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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고양 서삼릉과 어두운 역사의 그늘

인종·철종·소현세자 등이 잠든 곳
후궁 등 다양한 신분의 묘역 눈길
일제 강점기때 ‘왕자·왕녀묘·태실’
명당서 파헤쳐 옮겨 민족정기 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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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을 대표하는 희릉의 균제미
서삼릉을 대표하는 희릉의 균제미

조선 중종 조,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태종의 헌릉(獻陵, 지금의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가정보원 바로 옆) 서쪽에 능이 조성됐다. 기뻐야 할 그 희릉(禧陵)이, 피를 부르는 권력 다툼의 단서가 됐다. 당시는 간신이 간신을 치는 시대, 김안로(金安老)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의 정유 3흉(丁酉三凶)과 심정(沈貞)이항(李沆)김극복(金克福)의 기묘 삼간(己卯三奸)은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당대 권간들은, 훈척 세력과 손잡고 4대 사화를 일으켜 사림의 등용을 차단하는데 성공했고, 임사홍, 유자광, 송익필 등은 죽은 뒤였다. 당시의 권신이자 대표 간신 김안로는 희릉이 잘못된 위치에 잘못 조성됐다는 낭설을 퍼뜨렸다. 무덤 아래 큰 돌이 있어 크게 불길하며, 이는 왕조의 기를 훼손하는 ‘역모 사건’이라 키워 정적인 남곤, 정광필 등을 제거했다. 당시 왕릉의 산역은 그만큼 중대한 사건이었다.

■ 삼간(三奸)과 삼흉(三凶)의 시대… 준비 안 된 지도자의 한계

서삼릉 예릉(睿陵)에는 강화도령 철종과 비 인철왕후 김씨가 묻혀 있다. 원래 조선조 국왕은 세손이나 세자로 책봉되면,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꽉 짜인 일정으로 당대 최고 대학자들의 훈육을 받고 심신을 단련하고 어른들에게 문후를 올린다. 제왕 수업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철종은 아무 생각 없이 강화도에서 나무하다 갑자기 국왕이 되었으니 흉중에 큰 뜻이 있을 리 없고, 뜻이 있어도 실천할 일머리가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철종조부터 조선은 외척인 안동 김씨 세도가 본격화되고, 삼정이 문란해져 전국에서 민란이 빈발하게 된다. 인종과 비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孝陵)은 인종의 재위기간이 1년도 채 못 되었으니 논평할 가치조차 없다. 오늘 필자는, 잘 알려진 역사의 주인공이 묻힌 왕릉보다 원과 묘에 묻힌 덜 알려진 비운의 주인공에 관심이 쏠린다.

■ 인조(仁祖)인가 인군(忍君)인가… 회기동과 효창공원, 의령원

서삼릉에는 소경원(昭慶園)에 소현세자가 묻혀 있고, 부근에 제주도에 유배됐다가 13살, 9살에 죽은 소현세자의 장남 경선군(慶善君) · 차남 경완군(慶完君) 묘가 있다. 인조 이중은 청나라가, 중국 심양에 9년 동안 볼모로 묶여 있던 장남 소현세자를 더 지지한다고 생각하고 소현세자를 경계했다. 거기에 인조의 총희 조 소용은 소현세자를 참소하고 세자빈 강씨(민회빈)을 견제했다. 결국 소현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사망하는데, 실록조차 독살 정황과 인조 배후설을 강하게 제기한다. 얼마 후 세자빈이 사약을 받고 소생인 어린 아들들이 유배지 제주도에서 의문사하는 것을 보면서, 인조의 잔인함이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 이상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 묘호는 인조(仁祖)가 아니라 잔인군(殘忍君)이라야 옳지 않을까?

회묘(懷墓)는 월탄 박종화의 역사 소설 ‘금삼의 피’를 비롯해 많은 역사소설과 드라마의 모델이 된 성종의 폐비 윤씨의 묘다. 성종은 자신이 윤씨를 폐위하고 사약을 내렸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애틋한 마음이 있었던지 특별히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허락했다.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즉위 후 어머니의 한 맺힌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이 어머니 사사의 장본인들을 사사한 사건이다. 회묘가 고양으로 옮기기 전 원래 있었던 서울 동대문구 마을은 회기동(회묘동(懷墓洞) → 회묘동(回墓洞) → 회기리(回基里)로 불리게 된다.

효창원(孝昌園)은 홍역에 걸려 5살로 일찍 세상을 떠난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다. 고양으로 오기 전 원래 자리가 오늘날의 서울 효창공원이다.

의령원과 효창원
의령원과 효창원

■ 훼손된 민족 정기와 극일(克日), 천장(遷葬)과 태실 이봉(移封)

의령원(懿寧園)은 영조의 첫 손자며 사도세자의 첫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다. 그러니까 정조의 동복형인 세손이 태어나자 영조는 크게 기뻐하며 돌박이를 세손으로 책봉한다. 그러나 두 돌을 넘기자 마자 병으로 죽자 영조는 크게 상심해 하며 친히 조문(弔文)과 비문(碑文)을 지어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했다. 의령원 표석 글씨도 영조 친필이다. 영조가 정조 이산을 세손으로 책봉한 것은 세 돌 지나서니 의소세손에 대한 괴임은 참으로 남달랐다.

서삼릉에는 그밖에도 후궁묘, 왕자묘, 왕녀묘, 태실 등 다양한 신분과 형식의 묘역이 있어 이채롭다. 후궁묘 22기는 대부분 원래 이 자리에 있던 것이나, 왕자묘 8기와 왕녀묘 14기는 일제 강점기에 옮겨진[遷葬] 것이다. 옮겨진 묘에는 원래 비석과 옮겨진 후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는데, 일본 연호를 삭제한 흔적이 남아 회한을 더한다. 거기에 국왕 태실 22기, 왕자 공주 태실 32기 등 태실이 54기나 옮겨 모셔져 서삼릉은 문자 그대로 조선 왕실의 음택이요 세계적 문화재가 되었다. 일제는 조선 팔도 명당에 묻혔던 태실을 파헤쳐 옮기면서[移封] 조선 왕실과 지역민의 유대를 차단했다. 그리고 태실의 문화재는 빼돌리고 옮긴 태실은 규모는 줄이고 형태는 ‘日’ 자로 만들어 민족 정기를 말살하려 획책했다. 극일(克日), 21세기에도 우리 민족 최대 과제의 하나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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