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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상, Today] 당신의 마음을 노린다, 로맨스 스캠

로맨스 스캠, 법으로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범죄가 등장했다. 사기 범죄는 보이스피싱을 거쳐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다변되고 있다. 비대면 시대가 도래하자 SNS를 비롯한 가상공간에서 사람의 마음을 꾀어내는 것이다. 자발적인 동참을 이끌어 내는 탓에 구제가 어렵다는 게 가장 치명적인 문제다. 경기일보는 피해 당사자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범행 수법을 조명하고 대책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로맨스 스캠이란? 사랑을 뜻하는 로맨스(romance)와 신용사기를 의미하는 스캠(scam)의 합성어로, SNS나 메신저 등에서 신분을 사칭하면서 불특정 이성에게 호감을 산 뒤 금전을 요구하는 신종 사기 수법이다. 주로 해외에 본거지나 서버를 두고 있어 계좌 추적이 어렵고, 검거한다 해도 사기죄로 입건되는 탓에 전자금융거래법을 적용받는 보이스피싱에 비해 양형 기준이 낮다. #1. "사랑해" 한 마디, 얼굴도 못 본 그에게 마음을 뺏겼다 우리, 친구할까요? 지난해 11월 소개팅 어플을 둘러보던 정민희씨(35가명)에게 낯선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프로필 사진 속 깔끔한 수트 차림으로 눈웃음을 짓고 있는 남자는 누가 봐도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정씨가 대화에 응하자 그는 자신을 미국에서 일하는 부동산 투자자라고 소개했다. 이 남자, 직업까지 매력적이다. 꽤나 완벽한 조건에 정씨도 의심을 품었지만, 남자는 여권사진과 집 주소까지 내밀며 자신의 존재를 인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씨도 마음의 빗장을 풀었고 어느새 사랑해라는 달콤한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그 남자에 대한 애정이 커지는 사이 정씨에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설레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밤을 새운 지 일주일, 남자는 대뜸 채팅 사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3천200만원에 달하는 큰 포인트가 적립돼 있는데 여자 회원만 현금 환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남자친구의 고민을 모른 척할 수 없었던 정씨는 문제의 사이트에 접속했고, 상담원과 대화를 시작했다. 상담원은 정씨가 신규회원이라 곧바로 환전이 어렵다며 등업비용을 요구했다. 그렇게 정씨는 485만원을 송금했지만, 상담원은 오류가 발생했다며 재차 송금을 요구했다. 다시 수백만원을 보내도 같은 문제가 반복되자 정씨는 의심을 품었다. 그러자 다정했던 그 남자는 차갑게 돌변하며 이별을 고했다. 정씨만 겪은 일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 주혜영씨(32가명)도 가짜에게 호감을 가졌다. 채팅 어플에서 자신을 홍콩 사업가라고 소개한 남성은 짙은 눈썹과 깊은 쌍꺼풀, 깔끔한 차림새로 주씨의 마음에 둥지를 틀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주씨는 대화를 이어갈수록 이 남자와 찰떡궁합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주씨가 만남을 요청하자 그는 국내로 들어온 뒤 자가격리 중이라는 디테일한 속임수를 펼쳤다. 차일피일 만남을 미루던 이상형은 주씨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역시나 여자만 환전이 가능하다는 특정 사이트에서 4천200만원을 꺼내달라는 것. 자가격리가 끝난 뒤 만나자는 말에 주씨는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등업비용에 퀵 환전비용까지 더해 80만원 상당의 문화상품권을 구매했고, 핀 번호를 모조리 채팅 사이트 상담원에게 넘겼다. 상담원은 계좌번호가 잘못됐다며 재차 같은 금액의 송금을 요구했다. 입금한 금액을 만나는 날 모두 돌려주겠단 남자의 말에 계속해서 돈을 보냈지만, 그는 주씨의 대화창에서 사라졌다. 두 여성이 비슷한 수법으로 당한 로맨스 스캠 사건은 각각 부천오정경찰서와 양주경찰서에서 수사 중이다. 다만 협박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돈을 보낸 것이기에 피해를 회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주씨는 수법이 널리 알려져서 더는 피해자가 나오지 않길 바란다며 경찰도 로맨스 스캠에 대응할 수 있는 수사 체계를 갖추길 바란다고 털어놨다. #2. 피해액만 수십억대, 코로나19 이후 사이버 범죄 '기승' 한때 김미영 팀장 또는 서울중앙지검 검사를 사칭하며 돈을 가로채는 보이스피싱이 활개를 치던 데 이어 최근에는 다양한 신종 사이버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 시대가 도래하자 SNS, 채팅 어플 등을 통해 접근하는 사례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로맨스 스캠이다. ■코로나19 틈타 사이버사기 기승 사이버사기는 스미싱, 몸캠피싱, 로맨스 스캠 등으로 다변화되고 있다. 피해는 계속되고 있지만, 수사 당국에선 아직 신종 범죄로 보고 있어 별도 통계를 분류하는 기준을 따로 마련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 같은 범죄들이 포함되는 사이버사기 항목을 통해 범죄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사이버사기는 지난 2018년 11만2천건, 2019년 13만6천74건, 2020년 17만4천328건으로 해마다 늘고 있다. 특히 그 증가폭은 국내 코로나19 유입의 기점이 된 2020년 들어 두드러진다. 지난 2020년 경기지역에선 3만9천254건(22.5%)의 사이버사기가 발생했다. ■공포 대신 호감 노리는 로맨스 스캠 앞선 정씨와 주씨의 피해 사례를 참고할 때 보이스피싱과 구분되는 로맨스 스캠의 가장 큰 특징은 피해자의 호감을 사면서 접근한다는 점이다. 주로 채팅 어플이나 SNS를 비롯한 온라인 가상공간을 통해 범행이 이뤄지며 결혼을 약속하거나 연인 행세를 한 뒤 돈을 뜯어낸다. 또 범죄에 연루됐다거나 협박을 통해 피해자를 압박하는 보이스피싱과 달리 피해자 스스로 범행에 빠져들게 한다는 면에서 더욱 치명적이다. 범죄 지시로 진화한 사례도 있다. 지난해 4월 수원서부경찰서는 로맨스 스캠을 당해 피싱 수거책으로 가담한 20대 여성을 검거하기도 했다. ■억대 피해 부지기수정체는 외국인? 로맨스 스캠의 발생 빈도가 늘어나면서 피해 규모도 불어나고 있다. 일례로 경기남부경찰청은 지난해 4월 사기 혐의로 나이지리아 국적 남성 2명을 구속했다. 미군 군의관 또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 직원을 사칭한 이들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이성으로 접근해 억대 금액을갈취했다. 비슷한 시기 경기북부경찰청도 로맨스 스캠 일당을 구속했다. 나이지리아 국적 등 외국인 4명은 지난 2020년 8월부터 2021년 4월까지 미군이나 금융거래소 직원, 의사 등을 사칭하며 피해자에게 이성으로 접근했다. 결혼 등을 약속하며 26명에게 뜯어낸 피해액만 16억5천만원에 달했다. ■국정원도 주목, 활개치는 사랑 범죄 로맨스 스캠이 국적성별을 가리지 않고 활개를 치면서 국가정보원도 이런 신종범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정원은 최근 지난 2018년 1월부터 2021년 11월까지 발생한 피해 사례 174건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피해 규모는 연도별 9억원대에서 20억원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국정원이 분석한 주요 수법은 크게 3가지다. 해외 재력가로 치장한 뒤 암호화폐 등에 투자를 유도하는 허위 가상자산 투자형, 친분을 형성한 뒤 대리 송금을 요청하는 가짜 인터넷뱅킹 송금형, 채팅사이트 포인트가 곧 소멸된다며 대리환전을 요청하는 사이버머니 대리환전형 등이다. ■가장 주효한 예방법은 합리적인 의심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로맨스 스캠은 사생활의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범죄인 탓에 피해를 당한 뒤 경찰 수사도 쉽지 않다며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피해자라는 점을 인식하고 상대방이 상식에서 벗어나는 요구를 하면 걸러낼 수 있는 이성적 판단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국정원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추세에 편승한 신종 범죄라는 점에서 주목하고 있는데, 대부분 해외에 거점을 마련해 조직적 범행이 이뤄지고 있다며 해외 정보 및 수사기관과 협력에 나서 국내 수사기관의 범인 색출을 돕는 한편 동향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겠다고 말했다. #3. 당신과 나, 사랑과 범죄 사이법으로 막을 수 있을까 로맨스 스캠으로 인한 피해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이를 방지할 구제 체계는 마련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회에서 관련 법안 제개정안이 우후죽순 발의되고 있긴 하나, 이 역시 실효성에 대한 의문 부호가 달린다. 8일 경기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현행 통신사기피해환급법상 보이스피싱 피해자는 별도의 소송절차 없이 신속하게 피해액을 회복할 수 있다. 피해자가 자금을 이체한 계좌에 입출금이체 금지를 금융기관에 요청하면, 즉각 지급정지가 실시되기 때문이다. 이후 금융감독원을 거쳐 환급된다. 반면 로맨스 스캠에 대한 제도적 안전망은 전무하다. 신종금융사기는 계좌 지급정지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탓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정치권에선 다양한 법안을 발의했다. 대표적으로 지난 2020년 12월 국민의힘 정희용 의원은 통신사기피해환급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주된 내용은 재화나 용역 공급을 가장한 행위를 전기통신금융사기에 포함시켜 계좌 지급정지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앞서 지난 2020년 8월에는 더불어민주당 박재호 의원이 다중사기범죄방지법 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금융업 영위로 불특정 다수에게 이득을 편취하는 행위를 다중사기범죄로 통합 정의, 현행법상 범죄를 유형별로 규제하면서 발생했던 사각지대를 줄이겠다는 게 법안의 주된 목적이다. 특히 이 법안에는 보이스피싱 구제 절차를 다중사기범죄 피해자에게까지 확대 적용하고, 피해자에 대한 손해액 3배 이내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까지 도입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또 상습법에 대해서는 신상을 공개하는 방안까지 포함돼 있어 가장 강경한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실장은 신종금융사기는 수법도 점차 다양해지고 수많은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어 다중사기범죄방지법 제정을 통한 통합 규제가 시급하다며 특히 새로운 법안에 포함된 신상공개와 계좌 지급정지 항목은 피해 예방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일각에선 실효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법안 제개정에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피해를 인지하고 신고했을 땐 이미 돈이 해외로 빠져나간 뒤일 확률이 높은데, 과연 지급정지가 주효할지 의문이라며 우선 수사기관이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피해 구제를 할 수 있도록 해외 수사기관과 국제적 공조 체계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장희준김정규기자

