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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12. 국외 한인사회 대동단결 도모한 오영선·부인 이의순

오영선은 6품 중추원 의관 주임관을 지낸 오평묵과 고씨 부인의 장남으로 1886년 4월13일에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리(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다. 호는 기윤, 다른 이름은 윤길로 알려졌다. 별호로 석농을 사용하기도 했다. 형제로 재선과 필선 두 동생이 있었다. 재선은 교사로서 민족교육에 힘쓰다가 일경의 고문으로 병고에 시달리며 요절했다. 필선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지였다. 오영선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면서 국제정세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3년 정도 근무한 개성 보창학교는 이건혁ㆍ임규영ㆍ박우현ㆍ손의문ㆍ최문현 등 유지신사들이 경비를 지원해 재학생이 백여 명에 달할 정도로 발전했다.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일제의 군대 강제 해산으로 안타깝게 구국 간성이 되려는 군인의 길을 접어야만 했다. 이후 영선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물리학교에 입학했으나 배일사상이 문제가 돼 퇴학 처분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이동휘의 초청을 받아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이 함북 성진군에 세운 협신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이러한 인연은 이동휘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계봉우ㆍ김하석ㆍ정창빈 등과 이른바 이동휘 교육생이 됐다.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약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오영선은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이동휘와 함께 북간도로 이주했다. 광성학교 교사로서의 활동은 독립운동을 이끌어갈 인재 양성과 맞물려 있었다. 동녕현 나자구에 동림무관학교 설립은 장차 일어날 독립전쟁에 대비하려는 일환이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곳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돼 국무총리 이동휘의 활동을 보좌했다. 이즈음 임시정부는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임시정부 개혁 논의가 한창이었다. 오영선은 1922년 독립신문에 신년의 신각오(독립운동에 관하여)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동지들에게 지금까지 구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한 7가지 각오를 밝혔다. 첫째는 공과 사의 구분, 둘째는 책임감, 셋째는 개인 욕망의 억제, 넷째는 감정이 아닌 이성, 다섯째는 동지의 결점과 단점을 지적하지 않기, 여섯째는 경거망동 금지, 마지막으로 동지를 선의로 대하는 것 등이었다. 즉 우리는 독립운동가라는 의미 앞에서 다 동지다라며 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임시정부 개혁에 앞장섰다. 1924년 12월 박은식 내각에선 법무총장으로 선출돼 정국쇄신을 위한 헌법을 개정했다. 이듬해 박은식이 사망하자 장례위원으로 빈소를 지키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정의, 신민, 참의 3부를 설득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도록 합의를 이끌어냈다. 김구 체제에서 군무장, 이동녕 체제에서는 의무장과 군무장에 각각 임명돼 민족유일당운동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중국 정세 변화로 이 운동은 1929년 10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가 해산을 선언함으로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이외에 임시정부 외곽단체에도 적극 참여했다. 대한교민단 의사회 학무위원으로 교민 자제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안창호를 중심으로 조직된 임시정부경제후원회 발기준비위원회에 임원도 맡았다. 이밖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해 안공근 등과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계속적으로 임시정부의 개혁과 대동단결을 주장했지만 안타깝게도 1939년 3월10일 상하이에서 지병으로 눈을 감았다. 정부는 임시정부의 통합을 주도한 오영선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 이의순 이의순은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대성리에서 아버지 이동휘와 어머니 강정혜 사이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하빈(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이다. 할아버지는 단천군 통인을 지낸 이승교(일명 이발)로 서북학회 회원과 연해주지역 노인동맹단원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다. 아버지는 강화도에서 보창학교를 중심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대한제국기와 일제 강점 초기에 문무쌍전에 입각한 민족교육을 이끈 선각자다. 중국 동북지역으로 망명한 후에는 민족학교를 운영하는 등 한인 자녀들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연해주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독립운동사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언니 이인순은 독립운동하는 아버지를 지원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했다.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1월께, 당시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버지를 도와 독립의 선봉장을 자임한 신여성이 열악한 환경으로 27세에 요절하고 만 것이다. 그녀가 숨진 이후 아들 정광우마저 5세의 어린 나이로 역시 장티푸스로 숨졌다.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모자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남편 정창빈은 이듬해에 1월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음을 안타까워한 동포사회는 1920년 1월17일 오후 2시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주최로 이인순과 김란사(일명 하란사)ㆍ김경희 등의 추도식을 열었다. 이때 내빈으로 참석한 안창호ㆍ김립ㆍ윤현진 등 30여명은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이인순의 추도식을 상하이에서 개최할 정도로 이름난 여성독립운동가였다. ■한인사회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여권 신장에 노력하다 아버지가 강화진위대장으로 부임하자 이의순은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했다.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로 일찍이 근대교육 수혜를 받았다. 일제 강점 이후 가족을 따라 중국 동북지역으로 건너가 국자가에 정착했다. 지린성 허륭현 명동촌에 있는 민족교육의 요람지인 명동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이의순은 교사로서 정신태ㆍ우봉운 등과 함께 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인근 마을에 야학을 운영하는 한편 부흥사경회도 개최하는 등 한인 여성들 자부심을 일깨웠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선 신한촌 삼일여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3ㆍ1운동 이후 국치기념일에 즈음해 이 행사를 부부가 주관했다. 이의순은 우리는 여자라고 하지만 대한민족이라면 일반적으로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이상 어찌 안이하게 좌시할 수 있겠는가. 국내에서는 많은 여학생이 피를 흘렸는데 해외에 있는 여자들도 어찌 수수방관하고 집안의 안락을 욕심내며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원수의 총칼 아래서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칠 것을 우리들의 행복이라고 믿는다며 여성도 남성과 같이 독립운동에 헌신하자고 호소했다. 오영선 사진 그는 채성하의 장녀 채계복과 함께 상하이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했다. 이 조직은 남성들이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해 독립운동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결성됐다. 나아가 여권을 신장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또한 독립전쟁에서 활동할 간호부의 양성을 위해 적십자회를 조직에도 분투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한 오영선과 결혼했다. 아버지가 임시정부와 결별한 뒤에도 계속 상하이에 남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의순은 1930년 8월11일 인성학교 교장 김두봉의 부인 조봉원 등과 함께 기존의 여성단체 조직인 상하이 한인부인회를 개조해 급진적인 상하이 한인여성동맹 조직에 앞장섰다. 그러나 한인사회 여성운동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등으로 상하이 여자청년회를 조직하려는 창립대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정부는 공적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서 동포들 대동단결과 화합, 민족의식 고취와 여권 신장에 혼신을 다한 오영선-이의순 부부의 항일여정이 아련히 떠오른다.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의 독립운동과 함께 한 이들의 인생항로는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온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11.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론가 조소앙·부인 오영선

■ 일본 유학 경험 세계사적 안목 기르는데 도움 독립운동가 조소앙 성균관을 그만 두고 방황할 무렵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유학생을 선발했다. 조소앙은 이 소식을 듣고 응시해 합격했다. 일행 50명은 도쿄부립제1중학에 입학해 일본식 중등교육을 받았다. 엄격한 규율과 통제된 생활에 염증을 느낀 유학생 40% 정도는 중도에 그만 뒀다. 더욱이 을사늑약에 격분한 유학생들은 우에노 공원에서 을사오적 등의 매국행위를 성토했다. 소앙은 유학생 친목단체인 공수학회를 조직하고 학보의 주필로 활동하는 가운데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해 단연동맹에 동참했다. 부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세이소쿠 영어학원에서 어학을 공부한 후 1908년 3월에는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이 대학은 프랑스 법학의 영향을 받아 국권주의를 비판하는 민권주의적 법학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재학 중 대한흥학회 기관지인 대한흥학회보 주필을 맡는 한편 여러 잡지에 자신의 경험담 등을 투고했다. 강제병합 때에는 한일합병성토문을 전달하고 비상대회를 소집하려던 것이 발각돼 연금당했다. 1912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경신학교ㆍ양정의숙ㆍ대동법률전문학교 등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 상하이 망명 후 한민족 대동단결 도모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독립 운동가 조소앙 등이 제출한 독 립요구서. 연합뉴스 이듬해에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신규식ㆍ박은식ㆍ신채호 등은 중국 혁명인사 등과 동제사를 개조한 신아동제사를 조직했다. 소앙은 이에 가담하는 한편 박달학원을 창립하고 해외 청년들의 교육에 힘썼다. 국내외 동포의 대동단결을 유도하기 위해 사해동포주의에 입각한 육성교를 제창했다. 이어 국내외 동포에게 대동단결선언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강조했다. 만국평화회의에 출석할 준비로 주권불멸론, 주권민유론, 최고기관 창조의 필요론을 골자로 한 취지서를 작성해 이를 스웨덴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조선문제를 의제로 제출, 통과시켰다. 1918년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해 부주석에 선출됐다. 이듬해 2월에는 만주 지린성에서 김교헌ㆍ김동삼ㆍ황상규ㆍ박찬익 등 39명과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국내 3ㆍ1운동 소식을 접하고 대한독립선언서 4천부를 인쇄해 각지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단체에 보냈다. ■ 삼균주의를 대한민국건국강령으로 내세우다 나경석으로부터 국내 3ㆍ1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조소앙은 대한독립의군부 대표로서 활동무대를 상하이로 옮겼다.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국민주권주의를 내세웠다. 그는 헌장기초위원, 심사위원, 임시의정원법기초위원, 초대 국무원비서장, 국무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이어 파리 강화회의와 국제사회당대회 등에 임시정부대표로 참가하면서 유럽을 시찰한 뒤 1921년 베이징에 도착해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문인 만주리선언을 발표했다. 이듬해엔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에 선출됐다. 한편 개조파와 창조파의 분열로 타격을 입은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제3차 개헌을 통해 집단지도체제로 전환을 도모했다. 임시정부의 헌법개정을 반대하고 내부분열을 수습하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소앙은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는 중 삼균제도를 집필해 삼균주의의 토대를 형성했다. 1927년에는 김구ㆍ안창호ㆍ이시영ㆍ김두봉 등과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를 창립하고 상임위원에 선출됐다. 이어 민족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이와 함께 동생 용주를 귀국시켜 삼균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삼평사를 조직하고 잡지 평론을 간행했다. 민족혁명당이 조직되자 한국독립당 대표로서 신당창립대표위원으로 참석, 김규식ㆍ김원봉과 함께 규칙제정위원으로 선출됐다. 민족혁명당은 당의와 당강을 통해 8ㆍ15해방 후의 민족국가 건설계획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여기에 삼균주의 이론이 반영돼 정치ㆍ경제ㆍ교육의 평등을 제시했다. 재건한 한국독립당은 명백하게 삼균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표방했다. 중일전쟁 발발에 즈음해 조소앙의 재건 한국독립당은 한국국민당ㆍ조선혁명당ㆍ한인애국단과 미주 5단체 등과 통합,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로 조직됐다. 