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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20. 경북 봉화 ‘계서당’

계서당(溪西堂)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몇 년 전, 천 년 고찰 봉화 축서사에 법력 높은 큰스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친견하는 길이었다. 시골길 왼편에 팻말이 붙어 있었다. 이몽룡 생가. 아니 이몽룡이면 춘향전이고, 춘향전하면 전라도 남원인데, 웬 이몽룡 생가? 궁금하지만, 한동안은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경북 봉화라는 지명조차 서울 사람에게 설다. 기껏해야 송이 축제요, 좀 안다는 사람도 청량사, 많이 알면 축서사나 무여스님을 기억하는 정도다. 드디어 인연이 닿았다. 봉화 지평리 계서당 창녕성씨 종택, 조선 중기의 청백리 성이성(成以性)이 나고 자란 고택이다. 본래 정면 7칸, 측면 6칸의 터진 ㅁ 자형의 50칸 규모니 대가의 풍모가 있다. 원래 초가를, 성이성의 장남 성갑하가 일대에 여유 있기로 소문난 닭실마을 권씨에게 장가가면서 처가에서 한 살림 받아 크게 넓히고 기와도 얹었다는 것이다. 6칸 솟을대문 안에 중문간채와 붙은 사랑채가 정면에, 뒤에 자형의 안채가 보인다. 정침 오른쪽 위에 사당은, 수령 500년의 구부러진 소나무가 지킨다. 사랑채 축대를 기와로 웃는 얼굴 모양으로 장식한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장식이 없어도, 경사지 건물 특유의 위압감이 있다. 사랑채는 팔작지붕으로 누마루와 툇마루가 붙어 있다. 마루 모서리에 판벽으로 막아 노인들이 급한 볼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축대가 워낙 높아 야간에 실외로 오가기는 위험했을 것이다. 안채는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이 있고, 양쪽 날개 채에는 다락이 있다. 다락은 큰일 때 음식재료를 보관하고 또 손님이 몰리기 전에 미리 음식을 차려 준비하는 공간으로 썼다고 한다. 손님도 남녀가 있어서, 상차림 준비도 남녀를 구분했다는 점이 재미있다. 일부에서 성이성이 지었다고 잘못 소개하나, 계서당은 아버지 성안의가 짓고 아들 성이성으로 이름이 나고 손자 성갑하가 키웠다. 성안의가 임진왜란때 고향 창녕에서 의병을 일으키며 비교적 안전한 봉화에 새로 거처를 마련해 부모를 모시니 이것이 계서당의 시작이다. ■계서당 일으킨 성안의-성이성 부자 성안의-성이성 부자는 공통점이 많다. 아버지는 한강 정구, 아들은 우복 정경세라는, 당대를 대표하는 거유에게 제대로 배우고 늦지 않은 나이에 과거에 등과했다. 둘 다 국가가 공인한 청백리에 직언 서슴지 않는 대쪽이라 중앙에서 빛 못 보고 외직을 전전한 것도 같다.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의병 일으키고 아들은 병자호란에 출전해, 국난 극복에 앞장선 것까지 비슷하다. 다만, 성이성이 로맨티시스트란 점이 다르다. 연세대 설성경 명예교수에 의하면 성이성이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이며 이것이 학계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성이성은 암행어사를 네 차례나 역임한 암행어사 전문이었다.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13살에 남원에 가서 5년간 머무르며 기생을 사귀고, 나이 들어 암행어사로 호남 지역을 순행하다가 남원을, 그것도 두 번이나 들렀다. 4대손 성섭은 교와문고에서 금준미주시의 실제 작자가 성이성이라며 암행어사 출두 장면을 묘사한다. 樽中美酒千人血 / 盤上佳肴萬姓膏 / 燭淚落時民淚落 / 歌聲高處怨聲高 (준중미주천인혈 / 반상가효만성고 / 촉루락시민루락 / 가성고처원성고) 좋은 술은 천 사람 피요 / 맛난 안주는 만 백성 기름이라 / 촛농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 노래 소리 높으니 원성도 높아라). 관리들이 돌려 보고 의아해 할 즈음 서리들이 암행어사를 외치며 달려들고, 여러 관리는 일시에 흩어졌다. 당일 퇴출된 자가 여섯이었다. ■관물은 작대기 하나라도 청백리 혈통 잇는 후손들 성이성은 합천담양창원진주강계 등 다섯 고을을 맡아 다스렸다. 합천에서 창고를 헐어 빈민을 구휼하고, 담양에 방제림을 조성해 홍수를 막고, 진주에서 암행어사 접대를 거부해 외려 좋은 평가를 받고 외투와 속옷을 하사받고, 강계에서 인삼 세금을 면제해 관서활불(關西活佛)로 불렸다. 종손 성기호 씨가 일찍 밭일하러 나가고 혼자 집을 지키는 종부는, 안채 마루 시렁에 걸린 장대를 가리킨다. 제주도 출장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아 장대가 배에 실린 것을 뒤늦게 발견했고, 그래서 장대를 바다에 던졌고, 장대가 배를 따라오고, 뭍에 닿고 나서 장대를 건져 올려 가보로 전하고 있다. 나무 장대 하나도 손대지 않는다는 청백리 가문다운 가보 자랑이다. 권신이 천거해도 출사하지 않고, 왕자인 대군이 불러도 만나주지 않는다. 임금이 입 가벼운 사관을 치죄하려든 데도 직을 걸고 사직하고 낙향한다. 외가 근처에 초당을 짓고 책을 읽으니 그게 계서당인데, 숙종이 세자 시절 내려와 유하고 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계서당을 어와정이라고도 부르고 뒷산 이름이 왕산이라는 그럴싸한 설명이 뒤따른다. 조상이 청백리라서인가, 종손 성기호 씨는 2014년 어사화, 교지, 암행록등 귀한 유물 700여 점을 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9. 전남 담양 ‘소쇄원’

보길도의 윤선도나 다산 초당의 정약용은 명문가의 준재니 별로 궁금할 게 없었다. 소쇄원은 달랐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무슨 돈이 있어 대대로 신선놀음 하고 사는지 궁금했다. 소쇄원은 조선 중기 문인인 양산보라는 약관 열일곱 청년이 구상해 10년 만에 지었다. 열다섯에 상경해 조광조의 제자가 되고, 열일곱에 문과에 급제하나 나이 적다고 합격장을 받지 못했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열일곱에 출세를 접고 은거를 결심하고 당호까지 소쇄라 정했다니, 여간 조숙한 인물이 아니다. 화순 유배 한 달 만에 사약을 받은 중죄인 조광조를, 낙향해 있던 전 교리 양팽손이 찾았다. 조광조의 제자인 재종동생 소쇄 양산보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스승이 죽자 양산보는 소쇄원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여러 고을 수령을 지낸 재력 있는 장인 김윤제로부터 크게 한 몫 떼 받았다. 김윤제는, 당시만 해도 순수했던, 집안이 몰락해 오갈 데 없던 소년 정철을 거둬 먹이고 가르친 품 넓은 관후 장자였다. 인허가와 인력 자재 공급은 내외종 형 전라도 관찰사 면앙정 송순의 지원을 받았다. 소쇄, 씻은 듯 맑고 깨끗하다 여름 소나기가 대숲 두드리는 소리 바람에 이 댓잎 흔들리는 소리 소쇄, 씻은 듯 맑고 깨끗하다, 중국 남북조 때 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이다. 소리 내 읽어 보라. 무더운 여름 한줄기 소나기가 대숲 두드리는 소리, 한 자락 바람이 댓잎 흔드는 소리 같지 않은가? 문득, 한자는 표의문자라는 언어학에 아니, 표음문자!라고 억지를 부리고 싶다. 夫以耿介拔俗之標(부이경개발속지표) 무릇 지조와 절개는 세속을 뛰어넘고 蕭灑出塵之想(소쇄출진지상) 마음은 맑고 깨끗해 홍진을 뛰어넘으며, 度白雪以方潔(도백설이방결) 몸은 흰 눈을 갓 건너온 듯 결백하고, 干靑雲而直上(간청운이직상) 뜻은 푸른 구름 넘어 바로 하늘에 다다르니 吾方知之矣(오방지지의) 나는 은자가 그런 것이라 믿었다. 스케일도 커서 정자 8개를 세우고 나무와 꽃, 귀한 풀을 22종류나 갖춰 심으니, 실의에 찬 호남 명유와 묵객에게는 더없는 힐링 공간이요 문화 살롱이었다.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 규암 송인수, 미암 유희춘, 청련 이후백, 태헌 고경명. 무지한 자들은 소쇄원을 자주 송강 정철과 연결하나, 소쇄원을 드나들던 호남 선비 천 명이 기축옥사 때 주심관 정철의 편파적 판정으로 죽어나간 사실을 알고나 있는가? ■ 소쇄원, 호남 명유의 문화 살롱,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사랑 공부는 이쯤 하고 이제 몸으로 즐길 때. 울창한 대숲이 끝나고 소쇄원 들어가는 무지개 다리 홍교는 속세와 선계의 경계다. 거기 시멘트를 덕지덕지 붙인 천박은, 동인백정 정철을 소쇄원에 갖다 붙인 무지와 쌍벽을 이룬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면 대봉대(待鳳臺), 봉황을 기다리는 정자다. 임금을 상징하는 봉황을 초가에서 기다린다는 설정이 의미심장하다. 소쇄원 48영을 쓴 김인후를 빼고 소쇄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속된 말로 앙꼬없는 찐빵이다. 하서 김인후는 경상도에 퇴계라면, 전라도에 하서라, 호남 유학의 태두다. 벼슬은 낮아도 대학자에 문장가로 인종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고 조경도 일가견 있었다. 양산보와 일찍부터 교유가 있었고, 나중에는 딸을 양산보의 차남 양자징과 맺어준다. 인종 붕어 후 낙향해 소쇄원을 드나들며 시와 글을 짓고 썼다. 비운의 왕 인종와의 신분 떠난 우정은 후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오방색 담장에 애양단(愛陽壇)이 보인다. 애양 볕을 사랑한다. 기축옥사로 제자를 몽땅 잃고도 임금에 대해 구름 낀 볕뉘도 쬔 일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지다 하니라 읊은 남명 조식의 심사가 애달프다. 원래 애양은 효를 상징하는 효경의 표현이니, 농암 이현보가 94살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려고 안동 도산의 집에 애일당을 들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곡문(五曲門), 주돈이가 머물던 구곡(九曲)에 대한 겸양인가? 오방색 담장 아래 물이 다섯 번 굽이치는 수구다. 공간은 나누되 물은 끊지 않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보여주는 한국 원림철학의 정수다. 오곡문을 지나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계곡을 사이에 두고 광풍각과 제월당이 마주 서 있다. 밝은 바람 광풍각은 독서 공간이요, 비 갠 날 달 제월당은 생활공간이다. 흉회쇄락 여광풍제월(胸懷灑落 如光風霽月) 마음이 맑고 깨끗하기가 밝은 바람과 비 갠 날 달 같다. 소동파와 쌍벽을 이뤄 소황(蘇黃)이라 불린 남송의 대시인 황정견이 성리학의 아버지 주돈이를 평한 데서 유래한 당호요 원림이름이다. 소쇄원이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중수한 3대 장주 손자 양천운도 계당상량문에 주돈이의 무이를 언급했다. 이처럼 소쇄원 역대 장주들은, 퇴계 이황 선생만큼이나 매사에 주돈이를 의식했다. 양산보 가문은 일본과 철천지원수다. 정유재란 때 소쇄원이 파괴되고, 2대 장주 양자징의 아들딸 가족이 왜군에 학살당하고 살아남은 손자녀들은 끌려갔다. 300년 뒤 일제는 다시 소쇄원 앞에 신작로를 내고, 정자는 3개만 남기고 허물어버렸다. 조선 영조 때 제작된 소쇄원 목판도에 만평 넘게 묘사되던 원림은, 천 평 남짓으로 쪼그라들었다. 축소하고 훼손해도, 심지어 일본 오사카에서 심사했어도, 소쇄원은 1992년 세계정원박람회 대상을 차지했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8. 전남 영광, 연암 김씨 종택

