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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째 깨볶으며 함께… 고소함 솔솔, 성남 화성기름집 [긴 세월 굳건하게, 경기노포를 찾아서]

동서고금에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구전부터, 퇴적·풍화를 거쳐 기록된 문헌까지 다양한 역사가 사시사철 숨을 쉰다. 지금 경기도엔 어떤 이야기가 남고, 또 사라졌을까. 경기일보 이연우 기자와 민경찬 PD가 시나브로 잊히는 우리네 이야기를 찾아 글과 영상으로 전한다. G스토리팀의 2024년도 첫 테마는 ‘노포(老鋪)’다. ‘고소하다’는 말에는 맛과 향이 함께 담겨있다. 1895년 편찬된 조선어-한문사전 <국한회어(國韓會語)>에도 고소하다는 말의 정의가 ‘참기름 냄새’라고 적혀 있을 정도다. 전국에서 가장 ‘고소한 골목’을 꼽자면 성남시 중원구 모란시장이 빠질 수 없다. 이 안에는 ‘대한민국 제1호 백년기름 특화거리’로 지정(2022년)된 100여m 남짓의 자타공인 기름 집합소가 있다. 과거 모란시장은 1960년대 초반 모란개척단이 창단한 뒤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상설시장화 됐다. 현재는 전국 최고 규모의 전통시장을 자부하는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대표적인 판매 품목 중 하나가 ‘기름’으로, 시장 초입부터 고소함이 진동해 절로 입맛을 다시게 된다. 이곳 특화거리에는 약 40개의 참기름·들기름 집이 즐비해 있다. 성남 지역에 소재하는 기름집(80여개)의 절반이 여기에 몰린 수준이다. 전국적으로 봐도 기름집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동네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기름 명소’이기 때문에 모란장(모란민속5일장)이 열리는 4일, 9일날이면 전국 곳곳에서 발 디딜 틈 없이 인파가 몰린다. 장날이 아니어도 시장을 찾아오는 손님과, 온라인으로 기름을 주문하는 손님이 꾸준하다. 단순히 기름 가게가 많아서 특화거리로 지정된 건 아니다. 이곳의 가치는 ‘노포가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지역만의 특별한 힘’에 있다. 이 골목의 참기름·들기름집 10개는 중소벤처기업부가 선정한 백년가게(30년 이상) 간판을, 5개는 백년소공인가게(15년 이상) 간판을 달고 있다. 기름 말고도 메밀가루, 도토리가루, 볶음콩가루, 들깨가루, 깨소금, 감자전분 등을 두루두루 수십 년째 판다. 어떤 가게는 지역에서 나온 재료만을 공수해오고, 어떤 가게는 지역의 거래처를 우선시한다. 노포가 노포를 먹여 살리는 길, 특화거리가 조성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특히 그 안에서도 눈에 띄는 한 가게가 있다. 같은 자리에서 40년 넘는 세월을 보내며 대대손손 3대째 깨를 볶는 ‘화성기름집’(1984년 창업)이다. G스토리팀은 '역사생활권'의 경기도 대표 노포로 꼽힌 성남시의 화성기름집을 찾았다. [G-Story] 노포편 ②3대째 깨볶는 고소함 솔솔 : 화성기름집 매일 아침 7시 무렵이면 가게 문이 활짝 열린다. 공동 대표들이면서 유일한 직원들이기도 한 장찬규(58)·최연화(57)·장원준(32) 씨는 별다른 말을 섞지 않아도 척척 손발을 맞출 수 있는 ‘기름 장인’들이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참깨·들깨를 여러 번 씻어 불순물을 없애고, 솥에서 볶아내는 작업이다. 저속으로 할 때와 고속으로 할 때, 어느 온도와 얼마나 로스팅하느냐에 따라 그 맛과 향이 전부 다르다. 뽀얘진 커피가루 같은 깨들이 쏟아지면 그 이후엔 고압 기계에 돌려 착유(搾油)하는 과정이 뒤따른다. 끈적하게 느릿느릿 새나오는 기름은 막바지에 이르러 콸콸 쏟아지고 마침내 40분 정도가 지나면 ‘기름 한 말’이 완성된다. 350㎖ 청록색 기름병에 참기름을 담던 장찬규 대표는 차곡차곡 매대를 정리하며 말했다. “저는 충북 제천이 고향입니다. 충주댐이 생기기 전 고향이 물에 잠기기 시작하면서 저희 아버지가 ‘경기도로 올라가자’시며 먼저 와 고추방앗간을 운영하셨어요. 몇 년 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와서 보니 ‘기름집을 해도 잘 되겠다’ 싶더라고요. 당시엔 기름집이 몇 개 없었거든요. 그렇게 방앗간에서 기름집으로 바꿔 2대째 운영을 한 게 벌써 40년이 된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요. 아내와 함께 노력하며 열심히 일궜습니다.” 장 대표는 눈짓으로 '아내' 최연화 대표를 가리켰다. 최 대표는 단골손님 3명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엔 단골손님들이 하나도 없어서 고생했어요. 하루아침에 단골이 생기진 않잖아요. 10년, 20년, 30년, 40년 세월을 한 곳에서 온 정성 쏟다 보니 점점 감사하게도 늘어나더라구요. 코로나19 전에는 바구니에 깨를 씻는 동시에 1번 줄, 2번 줄 대기를 세워야 할 만큼 단골들이 많았는데 이후로 문화가 많이 바뀌어서 전체 손님의 80~90%를 택배 배송으로들 찾아주세요. 명절용, 가정용, 선물용이 있는 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IMF도, 코로나19도 겪으며 막막한 순간이 많았지만 결국 저희 기름 맛을 잊지 못해 와주시는 분들이 계시니까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마음 뿐이에요.” 그 사이에도 남녀노소를 불문한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건 화성기름집의 앞집 충주기름집, 천안기름집, 파주기름집과 옆집 금성기름집, 제천기름집, 형제기름집 등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모란종합시장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장찬규 대표는 “저희뿐만 아니라 모란시장 모두가 잘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깨, 들깨 같은 저희의 국산 재료는 옛날에 시골 농사짓는 데에서 직접 공수해오곤 했는데 농사짓는 데가 점점 줄어들면서 이젠 농협에 수매해서 받아와요. 다른 가게들도 다 비슷할 거에요. 여기 특화거리에 ‘백년가게’도, ‘명품점포’도, ‘경기노포’도 있잖아요. 지자체와 상인들이 그동안 공들여서 해왔다는 증거 같은 거니까 서로 이 성실함과 신뢰감을 바탕으로 오래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차세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게 ‘부모’의 생각이자 바람이다. 화성기름집에선 장·최 대표의 아들이자 3대째 가게를 물려받게 될 장원준 대표의 몫이나 다름없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무직 회사를 재직하면서 ‘가게 일은 할 생각이 없다’며 살아왔어요. 부모님이 권유해도 거절했고요. 그러다 문득 ‘어릴 때부터 부모님 도우며 손에 익었던 일이니까 가업을 이어볼까’ 하는 고민이 들었죠. 개인 사정으로 퇴사를 하려던 무렵이라 그때부터 자연스레 가게 오게 된 것 같아요. 정직하게 40년 동안 좋은 제품으로 최고의 맛을 낸다는 자부심을 이어가야죠.” 끝으로 세 대표, 세 가족은 나란히 가게 안 평상에 앉았다. 부부 대표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간혹 일본의 노포 사례들을 보면 100년, 200년씩 점포를 이어나가잖아요.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저희도 전통적으로 4대, 5대까지 가게 명맥을 이어가는 게 꿈이에요. 여러 손님들과 소통하면서 저희만의 노하우를 한층 키워나가고 ‘아 성남 모란시장에는 화성기름집이 있지, 거기 믿을만 해’ 하는 가게로 거듭나면 좋겠어요. 모란시장의 기름집들이 앞으로도 좋은 유산으로 남을 수 있게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G-Story팀

옛 감성 그대로…추억을 상영하는 동두천 동광극장 [긴 세월 굳건하게, 경기노포를 찾아서]

동서고금에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구전부터, 퇴적·풍화를 거쳐 기록된 문헌까지 다양한 역사가 사시사철 숨을 쉰다. 지금 경기도엔 어떤 이야기가 남고, 또 사라졌을까. 경기일보 이연우 기자와 민경찬 PD가 시나브로 잊히는 우리네 이야기를 찾아 글과 영상으로 전한다. G스토리팀의 2024년도 첫 테마는 ‘노포(老鋪)’다. 오래된 가게에는 하루, 한달, 일년마다 손님들이 남긴 정서가 깃들어있다. 22일 경기도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도는 ‘우리 동네 오래된 가게(노포) 공모전’을 통해 경기노포 25곳을 선정했다. 오는 3월에는 신청을 받아 사회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경기 대표 노포를 추가 선정한다는 계획이다. 도는 경기노포를 생활 관광의 대표 콘텐츠로 육성하겠다는 방침과 함께, 테마를 ▲평화생태권 ▲역사생활권 ▲도시여유권 ▲자연치유권 등으로 나눴다. ‘평화생태권’에는 고양시 내 한 지역의 옛 지명인 ‘백양골’의 이름을 딴 참기름·들기름 판매업체 백양상회(1980년 창업)가, ‘역사생활권’에는 이천시의 전통 한식점 장흥회관(1982년 창업)이, ‘도시여유권’에는 과천시에서 한복의 아름다움을 선보이는 정금주한복연구실(1994년 창업)이 선정된 식이다. 경기노포 25곳을 분석해 본 결과, 노포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곳은 경기남부권에 위치한 안일옥(안성·1920년)으로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비교적 ‘최신’ 매장은 여주의 남한강송어횟집(1999년)으로 3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여러 경기노포 중 G스토리팀은 ‘자연치유권’의 대표 노포로 꼽힌 동두천시의 동광극장(1959년)을 찾았다. 영화의 인기가 떨어지는 와중 수많은 멀티플렉스와 경쟁하면서 경기도의 유일한 단관극장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반세기가 넘는 역사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이야기가 가득한 동광극장으로 출발했다. [G-Story] 노포편 ①오늘도 상영 중: 동광극장 샛노란 간판 아래,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반가운 손님이 왔다며 ‘딸랑’ 종소리가 울린다. 입구 왼편에는 팝콘과 땅콩 과자가 쌓인 ‘매점’이, 오른편에는 성인 9천원·청소년 7천원이라 적힌 ‘매표소’가 보인다. 소박한 양 옆 풍경과 달리 정면은 별천지다. 수많은 로봇·자동차 프라모델과 피규어, 여러 종류의 물고기가 사는 어항, 필름이 착착 감기는 아날로그 영사기, 오래된 자주색 다방 의자 등 예스러운 레트로 감성이 오밀조밀 펼쳐져 있다. 이곳은 동두천시 생연동에 위치한 시네마천국 ‘동광극장’. 지난해 경기도의 대표 노포로 선정된 곳 중 하나다. 1959년 개관해 현재까지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상업영화를 상영하는 전국 유일의 단관극장이면서, 자동차극장을 제외하면 경기도에 현존하는 유일한 단관극장이다. 영화 선정부터 티켓 발매, 매장 관리, 영화 상영, 매장 청소까지 전부 도맡아 관리하는 직원은 단 한 명, 고재서 대표(67) 뿐이다. “선친이 운영하던 동광극장을 제가 맡게 되면서 현재 약 39년째 동두천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있어요. 단관극장이지만 독립영화는 틀지 않고 일반 상영관과 똑같이 상업영화를 추구해요. 보통 설날이나 추석에 손님이 바짝 몰리는 편인데 최근에는 <서울의 봄>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호탕한 웃음을 지은 고 대표는 관객 없는 극장 안을 가리키며 “편하게 둘러보시라” 했다. 그의 안내를 따라 로비 맨 끝을 향하면 동그란 벽시계 아래로 둔탁한 철문이 보인다. 무거운 문을 밀고 들어서자 딱딱한 계단과 함께 비로소 커다란 상영관이 눈에 들어온다. 푹신푹신한 2인용 소파, 관객의 보행을 돕는 파란 LED 조명선, 화려한 앰프 등도 시선을 끄는 요소다. 잠시 후 익숙함이 느껴진다. 드라마 <시그널>에서 이재한(조진웅)이 오열하던 영화관, <응답하라 1988>에서 김정환(류준열)과 류동룡(이동휘)이 영화를 보던 곳, 바로 여기 동광극장이었다. “전체 좌석은 283석이지만 멀티플렉스 시장에 발 맞춰 최근 리클라이너 의자(소파)를 두면서 실질적으로는 240석이 됐어요. 좌석이 꽉 차는 날이 없어 관객들은 선착순으로 앉으면 되는 식입니다. 일반 영화관과 비교했을 때 생소한 분위기일지는 모르지만… 보시니 어떤가요?” 고 대표는 감상평을 물었다. 동광극장을 처음으로 마주한 ‘젊은 관객’의 입장이 궁금한 모양새였다. “저는 ‘영화관’보단 ‘극장’을 지향해서 예전 문화회관 시절처럼 각종 부대행사도 열고 싶은데 지역 사정상 마땅치가 않아요. 동두천이 타 시·도보다 재정자립도도 약하고 젊은이도 직장을 찾아 다른 도시로 나가잖아요. 영화는 젊은 사람들이 즐기는 취미인데 저희 극장이 부합하진 않죠. 더욱이 근처에 대형 멀티플렉스가 생기면서 운영하기 힘든 형편입니다. ‘동광극장’ 이름값은 있는데 사진 찍고 구경하러는 와도,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은 얼마 없어요. 근처에 ‘양키시장’이나 ‘문화거리’(캠프보산 동두천문화특구) 방문하시면서 같이 오시는 편이죠.” 그럼에도 이 오래된 극장을 붙잡고 있는 이유는 오로지 영화에 대한 애착이다. 고재서 대표는 ‘와칸다극장’이라 불리기도 했던 과거의 동광극장을 회상했다. 벽에 걸린 옛 사진에서 찾아낸 흔적으로는 이곳에서 상영한 첫 영화가 최훈 감독의 <내 가슴에 그 노래를>(1960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박상호 감독의 <우리 엄마 최고>(1964년), 박종호 감독의 <학사며느리>(1967년)를 간판에 내건 시절도 있다. “지금은 도로 위치에 따라 극장 입구가 바뀌었는데 예전 입구는 아주 크고 넓었어요. 그 길목에 사람이 꽉 찼었다고요. 옛날엔 볼거리가 영화 밖에 없었잖아요. 저는 평생을 영화와 함께한 셈이라 애정을 많이 갖고 있지요. 우리 극장에 대한 애착도 크다 보니까 ‘힘들어도 잘 운영해보자’ 했어요. 이렇게 저렇게 꾸미는 걸 좋아해서 극장에 손을 안 댄 부분이 없어요. 이렇게 사진을 볼 때면 ‘예전 기록 좀 많이 남겨놓을걸’ 후회가 돼요. 이제부터라도 차곡차곡 모아가야죠.” 그의 희망처럼, 앞으로 동광극장의 미래는 관객들의 발길에 달려 있다. 경기도는 지정된 ‘경기노포’에 ▲유튜브 제작자(크리에이터) 등 영향력자(인플루언서) 활용 콘텐츠 제작 ▲관광콘텐츠 활용 등 사업자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 제공 ▲경기노포 현판 제작 및 설치 ▲이야기 책(스토리북) 제작 ▲지역 관광자원 연계 코스 개발 등을 제공한다는 방침이지만, 실질적으로 이 계획들이 얼마나 많은 수의 관객을 극장 안으로 데려올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조만간 2층을 리모델링 해 로비를 산만하지 않게 정돈하려고 해요. 저희 극장은 평일이건 주말이건 문 닫지 않거든요. 지역 군 부대, 학교, 지자체 단체 관람이나 명절 가족 행사 등이 우리 극장에서 이뤄진다면 동두천만의 특색 있는 지역 문화 생활이 어우러질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동광극장은 오늘도 ‘상영 중’입니다!” G-Story팀

‘인구 소멸’ 공포 덮친... 경기도내 사라질 위기처한 마을 [G-story]