정강에는 삼균주의를 그대로 반영했다. 1941년 임시정부의 외무부장 겸 선전위원회 주임위원으로서 삼균주의 원칙에 입각해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기초했다. 이후 1943년 4월에는 한국독립당 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 ■ 조소앙 일가의 독립운동 버팀목으로 자리매김 부인 오영선 오영선(1887~1961)은 경기도 양주군(현 양주시)에서 태어났다. 조소앙과 혼인해 남편은 물론 자녀와 손자 등이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도록 뒷바라지에 혼신을 다했다. 1914년경 중국으로 망명했다. 남편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그런 만큼 시부모님 봉양과 자녀 양육 등 살림살이는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 영선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뒷바라지하며 독립운동의 뒷면에 있었다. 대부분 여성운동가들이 그러하듯 그녀의 존재감은 1940년에야 드러난다. 6월에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여성혁맹동맹 창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다. 이 단체는 임시정부 지원활동과 더불어 자녀들 민족정체성을 일깨우는 교육활동에 헌신적이었다. 또한 한국독립당 당원으로서 임시정부 지원에 남다른 활동을 전개했다. 오영선의 적극적인 활동은 남편의 삼균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아들 조시제는 한국독립당의 화랑사에 가입해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상해한인청년당을 조직하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딸 조계림과 남편의 두 번째 부인 최형록 등도 그녀와 활동을 같이 했다. 여기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부인이 감내해야 하는 고뇌와 역할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인생여정은 임시정부의 존재감을 굳건하게 이어나가는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한국전쟁 중 남편은 요인모시기 작전으로 납북되는 비운을 맞았다. 독립운동 중 남편과 생이별은 일상사와 같은 나날이었다. 슬픔에 안주하지 않고 일가의 가정사는 오로지 그녀의 몫으로 다시 시작됐다. 올곧고 헌신적인 독립정신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일군 하나의 진정한 밀알이 됐다.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해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올바로 평가했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국가보훈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10. 영원한 독립군 신팔균과 자결한 부인 임수명

신팔균은 김경천(본명 김경서), 지청천(본명 지석규)과 남만주 삼천(三天), 군인계 삼천으로 불릴 만큼 독립전쟁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인물이다. 그가 참여하거나 주도한 서로군정서나 대한통의부 등은 항일무장투쟁을 견인하는 대표적인 단체였다. 베이징에서는 김동삼ㆍ박용만 등과 함께 창조파 일원으로서 무장투쟁노선을 끝까지 고집한 참된 독립군이었다. 1882년 5월19일에 신팔균은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자는 윤수, 호는 동천이다. 본관은 평산이며, 본향은 충북 진천군 이곡면 노곡리(현 진천군 이월면 노은리)다. 그의 가문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무반이었다. 할아버지 신헌은 개혁적 관료로서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전권대신이었다. 그는 어느 문인 학자에 못지않은 경세가로 글씨에 문장에 능통했다. 아버지 석희는 한성부 판윤과 경무사, 중추원 일등의관 등을 역임했다. 신팔균은 삼형제 중 장남으로 동생 가균과 필균이 있었다. 가균은 그와 함께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민영환의 부관으로 근무하다가 군대해산 직후에 해직됐다. 1900년 10월 무관학교에 입학한 신팔균은 1903년 9월 보병과를 졸업했다. 재학 중인 1902년 7월6일 육군 참위(현 소위)에 임관됐다. 이듬해 3월 견습을 거쳐 군대해산 직전 보병 부위로 승진하고 보병 제7대대 부관으로 근위대에 배속됐다. 군대해산에도 그는 해임되지 않고 부위로 근무하는 가운데 2년 뒤에는 정위로 승진했다. ■교육계몽운동과 비밀결사운동에 뛰어들다 군인으로 재직하는 중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현실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그가 낙향하기 이전 동생인 필균은 친척인 신재균과 같이 사립보명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주요 교과목은 한문ㆍ국어ㆍ역사ㆍ지리 등으로 민족정신 함양과 항일의식 고취에 열성적이었다. 교사는 신팔균을 비롯해 동생 가균ㆍ필균과 생질 이조영 등으로 사실상 문중학교 성격을 지닌다. 그는 고택에 머물며 강당 고개에 있는 학교를 왕래, 학생들의 사기 진작에 노력을 기울였다. 신팔균은 이때를 전후해 대동청년당(단)원으로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이 단체는 보성중학교 교장 박중화를 중심으로 서울 남형우의 집에서 조직됐다. 목적은 신민회의 구국운동을 현장에서 실천하는 데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대종교인으로 훗날 중국 동북지역에서 무장투쟁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했다. ■대동단결항일투쟁으로 그려나간 인생 방향 강제 병합 이후 일제는 신팔균을 집요하게 감시하고 회유했다. 사실상 국내에서 그의 활동은 불가능했다. 그는 두 번째 부인 임수명을 만나 결혼 전후인 1914년경에 중국 안둥(현 단둥시)을 거쳐 베이징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그는 베이징과 남만주를 왕래하며 항일운동을 펼쳤다. 3ㆍ1운동 이후 북경고려공산당에 가입ㆍ활동하면서 이후 최진 등과 군인구락부를 조직ㆍ활동했다. 1922년 8월에는 경신대참변 당시 발생한 한국인 고아들 교육을 위한 자치기관의 성격을 지닌 한교교육회를 만들었다. 목적은 교민의 자녀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있었다. 집의학교를 설립했으나 경비 부족으로 1년만에 폐교되고 말았다. 이듬해에는 박용만ㆍ최동오 등과 북경한인구락부 조직에 참여했다. 이 단체는 한인들의 교육ㆍ오락ㆍ구제사업 등 베이징 한인들을 대상으로 사업사회를 병행했다. 1924년 7월에는 원세훈과 신숙 등이 합세해 북경한교동지회로 개칭했다. 한중호조사에도 간여하는 등 베이징 한인사회 대동단결 도모에 헌신적이었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그는 김동삼 등과 무장투쟁노선에 입각한 임정개조론을 주장했다. 창조파는 임시헌법을 새로 제정하고 국민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신정부를 지향하고 있었다. 신팔균은 군무위원장으로 선출돼 5개 군구(軍區)를 관할하는 책임자로, 연해주와 만주 지역 무장부대를 총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다양한 활동과 함께 중국과 연대를 모색하는 등 한인사회 지도자로서 부각됐다. 부인 임수명 ■대한통의부 총사령관으로강한 독립군 양성 몰두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도 무장단체 사이에 협력과 알력은 지속되고 있었다. 대한통의부의 지휘부는 1924년 1월 중앙의회에서 위원장제로 개편했다. 군사위원장에 취임한 그는 대대적인 조직 개편과 군사훈련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관 자격을 갖춘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사관 학원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924년 7월2일엔 남만주 흥경현 이도구에서 군사훈련을 진행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지방군으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동천은 진두지휘하면서 안전지대로 병력을 후퇴시키던 중에 총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다시 전투를 지휘하던 중 총탄이 흉부를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최후 순간에도 그는 일제와 싸우다 죽어야 하는데, 무관한 중국 사람과 싸우다 죽는구나라고 크게 억울해했다. ■남편의 순국 소식을 듣고 생을 마감한 임수명 임수명은 경기도 개성 출신이다. 대부분 여성운동가들이 그러하듯 가족 관계나 성장 과정 등은 알 수가 없다. 서울에서 간호원으로 일하던 중에 일제 경찰에 쫓겨 환자로 위장한 신팔균을 만나 1914년에 결혼했다. 남편과 같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베이징에서 1917년과 1919년 각각 아들을 출산해 양육했다. 남편은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한편 중국 동북지역 무장단체와도 긴밀하게 연락했다. 자녀 양육은 물론 비밀문서 전달, 군자금 모금, 독립군 후원 등도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신팔균이 순국하던 시점인 1924년 7월, 부인은 만삭의 몸으로 베이징에 있었다. 순국 소식을 알면 뒷일이 염려돼 동료들과 동지들은 그녀를 가족 곁으로 억지로 귀국시켰다. 귀국한 셋방살이로 전전하며 유복녀 신계영을 낳았다. 남편 소식을 기다리던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청천벽력 같은 남편의 순국 소식을 알았다. 이때 전후로 둘째 아들마저 병사하면서 충격을 받아 삶의 희망마저 잃었다. 결국 임수명은 갓난 딸과 함께 음독해 열녀처럼 남편의 뒤를 따랐다. 조카와 장남은 시신을 수습해 선영이 있는 진천에서 모셨다. 가정의 비극이자 슬픔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에 장남이 사망하는 등 일제 강점으로 일가족 모두가 희생되고 말았다. ■진정한 독립군의 상징이 돼다 그녀의 죽음에 조의금을 전하는 등 잠깐이나마 사회적인 관심사로 부각되었으나 곧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특히 시대일보 1924년 11월4일자 기사는 진한 여운과 메시지를 전한다. (상략) 더구나 자기 남편은 그리운 조국을 벗어나 거친 만주 뜰에 비상한 죽엄을 하고 어린 자식을 둔 외로운 홀어미가 원한과 간난 중에서 이 세상을 살라 하나 자기의 몸을 의탁한 남편이 이 세상을 떠난 이상에는 좁쌀만한 몸을 의지할 곳이 없고 차라리 멀리 황천으로 따라가 외로운 혼끼리 서로 위로하고 서로 의지하는 것이 쾌하겠다는 것이 이런 종막을 짓게 된 것이다. 남편이 민족을 위하여 죽고 아내는 남편을 따라 죽는 이 사실을 들을 때에 우리는 또다시 뜨거운 동정이 없지 못할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운동가들은 적지 않다. 안중근ㆍ이회영ㆍ이상룡ㆍ조소앙ㆍ오광선 일가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국망(國亡)에 즈음해 국권 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재산은 물론 존귀한 목숨까지 민족 제단에 바쳤다.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남편 사망 소식을 듣고 순국한 경우도 있었다. 신팔균ㆍ임수명 부부와 가족사는 우리들에게 아련한 기억으로 남는다. 누구는 이를 두고 전통적인 가치관이 빚어낸 비극이라고 혹평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는 너무 지고지순한 사랑과 조국애가 낳은 역사적 산물이 아닐까.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_서울국립현충원, 독립기념관 등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9. 한국광복군의 영원한 동지, 신송식·오희영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슬픈 이야기가 정설처럼 떠도는 현실이다. 3대 독립항쟁기념비는 할아버지에서부터 손자ㆍ손녀에 이르기까지 전 가족과 전 세대가 60년에 걸쳐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유명한 포수로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 할아버지 오인수(吳寅秀) 의병장, 만주 독립군에 이어 독립전쟁 일선에서 활약한 아버지 오광선(吳光鮮), 그리고 여성광복군으로 초모와 선전 활동에 나섰던 희영(吳姬英)ㆍ희옥(姬玉) 자매가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여기에 어머니 정현숙(처음 이름은 정정산)과 오희영 남편 신송식도 건국훈장을 받아 그야말로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공동운명체였다. ■3대가 독립운동에 나서다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릉리 어현마을은 고개가 길게 늘어져 있어 느리재라고도 부른다. 산들이 휘감고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이 마을 입구에는 이색적인 기념탑이 있다. 의병장 해주오공 인수라는 문구와 함께 3대 독립항쟁 기적비라는 문구에서 새삼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2003년 해주 오씨 종친회에서 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문중에서 배출한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것이지만 흔치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할아버지 오인수는 1905년 용인과 죽산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정주원 의병부대와 연합작전도 전개하는 가운데 남상목ㆍ김군필 부대와 연합해 안성 매봉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일본군에게 패한 후 빈총을 메고 애견과 함께 산야를 헤매다가 오인수는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고향집에 돌아왔다가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붙잡혔다. 7개월간의 모진 고문을 받은 후 8년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해야 했다. 해주오씨3대독립운동기적비 ■조국 광복 찾자는 뜻 담아 개명만주 독립군의 딸로 성장 토벌대에 끌려가는 아버지를 지켜본 어린 오광선은 죽은 애견을 땅에 묻으며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여준이 세운 삼악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해 서울의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했다. 일제에 의해 학교가 폐교에 이르자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했다. 이름도 조국의 광복을 되찾자는 광선으로 바꾼 그는 마침내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오광선에게 여준은 부친ㆍ부인 등과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한 달간의 여정 끝에 가족을 상봉한 오광선은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약했다. 이어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 후 서로군정서의 중대장과 대대장, 별동대장과 경비대장 등을 맡아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이 와중에 액목현에서 첫딸 희영(1925년 4월23일생)에 이어 2년 후에 둘째딸 희옥(1927년 4월3일생)을 얻었다. 오광선은 한국독립당 군사부의 의용군 중대장으로서 쌍성보전투, 경박호전투, 대전자령전투 등 전장을 누비며 맹활약했다. 그는 이후 근거지를 중국 관내지역으로 옮겨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지시에 따라 베이징으로 파견돼 비밀첩보활동을 펼치다 체포됐다. 심문 과정에서 온갖 회유와 고문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비밀을 지켰다. 