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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계석의 문화 돋보기] 문화도 ‘소비자 평가’ 받아들일 때

최근의 소비자 운동은 매우 활발하다. 옥시, 라돈 침대, BMW 리콜 등 손해를 입힌 것에 제품 불매 운동이 확산되고 심한 경우 회사를 도산에 이르게 한다. 합리적인 소비생활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제품에 대한 모니터링과 가격 등을 세심하게 살피는 전문성이 관건이다. 그러나 생활용품과 달리 문화예술 영역은 좀 다르다. 예를 들면 공연의 경우 티켓 가격이 적정한지. 내용이 충실한지에 반응이 별로 나타지지 않는다. 일반 소비제와 예술품이 같은 잣대를 적용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문화소비자 운동이 불가능한 것일까? 아니다. 문화도 소비자 평가시대가 온다면 관객의 심미안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예술성에 대한 논란 시비가 일어나는 것 자체가 관심을 넘어 사회적 분위기를 성숙시킬 수 있다. 정치나 경제, 사회 이슈에 묻혀 무관심한 상황에서 예술의 시장 확대를 기대하기 어렵다.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프랑스 오페라의 부퐁논쟁을 들 수 있다. 계몽지식인들과 왕정파가 마님이 된 하녀라는 작품을 두고 거친 논쟁을 벌인 것이다. 미술에서도 가짜 그림 소동은 가끔씩 일어나는 것이지만 예술 전반에 대한 전문가 평가가 위축된 입장에서 소비자 평가의 등장은 새로운 방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문화소비자란 용어가 상용어로 쓰이다 보면 터무니없는 것의 손해는 막을 수 있다. 현재 공무원법의 적용을 받고 있는 공공 무용단의 고령화 문제가 그렇다. 방치하면 시민 고객 입장에선 최고의 예술을 향유할 권리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나 합창단도 노조가 보호막이 되어 해외 콩쿠르를 석권하고 돌아온 빛나는 인재들의 영입을 막는다면 누구의 손을 들어 줄 것인가. 시장 논리에서도 독과점을 막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선의의 경쟁을 할 때 제품의 우수성이 나타나고 소비자의 선택에 이익이 돌아온다. 예술은 최고를 지향하는 것이다. 더 엄격해야 하는데 공무원은 자기 업무에 바쁘고 시민은 관심이 없다면 소비자는 질(質) 낮은 수혜를 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 전국의 시립합창단 10곳 가까이가 지휘자 공백 사태를 맞고 있다. 선장없는 배가 어디로 가겠는가. 자율주행 자동차도 아닌데, 아무런 방침이 없다. 반면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대구시향이 4년째 티켓 매진 신화를 쓰고 있다. 대전시향과 합창단 역시 티켓 성공을, 만간단체인 라벨라 오페라단이 관객의 찬사를 받고, 어제 7일 고양시향 역시 2개월 반 전에 티켓이 매진되었으며 1인 4매 제한구매를 했다니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면 관객이 감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문에 관객이 없는 것을 시민 탓으로 돌리는 것은 곤란하다. 우리 지역은 이래서 안된다는 비하(卑下)다. 소비자 평가가 있어야 하는 이유이기도하다. 이 역할을 누가 맡을 수 있을까. 전문 비평가의 역할에다 각종 예술 동호인들이 나설 수 있다. 턱없이 부풀려진 오페라 티켓 가격, 백화점에는 주차료가 없는데 공연장에선 매년 상승하는 것 역시 도마에 오를 것이다. 근자에 한 소비자 운동단체가 문화영역에도 소비자 상(償)을 제정하면서 문화 평가시대가 열릴 것이란 기대감이다. 소비자의 안목이 상품을 결정하듯 문화 소비자들이 비평가 수준에 이른다면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을 데워서 주듯 식상한 레퍼토리에 안주하는 예술단들에도 변화가 올것 같다. 결국 객석이 높아지면 눈높이에 맞는 변화는 불가피하지 않겠는가.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돋보기] 장애인 예술 활동 적극 대우해야

오는 12월 3일은 세계장애인의 날이다. 올해로 26회를 맞는다. 이를 기념해 지난 22일 여의도 KBS홀에서는 전국장애인합창대회가 열렸다. 이들의 경연을 보면서 자신들이 겪고 있는 장애를 훌쭉 뛰어 넘어 도전과 희망을 갖는 것은 감동이었다. 장애에 따라 입장을 이해하고 음악을 통해 스스로의 치유는 물론 보는 이들에게 강한 메시지가 전달된다. 예전에 비해 장애인에 대한 대우나 사회의 시선이 좀 달라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한계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음악의 경우만 해도 장애인 합창단은 많지만 시립합창단처럼 직업화가 된 곳은 없다. 이들 역시 장애와 상관없이 오히려 더 높은 기량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필자가 지난해 합창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최초의 맹인합창단인 라파엘 코러스를 보면서 기존 합창단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사운드 칼라와 메시지가 있어 국립이나 시립으로 승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전국에 60 여개에 이르는 시립합창단이 있지만 장애인 예술가들을 직업으로 고용한 경우는 없다. 이것은 장애인 예술에 대한 치별이다. 그 연주력이나 전문성 이 언급되지 않아 제도화에 이르지 못한 것이 원인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지급부터라도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들이 상향된다면 장애인 복지는 한 차원 높게 발전해 갈 것이다. 이들 예술 활동을 지금껏 지원하고 오늘에 이르게 한 것은 참으로 땀 흘림의 수고가 아닐 수 없다. 전채 장애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도 모범적인 활동에 혜택을 부여했으면 한다. 이것은 개인이 쉽게 할 수 없기에 정부가 나서는 것이 당연한 책무다. 우선 장애인 예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있어야겠다. 이들에 대한 관심이 동정심 수준이라면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 겉돌게 된다. 솔직히 일반시민이나 행정가들이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 이들의 권익을 드러내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에서 평등은 기회의 균등이란 날개로 나는 것을 말한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기에 지속적인 여론 환기가 필요하다. 말보다는 실행을 위한 절차가 무엇일까? 연구가 전제되어야 하겠다. 그리해서 사회 성숙도에 맞는 예술지원책이 필요하다. 장애인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장애인의 날 하루만의 축제나 반짝 관심이 아니어야 한다. 합창단의 경우 장애와 정상인을 가르지 않는 공연도 늘어났으면 한다. 아울러 이들을 위한 전용 콘서트홀 건립이다. 현행 공연장에 가는 것은 난관이 많아서 공연의 즐거움 보다 피로가 더 크다. 사실상의 선택권이 제한되어 있다. 가끔은 장애인석을 만들어 놓은 곳도 있지만 휠체어가 놓이는 것을 보는 게 쉽지 않다. 또한 시각장애인이나 기타 장애를 안고 있는 이들의 특수 공간이 그래서 필요하다. 편하게 소통할 공간하나가 없다는 것은 푸대접이다. 환경장애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에 심각성이 있다. 장애인의 날 축사하고, 상장주고 꽃다발 하나 주는 장애인의 날 보다 보이지 않는 눈물을 씻어주고 자긍심이 살아 날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갑질의 행태가 장애인에게 나타나지 않도록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 시각의 변화가 그 출발점이어야 한다.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 돋보기] 푸른 눈의 금광을 캐는 외국인 작곡가들

