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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경기, 천년보물] 청자 음각 꽃무늬 잔과 받침

조명 아래 은은하게 반짝이는 고려의 청자 잔과 받침. 가만히 들여다보니 잔은 꽃모양을 닮아 입술이 살짝 들어가고, 받침에는 연꽃과 국화를 새겨 넣었다. 세밀한 디테일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릇을 감싸고 있는 은은한 비색의 유약은 문양이 잘 드러나도록 투명하고 맑다. 우리나라 청자는 용인 서리, 시흥 방산동 등 서해를 통해 유입된 중국 청자의 기술이 도입된 이후 그 기술이 점차 발전했다. 제작 초기의 어두운 태토는 밝아졌으며, 유색은 짙은 갈색이나 짙은 녹색조에서 점차 아름다운 푸른색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2세기에 이르러 고려인들이 사랑하는 비색청자가 만들어졌다.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청자 도편의 과학기술적 분석 결과를 토대로, 고려 비색청자의 숨겨진 비밀을 살펴보자. 첫째, 청자 유약색의 푸른빛을 내는 산화철 성분을 잘 조절해야 한다. 산화철 성분이 많으면 유약의 색이 어두워진다. 실제로 용인 서리와 시흥 방산동에서 만들어진 초기의 청자 유약에는 산화철 함량은 3% 정도였는데, 점차 줄어들어 12세기 강진과 부안의 비색청자에는 1.5% 이내에 그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초기청자에 비해 약 50% 가량 감소한 수치이다. 이러한 산화철 함량의 변화는 태토에서도 같은 양상을 보인다. 태토에 철함량이 많으면 바탕의 색이 어두워져 유색이 더 어둡게 보이고, 태토가 최대한 밝아야 푸른 유색이 더 돋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가마에서 도자기를 번조할 때 불 조절 또한 매우 중요하다. 비색을 내는데 있어 철의 전체적인 함량과 함께, 철의 환원상태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번조할 때 높은 온도에 이르면 가마를 밀폐하게 되는데, 이때 산소가 부족해지면서 유약에서 산소가 빠져나간다. 환원상태가 되는 것이다. 동일한 철함량을 갖는 청자도 산화분위기에서 번조되면 갈색을 띠고, 환원상태에 가까울수록 푸른색을 띤다. 조금 더 푸르거나 조금 더 녹색을 띠는 미묘하게 다른 색의 차이도 역시 철이온의 산화상태비율(Fe2+/Fe3+)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의 기물에서도 유색이 다양하게 나타나거나 혹은 가마 위치에 따라서도 다른 색을 띠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만큼 불조절이 까다로운 탓이다. 셋째, 유약의 두께가 어느 정도 두꺼워야한다. 깊은 바다가 더 푸르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실제로 초기 청자의 유약은 머리카락 두께보다 조금 더 두꺼운 100~200마이크론에 불과하나, 200년 동안 조금씩 두꺼워져 12세기가 되면 약400~800마이크론 정도로 4배가 된다. 연꽃잎 하나하나 새겨진 문양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파여진 곳의 유약이 더 두꺼워지면서 진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넷째, 바탕이 보일 듯 말 듯한 유약의 투명성은 고려 비색유약의 특징 중 하나이다. 유약의 단면을 전자현미경으로 확대하여 관찰하여 보면 거의 완전하게 녹아있고, 드문 드문 크고 작은 기포가 보인다. 기포는 빛을 굴절시켜 더욱 은은하게 보이도록 한다. 고려 청자의 유약은 융제 중에서도 칼슘성분이 많아 유약이 두꺼워도 비교적 잘 녹을 수 있다. 만일 유약이 완전하게 녹지 않으면 탁하고 불투명한 유약이 된다. 깊이 있게 빛나는 반투명한 유약은 그 성분과 불을 땔 때 최고의 번조온도에서 유지하는 시간, 온도를 올리는 속도를 적절하게 조절하여 얻어진 결과이다. 비색청자는 이름 모를 수많은 고려 도공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루어낸 독자적인 첨단 기술의 성과물이다. 도자기의 원료인 태토와 유약의 성분, 유약 두께의 조절 등 만들기 전 단계의 준비과정부터 가마의 특징을 적절히 활용한 번조기술을 조화롭게 운용하며 발전시켰다. 지금껏 천하제일로 칭송받는 고려의 비색청자는 이 땅에서 나는 질 좋은 흙과 독자적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최고의 아름다운 걸작이다. 이영은 경기도박물관 학예사

[천년경기, 천년보물] 검은베일 ‘몽수’