신의주형무소에서 2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다시 하얼빈 인근으로 망명해 항일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신송식은 누구인가 신송식은 1914년 3월4일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면 입석리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진성경(陳敬誠)이다. 그는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당을 재건하고자 활동했다. 이듬해에는 국민혁명군 중앙포병 소위로 임명 배속돼 본격적인 항일전쟁에 참전했다. 1941년에는 민족혁명당원으로서 조선의용대에 가입해 제1지대에 편성됐다가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전입돼 시안에서 활동했다. 1942년 초에는 광복군 제3지대 지대장인 김학규의 인솔로 일군의 점령지구를 돌파, 중국군 유격부대가 자리 잡고 있는 부양에 도착해 그곳에서 첩보활동을 수행했다. 1944년에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반에 병설로 설치된 한광반의 교관으로서 광복군 양성에 주력했고, 같은 해 임시정부 주석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하던 오희영과 혼인했다. 1945년 6월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 참령 및 임시정부 주석비서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광복을 맞아 그는 교포의 귀국에 노력하다가 1946년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전원위원으로 활동, 이듬해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광복청년회 전위대장을 지내다 다시 타이완으로 가서 국민당정부 국방부에서 활동했다. 이후 1950년 2월 귀국해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사망했다. 사망 이듬해인 1974년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신송식 ■임정의 품 안에서 여성광복군으로 활약한 희옥 아버지 오광선이 특수 임무를 띠고 베이징으로 파견될 무렵, 어머니 정현숙과 희영ㆍ희옥 자매는 직속상관인 지청천의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전란을 피해 난징으로 이동해 임시정부 요인들 가족과 합류했다. 그러나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 요인들은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오희영 가족도 난징에서 치장으로, 다시 충칭으로 이동했다. 치장의 투차오에서 임시정부 요인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요인들의 뒷바라지에 전념했다. 한인촌이 형성되면서 투차오는 이전보다 안정적인 생활공동체로서 자리매김했다. 교회와 유치원이 있었고, 한인 자녀들은 화시탄 건너편의 청화중학에 다녔다. 투차오를 방문한 양우조는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언덕에 있는 YWCA 회관과 민가에서는 아이들을 모아 한국말과 한국노래를 가르치고 있어 그 앞을 지날 때면 고향에 온 느낌이 들곤 했다(제시의 일기)고 기록했다. 어머니는 한국혁명여성동맹 맹원으로 활동했다. 희영과 희옥 자매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했다. 오희영은 아버지 복수를 한다며 한국광복군 제3지대 산하의 징모처 제6분처 대원으로서 안후이성 푸양으로 가서 각종 선전활동에 참여했다. 주로 광복군의 활동을 대내외에 선전해 일제에 징병된 한인 학병을 탈출시키거나 첩보 상황을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던 중 김구 주석의 비서와 경호업무를 맡고 있던 신송식과 혼인해 부부광복군의 모범을 보였다. 오희옥 역시 13세 나이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입해 선전활동에 참여했다. 그녀는 공작대대원들을 따라 중국인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가두선전을 하거나 전장의 군인들에게 노래와 무용을 선보이며 사기를 북돋았다. 18세가 되는 해에는 한국독립당에 가입해 항일활동에 전념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그녀의 할아버지 오인수, 아버지 오광선, 언니 희영과 형부 신송식에 이어 자신과 어머니 정현숙도 늦게나마 건국훈장을 받았다. 세계사에 빛나는 독립운동의 명문가임을 알 수 있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_국가보훈처 등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8. 오광선ㆍ정현숙, 독립군에서 한국광복군 가족으로

아버지, 부부, 딸 둘과 사위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40여년간 펼쳐진 오광선ㆍ정현숙 부부의 항일 독립운동사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근ㆍ현대사가 아닐 수 없다. 오광선은 1896년 5월14일 용인군 원삼면 죽능리 어현(일명 느리재)에서 아버지 오인수, 어머니 이남천 사이 4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로 초명은 성묵이다. 그의 아버지는 용인ㆍ안성ㆍ여주 등지를 무대로 사냥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1905년 이후엔 용인과 죽산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수비대에 체포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옥살이를 한 후 출감했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오인수는 여준이 설립한 삼악(三岳)학교에 아들 오광선을 입학시켰다. 부친이 옥살이하는 동안 오광선은 1911년 삼악학교의 고등과에 들어가 2년 후 졸업했다. 아버지는 출옥하자마자 서둘러 아들을 결혼시켰다. 신부는 산 하나 넘는 이웃 마을인 이동면 화산리 출신 정정산(당시 14세ㆍ후일 정현숙)이었다. ■신혼생활 이전부터 독립운동 다짐만주서 살자 이미 독립운동에 큰 뜻을 품었던 오광선은 신혼생활 와중에도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대표적인 민족사학이던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했다. 은사인 장지영의 소개로 잠시 한약국 급사로 일하다가 1915년 가을엔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다. 베이징에 무사히 도착한 오광선 일행은 신규식의 도움으로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자신의 이름을 광선으로 바꾸었는데 조선의 광복을 되찾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6개월을 기한으로 폭탄제조법은 물론 군관이 되기 위한 특수훈련을 받았다. 중국 내전으로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어 방황하기도 했지만, 마침내 신흥무관학교에 무사히 도착했다. 오광선은 열심히 학업과 훈련에 열성적이어서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광을 안았다. 가족도 이주해 같이 생활하게 됐다. 당시 상황을 정현숙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20살이 되던 해(1919년) 봄 그이로부터 소식이 왔어요. 압록강 대안에서 200리 떨어진 곳의 신흥무관학교에 와 있으니 그리로 오라는 것이었지요. 간단한 살림도구를 챙겨 용인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지나 명죽리에서 내렸어요. 거기서부터 육로를 한 달 동안이나 걸어 만주로 들어갔지요. 단란한 그녀의 가정생활이었지만, 눈물겨운 독립운동 뒷바라지의 시작인 운명이었다. 이 무렵 가족들 안전을 위해 현숙으로 이름을 바꿨다. ■대전자령전투 후 한인군관 양성 위한 교관으로 활동 일본군에서 탈출한 지청천이 신흥무관학교 교육훈련대장에 취임하자 오광선도 교관을 맡았다. 3ㆍ1운동 이후 독립전쟁에 대한 기대는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오광선은 서로군정서의 중대장, 대대장, 별동대장, 경비대장 등으로 각종 전투에 참전했다. 1930년대 초반 만주의 정세는 일본군의 침략 노골화로 매우 불안했다. 전쟁 발발의 위기에 대응한 재만 한인세력은 대동단결과 무장투쟁 역량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이에 따라 지청천과 홍진 등이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내걸고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오광선도 군사부 위원에 배치돼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길림구국군과 합류, 항일 공동작전을 펼쳐 대전자령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뒀다. 1934년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내 한인특별반이 편성돼 군관양성활동이 본격화됐다. 지청천이 총책임자로서 군사훈련을 지도했고 오광선도 교관으로 초빙됐다. 한인반은 한국독립군 출신과 김구 계열, 김원봉 계열로 나눠져 세력간 경쟁이 일어나면서 갈등이 쌓임에 따라 2기생을 배출하고 이듬해 중단되고 말았다. ■베이징서 비밀공작 전개하다 근거지 노출돼 체포 이후 오광선은 김구 주석의 지시에 따라 북경으로 파견돼 비밀공작대를 조직했다. 김구 주석은 만주에 독립기지를 재건할 목적으로 오광선에게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을 규합하려는 의도였다. 이에 오광선은 1936년 베이징서 금은방을 차리며 잠행했다. 텐진에서 난징으로 이동한 가족들은 임시정부의 요인들 가족과 합류했다. 이 무렵 아들 오영걸이 태어났다. 베이징에 홀로 남아 첩보활동을 펼치던 오광선은 마침 그곳에 방문한 일본 관동군 참모장인 도이하라(土肥源) 중장의 암살을 준비했다. 불행하게도 국내에 침투한 다른 공작원의 체포로 근거지가 노출되고 말았다. 만주군 보안대와 일제 경찰의 기습으로 체포돼 1936년 10월부터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당시 상황을 둘째 딸인 오희옥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김구 선생님이 우리 아버지한테 비밀공작 사명을 맡겼어. 청년 몇 명 데리구 가서 비밀공작하라고.아버지는 북경서 금은방을 잘했는데, 어떤 한국인 스파이한테 걸려서 별안간 다들 자는데 한밤중에 우당탕 쳐들어 와 담을 넘어서 잠옷 바람에 다 걸렸대요. 그중에서 한 사람 주머니에서 조그만 칼이 있었대요. 창칼 끈으로 끊고 뛰어내렸는데, 50미터 간 후에 우리 아버지가 마지막 총을 옆구리를 맞았대요. 겨우 기어가 중국집으로 들어갔대요. 오광선은 1938년 출옥한 이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하얼빈 인근에서 항일 빨치산들과 만나 활동했다. 그는 만주 여러 곳을 편력하면서 지하활동을 꾀하다가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들었다.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들은 오광선은 곧 상하이로 건너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을 만났다. 지청천은 그를 국내지대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오광선은 국군에 투신하기로 결심, 육군사관학교 8기생으로 입교해 이듬해 육군대령으로 임관됐다. 한국전쟁 당시 오광선은 전주지구위수사령관을 8년 동안 지낸 후 준장으로 예편했다. ■독립군 뒷바라지, 만주벌 독립군의 어머니로 자리매김한 정현숙 1900년 경기도 용인에서 고명한 딸로 태어난 정현숙(본명 정정산)은 엄격한 환경에서 자랐다. 1913년 부모님 결정에 따라 이웃 마을에 사는 오광선과 부부가 됐다. 결혼생활에 대한 달콤한 기대와 달리 빈곤한 시집살이는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 모진 생명을 지탱하고자 안간힘을 기울였다. 남편 오광선은 이듬해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고자 상경했다. 이후 항일운동에 투신하고자 홀연히 중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남편의 무소식에 집안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더욱이 시부모 봉양을 비롯한 가정 대소사는 맡아야 하는 막중한 운명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노력에도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오광선과의 생활에서 마적단의 습격과 추위,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려야 했던 정현숙은 1924년 첫딸 오희영을, 2년 뒤엔 둘째딸 오희옥을 낳았다. 옥수수와 조를 심어 살림을 이어가던 정현숙 일가가 쌀을 구할 수 있을 때는 1년에 한 번, 설날뿐이었다. 교관인 오광선이 밤이건 새벽이건 갑자기 부하들을 데려와 밥을 먹여 집안의 식량은 매일 비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전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헌신적인 독립군 뒷바라지를 한 정현숙이 얻은 별명은 만주벌 독립군의 어머니였다. ■오희영ㆍ오희옥 자매를 여성광복군으로 키우다 이후 정현숙은 남편을 따라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주해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그녀를 포함해 세 모녀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오희영은 먼저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초모공작 등에서 활약했고, 동생 희옥도 공립중학교 3학년 다니다가 광복군에 지원했다. 이후 맏딸은 김구 주석의 사무실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 경호업무를 맡고 있던 신송식과 혼인해 부부광복군의 모범을 보였다. 그녀도 한국혁명여성동맹에 가입해 독립운동가 자녀들에게 역사ㆍ한글ㆍ창가 등을 가르쳤다. 오광선과 정현숙 부부의 인생항로는 독립운동과 자유로운 대한민국 건설로 점철돼 있다. 광복 후 가족들은 극적으로 상봉할 수 있었다. 정부는 오광선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정현숙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두 딸, 맏사위 등도 독립유공자가 됐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_국가보훈처 등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7-2. 주체적 민족정신 강조한 신채호와 영원한 반려자 박자혜