[이야기 세상, Today] 감염병의 그늘, 요양병원에서 벌어진 참극

코로나19 사태로 요양병원에 대한 면회가 통제되고 있다. 그렇게 닫힌 문 너머에선 환자의 안위를 위협하는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보호자는 알 길이 없다. 환자 역시 피해를 당해도 외부로 알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정부는 단절된 시설 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점검조차 하지 않고 있다. 끝 모를 감염병이 시설의 ‘폐쇄성’에 방아쇠를 당긴 지금, 경기일보는 요양병원의 환자 관리 실태를 낱낱이 조명한다. 편집자주 #1. 요양병원에서 6개월 만에 아버지 모셔온 그날, 딸은 가슴을 쳤다 얼마 전 상(喪)을 치른 송지연씨(46·가명)는 참아왔던 울음이 터져나올까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떨리는 손으로 처참했던 아버지의 생전 사진들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요양병원에 모신 뒤 6개월 만에 만난 부친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온몸의 각질이 허물처럼 벗겨졌고 살갗은 갈라지다 못해 피딱지가 맺혔다. 그렇게 ‘아빠’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큰딸의 가슴에 사무쳤다. 일흔에 다다른 송씨의 아버지는 폐암을 앓던 중 골반을 다쳤다.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병세가 악화되자 가족들은 지난해 4월19일 부친을 수원시 팔달구에 위치한 A 요양병원에 모셨다. 100개 이상의 병상을 운용하는 노인전문 요양병원이었다. 무엇보다 송씨는 ‘최상의 의료시스템과 최선의 간호·간병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병원의 말을 굳게 믿었다.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건 지난해 6월29일, 당시 코로나19 확산세가 거세지자 정부는 면회를 통제하고 나섰다. 이때부터 가족들은 병원에서 걸려오는 전화로만 아버지의 상태를 짐작했다. 그러던 중 케모포트(항암치료제를 중심 정맥에 투여하는 데 사용되는 관의 일종) 부근의 염증으로 치료가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고, 지난해 12월10일 퇴원 수속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 엉망이 된 아버지를 마주한 가족들은 곧장 병원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의료 과실은 아니라는 답만 돌아왔다. 항의가 계속되자 그제서야 ‘간병비는 환불해줄 수 있다’고 했다. 정작 간병인은 ‘할 만큼 했다’며 역정을 냈다.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 가족들이 가장 분노한 대목이다. 이 병원은 특정 간병협회와 협약을 맺고 간병인을 공급하는 중이었다. 간병인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다. 송씨의 아버지는 지난해 12월31일 새벽 끝내 숨을 거뒀다. A 요양병원에서 퇴원한 지 꼭 3주째 되던 날이었다. 송씨는 “간호일지에는 매일 피부 청결을 유지하고 보습제를 도포했다고 기록됐지만, 간병인은 제대로 씻기지 않았다고 실토했다”며 “피부가 이렇게 될 때까지 병원은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어 “말도 못하고 아파했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원망과 죄책감이 몰려온다”며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라 환자가 겪은 고통에 대한 책임을 느끼길 바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팔달구보건소 관계자는 “지난해 12월21일 A 요양병원에 대한 민원을 접수한 뒤 곧장 현장을 점검하고 행정지도 처분했다”며 “의료법에 저촉되는 사안이 아니라서 법적으로 처벌을 내리긴 어렵지만, 주기적으로 확인할 필요성이 있어 향후 지속적인 점검에 나설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A 요양병원 관계자는 “의료적인 과실은 아니지만 환자 관리에 일부 소홀한 점이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며 “보호자에게 환자의 피부 문제가 고지되지 않은 건 치료까지 필요하다고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계속 사과드리고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며 “다만 병원은 간병인을 직접 교육할 권한이 없어 난처한 점이 많다”고 부연했다. #2. 환자 방치한 뒤 간병비 환불해준다는 병원, ‘정부 인증기관’이다 환자의 피부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보호자에게 고지하지 않아 물의를 일으킨 요양병원은 ‘정부 인증기관’으로 확인됐다. 의료적 배경지식이나 병원에 대한 정보를 얻기 어려운 이용자 입장에선 국가의 보장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 인증의 신뢰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17일 경기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A 요양병원은 지난 2018년 12월 이틀에 걸쳐 보건복지부 산하 의료기관평가인증원의 조사를 받고, 이듬해 2월 ‘평가 인증’을 획득했다. 요양병원은 의료법에 따라 의무적으로 인증을 신청해야 하며, 인증의 유효기간은 4년이다. A 요양병원은 오는 2023년 2월까지 ‘인증의료기관’으로서의 자격을 행사할 수 있다. 병원 입장에서 정부의 인증은 환자와 보호자에게 신뢰를 담보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실제로 수원시 팔달구에 위치한 A 요양병원은 병원명보다 인증평가기관이라는 걸 알리는 간판을 훨씬 크게 내걸고 있다. 인증을 홍보하는 방식으로 신뢰성 확보를 노린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셈이다. 보호자는 이런 인증을 믿고 환자를 맡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정작 A 요양병원은 갈라지다 못해 피딱지까지 생긴 환자의 피부 상태에 보호자가 문제를 제기하자 ‘간병인의 잘못이니 간병비를 환불해주겠다’는 취지로 답했다. 의료기관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다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보호자 측이 가장 문제 삼는 것은 병원에서 환자의 피부가 악화되는 것에 대해 단 한 차례도 알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간호일지에도 의문 부호가 달린다. 취재진이 지난해 9월부터 12월10일 환자의 퇴원 시점까지 간호일지를 전수 확인한 결과, 시간대별 간호내용이 이른바 ‘복사+붙여넣기’처럼 대부분 동일했다. 피부를 항상 청결하게 유지하고 보습제를 도포했다는 내용도 매일 기록됐다. 어느 병원이든 특이사항 외 나머지 내용은 늘상 동일하게 기록한다는 게 병원 측의 설명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가 내준 인증의 신뢰성에 의구심이 든다. 경기일보 취재 결과, A 요양병원은 최초 인증 당시 <취약환자 권리보호> 항목에서 모두 상(上) 평가를 받았다. 조사항목은 ‘취약환자 권리 보호를 위한 규정이 있다’, ‘학대 피해자 발생 시 절차를 준수한다’, ‘직원은 의사소통이 어려운 환자에 대한 지원체계를 알고 있다’ 등이었다. 인증 이후 인증원은 4년의 유효기간 중 1회 실시하도록 돼 있는 ‘중간현장조사’를 지난해 11월30일 실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송지연씨(46·가명)가 부친의 상태를 확인하기 열흘 전이었다. 이때도 A 요양병원은 74개 세부 조사항목 중 70개 항목에서 상 또는 유(有) 평가를 받아 자격이 유지됐다.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는 동안 국가기관에서 조사를 벌인 결과다. 무엇보다 정부의 인증 및 조사 과정에서 환자의 상태나 치료계획에 대한 보호자 고지 여부를 점검하는 항목은 전무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건복지부 산하 의료기관평가인증원 관계자는 “인증의료기관에서 사회적 논란 등 특정 요건이 발생하면 수시조사에 착수한다”며 “문제가 된 요양병원에 대해서도 조사가 필요한지 검토해보겠다”고 해명했다. 이어 “보호자에게 진료과정에서 발생한 내용, 치료계획 등을 제공하는지 여부를 시범 관리하고 있지만, 아직 정식 조사항목은 아닌 상황”이라고 부연했다. #3. 감염병이 만든 사회적 단절, 요양시설 ‘폐쇄성’에 방아쇠 당겼나 코로나19 사태 이후 외부와 단절된 요양병원 및 시설에서 노인학대가 잇따르고 있다. 감염병이 ‘폐쇄성’에 방아쇠를 당겼다는 분석이다. 17일 경기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앞선 송지연씨(46·가명)의 피해 사례 외에도 최근 노인 생활시설이나 요양병원에서의 학대 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6월 고양시의 한 요양원에선 치매를 앓던 80대 노인이 요양보호사에게 상습적인 폭행을 당해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또 대구 수성구의 어느 요양병원에선 허리를 다쳐 입원한 80대 할머니를 오랜 시간 방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노인은 피부 괴사로 뼈가 드러날 정도의 욕창이 생겼지만, 병원 측은 끝까지 과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에 따르면 노인학대 신고 건수는 지난 2018년 1만5천482건, 2019년 1만6천71건, 2020년 1만6천973건으로 매년 증가세다. 해당 기간 학대사례 판정 건수도 5천188건, 5천243건, 6천259건으로 늘어났다. 특히 그 증가폭은 2018~2019년엔 1.1%에 불과했지만, 코로나19 유입을 기점으로 하는 2019~2020년엔 19.4%로 폭증했다. 노인이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생활시설 및 병원에서 발생하는 학대도 2019년 531건에서 2020년 558건으로 증가했다.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9%로 다소 적지만, 주목할 점은 비중의 차이다. 2017~2019년 당시 비중은 7.7%, 8.6%, 10.2%로 해마다 늘었는데, 본격적으로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진 2020년 들어 8.9%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해당 시설들의 폐쇄적인 특성상 실제적인 노인학대 건수가 코로나19 이후 외부로 노출되지 않고 있다는 게 전문가의 중론이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결국 요양병원의 폐쇄적인 문화가 문제인 건데, 애초부터 외부와 소통하고 투명하게 요양서비스를 제공했다면 감염병 상황에서도 학대 문제가 불거지진 않았을 것”이라며 “통계상 드러난 수치보다 은폐된 경우가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코로나19 사태는 요양병원들이 학대를 가리기에 딱 좋은 알리바이일 뿐”이라고 질타했다. 허준수 숭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병원이나 시설에서 발생하는 학대가 증가하는 추세인데, 은폐된 학대들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요양보호사나 간병인이 서비스를 원만하게 제공하는지 꾸준히 점검해야 하며, 특히 요양병원에서 노인학대가 적발된 경우 강력한 행정 절차를 통해 한 번의 실수인지 지속적인 학대인지 가려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방역 당국은 지난해 11월17일을 기점으로 요양병원에서 ‘비접촉 면회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를 어겨도 마땅한 제재 방법은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오는 24일부터 설 연휴 특별방역대책이 시행되며 그나마 시행하던 요양병원 및 요양시설에 대한 비접촉 면회마저 다시 통제된다. 임종처럼 긴박한 경우에만 기관 운영자 판단 하에 면회가 허용된다. 보건복지부 의료기관정책과 관계자는 “병원에서 코로나19 감염 우려를 이유로 ‘비접촉 면회를 해야 한다’는 규정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민원이 다수 접수되고 있으며, 현장의 문제에 대해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며 “현재로선 규정을 어긴 경우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지 않아 제재가 어려운 상황이며 개선방안을 검토해보겠다”고 설명했다. 장희준·김정규기자