‘베일’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결혼식 때 신부가 머리에 쓰는 새하얀 면사포(面紗布)를 연상할 수도 있다. 900년 전 고려시대에도 ‘베일(veil)’이 있었으니 고려인들은 이를 ‘몽수(蒙首)’라 불렀다. ‘몽수’는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이란 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도경은 그가 송나라 사절단으로서 1123년 고려에 방문해 한 달 남짓 머무르며 고려의 생활상을 기술한 책이다. 따라서 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의 복식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당시 왕과 관리의 관복부터 서민의 옷차림까지 다양하게 묘사했다. 그 중 ‘몽수’는 여성들이 착용하는 것으로 다른 여성복식보다 많이 언급하며 직물의 종류와 대략적인 치수까지 기록했다. 그가 보기에 고려 여인들의 ‘몽수’가 송나라의 복식과 달랐기에 관심이 갔던 것일까. 그의 설명에 따르면, “몽수는 검은색 성근 견직물(?羅) 3폭에 한 폭의 길이가 8자(현재 치수로 약2.4m)로 이마에서부터 머리를 덮고 나머지는 땅에 끌리게 했다. 또한, 말을 탈 때도 몽수를 쓰는데 그 끝이 말 위를 덮으며 쓰개(笠)을 쓴다. 몽수의 값은 은(白金) 한 근과 맞먹었기에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지 착용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땅에 끌릴 만큼 긴 ‘몽수’가 불편할 법도 한데 고려 여인들은 왜 ‘몽수’를 착용했을까. 이 물음과 관련해 고려도경에 표현된 고려 여인들의 또 다른 모습에 주목해보면, “고려 여인들은 몸매가 드러나지 않도록 넉넉한 바지를 입고, 손톱마저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해 주머니로 가린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몽수’ 역시 몸이 드러나지 않도록 착용했던 것이 아닐까? 아쉽게도 고려 여인이 착용했던 ‘몽수’는 기록만 존재할 뿐 몽수의 형태를 증명할 수 있는 그림이나 실물자료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몽수’에 대한 궁금증은 클 수밖에 없다. 이에 경기도박물관에서는 ‘몽수’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도록 고려도경의 기록을 참고하여 ‘몽수’와 함께 900년 전 고려 여인의 복식인 하얀 모시저고리와 황색치마 ‘백저황상(白紵黃裳)’, 옷감 8폭을 이어 만들어 겨드랑이까지 끌어올려 입은 선군(旋裙), 백저포(白紵袍)를 재현했다. 검은 베일 ‘몽수’를 쓴 900년 전 고려 여인은 900년 전 코리아를 방문한 이방인-고려도경展이 끝나는 10월 21까지 기획전시실 앞에서 만나볼 수 있다. 경기도박물관 학예팀 이혜린

[천년경기, 천년보물] 900년 전 고려 사람들의 장례문화

때는 고려시대. 사회적인 명망도 있고, 꽤나 잘사는 가문의 사람이 죽었다. 가족들은 슬픔에 잠겨 죽은 이의 장례를 준비한다. 행세깨나 했던 이 집의 사람들은 죽은 이를 애도하며 당시 유행하던 불교식 화장(火葬)을 진행하고 뼈를 추려냈다. 그리고 지역에서 유명한 석공을 불러 석관(石棺)을 만들게 하였고, 석관 내부에 여러 문양과 사신도를 새겨 넣고 묻었다. 이 석관은 900여년이 지나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즘도 유행하는 장례문화가 있듯이 900년 전 이 땅에 살던 사람들도 선호하는 장례문화가 있었다. 지금부터 900년 전인 고려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장례문화가 있었을까. 장례의 구체적인 모습은 지역과 시대, 계층 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려시대 왕족을 비롯한 지배계층은 화장 후에 남은 유골을 석관 안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내세의 평안을 위하여 석관 안에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의 사신도 혹은 12지신을 새기기도 하였고, 석관 안쪽의 천장에는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등의 별자리를 새겨 넣기도 하였다. 이는 피장자의 사후 생활을 지키는 상징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서민들은 주로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땅에 묻었다. 그 중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화장을 하고 유골을 수습하여 크기가 작은 석관에 넣었거나, 옹관(甕棺)에 넣어 묻었기도 하였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에 행하는 장례문화도 있다. 1123년(인종1) 고려에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들 가운데 버려두어 봉분도 하지 않고 비석도 세우지 않으며 개미나 까마귀나 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두되…”라는 대목이 있다. 이를 통해 장례 치를 형편이 되지 않거나, 전염병이 돌았을 경우에는 풍장(風葬)이나 조장(鳥葬) 등을 시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기도박물관에는 고려시대 석관과 옹관이 있다. 석관은 길이 95㎝, 높이 35㎝에 바닥 판, 네 벽면, 덮개 총 6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관 벽면 내부에는 동서남북 방위를 상징하는 사신도가 해학적으로 그려져 있다. 옹관은 2005년 경기도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서 발견되었다. 옹관 주변에는 고려백자접시를 비롯한 중국 수입품인 흑유자기 등이 묻혀있었고, 내부에는 신장 165㎝ 안팎의 성인 남자로 추정되는 인골이 발견되었다. 두 유물 모두 고려시대 장례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죽은 이가 편히 잠들고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원한다. 고려 사람들의 장례문화 중 하나였던 석관과 옹관은 ‘2018 경기천년 기념 특별전 900년 전 이방인의 코리아 방문기-고려도경’이 열리고 있는 경기도박물관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경기도박물관 학예사 김혜연

[천년경기, 천년보물] 조영복의 ‘연행일록’

