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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여행 에세이] 헤밍웨이 흔적을 찾아서 / 마지막회

올드 아바나 거리에 즐비한 콜로니얼 건축물은 여행 떠나기 전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나름 알찬 여행이었으나 마음 한구석에 아쉬운 여운이 남아 언젠가 다시 찾아갈 것 같은 여운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 학창 시절 좋아하였던 파파 헤밍웨이의 발자취와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코히마를 해변을 돌아보며 그의 향기를 만끽하였다. 헤밍웨이박물관을 돌아보며 9만여 권의 소장 도서 그리고 서재와 집필 공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바나 뒷골목을 돌아보다 뜻하지 않게 원조 코스모스의 저자 알렉산더 훔볼트의 흔적을 만난 것도 쿠바 여행에서 얻은 게 작지 않았다는 증표다. 통신 인프라가 잘 갖춰진 유럽과 달리 쿠바에서는 와이파이나 핫스팟은 언감생심 꿈꿀 수 없어도 느린 여행의 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느리지만 쿠바도 변화의 물결이 찾아든다. 혁명의 기수 피델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동생 라울도 권좌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쿠바는 아직도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개혁개방이 더디나 서서히 변화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아바네로는 세상의 빠른 변화의 속도보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처럼 느리게 사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지 아니면 표현하지 않는 것인지 알 길이 없어도 그들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시간이 멈춘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 여행에서 콜로니얼 도시 아바나 비에하, 트리니다드와 잉헤니오스 계곡, 체 게바라의 도시 산타클라라, 노인과 바다의 모티브가 된 코히마르 어촌과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산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언덕에 있는 핀카 비히아를 둘러본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를 마친다.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여행 에세이] 헤밍웨이 흔적을 찾아서 10-⑤

오리사스는 전통적인 요루바 신앙에서 주신이 아닌 외로운 신과 영혼들, 그리고 아프리카 기원 종교의 신 산테리아(Santeria)와 아프리카-카리브 문화를 상징하는 깐돔블레(Candomble)를 기리는 의식으로 남미의 물라토와 메스티소(Caribbean offshoots)에게는 의미 있는 예식이다. 어둠이 드리우자 오비스포 거리의 빈티지한 건물엔 울긋불긋한 불빛과 아프로쿠반 밴드의 감미로운 멜로디가 카리브 밤바람을 타고 거리에 흘러넘친다. 낮에 둘러보았던 현지인들이 사는 뒷거리와 달리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화려하고 자유롭다. 아바나의 맑은 하늘에 촘촘히 자리 잡은 별들의 반짝이는 미소와 카리브의 싱그러운 밤바람은 마지막 밤을 설레게 한다. 어느새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암보스 문도스 호텔을 지나 그가 매일 밤 친구와 모히토를 마셨던 엘 플로리디타 바에 도착한다. 오늘도 나그네에게 앉을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몇 차례 이 앞을 지나다녔으나 항상 여행객들로 꽉 차 있어 자리 잡기가 쉽지 않다. 바로 옆 오브라피아 거리에 있는 몬세라테 바에서 아프로 쿠반 밴드의 연주를 들으며 헤밍웨이가 매일 마셨다는 모히토 한 잔으로 추억을 쌓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라파엘 거리에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감미로운 트럼펫 연주에 이끌려 작은 아이스크림 카페에 들어간다. 쿠바 설탕이 듬뿍 든 아이스크림에 목을 축이며 애달픈 트럼펫 소리에 취해 아바나의 마지막 밤을 기억한다. 스마트폰, 신용카드, 영어가 무용지물인 3무(無)의 쿠바 여행은 순수함을 넘어 담백하였다. 카리브의 자연 속 한 점이 되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간 시간 여행은 즐거웠다.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여행 에세이] 헤밍웨이 흔적을 찾아서 10-④

광장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쿠바 북한대사관을 한 바퀴 돈다. 그들은 감추려는 것이 왜 그렇게 많은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대사관 주변은 고립감과 적막감이 넘쳐흐른다. 올드카는 디젤 냄새를 휘날리며 질주하여 잉글라테 호텔 앞 광장에 도착한다. 아바나에 머물며 매일 오비스포 거리를 걸어서인지 이 길은 이제 익숙한 옷처럼 낯설지 않다. 아르마스 광장 쪽으로 걸으며 손님 한 명 없는 국영 상점의 눈이 부신 불빛을 보자 사회주의 또 다른 허상을 보는 듯하다. 광장 옆 세이바 나무 기슭에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작은 그레코로만 형태의 건물이 하나 있다. 사원을 모방하여 지은 엘 뗌쁠레떼다. 도리아식 기둥과 고전적인 페디먼트가 있는 이 사원은 스페인 페르난도 7세의 아내 호세파 아말리아 여왕을 기리기 위해 1828년에 건축되었다. 이곳은 아바나에서 열린 최초 지역 대표자 회의인 인민평의회가 열렸던 장소로 의미 있는 곳이다. 사원 난간 기둥을 덮고 있는 열대 파인애플 나무가 건물을 위협하는 듯하지만, 이 사원은 19세기 쿠바 바로크에서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시대 전환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좁은 사원 내부에는 아바나의 산 알레한드로 예술 아카데미 창립자인 데이비드의 수제자이자 프랑스 화가 장 바티스트 베르마이가 그린 큰 유화 작품 석 점을 보관하고 있다. 그림은 첫 인민평의회 대표자와 의원 취임식에서 그들을 축복하는 첫 미사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곳은 1818년 11월 16일은 아바나시 인민평의회가 창립된 곳이지만 이날은 아바네로가 16세기부터 선조의 삶을 기리는 오리사스(orishas) 의식이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뜻깊은 장소다. 의식은 아르마스 광장에 있는 신성한 실크 나무(Ceiba,) 주위를 세 번 돌며 고달팠던 조상의 삶을 기리고 자신의 소망을 기원한다. 이 의식은 지금도 아바네로에게 중요한 예절로 이어지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여행 에세이] 헤밍웨이 흔적을 찾아서 10-③

