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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영화 대배우 제나 롤런즈를 기억하며 [영화와 세상사이]

수년간 알츠하이머를 앓아 왔던 미국 배우 제나 롤런즈가 8월14일 세상을 떠났다. 종종 롤런즈는 미국 독립영화계의 아이콘 존 카사베츠 감독의 아내로 소개될 때가 있지만 롤런즈가 남긴 궤적을 들여다본다면 그 소개 문구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롤런즈가 없었다면 남편 존이 연출한 영화들이 지금까지 회자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창작의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롤런즈는 1930년 태어나 20대 때부터 영화와 연극, 텔레비전 등 매체 환경을 가리지 않고 연기 활동을 이어갔다. 카사베츠 역시 배우이자 연출자였기에 롤런즈는 남편이 만든 영화에서 때때로 함께 연기를 할 때도 있었다. 그는 남편이 연출한 ‘그림자들’(1959년), ‘얼굴들’(1968년), ‘별난 인연’(1971년), ‘오프닝 나이트’(1977년), ‘글로리아’(1980년), ‘사랑의 행로’(1984) 등 대부분의 영화에 출연했다. 2004년에는 아들 닉 카사베츠가 연출한 ‘노트북’에도 출연해 건재함을 알렸지만 이후 2010년대 들어서는 투병생활 등으로 배우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롤런즈의 출연작을 유심히 살펴볼 때 느껴지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연출자가 롤런즈가 맡은 배역의 캐릭터나 서사를 정교하게 구축하지 않았다는 것. 이에 따라 관객들은 인물 자체에 몰입할 기회를 얻는 대신 롤런즈라는 배우와 소통하게 된다. 결국 그가 출연하는 영화들은 연기의 영역이 아닌, 현실 속 롤런즈의 개인적인 면모들이 어느정도 반영된 세계다. 남편 카사베츠가 연출을 맡았던 ‘글로리아’를 살펴보자. 이 작품에서 롤런즈는 마피아에게 부모를 잃은 소년을 보호하는 한 여인을 연기했다. 마피아 회계 담당이던 잭은 FBI에 조직의 정보를 흘린 뒤 마피아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가 사는 집에 마피아들이 들이닥칠 위기의 순간, 그의 아내 제리는 옆집 이웃 글로리아에게 어린아이만은 데려가 살려 달라고 부탁한다. 카사베츠의 카메라는 벼랑 끝에 몰려 도망치는 여인과 소년을 어떻게 따라갔나. 쫓기는 자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마냥 달라붙지 않았다. 오히려 상당수 구간에서 감독은 길거리든 방 안이든 그 어디든 간에 카메라를 떨어뜨려 놓고 망원렌즈로 줌을 조절해 가면서 이들을 관찰한다. 심지어 각본에서도 카사베츠는 글로리아의 서사를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관객들이 글로리아에 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제한된다. 사연 많아 보이는 과거를 간직한 채 내 옆에 달라 붙은 골칫덩어리 소년을 보호해야 하는 한 여인. 그런 글로리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와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가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때 글로리아를 관객들과 가깝게 이어 붙여 주는 존재가 바로 배역을 소화한 롤런즈의 존재 자체가 아닌가.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길을 끄는 구간이 있다. 아빠의 생사를 걱정하는 여섯 살배기 소년에게 글로리아가 “그냥 꿈이라고 생각해. 자다 보면 꿈에서 죽을 수도 있잖니. 자고 일어나 보면 살아 있고 말이야”라고 둘러대는 장면이 떠오른다. 또 도망치다 묵게 된 숙소에서 글로리아는 소년과 함께 누워 대화하다 소년이 헛소리를 한다고 여겨 아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 밑으로 밀쳐 떨어뜨린다. 도무지 아이에게 정을 붙이려고 하지 않는 차가운 글로리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구간이지만 롤런즈의 연기가 이 배역의 언행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셈이다. 관객들은 그의 연기를 보면서 신경질적인 말의 뉘앙스와 그리고 아이를 성가신 듯 바라보는 눈빛이 뒤섞여 있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나이대 중년 여성이 흔히 느낄 법한 모성의 본능 내지는 아이를 향한 연민도 함께 서려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신경쇠약 증상을 지닌 한 가정주부의 삶을 담아낸 ‘영향 아래 있는 여자’나 무대 안팎을 오가는 연극 배우의 고뇌를 조명한 ‘오프닝 나이트’에서 롤런즈가 맡은 인물들도 역시 비슷하다. 서사에는 깊이와 밀도가 없다. 그저 롤런즈에게 의지한 채 영화가 계속되는 것이다. 어쩌면 남편 존은 아내를 믿고 그에게 자유를 부여했을 수도 있다. 옆에서 가장 오랜 시간 함께했던 동반자인 남편은 롤런즈의 연기가 틀에 가둬 두기보다는 느슨하게 풀었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롤런즈는 남편 카사베츠의 카메라에 여러 차례 담겼고 그 속에서 감정과 몸짓을 마음껏 표출했다. 때로는 정적이고 때로는 동적인 움직임에는 삶과 연기를 오갔던, 영화인으로서 그의 일상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다.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미국 독립영화계를 이끌었던 롤런즈의 필모그래피나 위업 따위가 아니라 스크린 속에서 미세하게 떨리던 그의 눈가주름이나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이어야 한다.

시리즈의 근간과 멀어져 버린 ‘에이리언: 로물루스’ [영화와 세상사이]

