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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18.화성 융건릉

■ 당쟁에 희생된 영민한 세자 당쟁에 휘둘린 혼군 영조 역사는 승자의 역사, 가해자의 역사라 한다. 조선 중기 이래 한국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교육 문화가 서인-노론으로 이어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융건릉의 주인공은, 가해자 영조와 노론 일당이 아니라 피해자 사도세자와 유족 모자(母子)다. 사도세자는 차남이지만 맏아들 효장세자가 일찍 죽어 실질적 장남이다. 영빈 이씨가 후궁으로는 환갑인 39살에 얻은 늦둥이였다. 장남 겸 외아들에 영특하고 생모는 임금의 총애를 받으니, 세자가 보위를 잇는 것은 떼놓은 당상 격이었다. 연로한 부왕 영조도 경험을 쌓아주려고 대리청정까지 맡겼다. 세자는 노론의 국정 농단이 큰 폐단이라 생각하고, 소외된 남인소론북인을 자주 불렀다. 위기를 감지한 노론과 영조계비 정순왕후 김씨는 세자를 거세하기로 하고, 후궁, 옹주들과 힘을 모았다. 사실상 역모였다. 세자도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몰래 평양에 놀러 가는 등 빌미를 제공했다. 일찍 죽은 화순(38세 사망, 남편 김한빈, 이하 같음) 화협(19세, 신광수) 화길(18세, 구민화) 옹주는 노론 집안에 시집가긴 했으나,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 화완(70세, 정치달), 화령(68세, 심능건)이 문 숙의와 함께 세자 참소의 돌격대였다. 문 숙의는 영조의 첫 며느리 현빈 조씨의 시비(侍婢) 출신으로, 웃전의 빈소에서 영조를 유혹해 승은을 입은 요부다. 세자 장인 홍봉한, 영조 장인 김한구, 생모 영빈 모두 세자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았다. 영조 38년 5월 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고 7월 양주 배봉산(拜峯山) 아래 수은묘(垂恩墓)에 묻혔다. 14년 뒤 즉위한 정조는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존호도 사도(思悼)에서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다시 13년 뒤 화성으로 이장하고 현륭원으로 높였다. 정조는 복수와 예우를 고심하면서,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해 외조부 홍봉한을 사면하는 갈등을 겪었다. 고종 때인 1899년 세자는 드디어 장종(莊宗)을 거쳐 장조(莊祖)로 격상됐다. 꼬박 137년이었다. 사도세자 부부의 합장묘인 융릉의 봉분은 12지신상 대신 모란과 연꽃이 양각된 12면 병풍석이 감싸고 있다. 난간석 없이 3면 곡장(曲墻)만 둘렀다. 석물로 망주석, 석양(石羊)석호(石虎)석마(石馬), 문무인석 각 1쌍, 팔각 장명등과 상석 각 1좌와 능 언덕 아래 정자각비각홍살문재실은 여느 왕릉과 같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參道) 좌우에 박석(薄石)이 이채롭고, 천장 이듬해 조성한 곤신방(坤申方) 즉 남서향의 연지가 눈길을 끈다. ■ 학문과 기록의 중흥조(中興祖) 명군(名君) 정조의 등장 정조는 세종과 함께 조선조를 대표하는 명군이다. 학문을 좋아하고 학자를 예우하며, 현실에 적용하니, 세종 이후 위축, 후퇴를 거듭하던 조선 사회가 부흥기를 맞았다. 우선 아버지 죽음에 개입하고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일당을 제거하고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우문지치(右文之治) 작성지화(作成之化)의 명분을 내걸고 신진 기예를 발굴하고 인재를 모아 친위세력을 확보했다. 당쟁을 혐오하면서 탕평책을 썼으니, 남인 실학파와 노론 서출 북학파를 두루 중용해 문운(文運)을 진작했다. 정치문제화한 서학(西學)에 대해서는 유연하게 대처했다. 변화하는 조선후기 사회에 맞추어 문물제도를 재정비해,『속오례의』『증보동국문헌비고』『국조보감』『대전통편』등을 냈고, 형정(刑政) 개편,『서류소통절목』공포,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 폐지 등 개혁 정책을 폈다. 개유와(皆有窩) 도서실을 마련해 『사고전서(四庫全書)』등 외국 서적을 수입하고, 중인(中人) 이하 위항문학(委巷文學)을 지원해 문화의 저변을 확대했다. 신설한 규장각(奎章閣)이 문화정치 추진본부였다. 정조의 또 다른 업적은 기록이다. 제도를 정비해도 왜, 어떻게,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기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서원, 수원 화성, 남한산성,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모두 기록 덕분이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자신의 언행과 학문을『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로 작성했다. 즉위 7년부터는 기록 방식과 담당자가 변해 공식 국정 일기로 승격되고, 정조 생전에 670권이 작성되는 등 1760년부터 1910년까지 151년간 총 2천329책에 이르는 방대한『일성록』이 탄생했다.『일성록』은 군신이 모두 정무에 활용했는데, 편찬방식과 체재, 표현 방식까지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정해져 있었다. 전통시대에 세계 어디에도 이토록 중립적객관적인 기록은 별로 없다. 때문에 일성록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되고, 2011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임금이 기록을 중시하니, 규장각은『내각일력(內閣日曆)』1천245책을 남겼고, 비변사는 『주모유집(籌謀類輯)』을 편찬했다. 정조는 호학군주(好學君主) 세종도 없는 문집을 남겼으니, 180권 100책 10갑의『홍재전서(弘齋全書)』다. 모후 혜경궁 홍씨, 헌경왕후(獻敬王后)도 글쓰기에 일가견 있었다.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고, 그 죽음에 친정아버지가 책임없음을 해명한 회고록《한중록》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탄탄한 구성과 박진감 있는 전개, 소설 이상의 생생한 묘사와 아름다운 문체로 고전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관찰력과 필치로 묘사되고 표현된 왕실 법도와 궁중 어법은 역사와 국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헌경왕후의 의도와 목적은 뛰어난 작품성 덕분에 확실히 초과 달성되었다. 정조가 아버지 능을 모셔오며 조성한 원찰 용주사(龍珠寺)도 같이 들르면 좋을 것이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17.충남 보령 충청수영성

수영은 무엇이며, 굴강은 무엇인가? 예나 지금이나 열악한 수군 지위 왜구들의 침탈이 잦은 경상도전라도는 좌우수영으로 2개씩, 충청도는 오천 수영성 하나로 함대사령부가 전국에 5개였다. 수영의 최고 지휘관은 정3품 수군절도사 또는 약칭 수사였는데, 중앙 조정으로 치면 참의, 오늘날의 차관보급이다. 각 수영에는 한어와 왜어 통역을 각 1인씩 뒀다. 수영이 있던 곳은 아직도 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 있으니, 부산 수영만, 전남 해남 우수영 등이 대표적이다. 또 진해 안골포, 여수 등의 굴강동(굴강로) 역시 수영 시설을 지칭한다. 굴강(掘江)은 선박의 정박과 수리보수, 물자 하역 등을 위한 군사 항만시설로, 방파제와 선착장을 겸했다. 그러나 국어사전에는 [명사] 1. 개골창 물이 흘러나가도록 길게 판 내. 2. 성 주위에 둘러 판 못이라 해 역사학계 해석과는 거리가 있다. 국어사전의 용어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전통시대 수군은 지상군보다 열악한 지위였다. 최고위 장교의 TO를 비교해 보자. 지상군이나 수군이나 최고 계급은 종2품, 중앙조정의 참판, 오늘날의 차관급이다. 육군은 종2품인 전업 병마절도사가 8명이었다. 수군은 종2품이 삼도수군통제사 단 1명인데, 임진왜란 이듬해 이순신 장군을 임명한 것이 최초다. 이전에는 정3품 수군절도사(약칭 수사)가 최고위 장교로 경상전라에 2명씩, 충청 1명이었다. 그러나 국난을 극복하는 데는 수군의 활약이 훨씬 컸다. 서해안을 지킨 충청수영성 전성기 수군 8천400명 주둔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성은 해발 400m 야산에 돌로 쌓은 둘레 1천650m의 성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높이 11척이라 돼 있는데,『호서읍지』는 15척이라 기록했으니, 후대에 성벽이 보강된 듯하다. 갑오경장으로 폐쇄될 때까지 서해를 방어하는 성의 역할을 해왔다. 성벽 대부분은 내탁법 즉 안에서 쌓았으나, 서벽 일부는 협축법 즉 양쪽 쌓기다. 동서남북 소서 5곳의 성문에 모두 옹성과 문루가 있었으나 모두 없어지고, 홍예문과 부근 100m의 석축만 남았다. 대추나무가 많아 조성(棗城)이라 불리는데, 40㎞ 남짓 떨어진 해미읍성이 탱자나무가 많아 지성(枳城)이라 불리는 것과 대비된다. 해미읍성에는 병마절도사가 주둔해 내포 지역의 방어를 지휘했다. 원래 수영성내에는 영보정(永保亭), 관덕루, 시변루, 능허각 등 주변 바다와 섬을 관측하고 주변 관아들과 통신하기 위한 누정이 여럿 있었다. 전성기에는 병선 142척, 수군 8천400명이 주둔했고, 민가가 700호 이상이나 됐다. 객사 82칸, 벽대청 9칸, 상서헌 9칸, 내외 동헌과 관청고(官廳庫) 각 10칸 등 청사가 38채나 됐으나 지금은 장교청, 진휼청 등만 남았다. 장교청은 장교들이 행정을 처리하고 전략을 논의하던 무고주 5량가,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동측 1칸은 온돌방, 서측 3칸은 우물마루 대청으로 꾸며 작전회의와 지휘에 편리하다. 종량 위에 화려한 파련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쳤다. 진휼청(賑恤廳)은 춘궁기에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을 꿔주고 가을에 거둬들이는 곳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2칸에 방을 두고 전퇴를 달고 좌측 1칸은 대청, 우측 2칸은 큰방을 꾸몄다. 성 한 구석,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 참전했던 명나라 수군장인 계금장군을 기린 청덕비가 있다. 근처 앞바다, 만 입구에는 뾰족하게 깎은 나무말뚝을 물에 잠기게 바닥에 박은 다음 쇠사슬로 연결한 수중 목책(水中木柵)을 둬 적의 접근은 차단했을 것이나, 오늘날 그 흔적은 찾지 못한다. 수중목책은 제포, 영등포, 옥포, 지세포, 조라포, 당포 등 수군의 요충에 두루 설치됐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도 수중목책을 응용한 수중연환 덕분이다. 이탈리아의 수상 도시 베네치아에서는 물속에 나무 말뚝을 박아 세워 수로를 표시한다. 시인들 영보정에 올라 천혜의 미항(美港) 오천항 오천항은 아름답고, 도미부인 솔바람길은 애달프다. 2.5㎞ 떨어진 수영 병사들의 옛 훈련지는 가슴 아리다. 병인박해 때 많은 천주교 신자가 순교해 갈매못성지가 되고, 순교자 5명이 성인으로 시성(諡聖) 됐다. 순교 성지는 대부분 경관이 아름다워 더 처연한데, 갈매못 성지로 접어드는 바닷가 도로는 거의 환상이다. 영보정에 앉아 바라보는 천수만의 일몰은 대한 8경에 꼽을 만하다. 많은 문인이 절경을 감탄하는 시를 남겼으니 이곳 경승은 검증됐다. 다산도 밤늦도록 노닐면서 영보정에서 놀며[영보정연유기(永保亭宴游記)]를 정자에 걸고, 영보정에 올라[등영보정(登永保亭)]와 영보정 앞에서 달밤 뱃놀이하며[정전범월(亭前汎月)] 시 두 수도 남겼다. 영후정자(營後亭子)를 남긴 읍취헌 박은은 17살에 진사, 18살에 과거에 급제한 알려지지 않은 천재다. 20살에 간신 유자광을 탄핵했다가 파직되고 26살에 사형당하니, 하필 연산군 시절이라, 천재도 때를 잘못 만나니 별도리 없구나. 영후정자(營後亭子) 지여박박장비익 누사요요불계봉 북망운산욕하극 남래혜대차위웅 地如拍拍將飛翼 樓似搖搖不繫 北望雲山欲何極 南來襟帶此爲雄 땅은 새가 날개 치며 날아오르는 듯하고 누각은 흔들흔들 매인데 없는 배 같아라 북을 바라보매 운산은 어디가 끝인가 남으로 띠처럼 두른 산세 여기가 제일일세.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16.여주 세종릉과 효종릉