동서고금에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구전부터, 퇴적·풍화를 거쳐 기록된 문헌까지 다양한 역사가 사시사철 숨을 쉰다. 지금 경기도엔 어떤 이야기가 남고, 또 사라졌을까. 경기일보 이연우 기자와 민경찬 PD가 시나브로 잊히는 우리네 이야기를 찾아 글과 영상으로 전한다. G스토리팀은 2021년도에 이어 2년여 만에 다시 한 번 경기도의 ‘소규모 마을’을 찾았다. “인구 문제는 극복의 대상이기보다 적응해야 할 삶의 조건이다”. 지난해 10월 김홍상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이 연구보고서 ‘인구감소 농촌 지역의 기초생활서비스 확충 방안’을 통해 남긴 말이다. 당시 연구원은 전국 총 1천404개 읍·면 중 절반가량에서 인구가 줄고 있으며, 특히 인구 수가 3천명 이하인 곳에선 지역 내 보건의료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고 봤다. 이어 인구가 2천명 이하로 떨어지면 의(衣)·식(食)과 관련된 업종이 폐업한다고 분석했다. 경기도라고 다르지 않게 적용되는 얘기다. 1천400만여명의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지만 3천명이 채 살지 않는 소규모 동네가 여럿 존재하고, 대부분 병원·약국은커녕 편의시설이나 이·미용시설 등도 없기 때문이다. 올해 5월 기준 경기도의 행정읍·면·동은 총 570개. 이 중 23곳이 3천명 미만의 주민을 두고 있다. 단, 인구가 가장 적은 곳으로 집계된 광명시의 광명1동(57명)은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돼 2020년부터 거주 인구가 빠졌음을 감안해야 한다. 특히 인구가 3천명도 안되는 소규모 읍·면·동 중 6곳(▲중면 172명·도내 하위 2위 ▲장남면 720명·3위 ▲왕징면 1천16명·5위 ▲미산면 1천710명·7위 ▲백학면 2천517명·13위 ▲신서면 2천557명·14위)이 연천군 내에 있다. 군 안의 전체 읍·면이 10개인데 절반 이상이 인구 3천명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뒤이어 포천시 안에서도 창수면(2천58명·11위), 관인면(2천594명·15위), 화현면(2천622명·18위) 등의 인구 수가 적은 축에 속했다. 이유는 하나다. 저출생·고령화와 군부대 이탈로 인한 인구 감소. 인구 감소로 인한 제반 시설 붕괴. 이대로라면 멀지 않은 미래에 ‘마을과 주민’이 자취를 감추게 될지도 모른다. G스토리팀은 민통선 북방에 위치하고 19㎞의 휴전선에 인접한 접적 지역, 경기도에서 실질적인 거주 인구가 가장 적은 동네, 연천군 중면으로 향했다. G-Story팀 ※ 경기일보 G-Story를 검색하시면 ‘마을편’, ‘놀이편’, ‘선거편’, ‘납량특집편’ 등 다양한 에피소드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웃은 계속 줄어들지만… 그래도 살길은 있더라 [G-story]

2023년 여름의 시작점, 북쪽을 향했다. 사실 이 문장을 2년 전에도 비슷하게 썼다. 당시엔 여름의 끝자락에 맞춰 포천시 관인면(경기일보 2021년 9월14일자 1·3면)을 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적은 같았다. 경기도의 대도시, 신도시가 아닌 관심 밖 소규모 마을을 둘러보겠다는 것. 그뿐이었다. ■ ‘댑싸리 명소’ 중면, 인구 최하위…年 10명씩 감소 첫 번째 도착지는 총 주민 수가 172명에 불과한 연천군 중면. 남자가 98명, 여자가 74명으로 평균 연령은 60~70대다. 거주자보다 군인이 많이 보이는 마을, 사람보다 두루미가 유명한 마을이다. 재개발로 철거 중인 광명시 광명1동을 빼면 경기도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동네다. 1년에 약 10명씩 인구가 줄어든다. 정처 없이 도착한 이곳에서 다짜고짜 검색을 시작했다. ‘음식점, 대형마트, 영화관, 편의점, 사진관, 미용실’ 없음. 그나마 ‘농원, 목장, 정미소, 상회, 약수터’는 있음. 유일한 의료기관은 연천보건지소인데 자가용으로 30분은 가야 하는 상황. 혹여 부인과라도 가려면 강원도 철원까지 먼 여정을 떠나야 하는 곳. 그런 시골 동네였다. 명물은 ‘댑싸리’라고 한다. 푹푹 찌는 한 여름에는 청명한 초록색이었다가,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면서부터 화려한 분홍색으로 변하는 한해살이풀. 임진강 상류를 통해 북한에서 내려오는 물을 가장 먼저 마시게 되는 화초. 그 댑싸리가 오늘날 중면을 먹여살리는 효자 품목이다. “올해 댑싸리는 아직 심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오셨어요. 이번달 말부터 씨 뿌리기 시작하는데… 그때 오시지, 볼 게 정말 많거든요”. 김유미 중면 면장이 시원스레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중면 삼곶리에 있는 임진강 댑싸리공원을 찾은 관광객이 지난 한 해에만 8만명에 달할 정도다. 이어 김 면장은 설명했다. “우리나라 민통선 내에 주민이 살고 있는 마을이 딱 2곳 있어요. 파주시 대성동과 여기 중면. 특히 우리 동네는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2만5천평 규모의 ‘댑싸리 장관’이 펼쳐지기 시작해서 늦가을까지 외지인들이 구경하러 많이 찾아오세요. SNS에 입소문이 났는지 댑싸리공원이 알려져 아름다운 연천의 모습들을 많이 즐기고 가시죠. 관광객들이 오시면 재래식 두부나 옥수수 등 지역 먹거리를 드시기 때문에 주민들 입장에선 소득이 증대되는 효과도 있어요.” ‘관광객들이 와서 잘 곳은 있나요?’ 묻자 김 면장은 아쉬워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동네엔 없죠. 코옆이 북한인 안보 지역이라 교통 시설도 부족하고요. 결국 대부분이 당일치기라 ‘반짝 소득’이에요. 연천은 관광자원이 정말 많지만 숙박시설이나 편의시설 같은 게 부족해요”라던 그는 “인구가 워낙 적어 여러 인프라를 갖추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저는 주민분들이 여기에 살아주시는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에요”라고 전했다. ■ 경원선 중단으로 걸어잠군 대광리역 굽이굽이 흙길을 지나 비탈길을 넘어 드라이브를 떠났다. 차창 너머로 군인이 참 많이 보였다. 군장점도 그만큼 자주 만났다. 두 번째 도착지를 어디로 정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신서면 팻말이 보였다. 5월 기준 총 주민 수는 2천557명, 만 99세의 할머님(1명·최고령자)이 계시는 곳이다. 여긴 중면에 비해 상대적으로 번화가였다. 커피숍도 더러 있고, 음식점 체인점도 꽤 많았다. 청년층을 겨냥한 분식점도 있었으나 가게 문은 닫은 지 오래 된 모습이었다. 이곳 신서면은 전지역이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묶인 탓에 추가 개발은 쉽지 않다고 한다. 휴전선 11㎞와 접합한 연천군 최북단지역이기도 하다. 과거 경원선이 운행했을 땐 한동안 북방 경제의 활력소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철도가 중단(2019년)되고 대체운송버스가 돌면서 외지인이 선뜻 찾아오긴 어려운 편이다. 1912년 개통됐던 신서면 ‘대광리역’은 알록달록한 벽화 뒤로 세월의 흔적이 가득 묻어 있었다. 자물쇠로 잠긴 역사 앞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에는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는 어르신이 있었고, 주변 그늘진 정자에는 햇빛을 피해 바둑을 두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어, 이제 장 보고 들어가고 있어. 막걸리 두 통이랑 족발 포장했지. 지금 대광리역 지난다니까”…검은 봉지를 들고 길을 지나던 김진회 어르신(68)이 통화를 하고 있었다. “면회 갔더니 애가 까맣게 탔더만. 아니 근데 어디라고? 일단 끊어봐”하던 김 어르신은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뭘 그렇게 찍어요?”라고 질문을 건넸다. 대광리역 사진을 담고 있다고 하자 “왜?”라던 그는 “나도 여기 사람은 아니야. 날씨도 좋고 해서 술이나 한 잔 하러 왔는데 재미있는 구경하네”라며 “볼 것도 없는데 뭣하러 여기까지 왔어. 나랑 친구가 이제 곧 칠십인데 여기선 막내라니까. 아무튼 더운데 고생해요” 하고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무성하게 자란 잔디, 군데군데 깨진 철로. 노후하고 낡은 대광리역에서 소소한 재미를 느끼게 한 대화였다. ■ “풍족한 관광 자원이 우리 동네 살 길” 대표적인 인구 감소 지역으로 분류되는 연천. 낯선 이가 터를 잡고 머물기엔 아직 여건이 마땅치 않을 수 있지만, 생기를 잃고 죽어가는 도시는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연강 큰물터 사업’을 통해 중면 삼곶리 일원에 댑싸리공원 관련 기반시설(댑싸리원, 묵억새원, 휴게쉼터 등) 설치 등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고, ‘돌무지 무덤’과 ‘옥류봉 그리팅맨’, ‘재인폭포’ 등의 관광 자원이 넘쳐난다. 11월 이후 월동기에는 ‘율무 먹는 두루미 떼’를 마주할 수도 있는 독특한 생태 지역이다. 이날 연천에서 만난 한 주민은 꼭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며 입을 뗐다. “전형적인 힐링 장소에요. 빙애여울도 얼마나 예쁜데요. 하지만 지금 당장 우리에겐 관광 자원이 살 길이죠. 인구 소멸은 시대적 흐름이고 갑자기 이 동네에만 늘어나기도 힘든 구조니까요. 주민들도 그걸 아니까 자발적으로 논·밭에 두루미 먹이 주고, 댑싸리 씨 뿌리고 하는 거에요. 그렇게 관광 길이 뚫리고, 전용 버스도 운행하고, 한옥마을 같은 특화 시설도 조성된다면 ‘연천이 이런 곳이었어?’ 하는 사람들이 늘겠죠. 그렇게 점점 마을이 활성화 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앞으로 연천에 그런 기대가 있어요.” G-Story팀 ※ 경기일보 G-Story를 검색하시면 ‘마을편’, ‘놀이편’, ‘선거편’, ‘납량특집편’ 등 다양한 에피소드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납량특집] 입시 경쟁·강압적 훈육 ‘스트레스'...학생들 집단정서 소름돋는 허구로

전국 학교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전해지는 유명 괴담들이 있다. 비오는 새벽이면 칼자루를 드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라던지, 밤 12시에 혼자 화장실에 있으면 보게 되는 천장 귀신이라던지, 큰 틀에서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하다. 소위 ‘책장 넘기는 동상’, ‘빨간 휴지·파란 휴지’로 일컬어지는 이들 괴담의 뿌리는 모두 일본과 닿아 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온 일본인 교사들이 자국의 이야기를 전했던 게 지금의 학교 괴담으로 정착한 것이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괴담은 한국형으로 새롭게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건물이 지어진 터가 공동묘지 또는 정신병원이었다거나, 학교 안 100대 비밀을 알게 되면 죽는다거나 하는 식이다. 초등학교는 초등학교대로 비슷한 괴담을 공유하고, 대학교는 대학교대로 새로운 괴담을 만들어냈다. 학교급별 다른 괴담이 형성됐지만 전국적으로 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같은 학교 괴담이 사회적으로 갖는 의미가 있을까? 전문가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과거 바닥으로 떨어졌던 학생 인권과 강압적 훈육 시스템, 또 해마다 치열해지는 입시 경쟁과 사교육 열풍 등이 청소년들의 스트레스 요인으로 연결돼, 그들이 학교 괴담 속에 담겨 떠돌게 됐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청소년들만의 또래·집단 의식이 시대마다의 학교 괴담에 깃들어 있는 만큼, 학교 괴담의 변화에 따라 학생층의 사회문화상도 어떻게 달려져왔는지 알 수 있다. G스토리팀은 ‘무서운 학교’의 이야기를 찾아 인천으로 향했다. 이번 특집은 경기일보 홈페이지를 통해 생동감을 더한 인터랙티브형 기사로도 확인할 수 있다. * G-STORY 인터랙티브 기사(클릭) ‘폐교=무섭다’… 공포의 다른 모습은 ‘경쟁’ G스토리 학교괴담 ② 일본發 학교 괴담 속 인천 ‘송광분교’ 화창함을 넘어 쾌청한 날이었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느릿느릿 떠다니는 사이로 산새들이 지저귀었다. 고즈넉한 풍경 아래 넓게 깔린 들판에는 풀벌레들이 선선한 바람을 만끽하며 뛰놀았다. 한없이 여유로운 이곳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상산면 상리,1990년 폐교한 ‘삼산국민학교 송광분교’다. ■ ‘소규모학교 통폐합’에 문 닫은 학교…생기 없이 스산함만 석모도 깊숙히 자리한 송광분교를 찾았다. 교문을 지나 교정(校庭)에 들어섰을 때 “대낮인데 왜이렇게 무섭지?”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수풀에 가려진 학교 건물이 모습을 채 드러내기도 전에 우선 걸음부터 막혔다. 가슴 높이까지 100여㎝ 이상 자라난 무성한 잡초들이, 발 밑 진흙 범벅의 축축한 땅들이, 한 발 한 발의 전진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게 맑고 쨍쨍한 날 질척이는 땅이라니. 애써 이상한 마음을 누르고 학교에 다가갔다. 특유의 음산함이 뿜어져 나왔다. 군데군데 깨진 유리창, 녹슬대로 녹슬어 가루가 떨어지는 철 자물쇠, 거미줄 덮인 손잡이, 바닥에 널린 새·개구리 사체… 생기 없는 모습들이 눈에 강하게 들어왔다. 이곳 삼산국민학교 송광분교는 교육부가 1982년부터 ‘소규모학교 통폐합’을 추진하던 과정에서 사라진 학교다. 인천시 강화교육지원청은 2012년 8월께 송광분교를 포함한 4개의 폐교를 매각했고 현재는 이곳 역시 사유지가 됐다. 학교가 문을 닫은 뒤 3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건물이 남아있긴 하나 별다른 개발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웃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송광분교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교무실로 추측되는 공간이 있는 1층, 교실들로만 꾸려진 2층, 옥상이 위치한 3층. 본관 밖에는 아궁이·창고·변소 등이 있는 별관이 위치하는 구조였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살금살금 밟을 때마다 텁텁한 흙 먼지가 나풀댔다. 때때로 밖에서 개와 닭이 울부짖어 스산함을 더했다. ■ 교실·교무실·화장실, 공간마다 세월의 흔적 가득 1층이다. 정문을 마주봤을 때 가장 오른쪽에 있던 구석진 교실로 향했다. 복도에 분홍색 리본이 떨어져 있었다. 칠판에는 “I'M LOST MY BOOK(내 책을 잃어버렸다)”, “1979/8/28”, “안뇽” 등의 글들이 쓰여 있었는데, 특히 “윤OO! 교장 할아버지 감사해요”란 문구가 인상깊다. 윤 교장의 부임 시기가 1970년대 혹은 1980년대로 추정되는 만큼, 폐교 이전의 ‘감사 인사’가 2022년까지 남아있던 셈이기 때문이다. 바로 옆 교실에는 ‘일일 업무계획’, ‘시간표’ 등으로 보아 교무실로 추정되는 공간이 있었다. 주번 활동은 오전 8시부터 8시40분까지 진행하고, 교재 연구는 오후 3시30분부터 5시까지 해야 한다는 내용 등이 게시판에 쓰여 있었다. 이 역시 최소 33년 전의 계획일 테다. 이어 2층이다. 계단에 오르자마자 분필로 '화장실'이라 쓰인 공간이 나왔다. 별다른 문(門)은 없었다. 정면에 설치된 거울, 천장 뚫린 변기 칸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별관의 ‘변소’는 푸세식인데 이곳(본관)의 ‘화장실’은 수세식인 걸 보면 아마 현대화 작업이 일부 이뤄진 듯 했다. 전반적으로 1층은 바닥이 몽땅 무너지고 칠판이 벗겨져 세월의 흔적을 잔뜩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반면 2층은 딱히 큰 하자는 없었지만 벽면에 붙은 ‘간첩 좌경용공사범 ※민중폭력혁명선동 ※불온유인물제작…’ 포스터나, 복도에 버려진 나무 재질 ‘순찰함’ 등을 통해 지나온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 괴담이 만든 ‘학교=무섭다’는 인식…초·중·고·대마다 엇비슷한 내용 공유 별 일 없는 송광분교가 무섭게 느껴지는 건 비단 ‘폐교라서’만은 아니다. 교실·화장실·운동장 등 각각의 장소에서 느껴지는 공포감은 어릴 적부터 숱하게 들어온 ‘학교 괴담’의 영향이 크다. 우리나라 학교 괴담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전부 다른 형태를 갖고 있지만, 학교급별로는 공통적인 에피소드들이 생산·유포·공유되는 특징이 있다. 예컨대 초등학교 안의 대표적인 학교 괴담으로는 ‘빨간 휴지, 파란 휴지’나 ‘7대(혹은 100대) 불가사의’ 등이 있다. 중학교에는 전교 2등이 전교 1등을 밀었다는 데서 비롯된 ‘콩콩 귀신’이나 ‘분신사바’, ‘빨간 마스크’, 음악실에서 밤 늦게 홀로 남아 춤을 추는 여자 등의 일화가 있다. 또 고등학교에는 ‘수능을 앞두고’, ‘수험생 입장에서’, ‘야간자율학습 도중’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이 많고, 대학교에는 연애 또는 범죄 및 사건·사고와 연관된 이야기들이 많다. 그 외 비오는 날이면 한 장씩 책장을 넘기는 운동장의 (이순신·세종대왕·유관순…) 동상이라던지, 화장실 바닥 또는 천장을 기어다니며 불쑥 고개나 손을 내미는 사람이라던지, 무덤을 없애고 지은 학교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던지 등 괴담이 지역·세대 상관 없이 누구에게나 한 번 쯤 퍼졌던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경기도 학교에도 유명한 괴담이 있다. 먼저 안산 A고등학교를 중심으로 떠도는 얘기다. 시험을 앞둔 학생이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귀가하는데, 교재를 학교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나 야밤에 다시 돌아왔다. 그때 누군가 창문에서 학생을 보더니 이윽고 목·어깨·팔·다리까지 온몸의 관절을 모두 기이하게 꺾으면서 계단을 내려와 빠르게 쫓아왔다고 한다. ‘A고교 관절귀신’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야기인데, 사실 조금만 각색하면 웬만한 고등학교들에서 들을 수 있는 내용이다. 화성 B초등학교에선 ‘2학년 4반’에서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 학생과 그를 처벌하는 교사의 내용을 토대로 한 괴담이, 평택 C중학교에선 특정 색깔의 옷을 입고 가면 납치를 당한다는 등의 괴담이 존재한다. 이들 역시 소재만 조금씩 다를 뿐 익숙한 괴담들이다. ■ “일본이 전파한 괴담, 그 속의 한국을 찾는 게 바로 ‘민속문화’” 그렇다면 이러한 학교 괴담들은 왜 탄생하게 됐을까. 그리고 어떻게 비슷한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을까. “학교별·계층별·세대별 자신들의 관심사를 이야기 속에 포함해 괴담으로 만들어 전승하고 있는 것이죠”라고 김종대 국립민속박물관장이 요약했다. 한평생 도깨비에 대한 연구를 주력하고, 한국민속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그답게 적극적으로 입을 뗀 모습이었다. “‘민담’이라는 커다란 테두리가 있다면 ‘괴담’은 그 안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죠”라며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한 김 관장은 “우리나라 괴담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교사들에 의해 전파됐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경기도만의 학교 괴담’처럼 지역성을 띄지는 않아요. 일본의 소학교에서 전해온 거니까…. 전국의 화장실 괴담이나 7가지 불가사의 괴담 등이 비슷한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실제로 우리나라 학교 괴담의 ‘전부 다 알면 죽는다’는 풍문도 일본이 오리지널이고, 동상이 움직이는 것도 니노미야 긴지로(二宮金次郞·도쿠가와 막부 시절 일본의 농촌운동가)가 원조다. ‘빨간 휴지, 파란 휴지’도 일본의 요괴 갓파(河童)와 에도시대 종이 문화와 결합해 탄생했다. “도시에서의 괴담은 전세계적으로 다 있어요. 특히 학교 괴담은 학생들이 갖는 독특한 또래 문화랑 연관이 돼 많이 생기죠. 예를 들면 그들의 집단 문화는 ‘과시욕’, ‘일회성’, ‘우정’, ‘입시와 관련된 심리적 압박감’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들을 자극적인 표현으로 흥미롭게 표출하는 게 괴담의 확산 요인이고요. 어른들의 눈으로는 잘 이해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이러한 괴담은 지속성을 갖지 못하고 어느 정도 시대가 지나면 소멸하기 때문에 ‘O, X’ 형식으로 바라보고 ‘옳다 아니다’ 식으로 진단하면 안 돼요”라고 김 관장은 전했다. 그는 괴담을 통해 민담을, 민속문화를 찾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학교 괴담을 공부하면 현 시대에 학생들이, 청소년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어 재미있어요. 고루하고 답답하지 않습니다. 괴담을 만들어낸 기본 바탕은 일본이지만 그 안에서 한국화된 백그라운드를 찾는 게 필요해요. 그게 바로 ‘민속문화’거든요…. 현대사회에서 문화적인 변화가 왜 일어나고 있는지 찾아내고 분석하는 건 무척 중요하죠. 그 자체가 ‘민속’이고요. 민속이 과거의 생활이나 풍속이라고만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괴담 속에서 우리네 민속문화를 찾아가는 것, 충분히 의미 있고 재미 있지 않습니까?” G스토리팀=이연우·조주현기자,민경찬PD

