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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난민 취업실태] 8. 고국을 잃어버린 ‘절망’...그들을 보듬으면 ‘희망’

난민들의 취업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많지 않다. 당사자를 제외하면 일부 시민단체나 언론이 사실상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관련 통계도 많지 않다. 국내에 거주 중인 난민들의 숫자는 자료가 있지만, 그들이 어디서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난민들의 취업 문제가 과거부터 줄곧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군가는 우리가 그들을 품어줬으니 그 이후의 삶은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나 난민은 평생을 살아온 모국을 반강제적으로 떠나 언어도 문화도 다른 낯선 땅에서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외국인 근로자들과는 다르다. 이런 이유로 난민들을 위한 별도의 지원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혹자는 우리도 어려운데 난민을 먼저 돕자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활동 중인 배우 정우성은 이같은 지적에 어떤 삶도 누군가의 삶보다 우선할 수 없다. 복잡한 세상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그 중 난민 문제는 인류가 연대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유있는 분들이라면 함께 나누자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제 난민은 어느 특정 국가의 문제가 아니고 모두가 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로도 읽힐 수 있다. 난민들이 한국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자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난민이라는 신분상의 제약으로 일자리를 구하는 건 쉽지 않다. 정책적 지원이 뒷받침되면 좋겠지만 정부의 관심은 오로지 가짜 난민을 가려내는 데 있다. 난민으로 인정을 받아도 제조업이나 단순 노무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해결 방법은 있다. 그것도 매우 간단하다. 중요한 건 이제라도 난민들을 포용하려는 우리의 자세다. 언제든 상황은 달라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 같은 처지의 신청자와 체류자 난민 취업 문제는 대부분 체류자격에서 시작된다. 난민 인정자는 전반적인 업종에 취업이 가능한 F2 체류자격을 부여받는다. 이들은 외국인이 가질 수 없는 일부 전문직을 제외한 모든 유급직업에 종사할 수 있다. 난민협약에 따른 임금노동, 자영업, 자유업 등이다. 하지만 현실은 협약과 다르다. 본국에서의 경력이나 학력을 인정받기 어려워 특별한 지식이 필요없는 제조업이나 단순노무 일자리가 얻을 수 있는 전부다. 취업 과정에서 유료직업소개소를 찾는 일도 허다하다. 난민 인정을 받았지만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셈이다. 난민 신청자(이하 신청자)는 더 불안하다. 신청자는 난민 인정 신청을 한 후 6개월이 경과하면 취업 허가를 받을 수 있다. 문제는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자리인 건설업이 취업제한 업종으로 묶여 있다는 점이다. 특히 취업을 위해서는 고용계약서와 사업자등록증을 제출해야 하는데, 취업도 하기 전에 이같은 서류들을 준비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여기에 부득이한 사정으로 근무처를 변경할 경우에는 새로운 체류자격 외 활동 허가가 필요하다. 안정적인 일자리는 고사하고 임금체불이나 낮은 임금에 시달려야 하는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상황이다. 인도적 체류 허가자(이하 체류자)도 난민 신청자와 다를 게 없다. 다른 점이라면 건설업 취업이 가능하다는 정도다. 하지만 이들 역시 임시 체류자격 중 하나인 G-1-6를 부여받아 취업이 가능한 분야가 상당히 제한돼 있다. 이 때문에 실제 일자리를 구해 근로계약까지 체결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6개월마다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별도의 계약없이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자영업도 할 수 없다. 난민 사회에서 (체류자는) 한국에서 숨만 쉬면서 살라는 것과 차이가 없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공익법센터 이일 변호사는 신청자나 체류자는 직종 제한이 매우 심하다. 본인들이 본국에서 갖고 있던 전문성이나 다양한 경력들이 있을텐데 한국에서는 공장에서 일하는 것 말고는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며 적어도 체류자는 이미 지위를 얻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분들의 삶을 억제할 이유는 없다. 해외에도 난민 인정자나 체류자의 처우는 같다. 왜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 난민 정책 없는 경기도 경기도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난민이 사는 지역이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경기도에 살고 있는 난민(난민인정자, 난민신청자, 인도적체류허가자 등)은 1만1천여명에 달한다.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고, 주거비용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곳보다 난민 정책이 필요한 지역이지만 현재로서는 눈에 띄는 대책을 찾아볼 수 없다. 난민 정책의 대부분이 그들의 체류자격을 결정하는 데 집중돼 있어서다. 난민 신청을 한 후에, 혹은 인도적 체류허가 자격을 얻은 뒤에는 더 이상 정책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경기도가 지난해 11월 내놓은 경기도 외국인주민 정착 현황 및 관련 정책 분석을 보면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간 다문화 가족을 위한 각종 교육과 지원책, 통역 서비스, 고려인동포 정착지원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지만 정작 난민과 관련한 지원은 없었다. 난민도 외국인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한다면 별도의 지원책 마련이 절실하다. 경기도 관계자는 도 차원의 난민 정책은 없다. 난민은 법무부 관활이기도 하고 현황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015년 통과가 불발된 김포시 난민 지원 조례안은 눈여겨 볼 만 하다. 특히 난민에 대한 정의는 난민법상의 정의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제3조 난민의 지위에서 정한 혜택은 눈길을 끈다. 해당 조항에는 난민은 법령이나 다른 조례 등에서 달리 규정하고 있지 않으면 시민과 동일하게 시의 재산과 공공시설을 이용할 수 있고, 김포시의 각종 행정적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또 부시장과 시 난민 지원업무 담당국장을 당연직 위원으로 하는 난민지원위원회 설립과 김포시 난민 지원센터(이하 지원센터) 설치도 규정하고 있다. 해당 지원센터에서는 △생활안정지원, 교육지원, 취업지원, 자립지원 △난민인정 신청 지원 및 절차법적 정보 제공 △난민 지원을 위한 지역사회 연계협력 △난민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제공 및 홍보 △난민을 위한 문화체육행사 △관련 기관 등에 대한 협조지원 △난민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 방지 및 사회적 인식 개선 △그밖에 난민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이 조례안은 그러나 시의회를 통과한 지 2개월여만에 폐기됐다. 지원 대상 난민의 범위가 넓고 시민공감이 부족했다는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경기도가 법률 위반 등을 이유로 김포시에 재의를 권고했고, 유영록 전 시장은 지방의회가 소외계층의 삶에 다가가려는 노력은 바람직하지만 법령의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며 사실상 폐기에 동의했다. 해당 법안을 발의한 정왕룡 전 의원도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면서 사실상 조례안 부결에 동의했다. 그럼에도 난민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을 고민한 최초의 지자체 조례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 취업가능 직종 넓히고 체류자격 바꿔준다면 난민 지원책 마련이 무산됐지만 시민단체들이 줄곧 제안한 해법은 단순하다. 특히 취업 문제와 관련해 체류자격 외 활동허가 방식이 아닌 취업허가를 포괄적으로 늘려주는 방법을 공통적으로 주장한다. 이마저 어렵다면 취업 허가를 지금보다 포괄적으로 내려줘 난민들이 일자리를 보다 쉽게 구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방안도 제시된다. 또 정부 부처간 협의를 거쳐 난민들이 취업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해결방법이 될 수 있다. 해외에서는 유입된 난민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취업 알선이나 일자리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일 변호사는 우선 정부부터 난민이 한국에 일을 하기 위해 온 가짜 난민이라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 만약 난민들에게 혜택을 주거나 취업을 자유롭게 풀어주면 본국으로 갔다가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다고 생각해 더 옥죄는 것 같다며 법무부가 난민의 취업문제는 자신들의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다. 그저 처벌만 하려고 한다. 고용노동부도 취업 알선이나 관련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을텐데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다고 했다. 아예 신청자나 체류자도 취업이 가능한 비자 카테고리를 하나 만들자는 제안도 있다. 