■ 천하제일 명당 여주 세종릉 경기도 여주의 두 영릉(발음은 모두 영릉이나, 한자 표기는 英陵과 寧陵으로 다르다. 혼돈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는 세종릉과 효종릉으로 쓴다.)은 모두 명당자리에 있다. 특히 세종릉은 천하 명당으로 꼽힌다. 풍수가들은 말한다. 뒤에서 생기지맥(生氣地脈)이 흘러내려 오고, 앞에서 주작상무(朱雀翔舞)라 상상 속의 붉은 새 주작이 춤추며 날아오른다. 주위 산들이 봉황처럼 품어주니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이며 멀리 왼편 황학산과 연하산, 오른편 북성산이 서로 겹쳐 노니니 양봉상락형(兩鳳相樂形)이라 한다. 정면의 가까운 뭇산이 굽히고 순종하는 형세니 군신조회격(群臣朝會格)이며, 먼 산은 높고 날카로우니 창검이 옹위하는 형세 즉 기치창검형(旗幟槍劍形)이라, 듣기 좋은 말은 모두 가져다 붙인다. 덕분에 조선 국운이 100년은 더 연장됐다까지 말한다. 모르는 사람도 봉분 앞에 서면 가슴이 확 트이고, 몸과 마음이 청신해진다. 헌법 교과서를 보면 국가의 조건으로 영토, 국민, 정부를 든다. 다음으로, 독립국은 독자적인 화폐와 언어와 문자가 있어야 한다. 세종대왕은 사군육진을 개척해 오늘의 대한민국 영토를 확정하고 조선통보를 주조했으며 한글을 창제해 우리가 히라카나를 욀 필요 없게 하신 분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6대 기본 조건 중 두 가지가 세종 몫, 그밖에 업적은 나열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좋은 자리 누워 좋은 물 맑은 공기 마시며 사후를 편하게 보내실 자격이 있다. 세종릉은 원래 지금의 서울 서초구 헌인릉 자리에 있었는데, 예종 때 물이 든다는 논란이 있어 옮긴 것이다. 세종의 장남 문종이 일찍 죽고 차남 수양대군이 반란을 일으켜 동생 둘과 장손 단종을 죽였다. 수양대군의 장남은 19살에 죽으니 차남 예종은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주 명당에 옮기고도 예종은 즉위 1년 만에 19살로 죽고, 예종의 원자도 3살에 죽는다. 증손부인 성종비 윤씨가 폐비가 되고, 고손인 연산군이 쫓겨나는 것을 보면 제아무리 명당이라도 한계가 있다. 후손이 덕업을 쌓지 못한다면. ■ 혼군(昏君) 인조의 유산 효종릉과 좌절한 북벌 효종(孝宗)은 10년 재위 기간이 모자랐다. 나라와 백성의 원수를 갚겠다고 북벌을 준비했고 국고를 채우고자 대동법을 실시하고 산업 진흥을 위해 상평통보를 발행하는 등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변죽만 울렸을 뿐, 명분론에 치우친 노론으로는 국력을 배양할 수 없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혼군(昏君) 인조는 죽으면서도 화근을 남겼다. 소현세자 부부와 어린 자녀까지 죽이는 대학살극 음모의 주역 소용 조씨를 살려주라고 유언한 것이다. 조 씨가 살려준 은혜를 모르고 김자점과 역모를 꾀하니 효종은 결국 손에 피를 묻힐 수밖에 없었다. 즉위 10년 만에 붕어하니 만사휴의(萬事休矣)였다. 살아 보람이 없었던 효종은 죽어 여주에 옮겨 묻히고 나서는 부러움을 살 만하다. 효종릉은 원래 동구릉의 건원릉(태조릉) 옆에 있던 것을 현종 때 이 자리로 옮겼다. 부부가 합장도 아니고 나란히도 아니고 일렬종대의 특이한 동원이릉이다. 심양에 같이 끌려가 고생을 같이했던 탓에 의좋은 왕비 인선왕후 장씨가 바로 눈앞에 묻혔다. 또 함께 북벌을 준비한 훈련대장 이완의 묘, 효종을 보필한 홍명하, 원두표의 묘가 모두 여주에 있어 죽어서도 문무 조신들의 보필을 받는다. ■ 전제군주 시대, 산릉 역사(役事)의 민폐 계몽군주? 역시 전제군주일 뿐! 세종릉, 효종릉 천장(遷葬)에는 왕조 시대, 군주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얽혀 있다. 현재의 명당 능자리가 모두 남의 조상묘를 파헤치고 밀고 들어간 만행의 결과기 때문이다. 예종은 광주 이씨 묘와 한산 이씨 묘를 파내고 할아버지 세종릉을 그 자리에 들였다. 묻혀 있던 이에게는 길지를 내준다며, 연을 띄우고 줄을 끊는 쇼도 했다. 묘 자리 부근에 사패지를 내리고 여흥을 여주목(驪州牧)으로 승격해 민심을 달랬다. 숙종도 진주 유씨 묘를 파내 정터(원래 능터로 잡아둔 곳)으로 보내고 거기에 할아버지 효종릉을 옮겨 모셨다. 그것만이 아니다. 능의 기맥을 보존한다며 민가 수백 채에 관아니 성곽이니 모두 허물었으니, 민폐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만행을 세종이나 효종이 살아서 저지른 것은 아니다. 후세 왕들의 소행이지만, 만행이 반복된 것은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만행은 또 얼마나 많을까. 왕조시대의 이런 만행을 알지 못하는 일부 평론가는 계몽군주라 아첨한다. 정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나치 히틀러, 이라크의 후세인, 리비아의 카다피조차도 18세기 유럽 기준으로는 훌륭한 계몽 군주였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아직도 한일합병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숭앙한다. 그러나 계몽이건 뭐건 아무리 그럴싸한 수식어를 붙여 봐야 21세기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전제군주며 독재자요, 침략주의자며 반인륜 범죄자일 뿐이다. 지하에 누워계신 세종도 이런 논쟁 들으시면 마음 불편하실 것이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조선 왕조 태실

우리 조상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태(胎)를 소중히 여겼다. 태아에게 생명력을 부여한 것으로 여겨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 왕실은 왕자왕녀의 태가 국운(國運)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엄격하게 관리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엄격한 의식과 절차에 따라 태를 깨끗이 씻은 후 백자 항아리에 봉안하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싸고 붉은 끈으로 밀봉한다. 이 항아리를 다시 큰 백자 항아리에 담는다. 전국에서 널리 길지(吉地)를 찾으면, 궁에서 태 봉출식을 거행하고 안태사(安胎使)가 출발했다. 안태사는 길일(吉日)을 골라 현지 지방관의 지원을 받아 태항아리를 묻고, 태주의 무병장수와 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했다. 묻는 것도 법도(法度)가 있었다. 먼저 지대석(地垈石)으로 아래와 주변을 받쳐 일종의 작은 석실(石室)을 만들고 태항아리와 태주의 이름과 생년월일 사주를 음각한 지석(誌石)을 넣는다. 다음 개석(蓋石, 뚜껑돌)과 토석(土石, 돌과 흙)으로 덮은 뒤 기단석(基壇石)을 얹는다. 기단석부터가 지표면 위로 나오는데, 이후에도 앙련(仰蓮), 중동석(中童石), 개첨석(蓋石), 복련(覆蓮), 보주(寶珠)가 차례로 얹혀 태실의 높이는 140㎝쯤 된다. 앙련은 위를 바라보는 연꽃 문양이며 중동석은 동자(童子) 모양의 받침대, 개첨석은 처마 달린 뚜껑, 복련은 뒤집힌 연꽃 문양 그리고 보주는 구슬 모양이다. ■ 태실의 저의(底意)와 민폐(民弊) 조선 왕실의 전국 명당(明堂) 독점 왕릉은 도성에서 백 리 이내에 둔다는 원칙 때문에 한양 주변을 벗어날 수가 없다. 태실은 다르다. 왕이 조정 중신을 끌고 다니며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으니 멀어도 된다. 그래서 태실은 전국 방방곡곡 명산의 꼭대기 같은 명당을 입도선매하고 민간의 묘소를 강제 이장하고 들어가기도 했다. 명분은 생명 존중이지만 권력을 넘볼 명당자리를 왕실이 독점하려는 얄팍한 발상이 근저(根底)에 깔렸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만 잡으면, 정치를 잘해서 국본을 든든히 할 생각은 않고 항상 잔머리를 굴린다. 왕자가 왕위에 오르면 위엄을 더하기 위해 태실에 석물을 더해 장식하는 가봉(加奉)을 하고 가봉비를 세웠다. 앞에는 누구의 태인지를 알리는 비석을 세우고 금표(禁標)를 둘렀다. 금표에서 일정한 거리 안에서는 일체의 개간, 벌목, 방목 행위를 금했다. 그 거리는 왕은 300보, 대군은 200보 일반 왕자와 공주는 100보인데, 여기서 1보는 2걸음이며 실제 보폭보다 훨씬 넓은 180cm를 적용했다. 현재 육군에서 행군할 때 1걸음을 80cm 정도로 적용하는데 평균 신장이 훨씬 작았던 조선 때 1보는 비현실적으로 컸고, 금령을 어기면 엄벌에 처했다. 태실은 산에 둘러싸인 산에 두는 것이 보통이라 석물을 산 위로 옮기는 것도 큰일이었다. ■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 훼손, 바꿔치기, 약탈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 왕실의 국운을 끊고 백자로 된 태항아리와 부장품을 도굴하려고, 조선 팔도의 길지에 봉안된 태실을 철저히 훼손했다. 태실을 한데 모아 잘 관리하려 한다는 구실을 붙였다. 전국 곳곳의 태실 54기를 함부로 파헤쳐 태항아리를 몽땅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구석으로 옮겼다. 옮기면서 태함을 바꿔치기하고 태를 훼손하고 부장품도 약탈했다. 200평 남짓한 좁은 터에 시멘트 대좌에 똑같은 비석에 일본 연호 쇼와(昭和)를 새기고 일본식으로 담장과 출입문을 붙였다. 총독부 촉탁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의 하는 일이 이런 것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태실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제대로 보존하지도 않았다. 조선 왕실의 태실이 훼손당한 것은, 조선 역대 국왕이 정치를 잘못한 책임이 크니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태실 문화에는 국운과 명당을 독점하려는 얄팍한 사고가 깔렸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태실을 보호할 이유가 있는가. 그렇다, 보호해야 한다. 왜냐고? 어떻게 말해도 태실이 우리 문화의 결과물이며 우리 문화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 태(胎)의 생명력을 일찍이 알아보다 최근 들어 태반 주사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효능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올 정도로 태반의 생명력이 입증되고 있다. 일부 태반 주사는 코로나바이러스 특효약으로 알려진 렘데시비르와 거의 대등한 효과가 확인됐다고 한다. 왕실의 태실과는 별도로 민간에서는 탯줄을 소중히 보관하다가 아이들 비상약으로 쓰기도 했다 한다. 우리 조상이 태반의 의학적 효능을 미리 알고 태반과 탯줄을 이렇게 소중히 간직하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정말 대단한 의학적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생명존중의 문화, 세계 유일의 태실 문화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자.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홍유릉, 대한제국 ‘황제’의 능

망국 황제의 부인 엄비 조선의 미래 싹틔우다 홍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두 왕, 고종 부부와 순종과 두 부인의 무덤인데, 다른 조선 왕릉과는 사뭇 다르다. 진입로 양편에 석물들이 늘어서 있고, 제례를 올리는 건물이 丁자각이 아니라 사각형 정침이며 맞배지붕이 아니라 팔작지붕을 얹었다. 석물도 왕릉에 없는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등이 추가되고 양은 빠진다. 대부분의 조선의 왕과 왕비들은 중국의 번왕 자격으로 살다 죽었으나, 고종과 순종은 명색 대한제국의 황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국의 황제들이다 보니 황릉이지만,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 많다. 우선, 1910년 한일 강제합병 때 물러나 1926년 이왕(李王)으로 사망한 순종 이척(李拓)이 묻힌 유릉(裕陵), 동봉삼실(同峰三室) 합장의 극히 이례적인 형식이다. 다음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홍릉(洪陵). 대부분 사람들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부근에 홍릉이 있다고 생각한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군에 암살당한 명성황후는 원래 청량리 근처 홍릉에 묻혔다. 그러나 1911년 고종이 승하하자 청량리의 명성황후 유해를 옮겨 남양주 금곡동에 함께 묻었다. 그래서 오늘날 청량리 홍릉에는 홍릉이 없고, 홍릉은 남양주 금곡에만 있다. ■ 홍릉 없는 청량리 홍릉 엄비의 영휘원만 남아 청량리 옛 홍릉 자리는 완전히 비어 있는가? 그건 아니다. 고종의 총애를 받던 순헌황귀비 세칭 엄비(嚴妃)가 거기 묻혀 있으니 이름하여 영휘원(永徽園)이다.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가 명성황후에게 들켜 궁 밖으로 쫓겨났던 엄비는, 명성황후 사후 다시 고종의 부름을 받아, 43살의 늦은 나이에 영친왕을 낳고 사실상 중궁(中宮) 노릇을 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외교와 사회개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영향력을 피하기 위한 아관파천 즉 고종의 러시아 대사관 피난을 주도하고, 진명, 명신(후의 숙명) 학교를 설립하고 양정학교를 지원해 서양식 교육 보급에 한몫 크게 했다. 여학생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엄비는 해마다 학생들에게 무명 1필과 6백 냥씩을 내려 격려했다고 한다. 그러던 엄비는 고종 승하 반년 만에 급서(急逝)해, 자신을 박대하던 명성황후가 묻혔던 자리, 즉 옛 홍릉으로 가게 된다.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즉 영친왕과 그 비의 무덤 영원(英園)은 홍릉에서 돌아 나와야 5분 거리에 있다. 고종 입장에서 영친왕은 아관파천 직후 총애하는 엄비에게서 얻은 늦둥이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영친왕은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되지만, 망국의 왕자로 적국 일본 육사의 교수부장으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고 이왕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3년 남편과 함께 귀국한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마사코)는 겸손한 삶으로 한국민의 존경을 받다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1989년 세상을 떠났다. 영원 바로 옆은 영친왕의 아들 황세손 이구의 묘 회인원(懷仁園)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귀국했다가 2005년 일본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덕혜옹주 묘와 의친왕 묘가 잇따라 나타난다. 이런 의문이 든다. 황태자 무덤을 원으로 친왕의 무덤을 묘로 부르는 것이 법도에 맞는가? 황태자는 번왕이나 친왕보다 서열이 앞서니 황태자 능이라 해야 옳다. 또 친왕도 왕이니 능이라 불러야 한다. 황태자니 친왕이니 하는 호칭이 조선에 없던 제도라 익숙지 않다. 고종이 칭제건원하면서 생긴 짧은 새로운 고민이다. ■ 위기의 21세기 대한민국 한 말의 교훈 되새겨야 한 말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수하고, 서원을 철폐하며, 무기를 개발하고 화약 재고를 늘리는 등 나름대로 개혁 정책을 폈다. 당시 3천만 발에 이르는 무기 재고로도 나라를 구하지는 못했다. 지금 한반도 주변 상황은 구한말과 별로 다르지 않다. 북한은 핵개발을 가속화하고, 미국은 공사 구분 못 하는 부도덕한 지도자가 재선을 노린다. 장기집권이 계속되던 일본과 러시아도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이 점점 수위를 높여가면서 국제 정치의 변동성이 너무 커졌는데,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덮쳤다. 고종도 명성황후도, 순종도 영친왕도 모두 떠났지만, 엄비의 유산은 100년 이상 지난 오늘날도 엄연히 살아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배워야 한다. 깨우치지 못하면 나라를 잃는다. 두보의 시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춘망(春望) 國破山河在,城春草木深。 感時花淚,恨別鳥驚心。 나라는 깨졌으나 산하는 여전하고, 성에 나린 봄에 초목 무성하구나. 꽃만 봐도 눈물이 흐르고, 이별의 한 때문에 새소리에도 놀라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안성 죽주산성

