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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지역 민중미술 이끈 소집단 활동가를 찾다] 3. 포인트-시점時點ㆍ시점視點 이억배 작가

유령 같은 존재로만 있다가 이번에 처음 호명을 받았어요. 무명의 활동에 이름을 붙여준 것에 감사하고, 감회가 새롭습니다. 1980년대 수원지역 민중미술을 이끈 포인트-시점時點ㆍ시점視點 의 이억배 작가는 지난 3일 안성 그의 자택에서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 최근 경기도미술관이 1980년대 시대와 사회를 이끌어 온 소집단 미술그룹을 조명하는 전시를 3개월간 연 것에 대한 소회였다. 그의 말처럼 포인트-시점ㆍ시점을 비롯한 당시 소집단 미술집단 활동가들은 익명성을 대의로 여겨 시민과 지역과 사회에 몸을 던졌다. 1979년 12월 창립한 포인트는 그 중심이었다. 백종광, 장영국, 최춘일이 창립한 포인트는 수원 크로바백화점 전시실에서 창립 전시회를 열며 문을 열었다. 수원지역 고등학교 선후배들, 소위 미술계 반항아들이 몰렸다. 시대의 폭력과 불의의 맨몸으로 견뎌야 했던 시대, POINT는 이러한 시대적 고민과 사회에 대한 분노, 새로움에 대한 갈망 등을 현대미술의 실험적인 시도로 옮겼다. 이후 회원 대부분이 군 제대를 한 1984년, 진보적인 의식을 담은 예술활동으로 나아가고자 시점시점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포인트의 계승을 의미하는 볼 시(視)자와 새롭게 사회의식, 역사의식을 반영한다는 의미의 때 시(時)자를 결합했다. 이후 군중 속으로를 주제로 내걸고 수원지역뿐만 아니라 안양, 부천 등 경기지역 순회전을 열었다. 대중과 더 가깝게 소통하고 싶은 욕구의 표현이었다. 이 작가는 작가의 지인과 수원미술인들을 비롯해 일반시민도 많은 관심을 가져 전시장 열기가 뜨거웠다며 1985년 순회 전시회를 끝으로 해산했지만, 포인트와 시점시점으로 이어지는 활동이 현대미술의 모태로 출발하며 이후 수원, 안양 등 경기남부 지역에 민중미술운동에 씨앗뿌리는 역할했다고 말했다. 어릴 적부터 간직했던 예술가의 삶이자 꿈이었지만, 시대를 마주한 이 작가의 머릿속엔 늘 회의와 의문이 일었다. 멋진 예술가가 되고 싶기도 했지만, 그 시대를 살면서 내가 이런 활동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단한 사명감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 민중에게 현실을 알리고 싶었고 미술을 통한 저항을 하고 싶었습니다. 포인트-시점ㆍ시점이 해체된 이듬해 이 작가는 최춘일, 이득현과 함께 수원지역 목판모임 판을 결성한다. 민중미술 지향을 뚜렷이 시대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내 문제로 여기며 일치시키고자 분투했다. 미술인 두렁, 그림사랑동우회 우리그림 등 여러 지역의 소집단에서도 활동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예술로 시대와 고군분투하던 그에게 우연히 찾아온 그림책은 황무지에 단비가 내리듯 그에게 생긴 상처와 아픔을 치유해줬다. 그림책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심이 있은 후 1995년 명절 고향으로 향하는 솔이의 추석이야기를 펴냈다. 민중미술의 경험은 고스란히 그림책으로 옮겨졌다. 대중관과 화풍, 가치관, 미학이 반영됐다. 이후 민족성, 전통의 문제 등의 화풍이 담긴 세상에서 제일 힘 센 수탉,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모기와 황소 등을 줄줄이 내며 대한민국 1세대 대표 그림책 작가로 활동 중이다. 한국적인 그림과 정서를 담은 특유의 풍속화적인 그의 그림책은 대중의 호응을 받고 있다. 2010년도에 펴낸 한중일 평화그림책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은 그가 그동안 그림책 작가로서 골몰했던 주제를 응축한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비무장지대에 봄이오면의 마지막 장면에서 끝내 열지 못한 마음속 철조망을 지난해 출간한 봄이의 여행에서 열면서 완결편 작업을 마쳤다. 