[납량특집] 일제강점기 탄압 아픔 ‘고양 쌍굴’

구미호부터 빨간 마스크까지, 소름 쫙... 괴담 무더위 싹 동서고금에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구전부터, 퇴적·풍화를 거쳐 기록된 문헌까지 다양한 역사가 사시사철 숨을 쉰다. 지금 경기도엔 어떤 이야기가 남고, 또 사라졌을까. 경기일보 이연우 기자와 민경찬 PD가 시나브로 잊히는 우리네 이야기를 찾아 글과 영상으로 전한다. G스토리팀은 여름철을 맞아 네 번째 테마로 ‘납량특집’을 선보인다. 이번 특집은 경기일보 홈페이지를 통해 생동감을 더한 인터랙티브형 기사로도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주] * G-STORY 인터랙티브 기사(클릭) 괴담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만국 공통 ‘저승사자’가 주인공일 때부터 지역별 ‘학교 공동묘지 전설’이 쏟아지게 될 때까지, 세월 따라 무서움의 대상이 변하면서 괴담 역시 달라져왔다. 옛날옛적 우리나라에선 비현실적인 존재와 비일상적인 공간이 괴담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곤 했다. 현실적이지 않고 일상적이지 않은 각종 미지의 것들이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줬다는 의미다. 그렇게 탄생한 허구의 존재가 바로 도깨비·구미호·장산범 등이다. 사람도, 동물도 아닌 무언가가 흉가·동굴·우물 등에 나타나 저주를 부르거나 죽음을 이끈다는 식의 내용이 많다. 이러한 괴담이 생겨난 배경은 의외로 단순 명확하다.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나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을 때 가상의 존재를 통해서라도 곤란함을 모면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사회 풍토가 개인의 개성보단 집단의 통일을 우선시 했던 만큼, 타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겪고 마을에서 버려질 바엔 ‘헛것’의 핑계를 댔다고 할 수 있다. ‘귀신을 보고 놀라서 벌인 일’, ‘귀신이 일으킨 일’ 등을 명분 삼아 괴담을 만들어내며 나와 남의 소속감을 키웠다는 게 한국민족문화학계의 설명이다. 더욱이 과거 기술력이 지금과 같지 않아 구전(口傳) 이야기의 진위를 증명해 낼 길도 없었고, 종교적 위치에서 무속신앙이 가졌던 힘도 컸기에 이러한 괴담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현대에 가까워지면서 괴담의 형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쟁이나 일제강점기 등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새로운 공포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 특정 사고, 특정 인물처럼 ‘눈에 보이는 분명한 사실’이 허구보다 무섭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이를 기점으로 자유로귀신이나 빨간마스크 등 지역별 구체적인 괴담이 태어났다. 오늘날 경기도 지역엔 어떤 괴담들이 숨어 있을까.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 무엇을 두려워했을까. G스토리팀은 ‘수탈’의 공포가 물든 ‘화전 쌍굴’로 향했다. 등골 서늘한 괴담엔... 이름도 없이 스러진 선조들의 恨이 폭우가 내리고 축축함이 낮과 밤을 덮은 어느 여름날. 송글송글 빗방울이 묻은 무성한 잡초 사이를 헤치고 ‘그 곳’에 다다랐다. 열대야 속에서도 유독 서늘함이 느껴지던 입구는 사람의 출입을 막겠다는 듯 높다란 10개의 철제 패널로 막혀 있었다. 철판 가장 왼편 끄트머리에 몸을 구겨 넣을 수 있을만한 약간의 틈이 보였다. 안으로 발을 내딛자 시야를 가득 채운 건 캄캄한 어둠뿐. 손에 쥔 빈약한 플래시 하나로는 도저히 ‘그 곳’을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다. 인근에서 조금 더 큰 손전등 하나를 빌려 다시 입장. 바닥에는 언제 설치됐는지 알 수 없는 철로가 길다랗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쓰레기도 가득했다. 감귤로 만든 막걸리 캔부터 주인 모를 신발 깔창 하나, 플라스틱 일회용 숟가락과 쥐의 사체까지. 악취가 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개중에서 가장 눈에 띈 건 초코파이다. 포장지에 적힌 소비자가격은 200원. 동양제과㈜가 만들었다고 한다. 동양제과㈜가 오리온으로 사명을 변경한 게 2003년이었으니 적어도 20년 전에 버려졌으리라. 인적이 끊긴 지 한참 됐음을 알 수 있는 증거였다. 쓰레기를 뚫고 저벅저벅 한 걸음씩 나아가자 서서히 발등이, 발목이, 종아리가 젖어들었다. 차갑고 더러운 습한 흙탕물에 찝찝함이 마냥 커졌다. 수심이 깊어질수록 철로도 점점 잠겨 제 모습을 감추는 통에 살금살금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물방울마저 불규칙하게 똑똑 떨어지며 음산함을 높이던 그때, 저 멀리 입구에서 “거기 누구냐”고 묻는 고성이 들렸다. ■ 소문 무성한 ‘금단의 구역’ ‘여기’는 고양시 덕양구 덕은동 대덕로 52-19번지 일대. 과거엔 ‘화전 쌍굴’로 불렸지만 지금은 ‘고양 쌍굴’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도로를 기준으로 위쪽 터널에 있는 100여m의 상(上)굴과, 아래 골짜기 옆 터널에 있는 200여m의 하(下)굴을 합쳐 쌍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직선 형태인 상굴은 현재 차량 및 사람의 통행이 가능한 반면, 곡선 형태의 하굴은 모든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수십년 전 ‘쌍굴’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지었다는 이주원 씨(77)를 만났다. 그가 쌍굴 인근에서 지낸 세월만 40여년이다. “내가 1984년도? 아니, 1983년도에 이사 왔는데 그때 저기 아래(하굴)가 우범지대였다고. 지금은 근처에 흙이 덮여서 밭농사도 짓고 그렇지만 아직도 밑에는 철로가 그대로 있어. 예전엔 그 옆에서 젊은 불량배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 몰라. 허구헌 날 담배 피우고 본드 불고... 아주 말도 못 했어. 근데 그보다 더 전에는 훨씬 무서웠지. 나도 거기 안 간지 벌써 10년이 넘었네.” 이어서 그가 되뇌었다. “옛날에 거기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잖아. 10여년 전에도 누가 사고로 죽었다나 어쨌다나. 불량배들이야 쫓아내면 그만인데... 죽은 사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무서워서 못 가지.” ■ ‘조선의 한(恨)’ 쌍굴에 깃들다 ‘사람이 많이 죽었던’ 여기는 어떤 곳일까. 쌍굴의 탄생 배경을 알 필요가 있었다. 1940년대 초 지어진 고양 쌍굴은 일본이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물자를 빼앗을 목적으로 세웠던 ‘경성수색조차장’의 조성 일환에서 함께 설치된 굴이다. 보리쌀 같은 식량이나 석탄 등 군수물자를 실어나르기 위해 열차건 사람이건 이동이 편한 터널이 필요했고, 그게 지금의 쌍굴이 됐다. 과거엔 상굴과 하굴이 X자로 겹쳐져 파주 문산을 넘어 북한 신의주, 중국 만주까지 물자를 옮겼다고 한다. 누가 만들었을까. 당연히 강제 노역에 동원됐던 ‘조선인’이다. 당시 노역에 동원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 여전히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존재도 있다. 당시 노역 중 죽음을 맞은 이들도 있는데, 실제로 쌍굴에서 북서쪽으로 1.2㎞쯤 이동하면 이들이 묻힌 묘지를 볼 수 있다. 경성수색조차장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일본의 전범기업 하자마구미(간조·間組)가 공사에 동원했던 무연고자의 유해를 이곳 공동묘지(화전동 663-9번지)에 이장했다. 현재 묘지에는 함자(銜字) 대신 ‘443’, ‘463’, ‘728’ 등의 번호만 적혀있다. 고양시는 일제의 탄압 속 이름조차 없이 스러진 선조들을 기억하기 위해 지난 2019년 11월 이곳을 ‘일제강점기 화전동 무연고 합장 묘역’으로 지정하고 ‘화전동 기림의 길’ 등을 세웠다. “강제 노역과 징용으로 희생된 선조들의 아픔을 함께 기억하고 역사의 무게를 후대가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며 고양 쌍굴과 함께 이곳을 역사적·문화교육적 현장으로 키운다는 것이 시의 구상이다. 여기에 한국철도공사도 힘을 보태 쌍굴의 역사적 활용방안과 타당성 등 용역을 시행하기로 했다. 2년여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별다른 진전은 없지만 추후 ‘쌍굴 역사공원’이 들어설 수 있을지 주목된다. ■ 괴담 속 진실... “슬픈 역사 알려야” 탄압과 수탈의 장소에서 고통 속 죽어간 조선인의 모습은 쌍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비단 상·하굴 벽면에 셀 수 없이 많이 남겨진 탄흔만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나마 상굴은 화사한 벽화와 밝은 조명이 아픔을 가리고 있지만, 하굴은 언제나 캄캄하고 외롭다. 그래서인지 동네 사람들은 ‘누군가 우는 소리가 났다’거나 ‘군복 입은 남성이 보인다’거나, ‘얼마 전에 사고가 나서 누가 죽었다던데’ 등 괴담을 언젠가 한번씩 들어봤다면서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무서워하지 못한다. “하굴에 지금 오리 가족이 살아요. 뱀장어도 있고, 개구리도 있고, 뭐가 되게 많이 살아서 물이 참방참방 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그런데 우리 눈에 안 보이는 다른 것도 많을 거야. 억울한 장소잖아. 사람이 죽었던.... 심지어 그런 얘기도 있어. 하굴 중간쯤 가면 오른쪽 귀퉁이에 엄청 크고 깊은 웅덩이가 있는데 거기 잘못 빠지면 나오질 못한다고. 누가 발목을 붙잡는다고. 내가 그런 얘기를 들었어. 그러니까 하굴 들어가더라도 절대 거기는 가지마. 얼마나 무서워? 나는 절대 안 가”. 하굴 옆에서 농사장비와 가재도구를 정리하던 한 아주머니가 말했다. “그런데 이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름돋는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잖아. 조금 더 알려져서 후대 아이들한테 ‘우리 동네에 이런 역사가 있었다’ 하고 알리는 그런 이야기지. 하굴에도 ‘총탄 그림’ 같은 벽화 좀 넣고, 닫았던 문도 개방하고, 역사체험관광 같은 걸 해서 근처 하남이나 서울에서도 찾아오게 하고. 그런 식으로 고양 쌍굴이 알려지면 좋겠어.” G스토리팀=이연우·조주현기자,민경찬PD

