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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대를 둘러싼 성은 내탁일까 협축일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수원화성 시설물 중 최고 사령관이 머물며 전투를 지휘하는 곳이 서장대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다. 팔달산 능선에서 가장 북쪽이다. 의궤에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 자리에서 변화를 다 통제할 수 있다”며 팔달산 정상부의 전략적 입지를 매우 좋게 평가하고 있다. 이런 입지 때문에 팔달산정에는 최고 지휘부인 서장대, 장대를 보좌하는 서노대, 그리고 보조 공간인 후당이 계획된다. 이런 시설물을 배치하고 사용하려면 평평하고 너른 터가 필요했다. 하지만 당시 팔달산정은 온통 암반으로 들쑥날쑥하고 삼면은 매우 심한 급경사지였다. 급경사 입지와 함께 필자가 눈여겨본 것은 팔달산정의 성이다. 서장대를 둘러싼 성은 화성에서도 특이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성 안팎 모두 돌로 쌓았고 원성에 무수히 많은 큰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안팎을 모두 돌로 성을 쌓았다면 협축이다. 성을 쌓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낙안읍성이나 만리장성처럼 성안 쪽과 바깥쪽 모두 돌로 성벽을 쌓는 방식을 ‘협축’이라 칭한다. 반면 화성의 경우처럼 성 바깥쪽 면은 돌로 쌓고 성안은 자연의 산이나 인공적으로 흙을 쌓아 붙이는 방식을 ‘내탁’이라 한다. 협축과 내탁은 성을 축성 방식으로 분류하는 용어이고 개념이다. 수원 화성 성터를 보고 정조는 ‘천작내탁 불용협축’이라 했다. ‘하늘이 내려준 내탁이고, 협축은 허용하지 않는다’란 의미다. 이래서 화성은 내탁 방식의 성으로 지금까지 알려져 왔다. 그런데 화성에도 협축은 있다. 곡성 중 문 네 곳, 암문 다섯 곳, 수문 두 곳이 협축 형식의 성이다. 성 안팎을 소통하는 시설물이라 성안 쪽에 흙더미를 쌓을 수 없었기 때문에 협축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전체 성의 3%에 해당하지만 협축은 협축이다. 만일 서장대를 둘러싼 원성이 협축으로 밝혀진다면 수원화성은 곡성에도 원성에도 협축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즉, ‘화성은 모두 내탁이다’란 정의는 완전히 깨진다. 팔달산정의 성은 내탁일까, 협축일까. 협축이라 볼 수 있는 안팎으로 돌로 쌓은 부분을 살펴보자. 범위는 서암문부터 북쪽으로 정상이 끝나는 곳까지 44보로 약 52m다. 두께는 보이는 윗면 두께가 3.3m다. 여장 두께 90cm와 여장에 붙은 통로 폭 2.4m를 합한 수치다. 실제 아랫면은 이보다 더 두꺼울 것이다. 높이는 16척으로 약 5m다. 밖에서 보이는 높이다. 성안 쪽은 높이 전체가 보이지 않고 높이 1.2m 전후만 노출된 상태다. 나머지 아랫부분은 흙으로 메워진 상태다. 특이한 점은 노출된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는 점이다. 구멍은 35m 정도 구간에 아래위로 냈다. 흙 위 노출된 부분이 구멍 바로 아래까지인 것으로 보면 병사가 구멍을 활용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 이런 특이한 형식으로 성을 쌓았을까. 그 이유를 찾아보자. 이유는 복합적이다. 시공성, 안전성, 용도성으로 나눠 살펴보자. 첫째, 입지에 따른 시공성과 안전 때문이다. 서장대 앞쪽은 가파른 경사면이었다. 이런 지형에 너른 터를 만들기 위해 돌과 모래주머니를 쌓은 후 말뚝으로 지탱하고 그 안에 흙을 붙여 평평한 터를 만들었다. 흙을 돋운 높이가 10m이고 공사 범위가 사방 80m다. 면적으로 6천600㎡(2천평)나 되는 화성 최대 난공사였다. 성을 쌓을 팔달산정 서쪽 지형도 마찬가지였다. 바위들로 울퉁불퉁하고 급경사지다. 또 서장대 공사 일정을 보면 이곳 성 공사는 여름 장마철이다. 돌로 성 밖을 쌓고 성안에 흙을 붙이는 내탁 시공은 불가능했다. 흙을 메우고 비가 오면 흙은 모두 돌 사이로 빠져나갔다. 높게 쌓은 성은 자빠지는 위험이 컸다. 더구나 팔달산 능선에선 모래와 흙을 구하기 어려워 산 아래에서 인력으로 산 위까지 운반해야 했다. 이래서 성 안팎을 돌로 쌓은 것이다. 자재인 돌은 팔달산 능선에 무진장이었고 돌은 비가 와도 공사가 가능했다. 무엇보다 시공에서, 구조에서 안전했다. 따라서 시공 안전과 구조의 안전을 위해 돌로 안팎으로 성을 쌓은 것이다. 협축 방식이다. 둘째, 팔달산정 원성에 구멍을 뚫어야 하기 때문이다. 팔달산정 원성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성안에는 노출된 1.2m 부분에 위아래로 사각형 구명이 있다. 성 밖에 나가 살펴보면 이 구멍은 성 중간 높이 아래로 관통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벽을 관통하는 구멍을 내려면 내탁으로는 불가능하다. 흙으로 구멍을 낼 수 없다. 구멍 난 흙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성에 구멍을 내려면 성 두께 전체를 돌로 쌓아야 가능하다. 필요한 구멍을 내기 위해 성 안팎 모두를 돌로 쌓았다. 협축 방식이다. 문헌에 협축을 ‘성 내벽의 상당한 부분이 지상에 노출된 경우’로 정의한다. 이곳 성 내벽의 노출 정도가 상당한 부분이라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정의는 잘못됐다. 내탁과 협축은 축성 방식의 분류다. 축성이란 시공 방법을 말하는 것인데 겉에 보이는 외형으로 정의하면 안 된다. 서장대를 둘러싼 원성은 시공 방법이 분명 협축이다. 서장대를 둘러싼 성이 특이한 형태를 한 이유를 시공성과 구조성으로 봤다. 이는 이유 중 하나일 뿐이다. 사실은 깊은 전략적 의도가 숨겨져 있다. 다음 편에 구멍에 숨겨진 비밀을 소개할 예정이다. 한 가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지형에 따라 다양한 시도를 한 팔달산정의 협축에서 정조의 실험정신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화성은 모두 내탁(內托)일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성을 분류하는 방법에는 여러 분류법이 있다. 매우 복잡하다. 하지만 성을 쌓는 방식, 즉 축성 방식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순천 낙안읍성은 성의 안쪽과 바깥쪽 모두 돌로 성을 쌓았다. 성에 올라 안팎을 보면 양쪽 모두 돌로 쌓은 성이 보인다. 만리장성도 마찬가지다. 이런 방식을 ‘협축(夾築)’이라 칭한다. 다른 방식은 수원화성의 경우로 밖에는 돌로 성벽을 쌓았고 안으로는 자연 그대로 산에 의지하거나 인공으로 산처럼 흙을 쌓아 버텨주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내탁(內托)’이라 한다. 협축과 내탁은 성을 구분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성의 분류 방법 중 축성 방식의 종류인 협축과 내탁은 꼭 알아둬야 한다. 의궤에 “우리나라의 많은 성터는 산등성이와 산기슭을 타고 쌓고 있다. 이런 까닭에 자연지형을 이용해 쌓아 비용이 들지 않고서도 자연히 성이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굳이 안팎으로 쌓을 필요가 없다. 이렇게 성 쌓는 제도가 다른 것은 지세에 따라서 이용하는 효과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며 화성은 내탁임을 밝히고 있다. 정조도 ‘천작내탁 불용협축’이라고 했다. 수원화성은 하늘이 만들어준 내탁이고, 협축은 허용하지 않는다란 의미다. 이렇듯 수원화성은 모두 내탁 형식의 성이다. 과연 화성은 모두 내탁 형식의 성일까. 산상동성과 산상서성은 산상성으로 성의 안쪽이 모두 산이므로 쉽게 내탁 방식임을 알 수 있다. 평지성인 평지북성도 안쪽에 흙을 쌓아 붙여 놓았으므로 내탁 방식이다. 기록으로도, 현재 상태로도 화성은 모두 내탁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런데 협축 형식이라고 의심이 드는 곳도 있다. 하나는 용도(甬道)이고 다른 하나는 남암문이다. 의심하는 이유는 “용도를 보면 협축인 만리장성에 올랐을 때 보는 모습과 같다. 가운데에 길이 있고, 양쪽이 성이다. 따라서 안팎을 모두 돌로 쌓은 협축”이라는 의견이다. 그리고 남암문에 대해서는 “남암문에 대한 의궤 설명에 내외 협축이란 기록이 있다. 따라서 남암문은 협축”이라는 의견이다. 용도와 남암문은 협축일까, 내탁일까. 먼저 용도에 대해 살펴보자. 결론을 먼저 말하면 용도는 성이 아니므로 협축이냐 내탁이냐를 논의할 대상이 아니다. 용도가 성이 아니라는 근거는 다음 세 가지다. 첫째, 화성의 산상성은 높이가 16척이어야 하는데 용도는 여장만 있다. 의궤에도 “산 위의 3면에 돌로 성가퀴를 쌓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여장만 쌓았음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 용도는 성이 아니라는 증거다. 용도 아래에 있는 두 줄 정도의 돌은 여장의 기초이지 성이 아니다. 둘째, 성 길이, 혹은 여장 길이에 대한 의궤 기록을 보면 성의 길이 얼마, 용도 길이 얼마 식으로 용도를 성과 분리해 기록한다. 용도를 성과 같이 취급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셋째, 용도라는 명칭 자체가 길임을 말해준다. ‘솟을 용’, ‘길 도’다. ‘주변보다 약간 솟아오르게 만든 길’이라는 의미다. 이처럼 명칭, 의궤 내용, 의궤 기록, 실제 구조 등이 용도는 성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용도를 협축이냐 내탁이냐 논의 자체가 불필요하다. 다음으로 남암문에 대해 살펴보자. 화성에 암문은 다섯 곳이 있다.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서남암문, 남암문이다. 모두 곡성에 해당한다. 이 중 내외 협축이란 기록이 있는 암문은 남암문이다. 그런데 남암문은 복원되지 않은 시설물이라 실물을 볼 수 없다. 의궤에 기록된 남암문 그림을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다. 암문은 평시에는 하층 백성의 통로이고 전시에는 숨겨진 비상통로다. 통로이므로 암문은 지면 바닥에서부터 문을 설치한다. 성 안팎을 사람, 가축, 손수레, 물품 등이 드나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통로라서 성안 쪽에 내탁, 즉 흙더미를 쌓을 수 없었다. 흙더미를 쌓으면 그 길이만큼 터널을 만들어 줘야 한다. 통로이기 때문이다. 터널은 당시로선 공사도 힘들고, 만들어도 어두워 통로로 사용하기에 불편하다. 이런 이유로 암문의 성안 쪽에는 내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히 암문 안쪽은 돌로 성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의궤 남암문도를 봐도 암문의 성안 쪽에 내탁이 없음은 명확하다. 암문 안팎을 돌로 쌓았으니 남암문은 협축이라는 의견이 맞는 셈이다. 문이란 특성 때문에 흙을 쌓을 수 없었다. 애초부터 협축 형식의 성을 쌓으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도를 떠나 협축은 협축이다. 오늘 남암문을 따져보며 화성에도 협축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화성은 모두 내탁 형식으로 쌓았다는 지금까지의 상식이 깨진 것이다. 문은 문이지 성이 아니지 않으냐는 이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암문은 어디까지나 곡성이다. 화성의 성은 원성과 곡성으로 구성되고 그 합계가 4천600보다. 암문은 성이다. 남암문 외에 나머지 암문도 협축일까. 당연히 나머지 암문 모두가 협축이다. 그뿐만 아니라 문 네 곳, 수문 두 곳도 협축이다. 협축에 해당하는 성의 합계는 문 네 곳이 82보 4척, 암문 다섯 곳이 7보5척, 수문 두 곳이 50보로 합계는 140보3척이다. 화성 전체 길이 4천600보의 3%에 해당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화성은 전체가 내탁 형식이 아니다’, ‘화성에서 문, 암문, 수문은 협축 형식이다’, ‘화성에서 협축 형식의 성 길이는 화성 전체의 3%다’. 화성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내탁으로 계획해 공사 기간과 공사비를 대폭 절약했다. ‘협축 찾기’와 내탁을 통해 정조의 축성 의도를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정약용은 설계 전 현지 조사를 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정조는 화성 축성 2년여 전 홍문관 수찬으로 있던 정약용에게 화성 성제를 연구해 보고하라 지시한다. 이것이 화성 출발점이다. 1년의 연구 후 ‘성설’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흔히 말하는 정약용의 화성 설계다. 설계가 아니고 기본계획이다. 이때 정약용은 화성 규모를 3천600보로 제안한다. 그러나 실제 4천600보로 확장돼 준공된다. 지금의 화성이다. 언제 어떻게 변경됐을까. 무슨 이유로 확장됐을까. 사실을 알아보자. 먼저 ‘언제’와 ‘어떻게’를 살펴보자. 시기는 성역 착수 첫해 입표정기 때 변경된다. 입표정기란 행사를 통해 변경한다. 입표정기란 계획된 3천600보만큼 깃대를 꽂아 놓고 이를 보고 성터를 확정하는 이벤트를 말한다. ‘표시(표)를 세워(입) 터(기)를 정(정)한다’는 한자 말이다. 1794년 1월15일 입표정기 때 정조는 팔달산 정상부터 수원을 돌며 성터를 확정한다. ‘왜 변경됐을까’다. 정조는 입표정기 때 정약용의 최초 계획인 3천600보에 꽂힌 깃대를 보고 몇 가지를 지적한다. 지적대로 변경됐다. 이 지적에서 그 속에 담긴 정조의 뜻을 살펴보자. 정조의 말이 변경 이유다. 첫째, “깃대가 북쪽 마을을 지나가니 인가가 많이 훼철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깃대가 북리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많은 민가가 철거되면 철거, 이주, 신축 등 공사비와 공사 기간이 많이 소요될 것이다. 지적에 따라 성터를 북쪽으로 옮겼다. 공사비, 공기 절감은 외적으로 나타난 이유이고 실제는 정조의 백성 사랑 때문이었다. 정조는 공동체로 살아가던 한 마을 백성을 갈라 놓고 싶지 않았다. 더한 이유는 따로 있다. 헤어지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는데 한 마을 백성이 성안 마을과 성 밖 마을로 나뉘는 백성의 마음이 더 아팠다. 성안에 사는 것과 성 밖에 사는 것은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정조의 깊은 마음이다. 둘째, “깃대 세운 것을 가늠해보니 성 밖으로 나갈 인가가 꽤 많을 듯하다”고 지적한다. 왜 성 밖으로 나갈 백성을 걱정했을까. 