을 시작했고 서양사람들은 온돌방 방바닥이 아니라 침대 위에서 잠을 잔다는 것도 알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상과 천문관측을 했던 인천기상대가 이곳에서 세워졌고 우체국의 효시로 기록되는 우정총국 인천분국도 그 근거지는 인천개항장이었다. 1885년 선교차 이 땅을 밟은 북감리회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1891년에 세운 내리교회(웨슬리예배당)는 감리교회로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중 하나로 한국의 어머니 교회라고도 불린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빌렘 신부가 1889년 제물포성당을 창설한 것으로부터 시작된 답동성당은 벽돌로 만든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한국 성당 중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한 편, 랜디스 박사가 설립한 성 누가병원은 인천 최초의 서양식병원이고 인천부립도서관은 인천에서 최초로 문을 연 공립도서관이다. 인천에 건립된 오랜 은행건물로는 일본 제18은행이 있고 지금 인천중구요식업협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일본 제58은행 인천지점은 1892년 전환국에서 발행했던 근대식 화폐교환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프랑스풍 벽돌조 건축물로 그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자유공원은 1888년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이다. 1897년에 조성된 서울의 탑골공원보다 9년이 앞선다. 각국 공동조계 내에 위치, 처음 각국공원이라 불렸다가 몇 차례의 명칭 변경을 거쳐 1957년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건립된 이후 자유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1905년에 완공, 응봉산을 관통해 인천항과 전동을 연결하는 아치형 돌문 홍예문은 포화 태가 된 일본의 조계지를 만석동까지 확장시켰다. 인천개항장과 차이나타운의 나들목 인천역 역사는 큰 변화가 없는 지난 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인천개항의 그늘, 일본의 야망 인천을 일본인 중심의 도시로 만들다 인천개항은 외세의 진입과 이질적 문물의 유입에 따른 갈등과 지역사회에 새로운 시련을 가져오게 했다. 인천개항에서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키겠다는 일본의 야망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청일전쟁(1894~1895)과 노일전쟁(1904~1905)을 치르면서 조선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 일본은 1899년 제물포와 한성(漢城)을 잇는 도로와 철도를 부설했다. 1906년에는 도로와 철도에 연계되는 항만을 확장, 쌀을 위시한 식량과 공업원료인 목면을 확보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을 위시, 쌀의 증산계획과 수리조합 설립 등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인천은 다른 지역보다 먼저 많은 토지와 인력을 수탈당했다. 대부분의 농민이 몰락하고 몰락한 농민들은 저임금의 노동자로 전락했다. 부녀자와 아동들까지 가계보조적 노동인구로 유입됐다. 열악한 조선인의 노동여건으로 인천지역사회에는 통곡과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일본인 거주지 중심으로 도시시설을 집중 투자해 일본인에게만 유리한 일본인 중심의 도시환경을 조성했다. 일제치하가 된 인천부는 일본인 시가지를 중심으로 부역(府域)이 크게 줄어들고, 부평 등 농어촌지역은 신설된 부천군에 편입시켰다. 부(府)의 하부 행정조직은 모두 일본식의 정(町)과 정목(丁目)으로 바꿨다. 인천부는 완전히 일본인 중심의 도시로 변했고, 전통적인 생활권역과 공동체 질서는 파괴되고 악화됐다. ■한국 속의 작은 중국 차이나타운 경인선과 수인선의 종착역에 내리면 길 건너편으로 차이나타운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패루(牌樓)가 눈에 들어온다. 