연행(燕行)이란 조선시대 사행(使行)을 일컫는 말로 연경(燕京) 즉 북경(北京)을 다녀옴을 뜻한다. 사신으로서 명나라 및 청나라에 다녀온 관료들은 이러한 연행의 기록을 자신의 문집이나 일기로 남기기 마련이었다. 외교적인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타국을 방문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보고들은 것들을 기록한 연행록은 일종의 사적인 여행기인 셈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하는 대표적인 연행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 1년 내내 크고 작은 사유로 중국의 명청에 사신을 보냈다. 그중 정조사(정월에 황제를 알현하는 사행)·동지사(동짓달에 황제를 알현하는 사행)·성절사(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행)가 삼절(三節)이라고 불리우는 정기적인 사행이었고 그 외에는 사은사 등 별도의 임시사절이 있었다. 이는 조선과 중국의 관계에서 가장 의례적이면서도 중요한 외교활동으로 이에 참여한 조선시대 관료들은 중대한 임무를 갖고 북경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회동관에 머물며 명청의 관료 및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문화적 사절의 역할 또한 병행하기도 했다. 조선 숙종대의 문신 조영복은 정사 조도빈, 서장관 신절과 함께 동지사의 부사로서 북경에 다녀왔다. 경기도박물관에는 조영복이 1719년 11월부터 그 다음해 3월까지 5개월 가량 청나라 북경을 다녀오면서 그 여행과정을 기록한 연행일록과 떠나기 앞서 당시 조정의 대신들과 동료들로부터 받은 송별시문을 모은 별장첩, 그리고 당대에 그가 명현들로 받은 간찰들이 함께 소장되어있다. 이들은 모두 경기도유형문화재 134호로 일괄지정 되어있다. 조영복은 성경(盛京, 오늘날의 심양)을 지나기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사행 동안의 일련의 여정에 관하여서 그다지 상세하게 적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참여한 사신단의 규모, 청나라를 가기까지의 여정, 청나라에서 견문한 것들 등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공적인 기록 사이사이의 빈칸들을 나름대로 채워볼 수 있다. 조영복은 동지부사로서 공적으로는 청나라 강희제를 만나기도 했고 사적으로는 청나라 문인들과 교유하며 평소의 제도적 관심사의 궁금증을 풀거나 유명한 서화가들의 작품을 접하여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도 하며 만족스럽게 귀국하였다. 그는 청에 다녀온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운명을 달리하였으니, 그의 일대기 중에서도 연행일록은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휴대전화와 디지털 카메라로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손쉽게 간직할 수 있다.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고 싶을 때, 혹은 제삼자가 그 기억을 엿보고 싶을 때 사진을 꺼내보며 비교적 원형 그대로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보다 훨씬 오래 전의 과거는 문자로 기록된 것만을 통하여 그 순간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대신 실제와 꼭 들어맞지 않더라도, 그 기록을 읽음으로써 과거의 그 장면을 무한히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만큼은 그때 그 순간을 기록한 화자가 되어 경험할 수 없는 과거를 여행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정태란 경기도박물관 학예사

[천년경기, 천년보물] 효종의 충신, 이완 장군 투구

허생전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가? 허생의 이야기를 듣고 청나라에 대적할 만한 자문을 구하고자 찾아온 어영청 대장이 있다. 허생이 던진 세 가지 해결책에 어렵다는 대답만 하며 결국 칼에 쫓겨 도망치고 후에 자신의 잘못이라 사과를 하러 찾아온 무인. 분명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지만 당시 시대상으로 본다면, 허생의 무례함과 변변찮음에도 직접 찾아가고 사과를 하러 다시 간다는 점에서 허생전은 그 어영청 대장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은연 중에 나타내고 있다. 그 어영청 대장이 바로 효종의 북벌을 추진한 인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인 이완이다. 효종의 군사력 증강 정책에서 어영대장을 맡아 병제와 군비를 재정비하는데 크게 기여한 이완은 훈련도감의 자리도 지냈다. 보통 공신이나 외척이 임명되는 자리에 그가 있는 것은 이례적인 일인데, 이완의 능력이 상당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능력이 있어 이름을 떨친 인물이니 허생전과 같은 소설에도 등장했을 것이다. 이러한 인물이 살아생전 쓰던 투구가 경기도박물관의 소장품에 속해있다. 투구란 무엇인가?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방호구로서 매우 중요한 부위를 방호하기에 중무장뿐만이 아니라 경무장을 할 때에도 쓰는, 전쟁에 출진할 때 쓰지 않는 일이 없는 방어구 중 하나이다. 무인으로서 이완이 가장 가까이 했을 물건을 꼽자면 이 투구가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 갈 것이다.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이 몰려 있는 신체 부위중 하나가 머리이기 때문인지 투구는 착용자의 개성과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투구 원래의 기능 말고도 많은 장식이 가해졌는데 이완의 투구도 마찬가지다. 무쇠로 된 기본 투구 아래로 이마를 덮도록 무늬를 새긴 얇은 판을 둘렀으며, 금도금으로 여기에 테두리를 두르고 눈 부분을 반달형으로 팠다. 투구의 꼭대기에도 금도금으로 화려하게 장식을 하였으며, 술을 달 수 있는 대가 설치 되어있다. 이완은 야사와 민담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인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이야기 속에서 나오는 그의 모습은 기개와 재치를 느낄 수 있는 면모가 많다. 밤중에 효종의 호출을 받아 궁에 들어서자 화살이 날아왔는데, 태연하게 효종의 대전까지 걸어갔다는 이야기, 산적 두목을 잡아 부하로 영입하는 이야기 등이 있다. 그렇다면 혹시 그 순간, 이완이 쓰고 있던 투구가 박물관에 있는 이 투구가 아닐까. 이완의 투구는 경기도 박물관의 일정에 맞춰서 전시되고 있다. 문종상 경기도박물관 학예사

[천년경기, 천년보물] 주목받지 못하는 유물-발괄(白活)