안성(安城), 위태롭지 않고 편안하며 무탈한 성이란 뜻이다. 안성에는 극적루(克敵樓)라는 특이한 이름의 누각이 있다. 조선의 개국공신 권근(權近)은 《신증동국여지승람》10권에 실린 극적루 기문(記文)에서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에 송도가 함락되고 임금이 다른 곳으로 옮겨갈 때, 풍문을 듣고 근처 30여 고을이 의기를 분발하여, 항복을 위장해 잔치를 벌인 뒤 취한 적군을 섬멸하니, 적의 위세는 끊기고 더 이상 남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이에 국가에 공을 세운 사실을 적고 누각의 현판도 극적루로 지었다고 썼다. 안성의 옛이름 죽주(竹州)는 본래 백제 개차산(皆次山郡)이었지만 통일 신라기 경덕왕이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쳐 한주(漢州) 아래 두었다고 세종실록지리지는 썼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고구려 내혜홀(奈兮忽)이란 표현이 보이고, 최근 연구 결과 진흥왕 시절 신라 영토로 편입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고려 태조 때 죽주라 부르기 시작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죽주 대부분이 안성군 죽일면(竹一面), 죽이면(竹二面)으로 나뉜다. 그러나 발음이 좋지 않아 일죽, 이죽이 되고, 후에는 일죽, 죽산으로 다시 바뀌었다. (죽일, 죽이 몹시 거북하다. 이죽도 어감이 나쁘다.) 신라 말 궁예(弓裔)가 처음 이곳의 기훤(箕萱)에게 귀의했으나 푸대접받자, 5년 후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梁吉)에게 갔다는 기록도 있다. 난공불락의 요충, 죽주산성 『선조실록』에 사간(司諫) 이덕형(오성과 한음의 한음 대감)은 죽산 취봉(鷲峰)은 형세가 매우 든든하여 한 명의 군사로도 길을 막을 수 있는 험한 곳이라 상소를 올렸다고 나온다. 그 말대로 죽주산성 포루에 서면 안성벌과 이천장호원이 한눈에 잡힌다. 죽산은 영남대로가 조령과 추풍령 방면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으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조까지 전략적 요충지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삼남대로(三南大路)를 잇는 중요한 교통 요지였다. 오늘날에도 평택항에서 충주를 거쳐 태백, 동해항을 잇는 주요 산업도로(38번 국도)와 한반도의 대동맥 경부선이 만난다. 죽주산성은 삼국시대 신라가 북진하던 가장 이른 시기, 대중국 교역항인 당항진(남양만)으로 진출하는 거점으로 처음 축조했다. 전체 둘레 1천688m 원래 높이 68m(내성과 복원 성벽은 2.5m). 신라(중성), 고려(외성), 조선조(내성) 세 시대에 걸친 삼중 구조로, 대부분 3차례 이상의 수축한 흔적이 보인다. 따라서 시대별 성벽 축조 방법과 활용 변화를 잘 살펴볼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영남의 신라산성이 한강 유역으로 북상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띤다. 고려와 조선의 성벽은 신라 체성벽 상면에 축조되었는데, 대부분 무너지고 일부에 흔적만 보인다. 체성벽은 성벽의 높이와 너비가 거의 1대 1 비율로 구조적으로 탄탄하다. 몽골군 격퇴한 송문주 장군과 물! 성 안에서 신라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계단식 저수시설 8기가 출토되어 복원되었다. 물의 낙차를 고려해 계단식 저수시설을 두되 나름 조경도 꾸미고 물을 활용했다. 수조터에서 다양한 시대의 기와와 토기, 무기, 공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프랑스 남부 골 지방에 가면, 계단식 물레방아를 8단으로 놓고 하루 4.5톤의 밀을 빻은 고대 로마 시대 제분공장 유적이 있는데, 죽주산성에도 마찬가지로 8단의 크고 작은 계단식 저수조를 두었다. 하남 이성산성은 저수지가 큼지막하게 2군데 있었는데, 여기는 8단 저수조니 사용자 계급이나 용도에 따라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벽을 따라 외항(해자)을 두른 것도 산성에는 흔치 않은 예다. 그만큼 죽주산성에는 물이 흔했던 모양이다. 고려 말 몽골군의 3차 침입 때는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 송문주 장군이 주민들과 함께 파죽지세로 공격해오던 몽골군을 물리치고 전공을 세웠다. 5년 전 귀주성(龜州城)에서 동향 죽주 출신의 서북면 방어사 박서 장군을 모시고 명장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의 공격을 물리친 군공을 인정받아 낭장(將)에 초수(超授)되고, 1236년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이 되었다. 귀주성의 경험으로 몽고군의 작전과 장비를 잘 알아 적절히 대응하였으므로, 성안의 사람들이 신명(神明)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물이 넉넉하니 화공(火攻)도 포격(砲擊)도 소용없었을 것이고, 물이 넉넉하니 당대 세계 최강 몽골군의 포위 공격에도 보름이나 버텼을 것이다. 6차에 걸친 몽골 침입에서 고려가 승리한 대표적 전투의 하나다. 송문주 장군은 이 공으로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이 되고, 산성 안에 장군의 전공영각과 재실이 모셔졌다. 그러나 구국의 영웅이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기록도 없으니 서글프고 한심하다. 죽주산성은 360년 뒤 임진왜란 때도 격전지가 된다. 왜군에게 내준 죽주산성을 조방장(助防將) 황진 장군이 기습으로 탈환하자 왜군은 더 이상 용인과 이천을 넘보지 못했다. 그만치 죽주산성은 교통 요지요, 군사전략적 요충이었다. 안성에 내려간 김에 죽산 칠현산에 바짝 등 기대고 안긴 칠장사를 들러봐도 후회하지는 않을 듯하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강화 초지돈대

한반도 최초 해양국가 고려 왕건, 서해 제해권을 장악하다 강화가 역사책에 본격 등장하는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즉위 전 후고구려 궁예 아래에서 경력을 쌓을 때다. 청년 장군 왕건은 도선대사의 가르침에 따라 수군을 이끌고 혈구진(穴口鎭) 즉 강화를 공격해 점령한다. 이로써 왕건은 근거지를 예성강 하구의 송악 즉 개성에서 삼한의 배꼽인 한강과 임진강 입구까지 확장하고 마침내 한반도의 주인이 된다. 왕건은 강화의 전략적 가치를 제대로 인식한 최초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후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를 점령해 견훤의 후백제를 배후에서 위협하고 후백제와 중국의 외교망을 차단한다. 그뿐만 아니라 왕건은 나주 오씨와 결혼 동맹을 맺고 그 소생인 왕자 무가 2대 혜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말하자면 왕건은 개경에서 시작해 강화, 김포를 거쳐 서남 해안 일대에 이르는 서해의 제해권을 바탕으로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도 국가면서도 해양 진출을 포기하고 대륙만 바라본 조선의 운명은 참혹했다. 조선과 고려의 엇갈린 운명 조선의 굴욕, 그리고 패망 육전은 고전, 해전은 순항이라는 임진왜란의 성적표를 보고서도 조선의 위정자들은 끝내 해양 진출을 외면했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1636년 병자호란, 조선 인조는 강화 몽진의 타이밍을 놓치고 남한산성에 들었다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 했다. 오래 잊혔던 강화도의 전략적 가치를 뒤늦게 깨닫고 성을 쌓고 진지를 구축한 것은 17세기 숙종이었다. 월곶진, 재물진, 덕진진, 인화보, 철곶보와 돈대, 포대를 구축해 강화섬 전체를 군사 기지화했다. 강화해협 건너 김포에는 문수산성과 덕포진(德浦鎭)도 쌓았다. 그러나 한말 열강의 함포 외교에 대부분 무너지고 오늘날 남은 것은 남문 안파루(晏波樓)북문 진송루(鎭松樓)서문 첨화루(瞻華樓)와 동문 망한루(望漢樓)의 4대문과, 암문 4개, 수문 2개 정도다. 40일 만에 돈대 49곳을 축성했다는『강도지』기록을 보면 정말 다급하고 절실했던 것 같다. 한양의 목구멍 강화를 군사기지화했지만 19세기 후반 조선은 열강의 침략에 허무하게 굴복했다. 1866년 프랑스 병사 백 명은 40일 만에 물러나면서 강화 관아를 불 지르고 은 금괴와 서적, 무기, 보물 등을 약탈해 갔다. 1871년 미 해병 450명은 이틀 만에 초지진을 완전히 파괴하고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 방어군 300명을 광성보에서 전멸시켰다. 1875년 일본군 22명은 영종진(永宗鎭) 수비군 500명을 몇 시간 만에 제압했다. 열강의 함포 외교에 조총으로는 상대되지 않았다. 조선은 결국 10년 동안 세 차례 참패하고 불평등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했다. 듣기 좋아 강화조약이지 항복이다. 그 역사의 현장이 바로 초지진이요 광성보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한국, 대양으로 나아가야 지도자의 정세관이 중요 세계사의 큰 흐름이 유목민족, 대륙세력에서 해양세력으로 넘어갔는데도 조선만 몰랐다. 몽골, 청은 대륙에서는 당대 1강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즈음 서구는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고 이후 세계사의 주역은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미국의 해양세력이었고 지금도 해양세력인 미국이 세계 1강이다. 조선도, 대한민국도 해양세력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한민족의 저항 의식과 투쟁 역량이 점점 후퇴했다. 약소국 신라는 당나라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고 고구려는 연개소문 아들의 내분 이전에는 외세에 평양성을 열어준 적이 없었다. 고려는 몽골 상대로 38년, 조선 인조는 45일 만에 항복했다. 그러나 19세기 조선은 대대, 소대 병력에 심한 경우 몇 시간 만에 무너졌다. 대원군은 모든 개혁 정책에도 국권 상실의 가장 큰 책임자로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인조는 말할 것도 없다. 세계정세에 대한 위정자, 최고 집권자의 분석과 판단, 결정이 일선 군인이나 하급 행정관료의 애국심이나 열정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민주사회가 된 현재도 마찬가지다. 경제나 복지도 중요하지만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읽고 대처하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어야 한다. 그런 지도자를 선택하지 않으면 언제든 국권 상실의 위기를 겪을 수 있다. 강화도는 13세기 초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피해 왕궁을 짓고 천도해 38년간 고려 왕실과 조정은 육지로부터 식량과 다른 물자를 지원받아 몽골에 항전한 곳이다. 최대의 공신은 강화와 김포 사이에 놓인 남북 방향의 좁은 강화해협이었다. 좁은 곳은 200m, 넓어야 1㎞ 길이는 20㎞가량이다. 바닷물이 강처럼 흐른다 하여 염하(鹽河)라 한다. 폭도 좁고 수심도 얕지만 조수 간만(干滿)의 차가 크고 개펄이 넓고 깊어 도하가 쉽지 않다. 북으로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 강물이 흘러 들어오는데다가 북쪽 월곶과 남쪽 황산도 사이의 해수면 높이의 차이가 커서 물살이 매우 빠르고 거세다. 고려는 둘레 1천200m의 내성, 내성을 보호하는 중성 5천831m, 동쪽 해안을 따라 외성까지 3중으로 토성을 쌓아 강화의 왕궁을 방어했다. 특히 외성이 몽골군이 강화해협을 건너지 못하고 막는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었다. 몽골군은 육전은 세계 최강이었지만 해전은 서툴렀다. 물론 뭍에 남은 백성은 몽골군의 보복 공격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어쨌든 세계를 정복한 초강대국 몽골에 맞서 38년이나 버틴 것은 전무후무한 투쟁사라 할 만하다. 고려가 해군과 해운에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항전이었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파주 삼릉