산에서 나는 것 중의 최고가 ‘산삼’과 ‘금’이 아닐까 싶다. 사실 우리의 독창적인 전통문화도 금광이다. 그런데 변화에 따른 시대 문법을 만들지 못해 과거에 묶여 있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세상이 변한만큼 산뜻한 옷을 입고 시류(時流)에 적응하는 것이 창조 예술의 힘이다. 어떻게 가공하고, 어떤 안목을 가져야 할까. 작가의 몫이다. 예술감독이 그래서 중요하다. 오는 17일 오후 3시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국제음악작품 공모를 통해 얻은 결실을 발표한다. 경기도립국악단이 눈길을 끄는 프로젝트를 만든 것이다. 외국작곡가의 창작은 그 자체가 호기심이다. K-Pop 처럼 센세이션을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조용한 혁명이다. 적어도 한국, 중국, 일본의 동방문화에 관심을 갖는 작곡가들이 늘어나는 것은 자긍심을 갖게 한다. 근자에 외국의 대학에서 우리 국악 연주가나 작곡가를 초청해 한국음악을 이해하려는 현상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니 푸른 눈의 작곡가들이 우리 금광을 캐겠다고 달려 온 것이 새로운 음악사의 세상을 만드는 물꼬가 되기를 바란다. 물론 신라, 고려시대에도 조선왕조에도 국제교류는 있어 왔다. 그러나 지금처럼 전통악기의 기보법이 만들어지고, 악기론이 체계화된 것이어서 차원을 달리한다. 동일한 소재로 음악을 만드는 선의의 경쟁시대가 오는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그간 수없이 만든 창작에서 과연 좋은 작품이 얼마나 있는가에 물음이 생긴다. 작품이 좋으면 서양 관객들에게도 호응을 받는다. 엊그제 독도를 테마로 유럽 투어를 한 ‘라메르에릴(바다와 섬)’이란 단체는 가는 곳 마다 환호를 받았다고 한다. 우리의 앞날을 예측하는 시금석이다. 따라서 도립국악단의 이번 국내외 작곡가의 향연으로 창작 의욕 고취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이번 공모콘서트에 각계 전문가들의 관심이 집중된 이유다. 그동안 100년이 넘게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배웠던 것처럼 앞으로는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원 아카데미를 통해 장구, 단소, 가야금 배우기가 활성화될 것이다. 음악의 전파력은 빨라서 우리 아리랑 산조 가락이 은은하게 유수의 공연장에서 울려 퍼질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세계 거대한 음악사의 편입에 전초전이 되는 셈이다. 문명사는 돌고 도는 순환의 구조다. 한 때 영향이 컸던 동양문화가 새롭게 떠오를 시점이다. 외국인들이 만든 정서가 좀 다른 국악요리에서 어떤 맛을 느낄 수 있을까. 지금 프랑스의 청소년들사이에는 한글을 쓰는 것이 자랑이고, 장구치고, 피리를 부는 것이 앞서가는 사람으로 인식된다면 ‘선진화’ 개념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하와이대학교 교수 Donald Womack(도널드 워맥)과 Thomas Osborne(토마스 오스본)의 참여는 그래서 희망적이다. 아울러 독일 유학파인 작곡가 라재혁과 Song yang(송양)과 중견작곡가 김대성이 K-오케스트라 챌린저에 도전장을 내민 것 역시 새로운 음악을 쏘아 올리는 신호탄이다. 콘서트 로비에서는 전시회도 열린다. 세계적인 드로잉 작가로 알려진 모지선 화가의 ‘K-클래식을 그리다’가 음악과 미술로 만난다. 변화가 두려울 수도 있지만 실험과 도전은 창조자의 기쁨이다. 이제 우리 끼리만이 아니라 세상의 여러 눈인 다초점으로 보는 변화가 오고 있다. 누가 금을 많이 캐느냐보다, 어떻게 가공하느냐가 중요하다. 그 평가는 결국 소비자인 관객의 몫이 아니겠는가.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 돋보기] 창작에 불붙기 시작한 문화재단들

지난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광주문화재단이 제작한 작곡가 김대성의 ‘님을 위한 행진곡 주제에 의한 교향시 민주’(원곡 김종률)가 있었다. 이 곡은 체코에서도 연주되어 반향을 일으켰다. 광주항쟁이 지난지 반세기 가까이 되지만 그 역사를 담은 창작품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는 뼈아픈 자성이 탄생시킨 작품이다. 정치적으로도 매우 민감한 사안이기도 했지만 작곡가들의 직무유기란 쓴소리도 나왔다. 그 어느 나라이던 엄혹한 시절에 작품을 남긴 쇼스타코비치, 시벨리우스를 비롯한 작곡가들이 있음에 우리 작가의 의식이 무엇이었나를 되묻는 것 같다. 이 주제는 또 작곡가 박영란의 ‘피아노 협주곡’으로도 탄생해 광주에서 연주되어 큰 호응이 있었다. 우리 근현대사에는 이념 갈등으로 인해 작품들이 묻힌 경우가 많았다. 윤이상이 그랬고, 정율성이, 홍난파, 조두남 등 많은 작곡가들이 고통을 받았다. 이번 광주문화재단이 촉발시킨 창작은 그간 선배 작곡가들에 의해서도 꾸준히 진행되어 온 것이다. 조두남 칸타타 ‘농촌’ (1942년). 김동진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1943년), 김성태 ‘빛나라 내 조국’(1978년). 최영섭 ‘아름다운 내 강산’ (1962년) 등이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초연(初演) 후 재연(再演)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묻히고 말았다. 최영섭 작곡가의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에서 나온 것이 ‘그리운 금강산’이란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근엔 필자가 대본을 쓰고 임준희 작곡가의 ‘칸타타 한강’과 ‘송 오브 아리랑’이 국내외에서 레퍼토리로 뿌리내리고 있음은 발전적이란 자평(自評)이다. 최근의 문화재단들도 달라지고 있다. 창작의 관심을 물론, 국·공립 예술단체들 역시 전임 작곡가 제도를 도입하는 등 창작에 집중하려는 자세다. 사실 귀 밝은 클래식 청중들은 반복만 되는 레퍼토리에 식상해 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아창제’가 해를 거듭하면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뭔가 꾸준히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부산의 지역 공간인 을숙도 문화회관에서 창작페스티벌을 하는가 하면, 전남 보성에서 채동선 작곡가의 작품을 복원하려는 움직임, 대구 오페라페스티벌에 창작오페라 ‘사의 찬미’가 대구문화재단 지원으로 작품성을 높이 평가 받았다. 경기도립 국악관현악단은 외국 작곡가들에게 작품 공모를 하는 등의 혁신적 변화를 이끌고 있다. 최근엔 우리 작곡가들의 작품이 프랑스, 네덜란드,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 각광 받으면서 해외로 나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K-클래식 우리의 창작음악의 국제화에 물꼬가 트이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음악에 대한 외국 청중들의 반응은 그들 역시 수 백 년된 레퍼토리에서 탈피해 새로운 메뉴를 찾는 것이다. 때문에 이제는 어떻게 연주하느냐? 보다 무엇을 연주하느냐? 중요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맞고 있다. 지원기관 역시 창작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때마침 창작 쿼트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입시, 콩쿠르, 대학교 강사 임용에서 창작 의무화를 한다면 창작에 불이 붙을 것 같다. 한국영화가 외화를 물리치고 역전된 것에는 스크린 쿼터제가 있었다. 이 빛나는 성과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김윤기 광주문화재단 대표가 “님을 위한 행진곡을 광주에 국한하지 않고 전국 대중화와 세계화에 목표를 두고 있다. 창작에 대한 지원을 꾸준히 해야 음악의 지평이 열린다”는 소신은 그래서 설득력 있게 들린다. 바야흐로 내년은 3·1절 100주년이다. 우리 문화 독립성을 키워야 하는 큰 전환기가 오고 있으니 잘 준비해야 하겠다.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 돋보기] 440억원을 보는 두 눈