대부분 사람들은 역사 박물관을 갈 때, 옛 것을 보러 간다고 한다. 그리고 아름답고, 우아하고, 희귀하고, 영광스러운 유물들을 만나며 자랑스런 옛 조상들의 모습을 그린다. 그런데 그런 유물들이 옛 사람들 대부분의 실제 생활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당시의 고급문화는 현재의 고급문화와 마찬가지로 누리는 대상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 옛 선조들의 삶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럼 실제 생활을 보여주거나 추측해볼 수 있는 유물은 없는 걸까? 단순하고, 투박하고, 흔하면서, 애절하기까지 한 유물 종류를 소개해 볼까 한다. 물론 옛 삶의 전체 모습을 살피는 건 불가능하지만 겉으로 꾸미지 않은 실생활의 기록 중에 조금 특이한 것 말이다. 요즘도 그렇지만 일반인들이 사회생활에서 겪는 억울한 일들에 대해 행정관청에 호소하는 경우는 예로부터 많았다. 지금은 ‘민원’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전통사회의 관청은 행정, 사법 권한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므로, 단순 민원을 넘어 고소, 청원, 소송 등을 포괄했으며, 이때 서식에 따라 제출한 문서를 발괄 또는 소지(所志)이라고 한다.발괄은 순우리말의 이두식 표기법이지만, 한자 사용을 품위있다고 생각해온 문화 때문에 현재까지도 소지라는 한자식 표현도 많이 쓰인다. 또한 다른 고문서들 처럼 내용에도 이두가 많이 사용됐다. 실생활과 밀접하고, 직접 관련된 서민들이 주 대상이었기 때문에 한문 문장이 아니라 상당히 거친 이두문이 사용된 것이다. 이 발괄을 통해 서민들은 각종 개인적, 집단적 이해관계에 관한 일들을 관할 관청에 제출하고 고을 원(員;부윤,목사,부사,군수,현감,현령 등)의 판결이나 결정을 바랬다. 고을 원은 이를 보고, 발괄의 왼쪽 빈 여백이나 뒷면, 어떤 경우는 다른 종이를 덧붙여가면서 판결이나 지령을 쓴 후에 관인을 찍어 확인하고, 다시 돌려주었다. 이것을 뎨김[題音] 또는 제사(題辭)라고 한다. 이것은 고소에 대한 결정이고, 청원에 대한 답변이면서, 소송에 대한 판결이었기에 아주 소중하게 보관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긴 세월을 넘어 현재까지 그 모습을 남길 수 있었고, 현재 박물관에서 볼수 있는 고문서류 중 아주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내용은 서민들의 실재 생활 속 이해관계가 담겨있어서 대단히 다양다. 주로 재산분쟁, 조세에 관한 사항, 손해배상, 원한 등 고소, 고발들을 볼 수있는데, 특히 산송(山訟:조상의 산소와 관련한 소송)이 상당히 많다. 형식은 대체로 신청자의 주소·성명·내용·수신처·연월일순으로 되어 있다. 여러명이 집단으로 작성한 경우는 등장(等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고을 원에 올렸던 1차적인 발괄의 처분에 불만이 있을 경우는 의송(議送)이라는 서식으로 도지사에 해당하는 관찰사에게 다시 올렸다. 또 전통사회의 계급적인 차별도 반영되었는데, 양반들의 경우 발괄이나 소지라는 명칭의 사용보다는 단자(單子), 원정(原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서식도 좀 달랐고, 여러명이 연명할 경우는 상서(上書)라고 불렀다. 비록 문자해독이라는 이해상의 장벽과 문서라는 형식상의 딱딱함에도 불구하고, 발괄은 어려운 학문, 고급의 문화, 정치적 이해관계 등 양반들만의 생활을 다룬 기록이 아니다. 서민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실제적인 삶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너무 많아서 그 존재와 가치를 알아보기 힘든 유물이다.경기도박물관 수석학예사 곽창호

[천년경기, 천년보물] ‘소를 기르는 영척’ 이야기 거울

우리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외출 준비를 하고, 손거울로 자주 본인의 모습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옛날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까? 아마도 처음에는 잔잔한 물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청동거울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거울은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 또는 주술적인 도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양질의 동의 생산과 제작기술의 발달로 실생활에 사용하기 위한 많은 양의 청동 거울이 제작되었다. 중국에서 수입된 거울을 틀로 떠내어 똑같이 제작하거나, 문양의 일부를 본 따 변형시켜 만들기도 하였다. 둥근모양 외에 네모모양, 꽃모양, 모서리가 뾰족한 모양, 종모양 등 다양하다. 얼굴을 비추는 반대쪽에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무늬를 장식하였는데 물고기, 용, 꽃과 풀 등의 무늬뿐 아니라 중국의 신선세계, 당시 유행하던 소설의 한 장면, 한편의 시, 바다를 항해하는 장면 등 다양한 이야기를 새겼다. 경기도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 입구 테마전 교과서 돋보기에도 고려시대 거울 한 점이 있다. ‘소를 기르는 영척(寧戚飯牛)’이야기 거울이다. 1994년 경기도박물관에 입수되었지만 더 화려하고 정교한 여러 거울들에 밀려 전시실 빛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 보존처리를 통해 ‘갈고 닦이면서’ 드디어 14년 만에 교과서 돋보기라는 무대를 통해 첫 선을 보이게 되었다. 이 거울에는 두 인물과 소 한 마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영척(寧戚)은 중국 위나라 사람으로 고고한 덕을 갖추었으나 가난하여 소를 기르며 살았다. 어느 날 소뿔을 두드리며 “남산은 깨끗하고 흰 돌은 눈부신데 살아생전 요순시대 못 만났네” 노래를 불렀다. 제환공이 이를 듣고 그의 남다른 인품에 감명 받아 공경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고된 일을 하더라도 능력과 인품이 있다면 언제든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얼굴을 비춰보는 것 뿐 아니라 마음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교훈이 담겨 있는 것이다. ‘소를 기르는 영척’ 이야기 거울은 오는 7월24일까지 경기도박물관에 전시 될 예정이다. 조현이 경기도박물관 학예사