파주 삼릉의 역사는 예종 원비(元妃) 장순왕후가 공릉에 묻히면서 시작된다. 1460년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돼 당시 세자인 예종과 가례를 올리고 이듬해 음력 11월 원손(元孫 예종의 장남)을 낳았으나 엿새 후 산후병으로 요절했다. 17살 꽃다운 나이였다. 세자빈 신분이라 원래 묘도 작았는데 후에 예종이 즉위하며 장순왕후(章順王后)로 추존되고 공릉으로 격상됐다. 어머니를 잃은 원손 인성대군(仁城大君)도 세 살 되던 1463년 풍질로 사망하는데 아명은 분(糞) 즉 똥이었다. 영릉은 진종(眞宗) 즉 효장세자와 비 효순왕후의 쌍릉이다. 효장세자는 영조가 왕자 시절 후궁에게 얻은 맏아들로 사도세자의 이복 형이며, 10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정빈 이씨는 동궁전 나인 출신이다. 효장세자가 태어난지 5년 뒤인 1724년 영조가 즉위하고, 이듬해 효장세자는 왕세자가 되고 1년 뒤 조문명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순탄하던 삶은 1727년 11월 세자빈 조씨가 홍역을 앓아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큰 굴곡을 맞는다. 효장세자는 1728년 11월 옮긴 창경궁에서 열병과 안질환 등의 합병증으로 훙서(薨逝)했다. 당년 10살, 부왕 영조는 35살이었다. 세자빈 조씨는 남편이 죽고도 23년이나 더 살지만 유독 불운했다. 남편이 10살에 일찍 죽고, 후사도 없었다. 친정 부모상을 연이어 당했다. 평소 얼굴의 홍조 증상과 종기로 고생했고, 생애 후반 개창(옴)을 앓았다. 사망도 토황증 때문이었다. 1751년 11월 창덕궁 의춘헌(宜春軒)에서 승하해 이듬해 효장세자 묘 옆에 안장됐다. 영조는 며느리 상중에 며느리 시비(侍婢)를 건드려 후궁으로 삼으니 숙의 문씨다. 출생 날짜를 역산하면, 효장세자는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상 중에 잉태됐다. 상중에 천한 나인을 건드린 점에서 영조의 여성 취향도 매우 독특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했다. ■권세가 한명회의 한없는 권력욕 국구(國舅)의 끝없는 과시욕 삼릉에 왕이나 왕비로 죽은 이는 순릉에 묻힌 성종 원비 공혜왕후(恭惠王后)뿐이다. 공혜 왕후는 잔병 치레가 잦아 후사를 두지 못하고 19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12살 되던 1467년 세조의 손자며 요절한 의경세자의 차남 잘산군(山君)과 혼인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친정에 예단이 온 것은 정월 그것도 잘산군의 형 월산군의 혼례 5일만이었다. 1469년 잘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고 본인도 왕후로 책봉되지만 공혜왕후는 1473년 병으로 친정으로 옮겼다. 회복해 환궁했다가 병이 다시 도져 1474년 초 창덕궁으로 또 옮겼다. 성종과 그 조모, 양모, 생모 세 대비, 친정 부모가 차례로 들러 살폈지만 차도가 없었고 결국 그해 4월 19세로 훙서했다. 예종 원비 장순왕후와 성종 원비 공혜왕후는 같은 부모에서 난 자매간이며 둘다 일찍 죽어 사실상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도대체 아버지가 어떤 인물이길래 자매 둘을 왕 2명에게 차례로 시집보냈을까. 도대체 아버지가 어떤 큰 죄를 지었길래 딸 둘이 그런 불운을 당했을까. 그 아버지는 1453년, 수양대군의 반란 사건 즉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기획하고 실행한 주모자로, 수양대군이 그대는 나의 장자방(張子房)이오!라 인정한 인물이다. 장자방 즉 장량(張良)은 중국 한나라를 건국한 한 고조 유방(劉邦)이, 장막 안에 앉아서 천하를 내다보고 계략을 세워 천 리 밖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고 평가한 최고 전략가다. 한명회는 정권 찬탈 (정난공신靖難功臣)뿐만 아니라 정권 유지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사육신의 반정 기획을 차단하고(좌익공신佐翼功臣), 남이 장군 옥사를 매끄럽게 처리했다(익대공신翊戴功臣). 예종의 장남 제안대군이나 잘산군의 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어린 사위 잘산군을 성종으로 즉위시켜(좌리공신佐理功臣) 18년 동안 네 차례 1등 공신이 됐다. 조선 500년 역사 최대의 위기인 임진왜란 7년 동안 무능하고 변덕심한 선조를 달래 국권을 유지한 서애 류성룡이 2등 호성공신(扈聖功臣)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한명회의 훈작이 얼마나 과장된 것인지. 지금의 서울 강남 압구정동(狎鷗亭洞) 일대는 당대 권세가들의 별서 후보지 1순위였다. 만년의 한명회가 1번 타자로 정자를 짓고 명나라 문인 예겸에게 압구정, 즉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는 정자라는 뜻의 이름을 받았다. 뻬어난 경관으로 소문나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마다 압구정을 한번 들르겠다 고집했고 한명회는 잔치 핑계로 임금 전용의 차일(遮日)을 빌려달라고 사위 성종에게 두 번 세 번 강청했다. 진노한 성종이 한강의 정자를 허물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황희 정승이 은퇴해 파주 반구정에서 갈매기를 벗하며 세월을 보냈거니와, 군자와 소인배는 은퇴해 갈매기를 벗하는 것조차 격이 달랐다. 실록의 한명회 평이다. 번잡한 것 좋아하고 과시하기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색을 즐겨, 토지와 금은보화 등 뇌물이 이어지고, 너른 집을 차지하고 예쁜 첩을 많이 두니, 호사와 부유가 한 때에 떨쳤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하남 이성산성…신라에 의한 신라를 위한 ‘신라만의 城’

이성산성은 신라인이 세우고 쓰고 버렸다. 화재 흔적도 건물지에서 출토된 유물도 거의 없으니, 전쟁이나 화재가 아니라 옮겨 나가고 나서 자연 붕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후삼국이나 고려, 조선은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전성기 신라인들만, 이성산성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참으로 요긴하게 썼다. 목간과 영조척, 요고와 암수 기와, 철제 무기류와 농공구류, 대형 시루, 동이ㆍ자배기류, 항아리나 옹단지류 합(盒)과 뚜껑, 사발, 굽다리접시, 나무빗, 뼈빗, 바가지, 칠기, 인형, 나무망치, 짚신, 버들고리, 천 조각 등 모두 3천300여 점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한양대학교 발굴팀에 따르면, 아직도 전체 면적의 3분의 1도 채 발굴하지 못했다. 저수지가 보물단지였다. 무늬 기와, 벼루, 굽다리접시, 영조척과 목간 등 귀중한 유물들이 대량 출토됐다. 민무늬[無文], 문살[格子], 선조[線條], 생선뼈[魚骨] 등의 기와가 암수로 나왔다. 당시 기와는 왕궁, 사찰, 고급 관아에 사용되던 귀한 건축 소재로, 산성에 위상 높은 대형 건물이 많았음이다. 벼루 40여 점은 기록의 수요를, 영조척(營造 尺)은 토목과 건축의 수요를 알려준다. 네모난 초기 건물에 쓴 1자 35.6cm의 고구려자, 후기 다각형 건물에 쓴 1자 30cm의 당나라 자[唐尺]가 모두 저수지에서 나왔다. 합(盒)과 짧은굽다리접시[短脚高杯] 등은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유물과 매우 비슷하다. 황룡사 불사가 시작된 553년, 신라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무진목간이 결정적이었다. 「무진년 정월 십이일 붕남한성도사 수성도사촌주 전남한성 戊辰年正月十二日 朋南漢城道使 須城道使村主 前南漢城.」, 이성산성의 연대를 608년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당시 지명 남한성(南漢城)과 도사(道使), 촌주(村主) 등 관직명은 신라의 지방 지배체제를 이해하는 열쇠다. 그밖에 나무팽이는 팽이놀이 수입의 연대기를 앞당겼고,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요고(腰鼓), 욕살 목간, 다리며 몸통이 부러진 철마와 토마 등도 특기할 만하다. 산성은 둘레 1천925m, 내부 면적 16만㎡으로 삼국시대 산성 중 가장 큰 규모다. 산의 경사에 기대 안으로 기울어진 편축 내탁 방식이나, 계곡을 가로지르는 남, 서 일부는 안팎에서 쌓고 가운데를 채우는 내외 협축(夾築)이다. 초축 성벽은 가로 50㎝, 두께 20㎝의 편마암을 너비 78m, 높이 7m로 쌓았다. 뾰족한 마름모꼴로 다듬은 뒷채움돌을 맞물리게 쌓고 점토를 다져 넣어 물이 스며들지 않게 막았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 물과 토사에 밀려 초축이 무너지자 바깥쪽으로 4m 떼서 다시 성벽을 쌓았다. 1차 성벽은 기울기 81~84로 거의 수직인데, 2차 성벽은 69로 아름답고 웅장하며 안정적이다. 북서남동남에 문지 4개가 보이는데, 모두 사다리로 오르내리는 현문(懸門)으로 바닥 아래 배수 시설이 있다. 대개 현문은 경사 급한 골짜기에 만드니, 빗물이 몰려 하수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폭 20미터로 매우 넓은 치(雉), 수비병이 성벽 위에서 몸을 숨기고 활을 쏘기 편리하게 만든 여장(女牆) 즉 성가퀴의 흔적도 확인되었다. 성내 도로망은 성벽 안쪽에 성문을 연결하는 회곽(廻廓) 도로가 너비 23m로 시설되었다. 산성 안의 건물은 병영, 장대, 창고 등 군사용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성산성의 건물지(建物址)는 기능적인 장방형 건물뿐 아니라 행정, 의례적인 8각, 9각 건물까지 20기 이상이다. 9자가 완전무결함을 상징하는 하늘의 숫자이므로 9각 건물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壇), 8은 땅의 숫자이므로 50m 거리의 8각 건물은 사직단(社稷壇)으로 추정된다. 제천의식을 올릴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니, 군사는 물론 행정 즉 신주(新州), 후대 한산주(漢山州)의 치소였을 것이다. 한반도 지도를 펴놓고 임진강 어귀에서 원산만까지, 또 아산만에서 경북 영덕으로 직선을 그어보라. 경기도와 강원도, 그리고 황해도, 충청도, 함경도 일부를 포함하는 옆으로 세운 사다리꼴이 그려질 것이다. 사다리꼴의 북쪽선은 임진강, 추가령 통곡이고, 남쪽선은 낮은 구릉을 가로지르다 남한강과 만난다. 사다리꼴은 동쪽이 넓고 서쪽이 좁은데, 사다리꼴의 남북 경계면은 일찍부터 고을이 발달하고 성이 들어서고,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자주 주인이 바뀌었다. 백제에서 고구려, 다시 백제에서 신라로. 하남 이성산성, 사다리꼴의 꼭짓점을 떠받치는 입지(立地)와 정교한 축성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성이다. 한강 수운과 중부 내륙의 입구로, 천험의 요새 남한산성을 업어 배후의 곡창을 보호하고 강 건너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유리하다. 이성산성의 내력도 대부분의 사다리꼴 고을처럼 백제로 알려져 왔다. 백제의 두 왕자가 살아 이성산(二聖山)이 됐다는 전설, 서쪽 십리에 있는 백제 왕도(王都)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그렇게 만들었다. 조선 후기 정약용의 강역고(疆域考), 홍경모의 중정 남한지(重訂 南漢志) 등이 이성산성을 백제의 고도로 비정했고, 일제 시대 일본인 사학자 금서룡이 이를 확인하고, 해방 후 많은 친일, 반일 사학자들이 이를 답습했다. 그러나 1986년 이후 14차례에 걸친 한양대학교 팀의 발굴조사 결과 이성산성은 백제성이 아니라, 신라의 성임이 밝혀졌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포천 반월성