단재 신채호의 반려자인 박자혜는 1895년 12월1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수유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다. 일찍이 어머니가 사망해 어린 나이에 궁궐의 견습나인(일명 아기나인)으로 입궁, 10여 년 동안 궁중생활을 했다. 궁궐 생활을 위해 예의범절과 더불어 전통적인 학문을 받을 수 있었다. 일제 강점으로 대한제국이 망하면서 궁궐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상궁 조하서의 도움으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에 입학ㆍ졸업할 수 있었다. 이 학교는 엄귀비가 사족의 자녀를 교육하기 위한 현모양처주의를 표방했다. 이어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간호부과를 입학ㆍ졸업해 조산부가 됐다. ■언변 능하고 간호부 독립운동 주동한 자일제의 주목 박자혜가 조선총독부 부속병원의 조산원으로 근무하던 중이던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이필주 목사와 연락을 취하면서 이 병원 조산원과 간호원들로 조직된 간우회의 회원들과 함께 유인물을 배포했다. 병원에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과정에서 민족의 울분을 절감했다. 그는 3월10일께 비밀리에 간우회원들을 규합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이어 같은 병원 동료들과 김형익 등 한국인 의사를 규합하고 시내 국ㆍ공립 병원 직원들의 동조를 얻어 태업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러나 다행히도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풀려나게 됐다. 일제의 감시보고서인 사찰휘보는 박자혜에 대해 평소 과격한 언동을 하는 언변이 능한 자, 조선총독부 의원 간호부를 대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주동자로 명시하며 주목하고 있었다.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하기 어렵게 되자 박자혜는 중국으로 떠났다. ■단재와 부부이자 동지로서 인연을 맺다 베이징에서 박자혜는 옌진대학(현 베이징대학 전신) 의예과에 입학했다. 1920년 봄에 15세 연상인 독립운동가 신채호를 만나 인연을 맺었다. 단재와 만남에 대해 훗날 다음과 회고했다. 검푸르던 북경의 하늘빛도 나날이 옅어져 가고 만화방초가 음산한 북국의 산과 들을 장식해주는 봄 4월이었습니다. 나는 연경대학에 재학 중이고 당신은 무슨 일로 상해에서 북경으로 오셨는지 모르나 어쨌든 나와 당신은 한평생을 같이하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듬해 아들을 낳고 다시 1922년 둘째를 임신했으나 경제적 궁핍으로 아들과 함께 귀국했다. 임신한 아이는 태어나지 못했거나 유아기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박자혜는 서울 인사동에 박자혜 산파를 개원해 생계를 모색했다. 조산부는 교사나 은행원 등 여성전문적인 직업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임산부들은 출산을 산파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이 매우 궁핍했다. 서울로 돌아와 산파소를 개업했으나 일제의 감시와 방해로 개점휴업인 상태였다. 수시로 찾아와 온갖 방해를 일삼았기 때문에 영업을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산파소 경영난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열 달이 가야 한 사람의 손님도 찾아오지 않아 산파소 간판을 달아 놓은 것이 도리어 남에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러니 아궁이에 불 때는 날이 한 달이면 사오일이라. (중략) 산파소 간판이 걸린 초가집 대문을 넘어 문턱에 들어서자 부엌도 마루도 없는 한 칸 방에 박자혜가 앉아있었다. 부인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기 어려웠다. ■노점상 하며 독립운동 지원끝내 독립 못 보고 병사(病死) 그는 생계를 위한 풀장사나 참외장사 등 노점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자녀를 기르고, 동지로서 중국에 있는 단재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국내 지사들과 연락해 해외에서 밀입국한 후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돕기도 했다. 1924년 정의부가 결성됐을 무렵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정의부 요원이 국내로 파견되었을 때 보천교 북(北)방주 한규숙을 중개해줬다. 1926년 12월에는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을 안내하는 등 독립지사들의 연락과 편의를 제공했다. 나석주는 서울 지리에 어두워 박자혜의 안내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이듬해 신채호와 베이징에서 재회해 셋째 아들을 임신ㆍ출산했다. 1928년 신채호가 일경에게 체포되니 책과 옷 등을 구입해 보내주며 옥바라지를 했다. 때로는 뤼순 감옥에 있는 단재에게 하소연 섞인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정 할 수 없으면 고아원에 아이들을 보내라는 답장만 있었을 뿐이다.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에도 절망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러다가 단재는 국조보감과 서양역사책을 사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책값이 50원에 달하는 거금으로 여사는 안재홍에게 부탁했으나 사서 보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편지는 거의 오지 않았다. 1934년 신가정 기자는 부군은 옥중에, 신산(辛酸)한 새해맞이, 신채호 부인 박자혜 여사 방문기에서 당시 곤궁한 상황을 담담하게 밝혔다. 1936년 신채호가 옥사하고 나서 첫째 아들 신수범은 경성실업학교를 중퇴하고 해외로 떠났다. 둘째 아들 신두범은 1942년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박자혜 역시 유일한 희망인 조국의 독립도 보지 못한 채 평생의 회한을 뒤로하고 1943년 10월16일에 병고로 홀로 셋방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 조산부가 된 박자혜는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살림살이와 자녀 양육 외에 독립운동의 후방 지원, 일경의 끊임없는 감시와 폭력을 겪어야 했다. 정부는 박자혜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못다 이룬 꿈이 저승에서나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당신이 남겨놓고 가신 비참한 잔뼈 몇 개를 집어넣은 궤짝을 부둥켜안고 마음 둘 곳 없어 하나이다. 작은 궤짝은 무서움도 괴로움도 모르고 싸늘한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뜻을 못 이루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왜 이렇게 못난 주제로 내게 오셨습니까. 분하고 원통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 가신 임 단재의 영전에 중.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뒤 화장된 단재 유골은 부인과 장남 등에 의해 열차로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역에서 잠시 지인과 만난 뒤 곧바로 운구돼 고향인 귀래리에 암장됐다. 1941년에야 한용운과 오세창 등이 묘표비를 세웠고, 2008년 5월에 영당 뒤 현재의 위치에 묘역이 조성됐다. 지인 홍명희는 단재의 고혼도 외롭게 돌아와 고향에 깃들었지만 부인 박자혜의 삶과 죽음 역시 그러했다. 단재 묘소에는 부인의 위패만 묻혀 있을 뿐이다. 서울에서 쓸쓸히 병사한 뒤 화장돼 한강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한편 과묵하고 대쪽 같은 단재도 박자혜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이른바 부부 십계명은 이러한 사실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제1계 : 남편 되는 이, 밖에서 불편했던 얼굴로 집안 식구를 대하지 마시오. 제2계 : 남편 되는 이, 무단으로 나가 자거나 밤늦게 돌아오지 마시오. 제3계 : 남편 되는 이, 자녀가 있는 곳에서 아내의 허물을 책하지 마시오. 제4계 : 남편 되는 이, 의복에 대해서 잔소리를 하지 마오. 제5계 : 남편 되는 이, 친구의 접대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마오. 제6계 : 아내 되는 이, 남편의 부족한 일이 있으면 조용히 권고하고 결코 군소리 하지 마시오. 제7계 : 아내 되는 이, 물건이 핍박해도 소리 내기를 절도 있게 하시오. 제8계 : 아내 되는 이, 남편이 친구하고 이야기할 때 뒤에서 엿보지 마시오. 제9계 : 아내 되는 이, 함부로 남편에게 의복 구하기를 일삼지 마시오. 제10계 : 아내 되는 이, 항상 목소리를 크게 해 역하게 하지 마시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7. 주체적 민족정신 강조 신채호·반려자 박자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민족주의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의 남긴 명언이다. 단재는 언론인, 역사학자, 계몽활동가,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등 민족해방운동 선구자로서 일관된 인생 항로를 걸었다. 실증에 바탕을 둔 과학적 역사학을 주창하며 우리 근대역사학을 정립한 역사가로서 자리매김했다. 그가 열정을 불태운 역사학 연구는 실사구시에 입각한 학문적인 영역을 넘어 한민족의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제시했다. 외세 침략에 맞서 잠재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시대적인 사명감이 목적이었다. 단재는 박은식ㆍ정인보ㆍ문일평 등과 함께 붓으로써 대쪽 같던 민족 절개를 지킨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해박한 지식에 의한 객관적인 고증은 물론 현장 답사에서도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독자적인 민족사관 정립은 주체적인 한국사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 결정적 첫걸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국주의 침략이 강화하는 상황은 현실 인식을 심화시키는 요인이었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선언은 이를 방증한다. 우리 역사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냉철한 역사인식은 여기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단재는 우리와 함께 호흡한다. ■ 항일언론 이끌며 민중계몽 가열 단재는 1880년 12월8일(음력 11월7일)에 충남 대덕군 산내면(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고령, 필명 금협산인ㆍ무애생, 호는 단재ㆍ일편단생ㆍ단생 등 다양하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본향인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했다. 집안은 전통적인 학문과 아울러 신교육을 수용하는 등 상당히 개방적인 분위기였다. 어릴 때부터 학문적인 재능이 출중해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과 찬사를 받았다. 16세에 풍양 조씨와 결혼해 아들을 두었으나 조씨는 곧 요절하고 말았다. 아들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던 단재는 일시적으로 인생 비애를 느끼기도 했다. 그는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고자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겼다. 신기선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성균관 박사로서 뛰어난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등 약관에 자자한 명성을 얻었다. 학문에 정진하는 가운데 날벼락 같은 을사늑약에 크게 분노해 관직을 그만뒀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경험했다는 전언이다. 이후 무언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순간을 맞았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위원과 주필을 맡아 항일언론인 표상이 됐다. 일제 침략에 대한 날카로운 논조는 식민당국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국난 극복에 앞장선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통한 민족의식 앙양은 자신의 책무로 인식했다. 통감부는 단재의 언론활동을 억압하는 등 감시와 회유를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지향한 바를 실천으로 옮겼을 뿐이다. 또 단재는 대한제국기 최대 비밀결사체인 신민회에서 활동하는 등 국권회복에도 앞장섰다. 나랏빚 청산을 위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함으로 근대적인 시민운동에도 관심을 보였다. 1908년 한글로 된 가정잡지 발행에 동참하는 등 여권 신장에도 관심을 보였다. 또한 대한협회회보와 기호흥학회월보 등에 논설을 발표하는 한편 일진회 성토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활동은 역사 속에서 한민족의 저력을 재발견하는 중요한 토대였다. ■ 해외로 망명, 독립운동 선봉장으로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대한제국은 식물 정부와 같은 존재였다. 일제는 합법적인 계몽운동조차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관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단재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중국 칭다오로 망명해 그곳에서 안창호ㆍ이갑 등과 향후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했다. 이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신문에 우리 역사 관련 글을 통해 한인사회에 민족정체성을 일깨웠다.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중국 동북지역(만주)와 백두산 등 한민족의 고대 활동 무대를 답사했다. 사적지를 돌아보던 단재는 고구려에 대한 역사를 기록해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 역사서도 발간했다. 웅장한 서사시를 통해 한민족 자존심을 고취하려는 의도였다. 답사 중 안타깝게도 돈이 없어 일본인이 파는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가격만 물어보고 사지 못했다고 한다. 단재의 역사에 대한 열정은 여기에서 그대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상하이로 활동 근거지를 옮겨 신한청년회에 참가하면서 박달학원의 설립ㆍ운영에도 힘썼다. 장차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려는 목적이었다. 3ㆍ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의정원 의원과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한성임정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 등 내분으로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을 창간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과 맞서기도 했다. ■ 독립운동자금 조달 중 체포 독립은 쟁취하는 것 단재의 애국에 대한 일념은 이승만을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으로 인식한 대목이다. 이완용 등 이른바 을사오적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우리나라를 찾기도 전에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란 말이오라고 외치며 임시정부를 박차고 나와 외로이 독립투쟁에 전념했다. 이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 신대한청년동맹 부단주 등에 피선됐다. 1923년에는 민중의 직접 폭력혁명으로 독립 쟁취가 가능하다는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함으로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임시정부 창조파의 주동적인 역할을 하다가 다시 베이징으로 옮겨 다물단을 지도했다. 와중에도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는 등 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 전범을 보여줬다. 이회영ㆍ류자명 등과 교류하며 무정부주의를 신봉,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에 가입해 1928년 잡지 탈환 발간에 앞장서기도 했다. 국제적인 연대를 통한 민족혁명을 쟁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동지들과 합의를 거쳐 외국환을 입수해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고자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에서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뤼순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2월21일에 갑자기 옥사했다.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돼 고조선과 묘청의 난 등에 새롭게 해석하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단재는 우리 역사에서 주체적이지 못한 역사적인 사실을 비판했다.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된다.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해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6.한국광복군 박영준·신순호 부부