에이리언 시리즈의 최신작 ‘에이리언: 로물루스’(이하 ‘로물루스’)가 지난 8월14일 국내 개봉했다. 1979년 리들리 스콧이 ‘에이리언’을 내놓은 뒤 올해로 45주년을 맞은 에이리언 프랜차이즈는 정식 4부작, 프리퀄 시리즈에 이어 프레데터 캐릭터를 동원한 외전 콘텐츠나 게임까지 외연을 넓혀왔지만, 2017년 개봉한 프리퀄 두 번째 영화인 ‘에이리언: 커버넌트’가 실망스러운 흥행 성적을 낸 이후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잊혀가고 있었다. 이 시점에 등장한 ‘로물루스’가 시리즈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평이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하지만 ‘로물루스’는 시리즈에 대한 관심도를 일시적으로 끌어올릴 수는 있어도, 절대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 이유는 ‘로물루스’가 에이리언 세계관에 깔린 토대이자 근간을 은근슬쩍 간과하고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이 영화는 겉으로만 보면 에이리언 시리즈에 대한 애정과 헌사로 가득해보이지만, 정작 시리즈를 관통하는 핵심을 다루는 데엔 실패했다. ‘로물루스’는 1979년 리들리 스콧이 빚어낸 뒤 이어진 테마를 되살리는 방법을 모르는 결과물로 보인다. 오히려 그걸 도구로만 활용하기에 바쁘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에이리언 시리즈를 뻔한 장르물의 틀에 가둬버리는 데에만 집중하는 모양새다. 폭력과 번식력을 강하게 내뿜는 생명체 ‘제노모프’는 단단한 외피로 둘러싸인 덕분에 극한의 환경에서도 생존이 가능하고, 체내엔 산성 혈액이 흐르고 있어 자가 방어기제 역시 완벽하게 작동한다. 에이리언 시리즈가 다른 괴수·크리처물이나 호러·스릴러 장르물과 다른 노선에서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선명하게 각인된 제노모프의 존재감 때문이다. 더 중요한 건 이 생명체가 어떻게 우리들 눈앞에 나타나게 됐는지 따져보는 일이다. 이때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점이 있다. 제노모프가 자연 발생한 미지의 존재인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 생명체인지 판가름하자는 말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묘사된 요소들에만 집중해 보자. 이 미지의 생명체들이 어째서 다른 생명체에 의존해 태어나야만 하는지, 또 그 숙주로 채택된 존재가 인간이기에 과연 그들이 인류와 어떤 관계에 놓여야만 하는지 들여다봐야 하지 않겠나. 서사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영화를 움직이는 힘은 바로 그로부터 출발한다. 결국 이 시리즈에선 생명체들 사이에 형성되는 현상을 어떻게 영화 언어로 풀어낼지 고민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장르의 동력을 자아내는 공포 자체가 바로 서로 다른 생명체들이 각자를 받아들이고 대응하는 과정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인간과 제노모프가 굳게 닫힌 투명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숨죽인 채 서로를 의식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통상의 장르물이라면, 장면을 자주 전환하고 기괴한 음악을 삽입해 공포감을 조성하는 데 집중할 테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요소는 따로 있다. 숙주가 되어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에 공포와 무력감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 그런 인간과 문 하나 사이의 거리만큼 가까워진 제노모프의 맹목적인 목표 의식이 빚어내는 잔혹함 말이다. 하지만 ‘로물루스’는 이런 요소들을 제대로 다루는 영화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로물루스’의 후반부에는 주인공 레인이 쏟아지는 제노모프 무리를 퇴치하는 액션 신이 기다리고 있다. 에이리언 2편 속 인간들처럼, 레인은 펄스 소총을 들고 제노모프에게 사정없이 총알을 쏟아붓는다. 이 과정에서 레인은 선체 내부에서 작동하는 중력 발생 장치의 주기를 활용해 위기를 영리하게 극복한다. 이 신에서 감독은 불리한 조건에서 인간이 어떻게 제노모프를 상대하는지 상세히 조명했다. 총기 액션, 무중력 상태와 중력 상태를 오가는 인간의 몸짓 등을 비롯한 장르의 쾌감 요소가 밀도 있게 나열된다. 하지만 핵심이 빠져 있다. 달려드는 여러 마리의 제노모프가 공포의 대상이 아닌 게임 속 처리 대상인 유닛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인간에게 집착하는 면모나 그 경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와 상호작용하는 레인 역시 제노모프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묘사되지 않는다. 그저 액션의 스펙터클만 강조된 채, 이미지의 향연만 생산되는 셈이다. 게다가 감독 페데 알바레즈는 자신의 전작 ‘맨 인 더 다크’를 상당 부분 빌려와 이번 영화를 구성하는 데 활용했다. 이곳의 제노모프는 ‘맨 인 더 다크’ 속 눈이 먼 노인이고, 레인을 비롯한 주인공 청년들은 그 영화에서 눈 먼 노인의 집을 털러 들어간 좀도둑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결국 ‘로물루스’가 우주에서 벌어지는 ‘맨 인 더 다크’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로 문제다. 또 알바레즈는 리들리 스콧의 1편과 제임스 카메론의 2편을 적절히 배합해 ‘로물루스’를 빚어냈다. 또 스스로 에이리언 시리즈의 팬을 자처하는 감독은 한 편 안에 지금까지 이어져온 에이리언 영화 속 명장면이나 중요한 소재 등을 아낌없이 녹여냈다. ‘로물루스’에서 합성인간 앤디가 위기에 빠진 레인을 도와줄 때 내뱉는 대사 ‘get away from her, you bitch’가 2편에 등장했던 리플리의 대사였던 것만 봐도 그렇다. 결국 알바레즈의 ‘로물루스’는 감독의 전작들과 지금껏 공개된 에이리언 프랜차이즈를 버무린 결과물일 뿐이다. 모든 이미지와 레퍼런스들의 총집합체라는 점에서 안전한 작품이지만, 한편으로는 지향점을 설정하는 데 실패한 껍데기일 뿐이 아닌가. 재밌게도 ‘로물루스’는 프랜차이즈의 유산을 적극 활용했지만, 역설적으로 정작 시리즈의 근간을 제대로 파악해서 빚어낸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그러니 이 영화를 두고 “에이리언 시리즈를 태동하게 한 초심으로 돌아갔다”고 단정 지으면 안 된다. 오히려 시리즈의 근간을 은근슬쩍 호러, 스릴러, 스페이스 오페라 따위의 장르 관습으로만 덮어버린 위장술처럼 느껴진다.

‘댓글부대’는 정말 존재하는가? [영화와 세상사이]

사회부 기자 임상진(손석구)의 내레이션으로 출발하는 영화 ‘댓글부대’의 시작과 끝을 잘 살펴보자. 임상진은 헌정 사상 초유의 탄핵 사태를 이끌어냈던 ‘촛불시위’의 기원부터 시작해 거대 기업 만전그룹이 개입된 여론 조작의 연대기를 엮어낸다. 임상진은 “이것들은 내가 기자의 사명을 걸고 직접 취재해서 알아낸 것들”이라고 말한다. 이어 이 이야기가 한 중소 기술개발업체 대표의 제보로 시작된다고 덧붙이는 임상진의 말을 시작으로 영화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른다. 이제 관객들이 ‘댓글부대’를 음미하는 방법에 관해 말해 보려고 한다. 영화가 짜여 있는 방식을 살펴볼 때 그 매력을 더 음미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결론부터 짚어보자. 결국 관객들은 댓글부대의 모든 이야기가 결국은 해직 처분을 받은 전직 기자 임상진이 한 커뮤니티에 올린 ‘취재썰’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말에 이르러 임상진은 “내 기사를 받아주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지만 이제는 상관없다”며 “나는 온라인 여론 조작의 역사와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내 기사에 담았다”고 털어놓으며 한 PC방에서 ‘전직 기자가 직접 쓴 취재썰’이라는 제목의 글을 업로드한다. ■ 진실과 거짓,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관객들은 영화 내내 신문사 기자로서의 임상진을 계속해서 봐 왔지만 그가 사실은 망상증 환자에 PC방을 들락거리며 늘상 커뮤니티에 상주하는 백수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결국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인다. 감독이 영화 댓글부대에서 다루는 지점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여론 조작에 가담했던 댓글부대 ‘팀 알렙’의 멤버 중 한 명인 찻탓캇(닉네임·본명 이영준)은 임상진에게 완벽한 거짓을 말했던 걸까? 임상진이 찻탓캇에게 속았다고 여긴 뒤 복잡한 심경을 부여잡으며 혼자서 읊조리는 대사를 떠올려 보자. “완전한 진실보다 거짓이 섞인 진실이 더 진짜 같다. 완전한 거짓엔 진실이 없지만, ‘거짓에 진실을 섞었다’는 말은 진실에 거짓을 섞었다는 말이고, 완전한 거짓이 아니라면 진실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것들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라는 소리다.”(극 중 임상진의 내레이션) 이후 임상진은 회사에서 해고당한 뒤 2년간 물밑에서 취재를 이어간다. 수소문 끝에 음지에 숨어 지내는 내부고발자인 만전의 전 직원을 만난다. 그가 바로 만전 내에 여론전담팀이 있다는 사실을 인터넷에 폭로했던 사람인데, 그 제보자는 “제 기사가 어디까지가 진짜였는데요”라고 묻는 임상진에게 “거기 나온 내용 전부 가짜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 말을 듣는 임상진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임상진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때 재밌는 점은 과연 이 제보자의 말조차도 우리가 완전히 믿을 수 있느냐는 것. 이 제보자가 찻탓캇에 관해 말하는 내용 역시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 확언할 수 없지 않은가. 이는 임상진에게도, 또 관객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임상진도, 관객들도 과연 진실과 거짓을 어떤 잣대로 구분하고 수용해야 하는 것인가? 결국 대기업의 여론조작 실체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여론조작으로 누군가가 자살하거나 개봉작의 흥행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 터진 게 댓글부대의 작업 때문이라는 사실도 증명되지 않았다. 결국 관객들이 접한 모든 정보에 대한 진위가 도마에 오른다. 그렇지만 이들을 제대로 검증할 방법은 없다. 믿을지, 믿지 않을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결국 영화 댓글부대는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되묻는다. ‘무엇을 어떻게 믿을지 알아서 판단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 관객이 있어야 성립되는 영화 ‘댓글부대’ 결국 댓글부대라는 영화는 이를 감상하는 관객들, 즉 수용자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작품이 된다. 댓글부대에 관해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단순히 작품 안에서만 머무를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작품뿐만 아니라 작품을 음미하는 수용자들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해야 영화의 가치를 곱씹어볼 수 있다. 영화는 ‘밈’, ‘가십’ 등 온라인 환경을 구성하는 콘텐츠 수용과 생산의 구조를 품고 있다.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이 같은 정보를 향유할 수 있는 ‘수용자’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정보를 접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없으면 콘텐츠는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러니 진실이든 거짓이든 무엇이 됐든 끊임없는 재생산과 재소환 구조가 유지되기 위해선 관객들인 우리가 필요한 셈이다. 다시 영화를 둘러싼 구조를 살펴보자. 영화가 결말에 이르러 어떤 노선을 택하고 있나? 영화는 스스로가 영화라는 작품의 틀에 갇히는 길을 포기한다. 그 대신 밈, 루머, 가십의 총집합체로 변모하는 과정 그 자체가 되려고 한다. 결국 임상진이 겪은 이 모든 일이 완벽한 허구로만 구성된 한낱 ‘구라’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선택한 그 결말은 또 하나의 댓글부대를 만들어낼 테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조가 반복될 테다. 러닝타임이 종료된 이후가 더 존재감을 강하게 남기는 작품들이 있다. 댓글부대 역시 그렇다. 영화가 상영되는 도중이 아닌, 영화가 끝난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우리들의 현실에서 댓글부대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그들은 정말 존재할까?