[선거, 승자의 역사를 만들기까지] 현대사·인간상 반영한 투표물품

‘바퀴’가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다는 말이 있다. 무거운 물건을 굴려 옮기던 최초의 바퀴 통나무는 판자와 결합하면서 수레가 됐고, 수레에 손잡이가 생기면서 마차가 됐다. 그 마차는 점차 자동차로, 기차로, 비행기로 발전하며 전쟁의 역사를 만들어냈을 뿐더러 오늘날 지구촌 시대를 이뤄내는 주역이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바퀴의 재료 역시 나무에서 짐승의 가죽으로, 고무로, 금속으로 달라졌다. 이처럼 사물의 변화는 언제나 현대인의 편의를 추구하며 인간성을 고스란히 반영해왔다. 민주주의의 상징인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의 변천사가 있다. 투표방식은 물론이거니와 투표용지·투표함·투표용구 등 관련 물품이 사회적 변화에 따라 항상 새로워진 것이다. 지금은 재외국민선거나 사전선거 등이 익숙하게 받아들여지지만 한 때는 이러한 선거 풍경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실제로 과거 우리나라엔 한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이들을 위해 한자가 병기되던 투표용지가 있었고, 한국전쟁 이후 남은 탄피를 활용해 만든 투표용구도 있었다. 아울러 독재와 같은 사건·사고를 거쳐오며 투표의 공정성 및 투명성 보장이 그 무엇보다 중요시되는 나라였기에, 투표함도 목재에서 종이로, 플라스틱으로 바뀌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6·1지방선거를 한달여 앞둔 시점. G스토리팀은 현재 민주주의를 이룩하기까지 선거용품이 어떻게, 왜 달라졌는지 그 역사를 알아봤다. 선거편 ②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물건이 선거용품으로 1, 2, 3. 아라비아 숫자로 일, 이, 삼이다. 당연하게 읽히는 말이지만 예전엔 당연하게 읽히지 않았다. 육성으로 말하는 “일, 이, 삼”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지언정 글로 쓰는 ‘1, 2, 3’은 모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맹률이 높았던 탓이다. 전쟁 이후 찢어지게 가난했던 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이뤄 IT강국이 되기까지 국내 선거용품은 얼마나 변해왔을까. ■한글·한자 병기…숫자 대신 세로 막대 쓰던 투표용지 현재 우리나라 투표용지는 세로로 긴 형태다. 후보마다 기호 몇 번인지, 어느 정당 소속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가로쓰기로 줄줄이 나열돼 있다. 유권자는 후보 이름 옆 가장 오른쪽 빈 칸에 빨간색 인주가 든 내장형 도장을 찍으며 간편하게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런데 선거 초기 투표용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국내에 선거 제도가 자리잡기 시작한 초기는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를 기점으로 하는데, 이 무렵 투표용지는 가로로 긴 형태였다. 아라비아 숫자를 모르는 국민이 많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숫자 대신 막대 기호를 세로쓰기로 직접 적어내야 했다. 동시에 이 투표용지에는 후보자명이 한자와 한글로 함께 쓰여있다. 글 읽는 방법을 모르는 선거인들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제4대 대통령선거 투표용지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조병옥趙炳玉’을 뽑고 싶은 유권자는 세로 한 줄(│)을, ‘리승만李承晩’을 뽑고 싶은 유권자는 세로 두 줄(││)을 투표용지에 남기는 식이었다. 정당명은 들어가기 시작한 건 제3공화국 출범 이후다. 공직선거에서 정당추천제가 의무화 하고, 무소속 출마는 금지되면서 제5대 대선부터 투표용지에 정당명이 포함된 것이다. 막대 기호는 제7대 대선(1971년 4월)부터 사라져, 지금의 아라비아 숫자가 기호로 등장했다. 한자와 한글의 병기는 꽤 오래 유지되다 1992년 대선부터 없어졌다. 투표용지의 격변이 일어난 건 민주화 이후 지방선거가 부활하면서다. 1995년에 최초로 4개 선거(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장, 광역 및 기초의회의원)가 동시 실시되면서 전국단위 선거로는 처음으로 지금과 같은 ‘가로쓰기·세로정렬’ 투표용지가 사용됐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유권자 및 관리자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각 선거별 투표용지 색상이 구분됐다는 점이다. 경기도지사 투표용지는 흰색, 경기도의원 투표용지는 하늘색, 수원시장 투표용지는 연두색, 수원시의원 투표용지는 살구색 등으로 나뉘었다. ■손쉽게 볼 수 있던 ‘탄피’로 한 표 행사 그렇다면 이러한 투표용지들에 표기하는 ‘도구’는 무엇이었을까. 초기 선거법에는 기표용구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도구가 쓰이곤 했다. 그 주인공이 대나무와 탄피다. 1952년부터 약 20여년간 전국의 기표용구 대부분은 대나무 및 탄피로 제작됐다. 특히 탄피의 경우 1950년 한국전쟁 이후로 사용 물량이 크게 늘어나자 ‘시대적 상황’에 따라 기표용구로 탈바꿈한 역사적 아픔을 안고 있다. 조금 바꿔 말하면 전쟁이 끝나고 20년이 넘게 한국사회에서 대나무처럼 흔하게 볼 수 있고 빠르게 구할 수 있는 게 탄피였다는 소리다. 그러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부터는 기표대에 끈으로 묶어둔 흰색 플라스틱 용구가 활용되기 시작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볼펜대도 쓰였다. 가볍고 편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분실 우려, 지역별 편차 우려, 폐기물 증가 우려 등이 골머리였다. 표준화된 플라스틱 기표용구는 1985년 들어 처음으로 나왔다. 제12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선거관리 사무의 표준화 및 용구·용품 개선이 이뤄지면서 일률적인 인주와 플라스틱 기표봉이 만들어진 셈이다. 전국에서 최초로 투표소마다 ‘똑같은 기표용구’가 비치됐다. 뒤이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지나면서 2006년부터 인주가 내장된 일체형 기표용구가 탄생했다. 이전까지는 기표봉과 인주가 따로따로여서 선거인들이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있었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6장 이상의 투표용지에 기표해야 하는 동시지방선거 특성상 유권자들의 ‘편의’를 돕는 도구가 필요했을 때다. 이 용구는 이른바 ‘만년도장식 기표용구’로도 불린다. 이름 그대로 반영구적인 특성을 가지며 별도의 스탬프 없이 지금처럼 하나의 기표용구로만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한 시초다. ■목재→철재→알루미늄→종이…기표대·투표함도 ‘새 옷’ 시대가 흐르면서 투표용지와 기표용구만 변했으랴. 투표를 하는 자리, 투표용지를 넣는 통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국내 첫 기표대와 투표함은 모두 ‘나무’로 시작했다. 시기별·지역별 다소 차이는 있었으나 경제적 어려움이 있던 시대였던 만큼 비교적 값이 저렴한 목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독재 등의 한국적 사건·사고로 비밀투표는 보장해야 한다며 나름의 가림막은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기표대는 1985년 철재, 2004년 알루미늄, 2007년 종이 순으로 새 옷을 입어 갔다. 그러다 오늘날 개방형 기표대가 생겼는데 주된 배경은 ‘선거인의 기표 비밀을 보장하되 투표소 분위기를 밝고 쾌적하게 개선하자’는 취지였다. 또 이전엔 장애인·노인 등 선거인들이 배제된 감이 있었지만, 이때부터의 기표대는 휠체어를 타고 이동해도 투표가 가능하도록 높이가 낮아지는 등 시민들의 요구가 대폭 받아들여졌다. 투표함도 피차일반이다. 무게·부피가 적어 설치 및 철거가 간단한 알루미늄에서, 일회용 처리가 쉬운 종이를 거쳐, 봉인 기능이 강화된 강화플라스틱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발전했다. 2012년부터 투표소를 지키고 있는 가장 최근의 투표함은 넓은 주둥이에 좁은 밑바닥을 가진 디자인으로, 보관의 효율성을 높이는 한편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도록 했다. 더불어 투·개표 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고자 투표함 덮개 안쪽에 고유 식별번호가 내장된 전자칩이 부착됐다. 이러한 선거용구는 현재 수원 선거연수원 별관동에서도 볼 수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6월3일까지 특별전시회 <대한민국 선거 어제와 오늘>을 열고, 선거사료 200여 점을 공개하고 있어서다. 김동률 경기도선거관리위원회 홍보과 공보계장은 “1948년 초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이래 올해까지의 모든 선거 역사를 총망라해 돌아보고 현대사의 변곡점이 됐던 주요 사건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며 “선거용품을 통해 아름다운 선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선거관리위원회와 국민들의 민주선거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어 의의가 있다. 선거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겨 참여, 공정, 화합의 모습을 만들어가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G-Story팀=이연우기자, 민경찬PD

[선거, 승자의 역사를 만들기까지] “저 좀 봐 주세요” 시대·유행따라 달라진 표어

[승자의 역사를 만들기까지] 세월 따라, 유행 따라 달라지는 표어 동서고금에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구전부터, 퇴적풍화를 거쳐 기록된 문헌까지 다양한 역사가 사시사철 숨을 쉰다. 지금 경기도엔 어떤 이야기가 남고, 또 사라졌을까. 경기일보 이연우 기자와 민경찬 PD가 시나브로 잊히는 우리네 이야기를 찾아 글과 영상으로 전한다. G스토리팀의 세 번째 테마는 선거다. 흔히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고들 한다.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면서, 국가의 주인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대표적인 행동이 바로 선거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3월9일 제20대 대통령선거와 6월1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지는 해다. 선거에 뛰어든 수많은 후보들이 공정하고 화합하는 아름다운 선거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선거에서 이 같은 공명정대가 주창된 건 아니다. 한때는 배고파 못 살겠다, 죽기 전에 살길 찾자고 했던 시대가 있었고, 한때는 민주세력 대연대 시켜 군부 정치 끝장내자고 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경제를 살립시다라는 표어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평등한 세상, 준비된 사람이 강조되고 있다. 오늘날 민주선거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동안 수많은 후보자들은 자신의 매력을 어떤 문구로 어필해왔을까. 유권자들의 소중한 한 표를 얻기 위해 그동안 선거전에는 어떤 표어들이 쓰였을까. G스토리팀은 역대 대통령선거 및 경기지역 전국동시지방선거의 후보자선전물 중 공보공약서를 뺀 벽보를 중심으로 선거판을 살펴봤다. [G-Story] 선거편 ①시대별 이슈 담아낸 거울표심 구애 한국 현대사의 흐름이 그랬다. 온 국민이 쫄쫄 굶던 시절엔 허기를 달래는 게 급선무였고, 부패한 독재가 장기간 벌어질 땐 파벌 정치를 몰아내는 게 우선시 됐다. 먹고 살만해진 순간부터는 나라의 안정이 필요하다더니, 이후엔 창조와 혁신을 바탕으로 튼튼한 경제 강국이 돼야 한다고도 했다. 이 사이사이엔 평화 통일과 변화를 이끄는 새사람이 빠지지 않았다. 아무튼 최근 선거의 방점은 평등한 복지 실현과 누구나 행복한 삶에 찍혀 있다. 달라지는 시대상은 선거 벽보에 고스란히 담겨왔다. ■1~5대 선거까지 존재감 낮던 벽보, 6대 들어 본격화 먼저 대통령 선거 벽보부터 보자. 이승만(제1~3대)윤보선(제4대) 시절을 거쳐 제3공화국(제5대)에 이르는 시절까지는 선전물 전쟁이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를 넘어 단독정부가 자리 잡던 시대, 부정불법선거가 치러지던 시대, 516군사정변 이후 처음으로 실시한 대선에서 박정희가 정권을 잡던 시대를 모두 아우르는 기나긴 때의 이야기다. 이 시기(1960년대 초반까지)엔 선전물을 만들지 않아도 직선제와 간선제를 오가며 어련히 대통령이 정해지곤 했기 때문에 벽보가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그나마 제2대 대선에서 이승만이 발췌개헌을 통해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면서 정부통령 선거가 치러져 유일한 벽보가 생기긴 했다. 본격적으로 여러 후보들의 선거 벽보들이 붙기 시작한 건 제6대 대선이다. 대부분의 후보가 정장 차림에 무표정을 하고 근엄함을 앞세웠다. 지금과 달리 벽보 곳곳에 고문헌처럼 한자가 가득 적혀 있기도 했다. 당시 당선인은 명랑한 생활과 편리한 살림을 위해 황소처럼 뛰겠다고 내건 민주공화당 박정희다. 당 로고에도 황소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때에도 네거티브는 있었는지, 민중당 김준연은 병든 황소 몰아내자며 대놓고 박정희를 저격하고 나섰다. 어떠한 정책도, 비전도 제시하지 않고 벽보 속에 오로지 황소를 누르겠단 문구만 썼다. ■사라진 벽보, 12대부터 재등장표정포즈 다양화 그러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벽보가 다시 자취를 감췄다. 제9대까지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제10대 갑작스레 대통령이 된 최규하, 뒤이어 제11대 전두환 때까지 벽보가 없었다. 한국 선거사에 벽보전(戰)이 벌어진 건 제12대 때부터다. 이때 벽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행해 모든 후보들이 같은 틀의 벽보를 내세웠다. 이 역시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여파다. 개표 결과 창조개혁발전의 새 영도자 민주정의당 전두환이 당선됐다. 벽보의 색깔과 글씨체가 화려해지고 후보자들의 표정포즈가 다양해지기 시작한 건 제13대 때인데, 이 무렵 처음으로 여성 후보가 나오기도 했다. 사회민주당 홍숙자는 곱게 화장한 얼굴로 반지 등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내 대통령은 내 손으로 뽑는 오스트리아형 선진 민주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전했다. 무소속 백기완과 일체민주당 김선적, 통일민주당 김영삼은 모두 군정 종식을 외쳤다. 이들 모두 엄지를 치켜들고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민주정의당 노태우에게 밀려 패했다. ■남자처럼 꾸민 여자26년째 대통령 도전 중인 허경영도 제14대 선거에선 무소속 김옥선의 벽보가 독특하다. 여성이지만 짧은 헤어스타일과 진지한 표정, 남성용 재킷 등을 걸쳐 남장을 한 모습이다. 당시 사회 통념상 대통령직에 여성보단 남성이 유리하게 보였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그는 처음으로 벽보에서 분홍색을 사용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통일국민당 정주영은 벽보 역사 중 처음으로 경제 대통령 타이틀을 썼다. 이를 기점으로 다음 선거부터 여러 후보들이 경제 대통령을 들고 나온다. 다음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도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현(20대) 대선 후보이기도 한 공화당 허경영이 처음 등장한 것. 당시 허경영은 핵주권과 경제기적을 바탕으로 강력한 한국을 건설하자며 10대 혁명 공약을 제시했는데, 이를 실천하지 않을 시 국민으로부터 어떤 처벌도 받겠다고 서약했다. 올해로 26년째의 도전이다. ■그 유명한 불심으로 대동단결 나온 뒤비교적 무난한 벽보 부착 뒤이어 불심으로 대동단결한 제16대 대선이다. 호국당 김길수가 스님의 차림을 하고 나와 유명세를 탄 때로, 같은 선거에 나선 사회당 김영규의 벽보도 돋보였다. 그는 얼굴을 크게 확대하고 돈 세상을 뒤엎어라라는 카피를 내세워 마치 영화 포스터와 같은 벽보를 만들었다. 벽보에 개인 홈페이지 주소를 명시해 비로소 2000년대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났다. 제17대 대선에선 한나라당 이명박민주당 이인제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무소속 이회창 등 쟁쟁한 후보 사이에서 새시대참사랑연합 전관이 유독 튄다. 그는 백마9사단장 및 학생중앙군사학교(ROTC)장이었던 이력을 살려 녹슨 철모를 벽보 전면에 크게 배치했다. 나라를 지킨 철모라면서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해놨다. 역대 최다 여성 후보(4명, 박근혜이정희김소연김순자)가 출마한 제18대 대선, 곰돌이 캐릭터로 친근함을 앞세운 새누리당 조원진이 나온 제19대 대선엔 딱히 인상 깊은 벽보가 없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공직선거법이 강화하면서 선거 광고의 규정이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전국동시 첫 경기도지사 이인제, 30여년간 벽보만 10여개 지방선거는 어떨까. 광역기초단체장 선거로 한정해 봤을 때 첫 번째 벽보는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 붙었다. 광역의원은 이보다 앞선 1991년부터 붙기 시작했다. 대선 벽보와 같이 누군가는 기호를, 누군가는 정당을, 누군가는 정책을 제마다 강조하는 모습이었다. 지방선거의 경우 대통령선거보다 선거 횟수가 많고 후보자가 많아 일부 벽보만 추려봤다. 먼저 많아도 너무 많은 벽보의 주인공 이인제다. 이른바 피닉제(불사조를 뜻하는 피닉스와 이인제의 합성어)로 불리는 그는 1988년1992년2000년2004년2008년2012년2016년까지 총 7개의 국회의원 선거 벽보가 있다. 그뿐이랴. 1995년엔 광역단체장 선거 벽보, 1997년2007년엔 대통령 선거 벽보도 붙였다. 어쨌든 이 중 1995년이 바로 경기도지사 자리다. 국회의원 재선과 낙선을 경험하던 이인제는 1995년 경기도지사로 선출됐다. 더이상 서울의 봉이 될 수 없다던 민주당 장경우와 경기도의 아들이라는 자유민주연합 김문원 등을 눌렀다. 경기도를 위해 대통령과 맞설 수 있는 사람(1998년동시2회) 손학규도 땀으로 경기도를 적신다(2002년동시3회)고 했을 때 경기도지사에 당선됐다. 새천년민주당 진념(동시3회)민주당 박정일(2006년동시4회) 등 여러 후보들이 경제도지사 다섯 글자만을 내세우는 틈에서 유권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카피였다. ■출마자 다양한 광역의원 선거, 그만큼 벽보도 신선 광역의원 선거는 훨씬 볼거리가 많다. 수차례 진행된 여러 번의 선거 과정에서 아파트 현장 소장도 출마하고, 사업가도 출마하고, 수학 선생님은 물론 정복되지 않는 여자를 집필한 희곡작가 겸 연출가 등 내로라하는 이력의 소유자들이 뛰어든 만큼 벽보도 개성이 가득하다. 단 제1회 선거(1991년)의 경우 경기도의원직에 도전한 379명의 벽보가 모두 흑백 사진으로 제작돼 크게 튀는 부분이 없었다. 동시1회(1995년)부터 벽보는 컬러풀해지며 신선해지기 시작한다. 고양시 제1선거구 도의원에 도전했던 우리당 신관섭은 동시4회(2006년)에 출마하면서 독일 월드컵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한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넣었고, 가평군 도의원에 도전했던 무소속 정주석은 프랑스 에펠탑을 능가하는 자라타워를 가평에 만들겠다는 포부를 넣었다. 이 같은 벽보들은 중앙선관위 선거정보도서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역사 속 인물 흉내부터 TV 속 연예인까지상징적 선거운동에 의미 이와 함께 벽보를 통한 캐릭터 전쟁도 벌어졌다. 허준(민주국민당 최광2000년 국회의원선거 부산 사하구갑), 명성황후(자유민주연합 곽민경2004년 국회의원선거 서울 동대문구을), 추장(민주국민당 최성권2000년 국회의원선거 고양 일산구을)은 물론 반라로 나선 남자들도 있다. 아울러 우리에게 친숙한 연예인들도 과거 정계에 진출하던 당시 벽보를 만들었다. 이 같은 모습은 유튜브 경기TV에 업로드된 G-스토리 관련 영상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김동률 경기도선거관리위원회 홍보과 공보계장은 선거벽보는 우리나라 선거문화 초창기부터 유권자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상징적인 선거운동방법 중 하나다. 한 장의 종이가 가진 힘이 커 후보자들도 벽보에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라며 현재도 벽보의 중요성은 크다. 관련법상 정당한 사유 없이 벽보를 훼손하면 중대 범죄가 될 수 있는 만큼 깨끗한 선거를 위해 성숙한 시민의식을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G-Story팀=이연우기자, 민경찬PD