외국 여행 중에 때로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땐 중국 음식이 어느 정도 우리 입맛에 맞는 편이라 볶음밥과 중국 음식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아바나를 상징하는 올드카를 타기 위하여 잉글라테 호텔 앞 광장으로 간다. 오래되었지만 오색찬란한 올드카가 줄지어 서 있다. 멋쟁이 기사들은 여행자를 보면 서로 자기 차를 타라고 호객한다. 한 친구가 다가와 일본인이냐고 묻는다.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 그는 대뜸 Made in Korea인 자기 차를 타라고 권하여 귀를 의심한다. 한국 자동차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자기 차를 가리킨다. 순간 무엇인가 숨겨진 속내가 있을 것 같아 흥정을 마치고 아바나 시내 투어를 떠난다. 드라이브 중에 그가 자기 차를 한국산이라고 한 이유를 묻자 자신의 1957년식 미국 올드카의 엔진이 낡아 현대 스타렉스 엔진으로 교체하여 운행하고 있으며 그 성능에 만족한다고 엄지를 세운다. 기사는 아바나 시내 올드카의 80% 이상이 한국산 중고 엔진을 사용한다고 귀띔한다. 이어서 자기 아내는 그랜저 아버지는 소나타를 소유하고 있다며 휴대폰에 저장된 자동차와 가족사진을 보여주면서 한국을 예찬한다. 순간 가슴이 뿌듯하게 애국심이 발동하여 한국 차의 품질과 세계 시장 점유율을 자랑한다. 아바나 국립대학을 비롯하여 시내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 쿠바의 상징인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cion)에 도착하자 그는 자동차 엔진룸을 열어 현대차 마크가 선명한 스타렉스 엔진을 보여준다. 엔진 성능이 좋고 유지보수비용도 저렴하여 일본 엔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추가로 설명한다. 그는 한국 엔진을 장착한 차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게 하고 사진까지 찍어주는 서비스를 한다. 혁명 광장을 찾은 여행자들은 내무부 청사와 통신부 건물 벽면에 설치된 사회주의 키치를 본다. 이곳을 찾은 여행객들은 인증 샷으로 체 게바라와 까밀로 시엔푸에고스 얼굴 모양의 강철 기념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찍느라 바쁘다. 도심 광장에서 보는 아바나의 저물녘 검붉은 노을빛은 짓눌린 변화와 굴곡진 삶의 흔적을 태울 듯 타오르고 애잔한 핏빛 노을은 혁명 영웅 얼굴을 검붉게 물들인다. 인민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떠올리며 현지인들이 무엇인가 배급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기다림의 장면과 오버랩 되자 사회주의의 허상이 스쳐 지나간다. 혁명 광장은 7만2천㎡나 되고 정치 집회가 열리는 장소다. 광장 중앙에는 높이 109m 높이의 타워와 18m의 쿠바의 영웅 호세 마르티 동상이 있다. 전망대에 올라가면 멀리 말레콘 앞바다를 볼 수 있다. 주변에는 공산당 청사와 정부 부처가 자리 잡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여행 에세이] 헤밍웨이 흔적을 찾아서 ⑩-2

뒷골목 깊숙한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작은 공원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다. 마침 한 무리의 고등학생이 동상 옆 계단에 옹기종기 앉아 담배를 피운다. 그들에게 다가서자마자 한 여학생이 대뜸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말로 손을 내민다. Give me one dollar! 그녀는 오직 이 한 영어문장에만 익숙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무리 중 간단하게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한 여학생과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학교 수업에 영어 과목이 있지만 제대로 강의할 수 있는 선생도 없고, 배워도 일상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대부분 학생이 영어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여학생은 영어를 배우고 싶어 독학으로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트리니다드 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던 웨이트리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또 다른 사회주의의 허상을 보는 듯하고 쿠바 교육의 참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왜 담배를 피우냐고 묻자 친구들이 피우니까 그냥 피운다고 한다. 담배가 몸에 해롭다고 하자 고개를 끄떡이며 1달러 달라고 조른다. 그녀 손에 1달러 상당의 쿠바 외국인 화폐 1쿡 동전 한 닢을 쥐여 주고 학생들과 웃으며 사진 한 장 찍고 헤어진다. 쿠바에선 이처럼 어린 청소년과 특히 소녀들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담배를 많이 생산하고 일조량이 풍부하여 품질도 수준급인 쿠바 시가지만 미국의 경제 제재로 수출이 어려워서인지 내국인 흡연율이 높고 쉽게 흡연자를 마주한다. 세계보건기구가 최근 발표한 2020년도 국가별 흡연율을 보면 쿠바 남자 52.7% 여자 17.8%로 우리나라 남자 49.8% 여자 4.2%와 비교하면 우리보다 높고, 여성은 우리나라보다 4.2배나 높아 세계 상위 흡연 그룹에 속한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다 보면 어디서든 차이나타운이나 음식점을 만날 수 있다. 중국은 우리보다 문호를 일찍 개방하여 세계 각지로 이주한 역사가 길어서인지 아바나에도 중국인 거리가 있다. 입구에서부터 이곳이 차이나타운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중국 냄새가 나고 작지만,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입구처럼 상징적인 게이트도 있다. 이곳은 주변 아바네로의 뒷골목보다 비교적 깨끗하고 중국을 상징하는 건물과 조형물이 있다. 언제부터 그들이 쿠바에 살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현지인들은 19세기 초에 중국 상인들이 설탕과 담배 무역을 중개할 때부터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차이나타운은 그리 넓지 않으나 중국 상점과 식당가가 있고 작지만 중국 거리도 있다.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여행 에세이] 헤밍웨이 흔적을 찾아서 ⑩-1