[이야기 세상, Today] 기록되지 않은, 그럼에도 ‘있어야 할 아이들’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존재를 부정당한 아이들이 있다.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아이들을 우리는 미등록 이주아동이라 부른다. 한반도에서 태어나 한국의 문화를 배우고 한글로 자신을 표현하며 살아가지만, 정부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파서 병원에 가는 것처럼 당연한 일상이 이들에겐 누릴 수 없는 사치다. 부모가 한국에 불법체류 중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다. 경기일보는 미등록 이주아동이 한국에서 겪는 처참한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 다를 바 없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보장하기 위한 대책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1.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생일을 인정받지 못한 아이들 응애 엄마의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온 아기가 내는 첫소리, 넘치는 축복과 사랑을 받아야 할 순간을 알린다. 그러나 같은 순간, 누군가는 생존을 고민해야 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의 체류자격에 의해 운명을 결정당한 탓이다. 부모가 불법체류 상태라면 아이는 출생신고조차 할 수 없고 체류자격을 얻을 수도 없다. 세상을 위로하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꿈을 가진 미등록 이주아동 메이(21ㆍ가명)는 지난 2001년 한국에서 태어났다. 미얀마 국적을 가진 그의 부모는 지난 2000년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고국을 떠나 이곳으로 망명했다. 어렵사리 초ㆍ중ㆍ고 교육 과정을 이수한 메이는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야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메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체류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휴대전화도 자신의 명의로 만들지 못했다. 미등록 이주아동을 품어주는 교장을 만나 학교에 진학했지만, 어느 학생이나 들을 수 있는 EBS 강의를 듣는 것도 어려웠다. 이메일로 계정을 만들어야 하나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니 그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계좌를 개설할 수도 없어 학교에 돈을 내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메이 홀로 현금을 들고 갔다. 수학여행을 갈 때나 학교에서 단체행사가 있어 보험을 들 때도 생년월일만 써내면 되지만, 메이에겐 생일이 없어 매번 선생님께 불려가야 했다. 다른 아이들의 미심쩍은 눈초리를 감당해야 하는 건 오로지 소년의 몫이었다. 미소가 해맑은 소녀 지나(9ㆍ가명)의 삶은 더 처참했다. 지난 2008년 우간다를 탈출했던 지나의 부모는 한국에 들어온 지 4년 만에 지나를 낳았다. 지나의 엄마는 삼남매를 모두 자연분만으로 출산했다. 건강해서가 아니라, 보험을 들지 못해 제왕절개나 수혈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목숨을 건 것이다. 여섯 살 되던 해, 지나는 제대부(배꼽) 탈장으로 서둘러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겨울 만큼 고통스러운 지나를 안고 엄마는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원무과에서 아이의 입원 수속을 막아섰다. 신분이 증명되지 않으니 한국인 보증인을 세우거나 선납금을 걸라고 요구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나의 아빠는 난민 신청을 하려다 불법체류 사실이 발각돼 강제출국을 당한 터였다. 결국 지나의 가족은 살기 위해 출국을 결정했다. 떠나는 것도 맘처럼 쉽지 않았다. 정식 여권을 만들지 못해 여행증명서를 받아야 했다. 존재를 부정당한 채 비행기에 올라탄 지나의 가족이 남긴 마지막 말은 이렇다. #2.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결국 도망쳐야 하는 미등록 이주아동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평범한 일상은 허락되지 않는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아파도 병원 대신 약국을 찾아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이들은 존재를 드러내는 것조차 꺼린다. 언제든지 한국에서 쫓겨날 수 있는 처지에 놓인 탓이다. 앞선 메이와 지나의 이야기 역시 은수연 안산시글로벌청소년센터 기획실장의 입을 통해 마주한 현실이다. 은 실장은 다른 아이들은 꿈을 키울 때 미등록 이주아동은 생존을 고민해야 한다며 코로나19 이후 보편화된 QR코드를 찍는 일조차 이들에겐 어려운 과제라고 털어놨다. ■현황 파악조차 어려운 그림자 속 아이들 19일 법무부의 2020 출입국ㆍ외국인정책 통계연보에 따르면 불법체류 외국인은 지난해 기준 39만2천명, 이 가운데 19세 이하 미등록 이주아동은 7천447명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이는 공식적인 입국 기록이 남은 이들 중 체류기간이 만료된 경우만 산출한 것으로, 한국에서 태어난 미등록 이주아동은 모두 배제돼 있다. 관련 단체들은 최소 2만명의 미등록 이주아동이 한국에 살고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난해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 214만6천명 중 경기도에 거주하는 수는 71만5천명, 그 비율은 33.3%를 차지한다. 이 같은 지역별 분포를 미등록 이주아동 추산치에 대입하면, 약 6천600명의 아이들이 경기도에 거주할 것으로 예측된다. ■아파도 병원 갈 수 없는 미등록 이주아동 경기도는 지난 2019년 1~10월 도내 미등록 이주아동 468명을 대상으로 건강권 지원을 위한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도내 24개 시ㆍ군에 살고 있는 29개국 출신이 참여했으며, 미등록 이주아동의 부모 372명도 조사에 함께했다. 조사 결과, 산후조리를 집에서 받거나 전혀 받지 못한 경우가 91.3%에 달했다. 아이들의 건강검진이나 예방접종을 무료로 받지 못한 사례는 57.9%를 차지했으며, 특히 자녀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병원에 데려가지 못한 경우는 52.1%에 달했다. 경기도 외국인정책과 관계자는 도 차원에서는 초등학생 치과 주치의 사업이나 국가 예방접종 사업을 통해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며 지자체 단위에선 제도 개선에 한계가 있는 만큼 통계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정부 차원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설명했다. ■인권위 체류자격 부여 vs. 법무부 조건부 국가인권위원회는 이 같은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지난해 5월 법무부에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제도 개선을 권고했다.세부적으로는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무조건적 강제퇴거를 중단하고, 체류자격을 신청해 심사받을 수 있는 제도를마련하되 그 이전에라도 현행법상 가용 절차를 활용해 체류자격 부여를 심사할 것을 요청했다. 이후 법무부는 지난 4월 국내 출생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을 발표했다. 대상은 올해 2월28일 이전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자로서 ▲국내 출생 ▲15년 이상 국내 체류 ▲신청일 기준 국내 중ㆍ고교 재학 중 또는 고교 졸업자 등으로, 구제 신청기간은 지난 4월19일부터 오는 2025년 2월28일까지로 한정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구제받을 수 있는 국내 미등록 이주아동은 500명에 불과하다. 또 4년간 한시적으로 시행되는 탓에 형제자매 사이에서 체류자격 부여 기회가 다르게 적용되면 말 그대로 생이별하는 사례가 잇따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아동 권리 위한 인도주의적 관점 필요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정부의 융통성이 필요한 분야라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불법체류자 또는 미등록 이주아동 역시 돌아갈 곳이 있고, 돌아갈 기회가 있다면 진작 한국을 떠났을 것이라며 언어도 한국어밖에 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내쫓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어 속인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국적을 내주는 게 맞느냐를 놓고 논란이 불거질 수 있어 법무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며 적어도 아동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의 배려가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다만 법무부는 아직까지 유보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미등록 이주아동이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나, 지난 4월에 발표한 구제대책 이후로는 이렇다 할 변경사항은 없다면서도 다만 내부적으로 어떤 점에서 제도 개선이 필요할지 계속해서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3. 존재 증명해낸 아이들의 이야기, 이젠 사회가 귀 기울이길 [특집 인터뷰] 은유 작가 국가인권위원회는 미등록 이주아동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도서 출판을 기획했다. 국가인권위로부터 제안을 받은 은유 작가는 다섯 명의 아이들을 만나 그 이야기를 하나의 글로 엮어냈고, 지난 6월 있지만 없는 아이들을 펴냈다. 집필 과정에서 마리나와 카림, 페버 등의 처참한 현실을 직시하게 된 은유 작가는 다시 한 번 이주인권활동가, 변호사를 만나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경기일보 취재진은 세상에 기록된 적 없던 아이들의 목소리를 처음 글로 남긴 은유 작가를 만나 그 소회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Q. 책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점이 있다면. A. 나름대로 사회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미등록 이주아동이 처한 현실을 알게 된 뒤로 깊이 반성했다. 존재 자체가 드러나지 않은 아이들은 고통마저 감춘 채로 살아가야 했고, 이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전에도 성폭력 피해여성, 특성화고 학생 등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다뤘는데, 그보다 밑바닥에 이런 아이들이 있다는 게 너무나 충격으로 다가왔다. Q. 미등록 이주아동의 현실을 마주한 소감은. A.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언어 탓에 소통이 잘 안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많았지만, 누구보다 자기표현을 잘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존재를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고민하며 살아왔기에 정돈된 언어로 자기 생각과 경험을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아이들을 피해자라고만 정의하고 싶진 않다. 물론 미흡한 법 체계에서 유령처럼 살아야 했으니 피해를 당하고 있지만, 아이들은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사회에서 나를 설명해가며 살아냈다. 포기하지 않고 존재를 지켰다는 점에서 배울 점이 정말 많았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이주아동이 있다면. A. 마리나는 미등록 이주아동의 표상과도 같은 아이였다. 몽골에서 온 청각장애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소녀였는데, 우리나라 아이와 전혀 다른 점을 느낄 수 없는 선주민 아이로 기억한다. 삶의 조건은 누구보다 열악했지만, 그 아이가 살아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또 내가 부모를 키웠다고 당차게 말하던 그 모습이 기특하고 미안했다. 미등록 이주아동이 아닌 경우에도 부모에게 양육능력이 없어 거꾸로 자녀가 부모를 돌보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의 목소리까지 대변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정말 건강한 아이였다. Q. 아이들을 위한 사회적 과제를 제시한다면. A. 법무부의 구제대책은 있지만 없는 법으로 느껴진다. 앞으로 이민은 더 활발해질 테고 이를 위한 정책과 행정이 마련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외국인을 단지 값싼 노동력으로만 인식하고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 건 비겁한 처사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돼야 하며, 이를 통해 아이들의 존재가 세상 밖으로 더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꼭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희준ㆍ김정규기자