패루를 지나서 언덕길을 오르면 차이나타운의 중심거리를 만나게 된다. 차이나타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이후 중국인들이 모여 살면서 중국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된 곳이다. 골목골목 붉은 간판과 홍등을 내건 거리를 걷다 보면 중국의 한 곳을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차이나타운 나들목인 패루와 삼국지 벽화거리, 짜장면박물관 등 여러 가지 볼거리를 통해서 중국의 문화와 생활을 엿볼 수 있게 된다. 패루는 붉은 기둥위에 지붕을 얹은 중국식 대문이다. 예부터 중국인들이 동네 입구에 세웠던 마을의 대문으로 귀신을 쫓고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 전통의상인 치파오를 입은 화교 상인들을 만날 수 있는 이 거리에서는 중국식 건축물과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색 간판과 홍등을 볼 수 있는데 대표음식인 짜장면과 공갈빵, 월병 등을 맛보는 건 필수이겠다. 화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이곳에는 중국문인들의 정원양식을 재현한 휴식공간 의선당이 있고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은 130여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중국 후한말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삼국지벽화거리와 진나라로부터 한나라 건국까지의 시간여행, 초한지벽화거리는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우리나라 짜장면의 발상지인 옛 공화춘 식당건물을 리모델링해 건립한 짜장면박물관에서는 짜장면을 즐겨 먹었던 추억들을 반추해 보는 것도 각별한 일이 되겠다. 글=우촌 박재곤 / 사진=중목 최수범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소래포구

소래포구는 조업을 하는 어선이 드나드는 수도권 유일의 재래포구다. 인천의 대표관광지로, 당일 어획한 신선한 수산물이 소래포구어시장에 공급되고 있다. 소래포구어시장은 새우, 꽃게, 홍어, 농어, 광어, 낙지 등 다양한 수산물과 깊은 맛을 내는 젓갈로 유명하다. 수산물의 발효식품인 젓갈의 기원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젓갈이 보편적인 우리의 음식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찾아 볼 수 있다. 900년 전인 고려 인종 1년(1123년)에 발간 된 이 책속에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상용하던 음식이 젓갈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젓갈이 국가의 의례음식, 궁중음식 그리고 일반국민의 상용음식으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음식이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자랑스러운 우리만의 고유음식으로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겠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여러 지방에는 젓갈을 위시, 모든 수산물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시장이 여러 곳 있다. 그 시장들 중에서 450여 점포가 모여 있는 소래포구어시장은 경기도와 인천, 서울 등 수도권 2천만명의 시민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경인선의 완전한 개통으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하루의 나들이 길로 다녀올 수 있는 어시장이다. 아픈 과거를 담고 있는 관광지 소래포구어시장의 젓갈, 관광객들의 발길 끊이지 않아 인천광역시 남동구는 소래포구어시장 뿐만이 아니라 둘러 볼만 한 곳이 참으로 많다. 남동구는 도시와 농촌 그리고 어촌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다채로운 매력의 고장으로, 도심속의 푸른 숲과 해양생태공원 등의 녹지가 50%를 넘는다. 