여행 일정 막바지에 다다르자 새로운 것에 대한 신선함과 더불어 불편함도 느낀다. 여행 전 쿠바에 대한 기본적인 여행 자료를 노트북과 휴대폰에 담아 왔으나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 실시간으로 필요한 디지털 정보를 얻을 수 없고 오프라인 자료도 턱없이 부족하여 여행 중 목마름이 많았다. 배낭여행자는 도착지 공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찾는 것이 대중교통과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이드북이다. 아바나 도착한 날 공항 안내소에 갔으나 단 한 점의 자료도 구할 수 없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먼저 다녀간 여행자가 두고 간 스페인어로 된 자료는 있으나 영어로 된 자료를 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날 서점에서 25 쿡(27.5달러) 주고 산 작은 영어 가이드북이 유일한 길잡이였다. 오늘은 쿠바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 올드 아바나 뒷골목을 걷는다. 아바나 비헤아 지역 카피톨리오를 돌아 몇백 미터 벗어나자 현지인의 삶과 마주한다. 길옆 낡은 바로크 양식의 건물 앞에는 쇠창살로 가려진 작은 창구에서 무엇인가 배급받으려는 현지인들이 길게 줄지어 있다.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아바네로의 무표정한 모습은 세상 단 하나뿐인 이데올로기 병인 가난한 사회주의에 찌든 증상으로 느껴지고 드러내지 못하는 내면의 고통과 외침을 말없이 표출하는 퍼포먼스 같다. 그들은 길든 패턴에 따라 배급 차례를 기다린다. 이곳에선 카리브의 낭만이니 시간이 멈춘 도시니 하며 외부 세계에 지나치게 미화된 아바나 모습과 달리 지치고 고달픈 아바네로가 소리 없이 울분을 용트림하는 진정한 아바나의 속살이다. 그들에게서 희망과 용기는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듯하고 오로지 체념만 남아있다. 카메라 렌즈에 잡힌 그들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져 오는 무한한 허무와 현실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본다.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 9-⑤

헤밍웨이가 아바나에 머물 때 이곳 사람들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마초 성향의 그를 파파로 불렀고 그도 이 이름을 좋아했다. 그가 파파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였던 이유는 어릴 때 자신을 지극히 사랑한 아버지를 연상하며 닮고자 했고 때로는 보스 성격이 강한 자신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코히마르 출신 어부 푸엔테스 노인과 앞바다가 《노인과 바다》의 모티브가 되었다면 핀카 비히아는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사유를 즐기며 집필 활동을 한 후기 헤밍웨이 문학의 산실이었다. 그는 쿠바에 머무는 동안 《노인과 바다》 외에 《강 건너 숲속으로》와 비소설 《위험한 여름》도 이곳에서 집필했다. 헤밍웨이의 초기 소설은 스페인 내전, 이탈리아 전선, 투우장 같은 전쟁이나 야생 세계에서 극단적인 상황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면 후반 들어서는 카리브의 드넓은 바다를 삶의 터전이자 문학적 배경으로 삼았다. 헤밍웨이의 이 같은 문학적 가치관은 변화했다. 그는 노벨상을 받던 그해 두 번의 항공기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지만, 부상 후유증 때문에 수상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 후 그는 사고 전과 같은 강인한 정신과 체력을 회복하진 않았고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 우울증에 빠지는 실마리가 됐는지 모른다. 13년 만에 완성한 《노인과 바다》는 초기 소설과는 달리 과거 남성적이고 거친 쾌남아 이미지에서 벗어나 고독과 싸우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늙은 어부 산티아고에 투영했다. 이 소설의 모티브를 제공한 푸엔테스가 소설이 성공하면 그 대가로 그냥 밥 한 끼에 술 한 잔이면 된다고 했으나 헤밍웨이는 당시에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인 2만 달러의 거금을 어부에게 줬다. 쿠바에서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은 《노인과 바다》를 읽고 그곳에 담겨 있는 산티아고의 독백을 음미하며 코히마르 해변을 돌아보면 좋다. 그곳에서 한 노인의 실증적인 투쟁과 굽힐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를 떠올리며 헤밍웨이의 정제된 문장을 음미하며 여행하면 좋다. 그리고 느릿느릿 바닷가를 걷다 보면 소설 속 노인이 물고기와 사투하며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는 감상을 끌어낸 헤밍웨이를 만날 수 있다. 헤밍웨이는 어떤 말로도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특별한 그의 발자취도 찾아볼 수 있다. 고달픈 도시 문명의 기계적인 시간에 쫓겨 문득 파도 소리가 듣고 싶고 자연의 시간에 몸을 맡기고 느림의 사유를 느껴보고 싶다면 머뭇거리지 말고 에메랄드빛 바다가 출렁이는 카리브에서 느림의 낭만을 즐기는 여유를 한 번쯤 가지면 어떨까.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 9-④