‘펄프 픽션’, 싸구려 소설 독자의 마음에 가까워지기 [영화와 세상사이]

1994년 10월, 미국의 영화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토크쇼 진행자 찰리 로즈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 ‘펄프 픽션’(1994년)의 플롯과 이야기 전개 방식에 대한 생각을 밝힌다. 그는 “내가 만약 펄프 픽션을 소설로 써내고 이 쇼에 나왔다면 당신(진행자)은 이야기 구조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하지 않을 것”이라며 “왜냐하면 소설은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즉, 소설가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있어 완전한 자유가 보장돼 있다. 그게 바로 내가 영화에서 하고자 하는 영역”이라고 설명한다. 이어 “이야기는 끊임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급작스러운 사건이나 놀랄 만한 반전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펼쳐지는 무언가”라고 덧붙인다. 타란티노에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영화 펄프 픽션이 어느덧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지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의 영화가 여전히 기묘한 활력을 뿜어낸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각종 대중문화 코드에 기댄 채 과감하고 예측 불가능한 스토리텔링으로 세계를 구축해온 타란티노의 작품들 중 펄프 픽션에는 유독 앞서 타란티노가 밝힌 그의 ‘이야기 철학’이 꿈틀대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펼쳐져야 하며 정해진 틀 없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전달돼도 문제가 없다는 것. 이런 마음으로 영화를 다시 본다면 타란티노의 내면과 소통해볼 수 있지 않을까. 20세기 미국에선 질 낮은 종이에 인쇄해 저렴한 가격에 팔던 싸구려 소설 잡지, 일명 ‘펄프 픽션(Pulp Fiction)’이 유행했다. 그 속은 로맨스, 공상과학(SF), 오컬트, 호러 등 각종 장르를 욱여넣은 데다 자극적인 소재로 점철된 콘텐츠로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영화 펄프 픽션 역시 언뜻 보면 마치 싸구려 잡지를 스크린에 옮겨놓은 시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곱씹어볼수록 이 영화가 그런 싸구려 소설 내지는 잡지를 뒤적이는 이의 심리 자체를 스크린에 녹여내는 작품처럼 다가왔다는 게 중요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특정 구간마다 암전 상태로 쪼개지는 영화의 각 시퀀스를 잡지 속 각각의 섹션으로 간주해보자. 그리고 관객들을 이제부터 잡지를 읽는 독자로 설정해보자. 가상의 독자 A씨는 밥을 먹다 식당을 털어 보자는 허술한 커플 강도의 사연을 읽다가 문득 잡지의 구성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몇 페이지를 훌쩍 넘기니까 미아와 빈센트의 이야기도 나오고, 또 수십 페이지를 건너뛰니 복서 부치의 이야기도 나온다. 어느 페이지를 펼치든 시원치 않아 이리저리 뒤적이다 결국 처음 읽었던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렇게 펄프 픽션을 접하는 A씨는 마침내 잡지를 덮고 따분한 감정을 표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 영화 속 배치된 신과 시퀀스 순서는 얼마든지 달라져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매력으로 꼽는 수미상관 구조 역시 의미 부여를 하자면 끝없이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면 그저 ‘잡지를 뒤적이는 독자의 마음’에 기대 넘겨 버릴 수도 있다. 애초에 각 인물이 겪었던 서사가 순서대로 짜맞춰지는 작업 자체는 이 영화에서 아무런 의미도 얻지 못한다. 그러니까 지금 제시된 편집 순서는 그저 하나의 판본일 뿐 얼마든지 다른 판본의 펄프 픽션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저 타란티노가 최종 편집본을 매듭지을 당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버전의 싸구려 잡지를 접하고 있는 셈이다. 지면을 영화로 불러낸 펄프 픽션처럼 매체의 전이를 형상화하는 시도들이 간혹 있다. 게임을 영상으로 옮겨 놓은 듯한 ‘하드코어 헨리’나 ‘카터’라든가, 잡지라는 형식에 매달려 그걸 영화로 풀어낸 듯한 ‘프렌치 디스패치’, 회화를 그대로 스크린에 불러낸 ‘끝없음에 관하여’ 같은 작품들 말이다. 이때 펄프 픽션은 스스로가 싸구려 잡지임을 선언하나 오히려 잡지 그 자체로 보기엔 다소 의아한 구간이 많다. 스스로가 형식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리고 특정 양식에 갇히지 않으려 발버둥 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타란티노는 영화라는 매체를 빌려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하나의 사례를 만들어낸 셈이다. 여기서 즐긴다는 것은 창작자와 관객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늘 플롯이 선형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늘 서사는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사건이 예측 가능한 선에서 완벽한 타이밍에 발생해야 한다는 법칙 등 창작자라면 암묵적으로 따라야 하는 요소들이 있을 테다. 타란티노는 이런 것들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그렇게 타란티노가 마구잡이로 펼쳐 놓은 이야기 덩어리들은 관객 저마다에게 다른 기준과 방식으로 스며들면서 개개인의 기호에 맞는 싸구려 잡지로 변모한다. 그렇게 펄프 픽션은 잡지를 보는 독자의 내면에 가까워지게 만드는 매개체이자 윤활유가 된다.

예언을 넘어, 일상이 된 영화 ‘그녀(her)’ [영화와 세상사이]