인천대공원과 소래포구 등 생태관광도시의 면모를 갖춘 이곳은 김장철, 김장용 새우젓 구입을 위한 나들이길만이 아니더라도 찾아가 볼만한 충분한 대상들이 산재해 있다. 소래포구는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19~2020 한국인이 꼭 가 봐야 할 한국관광100선에도 선정되어 있다.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11번지, 소래포구는 아픈 과거를 담고 있는 관광지다. 일제치하의 1930년대 후반,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화약의 원료인 양질의 소금을 수탈하기 위해 철도를 건설하면서 소래포구의 발전사가 시작되었다. 해방후, 귀향한 실향민들이 무동력선 한 두 척으로 새우를 잡고 젓갈을 만들어 수인선열차와 경인선열차를 이용, 새벽부터 인천과 수원 그리고 부평과 서울 등지로 새우젓을 이고 지고 나가 팔면서 소래사람들의 삶은 꾸려졌다. 예나 지금이나 소래포구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젓갈이다. 그 중에서도 소래에서 나는 좋은 소금과 오래 축적된 그들만의 노하우가 만들어낸 새우젓은 수도권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 들이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김장철이 되면 양질의 새우젓을 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 시장으로 몰려 든다. 소래역사관, 아련한 추억속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소래포구 나들이길, 소래역사관에서 소래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고맙다. 소래역사관은 급속한 신도시개발과 도시화로 사라져가는 소래의 모든 것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보존하고자 2012년 6월 29일에 개관한 인천광역시 남동구 최초의 공립박물관이다. 소래역사관은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소래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추억이 된 옛 모습들을 생생하게 반추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놓았다. 소래포구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소래염전과 소래갯벌을 떠올리게 한다. 소래역사관에서는 소래어촌의 생활풍습과 어구 등 어촌문화와 생활상을 사진으로 볼 수 있으며, 소래염전의 유래와 소금생산과정등도 알 수 있게 해 놓았다. 소래염전 소개 코너에는 소금창고가 있고 소금밀대 밀어보기와 여러 가지 소금체험도 해 본다. 여기에 수인선 협궤열차가 등장한다. 박물관안 소래역대합실에 들어선다. 소래지명의 유래와 조선의 해양방비책을 알 수 있게 해 놓았다. 수인선의 건설과정을 볼 수 있고 모형으로 만든 협궤열차도 타 본다. 문화해설사의 소래포구의 형성과정과 소래어시장의 현황설명을 듣고 시각과 후각을 즐겁게 자극하는 바다내음과 식욕까지 돋구는 젓갈내음을 맡으며 소래포구어시장을 둘러 본다. 소래포구어시장에 인접한 바닷가에는 2001년 4월2일 인천광역시문화재자료 제19호로 지정된 장도포대지(獐島砲臺址)가 있다. 적의 포격을 방어하고 아군의 사격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세운 포대(진지)로 댕구산 포대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인 1877년(고종 14) 일본이 서해안 개항지를 물색하자 고종은 인천을 개항 후보지로 요구할 것에 대비해 인천 연안에 화도진(花島鎭)을 설치했다. 그 무렵 소래에도 포대를 설치한 것이 장도포대지로 1878년 8월 어영대장 신정희(申正熙)로 하여금 화도진과 연희진을 착공하게 한 뒤 이듬해인 1879년 7월에 준공하였다. 짙은 바다내음 바다와 갯벌을 끼고 걷는 매력의 길 등산(登山)의 개념을 산정상을 오르는 것 만으로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산 정상을 오른다는 등정(登頂)주의였다. 