[천년경기, 천년보물] 천년경기에 봄이 온다… 박제성 作 ‘천년의 땅’

비옥하고 풍요로운 기전천리 안팎의 산과 물은 백이로구나 덕교에다 형세마저 겸하였으니 천년의 역년을 기약하도다. (정도전, 신도 팔경의 시를 올리다 중 경기의 산하) 천년의 긴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삶의 터전인 자연, 자연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흐르는 시간이다. 정도전의 예언대로 천년의 시간이 흐른 경기도는 복합문화, 첨단지식과 기술, 창조와 융합의 중심에 서있다. 경기도박물관은 지난 4월18일부터 ‘2018 경기천년 기념 특별전’ 천년 경기와 미디어의 만남, in 봄을 개막하였다. 천년의 시간이 담긴 소장 유물을 현대 미디어 작가의 눈으로 해석하고 창조한 작품이 중심이다. 이번 전시는 6점의 영상작품과 15여점의 유물이 스토리를 구성하고 있다. ‘천년의 땅’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기도 건축물을 유화적으로 표현한 영상작품으로 천년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찰나와 같은 우리 삶의 이야기를 표현하였다. ‘그 안 이야기’는 아트보드를 레이저 커팅한 도자기를 건축적 구조로 표현한 작품으로, 도자기 문양을 활용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린이들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작품은 책가도 가상현실(VR)이다. VR 기술로 구현된 ‘Retrospect & Prospect, 책가도’는 장한종의 책가도를 가운데에, 그리고 좌우에 근대와 현대의 책가도 모습을 배치했다. 또한 책가도에 놓여 있는 오브제는 모델링을 통해 구현하였으며, 주요 오브제의 경우에는 사운드 및 움직임 등의 인터랙션이 가능하여 어른들까지도 흥미를 자아낸다. ‘경기천년 역사와 미래’는 소셜 데이터를 활용하여 특정 지역의 감성적 표정을 QLED 모니터를 통해 볼 수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집단 감정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 얼굴 표정의 변화를 통해 보여주는 프로젝트다.그 변화의 근거는 웹상의 단어를 추출하고 데이터의 머신러닝을 통해 감정단어로 분류한 후, 수치화하여 분석하는 과정을 거쳐 표정으로 반영된다. 따라서 긍정적인 내용이 많으면 웃고 부정적인 내용이 많으면 슬픈 표정을 만든다. 경기도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 작품은 웃음이 많아졌다. 웃음이 많아질수록 경기도, 나아가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은 것이 아닐까?한편, 이번 전시는 6월 24일까지 관람할 수 있으며 3018년 경기연표 만들기 체험도 준비되어 있다. 경기도박물관 이지희 학예사

[천년경기, 천년보물] 성산이씨 장신구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는 청송심씨 심지원 묘와 파평윤씨 윤관 묘는 조선 영조 대부터 최근까지 400년간 묏자리를 두고 다툼을 벌여온 것으로 유명하다.심지원(沈之源, 1593∼1662) 은 조선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고, 윤관(尹瓘, ?∼1111) 은 고려중기 문신이면서 여진족 토벌과 동북 9성을 쌓은 업적으로 역사교과서에 실린 인물이다. 2008년 청송심씨와 파평윤씨 문중간의 화해로 심지원 묘와 신도비를 이전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경기도박물관에서는 발굴조사를 하게 되었다. 조사 대상은 심지원 묘와 신도비, 그의 할아버지 심종침 묘, 아버지 심설 묘 3기였지만, 이 이외에도 아들 심익창 등 후손 묘 여러 기도 이전 대상 이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한 가문의 묘제 양식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출토복식과 지석, 명기 등 다양한 유물을 수습하는 학술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관심을 끌었던 것은 심익창의 부인인 성산이씨 무덤이다. 심익창의 첫 번째 부인인 성산이씨는 효종 2년(1651) 12월 24일에 태어났지만 이미 그녀의 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였다. 열네 살에 시집을 가서 겨우 스물한 살에 병을 얻어 사망하고 불행히 자녀마저 없었다. 안타까운 삶의 기록과는 달리 성산이씨 무덤에서는 금실로 짠 봉황무늬 치마, 진주로 장식된 주머니와 더불어 다량의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수습된 장신구는 옥 반지 2점, 은제 반지 2점, 가지장식노리개 1점, 용두장식노리개 1점, 머리장신구 2점, 비녀 1점이다. 장신구는 오랜 기간 땅 속에 묻혀있었기 때문에 장식된 진주와 산호가 녹아 없어지거나 투각된 옥의 일부가 파손되긴 했지만 원래의 모습을 추정 할 수 있는 상태이다. 성산이씨 장신구는 지금까지 전해오는 조선시대 장신구들과 비교해서 장식이나 조형면에서 화려하고 뛰어나다.특히 반지와 비녀는 궁중과의 관련성이 제기되는데, 은제 반지는 덕수궁에서 전해져 내려온 반지와 형태 및 장식기법 면에서 아주 흡사하고, 비녀머리 둘레에 여러 가지 장식을 하여 아름답게 꾸민 영락잠(瓔珞簪)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대소의식이나 특별한 날 왕비를 비롯하여 공주, 옹주가 예복에 착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또한 심지원 일가는 심지원의 아들 심익현이 효종의 딸 숙명공주와 결혼하여 청평위에 봉해짐으로써 왕실과의 연관성도 존재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출토 장신구의 일부 혹은 대부분이 궁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장신구의 대부분은 제작시기와 착용자가 알려진 예가 드문 편인데 성산이씨 출토품은 화유옹주(1740∼1777)묘 출토 장신구와 함께 정확한 시기와 착용자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올해 들어 경기도박물관에서는 성산이씨 장신구의 연구조사를 통해 그 당시 모습을 알 수 있도록 복원작업을 시작하였다. 복원작업이 마무리 되면 사치를 금기시했던 조선시대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여성들의 장식 문화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경기도박물관 전익환 학예사