[그때 그 시절 놀이] 힘 돋우고 흥 부른다...우리동네 놀이 한판

동구(洞口) 안팎에서 뛰놀며 즐기는 소소한 놀이 문화엔 지역민 고유의 삶이 어우러져 있다. 술래잡기는 밤에 돌아다니는 사람을 잡아들이는 군졸 '순라군'을 흉내내면서 시작됐고, 고무줄놀이는 칡넝쿨과 새끼줄을 뛰어넘던 것이 변하며 생겨났다. 경기도에도 우리 지역만의 놀이가 있다. 주로 공동 노동의 모습과 무속 신앙의 형태로 드러난다. 이러한 놀이들은 전래놀이, 전통놀이, 민속놀이, 향토놀이, 전승놀이 등 혼재된 용어로 불리지만 이번 기사에선 '전통놀이'로 통칭한다. 먼저 이천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전통놀이로는 경기도 지정 무형문화재 제50호인 ‘거북놀이’가 있다. 수수대를 벗겨 거북 모양을 만든 다음, 그 속에 사람이 들어가 농악대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풍요를 기원하는 놀이다. 모두의 건강을 축원하려 시작된 거북놀이는 경기남부와 충북 일부에 주로 분포됐으나 시대적 흐름에 따라 소멸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 초 이천의 한 민속학자가 고증하면서 다시 부활했다. 포천지역에선 틀무시 마을에서의 ‘동홰 세우기’가 유명하다. 정월대보름 저녁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마을 공터에서 즐기는 놀이다. 수수깡과 나무를 세워 놓고 불을 지르며 안녕을 기원하는 식이었다. 수원에는 시 향토유적 제9호인 '고색동 코잡이놀이'가 대표적이다. 1796년 수원화성 축성 이후 양반과 농민이 모두 모여 1년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며 줄다리기를 하는 놀이다. 현재 고색동에 있는 수원문화원 부설 고색향토문화전시관을 가면 코잡이놀이의 유래와 사진, 실제 사용된 암사줄 등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파주 ‘호영산 호대감놀이’, 연천 ‘아미산 울어리’ 등이 두루두루 전해진다. 파주의 굿놀이 호영산 호대감 놀이는 호랑이에게 죽은 원혼을 달래 사상자가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됐다. 군웅 할아버지가 호랑이 사냥에 나가는 장면에서 출발, 활을 쏴 액막이하는 순으로 그려진다. 연천향토무형문화재 제10호인 아미산 울어리는 겨우살이에 필요한 땔감을 얻으러 아미산을 올라갈 때 부르던 일 노래 형태의 놀이다. 민요와 놀이를 결합해 풋나무 베기, 남여행차, 농기싸움, 마당놀이 등으로 구성된다. 또 우리 동네엔 어떤 전통놀이가 있을까. 그리고 어떤 가락이 있을까. G스토리팀은 민족대명절 설을 앞두고 가족·친구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를 찾기 위해 광명으로 출발했다. [G-Story] 놀이편 ③450년 전통 ‘광명농악’ 조상의 정겨운 속삭임이자 미래 언어… 올곧게 지켜내야 산 할아버지가 구름 모자를 썼던 450여년 전 어느 날, 광명에서 가장 높은 산 아랫마을이 북적거렸다. 한자리에 모여든 마을 사람들은 1년 동안 마을에서 가장 덕을 많이 쌓은 어르신 둘을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로 지정했다. 얼마 뒤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이 열릴 때, 마을 사람들은 무르익은 곡식을 거두고, 돼지머리가 아닌 소머리를 챙겨 산에 올랐다. 봇짐을 이고 진 사람들 앞에서 농악대는 징·장구·꽹과리를 신명나게 두들기며 길놀이를 뛰었다. 구름산에서 굿을 하던 길 놀이, 지금은 각각 ‘구름산 도당굿’과 ‘광명농악’이라 불린다. 오늘날까지 광명지역에서 구전되는 광명의 전통놀이 이야기다. ■ 아방리·철산리…놀이마다 빠지지 않던 ‘우리네 소리’ 과거 광명 아방리 마을에선 음력 정월대보름마다 마을의 안녕을 비는 ‘아방리 줄다리기’가 열렸다. 남녀로 판을 나눠 암사줄을 50m가량 엮고 당기던 집단적 세시놀이 형태다. 방식은 여타 줄다리기와 같지만, 마을 단위에서 정기적(격년제)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옆 동네 철산리에선 ‘쇠머리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가 펼쳐졌다. 돌림병이 공포이던 시절, 괴질이나 역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제의식이었다. 아낙네들은 이웃 동네에서 디딜방아를 훔쳐와 피묻은 고쟁이를 씌우고, 그 디딜방아를 거꾸로 세워 식을 치렀다. 두 놀이 모두 '가락'이 빠지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방리 줄다리기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남은 짚을 모두 태우며 풍악을 쳤고, 철산리 쇠머리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에서도 농악이 울려 퍼지면 주민들은 덩실덩실 춤을 춰댔다. 광명의 놀이와 가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 마을 단위로 삼삼오오 놀던 문화 직접 발굴…무형문화재 지정 성과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노래를 듣는 사람도 있을 터. 놀이를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놀이를 배우는 사람도 있을 터다. 광명의 전통놀이와 농악을 복원·보존하는 중심에도 당연히 '사람'이 있다. 전승하는 사람이나 전수받는 사람이나 아직까지 부채를 펴고 버선을 신으며 상모를 돌린다. 조금은 관심 밖에 벗어나기도 했고, 조금은 서구 문화에 밀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유지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0호 광명농악의 인간문화재 임웅수 선생이다. 그는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옷 매무새를 만지작거렸다. 긴장된다며 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이내 목을 가다듬기도 했다. 임 선생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경기무형문화재총연합회 이사장, 광명농악보존회 회장, 광명시립예술단 예술감독 등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대한민국 정통 국악인'이다. 뿌리는 광명에 두고, 가지는 광명농악으로 치고 있다. 그가 광명에 다다른 배경은 별 것 없었다. “생업에 종사하다 보니 옛것을 잠시 잊었을 때가 있었어요. 그러다 1990년도에 광명에 오게 됐는데, 어르신들이 마을 단위로 악기를 가지고 놀이하는 모습을 보게 됐죠. 서적에도 딱히 서술된 게 없어서 다양한 어르신들을 만나며 그 놀이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광명에 머물면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갖고 있던 민속놀이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광명농악이 된 거에요. 구술로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경기도 대회도 가고, 한국민속예술축제도 가고, 문화재까지 된 거죠.” ■ 한(恨) 담긴 농요, 세계 속 K-문화의 기반 그에게 ‘옛것’, 즉 전통이란 무엇일까. 임 선생은 “조상이 우리에게 들려준 정겨운 속삭임이자 미래의 언어”라 표현했다. K-문화가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상황에서 우리네 기초 음악과 기초 놀이가 세계의 비전(Vision)이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대부분의 전통놀이는 자연의 정기를 받아 주변을 정화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놀이들이 지금도 광명을 넘어 세계 이곳저곳에서 숨을 쉬고 있다. “농요부터 말씀드리면 좋겠네요. 농요는 농민들이 노동에 지친 심신을 달래려 흥얼거리던 노래였습니다. 지금 우리도 힘들 때 이어폰을 꽂고 대중가요를 즐기듯, 그때는 농요를 즐긴 거죠. 그런데 이러한 농요에는 한(恨)이 담겨 있습니다. 갓 시집 온 아낙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디딜방아를 찧고, 가마니를 지고, 밥을 차리고, 저녁엔 새끼줄을 꼬고, 새벽녘에 잠들만 하면 장닭이 울고… 그런 상황에서 부르는 노래였으니 얼마나 한스러웠겠어요. 이 소리들이 발달해 농요라는 음악으로, 지역 공동체의 문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세계 어디에도 이런 문화는 없을 거에요. 그래서 우리 농악이 더 특별하고 매력적인 겁니다.” ■ 국립농악단·국립전통연희단은 왜 없을까요? 한때 광명은 향토문화 전승을 위해 18개동 전동에 주민자치 농악대가 만들어진 적도 있었다. 충현고등학교처럼 광명농악을 전수 받는 ‘전승학교’도 있었다. 청소년이건 어르신이건 지역 내 농악을 향한 관심이 컸던 곳이다. 하지만 시대적 변화와 코로나19 유행으로 현재는 전멸하다시피 무너졌다. 임 선생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고향’ 있잖아요. 명절이면 차가 아무리 막혀도 찾아가는 정겨운 곳. 우리는 고향에 가면 가족의 따뜻한 품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몸으로, 정신으로 배워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고향을 찾아가게 되는 거죠. 전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자연스레 체득했기 때문에 지역 문화들도 끊이지 않고 유지돼 왔죠. 그런데 이젠 그 전통들이 몸에 익은 사람들이 적어지는 거에요. 서양의 문화, 트렌디한 문화들이 생겨나니까 지역 문화가 잊히는 거죠.” 이어 그는 농악 전승 과정에서 겪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덧붙였다. “종종 재능이 있거나 뛰어난 기량으로 눈에 띄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들이 성화에요. ‘농악을 하면 밭에서 농사나 짓고 사는 거지, 너의 일생과 미래가 보장되느냐’며 말리고 타과목으로 진학을 하라는 거죠. 그렇게 농악을 접는 학생들이 많아 아쉬움이 큽니다. 전통문화라는 거, 문화재라는 거… 시장 경쟁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문화재로 지정해 국가에서 보호하고 육성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교육도 그렇듯 전통도 체계적으로 보호·육성하면서 가르쳐야 해요. 국립합창단, 국립오페라단은 있는데 국립농악단, 국립전통연희단은 없잖아요. 그러니 농악 관련 일자리도 한정돼 있고 학생들도 애초에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거죠. 자라나는 아이들이 농악이라는 공동체 문화를 통해 희망과 신명으로 흥을 돋우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 “민족 문화 육성해야 한다는 사명감·의무감으로” 전통을 좋아하는 것도 알겠고, 그 분야에서 유명한 것도 알겠는데… 왜 그는 이렇게까지 광명농악에 ‘진심’일까. 단도직입 물은 질문에 “철 없던 시절 우연히 잡았던 꽹과리가 오늘날 저를 살아오게끔 만들었다”는 호탕한 답이 돌아왔다. “국민교육헌장(1968년 12월) 앞머리를 보면 ‘우리는 조상의 얼을 이 땅에 되살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쉽게 말해 민족의 문화를 육성해야 한다는 글귀죠. 저는 자연스럽게 꽹과리를 잡고 음악과 함께 자라오면서 민속놀이에 대한 생활문화가 익숙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세월이 차츰 축적되면서 ‘우리 조상들의 흔적과 지혜가 실로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누군가 우리의 문화를 이어가야 한다면 ‘그게 나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전통 보존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사명감과 의무감이 결합돼 무형 유산을 지키고 있습니다.” 또 그는 “장독이 없다고 해서 고추장, 된장, 간장 안 먹고 살 수 없잖아요”라는 재치 있는 설명을 곁들였다. 전통놀이의 현대화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이었는데, 현대화를 위해서도 전통놀이의 유지가 필수라는 부연이었다. “경기도는 동쪽으로 강원도, 서쪽으로 인천, 남쪽으로 충청도, 북쪽으로 서울과 인접합니다. 한국의 지형적 중심은 아니지만 문화적으로는 상당히 중심적인 도시죠. 그렇다 보니 대한민국의 모든 문화를 받아들이고 가져와 발전시키는 고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농악의 흔적을 꾸준히 이어나갈 의무와 책무가 있어요. 전통을 올바로 올곧게 지켜낼 때 미래의 창조적인 음악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코로나19 속에서 당장은 어렵겠지만 장차 전통시장 등 공간을 활용해 문화재 개개인 및 단체가 활동 반경을 넓힐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길 희망합니다.” G-Story팀=이연우기자, 민경찬PD