현재 신청자나 체류자는 취업이 불가능한 G-1 비자를 받고 별도의 허가를 받아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 이처럼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필요없이 G-2라는 새로운 비자를 만들어 난민들에게 제공하고 취업이 가능한 직종을 설정하자는 게 난민지원단체 피난처 이호택 대표의 아이디어다. 예를 들어, 현재의 G-1-5(신청자)를 G-2-5, G-1-6(체류자)를 G-2-6로 부여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사업주 입장에서는 취업이 가능한 비자라고 인식할 수 있고, 난민들도 보다 손쉽게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호택 대표는 현재 외국인 계절 근로자들이 코로나19로 한국에 못 들어오는 상황인데 난민 신청자들을 농촌에서 일하게 해주면 된다. 그런데 현재 신청자들에게는 농촌에서 일할 수 있는 비자가 나오지 않는다. 일반 취업 시장에도 들어가지 못하는데 농촌에서 일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라며 그렇다면 이들에게 새로운 비자로 새로운 취업 가능 카테고리를 지정해주는 거다. 공공근로와 농촌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게 아닌가. 저는 난민들이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취업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강조했다. 장영준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난민 취업실태] 7. 그들이 원하는 직업

원하는 직업을 얻으려면 대학을 가야 한다. 대한민국에선 상식이다. 대부분의 취업 준비생들이 대학을 나왔고, 좀 더 유리한 위치에 서고자 스펙을 쌓는다. 남들 다 하는 그저 그런 일자리를 얻으려는 게 아니라면 공부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 누구도 예외는 없다. 본국에서의 박해를 이유로 쫓겨나거나 도망친 난민들도 분명 여기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하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다. 본국에서의 학력이나 경력을 인정받기가 어렵고, 체류 신분도 발목을 잡는다. 무엇보다 이곳에서의 기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교육을 위한 경제적 여유를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취업을 원하는 난민들의 꿈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길 바라는 것이 첫 번째이고, 자신들을 받아준 나라에 은혜를 갚는 것이 두 번째다. 그리고 출신 본국을 돕고 싶은 마음이 있다. 간호사, 통역사, 자영업을 원하는 비율이 높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의 높은 벽은 이런 작은 소망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난민들에게 취업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 수단이 아닌, 당장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점차 안정을 찾아갈수록 꿈은 멀어진다. 과연 그들의 꿈은 무엇이었고 목표를 이뤘는지, 또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 11년 전 자영업학업 꿈꿨지만, 지금은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가 지난 2010년 발간한 한국 체류 난민 등의 실태조사 및 사회적 처우 개선을 위한 정책 방안에 따르면 앞으로 종사하고 싶은 업종으로 취업이 응답자 총 383명 중 151명인 39.4%로 가장 많았다. 이어 자영업(24.8%), 학업(23.2%)의 비율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특히 자영업을 희망하는 비율은 난민인정자의 경우 40%, 인도적체류허가자의 경우 42%에 달해 매우 높게 나타났다. 학업도 난민인정자는 18.8%, 인도적체류허가자는 26.9%로 상당한 비율을 차지했다. 이는 난민들이 국내에서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얻은 뒤 자영업이나 학업을 통해 자립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보고서는 자영업이나 학업의 비율이 높은 건 경제적 목적 외에도 도전적이고 자아실현을 추구하고자 하는 성향과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태도를 가진 비율이 절반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며 한국 사회에서 난민들이 원하는 건 안정된 삶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아를 실현하거나 자립을 이룰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자영업을 하고 싶어도 창업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채널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또 창업을 시도할 때 체류자격이 없어 곤란을 겪은 경우도 29.3%에 이르렀다. 자영업을 하기 위해선 사업자등록이 필요한데 이때 F-2(거주), 재외동포(F-4), 영주(F-5), 결혼이민(F-6) 등의 소지자여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 제도적 정비가 필요한 실정이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난민들은 과연 꿈을 이뤘을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여전히 꿈으로만 머물러 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또는 임금체불이나 폭언 등 부당한 일들을 겪으며 악착같이 살다 보니 어느새 꿈은 잊혀졌다. 본국에서의 공부를 이어가겠다는 결심도 흐려졌다. 새로운 기술을 익혀 나만의 가게를 열고 싶다는 목표도 이루지 못했다. 인천에서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는 방글라데시 출신 난민은 원래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한국에서 같은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공부를 계속해서 학위를 받아 본국에도 도움이 되고자 했지만 도저히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며 지금은 그냥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사는 게 행복하다. 다른 꿈은 없다. 이제는 아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미얀마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탄압을 받았던 난민은 한국에서 목공소 일을 하거나 금속을 가공하는 일 등을 했는데 대부분 처음 해보는 일들이었다며 이제는 일이 손에 익어 벌이도 적당하고 안정적이지만, 언젠간 꼭 공부를 해서 미얀마 국민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 불안한 신분에 막힌 희망 난민들이 자영업이나 학업을 이어가려면 안정적인 신분이 우선돼야 한다. 가장 불안한 난민 신청자 신분으로는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난민 인정자 또는 인도적 체류 허가자가 돼야 원하는 직업을 얻을 기회가 생기지만 합법적인 체류 지위를 얻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 현재 많은 난민이 살고 있는 부천이나 부평에는 그들이 운영하는 식당, 식료품점, 휴대폰 가게 등 다양한 종류의 상점들이 있다. 비록 숫자는 많지 않지만 모두 난민들이 자신의 힘으로 일군 가게들이다. 이들 대다수는 재정착 난민으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체류 자격을 지녔다. 외국인 지원단체 관계자는 난민들이 가게를 차리고 자영업을 하는 데 있어서 정부가 지원해준 것은 없다고 보면 된다. 취업도 힘든데 창업까지 지원하는 제도는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다며 스스로 한국 땅에 자리를 잡아 가게를 차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9년에는 한 파키스탄 소수민족 출신 20대 여성이 난민신청자라는 이유로 대학 입학의 꿈이 좌절될 뻔한 일도 있었다. 이 일은 당시 언론을 통해 알려지며 주목받았다. 이 여성은 통역사의 꿈을 키우며 부산의 한 국립대 영어영문학부에 입학했지만 체류자격이 발목을 잡았다. 학교 측은 이 여성에게 유학생 비자가 필요하다고 했고, 여성은 지역 출입국외국인청을 찾아가 난민신청자 자격(G-1-5)을 유학생 비자로 변경할 수 있는지 문의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다행히 학교 측의 배려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이후 법무부도 외국인 대학 입학 시 반드시 유학생 비자가 필요한 건 아니다라는 긍정적인 입장 변화를 보였다. 결국 한국에서 난민들이 창업을 하거나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안정적이고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얻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난민 인정률과 인도적체류 결정률은 매우 낮은 수준이다.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난민 인정률은 0.3%(3,879건 중 10건), 인도적 체류 결정률은 21건으로 0.8%에 그쳤다. ■ 자립의 길 열어줘야 진정한 도움 난민의 자립을 돕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립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 길에는 취업이 있을 수 있고, 창업이나 교육도 있을 수 있다. 난민 스스로가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정착해 다시금 안녕과 평화를 되찾아 제2의 인생을 살아가려면 생계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미국도 난민들이 빠른 시간 안에 현지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립이 중요하다고 보고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해 놓고 있다. 그중에서도 난민들의 사업을 다방면으로 지원해 주기 위한 소액창업개발프로그램(the Microenterprise Development Program)은 눈여겨 볼만하다. 