정조는 백성과 함께하는 수원화성을 원했다. ‘관청의 성’에서 ‘백성의 성’으로의 전환이다. 이전의 성은 임금과 관리가 사용하는 면적이 대부분이었으나 수원화성은 민가가 차지하는 면적이 대부분이다. 공사비가 늘고 공사 기간이 길어져도 가능한 한 많은 민가를 성안으로 끌어들이라는 말이다. 셋째와 넷째는 “깃대가 행궁과 너무 가까워 마치 성이 행궁의 담장처럼 보인다”와 “성터의 남북 간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지적이다. 이 지적이 행궁만을 생각했다고 보면 오해다. 실상은 지속가능한 미래 수원을 염두에 둔 말이다. 이 지적으로 화성 경계를 북쪽으로 넓혀 수원화성의 면적을 2배 확장했다. 정조는 수원을 지속가능한 군사, 행정, 상업, 공업, 농업 도시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미래 수원부’에 대한 원대한 꿈이 담겼다. 230년이 지난 지금 수원은 정조의 꿈대로 실현됐다. 육군 3사령부, 해병대 사령부, 해군 2함대 사령부 등 군사 거점이 됐다. 경기도청을 품은 특례시가 됐다. 삼성, SK그룹의 모태가 됐다. 삼성 반도체, SK 반도체 클러스터가 모여 있다. 수원농고, 서울대 농대, 농촌진흥청은 한국 농업을 세계 최고로 올려놓았다. 정조의 꿈은 현실이 됐다. 하지만 정조의 지적을 보고 정조와 정약용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정약용은 기본계획을 작성하기 전 현장조사를 했을까, 안 했을까. 정약용의 계획에 대한 정조의 지적을 보면 화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아예 사전 현장답사를 하지 않았다. 근거를 살펴보자. 정약용은 성설에 ‘일찍이 수원부에 있는 개천가를 본 적이 있는데’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본 적이 있는데’는 원문에는 ‘상견(嘗見)’으로 돼 있다. 즉, ‘일찍이 본 적이 있다’는 표현은 이번에 간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에 간 적이 있다는 의미다. 기본계획 작성 이전에 유배나 외직으로 갈 때 수원을 지나며 봤다는 말이다. 그러면 정조는 정약용에게 왜 사전 답사를 지시하지 않았을까. 한양과 수원은 매우 가까운 거리인데 이해가 안 간다. 그 이유는 기본계획의 정체성과 맞물려 있다. 정조의 질문은 현지 조사까지 할 필요가 없는 수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기본계획인 성설의 정체성은 사업 초기 단계의 기본계획 규모 수치다. 한 예로 “연 1천만t을 생산할 수 있는 비료공장을 짓는 데 땅이 얼마나 필요합니까”라는 건축주의 물음과 같은 개념이다. 이는 사업 초기 단계에 대규모 사업의 대강을 파악하기 위한 규모다. “행궁과 민가 1만호를 품을 수 있는 성의 규모는 얼마면 되겠냐”라는 건축주 정조의 물음에 다산은 “성 둘레가 3천600보라야 계획한 바에 들어맞습니다”라고 답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본계획 3천600보 규모’는 실제와 차이가 커도 큰 문제로 볼 수 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다산의 기본계획은 정조의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낸 것으로 봐야 한다. 다만 차이가 생긴 것은 정조가 마음속에 품은 ‘웅대한 수원화성에 대한 꿈’까지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속 웅대한 화성은 바로 정조의 4천600보 화성이었다. 오늘은 성설이나 어제성화주략의 규모 계획에 대한 정체성을 살펴봤다. 정조가 실현한 백성 사랑, 미래 확장은 지속가능이고 공사비 절감과 공기 단축은 건설경영이었음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남수문 남쪽 성은 왜 이 모양일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은 1970년대 후반 대대적 복원공사를 거쳐 성역 당시의 전모를 볼 수 있는 성이 됐다. 복원되지 않은 구간은 남은구에서 남수문까지 평지남성 구간이다. 복원될 시설물은 남은구, 남서적대, 남동적대, 남암문, 남공심돈 등 다섯 곳이다. 현재 수원특례시에서 보상을 진행하고 있다. 팔달문에서 남수문까지 구간에 대한 복원에 기대가 크고 복원을 끝내면 화성은 지금보다 수십배의 가치가 있는 곳이 될 것이다. 가치가 높은 만큼 복원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특히 두 가지 점에 유의해 복원하기 바란다. 하나는 남서적대, 남동적대, 남암문, 남공심돈 시설물은 각각의 높이 기준을(기준 레벨) 원형대로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유는 높이 자체가 그 시설물의 목적과 기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높이가 맞지 않으면 시설물 개념이 손상된다. 원형보다 더 높거나 더 낮게 복원되면 해당 공간의 개념과 전략적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의미다. 원형이 잘 보존된 팔달문을 기준으로 각 시설물의 기준 레벨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하나는 남공심돈에서 남수문까지 성벽 구간은 성의 노선(루트)을 원형대로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구간의 모습은 화성 전체에서 매우 특이하다. 남공심돈에서 90도로 꺾이고 짧은 구간임에도 여러 번 굴절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유구가 잘 남아 있기에 문제는 안 생길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원형과 조금이라도 다른 노선으로 복원되면 이곳 성의 전략적 가치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남공심돈에서 남수문 사이의 성은 왜 이런 모양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수문 방어 때문’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성의 노선은 성을 쌓을 터의 지형과 양쪽 시설물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남공심돈과 남수문이 왜 그곳에 있어야 했는가를 따져보면 이곳 성 모양에 대한 궁금증이 밝혀질 것이다. 남수문 위치에 대해 살펴보자. 수문이기 때문에 당연히 수원천 위에 설치돼야 한다. 북수문인 화홍문 아래로 수원천 전체를 보면 구천까지 주변 모두가 평지다. 단 한 곳, 현재 남수문 동쪽에만 산이 있다. 일자사(一字砂)가 시작되는 곳이다. 일자사란 동남각루부터 창룡문까지 일직선으로 뻗은 산을 말한다. 남수문과 일자사 사이 지형을 의궤에 “수문의 동쪽으로부터 다시 산상의 터로 접어드는데 그 형세가 자못 험난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남수문 옆으로 산이 시작됨을 말해준다. 수문 위치는 옆에 이런 높은 지형을 꼭 끼고 있어야 한다. 방어가 매우 취약한 수문을 방어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방어에는 평지를 내려다보는 인접한 산이 최고다. 이런 이유로 산상동성 바로 아래에 남수문 터를 잡은 것이다. 최적의 위치다. 다음으로 남공심돈 위치에 대해 살펴보자. 팔달문과 남수문 사이에 남공심돈을 배치했다. 남공심돈은 팔달문 방어를 위한 것일까? 아니다. 남공심돈을 남수문 쪽으로 치우쳐 배치한 것이 그 이유다. 팔달문에는 이미 문루, 옹성, 그리고 좌우에 적대를 둬 공심돈까지는 필요 없다. 따라서 남수문 쪽으로 남공심돈을 배치해 남수문 방어를 맡긴 것이다. 평지를 고려해 시설물 중 가장 높은 공심돈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왜 남수문 바로 옆에 설치하지 않고 앞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했을까? 남수문 앞쪽은 평지라서 특별한 방어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방법은 성의 길이를 전방으로 길게 빼는 설계다. 마치 남수문 앞에 ‘악마의 목구멍’을 설치해 놓은 형상이다. 어떤 효과가 있을까? 효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적이 남수문으로 진입할 때 진입 거리를 길게 만들어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진입한 적군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적의 진입 루트는 성과 수원천 사이의 비좁은 통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지형으로 진입한다는 것은 적으로서는 두려울 수밖에 없다. 사지로 들어가는 형국이다. 진입할 엄두를 내지 않을 것이다. 정리하면 동쪽에서는 고저 차를 활용해 산상에서 적을 공격하고 서쪽에서는 긴 거리감과 측면 방향성을 이용해 적의 진입을 저지하고, 적의 측면 공격에 유리한 전략적 배치다. 과연 사실일까? 검증도 가능하다. 북수문인 화홍문과 비교해 보면 된다. 북수문은 수원천 북쪽에서 유일한 산상 아래에 배치했다. 바로 용두 아래다. 용두는 용연 위에 우뚝 솟은 바위산으로 방화수류정 터를 말한다. 북수문은 남수문과, 방화수류정은 동남각루와, 높은 용두는 높은 일자사와 짝을 이룬 듯 비교가 된다. 북수문 서쪽은 평지다. 서쪽 원성은 앞으로 길게 빼서 그 끝에 북동포루를 설치했다. 남수문 서쪽도 평지다. 앞으로 길게 빼서 남공심돈을 배치했다. 북수문과 남수문, 앞으로 길게 뺀 원성, 북동포루와 남공심돈은 판박이인 듯 비교가 된다. 앞으로 뺀 거리가 남수문이 80m, 북수문이 110m다. 남수문에서 남공심돈으로 벌어진 각도는 25도, 북수문과 북동포루의 전개 각도는 37도다. 모두 100m 전후, 40도 미만이다. 북수문이 방위각이 더 넓고 전방으로 더 멀리 나간 이유는 북수문 북동쪽에 큰 연못 용연 때문이다. 연못은 적의 침입 루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북수문도, 남수문도 동쪽에는 높은 산에 각루를 설치했고 서쪽은 모두 앞으로 성을 길게 빼 대포 진지 포루와 공심돈을 설치했다. 긴 진입 거리와 측면 공격으로 방어 효과를 극대화했다. 수문 방어전략이 한낱 주장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남수문과 남공심돈 사이 특이한 성 모양을 살펴보며 정조의 ‘수문 사수전략’이 숨겨져 있음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성 높이는 어디까지를 말할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은 성과 시설물로 구성된다. 시설물은 19개 유형에 60개 시설물이고 성은 원성과 곡성으로 나뉘고 있다. 의궤에 화성의 전모를 여섯 가지 특징으로 나눠 언급하고 있다. 첫째, 전체 형국은 만년의 금성탕지다. 둘째, 산이 많아 안팎으로 성을 쌓는 협축으로 하지 않고 내탁으로 했다. 셋째, 모두 돌로 쌓았다. 넷째, 성 밖에 자연 도랑이 있어 호참을 설치하지 않아도 저절로 견고한 성 구실을 할 수 있다. 다섯째, 성을 쌓는 제도는 허리가 약간 잘록한 홀(笏) 모양으로 했다. 끝으로 성의 여러 규격을 언급하고 있다. “높이는 2장, 두께는 아래는 5장, 위는 3장, 전체 둘레 길이는 2만7천600척이므로 4천600보가 된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성 두께는 성석과 내탁을 합친 두께이고 성의 총 길이는 원성과 곡성을 합한 길이 임을 밝히고 있다. 성 길이는 옹성과 용도 길이는 제외한 길이이다. 의궤에 옹성과 용도를 성과 분리해 별도로 보고 있다. 그런데 성 높이 기준에 대해 상세한 설명이 없다. 과연 성 높이는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말할까? 특히 높이에 미석이 포함될까, 아닐까? 성을 성 밖에서 보면 아래부터 성석, 미석, 여장이 보인다. 성의 기초는 땅속 부분이라 보이지 않다. 결론을 말하면 ‘성 높이는 지면부터 성 돌이 끝나는 지점까지’가 답이다. 따라서 미석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유를 찾아보자. 미석이 성 높이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몇몇 기록이 있다. 의궤도설 여첩 편을 보자. 첫째, 미석을 설명하며 “체성 위에 미석을 물렸는데 마치 처마 모양처럼 됐다”라는 기록이 있다. 원본에서 미석의 위치를 ‘체성 위에’라 했다. 이 말은 ‘체성은 미석 아래까지’라는 의미다. 체성과 미석을 구별한 근거로 볼 수 있다. 둘째, 여장을 설명하며 “미석 위에 장대를 설치하고 장석을 붙였다”고 기록했다. ‘장대(墻臺)를 설치한 지점이 미석 위’라는 말은 ‘여장이 미석 위부터’ 시작됨을 말하는 것이다. 장대란 여장 돌 쌓기의 밑바탕 긴 돌을 말하고 장석은 여장을 쌓는 돌을 말한다. 그렇다면 ‘체성’이 ‘성’과 같은 말이냐를 확인하면 된다. 화성성역의궤 건축용어집에서 체성에 대해 “성벽의 몸체 부분으로 성곽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구성 요소”라고 했다. 여기서 성벽의 몸체는 바로 ‘성신(城身)’이다. 또 화성의 성 모양에 대해 “화성의 성신 모양은 규형”라는 기록이 있다. 규(圭)형을 형성하는 부분이 성신이고, 지면에서부터 미석 밑까지를 말하는 것이므로 성신은 성을 의미한다. 땅속 성터 기초는 ‘성근(城根)’, 즉 성의 뿌리란 용어를 사용하므로 성신과 확실히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땅속에 있는 성의 기초 부분은 성 높이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따라서 ‘성 높이 기준은 지표면에서부터 미석 아래까지’로 정의할 수 있다. 땅속에 있는 기초 두께와 미석 두께는 성 높이에 포함되지 않는다. 정조는 화성 성역에서 성의 기초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기초의 깊이는 정약용의 기본계획 4척보다 50%를 더 늘린 6척으로 했다. 수원지방의 동한(凍限)을 고려한 깊이다. 기초의 넓이는 10척 계획에서 100% 더 늘린 20척으로 했다. 성의 석한(石限)을 고려한 넓이다. 요즘 용어로 동결심도와 지내력을 말한다. 지금부터는 ‘미석(眉石)’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미석 재료다. 특별히 살피는 이유가 있다. 현재 화성에는 돌로 만든 미석과 벽돌로 만든 미석이 모두 설치돼 있어 탐방객들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원래 미석 재료는 돌일까, 벽돌일까, 아니면 혼용했을까? 먼저 미석이란 용어에서 재료가 돌임을 알 수 있다. 미석에서 석은 돌을 말한다. 만일 벽돌로 미석을 만들어 사용했다면 ‘미벽(眉甓)’이란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조로 봐도 돌이어야 한다. 미석은 두께가 3촌(寸)에서 5촌 사이이다. 얇은 판으로 된 미석은 그 위에 설치된 여장의 하중을 장기간 견뎌내야 한다. 그래서 돌이어야만 한다. 