10년 전 국내 개봉했던 한 영화를 언급하고자 한다. 2014년 관객들과 만났던 ‘그녀(her)’. 아내와 이혼한 남자가 우연히 구매한 인공지능 운영 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담아낸 이 SF영화는 2025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가까운 미래상을 그려냈다. 영화 속에서 묘사됐던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는 연출과 각본을 맡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생각해낸 대사들과 상황들에 기반해 펼쳐졌다. ‘그녀’에서 인공지능(AI) 사만다는 구매자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와 소통을 반복해 점점 가까워지면서도 스스로 학습과 발전을 거듭하며 자의식을 갖춰나간다. 결국 사만다는 사전에 설정된 본연의 임무를 뒤로하고 인간의 곁을 떠난다. 이때 인공지능이 주체성을 갖게 되면서 인간의 지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영역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비단 이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과 영상을 비롯한 수많은 콘텐츠에서 확인할 수 있다. 테오도르는 AI를 인간처럼 대했지만 인간과 기계 사이 극복될 수 없는 간극을 끝내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런 그가 마침내 찾아낸 마음의 안식처는 결국 사람이었다. 사람은 사람과 사랑하고, 사람으로 치유받을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인간 중심의 논리가 영화의 엔딩에서 구체화됐다. 결국 ‘그녀’는 상상만 하던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를 영상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인간이 인공지능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그 존재와 융화되는 과정이 녹록지 않다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지난 5월13일 미국의 오픈 AI사는 차세대 인공지능 모델 ‘GPT-4o’를 공개했다. 이제 GPT-4o를 통해 인류는 1초 안팎의 반응 속도를 지닌 AI와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이어갈 수 있다. 기존 AI와 비교하면 2~4배 빠른 데다 대화를 나누는 이의 음성을 인식해 감정을 이해하는 모습도 보여준 만큼 영화 속 인공지능이 마침내 현실에서도 구현됐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에선 AI가 개개인에 맞춰 상용화된 시기가 2025년이고 현실 속 인류는 2024년을 지나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영화 ‘그녀’는 마치 예언처럼 우리 곁을 다시 맴돌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AI와 인간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SF 장르에서 중요한 건 창작자의 관점과 태도다. “현 시점의 인간이 다가올 미래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 이 질문이 적절하게 다뤄질 때 콘텐츠의 입체성과 생명력이 살아날 수 있다. 이때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 속 깊숙이 침투하는 상황을 가정한 채 진행되는 수많은 영화들이 떠오른다. ‘매트릭스’ 시리즈나 ‘터미네이터’ 시리즈 등 대중 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줄을 잇는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대다수 콘텐츠는 미래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데 혈안이 됐다는 점을 기억해보자. 물론 도달하지 않은 미래의 여백을 상상력만으로 채우려면 다양한 갈래의 생각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에 이런 묘사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같은 방식을 탈피해야만 한다. AI의 발전에 달려 있는 세계의 존속과 같은 거대 담론에만 매달리면 시야가 좁아질 위험이 있다. 그보다는 AI가 삶에 침투했을 때 지금 내 곁에서 또 우리 일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꼭 곱씹어 봐야 할 장면은 따로 있다. 시스템 업그레이드로 인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만다를 애타게 찾던 테오도르가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다가 갑작스레 복귀한 사만다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시퀀스를 떠올려 보자.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테오도르에게 바짝 붙어 클로즈업했기 때문에 그의 곁을 지나치는 주변 행인의 존재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앞선 구간에서도 종종 카메라는 사만다와 대화를 나누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화면 가득 채울 때가 많았다. 이 장면 역시 이전의 구간과 당장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순간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해주고, 자신과 일상을 나누던 게 아니라 8천316명과 동시에 이야기하고, 641명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로 인한 내면의 변화를 겪는 테오도르의 눈에는 그제야 주변 행인들이 저마다의 사만다와 대화하는 장면들이 들어온다. 관객들 역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개인용 AI를 통해 소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테오도르와 함께 알아차리게 된 셈이다. 이 구간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다가올, 또 이미 다가왔을지도 모르는 세계를 다루는 데 있어 사소한 순간에 주목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이 영화는 세계의 멸망이나 인류의 위기 같은 거대 담론에는 관심이 없다. 누구나 체감하는 일상, 그 속에서 연쇄로 피어나는 관계의 변화를 세심하게 포착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영화 ‘그녀’는 어떤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걸까. 인공지능을 손쉽게 구매해 개인이 사용하기 편리하게 세팅하는 ‘그녀’의 세계가 완전한 실재도 아니고 완전한 허구도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 보고 싶다. 다시 말해 영화 속 세계는 문명의 대변혁이 일어난 미래 도시도 아니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세계관도 아니다. 그저 적당한 현실감을 머금은 채 충분히 발생 가능한 에피소드로 가득한 곳이다. 곧 우리들의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세계인 셈이다. 이제 영화 ‘그녀’는 단순한 예언을 넘어 하나의 교본 내지는 참고본이 됐다.

미래에서 과거로 향하는 이유 [영화와 세상사이]

■ 미래에서 바라보는 과거…‘어떻게’에 집중한 ‘테넷’ 2020년 개봉한 영화 ‘테넷’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프리야와 주도자의 대화 신이다. “사토르는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브로커 역할을 하고 있어(프리야)”, “미래와 소통한다?(주도자)”, “우리 모두가 해. 이메일, 문자, 신용카드… 모든 게 기록돼서 남으니까 미래와 소통하는 거지(프리야)”, 그리고 이어지는 프리야의 질문. “그렇다면 미래도 과거와 소통할까?” 이 질문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필요없는 물음이다. 미래는 당연히 과거를 응시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곱씹어본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전진의 동력을 찾아내지 않나. 우리가 지금 남기고 있는 정보와 기록들은 지금 우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미래의 우리가 과거를 돌아볼 때 유용하게 쓰인다. 현재 우리가 실시간으로 남기는 흔적들은 지금 이 시점의 우리를 정립하는 재료가 아니라 우리의 자취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요소들일 뿐이다. 결국 테넷에서 관객들은 미래의 세력들이 현재로 요원들을 보내 인류가 직면하게 되는 참극을 사전에 막는 모습을 본다. 이때 미래는 당연히 과거와 접속할 뿐만 아니라 과거를 건드려 현재에 이은 미래까지도 바꿔 버린다. 이때 테넷과 같이 ‘시간 역행’을 소재로 삼아 과거를 바꿔 미래까지 영향을 미치게 하는 시도들은 다양한 영화에서 다뤘던 작업이기 때문에 특별하지 않다. 문제는 이런 시도들이 ‘왜’ 진행돼야 하냐는 것이다. 이들은 왜 시간을 거스르고, 이들이 왜 미래에서 과거로 또 현재로 건너와 일어날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저울질하며 고민에 빠져야 하는 걸까. 사실 테넷은 ‘왜’보다는 ‘어떻게’에 집중했다. 그 덕택에 이 영화는 독특한 작품으로 취급받고 있다. 개봉한 지 4년이 지났지만 이 영화만큼 역재생 기법을 다양한 방식으로 소화해낸 사례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시피 하다는 점에서다. 그도 그럴 것이 테넷에 담겨 있는 역재생 신들은 단순히 촬영본을 되감기한 장면으로만 구성된 게 아니라 직접 배우들이 거꾸로 액션하고 연기하면서 담아낸 장면들도 많이 포함돼 있다. 연출자인 크리스토퍼 놀런의 신작 ‘오펜하이머’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등을 휩쓸며 화제의 반열에 올랐지만 사실 놀런의 테크닉은 전작인 테넷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만큼 테넷은 기술과 연출 측면에서는 분명 주목할 만한 영화다. 그렇지만 테넷은 시간을 주물렀을 때 그 인과관계가 무너지고 다시 재정립되는 방식에만 초점을 맞출 뿐인 영화다. 다시 말해 미래의 존재가 과거에 개입하는 순간, 그 존재의 내면이 어떨지 들여다보는 데에는 한계를 드러낸다. 인류의 비극을 초래할 핵전쟁을 막자는 대의를 위해 요원들이 움직인다는 점은 알겠지만 그 이상의 동기나 명분, 내면의 고뇌 따위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요소들이 아니다. 결국 인간은 과거를 바라볼 수 있을 뿐 미래가 어떨지는 상상에만 맡겨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우리는 미래의 우리가 어떤 마음일지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 스트레인지는 ‘왜’ 시간을 거슬러야만 했나 이때 또 다른 영화 한 편을 함께 언급하고 싶다. 바로 2016년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는 테넷과 ‘역재생’이라는 키워드로 한데 묶일 수 있다. 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의 후반부 역재생 시퀀스는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이자 테넷과의 차별점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구간이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역재생이 흥미로운 이유는 세상이 파괴된 이후 재건 과정이 상세히 조명되기 때문이다. 악당 케실리우스와 그의 수하들이 홍콩에 도착해 웡을 비롯한 마법사들과 대치하는 장면, 그리고 이어지는 스트레인지와 모르도의 대화 신, 그리고 슬링 링을 지나 다시 펼쳐지는 홍콩. 이때 스트레인지와 모르도는 이미 폐허가 된 도시를 직면한다. 결의를 다지던 웡은 온데간데없고 시민들은 죽어 있으며, 생텀은 파괴됐고, ‘너무 늦었다’는 모르도의 대사가 극 내외에 선명하게 각인된다. 어째서 영화는 도시가 실시간으로 박살나는 현장의 급박함 대신 이미 벌어진 참상을 관객에게 제시했을까. 놀런은 테넷을 만들 때 건물을 실제로 폭파한 뒤 그것이 촬영된 필름을 되감았다. 그렇지만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런 실재하는 감각 자체엔 큰 관심이 없다. 그저 너와 나의 세계가 지속될 수 있는지, 그러니까 닥터 스트레인지의 스크린 안에는 그 가능성만이 맴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영화 속 홍콩이 폐허가 된 뒤 재건되는 과정은 잘못될 걸 알면서도 선택을 내려야 하는 존재들의 딜레마를 부각시킨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우리는 역행하는 시간대를 거슬러 순행의 상태로 존재하는 스트레인지가 어떤 마음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있는지 가늠해볼 기회를 비교적 선명하게 얻을 수 있다. 스트레인지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미래를 되돌려 과거로 향한 뒤 다시 발 딛고 살게 될 미래의 세상을 구한다. 테넷의 주도자 역시 닐과 함께 세상을 구했다. 이 과정에서 테넷은 당도한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관객에게 주도자가 막고자 하는 미래의 비극은 드러나지 않은 셈이다. 주도자가 과거를 바로잡아 인류를 구하려는 사명감이 느껴지긴 해도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몸부림치는지 가늠해보기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도르마무와의 거래 장면이 아니라 바로 파괴된 홍콩이 폐허에서 복구되는 장면이다. 관객들은 타임스톤을 이용해 시간을 되돌리는 스트레인지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한다. 흐르는 시간을 조작했기 때문에 스트레인지는 자연의 법칙을 거슬렀다는 점에서 분명 무언가를 감내해야 할 테다. 그들은 어째서 미래에서 과거를 돌아봐야만 했을까. 테넷은 그에 대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 답변을 제시했다.