그는 비무장지대에 봄이오면에서 DMZ 철문 앞에선 할아버지가 철문을 열고 들어가 북쪽 형제들과 상봉하는 판타지로 마무리했는데, DMZ의 철문만 열고 더 가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면서 봄이의 여행은 휴전선에서 봄이와 할아버지가 전국의 장날을 순례하고, 사춘기가 된 봄이가 두만강역에서 혼자 대륙 횡단열차를 타며 두만강까지 여행하는 걸로 마무리하면서 철조망을 연 완결편을 마쳤다고 말했다. 비무장지대에 봄이오면은 해외에서도 호평 받고 있다. 지난달 27일 전미도서관협회(ALA)가 주관하는 밀드레드 배첼더 어워드에서 어너리스트로 선정됐고, 미국 내 아시아교육협회가 주관하는 프리먼 북 어워드에서 어너리스트에도 뽑혔다. 또 지난달에는 1996년도에 출판한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새롭게 작업한 오누이 이야기를 펴내며 이억배표 호랑이로 아동, 성인들과 다시 만나고 있다. 그는 그동안 10년간 나를 지배한 건 평화그림책이었는데, 이제 마침표를 찍었다. 한 주제에 골몰하니 말랑말랑한 주제들이 다 날라가버렸다면서 어둡고 무거운 얘기뿐만 아니라 일상의 작고 소소한 웃음과 행복을 주는 부드러운 주제들을 가지고 계속 그림책 활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자연 기자

[경인지역 민중미술 이끈 소집단 활동가를 찾다] 2. ‘흙손공방’ 창립자 김봉준 작가

1980년대 후반 공장이 밀집했던 부천에서는 노동 운동과 노동자들의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 중심에는 노동자 맞춤 미술생산공방인 흙손공방, 그리고 김봉준이 있었다. 노동자들과 호흡하고 생존한 소집단 그룹 흙손공방의 창립자 김봉준을 지난 20일 성남 어느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다음 달 2일까지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리는 시점時點ㆍ시점視點 - 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전을 말하며 그동안 미술사에서 잊힌 인물이었는데 이제 작품이 조명받고 미술전시관에 전시되니 감회가 남다르다며 말문을 열었다. 김봉준은 국내 미술사는 물론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에서도 결코 가벼운 이름이 아니다. 집회 현장이 전시장이었고, 농민, 노동자가 있는 곳이 작업장이었다. 갤러리가 아닌, 현장에서 실천하는 예술가의 삶을 살아왔다. 그는 젊은 시절엔 A급 수배자로 쫓기기도 했고, 나이 들어선 정권의 블랙리스트였다며 그럼에도, 독립된 예술가로 살며 여전히 민중과 함께 꿈을 꾸는 예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릴 땐 촉망받는 예술가로 탄탄대로의 삶이 예상됐다. 중ㆍ고등학교 때 서양화로 수채화를 그리다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했다. 시험만 치면 늘 A였다. 하지만 그에겐 캠퍼스 안 공부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탈춤반을 결성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우리 문화에 대한 갈증을 풀었고, 절에 가서 스님에게 불화를 3년간 배우기도 했다. 1980년 3월 창작과비평사에 들어간 그는 전화를 받다가 우연히 광주에서 걸려온 청년 학생들의 울부짖음을 듣게 된다. 전화 몇 통을 받다 보니, 서울 대학교 탈춤반 연합회 소속인 중에서 광주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됐다. 유인물의 초안을 쓰기에 제격인 인물이 됐다. 그때부터 수배자가 됐어요. 매일 쫓기는 삶을 살며 함바집에서도 자고 판자촌 노동자 생활도 했어요. 하지만, 이런 시국에선 내가 민중과 함께하는 길을 택하는 것, 그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1년 뒤 포고령 위반이 없어지면서 풀려난 그는 시민, 민중운동을 다시 시작한다. 농민회에 들어가 농촌 문제를 알리는 농사꾼타령을 농민과 함께 만들어 1982년 출간했다. 또 그해 10월엔 한국 민중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친 미술동인 두렁을 결성했다. 