등산인구가 계속 늘어나자 인식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산 정상만이 아니라 오르는 산길, 둘레를 걷는 길도 등산의 개념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바로 등로(登路)주의의 발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1천950m) 정상 오르기 뿐만 아니라 한라산이 바라 보이는 제주도 바닷가를 일주 하는 코스(둘레길)를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의 산 주변들에는 둘레길이 생기게 되었다. 인천에도 둘레길이 있다. 아직은 생소하게 느껴지는 인천둘레길은 총 16개의 코스, 연장길이는 114.6㎞이다. 계양산과 원적산을 비롯해 문학산과 청량산 등 인천을 대표하는 산들은 인천시민들에게 청량제를 공급하는 역할을 해 왔는데, 이제는 산의 정상이 아닌 둘레길로 더 가까이 시민들과 호흡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천은 수많은 공장들의 굴뚝에서 뿌연 회색빛 연기를 뿜어내는 공업도시로만 인식되기 쉽지만, 인천둘레길로 바다와 갯벌, 강물과 나무들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16개의 둘레길 코스 중 인천대공원의 호수공원이 시발점인 6코스 소래길은 장수천과 소래습지생태공원으로 이어진다. 자전거까지 자유롭게 탈 수 있는 이 코스에는 습지원과 수목원, 목재문화체험장과 캠핑장, 애견놀이터까지 있다. 소래습지생태공원은 1970년대까지 전국최대 천일염 생산지, 옛 소래염전의 터다. 소래포구에서 소래철교, 해오름공원과 해넘이다리, 남동유수지와 저어새섬으로 이어지는 7코스 해안길에서는 뻘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이 지역은 1933년 소래염전개발과 1937년 수인선 개통으로 형성된 작은 어촌마을이었다. 1970년대 새우젓을 위시해서 젓갈과 꽃게 등 해산물시장으로 인기를 누려 왔고 1974년 인천항 내항의 완공으로 바다의 시장, 파시(波市)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갯벌을 끼고 걷는 둘레길은 일상에서는 쉽기 만나기 힘든 매우 즐거운 매력의 길이다. 글=우촌 박재곤 / 사진=중목 최수범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 野'나들이] 우리나라 철도 역사

수인선 전 구간 완전 개통 특집우리나라와 경기도의 철도를 고찰하다 1814년 영국의 발명가 조지 스티븐슨에 의해서 증기기관차가 처음으로 제작되었다. 세계 최초의 공공철도는 1825년 9월, 석탄과 화물수송을 목적으로 영국의 스톡톤과 다링톤 사이의 40km 구간에 놓여진 시속 16km의 단선철도였다. 오이도행 수인선 전철레일이 개천과 개천 사이를 잇고 있다. 우리나라의 철도 역사는 1899년 9월18일 노량진~인천의 33.2km 구간, 경인선의 개통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수운이나 우마차, 인력거나 자전거 등의 시대에서 철도의 개통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경인선의 뒤를 이어 1905년 경부선과 1906년 경의선, 1914년에는 호남선이 개통되었다. 1974년 8월15일에는 서울의 지하철1호선인 서울역~청량리 구간이 개통되어 새로운 철도 역사가 열린 것이다. 이후 45년이 훌쩍 흐른 2020년 현재의 서울과 수도권 철도망은 세계에서 가장 긴 철길이 되었고 시설면에서도 세계최상의 수준에 올라 있다. 2004년 4월1일에 개통되어, 한국철도공사가 운영하고 있는 한국고속철도 KTX(Korea Train Express)는 대한민국의 철길을 세계최고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낭만과 추억 그리고 역사 철길은 낭만이고 추억이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생생한 역사였다. 독립운동가 민세(民世) 안재홍(安在弘) 선생은 봄바람에 천리를 가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 글은 1949년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렸고, 지금의 80세 세대는 625 전쟁 때 중학교를 다니며 이 글을 읽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천리 길, 아침 8시 급객3호열차로 서울을 떠난 기차는 소요시간 10시간 30분, 저녁 때가 되어서야 부산에 도착했다. 기차 차창 밖으로 당시의 봄 풍경들이 소상하게 담겨져 있다. 봄바람에 천리를 가다에서 열차가 부산까지 간 10시간 30분 동안, 아침 8시 서울역에서 출발한 KTX 나들이객들은 부산 광안리 바닷가 횟집에서 점심을 먹고 광안대교를 건너 태종대로 이동한다. 