모든 정책은 예산을 수반한다. 돈의 쓰임을 놓고는 언제나 이해가 엇갈린다. 특히 시민과 관계된 사안들은 핫이슈로 격론이 벌어진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400억 원의 광고 수익을 포기해서라도 도시를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지하철 역을 전시장처럼 아트역으로 환경을 바꾸겠다는 것. 역내에 덕지덕지 붙은 조악한 광고물은 도시 미관을 해치고 그 피해가 고스란히 시민의 스트레스로 쌓인다. 찬반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지만 광고를 버려서라도 시민에게 예술의 기쁨을 주려는 정책도 눈 여겨 보아야 한다. 사람의 五感(오감) 중 가장 빠른 것이 눈이다. 그런데 이 눈이 단순히 일상의 사물을 인지하는 것을 넘어 예술을 보는 눈이 되면 행복지수가 올라간다. 이를 심미안이라 한다. 비엔나 시청이나 유럽의 시청들에 놀랄만한 조각과 작품이 있음은 예술의 가치를 아는 전통에서 온 것이다. 광고가 부착되어도 무신경하게 반응하는 경우도 있지만 안목이 높아지면 이로써 얻는 효과가 엄청나다. 전체 도시 디자인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지하철을 출발점으로 시민의 눈을 높여가면 당장은 심리 치료 효과도 있고 안목이 길러지면 평생 행복 보너스를 타게 된다. 새삼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그림이 주는 행복은 세계의 미술관에 관광객이 넘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반 고호 한 작가가 도시를 먹여 살리기도 하고 국가 브랜드가 되지 않는가. 어떤 정책도 비판의 칼날위에서 만들어지는 것 같다. 어둡고 혼돈스러움이 아니라 환경이 정화되면 범죄도 준다. 깨어진 유리창 효과의 반대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꽃이 만발한 곳에서 범죄나 사고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천경자의 그림이 시민들의 향수권 신장을 물론 그림 구매력을 불러일으킨다면 작가들에게도 희망이다. 비단 그림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매력적인 성악가의 노래, 바이올린의 가냘픈 선율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커서 좋은 문회를 가까이 하는 애호가가 된다. 좋은 것을 흡수하면 낮은 것을 물리치는 抗體(항체)도 생긴다. 품격이 그렇고 명품이 다 그런 것이다. 지하철 아트화가 실현된다면 수익논리를 뛰어 넘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당장은 아니기에 비판적일 수 있지만 그래서 리더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보이는 것만 보는 눈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설득의 기술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예술이 밥 먹어 주냐? 라고 핀잔하지만 밥보다 멋진 것을 외면하고 산다면 100세를 산다 해도 숫자에 불과하다. 440억 원이 4천400억 원을 넘을 수 있다는 의견이 많은 성숙한 사회가 되면 좋겠다. 배고픔만 해결하려다 보면 이게 당장 해결이 되는 것 아니지 않는가. 생각을 바꿔 문화를 주면 힘들어도 여유와 경제에서 얻지 못한 즐거움으로 보상을 받는다. 동구권 역시 어렵지만 택시 기사도 오페라를 보는 문화가 있다. 굳이 서울의 이야기를 지역에 소개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전국으로, 어려운 때 일수록 예술 바이러스의 파급이 필요한 지금이다.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 돋보기] 놀라운 비전 보여준 청소년 교향악 축전

지난 16일 안산문화예술회관애서 폐막한 제3회 ‘대한민국 청소년 교향악축전’은 우리 청소년 오케스트라에 놀라운 비전을 보여주었다. 객석을 가득매운 가족, 친지 중심의 콘서트여서 인지 따뜻하고 훈훈한 휴먼콘서트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지난 8일부터 하루 4개 팀이 구리, 부천, 오산, 수원, 안산을 통해 모두 20개 팀이 기량을 뿜어낸 무대다. 누가 1등을 하고, 2등을 하는 경연이 아니라 고사리 손으로 악기를 배워 낸 서툰 화음(和音)이지만 고스란히 살아 있는 숨소리 그 자체였다. 눈만 뜨면 스마트폰이나 게임을 하던 아이들이 아닌가. 이들이 교과서에서나 배웠던 모차르트, 베토벤의 위대한 악상(樂想)을 실제 더듬어 가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 힘든 고행의 과정에서 ‘내가 해냈다’는 자신감 의미를 우리 사회와 어른들이 잘 알았으면 한다. 애들이 뭘해? 이건 거야말로 낡은 생각이다. K-Pop 도 그렇고, 애들이 세상을 바꾸는 세상이다, 규율과 틀만 강조하는 제도권 교육이 그래서 지금 혼돈이 아닌가, 남의 소리를 들으면서 음(音)을 맞추어야 좋은 음악이 된다는 이 기막힌 민주화의 속성과 원리를 안 것은 콜럼버스 계란처럼 충격적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 훅하고 지나는 이 짧은 청소년기를 튼튼하게 정신적으로 자립시켜줄 고난의 행군. 그러나 뽀송뽀송한 솜털 얼굴에 성취의 쾌감이 넘쳐보였다. 아이들은 오케스트라가 하고 싶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한다고 했다. 친구가 사라진 세태에 형과 동생의 서열이 생기고 서로 배려하는 것을 배우는 공동체가 또 있을까. 저 유명한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El Sistema) 운동이 전 세계를 강타 한 이유다. 이번 교향악축전은 경기도문화의전당과 경기도음악협회가 발 벗고 나서서 만든 프로젝트다. 한정된 예산에서 쓰일 곳이 많겠지만 투자 효율성의 최고는 역시 청소년이다. 젊은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예산 250억을 배정하고 각급 학교에서 오케스트라, 합창, 연극 등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공약을 실행하고 있다. 음악 수업을 지속적으로 받으면 수학·암기 능력 등이 향상된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으니 학부형의 인식이 바뀔 차례가 아닌가. 클래식 부동의 1위인 ‘사계’ 작곡가 붉은 머리의 신부 비발디 역시 수녀원의 고아들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면서 이 같은 명곡을 낳지 않았는가. ‘용기’란 남이 주는 상처에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라고 했던가. 아이들도 이 날은 용기가 넘쳐 보였다. 연주회, 전시장이 익숙하지 않은 민주화 세대를 훌쩍 뛰어 넘어 청소년 교향악단이 기성 시립 오케스트라의 벽을 허물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심포니(Symphony)’는 ‘함께 울린다‘는 뜻의 그리스어인데 정말 이 날 저녁은 모두가 함께 울렸다.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돋보기] 클래식에 혁신적 변화 몰고 올 방송법 개정

현행 방송법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 이를 개정하려는 청원서 제출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행, 방송법의 제71조 2항에는 순수음악(가곡, 동요, 국악 및 기악곡 등)에 대한 방송사업자의 의무 편성이 없이, 대중음악에 대한 의무 편성만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 이같은 의무조항이 없으므로 방송이 상업성이 짙은 이이돌 스타나 오락, 먹방 등의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이런 방송에 비판 수위가 높아지면 자정 넘어 억지춘향격의 클래식 편성을 했다가 어느새 사라지곤 하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의무조항이 없으니 예산 편성도 없다. 시행령 제57조 ② 항에 방송사업자는 법 제71조제2항에 따라 연간 방송되는 영화·애니메이션 및 대중음악 중 국내에서 제작된 영화·애니메이션 및 대중음악을 다음 각호의 범위에서 방송통신위원회가 고시하는 비율 이상 편성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을 100분의 40 이하의 범위에서 방송통신위원회가 고시하는 비율 이상을 편성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도 몰랐던 방송법 개정의 필요성을 발견한 것은 오랫동안 방송업무에 종사했던 박경규(전 KBS FM 라디오, 전 국악방송 본부장) 작곡가에 의해서다. 수면 하에 있던 것을 향락 문화의 퇴조와 주 52시간 근무로 건강한 방송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사회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이를 다시 추진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주무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도 대중음악만을 음악의 총체로 규정한 것에 오류가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문화예술인이 중심이 되어 시민의 서명 작업을 통해 여론 조성을 해야 한다. 방송법이 개정되면 동요를 비롯해 합창, 오페라 등 클래식 전반에 실로 혁신적인 변화를 몰고 올 것 같다. 순수음악프로그램이 없으므로해서 발생하는 폐해도 적지 않다.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순수 분야의 에술가들이 처한 현실은 팍팍하기만 하다. 오랜 유학에서 돌아와도 이들이 일할 곳은 대학뿐이다. 그 대학이 이제는 한계 상황에 직면하여 이들의 뛰어난 역량이 死徵(사징)되고 있다. 방송은 열악한 구조에 숨통을 틔워 줄 수 있어야 한다. 방송을 잃은 클래식은 대중에게 알려질 기회를 갖지 못해 시장 형성을 할 수 없었다. 급기야 동네 학원마저 문을 닫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처럼 순수문화의 위기는 바로 기초문화의 위기인 것이다. 사실, 해방 이후 한 번도 본격적으로 거론되지 못한 방송법 개정이 된다면 서구 편향적인 프로그램의 편성도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바야흐로 한류를 타고 우리 작곡가의 우수한 우리 작품이 국내는 물론 세계에 소개되어야 할 타이밍이다. 방송의 고급문화 수용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무엇보다 국민 정서의 균형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다. 말초적인 자극의 문화가 아니라 품격과 힐링을 주는 문화로 사회의 갈등과 소통, 치유 역할도 맡아야 한다. 우리의 K-Pop이 세계 도처에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이 못지않게 전통문화와 현대화한 작품들이 조명 받아야 한다. 비단 음악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무용, 연극, 문학 등 여러 장르로 확산될 것이다. 또한 확산일로에 있는 각종 동호인 문화가 상승하면서 클래식 시장 기반을 반등시킬 것이다. 때문에 방송도 사회 트렌드의 변화를 읽고 국민들에게 삶의 비타민이 될 수 있는 양질의 소프트위어 공급이 필요하다. 참으로 방송의 힘이 막강하다. 순기능을 한다면 예술계 일자리 창출은 물론 사회의 건강 지수를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각 협회, 예술단체, 사회단체의 동참이 필요하다. 선진 방송의 사례를 수집하고, 바른 방향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도록 방송프로그램의 개선이 절대 필요하다. 그리해서 예술도 공급자인 예술가와 소비자인 시민이 방송이란 매개를 통해 선순환 구조의 시장을 구축한다면 ‘저녁이 있는 삶’은 더욱 풍성해지고 윤택해지지 않겠는가.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 돋보기] 고양시향 창단, 한국 오케스트라에 혁신인가