산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에 있는 헤밍웨이박물관 언덕에 오르자 아열대 수목의 싱그러운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입장료 5쿡을 내고 산책길을 따라 들어가자 길 아래쪽 수영장 옆에 그의 낚싯배 필라 호가 있다. 헤밍웨이는 아침 이른 시간에 글을 쓰고 날씨가 덥거나 습할 땐 코히마르 항구에 정박해 둔 필라 호를 타고 낚시를 했고, 해거름에는 친구들과 테라자 레스토랑에서 모히토를 마셨다. 박물관은 내부로 들어갈 수 없고 집 주변을 돌면서 열려 있는 창문으로만 내부를 관찰할 수 있지만 헤밍웨이의 삶을 충분히 엿볼 수 있을 정도로 창문이 많다. 이곳에는 그가 소장하였던 9천여권의 각종 도서와 세계 각지에서 사냥한 다양한 동물 박제가 있다. 서재 외에도 그가 머물렀던 곳곳에 집필과 독서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그가 왜 대문호였는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아바나 시내를 바라볼 수 있도록 배치된 그의 서재는 작가들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집은 모든 공간이 서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헤밍웨이가 머무는 곳이면 독서와 글을 쓸 수 있도록 책상이 갖춰져 있고 책이 있다. 외부에서 보기보다 내부가 단순한 듯하고, 거실, 식당, 서재, 침실, 서가와 수납공간은 당시 생활수준을 비추어볼 때 매우 호화롭게 꾸민 것 같다. 서재 벽면에는 파블로 피카소의 투우 두상의 세라믹 플레이트가 있는 것을 볼 때 헤밍웨이는 쿠바에서도 스페인에서 머물렀을 때 즐겼던 투우를 잊지 못한 것 같다. 집 옆에는 헤밍웨이가 이 집을 매입한 후 증축한 건물로 그는 이곳을 오르내리며 집필했다는 4층 높이의 망루가 버티고 서 있다. 꼭대기 층 집필실에서는 아바나 시내와 바다를 볼 수 있으며 먼바다와 하늘을 볼 수 있는 망원경도 설치해 놓았을 정도로 카리브를 사랑하였다. 헤밍웨이는 모히토 못지않게 고양이를 좋아해 여러 마리 키웠다. 그중 다지증 고양이를 특별히 좋아해 헤밍웨이 고양이라고 부른다. 이 고양이들의 후손은 지금도 헤밍웨이 박물관에 살고 있고 당시 헤밍웨이와 함께 살았던 고양이 네 마리는 그의 낚싯배 필라 호 앞 무덤에 잠들어 있다. 하루는 도마뱀 한 마리가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고양이에게 죽임당한 도마뱀을 포르말린 용액에 보존해 욕실에 보관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보면 찾을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 9-③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발표 이후 12년 동안 단 한 편의 장편 소설도 발표하지 못했다. 이 기간에 평론가들은 소설 속 산티아고 노인이 잡은 청새치를 상어가 뜯어 먹듯이 그를 비판했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발표하면서 보라는 듯이 미국과 세계 문단에 그가 건재하다는 것을 다시 알렸다. 헤밍웨이는 노벨상을 받은 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얼마나 쿠바를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입양 쿠바인이라 매우 행복합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무한한 쿠바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물결이 카리브의 아름다운 섬나라를 뒤덮자 그도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남기고 1960년 아바나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코히마르에는 아직도 그와 얽힌 흔적이 남아 있다. 매년 5월 하순 이곳에서는 헤밍웨이 국제 낚시대회가 열린다. 이 행사는 그가 아바나에 있을 때 미국 친구들을 불러들여 놀이 삼아 시작한 것이 지금은 제법 규모가 큰 대회로 발전했다. 그가 쿠바를 떠나고 주최 측이 그의 이름을 붙인 낚시대회를 계속 이어가려고 하자 미국에 살던 헤밍웨이도 반대하지 않아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 마을 마르티 레알 골목에 있는 라 테라자는 헤밍웨이가 자주 찾던 단골 레스토랑이었다. 그는 《노인과 바다》의 모티브가 된 어부 푸엔테스도 이곳에서 만났고 친구들과 어울려 우정을 쌓은 곳도 이 레스토랑이다. 마침 나그네가 이곳을 찾았을 때 불행하게도 증가하는 관광객을 위하여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 옛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어쩔 수 없이 헤밍웨이도 가끔 들렀다는 다른 레스토랑 라 테라시따에서 코히마르 포구와 해변을 카메라에 담는다. 늦은 점심을 마치고 이곳에서 아바나 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있는 헤밍웨이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 9-②

해안에 다다르자 바닷바람에 철썩거리는 도성이 들리고 수평선의 보임거리를 바라보노라면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그윽하고 평온한 나락에 빠져든다. 나그네는 칠십 평생 깊은 심연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짓누르던 잡념을 파도에 실어 멀리 밀쳐내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탁난친다. 코히마르 해변은 헤밍웨이의 쿠바 인연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강물이 흘러드는 포구 앞에는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 아바나 외곽 방어를 위해 1648년에 지은 또레온 코히마르 망루가 파수꾼도 없이 세월의 무게를 혼자 짊어지고 남루한 차림으로 멍하니 바다만 바라본다. 코히마르는 아바나 동쪽에 있는 작은 어촌으로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곳으로 잘 알려졌다. 아마 헤밍웨이도 이 망루에 올라 앞바다를 바라보며 소설 속에 그릴 노인과 바다, 청새치와 상어 등의 소설 속 플롯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헤밍웨이는 이곳을 떠났고 망루 옆에는 쿠바 사회주의 운동가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대문호의 흉상이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다. 오늘도 그는 바닷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바다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짓는다. 마치 자신 안에 존재하는 산티아고를 생각하며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된 순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어를 읊는 듯하다. 초라하지만 듬직한 망루 옆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바닷바람이 건듯 불자 감미로운 카리브의 냄새가 코끝에 스미고 헤밍웨이도 느꼈을 이곳의 정취가 온몸을 스친다. 바닷바람에 파도는 쉬지 않고 방파제를 두들기자 하얀 물보라가 일렁인다. 사라지는 물보라를 바라보며 헤밍웨이는 그 속에서 어떤 잔영을 보았을까. 순간 하늘을 나는 갈매기가 제 몸을 가누려고 이리저리 날갯짓하며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소설에 그려진 대로 산티아고 노인이 실망하지 않고 다시 바다로 나가서 커다란 청새치를 낚아 올리는 오뚝이 같은 모습이 떠오른다. 어느 날 헤밍웨이는 이 마을 출신 늙은 어부 푸엔테스가 거대한 청새치와 이틀 밤낮에 걸쳐 사투를 벌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노인의 삶을 모티브로 살아생전 마지막 작품인 《노인과 바다》를 구상하고 쓰기 시작한 지 13년 만인 1952년에 라이프 지에 발표했다. 그 후 이 소설은 헤밍웨이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가와 함께 퓰리처상을 받았고 1954년도에는 노벨상을 받았다.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 9-①

-쿠바를 사랑한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아- 쿠바는 헤밍웨이와 땔 수 없는 인연이 있다. 그는 생전에 발표한 장편 소설 4편 중《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포함한 3편은 유럽을 배경으로 썼으나 《노인과 바다》는 쿠바 코히마르에 거주하며 카리브 바다를 배경으로 썼기 때문이다. 헤밍웨이가 플로리다 키웨스트에 머무를 때 바다낚시에 빠져 청새치를 낚기 위하여 1932년 쿠바를 찾았다. 카리브의 낭만적인 정취와 쿠바의 매력에 빠진 그는 2주 일정이었던 낚시여행을 2개월 연장했고 몇 년 후에는 아예 쿠바에 정착하기 위하여 1939년 이주했다. 처음엔 아바나 오비스포 거리에 있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 머물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완성했다. 그러나 소설가이자 여행 작가인 세 번째 아내 마르타 겔혼은 호텔이 비좁아 창작이 어렵다고 불평하자 헤밍웨이는 산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언덕에 15에이커의 핀카 비히아(망루 농장)를 잠시 빌려 사용하다 그해 사들였다. 그리고 그는 이 집에서 20년 넘는 세월을 보내며 창작 활동을 했다. 오늘 여정은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어촌 코히마르 해변과 그가 쿠바에 거주할 때 이 소설을 집필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헤밍웨이박물관으로 변신한 핀카 비히아를 찾아 떠난다. 산타클라라에서 출발하여 코히마르로 가는 길에 쿠바 농촌 풍경을 마음껏 눈에 담는다. 오늘 하루 마음을 열고 느리지만 때 묻지 않은 카리브의 섬나라 풍경에 빠진다. 마침 말 수레를 타고 가는 현지인의 때 묻지 않은 모습에서 60년대 우리네 농촌 풍경이 오버랩 되어 스쳐 간다. 낡은 차는 파도에 리듬이라도 맞추듯이 좌우로 흔들리며 바다 갓길을 순풍에 돛을 달고 뱃놀이하듯 달린다. 그동안 살면서 때로는 침묵도 하였고 밀려드는 잡념 때문에 생각을 잠재우기 어려웠을 때도 많다. 하지만 오늘 이 순간은 멀리 창밖 풍경에 젖어 잡념에서 벗어나 맘껏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 8-① 체 게바라 사회주의 혁명과 쓸쓸한 뒤안길

