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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불교 신자였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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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의 원찰인 용주사는 사찰로는 특이한 점이 많다. 모두 정조의 특별한 배려다. 유교사회에서 아무런 마찰 없이 이를 행한 데는 정조의 비책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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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는 효찰대본산이다. 이강웅 고건축가

 

용주사(龍珠寺)에 대해

화성군 안녕리, 지금의 화성시 송산동에 용주사가 있다. 조계종 제2교구 본사로 경기도 사찰 업무를 총괄하는 절이다. 정조를 매개로 화성과 인연이 있다. 이 사찰만의 특이한 점이 있다. 첫째, 절 이름 앞에 효찰대본산이 붙는다. 둘째, 사찰로는 유일하게 홍살문이 있다. 셋째, 사찰 문으로는 유일하게 궁궐건축의 삼문이다. 넷째, 대웅보전 삼세여래후불탱화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다.

 

이런 특징은 모두 정조와 연관이 있다.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천장하고 현륭원이라 했고, 후에 융릉으로 승격시켰다. 원소도감이 “다른 능원의 예에 따라 원찰을 설치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린다. 이에 따라 융릉 인근에 용주사를 세운 것이다. 물론 보경 스님에게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감동해 건립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 밤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꿔 용주사라 이름 지었다 한다. 본전 주심포 아래 용이 물고기를 먹고 있는 조각이 있다. 스님께 물어보니 먹는 게 아니라 극락까지 데려다 주려고 물고 있는 것이란다.

 

정조의 배려로 당시 최고의 궁궐건축 장인과 화원 책임자를 전폭 지원했다. 문이 궁궐 삼문 형식으로 지어졌고 김홍도의 후불탱화가 탄생했다. 신성한 구역임을 구분하는 홍살문도 세웠다. 용주사에 승병을 조직하고, 특별히 총섭을 뒀다. 장용외영에 소속시켰고 전시에는 독성을 지키는 데 지원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독성은 세마대가 있는 수원 남쪽의 요충지다.

 

용주사 대웅보전의 후불탱화.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다.
용주사 대웅보전의 후불탱화.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다. 이강웅 고건축가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대해

용주사는 부모은중경 때문에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조가 보경 스님에게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세운 절이기 때문이다. 화성 성역이 끝나가던 해에는 ‘부모은중경판’을 제작해 절에 기증했다. 이래서 절 이름 앞에 ‘효원대본찰’이 붙은 것이다. 부모은중경은 ‘효도’보다 ‘은혜’에, ‘아버지’보다 ‘어머니’에 중점을 둔 내용이다. 내용은 임신부터 자식이 나이 들 때까지 베푸신 어머니의 10가지 은혜다. 10가지 은혜는 검색하면 쉽게 확인된다.

 

내용 중 필자의 마음에 찔리는 한 구절만 적는다. “부모가 지내시는 사정과 춥고 더운 것을 아는 체하지 않고, 문안도 드리지 않으며, 부모를 편안히 모실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부모가 나이가 많아져 모양이 쇠약하고 파리해지면, 남이 볼까 부끄럽다고 하여 구박하고 괄시한다.” 70이 넘어도 후회는 더 짙어진다.

 

용주사와 정조의 여러 관계를 살펴보며 의문이 생겼다. 당시는 불교를 배척하는 유교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임금이 큰 절을 세운 점, 홍살문과 삼문의 설치를 허락한 점, 탱화 제작에 화원 책임자를 지원한 점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역 기간에 부모은중경판을 제작해 기증하고, 은중게(恩重偈) 125장을 만들어 성역을 담당한 감동당상 이하 패장까지 나눠 줬다. 부처님 말씀을 성역 감독과 장인에게 나눠 준 것도 놀라운 일이다.

 

혹시 정조는 불교를 믿는 임금이었을까? 한마디로 ‘아니요’다. 유교를 기반으로 한 왕조와 권력을 나눠 갖고 있던 사대부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신료들의 견제 속에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정조가 이 일을 추진하는 데 세 가지 비책이 있다.

 

은중경을 배포한 것은 효를 강조하면서 불교로 천주교를 통제하려는 정조의 숨은 뜻이 있다.
은중경을 배포한 것은 효를 강조하면서 불교로 천주교를 통제하려는 정조의 숨은 뜻이 있다. 이강웅 고건축가

 

정조의 세 가지 비책에 대해

첫째, ‘교리’를 ‘좋은 문장’으로 전환했다. 정조는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불경이 이단의 학문으로 윤리에 어긋난다”라고 직접 말한 바 있다. 이런 인식에서 정조는 부모은중경을 불교 교리에서 분리했다. 즉, 불교 경전으로 보지 않고 좋은 문장으로 전환한 것이다. “도를 버리고 말을 취한 것”이라는 정조의 언급은 불교 교리를 유교의 성현 말씀과 같은 격으로 바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 경문을 논어나 중용으로 전환한 것이다.

 

둘째, ‘신앙’을 ‘교육수단’으로 전환했다. 조선에서 불교를 말살한 것은 아니었다. 하층 백성들은 불교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정조는 신앙이 아니고 백성에 대한 교육 수단으로 전환한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르치기 어려우나, 그들이 매양 믿고 숭상하는 불법의 말씀으로서 깊이 듣게 하고, 마음을 움직여 깨닫게 하였으니, 사람들을 가르치는 중요한 방법”이라는 정조의 말에서 백성에 대한 유용한 교육 수단으로 봤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이이제이 전략’을 활용했다. 당시는 천주교인을 감시하고 보고하던 때였다. “요사이 천주를 일컬으며 부모를 버리고 사람들을 현혹해서 모두 오랑캐나 짐승으로 만들었다. 이에 법으로 처단하고, 요설을 통렬히 씻어내어 한 사람의 백성도 빠지지 않게 하였다”란 언급도 있었다.

 

정조는 불교를 통해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통제하려 했다. 이이제이 전략인 셈이다. “무엇보다 이단으로써 이단을 구하여”란 정조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앞의 이단은 불교이고 뒤에 나오는 이단은 천주교다. 그러나 정조 개인의 본심은 박해보다 감화에 중점을 둔 것 같다. “이단을 구하여 저절로 감화하게 하였다”라는 말로 맺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중경은 불교 경전이지만 효는 보편적 가치다. 비명에 간 아버지의 넋을 기리고 자신이 하지 못한 효를 백성에게 전파하고자 했다. 유교가 주를 이룬 당시에 불교와 유연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정조의 숨겨진 세 가지 비책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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