연안김씨 직강공파 종택, 영광 매간당 고택으로 드는 마을 어귀, 솔숲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광은 서해가 10㎞ 상간이니 동고서저(東高西低)가 분명하다. 10㎞ 떨어진 동쪽 태청산(590m)을 제외하면, 100~200m의 나지막한 산들이 동남북으로 에워싼 길지, 먼 북쪽에 불갑천이 동에서 서로들을 휘감아 흐르는 길지, 뒷산의 정기가 모여 약간 부풀어 오른 언덕에 연안김씨 종택이 자리 잡고 있다. 매화꽃이 떨어진 형국(梅花落地)의 길지이며, 학(鶴)의 형상이란다. 김영(金嶸)이 16세기 중엽에 입향하면서 집터를 잡고 고종 초에 집을 세웠다. 일반적 배치와 달리 사랑채, 안채가 북향이다. 배산임수에 좌청룡 우백호를 갖추고, 모든 건물에서 마을 앞 넓은 들을 바라본다. 대문이 큰 자랑이다. 2층 누각의 삼문 형식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중앙에 두 칸 대문, 좌우에 창고 그리고 계단실은 별도다. 공포구조도 관청이나 궁궐의 대문에서 볼 수 있는 외일출목, 내이출목으로 앙서(仰舌)의 살미첨차에 여의주를 문 용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2층 누각 정면에 걸린 삼효문(三孝門) 현판은 고종의 이복형 이재면의 글씨로, 3대에 걸친 지극한 효성을 나라에서 인정해 명정(命旌)을 내렸다. 살짝 가공한 자연석 기단 위에 정방형 주초를 놓고 높은 주좌를 만들어 웅장함을 더하고, 아름드리 소나무 기둥을 그대로 올려 자연미를 뽐냈다. 대문 한쪽은 기둥 간격을 약간 좁혀 평소 출입한다. 다른 쪽은 가마에 앉아 드나들기 편하게 폭을 넓히고 문턱도 낮추고 상부 인방엔 무지개처럼 위로 휜 부재를 사용했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하여 별당, 사당, 곳간채, 안팎 대문, 마구간, 헛간, 찬광, 정원과 연못까지 갖춘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기거하는 방보다 창고 공간이 훨씬 다양하고 많아, 너른 들과 낮은 산, 바다를 고루 갖춘 대가의 넉넉한 살림을 짐작게 한다. 사랑공간은 북쪽, 안공간은 남쪽으로 분리했다. 사랑공간은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 별당과 하인 집, 정원 둘, 연지 등으로 구성된다. 사랑채는 긴 장대석을 3벌대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을 얹고 원기둥을 세웠다. 민간에서는 흔치 않은 기법이다. 중앙에 두 칸 대청, 오른쪽에 한 칸 방과 툇마루, 왼쪽에 방 두 개와 윗방을 두었다. 전면 툇마루 끝에 사랑측간을 두고, 건넌방에 쪽방을 내서 안채로 연결하는 공간으로 사용한다. 빗살문 광창, 방을 연결하는 불발기창 무늬가 모두 예술적이다. 공부방인 별당 툇마루에서 한번 시선으로 연지와 행랑채, 담 너머 산을 볼 수 있다. 향교와 서원처럼 가운데 대청에 좌우 온돌방 구조, 전면퇴가 있어 방에서 오른쪽 끝 툇마루까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사랑채 정원과 중문을 지나면, 마당을 중심으로 ㄷ자 안채와 一자 아래채로 구성된 안채 공간이다. 정침은 4벌대 기단 위에 방주를 세우고 툇마루를 전면에 놓았다. 툇마루에 앉으면 아래채 지붕 너머로 들판과 건너편 산이 보인다. 곳간채는 맞배지붕과 우진각 지붕의 좌우 불균형이 흥미롭다. 아래채는 대청마루와 온돌방, 벽 있고 없고, 퉤 붙고 없고 등 용도에 따라 여러 형태와 구조로 아홉 칸을 구성했다. 연속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추구한 매력적인 구상이다. 연안 김씨는 조선조 500년 동안 등제자가 문과 171, 무과 174, 사마시 342명에 진충공신(盡忠功臣)이 24명, 1ㆍ2품 대관이 85명이니 국중대성(國中大姓)이라고 불린다. 나라가 잘되려면 자원 특히 인적 자원의 가동률을 높여야 한다. 폭넓게 인재를 발굴하고, 써야 한다. 민주화, 근대화가 별건가? 왕족에서 귀족으로 다시 일반 국민 공채로 인재풀을 넓혀가는 과정일 뿐이다. 우리나라는 봉건시대에도 공채였고, 현대에도 공채인 세계 유일의 나라다. 공채 덕분에 한국은 다른 제3세계와는 달리 일제의 압제와 6ㆍ25의 폐허 위에서 빠른 속도로 일어설 수 있었다. 최근 조국 수석이 불법적으로 자녀를 명문대 인기학과에 넣은 것은 한국의 최대 강점을 파괴한 행위라 할 것이다. 연안 김씨 집안을 소개하다 곁길로 새버렸지만, 연안 김씨 문중에는 아픔이 있다. 아버지 김흔에 이어 부자 문과 장원의 수재인 문중의 대표 인물 김안로(金安老) 이야기다. 문중에서는 김안로가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무고로 억울하게 죽었다 주장하나, 정사는 김안로를 권간(權奸)으로 묘사한다. 간신 김안로 권력을 쫓다라는 어린이용 역사책도 있다. 1527년 초 동궁의 은행나무에 머리를 불로 지진 쥐[灼鼠]가 걸렸다. 동궁 즉 왕위 계승자인 세자를 저주한 나무 조각도 함께. 대역죄나 다름없는 사건에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복성군(福城君)과 생모 경빈 박씨(敬嬪朴氏)가 혐의를 뒤집어썼다. 폐서인(廢庶人)됐다가 결국 사약을 받은 모자의 억울함이 밝혀진 것은 5년 뒤였다. 범인은 부마인 김희(禧)와 아버지 김안로였다. 김안로는 작서의 변을 일으킨 후 좌ㆍ우의정으로 권세를 누리며 정적들을 죽이고 학덕 높은 이언적 등을 귀양 보냈다. 당시 세간에서는 김안로 일파를 정유삼흉(丁酉三凶)이라 불렀고, 사서는 유자광, 임사홍, 남곤, 송익필, 이이첨 등과 함께 그를 조선의 대표적 간신으로 꼽는다. 오늘의 정치인이여, 역사를 두려워하라!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7. 경기 이천, 김좌근 고택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포근한 이천 들녘 한가운데 길로 잠깐, 왼편으로 깔끔한 신축 양옥들이 이어진다. 길이 끝나는 안쪽 널찍한 터에 큼지막하고 단정한 고택이 두 채가 나타난다. 조선말 안동 김씨 세도를 대표하는 인물 김좌근 고택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살지 않았다. 그의 묘소를 관리하는 재사 겸 별채로 쓸 겸 양자 병기가 공력을 들여지었다. 이 집과 좌근-병기 부자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관계는 최근 영화 명당으로 꽤 알려졌다. 세도 정치에 참여한 안동 김씨들은 안동 김씨라 불리지 않았다. 서울 장동(壯洞)에 몰려 살며 자신을 장김(壯金)이라 불렀다. 장동, 인왕산 동쪽 경복궁 서쪽으로, 조선시대에는 장의동(藏義洞, 壯義洞) 혹은 장동(壯金)이라 불리던 오늘날 청운 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다. 왕자 시절의 태종 이방원, 효령대군, 안평대군 등이 살고 세종이 태어난 조선 초 권력의 산실이었다. ■ 옛 영화는 가고 주춧돌만 남아-누대의 청백리에 문장가 집안 이천 김좌근 고택의 안채는 팔작지붕의 일자 집으로 정면 8칸, 측면 2칸으로 웅장한데,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잘 다듬은 돌기둥으로 주추를 놓았다. 지붕에 학, 연꽃, 구름무늬를 누비고, 벽과 담장을 기하무늬로 꾸민 등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안채 뒤로 별채 겸 사랑을 차단하는 담과 샛문이 있다. 역시 팔작지붕으로 멋을 낸 별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오른쪽에 한 칸 내루를 달아냈다. 별채의 정제된 다양한 문살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집 전체가 웅장하고 어디 나무라기 어렵게 격조 있는데 뭔가 허전하다. 그렇다. 원래 99칸의 거택으로, 남아 있는 안채와 별채를 행랑채가 통째로 둘러싼 구조였는데, 옮겨 세우는 과정에서 안채와 별채만 남았다고 한다. 두 줄로 나란히 남은 잘 다듬어진 주춧돌이 전성기의 영화를 말해준다. 김좌근의 장동 김씨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노론의 명문이었다. 은진 송씨, 송시열, 송준길과는 급이 달랐다. 김상용, 척화신 김상헌 형제로 시작해 김수흥, 김수항 형제, 김창집의 6형제 등 누대에 걸쳐 청백리에 문장가로 소문난 집안이었다. 좌근의 아버지 조순은 노론이면서도 정조의 신임이 두터워 어린 순조를 맡긴다는 유지를 받은 규장각 각신이었다. 좌근은 누님인 순조비 순원왕후의 지원을 받아 장동 김씨 세도의 전성기를 누린다. 판서 4자리에 영의정만 세 번 역임했으니! 좌근은 파락호 시절의 흥선대원군에게 용돈을 챙겨주는 여유를 보여 대원군 집권 후에도 명예롭게 천수를 누렸고, 사후에도 왕릉 자리에 꼽히는 이집 뒤 명당에 묻혔다. (필자가 항상 이야기하지만, 명당을 찾아 그 집에 살거나 누울 수는 있지만, 복을 얻는 것은 후손이 얼마나 덕을 쌓느냐에 달렸다.) ■ 국정 농단의 역사는 살아 있다-나합, 최순실, 그리고 오늘 좌근을 이야기하면서 나합 이야기를 건너뛸 수 없다. 타고난 미모에 노래와 춤이 대단해 좌근의 총애가 이만저만 각별한 게 아니었단다. 좌근이 다른 여인 쳐다본다고 따귀 올리고, 그러면서 본인은 다른 남자를 불러들이기 일쑤. 여기까지는 프라이버시라 치더라도, 나라 곳간을 제 쌈짓돈 쓰듯 쓰고 시야를 가린다고 민가를 허물었다. 뇌물 받고 죄인을 꺼내주고 돈 받고 벼슬을 팔 지경이니, 삼정승에게나 붙이는 합하(閤下)로 불렸다. 뜻으로나 예우로나 요즘의 각하(閣下) 격인데, 아무리 세도 정승의 첩이라도 일개 기생 출신 천첩에게 합하는 과했다. 나주 출신이라 나합(羅閤)이라 했는데, 하루는 좌근이 네가 세도를 부려 나합이라 불린다면서?하고 첩을 경계하려 했더니, 첩의 임기응변이 대단하다. 나합이 전각 합(閤)이 아니라 조개 합(蛤)입니다. 세인들이 자신을 나주 출신 조개로 비하한다고 역공을 펼친 셈이다. 그 후부터 세간에 두 가지 버전의 나합이 돌았다 한다. 합하와 조개. 최근 각하와 가카새키 파문을 연상케 한다. 이 이야기는 한 말의 열사 황현의 매천야록과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에도 언급된다. 김삿갓 류의 한시 한 수가 재미나 여기 옮긴다. 뜻도 뜻이지만 독음이 음미할 가치가 있다. 후손들은 이 집과 주변 땅 10만 1천500㎡를 2009년 서울대학교에 기증했다. 친일 매국노들이 일제로부터 받은 땅을 돌려 달라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고, 명색 장관 지명자의 가족이 나랏빚을 128번이나 독촉받고도 뭉개는 세상에 장동 김씨 후손들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6. 경북 예천, 예천 권씨 초간종택

정자는 계곡물이 휘돌아 흐르는 큰 바위 위에 날아갈 듯 서 있다. 바위와 물과 노송의 기괴한 조화, 자연과 정자의 아름다운 조화, 귀한 터와 명저의 조화, 선현과 후학의 지적 대화. 자연과 인간이 겹겹이 어우러지는 곳. 정자와 노송과 바위는 높고, 계곡도 물도 숲 그늘도 깊다. 때마침 태풍 미탁이 지나간 직후라 용문산에서 내려온 석간수는 계곡에 넘칠 듯 바위를 때리며 울부짖는다. 숲과 계곡, 바위와 정사를 합쳐 명승 51호 경북 예천의 초간정 원림이 된다. 초간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가 낙향해 공부하던 터전이다. 초간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등 동문도 쟁쟁하다. 정(亭)은 시를 읊는 풍류 공간이요, 정사(精舍)는 강학과 집필 공간이니 원래 이름 초간정사(草澗精舍)가 맞다. 정자 뒤에 초간정사(草澗精舍), 앞에 초간정(草澗亭), 옆에 석조헌(夕釣軒), 현판 셋이 걸렸다. 초간정 편액은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글씨다. 천하절승은 세인의 시선을 모으던 주말 드라마로 더 유명해졌다. 미스터 션샤인의 여주인공 애신이 글을 읽고 일하던 배경이었다. 천하절승 예천 초간정, 인간과 자연의 조화 초간은 당나라 시인 위응물(韋應物)의 저주서간(州西澗)의 홀로 계류가에 자라는 우거진 풀을 사랑하노니(獨燐幽草澗邊生)에서 따왔다. 고아한 선비의 모습이다. 성리학의 창시자인 송나라의 염계(濂溪) 주돈이(周敦)가 뜰에 자라는 풀을 뽑지 않고 두고 보면서 천지 기운이 생동하는 모습을 관찰했다는 고사는 거창한 우주 철학자다. 초간(草澗), 풀(草)에는 자연의 섭리가 계곡물(澗)에는 우주의 원리가 숨어 있다 하니! 한민족 최초의 백과사전 탄생 프랑스 백과전서파보다 200년 앞서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실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1618)이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배웠는데, 그게 아니다. 30년 앞선 1589년, 초간정에서 한민족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이 완성됐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달랑베르(DAlembert)와 디드로(Diderot)가 백과사전을 출간하기 170년 전이었다. 중국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은 어제 일처럼 밝은데, 동국의 일은 아득히 문자가 없던 시대의 일처럼 어둡다. 눈앞을 보지 못하면서 천리 밖을 보려는 것 같다. 초간의 탄식이다. 오늘날 학문하는 자들도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았는지? 초간은 중국의 음시부(陰時夫)가 지은 운부군옥(韻府群玉)의 체제를 빌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표제어 2만 성어, 인명 1천700조목으로 정리해 20권 20책에 압축했다. 대동운부군옥이 현세에 전해진 것은 초간의 치밀한 성품 덕분이다. 당초 3본을 베꼈는데, 학봉 김성일이 국가 간행을 위해 한 질, 한강(寒岡) 정구가 또 한 질 빌려갔고, 그게 임진왜란으로 또 화재로 소실됐다. 아들 권별이 보관하던 나머지 한 질이 살아남아 전해지고 목판과 초판본이 초간일기 3책과 함께 보물로 지정됐다. 압도적인 위용의 초간 종택 2중 기단 위의 오량가 양통집 초간정에서 북두루미산을 사이에 두고 서북쪽 2㎞ 죽림마을에 예천 권씨(醴泉 權氏) 초간종택이 있다. 죽림은 조선 태조가 도읍으로 고려한 적 있는, 정감록의 이른바 10승지지의 하나다. 죽림에 세거하던 예천 권씨는 원래 고을 호장을 세습하던 흔(昕)씨였는데, 고려 충목왕(忠穆王)의 이름 흔(昕)을 기휘(忌諱)하느라 외가 성씨인 권(權)으로 바꿨다 한다. 조선조 들어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막대한 피해를 보고 한동안 조정에 출사하지 않았다. 초간정도 두 차례나 불타 없어진 것을 100여 년 후 현손 권봉의가 중건한 것이다. 십승지지가 무색하게 고초가 잦아서일까, 예천 권씨 문중에는 부불백석, 권불진사(富不百石 權不進仕)라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재산은 백 석을 넘지 말고 벼슬은 진사를 넘지 마라. 낮추고 낮춰라. 초간종택은 15세기 말 초간의 조부 권오상이 지었다. 서쪽 주산을 등지고 동쪽 벌을 바라보는 서향 안채는 2중 기단 위에 높이 자리 잡아 위용이 압도적이다. 오량가 양통집 전면 5칸인데, 4칸 대청을 가운데 두고 남에 田자형 4칸 안방, 북에 단칸 건넌방을 두었다. 건넌방 앞에 단칸 마루를 달고, 안채 양끝에서 단칸 날개 채를 달아냈다. 남쪽 날개 채에 안채 부엌을 두고 북쪽 날개 채는 아래에 협문-사랑채 후원으로 통하는- 위에 다락을 두었다. 날개채 끝에 안대문 행랑을 이으니 전체적으로 ㅁ자가 된다. 안채 북쪽에는 사당이, 동남에는 대동운부군옥 목각판이 보관된 백승각(百承閣)이 자리 잡았다. 초간 종택 사랑채(별당)의 가치 보기 드문 조선 전기 접객형 건물 안채 동북 모서리에 붙은 사랑채 즉 별당은 조선 전기 누각형 접객 건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드문 사례로 보물 457호다. 전면에 높은 축대가 있고 대청에 계자 난간이 붙어, 뒤쪽에서 올라야 한다. 별당은 전면 4칸, 측면 2칸의 양통집으로 5량가이며 사방에 쪽마루를 덧달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남쪽 두 칸에 온돌을 두고 나머지 6칸은 대청이다. 대청 대들보 위에 짜 넣은 눈썹 반자에는 칼과 창, 활 등 무구를 비치해 전란에 대비했다고 한다. 대청과 온돌방을 구분하는 3분합 불발기창이 띠살부늬 덧문과 잘 어울린다. 별당 뒤로 2칸의 날개채를 달아 신발을 신지 않고 안채로 드나들 수 있다. 건넌방의 4배나 되는 안방, 행랑과 익랑으로 안채와 사랑채의 긴밀한 연결, 그리고 연화두형 첨차를 사용한 포형동자주와 하엽(荷葉) 위에 포대공을 올린 화려한 대공 장식 등이 접객형 건물의 특징이다. 조금 늦게 지어진 부근의 의성김씨 남악종택도 비슷한데,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은 학봉 김성일의 동생으로 예천 권씨의 사위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학봉 김성일 5형제가 모두 급제해 5자 등과로 크게 이름을 떨치니, 스승 퇴계 이황 선생의 이름이 비로소 중앙 무대에 알려졌다고 한다. 종손 권영기 씨는 몸이 불편해 예를 갖추지 못한다고 송구해한다. 진성 이씨 두루 종택에서 자란 종부는, 필자가 안동 하계 출신이라 하니 외손이라고 반가워하며 대추와 밤, 오미자차를 차려내 주신다. 집만 접객형이 아니다. 봉제사 접빈객의 가풍은 아직도 살아있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5. 경북 안동, 하회마을