물라티 종업원과 영어로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 음식을 가져올 때마다 쿠바에 관해 물어본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이 종업원은 트리니다드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고작 20㎞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외가댁에 가본 것이 전부라는 말에 귀를 의심한다. 영어를 어떻게 배웠느냐고 질문하자 그녀도 오후에 이야기를 나눈 여학생처럼 독학으로 깨우쳤다고 한다. 덧붙여 시골 학교에서는 영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고 이야기하며 주변에 있는 다른 종업원의 눈치를 살핀다. 사회주의의 숨겨진 뒷모습일까. 이야기를 반추하면 아마도 50여년 이상 쿠바와 미국 간의 관계악화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트리니다드는 16세기 초에 건설되어 번성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19세기 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전투에서 이 지역 설탕 농장은 모두 폐허가 됐다. 하지만 설탕 산업 붐으로 이룬 부의 흔적은 성당이나 카라라 대리석 바닥과 철제 격자를 갖춘 농장주의 황폐한 저택에서만 그 영광을 찾아볼 수 있다. 트리니다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양콘 해변은 쿠바에서도 손꼽히는 해양 스포츠 명소로 젊은 여행자들이 찾는 1순위 여행지다. 특히 밤마다 도시 곳곳에 있는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펼치는 아프로 쿠반 밴드의 공연과 살사 춤사위는 언제나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쿠바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중 으뜸은 젊은 사회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꿈이 실현된 나라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노인과 바다를 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쿠바에선 통치자 카스트로 가문이 더 유명할 수 있지만, 쿠바사람들에게 노스탤지어의 원천인 체 게바라를 빼놓을 수 없다. 오늘은 트리니다드를 출발해 체 게바라의 도시 산타클라라로 간다. 그가 불멸의 청춘을 불사른 곳이자 잠들어 쉬는 곳이다. 아바나에서는 동쪽 290㎞ 지점에서 차로 약 4시간 이상 걸리지만, 트리니다드에서는 아바나로 가는 길목에서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어두컴컴하지만, 곧 밝아올 새날의 여명이 지친 여행자를 설레게 하여 생기를 돋게 한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차려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카리브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자 어느새 진한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집주인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오른다. 그녀는 아쉬움을 담아 또 놀러 오라고 인사하지만, 다시 찾기는 쉽지 않은 곳이라 가슴이 찡하다. 이처럼 자연을 닮은 사람의 행복한 미소는 길 떠나는 여행자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고 지울 수 없는 여행의 향수에 취하게 한다.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 8-⑥

체 게바라의 시신은 비밀리에 매장되었다가 30년이 지난 후 1997년에 유족을 포함한 볼리비아와 쿠바 합동 조사단에 의해 동부 저지대 바예그란데의 폐쇄된 활주로에서 발굴됐다. 이후 쿠바 정부는 추모 주간을 선포하고 대규모 국장을 치렀고 그가 활약한 산타클라라에는 그를 추모하는 교회까지 생겼다. 2013년 쿠바 정부는 볼리비아의 협조를 받아 체 게바라의 일대기가 담긴 일기와 편지, 신문 기사, 사진, 문서 등을 세계기록유산에 올렸다. 그의 삶과 활동을 돌아볼 때 혁명가로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정치가로서는 실패한 인물이다. 그는 단명한 비운의 삶을 통해 상품화된 사회주의 혁명가의 우상에 불과하나 장 폴 사르트르는 그를 금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몇 년 전 볼리비아를 여행했을 때 체 게바라에게 기독교 성인처럼 이름 앞에 성을 붙인 사진이 있을 정도로 그를 추종하는 사람이 남미에는 많다. 어떤 사람은 그를 인류를 사랑하는 재능을 가진 인간적인 혁명가이자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몸을 내던진 혁명가로 평가한다. 하지만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 방문 이후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쿠바인들은 무엇보다 우선하여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찾아 몸부림치고 있다. 물론 잘 산다고 하여 행복한 것이 아니고 못 산다고 하여 불행한 것도 아니지만 그늘진 곳에 숨겨진 현실에서 피폐한 사회주의의 몸부림치는 단면을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지금 눈앞에 펼쳐진 현재 모습이다. 쿠바인들은 스페인과 미국으로부터 독립과 자유를 위해 수많은 생명을 잃어야만 했다. 그들은 혁명으로 국가를 전복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진 못하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나라가 됐을 뿐이다. 쿠바의 경제는 생산성과 성장성 추락으로 피폐하였고 민중들 삶의 질도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결과를 얻으려고 혁명의 깃발 아래 피를 흘리진 않았을 것이고 민중들이 가슴에 품었던 혁명의 본질도 결단코 이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 8-⑤