해가 나기 전 이른 아침, 면사무소 뒤 산길을 오른다. 면사무소에서 일하던 이들이 경사가 급하니, 서두르지 말고 쉬엄쉬엄 오르라 친절하게 충고한다. 비탈을 오르면서 간간이 마주치는 산책 나온 주민들이 반갑다. 30여 년 전 어느 초여름 토요일 오후, 가족 휴가차 방문했던 공주 국립박물관 잔디밭에 주저앉아 또는 엎드려 박물관을 그리던 아이들 생각이 났다. 40여 년 전 토요일 오후 학교에 남아 자습하다가 무료해지면 학교의 정경을 그리던 학창 시절도 떠올랐다. 역사의 현장은 모름지기 이렇게 친근해야 한다. 나이 든 사람의 아침저녁 산책로라야 하고,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놀며 배우는 터전이라야 한다. 모두가 함께 즐기는 공간이라야 한다. 보존이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너무 몰린다면 모를까, 인적이 드물어서는 안 된다. 우리 역사가 일부 식자들의 전유물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옛것을, 우리 선조를 세계인에게 더 자랑해야 한다. 우리가 멀리 하면서 우리가 즐기지 않으면서 세계인에게 자랑 할 수는 없다. 일각에서 스토리가 없다고 투정하지만, 설령 있다 해도 찾지 않으면 스토리는 사라진다. ■포천의 역사와 전략적 중요성 현대의 포천시는 군사적으로 중요하다. 5개뿐인 전방 보병군단 가운데 2개가 본부를 포천에 두었다. 지금은 남북 관계가 많이 풀렸지만, 긴장이 고조된 한때, 이른바 북한군의 조공로(助攻路)로 지목되기도 했다. 현대 이전에는 더 그랬다. 포천에는 반월성을 비롯해 고모리냉정리대전리성동리초성리주원리보가고소 등 산성이 즐비하다. 오늘날 군부대와 막걸리와 산정호수로 대표되는 포천이지만, 원래 살기 좋은 지형에 기후요 상업 중심지였다. 추가령 통곡, 한탄강 줄기 따라 서남으로 한강 하류와 서해, 동북으로 함경도로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요지다. 한강 하류를 내려다보는 요충지로 백제, 고구려, 신라의 필쟁처였다. 한사군이 한반도에서 쫓겨난 4세기 초 근초고왕 치세의 백제가 먼저 포천을 차지했다. 4세기 후반 광개토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가 임진강과 한강 유역 성 58개와 촌 700개를 빼앗았다. 100여 년 후 6세기 초 신라와 백제 동맹이내분에 휩싸인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를 빼앗았다. 최종 주인이 된 신라는 포천과 철원을 북방 전진 기지로 잘 활용했다. 고려조는 태조 왕건을 핍박한 궁예가 철원에 도읍하고 포천에 죽은 연유로 다소 홀대했다. 포천 곳곳에서 구석기 이래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 유적이 발견되고, 반월성에서 백제 이래 시대별 유물이 대량 출토되지만 고려 것만 드문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은 포천을 중시했다. 조선 초기, 왕실 사냥터와 태조 이성계의 두 왕후 한씨, 강씨의 농장, 이성계의 의형제 이지란의 사당[청해사(淸海祠)]이 들어섰다. 원래 왕조의 터전인 함경도 함흥으로 향하는 길목이고(京興大路, 함흥 차사도 함흥으로 떠난 이성계에게 보낸 이방원의 사절을 이르는 말이다), 태종 이방원의 생모 신의왕후 한씨가 왕조개창 전 포천현 재벽동(滓甓洞)에 거주한 인연도 있었다. 조선 후기, 포천은 금강산과 원산, 함흥으로 가는 관북대로를 끼고 물산이 자주 유통하는, 근기(近畿)의 대표적 상업 도시였고, 특히 소흘읍 송우장이 유명했다. ■현대에 되살아난 역사의 현장, 반월산성지에서 반월성으로 반월성은 그 요지 포천 중앙에 솟은 청성산 정상부를 에워싸 축조한 산성이다. 청성산(283.5m)은 높지는 않아도 분지인 포천에선 우뚝하니, 반월성에 오르면 포천시 일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의 남서북으로 흐르는 구읍천, 포천천, 하성천이 자연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둘레 천80m, 동서 490m, 남북 150m이며, 성내에서 치성 4곳, 토광터 27곳, 우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주능선 따라 동서로 길고, 북은 불룩하고 남은 오목한 반월 모양이다. 북쪽 주능선의 경사면과 남쪽 계곡을 가로질러 성벽을 쌓아, 급경사를 오르지 않으면 접근조차 어렵다. 화강암을 주소재로 내외 협축(內外夾築, 양쪽 쌓고 가운데 채우기), 편축(片築, 한쪽 쌓고 맞은 편채우기)을 모두 적용했고, 일부 완만한 곳은 암반을 파서 수직으로 단을 조성한 후 축조했다. 장방형돌의 면과 모를 맞춰 빈틈없이 축조했다. 남북동 문터 셋 가운데 경사가 완만한 남 문이 주 출입구였을 것이다. 북문은 평거식, 동문은 현문식으로 추정되는데 방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했다. 성내에서 서, 북 두 군데 장대지를 포함해 건물터 6곳이 확인됐다. 유기적인 방어를 위해 성 전체에 회곽도로를 시설했다. 『대동지지』『, 연려실기술(樮藜室記述)』『포천군읍지(抱川郡邑誌)』『견성지(堅城誌)』등 조선 후기의 책들에 산성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1994년 지표조사에서 다량의 삼국시대 토기와 기와가 수습되면서 모든 기록은 혁명 수준으로 뒤집혔다. 1995년도 2차 발굴조사에서는 마홀수해공구단(馬忽受解空口單)이라 양각된 암키와가 출토됐다. 마홀(馬忽)과 부근 소흘, 6세기 진흥왕에서 10세기 통일신라에 이르는 400년 신라 지배를 뛰어넘어 살아남은 고구려식 지명들이다. 2011년 문화재청은 이곳의 공식 명칭을 반월성으로 바꿨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양주 대모산성

오전 8시부터 3시간 좋이 산 중턱을 헤맸지만, 찾지 못하고 하릴없이 돌아섰다. 이정표도 없었고, 주민들도 전해오는 말만 전할 뿐 정작 가본 사람은 없었다. 가톨릭 의정부교구에서 운영하는 수련원 사람들이 그나마 가장 나은 길라잡이였지만 역시 소용없었다. 풀숲의 아침이슬에 흠뻑 젖은 바지가 무거웠고, 얼굴에 휘감기는 거미줄이 신경에 거슬렸다. 토끼길조차 보이지 않게 빽빽하게 자란 가시덤불에 팔과 어깨가 계속 긁혔다. 삼국시대 이래의 오랜 산성은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탐방객에게 속살을 허락하지 않았다. 산성 답사는 참담한 실패였다. 날씨가 흐려 땡볕이 아니고, 비가 내리지 않는데 감사해야 했다. 지역 문화 관광 안내도에도 전혀 표시가 없었다. 안내도는 일영, 장흥 유원지와 조소앙 기념관을 크게 내세우고, 그밖에 온갖 체험학습장으로 도배돼 있었다. 고기 구워 먹고 물장난하는 유원지와 우리 사회의 이념적 관용의 폭을 되살펴 보게 하는 조소앙 기념관이 서로 어울리는 주말 관광지라는데 동의할 분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 관광 문화의 수준이 인문학과는 먼 양극단 어디라는 점에서 한탄하게 된다. 역사와 문화에 조금 관심을 둔다면, 양주 관광안내 가이드북에도 중종의 원비 온릉(溫陵)과 백수현 고택, 대모산성, 권율 장군 묘소 등이 전면에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대모산성은 물론, 관리 보전을 위해 경기도가 올해 11억 예산을 배정한 백수현 고택조차 언급도 없다. 시간을 산책하다는 캐치프레이즈라도 달지 말지. 오늘의 주제인 양주 대모산성을 주민도 모르고 외지인도 찾지 않게 된 것은, 공무원들의 책임도 있지만 언론과 학자들 책임이 더 크다. 입만 벌리면 인문학 운운하고 역사와 문화 운운하면서도, 정작 인문학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는 의무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고자 지원서를 쓸 때만 역사와 문화의 대중화를 부르짖는다. 그러나 일단 지원이 확정되면 태도가 달라진다. 알 듯 모를 듯한 말로 진실을 가리거나, 아니면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무엇으로 만들어 버린다. 전문성을 내세워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저의는 없었는지 반성할 일이다. 사실 수원 화성도 남한산성도 한국의 서원도, 왕릉들도 전문가들이 독점할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중이 자주 찾고 세계인에게 내놓고 보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거다. 대모산성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 있나? 양주는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데다가, 남북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흐르니, 너른 평야에 넉넉한 물과 수운을 갖춰 예로부터 필쟁의 요처였다. 단양 적성산성이나 온달산성과 마찬가지로, 삼국 시대 초에는 백제가 먼저 양주 일대를 차지하고 고구려를 위협했다. 5세기 말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주인이 된 고구려가 군사 시설을 만들고 매성(買城)이라고 불렀다. 맷골 혹은 물골, 물의 땅이라는 뜻이다. 대모산성(大母山城)의 축성도 이즈음이다. 산성은 정상 면적은 1,653㎡이고 둘레 1.4㎞에, 높이 45m, 너비 6~8m다. 대체로 무너지고, 3군데 7080m 성벽만 보존 상태가 좋은데, 성벽과 현문(懸門) 등에 첫 축성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성벽은 바깥면이 장방형이 되도록 가공된 할석을 수평 고임하고, 성벽 바깥쪽 아래에 느슨한 기울기의 벽체를 더 쌓아 중간쯤에서 본성벽에 닿으면서, 전체적으로 경사를 이룬다. 발굴된 북문과 남동문 모두 바깥 계곡을 향해 단절된 현문(懸門)이라 이채롭고, 문짝을 들어 올릴 때 지탱하는 반원모양의 축수(軸受)가 박혀 있었다. 성 안에서 건물터 4, 우물터 5, 창고터 1곳이 발견되고, 德部(덕부)德部舍(덕부사)官(관)草(초)富部(부부)大浮雲寺(대부운사)城(성) 등 귀한 명문(銘文) 기와조각도 출토되었으니, 큰 관아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금속 유물만 600점이나 발굴됐는데, 거울말팔찌도장 등 청동제품이 확인돼 최고위급 인사가 가족과 함께 머문 흔적으로 보인다. 말 모양 토우(土偶), 그릇, 활촉과 쇠낫도끼투겁창말재갈솥쇠보습 등의 유물로 미루어 관할 지역이 농업수공업 생산력도 가늠할 수 있으니, 방어와 행정, 물류 중심의 복합적 기능을 수행한 듯하다. 개원통보는 당나라 현종의 연호를 딴 금속 화폐니,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와 고려기에 보수되어 오늘에 이르는 증거다. 대모산성은 최종적으로는 신라 땅이 된다. 1970년대 한때 신라가 이근행이 이끄는 당나라 보기(步騎) 연합군 20만을 격파하고 3국 통일을 완수한 매소산성 자리로 추정되면서, 대모산성 발굴 상황을 대통령이 챙긴 적도 있었다. 문무왕 때인 675년 당나라 장수 이근행이 이끄는 당나라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군마 3만 필을 노획한 매초성(買肖城) 전투가 양주 지역에서 벌어졌다는 건데, 요즈음 학계에서는 연천 대전리 산성이 매초성이라고 본다. 세월이 흘러 조선조에 접어들면, 태조 이성계가 태종 이방원의 반란을 용서하지 않고 양주 회암사에 머물렀으며, 영의정, 좌우의정등 최고위 관료들이 머물며 정사를 돌보던 곳의 지명이 의정부가 됐다. 임꺽정과 방랑시인 김병연이 양주를 무대로 활동했고, 임진왜란 때도 양주 게너미고개[蟹踰嶺]에서 부원수 신각(申恪)이 육지 전투로는 최초로 승리했으며, 21세기에도 효순이 미선이 두 여중생의 참사 등 양주 이야기는 끝이 없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단양 적성산성과 신라 척경비