[천년경기, 천년보물] 보물 제1174호 ‘이중로 초상’

우리 박물관에서는 작년부터 기증자와 기증유물에 담긴 이야기를 영상으로 제작하고 있다. 작년에는 총 5건의 영상이 제작되었는데, 그 중에는 지난 2000년 보물 제1174호인 이중로 초상과 정사공신교서, 그리고 이지란초상 등 110여점을 기증해주신 청해이씨 세마공 종중도 있다. 인터뷰는 기증 당시 종중 회장이셨던 이희철선생님을 모셔 진행하였다. 전화로만 인사드리다가 막상 뵈니 늠름하고 인자한 품성이 어딘지 모르게 이지란장군의 DNA가 느껴졌다. “처음에는 초상화를 기증하면 아예 유물을 뺏기는 줄 알았지. 그런데 박물관에서 김준권선생이 자꾸 찾아오는 거야. 기증하면 초상화를 똑같이 그려드리고, 보관도 잘해준다면서…. 그래서 문중에서 상의하고 고민 끝에 기증하기로 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기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보관도 잘 해주고, 전시도 해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도 있고, 모사본도 그려줘서 지금 춘제 때나 일이 있을 때는 영당에 걸어놓고 제사를 지내지 무척 떨린다고 하셨지만 막상 인터뷰가 진행되니 조선 개국 당시 이지란장군과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와 기증 당시 상황을 마치 이야기 보따리가 풀린 듯 자세하게 말씀해주셨다. 전쟁 당시 살벌했던 상황에서도 쌀보다 귀하게 여기며 초상화를 보관하고, 고이 접어 이불 밑에 깔아놓고 지켜냈다고 한다. 화마(火魔) 속에서도 유물을 지켜낸 이야기를 하실 때는 살짝 눈가에 이슬이 맺힌 듯 했다. 조상의 초상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고, 선조 그 자체로 여기는 우리의 유교문화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님을, 종중의 일원으로서 평생을 사셨던 선생님의 삶 속에 고스란히 녹아 여전히 현재진행 중임을 절절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십대 소년으로 집안을 책임져야 했고, 가문의 유품을 지켜내야 했던 힘든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것임을 알면서도, 유물에 담긴 생생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어서 철없는 아이처럼 자꾸 더 말씀해달라고 졸랐다. 지금 기증된 초상화는 박물관 서화실에서 관람객을 맞고 있다. 어렵게 결심하신 덕분에 기증된 유물은 이제 우리 모두의 보물이 되었다. 이영은 경기도박물관 학예사