기념비 뒤편에는 추모관과 전시관으로 구분된 박물관이 있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 훨훨 타고 있는 엄숙한 장소인 추모관에는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함께하였던 6명의 동지 사이에 체 게바라의 이름이 적힌 묘비가 가운데 있다. 전시관에는 그의 본명인 에르네스토 케바라라는 이름이 적힌 출생증명서, 어릴 때 그린 그림, 의학 공부할 때 사용하였던 책과 물건 등, 혁명군으로 활동할 때 입었던 옷과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이 밖에도 어릴 때 사진과 혁명 중에 축구 경기를 하는 모습이나 동지들과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 그리고 의사로서의 진료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은 인상적이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체 게바라가 쿠바 혁명에 결정적으로 승리한 격전지가 있다. 그는 바티스타 정부군 병력과 무기 보급 열차가 산타클라라를 지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곳에 불도저로 철로를 끊고 열차를 전복시킨 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함으로써 혁명군이 승리하는 데 발판이 된 전투 현장이다. 그러나 볼거리로는 불도저와 열차를 전시한 것이 전부로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이곳의 승리로 혁명군이 아바나까지 입성할 수 있는 교두보가 마련된 곳이다. 산타클라라에는 전투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때 정신을 기리기 위한 혁명의 흔적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나 벽화 등이 다양하게 있다. 그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체 게바라가 이곳에 입성할 때처럼 깁스한 왼쪽 팔을 목에 거는 그의 동상과 Hasta la vitoria siempre 계속 승리를 향해 또는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라는 문구가 인상적이고 도시에는 구석구석 그의 체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체 게 바라는 쿠바를 떠나 아프리카 콩고로 갔으나 언어와 종교의 공통점이 많은 남미와 달리 아프리카의 생소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1966년 11월 변장한 채 홀연 단신 볼리비아에 입국하였다. 그는 볼리비아 공산당에서 지지기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11개월 동안 방황하던 중 미국에 의해 양성된 볼리비아 정예 레인저 요원의 매복에 걸려 1967년 10월 8일 총상을 입고 생포된 다음 날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그는 처형 직전 빈사 상태에서도 주저하는 집행자에게 당신이 날 죽이려고 온 것을 알고 있다. 떨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라! 당신은 단지 한 사람을 죽이는 것뿐이다!라고 일갈했다고 전한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39살의 젊은 나이로 마감하였다.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 8-④

한국동란 이후 동서 간 이데올로기 투쟁이 심화하였고 공산주의 진영 내에서도 중국과 소련 간의 충돌로 편 가르기가 촉발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쿠바 경제는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침체하였고 그 과정에서 체 게바라는 경제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자아비판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권력 속성상 그의 실책을 반대파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 틈에 피델 카스트로의 친 소련파는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자 그는 권력 중심에서 멀어졌다. 그 후 피델은 친소정책을 표방하며 자국 내 소련의 핵미사일 기지 설치를 허용하고 군사와 경제 원조를 얻어냈으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소련이 배치하였던 핵미사일을 철수하자 체 게바라는 소련의 진의에 깊은 회의에 빠졌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진 핵미사일 사건에서 미국이 이기자 그는 소련은 더는 사회주의 혁명을 지원하는 종주국이 아니다라고 비판하며 마오쩌둥의 혁명 전략과 개발 모델에 큰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한편 피델 카스트로는 정권을 유지하고자 소련 이념과 정책 방향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자 둘 사이에는 봉합할 수 없는 균열이 생겼다. 1965년 체 게바라가 알제리를 방문하여 소련을 향해 어떤 사회주의 국가는 제국주의 국가처럼 착취한다라는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격노한 소련의 집권자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체 게바라가 공직에서 사퇴하지 않으면 쿠바에 대한 모든 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엄포를 놓자 카스트로는 그를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체 게바라는 쿠바를 떠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노동계급이 중심이 되는 대중혁명을 지원하고자 쿠바에서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을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확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소수 지지자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 게릴라도 되돌아가기 위하여 쿠바를 떠나기 전에 가족과 카스트로에게 남긴 작별 편지가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쿠바인들에게 유명한 편지 내용은 두 사람이 각자 제 갈 길로 가면서도 서로에 대한 축복으로 어우러진 이별 이야기로 그들은 혁명을 사랑으로 바꾼 애절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칭송한다. 산타클라라를 방문하면 누구나 이 편지를 보려고 이곳을 찾는다.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 8-③

체 게바라 집안은 스페인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상류층이었고 그는 1928년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문학과 사상에 대한 열정이 높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독서를 좋아하였고 진보적인 사상에 일찍 눈을 떴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에서 공부하였고 학창 시절에는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모터사이클을 타고 남미 일대 4,500km를 여행하며 고대 유적과 문명에 매료되었다. 이때 그는 라틴아메리카 역사와 민중들의 삶에 깊은 인상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학업을 마치고 의사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어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꿈을 이루려고 과테말라로 떠났다. 그곳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 소속 정치혁명가로 폭넓은 인맥과 경험이 있는 여성 혁명가 일다 가데아 아코스타를 만나 첫 결혼 하였다.. 아이를 안고 있는 체 게바라의 청동상 체 게바라는 1955년 멕시코에 머물 때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을 만나 쿠바혁명에 뛰어들었다. 그는 멕시코에서 혁명군을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에 침투하여 바티스타 정부군에 반항하며 게릴라 활동을 하였다. 그는 친미 정부를 전복하여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였고 피델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는 데 이바지하여 쿠바 시민이 되었다. 혁명 직후 그는 순회대사가 되어 이집트의 나세르, 인도의 네루,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 비동맹국가 지도자들을 만나 반제국주의와 반식민주의 외교활동으로 우호를 다졌다. 또한 그는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났고 쿠바 대표로 UN 총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혁명 정부에서 국가토지개혁위원회 위원장, 중앙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에 발탁되었다. 그는 농업국 쿠바를 공업국화 하려는 계획의 책임자가 되어 쿠바의 두뇌로 칭송받으며 사회주의 정권의 기초를 세워나갔지만, 애초부터 그는 사회주의 몽상가였지 금융이나 경제 전문가는 아니었다. 특히 정권 초기 너무 서두른 산업시설 국유화 조치는 서방 자본 이탈과 함께 미국의 경제 봉쇄라는 양날의 칼을 맞고 쿠바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아직도 그 후유증이 이어지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시간이 멈춘 카리브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 에피소드7-①

