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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4. 순창원·수경원·대빈묘

세 여인의 삶과 죽음… 조선 구중궁궐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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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원. 봉분 주변으로 정자각과 문인석‚ 여러 석물 등이 보이나 비각과 비석은 보이지 않는다.
순창원. 봉분 주변으로 정자각과 문인석‚ 여러 석물 등이 보이나 비각과 비석은 보이지 않는다.

살아도 한, 죽어도 한… 순창원의 공회빈 윤씨

능(陵)은 가끔 찾는 이가 있어도 ‘원(園)’은 찾는 이 없이 쓸쓸하다. 대부분 사람은 원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조선 왕실의 무덤은 품격에 따라 능, 원, 묘로 구분하고, 왕의 생모나 세자, 세자빈의 무덤을 원이라 불렀다. 세자나 세자빈은 젊어 죽은 이들이 많으니 ‘원’마다 애달픈 사연이 없을 리 없다. 서오릉 순창원에 묻힌 공회빈(恭懷嬪) 윤씨의 삶이 그랬다. 묘호 공회빈이 알려주듯이, 남편인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順懷世子)가 13살에 죽은 뒤 30년을 수절하다 남편 곁에 묻혔다. 아직 부부의 정을 깨치기도 전에 죽은 어린 남편 때문에 궁궐 한편에서 30년을 수절하며 마음고생 한 셈이다.

죽어서도 편치가 않았다. 1592년 3월 창경궁 통명전에서 사망해 창경궁에 빈소가 차려졌는데, 하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덜 떨어진 조선 왕 선조는 급히 한양 도성을 비우고 달아났다. 당시 수행 인원이 10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황망한 몽진에 누가 30년 전 남편 죽은 여성의 시신을 챙겼으랴. 이듬해 선조가 한양에 돌아와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왜군이 짓밟고 간 궁궐에서 찾을 수 있나. 사평(司評) 이충이 창경궁의 후원인 함춘원, 지금의 서울대병원 자리에 시신을 묻었다는 말은 있었으나, 이충 역시 죽어 물어볼 데조차 없었다. 죽은 지 10년이 지나서야 선조가 공회빈의 신주만 봉안해 순회세자와 합장했다. 공회빈의 모진 운명 2막이다.

병자호란 때 신주마저 분실해 순창원에는 공회빈의 빈 관만 합장하니 이게 3막이다. 그리고 지난 2006년 도굴 사건까지 벌어지니 이게 모진 운명 4막이다. 어찌 여인의 삶과 죽음이 모질 수가 있을까? 약소국에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하필 조선조에서도 무능한 지도자의 시대에 결혼하고 죽어 한은 더욱 깊으니 어찌 애달프다 아니 하리.

▲ 영빈 이씨 수경원 근경
▲ 영빈 이씨 수경원 근경

호강하며 살고 지고… 수경원의 영빈 이씨

수경원(綏慶園)의 주인공은 순창원과 전혀 딴판인, 운명의 수혜자다. 영조 이금(李昑)의 총애받는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暎嬪李氏). 어려서 입궁해 영조 이금의 30년 총애를 받으며, 사도세자와 화평, 화완 등 다섯 공주를 낳았다. 천한 무수리 소생인 이금은 스스로도 천출 후궁을 총애했고, 12명 딸 가운데 정비 소생은 하나도 없었다. 이금은 화평과 화완을 특히 사랑해 출가하고 나서도 궁중에 머물게 하고, 자주 그 사가에 행차했다. 화평이 딸을 낳다 죽자 정사를 내팽개치고, 슬픔이 과하다고 간하는 신하를 파직하니 딸 사랑이 끝을 몰랐다. 반면 사도세자를 극도로 미워했다.

이금이 영빈을 덜 찾을 즈음, 사도세자가 반역을 꾀했다는 고변(告變)이 올라왔다.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까지 유언비어를 옮기며 처분을 간하니, 이금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였다.(壬午禍變) 영빈은 아들이 죽고도 2년을 더 살다가 69살로 세상을 떠났다. 이금은 후궁 제일의 예로 장례하고 이듬해 의열(義烈)이란 시호를 추증하니, 국왕보다 후궁이 먼저 시호를 받는선시지례(宣諡之禮)다. 원래 영빈이 묻혔다 옮겨간 연세대 옛 무덤 자리에는 루스 채플이 들어섰다. 영빈은 살아 조선왕의 총애를 받고 죽어 서양 하느님을 가까이 모신 셈이다. 세자빈으로 간택됐지만, 소생 없이 청상과부로 수절하고 죽어 시신도 못 찾은 빈 무덤 신세인 공회빈과 너무도 대비된다.

 

▲ 영빈 이씨 정자각_연세대학교
▲ 영빈 이씨 정자각

대빈묘와 풍운의 여주인공, 부침 잦은 생과 사 장희빈

대빈묘(大嬪墓)의 주인공은 가장 유명한 후궁 희빈이다. 장옥정(張玉貞)이란 본명이 전해진 자체로 집안도 상당하고 본인 역량도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역관(譯官) 장형(張炯)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한다. 조부 장응인(張應仁)과 외조부 윤성립(尹誠立)이 역관으로 정3품, 종4품 역관이었고, 당숙 장현(張炫)은 역관의 수장 수역(首譯)을 지낸 거부였다. 어린 나이에 궁중 나인으로 뽑혀 입궁한 뒤 타고난 미모와 재력으로 숙종의 총애를 받고, 왕자 윤(?)을 낳으니 후의 경종이다. 집안 내림으로 영리하고 눈치 빠른데다, 이재(理財)와 외국어 실력, 정국을 보는 눈까지 갖춰 조선조 국왕 가운데 나름 똑똑하다고 자부한 숙종을 완전히 휘어잡았다.

소설가 윤승한은 역사소설 『장희빈』(1950)에서 남인이 희빈의 미모를 이용해 조정을 장악했다든가, 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고 아들 경종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등 근거 없는 이야기를 소설적 흥미를 위해 많이 삽입했다. 1970년대 초 라디오 연속극 『왕비열정』도 이를 많이 인용해 희빈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그녀는 악녀가 아니었고, 영리하고 유능한 후궁이었을 뿐이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 희빈의 인생도 바람 잘 날 없었다. 출궁했다 환궁하고, 왕후로 등극했다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아들 다음 즉위한 영조에게는 사약을 받았다. 죽은 뒤 경기도 광주 진해촌(오포)에 매장됐다가, 1969년 오늘날 서오릉으로 옮겨졌다. 대빈묘(大嬪墓)라 불리는 것은 아들 경종이 생모 희빈을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한 때문이다. 숙종 조 권력의 부침은 후에 다시 서오릉편에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 서오릉 대빈묘  전경
▲ 서오릉 대빈묘 전경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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