단양은 연단조양(鍊丹調陽)의 가취(佳趣)에서 시작됐다고 단양군청 홈페이지는 소개한다. 연단은 신선이 먹는 환약이며 조양은 햇볕이 골고루 따뜻하게 비춘다는 뜻이니, 신선이 다스리는 따뜻한 고장이란 뜻이다. 삼국시대 고구려 때는 적산(赤山) 또는 적성(赤城)이라 불렸고, 고려 초 단산(丹山)현을 거쳐 고려말 충숙왕 때부터 단양이라는 지명을 쓰기 시작했다. ■ 따뜻하고 아름다운 신선의 땅 단양 영춘면 지역은 고구려 때 을아단현(乙阿旦縣), 통일신라 때 자춘현(子春縣)을 거쳐 조선 세종 때 영춘(永春)이라는 지명을 얻으니, 단양은 일찍부터 봄과 햇볕을 연상시키는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말마따나 단양은 산천경개가 아름다운 곳이라 내로라하는 시인 묵객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그림을 그렸다. 사인암은 고려말 유학자 역동 우탁(사인은 우탁의 벼슬), 도담 삼봉은 조선 건국 공신 정도전(도담은 정도전의 호), 그리고 바위에 새긴 탁오대(濯吾臺)와 복도별업(復道別業) 글자는 퇴계 이황 선생의 자취다. 단원 김홍도는 도담삼봉과 사인암, 옥순봉 등 단양 8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러나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단양은 3국 군대의 치열한 전투가 끊일 새가 없었던 군사 요충지였다. ■ 삼국시대 필쟁의 군사 요충지 충청도 동북 끝, 남으로 죽령 넘어 경북 영주, 서쪽으로 천등산고개 넘으면 충주로 통하는 4통 5달의 요충지 단양.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강원도 영월로, 남한강을 따라 내려가면 경기도 여주, 이천, 광주를 거쳐 한양으로 이르는 삼한의 필쟁처 단양. 강원 산간에서 땔감과 마초를 걷어 뗏목에 실어 남한강에 띄워 보내면 단양에서 건져 사용하고, 뗏목은 풀어 한강 하류를 공격할 군선을 지을 수 있었다. 단양을 가지면, 한반도의 심장부 경기를 장악할 수 있었다. 오늘날이야 차 몰고 액셀레이터 잠깐 밟으면 도경계쯤 10~20분이면 돌파하지만, 옛날엔 평화 시에도 고개 넘는 게 하루일이었고 고개 하나 얻으려 수만 병사의 목숨을 걸고 몇 년, 몇 십 년 전쟁을 벌였다. 백제땅 단양은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하면서 고구려로. 다시 신라 땅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고구려 장수 온달이 아단성(온달산성) 아래서 전사한 슬픈 역사도 전해진다. 신라 진흥왕은 적성(단양)을 공략하여 탈취하고, 신라를 도운 공로로 적성 사람 야이차를 포상했다는 내용을 기록한 신라 적성비를 세웠다. 학창 시절, 진흥왕의 창녕 순수비와 북한산 순수비 사이에 뭐가 빠진 듯한 느낌이 많았다. 창녕이야 경주 바로 근처니 그렇다 치고, 경주와 북한산의 거리를 생각하면, 긴 순행 길에 백제군이 기습하면 진흥왕 일행은 큰 위기에 빠지게 된다. 중간 지점의 경호는 어떻게 연결했을까? 이 의문을 해결한 것이 1978년 1월 단양 신라 적성비의 발견이고, 단양 성재산 적성산성의 발견이다. ■ 약소국 신라의 도광양회 전략 단양 부근에서 남한강은 강폭은 넓고 수심은 깊어지고, 강안 양쪽은 50m 높은 절벽이라 천험의 요새가 된다. 강안 따라 만들어진 잔도길을 걷노라면 먼 옛날 중국 한나라 창업자 유방이 걸었다던 파촉의 험난한 잔도가 연상될 정도로 아찔하다. 그 험준한 천혜의 요새, 남한강 본류와 죽령천, 단양천이 만나는 호로병처럼 튀어나온 삼각지대의 꼭지점 높은 곳, 단양 일대를 조망하는 감제 고지(瞰制高地)에 둘레 923m의 산성으로서는 꽤 큰 적성산성이 있다. 성벽은 자연석을 대충 다듬어 폭 8자 정도로 단단히 쌓고, 흙을 다져 틈을 채웠다. 7, 8자의 성벽 높이는 별거 아닌 듯하지만, 급경사 지형을 잘 이용해 공성자에게는 무척 난공불락으로 느껴졌을 법하다. 신라의 진흥왕은 후진 소국의 왕이었지만 매우 전략적인 인물이었다. 먼저, 백제와의 동맹을 확인해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고서 남쪽 금관가야를 병합해, 인구, 군사, 경제 역량을 배가했다. 금관가야는 비옥한 낙동강 하류 지역을 차지하고 일찍 철기문화를 발전시켜 일본에 식민지를 개척한, 작지만 강한 나라였다. 적성산성 적성비에도 금관가야의 왕족이며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의 조부 무력의 이름이 등장한다. 다음 동맹군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고서, 마지막으로 백제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한강 유역을 독점했다. 오랫동안 소백산맥 남동에 웅크리고 있다가 단숨에 고구려, 백제의 약한 고리를 치고 나가 한반도의 중심을 차지한 것이다. 신라의 전략은 약소국이 어떤 전략을 구사해야, 위기에서 살아남고 마침내 역사의 주역으로 설 수 있는지 좋은 귀감이 된다. 단양 신라 적성비는 진흥왕이 단양을 차지한 뒤 전공을 세운 지역민을 상찬하고, 신라 법령을 지역민에게 알리며 지역 관행을 신라의 법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아 세운 척경비(拓境碑)다. 단양 적성비와 진흥왕 순수비는 국가의 지도자에게도 좋은 가르침을 준다. 지도조차 없는 당시 국왕이 새 영토의 지리를 익히고 새로운 백성을 위무한 것은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현장 리더십이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명장 롬멜 원수 역시 전선을 직접 둘러보고서야 전략을 구상했다더니, 진흥왕 역시 그러했다. 복속한 지 얼마 안 돼 치안이 불완전한 땅을 순행한 것은 선봉 리더십이다. 교통과 통신이 불편한 고대 사회, 반란을 두려워 않고 몇 달씩 수도를 비우면서 순행을 떠난 것은 위임과 책임의 리더십이다. 권력의 위임은 국정 장악에 대한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늘날 우리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 덕목들이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고양 서삼릉과 어두운 역사의 그늘

조선 중종 조,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태종의 헌릉(獻陵, 지금의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가정보원 바로 옆) 서쪽에 능이 조성됐다. 기뻐야 할 그 희릉(禧陵)이, 피를 부르는 권력 다툼의 단서가 됐다. 당시는 간신이 간신을 치는 시대, 김안로(金安老)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의 정유 3흉(丁酉三凶)과 심정(沈貞)이항(李沆)김극복(金克福)의 기묘 삼간(己卯三奸)은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당대 권간들은, 훈척 세력과 손잡고 4대 사화를 일으켜 사림의 등용을 차단하는데 성공했고, 임사홍, 유자광, 송익필 등은 죽은 뒤였다. 당시의 권신이자 대표 간신 김안로는 희릉이 잘못된 위치에 잘못 조성됐다는 낭설을 퍼뜨렸다. 무덤 아래 큰 돌이 있어 크게 불길하며, 이는 왕조의 기를 훼손하는 역모 사건이라 키워 정적인 남곤, 정광필 등을 제거했다. 당시 왕릉의 산역은 그만큼 중대한 사건이었다. ■ 삼간(三奸)과 삼흉(三凶)의 시대 준비 안 된 지도자의 한계 서삼릉 예릉(睿陵)에는 강화도령 철종과 비 인철왕후 김씨가 묻혀 있다. 원래 조선조 국왕은 세손이나 세자로 책봉되면,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꽉 짜인 일정으로 당대 최고 대학자들의 훈육을 받고 심신을 단련하고 어른들에게 문후를 올린다. 제왕 수업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철종은 아무 생각 없이 강화도에서 나무하다 갑자기 국왕이 되었으니 흉중에 큰 뜻이 있을 리 없고, 뜻이 있어도 실천할 일머리가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철종조부터 조선은 외척인 안동 김씨 세도가 본격화되고, 삼정이 문란해져 전국에서 민란이 빈발하게 된다. 인종과 비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孝陵)은 인종의 재위기간이 1년도 채 못 되었으니 논평할 가치조차 없다. 오늘 필자는, 잘 알려진 역사의 주인공이 묻힌 왕릉보다 원과 묘에 묻힌 덜 알려진 비운의 주인공에 관심이 쏠린다. ■ 인조(仁祖)인가 인군(忍君)인가 회기동과 효창공원, 의령원 서삼릉에는 소경원(昭慶園)에 소현세자가 묻혀 있고, 부근에 제주도에 유배됐다가 13살, 9살에 죽은 소현세자의 장남 경선군(慶善君) 차남 경완군(慶完君) 묘가 있다. 인조 이중은 청나라가, 중국 심양에 9년 동안 볼모로 묶여 있던 장남 소현세자를 더 지지한다고 생각하고 소현세자를 경계했다. 거기에 인조의 총희 조 소용은 소현세자를 참소하고 세자빈 강씨(민회빈)을 견제했다. 결국 소현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사망하는데, 실록조차 독살 정황과 인조 배후설을 강하게 제기한다. 얼마 후 세자빈이 사약을 받고 소생인 어린 아들들이 유배지 제주도에서 의문사하는 것을 보면서, 인조의 잔인함이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 이상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 묘호는 인조(仁祖)가 아니라 잔인군(殘忍君)이라야 옳지 않을까? 회묘(懷墓)는 월탄 박종화의 역사 소설 금삼의 피를 비롯해 많은 역사소설과 드라마의 모델이 된 성종의 폐비 윤씨의 묘다. 성종은 자신이 윤씨를 폐위하고 사약을 내렸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애틋한 마음이 있었던지 특별히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허락했다.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즉위 후 어머니의 한 맺힌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이 어머니 사사의 장본인들을 사사한 사건이다. 회묘가 고양으로 옮기기 전 원래 있었던 서울 동대문구 마을은 회기동(회묘동(懷墓洞) 회묘동(回墓洞) 회기리(回基里)로 불리게 된다. 효창원(孝昌園)은 홍역에 걸려 5살로 일찍 세상을 떠난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다. 고양으로 오기 전 원래 자리가 오늘날의 서울 효창공원이다. ■ 훼손된 민족 정기와 극일(克日), 천장(遷葬)과 태실 이봉(移封) 의령원(懿寧園)은 영조의 첫 손자며 사도세자의 첫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다. 그러니까 정조의 동복형인 세손이 태어나자 영조는 크게 기뻐하며 돌박이를 세손으로 책봉한다. 그러나 두 돌을 넘기자 마자 병으로 죽자 영조는 크게 상심해 하며 친히 조문(弔文)과 비문(碑文)을 지어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했다. 의령원 표석 글씨도 영조 친필이다. 영조가 정조 이산을 세손으로 책봉한 것은 세 돌 지나서니 의소세손에 대한 괴임은 참으로 남달랐다. 서삼릉에는 그밖에도 후궁묘, 왕자묘, 왕녀묘, 태실 등 다양한 신분과 형식의 묘역이 있어 이채롭다. 후궁묘 22기는 대부분 원래 이 자리에 있던 것이나, 왕자묘 8기와 왕녀묘 14기는 일제 강점기에 옮겨진[遷葬] 것이다. 옮겨진 묘에는 원래 비석과 옮겨진 후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는데, 일본 연호를 삭제한 흔적이 남아 회한을 더한다. 거기에 국왕 태실 22기, 왕자 공주 태실 32기 등 태실이 54기나 옮겨 모셔져 서삼릉은 문자 그대로 조선 왕실의 음택이요 세계적 문화재가 되었다. 일제는 조선 팔도 명당에 묻혔던 태실을 파헤쳐 옮기면서[移封] 조선 왕실과 지역민의 유대를 차단했다. 그리고 태실의 문화재는 빼돌리고 옮긴 태실은 규모는 줄이고 형태는 日 자로 만들어 민족 정기를 말살하려 획책했다. 극일(克日), 21세기에도 우리 민족 최대 과제의 하나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연천 호로고루성