벽돌 재질로는 장기간 견디기 힘들다. 이런 내용은 지금 누구나 직접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대 복원 시 많은 구간에서 미석 재료로 돌 대신 벽돌을 사용하였다. 아마 얇은 판형의 돌로 가공하는 것이 공사비와 공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잘못 사용된 벽돌 미석은 균열이 가고 깨졌다. 복원 당시 벽돌을 사용한 구간이다. 보기도 흉할 뿐 아니라 최초 성역 당시 장인이 부실공사했다고 오해받는 형국이다. 미석 재료는 돌이다. 동장대 뒤 여장처럼 여장이 벽돌 여장이라 해도 미석은 돌로 만든 미석이어야 한다. 미석 재료는 돌이어야 여장 하중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성 높이 기준을 알아보며 미석은 성 높이에도, 여장 높이에도 포함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이제는 미석의 설치 목적이다. 미석은 두께가 4치인데 성면에서 3치가 눈썹처럼 돌출돼 있다. 미석의 기능에 대해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물 끊기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일 뿐이다. 그러면 무슨 역할을 했을까? 더 중요한 목적은 성의 단조로운 면에 긴장감을 주기 위한 심리적 미적 디자인 요소로 사용한 것이다. 변화, 단락, 강조, 명암 등 미적 요소를 더해 주고 있다. 미석이 없는 성벽을 상상해 보라. 시집가는 새색시가 연지곤지도 없고 눈썹도 민 모습일 것이다. 세 치 돌출로 미학적 완성도를 이뤄낸 미석은 정조가 선사한 화성의 화룡점정이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홍예는 왜 모두 바깥쪽이 작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에는 대문이 네 곳이 있다. 장안문(북문), 팔달문(남문), 창룡문(동문), 화서문(서문)이다. 문의 함락은 곧 성의 함락이기 때문에 문은 매우 중요하다. 성을 공략할 때 문을 최우선 공격 목표로 삼는 이유다. 이처럼 안과 밖이 개방된 문은 특별한 방어 대책을 세워야 한다. 화성에는 앞쪽에 옹성을, 좌우에 적대를, 위에는 문루를 배치해 시스템 방어를 구축했다. 이외에도 철판을 입힌 두꺼운 문짝을 설치했다. 의궤에도 “두 선문은 철엽으로 싸고 횡경을 갖췄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문은 문짝을, 철엽은 나무 문짝에 붙여 놓은 철판을, 횡경은 문을 잠그는 나무 빗장을 말한다. 원산석은 문을 닫았을 때 문짝이 밖으로 밀려 나가지 못하게 막는 돌로 문 밖 바닥 중앙에 박는다. 문짝은 회전축을 중심으로 90도로 여닫는다. 나무 축을 ‘지도리’라 부르는데 아래는 돌구멍에, 위는 나무 구멍에 꽂혀 있다. 모든 문짝은 바깥 홍예에 설치했고 안 여닫이로 여닫는다. 홍예에서 아래쪽 수직 부분에 쌓은 돌을 선단석이라 한다. 선단석 위 무지개 모양을 한 돌을 홍예석이라 한다. 모든 문에는 이런 홍예가 안쪽에 하나, 바깥쪽에 하나로 구성돼 있다. 안쪽 홍예와 바깥쪽 홍예 사이는 그냥 수직 벽이다. 이 벽을 쌓은 돌을 무사석이라 한다. 홍예 크기를 보자. 홍예 넓이는 장안문 경우 안쪽 홍예가 18척2촌, 바깥쪽 홍예가 16척2촌이고, 팔달문은 안쪽이 18척, 바깥쪽이 16척이다. 창룡문과 화서문은 안쪽이 14척, 바깥쪽이 12척이다. 모든 문에서 바깥 홍예가 안쪽 홍예보다 2척이 작다. 지금까지 문짝과 홍예의 제도를 보며 누구나 이런 의문이 떠올랐을 것이다. 왜 문짝을 모두 바깥쪽 홍예에 설치했을까, 왜 모두 안 여닫이로 했을까, 왜 바깥쪽 홍예가 안쪽보다 2척이 작을까이다. 그 이유를 찾아보자. 앞서 말했듯 문은 방어에 가장 취약한 시설이므로 방어전략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안쪽 홍예와 바깥쪽 홍예 중 어디가 유리할까? 안쪽에 문짝을 설치하면 안 된다. 안쪽에 설치할 경우 적군이 안쪽 홍예와 바깥쪽 홍예 사이로 들어가 버리면 문루나 옹성 위에서 전혀 볼 수 없다. 홍예 사이에 들어간 적은 마음껏 문짝을 부술 것이다. 반면 바깥쪽에 설치하면 적은 옹성 안에 갇히고 아군에게 완전히 노출된다. 문짝 앞에 도달해도 문루와 옹성 위의 아군에 의해 몰살당한다. 그야말로 독(옹성) 안에 든 쥐가 된다. 이것이 문짝을 바깥쪽 홍예에 설치한 이유다. 안 여닫이와 바깥 여닫이 중 무엇이 유리할까? 바깥 여닫이로 설치하면 안 된다. 바깥 여닫이로 하려면 문짝은 홍예 바깥에 설치해야 한다. 이 경우 문짝과 가장 취약한 부분인 문의 회전축은 외부에 노출된다. 즉, 옹성으로 들어온 적에게 문짝을 내주는 꼴이 된다. 반면 안 여닫이로 설치하면 첫째, 문짝에서 가장 취약한 축을 선단석과 홍예석 뒤에 완벽하게 숨길 수 있고 둘째, 문을 닫으면 적군이 옹성 안에 갇히게 돼 몰살당한다. 이것이 안 여닫이로 설치한 이유다. 지금까지 바깥 홍예 안쪽에 설치하고 안 여닫이로 한 이유를 알았다. 가장 취약한 회전축을 선단석과 홍예석 뒤에 완벽히 은폐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문짝을 감추기 위한 폭은 얼마나 필요할까? 완전히 열었을 때 문짝을 구성하는 나무 널판, 띠장, 빗장이 감춰져야 한다. 전체 두께가 최소 1척이다. 문짝이 2개이므로 합하면 2척이다. 이 2척이 바로 안팎 홍예의 크기 차이가 되는 것이다. 차이를 확인해 보자. 장안문 경우 18척2촌과 16척2촌으로 2척 차이가 난다. 팔달문, 북옹성, 남옹성 경우 18척과 16척으로 2척이고 창룡문과 화서문도 14척과 12척으로 차이가 2척이다. 모두 바깥쪽이 안쪽보다 2척이 좁다.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지금도 문을 활짝 연 상태를 보면 문짝 전체가 선단석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로써 문짝을 안쪽이 아닌 바깥쪽 홍예에 설치한 이유, 문의 개폐 방향이 바깥 여닫이가 아닌 안 여닫이로 한 이유, 안쪽 홍예와 바깥쪽 홍예 넓이가 2척 차이가 나는 이유를 알게 됐다. 그러면 암문도 마찬가지일까? 답은 ‘마찬가지’다. 다만 차이의 크기는 다르다. 암문 다섯 곳도 바깥쪽 홍예가 안쪽보다 작다. 안쪽 홍예와 바깥쪽 홍예 넓이 차이는 북암문이 5촌, 서남암문과 동암문이 1척, 남암문 1척3촌, 서암문이 1척5촌이다. 차이가 서로 다른 이유는 암문의 통로 폭과 길이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통로 크기에 따라 문 두께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암문은 경사지에 세워 문짝도 작고, 안팎 홍예 크기의 차이도 작다. 그러나 암문은 적으로부터 문을 보호하려는 의도와 관련은 없다. 원래 암문은 비상시 흙을 쏟아부어 폐쇄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화성의 모든 문에서 바깥쪽 홍예가 안쪽 홍예보다 작다. 문의 취약부인 회전축을 선단석 뒤에 숨겨 보호하도록 설계했다. 모두 문은 안 여닫이로 했다. 문을 닫았을 때 적을 옹성 안에 묶어 놓을 수 있게 설계한 것이다. 성에서 문과 문짝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설치 위치, 여닫는 방식, 안팎 홍예의 크기 차이 이유를 살펴보며 정조의 전략적 사고를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자성치(自成雉)는 어디를 말할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자연이 만든 ‘지형’… 최강의 창이자 방패 치의 기능과 목적은 성에 접근하는 적을 좌우에 돌출된 ‘마주하는 치(對雉)’에서 적의 양 옆구리를 동시에 공격함으로써 방어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성치(自成雉)란 무엇인가? ‘자연 지형 스스로(자) 이뤄진(성) 치(치)’를 말한다. 의궤에도 ‘대체로 성은 굽고 꺾인 데가 많아 모퉁이와 문이 있는 곳에 이르면 자성치의 형상을 이뤄 원성을 보호하게 마련’이라는 기록이 있다.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던 용어다. 정의하면 ‘자성치는 지형이 꺾이는 곳이나 문의 좌우에서 지형 자체가 치의 기능을 하는 곳’이다. 앞으로 자성치란 용어를 사용하고 홍보도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화성에 자성치는 어디 있을까? 자성치는 자연 그대로의 지형을 말하므로 인공적으로 만든 곡성은 제외했다. 위치 용어 중 ‘좌, 우’ 명칭은 성 밖에서 보는 좌우를 말한다. ‘북쪽’, ‘동쪽’ 등은 ‘북쪽 원성’, ‘동쪽 원성’의 줄인 말이다. 첫째, 서북각루 전면이 자성치다. 좌측은 서옹성과 마주해 동쪽을, 우측은 서일치와 마주하며 남쪽을 공격한다. 둘째, 서장대 후면이 자성치다. 좌측은 서이치와 마주해 북쪽을, 우측은 서암문과 마주 보며 남쪽을 공격한다. 셋째, 서남암문 좌우가 자성치다. 모두 용도 치와 대치를 이뤄 용도를 방위한다. 넷째, 동남각루 전면이 자성치다. 좌측은 남공심돈과 마주해 남수문을 방어하고, 우측은 동삼치와 마주하며 북쪽을 공격한다. 다섯째, 동북공심돈 전면이 자성치다. 좌측은 동북노대와 마주해 남쪽을, 우측은 동장대 사이 돌출된 너른 자성치와 마주 보며 서쪽을 공격한다. 여섯째, 동북공심돈과 동장대 사이에 돌출한 반원형 너른 지형이다. 좌측은 동북공심돈과 마주해 동쪽을, 우측은 동장대와 마주하며 서쪽을 공격한다. 일곱째, 동장대 전면이 자성치다. 좌측은 동북공심돈 사이 돌출된 자성치와 마주해 동쪽 원성을, 우측은 동북포루와 마주 보며 서쪽 원성을 공격한다. 여덟째, 동북각루 좌우가 자성치다. 좌측은 동북포루와 마주해 북암문을, 우측은 북동포루와 마주하며 화홍문을 방어한다. 아홉째, 창룡문 좌우가 자성치다. 좌측은 동1포루와 마주해 남쪽 원성을, 우측은 동북노대와 마주하며 북쪽 원성을 공격한다. 좌우는 동시에 동옹성과 대치를 이뤄 창룡문을 방어한다. 열 번째, 화서문 서쪽이 자성치다. 한쪽은 서북각루와 마주해 서쪽 원성을 공격하고, 다른 한쪽은 서북공심돈과 마주하며 화서문을 방어한다. 이 10곳이 과연 치로서의 역할이 타당한지 검증해 보자. 자성치의 돌출 길이와 치성의 돌출 길이를 비교해 봤다. 곡성의 돌출 길이를 보면 적대 29척, 포루(대포) 29척, 동북노대 20척5촌, 포루(군졸) 평균 21척, 치 평균 20척으로 돌출 길이는 6.3m에서 9m까지이고 평균 7.5m다. 이런 가치를 지닌 자성치를 정조는 치 이상으로 활용했다. 첫째, 장대와 각루는 모두 자성치에 배치하도록 했다. 둘째, 자성치에 설치한 시설물은 여장에서 일정 간격을 두고 배치했다. 그 의도는 무엇일까? 성안 쪽으로 당겨 배치한 것은 시설물과 자성치 양쪽 모두 활용하기 위한 포석이다. 자성치를 앞에 두고 그 뒤에 시설물을 지은 것은 앞뒤로 2배의 전력을 운용하려는 의도다. 각건대 벽등에서는 방어 공간을 상하로 확장했다. 자성치에서는 방어 공간을 전후로 확장한 것이다. 좁은 터에서 공간을 위아래로 사용해 2배의 병력과 화력을 운용한 벽등과 마찬가지다. 장대와 각루만 배치한 것도 계획된 배치다. 장대는 사령부급 군사 지휘소이고 각루는 장대 다음의 사단급 지휘소다. 각루와 장대는 다른 시설물보다 막강한 병력과 화력을 배치하는 곳이다. 이런 병력과 화력으로 자성치를 엄호하고 자성치는 각루와 장대를 방어하는 상호 방위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이것이 여장에서 성안 쪽으로 자성치 공간을 두고 각루와 장대를 세운 이유다. 자성치에 올라 좌우를 바라보면 정조의 지모가 서려 있다. 자연이 만들어 준 자성치를 200% 활용한 정조의 지략과 공간 확장 능력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옹성 문루는 없애야 할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옹성은 문 앞에 반원형으로 만든 외성이다. 화성에는 문마다 옹성을 설치하고 옹성에는 문을 설치하도록 계획됐다. 계획대로 화성에선 모든 문에 옹성을 설치했다. 한양 도성에는 동대문(흥인지문)에만 옹성을 뒀다. 옹성은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뉜다. 북옹성과 남옹성은 폐쇄형이고 동옹성과 서옹성은 개방형이다. 폐쇄형이란 옹성 양 끝이 모두 성에 붙어 있는 형태다. 개방형은 옹성의 한쪽 부분이 성에서 떨어져 열려 있는 형태를 말한다. 개방형은 열린 부분으로 사람이나 수레가 다닐 수 있다. 폐쇄형은 사람이 통과하려면 옹성에 문을 내야 했다. 북옹성과 남옹성에 홍예와 문이 있는 이유다. 논쟁의 진원지는 현재 복원된 북옹성과 남옹성 홍예 위 작은 문루다. 의궤에는 옹성 홍예 위에 문루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도 “당초부터 있었다”, “복원 오류다”, 나아가 “원형이 아니므로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왜 문루를 추가했을까? 이유를 찾아보자. 옹성 문루 설치 이유를 알려면 문루 아랫부분의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옹성 정가운데에 너비 18척, 두께 27척의 통로를 뒀다. 그리고 문을 설치했다. 이 홍예 통로 위쪽의 단면을 보자. 양쪽 벽에 널빤지(개판)를 걸쳐 막았다. 널빤지 위에 회삼물을 편 후 벽돌을 깔고 전으로 덮었다. 회삼물이란 석회, 황토, 고운 모래 세 가지를 같은 비율로 섞은 것을 말한다. 이것을 4촌 두께로 깔았다. 두께 13㎝다. 전은 바닥에 까는 넓은 벽돌을 말한다. 넓은 벽돌을 깐 이유는 옹성 위 통로 바닥으로 병사가 다니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다. 통로에는 병사가 경계도 서고, 오성지에 물을 담거나 비축할 물통도 두게 된다. 널빤지 아랫면에는 용이나 구름 문양을 그렸다. 그림이나 회삼물은 문의 위계나 의장 효과도 있지만 장기간 노출되는 목재를 비, 습기, 이끼, 부패 등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과학적 조치이기도 하다. 문제는 홍예 윗부분이 구조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이다. 석회는 경화돼 단단해지지만 실제로는 나무판자 위에 그저 13㎝ 두께의 모래를 뿌려 놓은 정도다. 한마디로 홍예 윗부분은 사실상 허공이나 마찬가지다. 이 말은 홍예 위 통로를 병사가 여럿이 다니지 못하고, 뛰어다니지 못하고, 무기를 쌓아 두지도 못한다는 말이다. 더구나 오성지가 있어 물통도 비축하고 물을 쏟아붓는 작업도 해야 한다. 이런 활동을 할 수 없는 바닥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킬 안전한 대책은 없을까? 홍예 위 옹성 통로로 병사가 마음껏 뛰어다니고 물통이나 군장비도 쌓아 둘 수 있는 구조가 필요했다. 가장 좋은 대책은 홍예 위 옹성 통로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하중이 통로 바닥에 전달되지 않도록 하면 된다. 그 방법이 홍예 윗부분 전체보다 넓게 마루로 덮고 마루 위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로 하면 홍예 위의 모든 하중이 널빤지로 전달되지 않고 마루판, 장선, 동자주, 은주석을 통해 옹성 아래 원지반으로 전달된다. 즉, 상부의 모든 하중이 마루 아래 통로 바닥과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다. 