[그때 그 시절 놀이] 철 지난 오락실 GAME OVER

전국 번화가를 시끌벅적 호령하던 ‘오락실’이 무너지고 있다. 폐업 이유는 저출생에 따른 인구 감소, PC와 모바일 시장 확대, 코인노래방ㆍ인형뽑기장으로의 업종 변경 등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최근엔 코로나19 영향으로 대면 활동에 제약이 생기고 영업시간까지 제한받는 등 어려움이 겹겹이 더해져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그린게임랜드 같은 프랜차이즈부터 소규모 개인 오락실까지 차츰차츰 문을 닫고 사라지는 추세다. 여기서 말하는 ‘오락실’은 과연 어디일까. 한국표준산업분류에 따르면 ‘전자게임장 운영 업종’이 해당한다. 비디오게임방, 아케이드게임장, 전자게임장, 전자오락유기장, 전자오락실 등이 모두 포괄된 개념이다. 컴퓨터가 아닌 전자게임기를 갖춘 시설이 전부 오락실인 셈이다. 범주가 워낙 넓다 보니 통계상으로는 해마다 사업체가 늘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경기도만 한정해도 2012년 47곳이던 전자게임장 운영 업종이 2019년 174곳까지 늘면서 7년 새 270.2% 증가했다. 코로나19가 덮친 오늘날 철권과 DDR, 포트리스를 즐겼던 보통의 ‘오락실’은 정말 많아지고 있을까. G스토리팀은 2021년 마지막을 앞두고 ‘즐거운 한 판’을 찾아 경기도 오락실을 향했다. [G-Story] 놀이편 ②게임은 살아도 오락실은 죽는다 동전 짤랑거리며 드나들던 ‘동네 애들 사랑방’ 모바일 게임에 치이고 PC방에 밀려 추억 속으로 “오락실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세요?”라는 질문을 남녀노소 구분없이 던져봤다. ‘학교 끝나고 편하게 갈 수 있는 데이트 장소’(25세ㆍ수원 이희주), ‘농구나 <더 킹 오브 파이터즈> 하면서 스트레스 풀던 곳’(34세ㆍ안산 정영현), ‘왕년에 2천 원 들고 <펌프>하면서 시끌벅적하게 놀던 곳’(44세ㆍ가평 양선경), ‘어린 애들 바글바글한 데’(50ㆍ화성 원유호), ‘<1942>, <갤러그>, <핑퐁>’(61세ㆍ광주 이종호) 등 답변이 돌아왔다. 예전 오락실은 그랬다. 동그랗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빨간 스틱을 거머쥐면 번쩍번쩍 요란한 기계음이 나며 게임이 시작됐다. 이윽고 도트로 찍어낸 듯한 캐릭터나 배경들이 빨빨거리며 움직이면 그대로 시선이 따라갔다. 그렇게 기계마다 스쳐간 동전이 몇 만개는 될 테다. 100원짜리건 500원짜리건 호주머니 속 동전이 남아나는 날이 없었다. 수원시 망포동 짱오락실도, 시흥시 정왕동 뿅뿅게임랜드도, 양주시 광사동 게임킹 게임장도 사람과 동전이 소란스레 북적이곤 했다. 돌아보면 마냥 꿈 같은 시절 얘기다. 지금은 모두 폐업하고 문을 닫은 곳들이다. ■ 2006년 ‘바다이야기’ 여파로 부정적 이미지 확산 … 쇠락의 시작 과거 중심지마다 하나씩은 자리하고 있던 오락실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한때는 전국 오락실 4곳 중 1곳이 경기도에 있었는데, 그런 경기도에서도 올해만 10여 곳이 문을 닫았을 정도다. 온라인게임 발전과 현금 사용의 축소 등이 원인이다. 그 속에서도 오락실의 몰락을 이끈 첫 번째 계기는 지난 2006년 터진 소위 ‘바다이야기 사태’다. 바다이야기는 2004년 출시된 국산 아케이드 게임이다. 중독성과 도박성이 심했던 탓에, 게임으로 큰돈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생기면서 사회적 이슈가 됐다. 당시 정부는 허술한 심의로 이러한 사행성 게임이 나왔다며 제재를 가하고 게임물등급위원회(현 게임물관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오락실이 ‘흥청망청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심게 된 가장 큰 시작점이었다. 이듬해(2007년)엔 아이폰이 첫 등장했고, 뒤이어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안드로이드 OS가 대중에게 퍼져 나갔다. 스마트폰 모바일 플랫폼이 뜨면서 아케이드게임 시장은 더욱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PC게임은 물론이고 PSP, 닌텐도DS 같은 콘솔게임도 암흑기를 맞았다. 오락실을 넘어 게임을 하는 사람 자체가 ‘오타쿠’ 혹은 ‘돈과 시간이 많은 마니아’ 정도로 여겨졌다. 혹자의 표현대로라면 “재미 좀 보는 성인오락실 빼곤 다 망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비싼 기계 값과 게임 플랫폼의 다변화, 오락실 간 네트워크 단절 등이 줄 폐업의 원인으로 꼽힌다. 오락실을 가는 사람이 없으니 오락기를 만드는 사람도, 오락실을 운영하는 사람도 함께 없어졌다. ■ 국산게임 규제ㆍ시대적 흐름 변화…문 닫는 경기도 오락실 화성시 향남읍에 있던 A오락실도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다. 2000년대 초반 설립돼 60여 대 게임기로 문을 열고 승승장구하던 A오락실은 바다이야기 사건으로 ‘오락실’ 간판에 큰 타격을 입고 2007년 폐업 신고를 했다. 그러다 5년 뒤인 2012년 같은 부지에 재개장을 했다. 당시 A오락실 사장은 서울 성동구를 돌아다니며 ‘망한 오락실 투어’에 나서 버려진 게임기 7대를 하나하나씩 들여왔다. 게임기를 가져온 노력이 헛되지 않게 이용가는 그다지 높이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업데이트가 가능한 게임기는 1회당 1~2천 원에, 업데이트가 어려운 고전 게임기는 1회당 500원에 즐길 수 있도록 낮은 가격을 책정했었다. 상황이 나아지면 게임 값을 500원~1천 원가량 더 올릴 계획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게임 가격은 오르지 못했다. A오락실 사장은 “운 나쁘게도 망할 수밖에 없었던” 에피소드를 조심스럽게 전했다. “우리 오락실은 성인오락실이 아니었는데도 바다이야기 때 피해를 많이 봤어요. 당시 우리나라에선 여러 가지 게임들이 막혔거든요. 일본이나 미국은 심의가 덜하고 게임 값을 파격적으로 내리는데 국산 게임은 제약이 많았단 말이죠. 그렇다 보니 오락실에 들어오는 기계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어요. 좋게 말해서 ‘추억의 게임’들이지, 냉정하게 말하면 ‘철 지난 게임’들만 오락실로 오는 겁니다. 다양한 게임을 손쉽게 핸드폰이나 컴퓨터로 할 수 있는데 굳이 돈과 시간 들여서 오락실까지 오겠나요? 저 같아도 안 올 것 같아요. 그래서 영업시간을 점점 줄여가다가 코로나19까지 터지면서 올해 2월 가게를 정리하게 됐어요. 경기도엔 소상공인이 많으니까 다들 저 같은 심정이었을 거에요. 한 번만 더 해보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해보자 하면서 운영하다가도 도저히 답이 없으니까 우르르 문을 닫기 시작하는 거죠. 게임 아니어도 놀만 한 예능 거리가 너무 많고요. 이건 누구 탓도 아니에요, 시대적 흐름이 그런 거니까.” ■ “양질의 콘텐츠 키워 제3의 아케이드 붐 일어나길” 문 닫은 경기도 오락실들은 동전노래방ㆍ인형뽑기장ㆍVR게임장 등으로 업종 변경을 하거나, PC방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한 판’ 할 수 있는 터가 영 아니다 싶으면 게임과는 전혀 무관한 식당이나 편의점으로 확 바뀌기도 한다. 모바일과 콘솔에 밀려 비참한 처지가 됐지만 게임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다. 단지 오락실 게임만 다른 게임보다 더 많이 외면당하고 있을 뿐이다. 게임 업계는 오락실이라는 공간이 기존 이미지를 벗어 트렌드에 맞춰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엔 게임 정책의 내실화 및 안정화도 필요하고, 게임이 무료 콘텐츠가 아니라는 인식 개선도 동반돼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장기적으로는 ‘제3의 아케이드 붐’이 일어나리라 기대하는 분위기다. 김성헌 경기콘텐츠진흥원 게임문화팀장은 설명했다. “오락실에서 오락하던 청소년이 PC방으로 흡수됐습니다. 오락실을 다니는 연령대는 높아졌고요. 특히 바다이야기 사건으로 오락실 이미지가 많이 바뀌면서 더 심해졌습니다. 그전까지 생각하던 복합문화공간이 아니라 성인물을 취급하는 침체된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과거보다 못한 산업이 됐죠. 사실 게임 산업 전체로 보면 현재 오락실이 가지고 있는 비중은 낮습니다. e스포츠나 온라인게임 시장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너무 크니까 게임 업체들도 오락실이 아닌 여타 게임 시장이나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가는 거죠. 오락실 문화가 활성화하려면 ‘모니터 보고 서로 마주 앉아서 하는’ 형태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VRㆍ메타버스 등 신기술 영역과 접목한 양질의 콘텐츠를 키우면 또 다른 체험 문화공간으로 확장되리라 기대합니다.” G-Story팀=이연우기자, 민경찬PD

[그때 그 시절 놀이] 꿈 자라난 '만화방'…기억의 책장 속으로

동서고금에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구전부터, 퇴적ㆍ풍화를 거쳐 기록된 문헌까지 다양한 역사가 사시사철 숨을 쉰다. 지금 경기도엔 어떤 이야기가 남고, 또 사라졌을까. 경기일보 이연우 기자와 민경찬 PD가 시나브로 잊히는 우리네 이야기를 찾아 글과 영상으로 전한다. G스토리팀의 두 번째 테마는 놀이다.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시대를 지나 스타크래프트, 포트리스, 롤, 피파, 오버워치를 넘어 다시 구슬치기, 줄다리기, 오징어 게임의 시대가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ㆍ성별ㆍ연령별 수많은 놀이 문화가 존재했고, 수많은 변화가 일어왔다. 어떤 놀이는 삼삼오오 마당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즐길 수 있었고, 어떤 놀이는 나 홀로 방 안에서 즐길 수 있었다. 경기도 사람들은 어디서 어떤 놀이를 하며 여가를 보냈을까. 그땐 그랬지 하는 놀이는 무엇이 있을까. 과거부터 현재까지 경기도 곳곳의 대표적인 놀이터를 찾아봤다. 먼저 만화방이다. 지난 8월 통계청이 취합한 경기도 내 만화산업 관련 사업체는 2019년 기준 총 1천384개로 전국의 20.9% 상당을 차지했다. 서울(25.4%)에 이어 두 번째로 많지만 10년 전(2009년 2천199개)에 비하면 절반가량 사라진 수치다. 현재 경기도내 만화 출판사는 28곳, 만화방ㆍ만화카페 같은 만화 임대업체는 183곳이다. 각각 전국의 32.9%(85곳), 25.9%(704곳) 비중이라 평균적으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특히 체인점화 된 만화카페가 늘어난 것이 큰 몫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해마다 만화 관련 사업체는 줄어든다. 예나 지금이나 애니메이션은 존재하는데 만화방은 왜 없어지고 있을까. G스토리팀은 1983년부터 현재까지 운영 중인 창전사를 찾았다. 속속 생기는 만화카페의 모티브가 된 오래된 만화방이면서 이천시 유일한 만화방이기도 하다. 한 페이지씩 종이 냄새를 넘기러 출발한다. [G-Story] 놀이편 ①만화가게 아저씨는 오늘도 추억을 지킨다 11월3일 제21회 만화의 날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창전사 아저씨를 처음 만나러 갔을 때다. 건물 입구에 도착해 지하로 내려가기 전 계단 앞에서 잠깐 발걸음을 세웠다. 여러 가지 걱정이 들었다. 텅 비어 있으면 어쩌지, 외롭고 암울한 대화만 나누면 어쩌지, 어둡고 퀴퀴한 분위기면 어쩌지 하는 등의 잡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두 기우였다. 방탄소년단 포스터를 넘자 딸랑하고 종소리가 울렸다. 창전사 문을 여는 손님들을 환영하는 첫 번째 소리다. 곧바로 창전사 아저씨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두 번째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 이천 최고(最古)이자 유일한 만화방 창전사는 1983년부터 이천시 창전동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만화 가게다. 이천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만화방이면서, 현재 이천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만화방이다. 전국에 체인점이 늘어나고 있는 만화 카페의 모티브가 된 곳이기도 하다. 5천원짜리 만화책은 500원에, 7천원짜리 만화책은 700원에 볼 수 있다. 소설책은 1천원, 잠들면 2천원이다. 예전엔 한 권당 값이 매겨졌는데 이젠 손님의 선호도에 따라 여느 만화 카페처럼 시간제로도 볼 수 있다. 시대적 흐름을 따라 새롭게 생겨난 계산법이다. 과거 창전사는 이천고, 이천양정여중ㆍ고, 이천실업고(현 이천제일고) 학생들의 만남의 장이었다. PC방도, 오락실도 없던 시대에 놀러 갈 곳이라곤 만화방뿐이었을 시절이다. 학교가 끝나면 교복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와 너도나도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몸 다툼을 했더란다. 결국 오손도손 서로의 무릎에 앉아 책을 읽곤 했는데, 사실 보라는 책은 안 보고 슬쩍슬쩍 서로를 곁눈질했다는 걸 창전사 아저씨는 안다. 몇몇 학생들은 어른이 돼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자녀를 데리고 아빠가 어릴 때 다녔던 만화 가게야하는 남자도 있었고,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라며 편지를 전해준 여자도 있었다. 지금은 다들 50~60대가 됐다. 어휴, 옛날 생각나요. 어린 학생들이 그냥 창전사 아저씨, 창전사 아저씨~ 하고 불렀어요. 우리 가게가 워낙 오래돼서 그런지 가끔씩 다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죠. 그럴 때면 얼마나 고맙고 흐뭇한지 몰라요. 저 벽에 액자로 걸어놓은 그림도 예전에 한 여학생이 직접 그려서 갖다준 거에요. 마음이 참 예쁘죠, 저런 선물까지 주고. 옛날 생각이 정말 많이 나네요. 창전사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평일이건 주말이건 오전 8시30분~오후 9시 내내 불을 끄지 않는 이유가 이런 데 숨어 있었다. ■ 하루 평균 30명 방문하지만 온라인엔 밀릴 수밖에 예나 지금이나 인기가 많은 책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스테디셀러는 아무래도 슬램덩크, 드래곤볼, 열혈 강호, 더 파이팅 등이다. 현재까지도 찾는 손님이 꾸준해 손때가 자주 묻곤 한다. 예전엔 공포의 외인구단, 마제의 인기가 높았고, 최근에는 결말이 나온 하이큐를 찾는 사람도 많다. 그 만화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하는 그 만화책들이 모두 창전사에 있었다. 그렇게 하나 둘 모인 만화책이 총 10만 권에 달한다. 손님이 얼마나 와요?란 질문이 무색하게도, 창전사엔 계속 딸랑 소리가 울렸다. 요즘도 종이로 된 만화책을 보는 사람이 있을까 했는데, 정말 있었다. 심지어 생각보다 많았다. 창전사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게 6명의 손님이었을 정도다. 이후에도 2~3명이 들어와 제각각 떨어져 앉고는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창전사 아저씨 이근호 사장님(68)은 하루에 못해도 30명은 오지요, 주말엔 10명 정도가 더 많다고 해야 할까라며 쪼르르 차를 따랐다. 누군가는 잘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젠 거의 없다고 봐야죠. 예전에는 어느 정도 잘 된 게 아니고 잘 돼도 너무 잘 됐거든요. 우리 가게 옆, 뒤 200m 안쪽에만 만화방 3개가 생겼을 정도니까. 그런데 다 망했죠. 학생들은 컴퓨터 하러 가고, 만화 좋아하는 사람들은 휴대폰에서 찾아보고 그러잖아요.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본만화가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인터넷으로 보는 방법이 있나 봐요. 우리는 10권을 들여왔는데 손님들은 그거 11권 나왔어요, 이미 봤어요 하더라고요. 만화방은 그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지. ■ 사라진 총판, 책 가지러 서울까지인기 없는 책은 소각 그런데 어떻게 계속 운영하고 계신 거에요? 만화책 좋아하세요?하자 이근호 사장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만화책 안 좋아해요! 이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느릿하게 다음을 이어갔다. 근데 만화일지언정 책으로 학생들이 배우는 거 아니겠어요? 재미도 있지만 역사도 묻어 있죠. 37~38년 전에 일본하고 사이가 안 좋았을 때가 있어요. 그때 일본만화 걸어놓고 장사하면 걸린다고, 다 버리라고 할 때가 있었다고. 근데 장사하는 사람이 어디 그게 쉽나요? 밤에 트럭 한 대 준비해서 강원도 산속에 땅 파고 몽땅 감춰놨다가 이틀 뒤에 찾아오고 그랬죠. 또 한 번은 북한하고 사이가 안 좋을 때라 책마다 빨간 글씨가 있으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당시엔 군청이던 이천시청 앞에서 싹 거둬 태우고 그랬다고. 책이라는 게 그래요. 그런 모습들을 잊지 못하게 해요. 도란도란 창전사 아저씨와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손님들이 빠져나가 70여 개 좌석이 텅 비게 됐다. 새삼스레 포근하게 푹 꺼진 소파가, 빈 자장면 그릇이, 하이틴 코너 위 서태지와 아이들 브로마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한쪽 구석엔 누렇게 바랜 책들 수십 권이 쌓여 있었다. 조만간 처분될 책들이다. 창전사에는 매일 같이 신작이 들어오는 만큼 매일 같이 원래 있던 책들이 자리를 내주곤 한다. 총판이라고 하죠? 지금은 출판사라고 부르는데, 우리 지역을 담당하던 경기 남부 총판이 작년에 망해서 없어졌어요. 이제는 책을 사러 서울을 가거나 고양지역 총판에서 받아오죠. 여간 보통 일이 아니에요. 코로나19 때부터 부쩍 택배를 이용하고 있는데 편하고 좋더라고요. 근데 그렇게 가져오는 신작도 예전에 비하면 20%밖에 안 돼요. 80%가 사라졌어요. 그만큼 만화책을 만드는 곳도, 나르는 곳도 없어요.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거의 다 그냥 죽었다고 보죠. 우리 가게에 있는 만화책도 그래요. 누구 주려고 해도 산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아무도 찾지 않는 오래된 책들은 그냥 버립니다. ■ 만화방 명맥 유지만 돼도 더이상 바랄 것 없어 책들이 불태워지는 건 비단 창전사만의 얘기가 아니다. 1989년부터 30년 넘게 수원 북문을 지키고 있는 A만화방도 매일같이 책을 버리기 일쑤다. 말그대로 아무도 찾지 않아서다. 더욱이 그동안 A만화방에 책을 납품해주던 영화동 B총판이 이달 말부터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면서 신작을 들여올 수단마저 끊기게 됐다. 이제 만화방을 운영하면서 남은 일이라곤 남은 책을 처분하는 것밖에 없다. A만화방 대표(63)는 매일같이 그만둬야지 하면서도 정 때문에 하고 있다고 했다. 몇 명 남지 않았지만 단골손님들도 있고 그래도 이 만화방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고 가정도 지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이 많이 들었어요. 근데 B총판이 없어진다고 하니 책을 받을 데가 없어 막막하네요. B총판 직원도 더이상 책을 공급할 데가 없어서 그만둔다고 하던데, 그 얘길하면서 서로 눈시울을 붉히고 그랬어요. 내 삶을 영위했던 곳의 끝이 보인다고 하니 슬프죠. 제 아이들도 만화를 무척 좋아하는데 가게는 그만두라고 할 정도로 어려우니까요라고 말했다. 강산이 여러 번 변하는 세월 동안 만화방을 지속적으로 운영해 온 사장님들의 바람은 별것 없다. 커다란 수익을 기대하지도, 과거의 영광스런 부흥을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가족의 안녕과 만화방의 명맥 유지만 원했다. 만화책을 안 보는 만화방 아저씨의 마지막 말이 인상깊다. 이왕이면 젊은 사람이 새로운 기분으로 우리 가게를 운영해보겠다고 하면 좋겠어요. 전부 다 개조해도 좋아요. 그래도 만화방은 살아있는 거잖아요. 종이 만화책은 특유의 매력이 있어요. 휴대폰으로 갑갑하게 보는 것보다 훨씬 시원하게 즐길 수 있고, 페이지를 넘기는 맛도 있죠. 무엇보다 책 냄새가 나잖아요. 나도 그런 매력을 손님들에게 배웠거든. 이제 그런걸 다른 사람이 느껴도 좋다고 생각해요. 근데 아무도 없어도 괜찮아요. 장사가 안 되는 걸 누가 뭘 어찌하겠습니까. 어쨌든 만화방은 굴러갈 거에요. 그때의 저는 설봉산에서 새 모이나 챙겨주며 설봉산 새 아빠로 살 거고요. G-Story팀=이연우기자, 민경찬PD