공동창작을 중시한다, 있음에 머물지 않고 있어야 할 것을 지향한다, 불화와 민화와 같은 우리 전통을 낡은 전통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발표한 산그림 선언문은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흙손공방은 미술동인 두렁 이후 김 작가가 민중 속으로, 지역운동으로 들어가 실천의 예술가 삶을 실현하려는 의지였다. 이지녀, 엄경환 등과 함께 민주노동조합의 노동자에게 주문을 받아 미술품을 제작 납품했다. 1988년 연세대 학생회에서 주문한 이한열 추모비를 제작하기도 하고 그림 티셔츠, 머리띠, 걸개그림, 현수막, 노조간판, 달력, 기념판화 등을 만들어냈다. 여기엔 도시 노동자들의 가열한 노동해방 정서와 소외 정서가 반영됐다.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공방 안에 부천노동상담소도 만들어 소장으로 1년간 상담 활동도 했다. 그는 문화예술로 노동자, 민중과 함께 건강한 도시의 시민 문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건강이 급격히 무너졌고 공장들도 문을 닫으면서 1993년 여름 강원도로 떠났다고 설명했다. 도피하듯 떠난 강원도에서도 그는 그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며 끊임없이 창작활동을 이어왔다. 예술의 화두는 생태와 신화, 마을 등이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권력을 향한 민중의 외침을 끝없이 그림으로 그려냈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성주에 내려갔고, 작은 마을의 사드 배치 반대 투쟁과 100만 명이 모여든 촛불집회를 고스란히 붓 그림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1980년 광주부터 1990년 총파업시대, 2002년 붉은 악마, 2016년 광장의 시대, 촛불혁명까지 40년 민중사에 탱화와 신화가 한데 어우러져 그만의 작품세계가 구축된 셈이다. 지난해 5월엔 신작 전 오월의 붓굿을 광주 메이홀에서 열어 판화 60여 점과 회화 등을 전시했는데, 작품이 완판 되는 기록을 세웠다. 그해 말에는 그의 예술활동 40년을 돌아보고 기리는 김봉준미술 40년 기념전, 민중미술로 어울리다전도 열렸다. 그의 목표는 끝없이 창작활동을 하며 민중의 삶을, 희망을 그려내는 거다. 지난 40여 년 동안 해온 것처럼 말이다. 저는 리얼리스트도, 모더니스트도 아니에요, 꿈꾸는 미술인입니다. 앞으로도 꿈꾸는 미술인으로 예술인으로, 우리가 희망하는 세상을 그리며 살아갈 겁니다. 정자연기자

[경인지역 민중미술 이끈 소집단 활동가를 찾다] 1. ‘그림사랑동우회 우리그림’ 권윤덕 작가

한국 현대사에서 1980년대만큼 뜨거웠던 시대가 있을까. 부당한 권력과 억압에 적극적으로 맞섰고 노동자, 여성 해방을 꿈꿨다. 우리 것을 지키자는 정체성 찾기 운동도 일어났다. 경인지역에서 활동하던 소집단 미술그룹은 그 중심이었다. 특정 계층을 위한 예술이 아닌, 시민과 함께 삶을 변화시켰고, 사회 변혁을 이끌었다. 경기도미술관이 지난해 10월 29일부터 오는 2월 2일까지 선보이는 시점時點시점視點-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전을 통해 이들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격동의 시대, 1980년대 경인지역 민중미술 소집단 활동가들은 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경인지역 민중미술을 이끈 소집단 활동가를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본다. 첫 번째는 그림사랑동우회 우리그림의 권윤덕 작가다. 예순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생기 넘치고 환한 얼굴, 머리 위에 살포시 얹은 화려한 핀, 소녀감성이 물씬 나는 말투. 그 안에 담긴 많은 경험과 깊은 고민에서 나온 진실한 언어. 지난 13일 오후 군포시평생학습원에서 만난 그림책 작가 권순덕은 그녀의 작품처럼 담백하면서도 빛났다.