이 프로그램은 난민들이 자신들의 사업을 개발, 확장, 유지할 수 있도록 사업계획 개발, 경영, 회계, 마케팅 분야 등에 관한 교육 및 기술 지원 등에 관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공공보조 및 보조금을 받는 난민, 금융기관, 신용기록 또는 개인 자산이 부족해 대출이나 관련 기관을 통한 재정 지원을 받기 어려운 사람, 혹은 시민권을 받지 못한 난민의 경우에도 미국에 도착한 날짜와 상관없이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실제 미국 사회에서 이주민은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하지만 창업 기업가 집단 가운데 25%는 이주민이 차지한다는 분석이 있다. 재밌는 점은 우리에게 아이폰으로 익숙한 애플의 창업자이자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의 아버지도 시리아의 폭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난민이었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에서는 사회통합을 전제로 난민 신청자가 시설에 입소해 직업훈련을 개시하는데, 만약 외부의 직업훈련학교를 다닐 경우 수업료 보조는 물론, 퇴소 후 사업을 시작한다면 창업자금으로 1만5천유로(한화 약 2천만원)가 지급된다. 난민지원단체 관계자는 국내에 거주 중인 난민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점이 난민 인정을 쉽게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일자리를 얻기 어렵고 취업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하물며 난민에 대한 창업지원을 바란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다. 하지만 해외 사례처럼 사회경제적 효율성을 고려해 이제라도 전향적인 난민정책을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전했다. 장영준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난민 취업실태] 6. 한국에서 겪은 부당한 일들

대한민국은 오랜 시간 난민이라는 단어와 거리를 두고 지냈다. 그 사이 난민들에겐 불쌍한 존재,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막연한 인식이 깊게 자리했다. 그러다 지난 2018년 제주에 예맨 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본격적으로 이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동정심을, 누군가는 혐오감을 느꼈다. 드디어 난민을 인식하고 그들에게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은 이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곳곳에서는 난민을 향한 차별이 존재한다. 특히 생업에 뛰어든 난민이 취업 과정에서 겪는 차별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폭언을 듣거나 과도한 업무가 주어지기도 하고, 임금체불도 발생한다. 심지어 폭행을 당하거나 성범죄 피해를 겪는 일도 적지 않다. 한국인들의 난민 차별 배경에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막연한 혐오감이 자리하고 있다. 또 난민의 특수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대한민국에 돈 벌러 온 외국인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차별의 원인 가운데 하나다. 본인의 의지와 달리 어쩔 수 없이 난민이 돼 낯선 땅에 온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이미 수많은 난민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다. 서서히 우리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이제라도 난민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 이를 위해 과연 그들이 어떤 현실에 처해있고,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동시에 차별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안도 찾아보려 한다. ■ 쉴 새 없이 일해도 쥐꼬리 월급 난민이라는 신분으로 대한민국에 와서 가장 먼저 고민하는 것이 바로 취업이다. 대부분 가족과 함께 들어온 까닭에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난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청자와 인도적 체류자가 불안한 신분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설사 구했다 하더라도 각종 차별에 시달리거나 임금체불 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장혜영 정의당 의원의 차별금지법간담회 당시 자료집을 보면 난민들이 구직 과정부터 차별을 당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아프리카 출신 흑인인 난민 신청자는 인종차별을 받았고, 다른 외국인들과 비교해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이슬람 출신 난민 인정자는 히잡을 썼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고 답답해했다. 또 고용비자를 가진 이들이 일자리를 구하며 하나 둘 떠나갈 때도 난민 신청자는 아무 일도 얻지 못하고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인도적 체류자 신분이라는 이유 하나로 취업을 거절당한 경우도 있었다. 한국인 상사에게 매일같이 심한 욕설을 듣던 또 다른 난민은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참고 다녀야만 했다. 임금체불도 난민들이 자주 겪는 부당한 일 중 하나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난민은 한국어를 공부하기 전에는 문제점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누가 농담을 해도 욕하는 건 아닌지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 직원들과 관계도 안 좋아져 결국 퇴사했다면서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임금체불을 자주 겪어 정말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별다른 이유 없이 난민이라서, 혹은 그저 외국인이라서 일상에서 차별을 겪는 일도 다반사다. 김포에 사는 미얀마 출신 난민은 트럭에 짐을 싣고 왔다가 사무실 문을 막고 주차돼 있는 차를 발견했다. 연락처를 보고 차를 빼달라고 부탁했지만 어눌한 한국어 때문인지 아무 조치가 없었다. 급기야 상대방은 적반하장 격으로 나와 경찰까지 부르는 상황에 처했으나 다행히 상황은 잘 마무리됐다. 이 난민은 끝내 사과를 받아낼 수는 있었지만 가슴 속 깊이 새겨진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다고 했다. 다문화가정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관계자는 난민들도 취업 시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을 똑같이 겪는다고 보면 된다. 한국인 사업주들에게는 난민도 그저 외국인 노동자일 뿐이라며 차별이나 임금체불은 물론, 폭행이나 성범죄 등에도 무방비로 노출돼 있어 어려움을 겪는 난민들이 많다. 직장을 맘대로 옮기지 못해 그저 참고 일해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라고 설명했다. ■ 달라진 난민에 대한 인식 난민에 대한 인식은 3년 전 제주 예맨 난민 사태 당시와 비교하면 대체로 긍정적으로 변했다. 유엔난민기구는 지난 1월 대한민국 난민 인식 변화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대한민국 성인남녀 10명 중 5명은 난민수용에 대해 여전히 부정적이지만 2018년 이후 난민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는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조사에 응한 만 18세 이상 성인남녀 1천16명 중 난민 수용 찬성은 33%(335명), 반대는 53%(538명)였다. 2018년에는 찬성 24%, 반대 56%였다. 약 3년 사이 난민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면서 찬성은 소폭 증가하고, 반대는 소폭 감소한 것을 볼 수 있다. 난민수용을 찬성하는 이들은 △난민 인권에 대한 존중(74%) △난민협약 가입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책임(56%)을 주된 이유로 꼽고 있다. 반대는 △난민수용을 위한 정부와 국민의 부담(64%) △범죄 등 사회문제 야기(57%) 등을 이유로 든다. 여기에는 난민에 대한 오해와 가짜뉴스의 영향이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고 유엔난민기구는 분석했다. 설문조사 결과는 대한민국이 난민에 대한 인식을 점차 긍정적으로 바꿔가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 변화가 미미하다는 점에서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현실에서는 난민이 어떤 사람들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고, 심지어 그들을 오해하며 부정적 인식을 바꾸지 않으려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경기도에서 농장을 운영 중인 한 사업주는 한국인들은 힘든 일을 안 하려고 해서 주로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데 그동안 난민은 한 번도 고용해 본 적이 없다며 농장이라고 하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인식해 지원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같이 일을 해도 오래 함께 할 수 없어 난민을 잘 고용하지 않는다. 난민들은 덜 힘들고 돈도 많이 주는 공장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 차별금지법은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나도 언제든 차별의 대상이나 소수자가 될 수 있다. 지난해 4월 국가인권위원회의 2020년 차별에 대한 국민 인식조사 결과 국민 10명 중 9명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전체 응답자의 약 70%가 코로나19로 혐오나 차별의 대상이 된 사회집단이 있었다고 답했고, 그 대상이 외국인과 이주민이라고 생각한 응답자는 14.4%에 달했다. 