한국오케스트라에 새로운 모델이 창안되었다. 전국의 시립교향악단과 근본이 다르다. 그러니까 기존의 市(시) 소속 예술단체가 아니라 계약에 의해 연중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형식이다. 일반의 눈에는 뭐가 다른지를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전문가들의 눈은 예사롭지 않다. 그것은 비단 오케스트라뿐만 아니라 같은 구조하에 있는 합창단도 마찬가지다. 사실 세종문화회관 법인화 이후 전국의 많은 극장들이 법인화의 길을 걷고 있다. 그 찬반 논란은 아직도 계속이지만 고향시향의 예술단체 계약제는 전국에서 첫 사례다. 성공 여하에 따라서는 파장을 가져올지 모른다. 눈 만 뜨면 외국 오케스트라가 전국권을 시장화하고 있는 마당에 기존 공무원 시스템 하에 있는 우리 오케스트라들이 능력을 발휘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결국 양질의 향수권을 요구하는 시민과 시민 세금의 효율성을 걱정해해야 하는 시의 입장에선 이래저래 고민이 깊다. 지난 14일 고양아람누리 하이든 극장에서의 창단 콘서트는 때문에 여러 비평가들도 관심을 보였다. 오페라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은 지휘자 카를로 빨레스키의 첫 선은 합격점을 넘어 관객의 호응을 끌어냈다는 평가다. 암보를 통해 바그너의 발퀴레 서곡과 피아니스트 문지영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깊은 감동을 안겨 오케스트라 협연의 진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례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창단 연주회의 프로그램이다. 흔히 청중을 위한 프로그램은 눈높이에 맞추는 것인데 정면 승부수를 띄웠다는 점이다. 쉽지 않은 레퍼토리, 그것도 난곡(難曲에 해당하는 한 시간이 넘는 브루크너(제7번 교향곡)로 시민을 만난 것이다. 예상을 넘는 도전이다. 사실 음악이 청중을 설득하지 못하면 1부 공연 후 휴식 시간에 청중들은 빠져나간다. 그런데 라흐마니노프의 긴밀한 호흡과 섬세한 악상처리, 제네바 콩쿠르 우승의 젊은 유망주를 투입해 명연을 보인 것은 좋지만 후반의 브루크너는 강한 집중력을 갖지 못한다면 실패할 위험이 크다. 그러나 청중의 반응은 음악다운 음악을 들었다는 자긍심이 묻어났다. 그저 쉽고 편안하고, 귀에 쏙 들어오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청중들이 알아차릴 만큼 성숙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아니 청중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왜 이들은 낯선 무대에서, 그것도 이처럼 강공을 택한 것일까? 여기에 고양시향의 앞으로의 목표를 엿볼 수 있다.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최선의 최선을 다한 무대를 보이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이런 변화는 분명 도시 문화를 바꾸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시민의 자존심과 우수 프로그램을 흡입하는 관객들이 향후 ‘감상 근육’을 튼튼하게 키워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서운 힘이요 저력이다. 변화가 변화를 부른다고 하지 않던가. 인구 백만의 고양시를 한 차원 높게 끌어올리기 위해 무한 도전의 프로의식을 고양시향이 보인 것이다. 때문에 창단 연주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노조와 공무원,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단원이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답할 것인가가 숨은 그림찾기처럼 들어 있다. 이게 개혁이고 혁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경우든 시향의 주인은 시민이다. 시민의 사랑과 지원을 받으면서도 예술적 자존심을 살릴 수 있는 길이란 뼈를 깎고 땀을 흘리는 노력뿐이란 교훈을 남겼다. 자세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두고 봐야한다. 초심(初心)을 잃지 않고 매진한다면 분명 놀라운 일이 벌이질 것이다. 매 공연 환호가 이어진다면 후원자도 생기지 않겠는가. 이런 것들이 축적되어 한국 오케스트라의 경쟁력이 살아난다면 가히 오케스트라 역사를 새롭게 쓰는 일이다. 비록 티켓 가격은 저렴했지만 매진을 했다. 앙코르를 외친 한 관객이 극장 문을 나서면서 말했다. “오늘 음악회 너무 감동이야! 다음엔 친구들 데려와야겠어~.”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 문화 돋보기] 비(非)유학파로 유럽 오페라에 진출 ‘테너 이현재’