내하전차기복 후불지개 지금상순차도철 여차이망기무사자 특행이 奈何前車旣覆 後不知改 至今尙循此塗轍 如此而望其無事者 特幸耳 앞 수레가 이미 엎어졌는데 어찌 뒤에도 고칠 줄 모르고, 엎어진 바퀴 자국을 따른다. 이러고도 무사하기를 바라니 요행만 믿는 노릇 아닌가? - 징비록 녹후잡기(錄後雜記)에서 하회(河回)는 물돌이의 이두식 표기다. 안동에서 하회마을이라는 표현을 쓰면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경주 양동도 양동 마을이 아니라 그냥 양동이다. 하회는 낙동강이 마을을 크게 한 바퀴 휘감아 흘러 만든 마을이다. 경북 예천 회룡포나 단종이 귀양가 살던 강원도 영월 청령포와 지형이 비슷하다. 외부의 접근이 매우 어려워, 한반도에 닥친 숱한 전란도 피했다. 풍수에서는 안동의 내압, 검제와 함께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 천 년 번영할 마을이라는 말을 쓴다. 천변이면서도 영남 일대를 강타한 사라호 태풍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니 정말 천 년 불패인가 보다.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연꽃이 물에 떠있는 형국이라고도 한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명당은 명당을 얻어 자리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명당이 값하려면 꾸준히 덕을 쌓아야 한다. 서애가 벼슬길에 올라 나라에 봉사하고 국난 극복에 기여했다면, 형 겸암 유운룡은 고향에서 몸과 마음을 닦고 후학을 양성했다. 독립운동가의 집 표지도 몇 집 건너 대문에 붙어 흔해 보일 정도다. 안동 일대 양반촌이 대부분 그렇지만, 하회 역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둘째 가라면 서럽다. 하회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자라고, 은퇴하고 나서 살면서 징비록(懲毖錄, 국보 132호)을 쓴 곳이다. 서애 선생은 임진왜란, 하마터면 조선 나라가 없어질 뻔한 대란 7년 내내 선조를 가까운 거리에서 모셨다. 전란 전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행주대첩의 권율을 천거해 수륙군의 중핵으로 앉히고, 전술서적을 구해 이순신에게 보내 왜구 침략에 대비케 했다. 전란이 벌어지자 크게는 명나라와의 교섭을 전담했고, 작게는 나루청을 태워 몽진 길의 횃불로 쓰고 칡덩굴을 모아 대군이 강을 건널 부교를 만드는 임기응변까지, 국가 위기 극복을 총지휘했다. 징비록은 시경 주송(周頌) 중 소비편(小毖篇) 첫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預其懲而毖後患(예기징이비후환), 지난날 과오를 아프게 되새기면서 다시는 환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한다. 왜란을 교훈 삼아 다시는 그 전철(前輟)을 밟지 말자, 이게 다였을까? 덜떨어진 임금 7년 모시고 다니며 피눈물 흘린 분이 하고 싶은 말이 더 없었을까? 시경 구절을 다시 살펴보자. 預其懲而毖後患의 댓구는 莫予蜂自求辛(막여병봉자구신석), 내 꿀벌을 손에 놓고 만지다 스스로 독바늘에 쏘였구나.다. 주나라 성왕이 한때나마 간신을 총애해 반란을 자초한 자신을 후회했다는 해석이 단서다. 변덕 심한 선조는 의주로 몽진가는 와중에 하루 사이 영의정을 세 명 갈아치운다. 아계 이산해에서 서애 선생, 다시 정철. 정철은 조작된 기축옥사의 위관(주심관)을 맡아 영남과 호남의 무고한 선비 1천500명을 참살한 죄로 평안도 강계에 유배가 있었다. 다시 불려온 정철의 국난 중 활동상은, 체찰사로 임무를 소홀히 하고 명나라 조정에 거짓 보고를 해 오해를 샀다는 민망한 기록뿐이다. 없느니 못한 정승 정철! 가사문학의 거장 이미지가 여지없이 박살 나는 순간이다. 혹시 정철의 등용을 빗대 징비라 한 것은 아닐까? 국가 위기에 여전히 간신배를 가까이 둔 선조를 풍간(諷諫)한 것은 아닐까? 징비록에는 아무 언급이 없다. 다만, 서애가 후에 스승 이황의 문집 퇴계집을 편찬하면서, 정철에 대한 스승의 언급을 삭제한 데서 정철에 대한 서애의 평가를 알 수 있겠고 징비에 뭔가 실마리를 얻는다. 고담준론은 여기까지, 우리에게는 현실로 돌아가 하회 즐기는 법이 중요하다. 하회는 영국 여왕과 왕세자 모자가 다녀간 곳이며, 경주 양동과 함께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다. 길 건너 서애를 모신 병산서원도 세계문화유산이다. 대개 전통 마을에서는 가장 큰 기와집이 가장 중요한 고택이지만 하회는 다르다. 규모로는 18세기 말 지어진 북촌댁이 으뜸이지만, 16세기 이전 지어진 풍산류씨 대종가인 양진당(養眞堂, 보물 306호)과 17세기 초 지어진 서애 종가 충효당(忠孝堂, 보물 414호)을 먼저 찾아야 한다. 남촌댁, 주일재, 작천댁, 하동고택 등 기와 고택만 100채 가까이 즐비한 인류 문화의 보고다. 하회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부용대, 서애가 기거하던 옥연정사(玉淵精舍), 원지정사(遠志精舍), 서애의 형님인 겸암 류운룡이 책 읽고 공부하던 겸암정사(謙菴精舍), 빈연정사(賓淵精舍)까지 즐겨야 한다. 일정을 넉넉하게 잡아야 한다. 급하게 와서 셔틀버스로 마을로 들어가 휙 돌아보고 떠나지 말기를. 주차장에서 강 언덕을 걸어 마을로 들어가면 훨씬 좋다. 하회를 눈으로 볼 수 있으니. 수백 년 된 노거수에 소원 찍지도 달고. 여유 있게 다닐수록 얻는 게 많다. 하루쯤 묵어가면 더 좋을 것이다. 우리 생애 언제 다시 세계문화 유산을 하루 두 군데나 즐길 것인가?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4. 전남 장흥, 존재-신와-오헌 고택

방촌(傍村)은 통일신라 때 정안현, 고려 때 장흥부의 치소였다. 조선조에 장흥 위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해, 오늘날 12뜸에 위씨 110가구가 살고 있다. 작은 마을에 팔경이라면 과한 느낌인데, 방촌 팔경 두 대목만 소개한다. 2경 상잠만하(觴岑晩霞), 저녁밥 짓는 연기가 방촌의 주산 상잠산에 띠 허리를 두른다. 8경 금당귀범(錦塘歸帆), 고깃배가 해질녘 황혼의 기운을 받고 만선으로 돌아온다. 풍요로운 고장이다. 장흥 관산읍은 고려 말 원나라가 왜를 정벌할 때 조선소였다. 천관산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수 만 그루 베어 신월마을에서 900척 전선을 짓고, 군마등, 마장골에서 군마를 훈련시켰다. 조선조 들어 신월마을은 염전이 되어 부를 창출하니, 문자 그대로 장흥(長興, 길게 흥하다)이다. 장흥군 관산읍 방촌마을의 주산은 상잠산, 멀리 천관산을 바라본다. 천관산은 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변산과 함께 호남 5대 명산으로 꼽힌다. 천자의 면류관 닮았다는 설도 있고, 삼국 통일의 영웅 김유신의 첫 사랑인 기생 천관에서 연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버림받은 천관이 머리 깎고 옛 애인 잘 되기 빌던 자리라는 것이다. 기생 천관설이 훨씬 애달프고 가슴 저민다. ■ 존재 고택과 외로운 실학자 존재 위백규 정약용 선생은 위백규에게 영감을 얻었나? 존재(存齋) 고택은 방촌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경관이 아름답고 여름에 시원하다. 18세기 지어졌다는데, 대문간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앙증맞은 별당 겸 서재가 백미다. 안마당으로부터 돌아앉았다고 표현해야 좋은 좌향이다. 남과 동에 퇴를 두고, 각각 영이재(詠而齋) 위덕문, 존재(存齋) 위백규 부자의 호를 당호 편액으로 내 걸었다. 별당 지붕은 반쪽은 팔작지붕이고 다른 반쪽은 안채 지붕과 겹치지 않게 맞배지붕의 특이한 구조다. 고택의 주인공은 단연 실학자 존재 위백규다. 만언봉사, 정현신보(政絃新譜)에서 존재는 제도의 취지와 연혁, 폐단과 부작용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대책을 논했다. 존재는 학교, 용인(用人), 군현, 조운, 전결, 관직, 노비, 공물(貢物) 등 30여 분야에 걸쳐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했다. 여유당 정약용 선생의 경세유표를 연상케 해 흥미롭다. 더 재미난 것은 존재가 茶山書堂을 열어 시골 아이들을 가르쳤고, 여유당과 학문적 대화를 나눈 백련사 혜장스님과도 교분이 깊었다는 사실이다. 혹시나 여유당이 직, 간접적으로 존재에게서 영감을 얻지는 않았을까, 발칙한 생각을 해 본다. (여유당의 어떤 저술에도 존재에 대한 언급은 없다.) ■ 질서와 조화의 죽헌 고택 여유로운 남도의 삶 신와 고택 죽헌(竹軒) 고택은 담장과 사랑채, 안채의 지붕면이 위계(位階) 있고 정연하다. 집 앞 계단을 올라 서향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다시 높은 계단이 눈앞을 막는다. 계단을 직진하면 안채로 통하는 문간채요, 사랑채는 왼쪽 쪽문으로 꺾어야 한다. 직진하면 사랑채, 꺾으면 안채의 일반적인 배치와는 사뭇 다르다. 대문, 안채문, 안채가 동일 축선상이니, 다분히 안채 중심의 건축이다. 쪽문으로 사랑채에 들어서면 잘 꾸며진 일본풍의 음지 정원이다. 북쪽으로 연못을 파고 섬을 만들어 양지 식물을 심었다. 사랑채는 4칸 전후툇집으로 전면 처마를 길게 빼내 여름철 저녁 햇살을 가리고, 북쪽에 누마루를 들였다. 사랑채 높은 툇마루에 앉으면 멀리 천관산 환희대가 눈에 들어온다. 조경(造景)과 차경(借景)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남도 고택은 좌향과 상관없이 퇴가 영남이나 경기보다 퇴의 폭이 2배 가까이 넓다. 서향이 많은 방촌만이 아니라 북향인 영광 연안 김씨 종택도 마찬가지다. 햇살도 피하고 잦은 큰비도 피하지만, 덥고 답답한 방보다 마루가 쾌적하지 않을까? 신와고택은 위영형(魏榮馨)이 처음 터잡고, 손자 신와(新窩) 위준식이 고쳐 지금의 형태가 됐다. 안채, 사랑채, 사당, 곳간채, 헛간채, 문간채 등 6동으로 당당한 살림을 과시한다. 공동우물을 연상케 할 정도로 널찍한 우물과 어린이 놀이터로 쓰이던 문간채 다락, 사랑채(정면 5칸)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안채(정면 6칸)가 특징이다. 위기환 씨(72)는 거대한 바위를 피해 안채를 들이다 보니 안채와 사랑채의 좌향이 약간 비스듬해졌다고 설명한다. ■인간과 공간의 공진화 오헌고택 국난 극복과 판서공파의 전통 오헌(梧軒) 고택은 오헌 위계룡이 중건한 전통가옥이다. 원래 원취당 위도순이 자리 잡았는데, 사랑채에는 세거 인물의 아호 겸 건물의 당호가 편액으로 나란히 걸려 인간과 공간의 공진화(共進化)를 보여준다. 翠軒(읍취헌), 願醉(원취), 素庵(소암), 壺亭(호정), 春坡(춘파), 梧軒(오헌), 後溪(후계), 壺谷(호곡), 觴山(상산).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간다. 명색이 임금의 피난인데, 호종팀이 서애 유성룡 등 십여 명에 불과했다. 먹을 것이 떨어져 갓 무과급제한 말단 무관이 민가에서 서숙밥을 구해 바쳤다. 선조가 정말로 맛있는 밥을 구해왔다고 치하하고 즉석에서 언양 현감에 제수한다. 그 무관은 임란 호종으로 공훈록에 두 번 등재되고, 호조판서에 추증된다. 판서공 위덕화의 유래다. 판서공 종택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창고 등 여덟 채가 입 구(口)자를 이룬다. 1624년 지었다는 사당의 쇠꺾쇠는 녹았지만, 밤나무 기둥은 아직 생생하다. 해마다 음력 10월 중순, 전국의 장흥 위씨가 방촌으로 몰려들어 2박 3일 시제를 지내고 계취를 즐기며 우의를 다진다. 볼 만 하겠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3. 대전 회덕 동춘당(同春堂)

접근성과 희소성은 양립하기 어려운 가치다. 인간은 천성이 간사해 쉽게 접근하면 귀한 줄 모른다. 한편, 인간은 천성이 게을러 접근하기 어려우면 알려 들지 않고, 귀한 줄도 모른다. 이래저래 인간은 귀한 줄 모르고 산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회덕 동춘당이 딱 그렇다. 대전시 대덕구 도심 한복판, 접근성은 더할 수 없이 높다. 그러나 동춘당 선생의 학덕은 범접하기 어렵다. 건물 동춘당은 접근성이 높아 귀한 줄 모르고, 인물 동춘당은 접근하기 어려워 역시 귀한 줄 모른다. 아, 건물도 사람도 동춘당이니 헷갈리기 십상이니 건물은 그냥 동춘당, 인물은 선생이라 칭하자. 회덕의 은진 송씨 종택은 선생의 5대조 송요년(宋遙年)이 15세기 후반 처음 짓고, 현재는 1835년 마지막 중건된 모습이다. 송요년은 당시로써는 드물게 71살로 장수하는데, 51살에 사위 강귀순과 함께 대과에 급제하는 것을 보면 좋게 말해 의지가 강하고 나쁘게 보면 옹고집이었던 듯하다. 종택은 안쪽 깊이, 충청에서 보기 드문 ㄷ 자형 안채, 바깥에 ㅡ 자형 사랑채를 배치하고 담장으로 연결해 전체는 튼 ㅁ자 모양이 되었다. 정면 6칸의 사랑채는 큰사랑과 작은 사랑에 별도의 마루방이 붙었고, 안채 서쪽 날개채는 안방과 부엌, 마루 등이 겹쳐진 양통집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내외담이 있어, 안내판에 따르면 공간을 절묘하게 분리했다. 안쪽 높은 곳에 宋氏家廟 현판이 붙은 사당이 2개 있는데, 불천위 별묘를 위에 모시고, 일반 가묘는 약간 비껴 내렸다. ■ 동춘(同春), 살아있는 봄과 같아라 동춘당은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스스로 공부하면 손님을 맞고, 한편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강학 공간이다. 낮은 기단 위에 사각으로 다듬은 주초를 놓고 정면 3칸의 자그마란 겹집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네 칸 마루와 두 칸 방은 사이의 분합을 들어 올리면 통으로 쓸 수 있다. 바깥에는 난간 없는 장마루를 두르고, 영쌍장을 달았는데 툇마루 쪽은 민가에 보기 드문 삼중 창호다. 온돌방 부분은 상류계층 집에서만 보이는 머름을 댔고, 대청 앞 띠살문은 여름에 활짝 열 수 있다. 현판은 선생의 평생동지요 친구며 가까운 친척인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송시열은 물론,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 김창흡 부자 등 당대 날리던 명사가 남긴 방문기가 동춘당 안에 걸려 있다. 선생은 일찍이 19살에 생원과 진사 양과에 합격했으나 대과는 거리가 있었다. 저서도 『어록해(語錄解)』,『동춘당집(同春堂集)』단 두 권, 대단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그러나 병조판서로 효종의 북벌론(비현실적인 허망한 꿈이었지만)을 추진하고, 사헌부 대사헌, 성균관 좨주(祭酒), 이조판서 등 고위직을 두루 거쳐 사후에는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 동방 18현의 1인이 된다.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본인의 처신이 동춘(同春), 봄과 같이 온유하고 겸허했다. 노론의 영수 우암을 강력히 지지하면서도 남인과 소론에 대한 악형에 한결같이 반대하고, 여러 차례 우암과 소론의 영수 윤선거의 화해를 시도했다. ■ 어느 시대든 네트워크는 중요하다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했다. 우암과는 집안의 척분도 있었지만, 할머니끼리 자매간이라 진외(陳外家, 아버지 외가) 6촌간이라 어릴 때부터 항상 붙어다녔다. 또 예학의 정맥 사계(沙溪) 김장생이 선생의 외조부 김은휘(金殷輝)의 친조카니, 선생과는 외종숙인 인연으로 일찍부터 사계의 문하에 들었다. 아버지 송이창의 외조부가 병조판서를 지낸 이윤경에, 선생의 장인 정경세는 동인의 영수인 서애 류성룡의 수제자, 처남댁은 회재 이언적의 증손녀였다. 언급된 인물 가운데 이언적, 김장생과 그 아들 김집, 송시열, 그리고 선생 본인까지 5분 모두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다. 오늘날로 치면 노벨상으로 인맥을 메운 셈인데, 참으로 어마어마한 네트워크다. 여기까지는 가문의 선택이었는데, 선생의 인맥에 방점을 찍은 것은 선생의 안목이었다. 제자 가운데 가려 사위로 삼은 민유중이 낳은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가 되고, 선생은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가 된다. 그리고 공조판서가 되는 외손 민진후의 5대손에 명성황후가 탄생한다. 선생의 증조부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대과 급제의 기록은 없다. 실력에 비해 시험 운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과 급제 않고도, 살아 현달하고 죽어 명예롭고 자손 번창한다면 또한 본받을 만하지 않을까? 동춘당을 나와 동쪽으로 걸음 하면 시비가 하나 서 있다. 송씨 가문에 시집온 안동 김씨의 시비인데, 아호가 호연재(浩然齋)다. 남녀의 차별이 극심한 조선 후기, 얼마나 답답했으면 여류 시인은 스스로를 호연재라 불렀을까? 몇 걸음 더 가면 당호도 재미난, 소대헌(小大軒) 고택이 나온다. 선생의 둘째 손자 송병하 때부터 분가해 자손들이 살아온 집이다. 왼쪽에 큰사랑, 오른쪽에 7칸 작은사랑이 나란히 서 있는 재미난 배치다. 작은사랑 왼쪽 끝에 안채로 통하는 문이 달렸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2. 양주 매곡리 백수현 고택