[이야기 세상, Today] 경기도 어민들은 닻을 올리고 싶다

한창 바빠야 할 성어기를 맞았지만, 인력난에 시달리는 경기도 바닷가엔 적막이 감돌고 있다. 어업을 기피하는 내국인의 빈자리를 대신하던 외국인 노동자마저 코로나19 여파로 입국이 통제되며 자취를 감췄다. 여기에 한 가지 업종을 두고 고용노동부와 해양수산부로 나뉜 외국인 선원 도입제도는 영세 선주들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어촌, 특히 경기도의 어업가구는 다른 업종과 비교할 때 그 수가 적다는 이유로 각종 지원책에서 외면받고 있다. 경기일보는 바다를 인접한 지자체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쇠퇴하고 있는 경기도 어촌의 위기를 조명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1. 외국인 떠난 어촌, 항구에 묶인 어선쇠퇴하는 경기어촌 14일 오전 7시께 화성시 서신면의 궁평항. 주꾸미와 꼴뚜기가 제철이라는 12월을 맞았지만, 항구는 조용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어민들로 가득 채워졌던 부둣가엔 갈매기 몇 마리가 자리를 대신했다. 50척 안팎의 어선들은 언제 떠날지 알 수 없는 조업을 기다리며 항구에 발이 묶인 상태였다. 오전 8시께 어스름이 걷히기 시작하자 대명호 선주 이연표씨(36)가 7.93t짜리 선박에 올라탔다. 출항을 하기 전부터 이씨의 낯빛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은 그는 한때 외국인 노동자를 5명까지 고용했을 정도로 소형 선박치곤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1명뿐이다. 이마저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간신히 구한 일손이다. 이날 1시간 동안 바다를 가른 대명호가 도착한 곳은 주꾸미 조업을 위해 어장을 설치해 둔 지점. 닻의 위치를 옮길 때가 됐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최소 3명이 합을 맞춰야 할 정도로 고된 업무지만, 선박의 키를 쥔 이씨는 조타실 밖으로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인도네시아 국적 노동자 파리드씨(25) 홀로 거대한 닻과 30분 넘게 사투를 벌였다. 그는 일손을 구하기 어려워진 뒤로 조업시간이 3배 가까이 늘어났고 그만큼 업무 능률도 현저히 떨어졌다며 궁평항에 있는 어선 중 10t 이상의 선박들은 못해도 1년에 250일 정도 조업을 나가는데, 코로나19 이후로는 아예 조업을 하지 못한 배도 많다고 털어놨다. 해상에서 작업을 진행한 지 3시간째, 이씨의 입가에선 자꾸만 한숨이 잦아졌다. 경기도 어촌은 어느 지역보다 빠르게 쇠퇴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도내 어가 인구는 1천307명인데, 지난 1990년 2만1천889명 대비 93.6% 감소한 수치다. 이는 바다를 접한 지자체 중 가장 높은 감소율인 데다 같은 기간 전국 어가 인구의 평균 감소치인 80.2%와 비교해도 10%p 이상 웃도는 수치다. 특히 어업은 내국인 기피가 심하고 종사자의 고령화로 외국인 노동자의 역할이 막중하다. 이에 따라 국내 어촌에는 해마다 3천명 안팎의 외국인 노동자가 배정되며 지난 2019년에는 3천228명이 들어왔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한동안 입국이 통제되며 지난해 247명, 올해 들어서는 11월 기준 215명으로 대폭 감소했다. 경기도 해양수산과 관계자는 코로나19 확산 이후 어민들이 인력난과 생계난에 시달리는 상황을 인지하고 있다며 어민기본소득 시행에 필요한 기초조사를 진행 중이며 다양한 방향으로 지원 계획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2. 한 배에 탄 두 가지 법외국인 일손 어촌 탈출 부추겼다 경기도 어촌이 빠르게 쇠퇴하는 상황에서 외국인 일손마저 항구를 등진 배경에는 고용노동부와 해양수산부로 이원화된 외국인 선원 도입제도가 자리잡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14일 본보 취재를 종합하면 외국인 선원 도입제도는 지난 2007년 이후 노동부가 관리하는 고용허가제(E-9)와 해수부가 담당하는 외국인선원제(E-10)으로 나뉘었다. 고용허가제를 통해서는 5~20t의 소형 어선이나 양식장 등에 근무하는 인력을 도입하며, 외국인선원제로는 20t 이상의 대형 어선에서 근무할 선원을 등록한다. 문제는 고용허가제로 입국하는 노동자의 이탈률이 외국인선원제로 들어오는 노동자보다 월등히 높다는 점이다. 한국수산어촌연구원이 지난 2017년 밝힌 조사 결과를 보면 외국인 선원의 평균 이탈률에서 고용허가제는 49.2%, 외국인선원제는 26.8%를 기록했다. 20t 미만의 어선들이 전체 어선의 90%를 차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업 분야에서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절반가량은 어촌에서 탈출을 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고용허가제의 이탈률이 높은 이유로는 외국인 노동자가 어느 업종에 종사할지 모르는 상태로 입국한다는 점이 꼽힌다. 제조업ㆍ건설업ㆍ농업 등 비전문직 노동을 포괄하는 목적으로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 중 일부를 선원으로 선발하는데, 이렇게 뽑힌 인원들은 정식 선원교육도 받지 못한 채 어촌에 배치된다. 외국인선원제로 들어와 20t 이상 어선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와 달리 전문 위탁기관의 사후관리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이탈률을 따져보기 전에 단순 입국 인원수만 봐도 고용허가제의 현실은 처참하다. 지난해 고용허가제로 어업에 배정된 인원은 3천명이었지만, 10%에도 못 미치는 247명만 입국했다. 반면, 해수부 관할 하에 민간선원관리업체의 선별을 거치는 외국인선원제로 입국한 인원은 1천922명으로 집계됐다. 선박의 규모가 작아 영세한 어선들이 일손 확보에도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 일손 모집을 해수부의 외국인선원제로 일원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수협중앙회 관계자는 연안 어업의 경우 아예 조업을 중단하는 사례까지 속출하며 영세 어선들의 불만이 심화되고 있다며 어업 분야에 대해서는 해양수산부로 업무를 통일하는 게 보다 효율적인 관리 방안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도 문제를 인정하고 대책 마련을 시사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영세 어선을 중심으로 외국인 노동자 등록제도에 대한 일원화 요청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며 부처 간 실무 협의를 통해 업무 이관의 필요성을 검토해보겠다고 설명했다.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해수부는 외국인 노동자 등록제도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방안에 의지를 갖고 있다며 노동부에 업무 이관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으며, 개선 방안을 다각도로 논의해보겠다고 밝혔다. 김정규기자

[이야기 세상, Today] 당신을 지켜보는 불편한 시선, 불법촬영

예상치 못한 순간, 누군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과거 예능 프로그램에서 누군가를 깜짝 놀래키는 장난으로 여겨졌던 몰래카메라는 이제 명백하게 범죄를 가리키는 용어가 됐다. 공공기관은 물론 초등학교에서까지 불법촬영 범죄가 발생하며 더 이상 여성들이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는 한탄까지 나온다. 경찰에서 단속을 벌이거나 지자체마다 점검에 나서지만, 일상 속 깊숙이 파고든 불법촬영을 막기엔 역부족인 상황. 경기일보는 몰카 범죄의 전말을 파헤치고 대안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1.당신이 안심할 수 있는 공간, 없다 얼마나 쉽길래 해마다 5천건 안팎의 불법촬영 범죄가 발생하는 건지, 경기일보 취재진은 직접 몰카범이 돼 보기로 했다. 17일 낮 서울 용산구의 전자상가. 수도권 주민들이 찾는 전자제품은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이곳에선 여기저기 몰래카메라라고 적힌 표지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촬영장비를 판매하는 한 상인에게 작은 카메라도 파는지 묻자 그는 익숙하다는 듯 몰카를 찾느냐고 되물었다. 이내 진열대 밑에서 초소형카메라를 종류별로 꺼내놨다. 볼펜부터 라이터, 차키, USB, 보조배터리, 안경 등 셀 수 없이 다양한 모형 속엔 2㎜ 남짓한 렌즈가 숨어 있었다. 가격은 화질이 떨어지는 7만~8만원에서 초고화질을 자랑한다는 40만원대까지 천차만별. 상인들은 몰카를 찾는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대신 탐지기를 통과한 제품이라는 설명을 자랑스레 덧붙였다. 아, 절대 안 걸린다니까요 10곳 이상의 판매업체를 돌아다닌 끝에 14만원짜리 라이터형 몰카를 구매했다. 제품을 추천하던 상인에게 법적으로 문제가 없겠는지 묻자 그는 주방에서 과일 깎던 칼을 사람한테 휘둘러야 흉기라며 까놓고 말해서 안 걸리면 그만 아닙니까라고 속삭였다. 결국 범행도구로 쓰여도 판매자에겐 아무런 책임이 없단 말이었다. 취재진은 이렇게 산 카메라를 수원시의 협조를 얻어 한 공원 여자화장실에 설치했다. 어느 교장이 그러했듯 휴지갑에 렌즈 구멍을 뚫어 초소형카메라를 숨겼고, 스마트폰 공기계는 휴지걸이 안에 부착했다. 이후 공원 관리인 입회하에 출입을 통제하고 일반인 여성들이 화장실을 드나들며 몰카를 찾아낼 수 있는지 간단한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에 참여했던 대학생 안효민씨(24ㆍ여)는 휴지걸이 속 렌즈와 눈이 마주쳤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고 털어놨다. 안씨는 공중화장실에선 휴지로 모든 구멍을 막은 뒤에야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며 피해를 당한 적이 없는데도 자취방 화장실 타일 사이 구멍까지 매니큐어로 칠할 만큼 불안하다고 한숨지었다. 끝내 휴지갑 속 카메라를 찾아내지 못한 대학생 이민주씨(24ㆍ여)는 이쑤시개로 낸 작은 구멍을 보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씨는 불법촬영에 대한 뉴스를 볼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아 야외화장실 이용을 꺼리게 된다며 초소형카메라를 산 모든 이를 범죄자로 취급할 순 없겠지만, 범죄를 저질렀을 땐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실험 참가자는 경찰과 지자체에서 사용하는 탐지장비까지 모두 동원했지만, 몰카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두 여성은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믿을 구석이라곤 여성안심구역이라 적힌 스티커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경찰의 단속에도 안심할 수 없는 몰카 공화국, 이곳에 사는 여성들은 오늘도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2. 몰카 사고파는 유일한 국가, 대한민국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의 여성권리국 공동디렉터를 맡고 있는 헤더 바는 최근 인터뷰를 통해 공중화장실이나 여자 탈의실에 대한 몰카가 유행하는 건 전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고 질타했다. 또 이런 촬영물을 판매하는 시장이 있는 것도 한국뿐이라고 강조했다. HRW는 한국의 디지털성범죄를 주제로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펴내기도 했는데, 이를 통해 한국 정부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보다 촬영물 삭제에만 급급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서만 끊이지 않는다는 몰카, 법은 제대로 심판하고 있나. ■연평균 5천523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몰카 경찰청과 경기남부경찰청에 따르면 불법촬영 범죄는 최근 3년간 1만6천570건 발생했다. 전국으로 보면 소폭 줄어드는 양상이 나타났지만, 이를 경기남부로 좁히면 2018년 1천117건, 2019년 1천47건, 2020년 1천201건으로 되레 증가세를 보였다. 특히 경기남부지역 공중화장실에서 발생한 불법촬영은 해당 기간 405건으로, 해마다 전체 몰카 범죄의 12% 안팎을 차지했다. 불법촬영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올해 들어서는 지난 10월 안양시의 한 초등학교 교장이 여교사 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한 것으로 드러나며 사회적 충격을 줬다. 그는 휴지갑에 구멍을 뚫어 카메라를 숨겼는데, 교사들이 이를 발견한 뒤로도 경찰 신고를 망설이다 범행이 발각됐다. ■취재진이 산 라이터형 몰카, 진짜 범죄에 쓰였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초소형카메라로 불법촬영을 시도할 수 있는 상황. 취재진이 구매했던 라이터형 몰카 역시 실제 범행에 사용됐다. 수원지법 형사9단독 박민 판사는 최근 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로 기소된 L씨(28)에게 징역 2년 6월을 선고했다. 그는 올 초부터 노래연습장 여자화장실에 라이터 모형의 카메라를 설치, 수십차례에 걸쳐 여성들이 용변 보는 장면을 촬영했다. 해당 카메라로 교복을 입은 여학생의 다리를 찍거나, 성매매 업소를 돌며 여성들의 유사 성행위 장면을 촬영하기도 했다. 그가 5개월간 찍은 몰카 촬영물은 320개에 달한다. 그러나 몰카범에게 처음부터 실형이 선고되는 사례는 상당히 드물다. 일례로 의정부지법 형사3단독 신정민 판사는 최근 같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50대 A씨에 대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A씨는 지난 4월 치마를 입고 걸어가는 여성을 뒤쫓아가 다리를 몰래 촬영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다리가 예뻐서 찍었다고 진술했다. ■한 사람을 평생 불안에 떨게 한 죗값, 고작 벌금 불법촬영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대법원이 지난 2019년 밝힌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 1심 판결 현황을 보면, 2012~2018년 해당 혐의로 기소된 피고는 9천148명이다. 이 가운데 4천788명(52.3%)은 벌금형에 처해졌고, 그 뒤로는 집행유예 2천749명(30.1%), 징역ㆍ금고형 862명(9.4%) 순으로 집계됐다. 피해자는 성적 수치심과 함께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데, 몰카범 10명 중 8명은 벌금형이나 집행유예에 그친 것이다. 징역ㆍ금고형에 처해진 피고는 10명 중 1명도 되지 않았다. 지난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펴낸 분석자료를 봐도 법의 심판은 가벼웠다. 지난 2018년 불법촬영 피의자 4천948명 중 절반이 넘는 2천561명(51.8%)에 대해 검찰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또 1심 판결을 받은 피의자 1천913명 중 과반에 해당하는 1천42명(54.5%)이 벌금형에 그쳤다. 연구원은 장소ㆍ도구ㆍ대상 등 범행의 경중에 따른 기소율에 큰 차이가 없었으며, 성관계 영상 등 죄질이 중한 경우에도 불기소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3. 헛스윙 날리는 국회, 법도 못 막는 몰카 몰카 범죄를 근절하기 위한 제도권의 움직임은 무위에 그치고 있다. 해마다 관련 법안이 발의되고 있지만,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채 폐기됐기 때문이다. 이효림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사무국장은 17일 경기일보와의 통화에서 변형카메라 관리법 제정에 그칠 게 아니라 몰카 범죄를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까지 들여다봐야 한다며 처벌 강화를 시작으로 보다 근본적이고 강력한 대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19대 국회부터 21대 국회까지 의원들은 꾸준히 변형카메라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허가제냐 등록제냐 하는 차이는 있지만, 내용은 큰틀에서 같다. 이번 국회에선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발의한 등록제, 같은 당 윤영찬 의원이 내놓은 허가제가 계류 중이다. 이를 바라보는 정부의 입장은 신중론에 가깝다. 김보경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전파기반과장은 변형카메라 관련 법안의 도입 취지에 공감하며 성범죄에 실효성 있게 대응할 수 있도록 입법 논의에 적극 참여할 예정이라면서도 다만 과학기술 발전 저해에 대한 우려로 규제 대상을 정하는 부분에서 고민이 많다고 설명했다. 조기열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수석전문위원도 윤영찬 의원이 발의했던 법안에 대한 검토보고서를 통해, 카메라 기술이 생활밀접분야는 물론 산업ㆍ국방 등 분야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범죄예방과 기술발전의 측면을 균형있게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냈다. 같은 내용의 법안이 발의되고 계류하다 폐기되는 수순이 반복되는 국회. 다수의 범죄 전문가는 몰카 시장이 형성되는 근본적인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불법촬영 범죄가 연평균 5천건이라는 건 말도 안 되게 적은 수치라며 불법촬영물은 결국 돈으로 환전되는데, n번방 사태와 마찬가지로 플랫폼만 옮겨다닐 뿐 범죄수익이 발생하는 한 몰카 범죄는 계속된다고 경고했다. 변형카메라 관련 법안에 대해서는 매번 폐기되거나 상임위에서 계류 중인 것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카메라도 결국 과학기술인데 형사처벌로 통제하는 나라가 어디 있나라고 꼬집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계속되는 몰카 범죄의 원인으로 소비자를 지목했다. 수요가 있으니 그에 따른 공급이 이어진다는 것. 이 교수는 예컨대 미국이 마약과의 전쟁에 실패한 이유는 공급자만 차단했기 때문이다라며 불법촬영과 관련해서도 공급만 차단하려고 하는데, 수요는 전혀 차단하지 않으니 범죄가 계속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배상훈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터넷 공간이 확대ㆍ발달한 우리나라의 특수한 환경에서 몰카 범죄나 사생활 침해에 대한 교육이 미약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배 교수는 어린 아이도 스마트폰을 갖고 다니지만, 그걸로 몰카를 찍는 게 문제라는 학교 교육은 없지 않나라며 변형카메라 관리법도 결국 몰카 범죄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스마트폰을 배제해둔 셈이니,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희준ㆍ김은진ㆍ김정규기자