“유학을 가지 않을 수도 없고, 갔다 오면 자리가 없고”. 예술대학들의 문이 닫히면서 생긴 엄연한 오늘의 현실이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최근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상당한 위기를 몰고 올 것이란 불안감에 대학을 졸업한 예비유학도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그렇다고 학력 만능 사회에서 쉽게‘학력’을 빼고 개인이 도전하기란 포기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많은 비용이 드는 수년씩의 유학을 어떻게해야 할까? 사실 우리의 기술력은국내파로서도 충분히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나 반클라이번 콩쿨에 우승할 만큼 원천 기술은 인정을 받았다. 그렇지만 학력 시스템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異變(이변)이 생겼다. 돌파의 길이 열린 것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면서 스위스 바젤오페라하우스 영아티스트 오디션에 응시해 발탁된 테너 이현재(26살)다. 그러니까 유학을 가지 않은 순수 국내파로서 유럽극장에 진출한 것이니 유학에 대한 고정관념의 벽을 깬 것이다. 그는 한예종 성악과와 라벨라오페라학교에서 기량을 닦았다. 2013년 라벨라의 ’일 트로바토레‘의 루이즈역으로 데뷔했다. 그러는동안 국제적 권위의 콩쿠르인 오스트리아 린츠 국제오페라콩쿠르에서 3위, 국내 대구성악콩쿠르 대상, 국립오페라단 성악콩쿠르 동상 등을 획득했다. 그는 오는 9월부터 현지에서 공식 활동을 시작한다고 한다. 한편으로 이현재는 2013년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공군 패러디 영상인 ‘레 밀리터러블’에서 장발장역을 맡아 유튜브 580만뷰를 기록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그가 유학 대신 극장 진출에 도전한 것은 그의 부친인 라벨라오페라단의 이강호단장의 정확한 목표와 설계가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이 단장은 ‘우리의 오페라 가수 진입이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오면 유럽 현지 가수들보다 4~5년쯤 늦어진다며,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국내 오페라계가 안타깝다’는 주장을 늘 해왔다. 따라서 이번 이현재 성악가의 진출이 예술의 기량보다 유학파, 비유학파를 엄격하게 가르는 국내 현실에서 숨통을 터주는 계기로 발전했으면 한다. 시작에 불과하지만 이같은 물꼬가 시각을 열어 주는 것이어서 언젠가 우리도 선진국 수준의 오페라 환경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성악가를 기르는 시스템이 없고, 다된 사람만 데려다 쓰고 관리조차 안되는 혼돈의 환경을 바꾸는 정책이 국립오페라단을 비롯해 역량있는 민간오페라단에 의해 구축되었으면 한다. 사실 관객 입장에선 프로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특히 박사를 따느라 엄청난 고생과 시간을 보낸 입장에서 현장이 변화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 앞으로는 ‘대학’이 선호가 아니라 ‘프로’가 무대의 증심이 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새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유학만 다녀 오면 교수가 되었던 70~80년대가 아니다. 박사들로 수십개의 대학을 만들어도 모자랄 판이다. 강사 줄 잘못 섰다가 안풀리면 인생이 허비되고 말았다는 주변의 상황은 山之石(타산지석)이 되고 남는다. 묻지마 유학보다 나은 효율성을 찾자. 결국 답은 현장이다. 스스로 무대를 만들고 개척하는 방법이다. ‘학력’ 만들기에 몽땅 힘을 쏟고 나서 귀국하여 여력이 없어 투자를 해야 할 상황에 모두가 멈추는 것 같다. 바야흐로 이제 외국 작곡가들이 우리 소재로 작품을 만들고, 음반을 제작하는 시대다. 독창적 소프트웨어로 글로벌 시장을 뚫어야 한다. 130년 넘게 수입한 구조를 벗어나 수출로의 발상 전환이 그래서 필요하다. 유럽의 ‘직항(直航)로 개설을 위해 다양한 정보와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누구나 가는 길에서 체증(滯症)에 시달릴 것인가? 모험을 걸고 새 길을 갈 것인가, 인생이란 항시 선택이 운명을 바꾸는 주사위 앞에 서있는 것 같다. 체면이나 낯가림이 아닌 오픈마인드로 우리 예술가들의 기량이 묻히지 않고 살아났으면 좋겠다. 연륜이 있는 세대가 후배 세대의 징검다리 역할도 필요하고, 전문가의 멘토링을 통해 두드리면서 가는 지혜가 있었으면 한다.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돋보기] 우리 정서에 맞는 ‘기념 행사’를 부탁해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총칼로…’. 언제부터인가 불려지지 않은 6ㆍ25 노래다. 아마도 요즈음 청소년들은 거의 들은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6월은 보훈의 달이다. 현충일이 있고, 애국 충절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는 경건한 달이다. 엊그제 10일, 총리실 등에 따르면 이 총리가 지난 5일 국무회의에서 “최근 보훈처 주관 기념식이 뮤지컬을 본 듯한 감동을 주고 있다”고 평가하고 “다른 부처의 기념식도 감동을 주는 행사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딱딱하게 형식에 묶인 연설문을 낭독하고 많은 사람들이 연단에서 致辭(치사)를 하는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컨셉의 문화 소통을 주문한 것이다. 사실, 3ㆍ1절을 비롯해 광복절 등 국가 기념일에 태극기 들고 동원된 청중의 입장에서는 기념일이 그리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의미를 작품에 녹여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 시대에 맞는 것이다. 이 총리는 전 부처에 주문했다고 한다. 사실 필자 역시 오래전부터 국가 기념일에 우리 정서와 동떨어진 음악회 레퍼토리를 하는 것에 지적을 해왔다. 광복절에 베르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하거나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를 하는 것에 부적절성이다. 만약 미국이나 이태리, 세계 어느 나라가 자신들의 국경일에 남의 나라 음악을 가지고 ?을 기리겠는가. 주체성, 정체성이 상실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막아야 한다. 우리가 찬연한 5천년의 전통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인데 식민지적인 사고에 묻혀 있다면 경각심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무분별한 외국 작품을 하기보다 우리 문학이나, 詩(시)로 된 생생한 역사 현장의 스토리를 구성해 누구라도 공감하고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번 총리의 지적은 명쾌하다. 아울러 뮤지컬에만 기울지 말고, 우리 칸타타 작품들을 선정해 청중과 충분히 교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필자 역시 필요성 때문에 칸타타 ‘송 오브 아리랑’, ‘한강’, ‘조국의 혼’, ‘달의 춤’ 등을 작품화하여 반향을 끌어낸 바 있다. 전국의 시립합창단들이 이 달에만 해도 베르디, 브람스, 포레의 ‘레퀴엠’을 무대에 올린다. 모두가 명작인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농촌이나 시골 벽촌에서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 작품이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가를 재고해 보아야 겠다. 지난 4ㆍ3에는 제주도의 합창단이 창작을 해서 여러 지역을 순회해 큰 호응을 받았다. 음악이란, 노래란 귀로 먹는 음식이다. 이제는 외국 작품에 기대기보다 지역민들과 바로 소통이 되는 콘텐츠 개발에 나서야 한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적군일줄 알고 렌턴을 비첬던 중대장은 이미 싸늘한 죽음이 된 아들의 호주머니에서 악보하나를 발견했으니 이것이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오늘날의 추모, 장례, 취침 나팔곡이다. 이낙연 총리의 국가 기념일에 ‘우리 정서, 우리 내용’의 것으로 기념식 행사를 만들도록 하라는 지시는 무관심에서 벗어나 우리 국경일부터 역사 바로 세우기의 작업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도 기획자가 하자는 대로 했더니 반응이 좋았다는 기사를 보고 이제는 정말 官(관)이 콩 놓아라, 팥 놓아라 간섭하지 말고 예술가의 창의력이 살아날 수 있도록 지원했으면 한다. 모든 것은 변하고 또 변헤야 한다. 바야흐로 남북평화 무드로 러시아를 횡단해 유럽에 한류문화 콘텐츠가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동방의 보물이 갔던 실크로드 길이 우리세대에 실현된다면 그 얼마나 행운인가. 따라서 냉전시대에 설정된 노래나 감각에 동떨어진 정서의 것이 있다면 이번을 계기로 독창성이 살아났으면 한다. 사회 전 분야가 그러하지만 과거 근대화 속도전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내고 이제는 반듯한 우리의 얼굴, 우리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관행을 깨고 혁신으로 가는 것에 예술이 단연코 사회를 러더해야 하지 않겠는가.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돋보기] 전통 콘텐츠 개발이 세계화의 첫 걸음

전통을 비롯한 우리 문화가 살아나고 있다. 개발성장 시대에 획일적으로 서구화를 지향했던 것에서 벗어나려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그러니까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과 신문화 도입으로 서구 유학파에 크게 밀렸던 ‘전통문화’가 지방분권을 앞두고 문화주권 운동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시민촛불’ 이 나라의 명운을 바꾸었듯이 ‘문화촛불’ 운동으로 민주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오는 6월 6일 부산에서는 ‘미래예술’ 창립포럼을 열고 현장 중심의 예술 자율성 확보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한다. 이미 경기도는 이같은 혁신의 모범 사례를 보여 왔다. 경기도립국악관현악단(예술감독: 최상화)이 러더쉽을 발휘해 악기개량, 악보 표기법, 연주 교칙본을 만들어 서양 사람들도 우리 국악기를 연주하고 작곡할 수 있도록 하는 혁명을 감행한 것. 한걸음 나아가 이번엔 외국 작곡가를 대상으로 국제 작곡 콩쿨 응모를 시작했다고 한다. 동, 서양이 만나는 것은 나라와 나라도 그러하고, 개인 역시 다르지 않다. 상대 문화를 존중하고 인정하면 호감이 생긴다. 점차 눈이 열리면서 교류가 깊어진다. 엊그제 김환기 작가의 ‘붉은 점화’ 작품이 홍콩 경매에서 85억원 한국 미술품 최고가를 낙착한 것도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닐 것이다. 꾸준한 경매 시장 진출로 우리 그림에 눈을 틔워 온 결과다. ‘전통’이 살아나기 위한 방법도 그렇다. 지속적으로 좋은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킬 것은 확실하게 건강성을 유지하고, 현대의 옷을 입히는 것은 탁월성을 획득해야 한다. 예술은 100이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 질적 수준을 높이는 것이 관건이다. 전문가들이 상호 융합을 통해 끌어 올려야 한다. 사실, 전통은 그동안 대중의 무관심, 관객 취약, 공간 부족 등 극복해야 할 과제가 한 둘이 아니다. 혼자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전통은 끼리끼리 문화를 만들었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틀을 깨어야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다. 이제 정치보다 예술이 앞장서서 사회를 이끌어가야 한다. 창의적인 예술가들이 관변에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 지원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수입품 과다이거나 고만고만한 것들의 잔치에 오히려 역기능을 초래할 수 있다. 세계인들의 입맛을 당기는 글로벌 문화 공감 시대를 만들어가야 한다. 최근의 남북교류 평화 협상은 새로운 조짐임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실크로드를 타고 우리문화가 세계 사람에게 위안과 기쁨을 줄 수 있다. 최근 정부는 해외 문화원의 예산을 크게 증액하고, 전문성을 강화할 것이라고 했다. 우수 작품을 선정하여 네트워크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고 한다. 뮤지컬 같은 상업 베이스의 지원은 정부가 관여하기보다 시장 논리에맡겨 정리가 되어야 혼선을 막을 수 있다. 경기도립국악단 같은 단체를 집중 지원해 혁신성을 보여주는 것이 효율적이 아닐까 한다. 오랫동안 우리는 서양 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 썼다. 그러나 햄버거, 피자를 일상의 식탁에 올려놓고 주식이 되기는 쉽지 않다. 정서도 마찬가지다. 핏속에 감도는 흥을 대신할 것을 밖에서 찾는 것보다 빼았긴 미각을 돌려놓는 일이 문화주권 시대가 할 일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미식가들도 비빔밥에 빠져들었다. 굴지의 세계 화장품 회사들이 천연재료의 한국 화장품을 벤치마킹한다니 격세지감이다. 오늘의 시대를 사는 예술가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명쾌하게 짚고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물 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문화도 흐른다. 비전과 도약을 위해 신발 끈을 묶는 힘찬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교칙본에 이어 세계의 작곡가들을 대상으로 한국 창작곡 공모를 펼쳐 우리 국악의 세계화에 신호탄을 쏘고 있다. 문화주권시대가 올 것이란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 돋보기] 문화브랜드 만들기와 상표권 수익은 가능할까

