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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옛길을 걷다]③ 바람소리, 풍경소리에... 절로 힐링

경기옛길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화재가 '절'이다. 경기옛길 위에 자리한 절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하나씩 품고 있다. 정조의 불심과 효심을 담은 사찰,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된 뒤 다시 방문했다는 사찰, 고려 선종의 아들 한산후를 탄생시킨 쌍미륵이 있다는 사찰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깊은 산 속 절들이 우리에게 또 어떤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줄 지 경기옛길에 올라 귀 기울여봤다. ■ 정조의 불심과 효심이 담긴 용주사 쏟아지는 햇빛에 연신 땀이 흐르던 지난달 26일 오전, 수원시 권선구 평리동의 배양교를 지나 화성의 대표적인 사찰인 용주사에 도착했다. 화성시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용주사이지만 경기옛길 삼남길 제6길 화성효행길 탐방 중에 만난 용주사는 새롭게 다가왔다. 용주사에 들어서기 전 도롯가에는 커다란 삼남길 지도가 세워져 있었다. 특히 삼남길이 '서울 숭례문에서 시작해 해남 땅끝 마을까지 1천리에 이르는 한반도의 동맥과 같은 길'이라는 설명이 흥미로웠다. 지도를 둘러본 뒤 용주사의 입구인 사천왕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삼문에 다다르자 귀여운 보살 캐릭터가 우리를 반겼다. 지금의 용주사가 있기 전 이 자리에는 854년(신라 문성왕 16년)에 세운 갈양사가 있었다. 하지만 952년 병란으로 소실되고, 이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살피기 위해 용주사를 세웠다. 그의 지극한 효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와 함께 용주사와 인연이 된 인물은 또 있는데, 바로 '승무'의 조지훈 시인이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라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시를 지은 인물이다. 조지훈 시인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혜화전문학교 재학 중 우연히 용주사에서 승무를 보고 이를 시로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이유로 용주사 경내에 들어서면 조지훈 시인의 '승무' 시비를 볼 수 있다. 용주사를 나와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화산저수지를 거쳐 세마교에 도착한다. 시간은 약 50분 가량 소요된다. 화성효행길을 포함한 경기옛길 삼남길은 총 99.6km에 이르며, 서울을 기점으로 과천, 안양, 의왕, 수원, 화성, 오산, 평택으로 이어진다. ■ 용이 되돌아온 절, 회룡사 망월사역 3번 출구에서 약 40분 정도 걸으면 회룡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한다. 회룡사는 경흥길의 첫 관문인 제1길 사패산길을 걷다보면 만날 수 있는 절이다. 삼삼오오 다니는 등산객들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어느새 회룡사 입구에 도착한다. 최근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계곡에는 시원한 물소리가 가득했다. 울창한 숲에 들어와 힘차게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절로 힐링이 되는 듯했다. 이윽고 회룡사 입구로 들어서자 사찰 특유의 웅장한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한 켠에는 회룡사의 연혁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등산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회룡사는 본래 681년(신문왕 1년) 의상이 창건해 법성사(法性寺)라고 불렀다. 그러다 1384년 왕이 되기 전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이 절에 와서 기도를 드렸고 이후 동북병마사가 돼 요동으로 출전했다. 위화도회군을 성공시킨 이성계는 훗날 조선의 왕이 됐고, 다시 이곳으로 찾아온 일로 절 이름을 '회룡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설에는 1403년 태조가 함흥차사들의 끈질긴 노력에 노여움을 풀고 귀경해 무학대사를 찾아왔고, 무학은 회란용가(回鸞龍駕)를 기뻐해 회룡사라 불렀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회룡사를 나와 경기옛길 코스로 복귀해 약 1시간 정도 걸으면 의정부시청에 도착한다. 그리고 의정부 역에 이르러 사패산길은 끝이 난다. 사패산길이 포함된 경흥길은 총 89.2km로, 의정부시와 포천시를 아우른다. ■ 쌍미륵을 만날 수 있는 용암사 의주길 쌍미륵길에는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그 중 한 곳인 용암사에 도착해 주차장에서 입구로 향하는 계단에서 스탬프함을 발견했다. 바닥에는 의주길 서울 방향과 의주 방향을 스티커로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제법 높은 계단을 힘겹게 올라 입구에 도착했다. 다시 경사진 오르막길을 올라 경내에 들어섰지만 용암사의 보물인 용미리마애이불입상(쌍미륵)은 찾지 못했다. 