통로의 길이가 4.8m인데 기둥 간격이 6.4m인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면 마루만 설치하지 왜 지붕까지 만들었을까? 마루만 설치하고 외기에 장기간 노출되면 빗물로 인해 마루나 동자주가 썩는다. 빗물을 막기 위해 지붕을 설치한 것이다. 아울러 옹성 문루를 지키는 병사들의 적으로부터 은폐할 장소로도 쓰였을 것이다. 이것이 옹성 문루의 탄생 비밀이다. 옹성 문루는 기능상 꼭 필요한 것이다. 성역 당시 설치하지 않은 것은 마치 2층을 지어 놓고 계단을 빼먹은 것과 같다.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옹성 문루를 추가한 것이다. 아쉬운 것은 추가 공사 때 오성지도 지금의 모습으로 변형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성지 자체를 없애고 여장에 구멍만 5개 뚫어 놓은 기괴한 모습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 그때 문루 기둥 사이(6m)에 제대로 된 오성지(4.5m)를 설치했다면 지금도 옹성 문 위로 물을 쏟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옹성 문루의 존재 이유를 살펴보니 ‘남암문 문루의 비밀’도 풀린다. 남암문도 성역 당시에는 문루가 없었다. 하지만 옛 사진을 보면 문루가 세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남암문 위에 문루를 세운 이유는 옹성 문루와 똑같은 이유다. 그렇다면 다른 암문에도 문루가 있을까? 필자는 남암문을 제외한 다른 네 곳의 암문에는 문루가 없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남암문 외 다른 암문은 통로 폭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남암문이 13척1촌인 데 비해 북암문 4척6촌, 서암문은 5척6촌, 동암문 7척, 서남암문 7척이다. 남암문에 비해 너무 좁다. 문루 구조를 만들 최소 규격도 안 된다. 현재 옹성 문루는 원형이 아닌 것은 인정한다. 원형이 아니어서 문루를 없애는 것이 원칙이라는 주장도 있다.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유는 북옹성, 남옹성, 남암문 문루는 당초부터 해야 할 것을 놓쳐 추가로 설치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시간, 공사비, 설계 미비 등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이 참작돼야 한다는 의미다. 문화재는 시간성과 장소성이 중요하다. 하지만 차분하게 원인을 살펴 놓친 시공인지, 복원 오류인지 분별력을 발휘해야 한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연못은 왜 2개씩 붙어 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 연못은 연못이 아니다. 시기에 따라 변하는 요구에 맞춰 변신을 거듭한다. ‘일타오피’ 다목적 역할을 한 세계 유일의 연못이다. 화성 연못은 저류지와 저수조의 역할을 했다고 앞 편에서 밝혔다. 화성 건설 착수 초기, 짧은 기간 성 밑 물길인 은구 공사를 하기 위해 저류지 역할을 했다. 은구가 완료되자 공사용수를 모아두는 저수조 역할로 변신했다. 그뿐만 아니라 화성 연못은 준공 이후에도 특별한 역할을 한다. 어떤 역할을 했을까? 특히 두 개가 상하로 붙어 있는 연못이 큰 역할을 한다. 상남지, 하남지, 상동지, 하동지를 말한다. 두 개가 붙어 있는 연못의 특징을 찾아보자. 상하로 붙어 있다. 좌우도 아니고 왜 상하로 붙였을까? 두 개의 연못 중 하나는 착공하자마자 팠고 나머지 하나는 공사가 끝나갈 무렵에 팠다. 한 번에 파면 공사비도 덜 드는데 왜 공사가 끝날 무렵에 팠을까? 북지는 1개인데 남지와 동지만 2개다. 왜 남지와 동지만 두 개를 붙여 팠을까? 이 특징이 비밀을 풀 열쇠다. 왜 북지만 두 개가 아닐까? 북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못이 1개다. 북지는 성 밖 도랑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물의 유입만 있고 배출은 없다. 최종 목적지일 경우 1개면 된다. 반면에 상남지와 하동지는 준공 전 하남지와 상동지를 추가해 2개가 붙어 있다. 남지와 동지가 북지와 다른 점은 물을 수원천으로 배출하고 있는 점이다. 물을 배출할 경우 물과 물 위의 부유물, 그리고 물속에 포함된 토사가 함께 배출된다. 부유물은 나무 울타리에 걸리지만 물속 토사는 물과 함께 수원천으로 배출된다. 그리고 토사는 수원천 바닥에 침전된다. 장기간 침전되면 결국 수원천 바닥이 높아지게 된다. 이로 인해 여름 폭우에 수원천은 범람한다. 광교 저수지를 만들기 전까지 장마철이면 매년 수원천은 넘실거렸다. 때로 수원천을 넘어 민가가 침수되기도 했다. 바로 홍수다.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수원천으로 유입되는 토사를 막아야 한다. 은구와 성의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 유속을 낮춰야 한다. 대책은 무엇일까? 수원천으로 나가기 전에 연못을 만들어 토사를 침전시킨 후 물만 내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연못을 거치며 물의 속도를 낮추는 것이다. 이것이 침사지(沈砂池)다. ‘토사를 가라앉히는 연못’을 말한다. 해마다 범람하는 수원천 때문에 백성의 피해가 컸다. 정조는 이를 방지하려고 침사지로 남지와 동지를 설치한 것이다. 연못 크기와 위치는 강우, 지형, 토양, 유입원 면적, 배출 지점 등을 고려해 계획한다. 왜 상하 2개가 필요할까? 침사지는 기능을 높이려면 물이 거치는 길이가 길수록, 장애물이 있을수록 좋다. 토사의 침전과 유속을 더욱 안정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다다익선이라고 수많은 연못을 연속해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 2개는 필요하다. 침사지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청소, 준설 등 꾸준히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연못 안에 섬을 1개, 2개 만든 것은 유속을 줄이는 일종의 장애물이다. 하남지에 섬을 상하로 만든 것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위치가 수원천으로 물이 빠져나가기 직전에 만들어 놓은 점, 상하로 설치한 점이 남지와 동지가 침사지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을 침사지의 2지(二池) 시스템이라 한다. 광교 저수지도 2지 시스템이다. 상지가 2개다. 하나는 광교 종점에서 조금 올라가면 사방댐이 있다. 이것이 상지다. 사방(沙防)이란 이름 자체가 토사를 방지한다는 의미다. 다른 하나는 경동원을 지나 기도원 아래에 있는 저수지다. 이를 ‘윗방죽’이라 불렀다. 이것도 상지다. “화성 연못을 백성의 휴식공간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애민사상으로 포장했으나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아닌 근거를 보자. 첫째 형태가 원형이 하나도 없이 모두 사각형인 점, 둘째 5개를 만들면서 다섯 곳으로 분산하지 않고 세 곳으로 한 점, 셋째 위치가 백성의 인가와 너무 떨어져 있는 점, 넷째 정원석을 한 개도 사용하지 않고 모두 나무 말뚝만 박아 놓은 점, 다섯째 공사가 장기간 진행될 착공 초기에 3개를 판 점이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화성에 지(池)는 왜 만들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의 연못은 백성의 휴식공간을 위해 판 것이 아니다. 또 공사에 필요한 흙을 조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화성 연못은 시간이 지나며 역할이 변신한다. 지(池)와 연(淵)은 흔히 말하는 못 또는 연못이다. 화성에는 남지 2개, 동지 2개, 북지 1개로 모두 5개가 있다. 행궁에 있는 2개, 성 밖에 있는 2개를 제외한 개수다. 하나의 성에 연못이 5개나 있는 성은 화성이 유일하다. 의궤 용어 ‘지’는 편의상 ‘연못’으로 표현한다. 화성에 왜 이렇게 많은 연못이 있을까? 연못에 대해 의궤에는 아주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남지에 대해서는 “가운데 작은 섬이 있으며 홍련과 백련을 심었다. 가운데에 섬 둘이 있는데 두 못의 사이에 정자 터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북지는 “성 밖 도랑의 물을 끌어댔기 때문에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 동지는 “마름과 연꽃을 심었고 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다. 이것이 상지다. 하나는 구천의 북방에 있다”고 설명한다. 화성에 연못은 왜 이렇게 많이 만들었을까? 연못을 만든 이유로 학자들은 공사에 필요한 흙을 조달하고 백성에게 아름다운 휴식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을 말하면 이런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흙이 필요해 연못을 팠다는 것이 아니라는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공급에 맞는 일정이 아니다. 5개 연못 전체에서 나올 흙의 3분의 2는 하남지와 상동지에서 나온다. 흙이 필요했다면 많은 흙이 나오는 하남지와 상동지를 먼저 파야 하는데 이 두 곳은 모든 성역이 거의 끝나는 시점에 팠다. 둘째, 흙의 양이 너무 적다. 북성의 내탁에 필요한 흙은 5만㎥로 계산된다. 반면에 북지에서 나온 흙은 2천㎥다. 북성에 필요한 양의 4% 정도다. 매우 미미하다. 남지의 경우도 남성에 소요되는 양의 13%에 해당한다. 셋째, 결정적 이유로 초기에 흙이 필요하지 않았다. 의궤 ‘토품(土品)’에 “남성과 북성은 토질이 개흙과 같아서 땅을 6척을 파고 벽돌을 3중으로 깔았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초기에는 토질을 바꾸는 치환공사와 기반을 보강하는 공사라 흙이 필요하지 않고 두툼한 판석과 벽돌이 필요한 시기였다. 연못을 판 착공 첫해 3, 4월에는 흙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판 흙을 버려야 했다. 종합하면 소요되는 자재의 종류, 시기, 수량이 모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연못을 팠을까? 북지, 남지, 동지별로 살펴보자. 북지는 왜 팠을까? 의궤에 “북지는 성 밖 도랑의 물을 끌어댔기 때문에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은 북지가 성 밖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여 모아 두는 역할을 했다는 근거다. 성을 쌓을 곳 밖에 있는 도랑 때문이다. 성 기초공사를 하기 위해 6척을 파니 물이 들어차 공사를 할 수 없었다. 어떡하든 물을 잡아둬야 했다. 북성 공사를 시작하려면 북은구를 먼저 설치해야 했다. 은구(隱溝)란 성 밑을 관통하는 수로를 말한다. 물길을 만들어 줘야 성 기초공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은구 공사를 위해 도랑을 성안으로 끌어들여 물을 잡아둔 것이다. 북지 파기를 마친 날이 4월4일이고 북성 공사에 착수한 날이 4월7일이다. 이 사이에 북은구 공사를 한 것이다. 한마디로 북지는 물을 모아두는 저류지(貯留池) 목적으로 판 것이다. 남지를 판 이유는 무엇일까? 북지와 똑같은 이유로 팠다. 다른 점은 성 밖 도랑이 아니라 성안 도랑의 물을 가둬 둔 점이 다르다. 도랑이 공사할 남성 터를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구 공사를 위해 도랑물을 가두어 둬야 했다. 상남지를 끝낸 날이 4월1일이고 남성 공사에 착공한 날이 4월16일이다. 이 사이에 남은구 공사를 했다. 북지와 같은 저류지 역할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심정(深井)공법이다. 끝으로 동지는 왜 팠을까? 동지는 북지나 남지와 위치가 다르다. 동지 인근 성 안팎 어디에도 도랑이 없다. 당연히 은구도 없다. 성 기초공사와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혹시 남수문과 관련이 있을까 살펴봐도 연관이 없다. 동지를 판 것이 화성 성역 착공 첫해 4월이고 남수문은 2년 후 공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럼 무슨 목적으로 팠을까? 동지는 동성 공사에 착수하기 위해 판 것이 아니라 동성 공사를 위한 공사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판 것이다. 모든 공사에는 공사용수가 필요하다. 현재도 공사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가설 전기와 가설 수도를 설치한다. 당시도 공사용수 공급을 위해 웅덩이를 판 것이다. 물을 모아두기 위함이다. 북지는 북은구 공사가 완료되자마자 평지북성과 산상서성의 공사용수를 공급했다. 남지도 남은구 공사가 완료되자 평지남성과 산상서성에 공사용수를 제공했다. 은구 공사가 완료되며 저수조(貯水槽)로 역할이 바뀐다. 저수조는 ‘물탱크’다. 저류지에서 저수조로 역할이 바뀐 것이다. 도랑물을 모아둔 시간에 은구 공사를 했다. 저류지 역할이다. 은구를 사용하게 되니 성 쌓기 공사를 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공사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조로 변신했다. 이런 화성 연못이 화성 건설이 끝난 후에 그 목적이 또 바뀐다. 저류지와 저수조 역할은 없어지고 새로운 세 가지 기능을 제공한다. 연못이 없었다면 수원은 지속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에 관한 내용은 다음 편에 계속 발표할 예정이다. 연못을 통해 정조의 치수 관리와 올바른 공사 선후 관리를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정조는 불교 신자였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융릉의 원찰인 용주사는 사찰로는 특이한 점이 많다. 모두 정조의 특별한 배려다. 유교사회에서 아무런 마찰 없이 이를 행한 데는 정조의 비책 덕분이다. 용주사(龍珠寺)에 대해 화성군 안녕리, 지금의 화성시 송산동에 용주사가 있다. 조계종 제2교구 본사로 경기도 사찰 업무를 총괄하는 절이다. 정조를 매개로 화성과 인연이 있다. 이 사찰만의 특이한 점이 있다. 첫째, 절 이름 앞에 효찰대본산이 붙는다. 둘째, 사찰로는 유일하게 홍살문이 있다. 셋째, 사찰 문으로는 유일하게 궁궐건축의 삼문이다. 넷째, 대웅보전 삼세여래후불탱화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다. 