부산타워에 올라 부산항을 내려다 보면서 가난하고 초라했던 1억불 수출시대를 도리켜 보고 가난을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회고해 보기도 한다. 용두공원에서 남포동 거리로 내려와서 자갈치시장 등 여러 곳을 둘러 보고는 저녁까지 부산에서 먹고 오후 7시 부산역발 KTX 귀환열차를 탔다. 서울역에는 밤 9시 52분에 도착하는 열차다. ▲축지법이 된 수인선 3단계 구간 완결 한국철도가 달려 온 121년의 역사, 2020년 9월12일, 드디어 수원~인천 복선전철 수인선의 마지막 구간인 수원(수원역)~안산(한양대앞역)노선 19.9km가 수인선에 연결되었다. 이 연결로 인해 52.8km에 달하는 수인선은 완전 개통이 이루어진 한 편, 분당선까지 연결이 되어 인천에서도 수원과 분당선상의 여러 지역들과 원터치로 닿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철길(노선)이름도 분당수인선이다. 수인선 완전개통 이전의 수원~인천 구간은 서울의 구로역을 거쳐야만 했었지만, 오늘은 현대판 축지법로, 수원~인천간 승차시간이 90분에서 55분으로 35분이나 단축이 된 것이다. 수인선의 1단계 오이도~송도 구간(13.1㎞)은 2012년 6월, 2단계 송도~인천 구간(7.3㎞)은 2016년 2월 운행을 시작했다. 이번의 3단계 개통으로 분당수인선은 수원을 위시, 경인지역 여러 도시를 이어주는 명실상부한 도시 연결망이 된 것이다. 새롭게 이어진 이 노선을 이용하면 수많은 도시민들이 시흥시의 오이도와 인천의 소래포구, 월미도, 송도 등 서해바다를 쉽게 찾아갈 수가 있게 되었다. 또한, 수인선을 타면 인천역에서 수원역을 거쳐 서울 청량리까지 분당선(수원역~청량리역)도 원텃치로 연결된다. 역의 갯수는 60여 개, 100km가 넘는 광역도시철도로 거듭난 것이다. 이는 수도권 전철 노선 가운데 1호선(소요산~신창 166.7㎞), 경의중앙선(임진강~지평 128㎞)에 이은 3번째 긴 노선(108.1㎞)이 되었다. 이 노선상의 4호선 오이도역, 1호선 수원역, 3호선 도곡역, 2호선 선릉역, 7호선 강남구청역 등 주요 거점에서는 환승이 되고, 수원역에서는 KTX, 수서역에서는 SRT고속철도 이용도 가능하다. ▲새로 건립된 사리역-야목역-어천역-오목천역-고색역마을풍경과 시민들의 생활패턴을 바꾼다 1937년부터 1995년까지 운행됐던 수인선의 궤도폭은 표준궤도(1.43m)의 절반에 불과했다.그래서 꼬마열차라고 불린 협궤열차였다. 일제가 이 지역의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놓은 철도였다. 1960~70년대에는 수원과 인천을 오가는 학생들의 통학열차이자 농어민들의 생계를 위한 유일한 교통수단이기도 했었다. 이 철도가 폐선된 지 25년만에 수인선의 3단계 개통으로 수인선에는 5개의 새로운 역이 생겼다. 안산시의 사리역과 화성시의 야목역, 어천역은 역사까지도 새로 지었다. 역사적으로 철길이 닿는 곳에는 당연히 마을이 형성되었고 정거장이 들어 선 주변은 바로 그 도시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새로 들어 선 역사 중에서 화성시의 야목역과 어천역에는 새로운 모습들이 눈에 크게 띈다. 80만 인구의 대도시 화성의 여러 곳에서 어천역과 야목역으로 마을버스노선이 연결, 운행중인데 시민들을 위한 발 빠른 조치로 보여졌다. 다른 한 편에는 넓은 주차공간도 만들어 놓았다. 주거지와 역 구간만 승용차를 이용하고 전철이 닿는 곳 부터는 전철을 이용할 수 있는 편리한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수원권의 오목천역의 경우는 역과 주거지가 가까운 탓일까. 자전거 보관대도 새로 마련해 놓았다. 수원으로 가는 도로가 막혀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이도 나들이 오이도역(烏耳島驛)은 시흥시 정왕동에 있는 수인선과 안산선, 시흥기지선의 철도역이다.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과 4호선을 운행하며, 안산선과 시흥기지선의 시종착역이기도 하다. 역명 오이도역은 약 5km 거리에 오이도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2000년 7월28일 안산선인 안산~오이도 복선전철개통과 함께 영업을 시작했고 2012년 6월 30일에는 수인선 오이도~송도간의 복선전철도 개통되었다. 2020년 5월 29일, 수인선 철도거리표 개정에 따른 기점 및 거리가 수정되었는데, 오이도역은 수원기점 31.7km 지점이다. 2020년 9월12일 수인선 수원~오이도 구간의 완전개통은 오이도역을 수원~인천구간, 수인선의 중간역이 되게 했다. 