강북 강변도로를 서쪽으로 계속 달리다 보면 장월 나들목 쫌에서부터 도로는 북으로 꺾인다. 얼마 안 가 왼편에 우뚝 솟은 오두산 전망대가 나오는데, 바로 이쯤에서 한강은 임진강을 품어 안는다. 한강은 하류에 접어들면서 강의 흐름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데, 임진강은 급격한 구부러짐의 연속이다. 임진강의 고구려 시절 이름은 칠중하(七重河) 일곱 번 구부러진 강인가? 하구에서 세아려 다섯 번째 급격하게 구부러진 자리, 모래톱이 호로병처럼 생긴 곳, 문외한의 눈에도 군사 요충지라고 느껴지는 자리에 호로고루가 자리 잡고 있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전략적 요충지 호로고루(瓠蘆古壘), 이름부터 생소해 한자 사전을 찾아봤다. 瓠 바가지 호병 호, 蘆 갈대 로호로병 로, 古壘 낡은 보루옛 보루, 호로병 모양의 옛 보루다. (임진강을 한자로 표하(瓢河), 호로하(瓠瀘河), 호로탄(瓠瀘灘) 등으로 표기했고, 미추홀에서 보듯이 홀은 고구려 옛말로 고을을 뜻한다는 주장도 있다. 어느 설이 맞는지 비정할 자신은 없다.) 호로고루는 남한 지역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고구려 성곽 유적의 하나다. 사방 둘레는 410m이니 규모는 크지 않지만, 기와편, 와당편이 대거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국경 방어사령부 정도의 중요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음이 틀림없다. 당시에는 궁궐에 버금가는 중요한 관아가 아니면 기와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단 이전까지도 임진강은 고랑포까지 바닷배가 올라왔을 정도로 수운이 편리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 호로고루부터 배가 올라오기 어려울 정도로 수심이 얕아진다. 호로고루 내부는 전체적으로 해발 22m, 성벽 최정상부는 30m이며, 가장 높은 동벽 정상부와 서쪽 끝부분에 장대(將臺)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은 언덕 밑으로 흐르는 강이라는 뜻의 옛 이름 이진매 즉 더덜매 그대로 강폭은 좁아도 30~40m 수직 단애(斷崖) 아래 급류가 흘러 천연 장벽을 이룬다. 단단한 화강암과 퇴적암 위에 용암이 두껍게 흘러 30m나 되는 현무암층을 이루고, 물길 따라 암반이 패여 30m 이상의 깊은 협곡이 생겨나 전략적 요새가 되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임진강 남북 강 안에는 숱한 성과 보루가 세워지고, 전투가 치러졌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여기서 백제군을 대파했고, 신라 진흥왕은 남쪽 당포성(堂浦城)과 은대리성을 근거로 고구려와 대치했다. 한반도 장악의 필쟁처였다. 신라의 전략과 산성 네트워크 당나라군을 꺾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성지가 연천에만 강서리보루, 고성산보루, 광동리보루, 군자산성, 당포성, 대전리산성, 두루봉보루, 매소성, 무등리보루, 무등리성, 무등리 1보루, 무등리 2보루, 삼거리산성, 성령산성, 수철성, 아미리보루, 옥계리산성, 옥녀봉산성, 우정리보루, 우정리산성, 은대리성, 전곡리토성, 초성리산성, 초성리토성, 호로고루까지 25개나 된다. 대부분 수직 절벽 위에 선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독일의 라인강 크루즈를 타고 강 양쪽 언덕을 올려다보면 도선객(渡船客)들에게 도하세(渡河稅)를 받던 고성이 잇따라 나타나는데, 임진강 유역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그랬던 셈이다. 눈여겨볼 성은 대전리산성이다. 사서에는 신라 문무왕 때 신라가 당시 세계 최강 당나라군 20만와 큰 전쟁을 치러 전마 3만 필을 노획하는 등 대승했다고 기록돼 있다. 매소성(買肖城) 또는 매초성 전투인데, 우리가 잘 아는 김유신 장군의 아들 원술이 절치부심해서 승리를 이끈 전쟁이기도 하다. 신라의 승인은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전략과 후방을 교란하는 산성 네트워크였다. 성곽 네트워킹은, 웨섹스의 일개 영주였던 영국의 알프레드 대왕이 바이킹의 노략질로 고전하던 잉글랜드의 맹주로 우뚝 서게 한 전략이기도 했다. 어쨌든 매소성 대첩은 우리 역사상 살수대첩(고구려-수), 안시성 전투(고구려-당), 귀주대첩(고려-거란)과 함께 대륙의 대군과 정면 대결해 이긴 4대 전투의 하나다. 최근의 연구 결과 그 매소성이 연천군 대전리 산성이라 한다.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삶의 흔적, 그러나 지질학상 가장 젊은 지역 일본인들은 사소하고 작은 사안은 정직하고 빈틈없이 깔끔하게 한다. 그러나 요즘 코로나바이러스 파문에서 보듯이 정말 크고 중요한 사안은 전혀 죄 의식 없이 부인하고 조작하곤 한다. 과거 일본은 한반도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한반도와 한민족의 역사를 단축하려 안달이었고, 유적과 유물 조작을 밥 먹듯 했다. 그 와중에 연천 전곡리와 장단 등에서 수십 만 년 전 구석기 유적지가 발굴돼 한반도의 유구한 역사가 입증되었다. 그런가 하면 임진강 일대는 한반도에서 가장 최근 지질 활동이 이뤄진 곳이다. 협곡 아래는 수억 년 전 중생대 암석이지만, 흘러 내려온 용암이 식은 현무암의 주상절리와 판상절리 절벽은 신생대의 것이다. 2003년 서울대팀의 연구 결과, 구석기인들이 생활한 전곡리 구석기 유물 퇴적층 위를 용암이 덮친 사실이 확인됐다. 그래서 연천 임진강 일대는 인류학적으로는 가장 오랜 지역이지만 지질학적으로는 가장 젊은 지역이다. 올해 6ㆍ25에는 역사뿐만 아니라 과학까지 함께 공부할 수 있는 호로고루를 찾아보자.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4. 순창원·수경원·대빈묘

살아도 한, 죽어도 한 순창원의 공회빈 윤씨 능(陵)은 가끔 찾는 이가 있어도 원(園)은 찾는 이 없이 쓸쓸하다. 대부분 사람은 원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조선 왕실의 무덤은 품격에 따라 능, 원, 묘로 구분하고, 왕의 생모나 세자, 세자빈의 무덤을 원이라 불렀다. 세자나 세자빈은 젊어 죽은 이들이 많으니 원마다 애달픈 사연이 없을 리 없다. 서오릉 순창원에 묻힌 공회빈(恭懷嬪) 윤씨의 삶이 그랬다. 묘호 공회빈이 알려주듯이, 남편인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順懷世子)가 13살에 죽은 뒤 30년을 수절하다 남편 곁에 묻혔다. 아직 부부의 정을 깨치기도 전에 죽은 어린 남편 때문에 궁궐 한편에서 30년을 수절하며 마음고생 한 셈이다. 죽어서도 편치가 않았다. 1592년 3월 창경궁 통명전에서 사망해 창경궁에 빈소가 차려졌는데, 하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덜 떨어진 조선 왕 선조는 급히 한양 도성을 비우고 달아났다. 당시 수행 인원이 10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황망한 몽진에 누가 30년 전 남편 죽은 여성의 시신을 챙겼으랴. 이듬해 선조가 한양에 돌아와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왜군이 짓밟고 간 궁궐에서 찾을 수 있나. 사평(司評) 이충이 창경궁의 후원인 함춘원, 지금의 서울대병원 자리에 시신을 묻었다는 말은 있었으나, 이충 역시 죽어 물어볼 데조차 없었다. 죽은 지 10년이 지나서야 선조가 공회빈의 신주만 봉안해 순회세자와 합장했다. 공회빈의 모진 운명 2막이다. 병자호란 때 신주마저 분실해 순창원에는 공회빈의 빈 관만 합장하니 이게 3막이다. 그리고 지난 2006년 도굴 사건까지 벌어지니 이게 모진 운명 4막이다. 어찌 여인의 삶과 죽음이 모질 수가 있을까? 약소국에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하필 조선조에서도 무능한 지도자의 시대에 결혼하고 죽어 한은 더욱 깊으니 어찌 애달프다 아니 하리. 호강하며 살고 지고 수경원의 영빈 이씨 수경원(綏慶園)의 주인공은 순창원과 전혀 딴판인, 운명의 수혜자다. 영조 이금(李昑)의 총애받는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暎嬪李氏). 어려서 입궁해 영조 이금의 30년 총애를 받으며, 사도세자와 화평, 화완 등 다섯 공주를 낳았다. 천한 무수리 소생인 이금은 스스로도 천출 후궁을 총애했고, 12명 딸 가운데 정비 소생은 하나도 없었다. 이금은 화평과 화완을 특히 사랑해 출가하고 나서도 궁중에 머물게 하고, 자주 그 사가에 행차했다. 화평이 딸을 낳다 죽자 정사를 내팽개치고, 슬픔이 과하다고 간하는 신하를 파직하니 딸 사랑이 끝을 몰랐다. 반면 사도세자를 극도로 미워했다. 이금이 영빈을 덜 찾을 즈음, 사도세자가 반역을 꾀했다는 고변(告變)이 올라왔다.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까지 유언비어를 옮기며 처분을 간하니, 이금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였다.(壬午禍變) 영빈은 아들이 죽고도 2년을 더 살다가 69살로 세상을 떠났다. 이금은 후궁 제일의 예로 장례하고 이듬해 의열(義烈)이란 시호를 추증하니, 국왕보다 후궁이 먼저 시호를 받는선시지례(宣諡之禮)다. 원래 영빈이 묻혔다 옮겨간 연세대 옛 무덤 자리에는 루스 채플이 들어섰다. 영빈은 살아 조선왕의 총애를 받고 죽어 서양 하느님을 가까이 모신 셈이다. 세자빈으로 간택됐지만, 소생 없이 청상과부로 수절하고 죽어 시신도 못 찾은 빈 무덤 신세인 공회빈과 너무도 대비된다. 대빈묘와 풍운의 여주인공, 부침 잦은 생과 사 장희빈 대빈묘(大嬪墓)의 주인공은 가장 유명한 후궁 희빈이다. 장옥정(張玉貞)이란 본명이 전해진 자체로 집안도 상당하고 본인 역량도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역관(譯官) 장형(張炯)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한다. 조부 장응인(張應仁)과 외조부 윤성립(尹誠立)이 역관으로 정3품, 종4품 역관이었고, 당숙 장현(張炫)은 역관의 수장 수역(首譯)을 지낸 거부였다. 어린 나이에 궁중 나인으로 뽑혀 입궁한 뒤 타고난 미모와 재력으로 숙종의 총애를 받고, 왕자 윤(?)을 낳으니 후의 경종이다. 집안 내림으로 영리하고 눈치 빠른데다, 이재(理財)와 외국어 실력, 정국을 보는 눈까지 갖춰 조선조 국왕 가운데 나름 똑똑하다고 자부한 숙종을 완전히 휘어잡았다. 소설가 윤승한은 역사소설 『장희빈』(1950)에서 남인이 희빈의 미모를 이용해 조정을 장악했다든가, 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고 아들 경종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등 근거 없는 이야기를 소설적 흥미를 위해 많이 삽입했다. 1970년대 초 라디오 연속극 『왕비열정』도 이를 많이 인용해 희빈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그녀는 악녀가 아니었고, 영리하고 유능한 후궁이었을 뿐이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 희빈의 인생도 바람 잘 날 없었다. 출궁했다 환궁하고, 왕후로 등극했다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아들 다음 즉위한 영조에게는 사약을 받았다. 죽은 뒤 경기도 광주 진해촌(오포)에 매장됐다가, 1969년 오늘날 서오릉으로 옮겨졌다. 대빈묘(大嬪墓)라 불리는 것은 아들 경종이 생모 희빈을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한 때문이다. 숙종 조 권력의 부침은 후에 다시 서오릉편에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3. 남한산성

역사를 한두 사건이나 한두 인물의 이야기로 단순화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한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이나 인물은 있는 법이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역시 병자호란이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면, 당시 중국 대륙은 농경국가인 한족의 명(明)에서 유목민족인 여진의 청(淸)으로 주인이 바뀌고, 일본은 140년 전국시대가 끝나고 도쿠가와 막부 정치가 시작한 직후였다. 조선은 건국 200년을 지나면서 사화와 당쟁, 잦은 반정과 역모 조작 사건,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소진된 상태였다. 중국, 일본은 청년 국가인데, 조선만 말기 국가였다.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지도자의 차이도 컸다. 청나라는 태조 누루하치, 태종 홍타이지, 섭정 도르곤 3대에 걸쳐 영웅이 집권하지만, 조선은 무능할수록 왕위에 더 가까웠다. 연산부터 중종, 인종, 명종, 선조, 광해를 거쳐 인조까지 광해군 외에는 대부분 방탕하거나 병약했고, 아니면 의심증후군에 우유부단했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역량으로 치열한 경쟁을 뚫고 황위를 계승한 명민한 황제였지만, 인조 이종(李倧)은 서인의 반란에 얹혀 왕위에 오른 발언권 없는 우둔한 왕이었다. 국가와 지도자 모두 뒤지니 전쟁 전에 이미 승부가 나 있었다. 홍타이지는 중원 전쟁을 지원할 3만 병력과 전마 3천 필 요구가 거부당하자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군은 한양으로 직진하는 청군의 후미를 교란하지도 않았고, 조선 조정은 강화 몽진도 늦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것은 남한산성에 비축된 양식이 바닥난 50일 만이었다. 한반도의 대륙군에 대한 항쟁 기간은 점점 짧아진다. 기원전 2세기 고조선은 한나라군에 2년을 버티고, 고구려는 수, 당과 200년 간 항쟁해 대부분 이겼고, 7세기 백제는 임존성을 근거로 4년간 부흥 운동을 펼쳤다. 8세기 통일신라는 당나라 10만 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문약하다고 평가된 고려조차 세계제국 몽골에 근 20여 년을 버텼는데, 전주 이씨의 17세기 조선은 변방국 청나라군에 두 달 못 돼 항복했다. 아들 소현세자를 의심한 인조 소설이든 연극이든, 영화든 명칭이 무엇이든 모든 드라마는 위기 상황에서 인간 군상이 드러내는 갈등 구조를 묘사함으로써 성립한다. 갈등이 심각할수록 극적 효과는 크다. 병자호란은 드라마 배경으로 최고다. 떠오르는 청과 기울어가는 명, 젊고 기민한 청과 늙고 느린 조선의 대비는 구조적 모순이다. 발언권 약한 왕과 목소리 높은 서인 조정, 주전파와 주화파는 조선 갈등의 큰 틀이다. 이상과 현실이 괴리될수록 간신의 발호와 영웅의 비운은 더더욱 대비되니, 조선의 갈등은 더욱 복잡하면서 구체화된다. 무능한 부왕 인조와 명석한 장남 소현세자, 요사스런 총희(寵姬) 조 소용과 충직하나 경계 받는 세자빈 강빈, 중앙의 권간(權奸) 김자점 대 변방의 용장(勇將) 임경업. 그러나 조선은 갈등조차 모두 국운을 해치는 방향으로 해소한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영민해 왕위를 위협할 가능성을 경계했고, 후궁 조 숙원(趙淑媛)은 이를 부추겨 소현세자 부부와 아들 삼형제를 모두 죽인다. 얼마 후에는 중앙의 권간 김자점이 변방의 용장 임경업을 죽인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안타까운 이야기는 소설 임경업전으로 재구성됐다. 김자점과 임경업의 대비는, 중국 송나라의 간신 진회(秦檜)와 충신 악비(岳飛) 장군을 연상케 한다. 악비는 오늘날에도 관우와 함께 중국 민중의 절대적 숭앙을 받지만, 오늘날 조선조 임경업을 기억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너무나 허전하다. 그나마 효종 즉위후 김자점과 조 숙원이 역모를 꾀하다 죽는 반전이 있어 최소한의 위로를 준다. 호란 당시 주전파의 핵심 김상헌도 안동 김씨요, 청군의 밀정 노릇을 한 권간 김자점도 안동 김씨다. 같은 뿌리에서 나서 자랐다 해서 같은 줄기나 잎은 아니다. 신라 문무왕 때 첫 축성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백제 온조왕 13년에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것이 처음이라 기록돼 있고, 택리지는 백제 온조왕의 고도라 소개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때 한산주의 주장성이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비정된다. 광주산맥 주맥에 낮이 긴 산 일장산이 있고, 남한산성이 산 능선을 병풍처럼 둘렀다.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의 연주봉(467.6mm, 동의 만월봉(502m)과 벌봉(515m), 남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해 8㎞ 성벽을 쌓았다. 자연석 큰 돌을 아래, 작은 돌을 위에 얹은 석성이다. 바깥은 경사가 급한데 안은 완만해, 적의 접근은 어려우나 방어와 농성에 유리하다. 봉암(蜂巖), 한봉(漢峰), 신남(新南) 등 외성 셋과 옹성 다섯이 연결되어 하나가 뚫려도 다음 방어망이 기다린다. 원성 성벽의 안쪽 둘레는 6천290보로 17리 반이고, 바깥 둘레는 7천295보로 20리 95보며, 동서남북 4대문과 4장대를 세우고 옹성과 치성 각 5곳, 포루 7개, 암문(暗門) 16개를 냈다. 내부 면적은 15만 9천859평. 우물 80, 샘 45 등을 설치하고 매염처(埋鹽處), 매탄처(埋炭處)를 파서 소금과 숯을 비축했다. 안에 수어청을 두고 행궁 73칸, 하궐 154칸 합해 궁궐 227칸을 짓고, 종묘 건물로 사용할 좌전(左殿), 사직을 옮길 우실(右室),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도 갖추었다. 관아를 앉히고, 창고를 들였는데, 지금 남은 건물은 동ㆍ남문과 서장대(將臺), 지수당, 몇 안 된다. 4대문과 수어장대를 비롯한 남한산성 일대는 2014년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2. 구리 동구릉