[사라진 사람, 남겨진 마을] 역사 잇는 가문들, 진위면의 '대들보'

무심코 지나던 길목에 조선 건국의 역사가, 독립운동의 흔적이 묻어 있다. 2천년 평택 역사의 중심 진위면 이야기다. 과거 진위면은 근대도시의 중심지였다. 관아와 향교가 자리하고, 천도교ㆍ기독교가 일찍 수용돼 각종 문물이 빠르게 도입됐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신장동과 서정동 사거리 일대에 기지촌이 발달하면서 정치ㆍ경제ㆍ사회ㆍ교육 중심지가 점차 송탄으로 이동했다. 장기간 지역 문화를 선도해오던 진위면은 상공업이 뒤처지며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 지금은 벼와 채소 농사를 주산업으로 하는 ‘시골 마을’로 변모했다. 진위면에서는 지역 내 입지를 되찾기 위해 1980년대부터 많은 노력이 펼쳐졌다. 청호리에 LG전자 평택공장, 하북리ㆍ견산리ㆍ가곡리ㆍ신리에 홍원제지, 영풍제지, YKK한국 평택공장, 매일유업, 한국야쿠르트 평택공장, 롯데제과 등 150개가 넘는 기업체가 들어서며 마을이 커지는 듯했다. 최근에도 움직임이 활발하긴 마찬가지다. 진위4 일반산업단지가 조성 중임은 물론, 대규모 물류창고가 건립을 앞두고 있는 등 지역 재생을 위해 힘을 들인다. 다만 이 같은 노력에도 농촌지역 특성상 매년 인구가 감소하는 탓에 ‘중심지 탈환’이 마냥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진위면은 꼿꼿하게 유지되고 있다. 무엇보다 지역 고유의 색을 잃지 않으려는 토착민들의 역할이 크다. 무봉산 일대 안동권씨, 태봉산 일대 단양우씨 등 유력가문이 수백 년간 진위 땅에 정착하면서 민속문화와 전통을 보존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앞으로는 어떨까. 안타깝게도 진위면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 마을 안에서는 지역 문화가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그나마 자리를 지켜오던 유력가문들이 직장과 학교를 찾아 타향살이에 나서며 뿔뿔이 흩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G스토리팀은 평택시 진위면의 변천사를 짚어보며 지역 문화 계승을 위한 목소리를 들어봤다. [G-Story] 마을편 ③2천년 평택 역사의 중심... 전통체험도시 부활 꿈꾼다 학교 담장을 넘어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사리손으로 우산을 나눠쓴 아이들이 소나기 아래 하하호호 뛰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899년 세워진 이 학교, 120년이 넘는 전통의 평택 진위초등학교에서 마주한 모습이다. 과거 이 학교는 평택지역 3ㆍ1운동을 이끈 핵심지였다. 진위공립보통학교(당시 명칭)에서 학생 20명이 만세 시위를 벌이면서 독립운동에 불이 붙었다. 학생 시위를 기점으로 천도교도가 많았던 야막리에서 박창훈이 주도한 추가 시위가 전개됐고, 뒤이어 봉남리ㆍ은산리 시위로까지 확대됐다. 오늘날 진위초교 옆 진위면행정복지센터에는 이러한 역사를 기록하듯 ‘진위현청의 터이자 독립운동만세 자리’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진위면을 두고 “2천년 평택 역사의 중심” 또는 “평택지역의 혼이 서린 곳”이라 표현한다. ■유력가문 대대손손 집성촌 꾸려…풍부한 민속문화 고대부터 살펴보면 진위는 본래 마한과 백제의 영역이었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는 충청도 팽성읍이었다가 경기도 수원군이었다가, 끊임없이 행정구역이 변하곤 했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현재의 용인지역 일부와 합쳐지기도 했고 때로는 안성지역 일부를 아우르기도 했다. 유독 복잡하게 꼬인 고을인지라 품고 있는 역사도 상당하다. 2021년의 진위는 면적 34.02㎢ 규모로 총 1만1천360명이 거주한다. 그 안에는 ‘집성촌’이 많다. 무봉산 일대 경주이씨와 안동권씨, 태봉산과 덕암산 일대 단양우씨, 순흥안씨, 봉화정씨 등 토착세력이 유독 많은 마을이다. ‘여기 앞집’에는 이항복의 증손자인 이세필의 후손이, ‘저기 옆집’에는 고려말 학자 우현보의 후손이 사는 동네다. 해방 전후까지만 해도 마을마다 당제와 산신제, 정제(우물고사)를 지냈고 가신(家神)을 섬겼다고 한다. 공동노동조직 두레패를 운영하면서 지역민끼리 뭉치고, 정월 대보름에는 다 함께 줄다리기와 달집태우기도 하며 풍농을 기원했다고 알려졌다. 이처럼 풍부한 진위만의 민속문화가 특히 유명하다. ■정도전 후손의 마을, 은산리 주민 70% ‘봉화 정씨’ 진위를 대표하는 세력이 있다면 봉화 정가(家)를 빼놓을 수 없다. 짧게 조선의 이야기를 전한다. 1392년 조선이 건국하면서 이성계가 왕으로 추대됐다. 위화도 회군부터 정몽주 사망까지, 조선왕조가 세워지는 그 모든 과정에 신진사대부 정도전이 함께였다. ‘최초의 조선인’ 삼봉 정도전의 후손들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 정도전을 기억한다. 제례 문화가 축소되는 마당에, 아직도 동네 사람 모두 모여 매년 봄ㆍ가을 제사를 함께 지낼 정도다. 올해도 2월(춘향제)과 10월(추향제)에 제를 올렸다. 정도전 후손들이 모여 살며 제를 지내는 곳이 바로 여기 평택시 진위면이다. 특히 은산리 일대에 집성촌을 이뤘다. 동네 사람끼리는 산 아래 터를 잡았다는 뜻으로 ‘산대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인근 용인지역과 안성지역까지 5개가 넘는 행정리를 포함해 드넓은 땅 모두가 ‘산대’로 통칭된다. 산대마을 안에는 삼봉 선생을 기리는 사당(평택시 향토유적 제2호)과 기념관 등이 세워져 있는데, 조선경국전 등 정도전의 사상을 담은 삼봉집목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2호)도 보관 중이다. 후손들은 대략 1401~1405년부터 산대마을에 정착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덧 600여 년째다. 현재 은산리에 거주하는 주민 192명(98세대) 중 70%가량이 정도전 선생의 후손이다. 삼봉의 20대 후손 정병옥 은산1리 이장(67)도 수십 년째 이곳에 살고 있다. 이유는 별것 없다. 물이 맑고 공기가 좋고 선조가 일궈놓은 터전이 여기라는 것. 그걸 지키는 것이 후손의 도리라고 생각해 뿌리박고 있다는 것. 그뿐이다. 정 이장이 말했다. “현대화 물결 때문에 많이들 타지로 나갔죠. 진위에 기업체가 많으니 그만큼 외부인이 유입되기도 했고 세월이 흘러 세대가 교체되기도 했고… 많이 변했어요. 그래도 아직 60~70%가 봉화 정씨 사람들이니 삼봉 후손의 마을이 맞죠. 가장 융성했을 땐 6·25 동란 직후, 제가 태어났을 무렵인데 그땐 은산리만 5개 부락으로 나뉘어 400가구가 넘게 살았어요. 삼봉 후손들만 400가구요”. 그리고 덧붙였다. “우리 후손 외에도 전통가옥이나 디딜방아 등 문화적으로 살릴 게 많은 동네에요. 예전에 역사마을 조성을 추진했는데 몇몇 반대로 실패했죠. ‘누가 관리하느냐, 힘만 들게 뭐하러 하냐’는 이유로. 우리 지역은 다른 개발보다도 전통문화를 살리는 방향의 개발을 해야 합니다. 주민 자체만으론 안 돼요. 다들 나이도 들었고…. 관(官)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해요”. ■“진위 한옥 스테이ㆍ차(茶) 체험 등 ‘전통마을’ 됐으면” 진위면을 돌아다니며 가장 인상깊었던 말은 “서울 북촌 한옥마을, 전주 한옥마을처럼 우리도 진위만의 문화를 양성하자”는 것이다. 동천리 천년고찰 만기사에 있는 보물 제567호 평택만기사철조여래좌상, 봉남리에 있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0호 진위향교대성전. 이 외에도 이세필의 묘와 선도비, 경주이씨 상서공파 묘역과 영의정 이광좌의 묘, 안대홍 생가 등 진위면의 자랑이자 유산이 가득해 이를 알리자는 목소리다. 산대마을총회 총무이자 정도전의 21대 후손 정광섭씨(61)는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고민했다. “진위도 서울 북촌이나 전주처럼 전통마을이 되면 좋겠어요. ‘잘 살아보세’하던 옛 시절을 그리워만 할 게 아니라, 젊은 세대와 함께하면서 키울 방법을 모색해야 해요”. 그러면서 그는 강조했다. “은산리에 삼봉교육관과 기념관이 있듯, 진위 곳곳에 다른 문화적 아이콘을 심어야 합니다. 한옥 홈스테이, 전통 차 체험, 지역 내 야영 등 방법은 많아요. 활용할 수 있는 역사 콘텐츠가 많은 동네니까요. 문화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이 갖춰졌다는 소문이 나면 방문객도, 주민도 늘어날 거라 생각해요.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역사해설사의 설명도 듣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럼 역사 관련 일자리도 창출되겠죠. 서서히 지역의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데 경기도도 경기도만의 문화를 지키면 좋겠어요”. G-Story팀=이연우기자, 민경찬PD