마침 한 스님의 안내를 받아 안쪽 계단을 올랐고 드디어 쌍미륵을 만날 수 있었다. 최근 폭우로 인해 발판 아래가 무너져 위험해 보였지만 쌍미륵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용암사는 이 쌍미륵 덕분에 '쌍석불사'라고도 알려져 있다. 구전에 따르면 고려 선종(1084~1094년)의 후궁인 원신궁주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하기 위해 불상을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어느 날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며 사라졌고, 이에 선종은 즉시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해 불공을 드려 왕자 한산후를 얻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쌍미륵 중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고 한다. 용암사에 이어 쌍미륵길의 다음 목적지는 고려시대의 명장 윤관장군의 묘다. 이어 신산리 버스정류장까지 다다르면 총 14km의 여정이 끝난다. 제3길인 쌍미륵길을 포함해 제1길 벽제관길, 제2길 고양관청길, 제4길 파주고을길, 제5길 임진나루길까지 고양시와 파주시에 걸쳐 총 56.4km에 이르는 의주길은 아직도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가득 품은 채 옛길러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글·사진=장영준기자 / 영상촬영=곽민규PD

[경기옛길을 걷다]② 임금님 이야기 품고... 조선 500년 역사를 거닐다

경기옛길을 걷다 보면 다양한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 의외의 장소에서 뜻밖의 유물 또는 유적을 만나는 재미가 남다르다. 가까이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고 간신히 그 흔적만 남기고 있는 것도 있다. 그 중에는 조선시대 왕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들이 있다.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다. 알면 알수록 재밌는 조선시대 왕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경기옛길에 올랐다. ■ 정조로부터 당상의 품계를 받은 우물 거센 폭우가 물러간 뒤 찾아온 무더위에 연신 땀을 흘려보내던 지난 16일 오후 과천시 관문동. 경기옛길 탐방의 첫 목적지로 삼은 온온사에 도착했다. 마침 내부에서는 제초작업이 한창이어서 윙윙거리는 제초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내부로 들어서자 아담한 온온사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카메라에 온온사의 모습을 담은 뒤 한 켠에 자리한 경기옛길 스탬프함을 발견했다. 아직 많은 이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안에는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스탬프북이 쌓여 있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100호인 온온사는 이름만 들으면 얼핏 절로 오해하기 쉽지만, 조선시대 인조 27년(1649년)에 지어진 객사다.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은 곳인 동시에 외국의 사진이나 관리들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특히 고을 수령이 일을 하는 동헌보다 더 지위가 높아 고을의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다. 온온사는 정조가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머물며 붙여준 이름이다. '경치가 아름답고 몸이 편안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온온사를 벗어나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갈현동에 위치한 가자우물이다. 정확한 위치를 몰라 우물을 찾으려 골목 안까지 들어갔다가 한 동네 주민으로부터 초입에 위치해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발길을 돌려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모르고 지나치면 이곳이 가자우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이곳은 정조가 현륭원 능행길에 심한 갈증을 느끼다 우연히 이 우물의 물을 마시고 물맛이 좋다하여 당상 품계의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즉, 가자우물이라는 이름은 임금이 가자(정3품 이상의 품계)를 내린 우물이라는 데서 유래됐다. ■ 태조의 근심을 없애준 그곳 평해길 제1길인 망우왕숙길은 딸기원에서 시작한다. 망우리공원 입구에 다다를 즈음 어느새 서울과 경기도 구리의 경계에 위치하게 된다. 고개를 넘어가는 길목에는 이곳이 경계임을 알리는 해태상이 위치해 있다. 공원 안쪽으로 들어서면 걷기 좋은 둘레길이 펼쳐진다. 코스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곳이 망우왕숙길임을 알 수 있도록 비치된 경기옛길 표지판도 눈에 띄었다. 망우리고개는 태조 이성계와 인연이 있다. 태조는 한강에 도읍을 정하고 훗날 자신이 묻힐 묏자리를 무학대사로 하여금 알아보게 했다. 그리고 결정된 곳이 바로 양주의 검암산 기슭인 지금의 건원릉이다. 