따그르르르 또그르르 따그르르르 또그르르 딱따구리가 부리로 소나무 등걸을 두드린다. 능역 안에서는 들리지 않다가도 능역을 나와 모퉁이를 돌 때면 들린다. 그것도 희한한데, 1초에 최고 20번까지 나무를 두드린단다. 그러고도 부리가 머리가 목이 남아난다는 게 신기하다. 영혼과 이성을 일깨우는 딱따구리 소리를 들으며 노동절의 동구릉 참배를 계속했다. 옛 왕조 시절 성곽과 궁궐, 왕릉 조성은 백성에게는 어마 무시한 부담이었다. 생업에 종사할 시간에 무상으로 노동력을 빼앗기니 사연도 한(恨)도 많았을 게다. 기리고 존중할 것이 있다면, 나라 잘되기를 빌며 역사(役事)에 참여한 백성의 원력이요 정성일 것이다. 그 민초들을 기리며 묵례를 올리자.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 살아서는 충북 진천에 머물고 죽어서는 경기도 용인에 거하라는 뜻이다. 현대에는 국내 최대 재벌의 별장이 들어서고, 요즘은 수용성(수원용인성남)이라 중대형 아파트가 꽉 들어차니 생사불문 용인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생거한양, 사거구리였던 모양이다. 궁궐과 종친 사저는 한양에, 왕과 왕비 17명 능이 구리 동구릉에 빼곡하니 말이다. 동구릉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중국의 번왕(藩王)이면서 백성 앞에서는 황제로 허세를 부리던 조선왕의 2중적 지위와 고민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명당과 국운의 관계 2중으로 조성한 봉분도 조선의 2중적 지위를 말하거니와, 조종(祖宗), 왕의 묘호가 대표적이다. 엄격한 규칙은 없지만 대체로 나라를 처음 일으키거나 중단된 국통(國統)을 다시 일으킨 왕에게 조를 올리는 것이 오랜 법도였다.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무열왕 김춘추만 묘호(太宗)를 가졌고, 고려는 태조 왕건에게만 조의 묘호를 올렸다. 중국에서도 통일왕조에서 창업주 아닌 천자 가운데 조는 명나라 영락제[成祖], 청나라 순치제[世祖], 강희제[成祖] 단 3명뿐이다. 그만큼 귀한 묘호였는데, 조선에 와서 어마어마하게 인플레 된다. 조선은 태조 이성계 외 세조 이유선조 이균인조영조정조순조 등 조가 7명이나 된다. 선종(宣宗)을 선조로, 영종정종을 영조정조로, 순종을 순조로 바꾸기도 했다. 여기 묻힌 9명 왕 가운데 묘호에 값할 임금은 태조 단 한 명이다. 국운 쇠한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새 왕조를 개창했으니 잘 봐 주면 태조라 부를 만하다. 나머지 왕들은 과분한 묘호로 스스로 숨이 막힐 것이다. 선거 때마다 바꿔 유권자들이 기억도 하기 어려운 요즘 정당명들 같다. 이름만 바꾼다고 꼴찌가 1등 하고, 흉악범이 위대한 성인이 되나? 그 아첨의 시대에도, 윤근수(尹根壽), 정경세(鄭經世) 등 의식 있는 사림 출신 신하들은 묘호 개칭에 반대했다. 아, 기개 넘친 조선의 사림이여!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조선 왕실의 음택 동구릉, 동쪽 언덕 아홉릉에는 9왕 8왕비가 묻혀 있다. 1408년 이성계가 붕어한 뒤 참찬 김인귀의 추천으로 태종 이방원 옹립의 훈신 하륜이 정한 것이 시작이다. 1855년 철종이 24대 헌종의 아버지를 익종으로 추존해 수릉에 장사지냄으로써 완성된다. 왕릉을 한데 모으는 것은 후손들이 관리하고 참배하기 편하게 하라는 이성계의 뜻이었다 한다. 옛적에는 한때 동오릉, 동칠릉이라 불린 적도 있었다. 59만 평을 헤아리는 광대한 숲에 건원릉과 수릉 외에 5대 문종과 왕비의 현릉(顯陵), 14대 선조와 두 왕비의 목릉(穆陵), 18대 현종과 왕비의 숭릉(崇陵), 21대 영조와 계비의 원릉(元陵), 24대 헌종과 두 왕비의 경릉(景陵) 등이 자리잡았다.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대부분의 능역은 접근 금지되고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릉만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쉽다. 동구릉은 소중한 역사의 현장이며 교육과 연구의 소재며, 자연과 인간이 교감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재다. 굳이 그런 가치를 따지지 않더라도 숲과 개울, 너른 풀밭으로 도시 생활에 지친 서울시민에게는 귀중한 휴식 공간이 된다.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들이 어떻게 이와 같은 천작지구(天作地區) 하늘이 지어낸 자리가 있는가? 필시 인간의 조산(造山)일 것이다.라고 찬탄하고, 풍수가들이 모두 동의한 명당이다. 이성계가 천하명당 동구릉의 진혈에 묻히고, 37살로 즉위 2년 여 만에 요절한 이성계의 증손자 문종도 그 옆 명당자리에 묻혔다. 그러나 골육상쟁은 끝이 없었다. 능토가 마르기도 전에, 이성계의 증손자 이유(세조)는 조카 단종과 동생 안평대군을 죽이고 집권했다. 이성계의 5대손 성종은 첫 왕비 한씨가 후사 없이 죽고, 아들 형제를 낳은 계비 윤씨는 폐위돼 사사된다. 이성계의 6대손 연산군은 부왕 성종의 후궁들과 배다른 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서 쫓겨난다. 선조는 정여립 모반 사건을 조작해 영호남 선비 1천500명을 죽이고 임진 정유 왜란을 초래했다. 명당에 살고 묻히는 것보다, 후손이 선을 행하고 덕을 쌓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것이 가정의 달을 맞는 우리의 자세겠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1. 수원 화성

■방어기능 없는 조선의 성 대포가 본격화되기 전, 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강력한 방어 시설이었다. 성은 도시방어와 주민 보호가 기본이고, 이를 위해 보조 시설물이 필요하다. 유럽과 중국, 일본의 성 대부분이 옹성, 해자와 돈대, 치성, 여장과 총안, 현안을 갖추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성들은 낙제 수준이다. 전란 때마다 하루도 못 버티고 뚫린 한양 도성부터 그렇다. 게다가 중국 역대 왕조는 번국(蕃國) 조선의 축성까지 까다롭게 간섭했다. 조선 천지에 제대로 갖춘 성은 남아나기 어려웠고,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성이 적을 막아 지키기 위한 것인가? 적을 만나면 버리고 달아나려는 것인가? 나는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성이라 할 것이 하나도 없다. (所謂城郭者 將以守禦歟 抑遇敵則棄而去也 果爾 吾不知己 否則國無一城焉) 첫째, 벽돌은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크기가 균일하니 설계대로 정밀하게 축성할 수 있고, 시간도 절감된다. 왜 벽돌 아닌 돌로 성을 쌓는가? 둘째, 성이 인구보다 너무 커서 수비하기 불편하다. 청나라 주요 도시 영평성도 둘레 10리에 훨씬 못 미친다. 셋째, 성 바깥벽은 돌을 단단히 쌓았으되, 안벽은 허술하다. 넷째, 해자도, 현안도 없어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무용지물이다. 다섯째, 옹성이 없어 전투 시 성문이 바로 뚫릴 것이다. 수원 화성은 실학자들의 축성론이 상당 부분 반영돼, 전통 방식에 중국과 서양의 최신 기술이 어우러진 건축물이 되었다. 영정조 연간 되살아난 경제력과 기술력이 2년 반 남짓한 짧은 기간에 대역사를 가능케 했다. 당시 수원 인구나 경제 규모, 전략적 가치와 비교하면 규모는 작지만, 구조물을 과학적이고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추었다. ■정조 기획하고, 정약용 설계하다 기능과 경제성, 심미적 요소라는 디자인의 3원칙이 잘 살아난 작품 수원 화성은 대한민국 사적 3호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축성 책임자인 좌의정 채제공, 현장소장인 감관 조심태보다 더 큰 이바지를 한 인물은 기획한 정조와 설계자 다산 정약용이었다. 조선 왕조에 드문 명군과 조선 500년 최고 천재의 합작품인 셈이다. 정조는 효도를 명분으로 당쟁을 청산하고 왕도 정치를 구현하고 싶었다. 여차하면 한양 도성을 버리고 수원화성을 근거로 중원의 대군과 맞싸우고 싶었다. 정조 이산(李)은 성격 차, 정견차로 할아버지 영조에게 밉보여 일찍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와 전혀 다른 인물이다. 서고모(庶姑母)들의 견제와 방해를 뚫고 대권을 잡은 속 깊은 아들이다. 아버지를 참소한 인물을 차례로 치죄(治罪)해 제대로 셈을 치러준(, 셈 산) 효심 깊은 아들이다. 옥에 티가 있었다. 후에 금정 찰방, 오늘날로 치면 금정역장쯤인 한직으로 좌천된 다산이 임지로 가면서 화성 옹성 문 위에 구멍 다섯 개가 가로로 뚫린 것을 발견했다. 오성지(五星池)는 적이 성문을 불태우려 할 때 물을 부어 막는 것이니, 구멍을 세로로 곧게 뚫어 성문 바로 위에 놓아야 쓰임새가 있다. 감독자가 도본만 보고 구멍을 가로로 뚫었으니, 이른바 그림만 보고 천리마를 찾는 격이구나.(五星池者, 將以灌水禦賊之焚門也. 直穿其穴, 正當門扇之上, 然後方可有用. 董役者, 只見圖本, 橫穿其穴, 此所謂按圖索驥者也.) ■아름다운 수원 화성의 멋 정조는 계산에만 밝은 게 아니라, 심미주의자요 낭만파였다. 착공 전인 1793년 12월 후일의 공사감독관 조심태에게, 성곽의 기초와 치성, 옹성, 현안 등 부속시설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화성(華城 화려한 성)답게 아름답게 축성하라고 지시한다. 성루가 웅장하고 화려해 꾸며 보는 이의 기가 꺾인다면,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然則城樓雄麗, 使觀者奪氣, 亦爲守城之大助)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른다, 군사지휘소인 동북각루(東北角樓)의 공식 이름이다. 너무나 여유롭고 낭만적인데, 중국 송나라의 거유 명도(明道) 선생 정호(程顥)의 춘일우성(春日偶成) 칠언절구에 유래한다. 그 첫머리 운담풍경(雲淡風輕), 구름은 맑고 바람은 가벼우니.로 시작하는 가사가 조선 후기 가사집 청구영언, 해동가요에 실리고, 해방 후에는 박녹주, 이봉희가 불러 유성기 녹음까지 했단다. 봄날 풍류에 시대와 학문의 깊이는 상관없구나. 다음은 춘일우성 원시. 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구름 맑고 바람 가벼운 한낮에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 꽃 찾고 버들 따라 시내 건너네, 방인불식여심락(傍人不識余心樂) 사람들은 내 즐거운 마음 모르고, 장위투한학소년(將謂偸閑學少年) 한가함을 탐내 소년처럼 논다 하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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