경기(京畿)란 서울 근처의 땅을 말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왕경 오백 리 이내의 땅을 기(畿)라 했다고 한다. 우리처럼 작은 나라에서 오백 리면 거의 대전까지니 비현실적이다. 그냥 서울 근교 이백리 정도로 잡으면 얼추 현재의 행정구역상 경기도 그리고 현대인의 지리적 감각과 비슷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출세한 이들은 중앙에서 활동하다가 서울 근교, 즉 기내(畿內)에 집을 마련해 은퇴하는 경우가 많다. 농경 사회였던 조선조에는 그런 경우가 훨씬 많아 한양 근처에 집과 농장을 마련해 정착한 다음 일가붙이를 불러들여 집성촌을 이루곤 했다. 수원 백씨 집성촌 풍수학적 길지 전란이나 정변을 피해 이주하기도 하고, 정반대로 사패지(賜牌地) 즉 왕실의 총애를 입어 땅이나 임야를 하사받고 그 자리에 정착하기도 했다. 남양주 마재 마을이 다산 정약용을 필두로 한 나주 정씨에게 정변을 피해 들어간 곳이었다면, 수원 백씨에게 양주 매곡(梅谷) 마을은 왕실의 은총을 받아 자랑스레 입성한 예에 가까운 곳이다. 350년 전 조선 중기 문신인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이후 아직도 수원 백씨 8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이장의 설명으로는 일대 농지와 임야를 합해 백만 평 이상이 수원 백씨 소유라 한다. 매곡마을 혹은 맹골마을은 이름 그대로 마을 가운데 우뚝한 매화나무가 동네 이름이 되었다. 백수현 고택은 마을 뒤 매봉산을 진산으로, 매곡리의 가장 경개 좋은 반듯한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매봉산은 이 지역에서는 우뚝하지만 어지간한 지도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낮은 산이라(300m나 될까?) 평지처럼 보이는 편안한 경사다. 마을 진입로와 나란히 이름없는 작은 개울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고, 멀리 입암천은 매곡리 전체를 반대 방향으로 크게 휘감고 흐른다. 마을 앞 샘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한겨울에도 온기가 있어 아낙네들이 그 물로 겨울철에도 빨래를 쉬지 않았다 한다. 산은 낮아 큰 바람이 없을 것이며 물이 포근히 감아 들어오니, 장풍 득수에 배산임수를 모두 갖춘 풍수학적인 길지겠다. 4백 문장, 위기를 극복하다격조 높은 사대부 제택의 전범 수원 백씨 입향조 백인걸은 형제와 사촌까지 4백 문장(四白文章)이라 했다는데, 인영(仁英), 인웅(仁雄), 인호(仁豪), 인걸(仁傑) 네 사람 이름을 모으면 영웅호걸이다. 인영은 도승지, 인걸은 대사간에 올랐고 청백리에까지 선정됐다. 가문이 한창 뻗어나갈 즈음, 백씨 가문에게 위기가 닥쳐왔다. 기축옥사, 조작된 모반사건에 백인호의 손자 수민(白壽民)이 연루된 것이다. 정여립의 형 여흥(鄭汝興)의 사위였던 수민의 4형제와 대사성을 지낸 아버지 백유양이 모두 장살 당했다. 결과 위기를 잘 넘긴 백인걸의 후손이 수원 백씨 과반수를 차지하게 됐다. 백수현 고택은 전하는 바로는 고종 왕비인 명성황후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피난할 집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안채 하나만 남아 있다. 명성황후 피신설이 그럴싸한 것은, 우선 집이 사대부 제택(第宅) 중에도 격조 높게 정성들여 잘 지어졌기 때문이다. 말끔하게 다듬은 화강암의 안채 두 벌대 설치, 사다리꼴로 다듬은 주초, 고급스러운 문살과 문고리 치장이 그렇다. 다음으로, 이곳은 한양에서 보면 명성황후의 고향 여주와 정반대 방향이다. 당시 기준으로는 서울에서 꽤 떨어져 있지만, 또 마음먹으면 멀지만도 않다. 특히 서울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다. (오늘날에도 곳곳에 군부대가 진치고 있다.) 형의 안채와 형의 행랑채, 마당을 가운데 두고 튼 형의 집이다. 안채는 대청과 건넌방을 남향으로, 안방과 부엌이 동향한 서변(西邊)이다. 대청은 툇마루가 있는 칸반통의 2칸인데, 문얼굴을 놓고 사분합을 달았다. 뒷벽에 머름을 드린 문얼굴에 바라지창(廣窓) 사이 뒷산이 보인다. 대청 동편의 건넌방은 칸 반 크기다. 안방과 부엌은 각 칸 반 통의 2칸짜리로 시골서는 드물게 널찍하다. 부엌의 크기와 다락ㆍ벽면 구성 등이 집의 특색이니, 부엌 서쪽에 2칸 달아 1칸을 찬방으로 꾸몄다. 부엌 위로 고미혀를 받친 다락을 두고, 작은 분합의 광창을 내고 안마당쪽에 선반을 멍에에 맸다. 선반 아래 부엌벽은 판벽에 널문짝을 달았다. 나머지 칸은 머름을 드리고 붙박이 살대를 박아 광창을 넣었다. 행랑채는 남면 7칸 꺾어서 동변 7칸, 합이 14칸인데, 남면 1칸이 중문으로 열려 있다. 중문 서쪽 방들은 사랑방처럼 만들었으나 단칸통이고, 부엌 1칸이 달려 있다. 중문 동쪽에 마굿간과 마부 방을 두고, 꺾은 자리에 부엌 2칸, 뜰아랫방 2칸, 곳간과 2칸 내고(內庫)를 차례로 들였다. 진한 매실차로 매화마을을 느끼다 안채ㆍ행랑채 밖에 사랑채 터가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매봉산에서 내려와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까지 터가 이어졌다 한다. 사랑채와 별당채가 남아 있다면 정말 명품이었을 것이다. 집 앞에 다듬다 만 주초들이 뒹군다. 꽤 오래 사람이 출입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고 어설퍼 보인다. 고택은 현대 생활에 불편하기 때문에 거주자 없이 관리할 수밖에 없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죽은 집일 수밖에 없다. 수원 백씨는 다재다능하다. 조선조 문과 급제자가 백인걸의 증조부 이래 64명에, 무과 급제도 백인현 등 101명이다. 요즘 드라마화된 마의(馬醫) 출신 어의(御醫) 백광현도 넓게 보면 수원 백씨의 작은 집 임천 백씨 출신이다. 현대에도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백병원 설립자 백인제,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 명인 백용성 스님, 625의 명장 백선엽, 백인엽 등 다양한 인물을 배출했다. 백수현 고택을 둘러보다가 싫증 나면, 동네카페에서 진한 매실차 한 잔을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1. 태묘산 자락 연안이씨 동관댁

남양주 진접읍 내곡리는 한밭들과 유연이들 두 너른 들이 왕숙천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자리, 천견산(天見山:393m, 천겸산이라 된 지도도 있다) 줄기 남쪽 끝자락의 마을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한밭들을 치면 진접을 비롯해 양평, 이천, 여주, 충청도 제천, 경상도 문경, 상주, 달성(화원, 옥포 2곳), 고령, 합천(가회, 초계, 관평 3곳), 밀양, 고성, 함안, 전라도 남원, 영광, 함평 등 전국에 모두 20군데가 넘는다. 고유명사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좀 넓어 보이면 한밭들이라 이름 붙인 때문일 것이다. 그에 반해 유연이들은 전국에 단 한 군데 진접이다. 연안 이씨 동관댁은 내곡리에서 가장 큰 내동마을 맨 안쪽, 태묘산(372m, 지도에는 한자와 우리말의 병기인 태뫼산이라 돼 있다.) 기슭에 자리잡았다. 비탈진 산기슭에 용케 좌우로 길게 반듯한 터를 골라 들어앉았다. 동쪽과 북쪽 담밖에 고목이 여럿 둘렀지만 집 안은 큰 나무 단 한 그루가 없다. 수로도 없고 냇물도 집안으로 흐르지 않는다. 전저후고(前低後高) 지형이라 일조량도 넉넉하고 배수도 잘 될 것이다. 태묘산 기슭에 바짝 붙어 바람이 드세지 않고(장풍) 멀리 왕숙천이 왼쪽에서 흘러오는(득수) 명당이라 대대로 복록을 누려왔다고 한다. 좁은 땅에 효율적인 배 잘 보존된 250년 고택 노거수 앞 표지판을 지나 가파른 언덕길을 한참 올라야 서남향 대문채에 닿는다. 여경구의 장인인 이덕승의 8대조가 약 250년 전에 지었는데, 대문채, 사랑채, 두 곳간채, 안채, 사당만 남아 있다. 전란이 끝이 없었던 서울 부근임을 감안하면 18세기 초의 기법과 형상을 용케 잘 간직하고 있다. 외양간과 행랑방이 좌우에 붙은 대문채 중앙, 서북향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너른 마당이 나온다. 정면에 곳간채가, 왼쪽 산기슭에 동남향한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를 받치는 기단과 주추, 산석(山石) 그대로의 자연석도 아니지만 깔끔하게 다듬지도 않았다. 누군가는 무사석(武士石)이란 표현을 썼는데, 큰 돌을 알맞게 깎고 쌓은 품새가 중후하고 활달하다. 사랑채는 당호나 현판은 없어도 5단 돌계단 위에 늠름한데, 사랑방, 마루, 작은 방이 차례로 들어서고 뒤쪽에 쪽마루와 벽장을 둘렀다. 사랑채 툇마루에 앉으니 시야가 탁트여 멀리 천마산이 달려가는 것이 보인다. 명당이다! 사랑채 뒤 경사지를 깎아 사당을 들였다. 터가 좁아서인지, 따로 담이나 문을 두지 않은 매우 개방적인 사당이다. 사당 양편 벽은 기와와 돌을 사용해 예쁜 꽃담을 꾸몄다. 대개 제대로 된 민간 건물은 도리를 5개 받치고 내부에 높이 고주(高柱)를 세우니 1고주 5량이 보통이다. 사랑채와 안채 모두 1고주 5량 구조, 곳간채는 고주 없는 3량가다. 그러나 사당은 1고주 4량이라 흔치 않고, 도리칸 2칸이라 사당으로서는 더욱 흔치 않다. 1고주 5량가, 흔치 않은 4량가 한옥 건축에서는 무거운 기와 지붕의 하중을 분산시켜 받치는 문제가 가장 어렵다. 고급 건물은 무거운 기와를 세 겹 두니, 고민이 더 커진다. 도리, 보, 기둥 셋이 큰 하중을 받치는 삼대 가구(架構)다. 보는 지붕의 하중을 받아 기둥으로 전달하는, 건물의 앞뒤로 가로지른 구조물이며, 도리는 지붕의 하중을 기둥으로 전달하는 건물의 좌우로 가로지른 구조물이다. 이로써 한옥의 규모와 골조를 말하니, 도리와 보만 알아도 한옥의 큰 골조를 그릴 수 있다. 그래서 좀 아는 사람들은 한옥의 천장을 한참씩 올려다본다. 거기에 비밀이 있으니. 다음은 큰 하중을 나누는 다양한 부재들인데, 공포, 대공, 익공, 보아지, 장여, 주두, 첨차 등등 모양도 기능도 비슷해보이지만 다 제각각이고 이름도 달라 공부가 좀 필요하다. 각설하고, 정면 곳간채의 중문을 들어선다. 丁자형 안채는 서쪽부터 건넌방, 두 칸 넓이의 대청, 안방, 골방, 뒷방, 광으로 이어진다. 중부 지방의 안채는 안방을 대청의 서편에 두는 것이 보통인데, 이 집은 사랑채가 서쪽이라 안방이 동편이다. 안방에서 동남에 날개채를 두고 부엌을 들였다. 골방과 뒷방 앞에 쪽마루가 붙어 안방으로 다니기 편하다. 부엌, 안방, 대청이 있는 주공간에 골방과 광이 부속 공간으로 덧붙였다. 안채 앞에 ㄴ자 곳간채가 또 있어 넉넉한 살림을 짐작케 하고, 대청 우물마루는 뒤틀린 판 하나 없이 잘 관리됐다. 안채와 날개채, 곳간채가 튼 ㅁ 자 공간을 이룬다. 아직도 물맛 좋은 동관댁 급제 250명의 높은 문명(文名) 부엌 앞 마당, 담장과 회화나무 고목을 사이에 두고 안에 우물, 밖에 샘이 있다. 물맛이 아주 좋으니 산에서 내려와 목을 꼭 축일 것을 권한다. 6㎞ 떨어진 진산 천겸산은 정상에 샘이 있고 원래 샘재라 불렸다 한다. 샘재의 이두식 표기인 천현(泉峴)이 천견(天見)을 거쳐, 천겸이 되지 않았나 추정한다고 한다. 물맛이 좋은 것이 당연하다 싶다. 집주인인 연안 이씨는 여러 파가 있는데, 조선조 문과 급제자만 250명을 배출했다 한다. 인구 비례로 보면 정말 대단한 숫자다. 중시조 이석형은 조선 전기, 왕명으로 발탁돼 대학(大學)에 사례와 주석을 덧붙인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을 편찬한 문인이었다. 그는 진사시와 생원시, 정시문과를 모두 장원 급제해, 왕만 통과할 수 있는 궁궐 삼문의 중문으로 입궁한 전무후무한 특혜를 누렸다 한다. 세종은 생전에 대학을 100번 이상 읽었고, 정조 역시 대학을 숙독하며 대학유의를 직접 편찬했다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 한 권으로 로마 천년 제국의 5현제에 꼽히고 서양 철학사에 이름을 남겼는데, 우리 세종이나 정조는 정말 대단한 성군이다. 동관댁을 경영한 이들의 이야기가 별로 없는 아쉬움에 이석형을 떠올려 봤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0. 다산 유적지를 찾다