[이야기 세상, Today] 아이들의 끼니에 다한 정성, 암으로 돌아오다

학업에 열중하는 아이들을 위해 맛있는 밥이 지어지는 학교 급식실, 그곳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급식실의 열악한 환경이 세간에 알려진 건 지난 2017년 4월 수원 권선중학교에서 근무하던 조리실무사가 원발성 폐암 3기 진단을 받고, 그로부터 1년 만에 숨을 거두면서였다. 그의 죽음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된 건 다시 3년이 흐른 올해 2월, 그 사이 수많은 급식종사자가 쓰러져 나갔지만 대책 마련은 요원하다. 경기일보는 급식실의 실태를 낱낱이 조명하고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교육 당국이 노동자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도록 대안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1.밥 짓다가 골병 드는 급식종사자 학생들이 등교 준비에 한창일 시간, 시곗바늘이 오전 8시를 가리키면 20㎡ 남짓한 학교 급식실에선 죽음의 노동이 시작된다. 매일 아침 들어오는 고기, 야채 등 재료를 검수하고 나면 조리에 앞서 원재료를 다듬거나 세척하는 전처리 작업으로 이어진다. 급식종사자 대부분이 중년 여성인 만큼 수많은 식재료와 수백명의 학생들이 사용할 식기를 나르는 것부터 여간 고된 일이 아니다. 포천시의 한 중학교에 근무하는 21년 경력의 베테랑 조리사 심영인씨(57ㆍ가명)는 버거운 무게의 물건들을 매일 들어올리다 결국 엄지와 검지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엘리베이터 출입구에 낀 카트 바퀴를 밀어내려다 다친 허리도 매일 밤 그를 괴롭힌다. 심씨는 매일 430명의 끼니를 만들어야 한다. 수능 이후 본격적인 전면 등교가 이뤄지면 밥을 먹을 학생들은 650명까지 늘어난다. 함께 일하는 동료는 5명, 한 사람이 최대 109명의 식사를 책임지는 셈이다. 공공기관에서 조리사1인당 평균 식수 인원이 57명인 것과 비교하면 2배에 달하는 업무량이다. 심씨는 큰 솥에 담긴 음식에 삽질을 하다 보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 게 일상이라며 일과를 마치고 정형외과에 가면 주변 학교에서 일하는 조리사가 모두 모여 정모라고 할 정도라고 털어놨다. 본격적인 조리가 시작되면 급식종사자의 고통은 배가 된다. 학교급식법상 조리 후 2시간 내 배식을 해야 하는데, 코로나19 이후 시차 배식이 이뤄지는 탓에 끼니마다 2~3번에 걸쳐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조리 과정은 몸속까지 치명상을 입힌다. 주범 조리흄(cooking fumes)은 학생들이 좋아라 하는 튀김이나 볶음 등의 메뉴를 조리할 때 모습을 드러낸다. 국제암연구소(IARC)는 기름을 사용하는 튀김 요리에서 발생하는 배출물질의 일종인 조리흄을 발암물질로 분류했다. 안양시의 한 초등학교에서 22년간 일해온 정혜경씨(63ㆍ가명)도 지난 2016년 여름 급성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조리가 끝나도 위험은 계속된다. 수백명이 식사를 마친 식기들을 설거지하는 일 자체도 노동 강도가 상당하지만, 기름기를 쉽게 제거하기 위해 쓰는 1종 세제의 독성도 위협적이다. 조리기구와 솥을 닦을 때 쓰는 세제, 바닥을 소독할 때 사용하는 약품에 뜨거운 물을 끼얹으면 유해화학물질인 수산화나트륨이 기체 형태로 급식종사자의 몸속까지 스며든다. 그러나 온몸으로 죽어가는 급식종사자의 산재를 판단해줄 법적 기준이나 정기적인 건강검진 따위는 없다. 밥을 열심히 지었을 뿐인데 암에 걸려버린 이들에겐 아픈 이유를 증명하는 것도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2. 걸려도 호소할 데 없는 직업성 암 우리가 아픈 것도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업무 강도보다 위협적인 문제는 급식실 노동이 이른바 직업성 암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현행법은 암과 업무 간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으면 보상하도록 규정한다. 그럼에도 급식종사자 대부분은 산업재해 신청마저 망설인다. 공사 현장이 아니라 급식실에서 밥을 짓는 일은 산재 정책에서 소외돼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이하 학비노조)은 지난달 전국 유치원과 초ㆍ중ㆍ고등학교 급식종사자 5천365명(여성 5천34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태조사를 공개했다. 조사 결과, 급식실 근무 이후 폐암 진단을 받았다고 응답한 건 189명(여성)으로, 약 3.5%의 비율을 보였다. 이는 일반인(여성) 기준 폐암 발병률의 24.8배에 달하는 수치다. 지난 2018년 폐암으로 숨진 급식종사자도 지난 2005년부터 2017년까지 수원 권선중학교에서 조리실무사로 근무했던 여성이다. 튀김이나 구이 등 요리를 위해 고온의 열기 속에서 하루에만 수시간씩 조리흄을 들이켰던 그는 지난 2017년 4월 원발성 폐암 진단을 받고 이듬해 4월 숨졌다. 유족들은 같은해 8월 근로복지공단 수원지사에 산재보험 유족급여 신청서를 냈고, 꼬박 3년 만인 올해 2월에서야 업무상 질병을 인정받게 됐다. 이 밖에도 조사에 참여했던 5천365명 중 96.3%(5천166명)는 최근 1년간 근골격계 질환으로 인한 통증을 일주일 이상 느꼈다고 응답했고, 74.7%(4천5명)는 최근 1년간 근골격계 질환으로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변했다. 치료 경험자 중 73.6%(2천947명)는 자비를 들여 치료비를 충당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이유로 53.3%(2천136명)가 산업재해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워서라고 응답했다. 끝내 산재를 신청해서 인정받은 비율은 고작 1%에 불과했다. 최진선 학비노조 경기지부장은 가장 시급한 것은 식수 인원 대비 인력 배치의 기준이라며 근본적으로 너무 적은 인원이 너무 많은 양의 음식을 하다 보니 과다한 조리흄을 흡입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다고 질타했다. 학비노조는 산재를 당하고도 피해를 회복하지 못하는 급식종사자를 위해 집단산재 신청에 나서고 있다. 올해 6월에는 급식종사자 28명(경기 11명), 지난 9월에는 19명(경기 7명)이 산재 신청에 참여했다. 경기지역 18명 중 15명은 10년 이상 급식실에서 근무한 이력이 확인됐고, 병명은 폐암ㆍ유방암ㆍ직장암ㆍ혈액암ㆍ갑상선암 등으로 다양했다. 이윤근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은 조리흄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정한 1급 발암물질로, 근로복지공단에서도 인정하고 있다며 급식실에서 일하는지, 일한다면 얼마나 일했는지 따져보면 폐암과의 연관성을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세제에서 나오는 유해물질과 암의 연관성도 연구가 필요하지만, 우리나라는 지금 그 유해성에 대한 확인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며 교육 당국은 급식종사자에 대해 일종의 사업주 개념인데, 선제적으로 문제를 발굴하기 보다는 고용노동부 기준이 없다는 이유로 손을 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3. 헛바퀴 구르는 실태조사, 급식실 고통 외면하는 교육 당국 학교 급식실에서의 노동이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교육 당국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경기도교육청은 관내에서 첫 산재 인정 사례가 나오자 지난 5월 뒤늦게 도내 학교 2천363곳에 대한 전수조사 계획을 세웠다. 급식실을 점검하고 공조설비 등을 단계별로 교체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학교별로 자체 점검하는 형태였고, 당시 조사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돼 개ㆍ보수가 진행된 학교는 163곳(6.9%)에 불과했다. 현장에선 불만의 목소리만 터져나왔다. 학비노조 소속 급식종사자 임숙현씨(52ㆍ가명)는 조리 과정에서 매연이 발생하고 청소 과정에서 독한 세제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학교에서 점검하는 건 모든 작업이 끝난 뒤였다며 시설 개선을 요청해도 코로나19 때문에 어렵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도교육청은 학교 예산이 모자라면 각 교육지원청에서 신청을 받아 적극 지원하고, 대단위 예산일 경우 도교육청 차원에서 예산을 수립하겠다면서도 명확한 기준이 없어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는 건 어렵다는 입장이다. 고용노동부에서 연말까지 학교 급식소 표준 후드 환기방안 등을 마련할 예정인데, 그 기준에 맞춰 다시 조치하겠다는 게 도교육청의 계획이다. 결국 기준이 만들어질 때까진 사실상 손을 놓고 있겠다는 셈인데, 이미 경기지역 학교 급식실의 실태는 엉망으로 드러났다. 지난 5~6월 경기도의료원 파주병원 노동자건강증진센터에서 도내 학교 8곳을 점검한 결과, 가평중학교와 고양 한류유치원 급식실에선 아예 일부 후드가 고장난 상태였다. 또 산업안전보건공단이 규정하는 제어풍속은 0.5m/s이지만, 개구면이 아닌 호흡기 지점에서의 풍속이 0m/s로 측정되기도 했다. 환기 상태가 엉망이다 보니 부천 고강초등학교 세척실에선 22~29ppm 수준의 일산화탄소(법정기준치 30ppm)가 측정됐고, 고양 풍동초등학교에선 메추리알 조림 작업 중 창문을 열고도 4.4ppm(법정기준치 0.3ppm)의 포름알데히드가 계측됐다. 급식종사자의 건강 관리에 대한 대책도 현재까진 준비된 게 없다. 올해 3분기 도교육청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선 ▲작업환경 측정 ▲급식실 종사자 폐암 방지 건강진단 ▲각급 학교 산업안전보건 업무 범위 등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으나, 모두 계속 협의한다는 결론만 나왔다. 오는 12월 4분기 산안위에서 최종 의결이 이뤄질지도 현재로선 미지수다. 경기도의회 박옥분 의원은 학교가 처한 실태를 면밀하게 파악해야 더 이상의 피해를 막을 수 있으나, 도교육청은 급식종사자의 인권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며 인력 보강은 물론 도내 전체 학교를 대상으로 작업환경 측정과 특수 건강진단을 조속히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희준ㆍ김정규기자