[천년경기 천년보물] 분청사기 상감 ‘정통4년명’ 김명리 묘지

1989년 경기도 광주 광남동에 위치한 무덤을 이장하면서 특이한 형태의 유물이 발견됐다. 바로 안동김씨 문온공파대종회에서 김명리(金明理: 1368.2~1438.12) 할아버지의 지석이다. 34㎝ 크기에 커다란 종형태의 분청사기 지석으로 전체적으로 흰글자가 빼곡이 쓰여있는 특이한 모습이었다. 이 도자기의 정식 이름은 ‘분청사기 상감‘정통4년명’ 김명리 묘지’로 묘의 주인인 조선시대 성천도호부 부사(成川都護府副使)를 지낸 김명리의 기록을 담고 있다. 묘지의 글은 무덤 주인공의 관직과 이름으로 시작한다. ‘조선국 봉정대부 성천도호부부사 겸 권농부사 안주좌익병마단련부사 김공 묘지’ 그리고 김명리의 가계·이력·성품·부인과 자녀에 대한 기록이다.마지막으로 ‘정통(正統) 4년 기미년(1439, 세종21) 겨울 10월 하순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지낸 류의손(柳義孫)이 삼가 짓다’라 하여 만든 시기를 밝히고 있다. 김명리가 1438년 12월 죽은 후 이듬해인 정통 4년(1439) 기미년 겨울 10월 하순이다. 지석의 바닥면에는 음각으로 ‘행자 학민(行者 學敏) 산직 단동(山直 丹同)’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전체 모양은 상부에서 저부로 내려오면서 직경이 약간 좁아지는 비대칭의 원통형이고 상면 중앙에 높이 4.0㎝의 연봉형(蓮峰形) 꼭지가 투각돼 있다. 묘지문은 몸체 전면에 걸쳐 백상감 기법으로 각서(刻書)하였다. 도자의 장식기법 중 바탕 흙과 다른 흰색 흙으로 무늬를 채워넣는 백상감기법을 이용해 글을 남기고 있다. 묘지란 죽은 사람의 구체적인 생애인 서(序)와 생애를 압축하여 적은 명(銘)으로 구성되며 지석, 광지, 묘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운다. 묘지는 중국 위(魏)나라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무덤을 사치스럽게 꾸미는 대신 두 장의 판석에 묘주의 기록을 새겨 묘광 앞에 묻도록 한 것에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조선시대 상류층에서 유행했다. 고려시대 유교적 예교(禮敎)를 장려하면서 상ㆍ장례에 석제 판석의 묘지가 등장한다. 당시 귀족들의 장례절차는 대부분 불교의식에 따라 행해지고 여기에 묘지라는 유교적 매장 문화와 도교의 사상이 혼합됐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 이념에 따라 성종 5년(1474)년 『국조오례의』를 완성하며 지석 2개를 만들어 누구의 묘인지, 묘주의 생애 등을 기록한 내용을 묻으라고 규정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면서 숭유억불의 정책을 펼치지만, 유교적 규범이 완전히 자리잡기 전인 조선 15세기에는 여전히 불교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지석들이 제작된다. ‘분청사기 종형’묘지도 여기에 해당된다. 이 종형 묘지의 꼭대기에는 연봉우리가 입체적으로 표현돼 있다. 연꽃은 고려시대 위패에 등장하던 장식요소로서 ‘연화세계’ 곧 ‘극락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자기로 만든 위패형 지석에 연꽃은 중심 문양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종형 묘지는 입체의 형태에 15세기 유행하던 ‘송설체’로 빼곡이 쓰여진 개인의 기록으로, 조선 초의 사료를 보완해주는 매우 귀한 자료이기도 하며, 현재까지 발견된 묘지 중 유일한 형태이다. 이 유물은 집안에서 귀중하게 보관하던 것이었으나, 2011년 박물관에 위탁되어 학술적 가치가 밝혀지고, 이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됐다. 이런 아름다운 사례는 문중의 이름을 빛낼 뿐만 아니라 경기도의 소중한 문화재로 보존되고 기록될 것이다. 지금 경기도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에 가면 조선시대를 살았던 ‘김명리’할아버지의 생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김영미 경기도박물관 학예팀

[천년경기, 천년보물] 뛰노는 두 마리 개

올해는 무술년(戊戌年) 황금개띠해다. 무술년에서 ‘무’가 오방색 가운데 황색을 뜻하기 때문이다. 열두 띠 중에 인간과 가장 친한 동물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이 ‘개’를 선택할 것이다. 개는 신석기시대부터 우리 곁에서 줄곧 공존해왔다. 때로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제사의 희생물이나 식용으로 이용되어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충직한 동물로 자리 잡았다. 경기도에 전해오는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개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훌륭한 개 이야기와 평생 고생만 하신 어머니가 개로 환생해 자식이 업고 전국을 구경한다는 이야기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서도 개는 친근함과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훈훈한 주인공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영모도(翎毛圖, 새와 짐승을 그린 그림)가 유행해 개가 등장하는 작품이 여럿 전해져 온다. 개 그림은 궁중에서 길상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민간에 까지 확산돼 민화로 유행했다. 조선 중기에 모견도, 화조구자도 등을 그린 화원(畵員, 왕실의 전속 화가) 이암(李巖, 1499년~미상)이 유명하며, 비운의 인물인 사도세자와 궁중 화원이었던 신윤복, 김홍도, 장승업, 김두량 등도 개를 섬세하게 그렸던 화가다. 이 중 김두량은 귀신 잡는 개로 알려진 삽살개를 잘 그렸는데, 하루는 영조 임금께 개를 그려 바친 일이 있었다. 영조는 그 그림을 보고 “밤에 사립문을 지키는 일이 너의 임무인데 어찌하여 낮에 여기 있느냐”고 꾸짖었다. 이는 신하들이 일보다는 권력을 두고 다투는 일을 개에 빗대어 말한 일화다. 애견인이었던 아들 사도세자에 반해, 영조는 개를 문지기 정도로만 생각했나 보다. 경기도박물관의 소장품 가운데 개를 소재로 한 조선시대 민화가 한 점 있다. 작가를 알 수 없어 우리가 붙인 그림의 제목은 뛰노는 두 마리 개다. 무척 귀여운 그림 속 개 두 마리는 부모 자식처럼 꼭 닮아있다.양귀비꽃이 개화하는 따스한 봄날, 꽃밭에서 뛰놀다가 갑자기 나타난 무언가로 인해 동시에 한 곳을 응시하는 장면을 그렸다. 날아가는 나비라도 함께 본 모양인데 자못 진지하다. 이들의 품종은 시추인 것 같다. 눈이 커서 얼핏 보면 유명 연예인 ‘전현무’씨를 약간 닮았는데, 둘 다 보고 있으면 유쾌한 기분이 든다. 이 그림은 2018년 개띠 해 새날을 맞이하여 이달 말까지 경기도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한준영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