여기에는 난민도 포함돼 있다. 최근 사회 각계에서는 종교고용형태성별성소수자 등 모든 종류의 차별을 금지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한창이다. 2006년 노무현 정권 시절 인권위가 처음으로 제정 권고한 차별금지법은 끝내 국회에서 파기됐고, 2010년 이명박 정부는 정부 차원의 추진을 중단시켰다. 이후에도 차별금지법이 꾸준히 발의됐지만 국회 문턱을 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지난해 장혜영 의원이 △성별장애나이혼인 여부종교사상성 정체성 등을 이유로 직간접 차별을 당하면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고 △시정 권고를 받은 자가 이행하지 않을 경우 3천만 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하는 내용을 담은 차별금지법을 발의하면서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현재 해당 법안은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발의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차별금지법은 차별의 정의는 물론 피해자 구제 방안까지 담은 실질적인 법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미 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 다문화가족지원법 등에서 차별받지 않는다, 국가는 차별을 예방한다 등의 내용이 있지만 강제할 수 없다는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보다 강제적이라는 점에서 국회 통과 시 난민을 향한 차별도 줄어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국 이주인권 단체는 성명에서 코로나19 재난의 위기에서 바이러스 전파에 예외는 없었으나 재난지원정책 등에 있어서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주민과 난민은 배제됐다며 차별금지법은 모두의 안녕을 지킬 법이다. 생활영역 전반에서 모든 이의 인권을 보장하고 차별과 혐오에 사회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장영준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난민 취업실태] 5. 지금과는 달랐던 직업

이유는 각기 다를 수 있지만 자신이 살던 나라에서 더는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박해를 받아 도망치듯 떠난 이들을 우리는 흔히 난민으로 부른다. 이 때문에 자신의 나라에서 오랜 시간 쌓아왔던 경력이나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난 당시 관련 서류를 가져오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렇다고 경력을 인정받고자 본국의 대사관을 방문할 수도 없다. 한국에 온 난민들은 처음 한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학생이었는데 공장에서 일하고 종교인이었는데 일용직을 전전하는 건 예사다. 생계는 꾸려야 하고 경력이나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다 보니 자연스레 육체적으로 힘든 일에 내몰린다. 난민으로 인정받아 어렵게 영구 체류 자격을 얻고 나서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난민을 위한 직업교육이 있지만 실상 이를 알고 있거나 활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난민법 15조에는 난민도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명시했지만 하루 벌어 하루 살기가 어려운 이들이 시간을 내 교육을 받기도 쉽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본인의 의지와 달리 난민이 돼 한국이라는 낯선 곳까지 왔지만 시련의 연속이다. 난민 신청자라는 신분으로 수년을 살아내야 하고 우여곡절 끝에 난민 인정자가 되더라도 알아서 살라는 냉담한 현실은 그들의 삶을 더욱 옥죈다. 난민은 왜 자신의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제조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들여다봤다. ■ 과거 직업과 전혀 다른 일 고단한 삶 본국에서 난민이 갖고 있던 직업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한국인들이 가진 직업과 별반 다르지 않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미얀마 출신 난민 얀 나이투(51)씨는 원래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었다. 민주화의 거센 물결에 야심 차게 몸을 맡겼지만 돌아온 건 신변에 대한 위협뿐이었다. 결국, 난민이 돼 한국으로 왔고 현재 목재를 CNC 가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김포에서 재한줌머인연대 회장을 맡은 라트나 키르티 차크마(42)씨는 승려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종교적으로 탄압을 받다가 한국땅을 밟았다. 한국에 온 지 10년을 훌쩍 넘겼지만 여전히 그의 신분은 난민 신청자다.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돼 있어 일용직을 전전하고 있다. 다행히 용접 기술을 익혀 일당 15만 원 정도를 받으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많은 난민이 본국에서의 직업과 전혀 다른 일을 하며 한국에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자신과 같은 난민을 위해 통역사로 일하는 방글라데시 줌머족 출신 여성은 원래 본국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유학까지 다녀올 만큼 엘리트 대학생이었던 미얀마 출신 한 난민은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아예 한국으로 귀화해 NGO(비정부기구)에서 근무하는 난민도 있다. 지난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와 난민네트워크가 주최한 난민인정자 처우 현황 보고대회-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에서는 본국에서 언론사 기자가 플라스틱 제조업을, 다큐멘터리제작자가 용접일을, 건축설계사가 식품공장일을, 귀금속을 팔던 이는 공장 생산직종 등에서 일하는 사례가 소개됐다. 모두 난민 인정을 받았지만, 본국에서의 직업과는 거리가 먼 제조업에 몸담은 이들이 대다수였다. ■ 기술 못 배우고 적응 못 하고 난민법에서는 난민 인정자가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난민법 제15조(직업훈련)에는 법무부장관은 직업훈련을 원하는 난민인정자 가운데 근로자직업능력 개발법 제12조에 따른 직업능력개발훈련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을 법무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고용노동부장관에게 추천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법령에 나온 대로 직업훈련을 받아 새로운 일자리를 찾은 난민은 전혀 없다. 당장 생계가 절실한 상황에서 새로운 직업을 위해 교육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설사 교육을 받더라도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다. 한국에서 20년째 살고 있는 한 난민은 난민으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일용직, 공장 생산직, 식당 설거지 등의 일을 했다. 그때까지 아무런 기술을 배울 수 없었다. 그러다 난민으로 인정을 받았고 취업을 위해 기술을 배우고 싶었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다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떤 곳은 웃돈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다행히 그는 과정은 험난했지만 정규직 일자리를 구해 지금은 가족과 함께 안정적으로 한국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친구들은 이렇다 할 취업교육이나 기술을 배우지 못한 채 지인의 소개로 일용직을 전전하고 있다고 했다. 더욱 심각한 건 최근 들어 난민이 일용직조차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거다. 난민을 지원하는 시민단체의 소개로 일자리를 구한 한 난민은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사례도 있다. 또 난민을 향한 한국인들의 그릇된 편견 역시 난민의 한국 적응을 더욱 힘들게 하는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난민 단체 관계자는 요새는 직업소개소 같은 곳에서도 난민들이 환영받지 못한다. 진짜 난민이 된 거다. 아예 처음부터 난민을 거부하는 곳도 있다며 국가별로 차별하는 경우도 많다. 문화적인 차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 돼 있기 때문에 난민의 취업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 수도권 제조업 종사 난민 약 8천500명 본국에서의 경력과 학력을 인정받지 못한 채 한국에 난민이라는 신분으로 들어온 이들은 이렇다 할 취업교육을 받지 못해 대부분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 같은 나라 출신 지인이나 직업소개소를 통해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자리이기 때문이다. 본국에서의 경력을 이어간 경우는 극소수다. 국내에서는 난민의 취업과 관련한 통계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대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수도권 난민(난민 인정자, 인도적 체류 허가자, 난민 신청자 등)의 숫자는 1만 3천789명, 이 가운데 미성년 자녀 등 비경제활동인구를 약 31%(4천274명)라고 가정하면 9천515명이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시 90%가 제조업에 종사한다고 가정했을 때 8천563명이라는 숫자를 얻을 수 있다. 