[이야기 세상, Today] 이름은 서울, 주소는 경기…‘이상한 구치소’

경기(京畿)라는 지명에는 서울(京)의 외곽(畿)이라는 도민의 입장에선 그리 달갑지 않은 유래가 담겨 있다. 1천년 역사 경기도는 명실상부 대한민국의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지만, 뿌리박힌 서울 중심 사고는 현재진행형이다. 서울지역 기피시설을 경기도로 떠넘기는 것은 물론 주소지는 경기도에 두고 수십년째 서울 명칭으로 부르는 시설도 있다. 경기일보는 34년 전 의왕으로 떠밀려 온 서울구치소의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수렴하고 그 대안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1. 서울 기피하니 경기 옮겨놓고, 이름은 의왕 서울구치소 34년 전 의왕시로 이전한 뒤 현재까지 서울 명칭을 사용하는 의왕 서울구치소에 대해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지역 이기주의로 서울기관을 경기도가 떠안게 된 상황이 있는 만큼 계속되는 서울 명칭 사용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16일 경기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의왕시 포일동에 위치한 서울구치소는 서울ㆍ경기ㆍ강원지역을 관할하는 서울지방교정청 산하 교정시설 17곳 중 유일하게 지역과 다른 명칭을 사용한다. 서울구치소 부지는 46만8천㎡로 축구장 65개 면적과 맞먹고, 수용 인원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직원 규모만 700명에 달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서대문형무소는 해방 직후 서울형무소로 불리다가 지난 1961년 서울교도소로 이름을 바꿨고, 이어 1967년 서울구치소로 다시 변경됐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던 서울구치소는 지난 1987년 시설 노후화 등을 이유로 지금의 위치로 자리를 옮겨 개청했다. 이렇게 경기도에 터를 잡은지 34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서울구치소라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교정시설을 기피하는 님비(NIMBY) 현상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정부는 도심 속 교정시설의 교외 이전이라는 방침을 세웠다. 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인을 수용하면서도 그 옆으로 가지 못하고 서울의 외곽으로 치부되던 경기도로 밀려난 이유다. 반면, 다른 구치소의 상황은 다르다. 서울 구로구에 있던 영등포구치소는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구된 지난 1980년 이후로도 영등포 명칭으로 불리다가, 지난 2011년 지금의 구로구 천왕동으로 이전하며 서울남부구치소로 개칭했다. 님비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법원ㆍ검찰청 등과 교정시설을 함께 유치하기도 하는데, 성동구치소는 서울 송파구에 있으면서 성동으로 불리다가 지난 2017년 서울동부지법과 서울동부지검이 있는 문정동 법조타운으로 이전하며 서울 동부구치소로 이름을 바꿨다. 두 사례 모두 세밀한 지역 명칭 대신 광역 단위 명칭을 넣어 기피 현상을 해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울구치소도 이전 논의가 있긴 했다. 지난 2015년 의왕지역에 경기남부 법무타운을 신축ㆍ조성하고 안양교도소ㆍ서울소년원 등과 통합 이전하는 개발 방안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그러나 이 경우 기피시설만 묶어 이동하려다 보니 반발이 상당했고, 사실상 논의가 무산됐다. 지난해 7월 정부가 수도권 부동산 대책의 일환으로 서울구치소ㆍ안양교도소 부지에 주택 공급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다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기획재정부에서 결정된 바가 없다고 선을 그은 뒤로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서울지방교정청 관계자는 법무부에선 신설 및 신축ㆍ이전하는 교정기관을 대상으로 광역 명칭 사용을 확대하고 있다며 정부기관의 명칭 변경은 지리적 위치뿐만 아니라 기능ㆍ업무 등 여러 제반 사정을 종합 검토해야 할 사안으로 판단된다고 부연했다. #2. 서울 아닌 경기도 중심으로 명칭 개정 바람 솔솔 서울 중심의 사고가 녹아든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의 명칭이 29년 만에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로 바뀐 데 이어 의왕 서울구치소의 명칭도 경기도의 DNA를 담아 변경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특히 지난 2015년 의왕 서울 구치소 등을 이전하는 사업이 찬ㆍ반으로 양분된 주민 반발로 무산된 선례가 있는 만큼 명칭 변경에 대해 민의를 충분히 수렴해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경기도는 지난 2018년 국토교통부에 서울의 외곽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이유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의 명칭 변경을 요구했다. 국토부는 도의 요청에 따라 관계기관 협의와 도로정책심의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고속도로 100호선의 명칭 변경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지난 1991년부터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라 불리던 도로는 29년 만인 지난해 9월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로 변경됐다. 이처럼 수십년 전 서울의 변두리로 치부되던 경기도로 밀려난 의왕 서울구치소의 명칭도 이제는 경기도 중심의 이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의왕시 정계를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의왕시의회 A 의원은 지역 정가를 비롯해 의왕 주민들 사이에서도 서울이라는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며 다만 서울구치소 자체가 상징성이 있는 만큼 의왕이라는 명칭보다는 경기남부 또는 수도권남부 구치소와 같은 대표성을 갖춘 명칭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기도의회 장태환 의원(더불어민주당ㆍ의왕2)은 진작부터 명칭 변경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으며,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의 이름이 바뀐 것처럼 합당한 명칭으로 변경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명칭 변경을 추진하기에 앞서 수년 전 의왕 서울 구치소 등의 이전이 무산된 사례가 있는 만큼 주민 여론을 충분히 수렴해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개진됐다. 앞서 기획재정부는 지난 2015년 의왕 서울구치소와 안양교도소ㆍ서울소년원 등 3개 교정시설을 의왕시 왕곡동으로 이전하는 경기남부 법무타운 조성사업을 추진한 바 있다. 또 경기남부 법무타운 맞은 편 일대에 이주민과 교정직원을 위한 주거단지ㆍ법무지원시설 등 복합타운을 조성하는 안도 마련했다. 그러나 조성부지 인근 주민들의 반발로 사업에 제동이 걸리면서 현재는 논의가 잠정 중단된 상태다. 서울지방교정청 관계자는 서울구치소는 시설의 노후화 및 도심지 소재 교정시설의 교외 이전이라는 당시의 방침에 따라 이전된 것이라며 현재 서울구치소 명칭 변경에 관해 대내외 구체적인 논의나 제안 등은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정민훈ㆍ장희준기자