[천년경기, 천년보물] 직금기린흉배

지난해 10월 심온의 5대손인 심융(1523~1602)의 부인 나주박씨(16세기 후반 추정) 묘에서 대군의 상징인 ‘직금기린흉배織金胸背麒麟’가 출토되었다. 기린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기린(Giraffe)과는 형태와 의미가 사뭇 다른, 고대 중국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동물이다. 복되고 길할 조짐을 나타내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고, 다른 짐승을 해치지 않는다 하여 인수(仁獸)라 하였다. 생김새는 일반적으로 용의 얼굴, 사슴의 몸, 소의 꼬리, 말의 발굽을 가지고 있고, 이마에는 뿔이 있다고 묘사된다. 실제로 나주박씨의 묘에서 출토된 기린의 모습을 보면 머리에는 뿔 하나가 있고, 몸은 비늘이 덮여 있다. 풍성한 꼬리털과 머리털, 위로 향한 턱수염 등은 용의 모습도 보이고, 특히 뿔 하나가 특징인 해치(해태)와는 더 비슷하다. 자세는 비스듬히 누워 왼쪽 앞다리를 살짝 들고 있는 모습으로, 다리 뒤쪽에는 털이 나 있고, 발굽은 두 쪽으로 나뉘어져 있다. 다리 앞쪽으로는 화염(火焰) 모양의 영기(靈氣)가 뒤를 향해 뻗어 있다. 조선시대 흉배장식이 처음 시행된 것은 단종 2년(1454)으로 대군에게는 ‘기린흉배’를 장식하도록 하였고, 1485년 경국대전 역시 ‘흉배대군기린’으로 법제화한 바 있다. 이후 인조 4년(1648) 기린흉배는 대군의 상징임을 언급한 대목이 보이며, 영조 21년(1745) 속대전에는 흉배제도가 다시 정비되면서 대군만이 아닌 왕자와 대군 모두 기린(麟)흉배를 쓸 것을 제도화한 것이 보인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기린흉배는 규정상 대군, 왕자만이 가능한 흉배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이러한 기록 이후 기린흉배는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의 ‘금사자수기린흉배’에서 그 실물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두 번째 자료가 나주박씨의 묘에서 출토된 16세기 ‘직금기린흉배’가 되는 셈이다. 아쉬운 점은 대군의 상징인 기린흉배가 정작 대군의 것으로는 실물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나주박씨 역시 남편인 심융의 관직이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호군(龍衛護軍)’라 하였으니, 절충장군은 정3품, 용양위호군은 종4품의 무관직이다.경국대전에는 무관의 흉배로 1·2품은 호표(호랑이와 표범), 3품은 웅비(곰)가 명시되어 있다. 나주박씨가 남편의 품계를 따랐다면 4품은 흉배 규정이 없으니, 무관 3품에 준했다 하더라도 웅비흉배를 달았어야 했다. 당시 흉배 제도가 잘 지켜지지 않았던 당시의 사회풍조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어쨌든 이번 ‘직금기린흉배’의 출토는 조선전기에만 수차례 언급되었던 ‘직금흉배기린’에 대한 실체를 확인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울러 벌레를 잡아먹지도, 풀을 밟지도 않고 걷는다는 신령스러운 동물이 경기 천년의 해를 맞이하여 출현한 것은 경기도의 태평성대와 길할 조짐을 예고하는 것은 아닐지! 정미숙 경기도박물관 학예팀

[천년경기, 천년보물] 초조대장경 화엄경 권제1(初雕本大方廣佛華嚴經 卷第一)

2018 경기천년 특별전 오!경기의 천년여행이 열리고 있는 경기도박물관 기획전시실에는 가로로 길게 펼쳐져 있는 두루마리가 한 점 있다. ‘초조대장경 화엄경 권제1(初雕本大方廣佛華嚴經 卷第一)’ 한자로만 가득한 다른 문서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이 유물은 의외로 국보(국보 제256호)이다. 어지간해서는 외부에 빌려주지 않고, 경기도박물관에서도 아껴가며 전시하는 ‘레어템’인 셈이다. 하지만 유물의 이름이 길고 뜻도 어려워 친해지기가 쉽지 않다. 간단히 풀이해 보면 ‘초조’는 처음 새겼다는 뜻이고 ‘대장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모아 정리한 경전을 말한다. 인쇄술이 발달하자 불경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경전을 나무판(木板)에 새기고 이를 찍어 두루마리나 책으로 만들었다.즉 ‘초조대장경’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새겨진 대장경이라는 의미로, 우리나라 대장경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에 비해 먼저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화엄경은 불교의 한 종파인 화엄종(華嚴宗)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을 가리킨다. 초조대장경은 고려의 거란 침입 때 만들어졌다. 고려는 한반도 북쪽에 위치했던 거란과 30년 가까이 전쟁을 했는데, 특히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때는 당시 임금이었던 현종(재위 1010~1031)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수도 개경을 빼앗겼을 정도로 위태로웠다. 이즈음 만들기 시작한 것이 초조대장경이다. 이규보의 기록에 ‘옛날 현종 2년(1011)에 거란의 왕(契丹主)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침략하자,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하였는데, 거란 군사는 오히려 송악성(松岳城)에 주둔하고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큰 서원을 하여 대장경을 판각해 완성한 뒤에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대장경에는 부처님의 힘을 빌어서라도 거란의 침입을 막고자 하는 고려인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이렇게 새겨진 화엄경을 인쇄한 것이 바로 저 두루마리이다. 1011년경 시작된 대장경 제작은 1087년(선종 4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232년 몽골 침략 때 대장경 목판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당시 간행된 인쇄본이니 귀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80권으로 이루어진 화엄경중에서도 유일한 권1이니 국보라는 지위(?)가 과한 것은 아니다. 까마득한 과거의 생활이나 이야기를 책으로 배워 짐작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장경과 같이 당시 사람들의 눈물, 두려움, 공포, 희망, 염원이 그대로 담겨있는 ‘타임캡슐’을 마주했을 때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생각보다 큰 즐거움과 배움을 선사할 것이라 확신한다. 이소희 경기도박물관 학예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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