실제 기자가 만난 12명의 난민 가운데 시민단체 소속이나 통역사로 일하는 2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10명 모두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또 이들을 통해 전해 들은 다른 난민들 역시 대부분 제조업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수도권 거주 난민의 약 90%가 제조업에 종사할 것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언제까지나 추정치일 뿐 정확한 통계는 아니다. 난민의 취업 실태와 관련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자료가 만들어져야 이들을 위한 각종 지원책이 마련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소수의 난민을 위해 구체적인 통계를 마련하고 정책을 고민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실태 파악을 위해 지역별 외국인 노동자 관련 단체 또는 기관에 문의해봤지만 대부분 돌아온 답변은 난민에 대한 내용은 잘 모른다거나 난민에 대한 자료는 따로 없다였다. 결국, 연결된 난민을 통해 다시 다른 난민을 소개받으며 한명 한명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김포시외국인주민지원센터에서 상담팀장으로 일하는 줌머족 로넬 차크마 나니(49) 씨는 다른 아시아 국가에는 난민법이 없지만 한국에는 있다. 덕분에 난민 인정률은 2%대이지만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한국이 선진화가 될수록 더 많은 난민, 이주민,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려올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함께 생존하고 공존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또 그게 우리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외국 사례처럼 한국에도 사회통합을 위한 시스템 마련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영준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난민 취업실태] 4. 일자리 구하기 좋은 그곳

법무부 통계(3월 31일 기준)에 따르면 경기도와 인천에 등록된 외국인은 총 43만 1천37명이다. 전국적으로 약 11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이 거주 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수도권에 사는 셈이다. 대부분 거주비용이 적게 들고, 일자리가 풍부해 경기도, 인천 등 수도권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인 노동자 가운데 난민(난민 인정자, 인도적 체류 허가자, 난민 신청자 등) 신분을 가진 이들은 극소수다. 현재 수도권에 살고 있는 난민은 1만 3천789명이다. 전체 외국인의 약 1%에 해당하는 수치다. 여기서 다시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한 난민 인정자만 따지면 그 수는 더욱 줄어든다. 1천 명 이상의 난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살펴보면 서울 용산구를 제외하고 모두 경기도에 있다. 평택시(1천144명), 안산시 단원구(1천112명), 포천시(1천105명), 화성시(1천37명)가 난민 거주 순위 2~5위에 각각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들 지역은 난민뿐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들도 많다는 특징이 있다. 난민, 이주 노동자 등이 많다는 건 바꿔 말해 제조업이나 농업과 같은 육체적으로 힘든 일자리가 많다는 걸 의미한다. 한국인 노동자를 구하기 어려워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력에 기댈 수밖에 없는 업종들이 몰려 있다. 여기선 난민들이 많은 지역의 경제적 특성을 알아보고 왜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 난민 신청자가 많은 평택 평택의 등록외국인은 2만 2천776명이다. 국적별로 보면 △한국계 중국(중국동포, 1만 3천44명) △베트남(2천641명) △중국(2천501명) △우즈베키스탄(1천149명) △캄보디아(1천273명) 등 순이다. 이 밖에도 미얀마(374명), 카자흐스탄(503명), 방글라데시(260명)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이중 난민 숫자는 1천144명으로, 전체 외국인의 약 5%다. 특히 난민으로 인정받아 장기체류가 가능한 F-2 비자를 받은 이들은 단 34명뿐이다.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은 이들이 46명이고, 난민인정자의 가족은 6명, 그리고 나머지 1천58명이 모두 난민 신청자다. 평택은 12개의 산업단지가 있어 일자리가 많은 지역 중 하나다. 송탄(모곡동), 세교(세교동), 장당(장당동), 칠괴(칠괴동), 진위(진위면 청호리), 고령(청북읍 고령리), 추팔(패성읍 추팔리), 어연한산(청북음 어연, 한산리), 현곡(충북읍 현곡리), 오성(오성면 양교리), 포승2(포승읍 만호리), 진위2(진위면 가곡리)에 다양한 업체들이 위치해 있다. 평택에 조성된 산업단지 총 면적은 738만 1천854㎡로 425개의 업체가 들어와 있고, 근로자 수는 약 2만 8천250명이다. 음식, 섬유, 목재, 종이, 화학, 비금속, 1차 금속, 기계, 기타 가구 또는 전자제품 등 업종도 다양하다. 공단 배후 지역이라는 평택의 이점 덕분에 많은 난민이 이곳에 정착해 있지만, 대다수가 난민 신청자 신분이라는 점은 이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취업할 수 있는 업종에도 제약이 많아 사실상 단기 노무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평택의 외국인 이주민들을 지원하는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규모가 큰 산업단지가 위치해 있어 인력 수요가 많아 외국인들이 평택을 많이 찾고 있다며 단기 일자리를 원하는 난민 신청자들도 구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아 그 수는 앞으로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 다문화의 도시 안산 단원구 안산은 전국에서 외국인 숫자가 가장 많은 도시다. 그중에서도 단원구에만 3만 6천696명의 외국인이 있다. 국적별로 보면 △한국계 중국(1만 6천943명) △중국(6천225명) △우즈베키스탄(3천895명) △베트남(1천429명) △인도네시아(974명) 등 순이다. 이 밖에도 미국(39명), 일본(108명), 영국(10명)에서 온 외국인들도 살고 있다. 안산은 경기도에서 평택시 다음으로 난민이 많은 곳이다. 현재 1천112명의 난민이 살고 있고, 이 가운데 난민 인정자는 80명, 난민 인정자의 가족은 3명, 그리고 난민 신청자가 1천7명이다. 안산 역시 난민 신청자가 많아 대부분 일용직과 같은 단기 노무에 종사하고 있다. 안산에는 반월시화MTV 국가산업단지가 대규모로 조성돼 있다. 이곳에만 약 1만여 개 이상의 기업이 들어서 있고, 종사자 수는 15만 명을 훌쩍 넘어선다. 특히 안산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이 살고 있는 만큼 이들을 위한 다양한 정책적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앞으로도 많은 난민이 안산에 몰려들 가능성이 있다. 안산시 관계자는 안산 인근에는 산업단지가 위치해있고, 전국에서 외국인 주민 숫자가 많은 만큼 다양한 정책적 지원들도 아끼지 않고 있다며 자연스레 형성된 나라별 커뮤니티도 외국인들을 끌어들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중소 제조업체의 천국 포천 포천에는 1만 1천596명의 등록 외국인이 있다. 이중 베트남 출신이 1천239명으로 가장 많다. 또 △네팔(1천182명) △캄보디아(1천165명) △타이(1천69명) △미얀마(1천27명) 등 동남아 국가 출신 외국인들도 다수 거주 중이다. 이 가운데 난민은 1천105명으로, 전체 외국인의 약 9%를 차지한다. 포천의 난민 역시 대부분 신청자다. 포천도 제조업 비중이 높은 지역 중 하나이기 때문에 난민들, 특히 난민 신청자가 일자리를 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운 곳이다. 하지만, 근무조건이 열악한 곳이 많고, 규모는 대부분 중소기업 수준이며 대체로 노동집약적인 생산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대다수 회사가 외국인 노동 인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실제로 포천에 위치한 한 가구제조 업체는 국내 인력을 구하지 못해 외국인 노동자들의 노동력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포천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는 평안교회 김달성(67) 목사는 이곳 외국인 노동자들은 주로 3D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특히 채소를 재배하는 농장에서 많이 일하고 있다며 그 중에는 난민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신청자들이기 때문에 저임금에 더 어려운 일을 한다. 고용이 불안정하니 임금을 낮게 받거나 떼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국내에 유입되는 난민들의 숫자가 점차 늘어가는 추세를 고려하면 앞으로 포천에도 점점 많은 난민이 자리를 잡을 전망이다. 이미 여러 개의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는데, 식료품, 펄프, 화학, 전기장비, 플라스틱 제품 등을 제조하는 공장들이 들어설 에코그린산업단지와 소흘읍 고모리에 25만 4898㎡ 규모의 복합산업단지가 2023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 제2의 이주민 도시 화성 화성의 외국인 등록 숫자는 평택과 비슷한 수준이다. 현재 3만 6천102명의 외국인이 등록돼 있고, 국적별로는 △한국계 중국(6천307명) △베트남(4천716명) △타이(3천381명) △중국(2천745명) △네팔(2천581명) △캄보디아(2천375명) △필리핀(2천82명) △우즈베키스탄(2천52명) 등 순이다. 이중 난민은 1천37명으로 화성 전체 등록 외국인의 약 2.9%를 차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난민 인정자가 5명, 인도적 체류허가자가 93명이고 나머지 939명이 난민 신청자다. 이 지역 난민들 역시 난민 심사를 받으며 불안한 신분으로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해 있다. 화성 역시 제조업의 비중이 높아 외국인 근로자들은 대부분 내국인이 꺼리는 생산직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 곳에는 총 11개의 산업단지가 자리하고 있고, 면적은 1만 343㎡에 달한다. 업종별로는 제약, 식품, 섬유피혁, 목재제지, 화학, 기계금속, 전기전자, 비금속광물, 기타 등이 있다. 또 화성시 내에서 외국인 주민이 가장 많은 향납읍은 한때 다문화특구 지정이 검토됐을 정도로 다양한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다. 일자리 외에도 자국의 향수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화성을 찾는 외국인들의 수는 점차 늘고 있다. 화성 외국인 복지센터 관계자는 이곳에 거주 중인 외국인 노동자 대다수가 제조업에서 일하고 있다. 일부는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며 난민들의 경우 대부분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여성들은 식당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장영준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난민 취업실태] 3. 재한줌머인연대를 만나다