[이야기 세상, Today] 끊임없는 논쟁, 개(犬)는 가족인가 식용인가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계절이 바뀌면 옷도 달라진다.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관습일지라도 더 이상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거나 논란을 일으킨다면 다시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개 식용 문제는 한국 사회가 풀어내지 못한 숙제 중 하나다. 한 가지 눈여겨볼 역사의 흐름은 노예제도나 투견, 투우처럼 인간과 동물을 학대하는 관습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개고기를 먹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역시 잔혹한 도살 과정에서 비롯됐다. 경기일보는 법의 테두리 밖에서 끊임없이 논쟁을 일으키는 개 식용 문제에 대한 변화의 방향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1. 불법 도살 개고기모란시장으로 흘러갔다 27일 낮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의 야산. 남한강을 따라 펼쳐진 황금빛 들녘을 지나 산을 오르자 수풀에 가려졌던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린내가 진동하는 창고 형태의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개를 가둬놓는 이른바 뜬장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고, 벽면을 따라서는 가로ㆍ세로 1m 규격의 간이 견사들이 줄지어 자리잡았다. 옆 건물에는 도축시설에서 주로 쓰이는 공기압축기(에어 컴프레서)가 놓였고 각종 공구와 대야, 바구니 등도 발견됐다. 지난 8월 동물권행동 카라는 이곳을 습격, 불법 개 도살 현장을 적발했다. 당시 산속으로 끌려왔던 개는 31마리, 이들에게 뿌려질 물이 대야에 가득 채워진 상태에서 전기 쇠꼬챙이로 도살이 진행되기 직전이었다. 냉동고에선 그간의 불법 도살을 증명하듯 수많은 개들의 잘린 발과 머리가 쏟아졌다. 이곳에서 개를 잡던 60대 남성은 지난해 12월 고양시 일산동구 설문동에서 불법 도살장을 운영하다 붙잡힌 인물이었다.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은 끝에 법원에서 2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같은 범행을 반복한 것이다. 더구나 여주 도살장은 다른 이의 토지에서 몰래 벌인 일이었고 건물마저 불법 건축물로 확인됐다. 이렇게 도살당한 개들의 고기는 어디로 갔나. 추적 결과,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성남시장 재임 시절 대대적으로 정비했던 모란시장에 유입된 것으로 드러났다. 모란시장은 국내 최대 개고기 유통시장으로, 지난 1960년대부터 개고기 취급 업소들이 모여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8년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은 모란시장 내 불법 도축시설을 정비하며 개고기 유통이 사라지도록 업종 전환을 유도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이 지사가 떠난 뒤로 업종 전환에 대한 지원은 모두 끊겼고, 현재 모란시장 내 개고기 유통 업소는 최소 21곳으로 파악됐다. 도로변에 위치한 가게들의 유리 냉장고엔 개 형태 그대로의 지육이나 이빨을 드러낸 개의 두상이 전시돼 있었고, 1근에 8천원 또는 ㎏당 2만원대에 유통 중이었다. 건강원 외에 보신탕집에서도 지육을 거래할 수 있었으며, 상인들은 7만원을 추가하면 조리까지 해준다면서도 사진 촬영에는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성남시 재정경제국 관계자는 도축시설을 모두 폐쇄한 뒤로도 업종 전환을 유도하고 있지만, 개고기 유통이 계속되고 있다며 개고기는 현행법상 위생 단속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유통 및 판매 금지를 강제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이날 개 식용 금지를 검토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청와대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김부겸 국무총리와 주례회동을 통해 유기ㆍ반려동물 관리체계 개선과 관련한 보고를 받은 뒤 이제 개 식용 금지를 신중하게 검토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012년과 2017년 대선 당시 반려동물 관련 공약을 발표하며 동물에 대한 애정을 공식적으로 밝혀왔다. 사저에서 토리, 마루, 곰이 등 반려견과 함께 지내는 그는 지난 2018년 유기견 토리를 입양했는데, 그해 7월 문 대통령의 딸 다혜씨가 토리를 서울광장에서 열린 개 식용 반대집회에 데려가 주목을 받기도 했다. #2. 달라진 시대, 멈춘 법회색지대 개 식용 한국 사회에서 개고기 문제가 본격적으로 화두에 오른 건 지난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신탕이라는 이름을 사철탕으로 바꾼 것도 한국을 찾는 외국인에게 혐오감을 덜기 위해서였다. 이후로도 프랑스 유명 여배우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은 야만인이라고 비난하는 일이 있었고, 꼭 30년이 흐른 2018년 평창 올림픽 때도 개고기는 논란거리였다. ■반려동물 천만시대, 개는 가족이 됐다 한때 연 1천만마리 이상의 개가 도축되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 개고기 소비량은 연 150만마리 안팎으로 감소했다. 개고기 산업이 사양길을 걷게 된 배경에는 과거와 달리 먹거리가 풍부해졌다거나 혐오 음식이라는 인식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가장 크고 명확한 변화는 늘어난 견주의 수다. 27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정은 638만 가구, 인구 수로 따지면 1천500만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반려견 수에 대한 추정치는 602만마리로 집계됐다. 시대상의 변화를 반영하는 인구주택총조사의 항목에 통계청이 반려동물 현황을 추가한 것도 개(혹은 강아지)가 가족의 일원이 된 사회적 흐름을 보여준다. 반려견과 식용견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사실상 같다. 동물권행동 카라에서 지난해 12월 적발한 고양 도살장에선 골든리트리버, 시베리안 허스키 등이 발견됐고 지난 8월 여주 도살장에서도 잉글리시 포인터 등 품종견이 구조됐기 때문이다. 목줄을 찼던 흔적이 있거나 반려동물 인식칩이 내장된 개도 종종 발견된다. 도살장에서 죽어나가는 개와 품에 안긴 개가 다를 바 없다는 의미다. ■개고기 갈등 부추기는 낡은 법안 개농장, 도살장, 개고기 시장 등 국내에서 개고기와 관련된 모든 것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오간다. 축산법상 개는 가축으로 분류되지만, 도살이나 유통 등의 과정을 다룬 축산물 위생관리법에서는 개를 가축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이렇다 보니 개 사육장 등은 가축업에 대한 규제를 적용받지 않는 회색지대에 놓였다. 아리송하게도 식품위생법으로 보면 개를 식품원료로 조리ㆍ유통하는 건 불법이다. 국내에서 섭취 가능한 식품원료를 규정하는 식품의약품안전처 행정규칙에서 개고기를 동물성 원료인 축산물 식유류에 포함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개고기를 판매하거나 가공ㆍ조리ㆍ운반ㆍ진열할 경우 5년 이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그럼에도 개고기 식용 자체를 금지하는 조항은 없다. 보신탕 등의 간판을 내건 가게들이 버젓이 운영될 수 있는 이유다. 식약처 축산물안전정책과 관계자는 현행법상 개고기에 대한 유통이나 식용을 단속하기엔 법적 근거가 애매하고, 특히 개고기 식용은 사회문화적 측면이 강해 정부 차원에서 강제하기 어렵다며 지난 7월에도 농식품부와 개고기 문제를 놓고 회의를 진행했지만 지지부진한 터라 국회 차원에서 입법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회색지대 속 간편하게 도살되는 개 현행법상 개는 식품원료가 아닌 탓에 도살이나 유통에 대한 기준이 없다. 그야말로 사각지대다. 결국 식용을 위한 개는 인간에게 편한 방식으로 도살되고 있다. 개를 물에 흠뻑 적신 뒤에 전기 쇠꼬챙이로 감전시키는 이른바 전살법이 대표적이다. 올가미로 목을 매달아 죽이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 같은 도살법은 모두 동물보호법상 ▲잔인한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 ▲같은 종류의 다른 동물이 보는 앞에서 죽이는 행위 등에 저촉되며, 3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대법원도 지난해 4월 전기봉으로 개를 도살하는 행위를 동물학대라 판결하며 국제적으로 예를 찾을 수 없는 잔인한 도살법이라고 판단했다. 최윤정 동물권행동 카라 활동가는 축산법은 개를 가축으로 보고 축산물 위생관리법은 가축으로 보지 않는데, 이는 개를 사육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도살 및 유통하는 건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며 동물보호법이 잔인한 도살을 금지하고 있지만, 식약처는 실태조사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특히 경기도는 개농장과 불법 도축시설이 가장 많은 지역이라고 강조했다. ■대한육견협회 개 식용, 법제화하자 다만 일부 국민과 개고기 관련 업계에서 내는 불만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개고기 식용을 법의 테두리 안에 들여 제도적으로 정비하면 된다는 것이다. 주영봉 대한육견협회 사무총장은 축산물 위생관리법상 개를 가축으로 법제화하면 국민의 먹거리 안전도 지킬 수 있다며 담배도 금연구역이 있고 흡연구역이 있듯이, 반려동물에 대해서는 식용을 금지하고 식용견은 철저한 위생 관리 속에 키우면 될 일이라고 말했다. 개고기 식용에 대한 찬반이 가장 크게 부딪히는 쟁점은 반려견과 식용견의 차이에 대한 엇갈린 시선이다. 앞서 적발됐듯이 일부 반려견, 유기견 등도 도살 현장에서 발견되는 만큼 개는 모두 같다는 게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측의 입장이라면 식용을 찬성하는 측에서는 개농장에서는 식용견만 키운다고 바라보는 것이다. 주 사무총장은 여러 법령을 따져본 결과, 식용견만 키우는 개농장 운영에 대해서는 무법이니 사실상 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며 또 4년 전 조사 결과를 보면 여전히 연간 7만t의 개고기가 소비되는 것으로 나타난 만큼 개고기 식용은 개인의 결정에 맡겨야 할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3. 국회 문턱 넘지 못하는 법 개정, 세계는 변화 中 허술한 법 체계로 개 식용에 대한 찬반양론이 계속 대립하는 상황에서 사회적 분위기는 명백하게 반대로 기울었다. 27일 경기도에 따르면 지난 6월 도민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인식조사에서 620명(62%)이 개고기를 먹는 것에 반대했다. 또 앞으로 개고기를 먹을 의향이 있는지 묻는 것에 대해서는 838명(84%)이 없다고 응답했다. 개 식용 금지 법안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서도 638명(64%)이 찬성했다. 특히 개고기를 소비하는 주 연령대인 중장년층에서 50대 62%, 60대 69%, 70대 68%의 찬성 비율을 보이며 오히려 젊은 세대(20대 60%)보다 법안 마련에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 단위로 봐도 마찬가지다.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가 이달 1일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69세 남녀 2천명 중 78%가 개, 고양이의 식용 목적 도살과 판매를 금지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 같은 조사 결과들은 지난 2000년 한국식품영양학회지에 실린 인식조사에서 응답자 1천502명 중 83%가 개고기 식용을 찬성했던 것과 비교해 국민적 인식이 큰폭으로 달라졌음을 시사한다. 세계적인 추세도 개 식용 금지를 향해간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동물보건기구(OIE) 가입국 182곳은 OIE의 위생 관리 기준에 영향을 받는데, 개 식용을 법으로 인정하는 국가는 없다. 대만과 싱가포르, 홍콩 등이 개 식용을 금지했고 중국도 코로나19 발병 이후 지난해 4월부터 개를 가축에서 제외했다. 선진국의 척도로 평가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38곳 중에서도 개 식용 문화가 남은 건 사실상 한국이 유일하다. 대만의 경우 지난 1998년 동물보호법 제정 이후 반려동물을 기르는 가구 수가 늘어나며 개 식용 과정에서의 동물학대 문제가 대두됐다. 현재 우리나라와 비슷한 흐름이다. 이후 대만은 지난 2017년 개를 도살한 뒤 사체 또는 그 성분이 포함된 식품을 매매ㆍ식용ㆍ보유하는 것을 모두 금지하는 법 개정에 나섰다. 위반 시 2년 이하 징역 및 200만 타이완 달러(우리 돈 8천500만원 상당)의 벌금을 병과하고, 위반자의 이름과 사진 등을 공개한다. 우리나라도 움직임이 없던 건 아니다. 지난 20대 국회에선 임의 도살 금지 조항을 담은 동물보호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폐기됐다. 이번 국회 들어서도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이 지난해 12월 개 도살, 식용, 판매 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동물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선주자들을 중심으로 반려동물 공약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여권 후보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대표적이다. 그는 성남 모란시장에서 개 도축시설을 정비한 뒤로도 꾸준히 개 식용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내왔다. 이 지사는 지난달 20일 고양시 동물보호센터를 찾아 개 식용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큰 숙제이고 고민이라며 잔인한 학대와 도살, 비위생적인 사육환경, 식품으로서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는 유통구조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희준ㆍ김정규기자