박영준은 1915년 11월1일 중국 용정시에서 독립유공자 박찬익의 4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박찬익은 관립상공학교와 수원농림학교에 재학 중 국권회복을 위한 모의를 여러 차례 하다 퇴학을 당했다. 이후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대종교에 입교해 만주로 망명, 서일 등과 중광단을 조직해 항일무장세력 결성에 힘썼다. 박찬익은 중국과 교섭을 벌여 총 300정과 수류탄 150발 등을 구입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 같은 외교적 성과는 임시정부 외교관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밑거름이 됐다. 박찬익은 독립군 양성의 요람지인 신흥무관학교에서도 중국어와 한국 역사를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열정적이었다. 대한독립의군부 창설과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에도 참가하는 등 만주지역 항일운동을 이끄는 선각자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수립에도 참여했다. 임시정부 후원회 의원과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맡으며 외교창구 역할을 자임했다. 독립운동가들의 석방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 이후 안공근과 엄항섭 등과 외교 교섭을 진두지휘했다. 김구와 장제스 회담을 성사시키는 동시에 한국인들의 중국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는 단초도 마련한 주인공이 바로 박찬익이다. ■아버지 따라 항일 연극ㆍ강연 진행광복활동 전개하다 결혼까지 박찬익이 바쁘게 독립운동을 펼치다 보니 박영준은 어린 시절 부친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다 15살인 1930년 상하이에서 아버지와 다시 만났다.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하면서 항일 연극과 강연, 합창, 전단을 배포하는 등 반전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또 초모공작 활동에도 앞장섰다. 임시정부의 인재양성 계획에 따라 중국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도 입교해 1941년 12월에 졸업했다. 중앙군관학교에 재학 중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그는 광복군 제3지대에 배속돼 지대장인 김학규의 부관이 됐다. 이들은 일본군에 강제로 징집됐던 한국사병들을 초모하기에 진력, 다수의 학병ㆍ지원병과 징집병을 포섭하고 이들을 충칭 총사령부로 보내 한국광복군에 배치시켰다. 1942년 4월부터는 상위(上尉)를 맡아 충칭에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에 배속돼 근무했다. 이후 임시정부 한인청년회 문화부장과 총사령부 서무과장 등을 맡았다. 이때 신건식의 딸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순호와 만나 열애 끝에 결혼했다. 1944년 6월에는 이시영 재무장으로부터 위임장을 받고 임정 재무부 이재과장(理財科長)으로 근무했다. ■주화대표단 일원, 동포 귀국에도 앞장 그 후 박영준은 만주로 가서 대한민국 주화대표단 동북 총판사처 외무주임으로 근무하며 자위대를 조직했다. 광복 후에도 한국인을 보호하면서 이들이 조국으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주선한 다음 1948년에야 귀국했다. 국군 소령으로 임관돼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장교로서 참전한 그는 초대 정훈감을 지냈다. 한국전력사장에 임명된 후 군직을 퇴직해 광복군 동지회장, 서울증권사장, 백범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다가 2000년 3월27일 경기도 성남시에서 사망했다. ■산동 신씨의 외동딸로 독립운동 전선 뛰어들다 신순호는 1922년 1월22일 충청북도 청주군 가덕면(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독립유공자 아버지 신건식과 어머니 오건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상하이 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한 예관 신규식의 조카로 본관은 고령이다. 부친 신건식은 독립운동가 신규식의 동생으로, 독립운동 당시에는 신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른바 산동 신씨는 문중 개화의 길을 걸으며 많은 인재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산동삼재(山東三才)로 일컬어진 신규식ㆍ신채호ㆍ신백우 등은 대표적 인물이다. 신건식은 형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해 항저우 의약전문학교에 입학, 의학을 공부했다. 이는 후일 그가 중국군 의무 장교로 활동하는 기반이 됐다. 신순호는 4살의 나이로 어머니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해 아버지와 처음 만났다. 근대교육을 수학하던 중 집안 분위기에 따라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한중 연대에 의한 항일운동에 나섰다. 한국광복군이 창립됐을 땐 오광심ㆍ김정숙ㆍ조순옥과 함께 여군으로 참가했다. 이는 여성에 대한 인식 변화와 더불어 여권 신장을 일구는 든든한 밑거름이나 마찬가지였다. 신순호는 1942년 9월 임시정부 생계위원회 회계부에 파견돼 근무했으며, 1943년께 독립운동가 박찬익의 아들이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장이던 박영준과 결혼했다.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에 파견돼 근무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나라 잃은 설움 잊고, 모든 사람이 기쁨으로 하나된 결혼식 이들 부부의 인연은 시작부터 특별했다. 박영준이 17세에 상하이로 건너갔을 당시 기거하던 곳이 신순호의 아버지 신건식 집이었다. 처음 만난 후엔 한국광복진선에서 같이 활동했다. 만리장정을 헤쳐온 임시정부 가족들은 충칭 토교에서 한층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1943년 12월12일 충칭 오사야항 임시정부 강당에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많은 한인 동포들이 모였다. 외무부장인 조소앙의 사회로 결혼식은 시작됐다. 주례를 맡은 백범 김구와 민필호ㆍ조완구ㆍ김원봉ㆍ김성숙 등 각 당 대표들의 축사가 있었다. 단상에 오른 박찬익은 떨리는 음성으로 가정을 가져서 다섯이나 되는 자식을 두었지만 자식 놈의 결혼식에 참석해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고 또 마지막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신랑 박영준은 이 말을 들으며 만주에 두고 온 어머니와 형제를 떠올라 눈물을 흘린 것으로 전해진다. 박영준은 훗날 자서전에서 자신의 결혼식을 나라 잃은 설움도 잠시 잊고 모든 사람이 하나가 돼 기뻐하던 순간이라고 회고했다. ■해방 이후에도 한인 동포 귀국에 온힘 박영준ㆍ신순호 부부는 동지로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이들은 신건식, 박찬익과 한인 동포의 귀국 문제를 처리하는 주화대표단 임무를 맡고 있어서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1948년 4월에야 국내에 들어왔다. 정부는 1977년 박영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2000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신순호는 귀국 이후 남편을 따라 생활하다 성남시에서 조용히 지내며 2009년 7월30일 사망했다. 정부는 1977년 건국포장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2009년 그녀의 유해는 남편 박영준과 함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국가보훈처 등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5. 머나먼 이국땅에서도 꽃피운 민족독립의 魂

■ 근대교육 수혜로 현실을 직시하다 1895년 4월26일 경기도 수원군 북부면 북수동(현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에서 차인재는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인으로 독실한 신앙인이 됐다. 대한제국기를 대표하는 여성교육기관인 삼일여학교에 입학해 1910년 3월 제1회로 졸업했다. 최초 여류화가 나혜석과 동생 나지석, 박충애와 홍보배 등은 동기동창생이다. 이 학교는 북감리교 여선교회 스크랜튼(M.F Scranton) 선교사에 의해 설립됐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 설립자였다. 오직 전도사업과 여성 계몽에 혼신을 다하는 여성교육의 선각자요 대모와 같은 존재였다. 교장으로 새로 부임한 밀러는 스크랜튼 대부인의 적극적인 후원과 미국 여선교부의 재정적 지원으로 교육시설을 크게 확충했다. 여교사 김몌례(金袂禮)와 이사라(李士羅)는 학생들 의식을 일깨우는 스승이자 여성 선구자였다. 종교계 학교를 통해 성장한 차인재는 자율성을 견지하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었다. ■ 교사에서 구국민단 교제부장으로 거듭 차은재는 졸업한 뒤 모교 교사로서 여학생들에게 자신감과 자긍심 고취에 열성적이었다. 재직 중에는 김향화 주도에 의한 기생단 독립운동을 목격했다. 이는 스스로 사회적인 역할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는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였다. 이후 수원지역 민족운동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됐다. 기차로 서울을 통학하는 학생들은 이미 수원학생친목회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었다. 1920년 6월에는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선태와 경성기독교청년학관 이종상(일명 이득수) 등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체인 구국민단이 조직됐다. 목적은 크게 2가지로 독립국가 건설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후원이었다. 여러 차례 회합으로 소수에 의한 임원진을 구성했다. 단장은 박선태, 부단장은 이종상, 구제부장은 이선경(경기고녀), 서무부장은 임효정(일명 임순남, 이화여고보), 재무부장은 최문순(이화여교보), 교제부장은 차인재 등이었다. 이들은 3월 말경 상하이 임시정부의 동정과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 등을 수집ㆍ분석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독립신문, 대한민보, 창가집, 경고문 등을 배포하면서 동지 규합에 나섰다. ■ 미국 정착, 민족의식 일깨워 구국민단에서 활동하던 차인재는 1920년 7월 말경 갑자기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 결혼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8월에는 화성 영흥도 출신인 임치호와 결혼하면서 남편 성을 따라 임인재로 성을 바꾸었다. 일찍이 개신교 신자는 남편 성을 따르는 문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미국사회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캘리포니아 맥스웰에 살았던 차인재는 교포자녀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자 국어학교 교실을 운영했다. 삼일여학교 교사로서 소중한 경험은 한글 교육에 매진할 수 있는 중요한 에너지원이었다. 이는 교포사회에 널리 확산돼 민족정체성을 강조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1924년 대한인국민회 맥스웰지방회 학무위원으로 선정된 후엔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이 단체는 1908년 장인환ㆍ전명운에 의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 저격의거를 계기로 재미 한인단체 통합운동 결과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를 통합해 1909년 2월 국민회를 조직했다. 이듬해 2월 대동보국회가 국민회에 흡수됨으로써 대한인국민회가 출범했다. 북미ㆍ하와이ㆍ시베리아ㆍ만주 등 각 지방총회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중앙총회를 정비하고 임원을 선임했다. 기관지로 신한민보를 발간해 국내외에 배포함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광복 때까지 해외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중심적인 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지칠 줄 모르는 조국을 향한 애국심은 한인사회 여성들에게 꺼질 줄 모르는 희망봉이 됐다. 은퇴한 뒤 말년을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내다가 1971년 4월7일에 사망했다.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자수성가한 임치호, 독립운동자금 마련 1880년 남양군 대부면 영흥도(현 화성시 영흥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 20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 1906년 12월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1907년 12월경 솔트레이크시티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일찍이 항일단체에서 활동과 의연금 모금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이듬해 3월 공립협회 기관지인 공립신보를 1인당 10부씩 국내에 발송하자는 제의에 동참하는 한편, 식자기계 구입을 위해 금화 75원을 쾌척했다. 같은 해 7월 핸포드지방회를 설립했고 10월에는 아세아실업주식회사 발기인이 됐다. 1920년 7월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한인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고 양성소 간사로 활동했다. 레드우드비행학교에 오림하ㆍ이용선ㆍ이초ㆍ한장호ㆍ이용근ㆍ장병훈 등 6명의 단우가 입교했다. 5만 달러를 후원한 김종림(총재), 신광희(재무), 강영문(서기), 곽림대(감독) 등이 주축이 돼 윌로우스 한인비행가양성소를 창립했다. 이 비행학교는 1921년 4월에 문을 닫았으나 30여 명의 조종사를 배출해 상해임시정부는 이용근을 한국독립군 육군 비행병 참의(소위)로 임관했다. 1920년 8월에는 차인재와 결혼한 후 이듬해 맥스웰지방회, 1923년에는 동 지방회 법무, 다음해 재무로 활동했다. 1935년과 1936년 2년 연속 로스앤젤레스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자, 3ㆍ1절 기념식을 주관했다. 대한인국민회 총회 간부로도 일했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머나먼 이국에서 부부의 사랑에 가득 찬 가정생활은 한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자신이었다. 참된 이들의 인생역정은 하루빨리 역사무대에 조명되기를 기대한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4. 제암리학살사건에서 희생된 홍원식ㆍ부인 김씨