이런 특징은 모두 정조와 연관이 있다.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천장하고 현륭원이라 했고, 후에 융릉으로 승격시켰다. 원소도감이 “다른 능원의 예에 따라 원찰을 설치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린다. 이에 따라 융릉 인근에 용주사를 세운 것이다. 물론 보경 스님에게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감동해 건립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 밤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꿔 용주사라 이름 지었다 한다. 본전 주심포 아래 용이 물고기를 먹고 있는 조각이 있다. 스님께 물어보니 먹는 게 아니라 극락까지 데려다 주려고 물고 있는 것이란다. 정조의 배려로 당시 최고의 궁궐건축 장인과 화원 책임자를 전폭 지원했다. 문이 궁궐 삼문 형식으로 지어졌고 김홍도의 후불탱화가 탄생했다. 신성한 구역임을 구분하는 홍살문도 세웠다. 용주사에 승병을 조직하고, 특별히 총섭을 뒀다. 장용외영에 소속시켰고 전시에는 독성을 지키는 데 지원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독성은 세마대가 있는 수원 남쪽의 요충지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대해 용주사는 부모은중경 때문에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조가 보경 스님에게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세운 절이기 때문이다. 화성 성역이 끝나가던 해에는 ‘부모은중경판’을 제작해 절에 기증했다. 이래서 절 이름 앞에 ‘효원대본찰’이 붙은 것이다. 부모은중경은 ‘효도’보다 ‘은혜’에, ‘아버지’보다 ‘어머니’에 중점을 둔 내용이다. 내용은 임신부터 자식이 나이 들 때까지 베푸신 어머니의 10가지 은혜다. 10가지 은혜는 검색하면 쉽게 확인된다. 내용 중 필자의 마음에 찔리는 한 구절만 적는다. “부모가 지내시는 사정과 춥고 더운 것을 아는 체하지 않고, 문안도 드리지 않으며, 부모를 편안히 모실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부모가 나이가 많아져 모양이 쇠약하고 파리해지면, 남이 볼까 부끄럽다고 하여 구박하고 괄시한다.” 70이 넘어도 후회는 더 짙어진다. 용주사와 정조의 여러 관계를 살펴보며 의문이 생겼다. 당시는 불교를 배척하는 유교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임금이 큰 절을 세운 점, 홍살문과 삼문의 설치를 허락한 점, 탱화 제작에 화원 책임자를 지원한 점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역 기간에 부모은중경판을 제작해 기증하고, 은중게(恩重偈) 125장을 만들어 성역을 담당한 감동당상 이하 패장까지 나눠 줬다. 부처님 말씀을 성역 감독과 장인에게 나눠 준 것도 놀라운 일이다. 혹시 정조는 불교를 믿는 임금이었을까? 한마디로 ‘아니요’다. 유교를 기반으로 한 왕조와 권력을 나눠 갖고 있던 사대부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신료들의 견제 속에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정조가 이 일을 추진하는 데 세 가지 비책이 있다. 정조의 세 가지 비책에 대해 첫째, ‘교리’를 ‘좋은 문장’으로 전환했다. 정조는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불경이 이단의 학문으로 윤리에 어긋난다”라고 직접 말한 바 있다. 이런 인식에서 정조는 부모은중경을 불교 교리에서 분리했다. 즉, 불교 경전으로 보지 않고 좋은 문장으로 전환한 것이다. “도를 버리고 말을 취한 것”이라는 정조의 언급은 불교 교리를 유교의 성현 말씀과 같은 격으로 바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 경문을 논어나 중용으로 전환한 것이다. 둘째, ‘신앙’을 ‘교육수단’으로 전환했다. 조선에서 불교를 말살한 것은 아니었다. 하층 백성들은 불교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정조는 신앙이 아니고 백성에 대한 교육 수단으로 전환한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르치기 어려우나, 그들이 매양 믿고 숭상하는 불법의 말씀으로서 깊이 듣게 하고, 마음을 움직여 깨닫게 하였으니, 사람들을 가르치는 중요한 방법”이라는 정조의 말에서 백성에 대한 유용한 교육 수단으로 봤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이이제이 전략’을 활용했다. 당시는 천주교인을 감시하고 보고하던 때였다. “요사이 천주를 일컬으며 부모를 버리고 사람들을 현혹해서 모두 오랑캐나 짐승으로 만들었다. 이에 법으로 처단하고, 요설을 통렬히 씻어내어 한 사람의 백성도 빠지지 않게 하였다”란 언급도 있었다. 정조는 불교를 통해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통제하려 했다. 이이제이 전략인 셈이다. “무엇보다 이단으로써 이단을 구하여”란 정조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앞의 이단은 불교이고 뒤에 나오는 이단은 천주교다. 그러나 정조 개인의 본심은 박해보다 감화에 중점을 둔 것 같다. “이단을 구하여 저절로 감화하게 하였다”라는 말로 맺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중경은 불교 경전이지만 효는 보편적 가치다. 비명에 간 아버지의 넋을 기리고 자신이 하지 못한 효를 백성에게 전파하고자 했다. 유교가 주를 이룬 당시에 불교와 유연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정조의 숨겨진 세 가지 비책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동3치 현안은 1개일까 2개일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동3치 현안이 원형 1개에서 2개로 복원됐다. 복원 오류이지만 한 장인의 소신과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 기본 방어시설인 치가 화성에 여덟 곳이 있다. 북동치, 서1치, 서2치, 서3치, 남치, 동1치, 동2치, 동3치다. 이 중 동3치는 남수문에서 동쪽으로 높은 언덕에 있는 동남각루 바로 다음에 있다. 성 밖에서 보면 동3치에 현안이 2개 설치돼 있다. 모든 치에 현안이 1개씩 설치돼 있는데 왜 동3치만 2개일까? 오래전부터 논란이 있었다. 1개가 맞는 것일까? 2개가 맞는 것일까? 답은 1개다. 그 근거를 보자. 첫째, 화성성역의궤 중 ‘치성도’와 한글판 뎡니의궤에서 ‘치성 외도’”를 보면 모두 현안이 1개다. 그리고 양쪽 의궤의 ‘화성전도’를 확대해 봐도 1개다. 둘째, 의궤에 치에 대해 “바깥쪽으로 현안 구멍이 1개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개가 원칙이다. 셋째, 의궤 도설에 보면 8개 치에 대해 공통으로 설명하고 끝낸다. 각각에 대해서는 특별한 사항만 설명한다. 북동치는 북동적대와 붙어 있는 점, 서1치는 타구 위를 덮은 점, 서3치와 남치는 여장이 원성 안으로 들어온 점을 기록하고 있다. 만약 동3치 현안이 성역 당시 2개였다면 당연히 기록됐을 것이다. 매우 특별한 점이기 때문이다. 언급이 없다는 것은 다른 치와 마찬가지로 1개라는 말이다. 정리하면 성역 당시 동3치 현안은 1개였다고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동3치 전면 폭이 넓기 때문에 2개를 설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확인해보자. 먼저 치 여덟 곳의 전면 폭을 살펴보자. 북동치 7.6m, 서1치 5.9m, 서2치 5.4m, 서3치 4.9m, 남치 3.8m, 동3치 7.6m, 동2치 6.1m, 동1치 6.6m다. 8개 치 중에서 동3치는 북동치와 폭이 같다. 이처럼 같은 폭인데도 북동치는 현안이 1개다. 포루(군졸)와도 비교해 보자. 이유는 의궤에 치와 포루에는 현안을 1개씩 설치했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포루 중 동3치보다 전면 폭이 더 넓은 것은 동북포루 7.9m, 북포루 8.3m, 서포루 9.4m다. 그러나 이 세 곳 모두 현안이 1개씩이다. 이상 두 데이터는 폭이 넓다고 현안을 더 많이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재확인해도 성역 당시의 동3치 현안 개수는 1개다. 그런데 현재는 2개다. 지금부터 ‘동3치와 현안 2개의 미스터리’를 풀어보자. 왜 2개가 됐을까? 그리고 언제 2개로 됐을까? 몇 개월 전, 필자와 가까운 고건축가 한 분이 사진 파일 두 개를 주셨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병풍도 그림이다. 화성전도가 포함된 6폭과 12폭 병풍도 2개다. 최근에 자세히 살펴보던 중 미스터리를 풀 단서를 보게 됐다. 12폭 병풍도에는 현안이 1개이고 6폭에는 2개로 그려져 있는 모습이었다.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 글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병풍도 자체로는 왜 2개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언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있다. 조건은 제작 연도다. 제작 연도는 언제일까? 제작 연도는 다른 학자의 자료에서 가져왔다. ‘화성연구회 학술회의’ 자료다. 수원화성박물관 한동민 관장의 ‘정조 이후의 화성을 그리다’ 주제발표 내용이다. 발표에서 제작 연대를 12폭 병풍도는 1814년에서 1824년 사이, 6폭 병풍도는 1831년 이후 작품으로 추정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동3치 현안 수는 성역 완료 1796년에 1개, 1824년에 1개, 1831년에 2개가 된다. 따라서 현안이 1개에서 2개로 변동된 시기는 1825년부터 1830년 사이로 볼 수 있다. 이로써 2개로 바뀐 시점이 밝혀졌다. 그러면 왜 2개가 됐을까? 필자는 1825년과 1830년 사이 어느 날 ‘붕괴해’ 복원공사 중 2개로 ‘바꿨을’ 가능성을 가장 크게 본다. 타당한 근거도 있다. 먼저 붕괴에 대한 근거다. 치에서 현안을 1개에서 2개로 변경하려면 두 경우뿐이다. 의도를 갖고 모두 부수고 2개로 바꾸는 경우와 자연재해로 붕괴해 복원할 때 2개로 바꾸는 경우다. 현안을 2개로 늘리려고 일부러 동3치를 해체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성역 이후 홍수로 붕괴해도 예산 부족으로 복구에 장기간이 소요된 기록이 있다. 따라서 자연재해로 붕괴해 복원하면서 2개로 바꿨다는 것이 타당하다. 치의 현안은 부분 개조공사가 불가능한 구조다. 기둥이나 보가 있는 라멘구조가 아니라 돌로 쌓은 적층구조이기 때문이다. 현안을 1개에서 2개로 바꾸려면 전면을 모두 뜯어내야 한다. 전면을 뜯으려면 치 전체의 60에서 70%는 해체해야 가능하다. 부분 개조 공사가 불가능한 이유다. 현안은 1개일 경우 정중앙에 위치하고 2개일 경우 3분의 1 지점과 3분의 2 지점에 있으므로 전면을 모두 해체해야 가능하다. 다음 ‘바꾸다’에 대한 추정이다. 복원을 담당한 장인은 대규모 공사가 아닐 경우 설계, 시공, 감동을 겸해 재량권이 있는 편이었다. 현안의 기능을 잘 알고 동3치의 전면 폭이 유난히 넓은 것을 알고 있는 장인이기에 복원 중 2개로 늘린 것이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바꾼’ 것이 된다. 복원을 원형대로 하지 않은 잘못은 있으나 장인의 분석력과 소신은 인정해줄 만하다. 하지만 그 장인은 현안 수량을 정하는 규범까지는 몰랐다. 이것이 장인의 한계다. 동남각루 쪽으로 가까이 보내고, 폭도 넓혀, 방어력을 증강한 동3치에서 한 장인의 소신과 애틋한 마음을 느꼈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동북공심돈은 왜 원통형일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에서 독특한 외형을 가진 시설물 중 으뜸은 동북공심돈이다. 국내 유일의 원통형으로 동북성 높은 터에 우뚝 서 맞은편 선암산을 견제하고 있다. 화성 공심돈인 남공심돈, 서북공심돈, 동북공심돈 중 하나다. 공심돈이란 무엇일까? 첫째, 높이가 제일 높으므로 적을 두렵게 하는 적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둘째, 건물 속을 비우고 대포로 무장해 포루(대포)의 기능과 같고 셋째, 맨 위층에 집을 지어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포루(군졸) 역할과 넷째, 지휘부에 정보 전달을 하는 포사의 기능도 한다. 한마디로 다목적 전투 시설이다. 동북공심돈은 다른 공심돈과 무엇이 다를까? 우선 구조가 다르다. 의궤에 “벽돌로 쌓아 동그랗게 돈을 만들었는데 겹으로 둘렀다”라고 기록돼 있다. 동그란 형태이며 내원과 외원의 두 겹 구조임을 말하고 있다. 즉, ‘원돈’, ‘중잡(두 겹)’이 키워드다. 그리고 세워진 터가 다르다. 의궤에 “성탁의 위, 성가퀴 안에 동북공심돈을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성탁이란 성이 터를 민다는 의미로 너른 터가 3면의 성에 의탁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원지반 위에 세웠다는 의미다. 즉, ‘원지반 위’가 키워드다. ‘원돈’, ‘두 겹’, ‘원지반 위’는 어떤 장점이 있을까? 첫째, 원돈은 사각돈에 비해 무엇이 장점일까? 남공심돈과 서북공심돈은 속이 빈 사각형이기 때문에 벽돌 벽체가 두껍다. 따라서 실내의 병사가 사용할 공간이 매우 협소한 단점이 있다. 또 두꺼운 벽과 벽이 만나는 코너에는 구멍을 낼 수 없어 밖을 볼 수 없는 감시 사각지대가 너무 넓다. 반면 원통형은 어느 부분에도 감시 사각지대가 생기지 않고 360도 전 방향에 대해 맞춤대응이 자유롭다. 특히 적이 점거할 맞은편 선암산의 높이와 좌우 범위에 사각지대 없이 대응하는 데 최적의 형태다. 원형 평면은 사용 유효면적이 넓어져 포혈 수를 충분히, 그리고 필요한 위치에 자유롭게 설치할 수 있다. 그야말로 선암산 맞춤형이다. 둘째, 두 겹 구조는 공심 구조와 비교하면 무엇이 장점일까? 하나는 공심인 한 겹보다 두 겹이 곡선 구조에 유리하다. 한 겹은 내부에 지지체가 없으므로 벽체가 두껍게 돼 곡선 구조에 불리하다. 두 겹인 경우 내원이 지지체 역할을 담당하므로 곡선 구조와 높이 조절에 유리하다. 곡선으로 이뤄진 원형 평면은 포혈 위치와 포혈 수량을 자유롭게 계획할 수 있다. 당연히 공심돈의 대형화가 가능하다. 이 역시 선암산 맞춤형이다. 다른 하나는 두 개의 원 사이를 활용해 당시로는 첨단인 경사로(램프)를 설치했다. 이로 인해 병사의 이동이 신속해졌다. 당연히 포탄 등 물자의 이동도 안전하고 신속해졌다. 반면 사각형 평면에서는 구조상 경사가 급한 나무 사닥다리를 이용했다. 늘 위험하고 이동이 신속하지도 못했다. 셋째, ‘원지반 위’는 ‘치성 위’에 비해 무엇이 장점일까? 