온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난은 자초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받지만, 예수의 수난은 신학적으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구속 사업이다. 그러나 기독교와 동반 진출한 스페인의 중남미 식민지 수탈은 원주민의 역사와 문화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고 영혼까지 서로 뒤섞이어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 쿠바는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중남미로 가는 길목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스페인은 이 곳을 선점한 후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해적들로부터 끊임없이 침공을 받았다. 전투에는 스페인 군대 외에 아프리카 노예를 참전시켰고, 살아남은 자들은 진지를 구축하거나 복구하는데 끊임없이 노동력을 착취당하였다. 스페인 왕실 금고에는 식민지에서 채굴한 금과 은으로 가득 채워졌고, 그 후 더 가져갈 금을 채굴하지 못하자 침략자들은 설탕과 담배 무역으로 수익을 창출했다. 그 과정에서 노예는 혹독한 강제 노동과 질병에 시달렸고, 목숨을 잃어도 인간다운 예의를 받지 못하였다. 트리니다드에서 북쪽으로 16㎞ 떨어진 곳에 있는 잉헤니오스 계곡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이 곳은 아프리카 노예를 끌고 와 사탕수수농장을 일군 수탈 현장으로 트리니다드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1988년 등재됐다. 시 외곽 한적한 곳에서 마주한 기차역과 플랫폼은 지나간 세월의 무게만큼 남루한 모습이 처량해 보이나 1950년대 후반 우리나라 시골 역을 보는 듯 정겹다. 타고 갈 증기기관차 겉모습은 너무 낡아 움직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지만 보는 순간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탔던 기차여행의 향수가 떠오른다. 출발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기차는 느린 속도로 들판과 계곡을 달린다. 철로 주변에는 잡목과 덩굴 식물이 무성하고 레일 사이에는 잡초가 많아 이 지역의 흥망성쇠를 보는 듯하다. 과거 설탕 산업이 활황일 때는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으나 지금은 하루 한두 차례 여행객을 실어 나르는 남루한 관광열차에 불과하다.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 8-① 체 게바라의 사회주의 혁명과 쓸쓸한 뒤안길 물라티 종업원과 영어로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 음식을 가져올 때마다 쿠바에 관해 물어본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이 종업원은 트리니다드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고작 20㎞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외가댁에 가본 것이 전부라는 말에 귀를 의심한다. 영어를 어떻게 배웠느냐고 질문하자 그녀도 오후에 이야기를 나눈 여학생처럼 독학으로 깨우쳤다고 한다. 덧붙여 시골 학교에서는 영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고 이야기하며 주변에 있는 다른 종업원의 눈치를 살핀다. 사회주의의 숨겨진 뒷모습일까. 이야기를 반추하면 아마도 50여년 이상 쿠바와 미국 간의 관계악화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트리니다드는 16세기 초에 건설되어 번성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19세기 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전투에서 이 지역 설탕 농장은 모두 폐허가 됐다. 하지만 설탕 산업 붐으로 이룬 부의 흔적은 성당이나 카라라 대리석 바닥과 철제 격자를 갖춘 농장주의 황폐한 저택에서만 그 영광을 찾아볼 수 있다. 트리니다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양콘 해변은 쿠바에서도 손꼽히는 해양 스포츠 명소로 젊은 여행자들이 찾는 1순위 여행지다. 특히 밤마다 도시 곳곳에 있는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펼치는 아프로 쿠반 밴드의 공연과 살사 춤사위는 언제나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쿠바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중 으뜸은 젊은 사회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꿈이 실현된 나라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노인과 바다를 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쿠바에선 통치자 카스트로 가문이 더 유명할 수 있지만, 쿠바사람들에게 노스탤지어의 원천인 체 게바라를 빼놓을 수 없다. 오늘은 트리니다드를 출발해 체 게바라의 도시 산타클라라로 간다. 그가 불멸의 청춘을 불사른 곳이자 잠들어 쉬는 곳이다. 아바나에서는 동쪽 290㎞ 지점에서 차로 약 4시간 이상 걸리지만, 트리니다드에서는 아바나로 가는 길목에서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어두컴컴하지만, 곧 밝아올 새날의 여명이 지친 여행자를 설레게 하여 생기를 돋게 한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차려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카리브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자 어느새 진한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집주인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오른다. 그녀는 아쉬움을 담아 또 놀러 오라고 인사하지만, 다시 찾기는 쉽지 않은 곳이라 가슴이 찡하다. 이처럼 자연을 닮은 사람의 행복한 미소는 길 떠나는 여행자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고 지울 수 없는 여행의 향수에 취하게 한다. 박태수 수필가

[시간이 멈춘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 8-②

가는 길 차창 밖에는 나지막하게 키 작은 카리브 겨울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어디론가 바쁘게 종종걸음으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느릿느릿 마차 타고 콧노래 부르며 가는 사람도 보인다. 산타클라라로 가는 아침 길은 나그네에게 잔잔한 시골 풍경과 아침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 준다. 체 게바라의 도시 산타클라라는 비야클라라 주도로 쿠바나칸 인디오가 살았던 곳이다. 그러나 스페인이 쿠바를 점령한 후 1689년에 스페인이 건설한 식민도시로 발전하여 이 지역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곳도 잉헤니오스 계곡처럼 사탕수수와 잎담배 농사로 성장하였다. 부근에는 철과 구리 등 광산에서 수탈한 물자를 유럽으로 옮기기 위하여 시엔푸에고스 항구로 실어 나르기 위한 도로와 철도가 조성되었다.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낮은 언덕에 도착한다. 이미 멀리서부터 체 게바라의 동상과 기념비 뒤에 있는 혁명박물관이 보였다. 오전 이른 시간임에도 이미 한 무리 노인들이 이곳을 찾았고 가슴엔 사회주의 키치 같은 상징인 훈장을 주렁주렁 단 사람도 눈에 띈다. 말로만 들었던 위대한 사회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 기념비와 마주한다. 당시 그가 이끈 24명의 혁명군은 300명이 넘는 바티스타 정부군의 무기수송 기차를 습격하여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혁명군이 쿠바혁명을 완수하는 데 크게 기여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에는 체 게바라의 거대한 동상과 동지들의 활약상을 조각한 성벽 같은 조각 벽화가 있다. 조형물을 마주하는 순간 이곳에서도 한때 소비에트연방 일원이었던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보았던 혁명광장의 판박이 같은 거대한 조형물에서 사회주의의 키치를 다시 한번 느낀다. 산타클라라는 체 게바라 도시답게 혁명군의 전승을 기리는 격전지 투어가 있다. 물론 쿠바인들에게 사회주의를 고취하기 위한 혁명유적지다. 프로그램에는 체 게바라 기념관, 동상, 당시 그들이 탈취한 무기수송 열차, 정부군과 싸운 격전지 비달 광장, 로마 델 카피로 전망대 등 그를 기리는 명소가 전부다. 박태수 수필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 7- ④