태조는 이곳을 직접 둘러보고 돌아가던 길에 이 고개에 이르러 다시 돌아보면서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겠노라"라고 말해 망우리고개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한강이 길게 뻗어있는 왕숙천이다. 왕숙천(王宿川)은 포천시 소흘읍에서 발원해 남양주시와 구리시의 경계를 흐르다 한강 본류에 합류하는 한강의 제1지류다. 잘 닦인 자전거 도로는 라이더들의 필수 코스다. 햇빛이 따갑게 내리쬐던 이날도 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많았다. 오가는 자전거를 피해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합수머리 세월교로 향했다. 지도상에서는 가까워보였지만, 막상 걸어보니 한참이나 걸렸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스탬프함을 발견한 순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왕숙천은 '왕이 유숙한 하천'이라는 뜻이다. 태조가 상왕으로 있을 때 함흥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양주시 진접읍에 머물며 여덟 밤을 유숙한 데서 비롯됐다. 또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마을 이름이 팔야리(八野里)가 되기도 했다. 이 밖에 세조를 광릉에 안장한 후 '선왕(先王)이 길이 잠들다'라는 뜻에서 왕숙천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 의미가 달랐던 연산군의 금표비 벽제관지를 시작으로 7.3km에 이르는 의주길 제2길 고양관청길을 걷다보면 고읍마을로 향하는 길목에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 비석이 바로 '연산군시대 금표비'다. 경기도문화재자료 제88호인 연산군시대 금표비는 조선의 10대 왕인 연산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본래 '금표비'는 왕실에서 사냥과 군사 훈련 등의 목적으로 출입 금지 구역을 설정한 뒤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세우던 비이다. 하지만 연산군은 금표 구역을 유흥과 향락의 장소로 변질시켰다. 1984년경 고양시 대자동에 위치한 금천군(錦川君) 이변(李抃)의 묘역을 재정비하다가 발굴됐다. 비신(碑身, 글씨를 새기는 부분)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본래 지붕돌도 있었으나 거의 파손됐고 지금은 연잎 문양만 일부 남아 있다. 받침돌은 새로운 석재로 보충했다. 비신에는 '금표 안 쪽으로 침범해 들어온 자는 왕명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고 처벌하겠다'라고 새겨져 있다. 연산군시대 금표비를 뒤로 하고 다시 걷다보면 용미3리에서 고양관청길이 끝난다. 그리고 다시 14km에 이르는 제3길 쌍미륵길이 이어진다. 그 다음에는 제4길 파주고을길(12.4km), 제5길 임진나루길(13.8km)이 기다리고 있다. 고양과 파주에 걸쳐 총 57km에 이르는 경기옛길 의주길은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서 끝이 난다. 글·사진=장영준기자 / 영상촬영=곽민규PD

[경기옛길을 걷다]① 희망 담아 ‘자유’ 새겼지만…절망 닿아 ‘고통’ 남았네

길은 가장 확실한 인간의 흔적이다. 자주 다녀 흔적이 된 길이 있고,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길이 있다. 셀 수 없는 이들이 오간 그 길은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아직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가 한 가득인 그 길은 우리 가까이 존재한다. 특히 조선시대 한양과 지방을 이어주는 관문 역할을 했던 경기도에 많다. 지금은 ‘경기옛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 길들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까. 경기옛길을 걸으며 길 위에 새겨진 이야기들을 연재해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 희미하게 남은 수인선 철도의 흔적 낮 기온이 30도에 육박하던 지난 7월의 어느 날,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의 중고차 매매단지로 핸들을 돌렸다. 도로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발걸음을 옮겨 정갈하게 포장된 산책로 위에 발을 디디자 곧게 뻗은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간단하게 촬영을 마치고 1분가량 걸어 들어가자 서호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가 눈에 띄었다. 무심코 지나칠 뻔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의 정체가 ‘옛 수인선 철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철로를 나무로 덮어 다리로 만들었지만, 철길 자체를 드러내 이곳이 수인선 철로였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었다. 옛 수인선 철로는 경기옛길 삼남길의 다섯 번째 구간인 중복들길 위에 있다. 과거 수원과 인천을 이어주던 이 철도는 1937년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 소유의 사립 철도로 세워졌다. 일제 치하에 있던 당시 산미 증산 계획에 따라 조선의 곡식이 일본으로 대량 반출될 때 이 수인선이 사용됐다. 