‘파묘’, 우리 앞에 나타난 건 무엇인가 [영화와 세상사이]

지난 2월22일 개봉한 ‘파묘’는 모처럼 극장가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천만을 돌파했다는 단순 관객 수로만 잣대 삼아 영화를 바라봐선 안 된다. 영화를 감싸는 담론이 다채롭게, 또 활발하게 전개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관객과 평단의 반응이 제각각 갈렸으며 평자들과 유튜버들은 저마다의 리뷰와 해석 영상을 올리기 바쁘다. 그렇다면 파묘는 왜 사람들을 끌어당겼나. 그 이유는 파묘가 어떤 영화인지 파악하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파묘는 단순한 미스터리 오컬트가 아니다. 미지의 영역을 내버려두지 않고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무언가로 바꾸는 영화다. 또 공포의 근원을 애써 무시하지 않고 기꺼이 그걸 해소하고 치유하려는 태도가 돋보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에 영화 속 인물들이 왜 이 여정에 몸담게 되며, 왜 각자에게 이런 역할이 부여됐는지 따져보면 영화에 깃든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 풍수사, 무당, 장의사의 여정 풍수사 상덕(최민식)은 남들이 지나칠 법한 명당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그는 명당을 발견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풍수지리에 의지한다. 이제 풍수사가 정령을 처단할 때 삽입되는 보이스오버를 떠올려 본다. 이미지로 설명해도 될 순간을 과하게 말로만 풀어내는 방식처럼 느낄 수 있겠으나, 영화에 일관되게 배어 있는 논리로만 보면 타당한 귀결점이자 선택이다. 풍수사는 모두가 볼 수 있는 요소 가운데 남들은 볼 수 없는 걸 봐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봤던 것들은 그의 입으로 설명하지 않는 이상 남들이 알아차릴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허리가 끊겨 있는 한반도의 정기 회복을 위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정령을 처단하는 자가 돼야만 하는 여정 자체는 그에게 필연이자 운명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영화 내내 비중이 없어 보이는 장의사 영근(유해진)의 행보에 의문을 품는 관객이 있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 역시 파묘의 서사로 보면 당연한 전개다. 장의사는 자신이 다루는 대상과 원활히 소통할 수 없다. 시체를 누구보다 잘 다루지만 시체는 소통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장의사는 결코 정령을 상대할 수 없다. 무당 화림(김고은)과 봉길(이도현)도 마찬가지다. 무당은 귀신과 영혼 따위의 존재들을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느낀다. 하지만 정작 그것들을 개체 대 개체로 직면하는 데엔 어려움을 겪는다. 그저 누군가에 빙의된 형태로만 마주할 뿐 온전한 존재를 마주할 수는 없다. 그렇게 물리적인 실체를 느낄 새도 없이 영혼들은 육체를 들락거리고 인간을 기만한다. 이에 파묘에서 화림은 오니를 대면할 때, 자신이 모시는 신을 끌어들여 속임수를 동원해 일종의 필터를 마련한 채 상대했다. 그렇기에 오직 풍수사만이 고단한 육체를 내세워 다이묘(오니·일본 귀신·도깨비)와 개체와 개체로 맞설 수 있다. 상덕은 대면해서 판단한다. 두 가지 메커니즘이 그를 지배하고 있다. 그는 일단 대면해서 자신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들을 가려내는 작업에 돌입하려 든다. 그런 점에서 오니는 풍수사를 당황하게 만드는 존재다. 오니는 풍수사가 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니는 제멋대로 풍수사 앞에 나타나거나 사라진다. ■ 우리 앞에 나타난 건 무엇인가 우리는 그 과정에서 도깨비불로 변하는 다이묘의 형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도깨비불은 풍수사와 무당 그리고 장의사를 포함해 관객들까지 한데 묶어주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다이묘는 그 자체로 모습을 드러낼 때 모두를 압도하는 대상이긴 했으나 그 자태를 보기 위해선 몇 가지 제약을 극복해야만 했다. 하지만 도깨비불은 다르다. 도깨비불이 하늘로 치솟으면 모두가 넋 놓고 바라본다. 도깨비불은 누구라도 쉽게 그 등장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누구라도 홀린 듯 쳐다보게 된다. 거대한 정령이 순식간의 꿈틀대는 화염으로 변모해 하늘을 맴돌 때 사람들은 그 불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그저 현혹된 듯, 영혼을 빼앗긴 듯 쳐다만 본다. 그렇게 활활 타는 화염을 바라보는 얼굴 클로즈업 숏이 하나씩 관객에게 제시된다. 그렇다면 그 이후 따라오는 질문. 이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관객들은 그들이 불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정작 영화는 도깨비불과 관객들이 온전히 서로간 대면할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물들이 보고 느꼈던 화염과, 관객들이 가늠하고 짐작하는 화염 사이 빈틈이 생기게 된다. 이를테면 인식의 차이, 즉 같은 대상을 다르게 인식하는 자그마한 균열이 발생하는 것이다. 재밌게도 이 균열을 닫아버리는 건 다름 아닌 도깨비불의 다른 형태인 다이묘 자체다. 왜냐하면 다이묘는 도깨비불과 다르게, 관객과 인물들에게 나타나는 데 있어 다른 방식으로 분열되지 않는다. 관객에게도, 인물들에게도 다이묘는 그저 다이묘다. ■ 미스터리를 해소하는 영화 이어 짚어야만 하는 질문이 또 있다. 다이묘는 왜 우리 앞에 나타났는가? 그건 바로 파묘가 ‘문제의 근원’을 해소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다이묘가 온전히 사라지려면 모두에게 동일한 방식과 형태로 나타났다가 오롯이 소멸해야 한다. 파묘는 그 해결의 과정 전반과 그에 배어 있는 논리를 보여주는 영화이고, 그를 위해 영화 내 모든 요소가 기술적·미학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일 양국의 무속신앙을 엮어내고, 그 신앙과 문화의 충돌을 다루기 위해 첩장이라는 소재까지 동원한 파묘는 각종 설정과 다채로운 장르 요소의 외피로 둘러싸여 있다. 결국 파묘는 한반도에 꽂혀 있는, 봉인된 일본 귀신을 끄집어내 없애는 이야기다.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우리가 마주하는 공포나 미스터리를 영화가 어떻게 대하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곡성’이나 여타 오컬트 영화와 다르게 파묘는 초자연적인 존재라든가 미지의 공포를 뿜어내는 대상을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로 남겨 두지 않았다. 해소할 수 있고 씻어낼 수 있는 분명한 속성을 부여했다. 이건 파묘가 악령이나 원혼을 그려내는 방식만 봐도 알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령의 육성이 들리고, 정령화된 오니가 인물들의 눈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나. 만약 도깨비불이 사라질 수 없는 불가사의 그 자체로 주인공들을 계속 괴롭혔다면 이 영화는 미지의 공포를 다루는 코스믹호러 장르의 하위 변주에 지나지 않았을 게 뻔했다. 이 과정에서 미지의 존재를 그려내는 방식이 영화의 호불호로 이어졌다. 문제는 그 표현법이 바로 영화의 핵심이자 근간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파묘는 우리 앞에 나타난 게 무엇인지 그려내고, 붙잡아 파헤치다가 마침내 그 안에 엉킨 미지의 실타래를 완전히 풀어 해체한다. 그 과정을 버텨내야만 우리가 모두 미스터리에서 해방될 수 있기에 파묘의 선택을 지지하고 싶다.