다산유적지로 들어가는 길은 큰물이 가깝다. 두물머리 큰 물이 차창가로 찰랑대듯 가깝게 보이는 곳을 몇 군데 지난다. 지난 며칠간은 집중 호우까지 내렸으니, 다산의 생애만큼 아슬아슬하다. 어제는 바깥 활동을 최소화했는데도 세 켤레나 양말을 갈아신을 정도로 빗줄기가 거셌는데 오늘은 신기하게도 비가 긋고 움직일 만하다. 다산의 보살핌인가? 나주 정씨는 전라도 나주에서 시작해 고려 때 황해도 배천, 조선조에는 경기도 용인 일원을 세거지로 번성했다. 다산이 자랑하듯 12대조 정자급(丁子伋) 이래 9대 문과 급제에 9대 옥당의 문장가 집안이었다. 오죽하면 정조가 옥당은 정씨가 독차지한다(丁家之世傳物)고 찬탄했을까. 순탄하던 가문에 마가 낀 것은 다산의 8대조 정윤복 대였다. 정윤복은 서인의 송익필이 조작해낸 정여립 모반 사건 당시 탄핵받고 설 자리를 잃었다. 이후 정씨는 대대로 급제해도 크게 쓰이지 못했다. 두물머리에서 싹튼 실학사상 남양주 마재마을에 터잡은 것은 다산의 5대조 정시윤(丁時潤)이었다. 정시윤은 6살 때 아버지 정언벽(丁彦璧)을 잃고 모친까지 자결해 극히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굳은 의지로 공부해 문과에 급제해 출사했지만, 갑술환국으로 삭탈관직되고 결국 벼슬에 뜻을 잃고 마재마을에 은거하게 된다. 정시윤은 한강 상류 반고(盤皐)에 정자를 짓고 당호를 임청(臨淸)이라 내걸었다.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라,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불고 맑은 물에 이으러 시를 읊는다, 도연명이 정쟁을 피해 낙향하면서 읊은 귀거래사에서 따온 구절이다. 안동 임청각과 같다. 당시 마재마을 부근, 물길 따라 10리 거리는 당쟁을 피해온 집안들의 세거지였다. 농지가 부족한 대신 한강 뱃길을 이용한 상품 물화의 집산지라는 장점이 있었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강원도, 경기도 외곽의 땔감과 과일.야채, 남해안에서 낙동강 타고 올라와 충주에서 다시 한강 타고 내려온 물산들이 여기서 점검받게 마련. 마재 부근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일찌감치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정씨 가문도 원예 작물로 생계를 유지했다. 총명한 다산은 어린 나이에도 특용작물의 재배와 상업적 가치를 일찍부터 인식했을 것이며, 오가는 배와 물산, 몰리는 사람을 넘겨봤을 리 없다. 거대한 실학 사상의 토대는 어린 시절 배양되었을 것이다. 다산이 다른 실학자들과 차별화되는 것은, 우선 500권에 이르는 저작물의 방대한 양이다. 사상 체계도 훨씬 거대하지만, 당시 조선의 현실 세계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또 정치 행정만이 아니라 농업과 상공업, 광업 등 다양한 경제, 기술적 분야를 다룬다. 어릴 때 보고 느낀 것이 다산의 실학사상에도 녹아들어 있을 것이다. 일전에 식사를 같이 한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본 게 다르다는 표현을 썼다. 동석한 언론인들이 보고 들은 거라 말하자 들은 거는 중요하지 않고, 어릴 때부터 본 게 다르다고 굳이 본 것을 강조했다. 만일 강진 18년이 아니었다면? 18년 유배 생활은 다산과 가족에게는 참으로 불행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한국 실학의 관점에서는 참으로 소중한 세월이었다. 역사에 만일은 없지만, 다산의 강진 18년은 너무나 많은 만일을 생각하게 만든다. 만일 다산이 18년 유배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만일 외가인 해남윤씨의 세거지 바로 옆이 아니었다면? 만일 어릴 때 보고 느낀 것들이 없었다면? 다산이 유배지에서 가르치고 학문적 성취에 도움을 받은 제자 가운데는 서리 계급 출신이 여럿 포함돼 있다. 만일 다산이 차별적인 시각으로 그들을 가르치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했다면? 그 방대한 저작이 가능했을까? 저작이 그토록 구체적현실적일 수 있었을까?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일 수 있었을까?추상적 일반론이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풍성해질 수 있었을까? 다산이 귀양살이 초기에 의탁한 주막집 노파와의 대화가 전해진다. 노파가 질문한다. 아버지 은혜가 중합니까? 어머니 은혜가 중합니까? 다산이 답한다. 유교의 정통 이론에 따라, 부모 은혜를 비교하기 어렵지만 굳이 비교하면 아버지 날 낳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아버지 은혜가 더 중하다. 노파가 반론한다. 아무리 씨가 좋아도 땅이 이를 받쳐 주지 못하면 씨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조선 500년 최고의 천재 다산의 말문이 막힌다. 이 일화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씨를 길가에 뿌렸더니 새가 쪼아 먹고, 돌무더기에 뿌리니 말라 죽고, 가시덤불에 뿌리니 자라지 못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리니 수십 배의 소출을 올렸다는 비유 말이다. 이때부터 다산의 세계관이 바뀐 것은 아닌지? 여유당, 조심스레 살고 조심스레 잠자기 다산 유적지는 그가 노년을 보낸 집과 세상을 떠난 이후 쉬고 있는 묘소, 그리고 기념관까지 한곳에 있어 20세기 세계 모든 나라가 행정의 모토로 삼는 단일창구 One Window Policy 시스템을 가장 잘 구현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기념관과 여유당만 들르지만, 조금 불편하더라도 묘소를 들러 참배할 것을 권한다. 음택과 양택이 이어진 특이한 배치는 굳이 명당을 찾지 말라는 다산의 소박한 생각 때문이다. 20세기 들어 복원한 생가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신중하라, 겨울에 얼어붙은 시냇물 건너듯. 경계하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이 원전이라 소개돼 있다. 그러나 도덕경의 원문은 여혜(與兮)가 아니라 예언(豫焉)이다. 어느 쪽이 되었건 매사 조심 조심해야 했던 다산의 처지가 안쓰럽기만 하고, 조심하고도 유배당한 이후 상황은 더 안타깝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9. 남양주 궁집

공주님 살던 곳은 사가(私家)라도 남자가 드나들기 어려운가? 두 번 허탕치고 세 번째 발을 디딘다. 한번은 부슬부슬 비까지 내렸다. 날씨가 아주 화창하니 오늘은 일이 술술 풀리려나? 남양주 궁집, 조선 영조의 막내딸이며 정조의 막내 고모 화길옹주가 시집가 살던 집이다. 공주는 정실 왕후의 딸이요, 옹주는 후궁의 딸이다. 1997년 8월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빈(嬪)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나서 벌어진 호칭 논쟁이 기억난다. 당시나 지금이나 언론은 다이애나를 왕세자비로 호칭한다. 후비빈(后妃嬪)의 원전인 중국 황실의 품계에서, 후(后)는 황제의 정실 부인이다. 비(妃)는 왕이나 태자의 정실, 황제의 선임 후궁을 지칭한다. 빈(嬪)은 왕세자의 정실, 왕이나 황제의 후궁이다. 한국 언론은 희한하게도, 끝없이 한국 괴롭히는 일본은 천황이라 부르고 영국은 여왕이라 한다. 왕의 아들은 세자니, 찰스는 왕세자고 다이애나도 왕세자빈이 맞다. 그런데 다이애나가 어이없게도 왕세자 비가 되었다. 하기야 사단장 부인은 군단장이고, 찰스는 조롱의 대상이고, 다이애나는 연민의 대상이니. 격조 높은 궁집 임금이 나라의 자재와 장인을 내려줘 지었다 해서 궁집이다. 격조 있다. 단청만 없을 뿐 모든 게 궁궐 건물로 느껴진다. 공주 50칸, 당시 법도에 따라 칸 수를 꽉 채웠다. ㅁ자형 안채는 부엌 4칸, 방 3칸에 앞퇴를 한 칸 더 놓았다. 정면 가운데 안방을 두고 양편에 대청과 부엌이다. 안방 앞에서 대청으로는 퇴로 동선을 잇는다.정침 좌우 날개는 방과 곳간을 들이고, 남행랑에는 곳간과 중문이 있다. 우측 날개채에 건넌방과 부엌이 있는데, 부뚜막에는 무쇠 솥 2개가 걸려 있다. 좌측 날개채에 아랫방과 광이 있고, 사랑으로 연결된다. 사랑채는 ㄱ자 형으로, 방 두 칸 외에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서남쪽 끝에는 돌출시켜 날아갈 듯 처마선이 고운 누마루가 있다. 누마루는 한 칸, 장초석으로 주초를 놓고 잘 다듬은 장대석 기단을 얹어 품위를 높였다. 사랑채 북쪽, 안채 큰 부엌 뒷문 앞에 3단 장대석을 높이 쌓은 기단 위에 우물을 팠다. 우물의 허드렛물은 돌기단 아래 구멍으로 흘러 사랑채 뒤편으로 빠진다. 궁집과 영조, 화길의 생모 문씨 궁집 주인인 화길은 비운의 공주다. 13살에 시집가 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생모 문씨는 사약을 받았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으니 봉호[和吉]와는 반대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은 화길(和吉)했다. 막내로 태어나 시집가서도 아버지 영조의 총애를 누렸고, 생모의 수난을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신분 낮은 무수리 소생인 영조는, 이해하기 힘든 기행이 많았다. 외아들은 죽이고, 딸만 편애했다. 후궁도 천출을 총애해, 12명 딸이 정비 소생은 하나도 없었다. 시집간 화평, 화완을 궁내 머물게 하고, 화평이 딸을 낳다 죽자 한동안 정사를 내팽개쳤다. 또 과부 며느리 조씨(세자빈 현빈)를 자주 찾았다. 시아버지는 며느리 근처도 가지 않던 상례를 무시하고. 해진 뒤에도 과부 며느리에게 야식을 청하고, 현빈 조씨가 버선발로 부뚜막에서 밤을 구워 바쳤다. 화길의 생모 문씨가 승은(承恩)을 입는 과정도 그렇다. 1751년 말, 현빈 조씨가 죽자 57살의 영조가 빈소를 찾아 현빈의 시비를 건드린다. 시아버지가 며느리 빈소 옆에서! 금지옥엽이 왜 천것을? 실록에 직접 언급은 없지만, 낮은 신분의 궁녀들이 승은을 입는 것은 의외로 세수간이었다. 한복 정장을 입고 재래식 화장실에서 생리 현상을 해결해보면 안다. 누가 거들고 붙잡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그래서 왕조 시대에는 자주 세수간에서 역사가 이뤄졌다. 얼마나 냄새가 나면, 승지가 문씨의 책봉 교지에 옥새를 누르라는 왕명을 거부했을까? 문씨는 잔머리가 비상했고 손도 재빨라, 김상로, 오빠 문성국 등과 결탁해 사도세자를 무고해 죽게 만들고 궁내 인삼을 도둑질해 썼다. 문씨가 대가를 치른 것은 1776년 영조가 붕어하고 세손 정조가 즉위한 뒤였다. 폐서인 돼 사가로 내쫓기고 오빠와 어머니는 관노비로 내쳐지며, 국상이 끝나자 마침내 사사된다. 정조는 5년 전 화길의 장례식 비용 10만 냥까지 감사했다. 어진 임금 정조도 생부 사도세자에 대해서는 맺힌 것이 정말 많았던 모양이다. 궁집 영역의 가치와 부부 예술인의 안목 아랫사람들이 거처하던 초가 2채를 물리고, 그 자리에 일본 작위와 훈장을 받은 친일파 송병준의 고택(용인집)이 옮겨 들어섰다. 맞은 편에는 1974년 서울대가 관악으로 옮기면서 허물게 된 강감찬 장군의 낙성대 사당이 옮겨 세워졌다. 멀찌감치 등 돌린 단정한 정면 7칸의 건물은, 대원군과 함께 안동 김씨 세도 정치를 종식한 조 대비씨의 친정집(군산집)이다. 군산집은 앞에서 보면, 계단식 객석을 갖춘 고풍 찬연한 옥외 공연장이다. 유쾌한 반전이다. 풍수에서 바람은 막고(藏風) 물은 받으라(得水) 했는데, 20년 전 아파트가 들어서고 나서 궁집은 물길이 끊기고 연당은 말랐다. 예산 쓰든 모금하든 물길은 잇고 연당은 채우면 좋겠다. 옮겨온 군산집, 용인집, 강감찬 사당, 경내 조성된 물길과 돌무지개 다리, 갖가지 고목까지, 궁집은, 한번 걸음으로 고려 중기에서 조선 영조와 구한말을 거쳐 왜정까지 천 년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귀한 장소다. 작고한 연극인 이병복, 화가 권옥연 선생, 부부 예술원 회원은 무의자(無衣子)재단을 설립해 귀한 유산을 넘겼다. 공시지가 70억 큰 재산을 기울여 외골수로 자연과 문화를 다듬고 모아 보존한 두 선생께 감사를 드린다. 복권 수입으로 문화재나 천연유산을 매입해 보전 관리하는 영국 내셔널로터리(National Lottery)를 벤치마킹하면 어떨까?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8. 이천 어재연 생가