파리크라상, 본죽, 원할머니 보쌈, 한번 씩 들어본 적이 있는 유명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지금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 이들 회사 사주 일가들이 회사로 들어가야 할 상표사용료를 중간에서 챙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것이다. 현대는 모든 게 브랜드로 통하는 시대다. 세계 유명 브랜드 명품 가방이 잘 팔리자 짝퉁이 나와서 재미를 본 적도 있다. 유행하는 말로 3초 백이라고 하던가. 3초에 눈에 띌 만큼 대중 선풍을 일으킬 것이다. 문화나 공연 예술도 티켓을 팔기위해 안간힘을 쓴다. 흥행이란 결국 대중 소비자를 설득하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 발표회를 하는 예술가들은 자신의 얼굴을 브랜드로 내세운다. 때문에 대부분의 포스터가 좀은 과장된 촬영 기술에 의해 돋보이는 이지미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솔직히 이를 기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단체들은 단체 이름을 통해 상품화한다. KBS 교향악단, 서울시립교향악단, 국립오페라단, 경기필하모니, 국립합창단. 경기도립국악관현악단 등 관주도 예술단체의 이름이 개인 단체보다는 비교적 신뢰성이 높다. 개인단체도 역사가 오래된 것은 신뢰가 높다. 연륜이 주는 무게감이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솔리스트앙상블, 코리안심포니, 바로크쳄버오케스트라. 프라임오케스트라. 근자의 이마에스트리 등 많은 단체들이 이름 알리기에 온갖 힘을 쏟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한걸음 나아가 사업 마인드를 가지고 시도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 성악가 하만택 대표는 ‘코리아아르츠’란 주식회사를 만들어 오페라를 사업화하고 있다. 대치동 ‘가곡예술마을’은 순천에 본원을 두었고, 성용원 작곡가 역시 자신의 이니셜을 따서 ‘SW아트컴퍼니’란 네이밍으로 연주가들과 콘텐츠를 결합해 마켓을 개척하고 있다. 아예 거리(busking) 음악가를 자처한 노희섭 성악가는 500회가 넘는 거리 무료음악회를 통해 로또 복권 따기식의 공연대관에서 벗어나 자신의 무대를 만들어 간다. 기존 매니지먼트의 한계성을 벗어나 시장 개척을 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에서다. 그간은 대학 교수나 강사가 되려했지만 축소 일로에 있는 대학에서 희망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림 쪽 역시 기존 화랑 전시에서 벗어나 아파트 등 생활 밀집 지역으로 파고드는 경우다. . 노숙경 화가는 최근 ‘숙경 갤러리’를 만들어 인사동 전시의 화려한 명분(?)을 거두면서 활로가 개척되는 기쁨을 맛보고 있다고 했다. 물론 아티스트 중에는 지휘자 금난새, 소프라노 조수미 등 최고의 명성을 얻은 경우 그 자체가 브랜드다. 그러나 대부분은 개인 이름 보다는 작품이나 회사 브랜드를 키워야 하는 입장이다. 일본의 합창 주식회사는 합창단 60개를 만들어 관리한다고 했다. 요즘 우리가 말하는 프렌차이즈 형식이다. 이런 구조는 오래전에 일본 야마하 피아노가 학원 프렌츠차이즈를 통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때문에 우리 예술문화도 더 늦기 전에 본격 시장개척에 나서야 할 때가 왔다. 여기서 브랜드 만들기와 상표권은 기본이다. 특히 글로벌 시장개척을 하려면 우리끼리만 통하는 네이밍보다 글로벌한 감각을 가져야 유리하다. ‘바로크합주단’이 외국에 나갔을 때 이게 뭐야? 할 수 있다. 때문에 60년이나 된 브랜드를 몇 해 전에 ‘코리안쳄버’로 바꾼 것이 아닌가. 시대는 늘 변한다, 예술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브랜드’는 상표등록을 통해 권리를 보호 받는다. 필자의 ‘K-클래식’, ‘K-오페라’ 역시 글로벌 시장개척을 목표로 한 상표등록이다. 특성상 대부분이 개인일 수밖에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들이 먹고 살려면 창의성을 가진 예술사업가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정부의 기금지원정책도 바뀌어야 한다. 우리나라 공연장들이 대관 업무만 하는 것에 직무유기란 목소리가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창의의 예술가들이 예술작업에만 전념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브랜드 만들기와 상표권은 언제쯤 효력 발생이 가능할까. 우리가 진정으로 풀어 할 큰 과제다.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 돋보기] 노래방문화 가고 가곡시대 열리나