원지반 위이기 때문에 원형 동북공심돈이 태어날 수 있었다. 남공심돈과 서북공심돈은 원성에서 성 밖으로 돌출된 치성을 먼저 만든 후 그 위에 설치했다. 무엇보다 인공적으로 만든 치에는 평면 형태, 평면 크기, 높이에 한계가 있다. 치성 자체가 돌출 길이와 폭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북공심돈은 자연 원지반 위이므로 너른 터에 평면과 높이를 마음껏 설계할 수가 있었다. 원지반 위라는 터는 동북공심돈을 대형화하고 획기적인 원통형으로 만든 바탕이었다. 치성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많은 시간과 돈이 절약되는 것은 부차적인 혜택이었을 뿐이다. 그러면 왜 동북공심돈만 원형 평면으로 했을까? 동북공심돈만 원통형으로 한 이유는 남공심돈, 서북공심돈의 역할과의 근본적 차이 때문이다. 남공심돈과 서북공심돈은 원래 원성으로 접근하는 적의 측면을 공격하는 치의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높이를 높인 치다. 의궤에 치성을 순수한 치 8개와 사실상 치 8개로 나눴는데 두 공심돈은 사실상 치 여덟 곳에 포함했다. 두 공심돈은 높은 치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동북공심돈은 근본적으로 치의 역할로 세운 것이 아니다. 270도 넓은 전면을 방어 또는 공격할 목적으로 세웠다. 사각형 평면의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 구상한 결과물이 원통형 공심돈이었다. 맞은편 선암산에 대응할 최적의 형태가 원통형 동북공심돈이었다. 아군의 위치, 맞은편 산의 위아래와 좌우에 포진한 적군을 반영해 방어 목표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원통형 구조가 태어난 것이다. 학자들은 동북공심돈이 중국 평돈을 모방했다고 주장한다. “중국 계성의 평돈을 본떠 만들었다”는 의궤 내용을 그대로 따른 결과다. 이는 잘못이다. 의궤 내용은 ‘중국 돈의 제도를 따랐다’는 의미다. ‘원형 돈의 제도’와는 다르다. 필자는 원형공심돈의 원조는 수원화성 동북공심돈이라고 본다. 만약 중국 계성 평돈이 원통형이거나 경사로가 있다면 나는 주장을 철회할 것이다. 화성 남공심돈은 중국 돈의 제도를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남공심돈의 실패를 서북공심돈에서 대폭 개선했다. 그리고 마지막 동북공심돈에서 마주하는 선암산 위의 적군에 가장 알맞은 맞춤형으로 원통형 공심돈을 창조한 것이다. 동북공심돈은 개선이 아니라 창조다. 요구에 최적화하고 아름다운 외형으로 화성 상징의 모티브가 된 원통형 동북공심돈에서 정조의 혁신과 독창성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정조는 정약용을 토사구팽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정약용이 화성건설에 일절 배제된 것은 정조의 다산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건설 시스템에 대한 정조의 전략적 판단의 결과다. 1791년 정조가 홍문관 수찬인 정약용에게 화성을 위한 새로운 성제를 연구할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화성 성역은 출발한다. 기존의 장단점과 중국의 강점은 물론 서양의 과학기술을 반영해 1년 후 화성 기본계획서인 ‘성설’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정조에게 올린다. 그리고 6개월 후 성 이외의 시설물 계획인 ‘도설’을 보고한다. 성설은 즉시 임금의 이름으로 공포한다. 바로 ‘어제성화주략’이다. 공포 후 2년이 지난 1794년 정월에 착공한다. 이후 성역은 1796년까지 약 3년에 걸쳐 진행된다. 화성 건설 동안 정약용은 성균관, 홍문관, 우부, 규장각, 병조에 근무한 것으로 돼 있다. 화성 건설에는 일절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는 말이다. 정약용은 화성에 대해 당시로는 가장 많이 알고 있던 관료였다. 그런 그가 왜 화성 건설에 참여하지 못했을까? 본인의 피치 못할 사정이었을까? 아니면 고의로 배제한 것일까? 자의는 아니다. 여유당전서에 기록된 일화다. 정약용이 지방 근무지로 가는 길에 수원을 지나며 옹성 위에 설치된 오성지를 보게 됐다. 본인이 제안한 시설이다. 겉모양은 같았으나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됐음을 알았다. 이를 보고 다산은 “도면만을 보고 공사를 하니 ‘그림책을 뒤져서 천리마 찾는 격’이라고 한탄했다”라고 기록했다. 한탄까지 할 정도면 정약용은 자신이 계획한 화성에 깊은 관심과 애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인 스스로 화성 성역을 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다른 설은 부친의 사망과 천주교 연루 모함 사건을 이유로 보고 있다. 하지만 부친 사망은 1792년으로 착공 2년 전이었고 성설과 도설을 열심히 만드는 시기였다. 천주교 연루 모함 사건도 1795년으로 착공 후 1년 반이 지나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시기적으로 정약용의 배제와는 관련성이 없다. 그렇다면 타인에 의해 배제된 것이다. 누구일까? 바로 정조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정약용을 배제했을까? 이유를 알려면 건축주 정조의 관점에서 화성 성역과 건설 시스템에 대한 인식을 파악해야 한다. 첫째, 화성 성역에 대한 정조의 인식을 보자. 정조는 화성 성역을 공사가 아닌 대규모 사업으로 봤다. 영부사 채제공에게 화성 성역의 총책임자를 추천하라 했다. 채제공은 조심태를 추천했다. 그러나 정조는 조심태를 2인자인 감동당상으로, 채제공을 1인자인 총리대신으로 임명했다. 그 이유로 “일의 체모가 중대하니 채 영부사가 총괄해 살피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정조가 화성 성역을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인식했다는 방증이다. 또 정조는 화성 성역을 행궁이나 관아를 짓는 일반 건축물이 아닌 전쟁 군사시설물로 봤다. 핵심 조직에 군대를 지휘하고 전술을 아는 군사지식을 갖춘 사람을 임명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총리대신 채제공, 감동당상 조심태, 도청 이유경이다. 당시 채제공은 73세 영부사, 조심태는 53세 어영대장, 이유경은 금위중군으로 46세였다. 이에 비해 당시 정약용은 31세로 홍문관 수찬으로 근무하던 때였다. 나이나 직위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건설 실무 경험이 없는 점이었다. 정조는 기획력과 실무 경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고심 끝에 실무 경험을 택했다. 이 선택은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객관적 평가의 산물이다. 둘째, 당시 건설 시스템에 대한 정조의 인식을 보자. 정조는 계획과 집행으로 이뤄지는 당시 건설 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다. 정약용은 계획자다. 집행은 설계와 시공이다. 정조는 계획자에게 집행 임무를 함께 맡기는 것이 화성 성역에 도움이 될지에 대해 고민했다. 계획자가 집행까지 맡는다면 계획 의도를 시공에 잘 반영하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잘못 계획된 것 개선, 현장 상황과 동떨어진 것 개선, 장인들이 설계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단점이 있다.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계획을 밀어붙인다. 이와 달리 성을 시공했거나 군사전략을 아는 실무 경험자가 집행하면 계획의 수정, 보완, 개선을 반영해 높은 완성도를 이뤄내는 장점이 있다. 정조는 계획의 발현과 견제를 통한 완성도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계획과 집행의 견제를 택했다. 따라서 설계자인 정약용을 배제한 것이다. 완벽히 배제했다. 한마디로 당시 건설 시스템에 대한 정조의 전략적 판단이었다. 정조는 ‘전쟁 군사시설’, 그리고 ‘높은 완성도’ 두 가지 모두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토사구팽이라 할 수 없다.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관심과 애정은 깊었다. 정조는 정약용이 여러 모함을 받을 때마다 지방 근무나 유배를 보냈다. 이는 처벌이 아니라 보호와 배려였다. 잠잠해지면 곧 불러들여 자리를 주고 승진도 시켜 왔다. 흔히 알고 있는 장기간의 유배 생활은 정조가 죽고 1년 후부터 시작됐다. 정약용이 화성 성역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객관적 평가와 건설 시스템에 대한 정조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결과다. 유교의 기본 바탕은 인간관계, 체면, 명분이다. 정조는 유교정신보다 실무 경험을 우선시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석산발굴, 민원해결, 조직안정, 자금조달, 그리고 군사시설물에 대한 개선과 향상으로 최고의 완성도를 이뤄낸 동력이 됐다. 정약용의 발탁과 배제를 통해 정조의 객관적, 전략적 양면의 혁신적 조직 경영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각각의 4성 길이는 얼마일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을 4성으로 나눴다. 4성 경계도 네 곳이다. 경계를 잘못 해석하면 시설물 수도 길이도 모두 틀리게 된다. 4성 체계 개념에 맞게 경계를 구분해야 한다. 화성 길이는 4천600보다. 성이 4천600보고 옹성은 163보, 용도는 367보다. ‘화성 길이’에 관련 기관, 연구자마다 여러 수치가 사용되는 것이 아쉽다. 어느 독자는 의궤에 5천130보로 기록돼 있다고 말씀하신다. 아마 의궤 중 ‘터닦기’ 편에 나온 “소요된 터가 모두 합쳐 5천130보”라는 기록 때문인 것 같다. 5천130보는 성 터, 옹성 터, 용도 터를 합한 것이다. 화성 길이는 세 가지 중에서 성 터 길이, 4천600보만 말해야 한다. 안내판에 4성 체계로 화성을 소개했다. 4성 각각에 어떤 시설물이 속할까? 그리고 각각의 길이는 얼마나 될까? 연구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왜 그럴까? 4성 명칭과 4성 경계에 대한 개념과 정의 차이 때문이다. 먼저 4성의 명칭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자. 화성에서 4성 체계는 ‘동성, 서성, 남성, 북성’이 아닌 것에 유의해야 한다. 4성 체계는 의궤 권5 실입에 나온다. 실입이란 공사에 실제 투입된 돈, 자재, 인력, 장비를 말한다. 의궤에 나오는 4성의 명칭은 평지북성, 산상서성, 평지남성, 산상동성이다. 정확한 명칭을 써야 한다. 다음으로 4성의 경계선을 정의해보자. 4성별 시설물 수, 길이 등을 정확히 하려면 4성 간 경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우선 네 곳 경계선 중 평지북성과 산상서성의 경계선을 확인해보자. 한 곳을 이해하면 나머지 세 곳은 쉽게 구분할 것이다. 경계에 대해 평지북성이 끝나는 부분을 “서옹성 북쪽 끝까지”라 하고, 산상서성이 시작되는 부분은 “화서문 남쪽으로부터”라고 했다. 기록으로 보면 앞의 끝 지점과 다음 시작점 사이에 공백이 생긴다. 즉, 화서문이 평지북성에도, 산상서성에도 빠져 있다. 과연 경계선은 서옹성 북쪽 끝일까? 화서문 남쪽 끝일까? 아니면 화서문 정가운데가 될까? 답은 4성 체계의 개념에 달렸다. 4성은 실입에 기록돼 있다. 왜 하필 실입 편에 4성 체계를 만들었을까? 실입은 건설경영의 기초가 되는 기준 자료다. 정조는 자금 준비와 배분, 공정관리, 인력 배분, 품질관리 등 경영의 기준 자료로 4성 체계를 만든 것이다. 이를 위해 산상과 평지라는 지형, 즉 공사 난이도로 분류한 것이다. 동서남북처럼 단순한 방위 개념이 아니다. 난이도 분류가 더 합리적, 과학적, 경영적이라 본 것이다. 다만 장인, 인부 등 일하는 사람이 알기 쉽도록 지형 뒤에 동, 서, 남, 북의 방위를 붙인 것이다. 즉, 산상서성은 ‘산 위에 건설할 시설물’이라는 공사 난이도 개념을 우선하고 서쪽이라는 위치를 부차적으로 알려준다. 4성의 기본 개념은 공사 난이도이다. 즉, 지형이다. 이 개념을 염두에 두고 경계선을 결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평지북성과 산상서성의 경계선을 확정해 보자. 두 성이 만나는 부분에 대해 “서북공심돈 터에서 돌아 꺾여 남쪽으로 향해 15보 4척쯤 가면 화서문 터가 시작된다. 화서문 넓이가 14보 4척이다. 여기에서부터는 평지가 끊어지고, 산을 타고 오른다”라고 기록한다. 이 중 “평지가 끊어지고, 산을 타고 오른다”가 중요한 단서다. 평지에서 산으로 바뀌는 변곡점이다. 이 변곡점이 경계선이다. 화서문 남쪽 끝이 경계선이다. 따라서 화서문은 평지북성에 속한다. 이름에 방위 명 ‘서’가 있어도 현혹돼서는 안 된다. 현혹되면 화서문이 산상서성으로 보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한 경계가 틀리면 양쪽 성의 시설물 수도 틀리고, 길이도 모두 틀리게 된다. 같은 개념으로 나머지 세 곳의 경계선도 정의해 보자. 산상서성과 평지남성의 경계선은 남은구 서쪽이다. 따라서 남은구는 평지남성에 속하고 남포루와 남치는 이름에 ‘남’이 붙어 있어도 산상서성에 속한다. 평지남성과 산상동성의 경계선은 남수문 동쪽에서 동남각루 아래 30보까지 지점이다. 따라서 남수문은 평지남성에, 동남각루는 산상동성에 속한다. 산상동성과 평지북성의 경계선은 화홍문 동쪽이다. 따라서 화홍문은 평지북성에 속하게 된다. 이를 기준으로 4성 각각의 길이를 계산해 봤다. 평지북성은 737보4척, 산상서성은 1천193보4척, 평지남성은 282보, 산상동성은 1천751보다. 4성 체계 의궤 기록과 일치한다. 합은 3천964보2척이다. 이 수치를 보고 왜 화성 길이 4천600보와 다르냐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4성 체계는 원성 길이만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곡성 길이 635보4척을 합하면 정확히 4천600보가 나온다. 참고로 화성 길이 4천600보는 원성 85%, 곡성 15%로 구성된다. 그리고 평지성 30%이고 산상성 70%다. 기억하기 쉬운 수치다. 아래에 표로 성의 길이에 대한 모든 것을 정리해 봤다. 단순하게 위치나 방위에 의한 분류가 아니고 합리적, 과학적 경영을 위해 공사 난이도인 지형을 기준으로 경계를 나눈 화성의 4성 체계를 살펴보며 정조의 경영철학과 실용철학을 엿보았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왜 4성으로 구분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을 흔히 동성, 서성, 남성, 북성으로 구분해 부른다. 