경기도 김포에는 현재 약 1만 8천 명의 외국인들이 살고 있다. 수도권에서는 안산, 화성, 시흥, 부천, 평택에 이어 6번째로 많고, 전국에서는 8번째로 외국인이 많은 곳이다. 일자리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자리한 학운산업단지가 있고 곳곳에 크고 작은 제조업들이 밀집해 있다. 이 같은 지역적 특성 때문에 김포에는 김포시외국인주민지원센터가 설립돼 운영 중이다. 김포 지역 내 외국인들을 위해 통역, 상담 등의 서비스는 물론, 만남의 장도 제공한다. 기자가 방문했던 지난 9일은 일요일이었음에도 평일처럼 직원들이 출근해 일하고 있었다. 주말밖에 시간을 낼 수 없는 외국인들을 배려한 조치다. 센터를 방문한 외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내부에는 다양한 언어로 응대할 수 있는 직원들이 상주해 있었다. 강의실과 강당, 컴퓨터 교육실, 무료진료소, 다문화 전시관 등 각종 편의시설도 눈길을 끌었다. 이곳에서 난민 출신인 로넬 차크마 나니(49) 씨를 만났다. 김포에는 741명(3월 31일 기준)의 난민(난민 인정자, 인도적 체류허가자, 난민 신청자 등)들이 거주 중이다. 이 가운데 줌머족 출신 난민은 대략 150여 명 정도다. 이들 대부분이 난민으로 인정받아 김포에 터를 잡고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이나니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로넬 씨는 저는 방글라데시 동남부 치타공 산악지대에서 살던 줌머라는 소수민족 출신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 제2의 고향이 된 김포 줌머족은 방글라데시의 선주민으로 전체 인구의 1%밖에 되지 않는 소수민족이다. 1971년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후 본격적으로 줌머족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고 일부는 박해를 피해 태국, 인도 등으로 도망쳐야 했다. 이 중 한국으로 들어온 이들이 현재 김포에 사는 줌머인들이다. 김포시 양촌읍 양곡 줌머 마을을 중심으로 거주하기 시작했고 2002년 재한줌머인연대(Jumma Peoples Network-Korea)라는 단체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로넬 씨 역시 당시 줌머인연대를 함께 설립한 멤버 중 하나다. 그는 1990년대 초반 한국에 왔다가 줌머족 지도부와 방글라데시 정부 간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다시 귀국했다. 하지만, 협정은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2000년대 초 다시 한국행을 결정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부평을 찾았다. 생계를 위해선 일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고 고민 끝에 이미 줌머족들이 살고 있던 김포로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로넬씨와 김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로넬 씨는 처음에는 제조업 공장에서 도금하는 일을 했었다. 그런데 첫 직장은 일주일 만에 그만뒀다. 아무래도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며 김포로 이사를 온 후에는 계속 단순 노동만 했다. 일은 아는 사람을 통해 소개받았다. 그 후에도 여러 회사를 옮겨 다녔다. 그러다 2010년 한국어를 배웠고, 이후 영어학원에서 일 년 정도 일하기도 했다. 이곳 센터에서는 2012년부터 일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국어 공부는 로넬 씨에게 있어서 확실한 전환점이 됐다. 직장을 구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문화, 생활,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고,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2007년부터는 난민들을 위한 통역도 할 수 있었고, 자신과 같은 처지였던 소수자들을 도와줄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귀화를 통해 어엿한 한국인으로 거듭난 로넬 씨는 김포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지금의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당당히 생활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 난민이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다. 100% 자신의 일에 만족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보람을 느끼며 일을 하고 있다면서도 아무래도 외국인이라는 한계가 있다. 고용주가 대부분 한국사람이다 보니 갑질을 하거나 무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물론, 난민들을 이해해주시는 분들도 매우 많다고 지금의 난민들이 처한 현실을 언급했다. 2018년 제주 예맨 난민 사태 이후 대한민국에도 난민 문제가 새로운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하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난민 문제는 다른 나라 얘기다. 이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한국을 찾는 난민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국제사회 곳곳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어 당분간 난민의 숫자는 계속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로넬 씨는 재정착 난민은 법무부나 관련 단체에서 조직적으로 정착 지원을 해주고 있다. 주거 지원도 이뤄진다. 또 각종 사회생활 안내 같은 것들도 지원하고 있다며 그러나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들은 그런 지원 체계가 없다. 그저 난민으로 인정만 해주고 알아서 살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서 인정된 난민들은 일자리나 주거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이 있다. 그냥 알아서 살겠지라는 인식보다 난민을 위한 체계적인 안내 또는 관리 제도가 마련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 재한줌머인연대 사무실을 찾아가다 김포시외국인주민지원센터를 뒤로 하고 향한 곳은 재한줌머인연대 사무실이었다. 양촌읍 양곡리에 소재한 이곳은 겉으로는 평범한 상가건물이었다. 2층에는 김포이주민센터 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 이발소가 있었다. 재한줌머인연대 사무실은 바로 옆 다섯 평 남짓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방글라데시 소수민족들을 표시한 월페이퍼가 한 눈에 들어왔다. 60인치 정도 되는 대형 TV도 놓여 있었다. 사무실 한쪽에는 수많은 책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사무실은 김포에 사는 줌머인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운영하고 있다. 재한줌머인연대는 회장을 중심으로 사무국장, 재무부장 등 분야별 임원들이 활동 중이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 사무실에는 인터뷰를 약속한 라트나 키르티 차크마(42)씨와 사무국장인 니키 차크마 씨도 함께 있었다. 이들은 서로 한국말을 잘한다며 인터뷰를 미루는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진지한 모습으로 줌머인들이 처한 상황과 난민으로서 한국에 사는 어려움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라트나 씨는 재한줌머인연대 회장직을 맡아 줌머인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그의 신분은 난민 인정자가 아닌 난민 신청자다.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지만 생계도 함께 해결해야 하기에 제약이 많다. 난민 신청자는 난민 인정 신청을 한 후 6개월이 지나야 취업 허가를 받을 수 있고 취업이 먼저 확정돼야 허가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지인 소개를 받아 일하는 경우가 많아 합법적인 취업 활동 허가를 받기가 어렵다. 라트나 씨도 틈틈이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상황이다. 천막을 용접하는 일을 하며 일당으로 약 15만 원 정도를 받고 있다. 라트나 씨는 2008년 처음 한국에 왔다. 종교 탄압을 받아 한국에 와 난민을 신청했지만, 첫 번째는 떨어지고 지금 두 번째 신청해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라며 그러다 보니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지금은 용접도 할 줄 알고 운전도 잘해서 주변에서 틈틈이 일자리를 소개해준다. 하지만, 난민 신청자라 외국인 등록증이 없어 정식으로 일자리를 구하는 건 힘든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능숙한 한국어는 대학에서 공부했다. 원래 스님이었던 라트나 씨는 처음 한국에 와 경상북도 영주의 한 절에서 약 2년간 거주했다. 당시 인연을 맺은 한 스님이 동국대학교를 추천해줬고 그곳에서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다. 덕분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지만 난민 신청자라는 신분이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으며 취업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두 번째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라트나 씨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며 한국에 사는 난민들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난민들은 자기 나라에서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어서 다른 나라로 간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종교 문제 때문에 살 수가 없었다. 우리가 난민 신청을 하는 이유는 살아야 해서다. 우리도 사람이니까 살고 싶은 거다. 나 역시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살고 싶다. 그럴 수 없으니까 난민 신청을 하는 거다. 어느새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는데 난민 인정을 못 받아서 힘들긴 하다. 병원비도 많이 나오고. 그래도 재밌게 살고 있다. 장영준기자