오랫동안 우리 생활속에 뿌리내린 노래방문화가 퇴조하고 있다. 김영란법 이후 접대, 향락문화가 달라지면서 음주문화에도 큰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이다. 타고 난 가무 민족인 우리는 유난히 흥이 넘친다. 음악과 무용에서 세계의 각종 콩쿠르를 석권하는 것에서도 충분히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이를 반영하듯 시민합창운동의 증가에다 근자에는 노래를 배우려는 동호인들이 크게 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도시마다, 동네 마다 시, 군의 가곡교실은 물론 성악가들이 가곡 클래스를 개설하면서 가속화되고 있다. 여기에는 세대와 연령층을 넘어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동참해 새로운 사교문화를 형성해가고 있다.실력도 성악가 못지않은 가창 솜씨를 뽐내는 경우도 있다. 일전에는 한 성악동호회에서 김명곤 전 문화부장관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오래전에 영화 서편제에서 판소리를 통해 대중에게도 잘 알려졌는데, 이번엔 벨칸토 창법으로 김동진의 가고파 전, 후편을 노래하는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김장관은 젊은 시절 마음에 품어 왔던 노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지난 가을부터 성악 실기에 도전해 무대에 섰다고 했다. 음악가들도 이런 흐름을 읽고 발빠르게 변신을 하고 있다. 그간 강사 자리만 쫏던 대학의 일자리 창출에서 탈피해 시장 개척을 위해 뛰고 일부는 소극장 만들기에 나서고 있다. 한편 전국의 가곡 동아리클럽은 50 여개에 이르지만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엊그제 3일간의 순천국제가곡제 야외음악축제는 학술 토론과 성악가, 외국 뮤지션이 참여하면서 격상된 지역 문화를 보여주었다. 순천시가 지원을 하는 등 주민참여로 호응이 매우 높았다. 바야흐로 지방분권시대에 가곡을 잘 키우면 관광에도 역할을 할 것 같다. 정부 역시 1인 1악기 배우기를 권장하고 나섰다. 초등학교에 오케스트라 만들기나 합창반 운영은 이들이 평생 살아갈 ‘정서 근육’을 키워 자립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방송국 등에서도 프로그램 편성을 달리해야 한다. 채널만 틀면 먹는 음식을 가지고 과다하게 노출하는 것이 과연 시청자를 위한 것일까. 음악은 귀로 먹는 것, 그림은 눈으로 먹는 것 등 훨씬 다양한 심미안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다면 이는 편식의 강요다. ‘먹방’은 의식을 마비시키고, 상상력과 창의력을 잠재운다. 사유하고 음미하는 삶의 향기나 멋과 맛을 잃게 해 결국 자칫 인생이 배고픔만 해결하면 만족하는 동물의 단순화로 안내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예술의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들이 땅콩 패밀리처럼 배부른 갑질의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을 때 사회 갈등도 줄어 들것이다. 문화에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힘이 있다. 나를 이야기 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통하는 것에서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있다. 앞으로 여가문화는 성장산업이기도 하다. 일만 하던 시대에서 잘 놀고 잘 즐기는 문화 모델이 계속 개발되었으면 한다. 놀이의 개념에서부터 콘텐츠 개발에 지역적 특성도 살아나야 한다. 개미처럼 일만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던 시절에서 노래하는 배짱이가 있어야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창의력 기반사회를 위해서라도 가곡 부르기 운동이 기초가 되었으면 한다. 노래는 저비용 고효율의 만족이다. 잘 노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을 만든다.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돋보기] 예술하기 좋은나라 나쁜나라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각 부처는 정책을 쏟아낸다. 문화 현장에서 40년을 겪어온 필자는 그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에 장관이 부임할 때 마다 一 聲(일성)은 현장과의 소통이다. 그리고 몇 번의 세미나를 개최하고 현장 사진을 담아 기사화하는 등 부지런하지만 소통엔 여전히 불만이다. 엊그제 블랙리스트 사건의 일차 보고가 있었다. 내달에는 그 전모를 밝힐 것이라고 한다. ‘소통’이 아니라 ‘장벽’을 쌓아온 적폐가 비단 이런 것에만 있을까. 보이지 않는 弊害(폐해)는 늘 전문성 없이 힘을 가진 권력의 갑질이다. 이들이 지원보다 훨씬 더 큰 예술 생태계 파괴가 오늘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고양시의 한 민간오케스트라가 공모 사업에 의혹을 제기하며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지역을 위해 20년 가까이 눈물과 땀으로 헌신했는데, 오케스트라 전국 공모를 해서 그것도 진행 과정을 공개하지 않아 절차상 하자가 있음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선뜻 납득이 어려운 것은 시민의 세금이 지방분권화 시대를 앞두고 이렇게 쓰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공무원에 의한 폐해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제주 도립합창단 지휘자 공모에서 절차의 부당함을 지적한 예술감독을 탈락시키고 3년여의 소송 끝에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상식적으로도 뻔한 잘못을 갑질 공무원이 행정력을 동원해 도민 세금으로 소송비용까지 지불하면서 반성은커녕 예술가를 괴롭히고 있으니 참으로 예술하기 나쁜 나라다. 합창단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단체에 적용되는 것이기에 앞으로 전문가들이 정책을 만들고 집행을 감시해야 한다. 이달에는 ‘대한민국 교향악단 악우회’가 만들어져 오케스트라 문제에 중재자 역할도 할 것이란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경기문화재단이 만들어지고 전국에 문화재단 창단 러시가 이뤄졌다. 하지만 우리 문화재단은 아직도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 리더의 잦은 이동과 전시 행정으로 빈약한 재원에 줄을 서는 예술가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중에는 탁월한 능력으로 문화를 꽃피워 풍성하게 시민에게 돌려주는 기관장들이 있음은 다행스럽다. 어떻게 하면 예술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우선 자리에 있는 분들이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직원들도 서비스 정신으로 예술가의 입장을 헤아려주어야 한다. 예술가들도 이기적이거나 자기 것만 생각하기에 앞서 정책 입장을 이해하고 행정 문법에 관심을 가지고 소통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잘못이 있다면 즉각 인정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예술 환경을 바꾸는 길이 아닐까 싶다. ‘한번 정하면 틀려도 끝까지 간다’는 공무원의 불패신화가 과연 오른 처신인가를 생각해 본다. 예술은 자유의 텃밭에서 창조하고 생산하며 그 가치를 공유한다. 규제나 간섭이 많으면 奇形(기형)을 낳게 된다. 몇 달 전 행정안전부(장관 김부겸)가 공직의 낡은 관행을 혁신해 신뢰받는 정부로 거듭나기 위해 공직의 일하는 방식에 혁신을 본격 추진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탁상행정이 아니라 협업과 소통을 통한 국민이 원하는 일을 효율적으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백만 공무원의 1분 1초가 국민을 위해 바뀌는 것이 업무혁신이다”라는 카피를 날렸다. 말만 들어도 배가 부르고, 기운이 솟아나는 것이지만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신문고는 찢어져 있고, 국민청원은 20만 명이 되어야 비로소 소리를 듣는다고 하니 이건 예술로서는 그림의 떡과 다름없다. 이상한 나라의 동화처럼 느껴지기에 거울아, 거울아 우리나라는 예술하기 좋은 나라냐, 나쁜 나라냐? 답을 좀 해다오.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 돋보기] 힘들어도 꽃처럼 살자

봄꽃들도 놀랐을 것이다. 북한 공연 소식에... 노래와 춤으로 하나임을 확인한 열기는 전해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펼쳐진 문화교류는 얼었던 강물이 녹듯 촉촉한 감동이었을 것 같다. 봄이 늦은 유럽의 시와 노래들엔 쓸쓸함이 베어있지만 우리에게 4월은 희망이다. 곳곳에 문화축제, 아트페스티벌에 물이 오르면서 눈길을 끈다. 축제는 사람이 만든 또 하나의 꽃밭이 아닌가. 좀은 바빠도 틈을 내어 간다면 일상의 고통과 피로를 씻을 수 있다. 지난 달 31일부터 예술의전당에선는 전국 시립교향악단이 참여하는 교향악축제가 열린다. 경기필(7일) 참여를 비롯해, 모두 18개의 교향악단이 참가한다. 국립오페라단 ‘마농’(5~8일)에 이어 4월 27일부터 한국오페라 70주년을 기념한 오페라축제도 열린다. ‘춘희’부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 중 하나인 ‘리골레토’,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우리말로 노래하는 임준희의 ‘천생연분’까지, 한국오페라 역사 속의 명장면을 파노라마처럼 펼치는 갈라콘서트다. 라벨라오페라단의 ‘가면무도회’(4월 27~29일),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5월 4~6일), 누오바오페라단의 ‘여우뎐’(5월 11~13일)도 오페라극장 무대 위에 오르는 대형 작품이다. 소극장용 오페라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18~20일)을 번안한 ‘썸타는 박사장 길들이기’와 판소리와 오페라를 결합한 판오페라 ‘흥부와 놀부’(25~27일)가 공연된다. 이 모든 축제의 진정한 주인공은 관객이다. 좋은 공연이 있으면 비행기를 타고서라보는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공연장을 찾는 것은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요즈음은 티켓 구매뿐만 아니라 해당 작품을 인터넷 검색하면 작품 줄거리는 물론 동영상에서 세계 명가수들을 볼 수 있으니 아는 만큼 즐기는 것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이 보석들을 담을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꽃이 피었어도 보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공연 티켓이 비싸다는 일부 여론도 없지 않지만 사실은 티켓 값으로 공연물이 올라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수억원의 예산이 드는 오페라의 경우 티켓을 다 팔아도 30%~40% 비용이 안되기때문이다. 언젠가 한 지역 예술단체가 한 해에 50억 가량 쓰는 예산을 일년동안 하는 정기 공연 회수와 관객 비율로 나눴더니 2~3만원 티켓 가격의 원가가 실제로는 20만원이 훌쩍 넘더라는 것이다. 해당 시가 문화복지 차원에서 공공예술단을 지원하고 있는 것을 안 관객들은 이후 매표에 매우 적극성을 보였다는 것. 축제에 오른 공연물들은 만찬이다. 오랜 준비와 정성이 담긴 요리다. 설혹 자신이 먹어보지 않은 메뉴라 할지라도 선입견 가지 말고 낯선 분야를 개척하는 것이 인생을 더 풍요하게, 더 즐겁게 사는 지혜가 아닐까 싶다. 언젠가 쾌속 질주하는 오토바이 동호인들이 클래식 공연장에 와서 음악을 들은 후 ‘내가 이런 음악을 왜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다는 게 후회가 된다’고 했다. 누구나 취미와 좋아하는 것이 따로 있다. 그러나 인생 이모작, 삼모직의 긴 삶의 여로에서 편식보다는 용기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준비해서 얻는 것과 노력없이 그저 듣고 보는 문화는 다르다. 보다 높은 가치를 획득하는 것은 훈련해 오르는 산처럼 다른 희열이 있다. 그래서 좀은 신경을 쓰고 준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4월, 봄 축제에 시와 노래와 춤과 오케스트라, 오페라가 너무 밝고 화사한 계절이어서 자칫 빠지기 쉬운 우울증을 씻어 낼 것이다. 티켓 몇 장 사서 눈뜨지 못한 이들에게 나눔을 실천한다면, 어찌 한 끼니의 식사 대접에 비유할까. 힘들어도 내가 누군가의 꽃이 되어 살자.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 돋보기] 한국오페라 70주년, 대중에 더 가까이