이천(利川), 큰 강을 건너면 이로우리라[利涉大川]. 경기도 이천시 율면(栗面). 충북 음성군 삼성면, 생극면과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이천시의 경계가 맞닿은 지역이다. 옛날에는 밤이 많이 났던 모양인데, 너른 들과 청미천, 석원천의 풍부한 물로 예로부터 맛좋기로 소문난 이천쌀의 주산지다. 멀지 않은 음성군 삼성면 마이산(472m)에는 망이산성이란 성터가 있는데, 면적이 10만㎡나 되고 정상에는 봉화대가 있어 비옥한 곡창을 놓고 벌어진 3국 시대부터의 치열한 쟁패전을 짐작할 수 있다. 자연부락명 돌원인 율면 산성1리, 함종 어씨(咸從 魚氏) 집성촌이 있다. 시조(始祖)는 고려 명종 때 때 난을 피해 도래한 오늘날의 중국 섬서성 출신의 어화인(魚化仁)이라 한다. 함종, 생소한 지명이라 사전을 찾아보니 평안남도 증산군 함종리라 돼있다. 어씨 집성촌 맨 오른쪽 안 깊은 산자락에 국운이 기울어가는 조선말, 비운의 장군 어재연의 생가가 있다.  소박하지만 웅장해 보이는 초가지붕 소박한 초가라지만, 경사지를 평탄하게 하려고 석축을 높이 쌓은 전면은 웅장하기까지 하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이렇게 높은 석축 위에 놓인 초가를 본 적이 없다. ㄱ 자형의 안채와 ㅡ 자형의 사랑채와 광채가 안뜰을 둘러싼 튼 ㅁ 자형이다. 안채가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문 바로 안쪽에 짧은 내외담이 있다. 사랑채도 안채도 돋운 석축 위에 지었으니, 초가집으로는 상당한 공력이 들었을 것이다. 건물마다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웠는데, 단정하며 자연스럽다. 1칸 대청, 2칸 온돌방, 1칸 부엌의 사랑채는 2고주, 5량 구조로 툇마루를 달았다. 툇마루에 앉아 7월의 땡볕을 피한다. 초가 그늘에 들어서니 에어컨을 튼 것처럼 시원하다. 단열, 초가의 최대 장점이겠다. 사랑채는 외양간, 창고로 구성된 행랑채와 연결된다.이 집에서는 반가의 특징이라 할 누마루도 머름도 4분합 들창문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웅장해도 초가는 역시 초가라, 보도 기둥도 서까래도 기와집들보다 훨씬 가늘다. 볏짚으로 이은 초가지붕의 하중은 기와에 비할 바 없이 가볍다. 기와 집도 기와집 나름이라, 1벌, 2벌, 3벌로 재력에 따라 기와 덮는 방식이 달랐다. 궁궐이나 사원, 우리가 기억하는 고택은 3벌 기와가 보통으로, 기와를 3겹으로 얹었으니 하중이 어마어마했다. 보, 도리, 기둥, 서까래 모두그 하중을 떠받칠 만큼 든든해야 했다.  조선 말의 국제 정세와 약소국 장수의 운명 미군 함정이 강화도로 침공해온 신미양요(1871) 당시 조선군은 용기(정확하게는 만용)뿐, 무기와 전술에서 미군의 상대가 아니었다. 미군은 함정 5척에 병력 1천230명, 조선군은 보병 300명. 먼저 대포. 조선 대포는 철환을 쏘는 수준인데, 미군 함포는 목표물을 맞히면 화약이 폭발하니 파괴력과 살상력에서 비교되지 않았다. 다음 소총. 조선군의 화승총은 임진왜란 때와 별차이 없는 전장식으로 상반신을 드러내고 장전하는데, 미군 소총은 후장식으로 몸을 숨긴 채 장전하고 연속 사격이 가능했다. 서양에서도 후장식 드라이제 소총으로 무장한 프러시아 군이 전장식 머스켓 소총의 오스트리아 군에 압승한 1866년 보오 전쟁의 선례가 있다. 유일한 희망은 근접 백병전이었는데, 미군의 신체 조건이 월등했으니. 조선군은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그토록 강력히 싸우다가 죽는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당시 상륙 미군 슐레이 소령은 기록했다. 사망자 243 대 3, 조선군은 용맹했으나 어재연 대장 형제가 전사하고 대장기 帥자기마저 빼앗겼다. 참담 한 패배였다. 가로 415cm, 세로 435cm의 삼베 帥자기 오른쪽에 일부를 잘라낸 흔적이 있다. 죽인 소의 귀를 잘라 전리품 삼는 투우사의 전통처럼. 帥자기는 미국인인 토마스 듀버네이 한동대 교수의 주도로 2007년 미 해군사관학교로부터 임대받아 돌아왔다. 듀버네이 교수는 카터, 클린턴, 부시 등 미국 대통령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반환을 성사시켰다 한다. 후손된 이로 한심하고, 부끄럽기 한량없다. 帥자기와 함께 러시아 군함 바랴크기가 떠오른다. 1904년 조선 영해에서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러일 전쟁, 당시 바랴크함의 러시아군은 배를 넘겨주기보다는 자폭을 택했다. 그 깃발을 일본군이 승전 기념으로 인천에 보관하다 놓고 갔다. 국권을 잃은 쓰라린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그 깃발을 보관해야 하는 것 아닐까?  무너진 국권과 지배 엘리트의 책임 한일합병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잘못된 국제정세관과 쇄국정책이 빚은 참사로 기억된다. 또는 조선이 국제사회의 변화에 대응할 역량이 없었다는 숙명론 으로 일제의 병탄을 합리화한다. 문제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17세기 초 명청 교체기 대륙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명을 떠받들고 청을 멀리하자고 주장한 집권 세력의 잘못된 정세관이 조선 멸망의 근본 원인이다. 당시 수구 집권 세력은 명나라 황제를 숭상하는 만동묘를 만들고, 힘도 없으면서 택도 없이 북벌론 을 주장했다. 척화파-노론에서 세도 정치-친일파로 이어지는 집단은 정치경제 권력과 학문과 문화 권력까지 독점하고 국력을 철저하게 훼손했다. 그 대표는 세거지를 서울 장동으로 옮긴 안동 김씨[壯洞金氏]였다. 향리에 남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영호남, 경기의 선비들은 남인으로 산림에 묻혀 책을 읽고 후진을 길렀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먼 훗날을 기약하면서. 정약용, 이익 등 실학자들도 대부분 남인이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서원에 대해 젊은이들이 부정적인 것도 이해는 된다. 그러나 부정적 시각자체가 바로 노론-세도정치-친일파-수구 반동으로 이어지는 권문세가 출신의 의도라는 것을 왜 모를까?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7.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

안성 덕봉리는 주민의 90% 이상이 해주 오씨인 철저한 집성촌이다. 충정공 오두인을 모신 덕봉서원이 있고, 선조의 묘역과 종택이 잘 보존돼 있으며, 잘 지은 문중 재사까지 들어선 특이한 곳이다. 넉넉한 고문헌을 바탕으로 마을지까지 일찌감치 발간한 범절 있는 동네다. 진산인 고성산이 크게 높지는 않지만, 뒤를 받치고, 좌청룡 바리봉, 우백호 배미큰봉이 양옆을 포근히 감싸며 멀리 앞으로 대덕산이 보인다. 풍수를 잘 모르는 필자로서는 괜찮은 자리라 느껴지는데, 말 거들기 좋아하는 지관들이나 풍수들이 별로 언급하지 않은 점은 이상하기만 하다. 왜 풍수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가 하면, 남들이 안 하니 나라도 하자는 생각도 있고, 이 가문만큼 낮은 데서 크게 치솟아 올라온 가문도 별로 없으니 풍수의 덕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변화는 가문이 덕봉리에 자리 잡은 시점에 시작되었다. 멸문지화의 위기에 선 해주 오씨 해주오씨가 덕봉리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불명확하나 1525년(중종 20) 유세창, 유세영 무리의 고변 무고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반란을 계획했다가 사실이 밝혀지면 벌을 받을까 두려워, 오히려 거짓으로 역모를 날조해 고변했다. 60여 명이 연루돼, 국문 과정에서 7명이 죽고 16명은 대역죄로 능지처참 됐다. 오필경 부자도 처형당하고 형 오현경과 조카 오경운 부자는 장형을 받고 경남 산음과 안음으로 유배됐다가 세상을 떠났다. 오경운의 부인 풍산 심씨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 친정 근처에 장사지내고, 시묘하는 한편 두 아들을 키웠다. 당시 워낙 세도가였던 풍산 심씨네는 지관을 천시했는데, 심씨 부인은 지관들을 잘 대해주었고 그래서 명당에 시아버지와 남편을 모실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쨌든 심씨 부인은 친정의 도움으로 할아버지, 아버지 없는 10살, 7살의 수천, 수억 형제를 신중하게 말하고 행동하도록 엄하게 잘 가르쳤다. 여성의 힘, 역적의 후손에서 명문가로 시간이 흘러 유세창의 역모고변은 거짓으로 판명되고 오현경 부자도 억울한 누명을 벗고 관직도 회복되었다. 아들 수천, 수억 형제도 출사해 무관으로 인정받았다. 수억의 아들 정방(吳定邦)이 무과에 장원급제한 것이 결정적 변곡점이었다. 장원급제한 정방을 병조판서인 율곡 이이(李珥)가 인견(引見)하고 영재를 얻었다고 칭찬했을 정도였다. 정방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또 임금의 호종대장으로 현달(顯達)해 가문의 명성을 떨쳤다. 심씨 부인의 부덕(婦德)과 효열(孝烈)이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위기에서 가문을 일으키고 명문가로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후손들은 2015년 영모각(永慕閣)을 건립해 심씨 부인의 위대함을 기리고 있다. 이때부터 안성 덕봉리의 주인은 풍산 심씨에서 해주 오씨로 바뀐다. 마치 경주 양동이 손씨에서 여주 이씨 세거지로 바뀌듯. 해주 오씨는 원래는 중국이 원래 고향이지만 고려 때 건너와 해주에 오래 살았고, 조선조부터는 덕봉리 정착 전까지 용인 기흥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중후기에 오씨 가문은 문무 대과 특히 무과 급제자를 대거 배출해(문과 18명, 무과 107명) 명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예산 수당 고택에서도 전주 이씨 부인의 리더십이 위기의 가문을 일으켰는데, 정무공 고택도 절대 덜하지 않다. 국난사양상 가난사현처(國難思良相 家難思賢妻). 퇴전당, 온전하게 물러나다 정무공파 종택은 1515년 경 처음 건립된 이래 정무공 오정방, 경상도 관찰사 오숙 4형제와 영의정 오두인 등 영현(명사)을 여럿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원래 100여 칸 건물이었다 하니 별도의 행랑채 문간채 등이 외부와 경계를 형성했을 것이다. 현재는 문간채 안채 겸 사랑채 그리고 사당으로 구성돼, 영의정에 판서를 여럿 배출한 명문의 종가로서는 규모가 작다. 사랑채 누마루는 바닥높이가 옆방과 같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한편, 큰 시련을 겪은 집주인의 근신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정무공은 당대에 두 번이나, 피난길에 오른 임금의 호송대장으로 활약했다. 짧은 기간에 명예만 회복한 것이 아니라 왕실의 신임까지 회복했으니 얼마나 피눈물나는 노력을 했을까? 가문의 아픔과 인고의 세월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사랑채는 건축주 정무공의 아호인 퇴전당을 당호로 썼다. 퇴전당(退全), 온전하게 물러나라, 증조부 형제가 누명을 쓰고 비명에 세상을 뜬 이 집안에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또 무관에게는 세 불리하면 전력을 오롯이 간직해 후일을 기약하는 퇴전이 임전무퇴만큼이나 중요할 것이다. 덩케르크에서 눈물을 머금고 후퇴했다가 노르망디에 상륙한 2차 대전 당시 영국군처럼. 정무공 종택, 개혁적 실용적 배치 선비나 문반의 고택 가운데는 논산 명재고택이나 안동의 의성김씨 내압 종택 정도가 개혁적인 시도가 눈에 뜨이는 사례다. 그 외에는 문반보다 무반의 집이 구조나 배치, 세밀한 인테리어 등 기능적으로 더 우수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집도 그렇다. 사랑채 건넌방 앞의 툇마루를 이용하여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해 단일채로 구성한 독특한 구조다. ㄱ자형 몸채에서 ㅡ자형 부분을 길게 연장하고 중간에 사잇담을 두어 안채 영역을 감싸고 안팎을 나누는 수법은 창덕궁 연경당과 비견된다. 안채와 사랑채 문을 두어 공간의 다양성을 살리고 남녀 공간을 적당하게 구분한다. 안채와 사랑채를 엄격하게 구분하던 17세기 사대부 가옥의 일반 경향과 다르다. 또 사랑채 전면의 팔각기둥과, 채광 및 통풍을 원활히 하려고 부엌 앞뒤에 달아둔 개폐 가능한 주마창이 특징이다. 치목(재목을 다듬고 손질함), 건물 배치와 구성이 빼어나고, 조선 중기 양반가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이왕 나선 김에 집안의 많은 묘소, 웅장한 문중 재사, 덕봉서원, 백련정, 김좌진 장군의 부인 생가 등도 둘러보시라 권한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6. 충남 예산 수당 이남규의 고택

현충일 다음날, 비가 내리지만, 예정대로 충남 예산으로 향했다. 한말의 독립운동가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고택, 4대가 내리 훈장을 받고 국립묘지에 묻힌 이채로운 호국의 성지다. 그러나 의외로 충청도 토박이들 사이에서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는 않은 듯, 동행한 이들도 내력을 잘 알지는 못한다. 잘 정비된 진입로에 들어서면서 집과 사람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이 집을 짓고 경영한 주인공은 숙부인(淑夫人) 전주 이씨다. 북인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손자며, 수당(修堂)의 10대조인 한림공(翰林公) 이구(李久)의 부인이다. (이구가 1637년 지었다는 엉터리 주장이 있지만, 1609년 스물넷에 죽은 이구가 1637년에 집을 지을 수는 없다.) 숙부인의 고조부는 왕실용 도자기를 굽는 사옹원(司饔院) 도제조(都提調)를 역임하는 등 왕자로서는 파격적으로 정무에 참여한 성종(成宗)의 아들 이성군(利城君)이다. 이성군은 그림에도 재주도 있어, 붕어한 임금의 어진(御眞) 즉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도 주관했다 한다. 여성의 힘, 무너지는 집안을 일으켜 세우다 스물에 청상과부가 된 숙부인은 1636년 병자호란 때 피난을 떠났다. 이듬해 난이 끝나자 시댁인 한산 이씨의 세거지인 충남 보령을 떠나 시조부 이산해의 묘소 가까운 예산 갈막마을 산자락에 터를 잡았다. 노복(奴僕)을 불러모아 가시덤불을 베고 집을 짓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숙부인은 아버지 없는 4살짜리 아들을 가르쳐 진사를 만들고, 진사 아들이 32살에 죽자 하나 남은 5살짜리 손자를 길러 현감으로 세상에 내보냈다. 숙부인은 여든 살이 넘도록 오래 살면서 남편 없는 집안 살림을 주관했다. 남편만 없는 게 아니라 시댁이 주도하던 북인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을 것이다. 그 집을 잘 관리해 중흥시켰으니, 당대 여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보통의 양반가는 행랑채가 사랑채를 보호하고, 안채는 사랑채보다 안쪽에 들여 앉힌다. 이 집은 다르다. 안채가 사랑채보다 더 앞으로 나와 있다. 안채를 보호하는 문간채는 당시로써는 최신 유행이라 할 우진각 지붕이다. 북방 유목민족의 건축 방식에서 유래한다고 하는데, 호란 이후 청나라의 영향이라고 알려졌다. 팔작지붕은 위에서 보면 사다리꼴 4개가 중앙의 긴 직사각형을 둘러싼 모양인데, 우진각지붕은 긴 사다리꼴이 마주 보고 양쪽 빈자리를 삼각형이 채우는 형태다.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건축 문간채는 계단을 여섯 개나 밟고 올라갈 정도로 높은 축대 위에 서 있다. 아마 이 높은 축대 위에서 숙부인이 남녀 노복들을 호령했을 것이다. 문간채 대문의 아래위는 휜 나무를 잘 사용한 월방의 형태다. 사람이 주로 드나드는 중앙은 아래턱은 낮고 위턱은 높아 솟을대문이 아니면서도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다. 문간채 앞면 화방벽(火防壁)은, 아래는 굵은 냇돌 위로 갈수록 작은 냇돌을 박고 황토로 줄눈을 마감해 안정적이면서도 부드럽다. 시선을 차단하는 문간채 문간을 지나 안채로 들어서면 안채의 축대는 3벌대로 나직하다. 중앙의 대청마루가 정면 3칸으로 매우 널찍한데, 칸마다 바라지 창을 설치해 여름이면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다. 날개채는 안방과 건넌방이 끝에 부엌을 두 칸 두고 부엌문과 통풍용 살창, 부엌 위 다락 광창까지 모두 대칭으로 꾸몄다. 퇴는 나무판 2쪽 폭으로 매우 좁다.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서쪽 협문은 외부에 완전히 노출돼 있다. 평원정 평안하고 화락하되 끝없이 아득하다 사랑채는 3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소박한 자연석 돌계단을 딛고 올라가지만, 정면 여섯 칸, 측면 두 칸으로 당당하다. 좌우에 넉살무늬 4분합문을 단 온돌방을 두고, 대청마루에는 띠살무늬 4분합문을 꾸몄다. 사랑채 뒤에 퇴를 달고 부엌을 꾸민 실용적인 발상, 특이한 구조와 배치, 운영에 400년 전 숙부인 할머니의 자취가 배어 있다. 사랑채 중앙에는, 원래의 평원정(平遠停) 편액은 625때 없어지고 김충현 선생이 쓴 편액이, 좌우의 방 입구에는 청좌산거(請坐山居) 홍엽산거(紅葉山居)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평원은 중국 북송 시대의 최고의 화가요 이론가 곽희의 『임천고치(林泉高致)』산수훈(山水訓) 에 나오는 말이다. 산 아래에서 산 정상을 바라보는 것은 높은 원경 즉 고원(高遠), 산 앞에서 산 뒤를 들여다봄은 깊은 원경 즉 심원(深遠)이며,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바라봄은 수평 원경 즉 평원(平遠)이라 한다. 고원의 기세는 우뚝 솟은 듯하며, 심원은 겹겹이 포개져 있고, 평원은 평안하고 화락하되 아득하고 넓다. 집주인 숙부인이 사랑채를 평원정이라 한 뜻이 조금은 짐작이 된다. 그러나 숙부인 할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만만찮은 고난과 풍파가 집안에 닥쳤다. 이구와 아들, 장손까지 3대가 일찍 세상을 떴고, 북인의 시대가 끝나고 서인이 득세했기 때문이다. 4대에 걸친 호국 정신 궁내부 특진관(차관급)을 지낸 수당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 의병에 참여해 홍주(지금의 홍성) 전투에 장남 이충구와 함께 선봉이 되었다. 이후 부자가 왜병에게 붙잡혀 한 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고 결국 선생과 아들(당시 33세), 가마꾼까지 한날한시에 왜군의 칼날에 스러졌다. 손자 이승복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증손자 이장원 소위는 625 당시 원산 전투에서 산화했으니(당시 22세) 여장부 할머니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았다 하겠다. 수당이 고종에 올린 상소문 일부를 옮겨본다. 멸망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더욱 멸망을 재촉하니 그 존립이 구차한 것이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을 재촉하니 그 삶이 구차한 것이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5. 파주 자운서원