올해 4월15일은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난 지 102년째 되는 날이었다. 3ㆍ1운동 당시 일본 군인과 경찰은 평화적인 만세 시위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일대에서 벌어진 집단 학살은 상상조차 어려운 참혹한 현장이었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각종 충격적인 사건들은 양심적인 세계인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일본이다. 이는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며, 우리는 용서와 화해는 하되 역사적 사실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 ■충청남도와 경기도 서해안 일대에서 의병장이 되다 홍원식(洪元植)은 1877년 10월13일 경기도 남양군 공향면 제암동 넘말(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아버지 홍순화(洪淳華),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한 후 대한제국 시위대 군인이 돼 서소문 병영에서 근무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구실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보류인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해산군인들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목숨을 건 서울시가전을 전개했다. 수세에 몰린 홍원식은 해산군인을 이끌고 근거지를 옮겼다. 그가 지휘하는 소난지도 의병진은 면천성을 공격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난지도를 중심으로 활빈당의 일종인 수적(水賊)의 근거지는 바로 이곳이었다. 이들은 배를 이용해 충청남도와 경기도 서해안 일대를 오가며 맹렬하게 싸웠다. 피해 소식에 수원지역 의병진은 10여 척 배를 나누어 타고 들어와 밀고자를 색출하는 연합작전을 일궈냈다. 수적의 의병진 영입은 전투력 향상과 더불어 신분적인 갈등을 극복할 수 있었다. 반면 일제 토벌대의 보복은 참혹했다. 선원이나 부상당한 의병까지 살육하는 학살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일제의 화력 집중으로 의병항쟁은 불리한 상황에 직면했다. 의병진을 해산한 후 1914년 3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홍원식은 기독교 권사가 돼 학교를 세우는 등 항일의식을 일깨웠다. 제암리 교회의 안종후와 천도교인 김성렬 등과 함께 구국동지회도 조직하는 등 지도자로서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화성에 폭발하듯 울려퍼진 만세운동 수원 읍내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3월 중순 화성지역으로 파급됐다. 평화적인 만세운동이 지역사회에 확산하면서 점차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환되는 분위기였다. 3월28일 송산면 만세시위에 해산을 종용하던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는 총을 발포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시위군중은 일본순사를 죽이라고 외쳤다. 기세에 억압당한 노구치는 도망치다가 돌과 곤봉 세례를 받고 즉사했다. 3월31일 정오경에 발안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는 투석전으로 이어졌다. 일본군 수비대는 칼을 무자비하게 휘둘러 이정근은 현장에서 사망하는 등 부상자가 속출했다. 흥분한 시위군중은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ㆍ파괴했다. 다음날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산 위에서 봉화를 올렸다. 수촌리 이장 백낙렬, 수촌 제암리 교회 김교철 전도사, 석포리 이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은 4월3일 만세운동을 추동했다.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 2천여 명은 각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경찰관주재소를 불태웠다. 이를 저지하는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를 처단하는 등 극도로 긴장됐다. ■비참한 희생양이 된 부인 김씨 일본는 4월2일에 가장 격렬한 시위가 일어난 수원과 안성 지역에 대해 제1회 검거반을 구성했다. 4월5일에 편성된 검거반은 같은 달 14일까지 25개 마을에서 204명 검거와 290여 가옥을 방화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 사상자도 발생했다. 발안 장터와 고주리 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은 집단학살로 이어졌다. 4월13일 육군 보병 제20사단 79연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지휘하는 11명이 발안에 도착했다. 4월15일 오후 2시경에 아리타는 부하를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한국인 순사보와 정미소 주인 사사카(佐佐坂)의 안내로 제암리를 향해 떠났다. 아리타는 주민 중 15세 이상 남자들은 제암리 교회 안에 모이게 했다. 주민들이 모여들자 수비대는 교회 출입구와 창문을 봉쇄하는 일제히 사격한 후 후 불을 질렀다.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온 강태성의 아내 김씨(당시 19세)는 군인에게 살해당했다. 홍원식 부인 김씨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저들은 인근 고주리로 가서 시위의 주모자인 천도교 김흥렬 일가 6명을 학살했다. 학살 증거를 없애려고 현장을 불태우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스코필드(한국이름 석호필) 의료선교사는 소아마비로 팔과 다리가 성치 않았으나 자전거를 이끌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처참한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다. 제암리의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 보고서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상해 가제트(The Shanghai Gazette)의 1919년 5월27일자에 게재됐다. 그는 시신을 수습해 공동묘지 입구에 안장함으로 주민들에게 커다란 위안을 안겨줬다. ■애틋한 인생역정이 복원되기를 바라며 정부는 1968년 홍원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 부인 김씨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당시 학살된 부인들은 흔한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이들에 대한 실체를 하루빨리 밝혀야 하는 과제는 우리에게 남긴 몫이다. 1971년 제암리 학살사건을 다룬 영화 두렁바위가 촬영됐다. 1982년 9월에 유해 발굴 사업을 진행한 뒤 이듬해 7월에는 제암리 3ㆍ1운동 순국기념관과 기념탑이 건립됐다. 순국한 분들과 함께 애틋한 부부의 인생항로가 복원되기를 기대한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화성시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3-2. 만삭의 몸으로...만세운동 이끈...‘파주의 유관순’

파주의 유관순 임명애는 임신한 상태로 만세시위를 하다 체포됐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환경에서 감방 안 육아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화 항거에도 임명애를 모티브화한 인물이 등장한다. 결국 아이를 잃게 된 임명애는 출소 이후 어떤 삶았을지 모른다. 남편 염규호와 함께 그들의 행적이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다. 단순히 종교인이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넘어 독립운동가로서의 재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 보안법출판법 위반, 징역형 주민들 우르르 반발 시위를 주도한 임영애 부부를 비롯한 김수덕ㆍ김창실 등은 검거됐다.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임영애는 징역 1년 6개월, 나머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수감돼 옥고를 치렀다. 남편도 수감됨으로 부부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이를 계기로 청석면 주민 수백 명이 심학산에 모여 면사무소를 향해 나아갔다. 보통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손에 쥐고 선두에 나섰다. 이들은 면사무소 앞뜰에서 면장은 나와 만세를 부르라고 외쳤다. 면장은 처음에 해산을 종용하다가 결국 시위행렬에 가담하기도 했다. 1919년 3월28일 봉일천 장날(공릉장)에는 장꾼과 광탄면 주민 등이 합세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여기에는 고양군 주민 등도 참여했다.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연합시위가 이뤄진 셈이다.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발포를 시작했다. 현장에서 6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대규모 만세시위가 피로 얼룩진 역사현장으로 기억되는 순간이었다. ■ 옥중투쟁으로 존재감을 알리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임명애는 8호 감방에 배정됐다. 여자감옥인 8호방은 개성지역 3ㆍ1운동 주역인 어윤희ㆍ권애라ㆍ심명철과 3ㆍ1운동 아이콘인 유관순 열사, 수원지역 기생으로 이름을 떨친 김향화 등이 함께 수형생활을 했던 곳이다. 임명애는 당시 만삭의 몸이었다. 출산을 위해 임시 출소했다가 아이를 낳고 12월에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채 다시 수감됐다. 이때 남편 염규호도 1년형으로 복역 중으로 온 가족이 모두 수형생활을 하는 고난의 시절을 보냈다.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며 차디찬 감방에서 산후조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맡언니격인 어윤희는 어려운 여건에도 편의를 제공하는 데 헌신을 다했다. 아이의 기지개는 물론 산모 건강을 위해 조언과 세심한 보살핌을 잊지 않았다는 전언이다. 1920년 9월께 만기 출소한 임명애는 먼저 출소한 남편 염규호가 있는 파주 교하리 고향에 돌아왔다. 이들 부부는 수감 중에도 희망의 끈을 일순간마저 버리지 않았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전통적인 창가를 가사한 노래를 불렀다. 현재 남아 있는 창가는 모두 두 곡으로, 심명철이 생전에 아들 문수일에게 구술했다. 두 노래는 선죽교 피다리(1991, 장수복 저)라는 소책자에 실린 바 있다.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노래는 선죽교 피다리와 대한이 살았다다. ■ 힘든 생활 노래 가사로 전달 파주 항일운동가 더 발굴돼야 진중이 일곱이 진흙색 일복 입고 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할 때 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열고 던져줄 때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선죽교 피다리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대한이 살았다 당시 이들 부부가 불렀던 노래 가사에서 피눈물로 기도했네라는 부분은 참기 힘든 옥중생활을 사실적으로 알려준다. 두 번째 가사는 전국에 확산된 3ㆍ1운동의 기운을 대한이 살았다라는 노랫말로 독립을 바라는 의지와 염원을 보여준다. 3ㆍ1운동 한돌을 맞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전개된 옥중투쟁은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가사는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권애라가 아닐까 추정한다. 그녀는 음악적인 재능이 아주 뛰어난 신여성이었다. 김향화는 수원을 대표하는 명창으로 창가를 듣고 권애라가 이를 시대 상황에 맞게 정리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짐작되는 상황이다. 임명애ㆍ염규호 부부에 대한 독립운동가로서의 인생항로는 현재까지 여기까지만 피상적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등 각종 단체들은 이 부부의 복역 이후 사망할 때까지의 힘든 생활이 새롭게 발굴되기를 바란다. 신앙인으로서의 삶과 아울러 이들 후손에 대한 삶도 미답지나 마찬가지다. 더불어 이들에 대한 관심을 시작으로 장차 파주지역의 여타 항일운동가와 그들에 대한 새로운 모습, 또 역사적 자료 등이 추가로 복원되기를 기대한다.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사진=구세군역사자료관서대문형무소역사자료관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3-1. 유관순과 서대문감옥 여성들

3ㆍ1운동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바로 아이콘 유관순이다. 사회적인 민주화 진전과 더불어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발굴이 본격화하면서 기존 독립운동가를 바라보는 인식은 유관순 외에도 점차 폭넓게 변화하고 있다.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고 우리의 기억에서 오랫동안 잊혀진 여성들에 대한 올바른 자리 매김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암울한 현실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의연한 활약상은 신선한 자극제로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과거 서울 평양 정주 원산 등지에서 울려진 3ㆍ1만세운동 소식은 철도 연선을 따라 전국 각지로 삽시간에 파급됐다. 만세 현장에 참여한 학생들이나 고종 인산일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인사들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만세운동을 지역사회에 알려는 전령사였다. 파주는 서울과 개성의 중간에 위치해 이러한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파주 출신 구세군 신자 임명애는 지역 내 만세운동을 주도하면서 파주 유관순으로 일컬어졌다. 서대문감옥 8호 감방에서 어윤희 권애라 유관순 등 8인과 더불어 옥중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 구세군 바탕으로 열정적 활동 지역사회 신망 두터워 파주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임명애ㆍ염규호 부부에 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해 인생 역정을 밝히는데 한계를 지닌다. 지금까지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은 아래와 같다. 먼저 임명애 부교는 1886년 3월25일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 578번지에서 출생했다. 남편 염규호는 1880년 3월23일 같은 주소로 기록돼 있다. 이는 판결문에 근거한 것으로 만세운동 당시 상황을 반영한 주소로 판단된다. 손자 증언에 의하면 염규호 정교는 숯 공장을 운영한 사업가였다고 한다. 이들이 언제 결혼을 했고 구세군에 입교했는지 등은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이들은 구세군 파주영문 신도로 생각된다. 한 자료에 의하면 문산포역에서 한 정거장을 지나 금촌이라 하는 정거장으로부터 7리 정도 떨어진 곳에 교하리라는 구읍이 있다. 해처에 거성하는 염규호와 해씨의 부인은 구세군을 심히 사랑해 구세군영을 설립하기를 심히 원하는지라 등 문구가 쓰여 있다. 열성적인 활동과 깊은 신앙심 등이 지역사회에서 상당한 신망을 받았던 인물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은 종교 활동을 통해 주민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줌으로써 3ㆍ1운동 주역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다. ■ 파주, 독립만세 소리로 요동치다 러일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하려던 일본은 경의선 부설에 박차를 가했다. 