가는 길 주변은 깨끗한 중심지와 달리 청결하지 않고 하수 시설이 안 되어 있는지 생활 오수를 그냥 길바닥에 버린다. 마침 조금 전 이곳을 지나간 말의 배설물과 섞여 돌로 된 바닥에 그대로 스며드는 현장을 보며 625 전쟁 후 50년대 말 우리나라를 보는 듯하다. 고등학교 앞에 다다르자 마침 하교하는 여학생 무리를 만난다. 이야기를 건네자 깔깔 웃으며 영어를 못한다고 두 손으로 가위 표시하며 한 학생을 지목한다. 그 학생에게 영어 수업에 관한 질문을 하자 한 주에 한 시간 영어 수업이 있지만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선생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열의도 없다는 충격적인 대답을 듣는다. 대화한 학생은 2016년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쿠바를 다녀간 후 앞으로 영어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어 독학으로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번 쿠바 교육 현장의 뒷모습을 본다. 조금 전 헤어진 여학생 무리가 몇 발치 떨어진 곳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운다. 놀라운 사실은 흡연하는 청소년을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쿠바는 질 좋은 담배 생산량이 많고 배급 물품에 속해서인지 청소년 흡연율이 높다. 2020 세계인구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소년 흡연율은 남자 9.6% 여자 2.7%이나 쿠바는 남자 19.8% 여자 15.0%로 우리나라보다 남자 2.1배 여자 5.6배로 월등히 높다. 성인 흡연율도 우리나라 27.0%보다 쿠바는 35.3%로 높은 현실을 볼 때 쉽게 담배를 구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변하지 않는다면 청소년의 담배로 인한 건강 피해가 염려된다. 3박 4일의 트리니다드 여정을 마치고 마지막 밤의 만찬을 즐기려 발길을 옮긴다. 메뉴는 게스트하우스 부근 레스토랑에 예약해 놓은 카리브 바닷가재 요리다. 한국에서는 비싸 식사하기 어렵지만, 이곳에서는 5분의 1 가격 정도면 된다. 예약한 레스토랑은 여행 평가 사이트에서 랑고스타 요리 수준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 앞을 오가며 몇 차례 눈인사한 물라티 종업원도 있어서다. 랍스타의 탱탱한 식감과 함께 다른 음식도 푸짐하고 맛도 좋다. 시각적으로 예쁜 상차림과 조용한 분위기도 괜찮은 편이다. 종업원의 서비스도 만족스럽고 엊그제 마요르 광장 부근에서 먹은 가제요리보다 가격대비 가성비도 좋다. 카리브에서 잡은 싱싱한 바닷가재 요리로 쿠바 음식의 고상한 맛을 즐기지만, 이곳에서도 랑고스타는 보통 사람들이 먹기 어렵다고 한다.

[시간이 멈춘 카리브의 섬나라 쿠바 여행 에세이] 에피소드7-③

잉헤니오스 평지에 바람이 불자 줄에 널어놓은 순백의 수예품 천은 바람결 따라 휘날린다. 마치 지나간 인고의 고통을 회상하며 고단하던 시절 삭일 수 없는 아픔을 위로하려는 듯 진혼의 춤사위를 펼친다. 이즈나가 농장은 인간이 자유를 구속당하고 겪어야 했던 고통의 상흔을 뒤돌아볼 수 있는 인상적인 장소이고 이즈나가 탑은 노예 제도에 대한 침묵의 증인이다. 노예감시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설탕 산업이 호황일 때 지은 제분소 공장 흔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항구로 오갔던 증기기관차는 말끔히 치장하고 달리려 한다. 플랫폼에는 노예 후손인 물라토가 압축기로 사탕수수 주스를 내리고 물라티는 손수 만든 수공예품을 펼쳐놓고 눈빛으로 여행객을 유혹한다. 언제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한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며 이즈나가 탑이 노예들에게는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생각해본다. 기차를 타고 떠날 때 점점 작아지는 노예 감시탑을 바라보며 그들의 상흔을 가슴에 느끼고 무념무상에 젖는다. 트리니다드로 돌아와 교육 현장을 보고자 먼저 유아원을 찾는다. 콜로니얼 시대 건물에서 서너 살 되는 어린아이들이 옹기종기 바닥에 앉아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고 보모로부터 동화 이야기를 듣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가 초등학교 앞에서 멈칫하자 한 여인이 들어오라고 한다. 트리니다드의 클래식 건물의 정형인 학교 건물도 길과 맞닿은 대문 안쪽 거실이 교무실이다. 그곳에는 세 명의 교사가 책상에 앉아 수업 준비를 하고 앞쪽에는 들어오라고 손짓한 여인이 앉아있다. 추측하건대 당당한 그녀의 모습을 볼 때 당에서 나온 감독자로 수업 전반을 감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수업 장면을 촬영할 수 있느냐고 하자 그녀는 학교 사정이 좋지 못하니 후원해주면 좋겠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한다. 20달러 지폐 한 장을 건네주고 한 교실에서 여러 학년이 함께 통합 수업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방인의 등장에 잠시 당황하던 남자 교사는 의식하지 않고 수업을 계속하고 몇몇 학생은 이방인을 쳐다보며 옆자리 친구와 장난친다. 이 학교는 시설 부족과 전반적인 여건이 열악하여 학년별로 수업하지 못하고 13학년 하급반과 46학년 상급반으로 구분하여 통합수업을 한다. 눈앞에 펼친 사회주의 쿠바의 교육 현실은 화려한 관광지구와 달리 장막 뒤에 가린 어두운 모습이다. 교사였던 아내는 열악한 쿠바 교육 현장을 보고 안타까워한다. 감독 여인에게 길 안내를 받아 외곽에 있는 중고등학교로 발길을 옮긴다. 박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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