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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인천 - 개항장&차이나타운

1883년 개항과 함께 서구·中·日 앞다퉈 인천 진출
근대화 물결 가장 먼저 맞이하며 국제도시 발돋움
개항이 가져온 화려함 뒤 일제강점기 수탈 아픔도
中 음식·문화 느낄수 있는 ‘차이나타운’ 필수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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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역 건너편에 위치한 차이나타운의 대표적인 상징물 ‘제1폐루 중화가’의 모습.
인천역 건너편에 위치한 차이나타운의 대표적인 상징물 ‘제1폐루 중화가’의 모습.

세계의 新문물 유입 길목...최초의 역사가 시작된 곳

태초에 길은 없었지만, 인천의 앞바다 인천의 바닷길이 열리자 이 길은 세계로 통했다. 140여년 전, 한적했던 자그마한 인천의 한 포구가 새로운 문(門)이 돼 큰 문이 됐고 이 문을 통해 새로운 세계의 다양한 문물이 거친 밀물처럼 이 땅에 밀려 들어왔다. 그래서 인천은 수많은 ‘최초의 역사가 된 것’들이 쌓인 인구 300만명의 세계적인 대도시가 됐다. 나아가서 지금은 우리나라 최대의 국제공항이자 세계적인 공항, 인천국제공항을 통한 거대한 하늘길까지 열려 인천은 세계만방과 직결되는 명실상부, 위세 당당한 메트로폴리탄이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으로 ‘각국공원’이라 불렸다가 1957년 인천상륙작전 영웅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건립된 이후 ‘자유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으로 ‘각국공원’이라 불렸다가 1957년 인천상륙작전 영웅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건립된 이후 ‘자유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인천의 개항장, 우리나라 최초의 많은 역사가 한 곳에

이 땅에서 최초의 철길이 열린 곳이 인천이고 오늘을 사는 세계인들의 일상적인 음료, 커피를 이 땅에서 처음으로 마시게 된 사람들도 인천사람들이었다. 인천의 중구, 인천의 심장이 돼 있는 인천의 개항장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많은 역사가 한 곳에 몰려 있다. 1883년 개항과 함께 서구의 여러 나라와 청국과 일본의 상사들이 앞다퉈 인천에 진출하고 각국의 영사관이 설치되는 등 인천은 국제도시로 발돋움을 하기 시작했다. 청국과 일본인의 전용거주구역인 조계지가 계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설정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조계지가 들어서자 연이어 청국의 조계지도 조성됐다. 청국과 일본은 이 조계지에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치외법권을 누리면서 거주했다. 경계가 된 계단 양편으로 갈라진 청국과 일본, 두 지역에서는 지금도 100년을 훨씬 넘긴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나라의 건축양식인데 누구나 건축양식의 판이한 점을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벽에 삼국지의 주요 장면을 이야기와 함께 타일로 장식해 놓은 ‘삼국지벽화거리’에서 관광객들이 벽화를 구경하고 있다.
벽에 삼국지의 주요 장면을 이야기와 함께 타일로 장식해 놓은 ‘삼국지벽화거리’에서 관광객들이 벽화를 구경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 대불호텔도 이곳에서 개점, 영업을 시작했고 서양사람들은 온돌방 방바닥이 아니라 침대 위에서 잠을 잔다는 것도 알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상과 천문관측을 했던 인천기상대가 이곳에서 세워졌고 우체국의 효시로 기록되는 우정총국 인천분국도 그 근거지는 인천개항장이었다. 1885년 선교차 이 땅을 밟은 북감리회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1891년에 세운 내리교회(웨슬리예배당)는 감리교회로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중 하나로 ‘한국의 어머니 교회’라고도 불린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빌렘 신부가 1889년 제물포성당을 창설한 것으로부터 시작된 답동성당은 벽돌로 만든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한국 성당 중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한 편, 랜디스 박사가 설립한 성 누가병원은 인천 최초의 서양식병원이고 인천부립도서관은 인천에서 최초로 문을 연 공립도서관이다.