오이도는 전철4호선을 타고 가는 서해바다 나들이코스로 대단한 인기였는데, 수인선 전구간이 완전개통 된 지금, 그 인기가 폭발상태 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이 현지 조개구이집에서 만난 분들의 이야기다. 오이도는 신석기시대를 비롯한 각 시대의 유적이 여러차례 발굴되어 국가사적 441호로 지정된 유적지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오이도를 관광지개념으로 찾고 있다고 한다. 서쪽바다 수평선위,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아름다운 서해낙조와 오이도의 상징 붉은등대 아랫쪽,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루는 조개구이집들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글_우촌 박재곤/사진_중목 최수범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안성 국사봉

산은 다정한 친구, 말없는 스승이며 인자한 의사다. 도내에는 463개의 산이 솟아 있다. 우리나라 전체 4천440개 산의 10%가 되는 숫자다. 경기도의 어느 곳에서나 산은 쉽게 눈에 들어오고 도읍지나 각 고을에는 그 지역을 진호(鎭護)하는 진산(鎭山)이나 이름 높은 명산이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어느 때나 쉽게 오를 수가 있다. 왜? 산을 오르는가? 산을 오르는 사람마다 그 이유는 수없이 많고 다르기도 하다. 그리고 산을 오르는 형태 또한 각양각색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헤일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생계의 수단으로 산을 올라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산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산은 비록 말 없이 턱 버티고 서 있지만, 실은 다정한 친구다. 언제 찾아 가도 반기기만 할 뿐, 산은 사람을 적대시하지 않는다. 온갖 자연과 자연현상들과 쉽게 만나고 쉽게 사귈 수가 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어디 그 뿐이겠는가. 떠가는 흰 구름과 꿈의 이랑을 이루고 있는 구름바다, 가물가물 물결치며 이어지는 산맥 그 모두가 다 다정한 친구다. 묵묵히 산행을 하면서 사색을 해 본다. 산은 우리에게 수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 신앙이 된 고향산사랑, 안성 국사봉의 전도사가 되고파 경기일보 독자임을 밝히는 우렁찬 목소리, 중년으로 느껴진 남자분의 전화를 받았다. 경기일보 아름다운 강산 나들이를 읽고 자신의 고향땅에 솟아 있는 국사봉을 필자와 함께 오르고 싶어졌다는 강한 충동이 전화의 요지라고 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산을 오르겠다는 간절함이 가슴에 와 닿았다. 안성버스터미널에서 만난 두 사람은 통성명을 하고는 곧 바로 삼죽면 국사로, 산행나들목으로 갔다. 객에게 국사봉 산행의 즐거움을 안겨 준 분은 중목 최수범(中木 崔壽範)씨였다. 아호인 중목으로 불러 주시는 것이 가장 편하시겠지요 라고 했다. 산행나들목에 다다르자 중목은 조심스럽게 산을 오르셔야죠고 한다. 당연한 제의를 왜 조심스럽게 말 했을까, 객은 몹시 궁금했다. 상대방의 나이나 건강상태를 배려한 말로 받아졌다. 우리나라에는 국사봉이라는 이름의 산이 여럿이다. 안성 국사봉은 해발 444.5m의 산으로 높은 편은 아니다. 산행길 깔딱고개에서 연약한 젊은 나이의 사람이 힘겨워하는 모습과 산행으로 노년(老年)을 거부하는 숙년(熟年)이 싱싱 달리다 싶이 하는 모습을 쉽게 대조해 보게 된다. 산행은 속도경기가 아닌 만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오르면 된다. 평일의 오후, 우리 두 사람이 세 시간 동안 국사봉을 오르내리는 사이, 우리처럼 산행을 하는 3개 팀을 만났다. 한 팀은 전망대에서는 대왕바위를 보고 고성능의 망원경으로 주변의 경관들을 바로 눈앞에 둔 양, 조망을 하는 것이 매우 즐거운 일정이라고 했다. 특히 국사봉에서 내려다 보는 고삼호수는 절경 중의 절경이라는 극찬이다. 대왕바위는 아담한 바위들이 아름다움을 서로 선이라도 보이는 듯 어깨들을 나누며 뭉쳐져 있다. 