‘중경삼림’, 변화는 흔적으로 느낀다 [영화와 세상사이]

올해는 ‘중경삼림’ 개봉 30주년이다. 이에 맞춰 2월 말부터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 ‘해피투게더’, ‘타락천사’, ‘2046’을 비롯한 영화들과 함께 ‘중경삼림’이 극장가에 다시 소환되면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다. 사실 ‘중경삼림’과 같이 붙어 다니는 수식어 내지는 미사여구는 너무나 많다. 90년대 홍콩 반환 직전의 혼란스러운 감성을 잘 표현했다느니, 부유하는 청춘들의 감정을 형형색색 도시의 풍경과 엮어냈다느니 하는 말들이 그렇다. 심지어 영화가 동시대에 미치는 영향력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경찰 663 역으로 분한 배우 양조위가 극 중 처음 등장하는 순간은 유튜브에서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여전히 반복 재생되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이제는 ‘중경삼림’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왜 대중의 무의식에 자리잡아 존재감을 발산하는지 들여다볼 때다. 과연 영화에 어떤 매력이 깃들어 있는 걸까. ■ 변화를 알아차리는 건 어려운 일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를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변화’를 인지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의 헤어스타일이 바뀌었는지, 같은 자리에 늘 두던 그 물건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를 둘러싼 환경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따져봐야 소통을 향한 창구가 열릴 수 있다. 하지만 변화를 알아차리는 건 어려운 일이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하루가 지나 있거나 그 사람의 마음이 떠나갔거나 내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페이(왕페이)가 경찰 663(양조위)의 집을 몰래 청소하고, 집 내부의 물건이나 흔적을 임의로 바꿨지만 663이 크고 작은 변화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기에 ‘중경삼림’이 이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맴돌고 있는 영화고, 관객은 그들과 접속할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왜냐하면 영화가 관객에게 넌지시 물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들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과연 그들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던지고 있다. 1부와 2부로 쪼개진 구성에서, 네 명의 인물이 각기 다른 속도로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교차했다가도 평행선을 그린다. 관객들은 각기 다른 인물들의 사연을 매개로 영화 속에 뛰어들지만 이내 길을 잃어 버린 뒤 영화가 빚어낸 세계에서 치열하게 고민한다. 이제 관객들은 출구를 찾는 대신 인물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 과연 우리는 인물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중경삼림’을 어떻게 감상해야 친근하게 느껴질까. 먼저 영화 속 인물이 무언가 변화를 알아차리는 순간을 현실 속 관객인 우리들이 정확하게 짚어낼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해보자. 이유는 인물들 각자의 독백(내레이션) 때문이다. 그들이 각자의 사연이나 심리 상태를 늘어놓을 때 발화 시점과 화면 정보의 서술 시점은 늘 어긋나 있고 내적 세계에서의 인물의 발화 시점이 내레이션의 발화 시점과도 일치하지 않을 때도 많다. 경찰 663이 끝내 오지 않는 페이를 기다리다 체념하고 돌아서는 장면에서, 그 사람이 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해하며 되뇌는 663의 목소리가 삽입된다. 이 구간에서 663의 음성을 통해 전달되는 그의 내면 상태, 그가 처한 상황은 함께 제시되는 장면들과 정확하게 호응하거나 일치하지 않는다. 이 점에 주목해보면 우리는 스크린 속 663은 어떤 마음일지 자유롭게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고, 또 목소리로 자신을 드러내는 663이 어떤 상황에서 말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중경삼림’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관객이 인물과 만나려는 방식에 따라 각자만의 경로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결코 똑같은 버전의 ‘중경삼림’을 감상할 수는 없다. 각자에게 각자만의 ‘중경삼림’ 판본이 생겨나는 셈이다. 다른 사례를 살펴보자. 마약 밀매상(임청하)과 경찰 223(금성무)이 처음 가까워지는 순간. 223은 내레이션으로 자신의 내면과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때의 화자는 용의자를 쫓는 경찰 본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이때의 223은 현재 달리고 있는 223과 같은 시공간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다. 이때의 내레이션이 열심히 내달리는 223의 내면 상태를 지시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프레임 밖으로 223이 벗어난 뒤에도 화자의 내레이션은 독립적으로, 마치 미래를 예언하듯이 밀매상의 존재를 223 본인의 서사에 편입시키려고 한다. 하나의 인물이 분열된다. 카메라에 찍히는 인물, 그리고 그 인물의 내면을 서술하려는 존재로 갈라지고 있다. ■ 변화를 느끼려면, 흔적을 붙잡아야 결국 ‘중경삼림’ 속 인물은 자신의 변화 상태를 관객에게 제대로 털어놓을 수 없다. 관객은 이들의 감정 혹은 심리에 관한 정보를 전달받거나 수용할 수는 있어도 인물들과 이러한 것들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는 없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그럴 수 없는 영화라고 봐도 좋다. 그렇다면 ‘중경삼림’에서 인물과 가까워지기 위해선 그들 주변을 맴도는 것들에 집중해야 한다. 그들과 관계된 모든 요소들이 그들의 심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 속 세계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무언가를 지시하는 흔적이라든가 물리적인 매개체 따위의 것이다. 우리는 흔적과 매개체를 통해 ‘변화’를 느끼기 때문이다. ‘중경삼림’을 보는 관객들은 통조림을 먹는 223 자체를 조명하기보다는 인물의 손에 들린 통조림을 붙들고 늘어져야 한다. 또 관객들은 술집과 식당이나 운동장 그리고 경찰의 집에 머무르면서 무엇이 예전과 달라졌는지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문득 663이 집에 둔 비누를 보면서 말을 거는 장면이 떠오른다. 비누에게 왜 뚱뚱해졌냐며 말을 거는 663은 “그녀는 없지만, 자신을 돌봐야지”라고 내뱉는다. 그이가 같이 집에 있을 당시도, 그이가 떠나고 나서 집이 삭막해졌을 때도 비누는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변화의 순간을 다시금 환기하게 만드는 매개체가 됐다. 여러 사람이 나와 각자만의 사연을 풀어내고 있지만 도통 사람들의 생기가 넘실대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들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건 역시 흔적들이다. 그렇기에 ‘중경삼림’은 통조림의 영화, 삐삐의 영화, 인형과 빨래 그리고 비누의 영화, 냅킨의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외계+인 2부’, 관객의 영화가 아닌, 최동훈의 영화 [영화와 세상사이]