안동 도산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대표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서원은 지역 사회가 설립한 사립학교로, 제사와 강학, 풍속순화와 정치적 여론 형성도 맡았다. 어느 왕조를 막론하고, 훈척(勳戚, 공신과 왕실 친인척)은 권세를 믿고 부패와 불법이 잦고, 행정 관리에 어둡다. 그러니 왕은 훈척을 국정에서 배제하고, 깨끗하고 실력 있는 테크노크라트를 중용하고자 한다. 조선 전기 때도 그랬다. 사림(士林)은 체계적 독서를 통해 실력을 기른 테크노크라트였지만, 권모술수가 부족해 4대 사화(士禍)를 잇따라 당하며 패퇴했다. 사림이 실력을 배양하고 힘을 모아 정치 세력으로서 체계화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은 서원이었다. 결국, 사림이 조선의 정치권력을 잡고 정치 사회를 개혁하니 서원의 기여는 재평가돼야 마땅하다. 자운서원은 조선 광해군 때 율곡 이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앙하기 위해 파주 자운산 기슭에 지역유림이 창건했고, 효종이 자운 현판을 하사하면서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사액서원은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런던대 등 유서깊은 유럽 대학의 킹스칼리지(Kings College)격이다. 자운(紫雲), 붉은 노을, 아마 석양이 무척이나 아름다울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날 석양을 즐길 여유까지는 없었지만, 자운서원 넓은 안뜰에는 잔디가 깔렸고 나무 그늘과 연못이 있어 넉넉하고 아름다웠다. 선현의 유적에 대한 거리감을 없애는 데는 아주 좋으니, 자녀와 함께 나들이할 장소로 전혀 손색이 없다. 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라 해서, 앞에 강학 기능을 담당하는 강당과 동서 양재(기숙사)를 두고, 뒤에 묘향(廟享, 제사)을 위한 사당을 두어 선현을 모셨다. 서원 입구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우뚝하다. 2단 받침돌의 아랫단은 돌 4장을 짜맞추고, 윗단은 구름과 연꽃무늬를 새겨 호화롭다. 묘정비 비문은 당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김수증, 비명은 당대 명필 김수항이 썼다. 수령 몇백 년은 족히 될 느티나무 두 그루가 지키는 문성사(文成祠)는 팔작지붕의 6칸 건물이다. 율곡을 주향(主享)으로, 숙종 이후 수제자 사계(沙溪) 김장생과 남계(南溪) 박세채가 종향(從享)으로 모셔져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9대 서원 가운데 충남 논산 돈암서원이 김장생을 주향으로 모신다. 율곡 선생은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파주 율곡리에서 성장했다. 대제학, 대사헌, 호조병조이조판서를 지내며, 십만 양병설, 대동법 시행, 사창 설치 등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개혁가였다. 임금과 국가 경영과 치세의 도리를 주고받은 동호문답(東湖問答), 임금에게 올린 만 글자의 상소문 만언봉사(萬言封事)성리학 요체를 정리한 성학집요(聖學輯要), 학문에 입문하는 미래 세대를 위한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의 저서를 썼다. 시폐론(時弊論), 시무론(時務論)등 현실과 타이밍(時)을 강조한 저서가 많다. 퇴계 이황 선생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며, 퇴계가 영남 사림의 대표며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한 데 반해, 율곡 선생은 기호학파의 대표로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했다. 퇴계는 지방 사림의 교육과 민중 교화에 더 관심이 많았고, 율곡은 현실 정치와 행정에 깊숙이 관여한 차이가 학설에도 반영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서원 반대편 기념관, 선생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하며 선조에게 올린 글, 시무육조(時務六條)를 만난다. 나라에 가장 시급한 여섯 가지를 뽑아 올린 것인데, 첫째가 임현능(任賢能), (문벌 신분에 얽매지 말고) 어질고 일 잘하는 사람을 쓰라는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던 YS의 말이 떠오른다. 나도 글쓰는 사람인지라 공부하는 자세를 정리한 격몽요결(擊蒙要訣) 지신장(持身章)의 첫 구절을 되뇌어 본다. 족용중(足容重) 수용공(手容恭) 발은 무겁게, 손은 공손하게. 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묵적(墨跡)과 행적을 요약 정리한 동영상도 상영한다. 이항복의 백사집(白沙集)에는 율곡이 은퇴 후 처가인 해주에서 대장간을 차려 호미와 괭이를 만들어 팔았다 한다. 먼저 죽은 맏형 가족을 데려오고, 자리 잡힌 후에는 동생 가족, 가까운 친척 등 모두 100여 명의 대가족을 이끌었다 한다. 천민 출신이라도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면 주저 없이 교류했던 사실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기호학파 예론(禮論)을 이끈 구봉 송익필이 바로 천민 출신 친구였으며, 선생은 서출에게도 재산을 고르게 나눠주었다 한다. 선생은 실천하는 정치인이요, 학자였던 것이다. 기념관과 자운서원을 양쪽에 두고 산자락에 가족묘가 있다. 어머니 신사임당과 아버지 이원수 공의 합장묘를 비롯해 형 이선, 여류 화가로 이름을 떨친 누나 매창 부부, 맏아들 이경림, 큰손자 이제 부부 등 모두 14기가 정답다. 선생 묘소가 가장 크고 가장 위에 있어 이채롭고, 누나 부부와 그 시부모 묘소가 특이하다. 가벼운 산책을 겸한 참배를 권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임진나루 강기슭 남쪽은 천연의 성 모양이다. 참으로 가히 지킬만한 땅이며, 성을 두기 딱 좋은 곳이다. 이제까지 성을 쌓지 않았으니 얼마나 한스러운 일인가?라고 탄식했다 (臨津渡. 江岸南麓 如天作城形. 眞可守之地 而不得不置城處也 然至今不築城 切可恨也). 바로 그 자리 화석정(花石亭)은 지을 당시 주변에 기이하고 진귀한 화초와 소나무, 괴석이 많았다 한다. 화석(花石)은, 중국 당나라 재상 이덕유의 별장 평천장(平泉莊) 기문(記文)에서 따왔다. 율곡 사후 8년 뒤 임진년, 왜군이 쳐들어오자 선조가 비 내리는 야간에 몽진(蒙塵)을 떠나게 됐다. 율곡이 전란을 예견하고 화석정 기둥에 기름을 칠해 뒀음을 누군가가 떠올리고 화석정에 불을 붙였고, 그 불빛으로 선조 일행이 임진강을 건너 피난을 갈 수 있었다 한다. 그러나 실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고, 선조를 수행했던 유성룡도 징비록(懲毖錄)에서, 화석정이 아니라 임진강 나루 건물을 태웠다고 기록했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4. 구례 운조루(雲鳥樓)

오래전부터 아름답다고, 아름다운 사연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다. 벼르고 벼르던 구례 운조루(雲鳥樓)를 찾아 천 리 먼 길을 나섰다. 구례 오미동(五美洞), 큰길을 벗어나자 안온한 분위기의 기와 동네가 보인다. 동네 안쪽, 커다란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행랑채는 솟을대문을 가운데 두고 18칸 길게 늘어서 가문의 권세와 부를 과시한다. 솟을대문에 걸린 동물뼈는 벽사(僻邪)용으로 입향조(入鄕祖, 한 씨족이 어떤 장소에 처음 자리잡게 만든 조상)인 류이주(柳爾)가 문경새재에서 물리친 호랑이뼈라 한다. 집 입구에 실개천이 흐르는데 실개천 앞에 인공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다. 5월 중순, 푸른 연잎 사이사이 홍련이 피어 아름답다. 한국의 집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작은 연못으로 만족할 뿐 집 안팎에 많은 물을 가두지 않는다. 습하면 음기가 강해진다. 충남지사 공관 앞의 습지와 갈대 때문에 안희정 지사가 몰락했다고 해석한 풍수도 있었다. 운조루 입구의 연못은 벽사(僻邪)가 목적이라지만, 거택의 해자(垓子)라고 볼 수 있다. 해자는 일본이나 유럽의 성에서는 필수지만 중국과 한국의 성에서는 흔치 않은 발상이다. ■ 무신이 짓고 관리하는 아름다운 집 아름다운 거택을 지은 이는 조선 영조 때 무관 류이주로, 호랑이를 물리쳐 임금으로부터 박호대장(拍虎大將, 호랑이를 때려잡은 대장)이라 칭찬을 들었다. 무관이 이 아름다운 건물을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했다? 20여 년 동안 남한산성, 함흥성, 영남감영의 축성을 지휘 감독하고, 수원 능원(陵園)을 개보수한 전문가라니 의문이 풀린다. 입구 연지도 류이주의 방어형 축성 지식이 발휘된 것인가? 원래 대구 출신인 류이주는 부근 낙안군수로 있으면서 운조루 터를 점찍었고, 99칸 큰 집을 지은 뒤 동생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큰사랑 서쪽 누마루(지금은 고택 전체를 운조루라 부르지만 원래는 이 누마루의 이름이었다)에 올라 종부(宗婦) 이지순 할머니가 미리 준비해둔 차를 마시며 더위와 갈증을 함께 씻는다. 운조루 당호(堂號)는 손자인 류억(柳億)이 깊이 교류하던 추사 김정희 선생으로부터 얻은 것 같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전원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글자들이다.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운무심이출수 조권비이지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어떤 고택 소개 책자에서는 귀거래사를 칠언율시라 칭하는데, 여섯 글자 댓구를 보고도 칠언율시라니 한심한 일이다. ■ 자연을 살리되 멋과 실용을 겸하다. 사랑채 문은 띠살무늬 분합문인데, 흔히 보이는 좌우 대칭의 사분합(四分閤)이 아니라 좌우 비대칭의 일종의 삼분합(三分閤)이라 변화와 파격이 느껴진다. 필요하면 모든 문을 들어 천장에 달린 고리에 고정시키고 공간을 여닫을 수 있다. 여름철 덥고 습한 남쪽 지방의 기후를 고려한 것일 게다. 구름과 새(雲鳥)를 벗하는 주인의 자연 사랑이 드러난 것일 수도 있다. 운조루는 자연을 살린 건축으로 관심을 둘 만하다. 주춧돌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했고, 기둥이나 보에도 굽은 나무의 원형을 살린 곳이 여럿 눈에 뜨인다. 안채 좌우의 날개는 낮은 2층으로 구성돼 공간 활용을 극대화했다. 오른쪽 다락은 난간이 없지만, 왼쪽 다락은 난간이 있어 안전하게 쓸 수 있겠다. 큰사랑채 뒤쪽에는 작은 책방이 있다. 안채와도 거리를 둔 뒤쪽 구석, 작은 출입문에 작은 창문과 쪽문이 하나씩, 창은 이중창이다. 철저히 외부와 단절시켜 공부에 집중하도록 한다. 그렇지만 일부 건축학자가 주장하듯 5대 장원 급제는 사실과 다르다. 가문에 보관된 홍패(紅牌)는 무과급제 4장인데, 장원은 없다. 무과 급제 4장도 물론 대단하지만. ■ 성실하게 모으고 꼼꼼하게 기록하다. 타인능해(他人能解), 가풍은 영원하다. 이 집의 자랑은 급제보다, 짧은 기간 큰 부를 일구고 재산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과정을 잘 기록한데 있는 것은 아닌지? 유이주의 4세손 류제양(柳濟陽)은 문적(文蹟)마다 주(註)를 달고 목록을 붙여 봉투로 싸서 보관할 정도로 철저했다. 류제양은 손자 류형업(柳瑩業)에게도 기록 습관을 가르쳐 조손(祖孫할아버지와 손자)이 1851년부터 1942년까지 90년간 농가일기 시언(是言)과 기어(紀語)를 남겼다. 민간에서 유례가 드문, 꼼꼼하게 기록하는 집에 장원 급제 문서를 놓칠 리 없다. 운조루 터를 놓고 금환락지(金環落地 금가락지 떨어진), 금구몰니(金龜沒泥, 금거북 진흙에 묻힌), 오보교취(五寶交聚, 다섯 보물 쌓인) 등등 형상과 해석이 다양한데, 공통점이 있다. 선대가 덕을 베풀어 명당을 차지했지만, 자만 말고 더 겸손하고 노력해야 복 받는다. 작은사랑채의 편액(扁額)도 암수재(闇修齋)다. 闇은 그냥 어둡다[暗]와 다르다. 어슴푸레한 상태며 몸을 숨긴다, 아랫대에 주는 교훈이겠다. 부엌의 타인능해(他人能解, 이집 사람 아닌 사람만 풀어라) 쌀뒤주는 너무나 유명해 소개할 필요조차 없다. 밥짓는 연기가 담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굴뚝도 낮게 달았다. 가난한 이웃에게 쌀을 나눠주고, 끼니 거르는 민촌 사람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누마루의 세련미 이상 감동적이다. 결과 운조루와 자손은 동학혁명, 625, 지리산 빨치산 등 혼란기마다 표적이 됨직 했지만, 단 한번도 화를 입지 않았다. 배려의 마음은 다기와 함께 차봉투를 담아두고, 큰 물통과 커피포트까지 누마루에 비치해 누구나 부담없이 차를 끓여 마시게 하는 오늘에도 살아있다. 명당은 바뀔지라도, 가풍은 의연하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3. 여주 보통리 ‘3대 판서댁’

