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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포천 반월성

한강 하류 내려다보이는 군사 요충지
100여년 백제·고구려·신라의 필쟁처
주변엔 고모리·냉정리 등 산성 즐비
포천의 중앙 ‘청성산’ 정상부 에워싸
성 내부 치성·토광터·우물터 등 확인
장방형돌의 면·모 맞춰 빈틈없이 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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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문(暗門) 한 사람이 무장하거나 큰 짐을 지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폭은 좁으나, 운반 등의 편의를 고려해 길과 계단은 경사가 완만하다.
암문(暗門) 한 사람이 무장하거나 큰 짐을 지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폭은 좁으나, 운반 등의 편의를 고려해 길과 계단은 경사가 완만하다.

해가 나기 전 이른 아침, 면사무소 뒤 산길을 오른다. 면사무소에서 일하던 이들이 경사가 급하니, 서두르지 말고 쉬엄쉬엄 오르라 친절하게 충고한다. 비탈을 오르면서 간간이 마주치는 산책 나온 주민들이 반갑다. 30여 년 전 어느 초여름 토요일 오후, 가족 휴가차 방문했던 공주 국립박물관 잔디밭에 주저앉아 또는 엎드려 박물관을 그리던 아이들 생각이 났다. 40여 년 전 토요일 오후 학교에 남아 자습하다가 무료해지면 학교의 정경을 그리던 학창 시절도 떠올랐다. 역사의 현장은 모름지기 이렇게 친근해야 한다. 나이 든 사람의 아침저녁 산책로라야 하고,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놀며 배우는 터전이라야 한다. 모두가 함께 즐기는 공간이라야 한다. 보존이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너무 몰린다면 모를까, 인적이 드물어서는 안 된다. 우리 역사가 일부 식자들의 전유물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옛것을, 우리 선조를 세계인에게 더 자랑해야 한다. 우리가 멀리 하면서 우리가 즐기지 않으면서 세계인에게 자랑 할 수는 없다. 일각에서 스토리가 없다고 투정하지만, 설령 있다 해도 찾지 않으면 스토리는 사라진다.

치성(雉城) 치성은 성벽 바깥에 덧붙여 쌓은 벽. 적이 접근하는 것을 일찍 관측하고, 성벽에 바짝 접근한 적을 옆에서 활로 쏘는데 유용하다.
치성(雉城) 치성은 성벽 바깥에 덧붙여 쌓은 벽. 적이 접근하는 것을 일찍 관측하고, 성벽에 바짝 접근한 적을 옆에서 활로 쏘는데 유용하다.

■포천의 역사와 전략적 중요성

현대의 포천시는 군사적으로 중요하다. 5개뿐인 전방 보병군단 가운데 2개가 본부를 포천에 두었다. 지금은 남북 관계가 많이 풀렸지만, 긴장이 고조된 한때, 이른바 북한군의 ‘조공로(助攻路)’로 지목되기도 했다.

현대 이전에는 더 그랬다. 포천에는 반월성을 비롯해 고모리·냉정리·대전리·성동리·초성리·주원리·보가·고소 등 산성이 즐비하다. 오늘날 군부대와 막걸리와 산정호수로 대표되는 포천이지만, 원래 살기 좋은 지형에 기후요 상업 중심지였다. 추가령 통곡, 한탄강 줄기 따라 서남으로 한강 하류와 서해, 동북으로 함경도로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요지다. 한강 하류를 내려다보는 요충지로 백제, 고구려, 신라의 필쟁처였다.