지난 1월10일 개봉한 ‘외계+인 2부’는 최동훈의 영화일까, 그렇지 않을까. ‘타짜’, ‘전우치’, ‘도둑들’, ‘암살’ 등을 연출한 한국 상업영화의 아이콘 최동훈은 지난 ‘외계+인 1부’의 혹평을 의식하며 이번 후속작을 절치부심 끝에 내놓았다. 재밌게도 ‘외계+인 2부’는 최동훈의 시그니처 인장이 곳곳에 녹아든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만의 스타일을 어쭙잖게 흉내낸 듯한 조잡한 질감도 맴돌고 있다는 점에서 아리송한 인상을 남긴다. 최동훈 감독의 영화를 매력 있게 가꾸는 요소는 언제나 캐릭터와 장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두 편의 ‘외계+인’은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상당히 독특한 지위에 놓인다. 그 이유는 바로 영화에 깃든 동력원에서 비롯된다. ‘외계+인 2부’를 움직이는 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외계+인’ 2부작은 탄탄한 각본과 다층적인 캐릭터 묘사에 열을 올렸던 지난날 최동훈의 영화와 다른 선상에 놓일 수밖에 없고, 특히 1부보다 2부가 더 그렇다. 고려 시대와 현대를 오가며 전개되는 영화 속에서 맹인 검객 능파(진선규)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썬더(김우빈)가 “우리는 2022년으로 가겠다”고 했던 말을 놓치지 않았다. 미래로 합류하지 못한 능파는 불길한 예감에 얼른 서신을 써내려 간다. 그리고 미래로 떠난 이들이 세상을 구할 수 있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과 결단을 보여준다. 그저 후손 중 누군가에게 자신이 몸처럼 아꼈던 비검, 신선들의 거울과 부적, 무륵의 부채가 고스란히 전달될 거라 믿었던 그 마음. 막연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더없는 확신으로 가득 찬 그 믿음이 결국 ‘외계+인 2부’를 움직였던 것. 사실 이 능파의 믿음은 서사의 전개 측면에서 보면 너무나도 허무맹랑한 요소다. 1391년의 고려, 그리고 2022년의 한국. 과연 천년에 가까운 세월이라는 간극이 능파의 믿음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일까? 크고 작은 사건을 정신없이 중첩해가면서도 난잡하지 않게 서사의 줄기를 유지하고, 캐릭터 간 관계에 드러나는 정보와 드러나지 않는 정보의 격차를 활용하면서 전개에 긴장감을 부여했던 최동훈의 쫄깃한 각본이 어쩌면 ‘외계+인’에선 서사의 매듭을 위해 너무나 손쉬운 편의주의를 택한 게 아닐까? 이때 우리에겐 최동훈이 왜 이 영화를 만들었을지 상상해 볼 기회가 생긴다. 사실 현대에 들어서 SF 장르가 영화로 구현될 때, 창작자들은 딜레마에 직면한다. 인류의 터전이나 정체성과 직결된 근미래의 위기를 그려내자니, 60년대 이후 제작된 수많은 영화들이 닳도록 반복해온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최근 들어선 인류의 결핍과 욕망 등이 실현되는 평행 우주를 통해 SF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콘텐츠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최동훈의 SF 영화는 무엇일까? ‘외계+인’ 시리즈는 로봇 아닌 로봇, 신선 아닌 신선, 인간 아닌 인간, 과거 아닌 과거, 현재 아닌 현재 등 '~아닌 ~' 혹은 '~답지 않은~'이라는 구조로 귀결되는 요소들의 배열을 고집한다. 기계와 인간형을 오가며 모습을 바꾸던 로봇 썬더(김우빈), 인간의 신체에 자유자재로 스며드는 사이보그 가드(김우빈), 역시 인간을 숙주로 삼는 외계인들까지. 이뿐만이 아니다. 로봇이 로봇답지 않은 대사를 내뱉고, 현실에 현실 같지 않은 그래픽 요소가 개입되고 있다. 고려 말에 롤렉스 시계와 권총이 너스레를 떨듯 등장하고, MCU의 '앤트맨'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는 크기 변환 액션 신이 신선 흑설(염정아)의 청동 거울을 통해 구현되는 등, 상식 선에서 납득 불가능한 인공적인 조작이 계속되면서 관객들을 얼마간 당황시키거나 낯설게 여기도록 만들고 있다. 이렇듯 두 편의 ‘외계+인’에는 관객들이 각자 품던 기대감과 실망감이 교차할 때 피어나는 묘한 리듬이 지배한다. 현실을 풍자하거나 사회상을 도려내거나 완벽한 판타지 대서사를 펼쳐낼 생각이 전혀 없다. 그저 이질적인 요소들이 충돌할 때 피어나는 리듬을 통해 관객에게 어떤 쾌감을 전달하고자 한다. 다시 ‘외계+인 1부’를 떠올려 보자. 시공간 표지를 특정하는 순간, 영화는 현실과 호응하는 조건을 부여받는다. 그러니까 영화 속 1380년과 2022년 9월은 현실의 그것과 얼마나 같거나 다른지, 혹은 현실의 그것과 얼마나 가깝거나 먼 지 가늠할 기회가 생긴다. 문제는 어느 쪽으로 보든 <외계+인 1부>의 시간은 현실과 원활하게 소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점. 그 이유는 외계+인 시리즈에서 각각의 시대는 그저 배경으로만 작동할 뿐, 인물들이 왜 그 시점에서 그런 사건에 연루되는지 관객들을 납득하는 데엔 실패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외계+인’ 시리즈가 오가는 시공간대의 조합이 굳이 고려 벽란도와 현대의 서울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이 선택이 잘못됐다는 건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흥미롭게 지켜보게 된다. 깊이 있는 작품성을 구현하려는 창작자의 야망보다는 오랜 기간 흥미를 품어온 자신의 취향을 곳곳에 심어놓고 만족하는 한 덕후의 순수한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가령 2부의 칼집 액션 신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영화의 전개 상 없어도 되는 구간이지만, 감독이 그런 형태의 액션을 구현하는 데 매력을 느꼈기에 삽입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외계+인’은 관객들이 정의하는 최동훈이 아니라, 최동훈이 정의하는 최동훈을 드러내려는 영화에 가깝다. ‘외계+인’에 이은 그만의 세계관이 어떻게 요동치고 팽창할지 기대가 된다.

BIFAN의 밤 수놓는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인피니티 풀’ [영화와 세상사이]