그런데 의궤 전체를 아무리 뒤져도 이런 명칭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4성 구분은 편의상 후세에 만들었을까? 그것은 아니고 권5 실입(實入)에 나온다. 실입이란 공사에 실제 투입된 자재, 인력 등을 기록한 것이다. 실입에 성 쌓는 돌의 사용량을 구분하며 ‘평지북성, 평지남성, 산상서성, 산상동성’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성역 당시부터 사용한 것이다. 의궤에 기록된 4성 체계의 개념은 무엇일까? 우선 4성 중 하나인 평지북성에 대한 의궤 기록을 보자. “평지북성은 8개소인데 화홍문의 서쪽으로부터 서옹성의 북쪽까지로 전체가 737보 4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머지 3곳도 똑같은 형식이다. 이 기록에서 유의해 봐야 할 점이 있다. 4성 명칭, 개소 단위, 구간 길이, 기록 순서이다. 이를 살펴보며 개념에 접근해보자. 첫째, 4성의 명칭이다. 4성 명칭은 ‘평지북성, 산상서성, 평지남성, 산상동성’이다. 명칭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용어에 두 의미가 포함돼있다. 앞부분은 평지와 산상이라는 지형이다. 뒷부분은 동서남북이라는 방위다. 이것은 평지와 산상이 4성 구분의 주체이고 지형이 4성 체계의 개념이라는 의미다. 당시 4성으로 구분한 것은 화성을 지형으로 구분할 목적이었음을 말해준다. 왜 지형으로 구분했을까? 지형에 따라 투입되는 인력과 자재가 달랐기 때문이다. 착공 전 조달 준비, 시공 중 투입, 준공 후 정산에 기준을 삼기 위해서였다. 산상성은 높이가 16척이고, 평지성은 높이가 20척이다. 평지성에는 내탁공사가 추가된다. 공사 자체가 달랐다. 뒷부분에 동서남북 방위를 붙인 것은 다시 인력, 자재의 배치나 배분에 편리하도록 4개 지역으로 나눈 것이다. 한마디로 공사 난이도에 따라 평지성과 산상성으로 먼저 구분했다. 그리고 2차로 동서남북으로 구분한 것이다. 둘째, 4성 별 ‘개소’ 단위와 구간 수이다. 4성 체계에 나오는 단위 ‘1개소’는 원성 구간을 말한다. 곡성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유의해야 한다. ‘원성 구간 1구간’이란 곡성이 끝나는 A지점부터 다음 곡성이 시작되는 B지점까지 사이에 있는 순수한 원성만을 의미한다. 한 예로 ‘봉돈에서 동이치까지 114보 1구간’의 의미를 살펴보자. 봉돈에서 동이치까지 사이는 원성 1구간이다. 그리고 길이 114보는 원성 길이를 말한다. 원성이기 때문에 봉돈과 동이치의 곡성 길이는 제외되는 것이다. 이 1구간의 시작점과 종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시작점은 ‘봉돈의 북쪽’이고 종점은 ‘동이치의 남쪽’이다. 원문 ‘자봉돈지북(自熢墩之北)’과 ‘지동이치지남(至東二雉之南)’이 증명한다. 유의할 점은 곡성에 해당하는 시설물과 해당하지 않는 시설물을 구분하는 것이다. 성 가까이 시설물이 위치한다고 곡성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헷갈리면 안 된다. 곡성에 해당하지 않는 시설물은 크게 ‘성 안에 있는 시설물’, ‘용도 안에 있는 시설물’, ‘성 밑에 있는 시설물’로 나뉜다. 각 시설물 이름을 보자. 첫째, ‘성 안에 있는 시설물’은 동북각루, 서북각루, 동남각루, 서노대, 서장대, 동장대, 동북공심돈이다. 둘째, ‘용도 안에 있는 시설물’은 서남각루다. 셋째, ‘성 밑에 있는 시설물’은 북은구, 남은구다. 이외에 중포사, 내포사, 성신사도 있으나 이들은 원래 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헷갈릴 염려는 없다. 예를 들어 서북각루를 보자. 서북각루는 ‘성 안에 세운 시설물’로 곡성 위에 세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서북각루가 원성의 시작점과 종점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화서문 남쪽부터 서일치 북쪽까지’가 원성 구간 1구간이 된다. 화서문과 서일치가 이웃하는 곡성이 되기 때문이다. ‘서북각루 동쪽까지’라는 말이나 ‘서북각루 서쪽에서’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서북각루는 곡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4성 각 구간 길이다. 4성 체계에 기록된 구간 개소는 모두 원성 구간이므로 구간 길이의 합도 원성 길이가 된다. 4성 길이를 보자. 의궤 기록에 “평지북성은 737보4척, 평지남성은 282보, 산상서성은 1천193보4척, 산상동성은 1천751보”다. 합하면 평지성이 1천19보4척, 산상성이 2천944보4척이고, 4성 전체 길이는 총 3천964보2척이다. 이 원성 길이에 전체 곡성 길이 635보4척를 합하면 4천600보가 된다. 바로 화성 길이와 일치한다. 넷째, 기록 순서다. 북, 서, 남, 동 방향 순으로 기록했다. 이는 행궁의 좌향을 중심으로 좌측부터 시작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진행한 순서다. 화성 국면도 행궁의 좌향을 중심으로 후진, 안산으로 부르고 있다. 의궤에서 터닦기 편, 여장 편, 실입 편 모두 행궁 좌향을 기준으로 북, 서, 남, 동 순으로 기록이 진행한다. 의궤 모두 같은 체계다. 현재 안내판 등 모든 체계가 이와 반대로 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화성성역의궤란 기록이 있어 존재하듯 기록 체계도 존중해야 한다. 공사는 지형과 설계에 지배를 받는다. 산상성과 평지성은 계획과 설계가 각각 다르다. 정조는 방위에 의한 단순한 식별보다 지형 개념으로 구분했다. 거기에 방위를 붙여 장인과 백성도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 화성 4성 체계이다. 4성 체계로부터 정조의 실용정신과 경영철학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알려지지 않은 치, 국내 최초 공개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팔달산 남쪽 능선 성 밖에 용도(甬道)가 있다. 서남암문을 지나 양쪽에 여장이 있는 길이다. 평평하고 노송이 늘어선 편안한 길이다. 많은 사람이 용도를 성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길이다. 주변 지형보다 바닥을 약간 높이고 여장만 둘렀다. 그래서 이름도 ‘솟아오를 용’, ‘길 도’다. 여장 밑의 돌은 여장의 기반석이다. 용도란 “군량을 운반하고 매복을 서기 위해 낸 길”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화성 용도는 매복을 위한 장소로만 사용했다. 적이 점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곳은 적이 점거하면 화성 전체가 적에게 노출되는 요해처이기 때문이다. 화성 4대 요해처 중 한 곳이다. 안내판에 “암문에서 84보 되는 동쪽에 하나의 치를 설치하였고 또 10보쯤 서쪽에 하나의 치성을 설치하였다. 화성에 치가 10개가 있다”고 설명한다. 동서 양쪽에 각각 용도 치 1개씩 있는 점은 의궤와 일치한다. 그러나 “화성에 치가 10개가 있다”는 안내문은 잘못된 것이다. 10개는 화성 치 8개와 용도 치 2개를 합한 수치다. 그러나 용도 치는 화성 치와 제도가 다르므로 별도로 취급하는 것이 맞다. 치는 다음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 첫째, 원성에 잇대 돌출되고 둘째, 원성과 높이가 같으며 셋째, 전면에 현안이 1개 있어야 한다. 원문은 ‘철부성면, 고여성제, 외면유현안일혈’이다. 용도 치는 이 세 가지 조건을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용도는 성이 아니고 현안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용도 치를 화성 치와 동일하게 취급하면 안 되는 이유다. 여러 기록이 증명한다. 의궤에 “화성 치는 8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북동치, 서1치, 서2치, 서3치, 남치, 동1치, 동2치, 동3치라고 고유의 이름을 부여했다. 그러나 용도 치는 “동쪽에 1개의 치를 설치하고”처럼 보통명사화했다. 일부 학자는 ‘용도 동치’, ‘용도 1치’라 부르고 있다. 모두 근거 없는 용어다. 또 용도 치의 길이는 용도 여장 길이에 포함해 기록했다. 반면 화성 8개 치는 각각 곡성 길이로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의궤는 용도 치와 화성 치를 분리해 구분했다. 이는 용도 치와 화성 치의 제도가 다르다는 의미다. ‘화성 치’와 ‘용도 치’로 구별해 부르는 것이 원칙이다. 제도는 다르나 용도 치도 치의 기능은 하고 있다. 여장을 돌출시켜 만들어 용도로 접근하는 적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다. 문제는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을까다. 원래 치는 ‘양쪽 마주하는 치(對雉)”가 적의 양쪽 옆구리를 공격해야 한다. 따라서 최소 3개가 연속해 있어야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용도 치는 한쪽에 1개만 설치했다. 필자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좌우의 마주하는 치’를 국내 최초로 공개한다. 좌우는 용도 치의 남쪽과 북쪽을 말한다. 북쪽은 서남암문 양옆의 원성이 치의 역할을 한다. 용도보다 밖으로 돌출돼 있고 더 높다. 용도 치의 북쪽 마주하는 치다. 이런 치를 ‘자성치(自成雉)’라 한다. 자성치란 용어는 “대체로 성은 굽고 꺾인 데가 많아 모퉁이와 마주치거나 문이 있는 곳에 이르면 자성치의 형상을 이뤄 성을 보호하게 마련”이라고 의궤에 나온다. 성을 쌓지 않고도 자연 지형 자체가 치성의 역할을 충분히 하는 곳이다. 자성치는 필자가 찾아 국내 처음으로 사용하는 용어다. 다른 한쪽 남쪽은 화양루 양옆으로 돌출된 부분이 치의 역할을 하고 있다. 화양루 그림을 보면 용도가 화양루 앞에 와서 두 번 확장되고 있다. 첫 번째 넓어진 부분에 총안 1개, 두 번째 넓어진 부분에 총안 2개가 있다. 모양도, 구조도, 총안도 용도 치와 똑같다. 방향도 용도 치를 향한다. 용도 치의 남쪽 마주하는 치가 된다. 이것이 필자가 발견해 국내 최초로 공개하는 용도 치다. 왜 그동안 이 네 곳의 치를 알지 못했을까? 첫째, 복원 상태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원형은 두 번째 확장 부분에 2개의 총안이 있다. 그런데 현재 복원된 모습에는 총안이 없다. 복원할 때 이 부분을 화양루 담으로 보는 우를 범했다. 둘째, 앞에 말한 자성치란 용어와 존재 자체를 그동안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화성성역의궤의 기록 때문이다. 의궤에 “남쪽 끝에서 두 번 구부러져 넓혔다. 첫 번째 확장된 곳의 너비 9보, 두 번째 확장된 곳의 너비 11보로, 이것이 화양루 터”라고 기록됐다. ‘화양루 터’로 기록돼 있다. 즉, 의궤 기록이 화양루 터로 인식하게 했다. 필자가 발견하고 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뎡니의궤 덕분이다. 2018년 프랑스에서 뎡니의궤를 복제하고 2019년 수원시에서 책으로 발간했다. 뎡니의궤 ‘화성성역 제9’ 9월 초7일 편에 나오는 기록을 보자. “용도 남쪽 끝에 이르러서는 또 동서 쪽으로 각각 20척씩 빼내어 좌우로 치성을 설치했다”란 기록이다. 분명히 ‘치성’이라고 기록돼 있다. 당시에도 용도 남쪽 끝 확장된 부분을 용도 치로 본 것이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자성치 2개와 용도 치 2개를 찾아냈다. 치의 기능을 하면서도 화성 치처럼 고유의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용도 치다. 화양루(서남각루)에 덧붙여 연속 3개 치를 만들어 기능을 살려낸 용도 치에서 정조의 전략적 사고를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포루(砲樓)는 왜 벽돌로만 지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대포 진지인 포루는 전체를 벽돌로 만들었다. 성역 당시 벽돌은 고급 자재이고, 제작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설계와 시공 책임자인 감동당상 조심태의 입장과 발주자인 임금 정조의 국가경영 입장으로 나눠 살펴본다. 포루(대포)는 화성에 동, 서, 남, 북동, 북서포루 등 5곳이 있다. 북성에만 2개인 이유는 방어에 취약한 수문 화홍문을 위해 북동포루를 특별히 배치했기 때문이다. 구조는 “성의 몸체에 돌출되게 집을 지었는데, 높이는 포(집)와 같다. 3층으로 해 그 속 내부를 비운 점이 마치 공심돈의 구조와 비슷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정도라면 치, 포루(군졸), 공심돈의 세 가지 구조적 특색과 장점을 모두 갖춘 시설물이다. 가장 큰 특징은 3층 내부 모두를 비워 놓고 수많은 포혈을 낸 것이라 하겠다. 성에 벽돌을 사용한 것은 한국에서 화성이 유일하다. 암문, 수문, 봉돈, 노대 등은 벽돌과 돌을 함께 사용했으나 포루는 전체를 벽돌로 지었다. 당시에는 벽돌이 고급 자재였다. 어제성화주략에 “우리나라 사람은 벽돌 굽는 데 익숙지 못하고 또 벽돌 굽는 땔나무를 구하기도 어렵다”란 내용이 있다. 성역 당시 벽돌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그럼에도 포루는 왜 벽돌만 사용했을까? 이 또한 화성 미스터리다. 먼저 포루만이 가진 유일한 점을 찾아보자. 첫째, 지상부터 성 높이까지 사용하는 유일한 시설물이다. 화성 시설물은 대부분 치성 위에 짓는데 포루는 지상에 짓는다. 즉, 다른 시설물은 치상축(雉上築)이고 포루는 성 밖 원지반 바닥에 세운 유일한 시설물이다. 둘째, 3면 벽체에 많은 구멍이 뚫려 있다. 지상에서 성 높이까지 돌출 벽체 3면에 총혈, 포혈 등 구멍이 가장 많이 뚫려 있다. 1개 포루에 최대 38개까지 뚫었다. 셋째, 비어 있는 실내를 사용하는 유일한 시설물이다. 다른 모든 시설물은 지상에서 성 높이까지 흙으로 채워져 있다. 포루만 유일하게 속을 비워 놓고 실내공간처럼 사용한다. 이상과 같은 포루만의 건축적 특성을 통해 포루는 왜 벽돌만으로 지었을까? 알아보자. ■ 조심태의 입장을 알아보자 조심태는 감동당상으로 화성성역의 현장 총책임자다. 설계와 시공 모두를 담당한 입장에서 시공성에 관심을 뒀을 것이다. 첫째, 벽 안팎 모두 마감 처리를 해야 한다. 포루는 내부 공간 활용이 중요한 시설물이다. 내부에 기둥을 세우고, 마루 깔고, 사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리고 군사가 머물며 적을 정탐하고 대포를 쏘는 공간이다. 이 말은 벽체 안쪽이 모두 수직으로 매끈하게 마감돼야 군사가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울퉁불퉁한 돌 마감으로는 기둥조차 세우지 못하고 실내 사용에 무척 불편하다. 포루 내부를 비워 실내공간처럼 사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돌보다 벽돌이 최상의 재료이고 선택이다. 둘째, 다양한 각도로 많은 구멍을 설치해야 한다. 