즉, 수인선은 일제에 의한 가혹한 수탈과 궁핍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수인선은 1977년 수원-인천 간 산업도로가 개통하면서 그 쓰임새가 줄었고, 1995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운행을 중단했다. 철로는 폐쇄됐고, 철길의 모습도 자취를 감췄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그 위를 지나고 있었다. 다리 입구에는 이 길 이름이 삼남길이라는 것과 모수길, 수원둘레길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수인선에 대한 설명이 적힌 녹슨 스토리보드가 이 길의 과거를 설명하고 있었다. ■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북한강변을 따라 두물머리나루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두물머리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배다리 입구에 자리한 경기옛길 스탬프함에서 도장을 찍고 공원으로 향했다. 평일임에도 방문객들이 많았다. 가장 눈에 띈 건 곳곳에 걸린 핫도그 판매 간판이었다. 과거 한 예능 프로그램에 두물머리 핫도그가 맛있다는 내용이 방송되면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 두물머리의 멋진 광경보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보다 핫도그가 더 유명하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이 모인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양수리이다. 공원 중앙에는 두물머리 나루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를 통해 이곳이 과거 나루터였음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광주를 오가던 나룻배가 있었고, 나루 근처에는 객줏집·술집 등이 즐비했다. 또한 이곳에는 수령이 500년이 넘는 ‘도당 할아버지’라는 느티나무가 1982년 보호수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원래 그 옆에는 ‘도당 할머니’ 느티나무도 있었지만, 1968년 5월 팔당댐이 착공되면서 1970년대 해당 구역이 수몰돼 자취를 감췄다. 나루터의 역사적 배경이나 도당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설화를 알지 못해도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두물머리를 찾고 있다. 한가로이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커플들, 그리고 조용히 사색에 잠겨 여유를 즐기는 이들까지 각자만의 방식대로 두물머리를 즐기고 있었다. ■ 임진강의 남과 북을 잇던 자유의 다리 임진강역에서 의주길 제5길 임진나루길을 따라 걸으니 임진각관광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멀리 민통선을 왔다갔다 하는 곤돌라도 보였다. 다소 까다로워 보이는 탑승절차에 곤돌라 탑승은 다음을 기약하고 임진각 광장에 올랐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망배단이라고 쓰인 커다란 비석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허름한 다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자유의 다리였다. 어린 시절 기억과 달리 매우 낡고 허름했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출입금지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임진각을 찾은 관광객들은 자유의 다리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자유의 다리는 겉으로는 목재를 이용해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힘을 많이 받는 부분은 철재를 사용했다. 1953년 한국전쟁 포로 1만 2천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 귀환해 현재까지 ‘자유의 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원래 경의선 철교가 폭격으로 파괴돼 기둥만 남아 있었지만 전쟁 포로들을 통과시키고자 철교 일부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임시다리인 ‘자유의 다리’를 설치했다.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지만, 반대로 실향민을 위한 망배단과 함께 자리하고 있어 고향으로 갈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의 아픔 역시 안고 있었다. 자유의 다리를 건너 임진강 철교를 지나면 경의선 남쪽 최북단 역인 도라산역이 나타난다. 그다음 역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다. 비록 철길은 끊어지고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지만 언젠간 임진각 이북으로 길을 이어가길 희망해 본다. 우리 조상들이 그랬듯 의주길을 통해 전 세계로 다시 한 번 뻗어갈 대한민국을 기대한다. 글·사진=장영준기자 / 영상촬영=곽민규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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