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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설계 전 현지 조사를 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수원화성 축성 2년여 전 정조의 ‘성제’ 연구 지시에
정약용, ‘3천600보’ 규모 제안한 ‘성설’ 보고서 제출
성역 착수 첫해 입표정기때 성 밖 이주 민가 많다는
정조의 지적에 ‘4천600보’로 확장, 지속가능 설계 보완
‘관청의 성’에서 애민정신 담은 ‘백성의 성’으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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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3천600보 성 모양은 서1치에서 창룡문 옆의 동1치까지 직선인 모양이다. 이강웅 고건축전문가

 

정조는 화성 축성 2년여 전 홍문관 수찬으로 있던 정약용에게 화성 성제를 연구해 보고하라 지시한다. 이것이 화성 출발점이다. 1년의 연구 후 ‘성설’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흔히 말하는 정약용의 화성 설계다. 설계가 아니고 기본계획이다. 이때 정약용은 화성 규모를 3천600보로 제안한다.

 

그러나 실제 4천600보로 확장돼 준공된다. 지금의 화성이다. 언제 어떻게 변경됐을까. 무슨 이유로 확장됐을까. 사실을 알아보자. 먼저 ‘언제’와 ‘어떻게’를 살펴보자.

 

시기는 성역 착수 첫해 입표정기 때 변경된다. 입표정기란 행사를 통해 변경한다. 입표정기란 계획된 3천600보만큼 깃대를 꽂아 놓고 이를 보고 성터를 확정하는 이벤트를 말한다. ‘표시(표)를 세워(입) 터(기)를 정(정)한다’는 한자 말이다. 1794년 1월15일 입표정기 때 정조는 팔달산 정상부터 수원을 돌며 성터를 확정한다.

 

‘왜 변경됐을까’다. 정조는 입표정기 때 정약용의 최초 계획인 3천600보에 꽂힌 깃대를 보고 몇 가지를 지적한다. 지적대로 변경됐다. 이 지적에서 그 속에 담긴 정조의 뜻을 살펴보자. 정조의 말이 변경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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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 위 용두를 감싸 성을 쌓는 것이 좋다고 지적했다. 용두는 북수문인 화홍문을 지키는 요충지다. 이강웅 고건축전문가

 

첫째, “깃대가 북쪽 마을을 지나가니 인가가 많이 훼철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깃대가 북리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많은 민가가 철거되면 철거, 이주, 신축 등 공사비와 공사 기간이 많이 소요될 것이다. 지적에 따라 성터를 북쪽으로 옮겼다. 공사비, 공기 절감은 외적으로 나타난 이유이고 실제는 정조의 백성 사랑 때문이었다.

 

정조는 공동체로 살아가던 한 마을 백성을 갈라 놓고 싶지 않았다. 더한 이유는 따로 있다. 헤어지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는데 한 마을 백성이 성안 마을과 성 밖 마을로 나뉘는 백성의 마음이 더 아팠다. 성안에 사는 것과 성 밖에 사는 것은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정조의 깊은 마음이다.

 

둘째, “깃대 세운 것을 가늠해보니 성 밖으로 나갈 인가가 꽤 많을 듯하다”고 지적한다. 왜 성 밖으로 나갈 백성을 걱정했을까. 정조는 백성과 함께하는 수원화성을 원했다. ‘관청의 성’에서 ‘백성의 성’으로의 전환이다. 이전의 성은 임금과 관리가 사용하는 면적이 대부분이었으나 수원화성은 민가가 차지하는 면적이 대부분이다. 공사비가 늘고 공사 기간이 길어져도 가능한 한 많은 민가를 성안으로 끌어들이라는 말이다.

 

셋째와 넷째는 “깃대가 행궁과 너무 가까워 마치 성이 행궁의 담장처럼 보인다”와 “성터의 남북 간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지적이다. 이 지적이 행궁만을 생각했다고 보면 오해다. 실상은 지속가능한 미래 수원을 염두에 둔 말이다. 이 지적으로 화성 경계를 북쪽으로 넓혀 수원화성의 면적을 2배 확장했다. 정조는 수원을 지속가능한 군사, 행정, 상업, 공업, 농업 도시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미래 수원부’에 대한 원대한 꿈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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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계획의 규모는 실제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사업 초기 단계에서 본 규모이기 때문이다. 이강웅 고건축전문가

 

230년이 지난 지금 수원은 정조의 꿈대로 실현됐다. 육군 3사령부, 해병대 사령부, 해군 2함대 사령부 등 군사 거점이 됐다. 경기도청을 품은 특례시가 됐다. 삼성, SK그룹의 모태가 됐다. 삼성 반도체, SK 반도체 클러스터가 모여 있다. 수원농고, 서울대 농대, 농촌진흥청은 한국 농업을 세계 최고로 올려놓았다. 정조의 꿈은 현실이 됐다.

 

하지만 정조의 지적을 보고 정조와 정약용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정약용은 기본계획을 작성하기 전 현장조사를 했을까, 안 했을까. 정약용의 계획에 대한 정조의 지적을 보면 화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아예 사전 현장답사를 하지 않았다. 근거를 살펴보자.

 

정약용은 성설에 ‘일찍이 수원부에 있는 개천가를 본 적이 있는데’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본 적이 있는데’는 원문에는 ‘상견(嘗見)’으로 돼 있다. 즉, ‘일찍이 본 적이 있다’는 표현은 이번에 간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에 간 적이 있다는 의미다. 기본계획 작성 이전에 유배나 외직으로 갈 때 수원을 지나며 봤다는 말이다.

 

그러면 정조는 정약용에게 왜 사전 답사를 지시하지 않았을까. 한양과 수원은 매우 가까운 거리인데 이해가 안 간다. 그 이유는 기본계획의 정체성과 맞물려 있다. 정조의 질문은 현지 조사까지 할 필요가 없는 수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기본계획인 성설의 정체성은 사업 초기 단계의 기본계획 규모 수치다.

 

한 예로 “연 1천만t을 생산할 수 있는 비료공장을 짓는 데 땅이 얼마나 필요합니까”라는 건축주의 물음과 같은 개념이다. 이는 사업 초기 단계에 대규모 사업의 대강을 파악하기 위한 규모다. “행궁과 민가 1만호를 품을 수 있는 성의 규모는 얼마면 되겠냐”라는 건축주 정조의 물음에 다산은 “성 둘레가 3천600보라야 계획한 바에 들어맞습니다”라고 답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본계획 3천600보 규모’는 실제와 차이가 커도 큰 문제로 볼 수 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다산의 기본계획은 정조의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낸 것으로 봐야 한다. 다만 차이가 생긴 것은 정조가 마음속에 품은 ‘웅대한 수원화성에 대한 꿈’까지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속 웅대한 화성은 바로 정조의 4천600보 화성이었다. 오늘은 성설이나 어제성화주략의 규모 계획에 대한 정체성을 살펴봤다. 정조가 실현한 백성 사랑, 미래 확장은 지속가능이고 공사비 절감과 공기 단축은 건설경영이었음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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