철도 부설권을 장악한 일본은 파주군ㆍ교하군ㆍ고양군 등지에 강제로 역부를 징발했다. 주민들은 이에 반발해 저항하는 등 일제 침략에 정면으로 맞섰다. 일제 헌병과 경찰은 마을을 다니며 강제적인 징발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임진강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의병전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강제병합 이후에는 토지조사사업과 더불어 특산물인 농산물 중 콩을 수탈하는 데 혈안이었다. 그만큼 항일의식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19년 3월10일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100여명의 학생들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인근에 사는 가정부 임명애(林明愛)다. 그녀가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학생들은 일제히 호응함으로써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시위행렬은 운동장을 돌면서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를 주민들에게 알렸다. 임명애의 주도로 만세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구세군에서 운영한 주일학교와 관련성을 추정할 수 있다. 평화적인 시위는 바야흐로 파주지역 독립만세 운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소식은 관내로 파급되는 가운데 주민들 사이에도 조국독립을 위한 항일의식이 점차 확산을 거듭했다. 평화적인 시위가 있은 후 파주지역은 보름 동안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로 소강상태였다. 각지에서 전개된 소식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이곳에 전해지고 있었다. 주민들을 동원한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위한 준비단계였다. 판결문에 따르면, 3월25일경(실제는 이보다 이른 시기)에 학생 김수덕(당시 16세)과 농민 김선명(24세) 등은 그녀 집을 찾아와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의논을 하고자 하니 방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남편 염규호와 함께 이들과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격문 인쇄ㆍ배포가 필수적이라고 의견을 교환하는 동시에 결정했다. ■ 태극기 손에 쥐고 들끓는 시위행렬 곧바로 염규호는 격문의 원고를 작성했다. 오는 28일 마을주민 일동은 모두 윤환산으로 집합하라. 만약에 불응하면 방화한다는 내용이었다. 만세시위에 주민들을 참여시키는 강력한 행동방침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수덕은 등사판을 빌려와 60여매를 등사했고, 김창실은 와석면 구당리ㆍ당하리 등지에 배부했다. 그런데 일제 경찰과 헌병의 감시는 점점 삼엄하게 다가왔다. 만세시위는 격문에 있는 바와 달리 이틀 앞당겨 26일에 전개했다. 이들 부부를 비롯한 주동자는 700여명의 주민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녀는 선두에 서서 이들을 지휘하며 교하면 사무소로 향했다. 면사무소를 도착한 시위대는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고 면서기 2명에게 업무 중단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를 목격한 주민들이 시위행렬에 가담해 1천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를 이끌고 헌병주재소로 향해 나아가자 기세에 눌린 헌병들은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한 채 파주헌병 분소에 병력을 요청했다. 지원병력에 용기를 얻은 이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했고 당하리 최홍주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시위군중은 일단 해산했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사진=구세군역사자료관ㆍ서대문형무소역사자료관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2-2. ‘제시의 일기’에서 독립의 염원 담은 최선화·양우조

최선화(이명 최소정)의 남편인 독립운동가 양우조는 1897년 3월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명진 호는 소벽인데 중국에서 활동할 때는 양소벽양묵이춘삼데이비드 영(David J. Young)이라는 이름을 썼다. 상하이를 거쳐 미국 유학을 떠난 양우조는 방학 동안 탄광과 사탕수수 농장 등지에서 학비를 벌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열정적인 학구열로 MIT 공대와 폴리버 공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우리나라에 방직회사를 세우겠다며 이 분야를 전공했다. 바쁜 학창 시절에도 대한인국민회흥사단재미유학생학우회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민족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한국광복군 결성 당시에는 총사령부 참사 겸 정훈처장으로 광복군 발전에 이바지했다. 국제사회에 임시정부 존재를 알리는 일에도 열성적이었다. 충칭 한국인기독교청년회이사 겸 덕육지육부장으로 활약하다가 1946년 5월에 귀국했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된 이듬해 사망했다. ■ 제시의 일기에 부모로서 인정을 나타내다 이 책은 임시정부 가족들의 일상사와 독립에 대한 염원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물이다. 육아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은 인간미 넘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일전쟁 시기에 일본의 공습을 피해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하는 긴박함과 위험을 생생하게 시기별로 정확히 기록했다. 암울한 질곡 속에서도 독립을 염원하는 희망의 불씨는 여기에서 활활 타올랐다. 1938년 7월4일 아침 10시 정각, 최선화ㆍ양우조 부부의 딸이 태어났다. 제시가 처음으로 최선화를 엄마라고 불렀을 때 감회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이가 내게 엄마라고 불렀을 때, 나는 나눔과 희생, 사랑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꼈다. 엄마의 역할이 어렵고 힘들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또 8월30일에는 오늘 비로소 얼굴을 마주하고 정면으로 제시를 안아줬다. 언제부터인지 제시는 스스로 머리와 목을 바로 세우고 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아기의 모습이 대견스럽다. 불안한 피난 생활에도 때때로 망중한을 즐겼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독립전쟁으로부터 긴장감을 해소하려는 일환이었다. 우리 식구 3명은 저녁에 공원으로 산보를 가려고 나오다가 용성중학교 여학생 주최로 구망극사에서 연극을 한다는 광고를 봤다. 흥미 있는 일이었다.박수 소리를 들은 제시는 기분이 좋아 쉬지 않고 박수를 치며 재롱을 부려 옆에 앉은 손님들에게서 칭찬을 많이 들었다. 최선화양우조 일가(1941년 충칭) ■ 일본군 야만성 폭로임시정부 요인들 일상사 기록 최선화ㆍ양우조 부부는 12월15일 류저우에서 일본군 공습을 피해 천연동굴로 황급히 뛰어들었다. 곧이어 대대적인 공습이 있었다. 굴 밖으로 나왔더니 처참한 광경이었다. 집 앞뒤ㆍ오른쪽ㆍ왼쪽이 불바다를 이루고, 참혹하게 된 시신도 많이 눈에 띄었다. 시시각각으로 자행된 공습으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1940년 3월14일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인 이동녕(李東寧)이 하루 전 작고했다. 교민들 충격은 너무나 컸으며 최선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9월13일에는 치장에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 준비를 위해 충칭으로 떠났다. 공습경보로 제시를 안고 들에 나가 2시간 괴로운 잠을 청하곤 했다. 이국땅에서 피난 생활은 여린 마음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염원은 2년 후에 이뤄졌다. 절박하고 간절한 소망인 조국 해방이 이뤄졌다. 1945년 8월10일에는 상오 10시(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일본이 무조건으로 동맹국에 투항했다는 소식이 충칭에 도착한 것은 오늘, 10일 저녁 8시쯤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웬일인가 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일본이 망했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 오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가슴이 뛰고 너무 어지러워 자리에 가서 누워야 할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패망을 만나게 될 줄은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이어진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8월13일 순간적인 기쁨은 커다란 실망감으로 되돌아왔다. 신탁통치에 대한 소식은 임시정부 가족들을 긴장시켰다. 바람과 달리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다. 더욱이 급변하는 시국으로 제시를 학교에 입학시키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교민들을 모아 귀국시키는 중요한 과업은 이들 부부의 몫이었다. ■ 귀국길도 어려운 여정의 연속 귀국길도 쉽지 않았다. 충칭에서 상하이로 이동해 1946년 4월26일에야 귀국선에 올라 제주도를 거쳐 29일 부산 앞바다에 무사히 도착했다. 기나긴 피난 생활은 끝나 고국산천을 바라보며 감격스러운 순간을 맞았다. 약 10년간 독립운동가 아내로서 생활을 청산하고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했으나 전염병 창궐로 배 안에서 대기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최선화는 헌신적인 아내이자 다정다감한 어머니였다. 역사 무대에서 크게 빛을 발하지 못했으나 결코 과소평가할 문제는 더욱 아니다. 두 딸의 재롱에 미소 짓고 조그만 생채기에도 마음을 졸이던 평범한 가족. 나라를 빼앗긴 민족으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했다. 중일전쟁 이후 삶과 죽음의 공존을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은 애잔하게 다가온다. 반면 제시와 제니 자매를 바라보는 부모로서 애틋한 사랑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독립운동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의연함, 한국 동포들 사이의 따뜻한 정뿐만 아니라 한중 선각자들의 우정과 중국인들 도움 등도 담담하게 담았다. 임시정부 이동 상황과 요인들 생활상,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과 염원이 그대로 느껴진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2-1. ‘제시의 일기’에서 독립의 염원 담은 최선화·양우조

여성운동가들은 아내며느리어머니동지로서 오늘날 워킹맘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슈퍼우먼과 같은 존재였다. 헌신적인 희생정신은 남편과 동지들이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견인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였다. 동지로서 부부 인연은 아름다운 들꽃으로 탄생하는 벅찬 순간을 맞았다. 그럼에도 현재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극소수 여성운동가만 언급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21세기에 부응한 역사교육을 위한 대안은 언제 사회적인 공감대와 함께 교육현장에서 이뤄질 수 있을까. ■ 최선화, 양우조와 만나다 최선화(이명 최소정)는 1911년 6월20일 인천부 구읍면 학익동(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황익동)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평양으로 이사해 그곳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최선화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해 꿈 많은 재학시절을 보냈다. 재학 중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은 전문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 많은 충격과 아울러 커다란 자극을 줬다. 1931년 졸업한 후 모교에 재직하면서 여성 권익 옹호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가사과 김합라 교수의 소개로 양우조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당시 양우조는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울에 잠시 들렀다. 이러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이후 편지를 교환하며 교제를 지속했다. 그녀는 당초 미국으로 유학가려고 했으나 서로에 대한 신뢰감을 확인하고 결혼을 결심했다. 집안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으나 결국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상하이 간호전문학교 유학을 구실로 통행증을 비교적 쉽게 발급받아 유학길에 올랐다. ■ 딸 이름 영어식 세계 속 한국인 활약 기대 상하이에서 간호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한 최선화는 1937년 늦은 나이인 27세에 41세의 양우조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준비와 예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차원에서 진행됐다. 결혼 준비는 임시정부 파수꾼 엄항섭과 안살림꾼 연미당 부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결혼식은 진장 임시정부청사에서 김구의 주례로 임시정부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거행됐다. 최선화와 양우조는 결혼식을 끝내고 자신들의 결혼을 알리는 청첩장을 친지들에게 돌렸다. 신혼생활은 낯선 광저우에서 시작됐다. 중일전쟁 발발로 부부는 광저우를 떠나 류저우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최선화는 임시정부 가족의 일원이 됐다. 1938년 7월4일에 창사시 북문 밖에 있던 이태리 천주교당 의원에서 첫 딸 제시(濟始)를 얻었다. 1941년에 둘째 딸 제니도 낳았다. 딸 이름을 영어식으로 지은 이유는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활약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 여권 신장과 민족정체성을 일깨우다 류저우에서 5개월 동안 피난 생활을 하다가 임시정부 가족들과 함께 보금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한국독립당이 창립되자 이에 가입해 임시정부를 적극 뒷바라지했다. 치장으로 이전한 뒤에는 교포 부인들을 단합시켜 한국혁명여성동맹을 결성하는 주비위원으로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31운동 직후에 조직됐던 애국부인회 재건운동에도 착수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향하는 한국애국부인회의 재건선언문을 발표했다. 최선화는 서무부장에 선출됐으며, 회장에는 김순애가 추대됐다. 애국부인회는 방송을 통해 국내외 여성들에게 각성과 분발을 촉구했다. 위문품을 거둬 항일전선에서 활동하는 광복군을 위문하는 한편 여성과 청소년들의 계몽과 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최선화는 총무(서무부 주임)로서 회의에 관한 일을 주로 맡았다. 1943년에는 미국 교포사회에 편지를 보내 한국애국부인회의 재건을 알리고, 해외동포의 성원과 단결을 촉구했다. 최선화는 이를 묵묵히 지원하는 동지로서 알뜰한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남편의 항일운동 후원, 자녀 양육, 임시정부 지원을 하는 와중에도 여성들 존재감을 알리는 데 매진했다. 미주지역과 정보 교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 충칭 시내, 남안, 토교 세 곳에서 아동한글강습반을 운영했다. 임시정부는 매월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활동을 장려했다. 부인들은 가정과 교포학교에서 한글, 국사, 동요 등을 가르치며 자녀들에게 민족의식 배양에 노력했다. 매년 설날에는 교포들이 모여 많이 먹고 유쾌하게 놀고 재미있게 지낼 수 있도록 다과회 등도 개최했다. 최선화는 이런 모임들이 망명생활에 큰 활력소가 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1945년 봄에는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 있던 동포 위안부 10여명을 인계받았다. 한국애국부인회는 이들에게 임시정부 활동을 설명하고 민족혼을 불어넣는 정신교육에 치중했다. 광복 이후 귀국한 최선화는 1999년 국가보훈처에 자신이 소장해온 『독립신문』과 양우조의 저작물 등 42건을 수록한 독립운동사료집을 기증했다. 이와 별도로 남편과 자신이 집필한 『제시의 일기』를 외손녀 도움을 받아 출판했다. 1991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1-2. 대한민국 임시정부 살림꾼 연미당·파수꾼 엄항섭