[경기도 난민 취업실태] 2. 부평에 터 잡은 미얀마 난민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잔뜩 찌푸렸던 지난 4일 오후 인천 부평역 앞. 평일이라 거리는 한산했지만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외국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작은 백팩을 메고 있던 이들은 한눈에 봐도 외국인 노동자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발걸음을 역전지구대가 위치한 5번 출구 앞으로 옮기자 그곳에는 미얀마 거리로 알려진 부평1동 광장로 4번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골목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화려한 모텔 간판들이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골목 안쪽에서 낯선 문자로 쓰인 간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간판 아래 조그마한 글씨로 이곳이 미얀마 식당임을 알리고 있었다. 식당 외벽에는 미얀마의 민주주의 운동을 응원한다는 내용의 현수막들이 붙어 있었다. 자국민에 대한 폭력진압을 이끄는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군 최고사령관을 규탄하는 포스터도 있었다. 골목 구석구석 자리잡은 미얀마 식당들은 이곳이 대표적인 미얀마 커뮤니티임을 실감하게 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 정책본부 3월 통계월보에 따르면 현재 인천 부평구에는 총 426명의 미얀마인이 거주 중이다. 이 가운데 난민 인정자는 149명이며 이들 대다수가 지난 2015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재정착 난민 수용 시범사업을 통해 국내에 입국했다. 이들은 입국 후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에 6개월 이상 거주하며 한국어, 한국사회 적응, 기초 법질서 교육 등을 받은 뒤 부평으로 이동했다. ■ 난민이 된 물리학도 현재 부평구 십정동에 자리잡은 투안 상(44)씨는 2000년에 처음 한국땅을 밟고 나서 현재까지 가족들과 살고 있다. 그가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는 5년이 걸렸다. 그도 다른 난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정부 지원 없이 오롯이 홀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공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일을 해야 했다. 투안 상 씨는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우리도 살아야 하지 않겠나. 보통 일자리는 친구들 소개로 얻는다. 처음에는 일당을 받으며 일했다. 그러다 일이 없으면 직업소개소를 찾기도 했다며 부평에는 10년 전에 왔다. 처음 일을 했던 곳도 이쪽이어서 오게 됐다. 지금은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계속 살게 됐다고 말했다. 모국인 미얀마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한 엘리트 대학생이었다. 당시 대학생들에게 민주주의 운동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었고, 투안 상 씨 역시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그 일로 학교는 퇴교 조치를 내렸고, 그는 더는 미얀마에 머물 수 없었다. 어렵사리 한국에 왔지만 낯선 땅에서 자신의 전공을 살릴 길은 없었다. 돈을 벌어야 해 공부를 이어갈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수차례 직장을 옮겨다닌 끝에 3년 전부터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강화 플라스틱을 이용해 FRP 물탱크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월급은 300만원 정도이지만 아이 둘을 양육하는 데에는 많이 부족하다. 아내도 돈을 벌고자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대부분의 아르바이트가 풀타임을 요구했고, 파트타임으로 육아를 병행하려던 아내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친구들의 사정도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최저임금만을 받으며 생활해야 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아직 한국어를 하지 못해 취업 자체를 힘들어하는 이들도 많다. 투안 상 씨는 아직도 많은 난민이 공장 생산직이나 허드렛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술이라도 배우고 싶지만 그럴 기회조차 얻기 힘들다며 안타까워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일자리를 알선하는 한 직업소개소 관계자는 최근에는 난민들을 (취업처에) 거의 소개해 준 적이 없다. (취업을) 요청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며 코로나19 이후로는 문의도 없다. 지금까지 난민들이 취업한 곳은 대부분 공장이라고 전했다. ■ 사원을 중심으로 모인 난민들 부평역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불교 사원이 하나 있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카펫이 깔린 넓은 공간이 등장한다. 정면에 드리워진 커튼을 걷어내자 그 안에 화려하게 차려진 제단이 한눈에 들어왔다. 부처님 불상을 중심으로 화려한 꽃 장식이 어우러져 있었고, 한쪽에는 미얀마 스님의 사진도 놓여 있었다. 난생처음 접하는 미얀마 사원 내부의 모습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현재 부평에 7개의 미얀마 사원이 있는데, 이곳도 그 중 하나다. 이 지역의 사원들은 미얀마 난민들이 부평에 머무르는 이유 중 하나다. 우리를 이곳까지 안내한 얀 나이투(51) 씨도 그러한 이유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그는 현재 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회장을 맡아 미얀마 군부 쿠데타 규탄 국내 집회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얀 나이투 씨는 1992년 처음 한국에 왔다. 당시는 한국에서 외국인을 보기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아버지의 친구 아들이 한국에 있어 일자리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 후 같은 미얀마인과 결혼까지 해 완전히 한국에 정착했다. 현재는 목재를 CNC가공하는 일을 하며 월 280~290 정도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 역시 미얀마에서 대학을 다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는 이유로 더 이상 미얀마에 머물 수 없었다. 그렇게 태국을 거쳐 한국까지 오게 됐다.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학업을 모두 마치지 못한 탓에 한국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손을 대야 했다. 부평에 머물고 있는 미얀마인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얀 나이투 씨는 부평에 사는 미얀마인들은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허드렛일들이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식당을 운영하기도 한다며 예전에는 난민이라고 하면 안 좋게 봤다. 그냥 돈 벌러 온 외국인으로 인식했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전했다. ■ 난민이라고 차별하지 말아주세요 부평역에서 약 30분가량 차를 타고 가면 남동공단이라 불리는 남동산업단지가 나온다. 인천 남동구 남촌동, 논현동, 고잔동을 중심으로 약 957만 4㎡에 걸쳐 조성된 이 단지에는 크고 작은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식품섬유목재제지석유화학 등 종류도 다양하다. 그간 인력 수요가 풍부하다는 점 때문에 난민뿐 아니라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부평을 찾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조금 변했다. 예전과 비교하면 일자리가 줄었다. 난민들은 안정적이고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부평에서 인근 시화 또는 반월공단으로 옮겨가고 있다. 아직 부평에도 일자리가 있지만 대부분 한국인이 꺼리는 이른바 3D 업종이다. 그럼에도 부평은 여전히 미얀마인들에게 고향을 느끼게 해주는 고마운 곳이다. 미얀마 글씨와 음식들이 그들을 반기고 있고 종교활동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얀 나이툰 씨와의 인터뷰에서 통역을 맡았던 원라이 씨는 정치적 난민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식당, 식료품 가게, 사원들이 있어서 거주하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미얀마 난민들의 숫자가 많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투안 상 씨도, 얀 나이투 씨도, 원라이 씨도 한국에 바라는 건 하나였다. 난민이라고 차별하지 말아달라는 것. 어쩔 수 없이 난민이 됐고, 어쩌다 한국까지 왔지만 이제는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살아가는 자신들을 동등하게 대해달라는 것이었다. 한국에 바라는 것이 있느냐는 물음에 얀 나이투 씨가 답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난민이었어요. 또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 하셨던 분들도 과거 유럽이나 터키, 미국 등에 많이 있었는데 그들 역시 난민이었습니다. 저희도 난민으로서 한국에 정착해 고향을 그리워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같은 인간입니다. 차별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장영준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난민 취업실태] 1. 경기·인천에 터잡은 1만3천여 난민들