포루는 기능상 많은 구멍을 벽에 내야 한다. 정탐하고, 대포를 쏘기 위한 구멍이다. 구멍 수량보다 다양한 각도로 뚫어야 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같은 각도가 하나도 없다. 더구나 포루는 벽 두께가 1.2m에서 1.8m에 달한다. 돌로 된 벽체라면 불가능하다. 벽체에 여러 각도로 많은 구멍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벽돌이 최상의 재료이다. 정리하면 시공 총책임자 조심태는 포루 벽체를 돌로 시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포루에 최적의 솔루션으로 벽돌을 선택한 것이다. ■ 정조의 입장을 알아보자 발주자인 정조의 입장에서는 사용자 입장과 건설 경영에 관심을 두었을 것이다. 설계자, 시공자의 입장과 다른 차원의 전략이 숨어 있었다. 첫째, 사용자에게 좋은 디자인을 제공하려 했다. 성에는 대부분 돌이 사용된다. 시각적으로 성 전체가 동일한 색상, 텍스처, 형상을 보여준다. 여기에 벽돌은 큰 변화를 줬다. 변화와 미관을 군사와 백성에게 제공한 것이다. 둘째, 벽돌 제작기술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원했다. 성역 당시 벽돌 제작과 쌓는 숙련공인 벽돌장은 드물었다. 정조는 포루에 벽돌을 사용하게 해 제작기술의 발전을 기대했을 것이다. 굽는 가마와 굽는 방식을 새로이 고안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화성은 벽돌의 대량생산과 기술 발전의 시발점이다. 셋째, 공기 지연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서다. 포루는 화성에 5곳이 있고 돌출 길이도, 높이도, 두께도 가장 크다. 성과 시설물 모두 돌 한 종류로만 설계한다면 화성 성역은 돌 하나에 영향을 받게 된다. 자재인 돌과 인력인 석공의 수요가 일정 기간에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수요 피크 때 공급을 못하게 되면 공사가 지연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을 알고 있는 정조는 화성성역 주재료를 돌 한 종류에서 돌과 벽돌 두 종류로 전환한 것이다. 주인력도 석공 한 직종에서 석공과 벽돌공 두 직종으로 분산시킨 것이다. 분산 전략을 채용해 자재와 인력의 수요 공급 부하를 낮춘 것이다. 이는 공기 지연 리스크를 없애고 오히려 공기 단축의 효과를 얻게 된다. 벽돌은 시공이 쉽고, 공사 기간을 줄여주고, 까다로운 구멍 뚫기도 가능하고, 미관이 수려한 점 등 모든 것을 한번에 해결한 포루의 토털 솔루션이다. 기능성, 시공성, 미관성을 넘어 공사 기간에 예상되는 리스크 관리까지 고려한 것임을 알았다. 포루 자재로 벽돌을 선택한 정조의 경영 전략을 엿보았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화성에서 최고의 난공사는 어디일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어려운 공사와 일이 대규모인 공사는 질과 양의 문제다. 화성에서 보이지 않는 땅속 공사 중 가장 어려운 공사는 어디일까? 220여년 전 땅속 공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곳까지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서 찾아냈다. 화성 성역에서 어떤 어려운 공사가 있었을까 살펴보도록 한다. 시설물을 보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어려운 공사, 쉬운 공사를 판단할 수 있다. 대체로 규모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규모로 보자면 장안문, 팔달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규모가 커도 손쉬운 공사가 있고 작아도 까다로운 공사가 있다. 공사란 원래 보이지 않는 부분에 어려움이 많이 도사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어려웠을 공사는 어디였을까 찾아보도록 하자. 성역이 아주 오래전이었고, 보이지 않는 지하의 상태를 어찌 판단할 수 있을까? 눈여겨보지 않는 기록에서 캐보자. 보이지 않는 곳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겼다니 참으로 놀랍다. 권수 도설 중 ‘토품(土品)’편이다. 토품은 ‘성터’와 ‘시설물터’로 나눈 후 ‘지형’과 ‘토질’의 상태로 공사를 설명한 기록이다. 지형에서는 꺼지거나 솟아오른 외형을 메우고 잘라내는 작업에 대해 언급했다. 토질에서는 연약지반, 지하수 등 땅속의 상태에 대한 작업을 기록했다. 언급된 여러 지역 중 지형과 토질로 나눠 가장 어려웠던 곳을 각각 한 곳씩 선정해 본다. 먼저 지형으로 인해 가장 어려운 공사를 한 지역은 어디일까? 서장대가 세워진 팔달산 정상이다. 당시 서장대 터는 의궤에 “자갈밭인 데다 그 지세가 동북으로 비탈이 졌으면서도 웅장하고 높은데, 대 아래는 한쪽으로 치우치고 좁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당시 팔달산 정상은 암반으로 들쑥날쑥했고 주변은 급경사지였다. 이런 지형에 서노대, 서장대, 후당을 세우고 행사에 쓸 평평하고 너른 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따라서 규모도 크고 매우 위험한 보축공사를 해야만 했다. 급경사지에 돌을 쌓고 흙을 보태며, 모래주머니를 말뚝으로 고정시켜 산마루와 가지런하게 올려 쌓는 방법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 규모는 높이가 거의 3장이고 넓이는 사방 70보다. 3장은 약 10m 높이이고 사방 70보는 면적으로 2천평(6천611㎡)에 달한다. 급경사 비탈진 산꼭대기를 감안하면 큰 규모다. 위치도 팔달산 정상이라 필요한 자재를 산 중턱이나 하천에서 채취해 정상으로 옮겨와야 했다. 정상 인근은 모두 돌로 된 지형이라 보축에 필요한 흙과 모래는 구할 수 없었다. 팔달산 정상 서장대터는 산꼭대기라서 필요한 자재의 운반, 깎아지른 지형의 위험성, 장마철 공사로 인한 토사 유실 등에 대비해 여러 조치를 한 곳이다. 서장대터를 지형으로 인한 최대의 난공사 지역으로 선정했다. 다음으로 토질로 인해 가장 어려운 공사를 한 곳은 어디일까? 공동 1위로 남문, 남수문, 북수문터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모두 물과 싸우며 공사를 한 곳이다. 북수문과 남수문은 물이 흐르는 큰 내 안에서 공사를 했다. 공사 규모는 동서로 38보, 남북으로 51보를 파내어 다듬고 깊이 14척을 파고, 모래에 진흙을 섞어 다진 후 벽돌을 이중으로 까는 방법으로 진행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리의 안팎 넓은 범위까지 고기 비늘 모양으로 박석을 깔고 그 끝에 긴 돌을 물려 굳혔다. 흐르는 물에 기초가 패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남문은 평지인데 왜 물속에서 공사했다고 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남문인 팔달문터는 북문처럼 땅을 5척쯤 파 내려갔는데 지하수가 엄청나게 솟아나기 시작했다. 지하수맥 자리인 것이다. 공사를 위해 물을 모두 퍼내고, 땅을 더 파내고 벽돌과 모래로 바꿔야 했다. 의궤에 “여럿이 두레박으로 번갈아 퍼냈더니 나흘 만에야 겨우 잦아서 다시 9척을 파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다. 땅을 판 깊이가 모두 합해 14척이었다. 남문, 남수문, 북수문터는 큰 하천 가운데와 지하수가 분출하는 곳으로 물을 제어하고, 깊이 파고, 연약한 흙을 파내어 좋은 흙과 벽돌로 바꾸고, 흐르는 물에 기초가 패지 않도록 조치를 한 곳이다. 화홍문, 남수문, 팔달문을 토질로 인한 가장 최대의 난공사 지역으로 선정했다. 이상으로 마치고 몇 가지 재미있는 자료를 추가해 본다. 가장 쉬운 공사를 한 곳은 용도 구간과 서남암문에서 남포루까지의 산상서성 구간이다. 이 구간은 의궤에 “흙을 겨우 2척 정도 긁어내면 바로 암반이 나와 땅을 팔 필요도 없었고 캐낸 돌은 그 자리에서 다듬어 사용해 일석이조의 효과도 봤다”고 쉬운 지역임을 표현하고 있다. 가장 넓은 공사를 한 곳은 동장대 훈련장이다. 크기는 동서 180보에 남북 240보로 무려 1만8천평(5만9천500㎡)에 이른다. 훈련장을 관리하는 동장대터의 무려 20배 규모다. 배보다 배꼽이 큰 형국이다. 가장 적은 공사비가 투입된 곳은 포사다. 두 곳 합계가 350냥으로 기록돼 있다. 반면 가장 공사비가 많이 투입된 곳은 팔달문으로 5만8천냥이 들었다. 포사 300채를 짓는 공사비가 든 셈이다. 오늘은 화성에서 어려운 공사를 한 곳에 대해 살펴봤다. 이 정도 까다로움이면 화성 전체는 대체로 공사하기에 무난한 지형과 토질을 갖춘 곳이라고 필자는 평가한다. 화성은 방어하기에도, 공사하는 데도 모두 합당한 성터로 평가할 수 있다. 까다로운 공사 지역과 그 규모를 살펴보며 정조의 탁월한 ‘터 잡기’ 안목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적대는 왜 성안으로 반이 들어왔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북문인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으로 우리나라 성문 중 규모가 크다. 규모뿐 아니라 형식 면에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은 문루와 옹성이다. 6·25전쟁으로 유실된 것이 안타깝다. 문, 수문, 암문은 성에서 가장 취약한 곳으로 수비를 위한 특별한 대책이 필요하다. 암문은 위급 시 돌과 흙으로 문을 메워 버리는 구조로 계획했고 북수문은 철전문을 설치하고 두터운 벽첩을 덧대 포루를 만들었으며 남수문은 장포를 설치해 수백 명의 병사가 머물 수 있게 했다. 문의 경우 문루, 옹성, 적대를 설치해 시스템 방어를 구축했다. 문루는 상부에서, 옹성은 앞쪽에서, 적대는 좌우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방어하고 있다. 적대는 의궤에 “높은 대 양쪽 가장자리에서 적을 좌우로 살피면 적이 곧바로 성 아래로 다가오지 못할 뿐 아니라 굽은 살이나 비껴 쏘는 탄환이라도 대 위에 있는 아군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높게 만들어 달려드는 적에게 위압감을 주는 전략적 설계다. 치성 중 높은 이유다. 그리고 구조에 대해 의궤는 “대의 반쯤은 밖으로 나갔고, 반쯤은 성 안으로 벋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주 독특한 구조다. 장안문 양옆에 있는 적대를 가보니 확실히 대의 일부가 성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내탁부 위 통로 공간을 잡아먹으면서 왜 적대의 반이 성 안으로 들어왔을까? 화성 미스터리의 하나다. 탐험을 떠나보자. 적대는 성에서 가장 취약한 문을 방어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높은 대 ‘고대(높은 대) 전략’과 넓은 대 ‘광대(넓은 대) 전략’이다. ‘높은 대’는 오늘의 주제가 아니다. 추후 게재할 예정이다. 왜 ‘넓은 대’를 선택했을까? 하나는 적대의 방어 범위가 의외로 넓기 때문이다. 앞쪽으로 옹성에서 뒤쪽으로 문루까지가 범위다. 다른 하나는 방어 범위가 넓은 만큼 많은 양의 무기와 병력을 운용해야 할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길이가 모든 돌출 시설물 중 가장 긴 47척이다. 어마어마하다. 모두 돌출시키지 왜 성 안으로 반을 끌어들였을까? 치, 포루(군졸), 적대는 성 밖으로 돌출시켜 성으로 접근하는 적의 옆구리를 양쪽에서 공격해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성 밖으로 길게 나간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00척 길이로 길게 돌출시킨 치성을 생각해보자. 너무 길게 돌출되면 치성의 기능을 잃고 오히려 적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부분이 된다. 원성에는 8m가 넘는 내탁 공간이 있으나 돌출된 치성에는 고작 2m 내외의 공간만 있기 때문이다. 여장 뒤 공간은 무기와 병력의 비축과 이동 공간으로 넓이 자체가 방어력을 의미한다. 반대로 10척 길이로 아주 짧게 돌출시키면 치성의 역할을 못 하고 원성에 방해가 된다. 짧은 길이는 병사 한두 명만 배치할 수 있어 적의 측면을 공격하는 기능이 약화된다. 양옆 원성에서 보면 오히려 감시각에 장애물이 된다. 효율적인 치성의 역할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돌출 길이가 가장 효율적인가 판단해야 한다. 길면 오히려 적의 집중 공격을 받는 곳으로 바뀌고 짧으면 치의 기능을 못 하고 아군의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략적으로 돌출 길이는 얼마까지일까? 최대 돌출 길이는 사실상 돌출 상한선이다. 화성에 치성은 치 8곳, 포루(군졸) 5곳, 동북노대, 남공심돈, 서북공심돈으로 16곳이다. 치성의 최대 돌출 길이를 찾아보자. 현재 돌출 길이를 보면 치에서는 동1치가 23척8촌으로 가장 길고 포루(군졸)에서는 동1포루로 23척, 서북공심돈 23척, 동북노대는 20척5촌이다. 이 중 전체가 성 밖으로 모두 돌출된 치성 중에서는 동1치가 가장 길다. 돌출 길이가 23척8촌이다. 이 이상은 없다. 따라서 이 수치가 바로 돌출 상한선이 된다. 즉, 치성의 최대 돌출 길이는 24척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치성의 경우 돌출 길이가 24척이 넘으면 안 된다. 만일 24척이 넘으면 일정 부분을 성 안으로 들여 넣어야 한다. 화성에서 24척이 넘는 치성은 동북노대뿐이다. 동북노대는 돌출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11척이 들어오고 밖으로 20척5촌만 돌출시킨 것이다. 24척 이내로 만들기 위해서다. 이제는 치성 16곳 외의 돌출된 시설물을 파악해 보자. 적대 4곳, 봉돈, 포루(대포) 5곳을 말한다. 앞의 치성과 마찬가지로 원성에서 돌출된 길이를 보자. 적대는 29척, 봉돈은 18척, 포루(대포)는 29척이 돌출됐다. 따라서 치성 외 돌출 시설물의 최대 돌출 길이는 29척이 된다. 따라서 적대는 29척을 넘기지 않으려고 18척을 성 안으로 들였고 봉돈은 16척을 안으로 넣어 18척만 돌출시켰다. 그리고 포루(대포)는 돌출 길이를 29척으로 계획한 것이다. 정리하면 화성에서 시설물 중 치성은 돌출 한계가 24척이고 치성 외의 돌출 시설물은 29척임을 밝혔다. 성 안으로 들어온 부분은 무엇으로 쓰였을까? 주로 보조공간으로 쓰였다. 적대에서는 활, 화살, 화창, 동북노대에는 깃발, 북, 활, 쇠뇌, 뇌목, 포석, 비, 화기의 저장 공간으로 쓰였고 봉돈은 군졸의 거처와 기계 창고로 사용됐다. 적대, 동북노대, 봉돈이 왜 성 안으로 들어왔는지에 대해 살펴봤다. 내탁부 통로를 잡아먹으면서 돌출 상한선을 지킨 화성 시설물에서 정조의 엄격한 전략적 기준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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