중목은 이 지점은 궁예가 기도를 했던 곳이라는 설명을 해 주었다. ■ 국사봉 대왕바위 궁예의 발자취, 궁예가 기도하던 곳 국사봉 정상에서 5시 방향, 바로 아래쪽으로 지도상의 직선거리 400m 지점에 국사암(國師庵)이 있다. 불교사찰의 작은 암자다. 국사암에는 향토유적제42호로 지정된 국사암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다. 궁예미륵으로도 불리는 이 세 석불의 미륵 발목은 땅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 미륵은 안성지역과 궁예의 관계를 잘 말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역사상의 인물평가에는 그 누구나 명암이 있게 마련이고 궁예라고 예외는 아니겠다. 파란만장했던 궁예의 발자취에서 안성의 궁예는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이 석불이 말해 주는 듯하다. 안성지역에서는 유난히 많은 미륵불이 남아 있다. 국사봉은 규모가 작은 산이라 하루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자상한 성품의 중목은 일정을 하루 더 늘려 주었다. 두번째 국사봉 산행은 보개면쪽의 나들목으로 안내했다. 이곳에는 중목의 고향선배이자 스승으로 모시는 정장훈 선생이 고향마을 언덕위에 작은 집을 짓고 살고 계셨다. 젊은 날 경기도청의 도로건설과장을 위시, 도시건설관계 분야에서 오랫도록 일하신 분이라 지역의 지리를 소상하게 설명해 주셨다. 세 사람은 국사암에서 6시방향 정남의 450m 지점에 있는 쌍미륵사를 탐방했다. 이곳에는 쌍미륵불이 서 있다. 국사봉에서 멀지 않는 곳, 안성팔경의 제1경 칠장사에 들려서는 망부전 한 쪽 벽면에 그려진 궁예그림도 보았다. 세 사람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궁예로 모아졌고 궁예가 국사봉에서 기도한 내용이 국태민안(國泰民安)이었을 것임에 의견이 모아졌다. ■ 풍산개 테마마을 늑대와 풍산개의 2세, 안성개의 탄생 국사봉 산행에서는 큰 덤 하나가 있다. 국사로(國師路) 나들목 70번 지방도는 덕산호수를 끼고 돌 수 있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이기도 한데, 지척의 거리 삼죽면 계곡길89에는 매우 이채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풍산개 체험마을을 조성해 놓았다. 북한을 대표하는 명견(名犬) 풍산개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와 기회를 제공해 준다. 어른들 보다 어린이들에게 대단한 인기의 명소가 되어 있는 곳이다. 풍산은 북한 함경남도의 군(郡) 지명으로 풍산개로 세상에 크게 알려져 있다. 1994년 이웃사람인 노신만씨가 기르던 5마리의 풍산개를 귀한 자원이라며 이기운 풍산개마을 대표에게 양도한 것이 지금의 풍산개 테마마을의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이 대표는 이 개들의 혈통관리를 철저하게 하면서 번식을 시켰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풍산개와 늑대의 교배로 2세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개의 이름을 안성개로 명명했고 애견가들의 인기를 모으게 했다는 것이다. 호랑이도 잡을 만큼의 용맹성을 갖었다는 풍산개는 주인에게는 복종심과 충성심이 매우 강한 일편단심의 개로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함경남도 풍산이 한 반도의 북녘이라 풍산개는 추위에 강한 개이기도 한데, 국내만이 아니라 미국의 교포사회로부터의 분양신청도 많다고 한다. 어린이들이 부모와 동반하여 풍산개공원에서 풍산개와 함께 놀 수 있는 프로그램도 짜 놓았다. 안성은 기차와 전철이 닿지 않는 도시다. 그렇다고 교통이 불편한 곳은 아니다. 경기도 최남단에 위치, 경기도청 소재지 수원과 한강 이남의 수도권과는 가까운 곳이고 충남, 충북권과는 인접해 있다. 여러 지역에서 안성으로 가는 버스편이 많고 특히 국사봉 삼죽면 자락에 있는 동아방송예술대학교로 가는 여러 곳의 버스노선이 있다. 서울(남부, 동서울, 서초), 수원, 성남, 안양, 부천, 인천, 안산, 의정부의 노선버스편을 이용하면 국사봉의 국사로산행나들목에는 직행으로 닿을 수 있다. 글ㆍ사진=우촌 박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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