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꽃할머니, 제주 4ㆍ3 사건을 다룬 나무도장, 5ㆍ18 광주민주화 항쟁을 주제로 한 씩스틴 등 시대의 아픔을 그림책으로 담아온 권 작가는 지난 1987년 안양에서 창단한 그림사랑동우회 우리그림의 창립멤버다. 그가 미술운동에 뛰어든 나이는 스물일곱. 권 작가는 대학교 2학년 때 광주를 겪었고, 사회 변혁에 대한 갈망과 관심이 컸다. 변혁에 대한 갈망이 미술활동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권 작가를 비롯해 이억배, 정유정 등 중심멤버가 모여 이듬해 말 안양근로자회관 강당에서 그림사랑동우회 우리그림을 창립했다. 사회변혁의 갈림길에서 화랑에서 작품이 소비되는 걸 거부한 예술가들이 현장으로 들어왔다. 시민, 노동자들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했다. 이들이 주창한 것은 시민과 함께하는 예술, 그림은 특정인이 소유하고 누리는 게 아닌, 누구든지 그리고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우리그림은 안양시민미술학교를 개설하고, 안양독서회, 민요연구회, 노동자미술학교 등 지역 예술문화를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안양 그린힐 섬유봉제공장 화재로 여성노동자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터지자 이들을 위한 영정도를 제작했다. 활발한 활동을 하던 중 조각 단위의 소그룹이 연합으로 뭉치는 시대가 되면서 우리그림은 해체됐다. 이후 눈길을 돌린 것은 그림책이었다. 작가의 생각을 담아서 복제해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나누는 게, 민중미술의 또 다른 형태였다. 권 작가를 비롯해 이억배, 정유정 등 민중 미술가들이 대거 그림책으로 장을 옮겼다. 1995년,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권 작가의 첫 그림책 만희네 집이 나왔다. 지역민중 활동은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는 데 큰 원동력이 됐다. 안양시민들과 수업을 하면서 구름 가족 이야기라는 그림책을 낸 경험도 있었다. 권 작가는 미술운동을 했던 작가들은 작가 정신과 사회를 보는 시각이 정립돼 있어 이질감 없이 그림책으로 많은 호응을 받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들은 직접적이지 않다. 폭력을 말하면서도 폭력적인 장면이 없고, 성폭력을 다루지만 선정적이지 않다. 아름다운 그림으로 담담하게 표현된다. 그래서 더 아프다. 대학교 때 사회문제로 관여하고 관심 가졌던 일들이 책 꽃할머니까지로 이어졌어요.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 논쟁 중인 아픔들이 많네요. 그는 지금도 시민과 문화예술 활동을 함께한다. 올해로 14회째를 맞은 군포문화재단의 말하는 그림책에 1회부터 참여 중이다. 이 역시 30년 전 안양, 군포지역에서 시민 대상으로 했던 시민주도 참여 문화운동이 기반이 됐다. 그는 지역 소집단 문화예술운동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면서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이 그룹으로 모아져 한 번은 장을 펼쳐야 다음 단계로 이어지고, 큰 흐름을 만든다고 강조했다. 권 작가는 앞으로도 사회와 시대의 아픔을 대신 말하며, 대중과 함께 나눌 예정이다. 올해엔 우리가 가해자이기도 한 베트남전쟁을 주제로 한 그림책을 준비 중이다. 여수에 가면 여순사건을, 광주에 가면 광주를, 아이들은 세월호를 담아달라고 해요. 사회에 아프고, 누군가 대신 얘기해달라고 하는 걸 하는 일, 내가 조금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해요. 특히 베트남, 세월호까지 이 두 권은 꼭 제가 그림책으로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자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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