첫인상은 강하지 않았다. 일반 주택 사이 조금 높이 자리한 낡은 고택. 안이 들여다보이는 철망담에 관리인이 상주하니, 여주시가 나름 신경 써서 관리하는 셈이다. 조선 말 명성황후의 고향이요, 세종대왕 영릉이 있는 경기도 여주. 고택의 공식 명칭은 보통리 고택 또는 김영구 고택, 밋밋하기 그지없고 아무 감동도 없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 보면 이야깃거리가 넘치는, 어마어마한 집이다. 할아버지 조윤대(曺允大), 아버지 조봉진(曺鳳振), 아들 문정공(文靖公) 조석우(曺錫雨) 3대 내리 대과 급제에 당대 명필로, 관찰사에 판서를 두루 지냈다. 할아버지는 당시 소론(少論)의 영수였다는데, 최소한 여주 3대 판서댁 정도로는 불러야지 않겠나? ■ 멀리 한강을 내려다 보는 3대 판서댁 멀리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터전에 자리잡은 고대광실(高臺廣室), 아마 원래는 그랬을 것이다. 대문 달린 바깥사랑채와 행랑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사랑채와 작은사랑채, 안채와 곳간채가 ㅁ자를 이룬다. 남아있는 43칸만으로도 규모는 작지 않다. 가렴주구(苛斂誅求)가 판치던 조선 말임을 감안하면 3대 판서댁 규모로는 소박하다고 해야겠다. 집주인 조석우가 경상도 관찰사로 선정을 베풀었다는 송덕비가 경북 청도군에 남있고, 울산시 울주군 대곡리에는 마애송덕비(摩崖頌德碑)가 반구대 큰바위에 새겨졌다. 집은 산을 등지고 멀리 한강을 바라보는 정남향이니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좌향이다. 사랑채를 맨 앞으로, 대청 두 칸에 앞퇴를 두고 사분합 문짝을 달아 여닫게 했다. 대청 동편으로 사랑방 두 칸, 다음 마루 한 칸에 앞퇴가 이어진다. 대청 서편에 다시 방 두 칸, 그 앞에 내루(內樓, 다락) 한 칸, 사랑방 앞에는 한 단 높은 누마루가 시설돼 있다. 큰 사랑과 작은 사랑은 방과 마루를 곁들여 놓음으로써 겨울과 여름, 사철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누마루는 일반적인 대청과는 달리 3면이 열려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소통하는 공간이다. 특히 여름에는 습기를 피하고 자연 풍광과 풍류를 즐기는 고급 공간이다. 대청의 분합(分閤)은 키가 크니 여름에 시원하게 개방할 수 있고, 온돌방의 분합은 키가 낮으니 겨울에 따스하도록 보온에 신경을 쓴 셈이다. 마루 앞퇴는 머름을 두고 한 단 높였다. 머름은 한옥 특유의 재미난 착상이다. 출입문이 없는 방에 창 아래 한 자 또는 자 반의 높이로 머름을 놓고, 팔걸이를 겸했다. 창을 열었을 때 바닥을 가려 프라이버시를 보호받는다. 사랑채가 끝나는 서편 중문을 기나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ㄷ자로 둘러싼 안채는 모두 24칸이다. 남향으로 부엌, 안방, 대청을 일자 배열하고, 양 끝에 남쪽으로 날개를 달아 건넌방과 아랫방, 곳간을 두었다. 안방에도 내루를 두어 수납공간으로 활용하고, 대청에는 용 자 무늬의 분합문을 달았다. 안채 대청 동편에는 한 칸 마루방과 두 칸짜리 건넌방이 있고, 부엌 두 칸과 곳간이 이어진다. 부엌 동쪽으로는 방 두칸과 마루 한 칸의 작은 사랑채가 튀어나와 있는데, 앞에 반 칸 퇴가 뒤로 쪽마루가 놓였다. 이런 작은사랑채 배치는 아주 드물다고 한다. ■ 안목과 솜씨, 멋과 실용을 겸비하다 주초는 사다리꼴 화강석, 기둥은 각진 방주(方柱), 처마는 부연(浮椽)이 없는 홑처마다. 둥근 목재로 서까래 아래 길게 가로 놓인 도리(道里)를 썼으니 굴도리집이다. 목재는 옻을 칠하지 않은 백골(白骨)이고 담벼락은 마사토로 덧바른 재사벽(再沙壁)이며 마당에는 백토를 깔아 치장했다. 사랑채 앞에 선 비석에는 해시계라는 표지가 붙었는데, 원래는 분명 문자판이 있었을 것이나 마모가 심해 전혀 알아볼 길 없다. 사랑채 건물도 군데군데 붉은 벽돌로 수선한 자국이 남아 있어, 오히려 고택의 향을 날려보낸 것은 아닌지? 명당터를 고른 안목, 사랑채 한 칸을 다락으로 꾸며 실용성을 높인내루, 크기나 비례에서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반듯한 문 얼굴, 여유있는 사대부 제택(第宅)을 충실히 따랐다. 잘 가공된 석재, 세련되게 다듬은 목재, 흐트러지지 않고 가지런한 서까래와 시원스럽게 뻗은 추녀 등, 솜씨 좋은 당대 명인의 솜씨가 분명하다. 이 집의 유래로는 고종 때인 1860년 이조판서를 지낸 조석우가 지었다는 설과 영조 때인 1753년 해주판관을 지낸 증조부 조명준(曺命峻)이 지었다는 두 설이 대립한다. 어느 쪽이 옳든 임진왜란 전후로 거슬러 올라가는 영호남의 고택에 비하면 집의 역사는 짧다. 그러나 조명준 사후 아들 조윤대, 손자 조봉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조명준의 손자 즉 조석우의 아버지를 조용진(曺龍振)으로 소개하나, 이는 조봉진의 잘못이다.), 증손 조석우 판서 3대를 배출했으니, 역사의 무게는 물리적 시간보다 훨씬 무겁다. 조윤대는 두 차례나 3사 복합상소를 주도하는 등 직언을 서슴지 않는 현신(賢臣)이요 양신(良臣)이었다. 조봉진도 전라도관찰사 시절 둔전의 세제 문제와 관련해 민폐를 보고했다가 2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조석우도 고조부 조하망(曺夏望, 조명준의 아버지)의 문집 『서주집(西州集』을 간행했다가 유생들의 항의로 파직당하는 등 할 말 하는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후손 조성환(曺成煥)은 청산리 전투를 막후 지휘하고 임시정부 군무총장(참모총장격)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을 받았으니, 지도자의 DNA는 속일 수 없나 보다.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아예 입을 봉하려 하는 오늘날, 할 말 하는 인물, 그리고 그런 인물을 중용하는 풍토가 그립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2. 경북 안동 임청각-고성이씨 탑동파 종택과 군자정

안동역에서 철로 따라 동북으로 가면 왼편에 임청각(臨淸閣)이 나온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 생가다. 고성 이씨의 안동 입향조인 이증(李增)의 셋째 아들이며 형조 좌랑을 지낸 이명(李)이 1519년 지은 건물이다. 당호는 중국 남북조 시절 시인인 도연명의 귀거래사 마지막 부분에서 따왔다. 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 부귀는 내 바라는 바 아니며 신선 세계는 기약할 수 없다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불고 맑은 물에 이르러 시를 지으리. 임청각은 목조건물로는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임진왜란을 견뎌낸 몇 안 되는 건물이다.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인류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양동의 무첨당(無堂), 향단(香壇)과 함께 민간인 주거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오래된 고택이다. 원래 99칸이었으나 일제가 철도를 놓으면서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채 그리고 중층 문루를 철거당해 기세가 꺾였다. 영남산 기슭에 남동향으로 낙동강을 바라보니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좌향이다. 안채와 행랑채, 별채인 군자정, 사당의 세 영역으로 나뉘는데, 각 영역은 경사를 따라 성별과 위계, 기능에 따라 엄격하게 구별된다. 사랑채와 안채, 중행랑채는 세 개의 날개채로 연결돼 月자를 눕힌 모양이다. 고건축학자들은 임청각에 대해 用자를 가로로 뉜 형태의 건물 배치라 말한다. 이는 조선총독부 촉탁인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의 주장을 답습한 것이니 지하의 석주 선생이 들으면 피눈물 흘릴 노릇이다. (최근 明자 배치라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 군자의 삶, 넉넉하되 넘치지 않는다 임청각의 백미인 군자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동편에 대청, 서쪽에 온돌방 4칸을 둔 丁자형 남향 건물이다. 건물 주위에 쪽마루를 두르고, 난간을 쳐서 안전을 도모했다. 대청은 원주를 사용하고 그 위에 이익공계통의 공포와 그 사이에 화반을 1개씩 배치하였으며 겹처마로 만들었다. 공포(包)는 외면에서는 쇠서를 갖추지 않고 간소하게 꾸몄다. 회벽을 치고 대청 주위는 판문, 온돌방에는 빗살문을 달았다. 대청의 현판 글씨는 성리학의 태두인 퇴계 이황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네이버에 임청각을 두드리면 보물 제 182호 중기의 별당 건물 이렇게 나온다. 그러나 임청각 자체는 보물이 아니며(중요민속문화재 181호) 별채인 군자정(君子亭)이 보물 182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안동시청 홈페이지도 모두 임청각이 보물 182호라 소개한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는 제목이 다소 혼란스럽지만, 본문에서 이 중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보물로 지정된..이라 하여, 군자정임을 분명히 했다. 빨리 정정해야 할 일이다. 임청각 담장은 높지 않아 주인의 개방적인 마음을 드러내지만, 의외로 내부에서는 경계가 철저해 당시의 신분 질서를 말해주는 듯하다. 서울경기 지역의 저택과는 달리, 가마를 두는 헛간이 없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 일제의 잔재, 청산해야 할 숙제 임청각 바로 옆 고성이씨 탑동종택도 눈여겨 볼 만한다. 사대부저택의 요소를 고루 갖추면서 주변 자연과 교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고택이다. 조선 숙종 때 이후식이 안채를 짓고 손자 이원미가 사랑채와 별당인 영모당(永慕堂)을 완성했다. 안채는 폐쇄된 ㅁ자 형 주공간과 사당과 연결된 ㄷ자 형이 합해 ㅂ자형의 매우 독특한 평면 형식을 구성한다. 외따로 떨어진 북정(北停)은 1775년 지어졌다. 탑동 종택 바로 앞에는 탑동종택이라는 문파 이름의 유래가 된 7층 전탑(국보 16호)이 서있다. 흔치 않은 통일신라 시대 전탑이라 일찍 국보로 지정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임청각, 탑동파 종가, 7층 전탑 모두 일본이 부설한 철길 옆에서 오늘도 진동과 소음, 매연에 시달리고 있다. 일본은 왜 굳이 여기 철로를 부설했을까? 석주 이상룡 선생의 가문은 백하 김대락, 항산 허위, 이회영 가문과 함께 4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아들, 사위, 손자 등등 해서 가문에서 3대 9명이 독립운동으로 훈장을 받았다. 막내처제 김락은 본인도 왜경의 고문으로 실명했고 시아버지, 남편, 아들이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 순절했다. ■ 새로운 명문, 노블레스 오블리주 석주의 손위 처남 백하 김대락은 65세의 고령에 일가 15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는데, 세거지 안동시 천전(내앞) 한 마을에서 모두 29명이 훈장을 받았다. 석주의 손부(손자 며느리)인 허은 여사도 왕산 허위 집안 사람이다. 당시의 선비 양반은 오늘날의 졸부들과는 격이 달라도 크게 달랐던 것이니, 일제에게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국제 관계도 국내 경제도 어렵고 사회 갈등도 심해만 가는 오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선열들에게 부끄럽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 파주 ‘반구정’

황희 정승은 크게 두 차례 국왕을 거슬러 핍박을 받았다. 첫 번째,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노라며 두문동을 나오지 않은 고려의 유신 70여 명에 황희도 포함된다. 두문불출(杜門不出) 그러나 황희 정승은 그들의 추천으로 대표 출사해, 조선이 기반을 닦는데 참여했다. 두 번째, 태종이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세울 때 극력 반대했다. 태종은 대로해 이조판서 황희를 폐서인하고 귀양 보낸다. 인생을 포기할 나이인 쉰여섯의 황희, 4년을 근신하다가, 다시 불려 올라와 자신이 반대하던 충녕대군 즉 세종을 모시게 된다. 마침내 그는 6조 판서와 좌ㆍ우의정을 거쳐 18년 영의정으로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지고, 87살에 은퇴해 갈매기[白鷗] 벗하며[伴] 지내다 3년만에 세상을 눈을 감았다. 오제신후사, 지수일염자(吾齊身後事, 只守一廉字) 몸은 죽어도 청렴 하나는 꼭 지킨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사회가 황희에게서 청백리만 배우려 한다면 그만큼 큰 오류는 없을 것이다. 소와 농부, 공작새, 옳다 옳다, 많은 일화만큼이나 오늘의 한국 사회는 황희 정승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은 많다. ■ 인본사상과 통합의 정치, 황희 정승 통합은 정치의 목적이며 수단이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정치를 보면 편 가르기에 권력 다툼에만 혈안이 돼 있다. 창끝 같은 말과 칼끝 같은 행동으로 상대를 해치기에 여념이 없다. 황희는 조선조에 반대했고 후에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에도 강경하게 반대했다. 태종과 세종은 그를 중용했으니 그 자체가 통합의 정치다. 중용된 황희는 조정을 원만하게 이끌어 세종조의 번영에 큰 몫을 해냈다. 인본 사상이다. 오늘날 민주사회에서도 정파마다 조직마다 순혈주의를 내세우며 성골 진골 따지고, 북한은 백두혈통 운운한다. 몰지각한 일부 기업주는 임직원을 함부로 대하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 금수저 흙수저 운운이 일상화됐다. 그런데 엄격한 신분 사회인 조선 초, 황희 정승은 노비에게 과거에 응시할 기회를 마련해주고, 천민의 사회적 처우 개선을 도모하는 등 만민 평등 정책을 폈다. ■ 법의 지배와 실사구시의 정치 민주정치의 가장 큰 특징이 법의 지배요 예측 가능성이다. 황희 정승은 법자만세공공지기 불가일시지술경개지야(法者萬世公共之器 不可一時之術輕改之也) 법은 만대 이어져야 할 공공의 그릇이니 가벼이 고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기본법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시대에 맞게 수정 보완하면서도 국정의 안정과 예측 가능성을 고수했다. 조선 중기의 학자 미수 허목(眉 許穆, 1595~1682)은 황희 정승이 당사무대체 불문세정(當事務大體 不問細政) 큰일에 힘쓰고 자잘한 것은 따지지 않았다고 평했다. 북방 야인과 왜(倭)에 대한 방비, 4군 6진 개척같은 외교안보가 큰일일 것이다. 그러나 황희 정승은 경세치용, 농법 개량과 양잠 장려, 강원도민 구휼 등 민생을 위한 실물 경제 정책까지 챙겼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면서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면서 정작 알맹이는 놓치는 우리가 반성할 대목이다. ■ 남원 대강리 명당(明堂)과 황희 정승의 발복 고려말 전라도 남원, 부잣집에 명당을 잡아주기로 했다가 사기꾼으로 몰려 죽도록 맞던 스님을 전 재산을 털어 구한 의인이 있었다. 스님은 부잣집에 주려던 대강리 명당을 은인에게 알려줬다. 스님은 조선 수도 한양을 점지한 무학대사의 스승 나옹선사였고, 명당을 얻은 의인은 강릉부사 황군서, 거기 묻힌 이는 부친 황균비였다. 황희 정승의 선대들이다. 풍수에서는 황희 정승과 후대의 입신 양명은 5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큰 인물이 나올 명당 덕택이란다. 과연? 곤경을 처한 자를 돕는 의협심, 가문의 DNA가 발휘된 것은 아닐까? ■ 반구정의 재발견, 21세기 황희 정승을 찾는다 지금의 반구정, 반구정을 내려다보는 앙지대도, 영정을 모신 방촌영당도 모두 1960년대 이후 지었으니 고택은 아니다. 그러나 야트막한 언덕에 넓게 펼쳐진 임진강과 넘실대는 서해 바닷물, 시원하다 못해 가슴이 서늘해지는 강바람 바닷바람, 그리고 시시때때로 날아드는 갈매기까지, 넘치는 자연만으로도 반구정은 들를 가치가 충분하다. 거기에 곳곳에서 인문학적 감성 있는 눈길을 기다리는 허목의 반구정기, 노산 이은상의 앙지대 중수기, 이숭녕 선생의 동상기같은 고급 콘텐츠가 덤 치고는 푸짐한 덤이다. 항일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은 익성공은 진실로 이조 명재상이라 나라의 으뜸이시니. 정자의 유무가 무슨 차이가 있고, 기념문의 유무가 그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는데 또 무슨 차이가 있으랴(李韓明相國之首也 是亭之興廢何與於相公也 是記文有無又何與於傳後也)고 읊었다. 소개하든 않든 알 사람은 알 것이다. 반구정에서 임진강을 바라보다 멀리 한강 상류 건너로 시선을 돌린다. 여의도, 눈에 아직도 몸싸움에 머물고 있는 국회가 눈에 밟힌다. 아직도 삿대질에 멱살드잡이에 몸싸움, 한탄스럽기만 하다. 오늘의 한국 정치 현실이 너무 각박하고 답답해, 편히 쉬셔야 할 6백년 전 어른을 다시 깨워 일으켜본다. 고택도 아닌 반구정이 명가와 고택 시리즈의 첫머리를 차지한 이유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사진=김구철 시민기자경기일보DB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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