영화는 스크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1895년 처음 인류와 만난 영화는 태생부터 혼자 존재할 수 없는 예술이었습니다. 스크린을 바라보며 반응할 사람이 없다면, 그 영화는 상영되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편의 영화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도 없이 상영되면서 전 세계 어느 누구와도 만나는 소통의 창이 됐습니다. 영화는 영화 자체로도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스크린을 벗어날 때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품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영화광장’은 영화를 통해 세상을 말하고 사람을 말하는 시간입니다. 격주 주말, 영화광장으로 모여드는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9일 개막한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BIFAN)의 상영작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영화는 캐나다 출신 영화감독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세 번째 장편 영화 ‘인피니티 풀’(2023년)이다. 오는 9일까지 이어지는 BIFAN에서 세 차례 상영된다. 30일에서 1일로 넘어가는 심야상영 섹션에서 객석과 만난 뒤 이어 2일과 9일에도 만나볼 수 있다. ‘인피니티 풀’이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크로넨버그’라는 이름 때문이다. ‘크로넨버그’는 국내를 비롯한 유럽권 영화 애호가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그 주인공은 바로 캐나다의 영화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다. 그는 신체 변형과 바디 호러 장르, 인간의 원초적인 폭력, 성욕 등 본능의 영역을 다루는 데 있어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를 구축했다. ‘비디오드롬’(1983년), ‘플라이’(1986년), ‘엑시스텐즈’(1999년) 등을 비롯한 20편이 넘는 장편을 연출해 마이너한 장르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 특히 BIFAN을 찾는 관객들에게는 익숙한 존재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네이키드 런치’(1991년)도 이번 영화제에서 만나볼 수 있어 관심이 모이고 있다. 브랜든 크로넨버그 감독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연출가인 그는 현대인들의 뒤틀린 내면을 겨냥한 영화를 만들어왔다. 2012년 ‘항생제’에 이어, 2020년 ‘포제서’로 아버지와 함께 거론되기 시작했던 그는 올해에도 ‘인피니티 풀’로 영화계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화는 한 남자를 따라간다. 소설가 제임스 포스터가 글이 써지지 않아 창작의 영감을 얻고자 아내와 함께 어떤 섬의 리조트로 휴양을 가는데, 여기서 제임스는 섬에 얽힌 특별한 비밀을 마주한다. 이곳은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구금된 뒤 처형을 받아야 한다고 해도 돈만 지불하면 자신의 복제 인간을 대신 처형할 수 있는 법이 통용되는 곳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과연 내가 처형당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신체를 복제하는 과정에서 제임스는 환각상태와 무의식을 유영하는 신비한 경험 끝에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다. 이후 복제된 자신이 기둥에 묶인 채 끔찍하게 처형당하는 모습을 본다. 이 시점부터 영화는 제임스의 복제본이 죽었는지, 제임스가 죽었는지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마침내 제임스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처리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를 생각해본다. 그는 제임스일 수도 있지만, 제임스와는 관련이 없어져 버린 무수한 복제품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가 과연 어떤 감정과 생각을 품고 있을까? 관객들은 그 존재에 관해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감독은 질문하고 있다. 브랜든의 영화에서 사람들은 프레임의 중앙보다는 가장자리에 위치할 때가 많다. 식당에서 마주 보고 저녁을 먹을 때도, 직장에서 상사와 업무로 대화할 때도 카메라는 사람을 왼쪽이나 오른쪽 하단으로 몰아넣는다. 그렇게 영화 속 사람들은 어딘가 불안한 상태에 놓이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불안하게 보이게 하는 것일까. 왜 이들은 불안한 상태에서 혼란에 직면해야만 하는 걸까. 그는 지난 작품들에서도 개인의 내면을 파고들었을 때 만날 수 있는 뒤틀린 사회상을 영화로 보여줬다. ‘항생제’ 속 대중들은 연예인을 동경하는 뒤틀린 팬덤 문화의 극단적인 예시를 드러낸다. 연예인이 앓았던 질병의 바이러스를 거리낌 없이 몸에 주입해서 그들의 고통마저도 함께 느끼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스크린에 맺힌다. 두 번째 영화 ‘포제서’에는 타인의 정신과 육체에 접속해서 그 사람을 조종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인피니티 풀’은 그런 점에서 전작에서 다뤘던 소재를 다시 한 번 불러낸다. 정신과 육체를 지배당하든, 복제가 되든 도대체 진짜 ‘나’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일까. 감독은 이때 원인을 들여다보는 대신 병들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방식에 특별히 집중했다. 질문에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는 대신 혼돈과 변형의 과정을 겪는 존재들이 어떤 상황에 놓이는지 묘사한다는 점이 그의 영화에선 중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왜 병든 인간들을 자꾸만 스크린으로 불러내고 있을까? 인간을 병들게 하는 건 문명에 깊게 뿌리내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구조다. 현대사회의 구성원으로 멀쩡히 녹아들기 위해선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하고, 집단에 녹아들 수 있는 판단력과 융통성, 적응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여기서 낙오된다면 사회는 이들을 받아줄 여유가 없다. 브랜든의 영화는 사회의 통념과 그 정신없는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채 혼자만의 세계에서 방황하거나 신음하는 영혼들을 담아내고 있다.

‘전도연’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영화…넷플릭스 ‘길복순’ [영화와 세상사이]

영화는 스크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1895년 처음 인류와 만난 영화는 태생부터 혼자 존재할 수 없는 예술이었습니다. 스크린을 바라보며 반응할 사람이 없다면, 그 영화는 상영되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편의 영화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도 없이 상영되면서 전 세계 어느 누구와도 만나는 소통의 창이 됐습니다. 영화는 영화 자체로도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스크린을 벗어날 때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품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영화광장’은 영화를 통해 세상을 말하고 사람을 말하는 시간입니다. 격주 토요일, 영화광장으로 모여드는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편집자주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에서 눈에 띄는 장면들이 있다면, 바로 발생 가능한 미래의 ‘경우의 수’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영화는 관객들을 은근슬쩍 속인다. 길복순(전도연)은 영화 시작부터 죽는다. 길복순이 야쿠자 오다 신이치로(황정민)와 일본도로 싸우는 첫 액션 시퀀스에서 목이 잘려나가는 길복순의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건 상상 속의 시뮬레이션을 마친 뒤 생존 가능성이 낮은 선택에 베팅하지 않고, 확실한 경우의 수를 택해 최후의 승자가 되는 길복순의 모습이다. 길복순은 늘 시뮬레이션을 통해 최적의 생존법을 찾아낸다. 사실 그가 딛고 선 세상이 너무 각박하기에, 자타공인 청부업계 최고의 킬러 길복순은 늘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을 의식해야만 한다. 길복순의 모습은 자연스레 현실 속 전도연 배우와 겹친다. 후배 연기자들이 치고 올라오는 살벌한 경쟁판에서 오랜 기간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배우 전도연 역시도 매 순간 길복순처럼 시뮬레이션을 돌렸을 것만 같다. 아니, 바꿔 말하는 게 맞다. 길복순은 전도연처럼 행동하고 있다. ‘길복순’은 길복순의 생각과 감정을 훑어보려고 한다. 다른 이들은 다 놓쳐도 길복순의 서사는 붙잡고자 한다. 이때 길복순에게 부여된 설정들은 대부분 배역을 맡은 배우 전도연이 지닌 특징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길복순'은 길복순의 영화라기보다는 전도연의 영화인 셈이다. 그래서 영화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다. 전도연이 나와야만 한다. 연출을 맡은 변성현 감독 역시 다수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는 단계부터 전도연을 염두에 둔 채 작업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길복순이 킬러이자 평범한 엄마를 동시에 안고 살아가는 모습은 현실 속 연기자와 엄마를 오가는 전도연의 흔적이 고스란히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길복순’이 굳이 액션 영화일 필요가 있었을까? 사실 액션 영화에선 배우의 액션 소화력에 따라 영화가 뿜어내는 매력이 달라지는데, 이 영화 속 전도연이 보여주는 액션은 디렉팅의 문제인지 액션 구성의 문제인지 특별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속 나열되는 액션은 장르의 쾌감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의 조형에 크게 관여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전도연이 촬영해야만 그 존재가치를 얻는 영화인 ‘길복순’은 사실 액션만 놓고 보면, 꼭 전도연이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관객에게 어필하는 데엔 실패한다. ‘길복순’의 액션은 키아누 리브스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숨 가쁘게 찍은 ‘존 윅’ 시리즈나 톰 크루즈가 부상위험에 노출되면서도 대역 없이 촬영에 임했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서 보여줬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액션 장르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키아누 리브스가 아닌 존 윅의 액션을 상상할 수 없고, 톰 크루즈가 아닌 에단 헌트의 액션을 상상할 수 없다는 데에 대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길복순의 액션 만큼은 전도연의 것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그래서 ‘길복순’에서 나열되는 무색무취 액션 장면이 오히려 전도연과 길복순이 놓인 피비린내 풍기는 경쟁사회를 은유하는 장치가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길복순’의 세계관은 다른 킬러 영화들처럼 다소 황당무계한 측면이 있지만, 그조차도 어쩌면 전도연과 길복순을 오가는 어떤 존재가 딛고 선 세상이 얼마나 각박한지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길복순의 삶은 그만큼 고달프고, 전도연 역시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갈 즈음, 딸을 바라보는 길복순의 표정에서 그 흔적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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