[이야기 세상, Today] 가정 대신 시설로, 아이들은 다시 버려진다

갖은 고난에도 지원 한 푼 받지 않고 베이비박스를 운영해온 군포 새가나안교회 이기동 목사(62)가 강조하는 바는 한결같다. 아이는 가정환경에서 자라야 한다는 것. 비단 개인의 의견이 아니다. 지난 1993년 체결된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의 주요 원칙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지난 2013년 진영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아동이 가정에서 자랄 권리를 보장하겠다며 네덜란드까지 날아가 협약에 서명했다. 이로부터 8년이 흐른 지금, 국가의 외면과 방치 속에 아이들은 가정 대신 시설로 향하고 있다. ■하루 반나절에 1명씩, 아이들이 버려진다 14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1~2020년 국내 유기아동은 2천595명에 달한다. 연평균 260명, 1.4일에 1명씩 버려지고 있는 셈이다. 같은 기간 경기도에선 412명이 유기됐다. 경기지역 유기아동 비중은 지난 2013년 285명 중 10명(3.5%)에 불과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꾸준히 20% 안팎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엔 172명 중 38명(22.1%)이 경기도에서 버려졌다. 올해 6월에도 부천시 소사동의 한 수녀원 앞에서 갓 태어난 아기가 발견됐다. 탯줄만 엉성하게 잘린 채로 구조된 아기는 신체 일부가 파랗게 변하는 청색증을 보이며 엄마의 품 대신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 밖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길가에 버려지거나 비정한 부모에 의해 짧은 생을 마감하고 있다. ■가족의 품 떠난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홀로 세상에 놓인 아이들은 출생신고조차 돼 있지 않다. 서류상으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복지부는 아동복지법 개정에 따라 지난 6월30일부터 각 지방자치단체에 사례결정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다. 보호대상아동에 대한 조치를 심의하는 기구다. 도내 유일하게 베이비박스가 있는 군포시의 경우 시 공무원, 시의원, 경찰, 변호사 등 7명으로 구성돼 있다. 유기아동이 발생하면 사례결정위는 성본창설부터 진행한다. 이후 일시보호소로 보내진 아동에 대해 위탁ㆍ입양을 진행할지, 보육원 등 시설로 보낼지 여부를 결정한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을 기준으로 꾸준히 개정되고 있는 아동복지법은 아동이 가정환경에서 자라야 한다고 명시한다. 복지부도 원가정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되 입양 또는 가정위탁, 공동생활가정, 아동양육시설 순으로 조치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결론적으로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정환경이 아닌 집단시설로 보내진다. ■가정 대신 시설로, 아이들은 다시 버려진다 감사원의 보호대상아동 지원실태 감사 결과를 보면, 지난 2014~2018년 베이비박스 유기아동 962명 중 929명(96.6%)은 시설로 갔다. 위탁을 비롯한 가정보호 조치는 33명(3.4%)에 불과했다. 국내 베이비박스는 서울 관악구 주사랑교회, 군포 새가나안교회 2곳에 있다. 아동복지법에 따르면 국가와 지자체는 태어난 가정에서 자라기 곤란한 아동에게 다른 가정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시설보다 가정을 우선하는 게 기본원칙이고, 특히 애착형성 시기인 2세 미만 아동은 가정위탁 등에 먼저 배치해야 한다. 권고가 아닌 의무다. 그러나 부모를 알 수 없는 유기아동은 손쉽게 시설보호로 연계된다. 가정보호로 변경하기 위한 절차도 마땅히 없다. 사례결정위를 각 지자체마다 운영한다고 하지만, 수치로 나타난 결과는 100%에 수렴하는 아이들이 시설로 보내졌다는 것이다. ■도입 19년째, 뒷걸음질치는 가정위탁 제도 가정위탁 제도는 모든 아동은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원칙 하에 지난 2003년 도입됐다. 시행 첫해 위탁아동은 7천565명, 이후 1만2천명까지 늘었지만 최근 들어 감소세로 돌아섰다. 지난해엔 9천923명까지 줄며 도입 초창기에 가까워지고 있다. 경기지역도 2018년 2천46명, 2019년 1천961명, 2020년 1천860명으로 감소세가 나타났다. 위탁 형태별로 나눠보면 허수까지 드러난다. 8촌 이내 혈족, 조부모 등에 의한 위탁을 제외하면 혈연관계가 없는 가정에서 양육하는 일반 가정위탁의 비율이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지난해 경기지역 일반 가정위탁은 159명(8.5%)으로, 혈연이나 아무런 연고가 없는 유기아동은 시설로 갈 수밖에 없는 가정위탁 제도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친족 중심의 가정위탁을 탈피하기 위해 예비 일반위탁 부모를 양성하고 있다며 베이비박스 유기아동에 대해서도 전문 가정위탁 보호체계를 확립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서울시, 베이비박스 아동 따뜻하게 품는다 #. 아동은 가정에서 자라야 한다 유기아동이 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부보다 서울시가 먼저 변화의 첫발을 뗐다. 14일 서울시에 따르면 시는 지난 8월 베이비박스 유기아동을 맡아줄 위탁가정을 확대하고 그에 대한 재정 지원을 대폭 늘리기로 결정했다. 위탁가정에 대해서는 하루 3만원씩 월 90만원의 양육보조금을 비롯한 각종 수당을 지급하고, 관할 자치구는 아이가 위탁가정으로 보내진 뒤 사흘 이내 방문점검을 실시하는 등 사후 관리를 강화한다. 다소 경제적인 지원에만 초점이 맞춰졌다는 의견도 있지만, 지방정부 차원에서 논란의 베이비박스를 인정하고 유기아동의 가정위탁 연계까지 지원한다는 점에선 의미 있는 첫걸음으로 평가된다.재원은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의 예산을 활용하는데, 시 여성가족정책실에 편성된 예산은 지난해 1조7천885억원에서 올해 2조7천959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 관계자는 베이비박스를 둘러싼 찬반은 익히 알고 있지만, 아동의 생명과 인권을 지켜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며 유기아동이 위탁이나 입양 기회를 얻지 못한 채로 민간시설에 보내지는 관행을 깨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기도는 이보다 앞선 2016년 3월 도의회에서 건전한 입양문화 조성 및 베이비박스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입법예고한 바 있다. 그러나 유기를 조장한다는 반대 의견에 부딪혀 일주일 만에 무산됐다. 당시 조례안을 대표 발의했던 이효경 전 도의원은 10대 미혼모 등 출생신고의 어려움으로 인한 영아 유기를 막기 위해 조례를 준비했지만, 친부모의 기록이 남지 않아 가족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항의를 받고 조례 추진을 포기했었다며 지방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고, 그게 어렵다면 국가 차원에서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본적으로 가정위탁 제도는 지방이양 사업이다. 보건복지부의 권고에 따라 각 지자체가 예산을 부담하는 구조이다 보니 강제성도 떨어지고 지역별로 지원 규모도 천차만별이다. 현재 도내 지자체는 일반 가정위탁 기준으로 양육보조금 월 30만원, 아동용품 구입비 50만원(1회) 등을 지원한다. 다만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다. 박다은 아동권리보장원 아동보호기획부 과장은 지자체에서 예산을 배정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도와줄 방법이 없으니 일반 가정위탁 비율이 현저히 낮은 것이라며 기획재정부의 국고보조금법 시행령에서 가정위탁 양육지원 항목이 국고 지원 제외 사업으로 배정돼 있는데, 이 때문에 여러 노력들이 막히는 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경기도 여성가족국 관계자는 유기아동이나 가정위탁에 대한 책임이 각 시ㆍ군에 일임돼 있어 도 차원의 지원이 굉장히 제한적이라며 도 역시 유기 문제에 대해 깊은 공감대를 가지고 여러 방법을 모색 중이지만, 국가 차원의 논의로 환원돼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고 말했다. 장희준기자

[이야기 세상, Today] 부모도 세상도 등돌린 우리, 누가 품어주나

2천595명. 최근 10년간 부모의 품을 떠나 버려진 아이들의 숫자다. 여섯 중 하나는 경기도에서 유기됐다. 그 사이 군포 새가나안교회의 베이비박스는 140명의 숨결을 지켜냈다. 갖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다는 탈무드의 한 글귀는 베이비박스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잘 나타낸다. 문제는 그 다음, 대부분의 아이들이 집단시설로 흩어지며 다시 한 번 사회로부터 외면받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아동은 가정보호가 우선돼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도 책임을 방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일보는 베이비박스를 통해 유기 실태를 진단하고 국가와 지방정부 차원의 대책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14일 낮 군포시 산본동의 새가나안교회.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교회 정문에는 커다란 하트가 그려진 베이비박스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는 지난달 17일 한 장의 편지와 함께 태어난지 닷새 만에 엄마와 생이별한 갓난아기가 뉘여졌다. 말없이 편지를 읽던 이기동 목사(62)는 베이비박스는 버려지는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며 가출 청소년이 미혼모가 되고, 미혼모가 낳은 아기가 다시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라거나 유기되는 굴레를 끊기 위해 시작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소년원과 교도소, 중국에서의 청년사역을 통해 미혼모와 유기 아동이 생겨나는 과정을 목격한 이 목사는 지난 2014년 5월 베이비박스를 설치했다. 첫해 28명의 아이들이 버려졌고 올해 들어서는 도담이까지 7명이 박스 안에 놓였다. 이렇게 지켜진 140명 중 친부모에게 돌아간 건 단 2명, 나머지는 일시보호소에서 머물다 시설로 보내졌다. 성도들이 나서 위탁이나 입양을 시도했지만, 20명 남짓이다. 24시간 교대 근무로 보살핌을 받던 도담이도 지난달 25일 경기남부일시보호소로 떠났다. 슬하에 30대의 장성한 두 자녀를 둔 김영자 권사(57ㆍ여)는 지난 2015년 11월 사라의 엄마가 됐다. 그해 2월 태어난 사라는 사흘 만에 베이비박스로 왔고 친모는 3년 뒤에 꼭 데리러 오겠다는 편지를 남겼다. 가슴 저릿한 편지는 역설적이게도 아이에게 족쇄가 됐다. 입양을 원하는 가정이 나타나도 편지의 내용 탓에 거부되기 때문이다. 일시보호소를 거치면서 아이가 지쳐가는 모습을 본 김 권사는 위탁보호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가정위탁 절차를 진행한 뒤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법정 후견인을 신청했지만 한 차례 기각됐고, 보육원 시설장의 성씨(姓氏)를 딴 아이의 이름을 개명하는 것도 기각을 당한 끝에 어렵사리 승인됐다. 김영자 권사는 위탁이나 입양 절차는 전쟁이라 표현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리고 서류 절차도 복잡하다면서도 우리 모두가 책임을 느껴야 하는 일인 만큼 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위해 용기를 낼 수 있는 가정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이 버려지는 과정과 가정양육이 필요한 이유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고, 정부도 그에 초점을 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희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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