올해로 한국오페라가 7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한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심포지움, 기념음악회, 한국오페라 70년사 출간, 이인선 기념흉상 건립 등이다. 그러니까. 1948년 1월 16일 시공관, 국내 오페라의 선각자로 불리는 이인선 선생이 베르디의 오페라 ‘La Traviata 춘희’ 를 무대화한 것이 이 땅에 오페라를 첫 알린 최초의 일이다. 물론 오페라의 발상지인 이탈리아 오페라가 400년이 넘은 것에 비하면 일천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짧은 세월동안에 놀라운 성과들을 만들어냈다. 이중 괄목할만한 것이 국제수준에 이른 성악가들의 탄생이다. 홍혜경, 조수미, 신영옥을 비롯해 연광철 등 메트로폴리탄과 빈슈타츠오퍼에 당당하게 주역을 맞는 가수들이 늘고 있는 것은 우리 기량이 세계적임을 중명한다. 일취월장이란 말에 어울리는 성악가들이 한국의 성악을 크게 빛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찍이 파바로티의 선생인 깜보갈리아니가 생전에 한국이 세계 성악을 이끌 것이라 예언한 것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세계무대의 영광에 비하면 우리 현실은 안타깝고 우울하기까지 하다. 홈런을 칠 선수는 길러졌는데 제대로의 오페라하우스가 없다거나 설상가상, 오페라 관객층이 얼마나 있는가? 라는 물음 앞에선 맥이 빠진다. 관객이 형성되지 못해 무료로 청중을 모아야 한다면 채산성 악화는 불 보듯 뻔하다. 때문에 특히 지역에선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오페라를 관람할 기회가 줄어든다. 때문에 오페라에 대중의 이해가 낮고 특히 우리 소재, 우리 내용의 창작오페라가 관객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이번에 한국오페라 70주년사의 10년간 창작오페라를 정리하면서 많은 창작 활동이 일어난 것을 보고 반가웠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대부분 일회성 공연에 그치는 작품이 많아 시행착오를 하지 않을 정책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러니까 기금지원을 받기위해서 역사, 영웅 소재 인물에 집중된 탓이다. 경기도에도 많은 역사 인물과 스토리뿐만 아니라 전통 콘텐츠의 寶庫(보고)라 할 만 것들이 산재해있다. 대표 브랜드로 내 놓을 수 있는 작품은 무엇인가. 해외시장을 개척할 오페라 한 편이 있는가가 궁금하다. ‘누군가 오페라를 왜 봐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림 보고, 음악 듣고, 연극 보는 행위에 이유가 있을까. 종합예술인 오페라의 높은 예술적 가치를 느끼고 누리지 못한다면 그만큼 손해가 아닐런지.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오페라가 정착되지 못하고 대중과의 거리가 멀기만 하다. 티켓 가격이 비싸다는 비판도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오페라가 K- 팝에 이어 K-오페라로 세계 진출할 채비를 하고 있다. 라보엠, 리골레토, 아이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등 수많은 명작처럼 명작 하나가 탄생하면 그 힘은 실로 위대하다. 오페라정책을 바로 세운다면 예술 인력의 활동은 일자리 창출과도 직결된다. 종합예술의 다양한 요소들이 융합되는 과정애서 예술이 크게 발전한다. 솔로 중심의 음악회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오페라가 문화 중심축이 된다. 문화는 체험이다. 못보고 살아온 오늘의 기성세대여서 거리가 먼 것 같다. 자라나는 미래 아이들의 오페라 관람은 인생을 격조있게 살아갈 바탕을 만들어 준다. 바야흐로 배고픔의 시대를 넘어 정신의 허기짐을 풀어야 할 때다. 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출마자가 문화를 통해 시민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청사진이 나왔으면 한다. 복지 중 최고의 복지가 문화 복지이고, 이를 나누는 행위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의 가치요 보람이 아닐까 싶다.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 돋보기] 저녁이 있는 삶 문화가 중심돼야

노동에 힘을 들기 위해 부르는 것이 노동요다. 상주 모심기 노래, 베틀짜기 노래, 뱃노래, 철도 건설, 광산에서도 노동요가 땀을 씻어주었다. 미국 개척기 시절에도 카보이 노래들은 굵은 목소리에서 울리는 저음이 일품이었다. 그러다 도시로 옮겨가면서 틀이 박힌 공장 생활에 찌들게 된다. 부드러운 노래로 스트레스를 풀기 힘들어 진 것이다. 비트가 강한 록컨롤(rock’n’roll) 이 등장했다. 산업화의 찌꺼기를 풀어 주려면 강력한 해소법이 필요했다. 노동 시간의 증가는 삶을 피로하게 한다. 일에 중독되어 건강을 해치고, 각종 질병과 과로사에 노출돼 있다. 생활의 균형이 깨지면서 사회 발전도 저해되고 그 심각성이 날로 증대되어 왔다. 조기 퇴직 증후군으로 40~50대에 특히 고독사가 늘고 있다고 한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가 우리의 고속성장을 되돌아보게 한다. 지난 달 28일 실노동시간 단축법안(근로기준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로써 1주 7일간 최대 노동시간이 52시간으로 제한된다. 오는 7월부터 적용되는 법안이다. 늘어난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좋을까? 줄어든 만큼 기업의 생산성 문제 못지않게 개인 생활에도 준비가 필요하다. 결국 시간을 보내는 것은 비용과의 함수관계가 있다. 여가 콘텐트를 개발이 필요하다. ‘저녁이 있는 삶’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다. 선진국에 비해 가정문화, 가족문화가 거의 발달하지 못했다. 따로 따로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해 왔다. 오랜 권위주의, 가부장제도하에서의 대화법이 그렇고 , 구성원이 즐길 오락이나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명절 닐 고스톱을 하거나 윳놀이, 노래방 가는 것이 전부라면 이 한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저녁이 되면 도시가 한산해지는 유럽의 저녁 문화와 우리는 상당히 다르다. 밤 12시가 되어서도 흥청망청 놀이판이 존재하는 나라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음악회나 발레 공연을 보는 것 못지않게 미술관도 개방 시간을 고객에 맞추어야 한다. 현행 대부분의 미술관은 직장인들에겐 두루미의 식사초대다. 몇 해 전 스페인의 한 미술관에 들렀는데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무료입장이고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일상화된 문화 관람객에서 문화 저력을 보았다. 과연‘여유’란 무엇인가. ‘여가’란 무엇인가? 어떻게 보내느냐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와도 직결이다. 예전에 비해 취미 활동과 동호인 문화가 크게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런 한편에선 예술 관련 대학들의 취업난과 유학에서 돌아 온 아티스들의 활동 기반이 무너지고 있어 문화 소비자인 관객과 공급자의 균형이 깨트려지고 있다.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만족도가 높은 가정문화, 이웃과 소통하는 것에 문화가 윤활유 역할을 해야 한다. 얼마 전 한 기획자를 만났더니 아파트 옥상을 잘 가꾸어 이웃들과 함께 하는 가족음악회가 매우 호응이 좋다고 한다. 아파트 내 거주 예술가들이 참여하고 서로 음식을 한 가지씩 만들어와 나누며 소통하는 것을 보고 참 좋은 착상이라고 느꼈다. ‘저녁이 있는 삶’에 정답이 있겠는가. 사람은 혼자서 살수가 없듯이 공동체가 어떻게 서로 행복할 수 있을까. 연습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하고 서로 기쁨을 공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웃사촌이 아니라 이웃원수가 되어가는 세태에 아파트문화가 만들어낸 단절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오고 있다. 문화의전당이나 큰 시설의 공연장만이 문화가 아니라 몇 사람만 모여도 즐거웠던 우리의 전통 사랑방문화를 복원하는 것은 어떨까. 소유의 시대에서 공유의 시대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면 우리의 생각도 빠른 회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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