한사군이 한반도에서 쫓겨난 4세기 초 근초고왕 치세의 백제가 먼저 포천을 차지했다. 4세기 후반 광개토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가 임진강과 한강 유역 성 58개와 촌 700개를 빼앗았다. 100여 년 후 6세기 초 신라와 백제 동맹이내분에 휩싸인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를 빼앗았다. 최종 주인이 된 신라는 포천과 철원을 북방 전진 기지로 잘 활용했다. 고려조는 태조 왕건을 핍박한 궁예가 철원에 도읍하고 포천에 죽은 연유로 다소 홀대했다. 포천 곳곳에서 구석기 이래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 유적이 발견되고, 반월성에서 백제 이래 시대별 유물이 대량 출토되지만 고려 것만 드문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은 포천을 중시했다. 조선 초기, 왕실 사냥터와 태조 이성계의 두 왕후 한씨, 강씨의 농장, 이성계의 의형제 이지란의 사당[청해사(淸海祠)]이 들어섰다. 원래 왕조의 터전인 함경도 함흥으로 향하는 길목이고(京興大路, ‘함흥 차사’도 함흥으로 떠난 이성계에게 보낸 이방원의 사절을 이르는 말이다), 태종 이방원의 생모 신의왕후 한씨가 왕조개창 전 포천현 재벽동(滓甓洞)에 거주한 인연도 있었다. 조선 후기, 포천은 금강산과 원산, 함흥으로 가는 관북대로를 끼고 물산이 자주 유통하는, 근기(近畿)의 대표적 상업 도시였고, 특히 소흘읍 송우장이 유명했다.

애기당터 승전과 무운(武運)을 비는 애기당지가 있어 샤머니즘적 요소가 전장을 지배했음을 보여준다.
애기당터 승전과 무운(武運)을 비는 애기당지가 있어 샤머니즘적 요소가 전장을 지배했음을 보여준다.

■현대에 되살아난 역사의 현장, 반월산성지에서 ‘반월성’으로

반월성은 그 요지 포천 중앙에 솟은 청성산 정상부를 에워싸 축조한 산성이다. 청성산(283.5m)은 높지는 않아도 분지인 포천에선 우뚝하니, 반월성에 오르면 포천시 일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의 남·서·북으로 흐르는 구읍천, 포천천, 하성천이 자연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둘레 천80m, 동서 490m, 남북 150m이며, 성내에서 치성 4곳, 토광터 27곳, 우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주능선 따라 동서로 길고, 북은 불룩하고 남은 오목한 반월 모양이다. 북쪽 주능선의 경사면과 남쪽 계곡을 가로질러 성벽을 쌓아, 급경사를 오르지 않으면 접근조차 어렵다.

화강암을 주소재로 내외 협축(內外夾築, 양쪽 쌓고 가운데 채우기), 편축(片築, 한쪽 쌓고 맞은 편채우기)을 모두 적용했고, 일부 완만한 곳은 암반을 파서 수직으로 단을 조성한 후 축조했다. 장방형돌의 면과 모를 맞춰 빈틈없이 축조했다. 남·북·동 문터 셋 가운데 경사가 완만한 남

문이 주 출입구였을 것이다. 북문은 평거식, 동문은 현문식으로 추정되는데 방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했다. 성내에서 서, 북 두 군데 장대지를 포함해 건물터 6곳이 확인됐다. 유기적인 방어를 위해 성 전체에 회곽도로를 시설했다.

『대동지지』『, 연려실기술(樮藜室記述)』·『포천군읍지(抱川郡邑誌)』·『견성지(堅城誌)』등 조선 후기의 책들에 산성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1994년 지표조사에서 다량의 삼국시대 토기와 기와가 수습되면서 모든 기록은 혁명 수준으로 뒤집혔다. 1995년도 2차 발굴조사에서는 ‘마홀수해공구단(馬忽受解空口單)’이라 양각된 암키와가 출토됐다. 마홀(馬忽)과 부근 ‘소흘’, 6세기 진흥왕에서 10세기 통일신라에 이르는 400년 신라 지배를 뛰어넘어 살아남은 고구려식 지명들이다. 2011년 문화재청은 이곳의 공식 명칭을 ‘반월성’으로 바꿨다.

복원된 남문 통로 길이가 6m가 넘는다. 문루(門樓)를 받치는 초석으로 생각되는 0.78×0.87m, 0.71×0.93m의 석재가 1개씩 남아 있다.
복원된 남문 통로 길이가 6m가 넘는다. 문루(門樓)를 받치는 초석으로 생각되는 0.78×0.87m, 0.71×0.93m의 석재가 1개씩 남아 있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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