어렵게 고국을 떠나 한국 땅을 밟은 난민들은 당장 생존의 문제에 직면한다. 의식주를 비롯한 교육, 의료, 취업 문제는 난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내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들이지만, 해결이 쉽지 않다. 그 중에서도 취업은 난민들이 일상을 지속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너무나도 높다. 뿌리깊은 인종차별과 신분상의 불안한 지위는 난민들의 취업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더 이상 난민 문제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앞으로 한국을 찾는 그들의 발길은 계속될 것이다. 난민 취업 실태를 통해 이들이 처한 현실을 짚어보고, 과연 우리에게 어떤 과제가 주어질 지 8차례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법무부가 지난 20일 발표한 3월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에 따르면 전쟁이나 박해의 위험을 피해 한국에 온 난민신청자는 누적 7만1천699명이다. 이 가운데 심사가 완료된 건 3만7천959명, 그리고 최종 난민으로 인정된 경우는 1천100명에 그친다. 인정률은 2.9%다. 난민 인정을 받은 경우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취업 과정이 한결 수월해지고, 장기적인 계획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지 못한 경우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인도적 체류자 혹은 난민 신청자라는 불안한 지위를 갖고 살아야 한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취업도 매우 어렵다. 난민 신청자의 경우, 난민인정 신청을 한 후 6개월이 경과해야 취업활동을 할 수 있다. 또 난민인정을 받지 못한 외국인 중 인도적 체류를 허가받은 이들은 체류자격 외 활동 허가를 받아야 취업 활동이 가능하다. 일자리가 절실한 난민들은 자연스레 도심 지역으로 몰려든다. 그 중에서도 서울, 경기, 인천 등은 일자리가 풍부해 난민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각종 산업단지가 위치해 있고, 인력을 필요로 하는 사업자도 다수다. 일부 지자체는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정책들을 마련해 놓고 있다. ■ 난민 체류 지역 1위는 경기도 법무부 통계상 난민 인정자의 가족(F-1-16), 난민 인정자(F-2-04), 난민 신청자(G-1-05), 인도적 체류허가자(G-1-06) 등 체류자격을 따지지 않고 모두 난민으로 본다면 대한민국에 체류 중인 난민은 약 2만 9천여명이다. 이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1만 1천여 난민들이 경기도에 터를 잡고 있다. 경기도 난민의 숫자는 타 시도와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많다. 2위인 서울(4천182명)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 차이가 나고, 인천(2천144명)과의 격차는 더 벌어진다. 1천명대인 충청도와 경상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들은 모두 세자릿수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경기도에 난민들이 많은 이유는 당연하게도 일자리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취업이 쉬운 크고 작은 공장들이 밀집해 있고, 외국인 커뮤니티도 활성화 돼 있다. 타 지역과 비교해 주거비용이 저렴한 것도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그렇다고 난민들이 무작정 경기도만 선호하는 건 아니다. 사실 어느 지역을 특별히 좋아하고 살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일할 곳이 있느냐에 따라 거주지가 달라지는 것 뿐이다. 송인선 경기글로벌센터 대표는 수도권이라도 일자리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어디든 월급을 주는 곳이라면 난민들은 간다며 다만 고용주들이 난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고 잘못 고용했다가 불이익을 당할까봐 채용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말했다. ■ 일자리 풍부한 평택 외국인 살기 좋은 안산 경기도 내에서 난민 수가 가장 많은 곳은 평택시(1천144명)이다. 평택에는 K-55 오산미군기지와 K-6 캠프험프리수비대가 주둔하고 있고, 베트남필리핀미국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거주하며 각종 커뮤니티가 조성돼 있다. 특히 난민들에게는 풍부한 일자리가 매력적인 도시다. 평택에는 다양한 산업단지들이 조성돼 있고, 2천개가 넘는 공장들이 즐비하다. 게다가 농가 인력 수요도 꾸준하다. 저렴한 인건비를 원하는 사업자와 일자리를 원하는 이들 사이 수요가 맞아떨어진 덕분에 난민 숫자도 늘고 있다. 안산시도 마찬가지다. 현재 안산에는 1천112명의 난민이 살고 있다. 인근 시화 및 반월국가산업단지 등에 일자리가 많다. 안산이 평택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는 작은 지구촌이라고 불릴만큼 전국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안산에는 다른 지자체에는 없는 다양한 다문화 정책들이 추진되고 있어 선호하는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1천105명의 난민이 살고 있는 포천시는 영세제조업 공장이 약 4천여개에 달한다. 이곳은 외국인 근로자의 비율이 높아 실상 그들이 없다면 공장 가동조차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농가 인력 수요도 꾸준해 일자리가 급한 난민들이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다. 화성시는 최근 안산에 이어 제 2의 이주민 도시라고 불릴만큼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밀집하고 있다. 현재 화성에는 1천37명의 난민이 거주 중인데, 이곳 역시 일자리가 매우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56명의 난민이 사는 인천 연수구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외국인 증가율이 급격하게 오르는 지역 중 하나다. 이곳에는 시리아, 예맨, 키르시스스탄, 카자흐스탄 출신 난민들이 살고 있다. 일자리도 일자리지만 싼 월셋집이 많다는 점이 난민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난민들이 이처럼 수도권 각지로 흩어져 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실상은 매우 열악하다. 언어라는 가장 큰 장벽이 난민들의 취업을 가로막고 있고, 난민인정자가 아니라면 장기 근속은 꿈도 꾸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국 특유의 문화적 특성들도 난민들이 한 직장에서의 장기 근속을 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난민들은 단순 노무직을 구할 수밖에 없다. 세탁업, 페인트 작업, 이삿집 센터 업무 등 한국 사람들은 꺼리는 이른바 3D 업종만이 난민들의 일자리로 남아 있다. 포천이나 의정부에서는 영세 개인사업자의 사업장 혹은 각종 농장 등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도 한다. ■ 거주지 결정 결국은 일자리 난민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어디에 사느냐보다 일을 할 수 있느냐이다. 취업만 된다면 전국 어디에 살아도 상관 없다는 게 난민들의 입장이다. 난민 관련 시민단체 관계자들도 난민들은 일자리만 있으면 어디든 간다고 입을 모은다. 어느 나라에서건 취업은 매우 민감한 문제다. 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취업을 하지 못해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난민 취업 문제를 해결하자고 목소리를 높인다면 과연 누가 귀 기울여 들어줄까. 오히려 반대 여론만 키우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난민 문제는 결코 좌시해서는 안된다. 코로나19 탓에 국가간 이동이 어려워 난민 유입 숫자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고 그만큼 난민 숫자도 늘고 있다. 언제든 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난민들이 한국에 온 이유는 굶지 않고 보다 안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취업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난민들의 성공적인 정착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난민들에 대한 인식 변화가 요구되기도 한다. 국제난민지원센터 피난처의 이진하 간사는 일반적인 외국인 노동자와 달리 난민들은 그 수가 적고, 여전히 그들을 꺼리는 분위기가 있다며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난민들이 일자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장영준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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