[사라진 사람, 남겨진 마을] 기름진 평야 장호원… ‘규제 그림자’ 덮치다

수확기가 빠르고 식미(食味)가 좋아 구한말에는 왕의 진상품이 됐다. 이천대관(1955)에 나오는 이천시 장호원읍의 진상미 이야기다. 이천은 예로부터 쌀의 도시로 알려졌다. 남한강 지류인 청미천 안에 자리 잡은 장호원 마을이 특히 유명했다. 장호원은 강 유역을 따라 곡저평야가 발달하고 곡창지대로서의 자연적 조건을 모두 갖춘 곳으로 농사가 번영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한때는 사통팔달의 핵심이기도 했다. 서울ㆍ충주ㆍ부산을 잇는 국도와 평택ㆍ제천ㆍ영월을 잇는 동서횡단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가 바로 이곳 장호원이었다. 경기도 최동남단에 위치해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과 도계를 이루는 접경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장호원의 성장이 멈춰 섰다. 원주민들은 외지로 떠나고 출생률은 늘지 않으면서 인구가 빠르게 줄기 시작했다. 주된 원인은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른 지역 발전 규제다. 현행법상 자연보전권역으로 분류된 탓에 대학교도, 공장도 세울 수 없어 발전 동력을 잃은 것이다. 옆 동네 감곡이 역세권 개발을 추진하며 날로 발전하는 것과 달리 장호원은 미곡ㆍ과수 농사만 한다. 음성은 비수도권, 이천은 수도권이라서다. 5년마다 재검토할 수 있는 수도권정비계획도 수십 년째 그대로다. 장호원은 규제를 풀어 지역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외친다. 평일엔 회사로 출근하고, 주말엔 논ㆍ밭일을 하는 농사의 부업화를 주장한다. 수도권의 그림자인 이천시 장호원읍을 찾아갔다. [G-Story] 마을편 ②법 없이도 사는 동네, 법 때문에 우는 동네: 이천시 장호원읍 수정법에 꽁꽁 묶여 농사 외엔 비전 없어요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9월의 어느 노을녘. 흙 묻은 바짓단 한쪽을 무릎까지 걷고 머리엔 보자기를 뒤집어쓴 까무잡잡한 김씨 어머니를 따라갔다. 이 동네, 어떤 동네인지 알고 싶어서요라는 말에 김씨 어머니는 별 희한한 아가씨 다 있네 하곤 잰걸음으로 앞장섰다. 꽉 찬 사과 박스를 들고 40m쯤 발길을 옮겼을까. 정미소 근처 돌담에서 미리 김씨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어머니 3명을 만났다. 누구유?를 시작으로 그들과 희한한 아가씨의 대화가 이어졌다. 한창 자기소개를 하고 잡담을 나누다가 장호원이 경기도 동남쪽 끝이라면서요. 다리 하나만 건너면 충북이라던데 하니 순간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어머니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이내 큰 목소리로 깔깔거렸다. 여기가 그 충북이여. ■ 걸어서 2분 경기도와 충청북도 사이에 있는 마을 경기도 최동남단에 위치한 이천시 장호원읍은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과 도계(道界)를 이룬다. 청미천 위 장호원교를 기준으로 한 곳은 경기도, 한 곳은 충청도다. 직선거리로 200m 남짓, 도보로 2분 정도만 걸으면 지역이 바뀌는 동네다. 현재 이천 장호원읍에는 송산리, 풍계리, 진암리 등 52개 행정리가 있고 1만4천69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들 주민 셋 중 하나는 미곡이나 과수 등 1차 산업 위주의 농산물을 주 소득원으로 한다. 장호원읍 내 6천586세대 중 1천838세대(28%)가 농가이고, 면적 60.36㎢의 절반 이상이 농경지(23.84%)와 임야(23.41%)일 정도다. 토지가 비옥하고 흉풍을 타지 않는 고장이라던 장호원답게 농사가 번영하는 데에는 지리적 여건이 큰 몫을 차지한다. 청미천 물길을 따라가면 여주강을 거쳐 한강이 나오는 데다가, 1904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사통팔달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덕에 옛날옛적부터 수량이 많고 곡식의 산출이 많은 지역으로 불리곤 했다. 오늘날 이천 쌀과 복숭아 등이 유명한 것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 자연보전권역 이천시 수도권 규제 발 묶였다 장호원이 농사하기 좋은 환경이라 농사만 하느냐. 그건 아니다. 사실상 농사 말고는 다른 먹을거리를 찾기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농사를 해야만 한다. 젊은 직장인들은 기업을 찾아 서울이나 청주로 장거리 출퇴근에 나서고, 자라나는 아이들은 학교를 찾아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간다. 이러한 문제의 중심엔 수도권정비계획법이 있다. 1982년 제정된 수도권정비계획법은 서울, 인천, 경기도에 과도하게 집중된 인구와 산업을 적절하게 배치하기 위해 탄생했다. 주택 및 토지, 교통, 교육 등 각종 항목을 마냥 개발할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에서 조절하거나 통제해야 한다는 목적을 품었다. 이 법에 따라 수도권에서 수립하는 모든 토지이용계획은 수도권정비계획에 부합하게 수립돼야 한다. 수도권정비계획은 5년마다 재검토하고 필요한 경우 변경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으나, 현실은 수십 년간 크게 달라지지 못했다. 수도권 사람과 비수도권 사람의 마찰 탓에 개정안이 숱하게 발의됐다가, 폐지되길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금의 수도권은 과밀억제권역, 성장관리권역, 자연보전권역으로 나뉘고 있다. 경기도로 한정해보면 수원시ㆍ성남시 ㆍ고양시 등이 과밀억제권역이고, 평택시ㆍ안산시ㆍ오산시 등이 성장관리권역이다. 가평군ㆍ양평군 등과 함께 이천시는 자연보전권역으로 분류된다. 장호원 역시 자연보전권역에 해당해 수도권정비계획법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긴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 대학ㆍ산단 키우는 감곡, 역차별 호소하는 장호원 오랜 시간 지역민들은 장호원을 규제 대상에서 풀어달라 주장했다. 옆 동네인 감곡면은 비수도권이라 대학교와 대규모 공장이 속속 들어서고 있는데 장호원은 그렇지 못해 역차별이라는 이유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감곡면에는 강동대학교ㆍ극동대학교와 같은 학교는 물론 상우산업단지ㆍ이테크(e-Tech)산업단지 등 기업체들이 조성되거나 조성되고 있다. 특히 음성군이 충북혁신도시를 발판 삼아 2030 음성시(市) 승격을 목표로 총력전을 펴고 있는 만큼, 감곡면 역세권 개발 사업도 추진하면서 양 지역 간 격차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장호원의 질투 어린 볼멘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감곡면은 장호원보다 큰 동네일까. 그것도 아니다. 감곡면에는 지난해 6월 기준 9천912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행정리는 40개다. 장호원보다 인구 5천 명가량이 적은데 기반시설 여건은 한결 나은 셈이다. 면적은 감곡면(69.4㎢)이 장호원보다 큰 편이지만 농경지가 13.5%, 임야가 41.1%로 토지 구성은 얼추 비슷하다. 장호원은 감곡이 성장해선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감곡처럼만이라도 규제를 풀어달라고 말하고 있다. ■ 읍 승격 80주년수도권 규제 풀고 희망 찾아야 한숨이 날로 깊어지는 장호원은 올해 읍으로 승격한 지 80주년을 맞았다. 민선 7기 엄태준 이천시장은 변변한 문화시설과 스포츠센터조차 없던 장호원을 살리기 위해 300억원을 들여 복합문화스포츠센터를 건립하기로 했다. 동시에 장호원의 재도약을 위해 수도권정비계획법과 같은 규제가 풀어져야 한다고 한층 강조한다. 물론 지역 내에서도 그간의 경험을 통해 법 개정 등 급격한 변화가 어렵다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지역 발전 차원에서 행정ㆍ재원적 지원을 보태기 위해 정부와 광역지자체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에요. 먹고살 희망이 있어야 사람들이 터전을 꾸리러 올 텐데 지금은 농사 말고는 없으니까 (안 오죠). 충청남도 천안과 맞닿아있는 평택시하고는 상황이 달라요. 거긴 경기 남부지역이라 이런저런 기업이라도 많지, 장호원은 아니에요. 김경중 이천시 장호원읍장은 말했다. 그러면서도 끝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자연부락의 삶이 망가지면 다른 곳에도 여파가 가서 공생이 힘들어져요. 규제를 푼다고 수도권이 무조건 잘 살게 되는 게 아니에요, 동네와 마을을 살리는 건 지자체의 몫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할 테니 규제를 풀어달라고 하는 거죠. 여기 사람들 정말 좋아요. 법 없이도 사는 동네에요. 기반만 갖춰주면 죽음의 도시를 벗어나 활기찬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겁니다. G-Story팀=이연우기자, 민경찬PD

[사라진 사람, 남겨진 마을] 세월 품은 마을… 삶의 이야기 흐른다

동서고금에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구전부터, 퇴적ㆍ풍화를 거쳐 기록된 문헌까지 다양한 역사가 사시사철 숨을 쉰다. 지금 경기도엔 어떤 이야기가 남고, 또 사라졌을까. 경기일보 이연우 기자와 민경찬 PD가 시나브로 잊히는 우리네 이야기를 찾아 글과 영상으로 전한다. G스토리팀의 첫 번째 테마는 마을이다. 사람들은 집단을 이뤄 산다. 촌락 안에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를 구축한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땅 경기도엔 그만큼 다양한 생활상이 모여 있다. 하지만 어느 마을은 시대를 좇고, 어느 마을은 시대에 쫓긴다. 인구 수에 따라 차이가 크다. 대도시, 신도시가 아닌 관심 밖 소규모 마을을 찾아봤다. 지난해 기준 경기도에서 가장 적은 사람이 사는 곳은 연천군 중면이다. 경기도 최북단인 이 지역의 총 인구는 191명에 불과하다. 다음은 포천시 군내면(516명)이다. 이어 연천군 장남면(717명), 왕징면(965명) 인구가 네자릿수 이하로 3, 4위다. 최근 20년간 인구 감소 추이를 분석해 봤다. 인구가 가장 많이 줄어든 곳은 남양주시 진건읍이다. 2000년도 총 인구 수가 3만132명에 달했던 진건읍은 2020년 2만3천891명으로 6천여 명 이상 감소, 1년에 평균적으로 312명이 마을을 떠났다. 파주시 법원읍도 같은 시기 인구가 1만4천823명에서 1만1천99명(-3천724명)으로 줄었다. 평택시 진위면은 20년 전 1만4천929명 인구 중 3천354명이 빠져 이제는 1만1천575명만이 머문다. 진위면은 경기 남부지역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크게 준 지역이다. 뒤이어 포천시 영북면(-2천488명), 연천군 신서면(-1천960명), 이천시 장호원읍(-1천710명) 등 순이다. 수많은 마을 중 G스토리팀은 포천시 관인면을 찾았다. 궁예의 폭정에 지쳐 관직을 내놓은 관리들이 모여 만든 곳으로, 남북분계선보다 더 위에 있었다. 1만여 명이 거주했던 인구가 이젠 2천여 명만 남았다. 사람은 떠났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이야기가 남은 관인면으로출발했다. [G-Story] 마을편 ①텅 빈 골목, 황혼에 물든 시간: 포천시 관인면 2021년 여름의 끝자락, 북쪽을 향한다. 38선을 지나 강원도 철원군청보다 위에 있는 포천시 관인면에 도착한다. 과거 관인은 너그러운(寬) 사람(人)이 있는 동네라는 뜻이었다. 후삼국시대 궁예가 태봉국(901~918년)을 세웠을 때, 그의 폭정과 신정 정치에 못 이겨 관직을 버린 관리들이 모여 이룬 마을이라는 의미다. 조선 정조시대 이후로 지명 속 한자가 벼슬 관, 어질 인(官仁)으로 바뀌었지만 뜻은 여전히 동일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예로부터 관인면은 무수한 곡식이 자라는 풍요로운 땅으로 정평이 났다. 625 당시엔 치열한 고지전이 펼쳐진 중심지다. 이북지역으로 북한의 통치를 받던 중 휴전이 시작되면서 남한에 수복됐다. 관인 땅을 놓친 김일성은 원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보름간 통곡했다는 설이 알음알음 전해진다. ■ 전쟁 모습 지우려는 계획도시관인 르네상스 반짝 1960년대 들어 대한민국의 전후(戰後)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탄생한 계획도시가 바로 이곳 관인면이다. 연천군에 속해있다가 시가지를 중심으로 지역이 발전하면서 1983년 2월께 포천시(당시 포천군)에 편입됐다. 미군 40사단(일명 썬버스트ㆍSunburst)이 주둔하던 당시 관인면은 늘 북적거리고 시끄러웠다. 1만 명이 훌쩍 넘는 인구가 해가 뜨나 달이 뜨나 도시를 지켰다. 낮에는 탄동리 관인중ㆍ고등학교에서 주민 체육대회가 열렸고, 밤에는 초과리 오리나무 아래에서 막걸리 한 잔을 즐기던 영화의 시대였다. 매월 2일과 7일 관인버스터미널 일대에서 펼쳐진 5일장엔 포천 주민은 물론이고 연천, 철원 사람들까지 장사진을 쳐 말 그대로 호황을 누렸던 곳, 여기 관인면이다. 30여 년간 이 땅의 변천사를 몸소 보고 들은 조관형 관인면장은 반가운 옛 추억을 떠올렸다. 예전 관인면은 뉴타운(New Town)으로 굉장히 잘 사는 동네였어요. 농사가 번영하고, 철광이 유명하고, 한탄강이 가까워 인구가 유입될 수밖에 없는 도시였죠. 제가 다니던 국민학교도 전교생이 1천 명은 됐을 거에요. 1개 리(里)에만 5~6개의 학교가 있었으니까, 지금은 많아야 2개쯤인데. 아무튼 그때는 정말 잘 살았어요. 한 학교 한 반에 학생이 60~70명씩 꽉 차고 그랬으니까요. 인심도 넉넉했죠. 옆집에 가서 밥도 그냥 얻어먹고. 여학생은 고무줄놀이, 남학생은 총싸움 놀이하면서 함께 어울리는 놀이 문화도 활발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외지인에 벽치고 컴퓨터만 하는 시대잖아요. 그때는 그랬어요. ■ 1년에 2명 태어나는 마을 마지막 택시기사떠나다 잔잔한 바람이 불고 느린 시간이 흐르는 오늘날의 관인면에는 중리, 냉정리, 삼율리 등 11개 마을이 있다. 정확히는 11개 마을만 있다. 지역경제를 이끄는 대기업도, 주민 건강을 보살피는 병ㆍ의원도 단 한 곳 없다. 지난해까지 마을에 존재했던 유일무이한 택시도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택시기사의 건강 악화로 운행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관인 주민들은 급한 일이 생길 경우 연천이나 철원에 택시를 보내달라며 SOS를 요청하곤 하는데 손님이 많아 30분 뒤에 출발할게요, 이동시간이 꽤 걸리니 기다리세요 등 회신을 받기 일쑤다. 여유로워도 너무 여유로운 동네가 돼버린 셈이다. 관인면이 이처럼 조용해진 가장 큰 배경에는 인구 소멸이 있다. 군부대가 빠지면서 가족 단위 주민이 대폭 줄어든 데다가, 튼튼한 교육 시설이 부족해 청장년의 이탈마저 크게 늘었다. 더욱이 주변 신도시 발달로 주거ㆍ상업지가 이동하면서 마을 자체가 개점휴업 상태가 된 지 오래다. 불과 지난 1월까지만 해도 관인면엔 2천797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중 1천45명(37.3%)이 65세 이상 고령자였으며, 대부분 토착민이었다. 그런데 7개월여 흐른 현재, 주민 수는 2천745명으로 줄었다. 반년 사이 50명이 넘게 어딘가로 떠나면서 빠르게 인구가 감소했다. 아이 울음소리를 듣기도 어렵다. 올 한해 관인면에 출생신고를 한 신생아 수 역시 1명에 그친다. 평균적으로 한 해에 태어나는 아이는 2명이지만, 마을을 떠나는 인구는 88명에 달한다. 반세기 넘게 물리적 성장이 멈춘 초고령 도시라 일컬어지는 이유가 이 부분들에 있다. ■ 40년차 새댁, 사는 사람만 사는 동네 냉정리에 다다르면 비료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근처엔 목장과 쌀 가공센터 등이 있고 드넓은 평야가 자리한다. 풍광을 즐기는 동안 축축한 흙길 위에서 덜컹덜컹 트랙터를 몰던 새댁을 만났다. 주름진 손으로 이마 위 땀방울을 닦던 그에게 냉정리가 어떤 동네인지 묻자 나는 시집온 지 얼마 안 된 타지인이라 잘 몰러. 저 빨간 지붕 밑에 초록 벽돌 밑에 검은 처마 집 보이지? 거기 아저씨가 잘 알어, 저기에 물어봐라며 손짓하곤 멋쩍게 피했다. 그가 냉정리에 산 지는 올해로 40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동네의 새댁으로 불린단다. 그는 아직도 나는 신혼이랴, 막내라고 일만 시키구 앉았네 하며 크게 웃었다. 이윽고 새댁의 말을 따라 검은 처마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골목 안 하나하나의 주택 마당에서 낯선 사람을 본 개들이 공격적으로 짖어댔다. 한바탕 소란에 슬리퍼를 신고 밖을 나온 박영섭 할아버지(75)는 문득 우두커니 서서 처음 보는 얼굴이라 궁금해서 나와봤어라며 동그랗게 눈을 떴다. 모처럼 말벗을 발견한 박 어르신은 이 동네는 말도 못하게 잘 살았지. 벼농사가 잘돼 쌀이 맛있고, 인심도 좋고, 뭐 부족한 게 없었어. 면사무소 옆에 학교 가봤나? 옛날엔 그 학교에서 체육대회를 했다고. 사람이 어찌나 몰렸는지 발 디딜 틈이 없었어. 여기 동네 사람들은 다 알지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근데 이제는 누가 이런 시골에 오겠어. 사는 사람만 살어. 농사도 농협에 맡기고, 내 땅 내가 농사하는 사람도 적지. 누가 돈 주고 농사 좀 같이 해요 부탁이나 해야 임대경작 하는 거야라고 전했다. ■ 인구 감소는 시대적 흐름발전 고민 따라 활성화 여부 달려 그렇다고 관인면이 어두 컴컴 몰락하는 마을은 아니다. 도시재생을 위한 벽화 개선, 추억 향유를 위한 옛 사진 전시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필두로 농촌 개량 사업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동네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할만한 요소도 곳곳에 많다. 한국 여자 프로골프의 대모이자 선구자인 구옥희 골퍼가 관인면 출신이고,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오리나무 중 가장 오래된 노거수(수령 230년의 초과리 오리나무ㆍ2019년 천연기념물 지정)를 품기도 했다. 특히 울음산으로 불리던 명성산과의 연이 인상 깊다. 왕쟁이나루와 말등소의 이야기다. 왕쟁이나루는 궁예가 왕건에게 패해 도주하다가 한탄강을 넘은 곳이다. 이곳 화강암 바위에 말발굽보다 큰 흔적이 하나 있는데,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며 말을 타고 가다가 상처를 낸 것이라는 설이 돈다. 말과 함께 잠시 쉬어간 곳이 말등소로 불리면서 일명 말등소 전설이 됐다. 구전설화로 궁예가 자주 등장하고, 기라성 같은 의병장이 배출되고, 베이비붐이 조성되면서 인구 1만3천명이 넘었던 곳.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품격있는 이름의 동네가 있을까요. 7대째 관인면에 사는 이우형 현강역사문화연구소장(57)은 되뇌었다. 수복 이후 미군이 설계한 중심공간 안에 인구가 급속하게 빨려 들어왔죠. 경제가 화랑을 누렸고, 접경지역이라는 특수성까지 더했습니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넘어가는 생활환경의 변화와 급격한 인구 감소가 매치되면서 지역사회 공동체가 점점 어둠의 방향으로 가고 있죠. 어쩌겠어요, 인구 감소는 시대적 흐름인데. 그럼에도 마냥 비관적이진 않다. 무한한 잠재가치가 있어 우리가 시야를 좀 넓히면 지금보단 나아질 거에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삶의 터전이잖아요, 소중한 사람들의 공간이고. 고민의 질에 따라 지역이 어떻게 활성화할지 달려있습니다. 정부와 지자체도 노력하고 있고요. 언젠가 통일이 되면 경기도 최북단 지역들이 또다시 발전하는 기회가 우선적으로 주어지지 않겠어요? G-Story팀= 이연우기자, 민경찬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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