인천시 중구 중앙동에 있는 구 일본 제18은행. 현재는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시 중구 중앙동에 있는 구 일본 제18은행. 현재는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에 건립된 오랜 은행건물로는 일본 제18은행이 있고 지금 인천중구요식업협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일본 제58은행 인천지점은 1892년 전환국에서 발행했던 근대식 화폐교환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프랑스풍 벽돌조 건축물로 그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자유공원은 1888년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이다. 1897년에 조성된 서울의 탑골공원보다 9년이 앞선다. 각국 공동조계 내에 위치, 처음 ‘각국공원’이라 불렸다가 몇 차례의 명칭 변경을 거쳐 1957년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건립된 이후 ‘자유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1905년에 완공, 응봉산을 관통해 인천항과 전동을 연결하는 아치형 돌문 홍예문은 포화

태가 된 일본의 조계지를 만석동까지 확장시켰다. 인천개항장과 차이나타운의 나들목 인천역 역사는 큰 변화가 없는 지난 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 건축된 근대식 건물로 당시 명칭은 인천우편국이었으며 해방 이후엔 인천우체국으로 개칭됐다. 현재는 ‘인천중동우체국’이라는 이름으로 업무가 지속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 건축된 근대식 건물로 당시 명칭은 인천우편국이었으며 해방 이후엔 인천우체국으로 개칭됐다. 현재는 ‘인천중동우체국’이라는 이름으로 업무가 지속되고 있다.

■인천개항의 그늘, 일본의 야망 인천을 일본인 중심의 도시로 만들다

인천개항은 외세의 진입과 이질적 문물의 유입에 따른 갈등과 지역사회에 새로운 시련을 가져오게 했다. 인천개항에서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키겠다는 일본의 야망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청·일전쟁(1894~1895)과 노·일전쟁(1904~1905)을 치르면서 조선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 일본은 1899년 제물포와 한성(漢城)을 잇는 도로와 철도를 부설했다. 1906년에는 도로와 철도에 연계되는 항만을 확장, 쌀을 위시한 식량과 공업원료인 목면을 확보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을 위시, 쌀의 증산계획과 수리조합 설립 등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인천은 다른 지역보다 먼저 많은 토지와 인력을 수탈당했다. 대부분의 농민이 몰락하고 몰락한 농민들은 저임금의 노동자로 전락했다. 부녀자와 아동들까지 가계보조적 노동인구로 유입됐다. 열악한 조선인의 노동여건으로 인천지역사회에는 통곡과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일본인 거주지 중심으로 도시시설을 집중 투자해 일본인에게만 유리한 일본인 중심의 도시환경을 조성했다. 일제치하가 된 인천부는 일본인 시가지를 중심으로 부역(府域)이 크게 줄어들고, 부평 등 농·어촌지역은 신설된 부천군에 편입시켰다. 부(府)의 하부 행정조직은 모두 일본식의 정(町)과 정목(丁目)으로 바꿨다. 인천부는 완전히 일본인 중심의 도시로 변했고, 전통적인 생활권역과 공동체 질서는 파괴되고 악화됐다.

 

인천시 중구 답동에 있는 답동성당은 벽돌로 만든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한국 성당 중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의 하나다.
인천시 중구 답동에 있는 답동성당은 벽돌로 만든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한국 성당 중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의 하나다.

■한국 속의 작은 중국 차이나타운

경인선과 수인선의 종착역에 내리면 길 건너편으로 차이나타운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패루(牌樓)가 눈에 들어온다. 패루를 지나서 언덕길을 오르면 차이나타운의 중심거리를 만나게 된다. 차이나타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이후 중국인들이 모여 살면서 중국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된 곳이다. 골목골목 붉은 간판과 홍등을 내건 거리를 걷다 보면 중국의 한 곳을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차이나타운 나들목인 패루와 삼국지 벽화거리, 짜장면박물관 등 여러 가지 볼거리를 통해서 중국의 문화와 생활을 엿볼 수 있게 된다. 패루는 붉은 기둥위에 지붕을 얹은 중국식 대문이다. 예부터 중국인들이 동네 입구에 세웠던 마을의 대문으로 귀신을 쫓고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 전통의상인 치파오를 입은 화교 상인들을 만날 수 있는 이 거리에서는 중국식 건축물과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색 간판과 홍등을 볼 수 있는데 대표음식인 짜장면과 공갈빵, 월병 등을 맛보는 건 필수이겠다. 화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이곳에는 중국문인들의 정원양식을 재현한 휴식공간 의선당이 있고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은 130여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중국 후한말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삼국지벽화거리와 진나라로부터 한나라 건국까지의 시간여행, 초한지벽화거리는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우리나라 짜장면의 발상지인 옛 ‘공화춘’ 식당건물을 리모델링해 건립한 짜장면박물관에서는 짜장면을 즐겨 먹었던 추억들을 반추해 보는 것도 각별한 일이 되겠다.

글=우촌 박재곤 / 사진=중목 최수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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