엄항섭이 1922년 졸업과 동시에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에 임시정부는 내분으로 지리멸렬하는 분위기였다. 수립 초기에는 지사들이 몰려들어 북적됐으나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으로 돌아가 독단적인 행보를 걷었다. ■ 임시정부 파수꾼임을 자임하다 그런 이승만에 불만을 품은 국무총리 이동휘마저도 임시정부를 떠났다. 더욱이 항일투쟁 방법론을 둘러싸고 극심한 반목과 갈등은 수습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그야말로 임시정부는 유지하기 어려운 형국으로 내몰렸다. 특히 경제적인 곤궁으로 청사 집세는 물론 임시정부 요인들은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는 극한 상황이었다. 반드시 임시정부를 유지해야 한다고 굳게 결심한 그는 프랑스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해 요인들 끼니 해결에 앞장섰다. 나아가 일본영사관으로부터 임시정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이는 단순한 생계 해결에만 그치지 않고 일본영사관 정보를 수집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백범일기에선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엄항섭군은 뜻있는 청년으로 지강대학을 졸업 후 자기 집 생활은 돌보지 않고, 석오 이동녕 선생이나 나처럼 먹고 자는 것이 어려운 운동가를 구제하기 위해 프랑스 공무국에 취직했다. 그가 프랑스 공무국에 취직한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월급을 받아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倭)영사관에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사건을 탐지해 피하게 하고, 우리 동포 중 범죄자가 있을 때 편리를 도모해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엄항섭은 임시정부가 1920년대 중반에 당면한 극심한 고난을 극복하는 윤활유와 같은 청년이었다. 백범은 엄항섭에게 아버지와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한 백범은 임시정부를 활성화 방안으로 헌법 개정에 착수했다. 헌법개정기초위원으로 참여해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 채택은 파격적인 행보였다. 연미당 엄항섭 큰 아들 엄기동 큰 딸 엄기선 모습. ■ 엄항섭 헌신적인 활동, 임시정부 존립 밑거름 많은 파란을 겪으면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에야 충칭에 안착했다. 우선적인 과업은 임시정부 군대인 한국광복군 창설이었다. 가릉빈관에서 성대한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이 9월17일에 거행됐다. 중국국민당을 비롯해 외국사절 등 200여명이나 참석하는 등 항일투쟁 의지는 엄청나게 고조됐다. 행사를 주관한 주인공은 바로 엄항섭이었다. 그는 창설된 광복군의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미주 교포들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할 때도 앞장섰다. 미국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는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군사적인 활동상을 교민사회에 자세하게 보도했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 선전부장을 맡아 이념을 초월해 항일무장 대오를 견결하게 만들었다. 임시정부가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존립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엄항섭의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다. 열정적인 활동은 임시정부를 유지ㆍ존립시키는 원천이었다. 그의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으나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에 최선을 다했다. 정파나 이념을 초월한 진지한 태도는 대동단결을 도모하는 밑거름이었다. 그에 대한 임시정부의 파수꾼이나 젊은 일꾼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된 미사여구가 아니다. 해방 후 엄항섭은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환국했다. 국내에서도 이전처럼 임시정부와 함께 활동하며 백범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정하에서 임시정부 이름으로 활동할 공간은 너무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자 이를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동참했다. 남북에 이념과 체제가 다른 정부가 수립됨으로 결국 한민족은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하고 말았다. 더욱이 스승처럼 모시던 백범이 흉탄에 서거하면서 통일에 대한 희망도 사라졌다. 김구는 흉탄에 의해 서거했고, 김구의 평생 동반자였던 엄항섭은 장례식 때 추모사를 읽고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가슴 깊숙이 용솟음치는 슬픔을 느낀 사람은 바로 엄항섭이었다. ■ 부부 얼룩진 삶에서 남북분단을 실감한다 임정 요인 환국한 엄항섭은 조완구와 함께 김구의 측근으로 보좌했다. 문장에 뛰어나서 김구 명의로 발표하는 성명서나 국민에게 발표하는 호소문을 대부분 기초했다. 엄항섭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는 북측의 모시기 공작 대상으로 납북됐다. 이후 엄항섭 등 재북 인사들은 1954년 제네바 회담을 계기로 자신들의 통일 방안을 설명하기 위해 북측 대표 외에 자신들의 대표단 파견을 북측 당국에 요구했다. 그 결과 엄항섭과 권태양이 대표로 선발돼 모스크바로 파견됐으나 스위스 당국의 비자 발급 거부로 평양으로 되돌아왔다. 1956년 7월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해 상무위원 11인과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됐다. 이후 반당반혁명 행위 혐의로 체포돼 1962년 7월30일 숨을 거둬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묻혔다. 연미당 가족은 월북가족으로 오해받으며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연미당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자녀를 훌륭하게 성장시켰다. 경제적 어려움과 과로로 갑자기 찾아온 중풍으로 오랜 세월을 병마와 싸우다가 사망했다. 이들 가족의 삶은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과 괴로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들 부부와 같이 통일된 조국 땅에 유해를 모시는 일이야말로 남겨진 또 다른 숙제임이 분명하다. 부부 만남을 바라는 이유는 평화적인 남북통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애국지사연병환연병호선생선양사업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1-1. 대한민국 임시정부 살림꾼 연미당·파수꾼 엄항섭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3ㆍ1운동 직후 민주 공화제를 내세웠다. 신민이 아니라 국민이 주권임을 표방하는 대사건이었다. 임시정부는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임시정부 숨은 일꾼으로 활동한 연미당(본명은 연충효ㆍ延忠孝)과 남편 엄항섭도 주역이었다. ■ 핏줄로 이어받은 독립운동 의식 연미당은 연병환(어릴 때는 병우)과 김정숙 딸로 1908년 7월 중국 동북지역 륭징(龍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관립외국어학교를 다니는 등 문명사회 건설을 주창한 인물이었다. 졸업한 후 진남포ㆍ인천 해관 등지에서 근무하다가 일제 침략에 분개하여 중국 동북지역으로 망명했다. 아버지는 오직 조국 독립이 최고의 가치관으로 인식하고 실천하였다. 중국에서 무장투쟁을 지원하다가 구속되는 등 독립운동과 여정을 함께 했다. 삼촌 연병호는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에 온몸을 던졌다. 3ㆍ1운동 1주년을 맞아 독립신문 1920년 3월1일자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동포여! 우리는 참담한 멸망을 면하여 자생을 도모하려 하니 전쟁을 하면 살아나고 전쟁을 하지 않으면 죽을지라며 독립전쟁론을 주장하였다. 집안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왕래하였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은 항상 외롭고 외톨이와 같은 존재였다. 다만 독립군의 중국 동북지역에서 무장투쟁 소식은 신선한 충격이자 청량제로 다가왔다. 무엇이 조국이고 왜 부모님이 이국땅 중국에서 고민하는지를 미약하나마 느낄 수 있었다. 부모님은 일제의 탄압으로 생활 근거지를 중국 관내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동생 연병호 등을 상하이로 불러 독립운동에 매진하도록 부탁했다. 아버지 연병환에게 자주적인 독립국가 건설은 염원이자 최고 희망봉이었다. 이에 부합하여 삼촌 등은 자신들 안일보다 민족적인 과제 해결에 나섰다. ■ 엄항섭과 인연으로 독립운동에 나서다 이러한 분위기는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이 의미를 새롭게 인식했다. 아버지와 삼촌 연병호 등을 찾아오는 인물들도 보통으로 보이지 않았다. 난징 부근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독립운동가들과 빈번하게 접촉하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벌픽 작가 등의 활동 속에서 민족을 다시 보는 현장이었다. 부모님은 발랄한 딸에 대한 애정을 무한하게 보냈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숙환으로 1926년에 사망했다. 방황하던 시간도 잠시였다. 비록 연령은 많지만, 묵묵히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엄항섭의 인간적인 모습에 매료되었다. 눈치를 채고 이에 나선 사람이 있었다. 부부 인연을 맺은 준 사람은 임시정부 어른인 석오 이동녕이었다. 이때 연미당 나이는 19세였다. 물론 당시로선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앳된 신부로 연미당을 바라본다. 꿈에도 그리된 신혼 단꿈은 역시 한 폭에 꿈이었다. 임시정부 안사람의 역할은 다양하고 막중하였다. 남편 내조는 물론 가족들에 대한 생계 책임과 자녀 교육문제도 고스란히 그녀 몫이었다. ■ 독립군 사기진작, 임시정부 지원 등에 전력 임시정부가 조직한 특무조직인 한인애국단에도 남편과 함께 참여하여 단장 김구를 지원에 앞장섰다.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하자 중국군 19로군 부상병사에게 위문품을 보내는 위문활동에 나섰다. 매년 8월29일 국치기념일에 국치기념 전단을 만들어 각 방면으로 배포하며 항일민족의식 앙양에 노력하였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물 위에 뜬 정부였다. 남편은 중국정부와 연락 임무를 맡아 가정을 돌볼 틈이 없을 만큼 분주했다. 연미당은 임시정부 가족을 돌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폐결핵에 걸려 각혈하는 이동녕을 극진히 간호하였다. 힘든 상황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억척스러운 부인 모습은 남편에게 커다란 용기를 불어넣는 에너지원이었다. 독립운동 중에도 옷 세탁과 삯바느질로 돈을 벌어 능력이 닿는 대로 임시정부 지원에 앞장섰다. 필요한 자금을 염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할 때 광복군 모집에 열성을 다했다. 환국을 준비하면서 한국은 반드시 독립국이 되어야 한다는 자유한국인대회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남편이 먼저 귀국하여 이별을 맞는 순간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귀국을 준비하는 동포들의 안전에 많이 노력하였다. 딸 엄기선도 독립투사로서 키웠다. 중국방송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상과 일본군의 만행을 동맹국과 국내외 동포들에게 알리는데 매진했다. 또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병들을 위문하여 광복군으로 합류를 권유하였다.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선전공작에 진력하는 등 독립군의 사기 진작에도 열성적이었다. ■ 엄항섭이 역사무대에 등장하다 엄항섭은 1898년 9월1일 여주군 금사면(현 산북면) 주록리 90번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엄세영으로 농상공부아문 대신 판중추부사,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아버지는 승지 엄주완이다. 어머니 김씨는 김규식의 1남 3녀 중 둘째 딸로 외할아버지는 규장각 제학과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역사적인 현장을 목격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굳게 다짐한 후 곧바로 상하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곳에는 이미 민주 공화제를 천명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1919년 9월 법무부 참사에 임명되면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였다. 연해주ㆍ상하이ㆍ서울 등지에 각각 수립된 임시정부는 통합되어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를 중심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그는 항저우에 있는 지장(芝江)대학에 입학하여 중국어ㆍ영어ㆍ불어 등 어학 공부에 열정적이었다. 이는 훗날 다양한 외교활동을 펼치는 든든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애국지사 염병환ㆍ염병호 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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